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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아들들의 ‘태’ 묻은 태봉을 지켜오다

등록일 2025-08-13 19:03 게재일 2025-08-14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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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경북 성주 인촌리 선석사(禪石寺) 가로 숲, 노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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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자태실과 소나무.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 끝자락에 조용히 솟아오른 꽃봉오리 모양의 작은 산봉우리는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 자식들의 태를 묻은 태봉이다. 그 숫자가 놀랍게도 18명의 자식과 1명의 손자란다. 그 역사 현장을 나즐로 찾아 나섰다. 자동차를 주차장에 주차하여 놓고는 안내판의 설명에 따라 천천히 숨을 고르면서 태봉으로 올랐다. 솔숲을 걷다 보니, 어느 순간 마음이 고요해지고 발걸음이 저절로 느려진다. 마치 시간이 쉬어가는 길목이자, 자연과 인간, 그리고 기억이 만나 속삭이는 풍경이다. 오솔길의 소나무들은 사람을 맞이하는 문이자, 왕자의 영혼들이 솔바람으로 합창하는 생명의 복도 같았다.

 

태봉에 제 올리러오던 왕실의 사신들 
선석사 드나 드는 수행자·마을 사람들 
맞이하고 떠나보내고 그늘이 돼 주던
느티나무·소나무·팽나무의 가로 숲길


일제강점기 지나며 강제 이식·벌목 등
위협 속에서도 살아남은 ‘귀한 존재’

 

 

숲속 오솔길 돌계단을 따라 150m쯤 오르니, 세종대왕자 태실이 봉안된 태봉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발 258.2m의 완만한 봉우리에 조성된 이곳은 조선왕조의 혼이 담긴 성역이다. 태실은 태어나자마자 아기의 태를 담아 땅에 봉안하던 조선 왕실의 의례, 생명의 뿌리를 정성스레 모시던 신성한 공간이다. 이곳에는 세종의 아들 18명과 단종을 합쳐 19기의 태실이 모여 있다. 그중에는 다섯 왕자의 태실이 사각형의 기단석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있지 않았다. 나머지는 조성 당시의 형식을 간직한 채 생명의 출발점이자, 왕실의 안녕과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던 한 왕조의 기원이 담겨 있어 나를 숙연하게 했다.

 

왕자들의 태실 앞에 왕자보다는 세종대왕이 먼저 생각났다. 말과 글이 달라 뜻을 표현하기 어려운 일반 서민에게 빛과 희망이 된 한글 창제 때문이다. 대왕께서 반포하신 훈민정음은 백성의 입술에 빛을 내려 준 글이었다. 말은 있었으나 글이 없어 침묵하던 민중의 목소리에 문을 열어 준 그 위대한 한글 창제는, 단지 소리를 기록하는 도구를 넘어서, 마음을 전하고 사유를 나누는 문학의 뿌리를 틔운 생명의 씨앗이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시와 수필, 소설, 희곡 등 문학을 발전시키고 즐겁고 의미 있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자연과 사람, 고통과 사랑, 역사와 꿈이 한글이라는 그릇 안에서 꽃을 피웠다. 조용한 백성의 가슴속에도 시심이 깃들게 한 그 위대한 애민의 문자, 그것은 조선이 우리에게 건넨 가장 고귀한 선물이자, 오늘 우리가 문학으로 세상과 이어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다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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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석사 대웅전.

태봉에서 내려와 선석산 아래에 있는 명찰 선석사를 찾았다. 고찰 선석사로 들어가는 가로수를 따라 걷는 길은 너무 인상적이었다. 느티나무, 소나무, 팽나무 등 오래되고 거대한 노거수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가로 숲을 이루었다. 그 늘어선 나무의 모습 또한 여느 나무 못지않게 괴이한 모습이 아름답고 멋진 산사의 풍경을 연출했다. 아마 조선 시대만 하더라도 이곳은 울창한 숲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주민들이 나무를 심어 인공 가로 숲을 만들었다기보다 기존의 울창한 숲의 나무를 베고 길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다양한 나무들로 멋진 가로 숲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길에서 문득 나무와 나무 사이로 햇살을 본다. 빗방울이 말라간 자리에 맑은 이슬이 맺혀 반짝인다. 느티나무의 주름진 껍질 사이로, 오랜 세월을 이겨낸 생명의 의지가 돋아난다. 500년을 버텨온 느티나무 앞에 섰다. 아득한 시간 속에서 자리를 지키며 사람과 계절을 품어 온 나무는, 마치 선석사로 들어서는 영혼들의 수호자 같다. 노거수는 단순한 생물이 아니라 한 시대를 기억하고 있는 존재이다. 그 아래를 지나니, 300년은 족히 넘었을 소나무들이 바람결에 춤을 춘다. 하늘로 뻗은 가지는 자유롭고도 단정하며, 땅에서 솟은 줄기는 묵묵한 지조를 품는다. 그 모습은 마치 옛 선비의 절개처럼 서 있다. 팽나무 노거수가 해안 지방이 아닌 이곳 조용한 산사에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특별하게 남달라 보였다. 길을 따라 흐르는 개울물은 선석산에서 흘러온다. 맑은 물소리는 나무의 숨결과 어우러져 마치 한 편의 시처럼 들린다. 

 

예로부터 선석사로 드나드는 수행자와 마을 사람들, 그리고 태봉에 제를 올리러 온 왕실 사신들이 오르내리던 길이었다. 그들을 맞이하고, 떠나보내고, 비와 눈을 피할 그늘이 되어 주던 나무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느티나무는 민중의 신목으로 여겨져 마을 어귀나 사찰 입구에 즐겨 심었다. 느티나무의 펼친 가지는 품처럼 넓어 누구든 그 아래에서 쉼을 얻을 수 있었고, 소나무는 절개와 기개의 상징으로 우리 국민이 선호한 나무였다. 선석사 가로 숲은 그렇게 조선왕조의 예법과 백성들의 일상이 만나는 경계에 서 있었고, 오랜 세월 그 사연들을 묵묵히 품어 온 자연 가로 숲이었다.

 

역사적 기록으로 보면, 이 숲은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강제 이식이나 벌목의 위협 속에서도 살아남은 귀한 존재다. 태실이 전국적으로 훼손되거나 이전될 때도 성주 태봉은 예외적으로 원래 자리를 지켰고, 그 길목을 지키는 나무들 역시 뿌리째 뽑히고 베어지는 아픔을 면했다. 가로 숲은 침묵의 저항이자 살아남은 기록이며, 조용한 수호자였다. 오늘날 그 가로 숲길을 걸으면 바람 소리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시간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그 길을 걷는 이마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을 조용히 옮기는 이유는 어쩌면 그 숲이 기억하는 것들이 너무나 깊고도 소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성주 인촌리 선석사 가로 숲은 단지 오래된 나무들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삶과 시간, 믿음과 자연이 빚어낸 거대한 생명의 서사시이다. 이곳을 걷는 이마다 나무로부터 위로와 깨달음을 얻으며 많은 것을 사유하게 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나뭇잎처럼 흔들리다, 바람처럼 스며든다.

 

선석사는 신라 효소왕 692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원래는 신광사로 불리다가 고려 공민왕 1361년, 나옹왕사 혜근이 이곳으로 옮겨오며 선석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큰 바위(禪石)가 터에서 나와 절 이름이 되었고, 그 바위는 지금도 선석사에 서 있다. 임진왜란으로 불탔다가 다시 중창된 절은 조용하고 단아하다. 대웅전과 태장전, 명부전과 칠성각, 사천왕문과 산신각이 나란히 어우러져 있으며, 대웅전은 조선 후기 다포양식의 맞배지붕 구조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선석사 경내에도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 등 수백 년 된 벚나무가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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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느티나무 노거수.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은…

태실이란 왕실의 왕자나 공주 등이 태어났을 때 그 태를 씻어서 태항아리에 담아 봉안한 곳을 말한다. 태을 묻는 과정이 장태(藏胎)는 고려 시대도 있었으며 왕의 태를 묻었으나 조선 시대에 이르면서 왕자와 공주의 테를 묻었다. 조선 초기부터 장태 의례는 왕실의 주요 의례였으며 엄정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태가 국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명당인 이곳의 태봉까지 태를 옮겨 태실을 조성한 것은 태어난 아기의 무병 장수를 기원하는 동시에 왕실의 안정과 번영을 기원하는 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러한 장태 의례는 조선 후기까지 이어지면서 절차가 간소화되었다.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은 세종 20년 1438년에서 세종 24년 1442년에 걸쳐 만들어졌으며 세종의 아들 18명과 손자인 단종을 합쳐 모두 19기의 태실이 모여 있다. 

 

보통 1기씩 조성되어 따로 떨어져 있는 태실과는 달리 이곳에는 많은 수의 태실이 모여 있는데 전국 어디에도 이런 규모의 태실은 없다. 일제강점기 전국의 태실이 일본에 의해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일부 옮겨졌을 때에도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은 제자리를 지켜 옛 모습을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다. 

 

조선 시대 태실의 초기 형태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면서 왕실의 태실 조성 방식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볼 수 있는 조선시대의 중요한 자료이며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태란 태반이나 탯줄과 같이 태아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조직을 이루는 말. 봉안이란 시신을 화장하여 그 유골을 그릇이나 봉안당에 모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는 아기의 태를 담아 모시는 것을 뜻한다.-(안내판 글 옮김)

 

/글·사진=장은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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