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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오징어 판 돈으로 무기 구입… 일본군 침범 맞서 7차례 격퇴

독도 지키는 군대·경찰 없던 1953~56년까지 헌신적 수호 활동 1954년 日 전함 2척을 박격포 발사해 상륙 막은 ‘독도대첩’ 전훈 의용수비대기념관엔 1905년 패배한 러 발틱함대 유물도 보관 △울릉도 최고 부자 홍순칠의 의용수비대 석포에서는 맑은 날이면 92㎞ 거리의 독도가 한눈에 보인다. 안용복 기념관을 나서면 인근에 독도 의용수비대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은 2개 층에 전시공간이 마련되어 있는데 의용수비대원 33인의 독도 수호 활동을 체계적이고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독도의용수비대는 독도를 지키는 군대나 경찰이 없던 1953년-1956년까지 독도 수호를 위해 울릉도 주민들이 만들었던 자경단이다. 1956년 경찰에 독도 수비 업무와 장비들을 인계할 때까지 밤낮으로 독도를 지키던 의용수비대원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 이 기념관이다. 의용수비대 대장은 한국전 상이용사이자 육군 특무상사 출신의 울릉도 최고 부자 홍순칠이었으며 각각 15명으로 이루어진 전투대 2조, 울릉도 보급 연락 요원 3명, 예비대 5명, 보급선 선원 5명 등 총 45명으로 이루어졌다. 이 중 3명을 제외하면, 대부분 한국전쟁 참전 용사들이었다. 이후 12명이 탈퇴하면서 최종적으로 수비대에 남은 인원은 33명이 되었다. 1952년 한국전쟁의 혼란을 틈타 일본은 세 차례나 독도를 무단 침범했다. 이때 일본은 1948년 미군의 폭격 연습으로 희생된 150여명의 한국 어부들을 기려 세운 위령비를 파괴하고 독도에 시마네현 오키군 코카무라 다케시마(島根縣隱岐郡五箇村竹島)라는 표지판을 세웠다. 이에 대항하여 홍순칠과 울릉도 청년들이 1953년 4월 20일 결성한 것이 독도의용수비대다. 의용수비대는 전쟁의 와중에 7차례나 전투를 해 일본에 빼앗길 뻔 했던 독도를 지켜냈다. 독도를 수비할 무기들도 홍순칠 의용수비 대장이 부산으로 가 울릉도 오징어를 판 돈으로 구입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1953년 6월 일본 오게(大毛) 수산고등학교 연습선 지토마루 호를 독도의 서도 150m 걸 해상에서 나포해 이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냈으며, 같은 해 7월 해상보안청 순시선 치마루호가 독도에 접근하자 위협 사격을 가해 이들을 격퇴시켰다. 이 싸움이 수비대가 일본에 맞서 벌인 실질적인 첫 전투이다. △ 독도침범 일본 순시성 여러차례 격퇴 1954년 5월 23일에도 해상보안청의 1000t급 무장 순시선 즈가루호가 침범하자 격퇴했고, 5월 29일에는 일본 어업 실습선인 450t급 다이센호가 침범하자 의용수비대원들이 다에센호에 승선, 격렬하게 항의해 퇴각시켰다. 1954년 6월에는 홍순칠 대장 등이 독도의 동도 바위에 한국령(韓國領)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같은 해 7월 28일에는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나가라호(270t급)와 구르쥬호(270t급) 2척이 동시에 위협 사격을 가하며 독도를 침범하자 의용수비대원들이 사격을 가해 격퇴시켰다. 1954년 8월 23일에는 독도를 침략하려는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450t급 무장 순시선 오키호를 향해 기관총 600발을 발사해 격퇴시켰다. 1954년 10월 2일에는 2척의 전함이 동시에 독도 영해를 침범하자 대포를 발사하며 격퇴시켰다. 일본의 독도 침공 작전은 1954년 11월 21일 아침 6시경에 시작됐다. 450톤급 헤쿠라호와 450t급 오키호 두 척의 일본 전함은 동도와 서도 방향에서 동시에 독도로 접근해 왔다. 이때 독도를 지키던 의용수비대는 박격포를 발사해 두 전함의 독도 상륙을 저지시켰다. 이 전투는 후일 독도대첩으로 명명되었다. 이후 1956년 12월 30일, 무기와 임무를 경찰에 인계할 때까지 독도의용수비대는 독도를 지켜냈다. 경찰 인계 때 10명의 의용수비대원들은 경찰 소속으로 전환해 이후에도 독도를 지켰다. 의용대원들은 독도에 상주하며 갈매기 알로 배를 채우고 빗물을 받아 마시며 독도를 지켜냈다. 울릉도 주민들도 의용대원들에게 식량을 보급하며 헌신적으로 도왔다. 이들이 후예가 지금 독도를 방어하고 있는 독도경비대다. 울릉도와 울릉도 사람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국민들 모두가 애지중지 하는 독도를 지켜낼 수 있었다. 아마도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섬은 독도일 것이다. 여전히 일본이 침략하러 호시탐탐 노리는 국경의 섬, 심지어 일본은 정부의 공식 섬 통계에도 독도를 자국의 섬으로 포함시켜 놓고 있다. 그럼에도 독도가 대한민국의 실효 지배를 받는 우리 땅임을 국민들은 모두가 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독도를 다녀왔고 누구나 생애 한번은 독도에 가는 꿈을 꾼다. 그런데 육지 사람들은 독도에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울릉도란 것은 생각하지 못한다. 울릉도가 없었으면 독도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울릉도가 있어서 독도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이는 역사 시대 내내 변함없는 진리였다. 고대 국가 우산국부터, 삼국시대를 지나 고려, 조선, 대한민국에 이르는 기나긴 역사 속에서 소중한 우리 땅 독도를 지켜온 것은 울릉도 섬사람들이었다. 울릉도 사람들이 조각배를 타고 그 험한 바다를 건너가 독도에 거처하며 해산물을 채취해 살아갔다. 독도를 침탈하려는 왜국과 일본에 맞서 싸우고 마침내 지켜낸 것도 울릉도 사람들이다. 그 증거가 바로 독도의용수비대다. △러·일전쟁의 유물도 전시된 기념관 의용수비대 기념관에는 러일전쟁의 유물도 전시되어 있다. 러시아제 청동 주전자다. 1905년 러일전쟁 막바지에 발틱 함대 소속 드미트리 돈스코이호에서 쓰던 것이다. 한동안 보물선으로 세간의 화제가 됐던 그 배다. 돈스코이호 함장은 일본에 항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돈스코이호는 끝까지 일본에 항전했다. 힘에 부친 돈스코이호 함장은 결국 전함을 스스로 침몰시키기로 결정한 후 러시아 해병 570명을 울릉도에 상륙시켰다. 돈스코이호는 침몰했고 이 과정에서 독도의용수비대 홍순칠 대장의 할아버지 홍재형이 러시아 해병 구제에 나서 많은 목숨을 살렸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홍재형이 돈스코이호 함장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이 금화와 청동 주전자였다. 석포 마을 경로당 옆, 밭에서 노인 한 분이 잡초 제거 작업 중이다. 오래 묵혀두었던 밭에 다시 나물 재배를 시작하려고 돼지풀 등을 뽑고 있는 것이다. 노인은 30여년을 뭍으로 떠돌다 노년에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왔다. 49살의 늦은 나이였지만 당시 울릉도에는 오징어도 잘 나지 않았고 마땅한 일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먹고 살길을 찾아 뭍으로 나갔다. 뭍에서는 주로 건설 현장 ‘노가다’(막노동)를 했다. 한때는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등지까지 떠돌았다. 주로 대구의 건설 현장에 있으면서 ‘노가다’ 십장을 했다. 그렇게 아이들 다 키우고 결혼까지 시키다 보니 중년의 사내는 어느덧 노인이 되어버렸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일거리도 없고 그래서 다시 고향 쪽으로 눈을 돌렸다. 대부분의 밭은 고향 떠날 때 팔아버렸고 아주 조금 남겨둔 밭뙈기에 참고비 나물을 재배하려고 다시 개간 중이다. “옛날에는 나물을 누가 알아주지도 않았어요. 자기 먹을 거나 했지. 요새는 판로가 있으니 돈이 되지.” 겨울에는 자식들이 사는 대구의 집으로 가서 지내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울릉도에 산다. 빈집을 빌려 지내지만 그래도 고향이라 마음은 편하다. 돌아갈 고향이 있는 이는 행복하다. 고향을 잃어버린 시대. 섬을 고향으로 가진 이들은 행복하다. /강제윤(시인·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1-13

전통 모델·위성 감지·AI 기술 결합 ‘다층 대응’ 구축한 캐나다

캐나다는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산림 면적을 보유한 나라 중 한 곳이다. 캐나다는 전체 국토 면적이 약 998만 ㎢에 달하는데 약 38%인 347만 ㎢가 산림으로 구성돼 있다. 캐나다 산림 면적은 세계 산림 면적의 약 9%에 해당할 정도로 넓어 그만큼 산불이 잦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더해 지구 온난화 가속화에 따른 ‘열돔 현상’이 캐나다를 뒤덮으면서 매년 수천 건의 산불과 맞서 싸우고 있다. 캐나다 산림청(NRCan)에 따르면 지난 한해동안 캐나다에서 산불로 소실된 면적은 약 5만3천㎢로 캐나다 산림 면적의 1.5%가 불에 탔다. 한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기후변화로 인해 고온·건조·강풍 등 극단적 기상 조건이 빈번해진 탓에 산불 발생 가능성과 피해 규모가 커지고 있다. 기후 변화에 따른 산불 발생 변수에 대비할 필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다. 캐나다는 한발 앞서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산불 예방 활동에 집중하는 동시에 예기치 못한 산불이 일어나더라도 인명피해와 재산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캐나다 산림청이 운영하는 캐나다산불정보시스템(CWFIS·Canadian Wildland Fire Information System)을 통해 첨단 예측 체계를 구축하고 관련 기술 투자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와 함께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실천할 수 있는 파이어스마트(FireSmart) 프로그램을 통해 ‘산불 피해 최소화’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온난화 ‘열돔현상’에 매년 수천 건씩 산불 발생 2500여 기상관측소 데이터 활용하는 CWFIS 산불위험지수·화재행동예측지도 만들어 대비 정확도 위해 2029년엔 ‘소형위성’도 띄울 계획 지역사회-정부-주민 협력 ‘파이어스마트’ 가동 교육·식생관리 등 ‘피해 최소화’ 환경구축 힘써 전통 시스템에서 첨단 예측으로 캐나다 산림청이 운영 중인 CWFIS는 위성 관측, 기상 데이터, 식생 정보 등을 매일 통합해 전국의 화재 위험도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국가 플랫폼이다. CWFIS는 캐나다 및 미국을 포함한 2천5백여개의 기상관측소 데이터를 활용해 기상관측자료, 연료상태, 지형자료 등을 파악하고 산불 위험지수 및 화재행동예측을 지도로 만들어 산불 위험에 대비한다. 산불 지도화를 통해 통해 산불이 발생했을 때 대응 자원을 즉각 배치할 수 있고, 지자체나 일반 시민이 지역 화재 위험도를 확인하고 빠르게 대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또 위성 관측을 통해 산불 발생을 감지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산불 대응 기관들이 산불 초기 대응에 신속하게 나설 수 있도록 자원을 배분하는 등 전략을 수립하는 자료를 제공한다. 이 가운데 ‘Forest Fire Behaviour Prediction(FBP·산불확산예측)’ 시스템은 바람, 습도, 연료 종류에 따른 화재의 확산 속도와 강도를 예측하는 모델로, 현장 소방대와 지방정부가 자원 배치와 대피 판단에 활용하고 있다. 다만 데이터의 품질과 현실 적용에 있어 한계점이 드러나고 있어 캐나다는 최근 위성과 인공지능(AI)을 결합한 첨단 산불 예측 기술을 적극 개발하고 있다. 캐나다 우주국의 ‘‘WildFireSat’ 프로젝트는 소형 위성 여러 대를 띄워 캐나다 전역의 열 신호와 연기를 실시간 감지하기 위한 것으로 2029년 발사를 목표로 하고 있다. 기존 FBP등 모델의 정확도를 위성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국가 차원의 프로젝트로, 발화 초기의 작은 불씨까지 포착해 대응하는 것이 목표다. 이같은 노력은 국내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부는 여러 차례 대형 산불을 겪으면서 나름의 대책들을 발표했는데 이 가운데 발표한 종합대책에는 기상청과 산림청을 주축으로 ‘드론·위성·CCTV를 활용한 입체적 산불 감시 시스템‘을 구축하는 계획이 담겨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계획 단계로 구체적 실행 단계에 들어서지 못했다. 기상청만 하더라도 아직까지 산불 대응에 있어 기상 관측 및 예보, 경보 발령 등 역할이 대부분이다. 산불 발생 후 진화, 자원 배치, 화재 확산 속도 예측 등은 주로 산림청, 소방청, 지자체 등에서 맡고 있어 통합된 시스템 하에서 인공지능에 기반한 산불 대응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주변국이나 캐나다·미국처럼 산불발생 가능성과 화재행동 예측, 자원배치까지 아우르는 종합 예측 모델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로선 산림청 및 국립산림과학원 등이 전국 각 지역별 지형과 산림 현황, 기상청 예보 정보(온도·습도·풍속 등)를 활용해 산불 위험도가 높은 지역을 예측 제공하는 국가산불위험예보시스템이 운영 중이다. 하지만 현재 시스템으로서는 산불 예측과 확산 모델 전체를 커버할 수 없다는 한계가 명확하고, 산불 예방에 주력하는 미국이나 캐나다 등에 비해 연료(낙엽, 식생 밀도)상태, 지형의 복잡성, 국지 기후 등 변수 반영에 취약한 만큼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 및 발전이 수반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캐나다, 정부 주도 개발 동시에 지역사회-주민 협력 프로그램 마련 이와 함께 산불 피해를 줄이고자 지역 사회-정부-주민이 협력하는 파이어스마트(FireSmart)프로그램도 주목할 만하다. 파이어스마트는 캐나다 전역 산불 위험을 줄이고 지역사회 산불 탄력성을 높이고자 고안된 종합프로그램이다. 파이어스마트는 △교육 △식생 관리 △법률 및 계획 수립 △개발 시 고려사항 관리 △주택과 기반시설 생존 가능성을 높일 개발 규제 도입 △기관 간 협력 △교차 훈련 △비상계획 수립 등 7가지 핵심 원칙 하에 운영되며, 이는 각 지역 파이어스마트 코디네이터와 지역 대표 등이 주도하고 실행한다. 지난 7월 방문한 브리티시컬럼비아(BC)주 ‘파이어스마트 BC’의 경우 ‘지역사회 중심 예방문화 확대’를 목표로 산불 위험 인식을 높이고 예방과 완화에 필요한 교육을 진행하고 있었다. 산불 위험지역 내 산불 확산 원인이 될 수 있는 나뭇가지나 낙엽 같은 ‘연료’를 효과적으로 관리해 위험을 줄이는 식생 관리부터 각 주의 공공 정책과 통합 토지 이용 계획, 법률 명령 등을 정비해 화재에도 잘 견디는 건축자재로 주택을 짓는 등 방법을 통해 생존력을 높이고 있다. 특히 산불은 ‘정부만이 아닌 주민들과의 공동 책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주민 중심에서 산불 예방 활동 및 실행이 이뤄질 수 있도록 체계를 마련한 점이 특징이다. 신문, TV 등 전통적 방식에 더해 SNS 등 젊은 층이 향유하는 플랫폼을 통해 산불 예방과 행동 요령, 파이어스마트 BC 활동 관련 홍보·소통 등에 나서고 있다. 이를 통해 주민-지방자치단체-소방 등이 산불 예방과 안전에 공감하고 대처 요령을 공유할 수 있도록 도모하고 있다. 한마디로 주민이 주체가 되는 산불 예방 활동인 셈인데 이는 국내에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산불의 직접적 피해자는 다름 아닌 주민들이기 때문이다. 지난 3월 발생한 대형 산불은 비단 산과 임야 뿐 아니라 도시 주택과 도로, 학교 등 주거지역을 위협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2019년 강원도 고성·속초 산불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연이 피해를 입는 데 그치지 않고 주민의 생활과 생명을 위협했다. 때문에 산불이 ‘주거 재난’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이같은 점에서 ‘불이 나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데 주민과 힘을 함께 모으겠다는 캐나다의 정책은 국내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박형남기자 7122love@kbmaeil.com

2025-11-12

日 막부와 담판 안용복, 왕조가 버린 섬들 지키려 고군분투

△ 울릉도의 오지 중의 하나인 석포 해담길 내수전 구간이 끝나면 석포-추산 구간으로 이어진다. 이 길로 들어서기 전에서 석포 마을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석포마을에는 안용복기념관과 의용수비대기념관, 석포전망대 등 볼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일주도로 터널이 뚫리기 전까지 석포는 울릉도의 오지였다. 정들포, 정들께라고도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울릉도에서도 워낙 험한 산속 오지라 처음 찾아왔을 때는 막막하지만 막상 떠나려면 정이 들어서 떠나기 힘들 정도로 정이 많은 산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정들포였다. 석포 일출전망대는 의용수비대 기념관과 붙어 있는데 러일전쟁 때 일본군의 망루 역할을 했다. 전망댕에서는 울릉도의 3대 비경인 삼선암과 관음도, 공암을 모두 볼 수 있다. 1693년 日 어부들과 조업권 실랑이 벌이다 오키섬으로 끌려가 에도 관백 앞에서 ‘독도는 조선땅’ 주장, 출어 금지 서계 받아내 1948년 美 B29 독도 해상 폭격 연습… 어민들 집단 희생 비극 안용복 기념관은 왕조가 버린 섬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안용복(安龍福. 1658~?)을 비롯한 백성들의 분투를 기념해서 지어진 건물이다. 안용복의 제1차 도일은 1693년 3월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용복은 울산 출신 어부 40여 명과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다가 호키(伯耆)주 요나코무라(米子村)에서 온 일본 어부들과 마주쳤는데 조업권을 놓고 실랑이를 벌였다. 숫자가 적었던 탓에 안용복은 박어둔(朴於屯)과 함께 일본 오키(隱岐) 섬으로 끌려갔다. 여러 경로를 거처 에도(江戶) 관백의 심문을 받고 울릉도, 독도가 조선 땅이라는 주장을 하고 납치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결국 “죽도(울릉도)와 자산도(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 어민들의 출어를 금지 시키겠다”는 막부의 서계(書契)를 받아냈다. 하지만 이후 일본인들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불법 월경을 해 울릉도 근해에서 조업을 계속했다. 안용복은 조정의 관원으로 위장한 뒤 2차 도일을 감행해 담판을 짓고 돌아오려 했으나 실패하고 송환됐다. 조선 조정은 그런 안용복에게 상을 주기는커녕 사형을 시키려다 감형해 귀양을 보내고 말았다. 유배 이후 안용복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지금 안용복은 장군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후대의 추대일 뿐이고 그가 살던 당시에는 전라 좌수영의 노꾼 출신이 어부였다. 국가가 못한 일을 해낸 백성. 안용복은 장군 그 이상으로 추앙받고도 남을 공적을 세웠다. 장군들도 지키지 못한 독도를 지켜냈기 때문이다. △ 안용복기념관의 독도조난어민위령비에 서린 한 안용복 기념관에는 독도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주는 전시물도 있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것 말고 우리가 독도에 대해 아는 것이 무엇일까? 독도에서도 미군에 의한 한국인 양민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안용복 기념관에 그 증거가 전시되어 있다. 우리 군경에 의한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시기 양민학살은 많이 밝혀졌지만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은 충북 영동군 노근리 철교 밑에서 한국인 300여명이 학살당한 노근리 학살 사건 정도만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섬 지역에서도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이 적지 않았다. 여수의 섬 안도에서의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도 그 중 하나다. 한국전쟁 시기 여수에서 섬으로 피난을 오던 300여명의 양민을 실은 피난선을 미군 제트기가 무차별 폭격했다. 안도의 이야포 해변이 그곳이다, 이 폭격으로 한국인 150여명이 숨졌다. 그 증거가 안용복기념관의 ‘독도조난어민위령비’에 새겨져 있다. 1948년 6월8일 미군은 사전 통보도 없이 독도를 타깃으로 폭격 연습을 시작했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출격한 미 공군 제93중폭격비행단의 B29 폭격기 20대가 독도 주변 해상에 무차별 폭탄을 투하했다. 이 폭격으로 독도 앞바다에서 미역을 채취하고 조업하던 울릉도와 강원도 어민들이 집단으로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었다. 사건 발생 후 미 군정청은 어선 11척이 파괴되고 어민 14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조업 중이던 어선이 30여척이었고, 사상자도 150명이 훨씬 넘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생존 어부들은 “30여척의 동력선에 한 척당 5~8명이 승선했으니 150명 이상 숨졌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 어민들 피해에 대한 정당한 조사 이뤄져야 당시 독도는 연합국 최고사령관 각서 제1778호(1947년 9월16일)에 의해 주일 미 공군의 폭격 연습지로 지정돼 있었다. 미군정청은 의도적이 아니었다고 변명했지만 30여척이나 조업을 하는데 미군 조종사들 눈에 어선들이 보이지 않았을 까닭이 없다. 묻혀버릴 뻔했던 미군이 벌인 참상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사건 다음날인 6월9일 독도로 조업을 나온 어민들에게 구조된 장학상씨(당시 36세·1996년 사망) 등 목격자 덕분이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어선들은 조업하고 일부 어민들은 미역과 해산물을 채취하면서 점심 식사를 준비하다 독도로 접근하는 한 무리의 비행기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미군이 폭탄을 투하하고 기관총을 난사했다고 한다. 모두 4차례에 걸친 폭격과 총격으로 어민들 대다수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미국은 처음 폭격 사실 자체를 부인하다 6월17일이 되어서야 폭격을 시인했다. 7월 9일 미 군정청은 소청위원회를 구성해 피해 내용을 조사했고, 1명을 제외한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완료했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하며 사건은 덮어지고 말았다. 진상규명도, 피해 배상도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덮어지자 강원도와 울릉도 주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그러자 한국 정부는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1950년 6월 8일, 독도 동도의 몽돌해안에 ‘독도조난어민위령비’를 세웠다. 당시 위령비 제막식에는 조재천 경상북도 도지사와 해군 의장대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참혹한 사살이 조난이라니 어불성설이 아닌가. 우리는 미국의 눈치를 보며 제대로 말하지도 못하는 참혹한 시대를 살았다. 비석은 1959년 유실됐고 2005년 경상북도가 독도 동도에 다시 세웠다. 원래 비석은 2015년 바다에서 발견돼 안용복기념관에 보관되고 있다. 울릉도 주민들은 매년 6월8일 독도에서 희생 어민 위령제를 지낸다. 기상이 나빠 독도 접안이 어려우면, 안용복기념관 앞에서 위령제를 지낸다. 많이 늦었지만 정부는 이제라도 미군에 의한 독도 양민학살 사건의 진상을 다시 규명해야 마땅하다. 조난자위령비도 ‘미군 폭격 희생자 위령비’로 다시 세워져야 한다. 수백년 전 일본의 막부로부터 울릉도가 조선 땅이란 문서를 받아냈던 어부 안용복의 후예인 우리 어민들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해주는 것이야말로 역사를 바로 세우고 독도가 우리 땅임을 증명하는 지름길이다. 조난이 아닌 폭격에 의한 학살의 희생자들 그들을 위한 비석을 세워야 한다. ‘미군 폭격 희생자 위령비’. 그것만이 억울한 양민들의 죽음에 작은 위로라도 될 것 같다. 뜻하지 않게 샛길로 들어선 안용복 기념관에서 우리 역사를 새롭게 배운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1-12

어머니의 정신과 해풍국수의 전통 지키고 싶어

이순화 여사는 노동을 감당하지 못할 나이에 이르면서 사업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리고 업장에 앉아 국수를 판매한다. 문명의 이기에 익숙하지 않아 다방면으로 역할을 수행할 수는 없지만 ‘홍보대사’ 역할은 마다하지 않는다. 돈이 크게 되지는 않지만 필생의 사업을 포기할 수 없다는 자신의 뜻을 받아들인 아들이 고마웠다. 돈이 우선인가, 소멸되어가는 소중한 가치가 사장되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가장 늦게 시작한 국수시장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밥벌이의 지겨움은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아들 역시 20여 년 잘 다니던 직장을 정리하고 가업을 이어받은 것이기에 정말 고마웠다. 20여 년 직장 정리하고 가업 잇는 아들 10년 간 어머니 감각 익히며 공부 매진 어머니가 지켜온 가치 훼손 하지 않고 필요한 만큼 생산하고 품질에만 정성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 조언 따라 상표등록·최신 장비 갖추며 준비 ‘착착’ “해풍국수 먹고프면 구룡포로 오시라” 하동대 대표, 지역경제 상생 소명 전해 전통시장에서 상인연합회의 역할은 중요하다. 이순화 여사는 구룡포 전통시장의 현대화는 물론 좌판 상인들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하지 않았다. 노후에 이르러 더불어 잘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한다. 이런 노력에 아들은 그림자처럼 도움이 되고 있다. 그 많은 국수공장이 사라졌어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려는 이유다. “모든 어머니가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을까요? 젊었을 적에는 자식들을 위한 희생으로, 나중에는 자신의 삶에 대한 소명으로 일을 그만두지 않잖아요. 그 삶이 고귀해 이 사업을 물려받았습니다. 어머니에게 국수는 남편과 같고 친구와 같고 없는 애인과 같다는 말씀에 도저히 일을 그만두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건강하게 천천히 하고 싶은 대로 하시길 바랄 뿐이지요. 이렇게 소소한 행복을 선물해준 어머니께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구룡포를 찾는 사람이 늘어나게 하고 싶어 하동대 대표는 홍보의 중요함을 절감하고 있다. 알아야 면면장(免面牆)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인터넷이나 사회정보 시스템을 활용한 홍보는 일부러 거부하고 있다. 대량생산 시스템을 적용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2억 원가량을 투자해 최신식 장비를 설치하고 최상의 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었다. 언제까지 이 공장을 가동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발전 속도가 느린 사양산업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멈추지 말아야 할 의무가 그에게 있다. 해풍국수를 맛보고 싶은 사람들이 구룡포를 방문해 해풍국수를 끓이는 점포에서 맛을 보면 좋을 테고, 그렇게 사람을 불러 모으면 구룡포 경제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해풍국수는 직접 방문해 구입할 수 있는데 생산량을 적정하게 조절하다 보니 전화 주문을 하면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다. 고객들은 그런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하 대표는 배짱이 아니라 해풍국수를 먹고 싶으면 구룡포로 오라고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구룡포의 발전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한다. 어느 학자의 말을 빌려 그는 말했다. “인문학은 발걸음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책상에서 공부하고 컴퓨터로 검색하고 모바일로 체험하는 것과는 다른 경지라는 말로 해석되었습니다. 와서 보고 느끼고 감동하고, 건전한 소비를 통해 지역 경제에 기여한다면, 음식만이 아니라 지역의 정서를 고스란히 느끼고, 그다음 자신의 페이지에 그걸 기록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해요. 그런 경험이 확산된다면 지방 소멸이라는 말이 떠돌아다니지 않을 겁니다. 여행이 관광이 아니라는 사실을 구룡포는 보여줄 수 있을 겁니다. 오세요, 그리고 느껴 보세요. 구룡포는 국수만이 아니라 보고 느낄 것들이 정말 많으니까요. 구룡포 대게도 참 맛있는 음식입니다. 저렴한 생선회는 덤이고요. 구만리 청보리밭을 보는 것은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겁니다. 만월의 달밤에는 어쩌면 신비한 환각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10년 동안 어머니의 감각을 익혀 하 대표는 자신의 사업만 생각하지 않는다. 구룡포의 발전을 위해, 나아가서는 포항시민들과의 상생을 위해 작으나마 힘을 보태고자 한다. 물론 어머니가 우선이다. “이제 쉬셔도 되는 연세입니다.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지요. 그러나 어머니는 잠시도 일을 접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는 분입니다. 장터가 생활의 터전이기 때문이죠. 4남매 중 제가 장남입니다. 위로 두 누님은 내외가 다 교사로 재직하고 있어요. 남동생도 있지만, 어머니의 인생을 완성하려면 제가 가업을 잇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금의 후회도 없어요. 다만 더 잘하고 싶습니다.” 하동대 대표는 주어진 소임에 충실하고, 욕심은 내고 싶지 않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필요한 만큼 생산하고, 품질에만 신경을 쓰고 싶기 때문이다. 투자를 하고, 홍보를 강화하고, 대량생산은 아니더라도 적극적인 경영을 하면 훨씬 사정이 나아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각종 규제가 너무 힘들어 그렇게 싸우고 싶지 않다. 상표등록 등 다른 준비는 다 해놓았다. 대기업과 상표를 공유하며 매칭하는 것도 구상하고 있지만 많은 고민이 필요한 일이다. 이 경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어머니가 지켜온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다. 구룡포의 바람과 햇살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때까지 잘 살아오지 않았는가. 고생되더라도 어머니의 정신을 지키고, 가업을 이어받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서도 해풍국수의 전통을 지키고 싶다. 그리고 그럴 자신이 충분하다. 10년 동안 어머니의 감각을 익혔고, 그걸 기억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부는 항상 진행형이다. 위기를 맞은 인생음식 구룡포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현저하게 줄었다. 이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길은 기본에 충실하는 것임을 그는 어머니에게 배운다. 국수가 잘 팔리는 날도 있고 파리만 날리는 날도 있다.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이라고 어머니는 가만히 말씀해주셨다. 그 많던 국수공장이 다 사라져도, 가장 늦게 시작한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남지 않았느냐, 밥 먹고 산 일이 얼마나 고마운가, 그런 생각을 하면 금세 겸손해진다, 저 간판을 보라, 우체국장이 만들어준 저 간판이 우리의 얼굴 아닌가. 저 간판의 변치 않는 쨍쨍함, 그 어떤 붓글씨 대가의 필체보다 낫고 비바람 맞고 견딘 저 나무의 결만 보아도 마른 눈물이 난다, 나는 내가 자랑스럽고 이 길을 선택해준 네가 더 자랑스럽다, 어머니는 혼잣말하듯 그렇게 말씀하셨단다. 구룡포의 바다는 여전히 푸르고 창망하다. 그 깊이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순화 여사의 마음 역시 그 깊이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소중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삶이 세대를 뛰어넘어 면면히 유지되는 극명한 이유다. 모든 잔치에 국수는 반드시 등장하는 음식이었다. 그러나 이 인생 음식이 조금씩 소외되면서 위기를 맞고 있다. 대량과 편리, 파격적인 저가로 밀어붙이는 음식들이 식탁을 위협한다. 그러나 라면과 빵, 인스턴트로 대체되는 음식으로 간단하게 우리 인생을 때울 일이 아니지 않은가. 〈끝〉 글 : 이우근(시인) 사 진 : 김 훈(작가)

2025-11-12

속리산 법주사 정이품송과 부인 정부인송

우리가 흔히 짐승이라 부르는 동물이나 새들은 타고난 본성에 따라 목숨을 걸고 자신의 영역을 지킨다. 수천 년 동안 대를 이어 마치 개미가 쳇바퀴 돌 듯 한 자리를 지키며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계절을 맞고 보내는 사이, 특히 갈바람이 나뭇잎을 물들이는 가을이면 어딘지 모르게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럴 때면 어느 때보다 생각이 깊어지고,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나 또한 그렇다. 가을이 짙어가던 어느 날, 아우 대붕과 함께 대구에서 출발해 속리산 법주사 천연기념물인 정이품송과 그의 부인 정부인송을 만나러 이른 아침 길을 나섰다. 속리산(俗離山)은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중간 허리에 솟은 해발 1058m의 명산이다. 이름 그대로 ‘속세를 떠난다’는 뜻을 지녀 예로부터 수행과 깨달음의 도량으로 여겨졌다. 병풍처럼 둘러선 산세 속에는 천왕봉과 문장대 등 고봉이 즐비하고, 문장대에 오르면 백두대간의 능선이 파도처럼 굽이친다. 사시사철 다른 빛깔의 숲과 계곡이 어우러져 1970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보은 장안면 600살 된 소나무 ‘정부인송’ 치맛자락처럼 두 갈래로 펼쳐진 줄기들 천연기념물 제352호… 평안 품은 名木 세조의 벼슬을 받은 소나무 ‘정이품송’ 600년 세월 외줄기 곧은 자태 ‘남성적’ 천연기념물 제103호, 정부인송과 부부 산기슭에는 1500년 역사의 신라 고찰 법주사가 자리하여 불심의 중심을 이루고, 그 속의 팔상전은 우리나라 유일의 목탑으로 보물처럼 남아 있다. 이렇게 속리산은 자연과 불심, 그리고 문화가 어우러진 성산으로, 지금도 사람들에게 세속을 벗어나 마음의 고요와 깨달음을 찾게 하는 영산이다. 속리산의 치맛자락 아래, 마치 가을 하늘의 별빛처럼 박혀 있는 정이품송과 정부인송을 만난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설렜다. 갈바람을 헤치며 달리는 고속도로 위로 펼쳐진 황금빛 들판과 붉게 물들어가는 숲의 풍경은 내 지나온 세월처럼 아득했다. 자연은 ‘가을’이라는 이름 하나로 세상을 물들이고 있었고, 그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또한 노거수를 찾아가는 순례길 같은 행복한 순간이었다. 자동차는 순식간에 고속도로를 벗어나 보은군 장안면 서원리 49-4번지로 향했다. 그곳에 정부인송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 선비의 아내답게 풍채는 점잖고 단정하여, 한 집안의 맏며느리처럼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치맛자락처럼 펼쳐진 가지들은 동서남북을 고루 감싸며 너그럽게 품어주는 여인의 품을 닮았다. 나이 600살, 높이 15.2m, 가슴둘레 4.7m. 높이 70cm 지점에서 두 갈래로 나뉜 줄기 하나는 3.3m, 다른 하나는 2.9m였다. 동서로 23.8m, 남북으로 23.1m나 되는 치마 품의 그늘에 서면, 부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한 평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속리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의 삼가천을 안고, 법주사로 이어지는 장안로를 곁에 두고 살아간다. 지나가는 이들을 굽어보며 유유자적 세월을 이어가는 품이 건강하고 고요하다. 사람들 또한 정부인송의 미모와 하늘로 뻗은 두 줄기의 힘찬 기운에 매료되어 많이 찾고있다. 마을 사람들 역시 경외감이 들어 매년 음력 초이튿날, 정부인송 아래에서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고 있다.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마을은 평화롭고 주민들은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라에서도 1988년 4월 30일 천연기념물 제352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정부인송의 치맛자락 속에는 세월의 나이테만큼이나 깊은 연륜과 지혜가 깃들어 있다. 지난 폭설에 몸이 다소 상했지만, 곧 회복해 다시 아름다운 자태를 되찾았다. 그 회복력은 놀라우리만큼 강인했다. 그래서 보은 사람들은 정이품송과 부부의 연을 맺어주어 ‘정부인송’, ‘보은의 딸’, ‘보은의 며느리’라 부르며 아끼고 사랑한다. 그 곁에 서면 누구라도 따뜻한 가족의 품에 안긴 듯한 평안을 느낀다. 그녀의 남편은 바로 조선 세조로부터 정이품 벼슬을 받은 정이품송이다. 법주사 입구, 이곳에서 7km 떨어진 곳에 서 있다. 수많은 나무 가운데 나라로부터 벼슬을 받은 나무는 아마 이 정이품송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그 사연은 이러하다. 세조 10년(1464), 왕이 법주사로 행차할 때였다. 가마가 이 소나무 아래를 지나려는데, 가지가 아래로 처져 가마가 걸릴 듯했다. 세조가 “가마가 걸리는구나” 하고 말하자, 소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들어 올려 왕이 무사히 지나가도록 했다. 또 다른 날, 세조가 비를 피하려 이 나무 아래 머물렀고, 그 충정을 기리기 위해 정이품, 곧 장관급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정이품송은 한때 삿갓처럼 둥글고 단정한 자태였으나, 1993년 강풍에 서쪽 큰 가지가 부러져 많이 상하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연히 서 있다. 나이 600살, 높이 16.5m, 가슴둘레 5.3m. 1962년 12월 3일, 천연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어 오늘도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정이품송이 외줄기로 곧게 자란 남성적이라면, 정부인송은 우산 모양으로 치맛자락을 드리운 여성적이다. 서로 닮았으면서도 다른 모습으로 세월을 견디며 부부의 연을 이어오고 있다. 이 두 그루의 인연을 맺어준 중매자는 다름 아닌 충북 보은의 주민들과 산림청이다. 천지자연의 모든 존재가 이들의 장수와 평화를 축복했으리라. 오늘도 많은 사람이 정이품송 앞에서 부부 인연의 중요함을 인식하며 그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부부의 인연이란 무엇일까. 우연처럼 시작되지만, 실은 오랜 세월의 실로 꿰어진 인연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우연이 있을까. 젊은 날의 설렘이 생활의 언어로 바뀌어도, 그 속에는 서로의 웃음과 눈물이 켜켜이 쌓이며 단단해진다. 옛사람들이 부부를 ‘천지지합(天地之合)’이라 한 것은, 하늘과 땅처럼 서로의 햇살과 그늘이 되어주는 삶의 이치를 말한 것이다. 때로는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결국 서로의 얼굴 속에서 자신을 비추어 본다. 부부는 소유나 지배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며 한 울타리 안에서 함께 늙어가는 동행자다. 젊은 날의 사랑이 불꽃이라면, 세월의 사랑은 서로의 숨결로 켜지는 등불이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상대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통해 자신을 알아가는 일이다. 오늘 속리산 법주사의 정이품송과 서원리 정부인송을 마주하며 나는 부부의 인연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진리를 새삼 깨닫는다. 나무를 부부의 연으로 맺어준 보은인(報恩人)의 나무 사랑에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부부는 말없이 눈빛으로 약속한다. “내일도, 알콩달콩 함께 걸어가자.” /글·사진=장은재 작가 속리산 국립공원 기념비문의 내용은… 아름다운 자연을 예찬하고 옛 문물을 숭상함은 문화 민족의 자랑이다. 웅장하면서도 청아한 영봉과 기암괴석이며 첩첩이 굽이도는 절묘한 계곡과 하늘을 덮는 울창한 숲은 찾는 이로 하여금 한 여름에도 옷깃을 여미게 하고 신라 진흥왕 때 창건한 천년 향기 그윽한 법주사가 그 중턱에 자리 잡아 여기에 불교문화의 정수인 값진 문화제를 간직한 우리의 속리산은 역조의 왕이 행어 하셨고 많은 문인재사에 의하여 시와 노래로 읊어져 천하의 절승으로 널리 알려진 지 오래이다. 이 유서 깊은 지역은 1966년 6월 24일 사적지 제4호로 지정되었고 1969년 1월 21일에는 관광지로 1970년 3월 24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자연보호와 국민의 보건 휴양에 이바지하는 바 지대하다. 1970년 5월 4일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이곳에 이르시어 국민 정서 순화의 요람지로서 속리산 국립공원 보호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시고 공원 환경 조성과 사찰 정화에 관하여 구체적 개발 방향을 지시하심과 아울러 정부에서 적극 지원토록 조처하심으로써 1970년부터 사내리 신도시 건설 등 국립공원 연관 사업을 이룩도록 하였고 친히 공원 표제를 써 주시었기 우리는 조상의 얼이 담긴 이곳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고 가다듬을 것을 다짐하고 이에 속리산 국립공원의 연역을 밝힌다. 1970년 10월 3일 충청북도 지사 정해식 엮음

2025-11-12

트럼프, 치즈버거, 그리고 경주 돼지찌개

지난 10월 말. 경상북도 경주가 시끌벅적했다. 21세기 ‘지구 위 최강 2개국’이라 불리는 미국과 중국의 최고 권력자 도널드 트럼프와 시진핑(習近平)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신라의 옛 도읍인 서라벌을 찾았다. 그들의 전용기가 착륙한 김해공항에서부터의 비까번쩍한 의전과 그들이 머문 경주 보문단지 숙소 주변 경호가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유명인사가 왔다 가면 무성한 뒷이야기가 필연적으로 남는다. APEC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경주를 찾은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특별하게 수억 원대의 금을 사용해 제작된 신라 금관 모형과 무궁화대훈장을 선물 받고 입이 벌어졌다고 한다. 지난달 APEC 정상회의 참석 트럼프 ‘k-푸드’와 한국 스타일 별미 지천인데 숙소에 돌아가자마자 ‘치즈버거’ 요청 안강엔 엄지척 돼지고기찌개 맛집 2곳 진미 맛볼 기회 영영 놓친 듯 안타까워 대부분이 짐작하듯 트럼프는 세계 어느 국가의 통치자보다 ‘이익’을 국제관계의 주요 잣대로 판단하는 인간. 어쨌건 이런 딱딱한 이야기는 각설하고. 경주 APEC 회의에선 트럼프의 ‘욕심 없고 저렴한’ 음식 취향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국 이재명 대통령과의 회담을 마친 그는 숙소인 힐튼호텔로 돌아가자마자 ‘치즈버거’를 가져오라고 요청했단다. “채소는 따로, 베이컨은 빼고, 토마토케첩 많이”라는 구체적 요구까지 비서실로부터 있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주문이다. 한국에선 판매되지 않기에 곁들일 콜라는 미국에서부터 공수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햄버거에 콜라…. 가진 재산을 헤아리기도 힘든 사람의 음식 취향치고는 소박하다고 해야 할까? 어쨌건. 시간이 흘러 트럼프가 지금보다 더 나이를 먹었을 때, 그는 한국 경주와 거기서 열렸던 APEC을 늘상 즐기던 ‘치즈버거’를 재차 먹었던 도시로 기억할까? 만약 그렇다면 딱하기 그지없다. 경주는 이른바 ‘k-푸드’와 한국 스타일의 별미가 지천인 도시인데. 생각해보자. 제 나라는 물론, 주변 국가들에게까지 정치·군사·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통령이나 총리도 결국은 인간이다. 인간이 자신이 사는 공간을 떠나 다른 곳으로 여행-그게 전용기를 사용한 국빈 방문이건, 좁은 이코노미석을 이용한 가난한 사람의 해외여행이건-을 떠나는 건 도착한 여행지의 낯선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어느 곳이라 특정할 것 없다. 신문사의 사진기자는 이른바 ‘맛집’을 많이 알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자신이 담당하는 지역을 1년 365일 떠돌아다니며 혼자 식당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경상북도에서 발행되는 신문의 사진기자는 북쪽으론 영주와 안동에서부터 남쪽으로는 경주와 포항, 때로는 푸른 물결 출렁이는 먼 섬 울릉도까지를 오간다. 직업이 그러니 어떤 곳을 지목해 “거긴 가기 싫다”고 말할 방법도 없다. 30년 가까이 경상북도 일대 사진을 찍으러 다닌 사진기자 한 명을 알고 있다. 그가 경주를 수백 번 오갔을 건 구구절절 부연하지 않아도 분명한 사실일 터. 그가 소개한 ‘숨겨진 경주 맛집’이 몇 곳 있다. 쫄면을 파는 저렴한 분식집에서부터 석쇠에 일등급 한우를 구워주는 제법 비싼 식당까지 프리즘이 넓었다. 가격을 불문하고 경주시 안강읍에 있는 돼지고기찌개 식당 두 곳은 엄지를 치켜세울 정도의 맛을 자랑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돼지고기는 닭고기와 더불어 동서양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육류의 수위(首位)를 다툰다. 닭고기와 달리 수십억 명에 달하는 이슬람교도가 입에도 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돼지고기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사랑을 받으며 각종 요리 재료로 사용된 식용 고기일 터. 17세기 초반에 출간된 의학서 ‘동의보감(東醫寶鑑)’은 돼지고기가 ‘신장의 음을 보하고 위액을 충족시키며 간장의 음혈을 보하는 작용을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보편의 상식과 달리 적당한 양을 먹는다면 몸에 나쁠 게 없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돼지고기는 소고기에 비해 가격도 헐하다. 주머니 가벼운 서민들이 즐기는 이유가 있다. 지척이라 불러도 좋을 거리에서 영업하고 있는 경주 안강의 돼지고기찌개 식당 두 군데. 한 곳은 칼칼한 고춧가루 양념을 듬뿍 넣은 붉은빛으로 매운 맛을 좋아하는 이들의 혀를 유혹하고, 나머지 한 곳 식당은 얼핏 보기엔 맹물 같은 육수를 넣어 맑은 색깔의 독특함을 유지한다. 다들 짐작하겠지만, 돼지고기와 채소 몇 가지를 넣은 찌개가 ‘놀라운 맛’을 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미국 돈 10달러 안팎의 싼 가격으로 맛보는 경주 안강읍의 돼지고기찌개는 각별하다. 낮과 밤 언제 먹어도 소주를 부르는 별미다. 만약 이걸 트럼프가 맛봤다면... 도널드 트럼프가 좋아했던 형은 알코올 의존증을 앓다가 죽었고, 그런 이유로 트럼프는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고 들었다. 아들과 손자에게도 금주를 금과옥조처럼 강조한단다. 반주 없는 돼지찌개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니, 만에 하나 다시 경주를 오더라도 트럼프의 선택은 돼지고기찌개가 아닌 치즈버거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경주의 애주가들은 이렇게 말할 듯하다. “안타깝구나.”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1-11

외국인들은 어떤 돼지고기 요리를 먹을까

뜨거운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익어가는 삼겹살. 다수의 한국인들이 군침을 흘리게 되는 장면이다. 노릇노릇 잘 익은 삼겹살에 고추와 마늘, 쌈장을 넣어 상추에 싸먹는 방식은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까지 매혹시켰다. 당연지사 ‘삼겹살 쌈’은 손꼽히는 K-푸드 가운데 하나가 됐다. 시인 하재봉은 ‘삼겹살 한 점에 소주 한 잔하며 직장 상사 욕하는 재미에 회사 다닌다’는 내용을 담은 시까지 섰다. 이처럼 삼겹살 구이는 서민들의 가장 만만한 술안주이기도 하다. 삼겹살만이 아니다. 한국엔 돼지고기를 재료로 사용한 요리가 많다. 돼지 다리를 각종 약재를 넣어 삶아낸 쫄깃한 족발, 구이보다 기름기가 적어 담백한 수육, 내장을 매운 양념에 볶아먹는 곱창구이 등등. 그렇다면 외국에선 어떤 돼지고기 요리를 먹을까? 독일 사람들은 돼지 다리를 오븐에 오랜 시간 익혀 먹는 ‘슈바인스학세’를 즐긴다. 바삭한 껍질과 부드러운 속살이 맥주에 잘 어울리기에 독일을 찾는 여행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맛보게 된다고. 이탈리아에서는 향신료와 소금을 바른 돼지고기를 일정한 온도와 습도에서 숙성시킨 ‘카포콜로’를 피자 위에 토핑으로 올리기도 한다. 독특한 향과 식감 탓에 호오는 갈리는 편이다. 돼지고기 어깨살을 결대로 찢은 ‘풀드 포크’는 미국 남부 지방에서 주로 먹는다. 고기만 먹기도 하지만, 빵 사이에 넣어 먹는 방식이 보편적이다. 중국 또한 찌고, 굽고, 삶고, 튀기는 등 돼지고기 요리의 방식이 다양하기로 유명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1-11

19년간 폭설·폭우에 조난 당하고 굶주림에 지친 300여명 구조

△ 내수전 전망대 가는길 천국같은 집 한 채 내수전 전망대 가는 길, 내수전 마을 경치 좋은 곳에 홀로 들어선 집 한 채가 있다. 마당에서 앉아서도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관음도와 죽도까지 한눈에 들어오니 굳이 전망대까지 가지 않아도 그 자체로 최고의 전망대다. 노부부가 사는 집, 부부는 저동에 새집이 있지만 틈만 나면 오래 전부터 살아온 이 집에 와서 지내다 간다. 특히 여름에는 내내 이 집에서만 생활한다. 고지대라 시원하고 모기도 없기 때문이다.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틀 일이 없으니 전기세도 안 나간다. 연중 콸콸 흘러나오는 물 또한 더없이 달고 풍족하다. 천국이 따로 없다. 너른 마당은 캠핑족들에게 놀다 가라고 그냥 내준다. 그래서 해마다 텐트를 들고 와서 며칠씩 지내다 가는 이들도 많다. 어차피 산에서 쏟아지는 물 마음껏 쓰라고 한다. 사람들이 와서 지내니 말벗도 되고 심심하지 않아서 좋다. 그렇다고 관광객 상대로 무슨 장사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산속이 좋다. 종일 좋아하는 노래 틀어놔도 뭐라 하는 사람도 없어서 더욱 좋다. 오늘도 작은 카세트에서 흘러간 옛 노래가 나온다. 노래를 들으며 할머니는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할아버지는 겨울에 땔 장작을 패고 있다. “여기 있으면 몸 안 아파요. 시내 가면 가만히 들어앉아 테레비나 보지. 공기도 좋고 앞에 훤하니 좋아요.” 내수전 전망대 가는길 외딴 집 동해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여 캠핑족들 오면 너른 마당 제공 원시림 숲속 ‘영혼의 길’ 거닐며 진객 붉은배오색딱다구리 조우 사람들 떠난 백운동엔 구름만 할머니는 이 산중 옛집이 그리도 좋을 수가 없다. 전부 다 내 것 같고 마음이 푸지다. “돈 많으면 뭐해요. 죽어서 가져가나. 살았을 때 묵고 살면 되지. 마음이 부자라야지.” 할아버지와는 동갑인데 호적에는 4살이 더 많게 올라 있다. 사촌 형 호적에 대신 오른 바람에 그리됐다. 할머니는 나물 농사를 지었고 할아버지는 배 만드는 목수가 천직이었다. 비탈밭에 나물 농사를 많이 했지만 아들이 와서 다 처내 버렸다. 부모님 고생 그만하라고. 그래서 나물 밭은 참고비 밭만 아주 쪼금 남았다. “나물 중에는 참고비가 젤 맛있어요. 고사리 증조할아버지쯤 되지.” 할아버지는 본래 포항, 제주, 부산, 울산 등지를 떠돌며 배 짓는 목수로 일하다 울릉도로 들어와서는 오징어 배 짓는 ‘도대목’을 했다. 배 짓는 목수 중에서도 우두머리를 하셨단 말씀이다. 배 목수는 집 목수보다 기술을 몇 배 위로 쳐준다. 그만큼 공정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배 목수는 집을 지어도 집 목수는 배를 못 짓는다. 죽은 사람 널(관)도 많이 짰고 강고(노 젓는 배)들도 많이 만들곤 했다. FRP로 배를 만들게 되면서부터 일거리가 없어져 배 목수 일을 그만뒀다. “옛날엔 죽도 앞바다에 오징어가 바글바글했어요. 초저녁에 나가 한배 잡고 또 날 샐 때 가서 한배 잡아오고 그럴 정도였죠.” 그 시절에는 명태도 많이 났다. 처녀 시절 할머니는 땔감용 나무하러 다니고 오징어 내장 따서 돈 벌러 다니느라 학교 공부를 못했다. “학교는 문 앞에도 안 가봤어요.” 마을 사람들이 일을 너무 많이 해서 키가 안 큰다고 걱정 할 정도였다. “일 좀 그만 시키라고 시집 못 보낸다고 그랬어.” 동생들이 많아 동생들 업어 키우고 물 길러 다니라고 학교를 안 보내줬다. 7살 때부터 동생들 업어 키웠다. 명태, 오징어 손질해서 돈 벌어 동생들 가르치고 25살 때 중매로 신랑을 만나 결혼했다. “신랑을 잘 만났어요.” 저동 마을, 한동네 사는 총각이었다. 지금의 할아버지다. “봐라 세월이 얼마나 좋으냐.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요.” 기나긴 인고의 터널을 지나 비로소 찾은 안식. 그 안식의 시간이 할머니는 더없이 행복하다. 이 또한 울릉도가 주는 행복이다. 인사를 드리고 다시 길을 나서는데 귓가에 울리는 할머니의 충고 말씀이 가슴을 울린다.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부지런히 놀러 다니소.” 일 열심히 하지 말고 부지런히 놀러 다니라니 이 얼마나 지혜로운 말씀인가. 내수전 마을 삼거리에서 석포 방향으로 5분 남짓 걸으면 시멘트 도로가 끝나고 다시 숲길이 시작된다. 지금부터는 포근한 흙길에 더없이 호젓한 숲속 오솔길이다. 이 숲길에는 중간중간 저동에서 석포로 전기를 운반하는 전선과 전봇대가 눈에 띄는데 이 또한 사람이 오고 가던 옛길의 흔적이다. △ 옛 개척민 정매화가 살던 골짜기 그 외에는 내내 원시림의 숲길이다. 육지에는 사라지고 울릉도에만 자생하는 너도밤나무와 키 작은 대나무인 이대, 동백나무 들이 길을 따라 도열해 있다. 가을 숲은 더 바랄 나위 없이 고요하다. 이 고요함 속에서는 작은 시냇물 소리마저 요란하게 들린다. 이 또한 고요함의 증거다. 또 한동안 길에만 몰두해 걷는데 느닷없이 쉼터가 나타난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정매화골이다. 옛날 개척민 중에 정매화란 이가 살던 골짜기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매화가 살다 간 뒤 이곳은 1962년 9월부터 이효영씨 부부가 삼남매와 살았다. 이씨 일가는 1981년까지 19년을 이 외딴 골짜기에서 살았는데 이씨 부부의 이름이 남은 것은 그들이 이곳에 살면서 폭설, 폭우에 조난 당하거나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을 300여명이나 구조한 미담이 있기 때문이다. 1981년 11월27일 자 대구 매일신문에 기사가 실렸다. 이씨 부부는 1982년 선행군민 표창을 받았다. 다시 길을 걷는다. 숲속의 오솔길은 흙길이다. 이 흙길은 오래 걸어도 다리가 아프지 않다. 흙길은 발바닥이나 무릎에도 무리가 가지 않는다. 충격을 반사해내는 시멘트 길과 달리 흙바닥이 충격을 흡수해 주기 때문이다. 길가의 오래된 나무들이 뿜어내 주는 피톤치드는 내 몸 안의 나쁜 세균들만이 아니라 내 영혼을 좀먹는 병균들까지 박멸해 주는 듯하다. 어찌 영혼의 길이 아닐 수 있겠는가? 오늘은 이 숲길에서 진객을 만났다. 나무 둥치에 몸을 바짝 붙이고 먹이 사냥에 열중해 있는 새. 깃털이 아름다운 붉은배오색딱다구리. 한국에서는 번식이나 월동을 하지 않고 우연히 들르는 나그네새라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한다. 경기도 광릉, 옹진군 소청도 등에서 관찰된 기록이 있는데 봄에 북상하고 가을에 남하한다. 남쪽 먼 나라로 가다가 울릉도에 들렀다. 반갑구나! 나그네새여. 그대도 나그네 나도 나그네. 주린 배 많이 채우고 가시라. △ 구름도 쉬어가는 백운동마을 풍경 이제부터 길은 울릉읍 저동을 완전히 벗어나 북면 지역으로 들어선다. 울릉도의 북단이다. 숲속에 산장이 하나 있다. 예전에는 이 숲에도 몇 가구가 살았었지만 1960년대 말 김신조 무장간첩 사건 이후 외딴 집들은 모두 이주당했다. 이 숲의 꼭대기 산정에도 10여 가구가 살았었다. 백운동 마을이다. 그야말로 구름도 쉬어가는 산 정상에도 사람이 살았었다. 조금이라도 평지가 있으면 그곳이 어디든 깃들어 살던 울릉도 사람들. 이제는 백운동도 폐촌이 되었고 그저 구름이나 가끔 쉬어가는 구름 마을, 진짜 백운동이 되었다. 화전민들이 농사를 짓고 살았던 마을은 독거 가구 이주정책과 화전 금지 조치로 더이상 존립이 불가능해 졌고 백운동 주민들은 모두 뭍으로 떠나갔다. 그렇게 한 시대가 오고 갔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1-11

산불과의 싸움 변수는 ‘하늘’ 美 통합 대응 전략서 배운다

지난 3월 말, 영남권을 휩쓴 역대 최악의 대형 산불은 초속 25m/s의 강풍을 타고 불길이 삽시간에 확산되며 수천 헥타르의 산림을 삼켰다. 산불발생지역 지자체는 각자도생해야 했고, 진화 헬기 투입은 늦었다. 그 사이 화마는 밤낮을 쉬지 않고 번졌고, 불길이 지나간 자리의 모든 것은 속절없이 스러졌다. 대형 산불, 그것도 산악 지형이 험한 한국 특성상 헬기가 필수 요건이나 열악한 장비는 산불 진화에 어려움을 키웠다. 한국은 산불의 헬기 진화율이 80%에 달할 만큼 산불 진화에서 핵심 역할을 하지만 지난 영남권 산불 때 산림청 보유 헬기 50대 중 35대만 현장에 투입될 수 있었다. 러시아제 8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부품 수입이 끊겨 운용이 불가능했고, 7대는 1980~90년대 도입한 600리터급 소형 헬기라서 대형 산불 현장에 투입할 수가 없었다. 헬기가 필수인 지형의 한국이 갖가지 이유로 현장 투입이 어려운 상황과 달리 미국은 민간과 계약을 통해 산불 관리 항공 인력을 효율적으로 운용 중이다. 한국이 대형 산불에도 헬기 운용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실태와 함께 이와 다른 미국의 시스템을 소개한다. 항공기·인력 등 조정·배분하는 ‘NIFC’ 1~5단계 대비 데이터 기반 우선순위 정해 언제든 투입 가능한 민간항공기와 계약 전문소방대원 ‘스모크점퍼’도 현장 급파 美 전문가들 “韓, 산림청·소방청·지자체 헬기 통합 운용 컨트롤타워 필요” 조언 헬기 운영 한계 드러낸 우리나라 현재 국내 산불 진화에 투입되는 헬기는 △산림청 산림헬기 △소방청 소방헬기 △지방자치단체 임차헬기로 나뉜다. 산림청 소속 헬기는 2025년 2월 기준 총 50대인데 기령 20년 이상인 헬기가 44대(88%)에 달해 노후화 우려가 심각한 상황이다. 소방청 소속 헬기의 경우 총 32대로 이중 8대만이 2천~4천L급 담수 능력을 갖추고 있다. 지자체는 총 81대의 임차 헬기를 민간항공업체로부터 빌려 사용하고 있지만 기령 20년 이상이 74대에 달하며, 그마저도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자체는 임차조차 어려운 상황이라 노후 기종이라도 계약할 수밖에 없는 열악한 상황이다. 운영체계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산불은 초기에 진화하지 못하면 급속히 확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행 대응 체계에서는 산불이 발생하면 시장·군수·구청장이 초기 진화를 지휘하고 관할 헬기만 투입하도록 하고 있다. 이는 지자체 임차헬기만으로 조기 진화를 감당하기 어렵게 만든다. 지난 3월, 경북 의성에서 강풍과 함께 넘어온 산불에 맞닥뜨려야 했던 영양군은 당시 임차 보유 중이던 진화헬기 1대를 임차 업체 소속 조종사와 함께 현장에 투입했다. 그마저도 30년전 생산된 노후헬기로 산불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 현실이었다. 이에 대해 산림청 관계자는 “전국적으로 동시에 산불이 발생할 경우, 산림청과 지자체 헬기만으로는 감당이 불가능하다”며 “야간운항이 가능한 헬기가 3대뿐이라는 점도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산불 대응시에는 신속한 대응이 우선이나 법체계마저 이를 가로막는다. ‘항공안전법’상 야간 산불진화는 비행안전 확보를 위한 특별 운항제한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고 있는데 국토교통부 고시 「회전익항공기를 위한 운항기술기준」 제10절(회전익항공기 야간 산불진화 추가기준 10.3.1.가)에서는 회전익항공기의 야간 진화가 ‘주간부터 해당 지역의 지형·장애물을 숙지한 경우’에만 허용된다. 결과적으로 야간 산불은 헬기로 진화할 수 없는 시간대가 되기에 산불 진화 어려움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미국의 상황 “항공 자원, 하나의 시스템으로 전국 단위 배분” 산림청과 소방청, 각 지자체가 알아서 대응해야 하는 국내 시스템과 달리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체계적인 산불 대응 시스템으로 꼽히는 NIFC(National Interagency Fire Center) 운영을 통해 모든 항공 자원을 한 개 시스템 하에 두고, 전국 단위로 배분하는 극효율의 체계를 운영 중이다. 여러 기관이 모여 서로의 자원을 공유하고, 정보와 인력을 통합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NIFC는 전국단위로 필요한 항공기나 인력을 모두 센터에서 조정해 배분하고 있다. 실시간으로 자원을 조정하는 담당처는 NIFC 내에 있는 전국 산불 조정센터(NICC·National Interagency Coordination Center)다. 주로 국토부와 산림청 소속 직원들로 구성돼 있어 관계 부처 간 대응과 협력이 신속히 이뤄질 수 있다. NICC관계자는 “산불 발생시 로컬 디스패치(비상 상황시 화재 진압 소방대원 투입 조정센터)에서 자체적 해결이 가능한 경우 외에 전국적으로 필요한 상황이 발생할 시 인적 및 장비 요청을 진행한다”면서 “1~5단계까지의 준비상태(Preparedness Level)를 거치는데 기상청, 정보기관, 산불 관리 담당 등 세 곳이 협력해 정보를 통합하고 결정한다. 산불이 여러 곳에서 발생할 경우 헬기, 항공기, 인력 같은 대규모 자원 배분을 어떻게 할지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단순히 감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다”라며 “데이터 기반으로 어느 지역에 헬기를 우선 배치할지, 어떤 규모의 인력을 투입할지 결정한다”고 덧붙였다. 각 지자체 및 기관부처가 초기 대응을 도맡는 한국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특히 NICC가 보유한 항공 자원의 경우 정부 소유 항공기보다 민간 소유 항공기가 더 많이 계약돼 있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이는 필요할 시 언제든 투입이 가능한 항공기 수량이 항시 확보돼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NICC 관계자는 “NICC가 보유한 대부분 항공기는 개인소유, 민간항공사다”면서 “계약기간 동안 민간 계약자들은 상시 대기 상태로 있다가 우리가 필요할 때 언제든 항공기를 제공하며 출동 시 추가 비용을 지급받는다”고 설명했다. 항공기와 함께 전문 훈련을 받은 인력이 투입된다는 점도 산불 대응력을 높인다. NIFC에 소속된 기관중 미국 산림청(USFS)이 직접 운영하는 Great Basin Smokejumper Base(스모크 점퍼들의 훈련·출동·보급 거점)에서는 산불 현장에 투입되는 인력을 훈련·교육하고, 항공 출동을 지휘한다. 이들은 산불 전문 소방대원인 스모크점퍼(Smoke jumper)로, 비행기에서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려 산불 현장에 투입되는 전문대원이다. 주로 도로나 접근로가 없는 깊은 산속에서 산불 초기 대응을 하는 데 적합한 인력인 이들은 낙하 후 불길 근처에서 방화선을 만들어 불이 번지지 않도록 가연물을 제거하거나 작은 불길을 직접 진화하는 등 불길을 끊어 내며, 산불이 대형 재난으로 번지지 않는 데 효과적인 역할을 한다. 이 역시 한국의 상황과 확연하게 다르다. 한국은 크게 산불특수진화대, 산불예방진화대, 공중진화대로 나눠 산불 진화대를 운영하고 있다. 이중 산불예방진화대가 대부분 비중을 차지하는데 6개월~1년 계약을 체결한 기간제인데다 전문적인 직무 교육도 받지 않는다. 미국이 빠르게 초기 진압을 가능케 하는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반면, 국내 산불예방진화대는 주로 산불 예방과 잔불 정리 작업을 맡는데 지난 영남권 산불과 같은 대형 산불에는 진화에 직접 투입된다. 그만큼 위험성이 높다. 실제 당시 경남 산청에서는 창녕군청 소속 예방진화대원 3명이 작업 도중 목숨을 잃었다. 국내도 모자라다, 국제 협력 체계 갖춘 미국 미국의 NIFC 시스템은 확실하게 산불을 진화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민간 계약자들과 계약을 통해 산불 현장에 지체없이 투입할 수 있는 항공기를 확보해두고, 이 항공기를 이용해 스모크점퍼들과 같은 전문 인력을 현장으로 보내 산불 악화를 막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이로도 모자라 캐나다, 멕시코, 뉴질랜드, 포르투갈 등과 국제 협력 체계를 갖추고 있다. NIFC 관계자는 “1982년부터 NIFC와 협력을 시작했다. 이들 국가와 협력을 위해 공통적으로 ICS(Incident Command System)라는 표준화된 대응체계를 공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NIFC와 협력관계를 맺은 이들 국가는 화재 발생시 인적 자원 등을 지원한다. 미국 NIFC 역시 호주 화재 발생시 인력을 투입했고, 올해도 캐나다로 600명의 소방관을 지원했다. 이에 더해 NIFC 관계자는 “필요한 경우에 따라 군과도 밀접한 연락을 해 도움을 받기도 한다”면서 “또 산불만이 아니라 허리케인 등 다른 자연재해에도 투입될 수 있는 훈련을 한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군(軍)과 민간, 정부 기관이 명확히 역할을 나눈 통합 구조를 운영중이며, 산불 대응에서 나아가 허리케인, 대형 산업화재, 원전 사고 등에도 동일한 체계가 작동할 수 있도록 훈련하고 대비하고 있다. 한국의 상황을 들은 미국의 전문가들은 “한국도 장기적으로 산림청·소방청·지자체의 헬기를 통합 운용할 컨트롤타워를 구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미국은 예측과 협력, 훈련을 통해 ‘책임론’에서 벗어나 통합 체계를 구성했고 ‘누가 움직일 것인가’가 아니라 ‘함께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리고 산불과의 싸움에서 이겨나가고 있다. 견고한 대비 체계를 구축해 시간을 확보한 덕이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박형남기자 7122love@kbmaeil.com

2025-11-11

준비된 시스템·촘촘한 협력… 미국의 ‘예방 최우선’ 대응

“불은 경계가 없다.” 미국 아이다호주 보이시(Boise)에 위치한 국가 산불 공동 대응 센터(NIFC, National Interagency Fire Center) 관계자의 말이다. 그 말 그대로다. 불은, 특히 산불은 걷잡을 수 없이 뻗어나간다. 올해 초 경북지역에 발생한 산불도 소백산맥을 타고 하염없이 타들어갔다. 때문에 산불재발방지를 위해선 예방이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로 꼽힌다. 실제 미국은 산불을 ‘진압’이 아닌 ‘관리’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 여러 기관이 모여 서로의 자원을 공유하고, 정보와 인력을 통합적으로 운영하는 시스템으로 진화했다. 컨트롤타워조차 오락가락인 한국과 비교되며, 배울 점 또한 적지 않다. 화재대응정보 통합·자원조율기구 운용 중앙서 진화 자재 투입 등 ‘신속한 대처’ 산불예측데이터 제공 기상 시스템부터 항공적외선탐지기 등 고도화 장비 갖춰 지역사회 교육·협력 네트워크도 ‘탄탄’ 한국은 ‘전문기관 설치’ 논의만 수년째 NIFC: 아홉 기관이 모인 ‘협력 본부’ NIFC는 9개 연방기관(△미국 산림청:USFS △토지관리국:BLM △국립공원관리청:NPS △미국 어류 및 야생동물청:FWS △미국 토착민 업무국:BIA △연방 비상관리청:FEMA △미국 국방부:DOD △국립기상청:NWS △미국 해양대기청:NOAA)이 협력하는 기구다. 이들이 협력하고 있는 NIFC는 직접 진화 현장에 투입되지는 않지만 전국의 화재 대응 정보를 통합하고 자원을 조율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고 있다. 보이시 현지에서 만난 NIFC관계자는 “NIFC는 처음 군부와 국토부, 기상청 등 3개 기관이 뭉쳐 시작했는데 화재는 경계가 없기 때문에 점점 더 여러 기관들이 힘을 합치게 됐다”면서 “연방기관들이 속해 있어 신속한 대처가 가능하고, 군부가 함께 하기에 비행기 및 헬기 등도 빠른 투입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실시간 자원 조정의 중심, NICC NIFC 센터 내 핵심 조직인 전국 산불 조정센터(NICC·National Interagency Coordination Center)는 전국을 10개 구역으로 나누고, 250개의 지역 디스패치 센터(비상 상황에서 화재 진압을 위해 투입되는 소방대원들을 조정하는 센터)로부터 실시간 보고를 받는다. 이 곳에서는 화재 진화를 위한 소방차, 헬리콥터 등 모든 자재들을 관리하고 있다. 일례로 항공 진압 요청 등도 모두 NICC를 거친다. 센터 매니저인 션 피터슨(Sean Peterson)은 “전국에 10개로 나뉜 지역구마다 소규모 센터가 있는 구조다. 총 250개 로컬 디스패치가 있으며, 각 지역에서 발생한 화재들은 로컬센터를 통해 산불의 위치, 규모, 기상 상태, 필요 인력 등이 NICC로 보고된다”고 설명했다. 즉, 현장에서 시작해 중앙으로 올라오는 바텀업(bottom-up) 방식으로, 중앙에서 장비, 인력 배치 등이 이뤄져 현장의 혼선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예를 들어 A지역에서 산불이 발생해 A지역이 가진 자원이 모두 소진됐을 때 2단계로 인근 B주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으며, B주의 지원 여력도 소진되면 NICC 지원이 이뤄진다. 상세하게 각 대응 단계를 나눠 빠른 판단이 이뤄질 수 있는 데다 꼭 필요한 곳에 자원이 투입될 수 있도록 설계한 시스템이다. NICC 매니저는 “산불이 많이 발생하는 시즌엔 모두가 헬리콥터를 원한다”면서 “그럴땐 산불 진화 중요도와 필요성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NICC의 역할”이라 설명했다. 우선순위를 정해 자원을 배정하고 지원하면서 보다 효율적인 진화를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기상·통신·탐지…과학기술이 뒷받침하는 산불 대응 NIFC는 기상, 통신, 탐지 등을 통해 대응에 주력하고 있다. 우선 RAWS(Remote Automatic Weather Stations)에서는 미국 전역 331개의 자동 기상 관측소가 산불 예측 데이터를 제공하고 있다. RAWS의 앨런 헤스터(Alan Hester)필드 섹션장은 “RAWS는 태양광으로 작동하는 이동식 장비로, 산불이 나면 현장 근처로 직접 가져다 놓는 이동식 장비”라며 “기상청의 도심 기상관측과 달리 사람이 없는 위험 지역을 관측할 수 있어 보다 정확한 데이터 분석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미국 전역에 331개의 RAWS가 설치돼 있으며, 이를 통해 기온·습도·풍향·풍속·강수량·자외선 등의 자료가 수집된다. 이처럼 보다 고도화된 기상 시스템을 올초 발생한 경북산불에 적용할 수 있었다면 보다 빠른 진화가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경북 산불 당시 국내 기상청도 보관·관측차량 현장 파견, 실시간 강풍 정보 제공 등 총력 지원을 펼쳤지만 산불 진화 후 기성청 실시간 대응 한계가 명확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기상청도 초고속 대형산불 대응을 위한 시스템 개선, 재난 발생시 신속한 분석과 전달 체계 마련 등 계획을 밝힌 바다. 화재 현장에서 필요한 통신장비도 NIFC가 강조하는 시스템 중 하나다. NIICD(National Interagency Incident Communications Division)는 1만 2,000대의 무전기와 중계 장비 등을 갖추고 산불 현장에서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돕는다. 마크 힐튼(Mark Hilton) 국장은 “깊은 산악지대에서는 통신이 생명”이라며 “현장에 관련 기기를 설치해 소방대 간 통신망을 확장한다”고 설명했다. 이를 통해 현장 투입 소방관들은 보다 넓은 지역에서, 보다 많은 인원이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게 된다. 힐튼 국장은 “거대한 산불이 발생하는 곳은 통신망이 약하기에 이런 기기는 필수적이며, 기기를 더 설치하면 무전 거리를 더 넓힐 수도 있다”면서 “주파수 교체, 중복 주파수 관리 인원 등도 배치돼 현장의 효율성을 높인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Infrared Scanner(항공 적외선 탐지기)도 효율적 도구로 꼽힌다. 항공기에 장착해 사용하는 이 탐지기는 1만4천피트(4.2672km) 상공에서 작은 불씨까지 감지해 화재의 중심·확산 방향을 지도와 겹쳐 분석하고 산불화재 현장의 온도까지 파악해줘 정확한 화염지도를 만들고, 인명피해도 줄일 수 있게 돕는다. 또 GBISC(Great Basin Incident Support Cache·물자 창고)는 약 2000평 부지에 텐트, 호스, 식사 키트, 장비 등 산불 대응에 필요한 물품들을 보관하고 있다. 이같은 물자창고는 15개 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산불이 많이 발생한 지난해 기준 8300만 달러(약 1000억원) 규모의 재고량을 확보하는 등 만반의 대비를 갖추고 있다. 연방 토지관리국(BLM) 운영은 국내 도입시 산불 예방 효율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된다. NIFC에 속한 BLM은 미 내무부 산하 최대 규모이자 가장 복잡한 화재 대응 프로그램인 ‘BLM Fire’을 운영한다. 공공 토지 산불 관리를 직접 담당하면서 선제적 토지 관리 및 대국민 공공 교육까지 병행하고 있는데 특히 인간에 의해 발생하는 산불이 전체 산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인식, 대중과 적극 협력하고 있다. 이들은 지역사회 산불 보호계획(CWPP), Firewise 프로그램, 대중 교육 행사 등을 진행하고 있으며, 또 화재 위험이 높은 시기에는 지역사회와 협력해 일시적인 활동 제한, 공공 토지 폐쇄도 시행하고 있다. BLM 관계자는 “산불은 행정 경계 또한 가리지 않기 때문에 이 ‘all-hands, all-lands’(모두의 손으로, 모두의 땅을) 접근 방식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화재는 자연현상이지만, 사람의 부주의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지역사회 교육과 협력 네트워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NIFC 센터 내 추모 공간에는 임무 중 순직한 350명 이상의 소방관을 기리는 보라색 리본이 걸려 있다. 그 리본은 단지 기억의 상징이 아니라, 미국이 산불과 싸워온 긴 시간의 흔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긴 시간을 거치며 미국은 산불 대응에 있어 예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교훈을 배웠다. 한국은 어떨까. 대형 산불이 발생할 때마다 각종 대책이 거론되지만 실제 실행 단계에 들어서는 경우는 극히 적다. 일례로 진화대원 교육을 철저히 하겠다며 거론된 훈련 센터 설립은 3년째 지지부진한 상태다. 지난 4월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에 현안보고에서 민주당 문대림 의원도 “산림청 특수진화대원에게 들어보니 필요한 기술은 선배들에게 구두로 전수받고 있다고 한다”며 “미국은 전국화재합동센터(NIFC) 등 전문기관이 있지만 우리는 논의만 수년째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미국의 견고한 시스템은 우리에게 던지는 일종의 경고와도 같다. 여러 기관이 한 데 모여 과학과 데이터와 협력을 기반으로 하는 시스템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숲은 푸르름을 잃고 까만 재로 뒤덮일 수 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박형남기자 7122love@kbmaeil.com

2025-11-10

해방 무렵 오징어잡이 호황… 어업 전진 기지 저동항 ‘불야성’

저동은 울릉도의 어업 전진 기지다. 울릉도의 어선들은 저동항으로 입항하고 저동항에 정박한다. 그래서 저동은 울릉도에서도 가장 어촌다운 정취가 묻어나는 곳이다. 울릉도 어선들뿐만 아니라 동해안에서 조업하는 모든 선박들의 피난처이기도 하다. 저동항은 동해 어업전진기지로 만들어졌다. 1977부터 1980까지 93억원의 예산으로 완공됐는데 최대 어선 1000척까지 정박 가능한 대형 어항이다. 전성기 오징어배만 200척 넘어 2000년대 초반까지 연간 1만t 방파제 위에 우뚝 솟은 촛대바위 저동마을 지키는 수호신장 역할 사방 둘러 온통 절벽에 쌓인 죽도 지금은 1가구가 더덕 농사 지어 △ 모시가 많은 바닷가 마을 저동 저동의 상징은 촛대바위다. 방파제 위에 우뚝 솟은 촛대바위는 저동항의 어둠이란 어둠은 다 몰아내고 세상을 환히 밝힐 태세다. 촛대바위는 저동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장이기도 한 것이다. 저동의 본래 이름은 모시개. 모시 잎이 많아 모시개라 했는데 한자화 과정에서 모시 저(紵) 자를 써, 저동이 됐다. 개는 바닷가를 이르는 한글 말이니 저동은 모시가 많은 바닷가 마을이란 뜻이다. 저동은 모두 세 개의 작은 마을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큰 모시개, 중간 모시개, 작은 모시개다. 조선시대 말 울릉도 개척을 위해 탐사대장으로 들어왔던 이규원 검찰사의 울릉도 검찰일기에는 ‘대저포(大苧浦)’와 ‘소저포(小苧浦)’로 기록되어 있다. 울릉도에서는 1902년부터 본격적인 오징어잡이가 시작됐다. 1910년대가 오징어잡이의 최전성기였다. 그 무렵 일본인들이 울릉도로 대거 이주해왔다. 1930년대 들어서는 오징어가 사라져버렸다. 그때 일본인들도 대부분 울릉도를 떠났고 그 무렵부터는 고등어와 정어리가 많이 잡혔다. 울릉도에서 오징어가 다시 잡히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부터다. 오징어잡이로 호황을 누리던 때는 ‘동네 개도 5천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고 할 정도로 번성했었다. 근래까지도 오징어잡이 철이면 불야성을 이루던 저동이 요즈음은 한산하기만 하다. 동해에 오징어 흉년이 든 까닭이다. 울릉도의 최대 산업기반이고 상징이기도 한 동해 오징어가 멸족되다 싶이 하면서 저동뿐만 아니라 울릉도 전체가 크게 위축되고 있다. △ 내수전에서 석포로 가는 아름다운 트레일길 올해도 울릉도 오징어는 흉어였다.. 오징어 배를 따서 말리는 풍경도 보기 어려웠다. 어민들뿐만 아니라 울릉도 주민들 대다수가 오징어 배 따는 일로 생계를 이어왔었다. 아쉽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울릉도는 한때 오징어잡이 어선만 200척을 넘겼고, 2000년대 초반까지는 연간 1만t을 기록했다. 하지만 2024년 말 기준 울릉도 어선은 129척인데 90% 이상이 오징어 채낚기어선이다 어획량이 급감하자 어민들은 올해만 30여 척이나 감척을 신청했다. 생업을 포기하다 싶이 한 것이다. 그런데 현재 감척 확정된 어선은 13척 뿐이라 한다. 오징어가 사라진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온 변화, 동해 바다를 새까맣게 뒤덮은 중국어선들의 대량 남획, 하지만 아직까지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대체 이 세계에 영원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저동 해안 도로를 따라 내수전까지 걸어간다. 길은 시멘트 차량 도로지만 내내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어서 지루하지 않다. 내수전에서 석포에 이르는 길은 울릉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트레일로 꼽힌다. 내수전은 옛날 울릉도 개척 당시 제주도 대정 출신의 김내수(金內水)라는 사람이 화전을 일구고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도 내수전이 표기되어 있다. 내수전은 예전에 닥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저전포’라고도 불렸다. 행정구역은 저동 3리다. △ 겨울꽃의 대명사 동백 선비들이 사랑한 꽃 11월인데 길가에는 벌써 동백꽃이 만개했다. 같은 위도상의 육지인 강원도 산간지역에는 동백이 살지 못하지만 울릉도는 해양성 기후라 겨울이 따뜻해 동백이 자생할 수 있다. 동백은 흔히 겨울꽃의 대명사로 꼽히지만 실상 개화 기간이 어느 꽃보다 길다. 늦가을부터 피기 시작해 상춘까지 물경 6개월 남짓 피고 지기를 거듭한다. 그래서 피는 시기에 따라 그 이름도 제각각이다. 봄에 피면 춘백, 가을에 피면 추백, 겨울에 피는 꽃이라야 비로소 동백이다. 동백은 옛날부터 매화와 함께 이 땅의 선비들에게도 한껏 사랑을 받아온 꽃이다. 이규보, 서거정, 기대승 같은 당대 최고의 문사들도 동백을 노래했다. 퇴계의 수제자였던 학봉 김성일(1538년~1593년)도 매화와 함께 동백을 고고함의 상징으로 꼽으며 지극한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 “두 가지 동백나무 각자 다른 정 있나니/동백 춘백 그 풍도를 누가 능히 평하리오/사람들은 모두 봄철 늦게 핀 꽃 좋아하나/나는 홀로 눈 속에 핀 동백 너를 좋아하네” (학봉 김서일) 꽃에 미쳐 살았던 조선의 선비 유박(1730-1787)도 ‘화암수록(花菴隨錄)’에서 “치자와 동백은 청수(淸秀)한 꽃을 지니고 또 빛나고 윤택한 사시(四時)의 잎을 겸하였으니 화림(花林) 중에 뛰어나고 복을 갖춘 것이라” 평하며 동백이 도골선풍을 지녔다고 찬탄했다. 서양에서도 동백에 대한 사랑은 깊을 대로 깊었다. 파리 사교계의 여인 마르그리트 고티에는 한 달 내내 밤이면 동백꽃을 가슴에 꽂고 다녔다. 25일은 흰 동백, 나머지 5일은 붉은 동백. 그래서 그녀는 카멜리아의 여인(동백꽃 여인)으로 불렸다. 알렉상드르 뒤마 필스의 소설 ‘춘희’ 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제부터 동백은 내내 울릉도의 산야를 붉게 물들일 것이다. 저동2리 방파제 끝을 돌아서면 저동3리 마을 이정표가 서 있다. 내수전 마을이 시작되는 곳이다. 경계선 건너 우뚝 솟아있는 섬이 죽도다. 1가구가 더덕 농사를 지으면 살아간다. 예전에는 7-8가구가 살았었다. 감자, 고구마, 더덕 농사도 짓고 소도 기르며 살았었다. 죽도에서는 송아지 때 올라간 소가 산채로는 못 내려왔다고 한다. 작은 송아지는 밧줄에 매달아 올렸지만 온통 절벽이라 다 자란 큰 소는 밧줄에 매달 수도 없고 달리 내려보낼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축을 해서 고기가 돼서야 내려왔다. 죽도는 물이 귀해서 울릉도 본섬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생활용수는 빗물을 받아서 사용했다. 죽도 사람들은 20여 가구가 살다가 지금은 폐촌이 된 내수전 길 아래 마을 와달리로 왕래하며 살았다. 물도 와달리에서 길어다 먹었다. 날마다 먹을 물을 구하려고 절벽을 타고 오르내리던 사람들의 심정을 우리가 만분의 일이라도 알 수 있을까. 지금은 사람들이 떠나고 농사도 덜 지으니 솔밭도 새로 생겼다. 죽도는 사방을 둘러 온통 절벽이다. 마을은 절벽 위에 들어서 있다. 절벽 위에 제법 너른 평지가 있어 농사도 짓고 집도 짓고 살아갈 수 있었다. 지금이야 계단이 만들어져 제법 쉽게 오르내릴 수 있지만 그 전에는 저 아득한 절벽을 어찌 오르내리며 살았을까 생각하니 그저 삶이 온통 아득해진다. 울릉도 본섬 또한 가파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울릉도 본토에서도 밭 한 뙈기 얻지 못해 처음 저 가파른 절벽을 기어올라 섬으로 들어간 사람들의 심정은 또 어떠했을까. 생각하니 그저 먹먹하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1-10

‘해담길에서 만나는 울릉도’ 연재합니다

울릉도는 바다 한가운데 고요히 솟은 섬이다. 배가 포항을 떠나 동해의 물살을 가르기 시작하면 도시는 점점 희미해지고 바다의 숨결이 서서히 스며든다. 파도는 굽이치는 듯 부드럽고, 짙은 푸른빛은 어느새 여행자의 마음을 잠식한다. 도동항에 닿는 순간 섬은 거대한 화산의 품으로 여행자를 끌어안는다. 절벽과 숲, 그리고 안개가 어우러진 풍경은 육지의 시간과 전혀 다른 속도로 흐른다. 행남 해안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바위 틈새로 솟는 억새와 해풍에 일렁이는 파도가 묘하게 닮았다. 섬의 중심부인 나리분지는 화산분화구가 만든 평원이다. 봄이면 진달래가 붉게 번지고, 여름에는 초록이 하늘을 밀어 올린다. 가을의 억새는 바람을 따라 은빛 물결을 만들고, 겨울의 고요는 섬의 시간을 멈추게 한다. 나리분지의 투박한 밥상 위에는 막걸리 향이 은은하게 감돈다. 오징어·더덕·산채로 차린 한 상은 ‘섬의 맛’ 그 자체다. 울릉도의 매력은 느림에 있다. 봉래폭포의 물안개에 젖고 관음도 앞에서 바다와 마주 앉아 있노라면 시간의 경계가 사라진다. 스마트폰의 시계 대신 파도 소리가 하루의 리듬을 만든다. 해 질 무렵 도동항의 포구에 앉으면 섬이 붉게 물든다. 오징어 배 불빛이 반짝이며 바다 위에 별을 띄우고 어느새 하루가 저문다. 울릉도는 화려하지 않지만 깊고 푸르다. 최근 울릉도가 상처를 입었다. 바가지와 불친절의 표본처럼 매도당했다. 상당 부분은 사소한 오해이기도 하고 작은 부분은 반성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바다는 언제나 상처 위에 푸른 빛을 덧칠한다. 해담길을 따라 걸으며 절벽 끝에서 바람이 속삭인다. 10일부터 본지 15면에서 총 25회에 걸쳐 섬연구소 소장인 강제윤 시인의 ‘해담길에서 만나는 울릉도’를 연재한다. 강제윤 시인의 눈으로 바라본 울릉도의 숨겨진 아름다움과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최병일기자 skycbi@kbmaeil.com

2025-11-09

‘해가 담긴 길’ 9개 코스 35km… ‘걷기 천국’ 속살 제대로 만끽

울릉도 여행자들은 대부분 자동차로만 섬을 둘러보고 돌아간다. 하지만 걸어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숨어 있어서 눈에 띄지 않을 뿐, 울릉도의 트레일은 실핏줄처럼 섬 곳곳에 퍼져 있다. 그래서 사실 울릉도는 ‘걷기 천국’이다. 울릉도에는 걷기 좋은 길들이 많다. 걸어야 울릉도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이 여행기는 울릉도의 트레일을 걸으면서 울릉도의 속살을 들여다 본 이야기다. 2017년 옛사람 다니던 옛길 발굴 도동~저동~천부~태하~도동 회귀 느리게 느리게 걸으며 비경 감상 여객터미널 뒤 행남해안로 시작 울릉도 초기 화산활동 특징 간직 절벽엔 2500년된 향나무가 환영 △ ‘밝은 해가 담긴 길’ 해담길 걷기 울릉도의 대표적인 길은 ‘해담길’이다. 2017년 울릉군에서 울릉도의 옛사람들이 다니던 옛길을 발굴해 만들었다. 해담길이란 ‘울릉도의 이른 아침 밝은 해가 담긴 길’이란 뜻이다. 이 길 또한 최대한 천천히 걸어야 한다. 천천히 걸을수록 울릉도에 오래 머물 수 있다. 울릉도와 더 깊이 교감할 수 있다. 빠르게 걷느라 길가의 풀과 나무와 들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거나 새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정신없이 걷는다면, 또 시시각각 변화하는 바다의 풍경을 놓친다면, 길에 얽힌 이야기와 바람이 전하는 말을 듣지 못한다면, 자동차를 버리고 자연의 길을 걷는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울릉도에서는 느리게 느리게 걸어야 한다. 온갖 해찰을 다 부리며 걸어야 한다. 걷는 길에서는 도달해야 할 목적지 따위는 잊어야 한다. 목적지에 가지 못한들 어떠랴. 길을 벗어나 낯선 길로 들어선들 또 어떠랴. 여행의 목적지는 여행 그 자체가 아닌가? 여행을 떠난 순간 우리는 이미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울릉도를 깊이 있게 여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해담길을 걷는 것이다. 울릉도를 온전히 걸어서 일주할 수 있는 길. 제주 올레길 만큼이나 아름다운 길이다. 해담길은 울릉도의 관문인 도동항을 출발해 저동, 천부, 태하, 옥천 등을 거친 뒤 해안 둘레를 따라 다시 도동으로 돌아오는 35㎞ 길이의 트레일이다. 모두 9개 코스로 구성됐다. 지형적 문제 때문에 길이 완벽하게 하나로 연결되지 못하고 부분 부분 단절돼 있기도 하다. 그러니 해담길을 걸으며 길에는 포함되지 않는 샛길로 빠져 마을들을 둘러본 뒤 다시 해담길로 되돌아오는 것도 좋다. 길이란 온전히 걷는 자의 몫이다.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걸을 때 길은 비로소 온전히 자신만의 길이 된다. △ 2500년된 향나무가 여행자를 반기다 해담길의 시작점은 울릉도의 도동항이다. 도동항 여객터미널 뒤 안에서부터 해담길 행남해안로가 시작된다. 이 길은 지금 공사 중이다. 하지만 중간쯤에서 우회로를 따라가면 된다. 도동 행남해안로 초입에서 가장 먼저 여행자를 환영해 주는 것은 절벽 꼭대기의 2500년 된 향나무다. 실제로는 3000~4000년쯤 됐다는 설도 있다. 향나무는 1985년 10월 5일 태풍 브랜다가 왔을 때 한쪽 가지가 부러졌고 그 부러진 가지를 울릉군에서 공개 입찰했다. 향나무 가지는 기념품 가게를 하던 서귀용씨가 낙찰 받아 용이 승천하는 모양으로 조각을 해서 소장 중이라 한다. 사람은 한 자리에 하루도 서있기 어려운데 저 향나무는 수 천 년을 한 자리에서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 지독한 인고의 향이 얼마나 진할 것인지 생각만으로 아찔하다. 울릉도는 한국 최초의 국가 지질공원이다. 2012년 12월 27일 인증됐는데 울릉도 19개소, 독도 4개소가 지질 공원의 관할 영역이다. 울릉도의 도동 해안산책로, 저동 해안산책로, 봉래폭포, 죽도, 향나무자생지, 황토굴, 대풍감, 노인봉, 송곳봉, 코끼리바위, 삼선암, 관음도, 성인봉 원시림, 용출소, 알봉 등과 독도의 숫돌바위, 천장굴, 삼형제굴바위, 독립문바위가 지질 공원으로 지정된 곳들이다. 지질 공원은 지구과학적으로 중요하고 경관이 우수한 지역 중에서 지정된다. 도동에서 행남마을에 이르는 도동 해안 산책로도 국가 지질공원의 일부다. 섬의 크기는 울릉도에 비해 독도가 훨씬 작지만, 탄생 년도는 독도가 한참을 앞서는 형이다. 독도는 460만 년 전 수중화산으로 탄생했고 250만 년 전 화산활동을 멈췄다. 울릉도는 약 140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까지 5단계에 걸친 화산활동으로 탄생했다. 마지막 화산활동은 9300~6300년 전 쯤으로 알려져 있다. 울릉도와 독도는 화산 분화시기가 다르지만 주요 암석이 알칼리 계열 조면암이고 화학적 구성도 비슷한 것으로 밝혀졌다. 울릉도는 수중 2300m부터 시작돼 수면 위로 986.5m가 솟아올랐다. 전체 높이 3300m에 이르는 거대한 화산체다. 독도도 해수면 밑에 2300m의 화산체가 있다. 드러난 부분은 빙산의 일각이다. 독도 수면 아래 한라산보다 높은 산이 숨어 있는 것이다. △ 도동 해안산책로 다양한 지질구조 볼 수 있어 행남 해안산책로는 도동 해안산책로와 저동 해안산책로를 합한 이름이다. 두 곳 다 지질 공원으로 지정됐다. 저동 해안 산책로는 파손되어 접근 할 수 없으니 이 길에서는 도동 산책로의 지질만 관찰이 가능하다. 도동 해안산책로에서는 울릉도 초기 화산활동의 특징을 간직한 다양한 지질구조가 관찰된다. 절벽의 하부로부터 현무암질 용암류, 산사태로 운반되어 만들어진 재퇴적쇄설암, 화산재가 뜨거운 상태에서 쌓여 생성된 이그님브라이트, 분출암의 일종인 조면암 등이 순서대로 분포한다. 그야말로 이 산책로는 지질 박물관이다. 행남 마을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한길은 저동 옛길이고 또 한길은 행남해안로 저동 교량 길, 저동 해안 산책로다. 그런데 거친 파도를 견디지 못한 해상 교량이 여러 해 전 파손된 뒤 교량 구간은 통행이 차단되고 있다. 새로운 교량 공사가 진행 중인데 개통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릴 듯하다. 그래서 여기서부터는 저동 옛길을 지나야만 저동에 이를 수 있다. 저동 옛길을 걷기 전에 행남등대까지 다녀와도 좋다. 등대까지의 길은 평탄하고 호젓하다. 등대를 다녀온 뒤 길이 끊어진 저동 해안 산책로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본다. 완공이 되면 다시 기암괴석의 절경을 바라보며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을 것이다 끊긴 해안로 입구에서는 다시 행남 마을 쪽으로 조금 되돌아가야 저동마을 옛길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예전에는 이 비탈길이 두 마을을 연결해주는 생활의 길이었다. 산길이지만 가파르지 않아 천천히 걷다보면 금새 저동마을의 전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옛길의 끝자락에 저동마을 당집이 있다. 신당 안 제단에는 해동대신위라 쓰인 위패가 모셔져 있다. 바다의 신을 모시는 해신당이다. 이제 바다의 안전은 용왕 대신 GPS가 책임져 주는 시대가 왔지만 섬사람들은 여전히 바다가 두렵다. 아무리 인공위성이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한다 한들 순간적으로 돌변하는 파도의 변덕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여전히 해신의 위력에 기대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이 섬사람들이다. 섬사람 중에서도 어부들은 유일신 신앙을 가진 이 조차도 몰래 해신들에게 제를 지내기도 한다. 보험도 하나보다는 여러 개 들어놓는 것이 유리하다고 믿는 것과 같은 심사일 터다. 길의 끝에 문득 해상 도시가 나타난다. 저동이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1-09

영남권 대형산불, 예방부터 진화까지 ‘구멍난 시스템’ 화 키워

지난 3월 의성·안동·청송·영양·영덕 등 경북 5개 시·군은 물론 울산, 경남 지역에서 산불이 확산되면서 영남권 전역이 산불로 뒤덮였다. 2000년 동해안 산불의 4배가 넘는 규모로 문화재 손실 등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산림과 주거지의 경계가 밀접하고 강풍 통로와 급경사 지형, 고령화된 인구 분포, 불법 소각과 관리 사각지대 등이 겹쳐 산불 피해가 유난히 컸다. 이번 초대형 산불을 진화하는 과정에서 대형 살수 헬기 부재 등 우리나라의 산불 대응 체계의 총체적인 문제점을 드러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본지는 기획 시리즈로 이번 우리나라 산불 대응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초대형 산불을 맞닥뜨렸던 포르투칼·캐나다·미국 지역의 산불 대응 방안이 주는 교훈과 대책도 면밀히 살펴봤다.<편집자주> 지난 3월 의성 등 영남권 삼킨 ‘괴물 산불’ 산림청·소방청·지자체 등 따로따로 대응 대피경보조차 제대로 전달못해 혼선 빚어 산불 피해지 복원에 대부분 ‘침엽수’ 식재 ‘불쏘시개’ 된 소나무가 ‘불의 통로’ 만들어 진화헬기·장비·인력부족까지 총체적 난제 “예방 중심 대응책 등 장기적 로드맵 필요” 우리나라 산불 발생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 산림청 자료에 따르면 봄에 주기적으로 비가 내려 산불 발생이 적었던 2024년을 제외하고는 2017년부터 해마다 대형 산불이 발생했다. 특히 산불 위치정보를 토대로 산림청이 만든 산불다발지역 지도는 서울, 인천, 대구 등 인구 밀집 지역에 산불 위험이 높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대형 인명 피해 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경고한다. 그런데 이 같은 경고도 불구하고 지난 3월 의성 등 영남권 전역을 집어삼킨 산불이 발생했다. 이른바 ‘괴물 산불’로 불린다. 사망자 27명을 포함해 총 183명의 인명피해와 10만 4004ha의 산림이 불에 탔고, 주택 3848동과 농어업시설 6106건, 농기계 1만7158대 등에 피해를 입혔다. 이 외에 의성에 있는 고운사 등 전통사찰, 국가유산 등의 피해도 상당했다. 정부는 재난 대응 최고 단계를 발령하고, 전국의 소방 인력과 장비를 총동원해 진화 작업을 전개했지만 강풍과 건조한 날씨로 인해 진화 작업이 장기화됐다. 산림 훼손에 따른 주거지 파괴 등은 지방소멸이라는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수도권 일극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컨트롤타워 부재로 현장은 ‘혼선만’ 이번 영남권 산불에서 드러난 문제점은 상당하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재난 대응 체계를 문제삼고 있다. 우선적으로 컨트롤타워 문제가 꼽힌다. 지역의 한 소방 소장은 “산불이 나면 산림청 지휘를 받아야 한다”며 “산림청의 산불대응은 소수 인력에 불과해 산불 대응 체계가 너무 빈약하다”고 진단했다. 산림청·소방청·지방자치단체 간 산불대응체계 개편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실제 국회 입법조사처의 ‘최근 산불대응 관련 주요 쟁점 및 향후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산불대응 주관기관은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과 해당법 시행령에 따라 산림청이 맡고 있다. 문제는 산불 규모에 따라 달라진다. ‘산림보호법’ 제37조 및 제38조에 따르면 중·소형산불의 경우 특별자치시장·특별자치도지사·시장·군수·구청장 또는 국유림관리소장이, 대형산불의 경우 시·도지사가 각각 산불현장 통합지휘본부장을 맡는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과 산림보호법이 산불대응 주관기관을 서로 다르게 규정하고 있어, 일선 현장의 지휘체계 혼란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현행 산불대응 발령 기준에 따르면 시·군·구 차원의 초기 대응이 어려울 뿐 아니라 적기에 협조를 받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번 영남권 산불이 대표적이다. 산불 초기 당시 강풍이 불면서 확산세가 컸고 이로 인해 현장에선 시·군·구, 산림당국, 소방관서 간 혼선이 발생했다. 산불 피해를 직접 겪은 주민들 사이에서도 “컨트롤타워가 없었다”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이는 주민 대피 체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불길이 번지는 상황에서도 주민들에게 대피 경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해 대피명령이 지연된 사례가 있다. 산불 현장을 지켜봤던 민영권 산청난개발대책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은 “마을에 산불이 내려와 주민들이 불을 끄러 가는데도 ‘대피 명령’ 하나가 안내려 왔다“며 “재난 대응 관련한 대응 메뉴얼이 있는 것인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로 인해 산림은 산림청, 산불 대응은 소방청이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정정환 지리산사람들 운영위원은 “산림청에서 말했던 산불 대응 시스템, 모니터링하는 시스템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이쪽에서 ‘이쪽으로 가라’, 저쪽에서는 ‘저쪽으로 가라’ 이런 식이다. 이렇게 되면 서로 소통이 되지 않으면서 산불 대응을 빨리 하지 못한다“며 “일원화가 되지 않으면 서로 다른 얘기를 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현장에서 봤을 때 불에 대한 전문가는 소방청”이라며 “산불 관리에 대한 모든 권한을 소방청에 이관하는 게 낫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같은 주장은 지난 10월 24일 이재명 대통령이 참석한 ‘대구의 마음을 듣다’ 타운홀 미팅에서도 나왔다. 지난 3월 산불 진화작업에 투입됐다 순직한 대원의 장녀가 이 대통령에게 “아버지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산불 진화 업무가 제대로 된 체계로 관리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을 요청드린다”며 산불 진화 업무를 소방청으로 이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산불 진화 체계 재정비 문제는 대통령실에서 역점을 두고 정비 중”이라며 같은 대형 화재 참사를 막겠다고 약속했다. 산림 정책 ‘숲 가꾸기’ 대형 산불 원인으로 지목 산림청의 소나무 단순림 숲가꾸기 정책도 대형 산불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수분이 적고 건조한 환경에서 자라는 소나무는 활엽수에 견줘 산불 발생 시 1.4배 더 뜨겁게 타고 불 지속 시간도 2.4배 길다. 소나무보다 활엽수가 불에 강하며, 산불 확산을 막는 데에는 활엽수림이 더 유용하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산림당국은 산불 피해지 복원 등 인공조림 땐 침염수를 더 많이 심고 있다. 산림당국의 2014년부터 2024년까지 인공조림 현황을 수종별로 살펴보면 소나무를 포함한 침엽수는 13만5000ha를 차지한 반면 활엽수는 9만ha에 그쳤다. 정 운영위원은 “소나무 이파리는 불이 붙으면 숯처럼 빨갛게 날림 상태로 번지고, 불을 머금은 솔방울은 수류탄처럼 터져 인근 숲과 강 건너까지 불을 확산시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국립공원은 산림청 손을 타지 않기 때문에 숲이 자연스럽게 활엽수로 변했다”며 “활엽수가 많아 불이 지표화로 땅으로만 가지 수관화도 비화 현상도 없어 피해가 크지 않은 것”이라고 진단했다. 관리용 임도가 불을 키웠다는 주장도 나온다. 민 집행위원장은 “이번 산불에도 임도를 따라 불이 번지는 모습이 자주 목격됐다”며 “불을 끄기 위한 길이 오히려 불의 통로가 됐다”고 지적했다. 정 운영위원도 “소나무림은 불이 수관화해 임도를 덮어버린다”며 “내부 온도가 1600도 이상으로 치솟아 진입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산림 당국이 진화를 위해 임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이 외에도 진화 헬기와 장비 부족, 인력 부족 등도 문제점으로 드러났다. 산불은 대형화되고, 산불 발생 빈도도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 산불 진화 체계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전문가들은 지금 산림 정책으로는 산불을 막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대형 산불이 또 다시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 때문에 커지는 산불 위험에 대응할 체계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이지성 경남연구원 박사는 “기후 변화 등으로 대형 산불이 많이 나고 있다”며 “장기적인 로드맵 같은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산불 대응이 산림청과 소방청으로 나뉘어 있어 초동 진화에 혼선이 생긴다는 점을 거론하며 “재난안전관리법과 산림보호법 등 관련 법령을 일치시켜 지휘체계의 법적 근거를 명확히 하고, 지방정부가 운영하는 산불방지센터에 인력과 장비 동원 권한을 위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 다른 산림 전문가들은 단편적인 대응을 넘어선 구조적인 전환, 즉 기후 현실을 반영한 예방 중심의 재난 대응 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런 차원에서 산불 위험이 높은 나라들의 산불 대응 정책을 벤치마킹해 ‘한국형 정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박형남기자 7122love@kbmaeil.com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11-09

국수를 건조하는 데에는 하늬바람이 최고

‘해풍국수’는 배합과 건조의 기술로 탄생한다. 원재료도 중요하다. 브랜드의 이름을 말할 수는 없지만 최선의 제품을 엄선하여 쓴다. 소금도 그렇다. 물도 정제하여 쓴다. 하룻밤 묵힌 물을 쓴다. 재료를 함부로 선택하면 제품이 반항한다. 싼값을 고집하면 싼 음식이 된다고 믿는다. 그것을 뛰어넘어 손수하는 공정에서의 모든 노력이 국수를 완성하는 기본이 된다. 그중 바람의 영향이 크다. 밀가루를 반죽해 재래식 기계에서 면을 뽑기까지 반나절이 걸린다. 야외 건조장에서 바닷바람으로 반건조시켜 창고에 넣는다. 그렇게 숙성시키는 데 한나절 넘게 걸린다. 이를 다시 꺼내 햇살에 건조시킨다. 바람의 종류도 다양하다. 샛바람이 있다. 이는 동풍을 말한다. 하늬바람이 있다. 서풍이다. 마파람(동풍), 된바람(북풍)도 있다. 이 중에서 서풍인 하늬바람이 최고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바람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자연을 이기는 인간은 없다. 하룻밤 묵힌 정제된 물로 밀가루 반죽 바닷바람에 반건조, 창고서 한나절 숙성 자연과 정성으로 전 과정 세심하게 관리 남편 친구가 선물한 제일국수공장 간판 56년 된 간판 아래 ‘더불어 사는 삶’ 실천 본분에 충실… 전통적 국수의 맛 지켜와 2017년 구평리에 현대식 제2공장 건립 바다·솔숲 등 좋은 환경에서 제품 생산 ‘해풍국수’ 기본 바탕 품질 향상에 집중 밀가루 사기를 당하기도 국수공장이 자리를 잡아가고 이름이 나기 시작하면서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경주에서 밀가루 공장을 운영한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생산한 제품이 너무 많아 밀가루 500포대를 염가에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국수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밀가루가 많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500포대는 너무 많았다. 주위에 있는 일곱 군데 국수공장과 의논해 그 밀가루를 구입하기로 했다. 남편이 나섰다. 돈을 모아 경주 근화여고 뒤편의 다방에서 그 업자를 만나기로 했다. 당시로서는 거금을 들고서였다. 돈을 지불하면서 차 한 잔을 마셨다. 그리고 밀가루가 있는 창고로 가자고 해서 따라나섰다. 다리를 하나 건너는데 몸이 휘청거렸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풀밭에 쓰러져 있었다. 돈은 온데간데없고 맨몸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돈을 들고 나간 남편을 기다리던 이순화 여사는 애가 탔다. 그때 경주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사람을 데리러오라는 것이었다. 남편은 사태를 수습하느라 경찰서에 들러 신고했는데,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 일로 큰 손해를 입은 것은 물론이었다. 그리고 시간을 벌어가며 애걸복걸하면서 돈을 갚아야 했다. 한참 뒤에 다행히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범인을 잡았다는 것이었다. 그날 상황을 지켜본 똑똑한 다방 레지가 범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가 경찰에 신고해 그 사람을 체포한 것이었다. 남편은 그 길로 경찰서로 쫓아가 범인에게 분노의 귀싸대기를 날렸다고 한다. 빼앗긴 돈 일부를 돌려받았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본인은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다른 공장에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혁혁한 공을 세운 레지 아가씨에게도 사례금을 주었다. 남편은 그런 사람이었다. 오직 본분만 생각해 인터뷰 내내 ‘밀까리’라는 경상도식 발음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학교는 ‘가는’ 곳이고 핵교는 ‘댕기는’ 곳이라는 농담이 생각났다. 아무래도 ‘다니는 곳’보다 ‘댕기는 곳’이 훨씬 정감 있고 몸에 맞는 낱말인 듯하다. ‘밀가루’든 ‘밀까리’든 본질에서는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본질이 변함없으니 조금 잘나간다고 더 큰 이익을 추구하거나 무리해서 사업을 확장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이순화 여사는 바르게 배웠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시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는다. 오직 본분만 생각한다. 제일국수공장에는 오래된 간판이 있다. 그 간판은 남편의 친구인 구룡포우체국장에게 개업 기념 선물로 받은 것이다. 정갈하고 산뜻한 필체의 간판은 56년째 입구를 지키고 있다. 그 오랜 세월은 마음을 비우는 시간이었다. 밀가루 사건 이후 절대 욕심을 내지 않았다. 팔리면 팔리는 대로, 안 팔리면 안 팔리는 대로 국수를 끓여 식구들을 먹이고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 그만하면 본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이웃과 어깨동무하며 작은 도움이라도 정성껏 나누며 살았다. 그래도 손해나는 사업은 아니라서 먹고살 만했다. 더불어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자신은 가게라도 있으니 괜찮지만 좌판을 하는 사람들의 형편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을 도우며 산 게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순화 여사는 구룡포시장 상인연합회가 좀 더 적극적으로 활동해서 시장이 살아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바라는 것이 아니라 조건 없는 희생이 필요한 세상이라고 했다. 묵묵하다는 말이 있다. 침묵의 묵(黙), 고요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마음의 동요 없이 침묵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견디는 것은 수행자의 자세이기도 하지만 생활인의 삶에 더욱 필요한 덕목이기도 하다. 구평리에 현대식 제2공장 건립 2022년 초강력 태풍 힌남노가 몰아닥쳤을 때 구룡포는 큰 피해를 입었다. 마을이 온통 물에 잠겼다. 공장 뒷마당과 옥상에서 국수를 말리던 시절의 마지막을 시사하는 사건이었다. 재래식 공정은 원래 조금은 원시적인 방법이다. 공장이 바다와 맞닿아 있어 바람이 거세거나 파도가 맹렬할 때는 마당까지 물이 차올라 국수를 몽땅 버려야 했다. 바닷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판자를 세우고 집에서 사용하고 남은 비료 포대를 모조리 거두어 덧대고 덧댔다. 그러나 파도의 힘은 도무지 이길 수 없었다. 바닷물에 젖어 못 쓰게 된 국수를 내다 버린 양이 얼마였던가. 그러나 구룡포의 바람은 맑고 투명했고 햇살은 차고 넘쳤다. 그런 환경이 정말 고마웠다. 구룡포의 도로가 개선되고 교통량이 늘어나면서 분진 등의 환경문제가 발생했다. 이는 제일국수공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제일국수공장의 자연건조 방식에 위생적인 문제가 있다는 민원이 제기된 것이다. 낡은 시설도 미관상 좋지 않았다. 전통을 고집하며 고유의 방법으로 국수를 만든다는 자부심만으로 마냥 버틸 수는 없 없었다. 시대의 변화에 부응해야 했다. 그것 또한 새로운 생존 방식이었다. 국수 가게는 읍내에 그대로 두고 구룡포 구평리에 생산을 전담하는 제2공장을 2017년에 만들었다. 이 공장에는 현대식 설비를 갖추었다. 이순화 여사의 장남인 하동대(55) 대표가 제2공장 부지를 처음 방문해보니 바다가 눈앞에 있고 솔숲이 일렁거렸다. 마을보다 조금 높은 둔덕에 위치해 바람이 자유롭게 흘러다녔다. 주위에 건물이 없으니 햇살이 풍부했다. 더 나은 조건에서 더 좋은 국수를 생산할 여건이 마련되었다. 읍내의 좁은 장소에서 국수를 만드느라 물량 부족으로 걱정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더 품질 좋은 국수만 생산하면 되었다. 전성기의 판매량에 비하면 반토막도 안 되지만 이제는 품질에 집중할 수 있다. 하동대 대표가 행복한 이유다. 가업을 잇고 생업에 충실하니 이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다. 공장을 지키며 자유롭게 산책하는 삽살개 해풍이도 그 주인공의 일부다. 마당 가득 바람과 햇살이 차고 넘친다. 글 : 이우근(시인) 사 진 : 김 훈(작가)

2025-11-09

피보다 깊은 정신의 혈맥, 한 마을의 뿌리가 되다

나무를 심어 그로 하여금 가훈을 삼거나 그의 삶을 좌우명으로 삼아 살아가는 가문이 있다는 사실을, 노거수를 쫓아다니다 보니 알게 되었다. 나무의 삶과 상징성은 우리를 가르치는 스승이요, 인문학의 교과서 같다는 생각을 새롭게 가지게 되었다. 서원과 향교는 물론이고 각 가문의 종택, 제실, 정자에 살고 있는 나무를 볼 때면 그런 생각이 든다. 안동은 유교 문화, 선비 문화의 고장으로 우리 한국학의 본고장 정신문화의 수도이다. 안동은 발길 닿는 곳마다 눈길 가는 곳마다 옛 선비의 고고한 문화생활과 끈끈한 가족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경북 안동 정상 770번지 귀래정(歸來亭)에는 은행나무 노거수가 살아가고 있다. 귀래정이라는 말에서 삶의 철학이 묻어나고 은행나무에서 공자의 인의예지가 생각나고 노거수라는 말에서 삶의 경륜이 반짝인다. ‘귀래정 은행나무 노거수’는 낙포 이굉(李宏, 1441~1516)이라는 조선 선비의 삶으로부터 시작된다.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7호인 귀래정은 조선 중기에 문신이었던 이굉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고향에 돌아와 지은 정자이다. 조선 중기 이굉이 안동에 지은 ‘귀래정’ 후학양성·쉼터 ‘경북 문화재 17호’ 지정 500년 세월 귀래정에 터잡은 ‘은행나무’ 1982년 보호수 지정·키 18m·둘레 6m 유교문화·선비정신·가문의 정신 상징 귀래정이라는 이름은 중국 시인 도연맹의 귀래처사(歸來處士)에서 따온 말이다. 그는 1480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지내다가 귀양을 가기도 한 사람이다. 1513년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이곳에서 귀래정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원래는 강변 가까이 있어 낙동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으나 도로 개설로 인하여 이곳으로 물러나 옮겨놓았다. 그는 고성이씨 안동 입향조 이증(李增)의 둘째 아들로 귀래정에 은행나무를 심어 후학을 가르쳤다. 이 은행나무는 이굉을 상징하는 가문의 가훈 역할을 반세기 동안 이어 오고 있다. 조선의 가문(家門)은 한 집의 울타리를 넘어, 나라의 기둥이자 사회의 뿌리였다. 피붙이의 혈맥으로 이어진 그 울타리 안에는 예의와 도리, 충과 효가 자라났고, 조상의 숨결과 후손의 뜻이 한 줄기로 이어졌다. 은행나무는 세월이 흘러도 푸른 기개를 잃지 않았고, 그 정신은 후손들에게로 이어져 나라의 기둥이 되었다. 그의 후손인 임청각의 이상용은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으로 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고, 가문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한 그루의 은행나무가 뿌리로 맺은 정신은 세대와 세대를 잇는 신의와 충절의 상징이 되었고, 조선의 가문은 그렇게 한 사람의 도덕을 세우고, 한 마을의 질서를 바로잡으며, 한 나라의 역사를 써 내려갔다. 가문은 피보다 깊은 정신의 혈맥이었고, 그 정신이 모여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문화의 줄기의 바탕이었다. 또한 그의 현손인 이응태(李應台 1556-1586) 가족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는 온 국민의 심금을 울렸고, 영화 제작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그 주인공은 부인(원이 엄마)의 애절한 편지이다. 1998년 안동시 정하동 택지 개발 시 30세의 젊은 나이에 숨진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편지로 써서 무덤의 관 속에 넣어 둔 것이 발견되었다. 그녀는 남편의 병을 간호하면서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끝내 어린 아들과 유복자를 두고 세상을 떠나자, 그 안타까운 마음과 사모하는 그리움을 편지로 썼다. 편지의 절절하고 애틋한 내용은 평소 가족의 사랑이 얼마나 애틋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500년의 세월이 지나 그 편지가 세상에 다시 빛을 보았을 때, 그 속에는 한 인간이 지닌 가장 순수한 사랑과 그리움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가족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피로 맺힌 인연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다리이며, 떠나도 사라지지 않는 온기의 흔적이다. 말 한마디, 손길 하나, 밥 한 그릇에 스며 있는 정, 그것이 세월을 넘어 전해지는 가족애의 언어이며, 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지는 자리다. 이곳 귀래정의 은행나무 아래에서 뛰어놀며 나무를 보고 자란 이굉의 가정을 어렴풋이나마 엿볼 수 있다. 귀래정의 은행나무와 원이 엄마의 공원을 찾은 것은 한국산림문학 가을 문학기행(안동 이육사 발자취, 청송 객주문학관) 때 김선길 이사장님과 김선완 교수(회원)와 함께 짬을 내어 귀래정 은행나무와 원이 엄마 상을 답사 했다. 우리는 은행나무를 통하여 원이 엄마의 가족애와 고성이씨 가문의 독립운동 등 내력을 더 깊게 알게 되었다. 가족과 가문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은행나무를 통하여 깨닫게 되었다. 나무는 옛날부터 이래저래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았다. 산림문학회는 문학이 숲이 되고 숲이 문학이 되는 날까지 나무와 숲, 생명, 환경을 모티브로 하여 문학으로 우리 삶의 건강과 행복을 추구하는 문학단체이다. 귀래정 은행나무 노거수는 1982년 10월 26일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나이 500살, 키 18m, 가슴둘레 6m, 앉은 자리 폭이 16m인 거인이다. 원래는 귀래정 담장 안에 있던 나무를 지금은 담장 밖으로 나와 있다. 낙포 행단(杏壇)을 상징하는 은행나무는 500여 년이라는 긴 세월 선비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귀래정에 은행나무가 없다면 그저 하나의 오래된 정자로 기억될 뿐일 것이다. 택리지에서도 하회의 옥연정, 임청각, 군자정과 함께 안동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라고 했다. 또한 안동 팔경 중 제2경 귀래조운(歸來朝雲) 즉, 귀래정의 아침 구름으로 소개되고 있다. 귀래정을 품고 있는 은행나무의 노란 단풍이 가을 햇살에 반짝인다. 원이 엄마의 편지는… 원이 아버지에게 병술년 1586년 6월 초하룻날 아내가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을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이르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가로 58.5cm, 세로 34.0cm 크기의 이 편지는 한지에 한글 고어체로 쓰여진 것으로 형의 만시 미투리, 의복 등 다른 출토 유물들도 함께 안동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무덤은 안동시 풍천면 어담리로 이장하였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11-05

궁핍했던 시대, 구룡포의 자연에 사람의 정성을 더한 국수

나는 몰랐다. 무지한 편견으로 살았다. 국수가 다 그런 줄 알았다. 멸치국물에다 데친 나물 몇 점, 그것은 미나리이거나 부추무침이거나 호박나물이거나 달걀지단 등등 재료들의 향긋함과 고소함. 마늘과 쪽파를 다져 넣고 고춧가루와 참기름이 살포시 내려앉은 고명이면 최고인 줄 알았다. 정작 주인공인 국수의 존재는 무시했다. 무지도 이런 무지가 없었다. 앙꼬 없는 진빵을 먹고 고무줄 빠진 팬티를 입고 돌아다닌 꼴이었다. 1969년 문을 연 구룡포 제일국수공장의 창업자인 이순화(86) 여사의 가없는 이야기를 듣고는 무작정 철규분식으로 향했다. 제일국수공장의 국수만 사용하는 가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쉬는 날이었다. 그 옆에 있는 삼광상회로 발을 돌려 국수를 시켰다. 자그만 양은냄비에 담긴 적당한 양의 국수가 앙증스럽다. 최소한의 부추와 양념이 올라앉아 있다. 먼저 국물을 들이킨다. 적당하게 차가운 향이 그윽하다. 스물아홉 구룡포로 시집 온 이순화 여사 생업 위해 국수공장 한 켠서 일하며 창업 전문가 2명 모셔 직접 배우며 경력 쌓아 ‘해풍국수’ 이름 건 이순화 표 국수 탄생 밀가루•소금•물로서만 만드는 수제국수 기술이 아닌 몸으로 익힌 ‘경험의 산물’ 소금 녹이면서 손가락으로 찍어 맛 보며 감각 키우고 새벽마다 바람부터 헤아려 기계 반죽•열풍기 건조땐 7~8시간 충분 온전한 수제 생산은 빨라도 이틀 넘겨야 날씨•바람 따라 사나흘까지 험난한 과정 면과 육수의 절묘한 조합 면에 도전한다. 편견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혓바닥을 휘어 감는 면발의 부드러운 몸부림이 목젖까지 공격해온다. 너무 매끄러워 그냥 삼켜도 무난할 듯싶다. 쫄깃하다느니 탱탱하다는 진부한 표현은 그만두어야 한다. 제일국수공장의 국수는 그 둘을 합하고도 그윽함과 넉넉함이 넘친다는 표현을 포함해야 한다. 맑은 육수 외에는 별다른 간을 하지 않는다는 삼광상회 주인장의 말을 빌리면, 참으로 적당하게 국수에 소금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면과 육수의 절묘한 조합, 한판의 능란한 블루스를 본다. 필자는 이런 시를 쓴 적이 있다. 제목은 「멸치국수」다. 대략 옮긴다. 웨이브가 농염하네/장작의 부추김이 은근하네/짓이겨 뭉개져도 이마에 남는 마늘 향기/희생과 흔적은 이런 것이라 일러주네/팔팔 끓는 뙤약볕 밀밭의 추억//너무 정직하게 참 착한 햇살과/결 고운 바람 차분한 뒤뜰의 풍경마저 담겨 있네//바다의 뒤통수가 보이네//마치 첫 입맞춤의 그 비릿함의 멸치국수. 이순화 여사는 스물아홉에 감포에서 구룡포로 시집왔다. 공군으로 근무하다 막 제대한 남편은 철부지였다. 식구도 많았다. 남편은 집안일보다 바깥일에 더 열심이었다. 당연히 가정사에는 소홀했다. 문득 남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오빠는 풍각쟁이야>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친정에서는 곱게 자란 여식이었지만 시집온 이상, 뼈를 묻어야 할 가정에 대해 무한한 책임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 여사는 시장에 자리를 빌려 옹기 장사를 했다. 그때 많은 사람을 알 수 있었다. 날씨를 살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상의 시작 시장은 사람의 공간이다. 그때 구룡포시장에는 국수공장이 일곱 군데나 있었다. 옹기 장사로는 밥은 먹을 수 있어도 돈을 벌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국수공장의 끄트머리에서 국수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국수를 만드는 방법도 몰랐다. 의욕은 앞섰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본이 부족했다. 그러나 사업 전망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가난한 시절이었다. 질보다 양이라고, 고픈 배를 불리는 데 국수만 한 음식이 없었다. 구룡포답게 상품성이 없는 생선이나 지천으로 깔린 푸성귀를 넣고 끓이면 훌륭한 한 끼 저녁식사가 해결되던 시절이었다. 그야말로 배부르면 장땡이었다. 어부들도 먼 바다로 나가면 식사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 국수였다. 밤샘 작업을 하고 새벽에 돌아온 어부들의 빈속을 채워주는 뜨끈한 식사이자 해장국으로 칼칼한 어탕만 한 것이 없었다. 맑은 소주와 붉은 어탕으로 내일을 구축하는 머나먼 삶의 설계에, 미약하나마 국수는 삶을 위한 음식이었다. 그것을 ‘모리국수’라 했다. 멸치국수였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그렇게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가정은 많지 않았다. 자타공인 전문가 두 분을 모시고 제품을 생산하면서 일을 배웠다. 2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아이들의 도움을 받으며 직접 국수를 생산했다. 이순화 표 국수는 밀가루와 소금과 물이 전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각이다. 새벽에 일어나면 먼저 바람을 관찰한다. 날씨를 살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상의 시작이다. 수제로 생산하면 빨라도 이틀 이상 걸려 감각은 경험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그 감각을 계발하고 유지하며 일상적으로 적용하려면 섬세해야 한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깨너머로 배우며 눈여겨본 노동에 성실이 더해지면서 이순화 표 국수는 ‘해풍국수’라는 이름으로 거듭 탄생한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그냥 국수라고 취급하면 그 차이를 모를 사람이 많을 것이다. 모든 국수는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비슷하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하는 국수나 손으로 직접 생산하는 국수는 외형적으로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만드는 사람의 혼이 깃든 제품은 달리 설명이 필요하지 않고 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구태여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와 효용성을 아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으로 삶의 질을 고양하는 사람들이 많다. 공감하는 능력은 사람이 가진 특별한 재능이다. 그것을 잘 활용하면 기대 이상의 실용적이며 정신적인 만족감을 선사한다. 문화의 힘은 누리는 것에 있다. 실용성만 따지면 가치를 공유하지 못한다. 장삼이사의 수준에서 그냥 단순한 실용성에 머물며 만족하고 만다. 그렇게 살아도 크게 문제가 될 것도, 불편할 것도 없으며 오히려 합리적이라고 옹호될 수 있다. 아는 만큼 보게 되고 자리가 사람의 태도를 바꾼다. 이순화 여사는 염도계의 존재를 모른다. 처음 일을 배울 때부터 전문가들에게 소금의 양을 조절하는 법을 배웠다. 조금씩 물에 소금을 녹이면서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며 감각을 키웠다. 그것은 기술이 아니라 몸으로 기억하면서 익힌 경험의 산물로 굳어졌다. 날씨에 따라 소금의 양이 달라진다. 추운 날씨에는 평소보다 조금 많게, 여름에는 적게 넣는다. 흐린 날씨에는 적게, 바람이 약하면 많이 넣는다. 자연건조를 고집하는 탓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기계로 반죽하고 열풍기로 건조하고 최신 기계로 절단하면 일고여덟 시간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온전하게 수제로 생산하면 빨라도 이틀 이상이 걸린다. 날씨와 바람에 따라서 사나흘도 걸린다. 지금이야 기계로 반죽하지만 처음에는 여물통 같은 됫박에다 손수 밀가루를 치대야 했다. 그 험난한 과정을 비틀리고 굽은 손가락이 증명하고 있다. 글 : 이우근(시인) 사 진 : 김 훈(작가)

2025-11-05

영양엔 고기보다 맛있는 ‘그것’이 있다

추사 김정희와 함께 조선에서 필체 좋기로 으뜸을 다툰 이가 있다. 한호(韓濩·한석봉)다. 1543년 개성에서 태어난 그는 당대 풍류묵객 다수가 그러했듯 술을 어지간히도 좋아했던 모양. 한호는 종장(終章)이 근사한 시조 한 수를 남겼는데, 1980년대엔 그게 중학교, 혹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 그 시절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던 기자의 기억 속에 선명하다. 이런 노래다. 짚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 솔불 켜지 마라 어제 진 달 돋아 온다. 아해야, 박주산채(薄酒山菜)일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16세기 말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시조를 21세기 방식으로 다시 써보면 재밌을 듯하다. 대리석 바닥 깔린 근사한 살롱이 아니라도 좋다. 휘황한 조명과 신나는 음악이 없으면 또 어떠랴. 보시게, 여기 산나물 한 접시에 탁주 한 병 가져오게나. 경상북도 영양군은 시인 조지훈과 소설가 이문열을 낳은 문향(文鄕)이다. 산이 깊고 골짜기마다 철따라 화사한 꽃이 피는 곳. 사람들에겐 알싸하고 달달한 고추의 산지로 유명한 영양엔 그럴듯한 산나물 식당이 몇 곳 있다. 군(郡)의 이름을 걸고 산나물축제가 열릴 만큼 이런저런 나물이 흔한 영양군에 처음 간 건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쯤이다. 동행한 둘은 당시 모두 예순을 넘긴 사람들. 서울에서 출발해 먼 길을 가느라 점심을 시원찮게 먹은 기자는 저녁엔 소고기 구워 선배 자동차 트렁크에 실린 고급 양주를 마실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기대는 보기 좋게 깨졌다. 선배들이 문을 밀고 들어간 식당은 산채(山菜)를 파는 곳이었다. 연이어 기자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주문을 했다. “여기 산채정식 3인분에 막걸리 하나 주시오.” 식탁 위엔 열 가지는 분명 넘고, 아니 스무 가지도 넘는 온갖 나물에 된장찌개와 밥이 놓였다. 그 많은 나물 중 기자가 이름을 아는 건 겨우 고사리와 도라지 정도. ‘풀 반찬’을 싫어하는 얼굴은 찡그려졌지만, 그와 별개로 놀라움이 성큼 다가왔다. 세상에 사람이 먹는 나물이 그처럼 많다는 걸 그날 알게됐으니. 한국인, 그 가운데서도 나이 지긋한 이들의 ‘나물 사랑’은 대단하다. 유명인이라고 다를 바 없다. 늘그막의 미당 서정주(시인)는 두릅을 먹기 위해 봄을 기다렸고, 노년의 정치인 김영삼의 아침상엔 언제나 시래깃국과 나물 한두 가지가 반찬으로 올랐다고 한다. 산나물을 채취하는 이들의 동물적 감각과 축적된 경험에서 오는 선별법은 기가 막힌다. 산과 들에 지천으로 깔린 수백, 수천 가지의 풀 가운데 먹는 것과 먹지 못하는 것, 뜯어서 즉시 먹는 것과 데쳐서 말려 먹는 것, 약이 되는 식물과 독초를 신묘하게 가려낸다. 살아생전 기자의 외조모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고 모친에게 들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전원사시가(田園四時歌)’ 등의 고문헌엔 약용 나물과 독초의 구별법, 철 따라 나오는 산채의 종류 따위가 기록돼 있다. 그러니, 우리가 나물을 상식(常食)한 건 아주 오래고 오래된 옛날부터가 아닐지. 시계를 2년 전 봄으로 돌린다. 두 번째로 영양군을 찾았다. 취재를 위해서였다. 영양이 고향인 한 살 많은 선배가 자신의 단골 식당으로 이끌었다. 10여 년 전과 마찬가지로 산채가 맛있다는 밥집 가운데 하나였다. 세월이 흘러서였을까? 나이를 더 먹어서였을까? 그날 맛본 곰취와 방풍나물, 씀바귀와 당귀는 향이 좋았고 식감 또한 독특했다. 막걸리 한잔을 곁들여 점심을 달게 먹고 이런 혼잣말을 했다. ‘육식주의자를 자처한 내가 지천명을 넘어 이순에 가까워지니 산채를 안주로 박주 마시는 즐거움을 알게 됐구나. 역시 사람의 생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구나.’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1-04

따끈한 밥에 향긋한 나물, 한국인의 소울푸드

한국인의 밥상에서 나물을 빼버리면 어떻게 될까? 팥소 없는 찐빵, 신랑과 신부 없는 결혼식이 돼버리지 않을까? 김 오르는 따끈한 밥에 고소한 참기름이나 들기름으로 무친 각종 나물을 함께 먹는 건 수백 년 이어져온 우리네 섭식 형태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남새’라고도 부르는 나물은 콩나물 등의 채소나 산마늘 등의 산채, 또는 야생초를 삶아 만든 것을 조미료와 기름에 버무린 것을 지칭한다. 채취하여 데치고, 양념에 뒤섞는 나물 조리법은 비교적 단순하다. 하지만, 철마다 찾아낼 수 있는 재료가 원체 다양하기에 한국엔 수백 종의 나물이 존재한다. 채소의 재배와 채집이 힘든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 나물을 삶아 말리는 방식도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이를 ‘묵나물’이라 부른다. 채소만이 아니라 야생초, 나뭇잎, 식물 뿌리 중 먹을 수 있는 재료를 양념한 것도 일종의 나물로 분류된다. 쌀의 수확량이 적었던 시기. 봄이 되면 산이나 들에서 채취한 산나물로 밥을 대신했던 춘궁기도 있었다. 이를 기억하는 70~80대 어르신들은 모든 것이 풍족해진 요즘도 그때 먹던 나물 맛을 잊지 못하며 추억담을 들려주기도 한다. 나물은 한반도 사람들이 정착생활을 하면서부터 먹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육식을 금하는 불교의 본격적 유입 이후 나물이 중요한 반찬으로 정착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나물은 건강에도 이롭다. 한국임업진흥원의 설명을 아래 옮긴다. “현대인은 육식, 술, 담배 등을 즐기면서 체질이 산성화되고 있다. 산성체질은 여러 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 산나물은 알칼리성으로 이를 섭취하면 산성인 체질이 알칼리성이 되도록 도와준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1-04

파리 명문 요리학교에서 공부하며 시민제과의 미래를 구상

시민제과를 포항의 시그니처로서 전국적 명성을 획득한 브랜드로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진정하(45) 시민제과 3대 대표는 말한다.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명물을 만드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 또한 거기에서 자부심을 창출하는 것, 이러한 것은 누구 혼자만의 노력으로 가능한 일일까? 진 대표는 포항시민의 참여와 성원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발전하면서 힘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한다. 이런 이면에는 또 다른 역할이 포함되어 있다. 원도심의 쇠락을 걱정하는 평범한 시민들의 간절한 바람이 깃들어 있다. 많은 사람이 시민제과의 소비자가 되어 원도심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기초체력을 다지는 것도 진 대표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 동해바다와 구룡포의 풍경을 바탕으로 죽도시장과 포스코의 야경 그리고 불빛축제 등의 행사가 시민제과로의 ‘빵지순례’로 어울어진다면 자연스러운 관광상품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런 파급효과가 입소문으로, SNS로 연결된다면 전국적인 브랜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포항 ‘시민제과’ 3대 대표 진정하 씨 미국의 안정된 삶 포기하고 제빵 도전 파리 명문 제과과정 수료 후 가업 계승 프랑스·일본 등 해외출장에도 많은 투자 직원 연수·세미나·품평회로 노하우 공유 시민 참여와 성원 바탕 지속적 발전 기대 포항 명물로 전국적 브랜드 만들기 ‘총력’ 프랑스, 일본 출장 다니며 식견 넓혀 빵집은 의외로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오븐 하나에도 수천만 원이 든다. 밀가루도 일본산을 수입해 고객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춘다. 국내 밀가루도 사용하지만 각자의 제품에 적합한 맞춤형의 재료는 생산자가 직접 연구 개발하여 적용해야 한다. 이런 장기적인 목표를 달성하려면 굳건한 의지와 확실한 목표의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단기 매출에 연연하지 않고 꾸준한 투자로 확보한 인프라는 서서히 진가를 발휘한다는 것을 진정하 대표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소비자의 적극적인 소비를 유도함과 동시에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토대임을 그는 믿는다. 사람들의 입맛은 현란하고 변덕스럽기도 하다는 현실을 그는 직시하고 있다. 맛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각적이고 문화적인 취향까지 전반적인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매장에 깔리는 음악에도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한다. 기본이 완벽하면 응용은 무한대의 힘을 발휘한다고 그는 믿는다. 투자는 기술로 이어지고 그 결과는 매장에서 그대로 나타나는 법이다. 진 대표는 틈나는 대로 출장을 떠난다. 일본의 각종 세미나, 품평회, 신제품 발표회 때는 거의 빠지지 않으려 한다. 빵의 본고장인 프랑스 출장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는 만큼 식견이 넓어지는 것은 물론 제품 개발에 응용할 수 있는 노하우를 축적하기 위해서다. 직원들이 동행하기도 한다. 최고의 투자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는 진 대표의 신념은 굳건하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연수를 제의하거나 각종 세미나에 여건이 허락하는 한 참여시키려 한다. 자체적인 품평회와 제품 개발회의도 수시로 열어 직원들의 중지를 모으려 한다. 오래 머물고 싶은 회사를 만드는 것은 물론 외부에서도 많은 사람이 시민제과만의 경영 시스템과 제품 개발의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 방문하는 업체로 만들고 싶다. 그들을 통해 시민제과의 가치를 전국에 알리는 것은 물론이고 지역발전에 필요한 작은 밑돌이 될 수 있게 인식의 발판을 확장하려고 한다. 이러한 일은 젊은 기업인들이 발 벗고 나서야 한다는 것을 진 대표는 절감하고 있다. 파리의 명문 ‘에꼴 페랑디’에서 제과 과정을 수료 포항이 그리웠다. 아버지의 그림자는 길고 깊었다. 아버지의 생업을 저렇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마감할 것인지 고민스러웠다. 아직도 젊은 패기가 남아 있어서 과감한 도전의 유혹도 느꼈다. 나의 삶을 살자고 생각했다. 돌아왔다. 텅 빈 건물을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나의 뿌리가 지금 눈앞의 살아 있는 역사인데, 이것을 도무지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는가? 도전은 재미있는 일이지 억압이 아니다. 억압이라고 느낀다면 사업은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하 대표는 이른 나이에 미국에서 공부하고 굴지의 기업에서 억대 연봉을 받으며 일한 샐러리맨이었다. 모자랄 것이 없는 인생이었다. 주어진 환경에서 그럭저럭 살아도 부족함이 없을 삶이었다. 그러나 우연은 필연을 관통한다고 했던가. 그는 해운업 회사에서 원자재 운임 트레이드로 오랫동안 일했다. 그때 주로 맡은 업무가 밀을 비롯한 곡물의 대규모 거래였다. 그래서 그 한 부분인 밀 거래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 그 인연으로 제과점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거라며 그는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가 자못 흥미로웠다. 무엇이 되든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 잘나가는 직장을 그만두고 이 어려운 일을 권하는 어른의 심중을 못 헤아릴 바는 아니었지만, 언감생심 막막하기만 했다. 쉽게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은퇴를 조금 앞당겨 자신의 일을 한다는 것과 가업을 전승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그리고 일본에는 대대로 가업을 잇는 기업이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데 우리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불편한 진실도 진 대표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문제는 현실적인 적응 능력과 실질적인 기업 운영 능력이었다. 세상일은 용기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본인이 제과와 제빵의 전문 기술자가 아니었므로 적재적소에 배치해 일할 사람이 필요했다. 지금도 그 사람들이 내 곁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의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돈 이상의 재산이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그때부터 알았다. 사람 없이 어떻게 사람의 일을 할 것인가. 평생의 친구는 도반(道伴)이라는 말을 그때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진정하 대표는 당장 실천에 옮겼다. 2015년 프랑스 파리에 본원을 둔 세계적인 요리학교 ‘르 꼬르동 블루’ 서울분교에서 제빵 과정을 수료하고, 내친김에 1년 6개월이란 시간을 투자해 제빵의 본산인 프랑스로 날아갔다. 자처한 고통은 때로는 희열이 된다. 미래를 보장받을 수는 없지만, 인생의 방향은 스스로 설정할 수가 있다. 그는 파리의 명문 요리학교인 ‘에꼴 페랑디’에서 제과 과정을 수료한 후 제과 제빵의 기본기를 다지는 것은 물론 거기에 따른 디저트와 음료 등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수많은 책과 사진과 몇십 권의 노트가 그 시간의 고된 여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귀국해서도 전국의 유명한 제과점을 돌아다니며 견습생을 자처해 공부했다. 시작한 이상 끝을 봐야 하고 그 끝은 성공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고객 요구에 부응하려면 잠시도 멈출 수 없어 빵과 과자를 만드는 게 무슨 그리 대단한 일이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실상을 알면 기절초풍할 것이다. 수많은 프로그램을 통해 요리나 제빵에 관한 인식의 폭이 넓어지면서 고객의 눈높이도 높아졌다. 제과점의 삶은 전쟁의 연속이다. 고객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은 넓고 깊을 뿐만 아니라 감각적인 요구도 다양해지고 있다. 그런 요구에 부응하려면 잠시도 멈출 수가 없다. 쏟아지는 정보를 실시간으로 흡수하는 고객들의 요구는 실로 다양하다. 그 요구를 모두 수용할 수는 없지만 판로를 개척하고 끊임없는 연구 개발로 고객의 입맛을 이끌어간다는 자세는 필수적이다. 늘 깨어 있고 도전적이어야 한다. 이익이 적더라도 다양한 제품으로 이목을 끌어들이고 맛과 영양, 시각적 효과, 특화된 서비스, 밝고 쾌적한 매장 환경에도 신경을 놓아서는 안 된다. 다만 필자는 아득하게 기억하고 있다. 너무 가난했던 때라 시민제과에는 잘 들르지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교지 편집을 맡아 사람들을 인터뷰하거나 문학회 간부들을 만날 때면 가끔씩 들러 고소한 빵과 우유를 음미하며 우쭐한 마음으로 배를 채운 기억이 있다. 그때의 냄새는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정말 아쉽고 미안한 것은, 내 첫사랑을 한 번도 시민제과에 데려간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지독하게 반성한다. 그러나 다시 오질 않을 날들을, 시민제과는 시민 개개인의 아름다운 기억 속에서 그 넉넉한 가치를 오래 지켜줄 것이다. 그는 더 분발해야 할 의무가 있다. 시민제과는 시민의 것이므로. 〈끝〉 글 : 이우근(시인) 사진 : 김 훈(작가)

2025-11-02

‘동해선 K-관광’ 매력 한눈에 인터랙티브 페이지 본지 홈피 공개

영상과 사진, 기사가 어우러져 동해선의 매력과 주변 관광지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인터랙티브 페이지가 본지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시된다. 경북매일, 울산매일, 강원도민일보 3사는 지난 5월부터 함께 동해선 관련 기획과 취재를 시작했다. 2025년 1월 개통된 동해선의 현황을 점검하고, 동해선 철길이 지나는 일대에 산재한 관광지가 만들어갈 미래 청사진을 그려내기 위해서였다. 동해선이 통과하는 주요 관광도시들에게 벤치마킹 아이디어를 제공하기 위해 철도여행 선진국이라 불리는 일본도 찾았다. 그곳에서 9일간 오사카, 교토, 나라, 도야마, 쓰루가 등을 기차로 오가며 철도가 만들어낸 일본 관광도시의 면모를 가감 없이 확인한 것. 기차 이용자와 철도 관계자들 인터뷰 또한 병행했다. 여기에 더해 지난여름엔 동해선 철길이 지나는 포항, 울산, 삼척, 동해, 강릉을 돌아보며 지역의 관광 실태와 각각의 지자체가 관광 활성화를 위해 펼쳐 나가고자 하는 계획을 점검했다. 역시 기차를 이용해서였다. 이런 과정과 결과를 기사와 사진, 동영상에 일목요연하게 담아낸 인터랙티브 페이지는 향후 동해선을 타고 여행을 떠나려는 독자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 인터랙티브 기사 링크: 동해선 K관광의 미래-로컬 매력을 잇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0-30

크리스마스 때 한 시간에 100개 넘는 케이크를 팔기도

단팥죽과 찐빵은 군것질거리가 아니라 분에 넘치는 훌륭한 식사 대용의 음식이었다. 그것을 먹는다는 자체가 그 시절에는 황홀한 사치였다. 자줏빛 팥죽에 하얀 새알 경단, 거기에 첨가하는 설탕 몇 스푼은 은혜의 음식이었다. 단것이 그리운 시절이었다. 팥의 효능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액귀를 쫓는다는 주술적 의미를 넘어 건강에도 많은 도움이 되는 재료였다. 창업주는 그런 점에 주목했던 듯하다. 2대 진상득 대표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대한광업진흥공사라는 모두의 선망을 받는 직장이었다. 선친은 가업을 이어받기를 종용하지는 않았지만 은근하게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갈등이 없을 수 없었다. 틈만 나면 아버지의 굽은 어깨, 어머니의 새벽길을 나서는 연약한 실루엣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차피 영원히 직장생활을 할 수는 없는 법, 언젠가 귀향해서 부모님을 모셔야 하는 자식의 입장임을 고려해 조금이라도 젊을 때 결단을 내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인생 2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자줏빛 팥죽에 하얀 새알 경단 동동 첨가하는 설탕 몇 스푼은 은혜의 음식 그시절, 군것질거리아닌 황홀한 사치 대학 졸업후 번듯한 직장 잡았지만 좀 더 젊었을 때 부모님 모시기로 결단 2대 진상득 대표의 인생 2부 막 올라 1963년 지금의 자리에 터전 잡고 포항시 1호 제과점인 ‘시민제과’ 탄생 전국제과인들 모임 결성해 정기 모임 국내 유명한 빵집 물론 유럽도 방문 기술·실내장식·매장 시스템 등 연구 한 시간에 100개 넘는 케이크 팔리기도 1963년에 포항시 1호 제과점이 돼 막상 마음을 먹기는 했지만 제과에 대해 아무런 정보와 기술이 없었다. 먼저 매장을 바꾸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분들에게 의견을 듣고 최대한 반영해 따르기로 했다. 굴러온 돌 행세를 하지 않으려 무진장 노력했다. 자신은 경영에만 신경을 쓰기로 했다. 제품 개발 회의에 참석할 때는 가급적 발언을 삼가고 의견을 청취했다. 두 베테랑의 도움이 컸다. 현재 두 사람 중 한 분은 은퇴했고, 다른 한 분은 고문으로 내부의 자잘한 일을 처리해주고 있다. 당시에는 기숙사가 있어서 직원들이 선친을 사장이라 부르지 않고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업무에는 무척 엄격했지만 평소에는 한없이 너그러워서 직원들이 잘 따랐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일찍 직업전선에 나선 어린 직원들에게는 학업을 병행하게 했다. 1963년에 지금의 자리로 터전을 잡았다. 포항시 1호 식품접객업소로 등록했다. 그러니까 포항시의 1호 제과점이 된 것이다. 그때 ‘시민제과’라는 이름이 정식으로 사용되었다. 진상득 대표는 제과 분야에 문외한이었던 터라 관련된 책을 모조리 섭렵했다. 매장의 구조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잘 운영되는 가게를 찾아다니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열심히 받아적고 사진을 찍었다. 직접 배우기도 하고 직원을 파견해 연수를 받게 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제과인들의 모임을 결성해 정기적인 모임을 가진 것이었다. 대전의 성심당이나 군산의 이성당, 서울의 김영모과자점, 광주의 궁전제과의 주인들이 그 모임의 멤버였다.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빵집의 오너들이다. 지금은 모두 은퇴해 자연인으로 살고 있지만 제과산업의 발전을 위한 진정성은 항상 기억하고 있다. 그때의 열정을 한시도 잊을 수가 없다고 진상득 대표는 회고했다.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 업계의 모든 문제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난상토론을 했다. 그 모임은 제과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진 대표에게 살아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교육 현장이었다. 일본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산업현장을 방문했고 관련된 박람회에는 거의 빠짐없이 참관했다. 멀리 유럽의 유명한 빵집들도 방문했다. 직접 보는 만큼 생생하게 배울 수 있었다. 빵 기술뿐만 아니라 실내장식. 매장 구조. 주방 시스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차곡차곡 쌓이는 경험만큼 자신감이 붙었다. 많은 시민이 시민제과에서 행복을 누려 찹쌀떡은 참 좋은 상품이었다. 속이 보일 듯 말 듯 한 투명하고 쫀득하며 부드러운 앙금은 금세 전국적인 제품이 되었다. 높은 온도에서 갓 구워낸 단팥빵은 그 쫄깃함과 더불어 부드러운 앙금 맛으로 시민제과 최고의 제품으로 각광을 받았다. 같이 곁들이는 음료도 꾸준하게 개발했다. 우유의 시대를 지나 그 변형의 일종인 밀크셰이크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사각사각 씹히는 우유 알갱이와 혀에서 녹아나는 아이스크림은 최고의 디저트였다. 부단한 시도는 계속되었다. 당시만 해도 위생적인 문제로 포장지에 넣은 제품을 고객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대로 포장해주는 것이 일반적인 영업방식이었다. 진상득 대표는 그런 과거의 시간을 과감하게 건너뛰었다. 모든 제품을 출고되는 대로 판매대에 올려놓고 고객이 직접 집게로 선택하도록 영업방식을 바꾸었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방법이었다. 획일화된 제품을 무의식적으로 판매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감각과 취향을 고려한 것이었다. 즉 제품들을 이렇게 만들어놓았으니 선택은 당신의 몫이요, 우리가 하는 최선의 노력을 당신이 결정하면 된다는 의도였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우리가 겸허히 수용하리라, 더 헌신하겠다는 그런 마음이었다. 고객들은 신선한 시도에 대해 호응해주었고, 그런 시도는 위생과 제품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로서는 당돌하고 위험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고객들의 신뢰는 그 위험을 뛰어넘고도 남았다. 하나하나의 제품을 포장지에 정성스럽게 넣어주는 작업과 투박하지만 은근한 멋을 풍기는 종이봉투는 금세 하나의 트랜드가 되었다. 고객들에게 최소한 나는 시민제과의 빵을 먹는다는 은근한 자부심과 맛에 대한 자신의 감각을 은연중에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시민제과는 그렇게 포항을 대표하는 제과점으로 시민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수많은 가족이 시민제과의 빵과 음료로 행복을 누렸고 청춘남녀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피자헛이 시민제과 앞에 화려하게 개장해 시민제과 건너편에 시민극장이 있었는데 시민제과에서 만든 양갱을 극장 휴게소에서 팔았다. 양갱 역시 팥의 연장선상의 제품이다. 양갱은 화과자의 일종으로, 다른 제품들과 더불어 나름의 윤택함과 잠시나마의 활력을 제공하는 지참물이었다. 팝콘의 원조랄까, 그 당시 시간을 단축해 허기를 달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다. 시대는 급변한다. 피자헛이 시민제과 앞에 화려하게 개장했다. 각종 브랜드를 내건 제과점들이 우후죽순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일반 가게에서도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빵들로 넘쳐났다. 삼립식품이 대표적이었다. 동네 빵집도 제법 늘어났다. 당시 시민제과는 크리스마스 때면 한 시간에 100개가 넘는 케이크가 팔려나갈 정도였다. 크리스마스나 연말연시 때는 경찰들이 시민제과 앞에서 교통정리를 할 정도로 성황을 누렸다. 그러나 대형 브랜드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시민제과 양옆에 있는 태극당과 신화당과의 경쟁에도 힘에 부치는 판인데, 시대의 도도한 흐름인 물량과 저가 공세에는 도무지 승산이 없었다. 할 만큼 했다는 자포자기의 심정도 들었다. 일의 특성상 매장을 원활하게 운영하려면 속도가 생명인데, 주어진 시간 안에 이런 일을 감당하기에는 시설 혹은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다. 이런 어려운 일을 하려는 사람이 부족한 것도 또 다른 이유였다. 진상득 대표 역시 젊은 사람들의 감각을 쫓아가기에는 어느덧 나이가 들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잠시 시민제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글 : 이우근(시인) 사 진 : 김 훈(작가)

2025-10-29

'송시열 선생 유배지' 은행나무와 장기초등학교

조선 유배지의 고장, 경북 포항시 장기면 마현리 331번지, 장기초등학교 교내 운동장에 은행나무 노거수 한 그루가 살고 있다. 그는 17세기 조선의 학자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선생이 장기에 유배되어 머무르던 시절, 제자들을 가르치며 심은 나무라 전한다. 그때가 1675년 6월, 선생은 세월의 부침 속에서도 학문과 도의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장기에 남긴 것은 가르침만이 아니라, 그 뜻을 담은 한 알의 씨앗이 바로 은행나무였다. 그로부터 35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선생은 떠나고 세상은 변했으나, 그가 심은 나무는 그 자리를 지켰다. 바람과 비, 전쟁과 산업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묵묵히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펼쳤다. 마을 사람들은 나무 그늘에서 쉬었고, 아이들은 그 잎새 아래 자랐다. 이런 외형뿐만 아니라 이들의 내면 정신세계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정신이 세대를 거듭하며 나무는 선생을 대신하는 시간의 스승이 되었다. 1946년 3월 5일 은행나무는 장기초등학교의 교목으로 지정되었다. 어린이들의 성장과 배움의 상징이 되었고, 1972년 6월 9일 포항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시민 모두의 나무가 되었다. 그리고 1993년, 장기초등학교 제40회 졸업생들은 나무의 뜻을 기려 세월을 잇는 존경의 비석을 세웠다. 이렇게 나무를 통하여 선생의 가르침이 대를 이어오고 있다. 은행나무는 살아있는 선생으로 또한 역사서로 그의 나이 350살, 키 14m, 몸 둘레는 2.3m의 노거수이다. 굵은 줄기마다 조선의 선비 정신이 서려 있고, 잎사귀마다 배움과 인내의 빛이 어른거린다. 인간의 생은 짧지만, 한 사람의 뜻이 나무로 이어질 때, 그것은 세대를 넘어 마을의 정신이 된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심은 은행나무는 바로 그런 삶의 흔적이자, 교훈의 나무로 오늘날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의 몸에 난 상흔으로 보아 그동안의 삶이 순탄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상흔은 고난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오히려 그 상흔이 선생의 당시 희생의 고통처럼 느껴져 마음이 아프다. 옛날 공자는 은행나무 그늘에서 제자들에게 인의와 예를 가르쳤다고 한다. 350년 전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곳 장기에 은행나무를 심을 때도 아마 그런 뜻을 품었을 것이다. 거대한 줄기로 세월을 견디며, 잎이 돋고 지는 사이에도 나무는 묵묵히 배움의 상징이 되어 왔다. 지금 그 나무 곁에는 장기초등학교가 서 있다. 교실 창가를 스치는 바람은 마치 우암의 숨결처럼 아이들의 머리 위에 내려앉고, 아이들은 그늘에서 세상의 바름을 배운다. 공자의 은행나무 아래에서 피어난 학문의 혼이 이곳에 옮겨와, 오늘의 아이들 마음속에서도 조용히 잎을 틔우고 있다. 푸른 바다와 맞닿은 포항 장기 들녘에는 한때 외로운 유배객들의 발자취가 머물렀다. 조정에서 밀려나 이곳으로 흘러든 선비들은 절망 속에서도 학문을 놓지 않았고, 그 고요한 세월을 사유와 깨달음으로 바꾸어 놓았다. 우암 송시열은 제자를 가르치며 도의의 뿌리를 심었고, 다산 정약용은 목민의 길을 떠올리며 새 세상을 그렸다. 그렇게 포항 장기는 한때의 유배지였으나, 지금은 사색과 성찰의 땅, 인간의 깊은 정신이 깃든 문화의 터전이 되었다. 포항 장기는 조선의 두 거목,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이 머물며 사유의 깊이를 더한 유배의 땅이다. 우암은 장기에서 예와 의리를 가르치며, 혼탁한 세상 속에서도 바름의 길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한 인간이 먼저 마음을 닦아야 나라가 바르게 선다는 신념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 뜻을 은행나무 한 그루에 담아 후세에 남겼다. 한 세기가 지나 다산 정약용 또한 장기의 바람과 바다를 마주하며 인간과 세상을 새롭게 성찰했다. 그는 고난을 학문으로 승화시켜 백성을 위한 정치, 실천적 정의의 길을 모색했다. 두 선비가 거쳐 간 장기는 유배의 고통이 사색의 빛으로 변한 곳, 그리고 오늘날까지 ‘자신을 닦아 세상을 바르게 한다’라는 수신위정(修身爲正)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성찰의 고장이다. 수신위정(修身爲正)은 자신을 먼저 바로 세움이 세상을 바르게 하는 첫걸음이라는 뜻이다. 장기초등학교가 동학의 기상과 동해의 정기를 품고 배움의 터를 연 지 백 년, 그 세월은 한결같이 이 뜻을 지켜 온 시간이었다. 교정의 바람 속에서 아이들은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법을 배우고, 바른 품성과 정직한 마음을 길러 사회의 등불이 되었다. 조국의 어려움 앞에서는 나라를 위해 헌신했고, 평화로운 시대에는 근면과 성실로 이웃을 밝혀 왔다. 수신위정의 가르침은 단지 공부의 목적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의 방향이었다. 장기초등학교의 백 년은 바로 그 철학이 피워낸 푸른 역사이며, 앞으로의 백 년 또한 그 뿌리 위에서 더 깊고 단단하게 자랄 것이다. 그의 사상은 이곳 출신 주민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애국지사 장헌문(蔣憲文) 의병장과 엄주동(嚴柱東) 선생 추모비가 은행나무 곁에 세워져 있다. “일제 강점기 시대 장헌문(蔣憲文) 의병장은 김재홍, 김복선 등과 뜻을 모아 3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영일을 중심으로 경주, 죽장, 흥해, 청하 등지에서 항전하며 정환직, 신돌석 의진과 연계해 항일투쟁을 이끌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년 형을 선고받고 출옥하였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애국지사 엄주동 선생은 이우용, 최규익 등과 함께 일본인들에게 피탈 당하고 있는 각종 산업을 되찾으려는 노력과 함께 국권 회복 운동을 펼쳤다.”라고 새겨진 추모비는 우암 송시열 선생을 상징하는 은행나무 노거수 곁에 세워져 있다. “우암 송시열 선생과 다산 정약용 선생이 장기를 방문하신 일은 이 지역 사람들에게 최고의 학문을 접할 수 있는 큰 행운이었다. 두 분이 남긴 가르침과 덕망은 오랫동안 장기인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고, 그 고매한 정신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이 글은 포항 장기의 자긍심과 학문의 전통을 기리는 마음에서 ‘장기 발전연구회’가 돌비석에 새겨 놓았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우암 송시열이 망실(亡室) 이씨(李氏) 에게 올린 제문 아, 나와 당신이 부부로 맺은 지가 지금 53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나의 가난함에 쪼들리어. 거친 밥도 항상 넉넉하지 못하여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던 그 정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쌓은 앙화 때문에 아들과 딸이 많이 요절하였으니, 그 슬픔은 살을 도려내듯이 아프고 독하여 사람들이 견디어 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근세(近歲)에 이르러서는 내가 화를 입어서 당신과 떨어져 산 지가 이제 4년이 되었는데, 때때로 나에 대해 들려오는 놀랍고 두려운 일들 때문에 마음을 녹이고 창자를 졸리면서 두려움에 애타고 들볶이던 것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끝내 몸이 지쳐 병에 걸려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시종을 따져보면 나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습니다. 타고난 운명이 좋지 않아서 이같이 어질지 못한 사람과 짝이 되었으니, 당신이야 비록 원망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내 어찌 부끄러운 마음을 이겨내겠습니까. 우암 송시열은 71세였던 1677년 3월 22일 부인 이씨의 상을 당하여 멀리서 통곡했다. -장기 유배문화 체험촌 우암의 벽 기록을 옮김

2025-10-29

대게와 함께 털게와 왕게도 별미

바람이 차갑고 바다도 차가워지는 겨울은 각종 ‘게’가 맛있어지는 계절이다. 곧 다가올 겨울. 얼어붙은 어시장 거리에서 게를 찌는 찜통에서 솟아오르는 뜨거운 김 앞을 지날 때면 고소한 냄새에 군침이 절로 돈다. 겨울철 귀한 별미 중 으뜸은 대게라 하겠지만, 털게와 킹크랩으로 불리는 왕게도 여러 사람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게 만드는 각별한 맛을 지녔다. 한국에선 게의 다리 살은 물론 몸통 살도 꼼꼼하게 발라먹고, 내장까지 볶음밥에 넣어 먹는다. 하지만, 일부 국가에선 다리만 잘라내고 몸통은 버린다. 게 내장의 녹진한 맛을 즐기는 이들이 본다면 혀를 차며 안타까워할 듯하다. 영덕, 울진, 포항 등에서 주로 유통되는 대게는 높은 인기 탓에 금어기 때는 러시아 등지에서 수입해 판매한다. 오호츠크해와 베링해 등 북태평양에서 서식하는 털게는 진흙이나 모래 바닥에서 활동한다. 한국의 경우엔 고성 부근 동해 북측에서 주로 잡힌다. 털게 역시 달달하고 구수한 맛으로 유명하다. 살이 많고 향이 좋은데다가 내장 맛이 일품이지만, 어획량이 적어 가격이 만만찮다. 계절에 따라서는 비싼 박달대게보다 더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남북 교류가 활발하던 2000년대 초반 금강산을 여행하며 맛본 털게 맛을 기자는 아직 잊지 못했다. 통상 킹크랩이라 불리는 왕게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이 계절의 별미다. 알루샨 열도, 알래스카, 극동 러시아, 일본 북부에서 서식하기에 우리가 먹는 왕게의 거의 전부는 수입산이라 생각하면 된다. ‘왕게’라는 이름값을 하듯 평균 무게가 3kg을 넘나든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0-28

‘성큼’ 동해안 대게가 살찌는 겨울이 다가온다

동해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누가 뭐래도 경북 바다 ‘최고의 별미’인 대게의 계절이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다리를 쭉 펴면 가로 길이가 60~70cm를 넘나드는 대게. 경상북도 울진과 영덕, 포항 구룡포는 물론 강원도 바닷가 마을에서까지 ‘비싸지만 귀하고 맛있는 먹을거리’로 대접받는 대게는 다른 갑각류에 비해 몸피가 크다. 그래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대게’는 커다란 크기 탓에 대게라고 불린다고 착각한다. 한자인 대(大)가 ‘게’자(字) 앞에 쓰인 것으로 이해한다는 이야기. 하지만, 그건 틀렸다. 먼저 이것부터 수정하고 가자. 대게는 길쭉한 다리가 대나무의 마디와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니, 대게 앞에 붙는 ‘대’자는 ‘클 대’자가 아닌 ‘대나무 죽(竹)자’다. 허니, 대게를 ‘죽게’라 불러도 “그건 틀렸다”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아는 사람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에서도 대게와 유사한 것들이 잡힌다. 푸른 눈동자와 금빛 머리칼을 가진 그쪽 어부들은 대게를 ‘스노우 크랩(Snow crab)’이라 칭한다. 눈보라 치는 차가운 바다에서 잡히는 게라는 뜻일 터. 알다시피 한국의 동쪽 바다도 물이 차갑다. 대나무 마디 닮은 다리에서 비롯된 명칭 박달대게·털게·왕게 등 통통한 속살 가득 회·찜·굽기 등 다양하게 조리…맛 일품 상인들 “대게는 찜이 최고∼” 한목소리 21세기 한국엔 부자가 적지 않다. 아직은 다수가 아니겠지만 “그게 맛만 있다면 나는 먹는데 돈 아끼지 않는 사람”이라 호언하는 자칭 미식가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 간다. 대게로 만든 요리 중 값싼 건 드물다. 앞서 언급했듯 ‘혀에 감기는 비싼 별미’가 대게니까. 움직임이 활발하고 살이 단단해 ‘박달대게’라 불리는 건 다리에 원산지 표시를 매달아 한 마리에 20만 원을 호가하기도 한다. 서민이 자주 맛볼 수 있는 가격은 아니다. 어쨌건 경북 동해안 일대엔 대게를 회치거나, 찌거나, 굽거나, 이런저런 채소를 더해 끓인 요리를 파는 식당이 흔하다. 맛있다고 입소문이 난 가게 앞엔 겨울철 주말마다 관광객이 만들어내는 긴 줄이 생겨나기도 한다. 도로변에 서서 달리는 자동차를 향해 “어서 우리 가게로 오세요”라며 손을 흔드는 호객 행위도 만만찮다. 맛있는 걸 감각하는 즐거움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던 걸까? 대게는 고려의 성리학자 목은 이색(李穡·1328~1396)도 감탄하며 먹었다고 전해진다.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의 스승이기도 했던 점잖은 대학자가 겨울날 거친 물결치는 바다에서 아랫것들이 잡아온 대게의 다리를 들고 ‘쪽쪽~’ 고소한 속살을 빨아 먹는 모습을 상상하면 절로 미소가 그려진다. 이색은 대게를 소재로 시(詩)까지 썼다. 그의 작품 ‘잔생(殘生)’은 ‘서쪽 바다 등 푸른 생선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나, 동해의 대게는 어지간해선 맛보기 어렵구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맞다. 동서고금 먹지 않고 사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게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주자학의 대가(大家)라 할지라도. 이색의 경우엔 ‘대가’가 ‘대게’를 먹었으니 책할 이들도 없을 듯하다. 700여 년 전 고려 시대에 잡힌 대게는 21세기 대게와 맛이 달랐을까? 기자도 궁금하고, 우리 모두 궁금하다. 여러 방식으로 조리가 가능한 대게지만, 수십 년 이상 대게 요리를 손님들에게 대접해온 경북 동해안 식당 주인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대게 찜이 최고”라고. 자, 그럼 어떻게 해야 더 맛있게 찔 수 있을까? 아래 30년째 대게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주인장에게 얻어낸 답을 살짝 공개한다. 집에서 찜통 위에 대게를 올릴 때 참고하시기를. “일단 솥에 담을 때 대게가 물에 닿지 않게 하세요. 끓는 물과 대게가 직접 닿으면 물기가 살 속으로 파고들어 내장이 흘러버리니까요. 고구마를 찔 때처럼 대게를 올린 채반과 물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쪄야 보다 맛있게 됩니다. 1kg짜리 대게를 찌는 시간은 20~25분이 적당해요. 배가 위로 향하게 해서 쪄야 하는 걸 절대 잊지 마시고.”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0-28

“함께가자 Yes 문경, 함께먹자 약돌한우!”

문경의 대표 먹거리 축제인 ‘제14회 문경약돌한우축제’가 오는 31일부터 11월 2일까지 3일간 문경새재 야외공연장에서 열린다. 올해 축제는 ‘함께가자 Yes 문경, 함께먹자 약돌한우!’를 주제로, 문경의 청정 자연과 명품 축산물 브랜드를 전국에 알리는 가을 미식 대축제로 마련됐다. 31일 개막식 박지현·정서주·윤윤서·개그맨 영기 등 출연 무대 빛내 11월2일 ‘읍면동 노래 경연대회’, 시민·관광객들 함께 축제 즐겨 30m 대형구이터에서 약돌한우-돼지 요리, 800명 동시 이용 가능 사과·오미자·약돌한우 3대 특산품, 대한민국 명품 브랜드로 육성 ◇ 문경약돌한우, 전국으로 ‘Yes!’ 문경의 대표 브랜드 ‘문경약돌한우’는 청정한 산간지대에서 자란 한우로, 약돌(藥石)을 먹여 키운 건강한 프리미엄 고기다. 축제 추진위원회는 “문경약돌한우의 우수성을 전국에 알리고, 관광객이 직접 맛보고 즐길 수 있는 축제를 준비했다”며 “문경의 가을을 대표하는 브랜드 축제로 자리매김하겠다”고 밝혔다. 올해는 KTX 문경역 이용객을 대상으로 할인권과 경품권을 증정하며, 교통 접근성을 살린 관광객 유치에도 나선다. ◇ 화려한 개막, 스타들이 빛낸다 축제 첫날인 31일 오후 2시 개막식은 식전공연과 내빈 소개, 개막선언에 이어 ‘약돌 퍼포먼스’로 본격 막이 오른다. 무대 중앙에 ‘약속의 낙관’을 찍는 장면과 함께 조명이 색을 바꾸고, 약돌한우 캐릭터가 리프트로 떠오르며 현수막이 펼쳐지는 연출은 ‘문경의 약속과 화합’을 상징한다. 이후에는 미스터트롯2 준우승자 박지현, 미스트롯3 우승자 정서주, 문경 출신 윤윤서 홍보대사, 개그맨 가수 영기 등이 무대를 빛낸다. 팬클럽 수만 명을 보유한 트롯 스타들이 대거 출연하면서, 축제장은 개막 첫날부터 ‘전국 팬들의 문경행’으로 붐빌 전망이다. ◇ 둘째 날, ‘토요음악회 in 문경’ 11월 1일 토요일에는 인기 프로그램 ‘토요음악회 in 문경’이 열린다. ‘미스터트롯2’ 우승자 안성훈, ‘트로트퀸’ 우승자 지원이, ‘트롯전국체전’ TOP8 출신 한강, 그리고 합창 퍼포먼스 그룹 하모나이즈가 무대를 꾸민다. LG헬로비전이 현장을 녹화해 전국 송출할 예정으로, 문경 관광의 전국 홍보 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된다. 같은 날에는 국가대표 팔씨름 선수 주민경과 맞붙는 1대100 도전 이벤트, 한우 레크리에이션, 한우오락실(골든볼차기, 해머오락실) 등 다채로운 체험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 마지막 날, 읍면동 노래경연과 폐막 축제 마지막 날인 11월 2일 일요일에는 문경 전역에서 참여한 읍면동 노래경연대회가 열려 시민과 관광객이 함께하는 ‘패밀리 콘서트’ 분위기를 만든다. ‘무장상(무대장악상)’, ‘흥이 폭발했상’, ‘한마음 뭉쳤상’ 등, 재치 있는 상명과 시상금 300만~150만 원대의 풍성한 상품이 마련됐다. 폐막식 무대에는 ‘꽃을 든 남자’의 최석준, 김다나, 문경시 홍보대사 윤진우와 장혜진이 출연해 피날레를 장식한다. 이후 경품추첨과 폐막인사를 끝으로 3일간의 대축제가 대미를 장식한다. ◇ 맛과 체험, ‘먹거리+놀이+흥겨움’ 3박자 축제의 백미는 단연 약돌한우 구이터다. 문경축산농협이 직접 운영하며, 갈비·등심·살치살 등 인기 부위를 20~33% 할인 판매한다. 800명이 동시에 이용 가능한 대형 구이터(30m×40m)에서 즉석 시식이 가능해 가족단위 방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약돌한우·약돌돼지 시식회, OX퀴즈 및 약돌높이쌓기 대회, 농특산물 판매부스(32동), 문경가수 가요무대, 경품추첨 행사 등 풍성한 부대행사가 마련돼 축제기간 내내 흥겨운 잔치가 이어진다. ◇ “한우 먹고, 문경 새재길 걸어요” 문경새재의 단풍이 절정을 이루는 시기와 맞물려 열리는 이번 축제는, 사과축제에 이어 ‘가을 관광 2탄’으로 기획됐다. 문경시 관계자는 “문경사과축제의 열기를 이어 약돌한우축제가 관광객 소비와 지역경제로 이어지도록 준비했다”며 “새재의 가을과 약돌한우의 풍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지역 축산농가의 참여 확대와 농특산물 공동 홍보, 전통시장 상권 활성화 등 지역경제 선순환 모델도 가시화되고 있다. 특히, 한우협회 문경시지부와 한돈협회 문경시지부가 공동 운영하는 시식행사는 문경산 축산물의 경쟁력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로 꼽힌다. ◇ “문경약돌한우, 대한민국 대표 한우로” 송명선 문경약돌한우축제추진위원장은 “약돌한우는 문경의 자존심이자 대한민국 최고 품질의 한우 브랜드”라며 “시민과 관광객이 함께 즐기고, 농가와 상권이 함께 웃는 축제로 발전시키겠다”고 말했다. 신현국 문경시장은 “문경사과, 문경오미자, 문경약돌한우 등 지역의 3대 특산품을 축제 콘텐츠로 연계해 대한민국 대표 농특산 도시로 도약하겠다”며 “가을 문경새재에 오면 맛과 흥, 그리고 따뜻한 정을 모두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올해로 14회를 맞은 문경약돌한우축제는 ‘문경의 맛을 전국에 알리는 브랜딩 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화려한 공연, 체험, 시식, 관광이 어우러진 축제의 열기가 문경새재의 단풍처럼 붉게 타오르며, ‘맛의 고장 문경’의 이름을 다시 한 번 전국에 각인시킬 것이다. ◇ 약돌 ‘약돌’은 거정석으로 전통적인 한약재로 알려져 있으며, 문경에서 산출되는 광물이다. 칼슘·마그네슘·아연·게르마늄 등 미네랄이 풍부해 물을 정화하고 신진대사를 돕는 효능이 있어 예로부터 ‘약이 되는 돌’로 불려왔다. 문경시는 거정석을 미세하게 분쇄해 사료와 음용수에 섞는 사육 방식을 도입, 한우의 면역력과 소화력을 높였다. 그 결과 고기는 부드럽고 육즙이 맑으며 고소한 풍미가 살아난다. 2011년에는 지리적 표시 단체표장을 획득하며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약돌은 소화 효소의 분비를 촉진해 소화 기능을 개선시키고, 복부 불편을 줄여주며, 항산화 성분은 체내 자유 라디칼을 제거하고, 면역 세포의 활동을 촉진해 감염에 대한 저항력을 높인다. 또한 피로 회복에 도움을 주고 피부 세포 재생을 촉진하며, 염증을 줄인다. 혈액 순환을 개선하고, 혈압도 조절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성환기자 hihero2025@kbmaeil.com

2025-10-27

광복 후 대흥동에서 찐빵과 단팥죽 파는 난전으로 시작

인생이란 빗속을 달리고 문고리를 잡는 것 그 이상이다. 서로 얼굴을 스쳐 지나가고 냄새를 기억하는 것 이상이다. 독일의 작가 볼프강 보르헤르트(Wolfgang Borchert)의 「이별 없는 세대」라는 에세이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끝을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쏟아지는 비와 바람에 저항하고 비로소 도착한 목적지에서 문고리를 잡는 지난한 과정이 인생이라면, 그 과정에서 스치며 만난 많은 얼굴과 뇌리에 남아 있는 냄새는 우리의 과거를 현재로 형성시키는 중요한 장치임에 분명하다. 나는 냄새를 기억한다는 말에 주목한다. 그것이 첫사랑이든 아픈 기억이든 냄새에는 분명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불의 소인(消印)으로 남은 상처가 아니라 뇌의 깊은 곳에 스며든 특별한 냄새는 과거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연결고리가 되어 아득한 상념에 잠기게 한다. 그때 행복했다면 지금도 행복하다는 뜻이다. 상처는 어느덧 훈장이 되어 그 사람을 반짝이게 한다. 고통스러웠던 시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좋은 기억으로만 각인된다. 창업주 진석률 옹 일제강점기때 日 건너가 수없이 반복되는 차별에도 묵묵히 노력 우연한 기회에 고국에 왔을 때 광복 맞아 日서 일군 재산 없이 난전으로 다시 시작 찐빵과 단팥죽 팔며 1949년 ‘시민옥’ 개점 이후 ‘시민양과홀’, ‘시민제과’로 명맥 이어 6·25 피난 후 돌아왔을 땐 가게는 폐허로 난관 속 가게 열고 찹쌀떡으로 영역 넓혀 오늘날 시그니처 제품은 도전의 산물인셈 1949년 ‘시민옥’이라는 상호로 개점 ‘시민제과’는 이름에서부터 내공이 느껴진다. 외래어투성이의 빵집과 베이커리, 디저트 카페, 공장형 커피숍이 도처에 널려 있다. 자기완성형이면서 정체성을 잃지 않은 이름의 이 제과점은 내공만큼이나 저력을 자랑한다. ‘시민’을 이름으로 내걸 만큼 시민을 대표한다는 단단한 자존심으로 80년 가까운 세월을 더해 찬란해진 이름이다. 이런 제과점 하나쯤은 도시라면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한다. 시민제과는 1949년에 처음 이름을 내밀었다. 창업주인 진석률 옹은 일제강점기 때 변변한 재산이 없어 일찌감치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돈을 벌려고 했다. 그는 수없이 반복되는 차별에도 굴하지 않고 묵묵히 생업을 유지하고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도 노력하면 그런대로 살 만했다고 한다. 배달과 온갖 잡일을 마다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에 몰두했다. 성실에는 이길 장사가 없다고 했다. 우연한 기회에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마침 광복을 맞아 일본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때까지 일본에서 일구어놓은 재산도 챙길 수가 없었다. 먹고살아야 했다. 진석률 옹은 대흥동 근처 금은방이던 신정당과 수양다방 부근에서 난전을 벌였다. 손재주가 있었던 터라 찐빵과 단팥죽을 만들어 팔기로 했다. 배고픈 시절이었지만 누구라도 달콤한 군것질을 마다할 사람은 없었다. 설탕은 중독이자 에너지였다. 김이 폴폴 피어오르는 하얀 찐빵과 고소하고 진한 향기가 나는 단팥죽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호기심과 늘 배가 고픈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그만인 품목이라는 데 착안한 아이템이었다. 애초의 이름은 ‘시민옥’이었다. 방앗간을 운영했던 창업주의 경험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 가장 잘할 수 있는 업종을 선택한 것이었다. 일본에서 일할 때 어깨너머로 배운 팥 제조 기술은 큰 도움이 되었다. 이후로 시민옥은 ‘시민양과홀’로, 지금의 ‘시민제과’로 명맥을 이어가게 된다. 한국전쟁 후 폐허에서 만든 찹쌀떡 그 와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해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지붕이 날아가 버려 폐허가 된 가게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래도 신세 한탄이나 하면서 망설이고 있을 틈이 없었다. 최선을 다해 주위를 정리하고 다시 가게를 시작했다. 갖가지 난관에도 다시 빵을 만들고 단팥죽을 팔았다. 거기에 더해 찹쌀떡으로 영역을 넓혔다. 오늘날 시민제과의 시그니처 제품인 찹쌀떡은 그런 도전의 산물이었다. 앙금이 살포시 보이는 영롱한 빛깔의 찹쌀떡은 대표상품이 되었다. 입시철에는 밤새도록 일을 했다. 2대 진상득(70) 대표는 이렇게 회상한다. 새벽 3시에 일어나 팥을 씻는 것은 내일의 장사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오늘의 상품은 그 전날에 준비해야 한다. 무쇠솥이든 양은 재질의 큰 냄비이든 팥을 가득 넣어 찬찬히 끓이는 노동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디 당장 눈앞의 대가가 있으랴. 숙명과 운명의 쳇바퀴 같은 삶일지라도 지금의 생에 충실하고자 했다. 어머니의 모시 적삼에 밴 땀의 흔적을 그는 선명하게 기억한다. 아버지는 말없이 생업에 종사하면서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좋은 음식을 만드는 일은 군것질에 불과하더라도 배부름과 더불어 문화적 감각과 정신적 포만감을 보충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실용과 실리를 생각했다고 한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고 했는데, 지금 시민제과의 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를 망라하여, 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약간의 허기를 사람들은 질병처럼 앓고 있다. 문화적이면서도 지적 호기심을 뒷받침하는, 혹은 증명할 수 없는 부의 가치를 평가받는 그 오묘한 지점에서 시민제과는 그 역할에 앞장섰다. 지금에야 흔한 상품으로 빵의 존재이지만 그때는 달랐다. 먹는 것에서부터 생활의 위치가 달랐던 시절이기도 했다. 약간의 특권과 부의 과시가 존재했었다는 말이다. 식생활의 변화와 문화적 가치를 선도하는 사회적 기업의 역할을 시민제과가 창출했다는 의미에서 단순한 빵집의 존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맛이 미학(美學)이 될 수 있다는 그 징검다리를 놓았다는 이야기다. 밥의 존재는 여전하지만, 그 대체재로 빵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는 세상이다. 진상득 대표는 불을 조절하는 어머니의 둥근 어깨를 한시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마당을 치우고 정성을 다해 오늘의 장사를 준비하고 조심스럽게 불을 지펴 팥을 삶고 찹쌀밥을 지으며 손 모아 치성을 드리는 끝없는 간난의 여정을 잠시도 잊지 못한다. 요즘은 이스트를 사용해 간단하게 발효시키지만, 그 시절 어머니는 밀가루를 잘 반죽해 아랫목에 모셔다 놓고 이불을 두르면서 밤새 정성을 들였다. 그리고 새벽마다 무거운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생업 전선으로 떠났던 작은 체구의 어머니를 평생 그리며 살고 있다.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 없이는 인생이란 그림은 완성되지 않는다. 그 깊이와 넓이는 아무도 측정하지 못한다. 불 조절을 잘하는 것이 완벽한 팥을 만드는 지름길 그 한없는 정성은 추운 겨울에도 침묵의 웅변으로, 순수의 결정체인 땀방울로 흘러내렸다. 어머니의 정성은 자식들의 배부름이었다. 아버지의 묵묵한 헌신은 일가를 완성하는 신성한 노동이었다. 그러므로 잘살아야 한다고 어린 마음에도 꼭꼭 다잡았다고 한다. 찐빵과 단팥죽은 팔이 주원료다. 당연히 좋은 팥을 고르는 것에서부터 모든 일이 시작된다. 물론 밀가루도 중요하다. 하루 전에 반죽해 숙성시키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하고, 다음 날 새벽부터 빵을 만들기 시작한다. 팥앙금을 만드는 것은 기술과 정성이 어우러져야 완성되는 결과물이다. 좋은 팥은 짙은 붉은색을 띠는 것이 우선이며 낱알이 굵은 것, 가운데의 띠가 노르스름하면서도 흰색으로 선명해야 한다. 그리고 덕지덕지 붙은 하얀 가루가 없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팥을 고르려면 최대한 발품을 파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어머니는 매의 눈으로 시장을 누비며 좋은 품질은 물론 적절한 가격으로 팥을 구입했다. 또한 팥은 영양분이 뛰어난 재료라서 벌레가 많은 것이 흠이라면 흠인데, 그만큼 완벽한 식재료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엄선한 빛깔 좋은 팥을 물에 불려 은근한 불에 끓이고 나서 찧고는 체에 걸러 숙성과 건조를 반복하면 앙금이 탄생된다. 찐빵용의 앙금과 달리 단팥죽의 앙금은 손이 많이 간다.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지만 삶은 팥을 베자루에 넣고 지렛대로 압력을 가해 고운 가루로 걸러내야 한다. 그래야만 부드럽고 고소하며 감칠맛이 입안을 감싸는 앙금이 된다. 찐빵용 앙금과 단팥죽 앙금은 다시 꾸덕꾸덕한 앙금과 맑고 곱게 정제한 앙금으로 나누어져 단팥죽의 원재료가 된다. 단순한 과정 같지만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일이다. 도구도 화력(火力)도 손으로 제어해야 하므로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다. 특히 불 조절은 많은 경험을 쌓지 않으면 안 되는, 순전히 누적된 시간의 산물이다. 뒤꼍에 쌓아놓은 장작과 마른 솔잎은 중요한 자원이었다. 그 땔감을 활용해 불 조절을 잘하는 것이 완벽한 팥을 만드는 지름길이다. 진상득 대표는 잘 마른 나무 냄새와 마른 솔잎의 향기가 아직껏 머리에 남아 있다고 회상한다. 그것은 냄새로 각인된 원형의 추억이자 삶을 지탱하게 하는 에너지가 되었다고 한다. 글 : 이우근(시인) 사 진 : 김 훈(작가)

2025-10-26

제9회 스틸에세이 공모전 대상 수상자 인터뷰

경북도와 포항시 주최, 경북매일신문 주관으로 열리는 ‘스틸에세이 공모전’은 산업도시 포항의 대표 문학 행사로 자리 잡았다. 철을 소재로 삶의 순간을 문학으로 승화시켜, 차갑고 단단한 철의 이미지를 따뜻하고 부드러운 문화로 재탄생시키기 위해 기획된 이번 공모전은 올해로 9회째를 맞는다. 지난 24일 발표된 ‘제9회 스틸에세이 공모전’에서 일반부, 청소년부, 포토에세이 부문 대상 및 금상 수상자 3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일반부 대상 진상용씨 -“ 철이 세계 평화와 인류 공동체의 삶에 올바르게 쓰이길…” "올가을, 근래 가장 풍성한 결실을 맺었습니다. 뜻밖의 수상 소식에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설레었지요. 하지만 일흔의 나이에 마주한 인터뷰 요청은 여전히 떨리고 조심스럽습니다. 함께한 이들의 냉소 어린 시선이 귓가를 스치는 듯해 더욱 그렇습니다. 미처 다듬지 못한 글이 선택받도록 살펴주신 심사위원께 감사드리며, 전쟁 속에서도 검게 그을린 주전자에 정성껏 끓여주던 그 땅의 차이 한 잔이 그리워지는 가을입니다.“ -수상작이 ‘청동 낙타, 한마리’이다. 청동 낙타에 대한 글을 쓰게 된 계기가 있다면. △70세를 훌쩍 넘기면서 운전면허증 반납부터 시작해 하나씩 줄이고 버리는 시기에 접어들어섰습니다. 이는 소중히 간직할 것과 쓸모가 적어진 사물을 구분 짓는 세대가 되었다고나 할까요. 집안 청소를 하던 중 눈에 띈 청동 낙타는 1980년대 중동 근무 후 귀국길에 챙겨온 기념품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묻혀 있던 이 낙타를 ‘철’을 주제로 한 에세이 공모전을 통해 세상 밖으로 꺼내주고자 마음먹었습니다. 글의 주요 소재는 철근이지만, 굳이 제목을 ‘청동 낙타’로 정한 이유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철근은 사막으로 수출되었고, 그 땅의 청동 낙타가 저를 따라온 셈이니까요. 어쩌면 저 자신도 한 마리의 낙타였는지 모릅니다. -글을 쓰는 과정과 작품을 통해 남기려는 메시지를 소개한다면. △젊은 시절 한동안 ‘철근쟁이’로 불리며 현장을 누볐습니다. 철근(鐵筋)을 우리말로 풀어쓰면 ‘힘줄 쇠’ 또는 ‘쇠 힘줄’이 되겠지요. 건축물의 뼈대를 이루는 철근은 단단한 콘크리트 속에 갇혀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를 악용해 부실 공사를 저지르는 이들이 있지만, 결국 수명을 다한 건축물이 철거될 때 끝까지 저항하는 것도 철근의 가닥입니다. 최근까지도 빈번히 들려오는 건물 붕괴 사고 소식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순살 아파트’라는 최악의 신조어가 하루빨리 사라지길 바랄 뿐입니다. -철이란 무엇인가. △인류사에서 가장 필수적이며, 시대별 문명의 척도가 되는 물질입니다. 진흙과 돌이 전부였던 사막 지역에 유입된 신문명은 탱크와 무기 같은 살상용 무기로 변질되기도 했지만, 현지인들 역시 철을 생활 도구로 삼아왔습니다. 선과 악의 경계 없이 활용되는 철이 세계 평화와 인류 공동체의 삶에 올바르게 쓰이길 소망합니다. -좋은 산문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6·25 전쟁 직후 태어난 우리는 험난한 시대를 겪으며 살아왔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을 글로 옮기면 책 몇 권 분량은 된다고 말하지만, 저 역시 살아온 만큼의 이야깃거리만 있을 뿐입니다. 과장하거나 포장하려 들면 겉치레 허울이 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세상사에 대한 푸념이나 넋두리로 흐르지 않으려면 더욱 그렇습니다. 타고난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라, 살아온 경험 자체가 소중한 글감이 된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문학작품의 장점이란 뭐라고 생각하는가? △솔직히 말해 저는 저는 문학 세상에 대해 어둡습니다. 생업에서 물러난 뒤에야 글 읽기와 쓰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창작 수업이나 문학 동호회, 강좌 등에 참여한 적은 없습니다. 특정 문학인과 교류한 경험도 없고요. 다만 글쓰기는 자기 수양의 과정이라 믿습니다. 쓰고 다듬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교정하게 되니까요. 글감은 삶의 관찰력에서 순간 포착되지만, 내용은 정제될수록 빛을 발합니다. 또한 타인의 글은 나보다 뛰어난 이가 썼다는 마음으로 경청하려 합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제 능력의 범위 안에서 겸손하고 이해하기 쉬운 글을 써나갈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말과 글만큼은 부끄럽지 않게 남기고 싶고, 남은 생 동안 기록의 본능을 잃지 않겠습니다. 비록 영원한 늦깎이 습작생으로 남을지라도 말입니다. 청소년부 금상 정희강 군 - “녹슨 철 구조물은 삶 속에 마주하는 위로이자 가능성” “저는 이 글에서 “괜찮아, 넌 충분히 할 수 있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살면서 실패나 실망 앞에 자신을 작고 부족하다 느낄 때도 있지만, 녹슬고 낡은 철 구조물도 제자리를 지키듯 우리 역시 완벽하지 않아도 충분히 버텨낸다는 것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시험 점수나 결과가 전부가 아니라 그 너머의 기억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수상 작품 ‘시험지보다 무거운 철, 그보다 가벼운 웃음’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작품에서 ‘녹슨 철 구조물’은 단순한 놀이기구가 아니라, 실패 속에서도 버티는 우리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상처 입고도 제자리를 지키는 철은 삶 속에서 마주하는 위로이자,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가능성을 상징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철’을 좋아합니다. -놀이터 녹슨 철 구조물이 작품 구상에 도움이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녹슨 철 구조물을 마주했을 때, 실패로 주저앉은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다. 상처 입고도 자리를 지키는 철처럼 저 역시 버틸 수 있다는 위로를 받았고, 이를 글로 표현하고 싶어 작품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정희강 학생에게 문학작품은 무엇인가요. △문학작품은 다양한 인물의 삶과 갈등을 통해 인간의 선택과 그로 인한 후회, 그리고 그 과정을 거쳐 얻는 성장을 깊이 있게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독자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공감하며, 감성과 상상력을 자극받는 동시에 언어적 표현력도 길러집니다. 또한 문학은 시대와 문화를 반영해 사회를 이해하게 하고, 때로는 위로와 치유를 전하며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수상작이 독자들에게 전하는 말은 무엇인가요? △삶에서의 실패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며, 그 순간은 마치 무거운 철처럼 우리를 짓누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실패의 경험조차 시간이 지나면서 녹슬고 흔적으로 남아 결국 우리를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된다는 점입니다. -정희강 학생이 생각하는 좋은 수필이란 무엇인가요. △저에게 좋은 글이란 단순히 문장이 아름답거나 표현이 화려한 글이 아니라, 읽는 이의 마음에 닿아 공감과 울림을 주는 글입니다다.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와 분명한 메시지가 담겨 있어야 하며,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구성과 표현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좋은 글은 읽고 난 후 마음에 무언가를 남기며, 생각을 움직이고 감정을 흔드는 힘을 가진 글이 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바람이나 계획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앞으로 더 많은 글을 작성하고 실력을 더 발전시키는 것이 목표입니다. 발전하는게 목표입니다. 포토에세이부 대상 임기순씨 - “개인주의 팽배와 소통 부재… ‘함께’ 의미 전하고 싶어” “저는 이 글에서 “함께하는 삶”의 의미를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요즘 개인주의가 팽배하면서 공동체가 약화되고, 소통의 부재와 갈등 증가 등 사회적 문제가 심화된 현실 속에서 ‘함께’의 가치가 더욱 절실하다고 느꼈습니다. 옷을 만들 때 없어서는 안 될 바늘도 결국 혼자서는 완성된 작품을 만들 수 없듯이, 우리 사회도 타인을 포용하며 협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상작 ‘어울림의 미학’을 쓰게 된 계기가 있다면. △외출을 앞두고 옷에 단추를 달기 위해 바늘과 실을 찾았는데, 옷에 맞는 색상의 실이 없어 난감했던 경험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바늘이라도 그에 맞는 실이 없으면 멋진 옷을 완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특히 요즘 결혼과 출산을 미루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성공을 우선시 하는 이들에 대한 걱정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였습니다. 결국 ‘혼자서는 완성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담아 아들에게 편지를 썼고, 그 과정에서 제 삶 전체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남기려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이 글은 ‘혼자가 아닌 가정을 이루면서 시작되는 여정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날카로운 바늘(불완전한 혼자)이 실(배우자)을 꿰고 천(자녀, 후손)을 만나야 비로소 진정한 삶이 펼쳐지며, 그 책임감과 더불어 사회생활에서도 ‘진정한 어울림’이 무르익는다는 비유를 담았습니다. 저는 어린이집 원장으로서 일하며, 아이들(바늘)과 교사(천), 학부모(실)가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며 협력할 때 교육의 목표가 달성된다는 것을 체감했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일상 속에서 ‘어울림’의 미학을 실천해 창조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펼쳐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철(鐵)’이란 어떤 소재로 기억되는가. △어린 시절 철은 생활의 근본이자 창조의 상징이었습니다. 어른들에게는 가마솥, 칼, 농기구처럼 살림에 꼭 필요한 물건이었고, 아이들에게는 스케이트나 장난감을 만들고 싶은 간절한 꿈이기도 했습니다. 즉, 철은 삶의 기반을 다지는 동시에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픈 열망이 담긴 소재였습니다. 지금도 철은 거대한 건축물부터 미세한 의료기기까지, 모든 창작물의 핵심 뼈대로서 그 가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 좋은 글이란 어떤 것일까? △독자에게 공감과 성찰의 기회를 주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려한 수사보다는 보편적인 소재와 경험 속에서 삶의 진리를 발견하고, 이를 진솔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독자가 글을 읽으며 “내 삶도 그렇다”고 공감하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글의 조건이 아닐까요? -문학 작품의 장점 또는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문학은 일상의 경험을 예술로 승화시켜 타인의 마음에 울림을 전하는 힘이 있습니다. 마치 철이 생활 속에서 빛을 발하듯, 문학은 개인의 내면을 풍요롭게 하고 사회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갈고닦아 독자와 공유하며, 독자는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문학이 지닌 가장 큰 가치이자 힘이라고 믿습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 △이번 수상은 제게 큰 격려이자 동시에 더 나은 글을 써야 한다는 책임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앞으로도 평범한 일상 속에서 발견한 소중한 가치를 독자들과 나누며, 따뜻하고 진실한 글로 소통해 나가겠습니다. ‘어울림의 미학’을 주제로 한 작품 활동을 지속하며, 독자들이 삶의 의미를 재발견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0-26

“기술과 사람을 잇는 ‘스마트 오퍼레이터’로 성장하고파”

냉연 소둔 공정, 철 속의 피로를 풀어주는 과정···‘완성된 철’이 되기전 마지막 단계 고온과 고압이 공존하는, 품질과 안전 동시에 요구되는 현장··· 높은 긴장감의 연속 - 자기소개를 해달라. 나는 포항제철소 냉연부 연속 소둔 공정에서 오퍼레이터로 근무하고 있는 6년 차 박성식 사원이다. 사람이 계속 움직이다 보면 피로가 쌓이듯, 철도 마찬가지다. 나의 담당인 냉연 소둔 공정은 쉽게 말하면 단단한 철 속에 남은 피로를 풀어주는 과정이다. 철이 여러 차례 가공을 거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긴장, 즉 내부 응력이 생기는데, 이 상태로 두면 철은 쉽게 깨지고, 원하는 형태로 가공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요리사가 재료 온도를 조심스레 조절하듯, 철을 일정한 고온으로 천천히 달궜다가 식히며 숨을 돌릴 수 있도록 돕는다. 이 과정을 통해 철은 다시 유연함을 되찾고, 세상 곳곳에서 새로운 형태로 태어날 준비를 마친다. 나는 냉연 연속 소둔 공정의 오퍼레이터로, ‘완성된 철’이 되기까지의 마지막 단계를 맡고 있다. 특히 내가 살피는 것은 단순히 기계가 아니라, 철의 성질을 결정짓는 온도와 압력의 균형이다. 소재마다 두께, 폭, 재질이 다르기 때문에 그에 맞는 조건들을 세밀하게 조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철이 너무 뜨겁거나 식으면 품질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수많은 데이터와 센서값을 바탕으로 설비를 운용하며 최적의 상태를 유지한다. 작은 오차도 품질에 직결되기 때문에, 철의 숨결을 읽고 → 변화를 감지하고 → 사람의 감각으로 완성하는 일을 하는 ‘철의 컨디션을 조율하는 조율사’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업무 현장과 팀을 소개한다면? 내가 근무하는 연속 소둔 공정은 고온과 고압이 공존하는, 품질과 안전이 동시에 요구되는 현장이다. 매 순간 정밀한 제어와 신속한 판단이 요구되며, 높은 긴장감 속에서 일한다. 그 속에서 내가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사람’이다. 현장은 언제나 엄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엄격함은 통제가 아니라 서로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배려에서 비롯된다. ‘동료의 안전이 곧 나의 안전’이라는 책임감이 우리 팀의 기본이다. 소둔 공정에서 가장 긴박한 순간은 ‘판 파단’이다. 철판이 찢어져 공정이 중단되는 상황인데, 그때마다 팀원들은 자신보다 서로를 먼저 챙긴다. 상황이 발생하면 누구보다 빠르게 파트장님께서 현장을 진두지휘하고, 과장님들이 앞장서 가스 절단기로 불량 부위를 제거한다. 판단이 빠른 대리님들은 스위치를 잡고, 나머지 팀원들은 제거한 부위를 함께 옮긴다. 위험한 순간일수록 선배들이 먼저 앞에 선다. 후배들은 그런 선배들의 뒷모습을 보며 배우고, 대응 절차와 안전 절차를 몸으로 익힌다. 이것은 누가 정해준 규칙이 아니라,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약속이다. 서로의 안전을 지키는 방식이 곧 우리 팀의 문화이며, 나는 그것이 우리 팀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 포스코에 입사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우리 가족은 포스코와 오랜 인연이 있다. 할아버지는 당시 포항제철의 스크랩을 받아 판매하셨고, 어머니는 제철소 인근 산업 폐기물 처리업체에서 근무하셨다. 어린 시절부터 포스코는 나에게 가까이 있으면서도 이루고 싶은 큰 목표였다. 학창 시절, 친구들의 부모님이 포스코에 다닌다고 하면 가정이 안정적이고 든든해 보이고는 했다. 포스코 산업 단지로 가득한 도시 포항에서, 그들은 단순한 직장인이 아니라 도시 경제와 산업을 움직이는 중심핵으로 여겨졌고, 나 또한 언젠가 그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키워오게 되었다. 이처럼 입사를 결심한 이유는 단순한 동경을 넘어선다. 포스코는 세계 철강 산업을 선도하며 혁신적인 제철 공법과 저탄소 기술을 통해 ‘철을 넘어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 또한 포스코는 나의 가족의 발자취를 잇는 동시에 내 삶을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내 두 번째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입사 후 가장 도전적이었던 순간이라면? 포스코는 단순한 일터가 아니라, 현장에서 배우고 성장하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고, 그만큼의 성취를 느낄 수 있도록 시스템과 문화가 뒷받침되어 있다. 내 회사 생활은 순항보다는 파도 타는 법을 먼저 배운 시간이었다. 입사 후 첫 회식 날, 초년생이었던 나는 낯선 사회생활이 두려워 회식 도중 눈물을 흘린 기억이 있다. 하지만 따뜻한 위로와 배움을 주는 좋은 선배들을 만나, 조금씩 일어서며 나의 첫 일터에 차츰 익숙해졌다. 특히, 되돌아보면 신입사원 OJT 발표대회에서 운 좋게도 전사 1등을 해 제철소장 표창을 받았을 때가 처음으로 큰 성취감을 느끼던 순간이었다. 반면 업무에 열중했던 나머지 허리 건강이 나빠져 크게 고생한 적도 있다. 그런 굴곡 있는 회사 생활 기간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QSS 개선리더’ 활동이었다. 당시 공장별로 QSS 개선리더가 1명씩 선발되어 각각 팀을 꾸렸고, 공장별 지정된 섹터의 설비 개선과 안전 향상을 목표로 활동했다. 나 또한 4개월간 개선리더로서 팀원들과 함께, 공장 내 코일 이송 설비의 성능 복원과 개선을 목표로 활동했다. 일부 부식된 설비가 있었기에 초기 활동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팀원들, 그리고 유관 부서와 협동심을 발휘한 덕에 냉연부 대표로 전사 성과공유회에 진출할 수 있었다. 제철소장님과 임원분들 앞에서 성과를 발표했을 때의 그 긴장감과 성취감은 지금도 선명하다. 그 노력의 결실로 우리 팀은 당시 50기 QSS개선리더를 대표해 생산기술본부장 표창을 받았다. 이 경험을 통해 팀워크가 단순한 협력을 넘어, 서로의 신뢰와 연대가 있을 때 더 큰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또한 다양한 상황들 앞에서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었고, 이는 나를 진정한 포스코인으로 성장하게 한 중요한 과정이었다. - 포항제철소에서 일하면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있는지. ‘영보드(Young Board)’ 위원으로 선발되어 1년간 활동했던 적이 있다. 영보드는 포스코의 젊은 구성원들이 회사의 방향과 내부 정책에 대해 자유롭게 제안하고 소통의 자리를 갖게 해주는 제도이다. 특히, 자주 만나기 어려운 광양제철소와 서울 본사 동료들과 의견을 나누며 색다른 소통을 경험할 수 있었던 점이 인상 깊었다. 경영 업무, 수출 업무, 연구 부문 등 서로 다른 분야의 이야기를 들으며 시야가 넓어졌고, 회사 전체를 바라보는 관점도 생겼다. 특히, 영보드 활동 중 포항 영일대 청송대에서 사장님과 직접 만나 식사하며 대화를 나눴던 시간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그때, 거대한 조직에서도 구성원 한 명 한 명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진정성 있는 리더십을 배우기도 하였다. 이처럼 영보드 활동을 통해 현장의 제안이 정책으로 반영되는 과정을 직접 경험하며, 한 사람의 생각도 조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이 활동은 단순한 제언 프로젝트가 아니라, 소통과 공감, 그리고 실행의 힘을 배우는 시간이었고, 영보드로서 현장과 경영진을 잇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며 더 나은 회사 문화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 자신이 생각하는 회사의 자랑거리는 무엇인지. 나는 회사 복지 중에서도 시즌별로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휴양 시설을 가장 좋아한다. 여름이면 가족과 친지들과 함께 월포 수련원을 찾곤 한다. 깨끗한 시설과 세심한 서비스 덕분에 갈 때마다 괜히 어깨가 으쓱해진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 포스코 수련원에 다녀오는 가족들을 부러워하셨던 기억이 있다. 이제는 내가 직접 어머니를 모시고 그곳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참 뿌듯하다. 가끔은 친구들이 “같이 갈 건데 예약 좀 해달라”며 부탁하기도 한다. - 국내 철강업계의 미래를 책임질 세대로서, 앞으로 어떤 변화나 발전을 기대하는지. 내수 둔화, 수출 관세 압력, 전력 비용 상승 등 복합적인 위기가 현장에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실제로 일부 생산 계획 축소로 실적이 줄고, 현장 흐름이 일시적으로 끊기기도 한다. 이러한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크게 거창한 무엇이 아닌 각자의 위치에서 공정과 업무의 효율성을 한층 높이는 일이라 생각한다. 나는 부서 내 주임님들을 보며 그 태도를 배우고 있다. 주임님들은 ‘현장에서 산다’라고 말씀하시며, 누구보다 현장을 가까이서 보고 느끼고 이해하신다. 또 늘 작은 불편함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개선할 점과 효율화 방안을 직접 제안하신다. 이처럼 현장을 이해하고 문제를 발견하며 함께 개선하는 힘이야말로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며, 내가 그리고 싶은 포스코인의 비전이라 생각한다. 나 또한 현장의 작은 변화가 결국 회사의 큰 혁신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이 있기에 앞으로도 단순히 설비를 ‘운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장을 데이터로 읽고 안전하고 효율적인 공정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 - 앞으로의 포부나 이루고 싶은 목표는? 세상 물정 모르던 스물넷에 포스코에 입사하면서, 내 인생의 두 번째 챕터가 시작됐다. 그저 사회활동을 시작한다는 마음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곳은 나를 사회인으로 그리고 한 사람의 어른으로 만들어 주었다. ‘결혼이나 할 수 있을까?’ 싶던 내가 이제는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고, 내년 4월이면 아빠가 된다. 요즘 들어 책임감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실감하며, 가정을 꾸리고 이끌어가는 선배들이 새삼 다르게 보인다.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현장에서는 실무자의 책임 의식을 갖고 굳건함을 유지하는 선배님들을 보며 내 미래를 그려보고는 한다. 나는 변화하는 현장 속에서도 안전을 가장 앞에 두는 오퍼레이터로 성장하고 싶다. 나부터 안전해야, 동료도, 가정도, 회사도 지킬 수 있다. AI와 자동화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현장의 본질은 결국 ‘사람’이라 생각한다. 기술은 안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을 지켜주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더욱이 기술과 사람을 잇는 ‘스마트 오퍼레이터’로 성장하고 싶다. 회사 내 유능한 동료들과 함께 기술이 사람의 안전을 보조하는 환경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 현장을 스마트하면서도 인간적으로 만들어가는 오퍼레이터가 내가 그리고 싶은 ‘나’이다. 끝으로 이렇게 인터뷰 기회를 통해,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내가 걸어온 길을 다시 한번 되짚을 수 있었고,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일해야 할지 되새길 수 있었던 시간이 된 것 같다. 좋은 기회 주어 감사하다. 포스코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맡은 바 자리에서 꾸준히 성장해 나가겠다. /김진홍경제에디터 kjh25@kbmaeil.com

2025-10-26

2025 포항철강산업대전·스틸에세이 수상자 및 수상 소감

제 13회 철강산업대상 수상자 철강 히어로 상 - (주)디에스아이 김윤수 대표이사 김윤수 대표이사는 철강산업 기반 중소기업의 기술 자립과 국산화를 선도하는 한편, 부산물 재활용을 통한 환경개선으로 지속적인 일자리 창출에 앞장섰다. 또한 포항 철강산업 생태계의 상생과 협력, 안전문화 확산은 물론, 방산과 철강 융합기술 개발을 통해 지역 제조업의 경쟁력 강화에 기여했으며, 사회공헌 활동을 통해 지역사회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소감 이처럼 영예로운 상을 받게 되어 송구하며, 관계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번 수상은 철강산업의 기술자립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모든 철강인과 관계기관의 노고에 대한 격려라 생각합니다. 비록 대외 여건이 어려운 시기지만, 지혜와 협력으로 철강산업이 다시 부흥의 길로 나아가리라 믿습니다. 앞으로도 기술혁신과 상생, 책임경영의 가치를 실천하며 대한민국 철강산업의 위상을 높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철강 프런티어 상 - 엠에스파이프(주) 박력 대표이사 박력 대표이사는 수출국 다변화와 기업의 안정적 성장 기반을 마련하는 한편, 기술력 강화에 힘써 글로벌 경기 침체와 미국의 철강 고관세 정책 속에서도 매출 성장세를 이어갔다. 신기술·신제품 개발에 적극 나서 회사는 물론 국내 철강산업의 수출 경쟁력 강화를 이끌었고, 이를 통한 지역 경제 활성화와 산업 발전에 기여한 점이 높이 평가된다. 소감 수상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세계 경기 침체와 무역 장벽으로 철강업계 모두가 어려운 시기이지만, 이번 상을 수출 기업에 대한 격려와 기대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앞으로도 우수한 품질의 한국산 철강이 해외 시장에서 더욱 안전하게, 더 널리 사용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한 더 넓은 세계에서 인정받는 철강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동반성장 상 - (주)세아제강 홍만기 대표이사 홍만기 대표이사는 ‘협력사의 경쟁력이 곧 기업의 경쟁력’이라는 확고한 동반성장의 철학 아래, 상생과 협력을 기반으로 한 건강한 철강 생태계 조성에 힘써왔다. 또한 협력사에 대한 실질적 지원을 확대하고, 투명하고 상시적인 소통을 통해 공정하고 신뢰 높은 기업문화를 정착시켜 국내 철강산업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동반성장 모델 확립에 기여했다. 소감 2025 포항철강산업대상 동반성장상을 수상하게 되어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는 헌신적으로 동행해주신 협력사 여러분과의 상생 협력, 그리고 사회적 책임의 실천으로 지역 사회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한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상생을 통한 건전한 동반 성장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앞장서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산업통상자원부장관상 - 현대종합금속(주) 김용덕 대표이사 김용덕 대표이사는 투철한 직업관과 안전의식을 바탕으로 무사고·무재해 사업장을 조성해 산업재해 예방에 공헌하며 공정안전관리(PSM) 우수사업장으로 ‘S’등급 인증을 획득했다. 평소 노사 간 소통을 통한 신뢰를 기반으로 상생의 노사문화를 실천하는 한편, 책임 있는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에도 앞장서며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기업문화를 구현했다. 소감 “ 자기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해준 현대종합금속 임직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대내외 어려운 경제 환경 속에서도 노사화합과 신제품 개발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 기업 경쟁력 확보에 힘쓴 결과, 매출 증대와 고용 안정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 지역을 대표하는 기업, 지역에 기여하는 책임있는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경상북도지사상 - 동국산업(주) 박종결 팀장 박종결 팀장은 체계적인 안전보건관리시스템을 구축하여 안전보건 의무 이행 상태를 상시 점검하고, 아차사고 제안제도 등을 운영해 예방활동을 강화함으로써 중대재해 방지에 힘썼다. 본사·현장 합동 순회점검을 통한 위험요인 개선을 주도했으며, 타 사업장의 중대 재해 사례를 공유해 재발 방지 대책 수립과 전사적인 안전문화 정착에 기여했다. 소감 “안전이 최우선 핵심가치”임을 비전으로 삼고 사업장의 다양한 유해∙위험요인을 발굴하고 개선조치를 시행한 결과, 산업재해율이 전년 대비 현저히 감소했습니다. 안전 관련 모든 구성원의 관심과 참여를 바탕으로 자기규율체계 고도화하여 지속가능한 무재해 사업장을 실현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에 헌신한 관리·감독자들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포항시장상 - (주)광우 신현민 수석팀장 신현민 수석팀장은 근면성과 책임감을 바탕으로 맡은 직무에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수행함으로써 매출 증대와 생산성 향상은 물론, 원가 절감에도 크게 기여했다. 꾸준한 기술개발과 솔선수범하는 봉사정신은 동료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지역사회 공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기업의 성장에만 몰두하지 않고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상생과 동반 발전에 힘썼다. 소감 어려운 대외 여건 속에서 매출 감소 위기에 직면했으나, 무엇보다 고객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고객만족도 향상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고객사도 이러한 노력과 기술개발 의지를 적극 지지 협력함으로써 매년 성장을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고객과의 협력과 공동의 위기극복 자세로 제품개발, 품질향상, 원가절감을 위해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김진홍경제에디터 kjh25@kbmaeil.com 제9회 스틸에세이 공모전 - 인간적 온기 소재 진상용 씨 ‘청동 낙타, 한마리’ 대상 전국서 모인 스틸과 관련한 추억 담긴 수필 작품 600여 편 출품 일반 진상용 대상·청소년 정희강 금상·포토에세이 임기순 대상 경북도, 포항시가 주최하고 경북매일신문이 주관하는 철(스틸·steel)을 소재로 한 창작 문학작품 공모전 ‘스틸에세이 공모전’ 제9회 수상자들이 결정됐다. 제9회 스틸에세이 공모전 심사위원회는 지난 15일 심사를 진행, 진상용(72·인천시 부평구)씨가 응모한 수필 ‘청동 낙타, 한마리’를 대상작으로 선정했다고 24일 밝혔다. 일반 부문 대상 작품 ‘청동 낙타, 한마리’는 중동 건설 현장에서 철근공으로 일하며 동료와 쌓은 유대감과 전쟁 속 인간적 온기를 청동 낙타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란 벼룩시장에서 나눈 낙타 한 쌍은 황무지를 오아시스로 바꾸는 희망의 상징으로, 철근 작업과 대비돼 인간 내면의 순수함을 드러낸다. 제목은 물질적 유산 대신 정서적 연대를 강조하며, 개인적 경험을 역사적·사회적 보편성으로 확장한 점에서 높이 평가받았다. 금상은 김용수(포항시 북구 흥해읍)씨의 ‘철근 더미에서 일궈낸 금메달’, 은상은 정현우(포항시 북구 죽도동)씨의 ‘그 녹을 걷어내도’, 동상은 신명순(경기도 여주시 산북면)씨의 ‘철, 따뜻한 숲의 재생을 꿈꾸다’, 차민채(서울시 서초구 서초동)씨의 ‘뜨겁게’ 등이 최종 수상작으로 각각 결정됐다. 가작은 백브리가(서울시 마포구 연남동)·김병윤(제주도 제주시 노형동)·김유환(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차성환(포항시 북구 두호동)씨가 뽑혔다. 청소년 부문 금상을 수상한 정희강(포항영신중 1년) 학생의 ‘시험지보다 무거운 철, 그보다 가벼운 웃음’은 놀이터의 녹슨 철 구조물이 흔들리면서도 제자리를 지키는 모습에서 자신의 불완전함을 직시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다짐을 학생다운 시선으로 담아내며 성찰적이고 단단한 울림을 전하는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은상은 조준호(경기도 분당대진고 2년) 학생의 ‘모루의 기억’, 동상은 박지민(대구 천내중 3년) 학생의 ‘가장 따뜻한 온도의 주전자’, 김단아(충남여중 1년) 학생의 ‘세상의 모든 경첩들에게’ 등이 최종 수상작으로 각각 결정됐다. 가작은 진주한(포항 대동중 1년), 김태민(포항 대동중 1년), 권태훈(포항 대동중 1년) 학생이 뽑혔다. 포토에세이 부문 대상의 영예를 안은 임기순(62·대구시 달성군 화원읍)씨의 ‘어울림의 미학’은 사진과 글이 조화를 이루며 관계가 엮이는 삶의 방식을 따뜻하게 담아냈고, 시각적 메시지와 서사의 깊이를 모두 갖춘 작품으로 호평받았다. 금상은 김미옥(대구시 동구 반야월)씨의 ‘너와 나의 시간’, 은상은 김은희(포항시 남구 대잠동)씨의 ‘신생의 얼굴’, 동상은 정미영(포항시 북구 흥해읍)씨의 ‘철 위에 새겨진 땀’, 황보민준(포항 영신중 3년)군의 ‘자전거 체인’ 등이 최종 수상작으로 각각 결정됐다. 가작은 장병연(경기도 과천시 원문동)·이은정(포항시 남구 오천읍)·문시화(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상동)·곽동근(서울시 성동구 금호동)씨가 뽑혔다. 포항스틸에세이 공모전은 현대문명의 상징이자 한국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돼온 철강산업의 소중함을 함께 나누고 재도약을 기원하기 위해 마련한 전국 유일의 철(鐵·Steel)을 소재로 한 수필 작품 공모전이다. 포항시·경북도 주최, 경북매일신문 주관으로 치러진 공모전은 올해가 아홉 번째다. 지난 7월 21일부터 9월 30일까지 국내외 거주자를 대상으로 미발표된 순수 창작품을 접수한 올해 공모전에는 경북을 비롯 서울, 강원 등 전국에서 스틸과 관련한 추억이 담긴 수필 작품 600여 편이 출품돼 △일반부 대상 1점, 금상 1점, 은상 1점, 동상 2점, 가작 4점 △청소년부 금상 1점, 은상 1점, 동상 2점, 가작 3점 △포토에세이부 대상 1점, 금상 1점, 은상 1점, 동상 2점, 가작 4점 등 모두 25점이 입상의 영예를 안았다. 심사위원회는 “수상작들은 차가운 금속의 이미지를 인간적 이야기로 재해석해 일상의 소중함을 담아낸 훌륭한 작품들로 평가받았다”며 “삶을 치열하게 마주하며 글을 써낸 모든 참가자들의 작품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단단한 울림으로 남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제 9회 스틸에세이 대상 수상 작품 ■ 제9회 스틸에세이 일반부 대상 수상 작품 - 진상용씨 ‘청동 낙타, 한 마리‘ 이룬 것도 없이 일흔 줄의 나이, 생업 일터에서 물러나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가사의 절반을 맡고 있다. 재활용품 분리수거일을 앞두고 집 청소 겸, 생활용품 정리를 시작했다. 자식들 모두 가정을 이루어 나가고 부부만 있다 보니 살림을 줄이게 되는 시기, 쓸모 없어져 내다 버릴 것과 챙겨둘 것들 구분을 두고 생각이 서로 달라 갈등을 빚기 일쑤다. 둬봤자 거추장스러울 뿐이라서 아내 모르게 처분한 것도 꽤 있다. 베란다 안쪽 구석을 정리하던 중, 폐품 더미 속에서 심하게 녹슨 청동 주물 낙타를 발견하였다. 수십 년 전, 수천수만 리 밖의 머나먼 땅에서 왔고 수십 번 옮겨 다닌 이삿짐에 악착같이 따라다니다가 기억에서조차 잊힌 기념품, 금붙이는 아니더라도 잡철보다야 값 낫게 쳐주는 쇠붙이이니 고물상에다 넘기려고 따로 모아두었으리. 1980년대 초, 건설회사 철근 직종으로 해외 취업한 곳은 이라크 북부의 키르쿠크였다. 유프라테스강물을 황무지로 끌어들여 농지화하는 관개수로 공사 현장, 미리 들은 바 있어 단단히 각오하고 왔지만 맞닥뜨린 현실 앞에선 지레 주눅 들고 만다. 잉걸불 태양은 아래 세상 모든 걸 불쏘시개 삼아 태워버릴 기세요, 혹독한 대기 온도 때문에 들숨 날숨마저 괴로울 지경, 지평선 끝에서 내달려온 열풍과, 대지를 뒤덮은 황사와, 갈가마귀 떼 그늘조차 만날 수 없는 극한의 자연환경 속에서 모든 생명들은 절로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각종 공구를 챙긴 다음 허허벌판에 야적된 철근 더미 앞에 마주 선다. 고국의 어느 철강회사에서 생산돼 해양선박으로 터키의 항구에 도착한 뒤, 육로로 운송된 국산 쇳가락들은 나와 비슷한 시기에 떠나온 처지라 반가우면서도 애틋하다. 설계 도면대로 철근을 절단하고, 규격에 맞춰 가공과 배근한 다음 결속선으로 묶어 조립해 나간다. 건축물의 뼈대이자 힘줄 쇠(鐵筋)를 용도에 맞춰 다뤄야 하므로 온몸 근육을 일으켜 세워야 감당될 만큼 노동 강도가 세지만, 그렇다고 완력만으로 상대하려 들면 안 된다. 무거운 데다 땡볕에 달구어진 걸 만지다 보니 물집이 잡혔다 터진 손바닥이 덧나며, 아물며, 굳은살은 점점 단단해진다. 거대 공룡의 골격 같은 철근 구조물이 서서히 모습을 갖춰가고, 최종 작업 끝냈을 때의 성취감. 어떤 ‘쟁이’인들 자기 손끝으로 만든 것들에 대해 나름의 자긍심이 없으랴마는 내 열정 다 쏟아부은 작품이라 더 멋져 보이고, 조감도 없이도 완공 후의 전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숙소 캠프는 물론, 현장엔 장갑차며 대공포 진지를 갖춘 수백 명의 군 병력이 24시간 경비를 해주고 상황이 악화하면 중무장한 탱크들이 이동 대열 앞뒤에서 호위한다. 전쟁 상대국인 이란의 공격도 막아야 하지만 빈발하는 내전 때문이다. 이 지역 토착 종족인 쿠르드 민병대가 자치 독립을 요구하며 대정부 압박 차원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납치 살상, 중장비 방화, 공사 방해 등의 테러를 저지르곤 하니 우리 역시 그들에 대한 인식이 좋을 리 없다. 그날 우리 철근 작업조 몇 사람이 구조물 작업을 위해 수십km 떨어진 현장으로 가게 됐는데 버스에서 식수통을 내려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한번 지나간 순환버스는 점심때나 돼야 들른다. 열풍은 점점 뜨거워지고 혀가 타들어 가는 갈증을 견뎌낼 재간이 없다. 꽤 떨어진 곳에 현지인 가옥이 보였고 현장 막내인 내가 그리로 향했다. 진흙집 안엔 검은 천을 두른 여인이 아궁이 앞에 앉아 뭔가 끓이는 중이다. 변변한 부엌살림도 없는 어둡고 좁은 공간, 그을음 찌든 주전자를 황토 화덕에 얹어놓고, 말린 가축분뇨를 밑불 삼아 온 정성을 쏟는 안주인의 주름진 얼굴. 손짓발짓으로 물을 얻어 현장으로 돌아온 나는 휴식 시간을 이용해 작업하고 남은 자투리 철근을 자르고 구부리고 결속해서 도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현재 있는 거라곤 철근토막뿐이고, 내가 가진 재주라곤 철근 다루는 기술밖에 없다. 어머니가 숯불화로 위에 뚝배기 얹어 끓이던 구멍쇠를 떠올리며 화덕에다 걸쳐놓기 좋도록 기능과 모양을 여러 차례 바꾸고서야 그럴듯한 아궁이용 석쇠가 완성되었다. 빈 물통과 함께 내 솜씨 몽땅 바친 철물을 가져다주었다. 차도르 사이로 고마워하는 진심의 눈빛이 보인다. 얼마 뒤, 여인이 주전자와 컵을 쟁반에 받쳐 들고 온다. 현지어로 ‘챠이’인 홍차다. 내가 만들어준 석쇠 덕분에 조금이나마 끓이기 편해진 데 대한 고마움의 표현일까. 이열치열이라곤 해도 한여름 사막의 뜨거운 음료가 고마울 리 없지만 그들의 손님 대접 문화인 걸 알기에 여럿이 돌아가며 후룩후룩 다 마셨다. 오후 쉴 참에도 난 사막 살림에 편리할 몇 가지 간단한 부엌 기구를 더 만들어 건네줬고 노파는 집 뒤 대추야자와 텃밭의 방울토마토를 새참 시간 맞추듯 내왔다. 작업이 끝날 때까지 여러 날을···. 소외된 곳일수록, 핍박당해 온 사람들일수록 본성은 순수하다. 늘 점령군만 보아왔음에도 낯선 우리를 반갑게 대한다. 착취자가 아니라 도움 주러 왔다는 생각에 더 그럴 것이다. 이곳은 쿠르드족의 거주지역이고 가족이나 친인척, 지인 중의 누군가는 반군일지도 모르지만 참 평화로운 정경이다. 인간 한계의 시험장처럼 혹독한 땅일지언정 자신들의 조국이기에 목숨 걸고 지키며 살고 있는 그들, 이방인인 우리도 거기 적응하고, 땀방울로 사막을 적시면서 애증의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지상 어느 곳, 기후 차이가 얼마든 사람 체온은 36.5℃임을 실감하면서. 공정 순서대로, 가장 먼저 일을 시작한 철근공은 손도 일찍 떼지만 인력 수급이 쉽지 않은 현지 사정상 계약 기간에다 2년 연장근무까지 해서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귀국을 앞두고 동료와 마지막 쇼핑을 나갔다. 전쟁 중인 나라라서 썰렁한 시장 모퉁이에 펼쳐놓은 벼룩 장터, 초라한 행색의 현지인이 내놓은 낙타 한 쌍이 눈에 들어온다. 흥정 없이 구매한 뒤 동료와 하나씩 나눠 가졌다. 사철 흐르는 ‘인공의 강’ 덕분에 불모의 사막이 푸른 오아시스로 바뀌는 미래를 상상하며 귀국길에 올랐고, 수십 년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사는 중간에 연락이 끊어진 동료와 다른 낙타 한 마리는 잘 있을까. 이미 용광로에 들어가서 이 땅의 무엇으로든 재생되었을지도 모를 일. 철 수세미로 낙타 몸통을 정성껏 닦는다. 푸른 녹이 벗겨지고 본디 색깔 서서히 드러난다. 내세울 것 별로 없는 내 이력서 한 칸 증명해 줄 청동 낙타를 장식장 선반 맨 윗칸에다 자리 잡아준다. 움푹 눈 슬퍼 보이지만, 입은 빙긋이 웃고 있다. ■ 청소년부 금상 수상 - 정희강(포항영신중학교 1학년) ‘시험지보다 무거운 철, 그보다 가벼운 웃음’ 시험지를 내던 순간, 손끝이 덜덜 떨렸다. 계산 과정이 빼곡히 적힌 종이는 결국 오답으로 가득했다. 교실 문이 철컥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며 마음을 짓눌렀다. 머릿속이 텅 비고, 온몸이 무거운 철덩이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려던 발걸음은 이상하게도 방향을 바꾸었다. 무의식처럼 향한 곳은 오래전에 친구들과 웃으며 놀던 녹슨 놀이터였다. 기억 속의 철 구조물들이 나를 불러내는 듯했다. 놀이터에 들어서자, 삐걱거리는 그네와 벗겨진 페인트가 눈에 들어왔다. 한때 반짝이던 철봉은 이제 붉은 녹이 스며들어 있었다. 미끄럼틀의 표면은 갈라진 금속 결처럼 거칠었고, 철제 울타리는 휘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낡음 속에서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완벽했던 기억이 아니라, 상처 입고 변한 모습이 오히려 지금의 나와 닮아 있었다. 실패의 흔적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철이, 내 마음을 대신 말해주는 듯했다. 나는 조심스레 철봉을 잡았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냉기는 순간적으로 정신을 맑게 했다. 그 철은 예전에도 분명 차가웠을 텐데, 어린 시절에는 그 차가움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저 오르내리며 몸을 흔드는 재미에 빠져 있었을 뿐이다. 지금은 그 차가움이 현실의 무게처럼 다가왔다. 시험, 성적, 기대. 어릴 적에는 몰랐던 쇳덩이 같은 단어들이 마음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철봉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철은 강하지만 영원하지 않다. 시간 앞에서는 녹슬고 갈라진다. 그러나 그 흔적조차 하나의 무늬가 된다. 나는 철의 그 상처에서 묘한 위로를 받았다. 시험에서 실패했다고 해서 내 삶 전체가 무너지는 건 아니었다. 녹슨 철이 여전히 구조를 버티고 있듯이, 나도 버틸 수 있었다. 철의 단단함과 녹의 연약함이 공존하는 모습은 마치 인간 같았다. 나는 그 사실을 철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네에 앉아 발을 굴렀다. 삐걱거리는 체인이 내 몸을 위아래로 흔들며 낡은 철문이 열리듯 소리를 냈다. 어릴 때는 그 소리가 음악 같았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기분을 주었다. 지금은 어쩐지 내 마음을 두드리는 위로의 종소리 같았다. 쇠사슬이 오래되어 불안정해 보였지만,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었다. 마치 불완전한 나를 지탱하는 힘처럼. 나는 눈을 감고 바람을 맞으며, 그 삐걱임에 몸을 맡겼다. 햇살이 놀이터 철골 사이를 뚫고 들어왔다. 금속에 부딪힌 빛이 반짝이며 녹과 함께 빛났다. 누군가 보기에 낡고 버려진 풍경일지 몰라도, 내 눈에는 살아 있는 듯 보였다. 시험의 실패로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조금씩 풀어졌다. 금속에 부딪히는 빛은 마치 내 안에도 아직 가능성이 있다는 듯 신호를 보냈다. 철이 빛을 머금듯, 나도 새로운 의미를 품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철은 단단해서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서서히 약해진다. 그 모습이 지금의 나와 닮아 있었다. 완벽할 거라 믿었던 자신감이 조금씩 녹슬고 있었다. 그러나 철이 녹이 슬어도 제 자리를 지키듯이, 나 또한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강함은 완벽에서 오는 게 아니라, 오래 버티는 데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놀이터의 철 구조물은 그 단순한 진실을 묵묵히 가르쳐주고 있었다. 그네를 매달고 있는 철사 줄을 올려다보았다. 곳곳이 갈라져 있었고, 금속이 닳아 있었다. 아이였을 땐 그 위태로움조차 모르고 하늘 끝까지 올라가려 했다. 지금 다시 타보니, 그 위태로움이 삶과 닮아 있었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불안정 속에서도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철사 줄은 삐걱대며 흔들리지만 여전히 나를 지탱했다. 그 불안정한 버팀이, 오히려 더 진실하게 느껴졌다. 놀이터 한쪽에는 쓰러진 철제 울타리가 있었다. 그 위에 누군가 분필로 낙서를 남겨 두었다. “웃어라.” 단순한 두 글자가 녹슨 철판 위에 하얗게 새겨져 있었다. 낡은 철과 대비되는 그 글씨는 오히려 선명했다. 시험지의 붉은 X표보다 훨씬 힘 있는 문장이었다. 웃으라는 명령은 억지 같지만, 그 순간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녹슨 철이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지만 진심이었다. 나는 미끄럼틀 꼭대기에 올라섰다. 철제 계단은 삐걱이며 불안정했지만, 발을 내디딜 때마다 익숙한 기억이 따라왔다. 꼭대기에 서니, 작은 놀이터가 세상을 내려다보는 무대처럼 보였다. 철판은 여전히 차갑고 불편했지만, 그 위에 앉아 바람을 맞으니 마음이 환해졌다. 아이처럼 두 손을 벌리자 실패의 무게도 바람결에 흩날렸다. 철은 그대로인데, 그 위에서 바라보는 나는 변해 있었다. 시험 점수는 종이 위의 숫자로만 남는다. 잉크로 새겨진 그 숫자는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 그러나 놀이터의 철 구조물은 차갑지만 따뜻하게 다가왔다. 같은 금속인데도, 하나는 나를 억누르고 하나는 나를 품어준다. 나는 그 차이를 손끝으로 느끼며 앉아 있었다. 시험이 나를 규정하는 철장 같았다면, 놀이터의 철은 나를 기억 속 자유로 이끌었다. 그것만으로도 숨통이 조금 트였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녹슨 볼트를 주워 들었다. 작고 쓸모없어 보였지만, 한때 거대한 구조물을 지탱하던 힘의 일부였을 것이다. 작아도 버팀목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 나 역시 지금은 실패에 눌려 있지만, 언젠가 누군가의 버팀목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볼트를 주머니에 넣으며 다짐했다. 철이 완벽하지 않아도 제 역할을 하듯, 나도 내 자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 놀이터 철봉 위에 새겨진 이름들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지나 글씨는 희미했지만, 여전히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어린 날의 우리도, 그곳에 존재했다는 증거였다. 시험 점수는 사라져도, 이런 흔적은 오래 남는다. 철이 기억을 붙잡아 두듯, 놀이터는 내 안의 웃음을 붙잡아 주었다. 나는 그 흔적들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잊고 있던 나의 일부를 되찾는 기분이 들었다. 해가 기울며 철 구조물들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그림자 속에서 나는 여전히 작은 아이처럼 느껴졌다. 실패도, 성적도, 미래도 잠시 멀어졌다. 녹슨 철 놀이터는 내게 두 가지 얼굴을 보여주었다. 하나는 차갑고 낡은 현실의 흔적, 다른 하나는 여전히 나를 품는 따뜻한 기억의 그릇. 나는 그 두 얼굴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놀이터를 떠나려 할 때, 철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닫혔다. 마치 나를 보내기 싫다는 듯한 소리였다. 그러나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실패는 철처럼 무겁지만, 시간 속에서 녹슬어 흔적이 될 것이다. 그 흔적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철 놀이터가 버텨왔듯, 나도 버틸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 철 같은 기억이 내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 될 것이라 믿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 포토에세이 부문 대상 작품 - 임기순씨 ‘어울림의 미학’ 바늘꽂이에는 굵은 바늘, 가는 바늘, 긴바늘, 짧은 바늘들이 서로 어울려 빛나고 있다. 모두 각자의 역할과 가야 할 길이 있듯이, 우리도 저마다의 개성에 따라 쓰임새가 다르다. 나는 작고 뾰족한 바늘이었다. 존재감을 찾으려고 혼자 발버둥 칠수록, 그저 날카로움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만 줄 뿐이었다. ‘혼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깊은 허무함이 밀려왔다. 그래서 우리네 어머니의 반짇고리에는 바늘과 실, 헝겊이 늘 함께 있었나 보다. 혼자 앞만 보고 달리던 나는 헐떡이며 뒤돌아보았다. 지나온 길마다 상처 구멍만이 빠끔빠끔했다. 그때, 누군가의 따스한 손길이 나를 일으켜 세웠고, 나는 실과 인연이 되었다. 실과 한 몸이 되니 따스함이 찾아온 듯하였으나, 곧 답답함에 빠졌다. 우두커니 붙어있자니 서로 엇갈리고 엉키고 꼬일 뿐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그때 맞잡은 손길에 의해 헝겊을 만났다. 헝겊은 일구고 가꿔야 할 대평원이 되어 눈앞에 펼쳐졌다. 헝겊 위에서 한 땀 한 땀 나아가다 보니, 엇갈림도 얽힘도 사라지고 제 위치와 속도를 찾으면서 부지런히 걸을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는 헝겊 조각을 잇대어 만든 조각 보자기, 상보, 이불, 원피스 같은 창작품이 빛나고 있었다. 한 소녀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자기만의 원피스를 입고 사뿐사뿐 춤을 춘다. 우리네 어머니는 이런 창작활동을 통해 우리를 키워주셨다. 혼자가 아닌 함께 손잡고 나아가는 것. 바늘이 실과 어울려 헝겊 위에서 한 땀 한 땀 이어간 길들이 결국 아름다운 창작품으로 피어난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어울림의 미학이라는 것을 바늘은 이제야 깨달았다. 심사평 - ‘철’을 소재로 다채로운 서사 꽃피워 ‘스틸에세이 공모전’은 ‘일상에서 만나는 철의 다양한 모습과 철의 숨은 이야기’라는 분명한 주제를 제시한다. 이 공모전은 차가운 금속에 불과한 ‘철(鐵)’이 어떻게 인간의 일상과 감정에 스며들어, 또 다른 언어와 서사로 태어나는가에 주목한다. 철이라는 소재를 통해 삶의 장면을 포착하고, 이를 문학적 언어로 끌어올리는 과정이 곧 작품의 깊이를 결정짓는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제9회 스틸에세이 공모전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을 중심에 두고 작품을 탐독하였다. 일반부 작품은 철을 단순한 소재가 아닌 삶의 상징으로 재해석하는 데 집중했다. 대상작인 진상용(인천)의 ‘청동낙타, 한 마리’는 해외 파견 노동자의 경험을 통해 철을 인간적 존엄과 공동체적 기억으로 승화시켰다. 개인의 체험을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한 통찰력이 돋보인다. 청소년부는 철을 성장과 관계의 상징으로 재해석해 신선한 시각을 보였다. 금상 정희강(포항영신중 1년)의 ‘시험지보다 무거운 철, 그보다 가벼운 웃음’은 녹슨 놀이터에서 불완전함과 대면하는 청소년의 내면을 섬세히 포착했다. 특히 철을 삶의 균열과 성장의 은유로 풀어내 눈길을 끈다. 포토에세이는 사진과 글이 함께 동반되는 장르로, 시각적 이미지와 서사가 어떻게 어우러져 하나의 메시지를 완성하는지에 중점을 두고 심사했다. 사진이 시선의 출발점이 되고, 글이 시선을 깊이 있게 확장하며, 철의 다양한 얼굴과 이야기를 새롭게 발견해 낸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번 공모전은 ‘철’을 소재로 서로 다른 삶과 시선이 만나 다채로운 서사를 꽃피웠다. 차가운 금속 위에 각자의 온기를 새긴 응모작은 이 시대의 흔적이며, 삶을 기록한 소중한 기억의 조각이다. 수상자의 성과뿐 아니라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치열하게 삶을 마주하며 문장을 빚어온 모든 이들의 이야기가 오래도록 울림으로 남기를 바란다. 철이 세월을 견디며 본연의 자리를 지키듯, 그 문장들도 오랜 시간 기억 속에 살아 숨쉬리라 믿는다. /심사위원 양진오(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신용목(계명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박시윤(답사기행에세이작가)

2025-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