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청도 원리 적천사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하늘로 치솟은 웅장한 은행나무의 모습에 놀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잠깐이었다. 먹구름이 몰려와 푸른 하늘을 가렸다. 은행 나뭇잎에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은행잎에 모여 큰 빗방울로 변해 머리 위에 떨어졌다. 천둥번개가 치면서 번갯불이 하늘을 가르고 벼락 치는 우레는 가슴을 조이게 했다.
숨돌릴 틈도 없이 빗방울은 채찍으로 변해 대지를 사정없이 때렸다. 거대하고 무성한 잎의 은행나무 아래에도 소낙비를 피할 수는 없었다. 갑자기 빗물은 도랑을 형성하고 산자락 경사진 개울로 쏟아져 내렸다. 신라 천 년 고찰 적천사로 뛰어들었다. 맞닥뜨린 것이 험상궂은 얼굴의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는 사대천왕이었다. 두려움에 간은 쪼그라들고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내 유년 시절에 청도 원리 적천사에 갔을 때 은행나무와 사대천왕을 처음 보았을 때 경험한 일이다.
청도 화악산 적천사 은행나무 두그루
수령 840년·키 29m·가슴둘레 9m…
천연기념물 은행나무의 웅장한 자태
주렁주렁 은행·노랗게 물든 은행잎
천년의 아름다움, 고요·평안 담아내
화악산 적천사는 나의 고향 청도군 청도읍 소재지에서 밀양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내려가면 오른쪽에 원리 마을이 있다. 마을 고샅길을 따라 산 쪽 방향으로 올라가면 산자락에 자리 잡은 고찰이다. 고찰과 함께 원리 981번지에 나이 840살, 키 29m, 가슴둘레 9m, 앉은자리 폭이 30.8m 되는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두 그루의 서 있다. 신라 보조국사 지눌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심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은행나무는 웅장함에 경외감을 가지게 한다. 고향 가는 길에 청도 원리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노거수를 찾았다.
이곳 원리 마을 출신 대구광역시 교육청 부교육감과 대구예술대학 총장을 역임한 도정기 선배님은 늘 고향 적천사 은행나무 자랑을 나에게 늘어놓곤 했던 기억이 오늘따라 새롭게 떠오른다. 고찰로 가는 산 비탈진 오솔길은 유년 시절에는 걸어서 갔지만, 지금은 자동차로 숨 한 번 헐떡거림 없이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 노거수의 웅장한 몸집에 주렁주렁 달린 은행이 떨어져 나무 밑을 꽉 채워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잘못하여 은행을 밟기라도 한다면 신발에 그 고약한 냄새는 귀가할 때까지 따라다니며 괴롭히기 때문에 조심해서 발걸음을 옮기면서 접근했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바라보면서 가을의 정취를 만끽했다.
은행나무는 노란 옷으로 갈아입은 어머니 같은 존재로 다가왔다. 세월의 무게를 짊어진 채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나무는 인간에게 위안을 주고, 자연의 순환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을 가진 하나의 존재임을 알았다.
자연과 사람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깊은 감정을 나무 아래에서 느꼈다. 나무는 그 자체로 시간의 기록이었고, 수많은 세월 동안 이곳에서 불교 신앙을 지키며 사람들에게 몸과 마음의 쉼터를 제공했을 것이다. 나무 아래 서 있으면 마치 그 시간 속에 내가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가지에는 노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장대한 모습, 그 아름다움은 마치 세상의 모든 고요와 평안을 담고 있는 듯했다.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나무, 그 나무를 지켜온 사찰, 아니 사찰을 지켜온 은행나무, 그리고 사대천왕의 존재는 나에게 자연과 불교, 그리고 인간의 삶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가르쳐주었다. 사대천왕은 그들의 세상을 지키고, 악을 물리치며,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로서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했다. 그리고 은행나무는 그 모든 것을 묵묵히 바라보며 천년의 세월을 지켜왔다. 나는 이곳에서 자연과 신앙, 그리고 인간의 삶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경험을 했다.
은행나무는 그 자체로 생불(生佛)이라 할 수 있다. 부처가 인간 내면의 불안감을 진정시키고 평화를 주듯, 은행나무는 그 긴 세월 동안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자연의 지혜를 상징한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은 마치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마음에 평온을 가져다주고, 그 고요한 아름다움은 인간의 원초적인 두려움과 불안을 잠재운다. 인간은 종종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흔들리지만, 고요히 떨어지는 은행잎을 바라볼 때면 그 모든 걱정이 잠시나마 잊히고, 평온과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이렇듯 은행나무는 자연의 순리 속에서, 그리고 부처의 자비 속에서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선사하는 생명의 상징이다. 천년 사찰의 은행나무는 이렇게 나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생불과 같은 존재로 와 닿았다.
가을 햇살이 사찰을 비추고, 은행나무의 잎이 바람에 날리면서 내 앞에 펼쳐진 풍경은 마치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시간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이곳에 서 있으면, 마치 내가 그 시간 속에 포함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청명한 가을하늘이 저만큼 높이 솟아 있고 푸른 솔가지 위에 가을 햇살이 반짝인다.
사대천왕의 무서운 트라우마를 떨치고 붉게 물들어가는 가을 산사를 빠져나왔다. 빠져나온 내 빈자리에 누군가 또 다른 방문객이 자리를 차지하려고 오르고 있다. 은행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고요히 방문객을 맞이하고 떠나보내고 있다. 천년의 시간은 은행나무와 사찰을 지나, 나의 마음속에도 스며들었음을 적천사를 빠져나오면서 다시 한 번 느꼈다.
적천사 사대천왕은…
①동쪽의 국토를 지키는 지국천왕(持國天王): 눈알이 튀어나올 듯 부릅뜬 눈을 하고 있다. 치켜세운 눈썹과 드러난 이빨로 오른손에는 칼을 쥐고 왼발로 마귀의 등을 밟고 있다. 발밑에 깔린 마귀는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다. 단청의 화려한 색상으로 앉아 있는 키만 하더라도 4m는 족히 되었다. 선한 자에게 상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어 권선징악으로 인간을 고루 보살핀다고 한다.
②남방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검은 눈썹을 잔뜩 치켜세운 채 이를 악물고 부릅뜬 눈으로 아래를 보고 있다.
양손으로 비파를 들고 있으며 세 개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가진 마귀를 왼발로 배를 밟고 있다. 자신의 위덕을 증가하여 만물이 태어날 수 있는 덕을 베풀겠다는 서원을 한다.
③서쪽을 방어하는 광목천왕(廣目天王):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검은 눈썹을 잔뜩 치켜세운 채 입을 꾹 다물고 부릅뜬 눈은 앞을 직시하고 있다. 갑옷으로 무장하고 오른손은 용을 왼손에는 여의주를 쥐고는 왼발로 악귀의 배를 밟고 있다. 죄인에게 벌을 내려 매우 심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광목천왕의 결의에 찬 모습이 믿음직스럽게 느꼈다.
④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부릅뜬 눈으로 눈썹을 잔뜩 치켜세운 채 붉은 입술의 입을 벌리고 있다. 오른손은 삼차극(三叉戟)을 들고 있고, 왼손에는 손바닥 위에 보탑을 받들어 쥐고 왼발로 악귀의 배를 밟고 있다. 암흑계의 사물을 관리하며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고 하는 다문천왕은 다른 천왕과는 다르게 배와 발아래 이상하게 생긴 마귀가 있다. 사대천왕의 오른발 아래 악귀가 하나씩 꿇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사천왕은 고대 인도 종교에서 숭상했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고 수미산(須彌山)에 살면서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지키며 제석천(帝釋天)의 명을 받아 불법을 수호하며 팔부중을 거느리고 있다고 한다.
/글·사진=장은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