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신성한 보고(寶庫) 선도산<br/>(18) 선도산에서 행해진 거대 불사
“잘려진 목에서 하얀 피가 솟고, 처형되던 날 서라벌 하늘에선 꽃비가 쏟아졌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신라 법흥왕(재위 514~540) 시절 이차돈의 순교.
이차돈이 불국정토(佛國淨土) 건설을 위해 쓰러진 그날 이후 신라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불교왕국’으로 재탄생한다. 불교가 나라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종교가 된 것이다.
일찌감치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 백제와 달리 신라의 불교 도입은 비교적 늦었다. 토속 신앙을 받드는 백성들이 많았고, 권력층 역시 부처가 설파한 도리가 자신들의 이익에 맞지 않는다하여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던 게 이유다.
하지만, 막상 불교가 국교 수준으로 숭배 받게 되자 신라는 빠른 속도로 대형 사찰을 건설하고, 절에서 생활하는 불자들을 귀하게 대접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간행한 책 등에 의하면 ‘신라는 불교 도입에 대한 반대가 심해 아도 화상(삼국시대 경북 일대에서 활동한 승려) 이후 100여 년이 지난 뒤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뒤늦게 국가가 불교를 공인’한다. 설명은 이렇게 이어진다.
“공인 이후로 신라의 불교 신봉은 삼국 중에서 가장 열성적이었고, 불교를 국가 운영원리로 채택함으로써 강력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구축했다. 신라 불교의 전래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민승(民僧)이 들어와 공식 외교를 통하지 않고 포교를 한 것이 고구려·백제 불교와의 차이점이다.”
국가 단합·민족 보호 중요한 수단으로 불교 활용
역사·문화적 가치 지닌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
호국불교 바탕 신라의 번영·안정위해 조성 된 듯
◆호국적 성격이 강했던 삼국시대 신라 불교
이차돈의 죽음이 촉발시킨 ‘불교의 국교화’ 이전에도 불교를 신라에 정착시키려는 노력은 없지 않았다.
각종 고문헌과 전래 기록상에는 신라 제13대 미추왕 2년(263년)에 고구려의 승려 아도가 와서 불교를 전했다는 설, 19대 눌지왕 때 고구려 승려 묵호자가 불교를 선양했다는 설 등이 전해지고 있다.
삼국시대의 신라 불교는 나라와 왕실을 수호한다는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성격이 강했다.
“진흥왕 이후 신라는 불교정신에 입각해 국민을 단합시켰다. 대표적인 사례로 팔관재회(八關齋會), 백고강좌(百高講座), 황룡사 9층탑 건립, 사천왕사(四天王寺) 건립 등이 있으며, 특히 화랑들이 금과옥조로 여겼던 세속오계(世俗五戒)는 불교정신으로 민족을 단합하고 국가를 지키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는 ‘위키백과’의 설명이 이 사실을 부연한다.
법흥왕 통치 시절 이차돈의 순교 이후 신라에선 금속, 목재, 석재로 만들어진 수천, 수만의 불상이 탄생한다. ‘숭배의 대상’을 형상화 하는 작업이었다. 왕을 포함한 신라의 지배층이 이런 작업에 주도적으로 나섰다.
유사한 형태를 띠며 국가가 주도한 불교 프로젝트는 6세기 이후 신라가 멸망에 이를 때까지 꾸준히 지속됐다는 게 대다수 사학자들의 이견 없는 주장이다.
6세기에 조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 또한 ‘불교 전파의 어려움-이차돈의 죽음-불교의 국가 공인-급속하게 진행된 거대 불사(佛事)-불교왕국으로 전이(轉移)된 신라’라는 공식 속에서 세워졌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목적의식적으로 만들어진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
영남대학교 한국학과 이창국의 논문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의 조성 시기와 조성 목적’은 선도산 아미타삼존상(마애여래삼존불)의 현재 모습을 서술하면서 시작된다.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삼존상은 현재 높이 5.81m의 아미타여래입상을 본존불로 하여 좌측에 현재 높이 4.53m의 관음 보살상, 우측에 현재 높이 4.56m의 대세지보살상이 있다. 이중 본존불은 자연 암벽인 안산암에 조각된 마애불이고, 좌우측의 협시보살상은 화강암으로 조각된 별도의 독립된 입상이다. 본존불의 얼굴은 현재 코의 일부와 입 및 턱을 제외한 상당 부분이 파손됐으며, 바닥에는 별석의 화강암 대좌가 있다.”
이창국의 논문은 불상의 미시적인 부분까지 세밀하게 관찰해 “본존불에는 표면 곳곳에 원형 구멍이 있는데, 실제 청동못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는 것과 “좌우 협시상 조성 당시에는 머리부터 신체, 대좌와 발을 조각한 두 부분으로 구성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이 만들어진 시기는 대략적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몇몇 역사학자들은 무열왕 통치 기간에 깎아 세웠을 것이라 유추하고, 또 다른 사학자들은 무열왕의 아들인 문무왕 김법민 재위 시절에 조성된 게 아닌가라고 짐작한다.
세 개의 불상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본 사람은 이제 세상에 남아있지 않으니, 어떤 추론이 진실에 가까운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을 만든 거대 불사는 당시의 신라사회 분위기로 봤을 때 ‘호국(護國)’이라는 목적의식에 아래에서 이뤄졌음이 분명할 듯하다.
이를 염두에 둔 것일까.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의 조성 시기와 조성 목적’ 역시 논문의 맺음말을 아래처럼 끝내고 있다.
“(마애여래삼존불은)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 과정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고, 전쟁의 참가자뿐만 아니라 남겨진 자들의 심리적 안정과 전쟁에 대한 의지를 결집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조성한 것으로 판단하였으며, 이로 인해 문무왕은 민심 이반에 대처하고 왕권의 안정화를 추구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계속)
선도산 성모, 혹은 서술산 성모
2000년도 더 된 까마득한 옛날이다. 기원전 57년. 현재의 경주를 포함한 영남 일대에 하나의 고대왕국이 형성된다.
훗날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해 삼한을 통합하고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사라진 935년까지 ‘황금의 제국’ 또는, ‘빛나는 불교왕국’으로 한국사에 이름을 남긴 신라.
그 신라의 첫 번째 왕으로 기록된 이는 박혁거세.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설화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박혁거세와 때놓을 수 없는 ‘설화 속 인물’이 바로 선도산 성모다.
‘삼국사기’ 등 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들에 의하면 선도산 성모는 선도성모(仙桃聖母), 서술성모(西述聖母) 등으로도 불렸다. 한국 신화에서는 선도산의 성모로, ‘삼국유사’에선 신라의 시조 혁거세 거서간(=박혁거세)의 생모로 지목된 여성. 사소부인(娑蘇夫人), 서술산 성모 역시 선도산 성모를 칭한 다른 이름으로 추측된다.
포항공대 인문사회학부 윤혜신의 논문 ‘서술산 여신 신화와 선도산 여신 신화의 서사 윤곽과 구비문학적 면모’는 이 여성의 삶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다. 아래 그 내용을 인용한다.
“서술산에 여신이 있었다. 서술산 여신은 솔개를 따라 산에 이르렀고 이곳을 집으로 삼았다. 서술산 여신이 박혁거세를 낳았다. 서술산 여신이 계룡으로 현신하여 알영을 낳았다. 선녀들에게 비단을 짜게 해 붉은색으로 물들여 조복을 만들었다. 그걸 남편에게 주니 나라 사람들이 이로 인해 신이한 영험을 알았다. 서술산 여신은 나라를 지켰고, 신령한 이적(異跡·신비롭고 기이한 일)을 많이 행했다. 서술산 여신은 나라가 생긴 이래로 나랏제사를 받았다. 제54대 경명왕의 매를 여신이 찾아주었다. 서술산 여신은 안흥사의 불전을 수리하도록 도왔다.…(후략)”
자그마치 1000년 가까이 지속되며 사회시스템·문화양식·예술 등 다양한 측면에서 뒤를 이은 고려왕조와 조선왕조에 영향을 미친 신라였기에 그 시작에 관한 궁금증과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노력이 오랜 시간 지속됐다.
오늘날도 관련된 연구서와 학술논문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 과정 가운데 앞서 말한 윤혜신의 논문은 선도산 성모를 ‘성스러운 처녀’로 설명한다. 이런 대목이다.
“고대의 여신에게 처녀성이라는 용어는 생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자질, 주관적 상태, 심리적인 태도에 관련돼 있는 정신적 자질로 남성과 독립적으로 자기 자신을 유지한다. 남성에 의존적이지 않은 자기 자신의 질서를 유지하는 여신은 남성 위주의 질서로 재편되기 전의 사회에서 발견된다.”
몇몇 사람들은 ‘박혁거세는 알에서 나왔다는데, 그렇다면 선도산 성모가 알을 낳은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진다. 거기엔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선도산 성모의 이야기는 사실의 잣대가 아닌 고대 설화의 특성인 상징과 은유를 바탕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