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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탁주의 공급구역 제한이 풀리면서 날개를 달아

동해명주의 역사는 1955년 도구양조장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양조장은 읍면동 단위로 대개 하나씩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970년대 양조장 대단위화 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지역 단위로 양조장이 통합되었다. 포항의 경우 12개 동이 합쳐져 합동 양조장이 탄생했다. 이 시기 양조장 주인은 지역에서 대표적인 부자로 통했다. 1970년대만 해도 포항은 전국에서 손꼽히는 막걸리 소비 도시였다.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전국 1인당 막걸리 소비량이 38리터였는데, 포항은 105ℓ나 되었다. 그리고 서울에 비하면 10배 가까이 되었다. 아래 『매일경제』 기사를 보자. 1970년대 손꼽히는 막걸리 소비도시로 전국 1인당 소비량 38ℓ, 포항은 105ℓ나 70년 역사 이어온 ‘동해양주’가 산 증인 1992년 지역 최초 100% 쌀막걸리 출시 2000년 들어 ‘포항의 제1 양조장’ 급성장 양수길 대표 전국 최초 합동 양조장 제쳐 포항TP•포스텍 공동 개발 ‘영일만 친구’ 과메기와 함께 포항시 공동브랜드 등극 포항 쌀 최다 사용, 업계 1위 기업에 올라 2011년 양조공장 현대화… 새 도약 전기 발효탱크 술 온도 관리 자동화시스템 전환 양조 품질•생산 효율성 동시에 향상 계기 국세청에 의하면 1970년 한 해 동안 막걸리의 국내 총소비량은 122만 6800㎘로, 맥주 소비량보다 13배 이상을 앞지르고 있다. 막걸리의 1인당 평균 소비량은 38.6ℓ로, 서울은 이보다 훨씬 적은 11.5ℓ로 나타났다. 막걸리의 소비량은 지역에 따라 큰 격차를 보인다. 각 도별로 보면 경북이 52.9ℓ로 가장 높고 제주도가 7.3ℓ로 가장 낮게 나타났다. 지역별로 막걸리를 가장 많이 마신 지역은 경북 김천시로 1인당 106ℓ를 마셨고, 다음이 경북 포항으로 105ℓ를 마셨다. 가장 적게 마신 경북 안동은 3.2ℓ를 마셨다. - 「막걸리 소비 여전히 수위 맥주보다 13배 많은 22만 ㎘」, 『매일경제』 1971년 5월 3일자. 양민호 대표는 70년 역사의 동해명주 자체가 산증인이 아니겠냐고 자부했다. “포항은 복합적인 도시잖아요. 농업과 어업 그리고 공업까지 고루 갖춰진 데가 많지 않은데, 거기에 해병대도 있고요. 전국적으로 양조장이 존속되는 지역이 많지 않은 현실에서, 70년 역사의 동해양주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포항은 양조 도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1992년 포항 최초로 100% 쌀막걸리 출시 포항에서 가장 오래된 동해명주의 역사는 바로 지역 양조사가 된다. 동해명주에서 가장 오래된 막걸리는 밀막걸리다. 1965년 양곡관리법이 시행되면서 쌀로 술을 빚는 것이 금지되자 밀가루로 막걸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쌀막걸리가 우세한 지금은 밀막걸리를 포기한 양조장이 많지만, 동해명주는 꾸준히 전통을 지켜왔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밀 누룩이 아닌 쌀누룩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지금이야 쌀이든 밀이든 원하는 대로 고르면 되지만, 선호하는 막걸리를 고를 수 있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막걸리의 재료 선택은 정부의 방침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1966년 막걸리 제조에 쌀이 금지된 뒤, 1977년 대풍이 들어 일시적으로 허용되었지만 가격이 비싸고 맛이 싱거워 반응이 좋지 않았다. 당시 신문에서는 서민층에 각광을 받으며 되살아난 막걸리의 인기가 갈수록 떨어진다는 뉴스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포항세무서가 집계한 주세 징수 실적에서 나타난 쌀막걸리 출고량은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쌀막걸리가 처음 선을 보였던 1977년 12월엔 210만 리터가 출고돼 이에 부과된 주세가 1228만 원이었던 것이 지난 1월엔 162만 ℓ에 주세가 1009만 원으로 크게 줄었고, 지난달에는 117만 ℓ에 주세가 731만 원밖에 안 돼, 두 달 만에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쌀막걸리에 대한 외면은 소비성향이 높은 도시보다 농촌이 더욱 심하다. 포항주조협회에 따르면 밀가루와 옥수수 가루로 술을 빚었을 때는, 농민들이 쌀 한 되를 가지고 막걸리 3~4되를 바꾸어 마실 수 있었으나 요즘은 맛도 떨어진 데다 2~3되밖에 바꿀 수 없어 거의 소주를 즐겨 마신다는 것이다. - 「전국실태-포항」, 『동아일보』 1978년 3월 25일자. 1979년 다시 쌀이 부족해지면서 쌀막걸리 제조가 중단되었고, 1990년이 되어서야 다시 허용되었다. 당시 동해양조장은 시장 변화에 빠르게 대응했다. 1991년에 낡은 목조 양조장을 철거하고 시멘트 건물로 공장을 신축했다. 이듬해 포항 최초로 100% 쌀막걸리를 출시하며 쌀막걸리 시장에 신속하게 진입했다. 연구와 개발을 이어온 덕분에 규제가 풀리자마자 출시했고, 불티나게 팔렸다. 특히 내연산 보경사 앞 식당 거리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합동 양조장을 이긴 전국 최초의 개인 양조장 2대 양수길 대표는 양조장을 ‘도구’에서 ‘동해’로 이름을 바꾸고 면 단위를 대표하는 양조장으로 키웠다. 그랬던 양조장이 2000년 들어 포항 제1의 양조장으로 급성장한다. 정부의 ‘막걸리 공급구역 제한 해제’ 덕분이다. 막걸리의 공급구역을 제한하던 시기에는 다른 양조장과 경쟁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낙후된 주류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막걸리의 공급구역 제한제도가 폐지되었다. 양조장의 선택에 따라 전국 어디든 막걸리를 유통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전국의 양조장이 경쟁하게 되는 상황이 되자 많은 양조장이 문을 닫았지만, 동해명주는 오히려 이 시기에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다. 양민호 대표는 “구역제에 막혀 판로가 답답하던 시장이 뚫리기 시작하니 날개를 단 셈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양조장 구역제 시절에 포항에서 5위 남짓한 양조장이 자율화되자 2위에 오르더니 합동 양조장을 제치기에 이르렀다. 양 대표는 “합동 양조장을 이긴 전국 최초의 개인 양조장”이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동해명주의 성장은 도전과 연구의 결과였다. 포항테크노파크와 포항공대의 공동 연구로 개발한 ‘영일만 친구’가 그것이다. 가수 최백호가 부른 노래를 막걸리 이름으로 붙인 것으로, 막걸리와 우뭇가사리의 조합이 눈길을 끌었다. 포항 과메기가 전국 브랜드가 되고 겨울 술안주로 각광받으며 포항시 공동 브랜드가 되었다. 100퍼센트 포항 쌀로 만들었다는 점도 주목을 끌었다. 이로써 동해명주는 전국에서 포항 쌀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기업으로 등극했고, 포항 시장에서 업계 1위로 올랐다. ‘영일만 친구’는 여전히 동해명주의 효자 품목으로 “전국의 민관 협업으로 만들어진 막걸리 중 가장 성공적이고 오래 지속된 막걸리”로 평가받는다. 발효실과 숙성실을 원격으로 관리 ‘영일만 친구’의 선전은 그즈음 불어닥친 막걸리 열풍과도 맞아떨어졌다. 2008년부터 막걸리는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당시 금융 위기로 저렴한 술이 소비되는 풍조, 웰빙 열풍, 문화 전반의 복고풍 영향, 일본에서의 막걸리 인기 등 복합 요인이 작용했다. 동해명주는 2011년에 또 한 번 도약의 전기를 마련했다. 양조 공장의 확장과 현대화를 목적으로 2층 규모의 공장 건물을 신축했다. 2층에는 원료 처리실과 발효실이 있고, 1층은 제성실과 병입실, 창고가 자리한다. 이때 발효 탱크의 술 온도 관리를 자동화 시스템으로 바꾸었다. 발효조의 온도 센서 패널을 디지털로 바꾸고, 원격 시스템을 연동해 온도를 제어했다. 막걸리 양조 작업이 고되어 일손을 구할 수 없게 되자 고안한 방안이다. 외부에서도 휴대전화로 발효실과 숙성실을 원격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작업 관리의 부담을 줄인 것은 물론, 양조 품질과 생산 효율성을 동시에 끌어올리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글 : 배은정(소설가) / 사 진 : 김 훈(작가)

2025-10-01

여유로운 긴 연휴···안방을 책임질 영화 한 편 어때요?

추석에 개천절과 한글날이 더해져 긴 연휴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고향에 가서 부모님을 뵙고, 오랜만에 어릴 적 친구를 만나고도 며칠이 남을 것이다. 가을 날씨를 느끼며 캠핑 의자를 펴고 벽돌보다 두꺼운 고전을 도장깨기 하듯 독파해 보고, 또 폰을 열어 지나간 영화를 보며 여유를 부려봐도 좋겠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하지 않던가. □'어느 가족'(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2018년) 영화를 보고 난 후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떠올리면 가족 모두가 툇마루에 나와서 할머니처럼 오래된 집 지붕과 나무 때문에 좁은 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이다. 밖에는 불꽃놀이로 시끌시끌하다. 그런 바깥 분위기와 다르게 조용히 흘러가는, 연세 많은 할머니처럼 공기도 느려진 어느 가족. 아이들이 불꽃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안 보이지만 소리를 보라고 한다. 그러면서 다들 보이지 않는 불꽃을 들으려 하늘을 올려다본다. 자식이 부모를 선택할 수 없지만, 나쁜 부모가 아닌 어느 가족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그게 더 강한 거 아닌가라고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피가 안 이어져서 더 좋은 점도 있다. 괜한 기대를 안 하게 된다고. 마지막으로 가족으로 합류하게 된 유리가 앞니가 빠지자 지붕 위로 던지는 장면, 우리나라 풍습과 닮았다. 언론을 통해 국내에서는 ‘들치기(만비키) 가족’이라는 제목으로 많이 알려져 있었으나 국내 개봉 명은 ‘어떤 가족’이었다가 ‘어느 가족’으로 바뀌었다. 고레에다 감독은 노부부가 사망하자 그 자녀와 자손들이 사망 처리를 하지 않고 연금을 받아 생활하다 체포된 가족의 뉴스를 보고 영화를 구상했다고 밝혔다. 한편, 방구석 1열에서는 처분하지 않은 낚싯대 때문에 검거된 좀도둑의 뉴스를 보고, 왜 낚싯대를 처분하지 않았을까? 남자 어른과 남자아이가 낚시하는 모습, 둘이 부자가 아니라면?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시나리오를 쓰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도쿄의 마트와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며 생활해 가는 생계형 도둑 쇼타, 그리고 그의 아버지 역할을 하는 오사무는 여느 때처럼 생계를 위한 물건을 훔치고 귀가한다. 이들이 사는 곳은 하츠에 할머니의 집. 고로케를 사 들고 돌아오는 길에 밖에 혼자 나와 있는 어린 여자아이를 보게 되고, 측은한 마음에 고로케를 건네주고 집에 데려온다. 아이의 이름은 유리로, 잠시 돌봐준 뒤 집으로 보내주기 위해 처음 만난 유리의 집 앞으로 돌아갔으나 안에서는 유리의 부모가 아이가 사라진 일로 심하게 싸우면서 내가 (유리를)낳고 싶어서 낳았냐는 폭언을 퍼붓고 있었고, 측은함에 다시 집으로 데려와 유리를 자식처럼 키우게 된다. 할아버지가 가게 주인인 가게에서 오빠 쇼타가 유리와 함께 물건을 훔치고 나올 때, 할아버지가 불러세우고 추궁하지 않고 오히려 과자 두 개를 손에 쥐어주며 동생에게는 도둑질하는 것 가르치지 말라고 한다. 그동안 불쌍한 쇼타의 행동을 다 알면서 내버려두는 모습은 마치 신과 같다. □'퍼팩트 데이즈'(빔 벤더스 감독, 2024년) 도쿄 시부야의 공공시설 청소부 ‘히라야마’는 매일 반복 되지만 충만한 일상을 살아간다. 오늘도 그는 카세트테이프로 올드 팝을 듣고, 아들과 저녁 먹으며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틀어놓으니 익숙한 음악이 나온다. 제목은 검색해야지만 많이 들었던 노래, 아들은 잘 모르겠단다. ‘The House of the Rising Sun‘, 'Pale Blue Eyes’,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 ‘Redondo Beach’, 'Walkin‘ Thru the Sleepy City’, '青い魚‘(푸른 물고기), ’Perfect Day’, ‘Sunny Afternoon’, ‘Brown Eyed Girl‘, ’Feeling Good’. 한 번 들어보시라. 음악 우리가 들어 익숙한 것들. 영화에 삽입하려면 다 판권 샀겠죠? 필름 카메라로 나무 사이에 비치는 햇살을 찍고, (일본어로 ‘코모레비’라고 한단다.) 딱 그때만 볼 수 있는 햇살, 그래서 영화의 주인공이 사는 지금, 지금을 말하는 영화의 주제이다. 다음은 다음일 뿐, 지금은 지금이다, 조카랑 돌림노래 하듯 말하는, 요즘 내가 느끼는 낱말이다.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을 주세요 늘 기도 한다. 지금 같은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자전거를 타고 단골 식당에 가서 술 한 잔(레몬소주?)을 마시고, 헌책방에서 산(문고판 책이 100엔이라 가면 사고 싶다. 책방 주인이 책을 다 읽고 비평가 수준인 것도 좋았다.) 소설을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늘 혼자서 대화 없는 하루, 그래도 늘 만족하는 하루다. 그러던 어느 날, 사이가 소원한 조카가 찾아오면서 그의 반복되는 일상에 작은 변화가 생긴다. 니코, 고양이를 네코라 하는데 조카 이름이 니코다. 일본어로 니코니코는 우리말로 싱글벙글 웃는 모습을 뜻한다. 해맑게 웃는 모습이라고 한다. 조카가 오면서 주인공의 첫 대사가 나온다. 웃기도 하고. 니코니코한다. 공중화장실을 일부러 여러 곳 찍은 거 같다. 독특해서 보는 맛이 있다. 화장실 변기와 벽 사이 빙고 게임을 그려놓은 누군가의 쪽지를 버리려다, 거기에 한 수 한 수 놓으며 다시 제자리에 꽂아 두는 배려. 땡큐라는 인사를 하자 윗옷 주머니에 넣는다. 좋다!! 이런 조용하고 늘 똑같은 일상 루틴이 좋다. 그러다 조카와 다카시의 빈자리, 단골집이 문을 안 열고 일상이 깨지니, 그의 얼굴에 웃음이 난다. 부잣집 도련님이 아버지랑 인생관이 안 맞아서 혼자 독고다이 하는 삶, 청소부도 전문적으로 열심히 하는 삶, 멋진 삶 같다. ‘퍼팩트 데이즈’ 좋은 영화다. 영화 내내 내 삶을 생각하게 만드니까. □'모나리자 스마일'(마이크 뉴웰 감독, 2004년) 편지 형식의 소설 ‘키다리 아저씨’의 주인공이 입학한 학교 같은 분위기의 기숙사. 새로운 물결을 받아들이는 것이 학점 따는 것과 먼 일이 되는 곳이다. 캐서린이 준비한 강의를 챗봇처럼 외워 교수의 코를 납작하게 하겠다는 학생들, 교재를 외워 오는 학생들에게 교재에 나오지 않는 추상화에 대해 강의하자 학생, 학부모, 학교와 다른 교수들까지 캐서린을 내쫓고 싶어 한다. 그 자세는 우리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때의 모습이다. 잘 아는 현재에 만족하며 새로운 지식이 일으킬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싫어도 밀려오는 물결을 막을 수 없듯,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니 새로운 물꼬를 터 준 교수, ‘모나리자 스마일’ 역할에 잘 어울리는 줄리아 로버츠의 젊은 시절의 영화이다. □'리빙:어떤 인생'(올리버 허머너스 감독, 2023년) ‘어바웃 타임’, ‘러브 엑츄얼리’에 나온 배우 빌나이가 주연했다. 그는 명품 연기자다. ‘나, 다니엘 브레이크’에서 보면 영국 공무원은 일하는 속도가 엄청 느리다. 이 영화에서도 일 안 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책상에 서류가 많이 쌓여있을수록 인정받는 사람이라고 한다니 웃프다. 주인공도 매일 같은 루틴으로 그럭저럭 살다가, 삶이 시한부 삶이 되자 일분일초를 의미 있게 살다 간다. 삶이 지루할 때 보면 좋은 영화다. /김순희 수필가

2025-10-01

‘탕’ ‘찜’으로도 먹어봐요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가 아니고, 흔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아니다. 하지만, 개복치를 한 번 맛본 사람들은 거듭해서 찾게 된다. 여타의 생선들이 구이, 조림, 찜, 어탕 등으로 만들어지듯 개복치 역시 그렇다.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개복치 묵’을 만들기 위해선 먼저 커다란 냄비가 필요하다. 여기에 물을 붓고 껍질을 벗긴 개복치를 삶아낸 후 차가운 물에 넣어 식힌다. 그러면 도토리묵이나 창포묵처럼 부들부들하고 쫄깃한 식감으로 굳어진다. 거의 무미(無味)에 가까운 개복치 묵엔 새콤달콤한 초장을 찍어 먹는 게 어울린다. 낯설고 독특한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라면 개복치의 머리나 뼈를 찜으로 만들어 먹는 걸 권한다. 의외로 연하고 부드러운 식감에 매료될 것이 분명하다. 지역에 따라선 드물게 ‘개복치 맑은탕’을 판매하는 식당도 있다. 복어 맑은탕이나 아귀 맑은탕을 만들 때와 마찬가지로 파와 마늘, 멸치와 후추, 다시마 등으로 국물을 내고, 여기에 개복치를 넣어 끓여낸다. 무, 콩나물, 미나리를 넣어 깔끔한 맛을 더한다면 전날 과음한 모주꾼의 속풀이에도 그저 그만이다. 개복치 껍질은 질기다. 그러나, 그 질긴 식감을 좋아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개복치 껍질무침’은 그래서 만들어진 또 하나의 개복치 요리다. 양념장과 여러 채소를 더해 무쳐 먹으면 좋다. 때로는 ‘개복치 회’를 찾는 미식가들이 있는데, 이건 단단한 개복치의 살을 오징어 숙회처럼 익혀서 먹는 게 일반적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9-30

이게 ‘물고기 내장’을 구운 거라고?

아래 기사는 본지 홍성식 기자가 한국기자협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연재하고 있는 ‘역사와 스토리가 있는 영남 음식’을 일부 수정·보완한 것이다…/편집자 주 지나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물어댔으면 저런 궁여지책을 찾아냈을까? ‘이 물고기의 이름은 개복치입니다’. 경상북도 포항 죽도시장을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붉은 글씨의 푯말이다. 1톤 트럭에 겨우 1~2마리만을 실을 수 있는 거대한 회색빛 물고기가 모로 누운 것도 장관이지만, 막부시대 사무라이가 사용한 일본도보다 더 큰 칼로 개복치를 해체하는 모습은 어디서도 쉽게 보기 힘든 흥미로운 구경거리다. 장터를 찾은 관광객들이 궁금해 하고, 신기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한국·일본·대만 등지서만 식용 가능 껍질 삶아 굳혀 만든 ‘묵’ 형태가 일반적 대창구이·수육으로도 색다르게 즐겨 원조 포항에서도 귀한 음식으로 대접 자, 그럼 개복치는 어떤 물고기일까? 기자는 생물학자가 아니기에 백과사전의 설명을 짤막하게 요약한다. 다음과 같다. ‘학명은 몰라몰라(Mola mola). 길이는 2~4m, 무게가 평균 1톤에 이르는 물고기다. 최대 2000kg까지 나가는 경우도 있다. 몸은 타원형으로 옆으로 납작하다. 눈, 입, 아가미구멍이 작다. 움직임이 거의 없으며, 피부는 두껍고 무두질한 가죽 형태다. 온대성 어류로 바다 중층에서 활동하지만, 맑고 파도가 없는 날엔 수면 위로 등지느러미를 보이며 헤엄치기도 한다. 무리를 짓지 않는 것도 특성이다. 주된 먹이는 해파리 따위. 몸길이가 60cm 이상이 되면 수컷은 주둥이가 튀어나오고, 암컷은 수직형이 된다. 수명은 약 20년. 살은 희고 연하며 맛은 담백하다’. 우선 ‘몰라몰라’란 학명이 재밌다. 라틴어로는 맷돌을 의미한단다. 매일매일 “저 물고기 이름이 뭐예요?” “우와 크다. 저건 무슨 생선인가요?”라고 묻는 구경꾼들에게 시달리는 개복치 해체 전문가가 들려주고 싶은 대답도 실상은 “몰라몰라~ 나도 몰라~”가 아닐지. 같은 말을 하루에 10번, 100번 반복한다는 건 고역이 분명하니까. 지구 위에서 개복치를 먹는 나라는 한국, 일본, 대만 정도가 거의 전부다. 유럽은 아예 ‘식용금지’ 딱지를 붙였다. 먹기 위해 사고파는 건 불법이라고 한다. 개복치는 여러 가지 요리로 만들어질 수 있는 식재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껍질을 삶아 흐물흐물해진 걸 굳혀 만든 ‘묵’ 형태의 개복치 요리만을 먹어봤을 터. 그걸 맛본 이들 중 열에 아홉은 입을 모아 말한다. “도토리묵처럼 씁쓸하지만 깊은 맛이 나는 것도 아니고, 메밀묵처럼 혀에 감기는 감칠맛도 없네. 쇠 젓가락으로 잘 잡히지도 않는, 아무 맛도 안 나는 이걸 왜 먹지?” 기자 역시 그랬다. 1990년대 후반 청년시절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개복치 묵’을 처음 먹었을 땐 “이게 뭐지? 보드카도 아닌 게 무향무취군.” 이런 혼잣말을 한 후 초장을 듬뿍 묻혀 소주와 함께 어거지로 삼켰던 기억이 있다. 맛이 없었다는 이야기. 그런데, 반전이 찾아왔다.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에야. 2015년 서울에서 포항으로 집을 옮겼다. 포항은 다양한 형태로 개복치를 조리하는 도시다. ‘개복치 묵’은 상갓집과 결혼 피로연장에 곧잘 등장하는 인기 메뉴. 자꾸 먹다보니 밋밋한 그것이 혀끝으로 미세하게 전달하는 ‘독특한 맛’을 시나브로 알게 됐다. 그리고 하나 더. 우거(寓居) 지척에 늙은 어머니와 50대 아들이 운영하는 식당이 하나 있다. 거기선 ‘개복치 대창구이’와 ‘개복치 수육’을 판다. 개복치를 상식(常食)하다시피 하는 포항에서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음식점이다. 기자는 음식 먹는 것에 터부가 거의 없다. 그래서다. 소, 돼지, 양, 닭은 물론 개의 내장도 먹어봤다. 그럼에도 ‘개복치 내장’의 식감과 향은 필설로는 형용하기 힘든 ‘특별함’이 담겨있다. 요즘 애들이 하는 말로 “안 먹어봤으면 말을 하지마세요”다. 그게 살인지, 껍질 아래 피하지방인지, 내장의 일부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개복치 수육’ 또한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운 ‘신묘한’ 맛이다. 이렇게 쓰고 나면 “그걸 파는 식당이 어디죠?”라고 묻는 이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쉬운 대로 사진은 보여줄 수 있으나 포항 개복치 요리점 옥호를 알려주진 않겠다. 왜냐? 앞으로도 혼자만 다니고 싶으니까. 북적거리는 식당 앞에서 줄을 서기엔 너무 나이를 먹었으니. 아, 궁여지책으로 이렇게 답하면 되겠다. “몰라~몰라.” 앞서도 말했지만, 몰라몰라는 개복치의 학명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9-30

건강·맛·영양·듬뿍 ‘영주 농특산물’ 한가위 선물로 딱이네!

청정지역 영주시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농산물과 이를 가공한 식품들이 소비자들로부터 신뢰받으며 성장하고 있다. 농산물은 생산 과정에서 자연 환경적 요소 등이 중요하지만 이를 키우고 가꾸는 농심 또한 큰 몫을 한다. 영주시에서 생산되는 농특산물은 환경적 요소에 농심이 더해져 우수 생산물이 생산되는 곳이다. 500년 역사 풍기인삼 약효 탁월 소백산맥 선물 영주사과 당도 ↑ 거세 우량소 사육 한우, 육질 으뜸 아토피•알러지 피부에 좋은 인견 국내산 고구마 활용한 ‘고구마빵’ 영주 産 찹쌀 원료 도너츠도 인기 영주시 농특산물이 소비자들로부터 신뢰도를 높여나가는 것은 농가소득과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영주시의 특화된 농업정책과 이를 바탕으로 현장에서 농가들의 기술 접목, 우수제품 생산을 위한 관계기관 및 작목반들의 연구와 노력의 성과가 모인 결과다. 특히 1차 산업에서부터 6차 산업에 이르기까지 생산된 제품에 대해 국내외 판로 확보와 소비자 신뢰도가 소비로 이어지기까지 유통 관련 지원업무가 적극 뒷받침된 것도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 영주시에서 생산되는 농특산물 중 소비자들로부터 인기몰이를 하는 품목은 풍기인삼, 영주사과, 영주한우, 영주기능성 쌀, 풍기 인견, 단산 포도, 순흥 기지떡, 고구마 빵, 정 도너츠, 소백산 오정주, 벌꿀, 순흥 복숭아, 영주 계란, 부각, 한과 등과 이를 활용한 다양한 가공식품이 있다. □ 풍기 인삼 국내 최초 재배삼의 시배지인 영주 풍기 지역은 500여년의 재배인삼 역사를 통해 품질이 우수한 인삼을 생산하고 있다. 소백기슭의 풍부한 유기물과 대륙성 한랭기후와 배수가 잘되는 사질양토로서 인삼이 생육하기 좋은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어 육질이 단단하며 유효 사포닌 함량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풍기인삼의 특성을 살린 인삼가공제품은 20여종으로 전국에 유통되고 있다. 풍기인삼의 특징은 육질이 탄탄하여 중량이 무겁고 약효가 뛰어나고 같은 분량을 달여도 다른 인삼보다 훨씬 진하며 약탕기에 끊여 재탕, 삼탕을 해도 물렁하게 풀어지지 않는다. 피로를 빨리 회복하고 식욕을 돋구어 주고 적혈구 증가 등 신진대사를 원활히 해준다. 인삼의 효능은 많은 연구결과 장기적 복용 시 면역력을 높여 체내에서 병 발생에 대한 위험도를 감소시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 의학적 효능은 당뇨병, 암, 동맥경화 및 고혈압, 빈혈, 노화방지, 피로 및 스트레스 해소, 한방적 효능으로 신체허약 개선, 강장효과, 간기능강화, 체력증진 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삼 가공식품은 절편삼, 홍삼절편삼, 홍삼차, 홍삼정과, 홍삼정, 홍삼타브렛, 홍삼액, 홍삼분말, 인삼분말, 홍삼정, 홍삼캡슐, 황금홍삼비누, 홍삼벌꿀비누, 홍삼우유비누, 홍삼제리, 홍삼캔디 등이 있다. 문의 풍기인삼공사영농조합법인 054)638-2304 풍기인삼협동조합 054)636-2714 □ 영주사과 영주시는 전국의 사과 생산 중 14.5%를 차지하는 제1의 사과 주산지로서 백두대간의 주맥인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분기하는 지역의 소백산 남쪽에 위치한 산지과원에서 생산돼 풍부한 일조량과 깨끗한 공기,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 덕택에 맛과 향이 뛰어나며 성숙기 일교차가 커 당도가 높다. 쓰가루 품종은 품질의 우수성이 입증돼 농산물 도매시장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고 소비자들의 선호도가 높은 품종이다. 영주사과는 포장단위를 5kg, 10kg와 소비자들의 다양한 구매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봉지 사과를 출시하는 등 소비 다변화에 적극 대응하고 저장시설의 현대화로 연중 질 좋은 사과를 출하하고 있다. 문의 영주농협공판장 054)636-8594 풍기농협공판장 054)636-3209 □ 영주한우 천혜의 환경을 자랑하는 소백산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에서 사육된 영주한우는 개량된 암소에 1등급 정액으로 인공 수정해 생산된 우량 숫송아지를 5-6개월에 거세하고 한우고급육 표준사양관리프로그램에 의거 사육하며 비육 후기에는 영주시와 건국대학교 축산대학 정태영 교수팀이 협력해 1996년부터 1997년 2년에 걸쳐 개발한 아마종실을 첨가한 특수사료 급여와 초음파 육질 진단을 해 출하적기를 판단, 고품질의 육질만을 생산·판매하고 있다. 영주한우는 부루세라병 등의 악성가축전염병을 완전차단하고 축산물의 위생,안정성에 대한 소비자 신뢰 확보를 위해 사육·도축·가공·판매에 이르기까지 정보를 기록·관리하는 쇠고기이력추적시스템을 2006년부터 시범실시해 소비자들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안전한 축산물을 생산하고 있다. 문의 영주축협유통센터, 054)630-6710, 하나로마트 630-6740 횡재먹거리 한우 054)638-0094 □ 풍기인견·고구마빵·찹쌀 도너츠 이 밖에도 식물성 자연섬유로 피부가 여린 갓난아기, 알레르기성 피부, 아토피성 피부 등 피부가 약한 분들에게 좋은 풍기인견과 전국 최초로 지역에서 생산된 순수 국내산 고구마를 활용해 만든 고구마빵, 영주지역에서 생산된 국내산 찹쌀을 주원료로 사용하는 찹쌀 도너츠 등이 있다. □ 단산포도·순흥복숭아 계절 과일로는 맛과 향이 뛰어나고 당도가 높은 순흥복숭아와 단산 포도가 인기다. 특히 순흥복숭아는 국내 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인기가 높아 동남아 지역 7, 8개국에서 매년 수입하고 있다. 영주시는 추석을 맞아 농특산물 쇼핑몰 영주장날에서 9월 한 달간 추석맞이 할인전을 진행한다. 이번 할인 기간에는 축산류와 양곡류는 20%, 그 외 품목은 30%까지 할인하고 예산 소진시 행사가 조기 종료 될수 있다. 이번 행사에는 믿을 수 있는 고품질 제품을 생산하는 130여개 농가·업체가 입점해 3000여 개 품목 제품을 판매 중이다. /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

2025-09-29

전국에서 파도소리와 가장 가까운 양조장

포항 도심에서 동해안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탁 트인 바다 마을이 나타난다. 영일만의 넓은 품에 안긴 포항시 동해면 도구리. 이곳에 70년을 이어온 양조장이 자리한다. 연오랑세오녀의 설화가 깃든 땅, 근대 한의학의 한 축을 이룬 석곡 이규준(1855∼1923)의 정신이 깃든 곳에 터를 다진 동해명주다. 손님을 맞으러 나온 양민호 대표는 유서 깊은 노포의 이미지와 다르게 40대의 젊은이다. 전국 수백 개의 양조장을 이끄는 이들 중에서 젊은 축에 속한다. 나이는 젊지만 다섯 살 때부터 아버지를 돕기 시작해 일반사원에서 공장장을 거쳐 대표 자리에 올랐으니 보통 내공은 아닐 터이다. 동해명주의 도로명인 일월로 51-1번지에는 건물 두 동이 있다. 70년 된 전통 양조장에 증류실을 마련해 증류주 연구를 본격화하면서 막걸리 생산은 2011년에 신축된 양조장에서 전담하고 있다. 막걸리 양조장 외벽에 설치된 조형물이 눈길을 끌었다. 술 항아리에서 잔으로 한 줄기 술이 떨어지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양 대표의 아이디어라고 했다. 미관상 고민거리이던 도시가스 배관이 취기에 올라서 보니 술 줄기로 변해있더란다. 그야말로 ‘술기운이 만든 작품’인 셈이다. 양 대표는 양조장의 핵심 시설인 발효실부터 안내했다. ‘양조장의 주방’이라 불리는 발효실은 양조장의 중심축으로 술의 성패를 좌우하기에 신성시되는 공간이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한여름 폭염주의보가 내린 날인데도 발효실 안은 서늘함이 감돌았다. 내부에는 1톤 용량의 스테인리스 탱크 35기가 자리했는데, 각각 냉각관을 통한 온도 조절 시스템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1t 탱크에서 생산되는 막걸리는 무려 2000여 병이다. 전통을 잇되 자동화 설비를 꾸준히 도입한 결과다. “지금이야 세월이 좋아졌지만, 옛날에는 장독대에 선풍기를 틀어 온도를 내렸습니다. 지금처럼 무덥지 않아서 장독대 하나에 선풍기를 집중적으로 틀어주면 20도까지 떨어졌지요.” 선풍기도 없던 시절에는 지하수를 흘려 온도를 낮추고, 겨울에는 연탄불을 피워 발효 조건을 맞추었다. 양 대표는 장독이라 온도 관리가 수월했다고 말했다. 장독이 숨을 쉬면서 스스로 온도 관리를 했기 때문이다. 장독에서 술을 익히는 게 낫지 않냐고 묻자 양 대표가 손사래를 쳤다. 대형 장독대 세척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란다. 가슴 높이의 항아리를 기울여 세제 없이 오직 손힘으로만 닦아야 하는 것이다. 또 항아리를 운반하려면 핸들을 돌리듯 굴려서 움직여야 했기에 파손될 위험도 컸다. 포항 도구에 70년 이어온 ‘양조장’ 자리해 1955년 서영수 대표의 ‘도구양조장’ 시작 2대 양수길 대표 인수 ‘동해양조장’ 명명 3대 양민호 대표 다섯 살부터 아버지 도와 일반사원서 공장장 거쳐 대표 자리 올라 전국 확장 의지 담아 사명을 ‘동해명주’로 매일 새벽 마당에 술을 뿌리며 기도 올려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 막걸리 한 잔의 여운, 정성과 철학의 결실 포항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 양민호 대표가 망사로 된 뚜껑을 열어서 탱크 안을 보여주었다. 발효된 쌀알이 표면에 떠 있고, 알코올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냄새는 시큼하기보다 구수한 쪽에 가까웠다. 보글거리며 올라오는 기포는 생명력을 알리는 듯했다. 포항에서 가장 오래된 이 양조장을 찾는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 독립영화가 있었다. 감독이 직접 막걸리 제조법을 배우다 아이디어를 얻은 <막걸리가 알려줄 거야>(2024)인데, 발효 과정에서 생긴 기포를 일종의 ‘신호’로 해석한 설정이 독특했다. 영화처럼 신비한 기운을 가진 막걸리가 “톡톡……, 톡톡톡……” 로또 번호까지는 아니더라도 특별한 메시지를 전할지 모르니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반면, 양 대표는 슬쩍 보더니 냄새로 술의 상태를 판단했다. 발효실에서 40년 가까이 있다 보니 후각으로 도수와 산미 정도를 감지할 수 있단다. 도수를 0.5도 단위까지 알아낼 수 있다니 실로 대단한 능력이다. 양 대표는 마치 알코올 도수 측정기가 눈앞에 있는 듯 현재 도수는 약 14.5도이고, 하루만 더 발효시키면 출고할 수 있다고 했다. 1톤 탱크의 3분의 1은 쌀이 차지한다. 뜨거운 증기를 온몸으로 감당하며 밥을 섞어주고 뒤집어준 고두밥이다. 쌀을 찌고 나면 균사를 고두밥에 뿌려 손으로 비벼주는 작업이 이어진다. 발효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양 대표의 표현대로 “쌀에서 꽃이 핀다.” 막걸리의 모든 공정에 정성이 들어가지만, 특히나 발효만큼은 감각에 의존해야 한다. 기술만으로 맛을 낸다면 대기업 제품이 가장 맛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유다. 동해명주의 뿌리는 도구양조장 효모가 제대로 활성화되어 고두밥 분해가 충분히 이루어지는 이상적인 발효 지점은 알코올도수 15도다. 반면에 발효가 덜 된 상태, 즉 ‘미주(未酒)’ 단계에서는 구수한 맛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나무에서 충분히 숙성된 과일이 풍부한 맛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막걸리도 탱크 안에서 충분히 발효될 때 가장 좋은 맛을 낸다. 맛의 품질과 생산 수율 사이의 균형을 찾기 위한 수많은 시도 끝에 도출한 최적의 조건이다. 목표치에 도달하면 물을 섞어 도수를 약 6도 수준으로 조정한다. 물을 더해 원하는 도수를 맞추는 방식은 위스키나 맥주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막걸리는 청주를 걸러내고 남은 침전물이었지만, 지금은 원주(原酒) 그대로 사용한다. ‘대충 막 걸러낸 술’이라는 막걸리의 어원은 오늘날에는 통하지 않는다. ‘이제 막 갓 빚어낸 술’이라는 해석이 현대의 막걸리를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 동해명주의 역사는 1955년 ‘도구양조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대 서영수 대표가 운영하던 양조장을 1985년에 2대 양수길 대표가 인수해 ‘동해양조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도구리를 넘어 동해면 전역을 대표하는 양조장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의지였다. 2016년, 양민호 대표가 대를 이어 취임하면서 브랜드 이름은 ‘동해명주’가 되었다. 전국 시장으로 영역을 넓히려는 의지가 담긴 것이다. 양 대표의 부친인 고(故) 양수길 대표는 포항시 연일읍 태생이다. 그는 떡방앗간을 처분하고 도구양조장을 인수하면서 포항시 도구리로 터전을 옮겼다. 쌀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양조장을 인수했지만, 재정적 기반이 부족한 터라 가내수공업 형태로 가족 모두가 힘을 보탤 수밖에 없었다. 양민호 대표는 한옥 2층 살림집 아래 1층 양조장에서 성장했다. 아침에 문을 열면 곧장 양조장이었고,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막걸리 상자 앞에 앉아 고사리손으로 비닐 마개를 씌우며 일을 도왔다. 당시 막걸리 병마개는 밀봉을 위해 비닐을 사용했다. 비닐 100개가 한 세트였는데 하나씩 벗겨내 병에 꽂고 열로 지져 수축시키는 방식이었다. 양 대표는 스스로의 성장을 ‘병뚜껑을 닫을 수 있는 높이’로 체감했다. 처음엔 2단만 겨우 가능했지만, 어느새 3단, 4단을 할 수 있게 되면서 키가 크는 걸 알았다. 매일 새벽 마당에 술 뿌리고 기도 올려 막걸리 냄새에 취해 살았다고 회고하는 양 대표. 어린 시절에는 ‘술도가’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다. 맥주와 소주에 비해 막걸리가 상대적으로 덜 대우받던 때였다. 고등학생이 되니 그제야 친구들도 하나둘씩 양조장이 마을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몸에 누룩 냄새가 배어 빠지지 않았어요. 친구들이 놀려도 막걸리집 아들로서 자부심이 있었죠. 한 톨의 쌀이 밥이 되고 막걸리가 되는 과정이 어린 제게는 신비로웠습니다.” 고(故) 양수길 대표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평소 “남은 1등, 나는 2등”이라는 말을 자주 했으며, 이는 배려와 책임의 철학을 보여준다. 겨울이면 쪽잠으로 버티며 서너 시간마다 밤새도록 연탄불을 확인했다. 세심하게 술을 지켰던 집념은 아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시키지 않았지만 행동으로 보이셨죠. 너부터 챙기지 말고 장독을 더 들여다보고 수억의 생명체를 먼저 챙기라는 말씀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1941년생 아버지가 45세에 인수한 양조장에서 같은 나이가 된 1981년생 아들이 전통의 맛을 지키고 있다. 양민호 대표는 매일 새벽 발효실에 들어가기 전 마당에 술을 뿌리며 기도를 올린다.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술에도 정성이 깃든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양조장은 전통과 경험, 기술과 철학이 맞닿는 지점이라는 그의 말은, 양조장이 술을 빚는 공간을 넘어선다는 의미다. 한 잔의 막걸리에 담긴 오랜 여운은 이 같은 정성과 철학의 결실이다. 글 = 배은정 소설가·사진 = 김훈 작가

2025-09-28

구미시, K-방위·항공산업 글로벌 중심지 도약 가능성 확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과 중동국가간 긴장고조로 세계 곳곳에 군비경쟁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K-방산은 오늘날 국가 안보의 영역을 넘어 새로운 경제질서를 만드는 게임체인저가 되고 있다. 특히 경북·구미 방산혁신클러스터는 경남·창원 클러스터 및 대전 클러스터와 함께 한국 방위산업을 이끄는 3대 중심축의 하나로 부상하고 있다. 최근 구미컨벤션센터와 금오공과대 등 구미에서 열린 ‘2025 항공방위물류박람회(GADLEX)’와 ’제3회 제2작전사령관배 드론봇 전투경연대회’ 등 방위산업 행사는 구미를 위시한 창원·대전 등지 K-방산의 현주소와 미래 성장 잠재력을 조명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국내외 기업 94곳 204개 부스 설치 VR 등 군 기술 체험 프로그램 운영 금오공대서 열린 드론봇 전투 관심 가공할 파괴력에 ‘게임 체인저’ 실감 市, 8개 기업 5841억 투자유치 성과 □ 2025 항공방위물류박람회(GADLEX) 지난 24일부터 26일까지 3일간 구미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항공방위물류박람회는 세계적 방산업체로 발돋움하고 있는 한화시스템과 LIG 넥스원 등 국내외 94개 기업·기관이 참여해 204개 부스를 운영하며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박람회에는 △10개 해외기업이 참여하는 절충교역 연계 수출상담회 △방위산업공제조합·방산물자교역지원센터·한국산업기술시험원이 진행하는 정부지원 사업 1:1 컨설팅 △대구경북공항 물류산업 육성 정책토론회, GDIP 포럼, UAM·드론방호돔 세미나, 구미시 투자설명회, 기술교류회, 2025국제드론산업포럼 등 각종 포럼과 세미나가 마련돼 산업계·학계·기업 간 협력과 교류가 활발히 이뤄졌다. 올해 처음 선보이는 ‘청년·대학(원)생 인재채용 상담 및 설명회’는 청년층에 취업 기회와 진로 탐색의 장을 제공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HD현대중공업, ㈜대한항공, 한화시스템, LIG넥스원, 퍼스텍, 위드포스, 한국우주항공산업(KAI), 한국항공서비스(KAEMS), 모아소프트, 넥스트에어로스페이스 등 국내 유수의 항공·방위산업 기업들이 참여해 현장에서 대학(원)생과 직접 소통하며 미래 인력 확보와 우수 인재 발굴에 나섰다. 또 박람회 기간동안 △안티드론건 재밍훈련 시뮬레이터 △헬기 조종 VR 시뮬레이터 등 다양한 군·항공 분야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돼 참관객들이 직접 최신 기술을 경험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와함께 구미시는 한국방위산업진흥회·경상북도와 방위산업 육성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세 기관은 △방산기업 교육 지원을 통한 전문인력 양성 △방위산업 분야 협력 및 공동교육·연구·정보교류 △방위산업 수출진흥 및 국제협력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해 구미 방산기업의 경쟁력 강화와 지역 방위산업 발전을 이끌 계획이다. □ 가공할 드론봇의 운영 시험무대, ‘드론봇 전투경연대회’ 금오공대에서 진행되는‘제3회 2작전사령관배 드론봇 전투경연대회’는 모두 7개 종목으로 나뉘어 ‘군사적 활용’분야와 ‘스포츠 참여형’ 분야로 운영됐다. 군사적 활용 분야는 드론의 군사적 활용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감시정찰, 폭탄 투하, 기체창작, 로봇 챌린지 총 4개 종목으로 진행되고 스포츠 참여형 분야는 드론축구, 드론 레이싱, 드론 배틀 3개 종목이 개최됐다. 이 대회는 △작전사 AI기반 유·무인 복합전투체계 구축을 위한 기반 조성 △드론봇 운용 고등 기술 숙달 및 전투발전 소요 창출과 대학의 첨단과학기술 연구분야 중 군내 활용 가능한 분야를 접목시키고 △민·관·군·산·학·연의 협력을 통해 첨단과학기술을 활용한 도시지역 작전수행 체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마련됐다. 시민 체험 프로그램으로는 수리온 헬기전시 및 탑승, 항공·드론 시뮬레이터, 로봇 제작, 3D프린팅, 팝드론 배틀, 드론 조종, 레이저 각인, 모의사격 체험 등이 선보였고 군악연주, 의장대 시범, 버스킹 공연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도 선보였다. 드론봇 대회 운영관계자는 “드론봇은 수십만원 또는 수천만원의 제작비만으로도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에 이르는 전차 군함 항공기를 파괴하는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다”며 “드론봇의 뛰어난 성능은 최근 러·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입증된바 있어 국제 무기시장에서 주요 트랜드로 자리잡고 있다”고 말했다. □ 삼양컴텍 등 8개기업 5841억원 방위산업 투자유치 앞장서 온 구미시 구미 방산혁신 클러스터는 세계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반도체·반도체·통신 등 IT 기술을 방산 장비및 무기에 접목하는 핵심방산기술 개발에 앞장서고 있다. 특히 AI(인공지능)가 조종사와 함께 전투기를 조종하고 로봇 병사가 인간 병사를 지원하는 ‘유무인 복합전투체계’ 분야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 구미에는 지난해 세계 100대 방산기업에 진입한 한화그룹(24위)의 일원인 한화시스템과 LIG 넥스원(76위) 등 방산전자 대표 기업과 130여개 중소기업이 방산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LIG 넥스원은 중거리 지대공 유도무기인 천궁과 중거리 대전차 유도무기 현궁, 함대공 유도무기 해궁등 유도무기에 특화된 방산기업이다. 또 한화시스템은 군위성통신 및 전술정보통신 체계구축과 30mm 차륜형 대공포로 세계방산시장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이밖에 K2 전차 특수장갑 생산업체인 삼양컴텍, 소형전자전장비와 함정용 방향탐지장치 전문업체인 빅텍, 유도무기 구동장치를 만드는 엘씨텍 등 중소기업들이 LIG넥스원과 한화시스템 등 대기업과 협력체계를 가동중이다. 2026년 2월 구미 공단동에 준공예정인 ‘첨단방위산업진흥센터’는 260억원의 사업비 투입으로 무기 및 방산장비개발부터 양산, 운용까지 방위산업 전 주기에 걸친 통합 시험 인증 시스템 서비스를 중소·벤처기업에 제공할 예정이다. 또 지난 8월 낙동강 수상레포츠 체험센터 인근에 완공된 ‘무인 수상정 테스트베드’는 계류장, 진수장 등을 갖추고 해양무인체계 기술의 실증테스트를 위한 환경시설을 완비해 해군 전력의 고도화에 디딤돌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구미시는 지난 24일 항공방위물류박람회 개막에 앞서 삼양컴텍으로 부터 239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다. 삼양컴텍은 방탄소재 분야 선도 기업으로 이번 투자를 통해 K2 전차와 K21 장갑차의 해외수출 물량 증가에 대응할 계획이다. 폴란드 튀르키에 등 해외수출을 위해 공장증설에 나선 삼양컴텍은 2026년까지 투자를 늘려 56명 가량의 신규 고용도 창출할 예정이다. 이번 투자는 지난 2022년 387억원 투자에 이은 후속 투자다. 경북도와 구미시가 부지 확보 등 기업의 애로사항을 적극적으로 해결한 것이 추가 투자를 이끌어냈다. 9월 현재 구미시는 방산분야에서 한화시스템, LIG넥스원을 포함한 8개 기업과 모두 5841억원 규모의 투자 MOU를 체결하는 성과를 올렸다. 김장호 구미시장은 “방위산업의 해외 수주는 한건 체결만으로도 수백억원 또는 수천억원의 수출효과를 낼 수 있다”며 “구미가 대한민국 방위산업과 항공산업의 중심지로 발돋움 할 수 있도록 지원역량 확대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 글·사진 류승완기자 ryusw@kbmaeil.com

2025-09-28

대서마늘 ‘씨마늘’ 성공 재배… ‘안정적 종구 보급’ 돌파구 찾았다

한국인의 ‘마늘 사랑’은 유별날 정도다. 각종 음식 관련 서적과 백과사전 등을 펼쳐보면 이런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유럽에서 마늘 소비량이 가장 높은 국가는 이탈리아다. 이 나라 사람들은 1년 동안 약 1kg의 마늘을 먹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한국은 1인당 연평균 소비량이 5kg이 넘는다. 유럽 사람들의 5배 이상을 섭취하는 것이다. 마늘의 원산지는 아프리카 이집트. 그럼에도 ‘마늘 사랑’은 이집트에서 멀고 먼 나라 한국에서 실현되고 있는 격이다. 3년 만에 우량종구 증식 성공… 170t 생산 공모농가 26곳과 협업 ‘균일한 품질’ 확보 타 지역보다 1세대 앞선 ‘주아 1세대 종구’ 가격마저 저렴… 경쟁력 강화·자급률 제고 ‘한국 마늘산업 박람회’ 우수상 수상 쾌거 요리사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한식에서의 마늘은 단순한 향신료가 아니다. 모든 요리를 망라해 그 저변에 깔리는 가장 주요한 재료”라고.“한국 요리의 시작은 마늘이고, 끝 또한 마늘”이란 말이 단순한 농담이 아니란 건 주변 식당과 평범한 가정의 주방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식품학자들은 “마늘은 혼자 지내는 독거생활인이나 편식이 심한 사람에게 유용한 식재료”라고 말한다. 마늘은 칼륨, 인, 칼슘 등의 무기질 함량이 높고, 비타민 B도 다량 함유됐기에 건강을 유지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는 것. 대중적으론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령군은 경상북도에서 영천시, 의성군에 이어 마늘 재배 면적이 3번째로 넓은 마늘 주산지다. 농업전문가들 사이에선 지리적으로 인접한 경상남도 창녕군, 합천군과 함께 전국 대서마늘 산업을 선도하는 지역으로도 인식돼 있다. 그런 현실을 감안해 고령군은 이미 오래전부터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고 단일 작물 중 연매출액이 가장 높은 것 중 하나인 마늘 산업의 활성화와 안정적인 보급과 생산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 마늘 특성 연구와 종구 구입 문제점 해결 위해 노력 그 중 대표적인 사업으로는 대서마늘 우량 종구(씨마늘) 보급사업이 손꼽힌다. 고령은 이 사업을 3년에 걸쳐 추진했다. 그렇다면 우량 종구 보급사업의 추진 배경은 무엇일까? 첫째는 마늘은 인편(쪽)을 통한 영양번식 작물이다. 그렇기에 재배 연수가 길어질수록 병해충 및 바이러스에 감염돼 종구가 퇴화하고, 이로 인해 수량 감소와 품질 저하 문제가 심각하게 발생하였다는 것.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이 필요했다. 둘째는 일부 농가에서 중국산 종구를 구입함으로써 국내 마늘 산업이 위축되고, 불량 종구로 인한 피해 사례가 빈번히 나타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도 농가 발전을 위해 선결돼야 할 문제였다. 셋째는 농가가 자체적으로 주아재배 종구를 생산하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며 번거로움이 컸다.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적이고 체계적인 도움이 필요했다는 이야기다. 넷째는 타 지역에서 들여오는 종구의 진위 여부에 대한 의문이 있었고, 매년 수억 원의 자금이 외부로 유출되고 있어 지역 경제 측면에서도 대책이 필요했다. 그뿐 아니라 농가에서 믿고 사용할 수 있는 안정적 종구 보급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 2022년부터 사업 본격화...올해 씨마늘 170t 생산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고령군농업기술센터는 2022년부터 대서마늘 ‘우량종구 증식체계 구축사업’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2023년에는 주아재배 종구 생산의 시작 단계인 주아 채취를 실시했고, 2024년에는 단구(씨마늘 전 단계) 생산을 거쳐, 올해는 최종적으로 주아 1세대 씨마늘 170t을 생산하는 성과를 이뤘다. 우량종구 증식체계 구축사업은 3년에 걸친 장기 프로젝트로 이남철 군수의 의지와 농업기술센터의 자체 역량을 결집해 성공적으로 완료했다. 하지만, 파종 및 수확 작업 등 기상 여건과 인력 수급 등의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씨마늘 생산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공개 모집된 26명의 증식 농가와 협업해 균일한 품질을 확보하는 등 민간과 지자체의 노력이 합해져 순조롭게 사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 고령군청 관계자의 설명이다. 고령군은 지난 7월 고령군농산물산지유통센터에서 ‘2025년산 주아1세대 씨마늘 수매 및 농가 보급 행사’를 통해 101명의 농가에 총 4772망의 씨마늘을 보급했으며, 거래금액은 모두 4억4989만원에 달한다. 이번에 보급한 종구는 타 지역보다 1세대 앞선 ‘주아 1세대 종구’로 가격 또한 저렴하게해 고령군 마늘 재배 농가의 경쟁력 강화와 자급률 제고에 적지 않게 기여하고 있다. □ 마늘산업 박람회서 품질의 우수성과 경쟁력 인정받아 또한 지난 8월엔 경북 영천시에서 열린 ‘2025년 제1회 한국 마늘 산업 박람회’에 고령군농업기술센터가 실증시험포장에서 생산된 조직배양 마늘을 출품했다. 이 마늘은 품종별 품질 평가회에서 ‘대서종 부문 우수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는 고령군 마늘의 우수성을 대외적으로 인정받는 성과인 동시에 품질 경쟁력을 증명하는 사례로 기록됐다. 마늘은 건강에 좋은 식품 가운데 하나다. 항암 효과가 있고, 전립선 건강에도 좋으며, 피부의 노화도 막아준다고 알려졌다. 한의학계에서도 “마늘을 익혀 먹으면 음기가 강해진다”는 말이 전한다. 마늘에 함유된 알리신은 피로 회복과 스테미너 증강에도 도움을 준다고 한다. 현재 고령군은 기존 주아재배 종구보다 품질이 뛰어난 조직배양 종구 생산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실증시험포장 내 조직배양 종구 생산 및 증식 시설을 갖춘 ‘대서마늘 우량종구 증식보급센터’ 구축을 위해 국도비 공모사업도 추진 중이다. 2027년부터 연간 10t 규모의 조직배양 종구를 농가에 보급하는 것을 목표로 대서마늘 산업의 고도화와 경쟁력 강화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남철 고령군수는 “마늘 주산지인 고령의 명성에 걸맞게 사업 규모와 품질을 지속적으로 높여 나가겠다”며 “마늘 뿐 아니라 고령군 주요 농산물의 품질 향상을 위해 노력을 멈추지 않겠다고”고 약속했다. /전병휴 기자 kr5835@kbmaeil.com

2025-09-25

장인의 자존심, 열쇠점을 지키는 힘

열쇠업이 전성기였던 1990년대, 포항에는 열쇠집이 70여 곳 있었다. 지금은 열쇠를 복사하려면 수소문해야 할 정도로 줄었다. 그러나 죽도열쇠 김건식 대표는 ‘사라질 산업’이라는 말에 고개를 젓는다. “열쇠 제작은 기술입니다. 로봇은 사람의 손 기술을 이기지 못해요. 도어록이 보편화되어도 열쇠는 여전히 필요합니다.” 그의 출장 범위는 아파트와 상가를 넘어 은행, 선박, 군부대, 교도소까지 다양하다. 해병대 출장도 예사다. “군대도 문이 있고 열쇠가 있거든요.” 문이 있는 곳이라면 예외가 없다는 말이다. 전성기던 1990년도 중반 부도 겪었지만 기술 하나 믿고 가업 지켜 ‘완벽하지 않으면 돈을 받지 않는다’ 신념으로 날마다 새 기술 정진 직접 개발한 디지털 도어록 전국 100여 군데 대리점서 1만개 판매 사양사업이라는 말에 고개 저으며 오늘도 ‘죽도 열쇠’ 역사 써내려가 열쇠 기술자의 하루는 종종 긴박한 구조 현장이 된다. 한여름 차 안에 갇힌 아이를 구한 적도 있고, 현관을 따고 들어가 쓰러진 노인의 목숨을 살린 적도 있다. 119구급대가 활동하지 않던 시절이라 급한 상황에서는 열쇠공이 곧 구조대였다. 반대로 어두운 순간을 마주하기도 했다. 경찰과 함께 들어간 집에서 자살 현장을 목격하거나, 부부싸움에 휘말려 곤욕을 치른 적도 있다. “예전엔 손님이 발을 동동 구르면 무조건 달려갔어요. 그런데 지금은 먼저 상황을 살펴요. 자칫하면 큰일 납니다.” 곤경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영웅이 되기도 하지만 자칫 나쁜 일에 휩쓸리기도 한다. 김 대표는 ‘문을 따는 기술’이 곧 ‘신뢰의 문제’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요즘은 집주인이라 주장하는 사람이라도 경찰을 대동하지 않으면 거절한다. 대화해보면 금방 답이 나온단다. 구체적인 내용은 ‘영업 비밀’이라면서, “은연중에 실수하도록 유도하면, 본인 집인지 아닌지는 몇 마디만 해봐도 나온다”고 했다. 오래 일하다 보니 사람 마음을 읽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부도 맞고 큰 시련 겪어 김건식 대표의 성실함은 주위에서 정평이 나 있다. 성실함은 신뢰로 이어졌다. 출장 중에 만난 장모가 딸을 소개할 정도였다. “장모님이 제가 못생겼어도 편하게 해줄 거라며 아내를 설득했죠.” 지금도 장모는 든든한 사위 편이다. 아내 역시 든든한 지원군이다. 집밥을 먹어야 힘이 난다는 그를 위해 사무실 한쪽에 마련된 부엌에서 매 끼니를 정성껏 챙긴다. 김 대표의 길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남의 문을 척척 열어주는 열쇠 기술자이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먹통인 시절도 있었다. 1990년도 중반, 한창 잘나가던 사업이 부도를 맞았다. 열쇠 도매상을 비롯해 주차장, 세차장, 식당 등 이곳저곳으로 확장해나가던 사업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사람을 지나치게 믿은 탓에 보증 문제가 터진 것이다. 그때 이미 아버지와 방송에 출연하며 이름이 알려져 도망가기도 숨기도 싫었다. 빚더미에 앉은 그는 좋아하던 술을 끊고 오직 빚 갚는 데 매달렸다. “30억 빚을 지고 나니 돈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돈은 잃었지만 인생 공부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몸도 마음도 지쳐 건강마저 무너졌지만, 그는 기술 하나를 믿고 다시 일어섰다. “어려운 시기가 저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어요. 기술이 있는데 왜 못 살아, 하고 오기가 생기더군요.” 결국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결심으로 다시 열쇠 앞에 섰다. 지금 와서 하는 얘기지만, 당시 그는 어머니에게 가게를 팔아 빚을 갚자고 졸랐다. 흔들리지 않고 가게를 지킨 어머니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눈물로 버티던 어머니 덕분에 지금의 자신이 있다는 것을. 디지털 도어록 기술 연구에 매진 이후 그는 오로지 일에만 몰두했다. 그가 일을 대하는 원칙은 단순하다. ‘완벽하지 않으면 돈을 받지 않는다.’ 열쇠는 정밀 기술이기에 작은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공부하고, 새로운 장비와 기술을 익힌다. 김 대표 스스로 다른 곳보다 비싼 편이라고 털어놓았다. ‘쌓아온 기술 값’이 더해지니 당연하단다. 열쇠 일은 완벽하지 않으면 돈을 벌 수 없는 직종이기 때문이다. 정밀도를 높이고 오차를 줄이려는 노력은 지금도 계속된다. 디지털이 보편화된 오늘날, 열쇠업은 사양산업일까. 많은 종사자가 열쇠업이 사양사업이라며 떠났지만 김 대표는 오히려 디지털 도어록 기술 연구에 매진했다. 실제로 수요가 많아지면서 설치나 수리 문의가 증가했다. 문제가 생기면 제작사보다 설치 기사를 찾는 손님이 많았다. 김 대표는 애초에 고장이 안 나게 만들면 안 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가 아예 ‘열쇠 기술자가 만든 도어록’을 직접 개발했다. 회원들과 힘을 합쳐 브랜드를 만들고, 3년간 무상 교환을 내세웠다. 현재 전국 100여 군데 대리점을 통해 판매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1만여 개를 판매했지만 AS 요청은 극히 적어 품질이 뛰어나다고 자부했다. 장인의 자존심을 건 결과다. 김 대표는 디지털 도어록도 완벽하지 않다고 말한다. 여전히 보조 열쇠와 병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도어록은 사실 보안 수준이 열쇠보다 약해요. 드릴 하나면 뚫리죠.” 그러니 요즘은 디지털 도어록이 마모되면 교체하고, 보조 열쇠를 덧붙이는 경우가 늘고 있다. 열쇠 자체가 복잡하게 진화 중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열쇠 전문가인 김 대표는 도어록과 자물쇠 중 무엇을 선호할까? 그는 도어록을 쓰지만 무심결에 문을 열어놓고 다닐 때가 많다며 웃는다. 예전에는 낮에는 열어두고 밤에만 문을 걸어 잠갔다. 열쇠를 우체통이나 담장 위에 올려두는 일도 흔했다.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는 문을 잠그지 않고 사는 문화였다. 자물쇠 추가 설치를 원하는 고객을 만나도 불필요한 곳이 더러 있단다. 불안하니까 설치해달라고 하지만 사실 시대가 달라졌다. CCTV가 보편화되면서 20년 전과 비교해 도둑 범죄가 확연히 줄었기 때문이다. 열쇠업에 타격을 준 건 디지털 도어록이 아니라 엄밀히 말해 CCTV일지 모른다. “세상 모든 자물쇠를 열어야 직성 풀려” 생각해보면 열쇠업은 사람들의 불안이 만들어낸 직종이다. 열쇠 기술자의 일은 결국 그 불안을 덜어주고 편안히 잠들 수 있게 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그의 출퇴근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 출근은 아침 8시, 퇴근은 대중없다. 열쇠 하는 사람 두 명이 와서 못 따고 헤매는 걸 김 대표가 짧은 시간 안에 해결한 적이 있다. 그럴 때는 보람이 크다. 하루 수십 건의 출장, 밤까지 이어지는 일과. 몸이 고되지 않을까 싶지만, 그는 말한다. “노는 게 더 아픕니다. 옛 어른들 말씀 하나 틀린 거 없어요.” 그에게는 취미가 따로 없다. 젊어서는 당구나 골프를 즐기기도 했지만, 지금은 기계를 만지며 시간을 보낸다. 다행히 딸과 사위가 퇴직하고 가업을 잇겠다고 약속했다. 구순이 넘은 노모도 여전히 정정하고, 10년 넘게 함께하는 제자가 있어서 든든하다. 죽도열쇠가 지켜온 장인정신은 어느덧 76년이 넘어섰다. 벽면에 걸린 수천 개의 열쇠부터 최신의 각종 전자키까지 세월에 따라 자물쇠도 변해왔다. 변치 않은 것은 언제든 달려가 닫힌 문을 열어주는 열쇠공이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 모든 자물쇠를 열어야 직성이 풀린다”는 김건식 대표의 말처럼, 죽도열쇠의 역사는 지금도 힘차게 이어지고 있다. <끝> 글 : 배은정 소설가 사 진 : 김 훈 작가

2025-09-24

신라 고갯길, 천년고도 문경 하늘재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지만, 여름의 더위는 여전히 맹위를 떨치며 좀처럼 물러날 기미가 없다. 대구에서 고속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달리며, 우리는 삼국시대 신라·백제·고구려가 서로를 오가던 고갯길, 영남과 기호지방을 잇는 삼국시대 신라가 처음으로 개척한 문경 하늘재로 향했다. 그 옛날에는 봇짐을 지거나 말을 타고 넘던 길이었지만, 지금은 자동차의 바퀴가 눈 깜짝할 사이에 그 거리를 줄인다. 그러나 길을 오르는 사람의 마음은 다르지 않다. 고갯마루에 닿자, 흰 구름은 하늘 높이 솟아올라 푸른빛을 가르며 무심히 흘러가고 있다. 숲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식혀 주고, 우리는 정자에 앉아 옛사람들의 자취를 생각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하늘의 구름과 땅의 숲, 자연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는데, 인간 삶의 시스템은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포암산 베바위를 바라보며, 이 재를 넘나들던 옛사람들의 역사와 애환을 그려 보았다. 신라 아달라왕 3년 북진 위해 길 열어 한강과 낙동강 잇던 가장 이른 고갯길 사람·사상·물자와 함께 불교도 전해져 오늘날엔 배움과 치유 공간으로 발길 잘 다듬어진 숲길 나무들로 울창하며 오솔길은 굽이치는 물길처럼 이어져 “민족의 숨결과 역사가 함께 흐르던 길 우리에게 시련을 넘어설 힘 일깨워줘” 하늘재는 신라가 처음 개척한 역사의 길로 삼국의 군사들이 오르내리며 흘린 땀과 한숨이 배어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 온달 장군은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평강공주의 내조와 자신의 노력을 바탕으로 장군이 되었다. 신라와 맞서 싸우던 그는 결국 전장에서 쓰러졌지만, 그의 죽음은 나라를 되찾으려는 고구려의 간절한 뜻을 상징했다. 개인의 비극을 넘어, 국토 회복의 열망과 민족의 충정을 일깨워주는 서사로 지금까지 전해오면서 가슴을 저리게 한다. 또한 고구려 실권자 연개소문은 백제와 함께 반(反)신라 동맹을 맺고 신라를 공격했다. 이에 신라는 당나라와 손을 잡아 나당 연합군을 형성하여 여제 연합군에 맞섰다. 645년, 당 태종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연개소문은 안시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당의 침략을 막아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고구려는 결국 나당 연합군에 의해 무너진다. 온달이 빼앗긴 국토를 되찾기 위해 맞선 신라와 갈등은 한 개인의 비극으로 끝났다면, 연개소문의 대립은 국가의 흥망으로 이어져 삼국시대의 거대한 전환점을 만들었다. 신라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이 고개를 넘어 삼국통일의 뜻을 이루었으나 통일신라 말에는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망국의 한을 안고 이 길을 넘어갔다. 이렇듯 하늘재는 통일의 꿈과 망국의 설움이 교차한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아달라왕 3년, 서기 156년 북진을 위해 이 길을 열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던 가장 이른 고갯길, 사람과 사상과 물자가 오가던 통로였다. 불교 또한 이 길을 따라 전해졌다. 고구려 승려 아도(阿道)가 불법을 전할 때, 지형상 가장 그럴듯한 길목이 바로 이 하늘재였을 것이라는 학설도 있다. 고개 남쪽의 관음리와 북쪽의 미륵리라는 지명은 불심을 전하는 이름 그대로다. 관세음을 찾고 미륵을 기다리던 신앙의 기운이 고개에 서려 있다. 지금도 관음사와 포암사의 법고 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지며, 폐사 터의 기왓조각과 옛 주막터의 흙냄새가 옛 발자취를 떠올리게 한다. 신라 이차돈의 순교 이전부터 이미 이 고개에는 신심의 불씨가 조용히 피어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문경새재에 자리를 내어주었지만, 고개와 산사, 마을들은 오래된 길이 품은 위안과 인연을 오늘까지 간직하고 있다. 하늘재 고갯마루 정상에는 ‘백두대간 하늘재’라 새긴 비석이 서 있고, 그 맞은편에는 ‘계림령 유허비’가 빼곡한 글자를 품은 채 옛 역사를 증언한다. 높이 520m에 불과한 고개지만, 백두대간의 포암산과 탄항산 사이에 자리하여 한반도의 등줄기를 잇는 요지이다. 하늘과 맞닿은 듯한 이름처럼, 이 길은 초월의 상징으로 읽혔다. 지금은 명승 49호로 지정되어 그 의미를 이어가고 있다. 고개란 늘 인간의 삶을 비유한다. 높은 산이 가로막아도 그 너머로 길은 이어지고, 사람은 언젠가 그 고개를 넘는다. 그래서 ‘재’를 넘는 일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극복과 인내의 상징이며,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는 문턱이다. 이 길은 단절을 잇고,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하며, 낯선 세계와 소통하게 하는 깊은 강을 건너는 다리처럼 험준한 산을 넘는 재였다. 하늘재를 넘던 발걸음마다 고난과 희망, 슬픔과 기쁨이 함께 배어 있는 아리랑 고갯길이 되었다. 고갯길만을 줄기차게 찾아다니며 그 뜻을 음미하고 살아가는 마니아도 있고 보면 고갯길은 곧 삶의 여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늘재 숲길은 사단법인 산과 자연의 친구 우이령 사람들과 남부지방산림청 영주국유림관리소가 협약을 맺어 ‘단체의 숲’으로 관리되고 있다. 안내판에는 숲 가꾸기 체험, 휴양과 문화 체험, 산림보호 활동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소개되어 있었다. 하늘재는 옛날에는 길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배움과 치유의 공간으로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 많은 사람이 숲길을 걷고 있었다. 우리 또한 주차장에서 출발해 관음정사와 포암사를 지나 표지석까지 올랐다. 그 길은 2.9km였고, 충주 미륵리까지 이어지면 5.4km에 달했다. 잘 다듬어진 숲길은 나무들로 울창했고, 오솔길은 굽이져 흐르는 물길처럼 이어졌다. 고갯마루를 찾는 발걸음은 사람의 흐름이자 세월의 흐름처럼 느껴졌다. 숲은 쉼 없이 하늘에 물을 뿌려 더위를 식혀 주었고, 나뭇잎은 바람의 부채가 되어 에어컨과 선풍기가 따로 필요 없게 했다. 자줏빛 물봉선화는 호젓한 숲길을 지나는 이들을 반기듯 피어 있었다. 오늘은 대붕 아우와 함께 하늘재를 찾았다. 동생은 허리가 좋지 않아 오래 걷지 못했지만, 다음에 다시 와서는 마음껏 걸어 보고 싶다고 했다. 그의 말은 숲의 위안처럼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숲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보약이 숨어 있는 듯했고, 매미 소리와 풀벌레 소리는 서로 어울려 자연의 오케스트라를 이루었다. 나는 그 순간을 오래도록 가슴에 담아두고 싶어 가만히 심호흡했다. 풀잎 향은 맑았고, 흙냄새는 오래된 시간의 기억을 끌어올렸다. 몸도 마음도 최상의 상태로 정화되는 듯했다. 하늘재는 민족의 숨결이 오가던 고갯길, 역사가 흐르던 고갯길이며, 지금도 우리에게 시련을 넘어설 힘을 일깨워주는 숲길이다. 언젠가 다시 찾아, 이 길 위에 쌓인 이야기와 초월의 숨결을 더 깊이 마시고 싶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하늘재는… 하늘재 옛길은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서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로 넘어가는 경계에 있는 고개로 높이 525m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뚫린 고갯길로 삼국시대 156년대 신라의 아달라왕이 북진을 위해 개척하였다. 고구려 온돌과 연개소문은 빼앗긴 하늘재를 다시 찾기 위해 끈질긴 전쟁을 벌였으며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을 피해 몽진할 때 이 길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렇듯 교통의 요지이며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었으나 조선 태종 때 새재길이 열리면서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이전에는 계림령(鷄林領), 대원령, 지릅재 등으로 불렀으나 요즘에는 거의 모든 지도에 하늘재라 표기하고 있다. 오래된 세월만큼 길 양쪽에는 전나무 굴참나무 상수리 등 다양한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2025-09-24

‘지속가능한 건강도시’… 맞춤형 서비스로 더 든든한 지킴이

인간의 단위가 가족에서 부족으로, 다시 국가로 확대되며 전염병에 대한 대책 마련 등이 강하게 요구되며 보건 행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보건 행정은 국민이 심신의 건강을 유지함과 동시에 적극적으로 건강증진을 도모하도록 돕는 보건정책으로 구체적으로는 영유아와 성인에서 노인까지의 보건 대책, 성인병이나 전염병을 포함한 각종 질병 대책과 정신위생 대책 등을 말한다. 이러한 보건 행정을 수행하기 위해 전국의 시·군·구 단위에 설치된 행정기관이 보건소다. 보건소의 사업 또는 조직이 본격화된 것은 20세기 초반으로 일본은 1937년, 대만도 1945년부터 위생보건소를 설치해 보건 활동을 전개했다. 우리나라는 광복 이후부터 보건 산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어 6·25 전쟁 등 빈약한 국가재정으로 보건소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지 못하다 1956년 12월 ‘보건소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법률 제406호로 공포됨에 따라 전국적인 보건소 활동이 가능해졌다. 지방보건소는 인문지리적인 조건과 지역주민의 요구 등에 따라 조직과 체제가 다르게 발전돼 주로 도시형 보건소와 농촌형 보건소로 조직과 구조가 구분돼 발전돼 왔다. 응급 골드타임 사수·공공 심야약국·결식 아동들 식생활 문제부터 전문가 심리상담 까지 전 세대 아우르는 의료복지 사각 해소 노력 2023~2025년 ‘우수지자체’… 지난해 ‘치매 사업’ 등 총 9개 기관상 내년에 보건지소 원격협진 본격 가동 더 촘촘한 지역 밀착형 진료 □ 경산시보건소의 시작과 역사 경산에는 지난 1961년 1월 경산군보건소가 설치되고 2월에 남천면 보건지소가 설치되어 보건 행정의 첫발을 내디디고 1962년 4월에 자인과 와촌보건지소를, 1964년 4월에 하양·압량·진량·경산·용성·남산보건지소를 설치했다. 이후 보건 행정의 서비스를 넓히기 위해 1983년 12월 용성 육동보건진료소를 설치하고 1989년 12월 진량 대원보건진료소를 설치하기까지 10개의 보전진료소를 설치해 의료서비스 사각지대를 해결하고 있다. 1989년 1월 경산시·군이 분리되며 1991년 경산시 보건소가 설치되었다 1995년 1월 시·군이 통합되며 경안로30길 18(삼북동)로 이전했다. 2002년 12월 현재의 보건소로 이전해 여러 차례 개편을 거친 조직은 2024년 보건행정과와 건강증진과, 방문진료과, 식품의약과로 개편돼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 경산시 보건 행정의 도전 경산시는 ‘지속 가능한 건강 도시’를 목표로 감영병 예방과 치매와 만성질환 관리, 맞춤형 건강증진 서비스 등으로 시민의 삶 속에서 든든한 건강 지킴이 역할을 하고 있다. 2026년에는 원격협진과 첨단 장비를 도입해 의료 사각지대를 없애고 어르신과 임산부를 위한 예방접종을 강화한다. 보건기관 환경정비로 쾌적한 진료 환경을 구축하고 의료인력 부족으로 불편을 겪었던 7개 보건지소에 원격협진 사업을 본격적으로 가동한다. 지난 4월 도입된 화상 시스템은 진료와 처방, 복약지도가 원스톱으로 이뤄지며 의료취약지역 주민들도 안정적인 서비스를 받고 있다. 또 10개 진료소에는 지역 밀착형 진료와 건강한 생활 습관 정착을 돕는 맞춤형 교육·프로그램이 확대되고 첨단 의료 장비 도입으로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진료 환경을 마련한다. 올해부터 임신 27주 이상 36주 이내 임산부와 배우자, 손자녀를 돌보는 조부모까지 백일해를 무료 접종해 출산 친화적 환경을 조성했다. 또 65세 이상에만 지원하던 인플루엔자 무료 접종을 지난해부터 60세 이상으로 확대하기도 했다. 소아과·산부인과의 필수 의료 체계를 강화하고 응급의료 시스템을 혁신해 골든타임을 지키고 먹거리 플랫폼과 안전한 급식 관리로 시민이 안심하고 생활해 모든 세대가 웃으며 행복을 나눌 수 있는 도시에 도전한다. □ 경산시 보건 행정의 두드러진 성과 경산시는 2023년 제8기 지역 보건의료계획(2023~2026년) 수립 성과대회에서 최우수기관으로 선정된 데 이어 2024년 2차, 2025년 3차 연차별 계획에서도 우수 지자체에 이름을 올리며 시민 건강을 위해 효율적으로 정책을 추진하는 능력을 대외적으로 인정받았다. 또 감염병 예방관리와 치매 예방 사업, 만성질환 예방, 맞춤형 건강증진 사업, 비대면 건강관리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경상북도가 주관한 제53회 보건의 날 기념 ‘2025년 보건 시책사업 우수기관 평가’에서 우수상을 받으며 다시 한번 역량을 입증했다. 지난해에는 감염병 관리와 대응 부문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해 중앙정부와 경북도평가에서 2023년에 이어 연속 기관상에 ‘치매 극복 관리사업’을 비롯한 주요 보건복지 정책들도 높은 평가를 받으며 총 9개의 기관상을 받았다. □ 초고령사회 선제 대응과 출산 정책 강화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지난해 말 기준으로 20.6%를 넘기며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경산시는 예방접종 등과 더불어 어르신 건강관리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치매안심센터를 중심으로 치매 검진과 맞춤형 사례관리, 예방과 인지 강화 프로그램, 환자 쉼터 제공, 공공후견 사업 등을 연계한 치매 통합관리 서비스 체계를 구축해 어르신의 건강과 존엄성을 보장하고 있다. 또 화면형 AI 스피커와 블루투스 건강측정기를 활용해 어르신의 일상 속 건강관리를 지원하는 맞춤형 돌봄서비스도 운영 중이다. 미혼 남녀의 자연스러운 만남으로 결혼으로 이끄는 ‘경산시 솔로탈출 single, 벙글!’ 프로그램에 출산가정을 위한 정책도 확대하며 출산을 장려하고 있다. 50만 원의 산후 조리비를 100만 원으로 상향하고 실생활에 필요한 출산 축하 박스도 지원한다. 다자녀 가정을 위한 농수산물과 35세 이상 고령 산모 진료비 지원, 생애 초기 건강관리사업 등 맞춤형 돌봄 정책으로 출산가정이 안심하고 건강한 육아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이처럼 경산시의 보건 행정은 응급환자 골드타임 사수, 공공심야약국, 어린이와 사회복지시설의 식생활 문제 해결, 전문가 심리상담 등 전 세대를 아우르고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의료복지 사각지대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조현일 경산시장은 “지난 성과를 밑거름으로 한 걸음 더나가는 경산시보건소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신규사업을 발굴해 추진할 계획이다”며 “어르신·임산부 예방접종 확대, AI·IoT 돌봄과 응급·필수 의료 강화로 건강한 경산을 만들며 나아가 안전한 먹거리 관리와 출산·육아 지원 정책을 확대해 아이 낳고 키우기 좋은 도시, 모든 세대가 어울려 건강한 일상을 만드는 행복 도시 경산을 완성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심한식기자 shs1127@kbmaeil.com

2025-09-23

1800년 전부터 한국인과 더불어 살았던 소

부지런함과 우직함은 소가 가진 주요한 특성이다. 예부터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에게 “에이, 소만도 못한 놈”이라 손가락질 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한국이 농경사회이던 시절. 소는 일꾼 열 몫의 농사일을 해냈다. 그러고도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 묵묵함과 순종적인 성격 때문에 적지 않은 농민들이 소를 그저 그런 짐승이 아닌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식구로 여기기도 했다. 그렇다면 소는 언제부터 인간과 함께 살아가게 됐을까?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엔 ‘신라 눌지왕 22년에 백성에게 소를 이용해 수레를 끄는 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눌지왕 22년은 서기 438년이다. 신라, 백제와 함께 삼국시대의 한 축이었던 고구려. 그 나라 벽화에서도 바퀴 달린 수레를 끄는 소 그림이 발견됐다. 그보다 이전 시대엔 다수의 군인이 전쟁터에 나가거나, 가뭄과 홍수 등 천재지변으로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소를 제물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이러한 고문헌의 기록으로 볼 때 소는 최소 1800여 년 전부터 한국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고락(苦樂)을 함께 해왔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인간의 오랜 친구’라 불러도 무방하다는 이야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한우를 “세계에서 유일한 우리나라 고유의 역용종으로, 수천 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독특한 품종”이라 설명하며, “성질은 온순하고 인내심이 강하면서도 영리하다”고 부연하고 있다. 소와 인간의 정서적 교감이 가능하다는 건 경북 봉화군 산골에 사는 늙은 부부와 그들이 키웠던 소 ‘누렁이’의 일상을 관찰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를 통해 이미 증명된 바 있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9-23

이 ‘착한 짐승’의 죄 없는 생애

경상북도 포항. 푸른 파도가 지척에서 출렁이는 죽도시장 들머리엔 소머리국밥과 소머리수육 딱 2가지 메뉴만 파는 두 음식점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자리해 있다. J식당과 P식당이다. 바람 쌀쌀하던 10년 전 겨울. 처음으로 J식당을 찾았을 때다. 정겹다고 해야 할까, 옛 정취 가득하다고 말해야 할까…. 어쨌건 고즈넉한 분위기에 매료됐다. 70~80대 노인들이 소주 한 병 가운데 놓고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오래 고아낸 소머리 국물을 천천히 드시고 있었다. 분위기만이 아니었다. 독특한 비주얼의 머릿고기는 보드라우면서도 쫀득한 식감으로 술꾼들의 아픈 속을 달래줬다. 수육에 곁들여 먹는 데친 부추는 향긋하고, 반찬으로 나오는 깍두기와 간장에 절인 양파도 깔끔한 맛. 가마솥에 오래 고아낸 ‘소머리 국물’ 보드랍고 쫀득한 식감 ‘소머리 수육’ 부추·깍두기·양파 곁들이면 맛 일품 2030 입맛까지 사로잡은 전통 음식 같은 메뉴를 파는 P식당도 분위기와 맛이 대동소이했다.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P식당은 국밥이 담긴 오지그릇에 날계란 하나를 깨 넣어주는 정도다. 그런데, 한참 동안 두 식당의 분위기가 달라진 적이 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두 곳 모두 이른바 ‘TV 맛집 프로그램’에 소개됐고, 방송을 탄 이후 거의 1년 이상 식당 앞 좁은 골목길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나이 지긋한 소머리국밥집 20~30년 단골들은 일종의 공황에 빠졌다. 조용하고 평화롭던 점심시간이 외지에서 찾아온 젊은이들로 시끌벅적한 도떼기시장이 됐으니. 분위기만이 아니라 “맛이 달라졌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더해지기도 했다. 방송의 힘이 어마무시하다는 걸 새삼 깨달으며 이 기간엔 기자도 J식당과 P식당을 찾지 않았다. 두 식당이 예전 분위기로 돌아온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음식점 주인은 계속 구름처럼 몰려드는 손님을 받고 싶었을 테니 섭섭했겠으나, 오랜 단골들에겐 다행스런 일이었을 터. 식당 앞 골목은 다시금 조용해졌다. 권력도, 방송의 힘도 어쩔 수 없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영원히 지속되는 건 세상에 없으니. J식당엔 앞서 말한 1년가량의 ‘혼란기’를 제외하곤 1~2주에 한 번쯤 갔으니 주인, 종업원과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 친하다. 비싼 우설(牛舌) 한두 점을 슬쩍 기자의 국그릇에 넣어주기도 할 정도다. 가끔 소머리를 삶는 가마솥이 보이는 테이블에 앉을 때면 하얀 김이 무럭무럭 솟는 커다란 검은 솥을 가만히 바라보곤 한다. 그러면, 유년 시절 외갓집이 떠오른다. 아니, 반세기 전 코흘리개일 때 외숙부가 키우던 그렁그렁한 눈망울이 착했던 누렁이가 떠오른다.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은 모친이 태어난 곳이다. 1970년대 후반이 돼서야 전기가 들어간 깡촌 중 깡촌. 낡고 덜컹거리는 완행열차를 타고 외가에 가면 가장 먼저 누렁이에게 볏짚을 먹이곤 했다. 열 살 안팎의 기자와 동생은 그 소를 말은 통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친구로 여겼다. 까마득한 옛날인 구석기시대에도 소는 존재했다. 여러 마리가 소가 그려진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가 그걸 증명한다. 그러나, 소와 인간은 친구가 되기 어려운 관계다. 알타미라 벽화가 그려진 1만800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 왜냐? 상호소통 없이 한쪽이 한쪽을 위해 일방적으로 무한희생만 하는 탓이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 살아서는 불평 한마디 없이 힘든 농사일을 거들고, 아이들의 친구가 돼줬다. 죽은 후에도 자신을 살과 뼈, 심지어 내장과 머리까지 인간에게 먹인 게 소였다. 허니, 소의 도저한 희생은 신(神)의 영역을 위협할 정도 아닌가? 외갓집 누렁이는 송아지에서 듬직한 수소로 커가던 과정에서 죽었다. 삼킨 복숭아씨가 목구멍을 막은 게 원인이었다. 죽은 소를 살리는 건 인간의 능력 밖이다. 그래서다. 외숙부와 이웃들이 누렁이를 나눠 먹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었던 날. 소죽을 끓이던 가마솥과 텅 빈 외양간을 망연히 쳐다보다가 소리 내 울었다. 그랬던 기자가 누렁이와 동족인 또 다른 소의 머릿고기를 무시로 쩝쩝거리며 먹고 있으니, 산다는 건 그 자체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9-23

전통 정자, 예술로 피어난다… 봉화 ‘누정愛아티스트’ 출범

전통 정자 문화의 중심지인 봉화군에서 예술과 자연, 문화유산이 만나는 특별한 예술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린다. 봉화정자문화생활관이 기획한 이번 프로젝트는 ‘누정愛아티스트’라는 이름으로, 전통 건축물인 정자(亭子)를 모티브로 현대 예술 창작과 지역 문화의 융합을 시도하는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이다. 봉화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누정(樓亭)이 남아 있는 지역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전통문화유산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예술 실험이 가능한 최적의 무대를 제공한다. 이번 프로젝트는 서양화가 김창한 작가를 첫 초청 작가로 맞이해 정자의 미학과 봉화의 풍경을 현대 회화로 재해석하는 시도를 담아낸다. 봉화정자문화생활관, 아티스트 레지던시… 전국 최다 누정 보유한 봉화서 시작 서양화가 김창한 참여 내년 봄까지 작품 25점 창작, 지역 문화·관광 활성화 기대 □ 봉화, 누정문화의 심장부 누정(樓亭)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자연 속에서 사색하고 풍류를 즐기던 정자 건축물로, 단순한 쉼터를 넘어 당대 지식인의 정신세계와 미의식을 반영하는 상징적 공간이었다. 봉화군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103개의 누정을 보유하고 있으며 청량산 자락과 백천계곡, 띠띠미마을 등 수려한 자연 속에 정자들이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청암정, 한수정, 몽화각 등 수백 년을 이어온 정자들은 봉화의 정신문화와 자연친화적 삶의 철학을 잘 보여줄 뿐 아니라, 선현들의 학문과 풍류가 교차하는 역사적 무대가 되었다. 이처럼 봉화에 누정이 유독 많이 남아 있는 이유는 단순한 사족(士族)의 거주 때문이 아니라 청량산과 문수산 등 조화로운 자연환경이 선비들의 풍류와 사색의 공간으로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정자들은 자연과 예술, 철학이 만나는 장소로 기능하며 선현들의 미학과 사유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오늘날에도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된다. □ 예술가를 위한 창작의 쉼터, ‘누정愛아티스트’ 레지던시 ‘누정愛아티스트’는 봉화정자문화생활관이 주관하는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예술가들이 일정 기간 머물며 창작 활동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다. 레지던시는 예술가에게는 일상에서 벗어나 온전히 작품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고, 지역에는 예술과 문화가 스며들어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문화적 플랫폼으로 자리한다. 특히 봉화의 누정이라는 독창적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점은 타 지역 프로그램과 차별화되는 특징이다. 최근 국내외 다양한 도시와 마을에서 레지던시가 예술과 지역이 상생하는 중요한 문화 생태계로 주목받고 있다. ‘누정愛아티스트’ 또한 단순히 창작 공간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술가와 지역 주민이 교류하며 서로의 삶과 문화를 나누는 과정을 중시한다. 정자라는 전통적 건축 공간과 현대 예술이 만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영감과 실험이 가능해지고, 이를 통해 창작은 더욱 풍성해진다. 이 프로그램은 예술가에게는 창작의 쉼터이자 예술을 꽃피우는 인큐베이터로, 지역에는 문화적 자산을 확장하는 동력이 된다. 봉화의 자연과 역사, 그리고 정자가 품은 정신적 유산이 예술가의 상상력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콘텐츠와 공동체적 가치가 창출되는 것이다. 따라서 ‘누정愛아티스트’는 예술과 지역 문화가 어우러져 미래지향적 문화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야외 화가 김창한, 봉화의 풍경을 화폭에 담는다 이번 프로그램의 첫 초청 작가는 야외작업과 생동감 넘치는 풍경화로 정평이 나 있는 중견 서양화가 김창한이다. 김 작가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동 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91년부터 현재까지 국내외에서 개인전 54회, 단체전 230여 회를 개최한 중견 화가다. 특히 그는 어린 시절 봉화 외가에서 자라며 봉화와 깊은 인연을 맺었고 부친 또한 봉화 상운면에서 사과 농사를 지어 지역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지니고 있다. 작품은 한국을 비롯해 미국, 독일, 일본, 호주, 캐나다, 미얀마 등지에서도 전시됐으며, 자연과 고향의 풍경을 서정적인 필치로 표현해왔다. 울산시립미술관, 현대예술관, 롯데호텔, SMS Korea 등 다양한 기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으며, 현재는 전업 작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작가와 봉화정자문화생활관은 누정갤러리에서 올해 6월에 첫 초대전을 개최한 것을 인연으로 이번 프로젝트를 함께하게 됐다. 김 작가는 2025년 여름부터 2026년 봄까지 봉화에 총 4회 이상 머물며 봉화의 주요 정자와 자연경관, 마을풍경을 소재로 대형 회화 작품을 포함한 25점 내외를 창작할 예정이다. □ 창작의 쉼터 솔향촌과 전시의 무대 누정갤러리 김창한 작가의 창작활동은 봉화정자문화생활관 내 체류형 숙소인 ‘솔향촌’에서 이루어진다. 솔향촌은 소나무 숲에서 풍겨오는 솔향기를 맡으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편안한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숙박시설로 정자와 숲, 마을이 조화를 이루는 조용한 자연 속 공간으로 예술가에게 창작의 몰입을 제공한다. 한편 작품전시는 내년 5월 말부터 약 3주간 봉화정자문화생활관 내 ‘누정갤러리’에서 진행된다. 누정갤러리는 2023년 6월에 문을 연 전시공간으로 봉화정자문화생활관의 누정오경과 조용한 자연환경이 제공하는 전통미와 현대적 전시 환경이 어우러진 복합문화공간이다. □ 주민과 함께 만드는 문화와 관광, 예술이 만나는 프로젝트 ‘누정愛아티스트’는 예술가 혼자만의 작업에 머무르지 않는다. 프로그램 기간 동안 김창한 작가는 지역주민과 관람객을 대상으로 오픈스튜디오, 드로잉클래스, 작가와의 대화 등을 운영하며 예술적 체험을 통해 지역민의 참여를 유도할 계획이다. 창작과정은 SNS와 유튜브(야외화가 김창한)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소개되어 봉화의 문화유산과 자연을 전국에 널리 알리는 콘텐츠로 활용될 예정이다. 이번 프로그램은 단순한 전시를 넘어 적극적인 홍보를 통해 문화·관광·예술이 유기적으로 연계된 지역 브랜딩 모델로서의 가능성도 주목받고 있다. 봉화군 관계자는 “정자라는 전통 공간에서 탄생한 예술작품은 봉화의 아름다움과 정체성을 새롭게 전달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될 것”이라며 “향후 봉화를 사랑하는 다양한 예술가들과 함께 사진, 음악, 영상 등 다양한 장르로의 확장도 고려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박종화기자 pjh4500@kbmaeil.com

2025-09-22

타고난 열쇠공, 열쇠점의 대를 잇다

포항시 북구 죽도동 칠성천길 64번지에는 76년 된 죽도열쇠 2호점이 있다. 김건식(61) 대표는 2008년 어머니와 함께 꾸리던 사업장에서 독립해 지금의 점포를 열었다. 3층 건물 규모에 각종 열쇠와 자물쇠 보유량, 처리하는 업무량을 감안하면 사실상 본점이나 다름없다. 점포에 들어서면 벽면을 가득 메운 수천 개의 열쇠가 먼저 눈길을 끌었다. 출장 중인 김건식 대표 대신 손님을 맞은 이는 그와 사제 관계로 인연을 맺은 직원이었다. 벽을 빼곡히 채운 열쇠 위치를 다 기억하느냐고 묻자 “신기하게도 사장님은 다 기억하세요”라고 대답했다. 대충 세어도 2000개가 넘는 열쇠였다. 폐에 총알 박힌 채 평생 전쟁 후유증 겪던 부친 김흥준 대표는 소문난 열쇠 장인 직접 연장 만들어 쓸 만큼 손재주 좋고 지역 은행의 금고 작업 대부분을 도맡아 기계없던 시절 줄질로 하나하나 복사해 손으로 만들던 열쇠는 장난감이자 일상 리어카 타고 아버지 따라다니던 소년의 76년 역사 2호점 벽면엔 수천 개의 열쇠 1990년~ 2000년대 초반 열쇠업 전성기 동료들과 한국열쇠협회 창립에 참여 지난해 ‘국민 재산 보호’ 전국지부 결성 1997년 포항 열쇠인들 ‘긴급 봉사대’ 발족 김건식 대표를 다시 만난 건 7년 만이었다. 2018년, 경상북도 노포기업으로 선정되었을 때, 방송 인터뷰를 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여전히 자신감의 열쇠라도 쥔 듯 당당하고 거침없었다. 변함없는 또 하나는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벨이었다. 당시에도 녹화 도중 손님 전화를 받아 제작진을 당황하게 했는데, 이번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하루 평균 50∼60통의 전화가 걸려오고, 그 절반은 출장으로 이어진다. 김 대표는 “가끔 전화기를 던져버리고 싶지만 고객의 문의는 성심껏 답해야죠”라고 말했다. 포항 문덕동에 사는 한 고객의 전화였는데, 아파트 현관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요청이었다. 김 대표는 현관문의 사용 연한과 잠금장치 종류를 꼼꼼히 확인한 뒤 방문 일정을 잡았다. 걸려오는 전화 내용은 다양하다. 자동차 키가 말썽을 부린다거나 비디오폰, 도어록 고장을 호소하는 경우도 많다. 잠긴 문을 열어달라거나 열쇠 복사 문의도 꾸준하다. “포항 열쇠는 아버지가 키워” 고객의 의뢰 내용은 계절에 따라 다르다. 여름과 겨울에는 자동문 고장이 잦고, 이사철에는 도어록 교체나 열쇠 복사, 스마트키 설치 문의가 늘어난다. 자동차 키 문제만큼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꾸준히 접수된다. 김 대표는 아버지를 도우며 자연스럽게 열쇠 일을 배웠다. 꼬마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출근했던 그는, 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하교 후에 곧장 난전으로 향해 하루를 보냈다. 아버지는 좌판에 열쇠를 늘어놓고 수리도 겸했다. “아버지가 리어카를 끌면 제가 뒤에서 밀었어요. 대부분은 리어카에 타고 왔지만.” 김 대표는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웃으며 회상했다. 기계가 없던 시절이라 모든 작업은 수작업이었다. 줄과 줄톱으로 하나하나 열쇠를 다듬어 복사했다. 본격적으로 복사 기계가 들어오기 시작한 건 1980년대 후반으로 기억했다. 줄질로 열쇠를 만들던 시절부터, 열쇠는 그의 장난감이자 일상이었다. 고인이 된 부친 김흥준 대표는 소문난 열쇠 장인이었다. 직접 연장을 만들어 쓸 만큼 손재주가 뛰어났고, 지역 은행의 금고 작업은 대부분 도맡았다. “포항 열쇠는 우리 아버지가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 대표는 자부심을 드러냈다. 어릴 적부터 이웃들은 그에게 “네 아버지처럼 살아라”고 말했다. 부친의 솜씨는 경북 동해안 전역에 알려져 울진까지 출장 요청이 이어졌다. 김 대표도 아버지를 따라다니곤 했다. 한 번은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구룡포를 향했는데, 막 지은 여관에 도착했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던 버스와 땀 흘리며 일하던 아버지의 뒷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추억이다. 교통 여건이 열악했던 당시에는 출장을 다녀오는 데 꼬박 하루가 걸리기도 했다. 김 대표는 1985년에 첫 자동차를 마련해 기동력을 높였다. 거금 500만 원을 들인 프라이드였다. 1990년대 초반부터 10년간 열쇠업의 전성기 부친은 전쟁 후유증으로 평생 고통을 겪었다. 총알이 폐에 박힌 채 살아야 했고, 요양을 위해 제주도로 옮겨갔다. 제주에서도 열쇠공 제자를 둘 만큼 열쇠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부친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가업은 김건식 대표가 이어받았다.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열쇠업의 전성기였다. 이 시기 김 대표는 동료들과 한국열쇠협회 창립에 참여했다. 1990년,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회관에서 열린 창립총회는 언론에 ‘이색 모임’으로 보도되었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중소기업회관 2층에서 ‘열쇠인’들의 이색적인 모임이 열렸다. 열쇠 수리 판매 제작 등의 종사자 500여 명은 이날 한자리에 모여 ‘한국열쇠협회’의 실질적인 창립총회인 서울지부 결성식을 가졌다. “지난해 잇따라 은행 금고가 털리고 거액의 현금을 실은 수송차량이 습격당하는 것을 보면서 열쇠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무언가 보람 있는 일을 해보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지난해 7월 동료 열쇠인 10여 명은 함께 모여 협회 설립의 뜻을 모으고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전국지부 조직 결성에 착수했다. 협회 측은 전국에 단독 점포를 개설한 열쇠업자는 1만여 명이며 노점-행상과 철물점 구두수선 등의 겸업을 하는 경우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4만∼5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 「국민 재산-생명보호 거창한 주장 이색 ‘한국열쇠협’ 창립」, 『조선일보』 1990년 4월 27일자. 김 대표는 “80년대 후반부터 동료 열쇠인들이 모여 협회 창립을 의논했다”고 밝혔다. 또한 한국열쇠협회 경북도지부 이사직을 역임하며 지역 열쇠업 발전과 전문열쇠기술인 양성을 위한 교육과 정보 교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때는 국산 자물쇠 열 개가 미제 하나를 못 당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국내 기술이 형편없었어요. 지금은 많이 발전했지만요.” 김 대표는 국내 기술 발전 과정을 몸소 체험한 세대다. 포항 지역 열쇠인들은 1997년 ‘긴급 출동 봉사대’를 발족하기도 했다. 당시 열쇠를 이용한 범죄와 화재를 비롯한 각종 재난과 응급 상황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사고 예방과 대처에 앞장서기 위한 취지였다. 양로원이나 보호시설을 대상으로 한 봉사활동, 119와 협력한 긴급 출동이 대표적이었다.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봉사활동을 위해 회원사에서 각종 문고리와 열쇠, 자물쇠를 기부받기도 했지만, 아쉽게도 본격적인 활동으로 이어가진 못했다. 세대를 이어온 성실함과 책임감 2000년대 들어 열쇠업은 또 다른 변화를 맞았다. 튼튼한 수동열쇠는 여전히 인기지만 새롭게 전자열쇠가 등장하면서 다양해졌다. 특히 자동차 열쇠가 판도를 변화시켰다. 2004년 이후 자동차에 도입된 ‘이모빌라이저(immobilizer․ 열쇠마다 고유 암호를 부여하고 자동차에서 나오는 신호와 일치해야 시동이 걸리는 방식)’가 한 예다. 도난 방지에는 효과를 발휘했지만, 간혹 차가 잠겨버려 차 주인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외부에서 그런 일이 생기면 고액의 비용을 치르고 견인 차량을 불러야 했다. 혼쭐이 난 차 주인들이 열쇠 복사를 부탁했지만, 예전과 같은 방식은 통하지 않았다. 그전에는 눈대중해서 감각에 의존해 수가공으로 열쇠를 복사했다면, 이제는 고도로 복잡한 셈법이 필요했다. 전자칩이 내장된 자동차 키는 고도의 장비와 프로그램이 필요한 것이다. “아무리 실력자라도 새로운 게 계속 나오니까 늘 긴장하고 연구해야 해요.” 김 대표는 틈만 나면 자물쇠를 들여다보고 연구에 몰두한다. 김 대표의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죽도열쇠에 전화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문을 열어주는 기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열리지 않는 자물쇠도 풀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쌓인 결과다. 세대를 이어온 장인의 성실함과 책임감이 ‘열쇠’를 넘어 ‘신뢰’를 열어낸 것이다. 글 : 배은정 소설가 사 진 : 김 훈 작가

2025-09-21

TRM설비 분야 관리 업무 담당 수요자 맞춤형 트러블 최소화

미세 불량 조기 발견, 대규모 생산 차질 차단 ‘제철소장포상’ 수상 동료들과 함께 성장하며 미래 철강 선도할 포스코인 되도록 최선 - 자기소개를 해달라. 포스코에서 13년째 근무 중인 STS 압연부 2냉연공장 레이저 용접파트 박진영 대리다. 현재 나는 용접 품질 관리와 생산성 향상을 위한 전반적인 설비관리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내가 담당하는 설비로는 TRM Laser Welder 설비가 있다. TRM 설비는 두꺼운 철판을 얇게 압연하는 기계로, 밀가루 반죽을 밀어 펴듯 이해하면 쉽다. Laser Welder는 얇게 만든 서로 다른 철판을 이어붙이는 장비로, 성질 차이로 인한 불량을 방지하기 위해 연결 부위를 꼼꼼히 관리하고 있다. 결국 수요자가 원하는 규격에 맞춰 철판을 생산할 수 있도록 설비를 최적의 상태로 유지하면서, 생산성 향상과 설비 트러블 최소화에 집중하고 있다. 현장에서 설비 안정화와 불량원인분석을 하며 경험을 쌓아왔는데, 작은 불량 하나가 전체 공정과 안전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체감하며, 무엇보다 안전이 최우선임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입사 초반에는 배우는 자세로 선배들에게 많이 의지했지만, 이제는 후배들에게 경험을 전해주며 함께 성장하는 중간다리 역할을 하는 중이다. 함께 고민하고 해결할 때 큰 보람을 느끼고, 이를 통해 신뢰받는 동료, 인정받는 구성원이 되고자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도 포스코의 핵심 가치와 비전을 바탕으로 현장에서 더 큰 책임감을 가지고 업무에 임하며, 안전과 품질을 최우선으로 하는 전문가로 성장해 나가겠다. -포스코에 입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나는 스스로를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도전해 온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싶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8년간 요리사로 활동하며 실전에서 부딪히고 배우는 과정을 통해 성실함과 책임감을 키웠다. 이후 9년 차에 대학에 진학해 기계 분야를 전공했고, 그 기간 동안 11개의 자격증을 취득하며 역량을 넓혀갔다. 또한 이라크 파병을 통해 국위선양이라는 뜻깊은 경험을 하며 도전정신과 국제적 시야를 쌓을 수 있었다. 이처럼 다방면으로 쌓은 경험들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나만의 폭넓은 역량을 갖추는 계기가 되었다. 호기심이 많고, 무언가를 직접 다루고 조작하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며, 특히 기계를 이해하고 다루는 일에 재미를 느꼈다. 그 순간들이 내 삶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결국에는 포스코의 설비 담당자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글로벌 철강 기업에서 산업의 근간을 지켜 나간다는 자부심, 그리고 늘 도전정신과 기술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넘쳐난다는 점에서 더욱 입사를 희망하게 됐다. 포스코 입사는 단순한 직장 선택이 아니라, 내 인생 여정의 종착점이자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나와 맞는 일터를 만난 만큼 앞으로도 나의 현장에서 신뢰받고 인정받는 구성원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자 한다. -올해 7월 제철소장포상을 받았다고 들었다. 어떤 성과가 있었는지? 입사 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앞서 말한 TRM Laser Welder 부속품인 Roll의 마모상태를 조기에 발견하여 큰 품질 불량을 예방했던 경험이다. 당시 현장 점검 중 Roll 표면에서 평소와 다른 미세한 마모흔적을 발견했다. 작은 이상으로 보일 수 있었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비추어봤을 때, 이를 방치한다면 용접 불량으로 이어져 판 파단과 같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나는 즉시 계통보고를 진행했고, 반원 주임과 함께 설비를 면밀히 점검한 끝에 즉각적인 교체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후 라인을 일시적으로 정지하고 문제 Roll을 신속히 교체함으로써 대규모 생산 차질과 품질 문제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었다. 단순한 이상 징후 발견을 넘어, 설비 이상을 조기에 파악하는 것의 중요성과 현장 내 협업과 빠른 의사결정의 중요성을 알렸던 일이었기에, 관련해 제철소장포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일 이후로 Roll 교체 주기를 기존 2개월에서 1개월로 단축하는 개선 조치가 실행되기도 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생산 안정성과 품질확보에 크게 기여했으며, 나 또한 설비 관리자로써 책임감을 더욱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도 더욱 세심하게 현장을 살피고, 문제 예측과 대응력을 기르고자 한다. -입사 이후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었다면? 최근 팀원들과 다함께 부산으로 1박2일 일정의 조직활성화 활동을 다녀왔다. 첫날에는 부산 태종대와 해상 케이블카에 방문해 일상에서 벗어나 간만에 즐거운 나들이를 했다.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함께 걷고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평소 일터에서는 몰랐던 서로의 관심사와 생각을 알아가기도 했고, 선배와 후배 모두 한층 더 친밀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날 저녁에는 사직야구장을 찾아 다 함께 응원전을 펼쳤다. 응원가를 함께 부르며 목소리를 모으는 순간은 현장의 협업과도 닮아있었다. 다같이 신나는 시간을 함께하며 뜻밖의 단합력을 한번 더 느끼게 되었다. 덕분에 이후에도 팀 내 존중과 배려의 분위기가 더욱 돈독해지고, 업무에서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바탕으로 더 큰 성과가 만들어지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포부 한 마디. 앞으로도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며 쌓은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설비 안정화와 품질 개선, 그리고 안전한 작업환경 조성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천할 예정이다. 동료들과 함께 성장하며, 포스코가 미래 철강산업을 선도하는 데 꼭 필요한 구성원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다. AI·스마트팩토리 등의 혁신을 통해 미래 철강산업을 선도하는 포스코의 변화와 발맞춰 나 역시 현장에서 데이터 기반의 문제 해결력과 기술 역량을 꾸준히 길러 회사의 지속가능한 성장과 경쟁력 강화에 함께 기여하는 능력 있는 구성원이 되겠다. /김진홍경제에디터 kjh25@kbmaeil.com

2025-09-21

소둔정정파트 전체 설비 책임 안전 최우선···적극 소통 강점

소수정예 인원 4개조로 나뉘어 24시간 불철주야 생산 관리 힘써 서로 의견 존중하며 품질 향상 한마음으로 노력 행복한 팀 문화 - 자기소개를 해달라. STS압연부 2냉연공장 소둔정정파트에서 근무하고 있는 13년차 김재형이다. 나는 포항에서 태어나 자랐고 포스코와 함께 38년 세월을 동고동락해왔다. 특히 포스코 입사를 결심한 이유로 아버지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는데, 아버지가 오랜 시간 STS2제강에서 근무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포스코가 단순한 직장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과 가족의 삶에 얼마나 큰 의미를 지녔는지 어린 시절 자연스럽게 느꼈던 것 같다. 포스코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는 결국 나의 꿈으로 이어졌고, 나 역시 아버지처럼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의 아버지의 모습을 되새기며, 포스코 발전과 함께 성장해 온 포항에서 나 역시 산업의 일꾼으로서 동반 성장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도 맡은 자리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회사와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구성원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 - 현재 소속된 팀을 소개해달라. 내가 속한 포항제철소 STS압연부 2냉연공장 소둔정정파트는 첨단 설비와 안전을 바탕으로 동료들과 함께 행복한 팀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나는 이곳에서 전체 설비를 책임지고 있으며,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일하고 있다. 특히 내가 관리하는 APF Line 공정은 제품 표면을 정밀하게 처리하고, 고객 요구에 맞춘 다양한 규격의 코일을 생산한다. 해당 공정은 소수정예 인원이 4개조로 나뉘어 24시간 불철주야 생산 관리를 하고 있다. 연속 공정의 특성상 팀원 간 긴밀한 소통과 협력이 필수이며, 모두가 품질 향상과 안전을 위해 한마음으로 노력한다. 각자의 역할에 책임을 다하면서도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문화가 우리 팀의 가장 큰 강점이다. 특히 작년 가을에는 팀워크 강화를 위해 팀원들과 함께 단풍놀이를 겸한 문경 여행을 다녀왔다. 바쁜 업무 속에서도 잠시나마 자연 속에서 힐링을 만끽한 소중한 시간이었고, 올여름에는 다같이 워터파크에도 다녀왔다. 팀원들과 물놀이를 즐기며 아이처럼 웃음꽃을 피웠던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처럼 우리 팀은 세대가 바뀌고 구성원이 달라져도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이런 긍정적인 에너지는 계속 되었으면 한다. - 포항제철소에서 일하면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순간은? 아직 업무 지식이 많이 부족하다고 느끼지만, 회사에 출근할 때마다 항상 ‘작은 일일지라도 도움이 된다면 하자’라는 마음가짐으로 업무에 임하고 있다. 신입사원 시절부터 현장을 돌아다니며 설비를 관찰하고 작동 원리를 하나하나 공부하는 데 힘써왔다. 또한 지저분한 구역이 보이면 솔선수범해 청소를 꾸준히 하면서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이 때문인지 어느새 공장 내에서는 “이 친구 정말 열심히 한다”라는 소문이 퍼졌고, 동료들 사이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됐다. 처음에는 칭찬을 받는 것이 어색하고 부끄럽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자신감이 생겼다. 특히 작년에 직책을 맡게 되었을 때는 그동안의 노력이 인정받은 것 같아 뿌듯했고, 동료와 가족의 축하를 받으며 큰 보람을 느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사소한 일에도 성실하게 임하는 태도가 큰 성과와 자긍심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체감했다. 앞으로도 꾸준히 배우고 성장하여 회사와 동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직원이 되고 싶다. - 회사의 자랑거리가 있다면? 포스코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자기계발 지원이 매우 잘 되어 있다는 점이다. ‘러닝 플랫폼’이라는 앱으로 직원들은 언제 어디서나 다양한 학습 콘텐츠를 손쉽게 이용할 수 있다. 이 플랫폼에는 직무역량 강화는 물론 어학, 생활·건강 등 폭넓은 분야의 강의와 자료가 준비되어 있어, 직원들이 언제나 자유롭게 학습할 수 있는 환경이 구축되어 있다. 나도 러닝플랫폼을 통해 산업안전기사 자격증을 수월하게 취득할 수 있었다. 또 포스코 인재창조원 실무교육을 통해 유·공압 관련 도면이나 전기 도면을 읽을 수 있는 유용한 지식을 얻게 되어 전문성을 강화하기도 했다. 좋은 학습 환경이 일터에 마련되다 보니 끊임없이 성장의 동기부여를 받게 된다. 현재는 압연기능장 자격증 취득을 목표로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최근에는 출산과 육아 관련 제도도 크게 개선되어, 남성 직원들도 출산휴가의 혜택을 받게 됐다. 특히 출산휴가는 개인이 필요한 시기에 나누어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게다가 회사에서는 출산장려금도 대폭 확대 지원하고 있어, 출산휴가를 사용하더라도 가정의 경제적 부담을 덜 수 있다. 이러한 제도 덕분에 가족과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을 걱정 없이 보낼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다. 또한 만 8세 이하 자녀를 둔 직원은 최대 1년까지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자녀 양육에 집중할 수 있도록 회사와 동료들이 적극적으로 배려해주고 있어, 일과 가정의 균형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앞으로도 이러한 지원을 적극 활용해 더 많은 직원들이 자신의 꿈과 목표를 이루고, 행복한 가정과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함께 누릴 수 있었으면 한다. - 국내 철강업계의 미래를 책임질 세대로서, 앞으로 어떤 변화나 발전을 기대하고 있는지? 앞으로 국내 철강업계가 성장하려면 디지털 혁신과 스마트팩토리 구축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최근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같은 첨단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철강산업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특히, 자동화 시스템이 적용된 생산 라인에서는 작업자의 실수를 줄이고, 실시간 데이터 분석을 통해 설비 이상이나 품질 문제를 미리 파악할 수 있어 안전하고 효율적인 작업장으로 변화할 것으로 기대한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생산성 향상에 그치지 않고,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로 이어져 자동차, 조선, 에너지 등 다양한 산업에서 요구하는 맞춤형 철강 생산이 가능해질 것이다. 결국 디지털 혁신과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이 함께 이루어질 때, 우리 철강업계는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진홍경제에디터 kjh25@kbmaeil.com

2025-09-21

70여 년을 하루처럼 그 자리를 지키는 94세 할머니 열쇠공

시간의 문을 여는 비밀 공간이 있다면 아마도 이곳이 아닐까.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세 평 남짓한 작은 가게. 먼지가 진득하게 쌓인 구형 열쇠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곳. 포항 원도심 중앙로의 역사를 몸소 겪어낸 열쇠공이 여전히 고객을 맞이하는 곳. 포항시 북구 죽도동 135-105번지 ‘죽도열쇠’다. 죽도시장 건너편 골목 안 컨테이너 건물이 바로 그곳이다. 세월 고스란히 간직한 세 평 남짓한 가게 고윤기 씨가 문 열고 따뜻하게 손님 맞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서울내기 고 씨 이북 출신 남편 김흥준 씨와 사랑에 빠져 서울서 강릉·울산 등 거쳐 포항에 터 잡아 “손재주 뛰어난 남편, 손수레 하나 마련해 시장통 누비던게 ‘죽도열쇠’의 시작이지” “노점 생활 30년 만에 판잣집을 짓고 장사 우리 다섯 식구 삶의 터전으로 자리 잡아 세 아들 이곳에서 일 배우고 밥벌이 했어” 올해 94세를 맞은 고윤기 씨가 문을 열고 손님을 맞았다. 인터뷰를 시도했다가 거절당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어 조심스러웠지만 의외로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근처에서 열쇠집을 운영하는 차남 김건식 대표와 함께 먼저 인사를 드린 적이 있었는데, 그 일도 기억하고 있었다. 가게의 3분의 1 정도를 방처럼 만들어 놓은 이곳에서, 고 씨는 손님이 오면 자물쇠를 판매하고 열쇠 복사를 해준다. 바닥을 창문 높이까지 돋운 방에는 텔레비전과 밥솥, 이부자리까지 살림살이가 살뜰히 마련되어 있었다. 지내시기에 비좁지 않은지 물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단다. 손수레로 장사하던 시절에 비하면 대궐이라고 했다. 오는 길에 사 온 간식거리를 내놓았다. 죽도시장 난전에서 파는 옥수수빵을 군것질 삼아 대화는 자연스럽게 과거로 흘렀다. ‘죽도열쇠’의 역사는 194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 씨의 남편인 고(故) 김흥준 씨(1999년 작고)는 이북 출신으로 인민군 장교였다가 한국전쟁이 터지기 1년여 전에 국군에 귀순했다. 혈혈단신 내려온 남한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고윤기 씨와는 서울에서 만났다. 부유한 집안 출신의 서울내기 고 씨는 사랑에 빠져 남편을 따라나섰다. 고생길이 훤한 고 씨의 선택을 부모도 말리지 못했다. 서울에서 강릉, 울산, 부산 등지를 거쳐 터전을 잡은 곳이 포항이었다. 비록 가진 것은 없으나 젊고 명석한 머리와 고치고 만드는 손재주가 뛰어난 남편은 낡은 손수레 하나를 마련했다. 연장을 싣고 시장통을 누비던 손수레가 바로 죽도열쇠의 시작이었다. 열쇠 수리에 필요한 재료와 장비뿐 아니라 지퍼나 라이터, 석유풍로 같은 잡화를 취급하는 난전이었다. “장사가 잘되었어. 우리 아저씨가 손재주가 좋았거든.” 그러다 지인의 소개로 세 평 정도의 땅을 얻어 가게를 냈다. 금은방을 운영하던 사장이 옆자리가 하나 비었으니 얼른 오라고 알려준 데가 여기였다. 목수를 불러 판잣집을 짓고 장사를 시작한 것이 1982년, 노점 생활을 한 지 30여 년 만이었다. □ 열쇠점은 다섯 식구의 삶의 터전 고 씨에 따르면 죽도 다리 위에서 난전을 시작했고, 가게도 멀지 않은 곳에 냈다. 가게 앞으로 개천이 흘렀다. 바로 눈앞이 물이었지만, 지대가 높아서 넘친 적은 없었다. 고 씨는 개천이 흙으로 덮이고, 아스팔트 도로가 깔리는 도시의 변화를 고스란히 지켜봤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군 장교로 참전한 김흥준 씨는 폭탄 파편이 폐에 박히는 부상을 입고 제대했다. 제대 후에는 예비군 훈련대장을 맡았다. 고 씨는 훈련병들의 식사까지 손수 준비해 손수레에 싣고 연병장까지 날랐다. 남편뿐 아니라 훈련병들의 식사까지 챙기는 것은 소대장 아내의 책무라고 여겼다. 훈련이 없는 날에는 생계를 위해 시장에 나가 난전을 펼쳤다. 때마침 영일만에 제철소가 들어선 뒤 주택과 자동차가 늘면서 열쇠 수리 일감도 많아졌다. 고윤기 씨가 포항에 터를 잡았을 때가 스물한 살이었다. 남편과는 서너 살 차이였다. 고 씨의 친정은 서울 종로에 택시회사와 주유소를 소유했을 만큼 부자였다. 1931년생인 그녀는 일제강점기와 광복이라는 혼란한 시대를 보내면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남편과 만나서 포항까지 오게 된 사연을 이야기해달라고 하니 힘든 시절은 떠올리기 싫다며 진저리를 냈다. “여기서 같이 놀던 친구들은 다 갔어. 놀러 오는 사람도 없고 찾는 이도 없고 그래.” 다들 변했지만 홀로 변하지 않은 섬과도 같은 가게를 지켜온 이유는 다섯 식구의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세 아들은 수업이 끝나면 집이 아닌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 씨는 밥을 지어서 출근했다. 성장한 아들들이 아버지의 출장길을 따라나서면, 고 씨는 가게에 남아 손님을 맞았다. 세 아들 모두 손재주가 있었지만, 둘째 김건식 대표가 특히 두각을 나타냈다. 습득이 빠르고 머리가 비상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김 대표는 10년 전에 가게를 키워 독립했다. “잘되어서 나가니 무척이나 기쁘지.” □ 두 아들도 열쇠업에 종사 인터뷰하는 내내 손님은 없었다. 요즘은 손님이 있는지 물으니, 오전에 벌써 열쇠 세 개를 복사했다고 했다. 고 씨는 열쇠 하나당 5000원이니 제법 벌었다며 자랑했다. 앉아서 쉴 틈도 없이 바쁘던 시절에 비하면 초라한 액수다. 한창때에는 손님이 내미는 열쇠를 어느 회사 제품이라는 것까지 알아맞힐 정도로 실력이 출중했다. 그런 기술자도 세월은 어쩔 수 없었다. 육칠십 대까지 노안이라곤 없던 눈이 침침해져서 세 대의 복사기 중 두 개는 놀리는 실정이다. 그렇지만 시력만 빼면 예전의 실력 그대로다. “집에서 놀면 뭐 해? 가게에 나와서 그냥 놀다가 집에 가서 자고, 아침이 되면 밥을 해서 또 나오는 거야. 딴 거 없어. 손님 있으면 일하고, 없으면 노는 거지.” 손님이 한 명도 없는 날도 있다. 허탈한 마음이야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다음 날이 되면 툴툴 털고 출근한다. 젊은 시절부터 대낮에 빨래를 해본 적이 없다. 낮에는 가게 일로, 밤에는 집안일로 늘 바쁘게 살아온 삶이 몸에 밴 탓이다. 여생을 편안히 보내도 될 텐데 왜 아직도 비좁은 가게를 떠나지 못하는 걸까. “나는 여기서 늙었어. 우리 아이들도 다 여길 거쳤지. 우리 영감님이 하던 거라, 되든 안 되든 내가 지키는 거야.” 세 아들 모두 이곳에서 자라며 일을 배우고 밥벌이를 했다. 세월이 흘러 맏아들은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두 아들은 여전히 열쇠업에 종사한다. 고 씨에게 이 작은 가게는 가족을 지탱해준 고마운 공간이다. 이제는 이곳 말고는 가고 싶은 곳도, 마땅히 갈 곳도 없다고 말한다. □ 94세 할머니 열쇠공 가끔 “안 열리는 자물쇠가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호통부터 친다. 안 열리는 열쇠는 없다는 것이다. 모든 자물쇠는 열리게끔 만들어졌고, 열고자 하면 안 열릴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도 혹시 안 열리면 “우리 건식이에게 가면 다 열린다”고 덧붙였다. 아들에 향한 믿음과 애정이 묻어났다. 지금도 자택이 있는 용흥동에서 가게까지 20분 남짓을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고 씨다. 자전거를 20년 가까이 타다 보니 다리에 근력이 생겼다며 바짓단을 걷어 보였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고 씨의 일상은 변함없다. 아침마다 도시락을 챙겨 가게로 출근한다. 젊은 시절 다섯 식구의 끼니를 챙겨 가게로 향했던 것처럼 길을 나선다. 세 평 남짓한 가게의 자물쇠를 열고 오래된 과거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가 앉는다. 여전히 제 할 일을 기다리는 오래된 열쇠들 사이에 우두커니 앉아 손님을 기다린다. 죽도동에 가면 70여 년을 하루처럼 그 자리를 지키는 94세의 할머니 열쇠공을 만날 수 있다. 글 : 배은정 소설가 사 진 : 김 훈 작가

2025-09-17

‘별의 고장’ 영천, 신기한 연리목 노거수 발견

경북 영천시는 별의 고장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1.8m 반사 망원경과 태양 플레어 망원경 등 다수의 천체 관측 시설을 보유하고 있는 보현산천문대가 있다. 국내에서 발견한 소행성 13개 중 12개가 이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1.8m 반사 망원경의 이름은 도약이며, 1만 원권 지폐의 뒷면 도안에도 존재한다. 광활한 우주의 별들을 관측한다는 것은 마음 설레는 일이다. 대구와 포항 간 고속도로 영천 나들목을 빠져나와 청송과 보현산천문대로 가는 구불구불한 길을 가다 보면 오리장 숲(五里長林)을 만나게 된다. 우주의 소행성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오리장 숲에서 신기한 연리목 노거수를 발견했다. 지난 청송군청에 근무할 때 대구를 오갈 때면 가끔 내려서 숲속의 연리근 회화나무와 느티나무를 만나 그 신비함을 체험하곤 했다. 아름드리 거목 울창한 ‘오리장 숲’… 수령 150∼300년 된 300여 그루 서식·천연기념물 제404호 지정 회화·느티나무 한 몸처럼 자라난 연리목, 사랑나무라 불리며 세 번 돌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도 아름드리 거목의 울창한 숲이다. 수령이 150년에서 300년, 줄기 둘레 3m, 키 10여m 이상의 노거수 300여 그루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도로와 하천을 따라 길게 조성된 숲은 왕버들, 말채나무, 팽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 은행나무, 굴참나무 등 다양한 수종의 노거수가 살아가고 있다. 오리장 숲은 1999년 4월 6일 천연기념물 제404호로 지정되어 나라에서 자연유산으로 보호 관리하고 있다. 예부터 마을 앞을 따라 오리(五里)에 걸쳐 뻗어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도로 확장과 개발로 본래의 숲이 많이 사라지고 군락지 몇 곳만 남았지만, 여전히 마을을 품에 안은 채 푸르름을 자랑하고 서 있다. 숲에 들어서면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거대한 나무들이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연리목(連理木) 회화나무와 느티나무이다. 다른 두 뿌리에서 돋아난 나무가 몸을 맞대고 한 생명을 이루듯 자라난 나무이다. 자천리 오리장 숲의 연리목은 나무 둘레만도 4m가 넘는다. 마치 회화나무가 느티나무를 양팔로 안은 모습이다. 예로부터 회화나무는 학자수(學者樹)라 하여 선비 나무라 하였다. 그리고 느티나무는 오지랖이 넓은 수형과 뭇 생명을 품는 여성목이라 했다. 그리고 보면 남자가 여자를 포근히 감싸 안은 형상의 모습이다. 주민들은 이를 보고 사랑 나무라 하여 나무 주위를 세 번 돌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귀하게 여기고 있다. 우리 인간 세상에서 사랑보다 더 큰 가치가 있을까. 사랑에 웃고 울며 목숨을 거는 인간 세상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연리목 앞에 서면, 이런 사랑에 대한 오래된 전설이 떠오른다. 옛날 중국에서는 하늘에는 비익조(比翼鳥)가 살고, 바다에는 비목어(比目魚)가 살고, 땅에는 연리지가 있다고 했다. 비익조는 암수가 각각 한쪽 날개와 한쪽 눈만 가지고 있어 서로가 합쳐져야만 날 수 있는 새이고, 비목어는 눈이 하나밖에 없어 좌우가 붙어야만 헤엄칠 수 있는 물고기다. 홀로는 온전히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함께해야만 완전해지는 생명체이다. 연리목 또한 그러하다. 두 그루의 나무가 하나로 뭉쳐서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연리지는 원래 중국의 후한서 채옹 편에 나오는 말로써 효심의 상징으로 전해졌지만, 당나라 시인 백낙천의 장한가라는 시가 나온 후에는 사랑의 나무란 의미가 덧붙였다. 그의 대표작 장한가(長恨歌)는 중국 당나라 황제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찬란하게 노래하면서도, 결국 파국으로 끝나는 역사적 비극을 노래했다. 궁의 온천에서 꽃처럼 피어난 사랑은 황제의 총애와 권세의 그늘 속에 더욱 농밀해졌으나, 그 뜨거운 사랑은 끝내 나라를 기울게 할 만큼 무겁고 치명적이었다. 권력과 사랑을 얻은 대가는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대가로 끝이 났다. 역사는 냉정했다. 안녹산의 반란, 즉 안사의 난이 일어나면서 당나라의 전성기는 무너졌다. 반란의 두목인 안녹산과 양귀비의 관계를 의심한 황제 호위병들은 피난길에 황제에게 양귀비의 목숨을 요구했다. 결국 황제의 피난길에서 양귀비는 군사들의 원망을 받아 마외역에서 목숨을 잃었다. 황제는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명령으로 사랑하는 양귀비의 죽음을 보게 되었다. 황제와 양귀비의 사랑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그러나 시인 백낙천은 사랑을 오히려 죽음 너머에도 이어지는 영혼의 결합으로 승화하여 노래했다.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자.” 이 맹세는 천지가 무너져도 사라지지 않는 사랑의 영원을 증언한다. 그래서 장한가는 단순한 옛 황제와 미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사랑의 가장 숭고하면서도 비극적인 진실을 보여주는 불멸의 서정시가 된 것이다. 오늘날 자천리 오리장 숲의 연리목은 그 시와 전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하다. 뿌리는 따로지만 줄기와 가지를 하나로 엮어 살아가는 나무는 인간의 삶과 사랑을 닮았다. 혼자서는 완전하지 못한 불완전한 존재가 서로를 의지하며 비로소 온전해지는 모습, 그것이 바로 인간의 진정한 삶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죽음이 둘을 갈라놓아도 사랑하는 마음은 언제나 하나로 연결되어 숭고함을 잇고 있다. 사랑이란 믿음이라는 세상에서 무성히 그리고 온전히 자라고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자천리 천연기념물 오리장 숲 연리목 앞에서 시인 백낙천의 장한가에서 그 의미를 찾아 되새겨본다. 별의 고장 영천, 보현산천문대에서 별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꿈, 오리장 숲에서 나무에 기대어 살아온 마을 사람들의 염원, 이곳을 찾아 연리목 앞에 선 나의 소망, 이 모두는 하나로 이어져 있는 듯하다. 별빛과 숲, 전설의 시가 한곳에 만나는 자천리 오리장 숲. 이곳은 단순한 풍경을 넘어, 우리가 어떻게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야 하는지를 말없이 가르쳐주는 역사책이다. 자연을 자세히 보고 명상하면 자연은 우리의 지혜를 일깨워주는 스승과 같다. 연리목 아래서 바라본 하늘은 더없이 높고 깊고 푸르다. 언젠가 나 또한 이 땅에서 인연을 마무리하더라도 누군가와 함께한 사랑이 연리목처럼 하나의 흔적으로 남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의미 있지 않을까 싶다. 자천리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이 숲을 마을의 수호림으로 여겼다. 홍수와 바람을 막아내고, 제방을 지켜주며, 때로는 신령이 깃든 신목으로 모셔졌다.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 사람들은 숲에서 제사를 올렸다. 숲이 푸르고 잎이 무성하면 그해 풍년이 들리라 믿었고, 나무의 기운이 약하면 흉년을 점쳤다. 숲의 생태는 곧 마을의 운명과 맞닿아 있었다. 근대화와 함께 제사의 전통은 끊어졌다. 그러다 2003년부터 마을 이장 협의회 주도로 다시 기원제가 부활했다. 노후화된 재단은 새로 정비되었고, 면민의 정성이 담긴 돌비석이 숲 한켠에 서 있다. 숲은 마을의 역사와 신앙, 삶의 기억을 간직한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다. 백낙천(白樂天)의 장한가(長恨歌)는… 양귀비(楊貴妃)와 당나라 황제 현종(玄宗) 둘의 로맨스가 워낙 유명했으므로 시를 지어 노래했는데 그것이 유명한 장한가이다. 생전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이 언약했다고 하는데, 당나라의 시인 백낙천이 당 현종과 양귀비의 비극적인 사랑을 장한가라는 장대한 서사시로 읊었다.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의 무릎을 베고 누워 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장한가의 끝 구절로 이렇게 노래했다.​ 현종은 안녹산의 난으로 꽃다운 나이에 비명에 간 양귀비를 잊지 못해 늘 이 말을 되뇌었다고 한다. 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장생전) 7월 7일 장생전에서 夜半無人和語時(야반무인화어시)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우리의 맹세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선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연리지) 땅에선 연리지가 되자고 간곡히 언약한 말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하늘과 땅은 차라리 끝이 있을지라도, 此恨綿綿無絶期(차한면면무절기) 님을 사모하는 이 마음의 한은 끝이 없으리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9-17

은어, 잡는 독특한 방법이 있다

한국과 일본, 중국과 대만 정도의 지역에만 분포하는 은어는 최대 30cm 정도까지 자라는 물고기다. 맑은 물이 아니면 살지 못하기에 조선의 선비들은 시문(詩文)을 통해 은어의 깨끗하고 정갈한 습성을 자신들의 청빈에 비유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건 만주 지방의 은어는 압록강에서는 사는데, 송화강엔 서식하지 않는다고 알려졌다. 아마도 물의 맑고 탁함이 그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낚시 고수는 생물학자 이상으로 은어의 이동 경로를 잘 파악하고 있다. 강태공들에게 최고의 손맛을 선사하는 물고기이기 때문이다. 매년 4~5월은 바다에서 월동한 은어가 하천으로 올라오는 시기다. 9월이면 산란을 하고, 알을 낳은 은어는 한 마리 빠짐없이 죽는다. 생사(生死)의 덧없음을 미물도 보여주는 것. 은어를 잡는 독특한 낚시 방법은 여러 번 들어도 들을 때마다 흥미롭다. 하천 여울진 곳에 영역을 형성해 일정 구역에서만 활동하는 은어는 동족이지만 다른 은어가 자기 구역에 드나드는 걸 반기지 않는다. 이를 이용해 은어 잡는 법은 아래와 같다. 일단 은어 한 마리를 잡아 그걸 낚싯줄에 묶는다. 그 줄에 여러 개의 낚시 바늘을 주렁주렁 매단다. 아직 죽지 않은 은어를 포획한 곳과 다른 구역에 던져 놓으면 그 은어를 쫓아내기 위해 다른 은어들이 몰려들고, 당연한 수순처럼 낚시 바늘에 여러 마리의 은어가 걸린다. 은어를 미끼로 은어를 잡는 것이다. 이 기상천외한 은어 낚시 방법을 이이제이(以夷制夷·오랑캐로 오랑캐를 잡는다)라 불러도 좋을까? 만약에 조선 선비들이 아직 살아있다면 “어째서 청류귀공자를 오랑캐에 비유하는가”라며 화를 낼 지도 모르겠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9-16

왕피천에 사는 ‘귀공자’를 만난 적 있나요?

‘은어(銀魚)’라... 세상이 붙인 이름에서부터 귀족티가 줄줄 흐른다. 은처럼 빛나는 물고기란 뜻인가, 그게 아니면 은처럼 값져서 귀한 사람의 밥상에 오르는 생선이란 의미인가? 식자(識者)라고 말할 것까지는 없겠으나, 시대불문 출간되는 소설을 꾸준히 따라 읽어간 한국문학 애호가들에게 ‘은어’의 이름을 드높인 사람이 두 명 있다. 울진 왕피천·영덕 오십천 물 맑고 깨끗 ‘청류귀공자’ 별칭 지닌 은어 살기 적합 ‘조선왕조실록’에도 여러 차례 기록 등장 높은 품계의 맛있게 잘 말리는 기술자 입맛 까다롭던 연산군 은어구이 즐겨 1990년대 중반. 당시 주목받는 신진 소설가로 이름을 높여가던 윤대녕이 ‘은어낚시통신’이란 제목의 단편집을 출간한다. 그 책의 표제작은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물론, 나이 지긋한 독자까지 적지 않은 이들이 아껴가며 읽은 20세기 막바지 빼어난 소설 가운데 하나다. 시시껄렁한 이야기 하나를 보태자면, 서울의 유명한 대형서점 가운데 한 곳에선 책의 제목만 보고 ‘은어낚시통신’을 소설 판매대가 아닌 ‘취미 서적’으로 분류해 진열했었다고. 오래전 일이니 지금 와서 그게 사실인지 풍문인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여기에 편견 없이 한국 소설을 읽고 거침없이 평가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한다’는 거장 문학평론가 김윤식(2018년 별세)이 ‘은어’와 ‘윤대녕’에게 날개를 달아준다. 앞서 언급된 작품을 “존재의 시원(始原)을 찾아가는 문장”이라 상찬한 것이다. 그로부터 30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 김윤식은 죽었고, 윤대녕도 갑년을 훌쩍 넘긴 문단 중견이 됐다. 책이 나왔을 때 군대를 다녀온 복학생이던 기자는 뜬금없게도 소설에 담긴 은유와 함의가 아닌 ‘은어 맛’이 궁금해졌다. 그때까진 은어를 먹어본 적이 없었으니. 경상북도 울진 왕피천과 영덕의 오십천은 물이 맑고 깨끗하다. ‘청류 귀공자’란 별칭을 지닌 은어가 살기에 딱 좋은 환경. 20세기 낚시꾼들은 은어가 바다에서 민물로 이동하는 계절이면 단단히 채비를 하고 은어잡이에 나섰다. 낚은 은어는 자신도 먹고, 이웃에게도 나눴다고. 은어는 회로도 먹고, 구이로도 먹고, 때로는 조림도 해먹는다. 지난 7월. 울진으로 취재여행을 갔다. 동해선 울진역에서 왕피천으로 가는 길. 나이 지긋한 택시기사에게 물었다. “요즘도 왕피천에서 은어가 잡히나요?” 그에게서 건조하고 간명한 대답이 돌아왔다. “옛날에 비하면 거의 안 잡힌다고 봐야죠.”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 기사는 프로 수준의 은어낚시 솜씨를 가진 죽마고우가 있고, 그 덕분에 몇 해 전까진 은어회를 먹었다고 했다. 기자가 은어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먹어본 건 7년 전 경북 봉화군의 한 식당에서다. 구이와 조림이 상에 차려졌는데, 잔가시가 너무 많아 발라내기가 거추장스러웠다. 책에서 읽기엔 ‘은어의 살에선 싱싱한 수박향이 난다’고 했는데, 글쎄…. 비릿한 풀향을 느낀 것도 같은데, 잘 모르겠다. 내 입엔 맞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자연산이 아닌 양식이라서 그랬나? ‘조선왕조실록’엔 은어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400~500년 전엔 수조와 냉장 시설이 장착된 트럭이 없었으니, 살아있는 상태론 왕에게 은어를 보낼 수 없었다. 그랬기에 은어를 맛있게 잘 말리는 기술자를 나라에서 가려 뽑았고 그의 품계가 꽤 높았다는 기록, 성격만이 아니라 입맛까지 까다롭던 연산군이 은어구이를 좋아했다는 이야기 따위가 전한다. 먹는 ‘은어’가 아닌 소설집 ‘은어낚시통신’에 얽힌 후일담도 있다. 소설가 윤대녕은 기자 초년병이던 2004년 제주도에서 만나 새벽까지 통음한 적이 있다. 소설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영화배우 전지현에 관해 이야기 나눴던 기억이 난다. 그보다 3년 전인 2001년 9월엔 평론가 김윤식의 퇴임 강연을 취재하러 서울대에 갔었다. 당시 연합뉴스 문학담당 기자였던 이성섭과 동행했는데, 교수 한 명의 퇴임 강연에 그토록 많은 기자가 몰린 것을 이전에도 이후에도 보지 못했다. “과연 김윤식”이란 말이 나올 법했다. ‘은어낚시통신’을 읽고 ‘존재의 시원’을 말했던 김윤식. 시원이 있다면 종국(終局) 또한 있을 텐데, “존재의 종국은 뭘까요?” 묻고 싶지만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없다. 이렇게 쓰고 나니 아주 조금 서글퍼지는 감정을 감추기 어렵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9-16

지자체 실정 맞는 방재 시스템으로 문화재 살린다

태풍, 홍수, 산불 등의 재난은 지자체 단위로 되풀이되지만, ‘재난지역 선포’와 같은 사후 조치에 집중됐다. 사전 예방 차원의 체계적 방재 시스템이 자리 잡지 못한 것이다. 이번 기획은 지자체 실정에 맞는 문화유산 방재 시스템을 구축 필요성을 제시하고, 농어촌 곳곳의 소중한 유산을 어떻게 지켜낼지를 탐구한다. 고령화 등으로 재난에 더 취약해진 자연 속 국가 유산을 지키는 데 필요한 ‘한국형(K)-문화유산 방재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마련해야 하는데, 일본의 경험을 토대로 경북은 물론, 전국 차원의 정책 수립에 필요한 시사점을 제공할 예정이다. <글 싣는 순서> 1. 산불 등 재난에 취약한 국내의 문화유산 2. 실제 재난으로 소실된 지역별 문화유산 3. 일본의 문화재 방재 연구기관 경험 4. 일본의 문화재 방재 정책 성공 사례 5. 한국형(K)-문화재 방재 정책의 방향성 ◇ 말로만 하는 방재, 현장은 ‘구멍투성이’ 2008년 숭례문 화재는 한국 문화재 방재 정책의 분기점이었다. 문화재청은 이후 IoT 기반 무인 경비, 1·2차 감지구역을 활용한 화재·침입 경보, 정기 안전 점검과 재난 유형별 매뉴얼 등 ‘한국형 방재’의 틀을 세웠다. 2030년까지 목조 국가 유산 방재시설을 고도화하고 2040년까지 석조·동산 문화재까지 첨단 설비를 확대한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하지만 2021년 문화재청의 방재환경 모니터링 결과는 냉혹했다. 경북 경주 기림사 대적광전은 감지기와 소화전이 기준에 미치지 못했고 귀래정은 자동화재속보설비와 CCTV가 아예 없었다. 대구 북지장사 지장전은 화재 수신기가 이쑤시개로 고정돼 있었고, 동화사 대웅전은 전기배선 노후와 관제 모니터가 불량으로 방치돼 있었다. 현장 전문가들은 “설비가 있어도 관리 인력이 부족해 유사시 제대로 작동할지 장담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기후 위기까지 겹치며 위험은 더욱 커졌다. 경주는 지정문화재만 900여 건으로 전국 최다를 자랑하지만, 태풍·폭우·산불 등 복합재난에 가장 취약하다. 2016년 지진은 ‘지진 안전지대’라는 인식을 무너뜨렸고 태풍 ‘힌남노’는 불국사·석굴암 인근 산사태를 불러왔다. 산림의 18%가 소나무 재선충으로 고사해 산불 확산 위험도 크다. ‘종이 매뉴얼’에 머문 방재 대책으로는 더는 버틸 수 없다는 경고다. ◇ “문화재도 생명이 있고 유한하다···재난 대비가 곧 생명선” 경주 신라문화유산연구원 김형석 연구원은 문화재 보존을 ‘영원한 가치’로만 바라보는 시각이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문화재를 과거의 고정된 유산이 아니라 “생명이 있고 유한한 존재”로 이해해야 한다며 보존 구역에 있다는 이유로 무조건 생명을 연장하려는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 연구원은 경주의 지형과 산림 구조를 가장 큰 위험 요소로 꼽았다. 그는 경주가 국토의 70% 이상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지정 문화재만 900여 건에 이르며 산림의 18%가 소나무 재선충 피해를 입어 산불 확산 위험이 특히 크다고 말했다. 불이 붙기 쉬운 소나무 위주의 식생은 “산불을 키우는 연료가 된다”는 점도 강조했다. 2016년 경주 지진과 태풍, 가을 집중호우가 석굴암과 불국사를 반복적으로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그의 설명이다. 대책을 묻자 김 연구원은 일본의 사례를 언급했다. 일본은 모든 문화재 건조물에 ‘문화재 보존·활용계획’을 세우고 국가·지자체·민간이 협력하는 체계를 갖췄다는 것이다. 그는 “문화청이 정책과 재정을, 지자체가 지역 방재계획을, 소유자가 일상 점검을 담당하며 대형 재해가 발생하면 ‘문화재 레스큐’가 즉시 가동된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주민 훈련과 매뉴얼 정비, 방화문·스프링클러 설치, 내진 보강,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이 체계적으로 진행된다는 점도 덧붙였다. 한국이 배워야 할 점에 대해 김 연구원은 한국의 산악 지형이 일본보다 산불 위험이 훨씬 크다고 지적하며 사건 후 특별 예산으로 단기 복구에 나서는 방식은 한계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후변화로 재해는 늘어날 것이며 문화재 방재를 사회적·교육적 가치로 공유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 “문화유산도 재난 환경 변화에 맞춰야” 백민호 강원대 소방방재학부 교수는 국가 유산이 지닌 ‘역사성과 장소성’이 오늘날 재난 취약성으로 되돌아오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문화재는 과거의 기후와 사회 조건 속에서 살아남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며 “기후 변화로 재난 양상이 변했고 과거 안전지대였던 입지조차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고 말했다. 또 “문화재를 영원한 존재로만 보는 인식에서 벗어나 구조적·비구조적 대책을 병행하고 관리 인력과 제도를 현실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 교수는 국가 유산이 재난에 취약한 이유에 대해 “역사성과 장소성이 문화유산의 강점이자 약점인데, 사찰·산중 유적처럼 인적이 드문 곳이 많아 전기·소방 등 기반 시설이 부족하고 기후가 변하면서 과거엔 안전했던 입지가 오히려 위험 요소가 됐다”라고 설명했다. 최근 재난 환경 변화와 관련해서는 과거에는 마을과 산사가 공생하며 숲을 관리했지만, 지금은 인구가 줄고 숲은 울창해져 오히려 불길을 키운다고 지적했다. 그는 “산불은 과거보다 확산 속도가 빠르다. 지진도 더 이상 예외가 아니다”고 경고했다. 백 교수는 “2005년 낙산사 산불, 2008년 숭례문 화재를 계기로 법은 정비됐지만, 문화유산은 전국에 흩어져 있고 환경이 모두 달라 일률적 적용이 어려워서 개별 유산의 특성과 위치를 반영한 맞춤형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자동 소화설비나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려면 관을 매립하고 못을 박아야 하는데 이 과정이 문화재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어 시설 설치가 어렵다고 한 백 교수는 “전력 차단이나 지형 제약으로 실제 화재 때 장비가 작동하지 못할 수도 있어 설치만큼 유지·관리, 현장 대응 역량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또 “일본은 설계·시공·유지관리를 일원화하고 현지 관리자가 장비를 직접 조작·훈련하도록 하는 시스템이고, 우리는 관리 업체가 자주 바뀔 뿐만 아니라 바뀌면서 도면과 현장이 달라지는 데다 장비가 제 기능을 못 하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구조적 대책과 비구조적 대책을 병행해야 한다”고 지적한 백 교수는 “물리적 설비를 강화하는 동시에 관리 인력의 전문성을 높이고 매뉴얼을 현실화해야 하고, 문화재는 영원하지 않다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문화재를 과거의 유산이 아닌 현재 살아 있는 존재로 바라보고 국가·지자체·민간이 함께하는 ‘한국형 문화유산 방재 시스템’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9-16

“노포는 오래 버틴 사람이 만든 자리”

죽도시장에서 40여 년 개복치로 가업을 지켜온 것이 결코 쉬울 수 없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IMF, 코로나19, 태풍, 불황의 파도가 쉴 새 없이 닥쳤다. 하지만 이 대표는 개복치를 꿋꿋이 지켜냈다. 장사는 정직하게 해야 고객들이 믿고 다시 온다는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왔다는 그의 목소리에는 단단한 확신이 묻어났다. ‘시장’이 아니라 ‘사람’이 그 자리를 만들어왔다는 자부심이었다. 부모가 35년, 내가 41년 넘게 이어온 가업 대학서 다양한 과정 수료•日 견학 등 노력 생선 넘은 생명, 상품 넘은 사명으로 지켜 어획량 급감… 동해서 사라져가는 개복치 해체 기술•노하우 등 전통 명맥 끊길수도 누군가는 계속 다뤄 다음 세대로 이어야 단순히 생선 장사가 아닌 인생을 거는 일 내가 이 생선을 왜 다루는지 잊지 않아야 포항의 고유한 역사를 개복치에 접목해 새 관광 자원으로 발전시켜 나가길 바라 “사람들은 노포를 오래되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노포는 오래 버틴 사람이 만든 자리죠.” 가업을 이어받은 사람들의 어깨는 무겁다. 부모 세대가 35년, 본인이 41년 넘게 이어온 수산물 유통의 중심에 ‘개복치’가 있다. 생선을 넘는 생명, 상품을 넘는 사명으로 개복치를 지켜온 이영태 대표는 수산 분야에서 권위자가 되고 싶은 포부가 있다. 그만큼 노력도 많이 했다. 서울대학교 해양정책 최고과정, 경북대학교 산업대학원, 한동대학교 해양수산 CEO 과정, 계명대학교 최고위과정 등을 수료했다. 선진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을 견학하기도 했다. 경력이 오래되었다고 안주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꾸준히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였다. 그래야만 고객에게 좋은 품질의 먹을거리를 제공할 수 있고 유통 또한 발전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생선 장수라고 부르지만, 나는 개복치로 포항을 알린다는 생각으로 일해요. 개복치가 포항에 왔다가 그냥 사라지는 생선이 아니라 여기에 뿌리내리게 하는 것, 그게 내 사명이라 여깁니다.” 이 대표는 앞으로도 개복치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가공식품 개발, 체험형 매장, 젊은 요리사와의 협업까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죽도시장의 작은 생선가게 안에는 개복치를 세상에 알린 한 남자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역 가업의 본질은 ‘상속’이 아니라 ‘기억의 실현’이라는 그의 말은 시장 어귀를 지키는 오래된 간판처럼 묵직하게 다가온다. 동해안에서 사라진 개복치 개복치는 동해안에서 매년 5월 보리누름에서 11월 나락누름 사이에 잘 잡혔다. 그래서 죽도시장에서는 1990년대 중반까지 ‘개복치 떼기’라 불리는 도매 행위가 활발했다. 하지만 수온과 해류의 경로 변화 등으로 개복치 어획량이 급격하게 감소했다. 포항, 강구 등 동해에서 잡히던 것이 해양 생태계 변화로 남해와 서해에서 출현 빈도가 높아지고 있으며 지금은 대만에서 많이 잡힌다. 이제는 개복치의 공급량보다 수요량이 많다. 서울 63빌딩 뷔페에 개복치를 공급하다가 물량이 부족해 제공하지 못한 적도 있고, 중국 칭다오 수산박람회에서 130톤을 주문받았지만 공급을 미룬 적도 있다. 개복치가 많을 때는 한 해 70톤 이상 취급했고, 부산, 통영에서 잡힌 개복치가 하루 50마리 넘게 태영수산으로 들어왔다. 그럴 때는 이 대표가 밤늦게까지 개복치 55마리를 해체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연간 물량이 하루치가 안 될 정도로 저조하다. 어느 해는 1년간 포항수협과 구룡포수협에 위판된 개복치가 12마리, 전체 양이 1070킬로그램에 불과할 때도 있었다. 현재 태영수산에서 판매하는 대부분의 개복치는 대만 해역에서 수입한 것이다. 이 대표는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대만 해역의 개복치를 들여왔다. “포항에서는 개복치가 안 잡히지만 포항의 이름으로 계속 알리고 싶어 수입을 결정했죠.” 이 대표는 개복치를 ‘지키는’ 일을 넘어 ‘보여주는’ 일을 하고 있다. 세계대표자대회 수출상담회, 수산박람회, 글로벌 회의, 죽도시장 퓨전 수산물 요리축제, 메가쇼(국내 최대 소비재 박람회), 팔도밥상페어까지 이어지는 개복치 홍보의 여정은 전 세계로 확대되고 있다. 그는 단순히 ‘생선을 판다’는 생각을 넘어 ‘식문화’를 만들어간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노포의 또 다른 과제는 ‘지속’이다. 개복치의 저변 확산이 지속되고, 다음 세대로 해체 기술이나 상품의 노하우, 유통기술이 이어지는 일은 중요하다. “개복치는 사라지는 생선입니다. 기술도 유통도 기억도 같이 사라지겠죠. 그걸 막기 위해 누군가는 계속 개복치를 다루어야 합니다.” 지금 포항에서 개복치를 전문적으로 유통하는 곳은 손에 꼽힌다. 생선이 사라지면 먹는 사람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 생선을 지켜온 전통 방식, 생선을 다루는 손의 감각, 생선을 기다리는 시간, 유통 노하우가 함께 사라진다. “가게 문을 닫는 순간, 이 생선은 다시 ‘듣도 보도 못한 물고기’로 돌아갈 수 있어요. 그런 생각을 자주 해요.” 개복치 전문 유통은 인생을 걸어야 하는 일 이 대표는 개복치 홍보에 온 정성을 쏟고 있다. 하지만 76년간 개복치 유통을 이어온 열정과 노력이 자신에게만 한정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 느낀다. “내 손에서 끝나면 안 되잖아요. 다음 사람이 이어야 해요. 누군가 기술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세대에 어떻게 이 노하우가 이어질 수 있을지, 여전히 과제로 남는다. 최근에는 노포의 지속을 ‘가업 승계’가 아닌 ‘지속 가능한 가치’에서 찾는 시도가 많아졌다. 그는 “자식에게 물려주고도 싶지만 고생할까 봐 권하지는 못한다”며 “자식들이 원하지 않으면 강요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단순히 생선 장사가 아니라 인생 전체를 걸어야 하는 일이니까 선뜻 넘기기 어려운 거죠. 누구든 이 일에 진심이 있다면 기꺼이 넘길 겁니다.” 이 대표는 기술을 배우는 것보다 중요한 건 ‘개복치에 대한 책임감’이라고 강조했다. 손님 한 명 한 명의 입맛과 반응을 기억하고, 계절에 따라 맛이 변하는 생선을 이해하며, 무엇보다 자신이 이 생선을 왜 다루는지를 잊지 않는 마음이 전수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대표는 누군가가 개복치 일을 이어간다면, 개복치의 가치를 잘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했다. 지역 협동조합, 로컬푸드 플랫폼, 청년 창업 프로그램과 연계해 노포 기술을 보존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지방의 소규모 노포들이 직면한 문제는 단순한 ‘경영 승계’가 아니라, ‘지방 산업 문화의 단절’이라는 점에서 지역사회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포항 역사와 개복치를 접목해 관광 자원으로 만들고 싶어 “죽도시장 안에 개복치를 소개하는 전시 공간이 마련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몇 해 전부터 교육과 홍보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해양수산부, 지방자치단체와 연계해 개복치에 대한 연구, 기록, 시식 행사를 열고자 하는 구상도 있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기에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하고 싶다. 포항의 고유한 역사를 개복치에 접목해 새로운 관광 자원으로 발전시킨다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다. 개복치는 포항이 ‘스스로의 바다’를 기억하는 상징이다. 영일만에 개복치가 사라졌다고 해서 개복치에 대한 기억마저 사라지게 두지 않겠다는 이영태 대표 같은 사람이 있는 한 포항은 ‘개복치를 기억하는 도시’로 남게 될 것이다. <끝> 글 = 정미영 수필가 사진 = 김 훈 작가

2025-09-14

“꾸준함을 더한 ‘작은 실천’ ‘원리 향한 집념’ 실력 키워”

- 포스코 명장으로 선정된 소감과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포항제철소 압연설비2부 STS압연정비섹션에서 근무하고 있는 신재석이다. 1987년 포스코에 입사해 어느덧 38년째 압연정비 분야에서 한 길을 걸어왔다. 올해, 포스코 명장이라는 영예로운 자리에 오르게 되어 감회가 남다르다. 명장이라는 타이틀은 내게 큰 자부심이자, 동시에 무거운 책임감을 안겨준다. 사실 명장이란 목표는 나에게도 한때는 너무 멀고 막연하게만 느껴졌다. ‘명장이 되겠다’는 거창한 꿈을 품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매일매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오늘 내가 현장에서 개선할 수 있는 한 가지, 이번 달에 꼭 이루고 싶은 작은 변화, 올해 반드시 남기고 싶은 성과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명장이라는 자리까지 오게 된 것 같다. 포스코에서의 시간은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수많은 기계 설비와 마주하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상황, 그리고 현장에서 크고 작은 난관들을 겪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으로 한 걸음씩 나아갔다. 명장이라는 자리는 결코 혼자만의 힘으로 오를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함께 땀 흘린 동료들, 선배와 후배, 그리고 나를 믿어준 회사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다. 냉연정비과에서 ‘정비인의 길’ 시작 문제 설비 직접 조립하며 원리 터득 현장에서 부딪히며 ‘기술 본질’ 이해 2022넌 냉천 범람 당시 침수 제철소 ‘비상 복구용 다용도 유압장치’고안 발전기에 전기공급 위기 해결하기도 노하우·경험쌓은 후배들큰성장위해 해외법인 현장근무도 적극 권하고파 - 어린 시절과 포스코 입사 전 성장 스토리도 말해달라. 나는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에서 태어났다. 상동은 낯익은 곳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두메산골도 아니었다. 당시 상동은 텅스텐 광산촌으로, 속된 말로 ‘잘나가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의 생활상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수입이 좋아 자녀들이 과외수업을 받을 정도였지만, 광산에서 일하지 않는 이들은 농사를 지어 광산촌에 납품하며 빈곤한 생활을 이어갔다. 나 역시 광산과는 거리가 먼 농가에서 9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터 하교 후 곧바로 소에게 풀을 먹이는 일을 맡았다. 소를 데리고 산에 오르는 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어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생각의 틀, 방법의 틀을 만들게 되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틀에 꾸준함을 더해 성과를 이뤄내는 습관이 자리 잡았다. 고향인 상동을 떠난 것은 포철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포항으로 오게 되면서였다. 포철공고를 선택한 이유는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가난한 농부인 아버지와 많은 식솔을 생각하면 대학 진학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포철공고를 졸업할 때쯤 자연스럽게 포스코 입사를 결심했다. - 포스코에서의 첫 시작은 어땠는지? 나는 포스코 압연정비부 냉연정비과에서 정비인의 길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설비를 새로 구축하고 안정화하는 시기여서, 선배들도 모든 것을 완벽히 아는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이 갖춰진 상태도 아니었기 때문에, 설비에 문제가 생기면 직접 뜯어보고 조립하면서 원리를 스스로 터득해야 했다. 단순히 고장 난 부품을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고쳐서 다시 사용하는 일이 많았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그만큼 현장에서 부딪히며 배우는 경험이 나를 성장시켰고, 기술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줬다. - 현장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무엇인가? 이처럼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며 얻은 경험을 통해, 나는 기술개발에서 ‘원리를 이해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단순히 주어진 방법을 따르기 보다는, ‘왜 이렇게 되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원인을 파악하려고 했다. 실제로 기름 농도를 측정하는 센서를 활용해, 냉각수에 섞여 나온 기름의 양을 알아낸 적도 있다. 이런 응용이 가능했던 건 센서의 원리를 잘 이해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후배들에게도 항상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직접 부딪히고 고민하면서 원리를 스스로 터득하라”고 조언한다. 이런 과정에서 진짜 실력이 쌓이고, 작은 성취라도 스스로 의미를 찾으면 힘든 일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내면의 힘과 지혜가 생긴다. - 제철소가 침수된 위기 상황에서 ‘비상 복구용 다용도 유압장치’를 고안해 문제를 해결했다고 들었다. 이런 발상의 전환은 어떻게 가능했는지? 2022년 냉천 범람으로 인해 제철소가 침수되고, 전기가 끊기면서 유압 시설까지 멈춰버린 현장을 마주했을 때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 제품이 설비에 그대로 물려 있는 상태라, 전기가 복구되더라도 바로 시운전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떠올린 것이 ‘비상 복구용 다용도 유압장치’였다. 설비에 임시로 유압을 공급할 수 있는 장치인데, 비상용 발전기를 연결해 전기를 공급하면 이동식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이 장치 덕분에 설비에 물려 있던 제품을 안전하게 빼내고, 전기를 복구해 바로 시운전을 할 수 있었다. 사실 이 장치가 획기적인 기술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위기 상황에서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방법을 떠올릴 수 있었던 건, 평소에 현장 문제를 깊이 고민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습관 덕분이었다. 정비업무를 하면서 늘 ‘만약 이런 상황이 오면 어떻게 대응할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대안을 머릿속에 그려왔다. 이번에도 그 경험이 발상의 전환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위기 속에서 현장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늘 새로운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느낀다. - 명장이 된 이후, 후배 양성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최근 들어 후배 양성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다. 가능하다면 후배들이 해외에 나가 현장을 직접 경험해보길 권하고 싶다. 설비에 대한 노하우와 경험이 쌓이면 해외 법인에서 근무할 기회가 주어지기도 하는데, 막상 현지에 도착하면 상황이 절대 녹록지 않다. 본사에서는 문제를 함께 풀어줄 동료와 전문가가 많지만, 해외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 문제가 생기면 모두가 나만 바라보는 상황이 펼쳐진다. 이런 상황은 실로 엄청난 부담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포스코 대표, 더 나아가 국가대표’라는 책임감을 절실히 느꼈다. 자연스럽게 ‘최고의 전문가가 돼야겠다’는 각오가 생기고, 실제로도 큰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이 소중한 경험을 어떻게 하면 더 많은 후배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앞으로도 후배들이 책임감을 느끼고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선배로서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지식을 나누는 데 힘쓰고 싶다. - 기술 특허, 수상 경력, 그리고 자격증까지 화려한 성과를 이루었는데, 그 원동력은 무엇인가? '멈추지 않고 작은 실천들을 행하는 것’이 내 삶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이, 현장에서 마주치는 문제를 그냥 넘기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개선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압연기능장, 용접기능장, 산업안전기사 등 여러 자격증을 취득했고, A등급 7건을 포함해 총 69건의 특허도 출원했다. 이런 성과들이 쌓일 때마다 스스로도 자부심을 느낀다. 또, 오랜 시간 불우 아동을 1대1로 돕는 자원봉사를 하면서, 나눔의 기쁨과 책임감도 배우고 있다. 앞으로도 내 삶에서 작은 실천들을 이어가며 주변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 마지막으로, 명장으로서 앞으로의 목표와 다짐은 무엇인가? ‘명장’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는 단순히 기술력이나 경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 같다. 이제는 나의 경험과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하고, 현장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며, 더 나은 포스코를 만들어가는 데 힘을 보태야 한다는 사명감이 더 크게 다가온다. 앞으로도 늘 그랬듯,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에 집중하며, 현장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다하고 싶다. ‘포스코 명장’ 신재석 포항제철소 압연설비2부 STS압연정비섹션 부장은… △ 1968년 1월 5일생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 졸업 △ 1987년 7월 입사 (근속연수 38년) △ 2006년 포스코 창립기념 모범사원 선정 △ 2021년 경상북도 최고장인 선정 (기계분야) △ 2023년 대한민국 우수숙련기술인 선정 (기계분야) △ 2023년 국회의원 표창장 (봉사 부문) △2025년 포스코 명장 /김진홍경제에디터 kjh25@kbmaeil.com

2025-09-14

“개복치에 한평생 매달린 게 헛되지는 않았네요”

개복치는 수질과 빛 등의 스트레스에 매우 민감하다. 유통 중 폐사율이 높고, 살아 있는 상태로 출하하기 어렵다. 기온과 수온의 변화에 민감하고, 피부가 얇고 물렁해 쉽게 상한다. 운반과 손질도 까다로워 이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곳이 드물다. 그래서 개복치는 전문적인 해체 기술이 필요하다. 해체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쓸개를 터트리면 안 된다. 쓸개가 터지면 개복치 전체에 쓴맛이 퍼져 판매할 수가 없다. 아가미 이빨에 독이 있어 조심스럽게 도려내야 한다. 날개 지느러미를 먼저 잘라내고 배 쪽을 절개해 내장류를 분리해 제거한 뒤, 피부를 벗기고 몸통을 분할한다. 일반 생선처럼 삼등분(머리-몸통-꼬리)이 아니라 살 부위 중심으로 나눈다. 그런 다음 살을 분리하고 부위별로 분류한다. 1980∼90년대, 포항은 죽도시장과 동빈내항을 중심으로 어시장 체계가 재편되었다. 이 흐름에 맞춰 이영태 대표는 개복치 전문 유통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때가 1984년이었다. 부모 세대의 수산물 유통 경험을 기반으로, 개복치 유통 노하우를 포항에서 최초로 정착시킨 것이다. 포장 방식, 수조 온도 유지, 도착 즉시 손질 처리 체계를 개발해 개복치의 상품화를 이끌었다. 41년 전 처음 제조 시도한 껍질로 만든 수육 쫄깃한 청포묵처럼 초고추장 곁들여 먹어 유통 노하우 포항서 최초 정착 ‘상품화’로 지역 경조사 상차림에 ‘단골 메뉴’로 등극 2012년 버리는 살코기로 만든 장조림 히트 포항시 추천으로 ‘개복치 명인’ 신청 추진 중 SNS 등서 입소문 ‘자자’ 택배시스템도 갖춰 “전통은 지키되 시대 흐름에 맞춰 가야죠” 개복치 수육과 장조림 개발 태영수산은 개복치를 좀 더 먹기 편한 대중적인 음식으로 보급하기 위해 개복치 가공식품인 수육과 장조림을 개발해 판매하고 있다. 현재 개복치 가공식품은 상표등록 보유 및 포항시의 추천으로 ‘대한민국 식품, 개복치 명인’으로 신청을 추진 중인데, 이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박정자 씨는 개복치를 전문적으로 유통하려고 보니 개복치를 뚝뚝 잘라 파는 방식으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시어머니가 개복치를 팔 때는 뚝뚝 잘라서 2000원, 3000원 이렇게 대강 팔았어요. 그날 팔지 못한 건 버릴 수밖에 없었고요. 장사를 이렇게 해서야 뭐가 되겠냐 싶더군요.” 박정자 씨는 손님들이 개복치를 간편하게 사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숱한 시행착오를 걸쳐 탄생한 것이 개복치 수육으로, 개복치의 겉껍질을 벗겨 삶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41년 전에 태영수산이 처음 시도했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개복치 껍질에 각종 재료를 넣고 푹 고아 껍질이 흐물흐물해지면 틀에 넣어 굳힌 음식으로 초고추장에 곁들여 먹는다. 피쉬 콜라겐으로 피부 미용과 뼈 건강에 도움이 되는 저칼로리 영양식이기도 하다. 모양은 청포묵과 비슷하고 비린내가 거의 없으며 단백하고 쫄깃한 식감으로 남녀노소가 즐길 수 있는 깔끔한 맛이다. 비린내가 없도록 개발한 수육은 포항에서 경조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 되었다. 1990년대에는 대방예식장, 목화예식장, 청솔밭에 납품했으며 나중에는 포항의료원 장례식장, 포항시민장례식장 등에 공급했다. 끊임없는 고민과 연구 끝에 개복치 상품화에 성공 새길을 여는 일은 수고스럽고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하다. 개복치 수육을 상품화하는 과정도 그랬다. ‘그냥 대충 잘라서 팔걸’ 하고 여러 번 후회하기도 했다. 문어처럼 삶아서 팔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해체 작업을 거쳐 먹을 수 있는 부위와 먹을 수 없는 부위를 선별해 각각 조리법에 맞게 요리해야 하므로 시작부터 까다롭기 그지없다. 예전에는 개복치를 잘라서 팔면 손님들이 집에서 조개껍데기나 감자껍질 벗기는 숟가락으로 가죽처럼 질긴 개복치 껍질에 붙은 속살을 직접 벗겨냈다. 이렇게 벗겨낸 속살을 삶거나 쪄서 채반이나 짚 위, 대나무 발 위에 얹어 식힌 다음, 하얗게 덩어리가 되면 닭가슴살처럼 뜯어 먹었다. 그 모습이 불편해 보인 이 대표 부부는 손님들이 편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연구해 조리법을 바꾸었다. 부부는 요리사가 아니라 장사하는 사람이었지만 맛을 내기 위해 요리사처럼 고민하고 여러 시도를 해보았다. 비린내를 없애려고 식초, 마늘, 생강, 소금, 간장, 된장 등을 넣어보고, 식감을 위해 불 조절, 삶는 시간 조절을 되풀이하는 몇 년 동안 버려진 개복치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노력 끝에 태영수산만의 개복치 수육이 탄생했다. 수육이 맛있다고 소문나자, 가게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독립해 상점을 차렸는데, 그 수가 일곱이나 되었다. 경쟁자가 많아지니 수육 판매만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새로운 걸 개발하게 되었다. 그렇게 개복치 장조림을 2012년에 개발했다. 개복치 속살에 물, 식초, 설탕, 간장을 넣고 비린내를 제거하기 위해 태국 고추, 마늘 등을 넣어 조린 요리다. 요리 비법은 사흘 동안 달이고 식히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간장에 조려서 보관이 쉬우며, 짭짤한 맛과 쫄깃쫄깃한 식감으로 입맛이 없을 때 밥반찬으로 기가 막힌다. 개복치 장조림을 개발하는 데에도 사연이 많았다. 개복치 껍질로 수육을 만들어 팔다 보니, 버려지는 살코기를 감당할 수 없었다. 죽도시장에서 살코기 한 통을 쓰레기로 버리는데 1만 원이 들었다. 쓰레기 버리는 값이 100만 원이나 드니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당시 박정자 씨의 친정은 청송에서 사과 과수원을 했다. 사과나무 아래에 개복치 살코기를 갖다 묻으면 비료가 될 것 같아 흙구덩이를 파서 묻고 난 뒤에 등겨를 덮었는데, 며칠 뒤 친정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너희들 나무 밑에 뭐 했냐?” 고기 냄새를 맡고 멧돼지가 산에서 내려와 사과나무 밑을 들쑤셔서 과수원이 엉망이 된 것이다. 이렇게 골치 아픈 살코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장조림으로 만들어 판매하게 되었는데 시장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현재 중국, 홍콩, 베트남 등 여러 나라에 수출을 추진 중이다. “포항 가면 개복치, 개복치는 태영수산” 개복치의 도톰한 살은 젓갈과 장조림, 뼈와 내장은 국거리, 껍질은 수육, 이 밖에도 회, 두루치기, 대창구이 등으로 상품화되었다. 개복치를 꾸준히 연구하면서 조리법을 바꾸다 보니 손님들의 반응도 달라지면서 고객층도 확대되었다. 이 대표는 가공식품 개발과 함께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정성을 쏟았다. 급격하게 바뀌는 식문화와 유통 질서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것이다. 택배로 개복치를 구입할 수 있는 시스템도 갖추어 놓았다. “이제는 매장에서만 파는 시대가 아니잖아요. 노포라고 해서 전통만 고집해서야 되겠습니까. 전통을 지키되 시대 흐름에 맞춰 가야죠.” 그런 노력 덕분에 태영수산도 개복치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여러 언론매체에 소개되고 SNS와 유튜브에 화제가 되면서 입소문이 났다. 인스타그램을 보고 찾아왔다는 젊은 층과 외지 손님도 많이 늘었다. 강릉, 광주, 심지어 제주에서도 개복치 상품을 찾는다. 이 대표는 “인스타그램에서 보고 왔어요”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의 뿌듯함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사람들이 “포항 가면 개복치, 개복치는 태영수산”이라는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대표는 “개복치에 한평생 매달린 게 헛되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글= 정미영 수필가·사진= 김훈 작가

2025-09-10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그리고 봄’ 촬영지 주산지

금강산의 봄 풍경이 마치 황금처럼 빛나고 생동감이 넘친다고 해서 금강산(金剛山)이라 하고, 여름은 안개와 구름이 자욱한 모습이 신선이 사는 산과 같다고 하여 봉래산(蓬萊山)이라 한다. 가을은 붉게 물든 산의 모습에서 풍악산(楓嶽山)이라 하고, 겨울은 눈으로 덮여 마치 깨끗하고 청정한 골짜기 같다고 하여 개골산(皆骨山)이라 불리 운다. 이렇게 계절별 산의 아름다운 모습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경북 청송 주왕산 자락에 주산지라 불리는 저수지 또한 계절별로 아름다움을 표출하고 있다.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김기덕 감독은 주산지는 어느 한 계절에도 머무르지 않는다고 하면서 2003년 ‘봄. 여름, 가을, 겨울…그리고 봄’이라는 주산지를 배경으로 영화를 제작했다. 신비스러운 주산지의 사계절 변화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주산지 자연은 살아있는 생명체로 이루어져 있기에 계절을 달리하면서 시시각각으로 변모하는 자연의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 봄에는 생명의 탄생을, 여름에는 성장의 신비함을, 가을에는 황혼의 화려함을, 겨울에는 한 생명의 침묵을 노래한다. 그 중심에는 물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하늘에 목을 내밀고 물속에서 살아가는 왕버들 노거수이다. 주왕산 깊은 계곡에 자리한 ‘주산지’ 조선시대 농업용 저수지로 만들어져 사계절 신비로운 풍경, ‘황홀’ 그 자체 영화 촬영지로 유명… 명소로 우뚝 청송 주산지 상징 ‘왕버들’ 고사 위기 현재 300년 왕버들 6그루, 총 28그루 생태복원 등 ‘노거수 살리기’ 진행 중 주산지는 주왕산 깊은 계곡 속에 있어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계곡을 따라 30여 분을 걸어 들어가야 볼 수 있다. 주산지는 약 300년 전 1721년 조선 경종 때 농업용 저수지로 길이 100m, 너비 50m, 수심 8m로 축조되었다. 마을 주민의 울력으로 계곡의 잘록한 동쪽과 서쪽의 산자락을 부여잡고 묶어 놓으니 자연스럽게 분지에 물이 고여 산속의 작은 호수가 되었다. 주민이 만든 주산지에 계절별 풍경은 주왕산 신이 숨겨놓은 특별 전시장의 걸작품이다. 걸작품을 바라보는 순간, 나 또한 작품 속 일부가 되고 고요 속에 스며든다. 주산지는 사계절 내내 우리에게 기다림과 변화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신비로운 풍경은 마음속에 오래도록 잔잔히 머문다. 주산지도 사계별로 그 아름다움이 달라 별도의 계절별 이름을 붙여도 좋을 것 같다. 주왕산 치맛자락이 주산지를 감싸고 있으면서 때때로 치맛자락을 들쳐 흔들기라도 하면 그 풍광은 180도로 변하여 또 다른 선경의 황홀함에 빠져든다. 주왕산 자락에 자리한 주산지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다. 그리고 주산지 물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왕버들이 사계절 내내 변주곡처럼 다양한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전국의 많은 사람이 이곳의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기 위하여 또는 즐기기 위하여 찾아오고 있다. 계절별 풍광은 서로의 계절이 더 아름답다고 뽐내면서 자랑하는 것만 같다. 어느 계절이 못하고 좋음이 없이 모두가 훌륭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영화 촬영의 배경 지역으로 부각하여 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그리고 주산지 절경은 사진작가들의 1순위 촬영지로서 주왕산국립공원의 대표적인 경관자원이자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어쩐 일인지 물속 왕버들은 점점 쇠약해져 고사 되어만 갔다. 주왕산 주산지 하면 물속 왕버들이 압권인데, 이에 주왕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는 나무의 수세가 약화 되어 점점 쇠퇴해 가는 왕버들을 살리고 보완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기청산식물원 강기호 박사(현 국립세종식물원 본부장)가 맡아 진행되었다. 이에 나는 자문 위원으로 참여했다. 왕버들 고사 원인을 분석했다. 1987년 더 많은 농업용수 확보를 위하여 2m 둑 높이 공사를 한 결과 주왕산 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저수지에 모이면서 연중 만수로 인하여 저수지 주변에 살던 왕버들이 완전히 물에 잠기어 오늘날까지 물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오고 있다. 그러나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수문이 열리면 수면이 하강하여 왕버들 줄기에 난 부정근이 햇볕에 노출되어 줄기와 잎에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해 주지 못하여 수세가 약화 되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리고 수면이 낮아지면서 노출된 뿌리 주변의 경사가 심해 뿌리를 덮고 있던 흙이 유실되었다. 그 두 가지가 원인으로 밝혀졌다. 이에 노출된 뿌리를 낙엽이나 부엽토로 덮어주고 종종 물을 뿌려서 건조하지 않도록 하고 토양의 경사가 급하여 덮은 부엽토가 흘러내릴 수 있는 곳에는 돌쌓기하기로 하였다. 먼저 주산지 물속 왕버들이 고사한 빈자리에 이식할 왕버들을 찾기로 했다.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낙동강 상류 지역인 청송 파천면 신기리 하천에 왕버들이 군락을 지어 살아가고 있었다. 이곳에 살고 있는 가슴높이 둘레가 25cm 정도 되는 왕버들 4그루를 선택하여 이식했다. 이제 주산지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왕버들은 모두 28그루나 된다. 저수지 축조 당시에 살고 있던 나이 300살, 가슴 높이의 둘레가 2.4m 이상인 왕버들 노거수 6그루가 아직도 주왕산 주산지 사계의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는 주역으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가끔 이곳 물속의 왕버들을 찾는다. 볼 때마다 다른 풍광 다른 느낌을 받는다. 봄은 생명의 기운이 잔잔한 수면 위로 봄 햇살이 반짝이며 나무의 그림자를 어루만진다. 수면에 비친 풍경은 마치 꿈결처럼 아름답다. 산새들의 지저귐이 물 위로 울려 퍼지고, 봄바람에 이따금 물결이 일 때 주산지는 마치 초록빛 꿈의 호수이다. 여름은 자연이 그려낸 초록의 싱그러움이 온 세상에 넘쳐흘러 젊음과 희망을 느끼게 한다. 저수지에 물안개가 스며들면 풍경은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이다. 온천에 몸 담근 실루엣 걸친 왕버들은 푸른 향기 뿜어내는 천사이다. 가을의 왕버들 잎사귀는 붉고 노란빛으로 물들어 저수지에 담아 놓은 꽃바구니이다. 갈바람에 나뭇잎들은 하늘과 물속에서 춤춘다. 겨울의 주산지는 얼음과 눈으로 덮이면서 고요함을 더한다. 적막하지만, 그 안에서 묵직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내가 간택한 왕버들이 주산지 왕버들 후계목이 되어 잘 자라고 있었다. 사계절을 맞이하고 보내면서 영화 같은 소설 같은 아름다움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필자의 시] 주산지 왕버들 초록 꿈을 물들이는 녹화(綠花) 가지에 생명이 피어난다. 물안개 속 고요한 숨결 푸르름이 주산지에 깊게 뿌리내린다. 곱게 물든 단풍 수면 위 춤사위 바람이 꾸며 놓은 콘서트장 앙상한 가지에 서린 하얀 숨 고요 속에서도 생명은 깨어 있다. 주산지를 떠난 물속 왕버들 빈자리에 후계목 네 분을 모셔 오는 날 사계를 맞이하고 또 보내면서 만세무강을 기원한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9-10

다식, 다이어트의 적이지만 달콤한 유혹을 어찌...

다식(茶食)은 다소 떫고 쌉쌀한 차를 마시는 문화와 함께 발달해왔다. 한국과 더불어 중국과 일본에도 차에 곁들여 먹는 달콤한 과자가 있는 건 이 때문이다. 적지 않은 여행자들이 일본을 다녀올 때면 ‘일본판 다식’이라 불러도 좋을 화과자(和菓子)를 사온다. 화과자의 설탕 함유량이 엄청나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 일본 역시 녹차와 홍차를 마시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건 화과자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다. ‘나무위키’는 다식을 “한과의 일종으로 신라와 고려시대에 널리 성행했던 차(茶) 문화와 함께 생겨난 과자”라고 정의하며, “곡물가루를 꿀에 반죽하여 모양을 만든 것이기에 과도하게 달다. 두께는 동전 4~5개를 쌓아놓은 정도고, 크기는 손톱 만하게 작지만 하나만 먹어도 씁쓸한 녹차나 다류가 땡긴다”고 부연하고 있다. 그렇기에 체중 조절을 위해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이 먹기엔 적절한 음식이라고 할 수 없는 게 다식이다. 과도한 당분이 그 이유일 터. 하지만, 쳐다보기 아까울 정도로 예쁘고 화려한 동시에 혓바닥을 녹일 듯한 매혹적인 단맛은 다식을 쉽게 끊을 수 없게 만든다. 우리가 시나브로 커피와 담배에 중독되는 것처럼. 그렇기에 가능하면 먹는 양을 적절하게 조절하고, 송홧가루나 콩가루, 밤이나 참깨 등 몸에 덜 해로운 재료로 만든 다식을 선택하는 게 다식에 의한 폐해(?)를 미연에 방지하는 지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9-09

안동 양반들 별식 ‘헛제삿밥’과 ‘다식’을 아시나요?

아래 기사는 본지 홍성식 기자가 한국기자협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연재하고 있는 ‘역사와 스토리가 있는 영남 음식’을 일부 수정·보완한 것이다…/편집자 주 경상북도 안동은 기자들에게 매력적인 취재처가 분명하다. 가까이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사에서부터 멀리는 16세기 조선 성리학의 빛나는 편린,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으니. 서원(書院)과 고택(故宅)의 고풍스런 검은 기와는 또 어떤가. 어떤 사람이건 설레게 만드는 힘이 있다. 도처에 역사적 숨결이 깃든 하회마을을 산책하듯 유유자적 걸으며 그 옛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삶을 떠올리고, 밤이 이슥해지면 박재서나 조옥화가 빚은 ‘쨍한’ 안동소주 한 잔 맛보는 것. 이만한 여행지를 찾기가 쉽지 않다. 좋은 술엔 먹음직한 음식이 따르는 게 정한 이치. 안동엔 먹을거리도 적지 않다. 아예 골목 하나를 통째 차지하고 들어서 군침을 돌게 만드는 안동 갈비는 헐하진 않지만 비싼 값을 한다. 석쇠에 잘 구운 한우 갈비를 먹고 나면 서비스로 나오는 찌개도 더할 나위 없이 맛있다. 발골(拔骨) 과정에서 생기는 자투리 고기와 매운 풋고추를 넣어 칼칼하게 입 속을 정리해준다. 짜지도 싱겁지도 않게 소금간이 잘 배어든 고등어를 구워 먹는 것도 안동 여행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안동 간고등어는 아이들에겐 ‘밥도둑’ 주당들에겐 ‘술도둑’이라 불릴 만하다. 안동식혜도 그렇다. 대체 누가 식혜에 고춧가루와 무를 넣을 생각을 할까? 안동 사람들이 아니라면. 기자가 마셔본 바 숙취 해소에도 그저 그만이다. 서너 해 전이다. 나흘을 안동에 머물렀다. 취재 반·휴가 반의 여유로운 일정이었다. 그때 또 하나 안동의 별미와 즐겁게 조우했다. 이름하여 ‘헛제삿밥’. 흥미로운 작명이다. 안동엔 제 나름 양반이라 큰소리치는 가문이 여럿이다. 그런 집엔 제사가 많다. 그럴 수밖에 없다. 부친과 모친, 조부와 조모만이 아니라, 증조부와 고조부 제사까지 모시는 경우가 흔한 탓이다.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은 정갈하고 담백하다. 자극적인 양념을 최대한 배제한 것이 대부분. 그런데, 비단 제사 때가 아니라도 이런 것들이 먹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날이면 이른바 ‘양반 집안’에선 탕국을 끓이는 동시에 생선과 전을 굽고, 온갖 나물을 데쳐 가마솥에 갓 지은 고슬고슬한 밥과 함께 야식으로 먹었다. 요즘 애들이 밤늦게 피자나 양념통닭을 배달시켜 먹는 것처럼. 그게 ‘헛제삿밥’의 유래라면 유래다. 헛제삿밥의 백미(白眉)는 갖은 나물을 넣은 비빔밥이다. 거긴 고추장 대신 집에서 만든 조선간장을 넣어 간을 맞춘다. 안동의 제각각 가문마다 비빔밥 맛이 다른 이유다. 헛제삿밥은 집에선 만들어 먹기가 번거롭고 힘도 든다. 그러나 걱정 마시라. 지금이 어떤 시절인가? 안동엔 헛제삿밥을 전문으로 파는 식당에 몇 군데 있다. “어느 식당이 최고”라고 다툴 필요도 없다. 대부분 식당이 다 먹을 만하니까. 글을 쓰는 지금도 입 안 가득 침이 고인다. 박재서 명인이 빚은 알코올도수 45%의 안동소주를 반주로 헛제삿밥을 먹었던 날을 떠올리면, 그깟 왕후장상(王侯將相)이 부럽지 않다. 안동엔 종갓집이 많다. 대부분의 종가(宗家)는 날아갈 듯한 기와를 이고 선 멋들어진 고택(古宅)이다. 퇴계종택, 학봉종택, 농암종택, 경당종택, 제산종택 등이 그렇다. 그것들 가운데 학봉종택과 농암종택에선 하룻밤 자는 호사도 누렸다. 이른바 ‘종택(고택) 스테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농암종택에선 종손과 아침을 함께 먹었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깔끔한 밥상이 수 세기 전 선비의 조반(朝飯)이 어떠했는지 짐작케 해줬다. 학봉종택에서 맛봤던 다식(茶食)은 색깔과 디자인 면에서 ‘미슐랭 3스타’에 올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었다. 그날 밤 앞에 놓인 다과상 위에선 계절과 무관하게 각기 다른 빛깔의 장미가 피어났고, 잣과 흑임자는 별로 다시 태어났으며, 조청에 절인 사과와 잘 말린 곶감은 혀를 녹였다. 20세기 이전이라면 헛제삿밥도, 다식도 양반들만 먹었을 게 분명하다. 힘겨운 매일의 노동과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궁핍 속에서 가난한 백성이 그런 걸 만들어 먹는 건 언감생심이었을 터. 그래. 정말이지 다행이다. 기자가 살고 있는 지금이 양반과 상것의 구분이 사라져 형식적 평등이라도 이뤄진 21세기라는 게.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9-09

‘복구보다 예방’ 일본 문화재 방재 정책···성공 사례로 배운다

태풍, 홍수, 산불 등의 재난은 지자체 단위로 되풀이되지만, ‘재난지역 선포’와 같은 사후 조치에 집중됐다. 사전 예방 차원의 체계적 방재 시스템이 자리 잡지 못한 것이다. 이번 기획은 지자체 실정에 맞는 문화유산 방재 시스템을 구축 필요성을 제시하고, 농어촌 곳곳의 소중한 유산을 어떻게 지켜낼지를 탐구한다. 고령화 등으로 재난에 더 취약해진 자연 속 국가 유산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한국형(K)-문화유산 방재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마련해야 하는데, 일본의 경험을 토대로 경북은 물론, 전국 차원의 정책 수립에 필요한 시사점을 제공할 예정이다. 사찰엔 방화문·스프링클러 설치 산림 인접 지역 방화대·내진 보강 홍수·쓰나미엔 모래주머니 활용 지자체, 지역 맞는 방재계획 수립 사찰 고택 소유자, 일상점검·보존 주민 주도적 참여 ‘복구보다 예방’ <글 싣는 순서> 1. 산불 등 재난에 취약한 국내의 문화유산 2. 실제 재난으로 소실된 지역별 문화유산 3. 일본의 문화재 방재 연구기관 경험 4. 일본의 문화재 방재 정책 성공 사례 5. 한국형(K)-문화재 방재 정책의 방향성 ◇ 제도적 기반과 법적 토대 일본의 문화재 방재 정책은 1950년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을 기초로 한다. 이 법은 1949년 나라 호류지 금당 화재 사건을 계기로 마련됐다. 금당 내부 벽화가 불타버리자 ‘국가의 보물도 재해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라는 비판이 쏟아지면서 사회적 충격이 확산했고, 문화재를 법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후 이 법은 대형 지진과 화재를 거치며 방재 조항이 강화됐다. 현재는 문화청이 정책과 지침을 마련하고 내진 보강과 방재 설비에 대한 재정 지원을 맡는다. 지자체는 지역 문화재에 맞는 방재계획을 수립하고 사찰이나 고택 같은 소유자는 일상 점검과 보존을 담당한다. 대형 재해 발생 시에는 문화청 주도로 ‘문화재 레스큐’가 가동돼 전문가가 파견되고 관·민 협력으로 응급조치가 이뤄진다. ◇ 교토 니넨자카 화재 2024년 1월 교토의 대표적 관광지 니넨자카에서 발생한 화재는 일본 문화재 방재 정책의 성과를 보여준 대표 사례다. 좁은 골목길에 전통 목조 건물이 밀집한 이곳은 자칫하면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러나 화재 발생 직후 주민들이 시민용 소화전을 가동해 불길을 초기 단계에서 잡는 데 성공했다. 이 소화전은 교토시와 리쓰메이칸대 역사도시방재연구소가 협력해 설치한 장치로 평소 주민 훈련을 통해 사용법이 공유돼 있었다. 덕분에 소방차가 도착하기 전 불길이 확산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교토시는 이 사건을 ‘지역 공동체가 주체가 된 문화재 방재의 모범’으로 평가했다. ◇ 노토 반도 지진 2024년 1월 1일 발생한 규모 7.6의 노토 반도 지진은 이시카와현 전역에 큰 피해를 남겼다. 사망자가 수백 명에 달했고, 수십 건의 지정 문화재가 붕괴하거나 손상됐다. 그러나 2007년 지진 이후 내진 보강을 거친 건물은 이번에도 무사했다. 문화청과 이시카와현은 즉각 ‘문화재 레스큐’를 가동해 전문가를 파견, 붕괴 건물에서 불상과 고문서를 반출하고 응급 조치를 시행했다. 특히 이시카와현은 문화재 위치를 디지털 대장으로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해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일부 시설은 방화·내수 보존상자와 반출 매뉴얼을 사전에 준비해 현장에서 즉시 활용할 수 있었다. 문화청은 “사전 보강, 긴급 레스큐, 디지털 관리, 현장 장비 준비가 결합된 다층적 성과”라고 평가했다. ◇ 도시형 문화재 방재와 주민 협력 교토·나라와 같은 전통 도시는 목조 건물이 빽빽이 들어서 화재 확산 위험이 높다. 일본은 이런 곳에 ‘연단건물’ 개념을 적용해 건물군 단위의 내화성을 높이고 피난로를 확보하고 있다. 교토시는 골목마다 소형 소화 펌프와 호스를 비치하고 주민들이 이를 직접 다루는 훈련을 주기적으로 진행한다. 또 전통 가옥 내부 통로를 활용해 화재 시 대피로로 쓸 수 있도록 했다. 주민 참여는 제도화된 훈련으로 이어진다. 일본은 매년 1월 26일을 ‘문화재 방재의 날’로 지정해 전국 문화재 현장에서 일제히 방재 훈련을 실시한다. 교토는 여름에도 한 차례 추가 훈련을 시행한다. 문화청은 “문화재 방재는 지역사회가 주체가 될 때 실질적 성과를 거둔다”고 강조한다. ◇ 미래 전망과 과제 일본은 최근 ICT, AI, 드론, 3D 스캔 등 첨단 기술을 문화재 보호에 적극 도입하고 있다. 문화청은 2023년 기준 3만 건 이상의 문화재를 디지털 아카이브화했으며 일부는 디지털 트윈으로 복원해 재난 발생 시 신속 복원이 가능하도록 준비하고 있다. 드론은 지진과 홍수 이후 문화재 피해 현황을 신속히 파악하는 데 활용된다. 기후변화로 폭염, 산불, 홍수 같은 재해가 잦아지면서 문화재는 더욱 큰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일본은 복원보다 예방에 무게를 두고 정책을 재설계하고 있다. 한국 역시 산불로 인한 문화재 피해가 잦은 만큼 일본의 예방 중심 정책과 주민 참여형 성공 사례는 중요한 참고가 될 수 있다. ◇ 교토가 주는 교훈 일본의 문화재 방재 정책은 법과 제도, 성공 사례만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이다. 그러나 책상 위 자료만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고민이 있다. 기자는 해답을 얻기 위해 7월 13일 교토 리쓰메이칸대 역사도시방재연구소를 찾았다. 연구소 내부는 마치 재난의 기록관 같았다. 벽면에는 지진과 화재로 무너진 문화재 사진과 복구 과정을 담은 패널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요시토미 신타 교수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일본의 경험과 한국이 참고할 과제를 조목조목 말했다. 요시토미 신타 교수는 “일본 문화재 건조물은 한국보다 산중 입지가 적어 산불 피해 사례가 드문 대신에 모든 건조물은 ‘문화재 보존·활용계획’을 작성해 방재계획에 포함하면서 연구기관과 연계해 고도화된 방재계획을 마련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문화재보호법’을 기반으로 국가·지자체·민간이 협력한다”라면서 "문화청은 정책과 재정 지원을, 지자체는 지역 문화재 방재계획을, 소유자는 일상 점검을 담당한다. 대형 재해 시에는 문화재 레스큐 체제가 가동된다”고 문화재 방재 체제를 설명했다. 자연재해 대응 방식에 대해서는 평상시 주민 훈련과 매뉴얼 정비가 이뤄지고, 사찰에는 방화문·스프링클러를 설치한다고 했다 또, 산림 인접 지역은 방화대를 두고 지진에는 내진 보강을 실시하며, 홍수·쓰나미에는 모래주머니·고상화·디지털 아카이브를 활용한다고 했다. 요시토미 신타 교수는 “한국은 산악 지형 문화재가 많아 산불 위험이 높다. 일본은 지형적 위험이 적어 대비가 부족했지만 앞으로 강화가 필요하다”라면서 “문화재는 전통 기법을 유지해야 하므로 내화 자재로 교체하기는 어려워서 물 공급·효과적 방수·피해 최소화가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기후변화로 재해는 늘어날 것이고, 사건 후 특별 예산으로 단기 대응하는 방식은 지속적이지 못하다"라면서 "문화재 방재를 사회적·교육적·공동체적 가치로 인식하고 사회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글·사진/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9-09

“책임감 무거운 ‘최연소 주임’ 영예 ‘포스코 명장’ 꿈 이룰 밑거름으로”

코크스 오븐 연소·유지 보수 담당하며 신기술 습득 ‘공정 개선’ 앞장 “세계적으로도 드문 ‘핫 아이들링’ 작업의 성공 완수는 큰 자부심” -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포스코 화성부 2코크스공장의 박우진 주임이다. 울산마이스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포스코에 입사했다. 학생 시절 포항제철소 현장 견학에서 “나도 이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품었고, 결국 입사했다. 현재는 2코크스공장 노체연소 파트에서 약 10년째 근무 중이며, 코크스 오븐의 유지·보수와 관리를 담당하고 있다. 입사 초기엔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배웠지만, 이제는 책임감을 갖고 후배들을 이끌며 함께 성장하고 있다. - 현재 코크스공장에서 맡고 있는 역할은? △나는 포스코 포항제철소 코크스공장에서 ‘문제 해결사’ 역할을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코크스 오븐의 연소와 유지·보수를 담당하는 ‘노체연소 파트’에서 일하고 있다. 코크스 오븐은 제철소 핵심 설비 중 하나로, 한 번 멈추거나 문제가 생기면 전체 생산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우리 파트에서는 오븐이 항상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가동되도록 설비를 정기 점검하고 상태를 꼼꼼히 모니터링하고 있다. 만약 이상이 발견되면 즉시 조치해 생산 차질을 최소화하는 것이 나의 핵심 업무다. 특히, 오븐 내부 내화벽돌이 고온에서 마모되거나 손상되면 세라믹 용접 등 특수 기술을 활용해 보수 작업을 진행한다. 이 때는 높은 집중력과 정확성, 협력사와의 긴밀한 협업이 필요하다. 결국, 나의 역할은 설비 이상을 사전에 예방하고, 발생 시 신속히 해결해 작업자들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현장에서 항상 긴장감을 갖고,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고 있다. - 새로운 시도나 개선으로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든 경험은? △현장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은 ‘핫 아이들링(Hot Idling)’ 작업이었다. 이는 코크스의 수급을 조절해야 할 때, 오븐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생산량을 줄이는 비상 운전 방식이다.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시도되는 고난이도 작업인데, 3개월에 걸쳐 이 작업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핫 아이들링은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자주 발생할 수 있는 작업이다. 그래서 동료들과 함께 밤낮없이 온도와 가스 흐름을 꼼꼼히 관리하며, 안정적인 오븐 운영이 되도록 협력했다. 이 과정에서 단순 설비 관리만이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 전체 시스템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고 팀워크의 가치를 실감했다. 덕분에 작업 후 오븐을 다시 원활하게 가동할 수 있었고, 이 경험은 팀원 모두에게 큰 자부심이 되었다. 이 일을 통해 “위기는 언제든 올 수 있지만, 철저한 준비와 협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앞으로도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고, 더 나은 변화를 만들어가고 싶다. - 최연소 주임으로서 느끼는 책임감이나 특별히 신경 쓰는 부분이 있는지? △27세 나이로 ‘최연소 주임’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현장에 투입됐다. 이 타이틀은 나에게 큰 자부심이자 동시에 무거운 책임감을 안겨줬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배들과 협력사 동료들에게 신뢰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스로를 더욱 엄격하게 관리하며, 항상 한 단계 더 성장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가장 신경 썼던 부분은 ‘안전’과 ‘소통’이다. 코크스 오븐은 제철소의 핵심 설비이기 때문에, 운전과 관리 모든 부분을 꼼꼼하게 살피며 관리해야 한다. 그래서 현장 상황을 더욱 세심하게 파악하고, 안전 수칙을 철저히 준수하며 일하고 있다. 또한, 연배가 높은 선배들과 원활하게 소통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역할이라 생각한다. 때로는 배우는 자세로, 때로는 책임 있는 관리자의 입장에서 의견을 나누며 서로 신뢰를 쌓아가고 있다. 젊은 세대인 만큼 새로운 기술이나 방식을 빠르게 습득할 수 있다는 점을 강점으로 삼아, 공정 개선과 혁신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도 ‘최연소 주임’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현장에서 신뢰받는 동료가 되고 싶다. - 예비 후배들에게 꼭 자랑하고 싶은 포스코의 장점은? △포스코의 가장 큰 강점은 단연 ‘사람 중심의 기업문화와 복지 제도’다. 단순히 일만 잘하는 회사가 아니라, 직원과 그 가족의 삶까지 세심하게 배려하는 다양한 제도가 잘 갖춰져 있다. 가장 와닿았던 복지는 ‘생애주기별 가족친화제도’다. 결혼, 임신, 출산, 육아 등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맞춤형 지원이 제공된다. 결혼축하금과 신혼여행지원금, 임신기 건강검진 지원, 출산휴가와 출산축하금, 육아휴직, 자녀 장학금 등 실질적인 복지 혜택이 체계적으로 마련되어 있다. 실제 최근 아내의 건강검진을 회사 지원으로 미리 챙길 수 있었고, 결혼축하금과 신혼여행지원금 같은 세심한 배려 덕분에 마음이 한결 놓였다. 회사가 직원뿐 아니라 가족까지 챙긴다는 사실을 크게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사내 문화와 여가 생활을 즐길 수 있는 기회도 많다. 콘서트, 연극, 강연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어 직원들이 재충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외에도 휴양 시설, 교육 지원, 자기계발 지원 등 폭넓은 복지 제도가 마련되어 있어 ‘직원들이 안정적으로 근무할 수 있는 회사’라는 확신을 준다. 포스코는 단순히 ‘철강업’이라는 이미지에 머무르지 않는다. 직원의 삶 전반을 든든하게 뒷받침해주는 회사라는 점에서, 후배들에게 꼭 자랑하고 싶은 특별한 직장이다. -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나 목표가 있다면? △가장 큰 목표는 언젠가 ‘포스코 명장’이 되는 것이다. 명장은 단순히 뛰어난 기술자가 아니라 오랜 경험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현장을 선도하고 후배들을 이끄는 존재다. 코크스 오븐의 관리와 유지보수는 오랜 경험과 노하우가 필요한 영역이기에, 매일의 경험이 나를 더욱 단단하게 성장시키고 있다. 앞으로는 개인의 성장에만 머무르지 않고, 후배들을 교육하고 이끌 수 있는 위치에 서고 싶다. 내가 걸어온 길이 좋은 길잡이가 되어, 후배들이 한 단계 더 성장한 숙련된 기술인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만약 ‘포스코 명장’이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을 얻게 된다면, 그 기쁨과 의미를 동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배우는 자세로 모두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코크스공장을 만들어가겠다. /김진홍경제에디터 kjh25@kbmaeil.com

2025-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