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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처럼 바람처럼’ 오랜 아픔과 고요를 모두 안고 서있는 나무

등록일 2025-07-02 19:43 게재일 2025-07-03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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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경북 영덕 신기리 느티나무 노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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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육사의 적요한 풍경.

한반도 백두대간을 이어 힘차게 뻗어 내린 낙동정맥의 동남을 부여잡고 맑고 푸른 동해에 몸을 담그고 있는 형국의 경북 영덕은 산과 평야, 해변, 바다가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경관을 빚어 놓은 아름다운 고장이다. 특히 영해, 병곡, 창수는 옛 영해부의 핵심지역으로 자연에 인문학이 입혀진 유서 깊은 문향의 고을이다. 이곳 영덕 창수로 들어온 지도 어언 20여 년이 되어간다. 

 

창수는 낙동정맥이 갈라놓은 동해안과 경북 내륙지방 영양, 안동을 연결하는 산중 통로이다. 창수(蒼水)의 뜻은 글자 그대로‘맑고 푸른 물’의 고장을 의미한다. 낙동정맥 골골이 동해바다에서 생성된 구름의 빗물이 계곡을 따라 송천이라는 내로 모여들어 고래불 해변을 관통하여 또다시 동해에 합류한다. 이런 수려한 자연경관은 찬란한 문화와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 

 

영덕 창수면 가산리서 나옹선사 출생
고려 공민왕때 서산 아래 장육사 창건
버려진 아기 까치들이 날개 펴 살려내 
‘까치소’라 이름 붙인 ‘탄생설화’ 전해 

 

20세때 출가하며 꽂아둔  반송지팡이
움 돋아 낙락장송 되어 600년간 살아
지금도 ‘반송정’이라 부르며 행적 기려

 

오랜세월 마을 지킨 신기리 느티나무
키 16m·둘레 8m·앉은 자리 폭 26m
거대함과 오래됨에 놀라 경외감 절로

 

풍상에 큰  두 줄기만 남아 안쓰럽지만
거대한 젊은 느티나무들 둘러서 호위
그 한 그루가 절이 되고 수행처 되는 곳 

 

특히 창수 출신 나옹선사는 고려 공민왕 때 운서산 아래 1355년 장육사(裝陸寺)를 창건하고 불교 혁신에 앞장섰다. 집으로 드나들 때면 일부러라도 장육사를 찾아 생활에 쌓였던 심신의 피로를 푼다. 구름도 쉬어가는 곳, 계곡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장육사에 들어서면 바깥세상과는 단절되는 아늑한 느낌을 받는다.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둘러 처진 산과 파란 하늘에 두둥실 떠 바람에 흘러가는 구름뿐이다. 아내와 함께 이곳을 방문하였을 때도 그랬다. 장육사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요사채 앞 평상에 누워 낮잠을 즐기는지 아니면 하늘의 흰 구름을 보고 명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너무나 편안하고 평화스러워 보였다. 

 

나옹선사는 1320년 고려 충숙왕 7년 경북 영덕군 창수면 가산리에서 출생했다. 호는 나옹(懶翁). 법명은 혜근(惠勤). 시호는 선각(禪覺), 별호 강월헌(江月軒), 왕사보제존자(王師普濟尊者)이다. 그는 위태로운 고려말, 자신만의 불교 사상으로 꺼져가는 선풍(禪風)의 법등을 다시 밝히고, 불교계의 통합과 민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다. 회암사 도량을 정비하여 불교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고 염불은 곧 참선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쉬운 가사 문학으로 지어 민중들을 교화하여 함께 깨달음을 얻고자 했다. 

 

나옹의 삼가(三歌) 중 백남가에 “헤어진 옷 한 벌에 여윈 지팡이 하나, 천하를 횡횡해도 걸릴 데 없네.”라는 말로 검소한 생활 속에 깨달음을 강조했다. 그렇다. 신앙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나 또한 백번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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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군 창수면 느티나무 노거수.

나옹선사의 탄생 설화도 있다. “나옹의 어머니인 정씨 부인은 남편이 관리의 횡포에 견디다 못해 도망을 가자 남편 대신 만삭이 된 몸으로 동헌에 잡혀갔다. 가는 도중에 작은 냇가에서 아이를 출산하지만, 관리들은 아기를 버려두고 부인만 관아로 데리고 갔다. 사정을 들은 부사가 정씨 부인을 풀어주었고, 다시 냇가에 도착했을 때 수십 마리의 까치들이 날개를 펴서 핏덩어리의 아이를 보호하고 있었다. 나옹은 하늘의 보호를 받고 살아났다.”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지금도 그곳을 ‘까치소’라고 한다.

 

또한 식수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나옹은 20세 젊은 나이에 친구의 죽음을 보고 인생무상을 느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가의 길을 떠나면서, 그때 반송 지팡이 하나를 거꾸로 땅에 꽂아 두고 ‘이 나무가 살아서 자라면 내가 살아 있는 줄 알고 이 나무가 죽으면 내가 죽은 줄 알라.’라는 말을 남기고 문경 사불산 대승사 묘적암에서 당대 명필인 요연선사에게 출가하였다. 

 

그때 반송을 꽂았던 그 자리가 바로 반송정이다. 그런데 신비하게도 이곳에 꽂아 둔 반송 지팡이에서 움이 돋아 낙락장송이 되어 600여 년 살다가 1965년 고사(枯死) 되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마을 전체를 반송정이라 한다.”라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장육사 못미처 나옹왕사 교육관이 있어 나옹에 대한 일대기를 살펴볼 수 있다.

 

영덕군 창수면 신기리 339번지에 살아가고 있는 느티나무 노거수가 있다. 장육사와 또한 우리 집과 가까이 있는지라 여러 번 가 보았지만, 갈 때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오늘은 가는 도중에 비가 내렸다. 현장에 도착하여 우산을 받쳐 들고 나무 밑으로 갔다. 아내는 그를 보자 깜짝 놀라워하면서 두 손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무심코 한 행동으로 우리 민족의 DNA에 노거수에 대한 경배의 마음이 들어있지 않나 싶었다. 

 

나 역시 거대함과 오래됨에 놀라 여느 때처럼 고개를 숙이고 경외감을 표했다. 그의 나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외모의 풍채에서 느끼는 무게감은 천년의 세월이 묻어나왔다. 키 16m, 몸 둘레 8m, 앉은 자리 폭 26m나 되었다. 

 

나이가 많고 덩치가 크다 보니 나무줄기는 오랜 세월에 부러져 나가고 큰 두 줄기만 남아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비가 내리다 보니 주변의 계곡물과 하천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어울려 묘한 정취를 느끼게 했다. 멀리서 보면 노거수가 있는지 잘 알지 못하지만, 가까이 가 보면 거대한 젊은 느티나무들이 노거수를 중심으로 주변에 서서 호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무는 인간과 달리 호위무사를 싫어하고 홀로 있기를 좋아한다. 햇볕을 나누어 갖기보다는 혼자 독차지하고 싶은 나무 본연의 욕망일 것이다. 언덕이라 흙이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하여 주민들의 울력으로 돌담을 쌓아 놓았다. 제단이 있고 나무에 금줄이 쳐져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물과 바람처럼 살라는 나옹선사의 가르침은 단지 마음을 닦는 도의 말씀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스스로를 비우고 낮추며 살라는 지극히 실천적인 철학이기도 하다. 나옹이 심어두고 떠난 반송 한 그루가 세월을 품고 자라났듯, 이 신기리의 느티나무 또한 오랜 침묵 속에 마을을 지키며 하늘을 우러러 서 있다. 

 

그 나무 앞에 서면 사람은 자연스레 고개를 숙인다. 인간이 만든 거대한 건축물 앞에서는 웅장함에 놀라지만, 나무 앞에서는 고요한 경외가 깃든다. 그 이유는 나무가 세월을 품었기 때문이다. 아무 말 없이도 삶의 본질을 일깨우는 나무, 아픔과 고요를 모두 안고 서 있는 나무는 곧 나옹선사가 말한 ‘물같이 바람같이’의 표상이다.

 

천 년을 묵은 느티나무 노거수 앞에서 마음을 다잡고 삶을 돌아본다. 나무처럼 한 자리에 뿌리내리고, 나무처럼 무심하게 햇살을 품고, 나무처럼 침묵 속에 사람들을 품는 그런 삶, 그것이 어쩌면 나옹이 남긴 진짜 법문일지 모른다. 나무 한 그루가 절이 되고, 수행처가 되는 곳. 바로 이곳 신기리 느티나무 아래, 바람도 물도 잠시 머물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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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의 위용이 대단하다.

나옹선사의 ‘청산가’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을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글·사진=장은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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