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기사는 본지 홍성식 기자가 한국기자협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연재하고 있는 ‘역사와 스토리가 있는 영남 음식’을 일부 수정-보완해 엮은 것이다. 홍 기자는 한국기자협회 미디어 리터러시 위원장이다...편집자 주
포항의 별미 ‘물회’… 고추장 본연의 맛으로 양념, 맹물·과일즙 부어 먹으면 일품
뱃일로 고된 시절 갓 잡은 생선에 찬물 붓고 훌훌 말아 넘긴 한끼, 삶이 담긴 음식
영남 북부 양반들이 귀하게 먹던 음식 ‘안동국수’… 고급 생선 ‘은어’로 끓인 한 그릇
투명하고 깔끔한 국물·매끄러운 면발… 별다른 고명 넣지 않아도 시원한 맛 자랑
▲어부의 고단한 살과 일상이 만들어낸 별미 ‘물회’
‘물’과 ‘회(膾)’는 어울리는 단어의 조합인가? 최소한 내겐 그렇게 다가오지 않았다. 서른두 살이 될 때까진.
제법 열정적인 연애가 지속되던 날들이었다. 30대 초반인 사내와 20대 중반인 여자가 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경북 안동까지,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짙푸른 파도 일렁이는 동해안 영덕 바다로 여행을 갔다. 대게가 맛있는 철이었다. 비싼 갑각류를 잔뜩 먹고 두주불사로 마신 다음 날. 해장 음식을 찾아 영덕 강구항 조그만 식당으로 갔다.
거기서 난생처음 ‘물회’란 걸 만났다. 크고 붉은 모조 보석이 박힌 금반지를 낀 호호백발 할머니가 잘게 썬 가자미 위에 양배추와 파, 고추장인지 초장인지 모를 시뻘건 양념을 듬뿍 올린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을 가져왔다.
“시원하게 찬물을 부어 먹어봐. 속이 확 풀릴 거야.”
부산에서 태어나 경남 마산에서 유년과 소년기를 보냈기에 회는 낯선 음식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백부를 따라다니며 자갈치와 마산 어시장에서 수십, 수백 차례 먹어본 익숙한 것이니까. 그런데, 멀쩡한 횟감에다 뜬금없이 물을 붓는다? 처음 보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그게 맛이 나쁘지 않았다. 방금 손질한 날생선 특유의 쫄깃한 식감을 지닌 회가 아닌 물컹이며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가는 회라니... 색다르고 생경한 요리 체험이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나도, 여자 친구도 달게 한 그릇씩 비웠다. 실실 웃음이 새어 나오는 독특한 맛이었다.
그리고, 덧없이 10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 40대 중반에 삶의 터전을 경북 포항으로 옮겼다. ‘물회’로 유명한 도시다. 바닷가는 물론, 시내에도 물회를 주된 메뉴로 파는 식당이 흔전만전이다. 당연지사 거기서 살게 된다면 누구나 자주 물회를 먹게 된다.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치는 포항의 물회 음식점들. 각각의 식당마다 조금씩 다른 레시피를 가졌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양념장을 만들 때 고추장, 식초, 설탕을 섞는 비율과 철마다 달라지는 생선의 종류, 횟감에 붓는 물을 만드는 방식 등.
10년쯤 살다보니 다수의 관광객들은 자극적인 ‘단맛’이 강한 물회를 선호하고, 나이 지긋한 바닷가 어르신들은 과일즙이나 청량음료를 섞지 않은 전통 방식 고추장으로 양념해 맹물을 부은 물회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두어 해 전이다. 구룡포에서 반세기 이상 뱃일을 해온 건장한 노인을 만났다. 취재를 핑계 삼아 지척에서 물결 일렁이는 포구 목로에 술병을 놓고 마주 앉았다. 그날 안주가 우연찮게도 물회였다. 서너 잔 낮술에 취한 늙은 어부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내가 흑백 테레비를 보던 시절부터 배를 탄 사람 아입니꺼. 지금이야 이렇게 멀끔한 식당에서 물회를 먹지만 옛날에야 그랬겠습니까. 뱃일이 생각보다 무지하게 힘들어예. 새벽부터 바다 나가서 그물 내리고, 올리고를 반복하다 보믄 제대로 밥 챙겨 묵을 시간이 없지예. 그저 잡아 올린 가자미, 볼락, 청어 같은 걸 손에 잡히는 대로 뼈째 칼로 썰어서 물 붓고, 찬밥 한 숟가락 말아 훌훌 마시듯 1~2분 만에 한 끼 때웠다 아입니꺼. 힘든 시절이었지예. 그때 생각하믄 세상 참 좋아졌다 아입니까.”
말을 마친 어르신이 젊은 시절 추억에 잠긴 듯 소리 없이 웃었다. 그때서야 제대로 알았다. 물회는 지난날 바닷가 뱃사람들의 고단한 노동과 힘겨운 일상이 만들어낸 음식이란 걸.
물회에 얽힌 ‘20세기 뱃사람들의 역사’를 말해준 그를 만난 이후부터다. 포항 죽도시장 식당 테이블에 오른 양념장 얹힌 가자미회나 청어회를 보면 물을 붓기 전 먼저 마음속으로 고마움과 바람부터 전한다.
“세상의 모든 생선을 우리의 식탁에 올려주는 어부들의 고된 삶에도 행복과 웃음이 깃들기를. 그들이 앞으로도 오래오래 건강하기를.”
▲‘안동국수’냐? ‘안동국시’냐? 그것이 문제로다
정확히 기억한다. 2019년 여름이다. 지금은 어울리지 않게 이름 앞에 ‘고(故)’자를 붙인 음식평론가 황광해(1957~2024) 선생과 안동역 인근 허름한 국숫집에 들었다. 점심은 먹었고, 저녁 먹기엔 이른 어중간한 시간.
뭘 모르는 내가 괜한 폼을 잡았다. “요즘은 어딜 가나 제대로 된 국수 맛을 보기 힘들어요. 밀가루 냄새가 풀풀 나서요. 그렇지 않나요?” 마주 앉았던 황 선생이 가소로운 듯 씨익 웃더니 짤막하게 한마디 했다.
“밀가루로 만들었는데 밀가루 냄새가 안 나면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냐?”
그날 우리가 먹은 걸 ‘안동국수’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좀 더 지역색을 드러내며 고풍스럽게 ‘안동국시’라 불러야 될까.
무어라 칭하든 그날 내가 맛본 건 ‘생애 최고의 국수’라 해도 과장이 아닐 듯하다.
영남 북부는 이른바 ‘반가(班家)’를 찾아보기 어렵지 않은 곳이다. 종택(宗宅)이라 불리는 멋들어진 기와집이 적지 않고, 거기엔 아직도 조선시대 유교적 전통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섬기는 종손과 종부가 살고 있다.
안동 김씨, 의성 김씨. 진성 이씨, 풍산 류씨…. 16~18세기 이 나라를 들었다, 놓았다 했던 집안의 후손들이 각자 가문의 자긍심을 지키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 가문들의 종택을 찾아가 나이 지긋한 종손, 범절 깍듯한 종부와 만나는 기회를 몇 번 가질 수 있었다. 취재를 업으로 하는 기자가 누릴 수 있는 기쁨 가운데 하나였다.
먼지 한 톨 없이 걸레질 된 반질반질한 대청마루에 앉아 그해 여든셋이 됐다는 종부가 가져다준 안동식혜를 받아들었다. 식혜에 고춧가루가 보이다니…. 영남 남부에선 보지 못한 스타일이다. 그러면 또 어때. 한 모금 마시니 땡볕에 달아오른 이마부터 시원하게 식는다.
“손님이 오셨는데 아무 것도 드릴 게 없어 송구하다”는 단아하게 나이 든 종부의 겸양에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시키려는 듯 쪽진 머리의 팔순 넘긴 할머니가 말을 이어갔다. 비취색 고운 비녀가 햇살에 반짝였다.
“처음 시집와선 힘들었니뎌. 열여덟에 아무 것도 모르고 남편 하나 보고 여기로 왔으니까예. 사내들이 은어 잡아오믄 끓여서 국물 만들고, 밀가루에 콩가루 쪼매이 섞어 국수 반죽 밀어 철마다, 때마다 오시는 수십 명 손님상을 차려내야 했다아입니껴. 아마 젊은 양반은 모를낍니더. 우리 동네에선 제사 때도 국수를 쓴다 아입니껴.”
시간을 투자해 ‘안동국수’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찾아본 건 그 종부 할머니 때문이었을 것이다. 책을 찾아보고, 인터넷도 뒤졌다.
실제로 ‘안동국수’라 불리는 음식은 과거 영남 북부의 양반들이 먹던 별식이었다. 은어로 국물을 냈다는 것도 고문헌에 남아 있는 사실이다. 은어는 ‘수중군자(水中君子)’로 불리는 물고기. 조선 시대엔 왕에게 진상하던 생선이었다. 한양으로 은어를 특급배송(?)하는 하위직 벼슬아치가 있었을 정도. 은어 배송이 실패하면 치도곤을 맞았다는 기록도 전한다.
그 귀한 물고기를 사용해 국물을 내고, 옛날엔 지금처럼 흔치 않았던 밀가루로 면을 만들었으니 수백 년 전 국수는 지금과는 그 위상 자체가 판이했을 터.
그해 여름. 취재를 함께 간 황광해 선생을 채근해 ‘제대로 된 안동국수’를 만드는 식당에 찾아갔던 건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예전처럼 은어를 사용하진 않았지만 국물은 투명하며 깔끔했고, 면발은 더없이 매끄러웠다. 별다른 고명을 얹지 않았음에도 특별하지 않은 국수가 내는 ‘특별한 맛’에 매료됐다고 해야 할까?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게 분명하다. ‘국수’라고 이름 한 걸 만나는 끼니때면 언제나 여든셋 키 작은 안동 종부와 수중군자 은어를 먼저 떠올리는 건.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