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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동해선 K-관광’ 매력 한눈에 인터랙티브 페이지 본지 홈피 공개

영상과 사진, 기사가 어우러져 동해선의 매력과 주변 관광지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인터랙티브 페이지가 본지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시된다. 경북매일, 울산매일, 강원도민일보 3사는 지난 5월부터 함께 동해선 관련 기획과 취재를 시작했다. 2025년 1월 개통된 동해선의 현황을 점검하고, 동해선 철길이 지나는 일대에 산재한 관광지가 만들어갈 미래 청사진을 그려내기 위해서였다. 동해선이 통과하는 주요 관광도시들에게 벤치마킹 아이디어를 제공하기 위해 철도여행 선진국이라 불리는 일본도 찾았다. 그곳에서 9일간 오사카, 교토, 나라, 도야마, 쓰루가 등을 기차로 오가며 철도가 만들어낸 일본 관광도시의 면모를 가감 없이 확인한 것. 기차 이용자와 철도 관계자들 인터뷰 또한 병행했다. 여기에 더해 지난여름엔 동해선 철길이 지나는 포항, 울산, 삼척, 동해, 강릉을 돌아보며 지역의 관광 실태와 각각의 지자체가 관광 활성화를 위해 펼쳐 나가고자 하는 계획을 점검했다. 역시 기차를 이용해서였다. 이런 과정과 결과를 기사와 사진, 동영상에 일목요연하게 담아낸 인터랙티브 페이지는 향후 동해선을 타고 여행을 떠나려는 독자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 인터랙티브 기사 링크: 동해선 K관광의 미래-로컬 매력을 잇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0-30

크리스마스 때 한 시간에 100개 넘는 케이크를 팔기도

단팥죽과 찐빵은 군것질거리가 아니라 분에 넘치는 훌륭한 식사 대용의 음식이었다. 그것을 먹는다는 자체가 그 시절에는 황홀한 사치였다. 자줏빛 팥죽에 하얀 새알 경단, 거기에 첨가하는 설탕 몇 스푼은 은혜의 음식이었다. 단것이 그리운 시절이었다. 팥의 효능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액귀를 쫓는다는 주술적 의미를 넘어 건강에도 많은 도움이 되는 재료였다. 창업주는 그런 점에 주목했던 듯하다. 2대 진상득 대표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대한광업진흥공사라는 모두의 선망을 받는 직장이었다. 선친은 가업을 이어받기를 종용하지는 않았지만 은근하게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갈등이 없을 수 없었다. 틈만 나면 아버지의 굽은 어깨, 어머니의 새벽길을 나서는 연약한 실루엣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차피 영원히 직장생활을 할 수는 없는 법, 언젠가 귀향해서 부모님을 모셔야 하는 자식의 입장임을 고려해 조금이라도 젊을 때 결단을 내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인생 2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자줏빛 팥죽에 하얀 새알 경단 동동 첨가하는 설탕 몇 스푼은 은혜의 음식 그시절, 군것질거리아닌 황홀한 사치 대학 졸업후 번듯한 직장 잡았지만 좀 더 젊었을 때 부모님 모시기로 결단 2대 진상득 대표의 인생 2부 막 올라 1963년 지금의 자리에 터전 잡고 포항시 1호 제과점인 ‘시민제과’ 탄생 전국제과인들 모임 결성해 정기 모임 국내 유명한 빵집 물론 유럽도 방문 기술·실내장식·매장 시스템 등 연구 한 시간에 100개 넘는 케이크 팔리기도 1963년에 포항시 1호 제과점이 돼 막상 마음을 먹기는 했지만 제과에 대해 아무런 정보와 기술이 없었다. 먼저 매장을 바꾸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분들에게 의견을 듣고 최대한 반영해 따르기로 했다. 굴러온 돌 행세를 하지 않으려 무진장 노력했다. 자신은 경영에만 신경을 쓰기로 했다. 제품 개발 회의에 참석할 때는 가급적 발언을 삼가고 의견을 청취했다. 두 베테랑의 도움이 컸다. 현재 두 사람 중 한 분은 은퇴했고, 다른 한 분은 고문으로 내부의 자잘한 일을 처리해주고 있다. 당시에는 기숙사가 있어서 직원들이 선친을 사장이라 부르지 않고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업무에는 무척 엄격했지만 평소에는 한없이 너그러워서 직원들이 잘 따랐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일찍 직업전선에 나선 어린 직원들에게는 학업을 병행하게 했다. 1963년에 지금의 자리로 터전을 잡았다. 포항시 1호 식품접객업소로 등록했다. 그러니까 포항시의 1호 제과점이 된 것이다. 그때 ‘시민제과’라는 이름이 정식으로 사용되었다. 진상득 대표는 제과 분야에 문외한이었던 터라 관련된 책을 모조리 섭렵했다. 매장의 구조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잘 운영되는 가게를 찾아다니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열심히 받아적고 사진을 찍었다. 직접 배우기도 하고 직원을 파견해 연수를 받게 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제과인들의 모임을 결성해 정기적인 모임을 가진 것이었다. 대전의 성심당이나 군산의 이성당, 서울의 김영모과자점, 광주의 궁전제과의 주인들이 그 모임의 멤버였다.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빵집의 오너들이다. 지금은 모두 은퇴해 자연인으로 살고 있지만 제과산업의 발전을 위한 진정성은 항상 기억하고 있다. 그때의 열정을 한시도 잊을 수가 없다고 진상득 대표는 회고했다.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 업계의 모든 문제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난상토론을 했다. 그 모임은 제과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진 대표에게 살아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교육 현장이었다. 일본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산업현장을 방문했고 관련된 박람회에는 거의 빠짐없이 참관했다. 멀리 유럽의 유명한 빵집들도 방문했다. 직접 보는 만큼 생생하게 배울 수 있었다. 빵 기술뿐만 아니라 실내장식. 매장 구조. 주방 시스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차곡차곡 쌓이는 경험만큼 자신감이 붙었다. 많은 시민이 시민제과에서 행복을 누려 찹쌀떡은 참 좋은 상품이었다. 속이 보일 듯 말 듯 한 투명하고 쫀득하며 부드러운 앙금은 금세 전국적인 제품이 되었다. 높은 온도에서 갓 구워낸 단팥빵은 그 쫄깃함과 더불어 부드러운 앙금 맛으로 시민제과 최고의 제품으로 각광을 받았다. 같이 곁들이는 음료도 꾸준하게 개발했다. 우유의 시대를 지나 그 변형의 일종인 밀크셰이크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사각사각 씹히는 우유 알갱이와 혀에서 녹아나는 아이스크림은 최고의 디저트였다. 부단한 시도는 계속되었다. 당시만 해도 위생적인 문제로 포장지에 넣은 제품을 고객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대로 포장해주는 것이 일반적인 영업방식이었다. 진상득 대표는 그런 과거의 시간을 과감하게 건너뛰었다. 모든 제품을 출고되는 대로 판매대에 올려놓고 고객이 직접 집게로 선택하도록 영업방식을 바꾸었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방법이었다. 획일화된 제품을 무의식적으로 판매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감각과 취향을 고려한 것이었다. 즉 제품들을 이렇게 만들어놓았으니 선택은 당신의 몫이요, 우리가 하는 최선의 노력을 당신이 결정하면 된다는 의도였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우리가 겸허히 수용하리라, 더 헌신하겠다는 그런 마음이었다. 고객들은 신선한 시도에 대해 호응해주었고, 그런 시도는 위생과 제품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로서는 당돌하고 위험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고객들의 신뢰는 그 위험을 뛰어넘고도 남았다. 하나하나의 제품을 포장지에 정성스럽게 넣어주는 작업과 투박하지만 은근한 멋을 풍기는 종이봉투는 금세 하나의 트랜드가 되었다. 고객들에게 최소한 나는 시민제과의 빵을 먹는다는 은근한 자부심과 맛에 대한 자신의 감각을 은연중에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시민제과는 그렇게 포항을 대표하는 제과점으로 시민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수많은 가족이 시민제과의 빵과 음료로 행복을 누렸고 청춘남녀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피자헛이 시민제과 앞에 화려하게 개장해 시민제과 건너편에 시민극장이 있었는데 시민제과에서 만든 양갱을 극장 휴게소에서 팔았다. 양갱 역시 팥의 연장선상의 제품이다. 양갱은 화과자의 일종으로, 다른 제품들과 더불어 나름의 윤택함과 잠시나마의 활력을 제공하는 지참물이었다. 팝콘의 원조랄까, 그 당시 시간을 단축해 허기를 달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다. 시대는 급변한다. 피자헛이 시민제과 앞에 화려하게 개장했다. 각종 브랜드를 내건 제과점들이 우후죽순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일반 가게에서도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빵들로 넘쳐났다. 삼립식품이 대표적이었다. 동네 빵집도 제법 늘어났다. 당시 시민제과는 크리스마스 때면 한 시간에 100개가 넘는 케이크가 팔려나갈 정도였다. 크리스마스나 연말연시 때는 경찰들이 시민제과 앞에서 교통정리를 할 정도로 성황을 누렸다. 그러나 대형 브랜드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시민제과 양옆에 있는 태극당과 신화당과의 경쟁에도 힘에 부치는 판인데, 시대의 도도한 흐름인 물량과 저가 공세에는 도무지 승산이 없었다. 할 만큼 했다는 자포자기의 심정도 들었다. 일의 특성상 매장을 원활하게 운영하려면 속도가 생명인데, 주어진 시간 안에 이런 일을 감당하기에는 시설 혹은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다. 이런 어려운 일을 하려는 사람이 부족한 것도 또 다른 이유였다. 진상득 대표 역시 젊은 사람들의 감각을 쫓아가기에는 어느덧 나이가 들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잠시 시민제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글 : 이우근(시인) 사 진 : 김 훈(작가)

2025-10-29

'송시열 선생 유배지' 은행나무와 장기초등학교

조선 유배지의 고장, 경북 포항시 장기면 마현리 331번지, 장기초등학교 교내 운동장에 은행나무 노거수 한 그루가 살고 있다. 그는 17세기 조선의 학자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선생이 장기에 유배되어 머무르던 시절, 제자들을 가르치며 심은 나무라 전한다. 그때가 1675년 6월, 선생은 세월의 부침 속에서도 학문과 도의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장기에 남긴 것은 가르침만이 아니라, 그 뜻을 담은 한 알의 씨앗이 바로 은행나무였다. 그로부터 35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선생은 떠나고 세상은 변했으나, 그가 심은 나무는 그 자리를 지켰다. 바람과 비, 전쟁과 산업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묵묵히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펼쳤다. 마을 사람들은 나무 그늘에서 쉬었고, 아이들은 그 잎새 아래 자랐다. 이런 외형뿐만 아니라 이들의 내면 정신세계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정신이 세대를 거듭하며 나무는 선생을 대신하는 시간의 스승이 되었다. 1946년 3월 5일 은행나무는 장기초등학교의 교목으로 지정되었다. 어린이들의 성장과 배움의 상징이 되었고, 1972년 6월 9일 포항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시민 모두의 나무가 되었다. 그리고 1993년, 장기초등학교 제40회 졸업생들은 나무의 뜻을 기려 세월을 잇는 존경의 비석을 세웠다. 이렇게 나무를 통하여 선생의 가르침이 대를 이어오고 있다. 은행나무는 살아있는 선생으로 또한 역사서로 그의 나이 350살, 키 14m, 몸 둘레는 2.3m의 노거수이다. 굵은 줄기마다 조선의 선비 정신이 서려 있고, 잎사귀마다 배움과 인내의 빛이 어른거린다. 인간의 생은 짧지만, 한 사람의 뜻이 나무로 이어질 때, 그것은 세대를 넘어 마을의 정신이 된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심은 은행나무는 바로 그런 삶의 흔적이자, 교훈의 나무로 오늘날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의 몸에 난 상흔으로 보아 그동안의 삶이 순탄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상흔은 고난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오히려 그 상흔이 선생의 당시 희생의 고통처럼 느껴져 마음이 아프다. 옛날 공자는 은행나무 그늘에서 제자들에게 인의와 예를 가르쳤다고 한다. 350년 전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곳 장기에 은행나무를 심을 때도 아마 그런 뜻을 품었을 것이다. 거대한 줄기로 세월을 견디며, 잎이 돋고 지는 사이에도 나무는 묵묵히 배움의 상징이 되어 왔다. 지금 그 나무 곁에는 장기초등학교가 서 있다. 교실 창가를 스치는 바람은 마치 우암의 숨결처럼 아이들의 머리 위에 내려앉고, 아이들은 그늘에서 세상의 바름을 배운다. 공자의 은행나무 아래에서 피어난 학문의 혼이 이곳에 옮겨와, 오늘의 아이들 마음속에서도 조용히 잎을 틔우고 있다. 푸른 바다와 맞닿은 포항 장기 들녘에는 한때 외로운 유배객들의 발자취가 머물렀다. 조정에서 밀려나 이곳으로 흘러든 선비들은 절망 속에서도 학문을 놓지 않았고, 그 고요한 세월을 사유와 깨달음으로 바꾸어 놓았다. 우암 송시열은 제자를 가르치며 도의의 뿌리를 심었고, 다산 정약용은 목민의 길을 떠올리며 새 세상을 그렸다. 그렇게 포항 장기는 한때의 유배지였으나, 지금은 사색과 성찰의 땅, 인간의 깊은 정신이 깃든 문화의 터전이 되었다. 포항 장기는 조선의 두 거목,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이 머물며 사유의 깊이를 더한 유배의 땅이다. 우암은 장기에서 예와 의리를 가르치며, 혼탁한 세상 속에서도 바름의 길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한 인간이 먼저 마음을 닦아야 나라가 바르게 선다는 신념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 뜻을 은행나무 한 그루에 담아 후세에 남겼다. 한 세기가 지나 다산 정약용 또한 장기의 바람과 바다를 마주하며 인간과 세상을 새롭게 성찰했다. 그는 고난을 학문으로 승화시켜 백성을 위한 정치, 실천적 정의의 길을 모색했다. 두 선비가 거쳐 간 장기는 유배의 고통이 사색의 빛으로 변한 곳, 그리고 오늘날까지 ‘자신을 닦아 세상을 바르게 한다’라는 수신위정(修身爲正)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성찰의 고장이다. 수신위정(修身爲正)은 자신을 먼저 바로 세움이 세상을 바르게 하는 첫걸음이라는 뜻이다. 장기초등학교가 동학의 기상과 동해의 정기를 품고 배움의 터를 연 지 백 년, 그 세월은 한결같이 이 뜻을 지켜 온 시간이었다. 교정의 바람 속에서 아이들은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법을 배우고, 바른 품성과 정직한 마음을 길러 사회의 등불이 되었다. 조국의 어려움 앞에서는 나라를 위해 헌신했고, 평화로운 시대에는 근면과 성실로 이웃을 밝혀 왔다. 수신위정의 가르침은 단지 공부의 목적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의 방향이었다. 장기초등학교의 백 년은 바로 그 철학이 피워낸 푸른 역사이며, 앞으로의 백 년 또한 그 뿌리 위에서 더 깊고 단단하게 자랄 것이다. 그의 사상은 이곳 출신 주민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애국지사 장헌문(蔣憲文) 의병장과 엄주동(嚴柱東) 선생 추모비가 은행나무 곁에 세워져 있다. “일제 강점기 시대 장헌문(蔣憲文) 의병장은 김재홍, 김복선 등과 뜻을 모아 3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영일을 중심으로 경주, 죽장, 흥해, 청하 등지에서 항전하며 정환직, 신돌석 의진과 연계해 항일투쟁을 이끌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년 형을 선고받고 출옥하였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애국지사 엄주동 선생은 이우용, 최규익 등과 함께 일본인들에게 피탈 당하고 있는 각종 산업을 되찾으려는 노력과 함께 국권 회복 운동을 펼쳤다.”라고 새겨진 추모비는 우암 송시열 선생을 상징하는 은행나무 노거수 곁에 세워져 있다. “우암 송시열 선생과 다산 정약용 선생이 장기를 방문하신 일은 이 지역 사람들에게 최고의 학문을 접할 수 있는 큰 행운이었다. 두 분이 남긴 가르침과 덕망은 오랫동안 장기인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고, 그 고매한 정신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이 글은 포항 장기의 자긍심과 학문의 전통을 기리는 마음에서 ‘장기 발전연구회’가 돌비석에 새겨 놓았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우암 송시열이 망실(亡室) 이씨(李氏) 에게 올린 제문 아, 나와 당신이 부부로 맺은 지가 지금 53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나의 가난함에 쪼들리어. 거친 밥도 항상 넉넉하지 못하여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던 그 정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쌓은 앙화 때문에 아들과 딸이 많이 요절하였으니, 그 슬픔은 살을 도려내듯이 아프고 독하여 사람들이 견디어 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근세(近歲)에 이르러서는 내가 화를 입어서 당신과 떨어져 산 지가 이제 4년이 되었는데, 때때로 나에 대해 들려오는 놀랍고 두려운 일들 때문에 마음을 녹이고 창자를 졸리면서 두려움에 애타고 들볶이던 것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끝내 몸이 지쳐 병에 걸려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시종을 따져보면 나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습니다. 타고난 운명이 좋지 않아서 이같이 어질지 못한 사람과 짝이 되었으니, 당신이야 비록 원망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내 어찌 부끄러운 마음을 이겨내겠습니까. 우암 송시열은 71세였던 1677년 3월 22일 부인 이씨의 상을 당하여 멀리서 통곡했다. -장기 유배문화 체험촌 우암의 벽 기록을 옮김

2025-10-29

대게와 함께 털게와 왕게도 별미

바람이 차갑고 바다도 차가워지는 겨울은 각종 ‘게’가 맛있어지는 계절이다. 곧 다가올 겨울. 얼어붙은 어시장 거리에서 게를 찌는 찜통에서 솟아오르는 뜨거운 김 앞을 지날 때면 고소한 냄새에 군침이 절로 돈다. 겨울철 귀한 별미 중 으뜸은 대게라 하겠지만, 털게와 킹크랩으로 불리는 왕게도 여러 사람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게 만드는 각별한 맛을 지녔다. 한국에선 게의 다리 살은 물론 몸통 살도 꼼꼼하게 발라먹고, 내장까지 볶음밥에 넣어 먹는다. 하지만, 일부 국가에선 다리만 잘라내고 몸통은 버린다. 게 내장의 녹진한 맛을 즐기는 이들이 본다면 혀를 차며 안타까워할 듯하다. 영덕, 울진, 포항 등에서 주로 유통되는 대게는 높은 인기 탓에 금어기 때는 러시아 등지에서 수입해 판매한다. 오호츠크해와 베링해 등 북태평양에서 서식하는 털게는 진흙이나 모래 바닥에서 활동한다. 한국의 경우엔 고성 부근 동해 북측에서 주로 잡힌다. 털게 역시 달달하고 구수한 맛으로 유명하다. 살이 많고 향이 좋은데다가 내장 맛이 일품이지만, 어획량이 적어 가격이 만만찮다. 계절에 따라서는 비싼 박달대게보다 더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남북 교류가 활발하던 2000년대 초반 금강산을 여행하며 맛본 털게 맛을 기자는 아직 잊지 못했다. 통상 킹크랩이라 불리는 왕게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이 계절의 별미다. 알루샨 열도, 알래스카, 극동 러시아, 일본 북부에서 서식하기에 우리가 먹는 왕게의 거의 전부는 수입산이라 생각하면 된다. ‘왕게’라는 이름값을 하듯 평균 무게가 3kg을 넘나든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0-28

‘성큼’ 동해안 대게가 살찌는 겨울이 다가온다

동해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누가 뭐래도 경북 바다 ‘최고의 별미’인 대게의 계절이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다리를 쭉 펴면 가로 길이가 60~70cm를 넘나드는 대게. 경상북도 울진과 영덕, 포항 구룡포는 물론 강원도 바닷가 마을에서까지 ‘비싸지만 귀하고 맛있는 먹을거리’로 대접받는 대게는 다른 갑각류에 비해 몸피가 크다. 그래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대게’는 커다란 크기 탓에 대게라고 불린다고 착각한다. 한자인 대(大)가 ‘게’자(字) 앞에 쓰인 것으로 이해한다는 이야기. 하지만, 그건 틀렸다. 먼저 이것부터 수정하고 가자. 대게는 길쭉한 다리가 대나무의 마디와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니, 대게 앞에 붙는 ‘대’자는 ‘클 대’자가 아닌 ‘대나무 죽(竹)자’다. 허니, 대게를 ‘죽게’라 불러도 “그건 틀렸다”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아는 사람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에서도 대게와 유사한 것들이 잡힌다. 푸른 눈동자와 금빛 머리칼을 가진 그쪽 어부들은 대게를 ‘스노우 크랩(Snow crab)’이라 칭한다. 눈보라 치는 차가운 바다에서 잡히는 게라는 뜻일 터. 알다시피 한국의 동쪽 바다도 물이 차갑다. 대나무 마디 닮은 다리에서 비롯된 명칭 박달대게·털게·왕게 등 통통한 속살 가득 회·찜·굽기 등 다양하게 조리…맛 일품 상인들 “대게는 찜이 최고∼” 한목소리 21세기 한국엔 부자가 적지 않다. 아직은 다수가 아니겠지만 “그게 맛만 있다면 나는 먹는데 돈 아끼지 않는 사람”이라 호언하는 자칭 미식가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 간다. 대게로 만든 요리 중 값싼 건 드물다. 앞서 언급했듯 ‘혀에 감기는 비싼 별미’가 대게니까. 움직임이 활발하고 살이 단단해 ‘박달대게’라 불리는 건 다리에 원산지 표시를 매달아 한 마리에 20만 원을 호가하기도 한다. 서민이 자주 맛볼 수 있는 가격은 아니다. 어쨌건 경북 동해안 일대엔 대게를 회치거나, 찌거나, 굽거나, 이런저런 채소를 더해 끓인 요리를 파는 식당이 흔하다. 맛있다고 입소문이 난 가게 앞엔 겨울철 주말마다 관광객이 만들어내는 긴 줄이 생겨나기도 한다. 도로변에 서서 달리는 자동차를 향해 “어서 우리 가게로 오세요”라며 손을 흔드는 호객 행위도 만만찮다. 맛있는 걸 감각하는 즐거움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던 걸까? 대게는 고려의 성리학자 목은 이색(李穡·1328~1396)도 감탄하며 먹었다고 전해진다.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의 스승이기도 했던 점잖은 대학자가 겨울날 거친 물결치는 바다에서 아랫것들이 잡아온 대게의 다리를 들고 ‘쪽쪽~’ 고소한 속살을 빨아 먹는 모습을 상상하면 절로 미소가 그려진다. 이색은 대게를 소재로 시(詩)까지 썼다. 그의 작품 ‘잔생(殘生)’은 ‘서쪽 바다 등 푸른 생선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나, 동해의 대게는 어지간해선 맛보기 어렵구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맞다. 동서고금 먹지 않고 사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게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주자학의 대가(大家)라 할지라도. 이색의 경우엔 ‘대가’가 ‘대게’를 먹었으니 책할 이들도 없을 듯하다. 700여 년 전 고려 시대에 잡힌 대게는 21세기 대게와 맛이 달랐을까? 기자도 궁금하고, 우리 모두 궁금하다. 여러 방식으로 조리가 가능한 대게지만, 수십 년 이상 대게 요리를 손님들에게 대접해온 경북 동해안 식당 주인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대게 찜이 최고”라고. 자, 그럼 어떻게 해야 더 맛있게 찔 수 있을까? 아래 30년째 대게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주인장에게 얻어낸 답을 살짝 공개한다. 집에서 찜통 위에 대게를 올릴 때 참고하시기를. “일단 솥에 담을 때 대게가 물에 닿지 않게 하세요. 끓는 물과 대게가 직접 닿으면 물기가 살 속으로 파고들어 내장이 흘러버리니까요. 고구마를 찔 때처럼 대게를 올린 채반과 물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쪄야 보다 맛있게 됩니다. 1kg짜리 대게를 찌는 시간은 20~25분이 적당해요. 배가 위로 향하게 해서 쪄야 하는 걸 절대 잊지 마시고.”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0-28

“함께가자 Yes 문경, 함께먹자 약돌한우!”

문경의 대표 먹거리 축제인 ‘제14회 문경약돌한우축제’가 오는 31일부터 11월 2일까지 3일간 문경새재 야외공연장에서 열린다. 올해 축제는 ‘함께가자 Yes 문경, 함께먹자 약돌한우!’를 주제로, 문경의 청정 자연과 명품 축산물 브랜드를 전국에 알리는 가을 미식 대축제로 마련됐다. 31일 개막식 박지현·정서주·윤윤서·개그맨 영기 등 출연 무대 빛내 11월2일 ‘읍면동 노래 경연대회’, 시민·관광객들 함께 축제 즐겨 30m 대형구이터에서 약돌한우-돼지 요리, 800명 동시 이용 가능 사과·오미자·약돌한우 3대 특산품, 대한민국 명품 브랜드로 육성 ◇ 문경약돌한우, 전국으로 ‘Yes!’ 문경의 대표 브랜드 ‘문경약돌한우’는 청정한 산간지대에서 자란 한우로, 약돌(藥石)을 먹여 키운 건강한 프리미엄 고기다. 축제 추진위원회는 “문경약돌한우의 우수성을 전국에 알리고, 관광객이 직접 맛보고 즐길 수 있는 축제를 준비했다”며 “문경의 가을을 대표하는 브랜드 축제로 자리매김하겠다”고 밝혔다. 올해는 KTX 문경역 이용객을 대상으로 할인권과 경품권을 증정하며, 교통 접근성을 살린 관광객 유치에도 나선다. ◇ 화려한 개막, 스타들이 빛낸다 축제 첫날인 31일 오후 2시 개막식은 식전공연과 내빈 소개, 개막선언에 이어 ‘약돌 퍼포먼스’로 본격 막이 오른다. 무대 중앙에 ‘약속의 낙관’을 찍는 장면과 함께 조명이 색을 바꾸고, 약돌한우 캐릭터가 리프트로 떠오르며 현수막이 펼쳐지는 연출은 ‘문경의 약속과 화합’을 상징한다. 이후에는 미스터트롯2 준우승자 박지현, 미스트롯3 우승자 정서주, 문경 출신 윤윤서 홍보대사, 개그맨 가수 영기 등이 무대를 빛낸다. 팬클럽 수만 명을 보유한 트롯 스타들이 대거 출연하면서, 축제장은 개막 첫날부터 ‘전국 팬들의 문경행’으로 붐빌 전망이다. ◇ 둘째 날, ‘토요음악회 in 문경’ 11월 1일 토요일에는 인기 프로그램 ‘토요음악회 in 문경’이 열린다. ‘미스터트롯2’ 우승자 안성훈, ‘트로트퀸’ 우승자 지원이, ‘트롯전국체전’ TOP8 출신 한강, 그리고 합창 퍼포먼스 그룹 하모나이즈가 무대를 꾸민다. LG헬로비전이 현장을 녹화해 전국 송출할 예정으로, 문경 관광의 전국 홍보 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된다. 같은 날에는 국가대표 팔씨름 선수 주민경과 맞붙는 1대100 도전 이벤트, 한우 레크리에이션, 한우오락실(골든볼차기, 해머오락실) 등 다채로운 체험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 마지막 날, 읍면동 노래경연과 폐막 축제 마지막 날인 11월 2일 일요일에는 문경 전역에서 참여한 읍면동 노래경연대회가 열려 시민과 관광객이 함께하는 ‘패밀리 콘서트’ 분위기를 만든다. ‘무장상(무대장악상)’, ‘흥이 폭발했상’, ‘한마음 뭉쳤상’ 등, 재치 있는 상명과 시상금 300만~150만 원대의 풍성한 상품이 마련됐다. 폐막식 무대에는 ‘꽃을 든 남자’의 최석준, 김다나, 문경시 홍보대사 윤진우와 장혜진이 출연해 피날레를 장식한다. 이후 경품추첨과 폐막인사를 끝으로 3일간의 대축제가 대미를 장식한다. ◇ 맛과 체험, ‘먹거리+놀이+흥겨움’ 3박자 축제의 백미는 단연 약돌한우 구이터다. 문경축산농협이 직접 운영하며, 갈비·등심·살치살 등 인기 부위를 20~33% 할인 판매한다. 800명이 동시에 이용 가능한 대형 구이터(30m×40m)에서 즉석 시식이 가능해 가족단위 방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약돌한우·약돌돼지 시식회, OX퀴즈 및 약돌높이쌓기 대회, 농특산물 판매부스(32동), 문경가수 가요무대, 경품추첨 행사 등 풍성한 부대행사가 마련돼 축제기간 내내 흥겨운 잔치가 이어진다. ◇ “한우 먹고, 문경 새재길 걸어요” 문경새재의 단풍이 절정을 이루는 시기와 맞물려 열리는 이번 축제는, 사과축제에 이어 ‘가을 관광 2탄’으로 기획됐다. 문경시 관계자는 “문경사과축제의 열기를 이어 약돌한우축제가 관광객 소비와 지역경제로 이어지도록 준비했다”며 “새재의 가을과 약돌한우의 풍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지역 축산농가의 참여 확대와 농특산물 공동 홍보, 전통시장 상권 활성화 등 지역경제 선순환 모델도 가시화되고 있다. 특히, 한우협회 문경시지부와 한돈협회 문경시지부가 공동 운영하는 시식행사는 문경산 축산물의 경쟁력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로 꼽힌다. ◇ “문경약돌한우, 대한민국 대표 한우로” 송명선 문경약돌한우축제추진위원장은 “약돌한우는 문경의 자존심이자 대한민국 최고 품질의 한우 브랜드”라며 “시민과 관광객이 함께 즐기고, 농가와 상권이 함께 웃는 축제로 발전시키겠다”고 말했다. 신현국 문경시장은 “문경사과, 문경오미자, 문경약돌한우 등 지역의 3대 특산품을 축제 콘텐츠로 연계해 대한민국 대표 농특산 도시로 도약하겠다”며 “가을 문경새재에 오면 맛과 흥, 그리고 따뜻한 정을 모두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올해로 14회를 맞은 문경약돌한우축제는 ‘문경의 맛을 전국에 알리는 브랜딩 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화려한 공연, 체험, 시식, 관광이 어우러진 축제의 열기가 문경새재의 단풍처럼 붉게 타오르며, ‘맛의 고장 문경’의 이름을 다시 한 번 전국에 각인시킬 것이다. ◇ 약돌 ‘약돌’은 거정석으로 전통적인 한약재로 알려져 있으며, 문경에서 산출되는 광물이다. 칼슘·마그네슘·아연·게르마늄 등 미네랄이 풍부해 물을 정화하고 신진대사를 돕는 효능이 있어 예로부터 ‘약이 되는 돌’로 불려왔다. 문경시는 거정석을 미세하게 분쇄해 사료와 음용수에 섞는 사육 방식을 도입, 한우의 면역력과 소화력을 높였다. 그 결과 고기는 부드럽고 육즙이 맑으며 고소한 풍미가 살아난다. 2011년에는 지리적 표시 단체표장을 획득하며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약돌은 소화 효소의 분비를 촉진해 소화 기능을 개선시키고, 복부 불편을 줄여주며, 항산화 성분은 체내 자유 라디칼을 제거하고, 면역 세포의 활동을 촉진해 감염에 대한 저항력을 높인다. 또한 피로 회복에 도움을 주고 피부 세포 재생을 촉진하며, 염증을 줄인다. 혈액 순환을 개선하고, 혈압도 조절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성환기자 hihero2025@kbmaeil.com

2025-10-27

광복 후 대흥동에서 찐빵과 단팥죽 파는 난전으로 시작

인생이란 빗속을 달리고 문고리를 잡는 것 그 이상이다. 서로 얼굴을 스쳐 지나가고 냄새를 기억하는 것 이상이다. 독일의 작가 볼프강 보르헤르트(Wolfgang Borchert)의 「이별 없는 세대」라는 에세이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끝을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쏟아지는 비와 바람에 저항하고 비로소 도착한 목적지에서 문고리를 잡는 지난한 과정이 인생이라면, 그 과정에서 스치며 만난 많은 얼굴과 뇌리에 남아 있는 냄새는 우리의 과거를 현재로 형성시키는 중요한 장치임에 분명하다. 나는 냄새를 기억한다는 말에 주목한다. 그것이 첫사랑이든 아픈 기억이든 냄새에는 분명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불의 소인(消印)으로 남은 상처가 아니라 뇌의 깊은 곳에 스며든 특별한 냄새는 과거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연결고리가 되어 아득한 상념에 잠기게 한다. 그때 행복했다면 지금도 행복하다는 뜻이다. 상처는 어느덧 훈장이 되어 그 사람을 반짝이게 한다. 고통스러웠던 시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좋은 기억으로만 각인된다. 창업주 진석률 옹 일제강점기때 日 건너가 수없이 반복되는 차별에도 묵묵히 노력 우연한 기회에 고국에 왔을 때 광복 맞아 日서 일군 재산 없이 난전으로 다시 시작 찐빵과 단팥죽 팔며 1949년 ‘시민옥’ 개점 이후 ‘시민양과홀’, ‘시민제과’로 명맥 이어 6·25 피난 후 돌아왔을 땐 가게는 폐허로 난관 속 가게 열고 찹쌀떡으로 영역 넓혀 오늘날 시그니처 제품은 도전의 산물인셈 1949년 ‘시민옥’이라는 상호로 개점 ‘시민제과’는 이름에서부터 내공이 느껴진다. 외래어투성이의 빵집과 베이커리, 디저트 카페, 공장형 커피숍이 도처에 널려 있다. 자기완성형이면서 정체성을 잃지 않은 이름의 이 제과점은 내공만큼이나 저력을 자랑한다. ‘시민’을 이름으로 내걸 만큼 시민을 대표한다는 단단한 자존심으로 80년 가까운 세월을 더해 찬란해진 이름이다. 이런 제과점 하나쯤은 도시라면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한다. 시민제과는 1949년에 처음 이름을 내밀었다. 창업주인 진석률 옹은 일제강점기 때 변변한 재산이 없어 일찌감치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돈을 벌려고 했다. 그는 수없이 반복되는 차별에도 굴하지 않고 묵묵히 생업을 유지하고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도 노력하면 그런대로 살 만했다고 한다. 배달과 온갖 잡일을 마다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에 몰두했다. 성실에는 이길 장사가 없다고 했다. 우연한 기회에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마침 광복을 맞아 일본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때까지 일본에서 일구어놓은 재산도 챙길 수가 없었다. 먹고살아야 했다. 진석률 옹은 대흥동 근처 금은방이던 신정당과 수양다방 부근에서 난전을 벌였다. 손재주가 있었던 터라 찐빵과 단팥죽을 만들어 팔기로 했다. 배고픈 시절이었지만 누구라도 달콤한 군것질을 마다할 사람은 없었다. 설탕은 중독이자 에너지였다. 김이 폴폴 피어오르는 하얀 찐빵과 고소하고 진한 향기가 나는 단팥죽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호기심과 늘 배가 고픈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그만인 품목이라는 데 착안한 아이템이었다. 애초의 이름은 ‘시민옥’이었다. 방앗간을 운영했던 창업주의 경험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 가장 잘할 수 있는 업종을 선택한 것이었다. 일본에서 일할 때 어깨너머로 배운 팥 제조 기술은 큰 도움이 되었다. 이후로 시민옥은 ‘시민양과홀’로, 지금의 ‘시민제과’로 명맥을 이어가게 된다. 한국전쟁 후 폐허에서 만든 찹쌀떡 그 와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해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지붕이 날아가 버려 폐허가 된 가게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래도 신세 한탄이나 하면서 망설이고 있을 틈이 없었다. 최선을 다해 주위를 정리하고 다시 가게를 시작했다. 갖가지 난관에도 다시 빵을 만들고 단팥죽을 팔았다. 거기에 더해 찹쌀떡으로 영역을 넓혔다. 오늘날 시민제과의 시그니처 제품인 찹쌀떡은 그런 도전의 산물이었다. 앙금이 살포시 보이는 영롱한 빛깔의 찹쌀떡은 대표상품이 되었다. 입시철에는 밤새도록 일을 했다. 2대 진상득(70) 대표는 이렇게 회상한다. 새벽 3시에 일어나 팥을 씻는 것은 내일의 장사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오늘의 상품은 그 전날에 준비해야 한다. 무쇠솥이든 양은 재질의 큰 냄비이든 팥을 가득 넣어 찬찬히 끓이는 노동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디 당장 눈앞의 대가가 있으랴. 숙명과 운명의 쳇바퀴 같은 삶일지라도 지금의 생에 충실하고자 했다. 어머니의 모시 적삼에 밴 땀의 흔적을 그는 선명하게 기억한다. 아버지는 말없이 생업에 종사하면서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좋은 음식을 만드는 일은 군것질에 불과하더라도 배부름과 더불어 문화적 감각과 정신적 포만감을 보충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실용과 실리를 생각했다고 한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고 했는데, 지금 시민제과의 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를 망라하여, 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약간의 허기를 사람들은 질병처럼 앓고 있다. 문화적이면서도 지적 호기심을 뒷받침하는, 혹은 증명할 수 없는 부의 가치를 평가받는 그 오묘한 지점에서 시민제과는 그 역할에 앞장섰다. 지금에야 흔한 상품으로 빵의 존재이지만 그때는 달랐다. 먹는 것에서부터 생활의 위치가 달랐던 시절이기도 했다. 약간의 특권과 부의 과시가 존재했었다는 말이다. 식생활의 변화와 문화적 가치를 선도하는 사회적 기업의 역할을 시민제과가 창출했다는 의미에서 단순한 빵집의 존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맛이 미학(美學)이 될 수 있다는 그 징검다리를 놓았다는 이야기다. 밥의 존재는 여전하지만, 그 대체재로 빵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는 세상이다. 진상득 대표는 불을 조절하는 어머니의 둥근 어깨를 한시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마당을 치우고 정성을 다해 오늘의 장사를 준비하고 조심스럽게 불을 지펴 팥을 삶고 찹쌀밥을 지으며 손 모아 치성을 드리는 끝없는 간난의 여정을 잠시도 잊지 못한다. 요즘은 이스트를 사용해 간단하게 발효시키지만, 그 시절 어머니는 밀가루를 잘 반죽해 아랫목에 모셔다 놓고 이불을 두르면서 밤새 정성을 들였다. 그리고 새벽마다 무거운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생업 전선으로 떠났던 작은 체구의 어머니를 평생 그리며 살고 있다.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 없이는 인생이란 그림은 완성되지 않는다. 그 깊이와 넓이는 아무도 측정하지 못한다. 불 조절을 잘하는 것이 완벽한 팥을 만드는 지름길 그 한없는 정성은 추운 겨울에도 침묵의 웅변으로, 순수의 결정체인 땀방울로 흘러내렸다. 어머니의 정성은 자식들의 배부름이었다. 아버지의 묵묵한 헌신은 일가를 완성하는 신성한 노동이었다. 그러므로 잘살아야 한다고 어린 마음에도 꼭꼭 다잡았다고 한다. 찐빵과 단팥죽은 팔이 주원료다. 당연히 좋은 팥을 고르는 것에서부터 모든 일이 시작된다. 물론 밀가루도 중요하다. 하루 전에 반죽해 숙성시키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하고, 다음 날 새벽부터 빵을 만들기 시작한다. 팥앙금을 만드는 것은 기술과 정성이 어우러져야 완성되는 결과물이다. 좋은 팥은 짙은 붉은색을 띠는 것이 우선이며 낱알이 굵은 것, 가운데의 띠가 노르스름하면서도 흰색으로 선명해야 한다. 그리고 덕지덕지 붙은 하얀 가루가 없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팥을 고르려면 최대한 발품을 파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어머니는 매의 눈으로 시장을 누비며 좋은 품질은 물론 적절한 가격으로 팥을 구입했다. 또한 팥은 영양분이 뛰어난 재료라서 벌레가 많은 것이 흠이라면 흠인데, 그만큼 완벽한 식재료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엄선한 빛깔 좋은 팥을 물에 불려 은근한 불에 끓이고 나서 찧고는 체에 걸러 숙성과 건조를 반복하면 앙금이 탄생된다. 찐빵용의 앙금과 달리 단팥죽의 앙금은 손이 많이 간다.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지만 삶은 팥을 베자루에 넣고 지렛대로 압력을 가해 고운 가루로 걸러내야 한다. 그래야만 부드럽고 고소하며 감칠맛이 입안을 감싸는 앙금이 된다. 찐빵용 앙금과 단팥죽 앙금은 다시 꾸덕꾸덕한 앙금과 맑고 곱게 정제한 앙금으로 나누어져 단팥죽의 원재료가 된다. 단순한 과정 같지만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일이다. 도구도 화력(火力)도 손으로 제어해야 하므로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다. 특히 불 조절은 많은 경험을 쌓지 않으면 안 되는, 순전히 누적된 시간의 산물이다. 뒤꼍에 쌓아놓은 장작과 마른 솔잎은 중요한 자원이었다. 그 땔감을 활용해 불 조절을 잘하는 것이 완벽한 팥을 만드는 지름길이다. 진상득 대표는 잘 마른 나무 냄새와 마른 솔잎의 향기가 아직껏 머리에 남아 있다고 회상한다. 그것은 냄새로 각인된 원형의 추억이자 삶을 지탱하게 하는 에너지가 되었다고 한다. 글 : 이우근(시인) 사 진 : 김 훈(작가)

2025-10-26

제9회 스틸에세이 공모전 대상 수상자 인터뷰

경북도와 포항시 주최, 경북매일신문 주관으로 열리는 ‘스틸에세이 공모전’은 산업도시 포항의 대표 문학 행사로 자리 잡았다. 철을 소재로 삶의 순간을 문학으로 승화시켜, 차갑고 단단한 철의 이미지를 따뜻하고 부드러운 문화로 재탄생시키기 위해 기획된 이번 공모전은 올해로 9회째를 맞는다. 지난 24일 발표된 ‘제9회 스틸에세이 공모전’에서 일반부, 청소년부, 포토에세이 부문 대상 및 금상 수상자 3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일반부 대상 진상용씨 -“ 철이 세계 평화와 인류 공동체의 삶에 올바르게 쓰이길…” "올가을, 근래 가장 풍성한 결실을 맺었습니다. 뜻밖의 수상 소식에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설레었지요. 하지만 일흔의 나이에 마주한 인터뷰 요청은 여전히 떨리고 조심스럽습니다. 함께한 이들의 냉소 어린 시선이 귓가를 스치는 듯해 더욱 그렇습니다. 미처 다듬지 못한 글이 선택받도록 살펴주신 심사위원께 감사드리며, 전쟁 속에서도 검게 그을린 주전자에 정성껏 끓여주던 그 땅의 차이 한 잔이 그리워지는 가을입니다.“ -수상작이 ‘청동 낙타, 한마리’이다. 청동 낙타에 대한 글을 쓰게 된 계기가 있다면. △70세를 훌쩍 넘기면서 운전면허증 반납부터 시작해 하나씩 줄이고 버리는 시기에 접어들어섰습니다. 이는 소중히 간직할 것과 쓸모가 적어진 사물을 구분 짓는 세대가 되었다고나 할까요. 집안 청소를 하던 중 눈에 띈 청동 낙타는 1980년대 중동 근무 후 귀국길에 챙겨온 기념품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묻혀 있던 이 낙타를 ‘철’을 주제로 한 에세이 공모전을 통해 세상 밖으로 꺼내주고자 마음먹었습니다. 글의 주요 소재는 철근이지만, 굳이 제목을 ‘청동 낙타’로 정한 이유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철근은 사막으로 수출되었고, 그 땅의 청동 낙타가 저를 따라온 셈이니까요. 어쩌면 저 자신도 한 마리의 낙타였는지 모릅니다. -글을 쓰는 과정과 작품을 통해 남기려는 메시지를 소개한다면. △젊은 시절 한동안 ‘철근쟁이’로 불리며 현장을 누볐습니다. 철근(鐵筋)을 우리말로 풀어쓰면 ‘힘줄 쇠’ 또는 ‘쇠 힘줄’이 되겠지요. 건축물의 뼈대를 이루는 철근은 단단한 콘크리트 속에 갇혀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를 악용해 부실 공사를 저지르는 이들이 있지만, 결국 수명을 다한 건축물이 철거될 때 끝까지 저항하는 것도 철근의 가닥입니다. 최근까지도 빈번히 들려오는 건물 붕괴 사고 소식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순살 아파트’라는 최악의 신조어가 하루빨리 사라지길 바랄 뿐입니다. -철이란 무엇인가. △인류사에서 가장 필수적이며, 시대별 문명의 척도가 되는 물질입니다. 진흙과 돌이 전부였던 사막 지역에 유입된 신문명은 탱크와 무기 같은 살상용 무기로 변질되기도 했지만, 현지인들 역시 철을 생활 도구로 삼아왔습니다. 선과 악의 경계 없이 활용되는 철이 세계 평화와 인류 공동체의 삶에 올바르게 쓰이길 소망합니다. -좋은 산문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6·25 전쟁 직후 태어난 우리는 험난한 시대를 겪으며 살아왔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을 글로 옮기면 책 몇 권 분량은 된다고 말하지만, 저 역시 살아온 만큼의 이야깃거리만 있을 뿐입니다. 과장하거나 포장하려 들면 겉치레 허울이 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세상사에 대한 푸념이나 넋두리로 흐르지 않으려면 더욱 그렇습니다. 타고난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라, 살아온 경험 자체가 소중한 글감이 된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문학작품의 장점이란 뭐라고 생각하는가? △솔직히 말해 저는 저는 문학 세상에 대해 어둡습니다. 생업에서 물러난 뒤에야 글 읽기와 쓰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창작 수업이나 문학 동호회, 강좌 등에 참여한 적은 없습니다. 특정 문학인과 교류한 경험도 없고요. 다만 글쓰기는 자기 수양의 과정이라 믿습니다. 쓰고 다듬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교정하게 되니까요. 글감은 삶의 관찰력에서 순간 포착되지만, 내용은 정제될수록 빛을 발합니다. 또한 타인의 글은 나보다 뛰어난 이가 썼다는 마음으로 경청하려 합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제 능력의 범위 안에서 겸손하고 이해하기 쉬운 글을 써나갈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말과 글만큼은 부끄럽지 않게 남기고 싶고, 남은 생 동안 기록의 본능을 잃지 않겠습니다. 비록 영원한 늦깎이 습작생으로 남을지라도 말입니다. 청소년부 금상 정희강 군 - “녹슨 철 구조물은 삶 속에 마주하는 위로이자 가능성” “저는 이 글에서 “괜찮아, 넌 충분히 할 수 있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살면서 실패나 실망 앞에 자신을 작고 부족하다 느낄 때도 있지만, 녹슬고 낡은 철 구조물도 제자리를 지키듯 우리 역시 완벽하지 않아도 충분히 버텨낸다는 것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시험 점수나 결과가 전부가 아니라 그 너머의 기억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수상 작품 ‘시험지보다 무거운 철, 그보다 가벼운 웃음’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작품에서 ‘녹슨 철 구조물’은 단순한 놀이기구가 아니라, 실패 속에서도 버티는 우리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상처 입고도 제자리를 지키는 철은 삶 속에서 마주하는 위로이자,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가능성을 상징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철’을 좋아합니다. -놀이터 녹슨 철 구조물이 작품 구상에 도움이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녹슨 철 구조물을 마주했을 때, 실패로 주저앉은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다. 상처 입고도 자리를 지키는 철처럼 저 역시 버틸 수 있다는 위로를 받았고, 이를 글로 표현하고 싶어 작품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정희강 학생에게 문학작품은 무엇인가요. △문학작품은 다양한 인물의 삶과 갈등을 통해 인간의 선택과 그로 인한 후회, 그리고 그 과정을 거쳐 얻는 성장을 깊이 있게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독자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공감하며, 감성과 상상력을 자극받는 동시에 언어적 표현력도 길러집니다. 또한 문학은 시대와 문화를 반영해 사회를 이해하게 하고, 때로는 위로와 치유를 전하며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수상작이 독자들에게 전하는 말은 무엇인가요? △삶에서의 실패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며, 그 순간은 마치 무거운 철처럼 우리를 짓누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실패의 경험조차 시간이 지나면서 녹슬고 흔적으로 남아 결국 우리를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된다는 점입니다. -정희강 학생이 생각하는 좋은 수필이란 무엇인가요. △저에게 좋은 글이란 단순히 문장이 아름답거나 표현이 화려한 글이 아니라, 읽는 이의 마음에 닿아 공감과 울림을 주는 글입니다다.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와 분명한 메시지가 담겨 있어야 하며,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구성과 표현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좋은 글은 읽고 난 후 마음에 무언가를 남기며, 생각을 움직이고 감정을 흔드는 힘을 가진 글이 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바람이나 계획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앞으로 더 많은 글을 작성하고 실력을 더 발전시키는 것이 목표입니다. 발전하는게 목표입니다. 포토에세이부 대상 임기순씨 - “개인주의 팽배와 소통 부재… ‘함께’ 의미 전하고 싶어” “저는 이 글에서 “함께하는 삶”의 의미를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요즘 개인주의가 팽배하면서 공동체가 약화되고, 소통의 부재와 갈등 증가 등 사회적 문제가 심화된 현실 속에서 ‘함께’의 가치가 더욱 절실하다고 느꼈습니다. 옷을 만들 때 없어서는 안 될 바늘도 결국 혼자서는 완성된 작품을 만들 수 없듯이, 우리 사회도 타인을 포용하며 협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상작 ‘어울림의 미학’을 쓰게 된 계기가 있다면. △외출을 앞두고 옷에 단추를 달기 위해 바늘과 실을 찾았는데, 옷에 맞는 색상의 실이 없어 난감했던 경험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바늘이라도 그에 맞는 실이 없으면 멋진 옷을 완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특히 요즘 결혼과 출산을 미루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성공을 우선시 하는 이들에 대한 걱정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였습니다. 결국 ‘혼자서는 완성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담아 아들에게 편지를 썼고, 그 과정에서 제 삶 전체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남기려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이 글은 ‘혼자가 아닌 가정을 이루면서 시작되는 여정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날카로운 바늘(불완전한 혼자)이 실(배우자)을 꿰고 천(자녀, 후손)을 만나야 비로소 진정한 삶이 펼쳐지며, 그 책임감과 더불어 사회생활에서도 ‘진정한 어울림’이 무르익는다는 비유를 담았습니다. 저는 어린이집 원장으로서 일하며, 아이들(바늘)과 교사(천), 학부모(실)가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며 협력할 때 교육의 목표가 달성된다는 것을 체감했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일상 속에서 ‘어울림’의 미학을 실천해 창조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펼쳐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철(鐵)’이란 어떤 소재로 기억되는가. △어린 시절 철은 생활의 근본이자 창조의 상징이었습니다. 어른들에게는 가마솥, 칼, 농기구처럼 살림에 꼭 필요한 물건이었고, 아이들에게는 스케이트나 장난감을 만들고 싶은 간절한 꿈이기도 했습니다. 즉, 철은 삶의 기반을 다지는 동시에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픈 열망이 담긴 소재였습니다. 지금도 철은 거대한 건축물부터 미세한 의료기기까지, 모든 창작물의 핵심 뼈대로서 그 가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 좋은 글이란 어떤 것일까? △독자에게 공감과 성찰의 기회를 주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려한 수사보다는 보편적인 소재와 경험 속에서 삶의 진리를 발견하고, 이를 진솔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독자가 글을 읽으며 “내 삶도 그렇다”고 공감하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글의 조건이 아닐까요? -문학 작품의 장점 또는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문학은 일상의 경험을 예술로 승화시켜 타인의 마음에 울림을 전하는 힘이 있습니다. 마치 철이 생활 속에서 빛을 발하듯, 문학은 개인의 내면을 풍요롭게 하고 사회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갈고닦아 독자와 공유하며, 독자는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문학이 지닌 가장 큰 가치이자 힘이라고 믿습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 △이번 수상은 제게 큰 격려이자 동시에 더 나은 글을 써야 한다는 책임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앞으로도 평범한 일상 속에서 발견한 소중한 가치를 독자들과 나누며, 따뜻하고 진실한 글로 소통해 나가겠습니다. ‘어울림의 미학’을 주제로 한 작품 활동을 지속하며, 독자들이 삶의 의미를 재발견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0-26

“기술과 사람을 잇는 ‘스마트 오퍼레이터’로 성장하고파”

냉연 소둔 공정, 철 속의 피로를 풀어주는 과정···‘완성된 철’이 되기전 마지막 단계 고온과 고압이 공존하는, 품질과 안전 동시에 요구되는 현장··· 높은 긴장감의 연속 - 자기소개를 해달라. 나는 포항제철소 냉연부 연속 소둔 공정에서 오퍼레이터로 근무하고 있는 6년 차 박성식 사원이다. 사람이 계속 움직이다 보면 피로가 쌓이듯, 철도 마찬가지다. 나의 담당인 냉연 소둔 공정은 쉽게 말하면 단단한 철 속에 남은 피로를 풀어주는 과정이다. 철이 여러 차례 가공을 거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긴장, 즉 내부 응력이 생기는데, 이 상태로 두면 철은 쉽게 깨지고, 원하는 형태로 가공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요리사가 재료 온도를 조심스레 조절하듯, 철을 일정한 고온으로 천천히 달궜다가 식히며 숨을 돌릴 수 있도록 돕는다. 이 과정을 통해 철은 다시 유연함을 되찾고, 세상 곳곳에서 새로운 형태로 태어날 준비를 마친다. 나는 냉연 연속 소둔 공정의 오퍼레이터로, ‘완성된 철’이 되기까지의 마지막 단계를 맡고 있다. 특히 내가 살피는 것은 단순히 기계가 아니라, 철의 성질을 결정짓는 온도와 압력의 균형이다. 소재마다 두께, 폭, 재질이 다르기 때문에 그에 맞는 조건들을 세밀하게 조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철이 너무 뜨겁거나 식으면 품질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수많은 데이터와 센서값을 바탕으로 설비를 운용하며 최적의 상태를 유지한다. 작은 오차도 품질에 직결되기 때문에, 철의 숨결을 읽고 → 변화를 감지하고 → 사람의 감각으로 완성하는 일을 하는 ‘철의 컨디션을 조율하는 조율사’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업무 현장과 팀을 소개한다면? 내가 근무하는 연속 소둔 공정은 고온과 고압이 공존하는, 품질과 안전이 동시에 요구되는 현장이다. 매 순간 정밀한 제어와 신속한 판단이 요구되며, 높은 긴장감 속에서 일한다. 그 속에서 내가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사람’이다. 현장은 언제나 엄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엄격함은 통제가 아니라 서로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배려에서 비롯된다. ‘동료의 안전이 곧 나의 안전’이라는 책임감이 우리 팀의 기본이다. 소둔 공정에서 가장 긴박한 순간은 ‘판 파단’이다. 철판이 찢어져 공정이 중단되는 상황인데, 그때마다 팀원들은 자신보다 서로를 먼저 챙긴다. 상황이 발생하면 누구보다 빠르게 파트장님께서 현장을 진두지휘하고, 과장님들이 앞장서 가스 절단기로 불량 부위를 제거한다. 판단이 빠른 대리님들은 스위치를 잡고, 나머지 팀원들은 제거한 부위를 함께 옮긴다. 위험한 순간일수록 선배들이 먼저 앞에 선다. 후배들은 그런 선배들의 뒷모습을 보며 배우고, 대응 절차와 안전 절차를 몸으로 익힌다. 이것은 누가 정해준 규칙이 아니라,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약속이다. 서로의 안전을 지키는 방식이 곧 우리 팀의 문화이며, 나는 그것이 우리 팀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 포스코에 입사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우리 가족은 포스코와 오랜 인연이 있다. 할아버지는 당시 포항제철의 스크랩을 받아 판매하셨고, 어머니는 제철소 인근 산업 폐기물 처리업체에서 근무하셨다. 어린 시절부터 포스코는 나에게 가까이 있으면서도 이루고 싶은 큰 목표였다. 학창 시절, 친구들의 부모님이 포스코에 다닌다고 하면 가정이 안정적이고 든든해 보이고는 했다. 포스코 산업 단지로 가득한 도시 포항에서, 그들은 단순한 직장인이 아니라 도시 경제와 산업을 움직이는 중심핵으로 여겨졌고, 나 또한 언젠가 그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키워오게 되었다. 이처럼 입사를 결심한 이유는 단순한 동경을 넘어선다. 포스코는 세계 철강 산업을 선도하며 혁신적인 제철 공법과 저탄소 기술을 통해 ‘철을 넘어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 또한 포스코는 나의 가족의 발자취를 잇는 동시에 내 삶을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내 두 번째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입사 후 가장 도전적이었던 순간이라면? 포스코는 단순한 일터가 아니라, 현장에서 배우고 성장하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고, 그만큼의 성취를 느낄 수 있도록 시스템과 문화가 뒷받침되어 있다. 내 회사 생활은 순항보다는 파도 타는 법을 먼저 배운 시간이었다. 입사 후 첫 회식 날, 초년생이었던 나는 낯선 사회생활이 두려워 회식 도중 눈물을 흘린 기억이 있다. 하지만 따뜻한 위로와 배움을 주는 좋은 선배들을 만나, 조금씩 일어서며 나의 첫 일터에 차츰 익숙해졌다. 특히, 되돌아보면 신입사원 OJT 발표대회에서 운 좋게도 전사 1등을 해 제철소장 표창을 받았을 때가 처음으로 큰 성취감을 느끼던 순간이었다. 반면 업무에 열중했던 나머지 허리 건강이 나빠져 크게 고생한 적도 있다. 그런 굴곡 있는 회사 생활 기간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QSS 개선리더’ 활동이었다. 당시 공장별로 QSS 개선리더가 1명씩 선발되어 각각 팀을 꾸렸고, 공장별 지정된 섹터의 설비 개선과 안전 향상을 목표로 활동했다. 나 또한 4개월간 개선리더로서 팀원들과 함께, 공장 내 코일 이송 설비의 성능 복원과 개선을 목표로 활동했다. 일부 부식된 설비가 있었기에 초기 활동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팀원들, 그리고 유관 부서와 협동심을 발휘한 덕에 냉연부 대표로 전사 성과공유회에 진출할 수 있었다. 제철소장님과 임원분들 앞에서 성과를 발표했을 때의 그 긴장감과 성취감은 지금도 선명하다. 그 노력의 결실로 우리 팀은 당시 50기 QSS개선리더를 대표해 생산기술본부장 표창을 받았다. 이 경험을 통해 팀워크가 단순한 협력을 넘어, 서로의 신뢰와 연대가 있을 때 더 큰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또한 다양한 상황들 앞에서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었고, 이는 나를 진정한 포스코인으로 성장하게 한 중요한 과정이었다. - 포항제철소에서 일하면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있는지. ‘영보드(Young Board)’ 위원으로 선발되어 1년간 활동했던 적이 있다. 영보드는 포스코의 젊은 구성원들이 회사의 방향과 내부 정책에 대해 자유롭게 제안하고 소통의 자리를 갖게 해주는 제도이다. 특히, 자주 만나기 어려운 광양제철소와 서울 본사 동료들과 의견을 나누며 색다른 소통을 경험할 수 있었던 점이 인상 깊었다. 경영 업무, 수출 업무, 연구 부문 등 서로 다른 분야의 이야기를 들으며 시야가 넓어졌고, 회사 전체를 바라보는 관점도 생겼다. 특히, 영보드 활동 중 포항 영일대 청송대에서 사장님과 직접 만나 식사하며 대화를 나눴던 시간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그때, 거대한 조직에서도 구성원 한 명 한 명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진정성 있는 리더십을 배우기도 하였다. 이처럼 영보드 활동을 통해 현장의 제안이 정책으로 반영되는 과정을 직접 경험하며, 한 사람의 생각도 조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이 활동은 단순한 제언 프로젝트가 아니라, 소통과 공감, 그리고 실행의 힘을 배우는 시간이었고, 영보드로서 현장과 경영진을 잇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며 더 나은 회사 문화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 자신이 생각하는 회사의 자랑거리는 무엇인지. 나는 회사 복지 중에서도 시즌별로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휴양 시설을 가장 좋아한다. 여름이면 가족과 친지들과 함께 월포 수련원을 찾곤 한다. 깨끗한 시설과 세심한 서비스 덕분에 갈 때마다 괜히 어깨가 으쓱해진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 포스코 수련원에 다녀오는 가족들을 부러워하셨던 기억이 있다. 이제는 내가 직접 어머니를 모시고 그곳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참 뿌듯하다. 가끔은 친구들이 “같이 갈 건데 예약 좀 해달라”며 부탁하기도 한다. - 국내 철강업계의 미래를 책임질 세대로서, 앞으로 어떤 변화나 발전을 기대하는지. 내수 둔화, 수출 관세 압력, 전력 비용 상승 등 복합적인 위기가 현장에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실제로 일부 생산 계획 축소로 실적이 줄고, 현장 흐름이 일시적으로 끊기기도 한다. 이러한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크게 거창한 무엇이 아닌 각자의 위치에서 공정과 업무의 효율성을 한층 높이는 일이라 생각한다. 나는 부서 내 주임님들을 보며 그 태도를 배우고 있다. 주임님들은 ‘현장에서 산다’라고 말씀하시며, 누구보다 현장을 가까이서 보고 느끼고 이해하신다. 또 늘 작은 불편함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개선할 점과 효율화 방안을 직접 제안하신다. 이처럼 현장을 이해하고 문제를 발견하며 함께 개선하는 힘이야말로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며, 내가 그리고 싶은 포스코인의 비전이라 생각한다. 나 또한 현장의 작은 변화가 결국 회사의 큰 혁신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이 있기에 앞으로도 단순히 설비를 ‘운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장을 데이터로 읽고 안전하고 효율적인 공정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 - 앞으로의 포부나 이루고 싶은 목표는? 세상 물정 모르던 스물넷에 포스코에 입사하면서, 내 인생의 두 번째 챕터가 시작됐다. 그저 사회활동을 시작한다는 마음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곳은 나를 사회인으로 그리고 한 사람의 어른으로 만들어 주었다. ‘결혼이나 할 수 있을까?’ 싶던 내가 이제는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고, 내년 4월이면 아빠가 된다. 요즘 들어 책임감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실감하며, 가정을 꾸리고 이끌어가는 선배들이 새삼 다르게 보인다.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현장에서는 실무자의 책임 의식을 갖고 굳건함을 유지하는 선배님들을 보며 내 미래를 그려보고는 한다. 나는 변화하는 현장 속에서도 안전을 가장 앞에 두는 오퍼레이터로 성장하고 싶다. 나부터 안전해야, 동료도, 가정도, 회사도 지킬 수 있다. AI와 자동화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현장의 본질은 결국 ‘사람’이라 생각한다. 기술은 안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을 지켜주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더욱이 기술과 사람을 잇는 ‘스마트 오퍼레이터’로 성장하고 싶다. 회사 내 유능한 동료들과 함께 기술이 사람의 안전을 보조하는 환경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 현장을 스마트하면서도 인간적으로 만들어가는 오퍼레이터가 내가 그리고 싶은 ‘나’이다. 끝으로 이렇게 인터뷰 기회를 통해,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내가 걸어온 길을 다시 한번 되짚을 수 있었고,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일해야 할지 되새길 수 있었던 시간이 된 것 같다. 좋은 기회 주어 감사하다. 포스코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맡은 바 자리에서 꾸준히 성장해 나가겠다. /김진홍경제에디터 kjh25@kbmaeil.com

2025-10-26

2025 포항철강산업대전·스틸에세이 수상자 및 수상 소감

제 13회 철강산업대상 수상자 철강 히어로 상 - (주)디에스아이 김윤수 대표이사 김윤수 대표이사는 철강산업 기반 중소기업의 기술 자립과 국산화를 선도하는 한편, 부산물 재활용을 통한 환경개선으로 지속적인 일자리 창출에 앞장섰다. 또한 포항 철강산업 생태계의 상생과 협력, 안전문화 확산은 물론, 방산과 철강 융합기술 개발을 통해 지역 제조업의 경쟁력 강화에 기여했으며, 사회공헌 활동을 통해 지역사회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소감 이처럼 영예로운 상을 받게 되어 송구하며, 관계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번 수상은 철강산업의 기술자립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모든 철강인과 관계기관의 노고에 대한 격려라 생각합니다. 비록 대외 여건이 어려운 시기지만, 지혜와 협력으로 철강산업이 다시 부흥의 길로 나아가리라 믿습니다. 앞으로도 기술혁신과 상생, 책임경영의 가치를 실천하며 대한민국 철강산업의 위상을 높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철강 프런티어 상 - 엠에스파이프(주) 박력 대표이사 박력 대표이사는 수출국 다변화와 기업의 안정적 성장 기반을 마련하는 한편, 기술력 강화에 힘써 글로벌 경기 침체와 미국의 철강 고관세 정책 속에서도 매출 성장세를 이어갔다. 신기술·신제품 개발에 적극 나서 회사는 물론 국내 철강산업의 수출 경쟁력 강화를 이끌었고, 이를 통한 지역 경제 활성화와 산업 발전에 기여한 점이 높이 평가된다. 소감 수상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세계 경기 침체와 무역 장벽으로 철강업계 모두가 어려운 시기이지만, 이번 상을 수출 기업에 대한 격려와 기대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앞으로도 우수한 품질의 한국산 철강이 해외 시장에서 더욱 안전하게, 더 널리 사용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한 더 넓은 세계에서 인정받는 철강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동반성장 상 - (주)세아제강 홍만기 대표이사 홍만기 대표이사는 ‘협력사의 경쟁력이 곧 기업의 경쟁력’이라는 확고한 동반성장의 철학 아래, 상생과 협력을 기반으로 한 건강한 철강 생태계 조성에 힘써왔다. 또한 협력사에 대한 실질적 지원을 확대하고, 투명하고 상시적인 소통을 통해 공정하고 신뢰 높은 기업문화를 정착시켜 국내 철강산업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동반성장 모델 확립에 기여했다. 소감 2025 포항철강산업대상 동반성장상을 수상하게 되어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는 헌신적으로 동행해주신 협력사 여러분과의 상생 협력, 그리고 사회적 책임의 실천으로 지역 사회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한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상생을 통한 건전한 동반 성장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앞장서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산업통상자원부장관상 - 현대종합금속(주) 김용덕 대표이사 김용덕 대표이사는 투철한 직업관과 안전의식을 바탕으로 무사고·무재해 사업장을 조성해 산업재해 예방에 공헌하며 공정안전관리(PSM) 우수사업장으로 ‘S’등급 인증을 획득했다. 평소 노사 간 소통을 통한 신뢰를 기반으로 상생의 노사문화를 실천하는 한편, 책임 있는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에도 앞장서며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기업문화를 구현했다. 소감 “ 자기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해준 현대종합금속 임직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대내외 어려운 경제 환경 속에서도 노사화합과 신제품 개발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 기업 경쟁력 확보에 힘쓴 결과, 매출 증대와 고용 안정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 지역을 대표하는 기업, 지역에 기여하는 책임있는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경상북도지사상 - 동국산업(주) 박종결 팀장 박종결 팀장은 체계적인 안전보건관리시스템을 구축하여 안전보건 의무 이행 상태를 상시 점검하고, 아차사고 제안제도 등을 운영해 예방활동을 강화함으로써 중대재해 방지에 힘썼다. 본사·현장 합동 순회점검을 통한 위험요인 개선을 주도했으며, 타 사업장의 중대 재해 사례를 공유해 재발 방지 대책 수립과 전사적인 안전문화 정착에 기여했다. 소감 “안전이 최우선 핵심가치”임을 비전으로 삼고 사업장의 다양한 유해∙위험요인을 발굴하고 개선조치를 시행한 결과, 산업재해율이 전년 대비 현저히 감소했습니다. 안전 관련 모든 구성원의 관심과 참여를 바탕으로 자기규율체계 고도화하여 지속가능한 무재해 사업장을 실현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에 헌신한 관리·감독자들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포항시장상 - (주)광우 신현민 수석팀장 신현민 수석팀장은 근면성과 책임감을 바탕으로 맡은 직무에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수행함으로써 매출 증대와 생산성 향상은 물론, 원가 절감에도 크게 기여했다. 꾸준한 기술개발과 솔선수범하는 봉사정신은 동료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지역사회 공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기업의 성장에만 몰두하지 않고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상생과 동반 발전에 힘썼다. 소감 어려운 대외 여건 속에서 매출 감소 위기에 직면했으나, 무엇보다 고객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고객만족도 향상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고객사도 이러한 노력과 기술개발 의지를 적극 지지 협력함으로써 매년 성장을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고객과의 협력과 공동의 위기극복 자세로 제품개발, 품질향상, 원가절감을 위해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김진홍경제에디터 kjh25@kbmaeil.com 제9회 스틸에세이 공모전 - 인간적 온기 소재 진상용 씨 ‘청동 낙타, 한마리’ 대상 전국서 모인 스틸과 관련한 추억 담긴 수필 작품 600여 편 출품 일반 진상용 대상·청소년 정희강 금상·포토에세이 임기순 대상 경북도, 포항시가 주최하고 경북매일신문이 주관하는 철(스틸·steel)을 소재로 한 창작 문학작품 공모전 ‘스틸에세이 공모전’ 제9회 수상자들이 결정됐다. 제9회 스틸에세이 공모전 심사위원회는 지난 15일 심사를 진행, 진상용(72·인천시 부평구)씨가 응모한 수필 ‘청동 낙타, 한마리’를 대상작으로 선정했다고 24일 밝혔다. 일반 부문 대상 작품 ‘청동 낙타, 한마리’는 중동 건설 현장에서 철근공으로 일하며 동료와 쌓은 유대감과 전쟁 속 인간적 온기를 청동 낙타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란 벼룩시장에서 나눈 낙타 한 쌍은 황무지를 오아시스로 바꾸는 희망의 상징으로, 철근 작업과 대비돼 인간 내면의 순수함을 드러낸다. 제목은 물질적 유산 대신 정서적 연대를 강조하며, 개인적 경험을 역사적·사회적 보편성으로 확장한 점에서 높이 평가받았다. 금상은 김용수(포항시 북구 흥해읍)씨의 ‘철근 더미에서 일궈낸 금메달’, 은상은 정현우(포항시 북구 죽도동)씨의 ‘그 녹을 걷어내도’, 동상은 신명순(경기도 여주시 산북면)씨의 ‘철, 따뜻한 숲의 재생을 꿈꾸다’, 차민채(서울시 서초구 서초동)씨의 ‘뜨겁게’ 등이 최종 수상작으로 각각 결정됐다. 가작은 백브리가(서울시 마포구 연남동)·김병윤(제주도 제주시 노형동)·김유환(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차성환(포항시 북구 두호동)씨가 뽑혔다. 청소년 부문 금상을 수상한 정희강(포항영신중 1년) 학생의 ‘시험지보다 무거운 철, 그보다 가벼운 웃음’은 놀이터의 녹슨 철 구조물이 흔들리면서도 제자리를 지키는 모습에서 자신의 불완전함을 직시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다짐을 학생다운 시선으로 담아내며 성찰적이고 단단한 울림을 전하는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은상은 조준호(경기도 분당대진고 2년) 학생의 ‘모루의 기억’, 동상은 박지민(대구 천내중 3년) 학생의 ‘가장 따뜻한 온도의 주전자’, 김단아(충남여중 1년) 학생의 ‘세상의 모든 경첩들에게’ 등이 최종 수상작으로 각각 결정됐다. 가작은 진주한(포항 대동중 1년), 김태민(포항 대동중 1년), 권태훈(포항 대동중 1년) 학생이 뽑혔다. 포토에세이 부문 대상의 영예를 안은 임기순(62·대구시 달성군 화원읍)씨의 ‘어울림의 미학’은 사진과 글이 조화를 이루며 관계가 엮이는 삶의 방식을 따뜻하게 담아냈고, 시각적 메시지와 서사의 깊이를 모두 갖춘 작품으로 호평받았다. 금상은 김미옥(대구시 동구 반야월)씨의 ‘너와 나의 시간’, 은상은 김은희(포항시 남구 대잠동)씨의 ‘신생의 얼굴’, 동상은 정미영(포항시 북구 흥해읍)씨의 ‘철 위에 새겨진 땀’, 황보민준(포항 영신중 3년)군의 ‘자전거 체인’ 등이 최종 수상작으로 각각 결정됐다. 가작은 장병연(경기도 과천시 원문동)·이은정(포항시 남구 오천읍)·문시화(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상동)·곽동근(서울시 성동구 금호동)씨가 뽑혔다. 포항스틸에세이 공모전은 현대문명의 상징이자 한국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돼온 철강산업의 소중함을 함께 나누고 재도약을 기원하기 위해 마련한 전국 유일의 철(鐵·Steel)을 소재로 한 수필 작품 공모전이다. 포항시·경북도 주최, 경북매일신문 주관으로 치러진 공모전은 올해가 아홉 번째다. 지난 7월 21일부터 9월 30일까지 국내외 거주자를 대상으로 미발표된 순수 창작품을 접수한 올해 공모전에는 경북을 비롯 서울, 강원 등 전국에서 스틸과 관련한 추억이 담긴 수필 작품 600여 편이 출품돼 △일반부 대상 1점, 금상 1점, 은상 1점, 동상 2점, 가작 4점 △청소년부 금상 1점, 은상 1점, 동상 2점, 가작 3점 △포토에세이부 대상 1점, 금상 1점, 은상 1점, 동상 2점, 가작 4점 등 모두 25점이 입상의 영예를 안았다. 심사위원회는 “수상작들은 차가운 금속의 이미지를 인간적 이야기로 재해석해 일상의 소중함을 담아낸 훌륭한 작품들로 평가받았다”며 “삶을 치열하게 마주하며 글을 써낸 모든 참가자들의 작품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단단한 울림으로 남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제 9회 스틸에세이 대상 수상 작품 ■ 제9회 스틸에세이 일반부 대상 수상 작품 - 진상용씨 ‘청동 낙타, 한 마리‘ 이룬 것도 없이 일흔 줄의 나이, 생업 일터에서 물러나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가사의 절반을 맡고 있다. 재활용품 분리수거일을 앞두고 집 청소 겸, 생활용품 정리를 시작했다. 자식들 모두 가정을 이루어 나가고 부부만 있다 보니 살림을 줄이게 되는 시기, 쓸모 없어져 내다 버릴 것과 챙겨둘 것들 구분을 두고 생각이 서로 달라 갈등을 빚기 일쑤다. 둬봤자 거추장스러울 뿐이라서 아내 모르게 처분한 것도 꽤 있다. 베란다 안쪽 구석을 정리하던 중, 폐품 더미 속에서 심하게 녹슨 청동 주물 낙타를 발견하였다. 수십 년 전, 수천수만 리 밖의 머나먼 땅에서 왔고 수십 번 옮겨 다닌 이삿짐에 악착같이 따라다니다가 기억에서조차 잊힌 기념품, 금붙이는 아니더라도 잡철보다야 값 낫게 쳐주는 쇠붙이이니 고물상에다 넘기려고 따로 모아두었으리. 1980년대 초, 건설회사 철근 직종으로 해외 취업한 곳은 이라크 북부의 키르쿠크였다. 유프라테스강물을 황무지로 끌어들여 농지화하는 관개수로 공사 현장, 미리 들은 바 있어 단단히 각오하고 왔지만 맞닥뜨린 현실 앞에선 지레 주눅 들고 만다. 잉걸불 태양은 아래 세상 모든 걸 불쏘시개 삼아 태워버릴 기세요, 혹독한 대기 온도 때문에 들숨 날숨마저 괴로울 지경, 지평선 끝에서 내달려온 열풍과, 대지를 뒤덮은 황사와, 갈가마귀 떼 그늘조차 만날 수 없는 극한의 자연환경 속에서 모든 생명들은 절로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각종 공구를 챙긴 다음 허허벌판에 야적된 철근 더미 앞에 마주 선다. 고국의 어느 철강회사에서 생산돼 해양선박으로 터키의 항구에 도착한 뒤, 육로로 운송된 국산 쇳가락들은 나와 비슷한 시기에 떠나온 처지라 반가우면서도 애틋하다. 설계 도면대로 철근을 절단하고, 규격에 맞춰 가공과 배근한 다음 결속선으로 묶어 조립해 나간다. 건축물의 뼈대이자 힘줄 쇠(鐵筋)를 용도에 맞춰 다뤄야 하므로 온몸 근육을 일으켜 세워야 감당될 만큼 노동 강도가 세지만, 그렇다고 완력만으로 상대하려 들면 안 된다. 무거운 데다 땡볕에 달구어진 걸 만지다 보니 물집이 잡혔다 터진 손바닥이 덧나며, 아물며, 굳은살은 점점 단단해진다. 거대 공룡의 골격 같은 철근 구조물이 서서히 모습을 갖춰가고, 최종 작업 끝냈을 때의 성취감. 어떤 ‘쟁이’인들 자기 손끝으로 만든 것들에 대해 나름의 자긍심이 없으랴마는 내 열정 다 쏟아부은 작품이라 더 멋져 보이고, 조감도 없이도 완공 후의 전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숙소 캠프는 물론, 현장엔 장갑차며 대공포 진지를 갖춘 수백 명의 군 병력이 24시간 경비를 해주고 상황이 악화하면 중무장한 탱크들이 이동 대열 앞뒤에서 호위한다. 전쟁 상대국인 이란의 공격도 막아야 하지만 빈발하는 내전 때문이다. 이 지역 토착 종족인 쿠르드 민병대가 자치 독립을 요구하며 대정부 압박 차원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납치 살상, 중장비 방화, 공사 방해 등의 테러를 저지르곤 하니 우리 역시 그들에 대한 인식이 좋을 리 없다. 그날 우리 철근 작업조 몇 사람이 구조물 작업을 위해 수십km 떨어진 현장으로 가게 됐는데 버스에서 식수통을 내려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한번 지나간 순환버스는 점심때나 돼야 들른다. 열풍은 점점 뜨거워지고 혀가 타들어 가는 갈증을 견뎌낼 재간이 없다. 꽤 떨어진 곳에 현지인 가옥이 보였고 현장 막내인 내가 그리로 향했다. 진흙집 안엔 검은 천을 두른 여인이 아궁이 앞에 앉아 뭔가 끓이는 중이다. 변변한 부엌살림도 없는 어둡고 좁은 공간, 그을음 찌든 주전자를 황토 화덕에 얹어놓고, 말린 가축분뇨를 밑불 삼아 온 정성을 쏟는 안주인의 주름진 얼굴. 손짓발짓으로 물을 얻어 현장으로 돌아온 나는 휴식 시간을 이용해 작업하고 남은 자투리 철근을 자르고 구부리고 결속해서 도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현재 있는 거라곤 철근토막뿐이고, 내가 가진 재주라곤 철근 다루는 기술밖에 없다. 어머니가 숯불화로 위에 뚝배기 얹어 끓이던 구멍쇠를 떠올리며 화덕에다 걸쳐놓기 좋도록 기능과 모양을 여러 차례 바꾸고서야 그럴듯한 아궁이용 석쇠가 완성되었다. 빈 물통과 함께 내 솜씨 몽땅 바친 철물을 가져다주었다. 차도르 사이로 고마워하는 진심의 눈빛이 보인다. 얼마 뒤, 여인이 주전자와 컵을 쟁반에 받쳐 들고 온다. 현지어로 ‘챠이’인 홍차다. 내가 만들어준 석쇠 덕분에 조금이나마 끓이기 편해진 데 대한 고마움의 표현일까. 이열치열이라곤 해도 한여름 사막의 뜨거운 음료가 고마울 리 없지만 그들의 손님 대접 문화인 걸 알기에 여럿이 돌아가며 후룩후룩 다 마셨다. 오후 쉴 참에도 난 사막 살림에 편리할 몇 가지 간단한 부엌 기구를 더 만들어 건네줬고 노파는 집 뒤 대추야자와 텃밭의 방울토마토를 새참 시간 맞추듯 내왔다. 작업이 끝날 때까지 여러 날을···. 소외된 곳일수록, 핍박당해 온 사람들일수록 본성은 순수하다. 늘 점령군만 보아왔음에도 낯선 우리를 반갑게 대한다. 착취자가 아니라 도움 주러 왔다는 생각에 더 그럴 것이다. 이곳은 쿠르드족의 거주지역이고 가족이나 친인척, 지인 중의 누군가는 반군일지도 모르지만 참 평화로운 정경이다. 인간 한계의 시험장처럼 혹독한 땅일지언정 자신들의 조국이기에 목숨 걸고 지키며 살고 있는 그들, 이방인인 우리도 거기 적응하고, 땀방울로 사막을 적시면서 애증의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지상 어느 곳, 기후 차이가 얼마든 사람 체온은 36.5℃임을 실감하면서. 공정 순서대로, 가장 먼저 일을 시작한 철근공은 손도 일찍 떼지만 인력 수급이 쉽지 않은 현지 사정상 계약 기간에다 2년 연장근무까지 해서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귀국을 앞두고 동료와 마지막 쇼핑을 나갔다. 전쟁 중인 나라라서 썰렁한 시장 모퉁이에 펼쳐놓은 벼룩 장터, 초라한 행색의 현지인이 내놓은 낙타 한 쌍이 눈에 들어온다. 흥정 없이 구매한 뒤 동료와 하나씩 나눠 가졌다. 사철 흐르는 ‘인공의 강’ 덕분에 불모의 사막이 푸른 오아시스로 바뀌는 미래를 상상하며 귀국길에 올랐고, 수십 년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사는 중간에 연락이 끊어진 동료와 다른 낙타 한 마리는 잘 있을까. 이미 용광로에 들어가서 이 땅의 무엇으로든 재생되었을지도 모를 일. 철 수세미로 낙타 몸통을 정성껏 닦는다. 푸른 녹이 벗겨지고 본디 색깔 서서히 드러난다. 내세울 것 별로 없는 내 이력서 한 칸 증명해 줄 청동 낙타를 장식장 선반 맨 윗칸에다 자리 잡아준다. 움푹 눈 슬퍼 보이지만, 입은 빙긋이 웃고 있다. ■ 청소년부 금상 수상 - 정희강(포항영신중학교 1학년) ‘시험지보다 무거운 철, 그보다 가벼운 웃음’ 시험지를 내던 순간, 손끝이 덜덜 떨렸다. 계산 과정이 빼곡히 적힌 종이는 결국 오답으로 가득했다. 교실 문이 철컥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며 마음을 짓눌렀다. 머릿속이 텅 비고, 온몸이 무거운 철덩이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려던 발걸음은 이상하게도 방향을 바꾸었다. 무의식처럼 향한 곳은 오래전에 친구들과 웃으며 놀던 녹슨 놀이터였다. 기억 속의 철 구조물들이 나를 불러내는 듯했다. 놀이터에 들어서자, 삐걱거리는 그네와 벗겨진 페인트가 눈에 들어왔다. 한때 반짝이던 철봉은 이제 붉은 녹이 스며들어 있었다. 미끄럼틀의 표면은 갈라진 금속 결처럼 거칠었고, 철제 울타리는 휘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낡음 속에서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완벽했던 기억이 아니라, 상처 입고 변한 모습이 오히려 지금의 나와 닮아 있었다. 실패의 흔적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철이, 내 마음을 대신 말해주는 듯했다. 나는 조심스레 철봉을 잡았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냉기는 순간적으로 정신을 맑게 했다. 그 철은 예전에도 분명 차가웠을 텐데, 어린 시절에는 그 차가움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저 오르내리며 몸을 흔드는 재미에 빠져 있었을 뿐이다. 지금은 그 차가움이 현실의 무게처럼 다가왔다. 시험, 성적, 기대. 어릴 적에는 몰랐던 쇳덩이 같은 단어들이 마음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철봉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철은 강하지만 영원하지 않다. 시간 앞에서는 녹슬고 갈라진다. 그러나 그 흔적조차 하나의 무늬가 된다. 나는 철의 그 상처에서 묘한 위로를 받았다. 시험에서 실패했다고 해서 내 삶 전체가 무너지는 건 아니었다. 녹슨 철이 여전히 구조를 버티고 있듯이, 나도 버틸 수 있었다. 철의 단단함과 녹의 연약함이 공존하는 모습은 마치 인간 같았다. 나는 그 사실을 철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네에 앉아 발을 굴렀다. 삐걱거리는 체인이 내 몸을 위아래로 흔들며 낡은 철문이 열리듯 소리를 냈다. 어릴 때는 그 소리가 음악 같았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기분을 주었다. 지금은 어쩐지 내 마음을 두드리는 위로의 종소리 같았다. 쇠사슬이 오래되어 불안정해 보였지만,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었다. 마치 불완전한 나를 지탱하는 힘처럼. 나는 눈을 감고 바람을 맞으며, 그 삐걱임에 몸을 맡겼다. 햇살이 놀이터 철골 사이를 뚫고 들어왔다. 금속에 부딪힌 빛이 반짝이며 녹과 함께 빛났다. 누군가 보기에 낡고 버려진 풍경일지 몰라도, 내 눈에는 살아 있는 듯 보였다. 시험의 실패로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조금씩 풀어졌다. 금속에 부딪히는 빛은 마치 내 안에도 아직 가능성이 있다는 듯 신호를 보냈다. 철이 빛을 머금듯, 나도 새로운 의미를 품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철은 단단해서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서서히 약해진다. 그 모습이 지금의 나와 닮아 있었다. 완벽할 거라 믿었던 자신감이 조금씩 녹슬고 있었다. 그러나 철이 녹이 슬어도 제 자리를 지키듯이, 나 또한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강함은 완벽에서 오는 게 아니라, 오래 버티는 데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놀이터의 철 구조물은 그 단순한 진실을 묵묵히 가르쳐주고 있었다. 그네를 매달고 있는 철사 줄을 올려다보았다. 곳곳이 갈라져 있었고, 금속이 닳아 있었다. 아이였을 땐 그 위태로움조차 모르고 하늘 끝까지 올라가려 했다. 지금 다시 타보니, 그 위태로움이 삶과 닮아 있었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불안정 속에서도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철사 줄은 삐걱대며 흔들리지만 여전히 나를 지탱했다. 그 불안정한 버팀이, 오히려 더 진실하게 느껴졌다. 놀이터 한쪽에는 쓰러진 철제 울타리가 있었다. 그 위에 누군가 분필로 낙서를 남겨 두었다. “웃어라.” 단순한 두 글자가 녹슨 철판 위에 하얗게 새겨져 있었다. 낡은 철과 대비되는 그 글씨는 오히려 선명했다. 시험지의 붉은 X표보다 훨씬 힘 있는 문장이었다. 웃으라는 명령은 억지 같지만, 그 순간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녹슨 철이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지만 진심이었다. 나는 미끄럼틀 꼭대기에 올라섰다. 철제 계단은 삐걱이며 불안정했지만, 발을 내디딜 때마다 익숙한 기억이 따라왔다. 꼭대기에 서니, 작은 놀이터가 세상을 내려다보는 무대처럼 보였다. 철판은 여전히 차갑고 불편했지만, 그 위에 앉아 바람을 맞으니 마음이 환해졌다. 아이처럼 두 손을 벌리자 실패의 무게도 바람결에 흩날렸다. 철은 그대로인데, 그 위에서 바라보는 나는 변해 있었다. 시험 점수는 종이 위의 숫자로만 남는다. 잉크로 새겨진 그 숫자는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 그러나 놀이터의 철 구조물은 차갑지만 따뜻하게 다가왔다. 같은 금속인데도, 하나는 나를 억누르고 하나는 나를 품어준다. 나는 그 차이를 손끝으로 느끼며 앉아 있었다. 시험이 나를 규정하는 철장 같았다면, 놀이터의 철은 나를 기억 속 자유로 이끌었다. 그것만으로도 숨통이 조금 트였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녹슨 볼트를 주워 들었다. 작고 쓸모없어 보였지만, 한때 거대한 구조물을 지탱하던 힘의 일부였을 것이다. 작아도 버팀목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 나 역시 지금은 실패에 눌려 있지만, 언젠가 누군가의 버팀목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볼트를 주머니에 넣으며 다짐했다. 철이 완벽하지 않아도 제 역할을 하듯, 나도 내 자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 놀이터 철봉 위에 새겨진 이름들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지나 글씨는 희미했지만, 여전히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어린 날의 우리도, 그곳에 존재했다는 증거였다. 시험 점수는 사라져도, 이런 흔적은 오래 남는다. 철이 기억을 붙잡아 두듯, 놀이터는 내 안의 웃음을 붙잡아 주었다. 나는 그 흔적들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잊고 있던 나의 일부를 되찾는 기분이 들었다. 해가 기울며 철 구조물들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그림자 속에서 나는 여전히 작은 아이처럼 느껴졌다. 실패도, 성적도, 미래도 잠시 멀어졌다. 녹슨 철 놀이터는 내게 두 가지 얼굴을 보여주었다. 하나는 차갑고 낡은 현실의 흔적, 다른 하나는 여전히 나를 품는 따뜻한 기억의 그릇. 나는 그 두 얼굴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놀이터를 떠나려 할 때, 철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닫혔다. 마치 나를 보내기 싫다는 듯한 소리였다. 그러나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실패는 철처럼 무겁지만, 시간 속에서 녹슬어 흔적이 될 것이다. 그 흔적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철 놀이터가 버텨왔듯, 나도 버틸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 철 같은 기억이 내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 될 것이라 믿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 포토에세이 부문 대상 작품 - 임기순씨 ‘어울림의 미학’ 바늘꽂이에는 굵은 바늘, 가는 바늘, 긴바늘, 짧은 바늘들이 서로 어울려 빛나고 있다. 모두 각자의 역할과 가야 할 길이 있듯이, 우리도 저마다의 개성에 따라 쓰임새가 다르다. 나는 작고 뾰족한 바늘이었다. 존재감을 찾으려고 혼자 발버둥 칠수록, 그저 날카로움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만 줄 뿐이었다. ‘혼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깊은 허무함이 밀려왔다. 그래서 우리네 어머니의 반짇고리에는 바늘과 실, 헝겊이 늘 함께 있었나 보다. 혼자 앞만 보고 달리던 나는 헐떡이며 뒤돌아보았다. 지나온 길마다 상처 구멍만이 빠끔빠끔했다. 그때, 누군가의 따스한 손길이 나를 일으켜 세웠고, 나는 실과 인연이 되었다. 실과 한 몸이 되니 따스함이 찾아온 듯하였으나, 곧 답답함에 빠졌다. 우두커니 붙어있자니 서로 엇갈리고 엉키고 꼬일 뿐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그때 맞잡은 손길에 의해 헝겊을 만났다. 헝겊은 일구고 가꿔야 할 대평원이 되어 눈앞에 펼쳐졌다. 헝겊 위에서 한 땀 한 땀 나아가다 보니, 엇갈림도 얽힘도 사라지고 제 위치와 속도를 찾으면서 부지런히 걸을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는 헝겊 조각을 잇대어 만든 조각 보자기, 상보, 이불, 원피스 같은 창작품이 빛나고 있었다. 한 소녀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자기만의 원피스를 입고 사뿐사뿐 춤을 춘다. 우리네 어머니는 이런 창작활동을 통해 우리를 키워주셨다. 혼자가 아닌 함께 손잡고 나아가는 것. 바늘이 실과 어울려 헝겊 위에서 한 땀 한 땀 이어간 길들이 결국 아름다운 창작품으로 피어난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어울림의 미학이라는 것을 바늘은 이제야 깨달았다. 심사평 - ‘철’을 소재로 다채로운 서사 꽃피워 ‘스틸에세이 공모전’은 ‘일상에서 만나는 철의 다양한 모습과 철의 숨은 이야기’라는 분명한 주제를 제시한다. 이 공모전은 차가운 금속에 불과한 ‘철(鐵)’이 어떻게 인간의 일상과 감정에 스며들어, 또 다른 언어와 서사로 태어나는가에 주목한다. 철이라는 소재를 통해 삶의 장면을 포착하고, 이를 문학적 언어로 끌어올리는 과정이 곧 작품의 깊이를 결정짓는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제9회 스틸에세이 공모전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을 중심에 두고 작품을 탐독하였다. 일반부 작품은 철을 단순한 소재가 아닌 삶의 상징으로 재해석하는 데 집중했다. 대상작인 진상용(인천)의 ‘청동낙타, 한 마리’는 해외 파견 노동자의 경험을 통해 철을 인간적 존엄과 공동체적 기억으로 승화시켰다. 개인의 체험을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한 통찰력이 돋보인다. 청소년부는 철을 성장과 관계의 상징으로 재해석해 신선한 시각을 보였다. 금상 정희강(포항영신중 1년)의 ‘시험지보다 무거운 철, 그보다 가벼운 웃음’은 녹슨 놀이터에서 불완전함과 대면하는 청소년의 내면을 섬세히 포착했다. 특히 철을 삶의 균열과 성장의 은유로 풀어내 눈길을 끈다. 포토에세이는 사진과 글이 함께 동반되는 장르로, 시각적 이미지와 서사가 어떻게 어우러져 하나의 메시지를 완성하는지에 중점을 두고 심사했다. 사진이 시선의 출발점이 되고, 글이 시선을 깊이 있게 확장하며, 철의 다양한 얼굴과 이야기를 새롭게 발견해 낸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번 공모전은 ‘철’을 소재로 서로 다른 삶과 시선이 만나 다채로운 서사를 꽃피웠다. 차가운 금속 위에 각자의 온기를 새긴 응모작은 이 시대의 흔적이며, 삶을 기록한 소중한 기억의 조각이다. 수상자의 성과뿐 아니라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치열하게 삶을 마주하며 문장을 빚어온 모든 이들의 이야기가 오래도록 울림으로 남기를 바란다. 철이 세월을 견디며 본연의 자리를 지키듯, 그 문장들도 오랜 시간 기억 속에 살아 숨쉬리라 믿는다. /심사위원 양진오(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신용목(계명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박시윤(답사기행에세이작가)

2025-10-23

“맞춤 양복은 제 인생의 전부입니다”

“양복업자들은 대개 인물도 몸매도 좋았어요. 양복 입고 넥타이 매고 근무하니 다들 멋있다고 했죠. 그런데 속은 다 문드러져 있었어요. 선배들 중에 70대에 세상 떠나신 분이 많아요. 양복지(洋服地)에 워낙 먼지가 많으니까요.” 1980년대 이후 기성복 선호 경향이 뚜렷해졌다. 88올림픽 이후 국내 양복의 역사가 맞춤식에서 기성복 시대로 바뀌면서 맞춤 양복점은 쇠퇴기로 들어섰다. 한창때에는 150여 곳에 달했던 포항의 맞춤 양복점은 지금 죽도시장, 중앙동 등에 서너 곳만 남았다. 그 많던 양복 기술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권창화 재단사에 따르면, 포항 시내 양복점 절반 정도는 세탁업으로 전환했다. 손재주가 뛰어난 양복사는 수선을 병행하는 세탁소로 성공하기도 했고, 일부는 프랜차이즈 양복점으로 업종을 바꿨다. 급변하는 시장에서 생존하려면 업종을 전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맞춤 양복업 호황 대기업 뛰어들며 급변 멋진 배우 기성 양복 광고… 고객들 이탈 결정타는 IMF 사태… 업종 사라질 위기 “내 몸에 딱 맞는 옷 어디서도 찾기 어려워” 맞춤 양복을 경험한 이들 그 매력 푹 빠져 기성복과 달리 한 사람을 위한 작품이기에 재단사로 일한 지 올해로 48년째인 권씨 첫 직장이자 지금까지 이어온 그의 인생 “값을 매길 수 없는 정성, 인정받는 날 오길” 맞춤 양복, IMF 때 결정타 맞아 권 재단사는 맞춤 양복업의 호황이 계속될 줄 알았다고 회고했다. “젊을 땐 술을 좀 했습니다. 해만 빠지면 친구 예닐곱이 가게 앞에서 기다렸어요. 권창화한테 가면 술 얻어먹는단 소문이 돌았거든요.” 당시 그의 가게 앞 풍경은 호황을 상징적으로 알려준다. 권 재단사는 “88올림픽 이후 이삼 년은 그래도 괜찮았다”고 한다. 하지만 LG패션, 반도패션 등 대기업들이 양복업계에 뛰어들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텔레비전 광고에 멋진 배우들이 나와 기성 양복을 광고하면서 맞춤 양복 고객이 대거 빠져나갔다. 초기에는 이른바 메이커 양복이 비쌌지만, 시간이 지나자 가격이 역전되고 격차도 벌어졌다. 결정타는 1997년 IMF 사태였다. 맞춤 양복 종사자 수가 급감하면서 업종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매년 발간되는 『한국직업사전』에는 1950년대부터 맞춤 양복 관련 직종이 수록되어 있다. 1980년대 『한국직업사전』에는 맞춤 양복공, 의복가봉공, 맞춤 양복 견습생이 수록되어 있지만, 2000년대에는 양복 관련 직업으로 ‘양복제조원’만 수록되어 있다. 세분화한 양복 관련 직종을 모두 합쳐 부르는 말이다. 2010년에는 ‘양복사’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재단사와 봉재사가 모두 합쳐진 직종이다. 견습생 직종이 사라진 것에서 맞춤 양복의 흥망과 직업 선호도를 가늠해볼 수 있다. - 정붓샘, 「노포의 탄생」, 『100년의 테일러, 종로양복점』, 국립민속박물관, 2014, 130쪽. 1990년대에 기성 양복이 전체 양복 소비의 80퍼센트를 차지하면서, 맞춤 양복업계는 급격히 위축되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양복점 1500여 곳이 폐업하고, 업계 종사자 약 18만 명이 이탈했다. 권창화양복점도 예외가 아니어서 IMF 이후 다섯 차례나 자리를 옮겨야 했다. IMF 이후 구 포항역전으로 이전했다가, 2000년에는 건물주가 건물을 매각하면서 구 역전파출소 앞으로 옮겼다. 이후 중앙상가 확장으로 2002년 신흥동으로 내쫓겼다가, 2007년 구 포항전화국 앞 현 위치에 정착했다. 가게를 옮겨다니는 과정에서 상패를 모두 내버렸다. 현실이 팍팍하니 한때의 영광이 부질없어 보였다. “노포가 인정받는 시절이 올 줄 알았으면 남겨둘 걸 그랬어요.” 권 재단사는 지난 20년 동안 양복업을 접을지 말지 수없이 고민했다. 돈이 되는 업종으로 전환해보려고 가족이 나서 신시가지 유동 인구를 조사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아내에게 큰 병이 찾아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기성복과의 가격경쟁 위해 ‘반맞춤’ 방식 도입 현 위치에 정착한 뒤에야 비로소 숨을 고른 권 재단사는 시대 흐름에 발맞춰 다양한 변화를 모색하며 명맥을 이어왔다. 먼저 꺼낸 카드는 고급화 전략이다. 그는 과감하게 이탈리아 명품 원단을 들여오고, 실력 있는 기술자에게 공임을 더 얹어주며 품질을 끌어올리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지역에서 300만 원에 이르는 맞춤 양복을 구매할 만한 고객층이 두텁지 않았던 것이다. 원단 공급업체는 최소 열 벌 이상을 구입해야만 견본 책자를 제공한다는 조건을 내세워 부담은 늘어갔다. 끝내 판매하지 못한 원단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 정도다. 한편으로 기성복과의 가격경쟁을 위해 새로운 시스템도 도입했다. 재단된 옷감을 전문 재봉회사에 위탁해 제작하는 MTM(Made to Measure) 방식, 즉 반맞춤 방식이다. 이지오더(easy order)라고도 불리는 방식으로 미리 정해진 디자인과 원단으로 체형별 표준 치수에 맞춰 옷을 생산한다. 가봉 과정이 생략되니 신속하고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권 재단사는 한국기능올림픽과 일본기능올림픽 수상 경력의 재봉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품질 좋은 양복을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국산 원단 기준 120만∼150만 원대 맞춤 양복을 절반 비용에 제공할 수 있어 가격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물론 시스템이 아무리 좋아도 베테랑 재단사의 눈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표준 체형은 무리가 없었지만 특수 체형은 품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재단사의 손이 일일이 닿지 않는 시스템으로는 고객이 100퍼센트 만족하는 양복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맞춤옷이란 좋은 자리를 빛내기 위해 큰맘 먹고 해 입는 옷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허투루 작업할 수 없죠. 고객이 좋은 자리에서 귀한 대접을 받도록 하는 일이니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포항의 최고령 현역 재단사 누군가의 옷을 만들어 입히는 일은 수없이 해온 작업이지만 여전히 신경이 곤두서는 순간의 연속이다. 미세한 주름 하나를 다듬고 고쳐 세우느라 세월 가는 줄 몰랐다. 원단을 재고, 자르고, 꿰매고, 다시 뜯기를 거듭하는 동안 손가락은 늘 얼얼하고 시렸다. 그렇게 50년을 매달려왔지만, 지금도 한 벌 한 벌에 온 힘을 쏟아붓는 긴장감은 변함없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찾아주는 고객들이 있어 힘들고 고된 시간을 잊게 된다. 얼마 전에는 포항 해병대 청룡회관에서 근무했던 고객이 15년 만에 연락을 했다. “이리저리 유명한 곳을 다녀봐도 내 몸에 딱 맞는 옷을 찾기 어렵다”며 다시 주문을 의뢰한 것이다. 이처럼 한번 맞춤 양복을 경험한 사람은 그 매력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몇 가지 패턴으로 만들어지는 기성복과 달리 단 한 사람을 위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오랜 단골손님들을 마주하면 그들에게도 여지없이 흘러간 시간의 흔적을 발견한다. 처음 발길을 했던 청년이 중년으로 접어들고 이제는 장성한 아들을 데려와서 양복을 맞춰주는 모습을 본다. 대를 이어 맞춤 양복의 품격을 입혀주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에 더 정성을 들인다. 재단사로 일한 지 올해로 48년인 권 재단사에게 맞춤 양복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보면 제 인생의 전부입니다. 군 제대 후 첫 직업이었고 모든 걸 바쳤어요. 지금까지 먹고살아온 것도 양복 덕분이죠. 그래서 정리해야 할 나이인데도 붙잡고 있어요.” 권 재단사에게 양복은 인생 그 자체다. 양복점이 첫 직장이었고 가족을 먹여 살렸고 지금까지도 놓지 못하니 마지막 직장이 될 것이다. 권 재단사는 포항의 현직 재단사 가운데 최고령자다. 그는 돈으로는 값을 따질 수 없는 정성이라는 가치가 인정받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오늘도 권창화양복점을 지킨다. 〈끝〉 글 : 배은정(소설가) 사 진 : 김 훈(작가)

2025-10-22

천년고도 불국사의 가을, 불국토를 품다

경주라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천년고도의 깊은 숨결이고, 그 중심에 우뚝 선 토함산과 남산은 마치 거대한 역사박물관과도 같다. 토함산 자락을 따라 오르면 불국사의 장엄한 기와가 햇살을 받아 빛나고, 다보탑과 석가탑은 천년 세월을 묵묵히 지켜온 지혜의 상징처럼 서 있다. 토함산 정상에서 동해를 바라보고 있는 석굴암은 고요히 부처의 미소를 간직한 채 세상의 번뇌를 감싸안는다. 토함산과 남산은 산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신라인의 정신과 예술, 그리고 우리 민족의 혼을 품은 살아 있는 시간의 성전이다. 불국사 가는 토함산 끝자락에 뿌리내려 키 17m·몸둘레 6m·앉은자리 폭 29m 700년 오랜 세월 살아온 마을의 큰 어른 정자·복지회관 품고 사람들 삶 속에 녹아 나누는 담소·두 손 모아 기도하던 간절함 아이들 해맑은 미소까지 고스란히 스며 토함산 자락에 자리한 가을의 불국사는 그 이름처럼 불국토를 옮겨 놓은 듯 장엄하면서도 서정적이다. 단풍잎이 금빛과 붉은빛으로 물들어 경내를 수놓으면, 청아한 기와지붕 위로 흩날리는 낙엽은 천년 세월을 품은 고즈넉한 숨결과 어우러져 한 폭의 수묵화를 이룬다. 석가탑과 다보탑은 가을 햇살 속에서 더욱 단단히 빛나며, 경내를 거니는 발걸음마다 신라인이 꿈꾸던 이상향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불국사의 가을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머무는 불심과 평화의 빛을 일깨워 주는 순간이다. 불국토의 상징인 불국사로 가는 토함산 끝자락 마동 588번지, 하천 변에 뿌리를 내린 느티나무 노거수 한 그루가 살아가고 있다. 그는 700년 세월을 살아온 마을의 어른이다. 키 17m, 몸 둘레 6m, 앉은 자리 폭 29m나 되는 거인의 노인이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된 노거수는 정자와 복지회관을 품고 있다. 이제는 마을 사람들의 삶 속에 녹아든 존재가 되었다. 주민들은 그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다. 세 개의 지팡이를 선물하여 노령의 몸을 지탱하게 했다. 그리고 작은 원통형 돌담을 경계로 함부로 접근을 금지했다. 나무 아래 제단을 만들어 매년 정월 대보름날에 동신제를 지내며, 마을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한다. 세월 앞에 조금씩 속을 비워내며 쇠약해지는 듯 보이지만, 느티나무는 여전히 제 역할을 잃지 않는다. 한 줄기에서는 먼저 잎이 돋고 꽃이 피어나고, 다른 줄기에서는 늦게 잎과 꽃이 터져 나오니, 같은 뿌리이되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묘한 대비가 눈길을 끈다. 보기에 따라 한 나무인 것 같기도 하고 두 나무가 하나의 나무로 된 연리목 같기도 하다. 뿌리는 분명히 하나로 연결된 연리근 나무일 것이다. 나무줄기 높이 2미터에서 다섯 가지가 뻗어 올라 서로 얽히고 합쳐진 연리목의 나무임이 분명해 보였다. 주민들은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크기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회상하고 있다. 잎의 크기와 무성함이 줄어든 것을 보며 나무의 나이를 실감한다. 비 오는 날이면 줄기 속에서 스며 나온 물이 고여 흐른다는데, 그 빈속조차 생명을 품은 흔적처럼 여겨진다. 불국사가 가까이 있는 이곳에서, 마동 느티나무는 세월의 집, 사람들의 기도를 담아온 신목(神木)으로 남아 지금도 조용히 마을을 품고 있다. 뿌리에서 갈라져도 결국 함께 어깨를 맞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닮았다. 나무의 곁에 앉으면 자갈이 깔린 바닥 너머로 잔잔히 흐르는 하천의 물소리와 함께 천년고도의 숨결이 들려오는 듯하다. 마을이란 집들이 모여 있는 거주지만은 아니다. 세월의 결을 따라 전통과 기억이 겹겹이 쌓여 형성된 공동체이기도 하다. 그 한가운데 서 있는 노거수는 마을의 얼굴이자 품격을 드러내는 기둥으로, 수백 년 동안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며 마을의 역사를 증언한다. 지도 위의 작은 점에 불과한 마을은 노거수를 통해 이름과 이야기를 얻고, 외부에 그 존재의 위상을 드러낸다. 노거수가 없는 마을은 제단 없는 의식과 같아 중심이 희미하고, 광장이 없는 도성처럼 모임의 자리가 비어 있다. 그러나 노거수가 있는 마을은 그 자체로 풍경이 되어, 아늑한 그늘과 푸른 수관이 마을을 감싸안으며 사람들에게 안도와 휴식을 준다. 웅장한 수형은 마을의 품격을 한층 높이고, 사계절의 빛을 담아내며 마을 경관을 풍성하고 풍요롭게 한다. 결국 한 그루의 노거수는 마을의 정신을 세우고 삶을 아름답게 꾸며주는 문화적 상징이자 공동체의 심장이다. 마을의 노거수는 오랜 세월 한자리에 서서 주민들의 삶을 지켜본 따뜻한 증인이다. 그늘에 모여 담소를 나누던 이들의 웃음소리, 제의를 올리며 두 손 모아 기도하던 간절한 마음,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까지 모두 나무의 가지와 잎새 속에 고스란히 스며 있다. 노거수는 바람과 비를 막아주는 보호막이자, 사계절마다 색을 달리하며 주민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건네는 마을의 큰 품이다. 그 존재만으로도 노거수는 마을 사람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준다. 굵은 줄기와 드넓은 수관은 마을의 품격을 높이고, 그 아늑한 그늘은 언제나 열려 있는 쉼터가 된다. 농사일에 지친 어른에게는 평온을, 뛰노는 아이에게는 자유를, 외지인에게는 마을의 아름다움과 따스한 기운을 선물한다. 이렇듯 노거수는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공동체의 마음을 한데 모아주는 살아 있는 기둥이자 감동의 근원이다. 노거수는 마을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교육적이고 정서적인 스승이 된다. 그 그늘에 어른들은 옛이야기를 들려주며 역사를 전하고, 아이들은 자연의 이치를 배우며 자란다. 세월을 견뎌온 굳건한 줄기는 인내와 끈기를 가르치고, 사계절 따라 변하는 수관은 삶의 무상함과 조화의 아름다움을 일깨운다. 또한 그 아늑한 품은 사람들에게 위안과 평온을 주어, 마음을 달래고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정서적 균형을 길러준다. 마을 노거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우주이자 생명의 집합체이다. 굵은 줄기의 갈라진 틈은 올빼미와 딱따구리의 보금자리가 되고, 무성한 수관은 여름의 햇볕을 가려 새와 곤충들에게 그늘을 내어준다. 떨어진 잎은 땅으로 돌아가 흙을 살찌우고, 그 속에서 곤충과 균류가 자라나 또 다른 생명의 터전을 마련한다. 한 그루의 나무가 품은 공간은 수많은 종에게 삶을 잇는 다리가 되어, 보이지 않는 생명의 사슬을 이어준다. 이렇게 느티나무는 마을 생태계의 심장으로 뛰고 있다. 바람을 흡수하고 뿌리로 물길을 잡아 토양을 지탱하며, 그늘은 미세 기후를 조절해 사람과 생물 모두에게 안온한 환경을 마련한다. 거대한 수형 속에서 이어지는 생명들의 공존은 마치 교향곡처럼 조화롭고 서정적이다. 그래서 노거수 앞에 서면, 생명이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거대한 순환과 자연의 질서를 마주하게 된다. 경주에서 열리는 2025년 APEC 정상회의는 세계가 모여 미래의 협력과 지속가능성을 논의하는 자리이지만, 그 무대 뒤에는 천년고도 경주가 품은 자연자산이 살아 있다. 오랜 세월을 견뎌온 노거수들은 인간의 문명을 넘어선 생명의 시간과 기억을 간직한 존재들이다. 경주의 노거수와 숲을 세계에 드러내는 일은, 인류가 함께 지켜야 할 지구 공동의 유산임을 알리는 가장 강력한 언어가 아닐까 싶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노거수의 외과 수술 지역에 잔존하는 노거수는 그 지역 삼림의 임령(林齡)보다도 훨씬 수령(樹齡)이 오래된 경우가 많다. 지역에서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유일한 고령의 잔존 생물체이며, 고령의 생물체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생물 종들에게 유일한 삶의 터전으로 기여하는 핵심 서식처 자원(생물 종과 개체들의 서식을 제어하는 생태적 요소는 조건과 자원이며, 조건이 무제한이라면 자원은 소모되어 버림으로써 제한적 요소임)이다. 올빼미류와 딱따구리류는 노거수를 필요로 하는 조류들이며, 엄청난 수의 분해자들은 노거수에 의존한다. 향토 문화적 요소로서 잔존하는 노거수일지라도 노거수 개체에 대한 생태학적 접근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늙은 개체는 필연적으로 분해자들에 의하여 썩어가는 부위가 발생할 수 있다. 이처럼 보다 노쇠한 노거수 개체에서 관찰되는 생태적 메커니즘에 ‘외과수술’이라는 인위적 노거수 관리는 그러한 조류들의 서식을 크게 위협하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민속적 목적에 의한 노거수의 경우 적절한 외과수술이 적용될 수도 있다. 해당 노거수에 대한 주요 생물종의 서식 상황에 대한 모니터링을 통한 면밀한 생태적 조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2025-10-22

외국에선 어떤 닭 요리를 먹을까

한국은 닭을 맛있게 요리하는 나라다. 몇 해 전부턴 세칭 ‘K-푸드’의 하나로 조각내 튀긴 닭에 매콤달콤한 양념을 바른 게 지목됐고, 적지 않은 외국인들이 서울과 부산, 경주와 제주에서 그걸 맛보며 만족해하는 모습이 TV 전파를 타기도 했다. 아시아는 물론, 미국과 유럽 몇 개 도시엔 최근 들어 한국식 양념통닭을 판매하는 식당이 생겨나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닭은 한국만이 아니라 다른 국가 어느 곳에서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다. 그렇기에 동서양을 불문하고 다양한 닭 요리는 수백 년 전부터 있어 왔다. 일본의 닭튀김인 ‘가라아게’는 한국에도 안주로 판매하는 주점이 적지 않고, 중국 남부에서는 오래전부터 닭고기에 팔각, 육두구, 생강 등의 향신료를 더해 ‘자지가이(炸子雞)’를 만들어 먹었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무슬림이 많은 인도네시아도 닭을 통째 튀겨 ‘아얌 고렝’이라 부르며 맛있게 먹는다. 당연하게도 대다수의 이슬람 국가는 닭고기의 주요 소비국이다. 닭 날개를 매운 후추 소스에 발라 튀긴 ‘버펄로 윙’은 미국에서 시작된 요리로 알려졌고, 인도는 각종 향신료와 버터를 넣어 오랜 시간 끓인 닭 스튜를 즐긴다. 붉고 선명한 토마토의 주요 생산지 가운데 하나인 스페인에선 ‘토마토 닭조림’을 만들고, 이건 유럽인들에게 익숙한 음식이다. 그 외에도 프랑스의 코코뱅, 필리핀의 아도보(Adobo) 역시 닭을 재료로 만들어지는 요리. 앞으로는 또 어떤 새로운 닭 요리가 만들어져 사람들의 미각을 유혹할지 궁금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0-21

청도 별미 ‘옹치기’를 아시나요?

몇 해 전이다. 고색창연한 운문사 풍광이 좋고, 끈적끈적 달콤한 반시가 혀를 녹이는 경북 청도에 갔다. 군청 직원을 만나 물어볼 게 있었다. 일 때문에 갔고, 급히 돌아와야 했으나 점심을 굶을 수는 없는 노릇. 사람이 하는 대부분의 행위가 다 먹고살자고 버둥대는 짓인데. 옹그리고 있는 닭에서 비롯된 ‘옹치기’ 맹물에 삶은 닭을 간장 양념으로 조려 찜닭과 비슷하지만 당면은 넣지 않아 청도 방문땐 ‘옹치기 조림닭’ 맛보길 청도군청 직원에게 물었다. “점심때가 좀 지나긴 했는데, 어디 괜찮은 식당 없나요?” 질문을 받은 사람이 옆 자리 동료를 힐끗 보며 동의를 구하듯 말했다. “옹치기가 좋겠지?” 처음에는 옥호(屋號)인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란다. 음식 이름이라고 했다. 50년 넘게 살아오며 먹어보거나 들어보지 못한 음식이다. 궁금증이 일었으니 당연지사 이렇게 물어볼 수밖에. “옹치기? 그게 뭔데요?” 흔한 재료로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요리를 만들어내는 건 어려운 일이다. 상어의 지느러미나 거위의 간, 이탈리아 특정 지역에서 채취한 송로버섯 등은 이미 재료의 희귀성과 이름값만으로도 만들어질 요리에 관한 기대치를 높인다. 그리고, 솔직히 고가의 재료를 사용하면 비단 일류 셰프가 아닌 누구라도 그럴듯한 먹을거리를 만들어내는 것 아닌가? 정성 들여 잘 기른 한우나 일본 와규가 숯불에 구워도 맛있고, 가스불에 구워도 근사한 맛을 내는 것처럼. 이야기가 멀리 갔다. 다시 청도군청으로 돌아가자. 옹치기가 뭔지 묻는 우리 일행에게 돌아온 대답은 “안동찜닭하고 비슷한데, 당면이 들어가지 않는다”였다. 주인장에게 요리 이름을 그렇게 붙인 이유가 뭔지 물어보려면 가볼 수밖에 없었다. 군청 공무원과 인사하고 차에 올랐다. 다행히 ‘옹치기’를 파는 식당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닭은 지구 위에서 가장 흔해빠진 식재료 중 하나다. 어느 정도냐? 최근 조사에 의하면 1년 동안 도축돼 사람들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닭은 약 600억 마리. 한국에서만 1억2천만 마리가 넘는다. 길러서 잡아먹기까지 걸리는 기간도 짧아서 1~2개월이면 충분하다. 종교적 금기 탓에 무슬림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힌두교도는 소고기를 안 먹는다. 그러나, 그들 모두 닭고기는 사양하지 않는다. 육식에 대한 열망은 인간의 본능 가운데 하나 아닌가. 2005년 초여름엔 인도를 한 달쯤 돌아다녔고, 2011년 5월엔 이란을 17일간 여행했다. 알다시피 인도는 힌두교도가, 이란은 시아파 무슬림이 국민의 절대다수다. 그랬기에 인도에선 소고기구이 식당을 보지 못했고, 이란 사람들은 “한국인은 돼지고기를 즐긴다”는 기자의 말에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지사 이란엔 삼겹살집이 없다. 그래서였다. 누구보다 육식을 좋아하는 기자는 ‘꿩 대신 닭’ 아니, ‘소·돼지 대신 닭’이란 심정으로 인도에서도 이란에서도 엄청나게 많은 양의 닭고기를 먹었다. 한국과 비슷하게 두 나라 모두 닭 요리법이 다양했다. 기름에 튀기고, 큰 솥에 삶고, 탄두르(tandoor)라는 화덕에 굽고, 걸쭉한 양념을 더해 졸이고…. 맛은 어땠냐고? 예상대로 한국 닭 요리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제 ‘옹치기’라는 이름이 왜 생겼는지 말해줄 때가 됐다. 예상과는 달리 특별하고 유별난 사연을 가진 호칭은 아니었다. 식당 주인이 어느 날 털이 벗겨진 채 ‘옹그리고 있는’ 닭을 봤고, 그게 식당 메인 메뉴의 이름인 ‘옹치기’로 바뀌었다고 했다. 맹물에 한 번 삶아낸 닭고기에 간장을 베이스로 만든 양념과 육수를 넣고 바특하게 조려낸 옹치기. 기억에 남을 대단한 맛은 아니었으나, 다시 청도에 가게 된다면 한 번쯤은 더 들르고 싶을 정도의 맛이라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이란의 수도 테헤란과 중세 사파비 왕조의 고도(古都) 이스파한을 잇는 고속도로엔 몇 개의 휴게소가 있다. 그 휴게소 가운데 한 곳에서 페르시아 스타일로 요리한 ‘닭다리 조림’을 먹은 적이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청도의 별미 ‘옹치기’와 너무나 비슷한 맛이었다. 맞다. 닭고기라는 같은 재료로 ‘사람이 만들어 사람이 먹는 음식’이 달라봐야 뭐가 얼마나 다르겠는가. 아주 먼 옛날에도 신라 사람들은 페르시아까지 걸어서 가곤 했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0-21

문경시 ‘닻별 테마길’, 6000여 명 노란 물결

가을밤 문경의 도심이 노란 별빛으로 물들었다. 문경시는 19일, 점촌점빵길 ‘닻별 테마길’에서 열린 ‘점촌점빵길 가을음악회’가 약 6000여 명의 관람객이 운집한 가운데 성황리에 마무리됐다고 밝혔다. 이날 현장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트로트 가수 박서진 팬클럽 ‘닻별’ 회원 1500여 명(대형버스 38대 규모)의 참여로 열기와 함성이 가득했다. 문경의 골목길은 노란 닻별풍선과 깃발로 수 놓였고, 공연장에는 가족 단위 시민과 관광객이 한데 어우러져 진정한 축제의 장이 펼쳐졌다. 이번 음악회는 문경시가 추진 중인 ‘닻별 테마길 조성사업’의 첫 성과로, 지역 상권 재생과 문화 활성화를 목표로 기획됐다. 시는 점촌역전상점가·행복상점가·문경중앙시장을 잇는 점촌점빵길 130m 구간에 노란색 간판과 어닝을 새롭게 단장하고, 상징 조형물 13점과 조형벤치 20개, 18m 은하수 조명과 360여 개의 파티등을 설치해 도심 속 ‘빛의 거리’를 완성했다. ‘닻별’은 트로트 가수 박서진의 공식 팬클럽 이름이자, 이번 거리 조성의 상징이 된 문경의 새로운 문화 브랜드다. 문경시는 팬덤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지역경제와 결합해 문화도시형 상권 회복 모델로 발전시키겠다는 전략이다. 무대에는 문경시 홍보대사인 박서진을 비롯해 윤윤서, 장혜진, 장현욱, 김수찬, 윤수현, 지원이, 이수호 등 인기 트로트 가수들이 총출동해 화려한 무대를 꾸몄다. 박서진은 이날 마지막 엔딩무대를 맡아 히트곡 ‘문경이 좋다’와 ‘닻별의 노래’를 연이어 선보이며 관객들의 환호 속에 ‘별빛 피날레’를 장식했다. 공연 중에는 관람객들이 휴대폰 불빛을 흔들며 ‘닻별 물결’을 만들어내, 거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황금빛 파도처럼 반짝였다. 공연이 끝난 후에도 팬들과 시민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며 사진을 찍고, ‘닻별 포토존’과 ‘체험부스’를 찾는 등 열기가 이어졌다. 같은 날 운영된 ‘닻별(노랑)마켓’은 점촌상권 활성화의 중심 무대였다. 지역 상가 10개 팀이 참여한 특설 장터에서는 문경사과빵, 오미자청, 수공예품 등 지역상품이 판매되었고, 시민과 관광객이 함께 어울리며 활기찬 장터 분위기를 연출했다. 또한 ‘닻별 색상’을 활용한 체험부스에서는 아이들이 직접 별모양 장식품을 만드는 체험을 즐겼고, 길거리 포토존은 전국 각지에서 온 팬들의 인증샷 명소로 인기를 끌었다. 행사 이후에는 숙박·음식업계 매출이 눈에 띄게 증가했으며, 상가 주변 거리의 유동인구도 평소 대비 3배 이상 늘어나 ‘문화형 경제선순환’의 모범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신현국 문경시장은 “문경을 찾아준 박서진 가수와 전국의 닻별 팬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이번 행사를 계기로 점촌 원도심이 활력을 되찾고, 시민과 관광객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거리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또한 “중앙시장과 연계한 점촌점빵길 구간에 노란 닻별 테마길 조성을 단계적으로 확대해 문화·경제가 공존하는 지속가능한 도심재생 모델을 완성하겠다”고 강조했다. 문경의 ‘닻별 테마길’은 단순한 팬테마 공간을 넘어, 지역문화·청년창업·관광콘텐츠를 결합한 새로운 도심 재생 실험으로 주목받고 있다. 문경시는 내년 상반기까지 점촌중앙시장과 행복상점가 일대를 연결하는 추가 구간을 조성하고, 정기적인 버스킹 공연과 야간 조명 축제를 통해 ‘365일 즐기는 문화거리’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고성환기자 hihero2025@kbmaeil.com

2025-10-21

영천 가을축제 8만 2000명 방문 다채로운 즐길거리로

영천시의 대표 축제들이 동시에 열리며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이번 축제는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다채로운 즐길거리와 풍성한 먹거리를 선사했다. 이번에 동시 개최된 축제는 △제22회 영천보현산별빛축제 △제23회 영천한약축제 △제13회 영천와인페스타·한우 명품구이축제 △제51회 영천문화예술제다. 축제들은 영천의 자연과 과학, 전통, 예술, 식문화를 한데 모아 보여주며 지역경제 활성화와 관광 산업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영천의 별빛 아래, 토성의 고리를 찾아’를 슬로건으로 열린 보현산별빛축제는 보현산천문과학관 일원에서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관람객을 맞이했다. 개막식에서는 별빛어린이무용단 공연과 초청가수 김필의 무대, 드론 라이트쇼가 펼쳐졌으며, 별자리 강연과 아마추어 천문동아리의 ‘스타파티’, 과학 체험 프로그램 등이 큰 호응을 얻었다. 한국수자원공사의 후원으로 운영된 드론 시뮬레이터, 레이저 사격, AI 오목로봇 체험 부스도 인기였다. 특히 보현산댐 출렁다리 야간 개방은 가족 단위 방문객에게 특별한 추억을 선물했다. 영천강변공원과 한의마을에서 열린 한약축제는 한방 명의 진료, 약초전시터널, 희귀약재 전시 등 전통 한방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꾸며졌다. 약초 향주머니 만들기, 어린이 갓 만들기, 조선시대 캐릭터와의 전통놀이 등 가족 친화적 체험도 마련됐다. 룰렛 이벤트와 스탬프 투어를 통한 경품 행사도 인기를 끌었다. 영천와인페스타와 한우 명품구이축제는 영천강변공원에서 동시에 열렸다. 와인페스타에서는 지역 10개 와이너리의 50여 종 와인을 시음·구입할 수 있었으며, 와인 담그기·병입체험 등 참여형 프로그램도 운영됐다. 한우축제장에서는 할인된 가격의 한우를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첫날부터 인산인해를 이뤘다. 한우불고기버거, 돼지육포 등 축산물 시식 행사도 진행됐다. 영천문화예술제는 풍물·난타 경연대회, 품바 페스티벌, 전통 줄다리기 등 다채로운 행사로 시민과 관광객의 참여를 이끌었다. 마지막 날인 19일에는 왕평가요제가 피날레를 장식했으며, 주현미와 박구윤 등 트로트 가수들이 무대에 올라 흥겨운 분위기를 더했다. 시민 정미숙(43·영천완산동) 씨는 “한자리에서 와인도 즐기고 한우도 맛볼 수 있어 가족 모두 만족스러웠다”며 “밤하늘의 별빛축제까지 이어지니 영천이 정말 활기찬 도시로 느껴졌다”고 말했다. 또 다른 시민은 “도심 가까이에서 전통과 과학, 문화가 어우러진 축제가 열린 건 오랜만”이라며 “매년 이런 축제가 계속됐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최기문 영천시장은 “이번 축제는 영천의 자원을 활용한 특색 있는 행사로, 시민과 관광객이 함께 즐기는 진정한 축제의 장이었다”며 “앞으로도 지역 문화관광을 활성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조규남기자 nam8319@kbmaeil.com

2025-10-21

한 집 건너 한 집이 양복점이었던 시대

1960년대 한국을 찾은 한 외국인 재단사는 “한국은 양복점의 천국”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맞춤 양복의 시대는 30여 년간 절정을 이루었다. 도심 곳곳에 맞춤 양복점이 즐비했고 포항도 예외는 아니었다. 포항은 철강도시로 변모하면서 인구가 급증했고 양복을 찾는 사람도 증가했다. 1980년대에 포항에 150여 개의 양복점이 들어섰으니 맞춤 양복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48년간 포항에서 양복점을 운영해온 권창화 재단사는 당시 지역에서 규모가 컸던 양복점으로 권창화양복점을 비롯해 대일라사, 보성라사, 동양라사, 연일라사, 강은라사, 신고사양복점 등을 꼽았다. 당시에는 ‘양복점’보다 ‘라사(羅紗)’라는 명칭이 더 일반적이었다. ‘라사’는 일제강점기에는 모직과 견직물 판매점 이름으로 사용됐고, 1950~60년대에는 양복점 상호로 자리 잡았다. 양복지가 귀하던 시절, 좋은 양복점은 곧 질 좋은 원단을 갖춘 곳과 같은 의미로 통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한 집 건너 한 집이 양복점일 정도였어요. 양복협회 일을 오래 맡은 대일라사가 가장 규모가 컸고, 그다음이 우리였죠.” 60년대부터 30여 년 맞춤양복시대 절정 80년대 포항도 도심 곳곳 150여 곳 성업 ‘세일즈맨’ 둔 업계 1위 ‘대일라사’와 달리 양복대금 지불은 ‘일시불’ 원칙 고수해와 전성기 맞은 1970년대 말~1980년대 초엔 기능대회 메달리스트 영입 직원만 20여명 대일라사와는 계절별 축구경기 펼치기도 포항시조합 중심으로 복련 경북지부 구축 경북 동해안 양복업계 성장 함께 펼쳐와 ‘세일즈맨’을 두었던 대일라사 권창화양복점보다 10년 먼저 개업한 대일라사의 위세는 대단했다. 권 재단사가 존경하는 선배인 권의술 대일라사 대표는 포항 양복업 종사자들의 모임을 이끌며 지역 양복업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당시 신문 기사에서도 권의술 대표의 활약을 확인할 수 있다. 대한복장기술협회(大韓服裝技術協會) 경북지부(지부장 유시석)는 지난 16일 포항에서 단위조합 합동이사회를 열었다. 포항시 조합장 권의술 씨(대일라사 대표)는 회의 비용을 거의 전담하면서 주문복 업계의 활성화를 촉구했으며 앞으로도 양복업에서 얻은 수익은 모두 복장인(服裝人)을 위해 쓰겠다고 다짐, 임원들의 박수를 받았다. - 「신사복기술 경기대회 집행사항 논의」, 『매일경제』, 1980년 6월 23일자. 대일라사는 포항제철에 ‘세일즈맨’을 두고 매달 350벌 이상씩 양복을 만들어냈다. 세일즈맨은 줄자와 양복지 견본 책자를 들고 회사를 직접 방문해 양복을 판매했다. 신용카드가 없던 시절이라 양복값을 한 번에 치르는 것이 부담스러운 월급쟁이를 위해 ‘할부 양복’이 등장하기도 했다. 제철소나 공공기관 근무자가 주요 고객이던 대일라사는 할부 판매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반면 권창화양복점은 일시불 원칙을 고수했다. 세일즈맨은 따로 없이 사무실 1층에 직원과 경리 등 네 명이 직접 고객을 응대했다. 단골손님 가운데 서너 번 이상 거래한 이들에게만 두 차례 분할 납부를 허용했다. 시계를 담보로 맡기는 고객도 있었는데, 미수금은 골칫거리였다. 맞춤 양복 가격은 원단값과 공임으로 나뉘었다. 가게에 비치된 양복지를 선택하면 전체 금액을 내야 했다. 당시 양복지는 귀한 선물로 여겨져, 선물 받은 원단을 가져오는 손님도 있었다. 이 경우에는 공임만 받았다. 견습 재단사 수입이 7급 공무원 월급보다 많아 권 재단사가 누렇게 바랜 스프링 노트를 꺼내 보였다. ‘미수금 장부’라고 적힌 노트에는 수백 명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옷이 맞지 않는다면서 트집을 잡으며 돈을 안 내려는 손님도 적지 않았다. 당시에는 미수금을 회수하지 못해 문을 닫는 양복점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권 재단사는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잘 못 해 부친에게 도움을 청하곤 했다. 맞춤 양복업은 고객과의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한 업종이다. 고객의 요구를 제대로 이해해야 고객이 원하는 양복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권 재단사는 옷을 만드는 정성만큼 고객들에게 마음을 기울였다. 일 년에 대여섯 차례 고객에게 손수 쓴 감사 카드를 월간지 『샘터』와 함께 소포로 발송했다. 결혼기념일, 생일, 첫 주문일, 설날과 추석, 큰 재난이 닥칠 때마다 따뜻한 마음을 전했다. 맞춤 양복을 지어준다는 건 단순히 옷을 만드는 일을 넘어 고객에게 멋과 자부심을 선사하는 일이다. 몇 년 후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기성 양복업체가 유사한 고객관리 시스템을 도입하는 걸 본 권 재단사는 ‘본인의 방식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권 재단사는 그의 양복점에 “안 온 고객은 있어도 한 번만 온 고객은 없다”고 자부한다. 지역 양복업이 전성기를 맞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에는 업체 간 경쟁도 치열했다. 기술자 스카우트는 흔한 일이었고, 권 재단사 역시 부산까지 가서 기능대회 메달리스트를 영입했다. 1980년대 후반에 이런 기술자들은 100만 원씩 더 얹어줘야 할 만큼 몸값이 높았다. 권 재단사는 “견습 재단사 수입이 7급 공무원 월급보다 많을 정도였으니 양복 기능공은 선망의 직업이었죠”라고 회상했다. 중저가형 기성 양복이 나오면서 맞춤 양복 시대는 저물어 양복업계가 성장하면서 종사자 수도 급증했다. 기술 교류와 권익 보호를 위한 단체 활동도 활발해졌다. 1980년대 전국의 양복업 종사자들이 돈을 모아 복지회관을 짓고 매년 기능대회를 개최했다. 기술자들의 모임인 ‘대한복장기술협회(기협)’와 사업자 모임인 ‘대한복장상공조합연합회(복련)’가 대표적이었다. 포항에도 협회가 조직돼 30∼40명씩 참석하는 모임이 열렸다. 직원이 많은 양복점은 친목 활동도 벌였는데, 대일라사와 권창화양복점은 분기마다 축구대회를 열었다. “대일라사와 권창화양복점의 직원이 각각 20여 명이었어요. 두 양복점이 상금을 내걸고 계절마다 축구 경기를 했지요. 그리고 일 년에 한 번씩 대구에서 열리는 대회에 포항팀을 만들어 참가했어요. 제일모직이 협찬하는 대회였는데, 상금도 있고 가전제품이나 양복 원단 등 상품이 많았습니다.” 지역 양복업계 종사자가 늘어나자 조직화가 이루어졌고, 경북 동해안 지역 전체로 점차 확산되었다. 1980년 복련 경북지부는 포항시조합을 중심으로 지역조합 체계를 구축했다. 당시 복련 경북지부의 활동은 경북 동해안 양복업계의 성장과 함께 포항이 중심지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대한복장상공조합연합회(大韓服裝商工組合聯合會) 경북지부는 동해안 지역구를 조직하고 단합대회를 가졌다. 동해안 지역구는 포항시조합(조합장 권의술) 산하 지역조합으로 영해, 영덕, 축산, 강구, 흥해 등지의 양복점이 조합원사가 되었다. - 「복련, 각 지부 조합에 전달」, 『매일경제』, 1980년 8월 25일자. 경북 동해안 지역 양복업 종사자들은 경쟁 관계이면서도 기술을 교류하고 정보를 나누었다. 이들은 협회 회원들의 이익을 지키고자 단체 행동에 나서기도 하고, 기성복이 양복 시장에 진출하자 맞춤 양복업을 살리기 위해 힘을 모으기도 했다. 대량생산에 의한 중저가형 기성 양복이 시장에 진출하자 맞춤 양복 시장을 찾는 소비자가 급격하게 줄었다. 이러한 추세는 맞춤 양복점의 위축을 불러왔다. 창업 이후 성장세를 이어가던 권창화양복점 역시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손님이 줄어들자 직원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독립하는 기술자가 있었고 세탁업으로 진출하는 이들도 있었다.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노사 간 갈등도 빚어졌다. 맞춤 양복의 시대는 이렇게 저물어갔다. 글 : 배은정(소설가) 사 진 : 김 훈(작가)

2025-10-19

'다시 푸르게, 다시 붉게' ⋯ 청송사과축제 29일 개막

청송사과축제가 ‘청송-다시 푸르게, 다시 붉게’라는 슬로건으로 오는 29일부터 11월 2일까지 5일간 청송읍 용전천 현비암 일원에서 개최된다. 올해로 19회째를 맞는 청송사과축제는 온라인 축제와 병행하고 축제 전용홈페이지를 구축해 행사의 안전성과 접근성을 더욱 높였다. 이는 사과축제장의 생동감과 온라인 축제의 지속적인 확대를 통해 축제 형태를 다양화해 대한민국 대표축제로 자리매김 한다는 것, 올해 사과축제 주제인 ‘청송-다시 푸르게, 다시 붉게’와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13년 연속 대상을 연계한 태극무늬의 이미지를 활용한 홍보관을 운영해 청송을 상징한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산소카페 청송군, 산소카페 청송정원,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국제슬로시티, 국립공원 주왕산 등 주요 관광자원을 최고의 청정 관광도시로 축제를 통해 부각시켜 나간다. 청송사과를 소재로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하는 참여형 문화관광축제로서 전시·판매·관람의 위주가 아닌 모든 관광객이 참여해 즐기는 축제로 구성해 나가며 청송사과 생산자와 소비자의 소통과 공감의 장을 마련해 소비 신뢰를 구축해 나갈 계획이다. 올해의 청송사과축제는 하이브리드 축제를 지속적으로 확대 추진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축제로 병행시켜 축제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시켰다. 대면 축제의 한계를 벗어나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글로벌 축제로 도약한다데 중점을 두고 있다. 또한 온라인 플랫폼을 최대한 활용해 사과축제의 영상 노출을 극대화하고 청송군 SNS 홍보단을 통해 축제 숏폼을 수시로 업로드 시켜 대대적 홍보에도 주력한다. 이에 앞서 청송군은 한국관관공사와 협업해 수도권 중심의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축제 사전 홍보를 통한 사과축제 인지도 제고를 위해 지난 8월 팝업 이벤트 복합문화공간인 ‘리얼월드 성수’에서 팜어스토어도 운영하고 있다. 또 방송사의 대표 저녁 프로그램인 전국시대 프로그램과도 협업해 청송사과축제를 지상파 노출로 홍보 효과도 극대화시켜 나간다는 방침이다. 사과축제와 청송을 상징하는 스템프 아이템을 고안해 주왕산과 축제장을 연결하는 스팸투어를 현장에서 진행하고 주왕산 등산객과 축제장 방문객의 교차 방문을 통해 축제의 만족도를 높여 나간다는 것. 특히 용전천 섶다리 하류부인 용전천 수변공간에 기존 조형물과는 별개로 청송과 사과축제를 상징하는 대표조형물을 설치해 사과축제를 더욱더 부각시켜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도 제공한다. 여느 축제장도 마찬가지로 골칫거리로 떠오르는 불공정 상행위에 대해서도 특별 대책도 마련했다. 각 파트별 파트장 선임과 구성원을 편성해 평가기준표에 의해 평가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향후 사과축제 입점 선정시, 인센티브 및 페널티를 부여해 입점자들에게 부스 운영의 책임감 부여와 경각심도 고취시켜 나갈 계획이다. 올해에도 사과축제장 내에 축제현장 불편 신고센터를 2개소를 설치해 공무원이 전담 상주해 바가지요금 자체를 근절하고 관람객들에게 축제에 대한 신뢰감을 형성해 나간다는 대책을 세우고 있다. 제19회 청송사과축제는 초대형 산불과 개화기 이상 저온이라는 아픔을 이겨내고 개최되는 축제인 만큼 그 의미가 남다르다. 방문객 수도 약 40만 명이 찾는 대한민국 대표축제인 만큼 다양한 문화체험도 준비돼 있다. 이밖에도 각종 사과체험을 골고루 할 수 있고 유명 연예인들도 출연해 이번 청송사과축제는 ‘청송-다시 푸르게, 다시 붉게’란 주제 아래 가을을 맞아 주민과 관광객들에 큰 기대가 모아진다. /김종철기자 kjc2476@kbmaeil.com

2025-10-16

'맑은 바람처럼 사리사욕 버린 재상'을 닮은 나무

오늘날 언론에 비치는 선출직 고위 공직자, 소위 말하는 의원 나리들이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비리에 연루된 소식을 들을 때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깊은 실망과 허탈감을 느낀다. 나라의 앞날을 이끌어야 할 이들이 책임과 도리를 저버린 채 개인의 이익을 좇는 현실은, 공동체 전체를 어둡게 만들고 신뢰를 흔들어 놓는다. 이럴 때 나는 세종을 도와 나라의 기틀을 다졌던 황희 정승을 떠올린다. 청렴과 인자함으로 백성을 보듬고, 사리보다는 공익을 좇으며 청백리의 모범이 되었던 그의 삶은 오늘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세월은 흘러 시대와 제도는 달라졌지만, 참된 정치의 본질은 여전히 ‘깨끗한 마음’과 ‘곧은 뜻’에 있음을 그는 일찍이 몸소 증명했다. 지금 우리 사회가 회복해야 할 길 역시 그 맑은 정신과 청백의 자세 속에 있음을 절실히 느낀다. 조선 황희 정승 7대손 황시간 선생이 심은 장수황씨 종택 마당 400살 넘은 탱자나무 청렴·절개의 상징으로 수백 년 자리 지켜 1982년 보호수·1999년 경상북도기념물 2021년 천연기념물로 승격돼 보호 관리 날카로운 가시로 집안 지킨 탱자나무 옆 배롱나무 연리지도 함께 가문 지탱해 와 조선 초 명재상 황희는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본관은 장수(長水)로 황군서(黃君瑞)의 아들로 개성에서 태어났다. 고려 말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관으로 관직을 시작한 뒤, 조선조에 들어와 판서, 대사헌 등을 두루 거쳐 세종 13년, 영의정 자리에 올라 무려 18년 동안 세종을 보좌하여 훌륭한 공적을 남겼다. 그는 평소 인자하고 깨끗한 관직 생활로 청백리로서 귀감이 되었다. 권세보다 도덕을 숭상하고, 탐욕보다 청렴을 지켰으며, 인자하고 포용력 있는 태도로 신하와 백성들에게 신망을 얻었다. 청백리의 표상으로 일컬어지는 그의 삶은 세속의 욕망에 물들지 않고 나라와 백성을 향한 곧은 뜻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후세에는 그를 두고 ‘맑은 바람처럼 사리사욕을 버린 참된 재상’이라 칭송한다. 저서 방촌집은 그의 학문과 사유를 남겨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황희의 7대손 황시간 선생(1558-1642)은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집을 짓고, 마당 한가운데 탱자나무를 심었다. 이 탱자나무는 뿌리를 깊이 내려 단단히 버티며, 날카로운 가시로 자신의 몸을 지키고, 작고 쓴 열매를 꿋꿋이 맺었다. 화려한 풍요가 아니라 정신의 올곧음을 중히 여기는 가풍처럼, 탱자나무는 청렴과 절개의 상징으로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선비의 삶이란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 공정과 의리를 좇으며, 학문과 도덕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길이다. 황시간 선생은 말이 아닌 탱자나무를 가훈으로 삼아 후손들에게 가문의 기둥이 무엇인지를 전하고자 했을 것이다. 권세와 이익 앞에서도 마음을 흐리지 말고, 맑고 곧은 길을 걸으라는 무언의 가르침, 그것이 탱자나무에 담긴 정신이 아닐까 싶다. 탱자나무는 마당 한가운데 서서, 세월을 넘어오는 바람 속에서 후손들에게 조용히 뜻깊은 가훈을 전하고 있다. 탱자나무 노거수의 나이는 약 400살, 키 6.3m, 몸 둘레 2.1m, 앉은 자리 폭은 동서 9.2m, 남북 10.3m이다.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 460-1번지 장수황씨 종택 마당에 살아가고 있다. 1982년 10월 26일 보호수로 시작하여 1999년 11월 25일 경상북도기념물 제135호, 마침내 2021년 10월 29일 천연기념물로 승격하여 자연유산으로 보호 관리하고 있다. 탱자나무는 경계 울타리로 짐승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담장용이나 논밭 두렁이나 옛날 군사적 요충지에 적의 침투를 막기 위하여 또는 중한 죄수를 가두어 두는 위리안치에 주로 심었다. 그러나 탱자나무를 가훈으로 삼아 마당에 심고 늘상 보면서 가문의 유훈처럼 마음에 새기도록 한 예는 실로 보기에 드물고 흔치 않은 일로 그 지혜로움이 돋보인다. | 장수황씨 종택은 사정공파 종가로 세월을 품은 담장 너머로 고요한 기품을 뿜어낸다. 황시간 선생이 거처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집은 안채와 사랑채, 고방채와 사당이 정연하게 어깨를 맞대며 서 있다. 방촌 황희 정승의 분재기와 벼루가 보존된 유물관은 이곳이 역사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공간임을 일깨운다. 탱자나무와 오래된 기와 한 장마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한 가문의 뿌리를 지키는 상징이자 우리 모두의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고택의 고즈넉한 마당에 서면, 옛 선비들의 청렴한 기상이 바람결에 스며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묵묵히 말을 건넨다. 문경 대하리의 장수황씨 종택은 수백 년 세월을 품은 채 선비 정신을 지켜온 집이다. 안채와 사랑채가 고즈넉이 서 있는 마당 한가운데에는 천연기념물 탱자나무와 연리지 배롱나무 노거수가 어른처럼 뿌리를 깊이 내리고 서 있다. 노거수는 한 가문의 역사와 정신을 묵묵히 지탱해 온 상징이다. 사계절의 햇살과 비바람을 함께 견디며 살아온 탱자나무와 배롱나무는 조상의 숨결이 깃든 종택과 한 몸처럼 어울려 있다. 굳건히 뻗은 뿌리는 가문의 뿌리를 닮았고, 해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순환은 선비 정신의 끊임없는 계승을 떠올리게 한다. 날카로운 가시로 집안을 지켜낸 탱자나무는 가문 울타리로 그리고 여름마다 붉게 타오르는 배롱나무 연리지는 꺾이지 않는 기개와 효도, 사랑의 상징물이 되었다. 지난 시절 공직에 있을 때 동료이며 친구인 황조연 교수는 황희 정승의 직계 후손임을 늘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 또한 청렴을 몸소 실현하였다. 황희 정승의 청백 정신을 품은 탱자나무는 후손들의 삶을 묵묵히 지켜오는 가훈으로써 오늘을 사는 우리의 가슴에도 맑은 바람 같은 울림을 전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문경 장수황씨 종택, 숙청사(肅淸祠)와 숭모각(崇慕閣)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236호.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 460-6에 위치했다. 문경 장수황씨 종택은 경북 문경에 있는 양반 가옥으로 장수황씨 사정공파 종택(長水黃氏 司正公派宗宅)이며 조선 초기 재상인 황희 정승의 후손 황시간 선생(1558∼1642)이 살았던 곳이다. 이 건물은 안채와 사랑채, 중문채, 고방채가 있고 우측에 별도로 사당 및 유물관이 담장 내 배치되어 있으며 유물관에는 방촌 황희 선생의 분재기와 벼루 등 유물을 보존하고 있다. 문경 장수황씨 종택 내 숙청사(肅淸祠)는 ‘방촌(厖村) 황희(黃喜)’의 영정을 모신 곳, 숭모각(崇慕閣)은 유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16세기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위치는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 사묘가 있는 곳에 있었으며 1960년대에 종택 내의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황방촌유물(黃厖村遺物)은 경북 유형문화유산 제123호. 조선 전기 황희 정승의 유물로서 옥으로 된 종이 누르개(옥서진) 1쌍, 산호로 된 갓끈 1종, 옥 벼루 1개, 코뿔소의 뿔로 된 띠(서각대) 1개, 재산 분할문서 1매(분재문서) 들이다. 홍치(弘治) 13년 경신년(庚申年) 연산군 6년(1500년) 황희(黃喜)의 증손인 정(庭)은 아들 사웅(士雄)에게 특별히 논, 밭을 지급하고 상국(相國)의 유물이 몇 점뿐이나 종가에서 잘 보존하여 잃어지지 말도록 하고 후일 다른 자손 중에 이를 두고 다투는 자가 있으면, 재산분할 문서(분재문서)로 해결하라고 밝혔다.

2025-10-15

아버지의 대를 이어 양복점을 열다

1980년대 권창화양복점은 포항의 사회 초년생이 꼭 들르는 곳이었다.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이들에게 양복은 필수품이었으니 양복점은 통과의례 같은 곳이었다. 양복점 앞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옷 선택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도 흔했다. 연배가 있는 이들은 권창화양복점보다 10여 년 먼저 문을 연 대일라사를 선호했다. 아버지가 전통적인 스타일을 고집하면 아들은 세련된 ‘핏’을 내세운 권창화양복점을 찾았다. 포항 신사들의 옷맵시를 책임진 양복은 권창화(73) 재단사의 손끝에서 태어났다. 반세기 동안 양복을 지어온 그는 일흔을 넘는 지금도 멋스러운 감각을 유지했다. 1977년의 전통 잇는 포항 ‘권창화양복점’ 고교시절 의복 기술 배운 권창화 재단사 과거 타자기로 찍은 상표에 자부심 담아 부친 권학주씨, 일본인에 의복 기술 배워 광복 후 오천 미군부대서 군복 세탁·수선 1956년 포항 중앙상가 ‘중앙양복점’ 오픈 군 제대 후 부친의 건강 악화로 가업 이어 중앙상가서 시작 5년만에1982년 전성기 직원 20여명과 월 250~300벌 주문 소화 세련된 맞춤 핏으로 승부… 손님들 발길 포항 북구 신흥동에 위치한 권창화양복점은 전성기에 비해 규모는 줄었지만, 내부는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작업대 한쪽에는 ‘TAILOR’S KWON CHANG HWA, SINCE 1977’을 찍던 낡은 타자기가 놓여 있다. 옷감 위에 직접 글자를 인쇄하는 방식인데, 지금은 잉크를 구할 수 없어 사용하지 못한다. 그렇게 인쇄된 상표는 바지와 상의에 하나씩 꿰매 붙였다. 오랜 역사를 품은 상표는 재단사에게도 고객에게도 자부심이 되었다. 옷본이 그려진 재단 종이를 지그시 누르는 둥근 누름쇠는 제철소에 다니는 한 고객이 선물한 것이다. 그 누름쇠는 단추 구멍을 뚫을 때도 사용하는 것인데, 낡은 걸 보더니 회사에서 직접 만들어 가져왔다. 손때 묻은 무쇠 다리미, 무쇠로 만든 소매 다리미판, 날이 다 닳은 묵직한 가위, 누렇게 바랜 고객 명단이며 미수금 장부까지 저마다 세월의 흔적이 배었다. 권 재단사의 빈틈없는 솜씨는 부친 권학주 씨로부터 이어졌다. 경북 군위 출신으로 1920년생인 권학주 씨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양복사한테 양복 기술을 배웠다. 재단과 양복(서양식 남성 정장), 양장(서양식 여성 정장), 두루마기를 두루 섭렵한 의복 장인이었다. 한복과 양복을 만드는 방식이 다르지 않은지 물으니, 1990년대까지 한복을 맞출 때 두루마기만은 양복지(洋服地)로 맞추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양복이 우리나라 복식에 적용된 예가 두루마기라는 것이다. 양복지 두루마기는 한복이 아닌 양복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양복점에서 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군 제대 후 가업을 이어받아 권학주 씨는 광복 후에 오천 미군 부대에서 군복 세탁과 수선으로 큰돈을 벌었다. 그리고 1956년 포항 중앙상가 무궁화백화점 자리에 ‘중앙양복점’을 열었다. 뛰어난 기술 덕분에 주문이 몰렸다. 포항 도구리 동해면사무소 앞에 400평 저택을 지을 정도로 부를 쌓았다. 친척들에게 하숙방을 제공할 만큼 늘 북적거리는 저택에서 권 재단사는 태어났다. 부친은 솜씨만큼이나 인물이 출중했다. 주위에서 “네가 아버지만큼 생기면 영화배우도 했을 것”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선친은 지역 유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부를 누렸으나 재산 관리를 잘 못 하여 가세가 기울고 말았다. 권 재단사는 고등학생 시절 부친 곁에서 재단 기술을 배웠지만 평생의 업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고령의 부친이 더 이상 가위를 잡을 수 없게 되면서 양복점의 대가 끊어질 처지가 된 것이다. 가업을 잇느냐 끊느냐의 갈림길에서 그는 양복사의 길을 선택했다. 1977년 7월 7일, 권 재단사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권창화양복점’을 개업했다. 당시만 해도 주인의 이름을 내세운 양복점은 드물었다. 군 제대 후 무일푼이던 그는 형수에게 빌린 100만 원으로 중앙상가에 작은 가게를 마련했다. 선풍기 부품을 조립해서 판매하는 ‘한일정’ 옆자리였다. 권 재단사의 뛰어난 솜씨 덕에 손님들로 장사진을 이루자 한산하던 골목은 순식간에 활기를 띠었다. 그러자 한 골목에 양복점만 열 곳 넘게 새로 문을 열었다. 권 재단사 덕분에 상권이 살아났다며 상인회에서 감사패를 전했을 정도다. 한적한 골목에 4평짜리 점포로 시작했는데 불과 5년 만에 옆 가게와 뒤쪽 주택을 매입해 확장했다. 1982년 가게 확장을 기념해 친척들과 촬영한 흑백 사진 한 장이 현재도 가게 입구에 걸려 있다. 이 시기가 권창화양복점의 최전성기였다. 양복점 전성기 때 직원 20여 명을 고용해 한국 남성 맞춤복의 전성기는 1960년대부터 80년 중반까지로 본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양복 문화가 보편화되고 토착화한 시기다. 양복 수요가 급증하면서 권창화양복점도 성황을 이루었다. 결혼을 앞둔 손님은 예복으로 일곱 벌에서 열 벌까지 맞췄다. 신랑 양복만 계절별 정장에 코트까지 최소 네 벌이 기본이었다. “한 달에 250벌에서 300벌씩 주문을 받았습니다. 문만 열면 주문이 밀려왔으니까요.” 한창때에는 2층 건물에 직원이 20여 명이었다. 주문과 경리, 재단 보조, 상의 담당, 바지 담당, 수선 등 분업 체계가 철저했다. 맞춤 양복은 분야별 전문 기술자들이 숙련된 솜씨를 발휘해 완성되었다. 한 벌을 제작하는 데에는 재단사, 상의 재봉사, 바지 재봉사, 마무리 전문 담당 등 최소 네 명이 협업했고, 다림질 담당과 가봉사 등의 분야가 추가되었다. 맞춤복 산업은 어린 견습생이 밑바닥부터 기술을 익히는 전형적인 도제 시스템이었다.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꼬마’는 심부름부터 시작해 가봉, 수선, 바지, 상의 담당으로 단계를 밟았다. 수선 전문가를 ‘수리공’이라 불렀는데 유일하게 월급을 받는 자리였다. 월급이 25만 원으로 당시 공무원 월급의 다섯 배였다. 기술이 쌓이면 상의나 바지 한 장당 돈을 받는 기술자가 되었다. ‘바지공’을 거쳐 ‘조끼공’, ‘상의공(上衣工)’을 지나야 전체 공정을 지휘하는 재단사가 되었다. 안정적인 월급을 받는 수리공보다 기술자를 선호한 이유는 수입 차이였다. 실력이 뛰어나면 일한 만큼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 5시부터 밤 11시까지 매달려야 상의 한 벌을 완성할 정도로 강도 높은 노동이었다. 그러나 다른 업종에 비해 소득이 높다 보니 씀씀이도 컸다. 음주와 노름으로 봉급을 미리 당겨 쓰고, 생활비를 겨우 챙기는 경우도 있었다. 서울 소공동 양복 거리에서 최신 유행 익혀 재단사의 위상은 남달랐다. ‘재단사 손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재단사가 양복점을 옮기면 단골들이 따라나섰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정치인이나 경제인, 방송인 등 단골도 제법 있었다. 권 재단사의 솜씨를 믿고 지인들을 데리고 오는 손님도 많았다. 권 재단사의 양복점이 사랑받은 비결은 ‘세련되면서도 편안한 감각’이었다. 그는 해마다 서울 소공동 양복 거리를 찾아 선배 재단사들과 교류하며 최신 유행을 익혔다. 덕분에 중후한 멋과 세련된 옷 핏, 편안함을 두루 갖춘 옷으로 신뢰를 얻었다. 당시 권 재단사가 도입한 디자인은 몸의 곡선을 유연하게 드러내는 ‘콘티넨탈 룩(Continental Look)’이었다. 허리를 조이고 바지 끝을 가늘게 처리해 슬림해 보이면서도 여유 있는 품으로 편안함을 살리는 유럽형 디자인이었다. 상의에는 ‘심(interlining)’을 넣어 모양을 잡았다. ‘심’은 동물의 머리카락이나 순모를 섞어 만든 소재로 옷의 골격을 단단히 지탱해주었다. 포항 지역에는 이 기법을 구현하는 기술자가 없어 서울과 부산에서 스카우트해야 했다. 그런데 웃돈 주고 스카우트한 기술자들이 점심시간에 몰래 작업하며 기술을 숨겼다. 권 재단사가 설득해 기술 전수를 하려니, 이번엔 직원들이 자존심을 내세워 반발했다. 기술자들 사이에 자존심 경쟁이 그만큼 치열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맞춤 양복은 단순한 옷이라기보다 기술자들이 한 땀 한 땀 자부심으로 공들인 결과물이다. 사람을 단정하고 당당하게 세워주는 도구이자 삶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하는 동반자다. 권 재단사가 옷을 결코 허투루 만들 수 없는 이유다. 글 : 배은정(소설가) 사 진 : 김 훈(작가)

2025-10-15

“호국도시 칠곡” 스마트 기술 더한 ‘신개념 민군 통합 축제’로

호국과 평화를 기치로 한 국내 유일의 민군(民軍) 통합 축제인 ‘제12회 칠곡낙동강평화축제’와 ‘제16회 낙동강지구전투 전승행사’가 오는 16일부터 19일까지 4일간 칠곡보생태공원 일원에서 열린다. 올해 축제는 ‘평화, 칠곡이 아니었다면’이라는 주제로 열리며, 경상북도와 칠곡군, 대한민국 국방부가 후원하고 (재)칠곡문화관광재단과 제2작전사령부가 주최·주관한다. 칠곡군은 ‘디지털 2.0 시대’에 맞춰 축제 운영 전반에 첨단 기술을 접목한 ‘신개념 스마트 축제’를 선보인다. 관람객들은 팔찌형 ‘컴인핏(Com-In Fit)’을 착용해 신속하고 안전하게 입장할 수 있으며, 행사 중에는 실시간 안내 시스템을 통해 일정 변경이나 공지사항을 즉시 확인할 수 있다. ‘디지털 2.0 시대’ 맞춰 첨단 기술 접목 ‘신개념 스마트 축제’ 선보여 ‘평화, 칠곡이 아니었다면’ 주제 경북도-칠곡군-국방부 등 주최·주관 박서진·홍진영·임창정·자우림·이승기 등 국내 정상급 가수들 출연 지뢰 탐사·모의 소총 체험·드론 로봇 장비 관람 등 군 문화 체험도 이번 축제는 ‘평화를 위한 음악(Music for Peace)’과 ‘평화의 힘(Power of Peace)’ 두 가지 테마로 구성됐다. 주요 프로그램은 △보물찾기328 △오십오게임 △960톤의 숲 △이프칠곡 △낙동아일랜드 △미스터트롯TOP7콘서트 △피스뮤직페스티벌 등이다. 평화공연에는 △16일 박서진·홍진영·박지후 △17일 미스터트롯3 TOP7 △18일 임창정·이재훈·민경훈·손승연 △19일 자우림·이승기·다이나믹듀오 등 국내 정상급 가수들이 출연해 평화를 노래하는 감동 무대를 펼친다. 칠곡보 오토캠핑장에서는 ‘평화의 힘’을 주제로 KUH-1 수리온, UH-60 블랙호크, K-2 전차, K-9 자주포, 자주도하장비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첨단 무기를 전시한다. 또 칠곡보생태공원과 오토캠핑장을 잇는 낙동강 위에는 국내 최장 430m 부교가 설치되며, 도하장비를 타고 강을 건너는 ‘문교(們橋) 체험’도 진행된다. ‘오십오게임’은 6·25전쟁 당시 55일간 이어진 낙동강 방어선 전투를 모티브로 한 대형 체험 프로그램이다. 4개의 대형 콘텐츠를 통해 당시 치열했던 전투 현장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보물찾기328’은 유해발굴 1호 지역인 ‘328고지’를 배경으로 한 체험형 프로그램이다. 유학산 328고지에서는 6·25전쟁 당시 12일 동안 15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뀔 만큼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관람객들은 이를 기리며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할 수 있다. ‘960톤의 숲 ECO존’은 전쟁 당시 960톤의 폭격으로 초토화된 땅이 평화와 자연이 공존하는 ‘생명의 터전’으로 되살아난 모습을 상징한다. ‘꿀맥펍(꿀맥+Pub)’에서는 지역 특산물인 벌꿀로 만든 ‘칠곡 꿀맥’을 즐기며 낙동강의 평화를 위한 건배가 이어진다. 오토캠핑장에서는 육군 제2작전사령부가 주관하는 ‘군 문화 체험존’이 운영된다. △과거존(6곳)=적 장비 전시, 6·25전쟁 사진전, 워커 장군 사진·영상전 △현재존(16곳)=지뢰 탐지, 모의소총 체험, 태극기 바람개비 만들기, 드론 축구장 등 △미래존(10곳)=전쟁 VR, 신병교육 메타버스 체험, 드론봇전투단 장비 전시 등으로 구성된다. 칠곡군은 축제 방문객의 편의를 위해 7곳의 주차장을 마련하고 셔틀버스도 운행한다. 주차장은 △제1주차장(1000대·칠곡보 야외물놀이장) △제2주차장(400대·칠곡호국평화기념관) △제3주차장(200대·칠곡 사계절썰매장) △제4주차장(500대·칠곡보생태공원) △제5주차장(800대·칠곡보생태공원) △제6주차장(300대·칠곡종합운동장) △임시주차장(300대·석적읍 중지리) 등이다. 18~19일 양일간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칠곡보 야외물놀이장, 왜관북부정류장, 칠곡종합운동장, 북삼읍사무소, 석적읍사무소, 지천면사무소, 동명·가산평생학습복지센터, 약목면사무소, 약목농협(기산지점)에서 축제장까지 셔틀버스가 운행된다. 또 16일 밤 9시부터 20일 새벽 2시까지는 약목면 관호리 칠곡보 서편~약목면 덕산리 무림배수장 구간의 교통이 통제된다. 한편 칠곡군은 같은 기간 18~19일 양일간 왜관시가지 1번 도로에서 ‘205칠곡문화거리페스타’를 함께 연다. 이 축제는 대형 가수 공연 위주가 아닌 마술·버블·서커스 등 거리공연 중심으로 진행된다. 마칭밴드와 인형탈 퍼레이드, 시니어 모델쇼, 지역 청소년·아동이 참여하는 개막 퍼레이드가 펼쳐지고 거리 곳곳에서 풍물과 난타공연이 이어진다. 개막무대에는 세계적 마술사 유호진이 출연해 스토리텔링 공연을 선보인다. 19일에는 독일 베르너 홀츠바르트 원작의 아동뮤지컬 ‘누가 내 머리에 똥쌌어?’가 무대에 오르고, △아크로바틱(브레이커스 컴퍼니) △서커스 밴드(팀 퍼니스트) △태권도 시범 △라인댄스 △스턴트 치어리딩 △마임과 코미디 마술 등 다채로운 공연이 이어진다. ‘에코존’에서는 △공기정화식물 행잉 △업사이클링 키링 제작 △환경비누 만들기 △폐현수막 공예 등 친환경 체험이 가능하다. ‘인문학 마을존’에서는 화덕피자 만들기, 떡메치기, 식혜 체험도 마련됐다. 특히 ‘205 놀이터’에서는 7개 구역에서 이틀간 7회 프로그램이 교차 진행된다. △분필 낙서 거리 꾸미기 △버블 놀이터 △랜덤플레이댄스 △못박기·신발던지기 등 가족 체험형 순서가 이어진다. ‘205칠곡문화거리페스타’는 무대를 중심으로 한 행사를 넘어, 거리 전체를 참여형 축제 공간으로 확장했다. ‘럭키 칠곡’의 상징성을 담아낸 이번 행사는 공연과 체험이 어우러진 시민 참여형 축제로 왜관 시가지를 뜨겁게 달굴 전망이다. 김재욱 칠곡군수는 “스마트 시스템을 도입한 이번 칠곡낙동강평화축제는 넓은 주차장과 편리한 셔틀버스로 방문객 편의를 높였다”며 “많은 국민이 참여해 호국평화의 의미를 나누고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보탬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호평기자 php1111@kbmaeil.com

2025-10-15

문경사과축제 20주년 ‘인생감홍’ 카운트다운

문경시는 ‘2025 문경사과축제’를 오는 18일부터 26일까지 9일간 문경새재도립공원 일원에서 개최한다. 올해로 20주년을 맞는 문경사과축제는 문경사과의 명성과 함께 성장해온 축제로, 새롭게 도약하는 문경사과의 미래를 선포하는 자리가 될 전망이다. 판매행사는 축제 이후인 11월 2일까지 연장 운영된다. □ 감홍사과 숙기에 맞춰… “가장 맛있는 시기” 이번 축제는 문경의 대표 품종인 감홍사과가 가장 맛있게 익는 시기에 맞춰 열려, 방문객들에게 최상의 맛을 선사한다. 감홍사과는 과피에 검은 반점이 생기는 고두병 피해로 타 지역에서는 재배가 어려운 품종이었지만, 문경에서는 칼슘비료 활용 재배법과 동록 방지 기술 개발로 피해를 대폭 줄이고 대량 생산에 성공했다. 1993년 문경에서 시험 재배를 시작한 이후 지속적인 품종 개량과 재배법 개선으로, 지금의 감홍사과는 크기(350g 이상)와 당도(16.5Brix 이상)가 뛰어나고 신맛이 적어 전국적으로 사랑받는 프리미엄 품종으로 자리 잡았다. “한 번도 안 먹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다”는 별칭처럼, 문경 감홍사과는 ‘인생감홍’으로 불리며 전국 재배면적이 800ha에 달하고, 이 중 65%인 520ha가 문경에서 재배된다. □ 개막 퍼포먼스·인기가수 축하공연 축제 개막식에서는 문경 농업의 결실인 감홍의 ‘비상(飛上)’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이어 김용빈·안성훈·전유진·손태진 등 국내 정상급 가수들의 축하공연이 열려 현장을 찾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사로잡을 예정이다. 20주년을 맞아 문경사과홍보관도 새 단장했다. 외부에서도 내부를 볼 수 있는 투명 에어돔으로 조성했으며, 사과품평회 수상작 전시, 프리미엄 감홍사과 특별홍보, 포토존 등을 갖춰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강화했다. □ 가족 위한 체험 공간 ‘문경사과 플레이그라운드’ 축제 기간 동안 문경새재 1관문 앞 잔디광장은 ‘문경사과 플레이그라운드’로 변신한다. 감홍노래방·사과모자 만들기·인생네컷·에어바운스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마련돼 가족 단위 방문객들에게 큰 호응이 기대된다. 맛있기로 소문난 감홍사과는 시중 가격이 비싸지만 축제장에서는 무료 시식이 가능하다. 17농가가 참여하는 판매장에서는 모두 시식을 제공하며, 농가별로 미세한 맛의 차이를 느껴본 뒤 원하는 곳에서 구매할 수 있다. 온라인에서는 19농가가 참여해 전국 어디서나 주문이 가능하며, 시나노골드와 부사도 축제 후반부에 판매될 예정이다. □ 사과 따기·나눔 행사로 풍성함 더해 문경의 13개 농장이 참여하는 사과 따기 체험은 무료로 진행되며, 수확한 사과는 현장에서 구매할 수 있다. 특히 25일에는 ‘일곱난쟁이 사과밭’에서 1인당 2개씩 무료 수확 체험이 진행돼 인기를 끌 전망이다. 또한 사과 나눔 이벤트는 게릴라 형식으로 수시 진행되며, 24일 ‘애플데이’와 26일 폐막식 이후에도 사과가 무료로 배부된다. 문경오미자·표고버섯 등 문경특산물 32개 업체가 참여하는 특산물 판매장도 함께 운영된다. 축제 종료 후에도 직거래 장터는 11월 2일까지 연장 운영돼 가을 단풍철 문경새재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풍성한 구매 기회를 제공한다. 신현국 문경시장은 “문경의 자랑인 감홍사과는 오직 10월에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사과”라며, “깊어가는 가을, 문경새재 단풍 길을 걸으며 제철 ‘인생감홍’을 맛보고 가족과 함께 축제를 만끽하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고성환기자 hihero2025@kbmaeil.com

2025-10-15

마늘, 장구한 역사의 식재료

사람이 되고 싶은 곰과 호랑이가 있었다. 열망을 이루기 위해 신(神) 앞에서 읍소했다. “100일간 동굴 속에서 나오지 않고 마늘과 쑥만 먹는다고 약속해라.” 신의 주문이었다. 호랑이는 견디지 못하고 동굴을 나갔고, 곰은 약속한 기간을 지켜 사람이 됐다. 그 사람이 된 곰이 낳은 것이 단군이다. 위는 한국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들어봤을 ‘단군신화’의 줄거리. 여기에 ‘마늘’이 등장한다. 이는 우리 민족이 까마득한 옛날부터 마늘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아닐지. 한국만이 아니다. 중앙아시아가 원산지로 추정되는 마늘은 수천 년 전부터 인간의 주요한 먹을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피라미드가 만들어지던 고대 이집트에선 육체적으로 힘겨운 일을 하는 노동자에게 마늘과 양파를 먹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먼 옛날 그리스에선 마늘을 특정 질병을 치료하는 ‘약’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수선화과의 여러해살이풀인 마늘. 한국에선 2가지 종류의 마늘이 재배되는데 중국에서 유입된 한지형과 스페인에서 온 난지형이 그것들이다.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김치, 각종 국과 찌개, 무침 등을 만들 때 마늘을 빼놓을 수 없는 재료다. 제주도 사람들은 마늘의 여린 잎을 간장에 담근 ‘마농지’도 즐겨 먹는다. 마늘은 스태미나 증강에도 사용됐다. 고대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에겐 빼놓지 않고 마늘을 먹였다. 항암과 고혈압, 동맥경화를 예방하는 효과도 있다고 전해진다. 마늘의 최대 생산지는 중국이다. 지구 위에서 생산되는 마늘의 78%를 중국이 재배한다. 한국인들은 어느 나라 사람보다 마늘을 좋아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재배지가 줄어들고 있다. 값싼 중국산이 대량으로 수입되는 탓이 아닐까?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0-14

의성 맛집들의 비결은 바로 ‘이것’

2019년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길목인 9월이었다. 지금은 여러 구설수와 논란에 휩싸여 적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욕을 얻어먹는 처지가 됐지만, 그때는 백종원의 위상이 ‘요식업계 황제’라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보통의 시청자가 보기엔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TV 출연이 잦았고, 그가 언급하거나 찾아간 식당은 당장 매출액에 0이 몇 개 더 붙을 정도로 손님들이 밀려들었으니. 마늘닭, 기름에 튀긴 특유의 느끼함 없이 미묘하게 미각을 자극하는 마늘의 풍미 입과 더불어 코까지 행복하게 만들어줘 석쇠에 구운 소고기 옆에는 마늘 한 접시 누구랄 것도 없이 식당 안 사람들 모두가 소고기 한 점에 마늘 한 쪽을 더해 ‘꿀꺽’ 의성은 한국서 손꼽는 ‘맛있는 마늘’ 산지 경상북도 의성. 튀긴 닭에 양념을 해서 파는 가게가 있다고 했다. 백종원이 다녀간 곳이었다. 시골의 여느 식당과 다르지 않은 입구와 실내. 문은 열려있는데 주인장이 없었다. 가게 안 구석에 전화번호를 적어놓았기에 통화를 했다. “곧 갈 테니 10분만 기다려요”란다. 긴 시간이 아니니 “네 천천히 오세요”라고 답했고. 잠시 후 나타난 6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뚝딱뚝딱 자른 닭을 기름솥에 튀겨 꺼낸 후 불그스레한 양념을 꺼내왔다. ‘훅~’하고 풍겨오는 알싸한 마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양념에 들어간 마늘의 엄청난 양이 짐작되는 순간이었다. 옥호(屋號)가 ‘양념통닭’이 아닌 ‘마늘닭’인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짐짓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백종원이 이 마늘양념에 반했나봐요?” 기대와 달리 자랑이 아닌 심상한 대꾸가 돌아왔다. “그 양반? 뭘 엄청나게 아는 척 하던데, 자기가 닭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어.” 오랜 세월 닭을 고르고 만지고 튀겨내고, 거기에 어떤 양념이 어울리는지 수십 년 골똘하게 고민해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프라이드였을까? ‘의성 마늘닭집’ 주인의 말에선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런 자긍이라면 까짓 백종원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요리사 고든 램지(Gordon Ramsay)도 우습게 보일 듯했다. “닭튀김이라면 내가 너보다 훨씬 잘 알아”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유명한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날 맛본 마늘닭은 기름에 튀긴 음식 특유의 느끼함이 없었고, 자극적이지만 미묘하게 미각을 자극하는 마늘의 풍미가 입과 더불어 코까지 행복하게 만들어줬다. 영어로는 갈릭(Garlic)이라 부르고, 중국인들은 산(蒜)이라 쓰는 마늘의 역사는 유구하다. 드라마틱한 소설처럼 재밌는 역사책 ‘삼국유사’에서도 곰과 마늘에 얽힌 토픽이 확인된다. 이 책은 자그마치 800여 년 전인 고려왕조 말기에 승려 일연(1206~1289)이 쓴 것이다. 더 멀리 가보자.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 파라오(Pharaoh)가 지배하던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에도 ‘건강하려면 마늘을 먹어야 한다’는 문장이 등장할 정도. 점심으로 ‘마늘닭’을 먹은 그날. 저녁은 의성군에서 유명하다고 이름난 소고기구이집에 갔다. 채식주의자라면 치를 떨 일이겠으나, 기자는 ‘육식주의자’에 가깝고, 다행히 일행 중에도 베지테리언이 없었으니. 듣기로 의성에서 식용으로 키우는 소에겐 마늘을 먹인다고 했다. ‘얼마나 지천이면 사람 먹는 마늘을 소에게까지 먹일까’라는 의심이 들었다. 헌데, 그런 생각은 의성군 재래시장마다 주렁주렁 널려있는 수천 접 마늘을 보며 사라졌다. 의성은 한국에서 손꼽히는 ‘맛있는 마늘’ 산지가 아닌가. 그걸 증명하듯 석쇠에 구운 소고기 옆에는 의성마늘이 한 접시 가득 놓였다. 굽지도 않은 생마늘이. 누구랄 것도 없었다. 식당 안 사람들 모두가 소고기 한 점에 마늘 한 쪽을 더해 꿀꺽꿀꺽 삼키고 있었다. 소고기구이집 주인에게 물었다. “왜 모두에게 마늘을 주는 거죠? 마늘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느긋하고 여유만만한 대답이 금방 돌아왔다. 반문이었다. “네? 마늘 싫어하는 한국 사람이 있나요?” 맞다. 한국 사람인 기자도 마늘을 누구보다 좋아한다. 그러니까 그게 2011년이다. 한 달쯤 남부 유럽 북마케도니아의 호숫가 마을 오흐리드(Ohrid)에 머문 적이 있다. 그 기간 숙소였던 조그만 게스트하우스에선 가끔 유럽 각국에서 온 청년들의 바비큐 파티가 벌어졌다. 라제 파마코스키, 알렉산더 몰코스키란 이름을 가진 동네 청년들은 그 파티에서 구운 고기보다 생마늘을 더 많이 먹는 기자를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자의 별명이 ‘미스터 갈릭맨’이 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마늘은 맛있다. 의성마늘은 특별히 더 맛있다. 그렇지 않은가?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0-14

포항시민의 자부심이 되는 막걸리를 만들고 싶어

남들은 막걸리를 술이라지만 내게는 밥이나 마찬가지다 천상병의 시 「막걸리」의 한 구절이다. 시인은 막걸리가 “술이 아니고 밥일 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더해주는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말했다. 또한 막걸리 한 병을 작은 잔으로 나누어 하루 종일 마신다고 했다. 이처럼 적당히 마시는 막걸리는 즐거움이 되고, 피로를 잊게 하는 노동주가 된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끼니가 된다는 사실을 양민호 대표는 한 단골손님에게 배웠다. 어느 날 매번 양조장에 직접 와서 막걸리를 사 가던 손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손님의 아버지가 위암 수술을 받은 후 음식을 삼키지 못했는데, 유독 양 대표네 막걸리는 잘 드신다고 했다. 그러면서 “잘 만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하는데, 그 손님의 인사가 양 대표의 심금을 울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막걸리를 허투루 만들어서는 안 되겠다는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양 대표는 술인 동시에 영양이 풍부한 발효식품인 막걸리를 좀 더 안전하고 건강하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연구와 개선을 거듭하여 2017년에 경상도 지역 양조장으로는 최초로 HACCP(식품안전관리인증기준) 인증을 획득했다. 동해명주 3대 대표가 된 지 불과 1년 만의 성과였다. HACCP은 식품의약품안전처의 가장 높은 수준 인증제로, 식품 원재료 생산부터 소비자가 섭취하기 전까지 생물학적, 화학적, 물리적 위해 요소가 혼입되거나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위생 관리 시스템이다. 체계적인 공정과 위생 관리로 안전한 막걸리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막걸리가 끼니가 된다”는 손님의 한마디 덕분이었다. 쓴맛·단맛·감칠맛·톡 쏘는 맛·새콤함 五味 어우러져 독특한 풍미… 외국 술에선 찾아보기 힘든 고유한 맛 전통 잇는 젊은 양조인들의 현재 화두는 ‘프리미엄’ 최근 포항의 회와 어울리는 맑은 약주 개발에 몰두 양민호 대표, 2017년 경상도 최초 HACCP인증 획득 동해명주 3대 대표 맡은지 불과 1년 만에 이룬 성과 아일랜드 국가브랜드 ‘기넥스 맥주 양조장’ 최종 모델 “여행자들의 필수 코스로 만들어 관광명소화” 포부 막걸리는 ‘오미(五味)의 예술’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술은 백약의 장(長)이고 만병의 근원이라는 말이 있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화를 부르는 법이고 과음도 마찬가지다. 술도가에서 태어나 술을 생활처럼 접하며 살아온 양 대표의 철학도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 양조장에서 부모님을 도우며 막걸리를 배워서인지 술에 대한 기억도 남다르다. “옛날 주입기는 자동으로 멈추지 않아 병에서 술이 흘러넘쳤는데, 그 모습이 마치 우유 같아서 바가지로 받아 맛을 보곤 했습니다.” 양 대표에게 막걸리는 목이 마르면 떠 마시는 발효음료와 비슷했다. 조기교육 덕에 음주를 호기심이나 모험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수학여행지 숙소에서 선생님 몰래 술을 마시는 일탈을 해본 적도 없다. ‘술은 편한 자리에서 맛있는 음식과 더불어 즐기며 마시는 것’이라는 철학을 일찍부터 세웠기 때문이다. 술을 즐기는 또 하나의 비결은 ‘페어링(pairing)’이다. 그날의 기분과 상대방 그리고 음식과의 조화가 중요하다. 양 대표는 “술은 음식과 함께할 때 비로소 제맛을 낸다”고 강조한다. 술과 음식의 조화는 술 자체뿐 아니라 음식의 풍미까지 좌우한다. ‘적게 마셔도 제대로 즐기자’는 요즘 술 문화 흐름과도 상통한다. 양민호 대표는 상황에 따라 술을 달리한다. 깊은 대화에는 소주, 더운 날에는 맥주, 가벼운 분위기에는 와인 그리고 출출하거나 마음이 허할 때는 막걸리를 찾는다. 막걸리는 종류에 따라 음식도 달라진다. 구수한 밀막걸리는 매운 음식에, 알코올 풍미를 강한 동동주는 기름진 전과 잘 맞는다. 당도를 낮춘 가벼운 쌀막걸리는 해산물과 어울린다. 막걸리는 ‘오미(五味)의 예술’이라 불린다. 알코올의 쓴맛, 당분의 단맛, 발효에서 비롯한 감칠맛, 탄산의 톡 쏘는 맛, 유산균이 남기는 새콤함이 한데 어우러져 독특한 풍미를 낸다. 외국 술에서는 찾기 힘든, 한국만의 고유한 맛이다. 양 대표는 “첫 잔이 맛있는 술보다 음식과 오래 잘 어울리는 술이 좋은 술”이라고 말한다. 주종을 가리지 않고 마셔도 쉽게 취하지는 않지만, “25도 소주 7병도 거뜬했다”는 부친의 주량에는 미치지 못한다며 웃었다. 포항의 신선한 회와 어울리는 약주 개발에 몰두 물론 술 앞에서 늘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한 번은 과음으로 관능검사(미각, 시각, 후각, 청각, 촉각 등의 감각을 이용해 식품의 특성을 평가하는 방법)를 놓쳐서 원료 하나를 빠트린 채 5000병을 용기에 넣는 실수를 한 적이 있다. 결국 직원 일곱 명이 달라붙어 병을 다시 따야 했고, “5초면 될 일을 하루 종일 다시 하며 뼈저리게 후회했다”고 말했다. 실패와 시행착오 속에도 배울 것은 늘 있는 법이다. 현재 막걸리 시장의 화두는 ‘프리미엄’이다. 젊은 양조인들이 전통 제조법을 익혀 새로운 맛을 내고, 도시 소비자들이 이를 즐긴다. 이제 막걸리는 ‘막 걸러 만든 술’이 아니라 ‘신선하게 걸러낸 술’로 인식되는 시대다. 신선하게 걸러낸 막걸리는 양조장에서 떠난 뒤에도 쉼 없이 살아 움직인다. 출시 직후에는 달콤함이 강하지만, 보름이 지나면 산미가 돌고 한 달이 되면 입맛을 돋우는 시큼한 맛이 완성된다. 양 대표가 즐겨 찾는 시점은 출시 후 20일 무렵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계절마다 달라지는 옛 막걸리 맛이 오히려 그리울 때가 있다”고 말한다. 과거에는 누룩 냄새가 강하고 과발효로 맛이 일정치 않았지만, 계절마다 다른 맛을 즐길 수 있었다. 지금은 균일한 맛이 보장되지만, 특별한 맛을 우연히 만나는 멋은 사라졌다고 아쉬워했다. 그러한 아쉬움은 ‘옛 막걸리 프로젝트’로 이어졌고, 자전거에 말통을 싣고 배달하던 시절의 맛을 복원해 출시하기에 이른다. 양 대표는 전국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양조장이니 바닷바람이 술맛의 깊이를 더했다며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최근에는 포항의 신선한 회와 어울리는 맑은 약주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양 대표의 이름을 건 제품이다. 6개월의 숙성 과정을 거치지만, 만족스럽지 않으면 과감히 버린다. 지금까지 버린 술만 10여 톤에 이른다. 무언가에 이름을 걸었다는 건 막중한 책임감을 의미한다. 하기야 막걸리에 인생을 걸기로 작정한 사람이니 이름을 거는 건 당연한지도 모른다. 양조장을 관광명소로 키우고 싶어 양민호 대표가 막걸리에 인생을 걸기로 다짐한 건 해병대 복무 시절이었다. 우연히 참석한 장성들의 술자리에서 “포항에서 제일 좋은 막걸리”라는 찬사를 들었고, 그 순간 습관처럼 빚던 술이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고 허물없는 시간을 만든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양 대표는 제대 후 대학에 복학해서도 장거리를 통학하며 양조장 일을 도왔다. 그 이후 단 한 번도 흔들림 없이 막걸리에 인생을 건 한길을 걷고 있다. 양 대표가 그리는 최종 모델은 아일랜드의 기넥스 맥주 양조장이다. 아일랜드를 맥주의 나라로 만든 곳으로, 여행자들의 필수코스다. 기넥스 맥주 양조장이 국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국가 브랜드로 자리를 잡은 것처럼, 양 대표는 포항시민의 자부심이 되는 막걸리를 만들고 싶다. 포항시문화관광협회 부회장이기도 한 그는 양조장을 관광명소로 키우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지난 8월에는 도구해수욕장에서 막걸리 축제를 열었고, 연오랑세오녀 설화를 담은 프리미엄 막걸리도 준비하고 있다. 양 대표는 “막걸리는 한민족의 애환이 담긴 술”이라며, “전통을 계승하는 사명은 있지만, 옛 방식을 답습할 필요는 없다”고 밝힌다. 현대인의 입맛에 맞는 막걸리 연구가 필요하며, 이는 전통주 계승자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지역에서 내공을 다지면 반드시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양 대표는 관광과 문화, 전통과 현대적 감각을 접목해 포항의 막걸리를 새로운 브랜드로 성장시키고, 나아가 세계 시장에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포항에서 빚은 막걸리가 머지않아 세계인의 술잔을 채울 날이 오리라 기대한다. 〈끝〉 글 : 배은정(소설가) 사 진 : 김 훈(작가)

2025-10-12

노란 닻별이 빛나는 거리, 문경 점촌 원도심에 활력 불어넣다

문경시가 점촌 원도심 문화의 거리를 ‘닻별 테마길’로 조성하며 새로운 희망의 불빛을 밝혔다. 문경시는 별자리 카시오페아자리의 다른 이름인 ‘닻별’을 테마로 한 조형물·조명·마켓을 설치하고, OBS경인TV 특집 가을음악회를 마련해 침체됐던 점촌 구도심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특히 거리는 닻별의 상징색인 노란색으로 화사하게 꾸며, 마치 별빛이 내려앉은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노란색 간판·어닝 단장, 조형물13점·벤치 20개·파티등 360개 설치 “트로트 스타 팬덤·에너지를 구도심 활성화에 접목” 긍정적 평가 역전상점가-행복상점가·중앙시장·점촌점빵길 한 흐름으로 연결 닻별 테마길 조성 이후 주말마다 유동인구 급증, 상권도 살아나 □ 닻별의 노란빛으로 다시 태어난 문화의 거리 문경시는 점촌원도심상권 130m 구간을 정비해 ‘닻별 테마길’을 완성했다. 노란색 간판과 어닝을 새로 달고, 상징 조형물 13점, 조형벤치 20개를 설치했으며, 은하수 조명 18m와 360여 개의 파티등으로 거리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특히 거리를 수놓은 색상은 ‘닻별’의 상징인 노란색이다. 조형물은 황금빛 별 모양을 형상화했고, 벤치와 가로등에는 노란색 포인트가 더해졌다. 밤이 되면 파티등과 은하수 조명이 노란빛으로 거리를 밝히며, 시민들은 “거리 전체가 별빛 속에 잠긴 듯 황홀하다”고 감탄한다. 문경시 관계자는 “닻별의 노란색은 희망과 따뜻함을 의미한다”며 “시민과 방문객이 언제든 밝은 기운을 느낄 수 있도록 색채 계획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설명했다. □ 팬덤문화, 원도심에 생기를 불어넣다 ‘닻별 테마길’의 출발점은 트로트 스타 팬덤이다. 팬클럽 ‘닻별’은 전국적으로 결속력 있는 팬덤을 형성하고 있으며, 문경시는 이들의 에너지를 구도심 활성화와 접목시켰다. 닻별 회원 이정은 씨(42)는 “닻별 덕분에 문경까지 오게 됐다”며 “거리 이름이 팬클럽 이름과 같아 자랑스럽다. 노란 닻별 조명이 너무 예쁘고, 팬으로서 마음이 벅차다”고 말했다. 또 다른 팬클럽 회원 김민서 씨(38·서울)는 “문경이 닻별의 고향처럼 느껴진다”며 “도시 전체가 팬덤의 따뜻한 정성과 열정으로 물든 것 같아 감동받았다. 앞으로도 문경을 자주 찾고 싶다”고 했다. 시민들도 이 같은 변화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점촌동 주민 박성호 씨(57)는 “예전에는 어둡고 한산하던 거리가 요즘엔 젊은 사람들로 북적인다”며 “닻별 덕분에 우리 동네가 밝아진 느낌이다. 상권도 되살아날 것 같아 기대된다”고 미소 지었다. 이처럼 트로트 팬덤의 문화적 열정이 지역 재생의 불씨로 이어지면서, ‘닻별 테마길’은 팬과 시민이 함께 만들어가는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 점촌역전상점가·행복상점가·중앙시장을 잇는 점촌점빵길 상생전략 문경시는 테마길 조성과 함께 점촌역전상점가·행복상점가·문경중앙시장을 잇는 점촌점빵길을 활용하는 전략을 세웠다. 거리에서 공연과 쇼핑을 즐긴 방문객들이 자연스럽게 인근 상권으로 발걸음을 옮기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문경중앙시장에서 20년째 식당을 운영 중인 김모 씨(56)는 “코로나 이후 손님이 줄어 어려웠는데, 거리가 환하게 단장되니 다시 북적일 것 같다”며 기대를 전했다. 행복상점가 상인회 관계자도 “닻별마켓을 계기로 시장 특산품과 점촌점빵길 상품까지 자연스럽게 홍보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점촌역전상점가에서 의류점을 운영하는 이은정 씨(45)는 “닻별 테마길이 생긴 뒤 주말마다 젊은 손님이 눈에 띄게 늘었다”며 “사진 찍고 놀다 쇼핑까지 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상인들도 거리 분위기에 맞춰 진열대를 새로 꾸미는 등 활기를 되찾고 있다”고 전했다. □ 가을음악회와 닻별거리 첫 축제 오는 10월 19일 낮 12시 30분, 문화의 거리 공영주차장에서 OBS경인TV 특집방송 문경 문화의 거리 가을음악회가 열린다. 방송은 2주 뒤 방송 될 예정이다. 출연진은 화려하다. 문경 홍보대사 박서진, 윤윤서, 장혜진을 비롯해 김수찬, 윤수현, 지원이, 이수호, 그리고 문경 트롯가요제 대상 장현욱이 무대를 꾸민다. 이날 박서진은 마지막 엔딩 무대를 맡아, 별빛 같은 피날레를 장식한다. □ 닻별마켓, 청년 창업과 상인들에게 활력 같은 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열리는 ‘닻별마켓’은 지역 상가 10팀이 참여하는 특설 장터로, 노란 닻별 색상을 활용한 체험 부스도 준비돼 있다. 점촌 행복상점가에서는 “문화행사와 시장 소비가 연결되어 상생이 된다”며 “닻별마켓이 지역 상권에 새로운 기회를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문경중앙시장에서 청년카페를 운영하는 최유진 씨(29)는 “닻별마켓을 통해 젊은 창업자들도 고객과 직접 만나 교류할 수 있어 큰 도움이 된다”며 “SNS 홍보 효과도 커서 손님이 꾸준히 늘고 있다. 앞으로는 지역 청년들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장터로 발전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점촌역전상점가에서 생활용품점을 운영하는 박진호 씨(52)는 “마켓이 열릴 때마다 거리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며 “외지 손님들이 많아지고, 상인들끼리 협력하는 분위기도 좋아졌다. 닻별마켓이 문경 상권의 새 활력소가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 “보여주기식이 아닌 지속 가능한 거리” 문경시는 닻별 테마길과 가을음악회를 일회성으로 끝내지 않고, 정기공연·콘텐츠 프로그램 개발, 체험행사 등으로 확장해 나갈 계획이다. 신현국 문경시장은 “닻별 테마길은 보여주기 식이 아닌, 장기적으로 시민·상인·관광객이 함께 살아가는 거리로 운영할 것”이라며 “점촌 원도심 전체가 활력을 되찾는 모델로 발전시키겠다”고 밝혔다. 박모 씨(67·점촌동)는 “예전엔 거리가 늘 썰렁했는데 요즘은 다시 활기가 도는 것 같다. 노란 닻별 조명이 켜진 밤거리를 걸으면 젊은 시절 생각이 난다.” 청년 상인 이모 씨(33)는 “닻별마켓을 통해 제 상품을 알릴 기회를 얻게 돼 기쁘다. 문화와 경제가 함께 어울리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 노란 별빛이 수놓은 ‘닻별 테마길’. 시민과 상인의 땀방울이 모여 문경 원도심이 새롭게 숨 쉬고 있다. 점촌의 밤하늘에는 닻별이 빛나고, 그 길을 걷는 발걸음마다 지역 상생과 부활의 희망이 반짝이고 있다. □ 닻별 ‘닻별’은 ‘카시오페이아자리’를 말한다. 가을철에 북극성을 중심으로 북두칠성의 맞은편에서 볼 수 있는 ‘W’ 모양의 별자리다. 우리나라에서 북두칠성과 함께 비교적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별자리인데, 그 별자리의 생김새가 닻 모양과 비슷하다고 해서 ‘닻별’이라 불렀다. 북두칠성의 국자 바가지 끝을 이어가다 보면 붙박이별인 북극성이 나오고, 다시 비슷한 거리만큼 떨어진 곳에 닻별이 있다. 글·사진/고성환기자 hihero2025@kbmaeil.com

2025-10-09

드라마 따라 포항으로… 감성여행 가볼까

역대급으로 긴 추석 연휴에 국민 10명 중 4명이 여행을 계획(한국교통연구원 조사)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런데도 막상 어디로 떠날지 쉽게 결정하기 어렵다. 최근 인기를 누린 드라마를 따라가 보면 어떨까. 첫사랑의 설렘이 남은 해변, 싱글맘의 눈물이 스며든 계단, 판타지의 저주가 깃든 전망대 모두 포항을 배경 삼아 만들어낸 드라마 속 명장면이다. 포항의 매력은 단순한 풍경을 넘어선다. 삼국유사의 전설이 살아 있는 해안, 일제강점기의 흔적을 간직한 골목, 그리고 철과 빛이 공존하는 현대적 야경이 한데 어우러진다. 바다와 숲, 시장과 철길, 도시와 항만이 교차하는 포항은 그 자체가 거대한 오픈세트다. 배우들이 걸었던 길을 따라가면 스크린 속 장면이 여행자의 발자국 위에서 다시 살아나고, TV에서만 봤던 동해의 푸른 결이 코끝과 피부로 스며든다. 이번 연휴, 드라마 제목을 손에 쥐고 길을 나서보자. 삼정해수욕장의 잔잔한 파도, 청하공진시장의 노란 불빛,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의 붉은 기와, 송도송림테마거리의 솔향, 장길리 복합낚시공원의 은빛 잔교, 이가리 닻 전망대의 일출, 철길숲의 초록 터널, 포항운하의 반짝이는 수면···. 카메라가 담았던 모든 장면이 여행자의 두 발과 시선으로 완성된다. ◇ 동백꽃 필 무렵 –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 싱글맘 동백(공효진)은 세상의 편견과 맞서 아이를 키우며 순박한 경찰 황용식(강하늘)의 사랑을 받는다. 동백꽃 필 무렵은 작은 마을의 상처와 연대, 치유를 촘촘히 그린 작품이다. 그들의 사랑과 아픔을 감싸 안았던 무대가 바로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다. 1920~30년대 일본식 목조 건물이 약 500m 구간에 80여 채나 남아 있으며 붉은 기와와 낡은 나무 문살, 좁은 골목길이 시간의 결을 그대로 품고 있다. 특히 일본에서 직접 자재를 들여와 지었다는 ‘하시모토의 집’은 현재 ‘구룡포근대역사관’으로 운영돼 당시 생활의 흔적을 다다미와 부츠단, 란마를 통해 생생히 보여준다. 골목 초입에는 모형 우체통과 옛 심상소학교를 재현한 전시가 있어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상상하게 한다. 드라마 속 동백과 용식이 사랑을 확인하던 계단은 지금도 연인들이 차례를 기다리며 앉아 사진을 남기는 포토존이다. 언덕 끝자락에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면 짭조름한 바람이 역사와 현재를 함께 데려온다. ◇ 갯마을 차차차 – 청하공진시장 도시 치과의사 윤혜진(신민아)은 바닷가 마을에서 만능 이웃 홍두식(김선호)을 만나 ‘함께 사는 기술’을 배워간다. 극 중 ‘공진시장’의 실제 무대는 포항시 북구 청하시장이다. 드라마 방영 이후 시장은 ‘청하공진시장’이라는 간판을 달고 여행객을 맞는다. 1·6일마다 열리는 오일장에는 활어와 해산물이 넘치고 연탄불 위에서 고등어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냄새가 골목을 채운다. 해가 기울면 시장 천장에 매단 전구가 하나둘 켜져 노란빛의 긴 통로가 된다. 식당 한편에서는 따뜻한 국물 한 숟갈을 들이키면 순간 드라마가 말한 ‘동네의 온기’가 체온으로 스며든다. 시장 입구의 카페 세트장과 골목 끝 슈퍼마켓은 지금도 팬들의 발길을 사로잡는 명소다. ◇ 나의 완벽한 비서 – 송도송림테마거리 일 ‘만’ 잘하는 헤드헌팅 회사 CEO 강지윤(한지민), 일 ‘도’ 완벽한 비서 유은호(이준혁). 업무와 감정의 경계에서 서로에게 스며드는 두 사람의 로맨스는 송도송림테마거리의 숲길 위에서 완성됐다. 이곳은 포항시가 ‘그린웨이 프로젝트’로 조성한 보행 중심의 숲길로 해변을 따라 솔개천·바닥분수·벽천이 이어지고 스틸아트와 트릭아트가 곳곳에 배치돼 낮에는 햇살이 반짝이며, 밤에는 조명이 솔숲을 은은히 물들인다. 황혼 무렵 벤치에 앉으면 솔향 사이로 포스코 야경이 별처럼 스며들고 계절마다 열리는 거리예술제와 버스킹은 숲 전체를 무대로 변신시킨다. ◇ 런온 – 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 육상선수 기선겸(임시완)과 영화 번역가 오미주(신세경)가 서로의 언어로 달려가는 청춘 로맨스 런온. 이들의 감정선이 동해의 수평선과 만나는 장면은 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에서 촬영됐다.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전설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이 공원은 해와 달의 조형물, 출렁이는 억새밭, 일월대 전망대가 어우러진다. 입구의 벽화 거리에선 연오랑과 세오녀의 여정이 펼쳐지고, 전시관 ‘귀비고’에서는 VR과 영상 체험을 통해 설화를 생생히 만날 수 있다. 산책로를 따라가면 바다 위로 튀어나온 일월대 전망대가 동해를 한눈에 담아내며 해질 무렵이면 바다가 금빛에서 보랏빛으로, 다시 진청색으로 변하는 장관이 펼쳐진다. ◇ 이 연애는 불가항력 – 이가리 닻 전망대 저주로 얽힌 두 남녀 장신유(로운)와 이홍조(조보아)가 운명에 맞서는 판타지 로맨스. 긴장과 설렘이 교차하는 결정적 장면은 이가리 닻 전망대가 만들어낸 공간 덕에 더 선명해졌다. 푸른 해송 숲 사이를 지나 바다로 길게 뻗은 스틸 데크는 위에서 보면 ‘닻’ 모양이 선명하다. 높이 약 10m, 길이 약 102m의 전망대 끝은 독도를 향하고 있으며 발아래 투명 데크를 통해 치솟는 포말을 내려다볼 수 있다. 새벽이면 닻 끝에서 태양이 솟아오르듯 일출이 열리고 난간을 타고 울리는 파도 소리와 해풍의 금속 차가움이 극의 ‘필연’을 촉각으로 전한다. ◇ 모래에도 꽃이 핀다 – 장길리 복합낚시공원 20년째 떡잎인 씨름 신동 김백두(장동윤)와 골목대장 출신 오유경(이주명)의 재회와 성장담. 주저하던 청춘이 다시 걷기 시작하는 장면이 바로 장길리 복합낚시공원에서 탄생했다.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바다 위로 약 170m 뻗은 보릿돌교. 데크 틈새로 파도가 들고나며 염분이 미세한 안개로 흩어지고 해가 지면 해상 펜션의 불빛이 물결 위 별처럼 깜박인다. 보릿돌은 과거 미역이 풍성했던 바위로 알려져 마을의 ‘식탁’을 지켜온 기억을 품는다. 난간에 손을 얹으면 금속의 촉감이 파도의 리듬을 손바닥으로 전하고 금속 그림자와 물결이 겹쳐 은빛 물무늬를 만든다. ◇ 마이유스 – 삼정해수욕장 남들보다 늦게 평범한 삶을 시작한 선우해(송중기), 뜻하지 않게 그 평온을 흔들어야 하는 성제연(천우희). 첫사랑의 기억과 후회, 화해를 다루는 감성 로맨스 마이유스의 무대는 구룡포 남쪽 삼정해수욕장이다. 만곡형의 포근한 포켓 비치, 곱고 잘 드는 모래, 완만한 경사 덕에 파도의 호흡이 낮다. 해수면이 얕아지는 구간이 길어 해질녘 얇은 물막 위에 노을이 거울처럼 반사된다. 마을 고깃배가 돌아오는 이른 저녁이면 하늘과 바다의 색이 서서히 뒤섞이고 해변 뒤편 작은 포구와 횟집이 노을빛을 받아 붉게 달아오른다. 카메라가 없어도 영화 같은 장면이 연출된다. ◇ 여행을 대신해 드립니다 – 철길숲 한때 도시의 대동맥이었던 옛 철도선로가 지금은 시민의 허파 같은 숲길로 환생했다. 아이돌 출신 리포터가 의뢰인의 사연을 안고 길을 대신 걸어주는 ‘여행을 대신해 드립니다’의 따뜻한 정서와 맞닿는 공간이 바로 포항 철길숲이다. 4.3km의 선형 공원으로 실개천·분수·인공폭포가 걷기의 리듬을 만들어 준다. 왕벚나무·느티나무·메타세쿼이아 등 수천 그루가 그늘을 드리우고 밤이면 은은한 조명이 길 전체를 터널처럼 밝힌다. 초여름이면 수국이 만발해 색색의 꽃길이 이어지고, 가을이면 단풍이 레일 위로 내려앉아 “기차는 없지만 여행은 계속된다”는 감상을 선사한다. ◇ 여행 동선 팁 추석 연휴에 포항을 찾는 이들을 위한 여행 동선을 한눈에 정리해 본다. 먼저 북부 코스는 청하공진시장에서 싱싱한 해산물의 활기를 느낀 뒤 푸른 해송 숲 사이로 길게 뻗은 스틸 데크를 걸으며 동해 일출을 맞이할 수 있는 이가리 닻 전망대로 이어진다. 이어 도심 코스에서는 옛 철도선로를 숲길로 재탄생시킨 철길숲을 천천히 거닐고 해변을 따라 조성된 송도송림테마거리에서 스틸 아트와 야간 조명을 즐기며 포스코 야경까지 한눈에 담는다. 마지막으로 남부 코스는 1920~30년대 일본식 목조 건물이 남아 있는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에서 과거의 시간을 거슬러 보고 부드러운 모래와 잔잔한 파도로 ‘포켓 비치’의 매력을 품은 삼정해수욕장에서 여유로운 산책으로 마무리한다. 일출과 일몰 명소도 빼놓을 수 없다. 해가 바다 수평선 위로 솟는 장관을 보려면 이가리 닻 전망대, 석양이 금빛과 보랏빛으로 물드는 황혼을 담고 싶다면 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 일월대가 제격이다. 다만 해안 데크와 전망대는 강풍이나 결빙 시 출입이 제한될 수 있으니 방문 당일 포항시 관광 안내를 통해 최신 정보를 확인하고 안전을 챙기면 더욱 알찬 추석 여행이 될 것이다. 포항은 단순히 드라마의 배경이 아니다. 전설·근대·현대가 켜켜이 겹쳐 하나의 서사를 이룬다. 구룡포의 오래된 목조 가옥에서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연대의 시간을, 청하공진시장에서 함께 사는 기술을, 송도송림테마거리에서 일상 속 로맨스를, 장길리 끝에서 다시 걷기 시작하는 청춘을, 철길숲에서 기차 없이도 계속되는 여행을 배운다. 그리고 이가리 닻 전망대에서 일출을 맞으며 이번엔 우리가 주인공인 장면을 한 컷 더 찍는다. 카메라는 꺼져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이번 추석, 포항에서 화면 밖의 장면을 완성해보자. /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

2025-10-01

물안개·가을꽃 물드는 고즈넉한 풍경속으로

가을은 한국의 사계절 중 가장 짧지만 가장 깊은 계절이다. 여름의 열기를 식히는 바람이 불고, 나뭇잎은 붉고 노랗게 물들며, 하늘은 높고 푸르다. 이 계절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여행지는 단연 경북이다. 산과 강, 고택과 서원이 어우러진 경북은 가을이 되면 그 진가를 발휘한다. 특히 추석 연휴는 가족과 함께 자연을 만끽하기에 더없이 좋은 시기다. 하지만 유명 관광지는 인파로 북적이기 마련이다. 경주 불국사, 안동 하회마을, 청송 주왕산 등은 이미 많은 이들이 찾는 명소다. 이번 특집에서는 사람들에게 덜 알려졌지만, 경치와 분위기, 체험 요소까지 두루 갖춘 경북의 숨은 명소 10곳을 소개한다. 조용한 가을 여행을 원하는 이들에게 최고의 선택이 될 것이다. 1. 청송 주산지-물안개와 단풍이 어우러진 신비의 호수 청송군 주왕산면에 위치한 주산지는 조선시대 인공적으로 조성된 저수지다. 하지만 그 풍경은 자연 그대로의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새벽이면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호수에 비친 왕버들나무는 마치 동양화 속 풍경처럼 고요하다.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10월 초에는 붉은빛과 안개가 어우러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주산지는 관광객이 몰리는 시간대를 피해 이른 아침에 방문하면 고요한 자연과 마주할 수 있다. 사진 애호가들에게는 특히 인기 있는 장소이며, 삼각대를 세우고 해가 떠오르는 순간을 기다리는 이들의 모습도 흔하다. 주산지의 가을은 말없이 깊고, 그 고요함이 여행자의 마음을 정화시킨다. 2. 고령 다산 은행나무숲-황금빛 산책로의 낭만 고령군 다산면 낙동강변에 위치한 은행나무숲은 수령 100년 이상의 은행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장관을 연출한다. 가을 햇살 아래 황금빛으로 물든 나뭇잎 사이를 걷다 보면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1km 이상 이어지는 산책로는 강변 벤치와 어우러져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에 제격이다. 입장료 없이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으며 가족 단위 방문객에게도 부담 없는 힐링 공간이다. 특히 해질 무렵 강 너머로 떨어지는 햇살이 은행잎 사이로 스며들면 그 풍경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다. 3. 문경 봉천사 개미취 꽃밭-연보라빛 가을의 정원 문경시 가은읍에 자리한 봉천사는 가을이면 개미취 꽃으로 뒤덮인다. 1만여㎡(3000여평) 규모의 꽃밭은 연보라빛 물결이 일렁이며, 절 주변을 수채화처럼 물들인다. 이곳에서는 차와 묵이 제공되는 힐링 공간도 마련돼 있어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선 명상과 휴식의 장소로 손꼽힌다. 개미취는 국화과 식물로 가을에 피는 연보라빛 꽃이 특징이다. 봉천사에서는 이 꽃을 중심으로 사찰과 자연이 어우러진 정원을 조성해 방문객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꽃 사이를 걷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절의 종소리가 들려오면 그 고요함은 더욱 깊어진다. 4. 영주 죽계구곡-선비의 길을 따라 걷는 단풍 트레킹 영주시 풍기읍에 위치한 죽계구곡은 조선 시대 선비들이 사색하던 계곡길이다. ‘구곡’이란 이름처럼 9개의 굽이 마다 고유한 이름과 풍경을 지닌다. 약 6.6km의 트레킹 코스로 단풍과 청량한 물소리를 즐기며 걷기 좋다. 죽계구곡은 단순한 자연 경관을 넘어선 철학적 공간이다. 선비들은 이곳을 걸으며 자연 속에서 도를 닦고 삶의 의미를 되새겼다. 가을이면 붉게 물든 단풍과 계곡의 맑은 물이 어우러져 깊은 정서를 자아낸다. 붐비지 않는 한적한 길에서 가을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5. 칠곡 가산수피아-가을꽃이 피어나는 테마정원 칠곡군 가산면에 위치한 가산수피아는 핑크뮬리, 구절초, 댑싸리 등 다양한 가을꽃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테마정원이다. 산책로가 잘 정비돼 있어 가족 나들이나 커플 여행에 적합하며 꽃과 함께 사진을 찍기에도 좋은 장소다. 가산수피아는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진 공간이다. 곳곳에 설치된 조형물과 포토존은 방문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며, 꽃 사이를 걷는 길은 마치 동화 속 정원처럼 느껴진다. 10월 초에는 꽃들이 절정을 이루어 화려한 색채의 향연을 즐길 수 있다. 6. 경주 운곡서원-은행나무 아래 고즈넉한 서원의 풍경 경주시 강동면에 자리한 운곡서원은 400년 된 은행나무가 서원 앞을 지키고 있다. 단풍철이 되면 노란 은행잎이 서원 마당을 뒤덮으며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관광객이 많지 않아 조용한 산책과 사색의 시간을 보내기에 좋다. 운곡서원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 김굉필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서원으로 그 역사적 가치도 크다. 서원 내부에는 퇴계 이황의 정신을 기리는 공간도 있어 전통과 철학을 함께 느낄 수 있다. 가을의 서원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시간과 사색이 흐르는 공간이다. 7.울진 금강송 숲길-걷는 길이 곧 힐링이 되는 곳 울진군 북면에 위치한 금강송 숲길은 국내 최대의 천연 금강송 군락지다. 금강송은 곧게 뻗은 기품 있는 자태로 조선 궁궐의 목재로 쓰였던 나무로 그 숲을 걷는다는 건 역사와 생명의 흐름 속을 걷는 일이다. 가을이면 금강송 사이로 단풍이 물들고, 숲길은 붉은빛과 초록빛이 어우러진 오묘한 색채로 변신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발끝에 닿는 낙엽의 감촉, 그리고 피톤치드 가득한 공기는 도시에서 잊고 지낸 감각을 되살려준다. 금강송 숲길은 총 13km에 달하는 탐방로이다. ‘금강송 생태탐방로’는 자연 그대로의 숲을 보존한 구간으로 인위적인 시설 없이 오롯이 숲과 마주할 수 있는 길이다. 가족 단위 방문객은 평탄한 숲길을 따라 가볍게 산책할 수 있고, 트레킹을 즐기는 이들은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 금강송의 숨결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다. 8. 영덕 창포말등대공원-바다와 등대가 어우러진 산책 코스 경북 영덕군 창포리에 위치한 창포말등대공원은 동해의 푸른 바다와 하얀 등대가 어우러진 조용한 산책 명소다. 이곳은 관광지의 화려함보다는 바다와 하늘, 바람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조화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가을철에는 높고 맑은 하늘과 선선한 바닷바람이 어우러져 걷기 좋은 날씨가 이어진다. 창포말등대는 영덕 블루로드의 일부이다.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트레킹 코스와 연결돼 바다를 바라보며 걷는 길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공원 내에는 등대를 중심으로 작은 광장과 벤치, 전망대가 있어 바다를 바라보며 쉬어가기 좋다. 해질 무렵에는 붉게 물든 하늘과 등대가 어우러져 낭만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걷는 길은 도시의 소음을 잊게 하고 바다의 너른 품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9. 청도 운문사 은행나무길-이틀만 공개되는 황금빛 절경 청도군 운문면에 위치한 운문사는 신라 시대에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이다. 이곳의 은행나무길은 단풍철에 단 이틀만 일반에 공개되며, 그 희소성 덕분에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수령 300년이 넘는 은행나무들이 절 입구를 따라 늘어서 있다. 노란 은행잎이 바닥을 덮는 풍경은 마치 황금빛 융단을 깔아놓은 듯하다. 운문사는 비구니(여성 승려)들이 수행하는 사찰로도 유명하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은행나무 아래를 걷다 보면 자연과 수행의 기운이 어우러져 마음이 차분해진다. 단풍과 은행잎이 어우러진 절경은 짧은 가을을 더욱 깊고 진하게 만들어준다. 10.안동 물길공원-낙동강과 가을빛이 흐르는 도심 속 쉼터 안동시 성곡동에 위치한 물길공원은 낙동강변을 따라 조성된 도심 속 자연공원이다. 이름 그대로 ‘물길’을 따라 걷는 산책로가 중심이며, 강변의 풍경과 계절의 색이 어우러져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힐링 공간이다. 가을에는 은행나무와 단풍나무가 노랗고 붉게 물들며, 강물에 비친 색채가 또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공원 곳곳에는 유교문화권의 상징물과 조형물이 설치돼 걷는 동안 안동의 정신적 뿌리를 자연스럽게 체험할 수 있다. 강변 데크와 전망대, 쉼터가 잘 정비돼 가족 단위 방문객이나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도 적합하다. 해가 지는 시간에 물길공원을 걷다 보면 낙동강 너머로 붉게 물든 하늘과 강물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도심에서 멀지 않으면서도 자연의 고요함을 느낄 수 있어 추석 연휴에 잠시 일상을 벗어나기 좋은 장소다. 안동댐과 월영교, 유교랜드 등 인근 명소와 연계해 하루 코스로 즐기기에도 알맞다. 이번 추석 연휴에는 경북의 숨은 명소에서 자연과 전통, 체험과 감성을 모두 담아보자. 붐비지 않는 조용한 공간에서 진짜 가을을 만날 수 있다. 단풍 아래서 걷고, 은행잎 사이에서 사색하며, 물안개 속에서 가을을 느껴보는 여행. 그 길 끝에서 당신은 아마도 잊고 있던 계절의 감성을 다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 /피현진기자 phj@kbmaeil.com

2025-10-01

다양한 전시·공연·체험 ‘문화와 재미’로 채워진 도심 곳곳

대구시는 추석 연휴 기간 시민들과 대구를 찾는 방문객들이 즐길 수 있는 전시, 공연, 체험 프로그램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도심 곳곳에서 운영한다. 우선, ‘The Pulse of Life – 생명의 울림’을 주제로 30여 개국 200여 작가의 700여 점을 선보이는 국내 최대 규모의 국제사진전시회인 대구사진비엔날레를 추석 당일을 제외한 연휴 기간 내내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감상할 수 있다. 대구 사진비엔날레 30여 개국 작품 700여 점 선보여 토요시민콘서트•대구예술제•청년버스킹 공연 풍성 ‘호러 축제’와 함께 진행되는 국제힐링공연예술제 근대역사관•방짜유기박물관 등 체험 프로그램 마련 이월드, 귀성길 승차권 등 인증•가족 특가 할인 진행 4일 가스공사 페가수스 vs 삼성 썬더스 프로농구 도심 속 독서 휴식 공간 ‘신천문화마당’•‘신천 시네마’ 고산도서관 이융남 교수 특별 강연 ‘공룡학자의 삶’ 수성아트피아 ‘이은결의 더 일루션-마스터피스’ 상영 수성못 수상무대서 국제오페라축제 ‘프린지 콘서트’ 이번 전시는 인간 중심의 시각을 넘어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고 공존하는 ‘공생세(Symbiocene)’의 개념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이 선보인다. 참여 작가들은 생명을 변화·연결·공명하는 힘으로 재해석하며, 관람객에게 지구와 공동체 속에서의 위치와 역할을 다시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다. 대구미술관은 지역 출신이자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인 이강소 화백의 회고전 ‘곡수지유(曲水之遊)’를 통해 지역의 문화 자긍심을 한층 더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전국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대구간송미술관은 광복 80주년 기념 기획전 ‘삼청도도(三淸滔滔)-매·죽·난, 멈추지 않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 민족의 정신적, 문화적 힘을 담은 작품을 소개해 많은 관람객이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주요 공연으로는 토요시민콘서트(신천 수변무대), 판타지아대구페스타 가을 축제인 2025 대구예술제(코오롱 야외음악당)와 청년버스킹(동성로 일원) 등 다양한 볼거리가 시민들이 즐겨 찾는 야외 도심 무대에서 열린다. ‘토요시민콘서트’는 시립교향악단, 합창단, 국악단, 무용단, 극단, 소년소녀합창단 등 6개 시립예술단이 참여하는 정기 야외 공연이다. 오는 8일까지 대구 코오롱야외음악당에서 열리는 ‘2025 대구예술제’와 ‘2025 청소년무대예술페스티벌’에는 대구예총 9개 회원협회와 3개 특별회원 단체, 대구예술문화대학 원우들이 참여한다. 특히 대구·광주 달빛동맹 예술교류와 대구·베트남 다낭 국제 예술교류 등을 더해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할 예정이다. 가을밤 색다른 공연을 즐기고 싶다면, 2025 대구국제힐링공연예술제를 찾으면 된다. 비수도권 유일 공연 거리인 대명공연거리와 도심 곳곳의 공연장에서 다양한 연극을 접할 수 있어 공연문화도시 대구의 진수를 느낄 좋은 기회다. 호러 축제와 함께 진행되는 이번 예술제는 12일까지 대구문화예술회관과 대구 내 소극장에서 열린다. ‘다시, 공연에 빠지다’라는 슬로건 아래, 해외 및 수도권 작품부터 지역 극단의 우수 레퍼토리까지 다채로운 무대가 마련된다. 특별초청작 2개, 지역 극단 공식 초청작 6개, 해외 초청작(튀르키예·영국) 2개, 자유 참가작 2개로 총 12개 작품이 관객들 앞에 선다. 추석맞이 체험 프로그램과 이벤트도 다채롭게 준비돼 있다. 대구시립박물관인 대구근대역사관과 대구방짜유기박물관, 대구향토역사관은 추석 당일(6일)을 제외한 연휴 기간(3~9일)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다채로운 문화행사를 연다. 경상감영공원에 있는 대구근대역사관은 ‘2025 대구근대역사관에서 보내는 즐거운 한가위 연휴’라는 주제로 체험행사를 진행한다. 3일부터 5일까지 우리나라 전통 장신구인 노리개를 만들며 전통 문양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마련한다. 하루에 50명의 어린이가 참여할 수 있다. 7~9일은 하루 100명씩 한글 책갈피 꾸미기를 하며 한글날의 의미를 느껴보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또 2층 기획전시실에서는 근대 대구 섬유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대구 도심 공장 굴뚝, 기계 소리’ 특별기획전이 열리고, 1층 ‘대구 근대여행 길잡이방’에서 진행 중인 ‘100년 전 여류 비행사 권기옥·박경원, 대구와의 특별한 인연’ 전시와 ‘명예의 전당’ 앞에서 진행 중인 기증유물 작은전시 ‘박물관으로 온 두 책 –대구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와 파리만국박람회’도 관람할 수 있다. 팔공산국립공원에 위치한 대구방짜유기박물관은 ‘팔공산 달빛에 물든 풍요로운 한가위’라는 주제로, ‘보름달과 토끼’ 스티커 붙이기와 회오리 나무 팽이 놀이를 박물관 로비에서 펼친다. 연휴 기간 매일 선착순 90명을 대상으로 한다. 기획전시실에서는 현재 성황리에 진행 중인 국가 무형유산 이봉주-이형근- 이지호, 3대로 이어지는 방짜유기장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3대로 피어나는 방짜유기의 생명력’ 특별기획전을 관람할 수 있으며 유리 벽 전시실에서는 고지도와 옛 그림에 보이는 팔공산 역사 문화를 살펴보는 ‘옛 지도 속의 국립공원 팔공산’ 작은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올해 개관 28주년을 맞이한 달성공원 대구향토역사관은 △향토역사관 생일 축하 메시지 쓰기(1~9일) △한가위 행운의 룰렛(1~3일) △전통의 멋, 갓과 호랑이 그림 알기(5~8일) 등의 체험을 준비했다. 2일에는 건국대 김해경 교수를 초청해 근대 공원으로 다시 태어난 달성공원에 대한 특강을 개최한다. 상설전시실에서는 대구달성(달성공원) 변천을 소개한 ‘대구 역사의 중심, 대구달성(달성공원) 몇 장면’ 작은 전시를 관람할 수 있으며 경상감영 유적에서 출토된 조선시대 기와·도자기 편을 직접 만져보며 체험하는 ‘대구야, 고고(GoGo)유물과 놀자’도 진행된다. 지역 대표 유원지인 이월드는 귀성길 버스, 기차 등 이용 승차권 인증 할인과 가족 특가 할인을 진행하고, 대구문화예술진흥원은 스탬프투어 앱을 통해 대구 주요 관광지 스탬프 인증 시 추첨을 통해 치킨, 커피 쿠폰을 제공하는 이벤트를 진행한다. 스포츠에 관심이 많다면 4일 대구체육관에서 열리는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대구)와 삼성 썬더스(서울)의 프로농구 경기 관람을 추천한다. 여름철 도심 속 휴식처였던 신천 물놀이장도 주목할 만하다. 지난해 가을철 꽃 정원으로 꾸며졌던 ‘가족풀’은 도심 속 독서와 휴식 공간인 ‘신천 문화마당’으로 탈바꿈했고, 야간 조명이 돋보였던 ‘유수풀 포토존’은 대구시 마스코트 ‘도달쑤’를 활용한 ‘대형 벌룬 포토존’으로 새롭게 변신했다. 또 지난해 영화관람 장소로 큰 인기를 끌었던 ‘파도풀’은 형형색색 우산이 물결치는 그늘 쉼터와 함께 ‘신천 시네마’로 시민들을 맞이한다. ‘신천 문화마당’은 잔디 매트, 1인용 소파, 파라솔, 그리고 아동도서 200여 권을 비치해, 도심 속 자연에서 누구나 편안하게 책을 읽으며 쉴 수 있는 ‘북 쉼터’를 조성됐으며, 놀이공간 내 풋살 골대, 농구 골대, 놀이 블록을 마련해 가족과 어린이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참여광장’도 마련돼 있다. 영화관람 공간과 우산 그늘이 물결치는 쉼터를 겸한 ‘신천 시네마’를 선보인다. 매주 토요일 총 6회에 걸쳐, 12m×5m 크기의 대형 스크린과 음향 시설을 통해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야외 영화관’을 제공한다. 야외 영화관은 오후 5시부터 8시까지 운영한다. 연휴기간 상영작은 4일 ‘지금만나러갑니다’, 11일 ‘극한직업’ 등이다. 이 밖에도 수성구에 있는 고산도서관에서는 우리나라 최초 공룡 박사로 알려진 이융남 교수의 특별 강연 ‘공룡학자의 삶’이 열려 어린이와 학부모에게 유익한 시간을 선사한다. 또 수성아트피아에서는 세계적인 마술가 이은결의 ‘더 일루션-마스터피스’ 공연 실황 영상 상영, 애니메이션 ‘마녀 배달부 키키’ 상영, 극단 솥귀의 창작 연극 ‘화몽’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다. 연휴 기간(7~9일) 야외광장에서는 윷놀이, 제기차기 등 전통 놀이 체험도 가능하다. 5일 수성못 수상무대에서는 제22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 ‘프린지 콘서트’가 열리고, 10일 울루루문화광장에서는 ‘또 다른 시작’을 주제로 한 야간 상설 공연이 펼쳐진다. 대구시는 추석 당일을 제외하고 대구시티투어를 정상 운영하고, 관광안내소 4개소(대구공항, 동대구역, 동성로, 이월드)는 연휴 기간 내내 정상 운영하여 지역 관광명소를 찾는 방문객들의 불편을 최소화할 예정이다. 또 연휴 기간(2~12일) 귀성객과 방문객들의 주차 편의를 위해 공영주차장을 전면 무료 개방한다. 무료로 개방되는 공영주차장은 대구공공시설관리공단 직영주차장(61개소, 8128면)과 민간 위탁주차장(34개소, 1401면)으로, 총 95개소, 9529면이다. 공영주차장 95개소 중 59개소는 2일부터 12일까지 11일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으며, 민간 위탁주차장 중 33개소는 3일부터 8일까지 6일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시청 동인청사 부설주차장의 경우 5일부터 7일까지 3일간 개방되며, 서대구역 남편주차장과 동대구 맞이주차장의 경우 6일 추석 당일만 개방된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25-10-01

석회암 지대에 형성된 국내 유일의 카르스트 습지

하천 주변도 아니고 산 정상에 람사르가 지정한 습지가 있다고?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란 표정으로 반문한 대붕 아우와 함께 직접 그 현장을 답사하기 위해 문경 돌리네 습지로 향했다. 돌리네 습지가 위치한 도리실 마을은 문경시 산북면 우곡리 읍실 마을에서 산 정상으로 1.2km 더 올라가야 했다. 우곡리 읍실 마을만 해도 그렇다. 대승사로 가는 도로를 벗어나 산자락을 부여잡고 굽이 돌고 돌면서 산을 올라야만 도착할 수 있었다. 옛날 같으면 전쟁이 일어나도 모를 깊은 산골에 숨은 마을이었다. 산속 마을답게 마을 어귀에는 수백 년 넘은 느티나무 노거수가 군집을 이루어 살아가고 있었다. 나무줄기 둘레만도 5m나 되는 느티나무 노거수에서 마을의 힘찬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노거수는 마을의 상징물이며 수호신으로 마을의 품격을 높여주었다. 도리실 마을은 이제 태고의 습지로 돌아가 전설로 남고 음실 마을이 돌리네 습지의 주인이 되었다. 돌리네 습지 2017년 람사르 습지 지정 희귀식물과 멸종위기종이 서식하며 지질학·생태학적으로 가치 인정받아 한때 과수원과 논밭으로 쓰이던 땅 이제는 생명의 숨결을 품은 보고로 습지와 사람, 두 세계 나란히 걸으며 자연과 인간 공존하는 삶의 길 일깨워 돌리네 습지는 석회암 지대에 형성된 국내 유일의 카르스트 습지로서, 2017년 람사르 습지로 지정되었다. 돌리네라는 독특한 지형 속에 희귀식물과 멸종위기종이 서식하며, 지질학적, 생태학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람사르 지정은 습지가 지닌 생물다양성과 수문학적 기능을 국제적으로 공유하고 후세에 전승해야 할 자산으로 보존할 의무를 부여한 것이다. 또한 지역 주민들에게는 지속 가능한 이용을 통해 생태관광과 교육 자원으로 발전시킬 기회를 열어 주어, 자연 보전과 지역 사회의 공존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담고 있었다. 문경 돌리네 습지는 한때 과수원과 논밭으로 쓰이던 땅이 이제는 생명의 숨결을 품은 보고가 되었다. 농약이 사라진 자리에 풀꽃이 돌아오고, 새와 곤충이 다시 날아들어 자연성이 회복되자 마을은 활기가 넘쳤다. 주민들은 습지를 중심으로 생태관광과 환경교육에 나서며 새로운 소득을 얻었고, 마을은 행정의 지원 속에 주거와 생활 인프라가 정비되어 삶의 질도 한층 빛을 더했다. 습지와 사람, 두 세계가 나란히 걸으며 서로를 살리는 윈윈의 길이 열린 것이다. 습지의 생태적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 지난 시절, 습지를 메워 주택, 산업단지, 공용지로 사용하여 가뭄과 홍수가 빈번하였고 생물다양성 감소 등 안타까운 일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석회암 지대가 품은 습지는 빗물을 저장해 맑은 물을 선물하고, 홍수와 가뭄을 완화하며 천연의 방패가 되어 주었다. 멸종위기 생물이 깃들고 희귀식물이 자라는 곳, 그 풍경은 자연의 장면을 넘어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생태계의 어머니와도 같다. 또한 고요히 잠든 습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씻어 내고, 역사와 시간이 새겨진 풍경은 마음의 쉼터가 되어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삶의 길을 일깨워 주었다. 습지 숲은 물과 숲이 만난 신비로운 세계이다. 물에 잠긴 뿌리와 습지에 기대어 자라는 나무들, 그 사이를 누비는 새와 양서류, 곤충들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다양성은 생태계의 든든한 기둥이 된다. 그 풍요로운 생명력은 인간에게 식량과 의약품, 맑은 공기와 물을 내어주며, 동시에 영감과 문화, 정신적 위안을 건네준다. 돌리네 습지는 그렇게 다양성과 조화 속에서 인간과 자연이 함께 살아가는 길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서사시이다. 돌리네 습지는 굴봉산 정상부에 아늑히 자리한 산지형 습지다. 이곳은 육상 초원 습지 생태계가 공존하는 드문 공간으로, 좁은 면적에도 꼬리진달래, 낙지다리, 쥐방울덩굴, 들통발 같은 희귀 식물이 피어나고, 삵과 수달, 담비가 숲을 누비며, 새매와 붉은배새매, 원앙, 수리부엉이, 소쩍새, 황조롱이 같은 멸종위기 조류가 살아왔다. 처음 조사에서는 산림청이 지정한 위기 식물 3종을 비롯해 731종의 야생생물이 확인되었으나, 주민들의 보호와 보전의 손길이 더해지면서 지금은 200여 종이 늘어난 932종의 생명이 해발 290미터 바닥 위에서 어우러진다. 돌리네 습지는 그렇게 작은 그릇에 큰 생명을 담아낸, 풍요로운 생태의 무대가 되었다. 돌리네 습지가 품은 마을의 옛 지명들은 세월을 넘어 살아 있는 이야기로 전설이 되어가고 있다. 동그랗게 돈 모양에서 비롯된 돌실(도리실) 마을, 제사를 지내던 제궁골, 참새가 지저귀던 참새골, 그리고 천 년 된 팽나무의 이름을 남긴 팽나모리까지 이름마다 마을 사람들의 삶과 신앙이 깃들어 있다. 옥황상제의 병을 낫게 했다는 전설의 옥녀샘, 나뭇가지가 동서로 갈라져 나무꾼들의 쉼터가 된 동서나무, 습지를 넘어가는 돌재 고개, 바다라 불린 서긋바다와 가파른 암벽 서긋이마, 성황나무가 있던 서낭굿재 또한 기억 속 풍경으로 남아 있다. 옹기를 굽던 정골, 참나무가 빽빽하던 참나무배기, 소의 입을 닮은 우구지골과 소의 뿔에 비유된 각골에 이르기까지 그 옛날 사람들의 눈과 마음이 빚어낸 이름들은 삶의 흔적이자 전설처럼 지금도 습지와 마을에 숨 쉬고 있다. 그 옛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김한웅 문화해설가의 목소리에는 세월을 꿰뚫는 향수가 배어 있었다. 과수원이던 땅, 아이들의 놀이터였던 습지, 겨울이면 얼음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추억 등 모두가 생생한 삶의 무대였다. 버드나무 껍질로 키와 소쿠리를 엮고, 메기와 붕어를 잡아 시장에 내다 팔던 시절, 습지는 마을의 생명줄이자 보물창고였다. 장마철 두 달 동안 잠긴 물 때문에, 농사는 대마와 담배밭으로 변하고 그로 인해 물동이를 등에 지고 또 머리에 이고는 힘든 비탈길 논밭을 오르내렸다. 그뿐만 아니다. 황토에 발이 빠져 오르내리던 고단한 삶은 이제 이 땅의 기억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70가구의 마을은 23가구만 남아 노년의 주민들이 조용히 지켜가지만, 주말이면 수백 명이 이곳을 찾아오고 서울에서 먼 길을 달려오는 발걸음도 있다. 식당 하나 없는 불편함조차 오히려 순박한 정취로 어우러지고, 무료로 열려 있는 습지는 여전히 마을과 사람을 품으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살아 있는 이야기의 무대가 되고 있다. 머루와 다래, 으름과 오미자가 얽히고설켜 만든 300미터의 초록 터널은 한 걸음마다 향긋한 내음을 흘려내며 우리를 맞았다. 그 길 끝에 모습을 드러낸 돌리네 습지는 산 정상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세계, 마치 하늘이 내려앉은 신천지 같았다. 연못 위에 걸린 구름은 물결에 흔들리며 빛을 쏟아냈고, 그 곁을 산책하는 우리는 잠시나마 신선이 된 듯 가벼웠다. 전망대에서 대붕 아우와 나란히 사진을 찍으며, 전설로만 남은 도리실 마을의 고단한 삶을 떠올렸다. 그것은 슬픔이 아니라 추억이 되어, 우리 마음속에 한 장의 그림처럼 새겨졌다. 전동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다시 지나던 덩굴 터널 속에서 차를 세우고 주워 먹은 다래 한 줌은 달콤하고 향긋했다. 아우가 “이 맛은 잊을 수 없겠다”라며 웃었을 때, 돌리네 습지는 이미 우리의 기억 속에 영원히 머무는 풍경이 되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람사르 습지 지정 협약의 주요 내용은… 정식 명칭 : 습지에 관한 특별히 중요한 국제협약 채택 : 1971년 2월 2일, 이란 람사르에서 채택 목적 : 세계적으로 중요한 습지를 보전하고, 지속 가능한 이용을 촉진 행정 기구 : 스위스 글란(Gland) 소재 IUCN 사무국 주요 내용 : 습지는 철새 이동 등으로 국제 협력이 필수, 공동 연구, 정보 교류, 공동 관리 돌리네 습지 지정일 : 2017년 6월 15일 (환경부 고시 제2017-117호) 위치 :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우곡리 굴봉산 정상부. 지정 면적 : 49만 4434㎡

2025-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