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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진립 장군의 충절과 청백의 정신

등록일 2025-08-06 19:54 게재일 2025-08-07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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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경북 경주 이조리 회화나무 노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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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립 장군이 직접 심었다고 알려진 회화나무.

경주 최진립(崔震立, 1568~1636) 장군의 생가 잠와고택 충의당은 상류층의 도덕성을 얘기할 때 자주 거론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한국적 뿌리이다. 곧 경주 최부잣집, 명문 가문의 출발지다. 450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날까지 최씨 가문을 빛나게 한 유훈 정신의 출발 선상에는 충의당 동쪽에 있는 최 장군이 직접 심은 회화나무가 있다. 

 

나이 450살, 키 15m, 몸 둘레 4.7m의 거대한 노거수이다. 수많은 수난의 역사를 겪었지만, 아직도 건재하게 경북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234-2번지에 생을 이어가고 있다. 회화나무 노거수에 깃들여있는 최진립 장군의 충절과 청백의 정신은 여름 더운 햇살에도 불구하고 푸른 하늘 향해 가지를 뻗고, 잎들이 바람에 손짓한다. 

 

역사는 침묵 위에 기록된 울림이다. 그리고 그 울림은 어떤 이의 삶을 통해 더욱 맑고 깊게 퍼진다. 병자호란의 참담한 국난 속, 나이 칠십을 바라보던 한 노장은 말에 올라 창을 들었다. “내 비록 늙어 잘 싸우지는 못하지만, 싸우다 죽지도 못하겠는가!”라는 일성은 조선의 마지막 충의(忠義)를 밝힌 횃불이 되었다. 그는 바로 정무공 최진립 장군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한국적 뿌리 최진립 장군 생가 경주 잠와고택 충의당엔
최 장군이 심은 나이 450살·키 15m·몸 둘레 4.7m 거대한 회화나무가 함께해
그 나무 아래서 자란 후손들 ‘가거십훈(家居十訓)’ 유산 삼아 청부 정신 피워내


회화나무 노거수 주변은 익명의 기부자로부터 받은 돈으로 장군의 동상과 업적을 소개한 글들을 새겨놓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스물다섯의 젊은 나이에 의병을 이끌고, 왜적과 싸웠다. 그리고 사십여 년이 흐른 병자호란, 이미 노쇠한 장군은 다시 칼을 들었다. 몸은 늙었지만 뜻은 굳세었고, 용인의 험천에서 끝내 적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순절하였다. 

 

벼슬길에 있을 때는 녹봉을 아껴 향교를 고치고 성곽을 보수하며, 백성을 자식처럼 돌보았다. 나라는 그의 절개와 청렴을 높이 평가하여 청백리(淸白吏)로 선정하였고, 불천위로 모셔 그 정신을 길이 전하도록 하였다.” 싸움터에 쓰러진 그의 마지막 모습은 한 줄 시처럼 뜨겁고 장엄했다. 그러나 최진립의 위대함은 단지 무사의 충절에만 머물지 않았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공직자들에게 장군의 삶은 단순한 옛이야기로만 머물지 않는다. 공직은 부귀의 수단이 아니라 섬김의 자리고, 권위가 아니라 신뢰로 세워져야 한다. 탐욕이 아닌 절제, 아첨이 아닌 곧은 소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백성을 향한 따뜻한 눈빛. 최진립 장군의 삶은 이러한 공직자의 자세를 온몸으로 증명한 교과서이며, 우리는 그분의 숨결을 통해 오늘의 기준을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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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립 장군 동상.


최진립 장군의 위대한 정신은 그의 생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 숭고한 뜻은 혈맥을 타고 이어져 후손의 삶 속에서도 실천으로 되살아났다. 그의 아들 최동량은 집안을 다스리는 도덕적 지침으로‘가거십훈(家居十訓)’을 지어 후손들의 삶을 경계하고 이끌었다. 벼슬은 진사 이상 하지 말 것,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할 것, 흉년엔 땅을 사지 말 것, 과객을 후히 대접할 것, 100리 안 굶는 백성이 없게 할 것… 십계처럼 빛나는 그 가훈은 물질보다 사람을 앞세운 삶의 윤리였고, 부유하되 청렴하고 넉넉하되 절제하는 삶의 태도였다.

 

이러한 정신은 장군의 손자 최국선에게로 이어졌다. 그는 실제 만석꾼이 되었으나, 그 부를 권력의 사다리로 삼지 않고 백성과 나눔의 다리로 삼았다. 모내기와 시비법을 도입해 농법을 혁신했고, 흉년엔 차용 문서를 불태우며 빈민을 구제했다. 재산을 쌓기보다 ‘청부(淸富)’를 실천했고, 윤리 없는 풍요를 부끄러워했다. 이 같은 삶의 자세는 이후 400년 넘게 이어져 오늘날 ‘경주 최부자집’이라 불린 가문의 명예로 도덕적 자산이 되었다.

 

그 시작점, 곧 최진립 장군이 태어난 집이 바로 경주 내남면 이조리의 잠와고택 충의당(潛窩古宅 忠義堂)이다. 충의당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한국적 원형이 꽃핀 공간이다. 생가 뜰에 뿌리를 내린 회화나무는 장군의 화신과도 같이 ‘부는 나눔을 통해 빛나고, 권력은 겸손을 통해 완성된다.’라는 장군의 정신을 지켜온 존재가 아닐까 싶다.

 

최진립 장군이 손수 심었다는 나무는 사백 해를 넘는 세월을 살아냈고, 지금도 충의당의 마당 한가운데에서 그늘을 드리운다. “임진왜란 때 최진립 장군이 갑옷을 이 나무에 걸면 나무가 능청 능청하였다.”라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바람과 비, 전란과 평화를 견뎌낸 회화나무는 이제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장군의 분신이자, 가문을 지켜온 살아 있는 유산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당시의 인물들이 모두 세월에 묻히고 잊혀가는 가운데, 회화나무는 그 옛날의 장군의 기개와 정신을 일깨워 우리에게 숭고한 정신을 전하고 있다. 

 

회화나무 아래에서 자라난 자식과 손자들, 그리고 그 후손들은 나무를 조용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할아버지 최진립 장군의 모습으로 여겨왔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러한데, 장군의 절개는 나무의 줄기요, 잎의 푸르름은 장군의 청백 정신으로 여겨졌다. 넓은 그늘은 후손들에게 쉴 자리와 삶의 방향을 일러주는 교훈이 되었을 것이다.

 

“나무를 보면 사람을 생각하고, 사람을 보면 나무를 닮는다.”이조리의 회화나무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철학이고, 유산이며, 삶의 태도였다. 장군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뿌리는 나무를 타고 살아났고, 그 나무의 기품은 후손들의 마음에 뿌리내렸다. 가거십훈(家居十訓)은 나뭇잎처럼 가지마다 매달렸고, 청부(淸富)의 정신은 사계절마다 다시 피어났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회화나무는 단지 한 장군의 흔적이 아니라, 민족의 운명을 함께 품고 살아온 신비로운 생명체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해, 나무는 갑작스레 잎이 마르고 고사하여 죽은 듯 보였으나, 1945년 해방과 함께 다시 싹을 틔워 살아났다고 한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추위를 피하려고 불을 피우다 불꽃이 나무 둥치에 번졌고, 겉은 타버렸지만, 그 해를 지나 다시 푸른 잎을 피워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나라의 혼이 되살아난 징조라며 감격했고, 그 나무 앞에서 기도를 올리는 이들도 생겨났다. 나무에 금줄이 쳐져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 수호신으로 동제를 지내는 것으로 보인다. 몇 차례의 죽음과 부활을 겪으며 살아온 회화나무 노거수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었다. 이는 장군의 기개가 뿌리로 살아 있었고, 나라의 영혼이 가지마다 깃들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바람 불 때마다 나뭇잎은 떨림이 아닌, 조용한 대화처럼 울렸고, 나무 아래를 지나던 이들은 저마다 가슴 한편에서 조상의 숨결을 느끼며 걸음을 멈추었다. 회화나무 노거수는 그렇게 한 장군의 철학이자, 한 민족의 의지로서 오늘까지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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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나무의 웅장함이 사람들을 압도한다.

경주 최씨 가문의 육훈은…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벼슬을 하지 말라.
:공직은 봉사의 자리이지 부와 권력을 위한 것이 아님을 강조.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부를 독점하지 않고 사회와 나누는 윤리.

 

▲흉년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남의 불행을 기회로 삼지 말라는 가르침.

 

▲과객을 후히 대접하라.
:타지에서 온 손님, 특히 가난한 이들을 따뜻이 맞이하라는 뜻.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가문의 책임은 울타리 안에 있는 이웃 전체를 포괄한다는 선언.

 

▲시집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게 하라.
:겸손과 절약을 몸에 익히게 하는 교육.
 

 /글·사진=장은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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