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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여래삼존불’이 세워진 영적이고 신령한 땅

홍성식 기자 · 이용선 기자
등록일 2024-11-19 19:15 게재일 2024-11-2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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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신성한 보고(寶庫) 선도산 <15> 마애여래삼존불 왜 선도산에?
가을 하늘 아래 서있는 마애여래삼존불 보살상.
가을 하늘 아래 서있는 마애여래삼존불 보살상.

너른 벌판 아래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들을 내려다보고 선 마애여래삼존불, 고대왕국 신라 첫 번째 왕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여겨지는 성모(聖母)의 설화, 성스러운 기운이 서렸다는 땅 서악(西岳)…. 이 모두는 선도산(仙桃山)이란 키워드와 연결되는 것들이다.

조용한 늦가을 오후. 한낮에 찾은 선도산은 평화로운 모습으로 길게 엎드려 있었다. 수천 년 전부터 그랬을 것이다. 얼핏 보기엔 경주의 여느 지역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른바 ‘서악’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역사학계가 주목한 곳이다.

민족사학을 개척했다고 평가받는 이기백(1924~2004)은 삼한일통(삼국통일) 이전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겼다는 지역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1974년의 일이다.

“신라에는 통일전쟁 전에 경주평야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오악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동쪽의 토함산(吐含山), 서쪽의 선도산, 남쪽의 남산(南山), 북쪽의 북악(北岳), 중앙의 부악(釜岳)이 있었다. 그러나 신라의 영토가 확대되고 통일전쟁을 치른 뒤에는 오악도 국토의 사지(四至)에 있는 산들로 변화를 가져오게 됐다. 이때의 오악은 동쪽의 토함산, 서쪽의 계룡산(鷄龍山), 남쪽의 지리산(地理山), 북쪽의 태백산(太白山), 중앙의 부악이다. 이는 각 방위에 따라 국토를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그 지역의 일정한 정치적 세력을 제압한다는 상징적 의미도 지녔다고 한다.”

 

서악은 신라 오악 중 하나로 선도산 일대를 지칭

하늘의 뜻과 임금의 의지로 지배되던 고대엔

‘명당 중 명당’이 왕의 유택 자리로 선택됐을 것

아미타삼존인 이유? 사자의 극락왕생 위한 추선

◆‘명당 중 명당’으로 여겨졌을 경주의 서악

앞서의 언급처럼 서악은 신라 오악 중 하나로 선도산 일대를 지칭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들은 자신의 이름과 행적을 세상이 오래 기억해주길 원한다. 민의가 반영되는 선거가 아닌 타고나는 혈통으로 왕위를 이어갔던 고대엔 이런 열망이 더 컸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미드나 어마어마한 규모로 축조된 중국 서안의 진시황릉은 그런 열망이 낳은 유적이 아닐까.

합리와 이성보다는 하늘의 뜻과 임금의 의지로 지배되던 고대엔 이른바 ‘명당(明堂) 중 명당’이 죽은 왕의 유택(幽宅) 자리로 선택됐을 것이다. 신라인들은 분명 서악을 명당이라 믿었을 터.

1964년 여름 사적 제142호로 지정된 경주 서악동 고분군(慶州 西岳洞 古墳群)은 통일신라시대 즈음에 조성됐을 것으로 보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선도산 초입에 커다랗게 모습을 드러낸 무열왕릉의 뒤편 언덕에 자리한 네 개 봉분을 지칭하는 서악동 고분군에 대한 ‘위키백과’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곳 고분들은 경주 분지의 대형 고분과 비슷한 형태로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고분이다.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내부구조 시설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봉분이 거대한 점, 자연돌을 이용해 둘레돌을 두른 점 및 무열왕릉보다 높은 곳에 있는 점으로 보아 안에는 나무로 된 네모난 방을 만들고 그 위와 주변에 돌무더기를 쌓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형식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들 고분이 분포한 지형은 선도산에서 서남으로 뻗은 능선상에 있고, 뒷산과 동서의 계곡 건너에 있는 능선 등을 종합해 볼 때, 풍수지리사상의 영향 아래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무덤의 주인에 대해 첫 번째 무덤은 법흥왕릉, 두 번째 무덤은 진흥왕릉, 세 번째 무덤은 진지왕릉, 네 번째 무덤은 문흥대왕릉 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영남대학교 미학미술사학과 최미경의 논문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仙桃山 阿彌陀三尊像)-조성시기와 목적에 관하여’는 서악과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아미타삼존상), 7세기 신라 불교 조각과 아미타신앙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논문 역시 서악과 선도산이 가진 지리적·역사적 위상을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보자.

“불상(마애여래삼존불)이 위치한 선도산은 신라에서 서악이라 불리며 선도성모(仙桃聖母)의 주재처로 숭상 받던 곳이다. 현재 선도산 아래에는 무열왕릉을 비롯해 서악 동 고분군 및 무열왕 후손의 묘가 있으며 불상은 선도산에서 이들 고분군을 내려 보는 것 같이 조성돼 있어 지리적 위치 또한 주목을 받았다.”

신령스런 땅이라 불리는 서악에 새워진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을 Chat GPT가 그렸다.
신령스런 땅이라 불리는 서악에 새워진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을 Chat GPT가 그렸다.

◆마애여래삼존불은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을까

대부분이 알다시피 신라는 부정할 수 없는 불교왕국이었다. 법흥왕 이후 국교(國敎) 수준으로 귀하게 대접받았던 신라 불교.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숭배하는 불교신앙을 아미타신앙이라 한다. 그렇다면 아미타불(阿彌陀佛)은 뭘까? 불화와 번뇌가 없는 서방정토를 다스리는 부처다.

앞서 말한 최미경의 논문엔 “선도산 불상이 아미타삼존인 점에 주목해 조성 시기에 즈음한 아미타신앙의 형태를 살핀 결과 이는 사자(死者)의 극락왕생을 위한 추선(追善)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공덕(功德)으로 사자의 극락왕생을 비는 믿음에서 조성된 것”이라는 서술이 나온다.

여기에서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이 만들어진 이유의 일단을 짐작해볼 수 있다. 논문은 아래와 같이 이어진다.

“이러한 대규모 불사는 일반 백성의 의지로 보기는 어렵고 지리적인 위치 등을 고려했을 때 불상의 발원 세력은 왕족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선도산 불상은 무열왕대에 선대(先代)의 왕생을 빌며 발원했거나 혹은 문무왕의 발원 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특히 불상의 양식을 고려하면 650년경을 전후로 한 시기에 무열왕의 발원으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최미경을 포함한 적지 않은 사학자들은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이 무열왕 김춘추, 또는 문무왕 김법민 재위 시절에 바위에 새겨졌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신라 사람들이 영험이 깃든 성스러운 땅이라 믿었던 서악, 조금 더 좁혀 말하자면 선도산은 그런 국가적인 대형 프로젝트가 행해지기에 모자람이 없는 지역이었다고 추정된다.

영적이고 신령한 땅, 마애여래삼존불이 세워지기에 안성맞춤인 산, 신라를 태동시킨 여성의 신화…. 일연이 쓴 역사서 ‘삼국유사’ 역시 이 지역이 가진 신비스러움에 관해 짤막하게 서술한다.

“신라 시조 혁거세왕, 불구내왕이라고도 하는 바 광명으로써 세상을 다스린다는 말이다. 설명하는 사람은 말하기를 ‘이는 서술성모가 낳은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사람이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미하는 글에 현인(賢人)을 잉태해 나라를 열었다’라는 구절이 있으니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또는 계룡(鷄龍)이 상서를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았으니, 또한 서술성모의 현신이 아닌 줄을 어떻게 알 것인가…(후략)”

신라인들이 성스럽게 여겼던 서악 일대의 현재 모습.
신라인들이 성스럽게 여겼던 서악 일대의 현재 모습.

◆마애여래삼존불은 수나라 시대 양식 영향 받아

논문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仙桃山 阿彌陀三尊像)-조성시기와 목적에 관하여’는 마애여래삼존불의 양식을 “본존은 고부조임에도 볼륨감이 없어 전체가 하나의 원통형 기둥처럼 보이며 세부 표현을 생략해 간결하다. 이런 간결함, 양감 없는 체구, 부드러운 조형은 북제불(北齊佛)과 유사하나 적절한 신체 비율과 당당한 체구는 수대(隋代·수나라 시대)의 양식”이라고 보고 있다.

더불어 “통견의 법의는 굵은 선을 한 줄 새기고 그 아래 얕은 선을 번갈아 넣는 새김을 반복해 조각의 단조로움을 피했다. 몸에 밀착된 얇은 옷주름이 대칭으로 내려오는 것은 북제 불상의 특징이지만 장대한 신체는 오히려 수대 불상에 가까운 것으로, 본존은 북제불을 원류로 하면서도 보다 진전된 수대 양식을 받고 있다”고 쓴다.

7세기 중반 무렵. 번창 일로에 있던 불교왕국 신라는 당시 최고의 석조 기술을 가진 장인들을 동원해 부처와 보살의 형상을 선도산 정상 부근에 새겼을 것이다.

그것들이 장구한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도 ‘신라를 신라답게, 경주를 경주답게’ 보이게 하는 보물로 존재하고 있다. 반갑고 다행한 일이다.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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