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기후 괴물 앞에 처참히 무너진 ‘K-방재’
경북 산불 현장에서 1조 8000억원의 복구 예산보다 간절했던 것은 ‘물 한 바가지’와 ‘일원화된 지휘’였다. 68개 조항의 산불특별법은 산림투자선도지구 지정 및 인허가 의제 등 지역 재건 사업에는 촘촘한 그물망을 짰지만, 정작 화마(火魔)와 맞섰던 대원들의 안전 장비 보강이나 꼬인 통제 체계 개선안은 담아내지 못했다. 본지는 지상·도로·공중에서 법보다 앞서 몸을 던진 베테랑 3인의 목소리를 통해 현장 방재 시스템의 실상을 정밀하게 짚어본다.
◇ “800ℓ 진화차, 불길 앞에선 도망 나오기 바빴다”
지난 17일 포항남부소방서에서 만난 황병률(52) 현장대응팀장은 당시 의성, 영양, 울진 현장을 7일간 돌며 사투를 벌였다.
황 팀장은 “도착 직후 목격한 연기는 의성 읍내 전체를 덮어 구역 구별조차 불가능한 수준이었다”며 “좁은 산길을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소방서 산불 진화차의 물 용량은 고작 800ℓ인데 바람을 탄 화염이 사람 주먹처럼 확 덮치면 우리가 가진 수량으론 감당이 안 돼 차를 빼고 대피하기 바빴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인 ‘지중화(地中火)’를 경고했다. 황 팀장은 “표면은 꺼진 듯해도 삽으로 파보면 낙엽 아래 화기가 살아 움직이는 현상이 심각했다”며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끌 수 없는 불이라는 무력감이 들었다. 기상 조건이 안 맞으면 어떤 장비도 무용지물”이라고 토로했다.
지휘 체계에 대해서도 황 팀장은 “현재 산불 주도권은 산림청이, 인명 구조는 소방으로 분산돼 있어 대응 효율이 떨어진다”며 “누구든 좋으니 재난 현장의 컨트롤타워를 일원화해 효율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전술의 보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황 팀장은 “산은 타더라도 인명과 민가를 최우선으로 지키는 방향으로 전술이 보완돼야 한다”며 “산림 보호에 치중된 현재의 산불 대응 시스템은 민가 방어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고 아쉬워했다.
◇ “일반 마스크 한 장의 사투⋯부모 구하겠다는 절규 앞 딜레마”
23일 포항북부경찰서에서 만난 권도정(50) 교통관리계 팀장은 영덕으로 향하는 주요 길목인 포항시 북구 청하 삼거리에서 24시간 넘게 통제 업무를 수행했다.
권 팀장은 “가만히 서 있어도 강한 돌풍에 사람 몸이 비틀거리고 잿가루가 시야를 가린 암흑천지였다”며 “현장에서 지급 받은 마스크는 일반 마스크라 연기 한 모금에도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을 견디며 도로를 지켜야 했다”고 토로했다.
현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연속이었다. 권 팀장은 “차량 타이어에 불이 붙어 도로 위에 차를 버려둔 채 대피하는 상황이 속출했다”며 “그런 와중에 ‘집안에 어머니가 계셔서 꼭 가야 한다’고 울부짖으며 통제 구간으로 차를 밀고 들어오는 자식들 앞에서는 지시 위반을 따질 겨를도 없이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통제 구간을 막아서면 일부 주민들은 갓길로 무작정 진입하려 해 실랑이가 끊이지 않았다. 그 많은 인원을 일일이 설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며 “그렇다고 보내주자니 혹여 발생할 사고 책임은 고스란히 현장 경찰의 몫이 되는 딜레마가 반복됐다”고 전했다.
겹겹이 차단막을 쳐야 겨우 통제가 됐던 긴박한 상황이었지만, 정작 긴급 통제권의 범위나 공무원 면책 조항 같은 구체적 가이드라인은 이번 특별법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 “연기 뚫고 마주한 불의 띠⋯엇박자 공조에 피 말린 상공”
24일 울진산림항공관리소에서 만난 최근홍(56) 운항관제팀장은 당시 강릉에서 의성으로 급파됐다.
최 팀장은 “전날 산청 소집령을 받고 이동 중 의성 상황이 더 시급하다는 지시에 헬기를 돌려 ‘빽도(회군)’를 했다”며 “현장은 안동까지 연기가 밀려와 시정(視程)이 완전히 차단됐고 고도를 6000피트(약 1800m)까지 높여 숨구멍을 찾기 위해 빙글빙글 돌아야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상공에서 목격한 화마의 기세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최 팀장은 “연기가 누워 있으면 나무 사이로 ‘불의 띠’가 선명하게 보인다. 불이 바람 부는 방향으로 길을 내듯 정상을 넘은 뒤 다시 타고 내려간다”며 “이 띠를 조준해 물을 뿌리지만 침엽수는 송진 성분 탓에 한 번에 제압하지 못하면 확산 속도가 걷잡을 수 없다”고 했다.
기관 간 공조의 한계는 가장 뼈아픈 대목이었다. 최 팀장은 “산림청, 군, 경찰, 임차 헬기가 한꺼번에 몰렸으나 속도와 기동성이 달라 손발이 맞지 않았다”며 “산불 진화가 주 임무가 아닌 기종들이 대열에 섞이다 보니 앞에서 속도를 내지 못하면 뒤따르던 기체들은 공중에 줄줄이 대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처우 문제에 대해서도 최 팀장은 “조종사는 전문 임기제라 수당 체계에서 소외감이 크다. 또 헬기 대당 조종사 정원이 모자라 야간 진화 헬기가 도입돼도 운용 인력이 즉각 충원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전했다.
/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