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장은재의 명품 노거수와 숲<br/>(52) 청도 서원리 자계서원 은행나무
청도는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화랑도 세속오계를 창시한 원광법사가 주지로 있은 고찰 호거산 운문사와 삼국유사를 집필한 일연 스님이 역사 자료를 수집한 비슬산 대견사가 있는 고장이다.
고구려는 평양, 백제는 부여, 신라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반도를 삼국이 삼분하여 적대하면서 서로 국경 침략 등 백성은 편안할 날이 없었다. 분열된 한민족을 하나로 만든 신라 삼국통일 군사 훈련 중심이 된 곳도 이곳이며, 우리의 역사를 오천 년으로 끌어올린 삼국유사의 역사 자료를 수집한 장소도 이곳이다. 화랑도는 삼국통일의 원동력이며 삼국유사는 우리 역사의 뿌리를 기술하였다.
이러한 유서 깊은 역사의 고장인 청도는 산자수명하고 인재 또한 많아 예나 지금이나 살기 좋은 고장이다.
수령 500년·키 15m·둘레 4.4m
1983년 보호수 지정 우람한 자태
다섯 가지가 하나로 결합된 모습
오리발 닮은 단풍잎 ‘압각수’ 불려
자계서원 수북한 황금물결 ‘장관’
역사적 인물로 탁영 김일손(1464~1498)은 조선 중기 사관으로 무오사화에 희생된 청도인이다. 그는 절효 김극일의 손자로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486년 성종 때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서원리에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짓고 학문에 열중했다. 김종직 문하에 들어가 김굉필, 정여창, 남효온 등과 교류하면서 다시 벼슬길에 나가 이조정랑을 지냈다. 언관(言官)에 재직하면서 훈구파의 불의와 부패를 공격하고 사림파의 중앙 정계 진출을 돕기도 했다.
춘추관에 근무할 때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어 1498년 반역죄로 34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조의제문은 항우가 초나라 회왕 의제를 죽이고 권력을 찬탈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초나라 의제를 조상하는 형식이었지만, 세조가 권력을 찬탈한 부당성을 풍자한 것이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복권되고 순조 때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그의 굽히지 않는 올곧은 성품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아마 젊은 시절에 운계정사에 심어 놓은 은행나무의 역할이 크지 않았나 싶다. 선생이 직접 심은 은행나무가 지금까지 우람하게 자라면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탁영(濯纓)이란 호는 맑은 물에 갓끈을 씻는다는 의미로 중국의 고대 서적인 초사(楚辭) 굴원의 글에 나오는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물이 맑을 때 갓끈을 씻고, 탁할 때 발을 씻겠다는 비유로 세상의 혼탁한 일에 연연하지 않고 고결하게 살아가려는 마음가짐의 표현이다. 비록 현실이 혼탁하더라도 자신의 고결함과 깨끗함을 유지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 손수 서원 내 은행나무를 심고 그를 닮고자 하지 않았을까 싶다.
자계서원이 있어 마을을 서원리라는 이름의 지명을 붙였고, 자계서원을 상징하는 것은 나이 500살을 훌쩍 넘긴 은행나무 노거수이다. 청도군청 김윤길 행정안전복지국장의 도움으로 굳게 닫힌 서원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은행나무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키 15m, 가슴 높이 둘레 4.4m 두 그루가 우람하게 자라고 있었다. 한 그루는 5가지 줄기가 하나로 뭉쳐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모두 암그루로 은행 열매가 나뭇가지에 너무 많이 열려서 가지가 땅에 맞닿아 있었다. 1983년 7월 2일 보호수로 지정되었지만, 나무의 수령이나 그 크기 등 역사 문화적 가치로 보아 천연기념물 반열에 올려놓아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몇 년 전 11월 5일 자계서원을 찾았을 때는 은행나무가 가을 하늘과 서원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오리의 발과 닮았다 하여 압각수(鴨脚樹)란 이름을 가진 은행나무의 노란 단풍잎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은행나무 아래에는 하늘에서 나풀나풀 춤추며 내려앉은 노란 압각수 잎으로 덮었다. 자계서원의 은행나무 노란 단풍잎의 절정을 볼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치 않다. 그해의 기후와 날씨에 따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청도의 진산인 아름다운 남산을 바라보면서 아담한 동산을 배경으로 앞에는 비슬산에서 발원한 청도천이 흐르고 있는 서원리는 유서 깊은 자계서원을 품고 또한 자계서원은 은행나무를 품고 평화롭게 가을을 물들이고 있다.
유교와 관련된 서원에서는 은행나무가 인문학적 다양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은행나무는 지구상에 하나뿐인 속과 과의 나무이다. 화석식물이라 할 만큼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살아온 나무이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1200년이 지났지만,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 서원에 다니는 유생들에게 은행나무는 지식과 학문의 지속성, 변치 않는 가치를 상징하면서 교훈을 주었을 것이다. 서원은 조선시대 교육의 중심으로 지속적인 학문을 추구하는 교육 공간이라는 점에서 은행나무는 이러한 교육의 가치관과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
은행나무는 천천히 자라며 장수하는 나무이다. 그러면서도 건강하고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학문의 길에 들어선 유생들에게 이와 같이 지혜와 인내, 꾸준한 끈기의 노력을 상기시킨다. 이는 선비 정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은행 열매는 약재로 쓰이며, 나무의 모습 또한 우람하면서도 단정하여 선비의 지조와 품격을 떠오르게 한다. 서원에서 수양하고 학문을 닦는 선비들은 이러한 은행나무의 상징성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확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서원의 은행나무는 단순히 조경의 일부가 아닌 유교적 가치와 관련된 상징적, 정신적 요소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유교적 사상에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마당에 은행나무는 이러한 사상을 잘 반영하는 나무이다. 자연에서 인간이 본받아야 할 원리를 찾는 데 의미를 두었고 은행나무의 모습과 생명력은 자연의 본질을 잘 드러낸다. 서원은 학문을 탐구할 뿐만 아니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추구하는 공간이기도 하므로, 은행나무는 그 상징적 의미를 강화한다. 서원 내의 은행나무는 학문적 가치, 정신적 수양,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는 조선시대 철학의 핵심을 상징하고 있다. 탁영 김일손 선생처럼 나 또한 그러한 삶을 살아가리 마음먹으면서 노란 은행잎처럼 내 마음도 곱게 물들어 간다. 자계서원은 처음에는 은행나무를 담장 안으로 품었지만, 지금은 은행나무가 자계서원을 품고 탁영 김일손 선생의 올곧은 성품을 대변하고 있다. 은행나무를 닮고자 손수 심은 선생의 나무 사랑은 나에게 진한 감동을 주었다.
청도 서원리 자계서원(紫溪書院)은…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는 1400년경 김극일(金克一)이 입향하여 정착한 김해김씨 집성촌이다. 선조 1578년에 사당의 중수와 함께 학사 곳간 등의 새로이 세워져 서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자계서원이 되었다. 김일손이 형벌을 당할 때 그의 고향에 있는 냇물이 별안간 붉게 물들어 사흘 동안 물 색깔이 되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며 그런 까닭에 붉은 시내라는 뜻의 자계(紫溪)라 불리게 되었다. 1615년에 절효 김극일, 삼족당 김대유를 병향하고, 현종 1661에는 나라의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받는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고종 1871에 흥선대원군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4년에 사림과 후손들에 의해 김용희(탁영 14세손)의 사재로 복원되었다.
1975년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었다. 솟을삼문인 유직문(惟直門), 서원에서의 여러 행사를 하거나 학생들이 모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던 곳인 영귀루(詠歸樓), 강당인 보인당(輔仁堂), 학생들이 공부하고 숙식하는 생활공간인 동재와 서재, 사당인 존덕사(尊德祠), 제사 준비를 하는 전사청(典祀廳) 등이 있다.
1482년 점필재 김종직이 지은 ‘절효김선생효문비명’과 대제학 조정이 지은 ‘효자승사랑김극일정려본김해’ 두 기의 비석이 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