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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지속가능한 건강도시’… 맞춤형 서비스로 더 든든한 지킴이

인간의 단위가 가족에서 부족으로, 다시 국가로 확대되며 전염병에 대한 대책 마련 등이 강하게 요구되며 보건 행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보건 행정은 국민이 심신의 건강을 유지함과 동시에 적극적으로 건강증진을 도모하도록 돕는 보건정책으로 구체적으로는 영유아와 성인에서 노인까지의 보건 대책, 성인병이나 전염병을 포함한 각종 질병 대책과 정신위생 대책 등을 말한다. 이러한 보건 행정을 수행하기 위해 전국의 시·군·구 단위에 설치된 행정기관이 보건소다. 보건소의 사업 또는 조직이 본격화된 것은 20세기 초반으로 일본은 1937년, 대만도 1945년부터 위생보건소를 설치해 보건 활동을 전개했다. 우리나라는 광복 이후부터 보건 산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어 6·25 전쟁 등 빈약한 국가재정으로 보건소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지 못하다 1956년 12월 ‘보건소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법률 제406호로 공포됨에 따라 전국적인 보건소 활동이 가능해졌다. 지방보건소는 인문지리적인 조건과 지역주민의 요구 등에 따라 조직과 체제가 다르게 발전돼 주로 도시형 보건소와 농촌형 보건소로 조직과 구조가 구분돼 발전돼 왔다. 응급 골드타임 사수·공공 심야약국·결식 아동들 식생활 문제부터 전문가 심리상담 까지 전 세대 아우르는 의료복지 사각 해소 노력 2023~2025년 ‘우수지자체’… 지난해 ‘치매 사업’ 등 총 9개 기관상 내년에 보건지소 원격협진 본격 가동 더 촘촘한 지역 밀착형 진료 □ 경산시보건소의 시작과 역사 경산에는 지난 1961년 1월 경산군보건소가 설치되고 2월에 남천면 보건지소가 설치되어 보건 행정의 첫발을 내디디고 1962년 4월에 자인과 와촌보건지소를, 1964년 4월에 하양·압량·진량·경산·용성·남산보건지소를 설치했다. 이후 보건 행정의 서비스를 넓히기 위해 1983년 12월 용성 육동보건진료소를 설치하고 1989년 12월 진량 대원보건진료소를 설치하기까지 10개의 보전진료소를 설치해 의료서비스 사각지대를 해결하고 있다. 1989년 1월 경산시·군이 분리되며 1991년 경산시 보건소가 설치되었다 1995년 1월 시·군이 통합되며 경안로30길 18(삼북동)로 이전했다. 2002년 12월 현재의 보건소로 이전해 여러 차례 개편을 거친 조직은 2024년 보건행정과와 건강증진과, 방문진료과, 식품의약과로 개편돼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 경산시 보건 행정의 도전 경산시는 ‘지속 가능한 건강 도시’를 목표로 감영병 예방과 치매와 만성질환 관리, 맞춤형 건강증진 서비스 등으로 시민의 삶 속에서 든든한 건강 지킴이 역할을 하고 있다. 2026년에는 원격협진과 첨단 장비를 도입해 의료 사각지대를 없애고 어르신과 임산부를 위한 예방접종을 강화한다. 보건기관 환경정비로 쾌적한 진료 환경을 구축하고 의료인력 부족으로 불편을 겪었던 7개 보건지소에 원격협진 사업을 본격적으로 가동한다. 지난 4월 도입된 화상 시스템은 진료와 처방, 복약지도가 원스톱으로 이뤄지며 의료취약지역 주민들도 안정적인 서비스를 받고 있다. 또 10개 진료소에는 지역 밀착형 진료와 건강한 생활 습관 정착을 돕는 맞춤형 교육·프로그램이 확대되고 첨단 의료 장비 도입으로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진료 환경을 마련한다. 올해부터 임신 27주 이상 36주 이내 임산부와 배우자, 손자녀를 돌보는 조부모까지 백일해를 무료 접종해 출산 친화적 환경을 조성했다. 또 65세 이상에만 지원하던 인플루엔자 무료 접종을 지난해부터 60세 이상으로 확대하기도 했다. 소아과·산부인과의 필수 의료 체계를 강화하고 응급의료 시스템을 혁신해 골든타임을 지키고 먹거리 플랫폼과 안전한 급식 관리로 시민이 안심하고 생활해 모든 세대가 웃으며 행복을 나눌 수 있는 도시에 도전한다. □ 경산시 보건 행정의 두드러진 성과 경산시는 2023년 제8기 지역 보건의료계획(2023~2026년) 수립 성과대회에서 최우수기관으로 선정된 데 이어 2024년 2차, 2025년 3차 연차별 계획에서도 우수 지자체에 이름을 올리며 시민 건강을 위해 효율적으로 정책을 추진하는 능력을 대외적으로 인정받았다. 또 감염병 예방관리와 치매 예방 사업, 만성질환 예방, 맞춤형 건강증진 사업, 비대면 건강관리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경상북도가 주관한 제53회 보건의 날 기념 ‘2025년 보건 시책사업 우수기관 평가’에서 우수상을 받으며 다시 한번 역량을 입증했다. 지난해에는 감염병 관리와 대응 부문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해 중앙정부와 경북도평가에서 2023년에 이어 연속 기관상에 ‘치매 극복 관리사업’을 비롯한 주요 보건복지 정책들도 높은 평가를 받으며 총 9개의 기관상을 받았다. □ 초고령사회 선제 대응과 출산 정책 강화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지난해 말 기준으로 20.6%를 넘기며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경산시는 예방접종 등과 더불어 어르신 건강관리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치매안심센터를 중심으로 치매 검진과 맞춤형 사례관리, 예방과 인지 강화 프로그램, 환자 쉼터 제공, 공공후견 사업 등을 연계한 치매 통합관리 서비스 체계를 구축해 어르신의 건강과 존엄성을 보장하고 있다. 또 화면형 AI 스피커와 블루투스 건강측정기를 활용해 어르신의 일상 속 건강관리를 지원하는 맞춤형 돌봄서비스도 운영 중이다. 미혼 남녀의 자연스러운 만남으로 결혼으로 이끄는 ‘경산시 솔로탈출 single, 벙글!’ 프로그램에 출산가정을 위한 정책도 확대하며 출산을 장려하고 있다. 50만 원의 산후 조리비를 100만 원으로 상향하고 실생활에 필요한 출산 축하 박스도 지원한다. 다자녀 가정을 위한 농수산물과 35세 이상 고령 산모 진료비 지원, 생애 초기 건강관리사업 등 맞춤형 돌봄 정책으로 출산가정이 안심하고 건강한 육아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이처럼 경산시의 보건 행정은 응급환자 골드타임 사수, 공공심야약국, 어린이와 사회복지시설의 식생활 문제 해결, 전문가 심리상담 등 전 세대를 아우르고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의료복지 사각지대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조현일 경산시장은 “지난 성과를 밑거름으로 한 걸음 더나가는 경산시보건소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신규사업을 발굴해 추진할 계획이다”며 “어르신·임산부 예방접종 확대, AI·IoT 돌봄과 응급·필수 의료 강화로 건강한 경산을 만들며 나아가 안전한 먹거리 관리와 출산·육아 지원 정책을 확대해 아이 낳고 키우기 좋은 도시, 모든 세대가 어울려 건강한 일상을 만드는 행복 도시 경산을 완성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심한식기자 shs1127@kbmaeil.com

2025-09-23

1800년 전부터 한국인과 더불어 살았던 소

부지런함과 우직함은 소가 가진 주요한 특성이다. 예부터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에게 “에이, 소만도 못한 놈”이라 손가락질 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한국이 농경사회이던 시절. 소는 일꾼 열 몫의 농사일을 해냈다. 그러고도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 묵묵함과 순종적인 성격 때문에 적지 않은 농민들이 소를 그저 그런 짐승이 아닌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식구로 여기기도 했다. 그렇다면 소는 언제부터 인간과 함께 살아가게 됐을까?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엔 ‘신라 눌지왕 22년에 백성에게 소를 이용해 수레를 끄는 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눌지왕 22년은 서기 438년이다. 신라, 백제와 함께 삼국시대의 한 축이었던 고구려. 그 나라 벽화에서도 바퀴 달린 수레를 끄는 소 그림이 발견됐다. 그보다 이전 시대엔 다수의 군인이 전쟁터에 나가거나, 가뭄과 홍수 등 천재지변으로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소를 제물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이러한 고문헌의 기록으로 볼 때 소는 최소 1800여 년 전부터 한국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고락(苦樂)을 함께 해왔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인간의 오랜 친구’라 불러도 무방하다는 이야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한우를 “세계에서 유일한 우리나라 고유의 역용종으로, 수천 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독특한 품종”이라 설명하며, “성질은 온순하고 인내심이 강하면서도 영리하다”고 부연하고 있다. 소와 인간의 정서적 교감이 가능하다는 건 경북 봉화군 산골에 사는 늙은 부부와 그들이 키웠던 소 ‘누렁이’의 일상을 관찰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를 통해 이미 증명된 바 있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9-23

이 ‘착한 짐승’의 죄 없는 생애

경상북도 포항. 푸른 파도가 지척에서 출렁이는 죽도시장 들머리엔 소머리국밥과 소머리수육 딱 2가지 메뉴만 파는 두 음식점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자리해 있다. J식당과 P식당이다. 바람 쌀쌀하던 10년 전 겨울. 처음으로 J식당을 찾았을 때다. 정겹다고 해야 할까, 옛 정취 가득하다고 말해야 할까…. 어쨌건 고즈넉한 분위기에 매료됐다. 70~80대 노인들이 소주 한 병 가운데 놓고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오래 고아낸 소머리 국물을 천천히 드시고 있었다. 분위기만이 아니었다. 독특한 비주얼의 머릿고기는 보드라우면서도 쫀득한 식감으로 술꾼들의 아픈 속을 달래줬다. 수육에 곁들여 먹는 데친 부추는 향긋하고, 반찬으로 나오는 깍두기와 간장에 절인 양파도 깔끔한 맛. 가마솥에 오래 고아낸 ‘소머리 국물’ 보드랍고 쫀득한 식감 ‘소머리 수육’ 부추·깍두기·양파 곁들이면 맛 일품 2030 입맛까지 사로잡은 전통 음식 같은 메뉴를 파는 P식당도 분위기와 맛이 대동소이했다.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P식당은 국밥이 담긴 오지그릇에 날계란 하나를 깨 넣어주는 정도다. 그런데, 한참 동안 두 식당의 분위기가 달라진 적이 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두 곳 모두 이른바 ‘TV 맛집 프로그램’에 소개됐고, 방송을 탄 이후 거의 1년 이상 식당 앞 좁은 골목길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나이 지긋한 소머리국밥집 20~30년 단골들은 일종의 공황에 빠졌다. 조용하고 평화롭던 점심시간이 외지에서 찾아온 젊은이들로 시끌벅적한 도떼기시장이 됐으니. 분위기만이 아니라 “맛이 달라졌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더해지기도 했다. 방송의 힘이 어마무시하다는 걸 새삼 깨달으며 이 기간엔 기자도 J식당과 P식당을 찾지 않았다. 두 식당이 예전 분위기로 돌아온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음식점 주인은 계속 구름처럼 몰려드는 손님을 받고 싶었을 테니 섭섭했겠으나, 오랜 단골들에겐 다행스런 일이었을 터. 식당 앞 골목은 다시금 조용해졌다. 권력도, 방송의 힘도 어쩔 수 없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영원히 지속되는 건 세상에 없으니. J식당엔 앞서 말한 1년가량의 ‘혼란기’를 제외하곤 1~2주에 한 번쯤 갔으니 주인, 종업원과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 친하다. 비싼 우설(牛舌) 한두 점을 슬쩍 기자의 국그릇에 넣어주기도 할 정도다. 가끔 소머리를 삶는 가마솥이 보이는 테이블에 앉을 때면 하얀 김이 무럭무럭 솟는 커다란 검은 솥을 가만히 바라보곤 한다. 그러면, 유년 시절 외갓집이 떠오른다. 아니, 반세기 전 코흘리개일 때 외숙부가 키우던 그렁그렁한 눈망울이 착했던 누렁이가 떠오른다.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은 모친이 태어난 곳이다. 1970년대 후반이 돼서야 전기가 들어간 깡촌 중 깡촌. 낡고 덜컹거리는 완행열차를 타고 외가에 가면 가장 먼저 누렁이에게 볏짚을 먹이곤 했다. 열 살 안팎의 기자와 동생은 그 소를 말은 통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친구로 여겼다. 까마득한 옛날인 구석기시대에도 소는 존재했다. 여러 마리가 소가 그려진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가 그걸 증명한다. 그러나, 소와 인간은 친구가 되기 어려운 관계다. 알타미라 벽화가 그려진 1만800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 왜냐? 상호소통 없이 한쪽이 한쪽을 위해 일방적으로 무한희생만 하는 탓이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 살아서는 불평 한마디 없이 힘든 농사일을 거들고, 아이들의 친구가 돼줬다. 죽은 후에도 자신을 살과 뼈, 심지어 내장과 머리까지 인간에게 먹인 게 소였다. 허니, 소의 도저한 희생은 신(神)의 영역을 위협할 정도 아닌가? 외갓집 누렁이는 송아지에서 듬직한 수소로 커가던 과정에서 죽었다. 삼킨 복숭아씨가 목구멍을 막은 게 원인이었다. 죽은 소를 살리는 건 인간의 능력 밖이다. 그래서다. 외숙부와 이웃들이 누렁이를 나눠 먹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었던 날. 소죽을 끓이던 가마솥과 텅 빈 외양간을 망연히 쳐다보다가 소리 내 울었다. 그랬던 기자가 누렁이와 동족인 또 다른 소의 머릿고기를 무시로 쩝쩝거리며 먹고 있으니, 산다는 건 그 자체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9-23

전통 정자, 예술로 피어난다… 봉화 ‘누정愛아티스트’ 출범

전통 정자 문화의 중심지인 봉화군에서 예술과 자연, 문화유산이 만나는 특별한 예술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린다. 봉화정자문화생활관이 기획한 이번 프로젝트는 ‘누정愛아티스트’라는 이름으로, 전통 건축물인 정자(亭子)를 모티브로 현대 예술 창작과 지역 문화의 융합을 시도하는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이다. 봉화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누정(樓亭)이 남아 있는 지역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전통문화유산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예술 실험이 가능한 최적의 무대를 제공한다. 이번 프로젝트는 서양화가 김창한 작가를 첫 초청 작가로 맞이해 정자의 미학과 봉화의 풍경을 현대 회화로 재해석하는 시도를 담아낸다. 봉화정자문화생활관, 아티스트 레지던시… 전국 최다 누정 보유한 봉화서 시작 서양화가 김창한 참여 내년 봄까지 작품 25점 창작, 지역 문화·관광 활성화 기대 □ 봉화, 누정문화의 심장부 누정(樓亭)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자연 속에서 사색하고 풍류를 즐기던 정자 건축물로, 단순한 쉼터를 넘어 당대 지식인의 정신세계와 미의식을 반영하는 상징적 공간이었다. 봉화군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103개의 누정을 보유하고 있으며 청량산 자락과 백천계곡, 띠띠미마을 등 수려한 자연 속에 정자들이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청암정, 한수정, 몽화각 등 수백 년을 이어온 정자들은 봉화의 정신문화와 자연친화적 삶의 철학을 잘 보여줄 뿐 아니라, 선현들의 학문과 풍류가 교차하는 역사적 무대가 되었다. 이처럼 봉화에 누정이 유독 많이 남아 있는 이유는 단순한 사족(士族)의 거주 때문이 아니라 청량산과 문수산 등 조화로운 자연환경이 선비들의 풍류와 사색의 공간으로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정자들은 자연과 예술, 철학이 만나는 장소로 기능하며 선현들의 미학과 사유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오늘날에도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된다. □ 예술가를 위한 창작의 쉼터, ‘누정愛아티스트’ 레지던시 ‘누정愛아티스트’는 봉화정자문화생활관이 주관하는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예술가들이 일정 기간 머물며 창작 활동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다. 레지던시는 예술가에게는 일상에서 벗어나 온전히 작품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고, 지역에는 예술과 문화가 스며들어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문화적 플랫폼으로 자리한다. 특히 봉화의 누정이라는 독창적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점은 타 지역 프로그램과 차별화되는 특징이다. 최근 국내외 다양한 도시와 마을에서 레지던시가 예술과 지역이 상생하는 중요한 문화 생태계로 주목받고 있다. ‘누정愛아티스트’ 또한 단순히 창작 공간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술가와 지역 주민이 교류하며 서로의 삶과 문화를 나누는 과정을 중시한다. 정자라는 전통적 건축 공간과 현대 예술이 만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영감과 실험이 가능해지고, 이를 통해 창작은 더욱 풍성해진다. 이 프로그램은 예술가에게는 창작의 쉼터이자 예술을 꽃피우는 인큐베이터로, 지역에는 문화적 자산을 확장하는 동력이 된다. 봉화의 자연과 역사, 그리고 정자가 품은 정신적 유산이 예술가의 상상력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콘텐츠와 공동체적 가치가 창출되는 것이다. 따라서 ‘누정愛아티스트’는 예술과 지역 문화가 어우러져 미래지향적 문화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야외 화가 김창한, 봉화의 풍경을 화폭에 담는다 이번 프로그램의 첫 초청 작가는 야외작업과 생동감 넘치는 풍경화로 정평이 나 있는 중견 서양화가 김창한이다. 김 작가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동 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91년부터 현재까지 국내외에서 개인전 54회, 단체전 230여 회를 개최한 중견 화가다. 특히 그는 어린 시절 봉화 외가에서 자라며 봉화와 깊은 인연을 맺었고 부친 또한 봉화 상운면에서 사과 농사를 지어 지역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지니고 있다. 작품은 한국을 비롯해 미국, 독일, 일본, 호주, 캐나다, 미얀마 등지에서도 전시됐으며, 자연과 고향의 풍경을 서정적인 필치로 표현해왔다. 울산시립미술관, 현대예술관, 롯데호텔, SMS Korea 등 다양한 기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으며, 현재는 전업 작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작가와 봉화정자문화생활관은 누정갤러리에서 올해 6월에 첫 초대전을 개최한 것을 인연으로 이번 프로젝트를 함께하게 됐다. 김 작가는 2025년 여름부터 2026년 봄까지 봉화에 총 4회 이상 머물며 봉화의 주요 정자와 자연경관, 마을풍경을 소재로 대형 회화 작품을 포함한 25점 내외를 창작할 예정이다. □ 창작의 쉼터 솔향촌과 전시의 무대 누정갤러리 김창한 작가의 창작활동은 봉화정자문화생활관 내 체류형 숙소인 ‘솔향촌’에서 이루어진다. 솔향촌은 소나무 숲에서 풍겨오는 솔향기를 맡으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편안한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숙박시설로 정자와 숲, 마을이 조화를 이루는 조용한 자연 속 공간으로 예술가에게 창작의 몰입을 제공한다. 한편 작품전시는 내년 5월 말부터 약 3주간 봉화정자문화생활관 내 ‘누정갤러리’에서 진행된다. 누정갤러리는 2023년 6월에 문을 연 전시공간으로 봉화정자문화생활관의 누정오경과 조용한 자연환경이 제공하는 전통미와 현대적 전시 환경이 어우러진 복합문화공간이다. □ 주민과 함께 만드는 문화와 관광, 예술이 만나는 프로젝트 ‘누정愛아티스트’는 예술가 혼자만의 작업에 머무르지 않는다. 프로그램 기간 동안 김창한 작가는 지역주민과 관람객을 대상으로 오픈스튜디오, 드로잉클래스, 작가와의 대화 등을 운영하며 예술적 체험을 통해 지역민의 참여를 유도할 계획이다. 창작과정은 SNS와 유튜브(야외화가 김창한)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소개되어 봉화의 문화유산과 자연을 전국에 널리 알리는 콘텐츠로 활용될 예정이다. 이번 프로그램은 단순한 전시를 넘어 적극적인 홍보를 통해 문화·관광·예술이 유기적으로 연계된 지역 브랜딩 모델로서의 가능성도 주목받고 있다. 봉화군 관계자는 “정자라는 전통 공간에서 탄생한 예술작품은 봉화의 아름다움과 정체성을 새롭게 전달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될 것”이라며 “향후 봉화를 사랑하는 다양한 예술가들과 함께 사진, 음악, 영상 등 다양한 장르로의 확장도 고려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박종화기자 pjh4500@kbmaeil.com

2025-09-22

타고난 열쇠공, 열쇠점의 대를 잇다

포항시 북구 죽도동 칠성천길 64번지에는 76년 된 죽도열쇠 2호점이 있다. 김건식(61) 대표는 2008년 어머니와 함께 꾸리던 사업장에서 독립해 지금의 점포를 열었다. 3층 건물 규모에 각종 열쇠와 자물쇠 보유량, 처리하는 업무량을 감안하면 사실상 본점이나 다름없다. 점포에 들어서면 벽면을 가득 메운 수천 개의 열쇠가 먼저 눈길을 끌었다. 출장 중인 김건식 대표 대신 손님을 맞은 이는 그와 사제 관계로 인연을 맺은 직원이었다. 벽을 빼곡히 채운 열쇠 위치를 다 기억하느냐고 묻자 “신기하게도 사장님은 다 기억하세요”라고 대답했다. 대충 세어도 2000개가 넘는 열쇠였다. 폐에 총알 박힌 채 평생 전쟁 후유증 겪던 부친 김흥준 대표는 소문난 열쇠 장인 직접 연장 만들어 쓸 만큼 손재주 좋고 지역 은행의 금고 작업 대부분을 도맡아 기계없던 시절 줄질로 하나하나 복사해 손으로 만들던 열쇠는 장난감이자 일상 리어카 타고 아버지 따라다니던 소년의 76년 역사 2호점 벽면엔 수천 개의 열쇠 1990년~ 2000년대 초반 열쇠업 전성기 동료들과 한국열쇠협회 창립에 참여 지난해 ‘국민 재산 보호’ 전국지부 결성 1997년 포항 열쇠인들 ‘긴급 봉사대’ 발족 김건식 대표를 다시 만난 건 7년 만이었다. 2018년, 경상북도 노포기업으로 선정되었을 때, 방송 인터뷰를 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여전히 자신감의 열쇠라도 쥔 듯 당당하고 거침없었다. 변함없는 또 하나는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벨이었다. 당시에도 녹화 도중 손님 전화를 받아 제작진을 당황하게 했는데, 이번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하루 평균 50∼60통의 전화가 걸려오고, 그 절반은 출장으로 이어진다. 김 대표는 “가끔 전화기를 던져버리고 싶지만 고객의 문의는 성심껏 답해야죠”라고 말했다. 포항 문덕동에 사는 한 고객의 전화였는데, 아파트 현관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요청이었다. 김 대표는 현관문의 사용 연한과 잠금장치 종류를 꼼꼼히 확인한 뒤 방문 일정을 잡았다. 걸려오는 전화 내용은 다양하다. 자동차 키가 말썽을 부린다거나 비디오폰, 도어록 고장을 호소하는 경우도 많다. 잠긴 문을 열어달라거나 열쇠 복사 문의도 꾸준하다. “포항 열쇠는 아버지가 키워” 고객의 의뢰 내용은 계절에 따라 다르다. 여름과 겨울에는 자동문 고장이 잦고, 이사철에는 도어록 교체나 열쇠 복사, 스마트키 설치 문의가 늘어난다. 자동차 키 문제만큼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꾸준히 접수된다. 김 대표는 아버지를 도우며 자연스럽게 열쇠 일을 배웠다. 꼬마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출근했던 그는, 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하교 후에 곧장 난전으로 향해 하루를 보냈다. 아버지는 좌판에 열쇠를 늘어놓고 수리도 겸했다. “아버지가 리어카를 끌면 제가 뒤에서 밀었어요. 대부분은 리어카에 타고 왔지만.” 김 대표는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웃으며 회상했다. 기계가 없던 시절이라 모든 작업은 수작업이었다. 줄과 줄톱으로 하나하나 열쇠를 다듬어 복사했다. 본격적으로 복사 기계가 들어오기 시작한 건 1980년대 후반으로 기억했다. 줄질로 열쇠를 만들던 시절부터, 열쇠는 그의 장난감이자 일상이었다. 고인이 된 부친 김흥준 대표는 소문난 열쇠 장인이었다. 직접 연장을 만들어 쓸 만큼 손재주가 뛰어났고, 지역 은행의 금고 작업은 대부분 도맡았다. “포항 열쇠는 우리 아버지가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 대표는 자부심을 드러냈다. 어릴 적부터 이웃들은 그에게 “네 아버지처럼 살아라”고 말했다. 부친의 솜씨는 경북 동해안 전역에 알려져 울진까지 출장 요청이 이어졌다. 김 대표도 아버지를 따라다니곤 했다. 한 번은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구룡포를 향했는데, 막 지은 여관에 도착했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던 버스와 땀 흘리며 일하던 아버지의 뒷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추억이다. 교통 여건이 열악했던 당시에는 출장을 다녀오는 데 꼬박 하루가 걸리기도 했다. 김 대표는 1985년에 첫 자동차를 마련해 기동력을 높였다. 거금 500만 원을 들인 프라이드였다. 1990년대 초반부터 10년간 열쇠업의 전성기 부친은 전쟁 후유증으로 평생 고통을 겪었다. 총알이 폐에 박힌 채 살아야 했고, 요양을 위해 제주도로 옮겨갔다. 제주에서도 열쇠공 제자를 둘 만큼 열쇠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부친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가업은 김건식 대표가 이어받았다.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열쇠업의 전성기였다. 이 시기 김 대표는 동료들과 한국열쇠협회 창립에 참여했다. 1990년,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회관에서 열린 창립총회는 언론에 ‘이색 모임’으로 보도되었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중소기업회관 2층에서 ‘열쇠인’들의 이색적인 모임이 열렸다. 열쇠 수리 판매 제작 등의 종사자 500여 명은 이날 한자리에 모여 ‘한국열쇠협회’의 실질적인 창립총회인 서울지부 결성식을 가졌다. “지난해 잇따라 은행 금고가 털리고 거액의 현금을 실은 수송차량이 습격당하는 것을 보면서 열쇠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무언가 보람 있는 일을 해보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지난해 7월 동료 열쇠인 10여 명은 함께 모여 협회 설립의 뜻을 모으고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전국지부 조직 결성에 착수했다. 협회 측은 전국에 단독 점포를 개설한 열쇠업자는 1만여 명이며 노점-행상과 철물점 구두수선 등의 겸업을 하는 경우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4만∼5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 「국민 재산-생명보호 거창한 주장 이색 ‘한국열쇠협’ 창립」, 『조선일보』 1990년 4월 27일자. 김 대표는 “80년대 후반부터 동료 열쇠인들이 모여 협회 창립을 의논했다”고 밝혔다. 또한 한국열쇠협회 경북도지부 이사직을 역임하며 지역 열쇠업 발전과 전문열쇠기술인 양성을 위한 교육과 정보 교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때는 국산 자물쇠 열 개가 미제 하나를 못 당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국내 기술이 형편없었어요. 지금은 많이 발전했지만요.” 김 대표는 국내 기술 발전 과정을 몸소 체험한 세대다. 포항 지역 열쇠인들은 1997년 ‘긴급 출동 봉사대’를 발족하기도 했다. 당시 열쇠를 이용한 범죄와 화재를 비롯한 각종 재난과 응급 상황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사고 예방과 대처에 앞장서기 위한 취지였다. 양로원이나 보호시설을 대상으로 한 봉사활동, 119와 협력한 긴급 출동이 대표적이었다.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봉사활동을 위해 회원사에서 각종 문고리와 열쇠, 자물쇠를 기부받기도 했지만, 아쉽게도 본격적인 활동으로 이어가진 못했다. 세대를 이어온 성실함과 책임감 2000년대 들어 열쇠업은 또 다른 변화를 맞았다. 튼튼한 수동열쇠는 여전히 인기지만 새롭게 전자열쇠가 등장하면서 다양해졌다. 특히 자동차 열쇠가 판도를 변화시켰다. 2004년 이후 자동차에 도입된 ‘이모빌라이저(immobilizer․ 열쇠마다 고유 암호를 부여하고 자동차에서 나오는 신호와 일치해야 시동이 걸리는 방식)’가 한 예다. 도난 방지에는 효과를 발휘했지만, 간혹 차가 잠겨버려 차 주인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외부에서 그런 일이 생기면 고액의 비용을 치르고 견인 차량을 불러야 했다. 혼쭐이 난 차 주인들이 열쇠 복사를 부탁했지만, 예전과 같은 방식은 통하지 않았다. 그전에는 눈대중해서 감각에 의존해 수가공으로 열쇠를 복사했다면, 이제는 고도로 복잡한 셈법이 필요했다. 전자칩이 내장된 자동차 키는 고도의 장비와 프로그램이 필요한 것이다. “아무리 실력자라도 새로운 게 계속 나오니까 늘 긴장하고 연구해야 해요.” 김 대표는 틈만 나면 자물쇠를 들여다보고 연구에 몰두한다. 김 대표의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죽도열쇠에 전화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문을 열어주는 기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열리지 않는 자물쇠도 풀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쌓인 결과다. 세대를 이어온 장인의 성실함과 책임감이 ‘열쇠’를 넘어 ‘신뢰’를 열어낸 것이다. 글 : 배은정 소설가 사 진 : 김 훈 작가

2025-09-21

TRM설비 분야 관리 업무 담당 수요자 맞춤형 트러블 최소화

미세 불량 조기 발견, 대규모 생산 차질 차단 ‘제철소장포상’ 수상 동료들과 함께 성장하며 미래 철강 선도할 포스코인 되도록 최선 - 자기소개를 해달라. 포스코에서 13년째 근무 중인 STS 압연부 2냉연공장 레이저 용접파트 박진영 대리다. 현재 나는 용접 품질 관리와 생산성 향상을 위한 전반적인 설비관리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내가 담당하는 설비로는 TRM Laser Welder 설비가 있다. TRM 설비는 두꺼운 철판을 얇게 압연하는 기계로, 밀가루 반죽을 밀어 펴듯 이해하면 쉽다. Laser Welder는 얇게 만든 서로 다른 철판을 이어붙이는 장비로, 성질 차이로 인한 불량을 방지하기 위해 연결 부위를 꼼꼼히 관리하고 있다. 결국 수요자가 원하는 규격에 맞춰 철판을 생산할 수 있도록 설비를 최적의 상태로 유지하면서, 생산성 향상과 설비 트러블 최소화에 집중하고 있다. 현장에서 설비 안정화와 불량원인분석을 하며 경험을 쌓아왔는데, 작은 불량 하나가 전체 공정과 안전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체감하며, 무엇보다 안전이 최우선임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입사 초반에는 배우는 자세로 선배들에게 많이 의지했지만, 이제는 후배들에게 경험을 전해주며 함께 성장하는 중간다리 역할을 하는 중이다. 함께 고민하고 해결할 때 큰 보람을 느끼고, 이를 통해 신뢰받는 동료, 인정받는 구성원이 되고자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도 포스코의 핵심 가치와 비전을 바탕으로 현장에서 더 큰 책임감을 가지고 업무에 임하며, 안전과 품질을 최우선으로 하는 전문가로 성장해 나가겠다. -포스코에 입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나는 스스로를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도전해 온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싶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8년간 요리사로 활동하며 실전에서 부딪히고 배우는 과정을 통해 성실함과 책임감을 키웠다. 이후 9년 차에 대학에 진학해 기계 분야를 전공했고, 그 기간 동안 11개의 자격증을 취득하며 역량을 넓혀갔다. 또한 이라크 파병을 통해 국위선양이라는 뜻깊은 경험을 하며 도전정신과 국제적 시야를 쌓을 수 있었다. 이처럼 다방면으로 쌓은 경험들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나만의 폭넓은 역량을 갖추는 계기가 되었다. 호기심이 많고, 무언가를 직접 다루고 조작하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며, 특히 기계를 이해하고 다루는 일에 재미를 느꼈다. 그 순간들이 내 삶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결국에는 포스코의 설비 담당자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글로벌 철강 기업에서 산업의 근간을 지켜 나간다는 자부심, 그리고 늘 도전정신과 기술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넘쳐난다는 점에서 더욱 입사를 희망하게 됐다. 포스코 입사는 단순한 직장 선택이 아니라, 내 인생 여정의 종착점이자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나와 맞는 일터를 만난 만큼 앞으로도 나의 현장에서 신뢰받고 인정받는 구성원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자 한다. -올해 7월 제철소장포상을 받았다고 들었다. 어떤 성과가 있었는지? 입사 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앞서 말한 TRM Laser Welder 부속품인 Roll의 마모상태를 조기에 발견하여 큰 품질 불량을 예방했던 경험이다. 당시 현장 점검 중 Roll 표면에서 평소와 다른 미세한 마모흔적을 발견했다. 작은 이상으로 보일 수 있었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비추어봤을 때, 이를 방치한다면 용접 불량으로 이어져 판 파단과 같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나는 즉시 계통보고를 진행했고, 반원 주임과 함께 설비를 면밀히 점검한 끝에 즉각적인 교체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후 라인을 일시적으로 정지하고 문제 Roll을 신속히 교체함으로써 대규모 생산 차질과 품질 문제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었다. 단순한 이상 징후 발견을 넘어, 설비 이상을 조기에 파악하는 것의 중요성과 현장 내 협업과 빠른 의사결정의 중요성을 알렸던 일이었기에, 관련해 제철소장포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일 이후로 Roll 교체 주기를 기존 2개월에서 1개월로 단축하는 개선 조치가 실행되기도 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생산 안정성과 품질확보에 크게 기여했으며, 나 또한 설비 관리자로써 책임감을 더욱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도 더욱 세심하게 현장을 살피고, 문제 예측과 대응력을 기르고자 한다. -입사 이후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었다면? 최근 팀원들과 다함께 부산으로 1박2일 일정의 조직활성화 활동을 다녀왔다. 첫날에는 부산 태종대와 해상 케이블카에 방문해 일상에서 벗어나 간만에 즐거운 나들이를 했다.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함께 걷고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평소 일터에서는 몰랐던 서로의 관심사와 생각을 알아가기도 했고, 선배와 후배 모두 한층 더 친밀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날 저녁에는 사직야구장을 찾아 다 함께 응원전을 펼쳤다. 응원가를 함께 부르며 목소리를 모으는 순간은 현장의 협업과도 닮아있었다. 다같이 신나는 시간을 함께하며 뜻밖의 단합력을 한번 더 느끼게 되었다. 덕분에 이후에도 팀 내 존중과 배려의 분위기가 더욱 돈독해지고, 업무에서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바탕으로 더 큰 성과가 만들어지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포부 한 마디. 앞으로도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며 쌓은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설비 안정화와 품질 개선, 그리고 안전한 작업환경 조성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천할 예정이다. 동료들과 함께 성장하며, 포스코가 미래 철강산업을 선도하는 데 꼭 필요한 구성원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다. AI·스마트팩토리 등의 혁신을 통해 미래 철강산업을 선도하는 포스코의 변화와 발맞춰 나 역시 현장에서 데이터 기반의 문제 해결력과 기술 역량을 꾸준히 길러 회사의 지속가능한 성장과 경쟁력 강화에 함께 기여하는 능력 있는 구성원이 되겠다. /김진홍경제에디터 kjh25@kbmaeil.com

2025-09-21

소둔정정파트 전체 설비 책임 안전 최우선···적극 소통 강점

소수정예 인원 4개조로 나뉘어 24시간 불철주야 생산 관리 힘써 서로 의견 존중하며 품질 향상 한마음으로 노력 행복한 팀 문화 - 자기소개를 해달라. STS압연부 2냉연공장 소둔정정파트에서 근무하고 있는 13년차 김재형이다. 나는 포항에서 태어나 자랐고 포스코와 함께 38년 세월을 동고동락해왔다. 특히 포스코 입사를 결심한 이유로 아버지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는데, 아버지가 오랜 시간 STS2제강에서 근무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포스코가 단순한 직장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과 가족의 삶에 얼마나 큰 의미를 지녔는지 어린 시절 자연스럽게 느꼈던 것 같다. 포스코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는 결국 나의 꿈으로 이어졌고, 나 역시 아버지처럼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의 아버지의 모습을 되새기며, 포스코 발전과 함께 성장해 온 포항에서 나 역시 산업의 일꾼으로서 동반 성장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도 맡은 자리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회사와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구성원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 - 현재 소속된 팀을 소개해달라. 내가 속한 포항제철소 STS압연부 2냉연공장 소둔정정파트는 첨단 설비와 안전을 바탕으로 동료들과 함께 행복한 팀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나는 이곳에서 전체 설비를 책임지고 있으며,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일하고 있다. 특히 내가 관리하는 APF Line 공정은 제품 표면을 정밀하게 처리하고, 고객 요구에 맞춘 다양한 규격의 코일을 생산한다. 해당 공정은 소수정예 인원이 4개조로 나뉘어 24시간 불철주야 생산 관리를 하고 있다. 연속 공정의 특성상 팀원 간 긴밀한 소통과 협력이 필수이며, 모두가 품질 향상과 안전을 위해 한마음으로 노력한다. 각자의 역할에 책임을 다하면서도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문화가 우리 팀의 가장 큰 강점이다. 특히 작년 가을에는 팀워크 강화를 위해 팀원들과 함께 단풍놀이를 겸한 문경 여행을 다녀왔다. 바쁜 업무 속에서도 잠시나마 자연 속에서 힐링을 만끽한 소중한 시간이었고, 올여름에는 다같이 워터파크에도 다녀왔다. 팀원들과 물놀이를 즐기며 아이처럼 웃음꽃을 피웠던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처럼 우리 팀은 세대가 바뀌고 구성원이 달라져도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이런 긍정적인 에너지는 계속 되었으면 한다. - 포항제철소에서 일하면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순간은? 아직 업무 지식이 많이 부족하다고 느끼지만, 회사에 출근할 때마다 항상 ‘작은 일일지라도 도움이 된다면 하자’라는 마음가짐으로 업무에 임하고 있다. 신입사원 시절부터 현장을 돌아다니며 설비를 관찰하고 작동 원리를 하나하나 공부하는 데 힘써왔다. 또한 지저분한 구역이 보이면 솔선수범해 청소를 꾸준히 하면서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이 때문인지 어느새 공장 내에서는 “이 친구 정말 열심히 한다”라는 소문이 퍼졌고, 동료들 사이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됐다. 처음에는 칭찬을 받는 것이 어색하고 부끄럽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자신감이 생겼다. 특히 작년에 직책을 맡게 되었을 때는 그동안의 노력이 인정받은 것 같아 뿌듯했고, 동료와 가족의 축하를 받으며 큰 보람을 느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사소한 일에도 성실하게 임하는 태도가 큰 성과와 자긍심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체감했다. 앞으로도 꾸준히 배우고 성장하여 회사와 동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직원이 되고 싶다. - 회사의 자랑거리가 있다면? 포스코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자기계발 지원이 매우 잘 되어 있다는 점이다. ‘러닝 플랫폼’이라는 앱으로 직원들은 언제 어디서나 다양한 학습 콘텐츠를 손쉽게 이용할 수 있다. 이 플랫폼에는 직무역량 강화는 물론 어학, 생활·건강 등 폭넓은 분야의 강의와 자료가 준비되어 있어, 직원들이 언제나 자유롭게 학습할 수 있는 환경이 구축되어 있다. 나도 러닝플랫폼을 통해 산업안전기사 자격증을 수월하게 취득할 수 있었다. 또 포스코 인재창조원 실무교육을 통해 유·공압 관련 도면이나 전기 도면을 읽을 수 있는 유용한 지식을 얻게 되어 전문성을 강화하기도 했다. 좋은 학습 환경이 일터에 마련되다 보니 끊임없이 성장의 동기부여를 받게 된다. 현재는 압연기능장 자격증 취득을 목표로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최근에는 출산과 육아 관련 제도도 크게 개선되어, 남성 직원들도 출산휴가의 혜택을 받게 됐다. 특히 출산휴가는 개인이 필요한 시기에 나누어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게다가 회사에서는 출산장려금도 대폭 확대 지원하고 있어, 출산휴가를 사용하더라도 가정의 경제적 부담을 덜 수 있다. 이러한 제도 덕분에 가족과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을 걱정 없이 보낼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다. 또한 만 8세 이하 자녀를 둔 직원은 최대 1년까지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자녀 양육에 집중할 수 있도록 회사와 동료들이 적극적으로 배려해주고 있어, 일과 가정의 균형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앞으로도 이러한 지원을 적극 활용해 더 많은 직원들이 자신의 꿈과 목표를 이루고, 행복한 가정과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함께 누릴 수 있었으면 한다. - 국내 철강업계의 미래를 책임질 세대로서, 앞으로 어떤 변화나 발전을 기대하고 있는지? 앞으로 국내 철강업계가 성장하려면 디지털 혁신과 스마트팩토리 구축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최근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같은 첨단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철강산업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특히, 자동화 시스템이 적용된 생산 라인에서는 작업자의 실수를 줄이고, 실시간 데이터 분석을 통해 설비 이상이나 품질 문제를 미리 파악할 수 있어 안전하고 효율적인 작업장으로 변화할 것으로 기대한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생산성 향상에 그치지 않고,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로 이어져 자동차, 조선, 에너지 등 다양한 산업에서 요구하는 맞춤형 철강 생산이 가능해질 것이다. 결국 디지털 혁신과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이 함께 이루어질 때, 우리 철강업계는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진홍경제에디터 kjh25@kbmaeil.com

2025-09-21

70여 년을 하루처럼 그 자리를 지키는 94세 할머니 열쇠공

시간의 문을 여는 비밀 공간이 있다면 아마도 이곳이 아닐까.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세 평 남짓한 작은 가게. 먼지가 진득하게 쌓인 구형 열쇠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곳. 포항 원도심 중앙로의 역사를 몸소 겪어낸 열쇠공이 여전히 고객을 맞이하는 곳. 포항시 북구 죽도동 135-105번지 ‘죽도열쇠’다. 죽도시장 건너편 골목 안 컨테이너 건물이 바로 그곳이다. 세월 고스란히 간직한 세 평 남짓한 가게 고윤기 씨가 문 열고 따뜻하게 손님 맞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서울내기 고 씨 이북 출신 남편 김흥준 씨와 사랑에 빠져 서울서 강릉·울산 등 거쳐 포항에 터 잡아 “손재주 뛰어난 남편, 손수레 하나 마련해 시장통 누비던게 ‘죽도열쇠’의 시작이지” “노점 생활 30년 만에 판잣집을 짓고 장사 우리 다섯 식구 삶의 터전으로 자리 잡아 세 아들 이곳에서 일 배우고 밥벌이 했어” 올해 94세를 맞은 고윤기 씨가 문을 열고 손님을 맞았다. 인터뷰를 시도했다가 거절당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어 조심스러웠지만 의외로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근처에서 열쇠집을 운영하는 차남 김건식 대표와 함께 먼저 인사를 드린 적이 있었는데, 그 일도 기억하고 있었다. 가게의 3분의 1 정도를 방처럼 만들어 놓은 이곳에서, 고 씨는 손님이 오면 자물쇠를 판매하고 열쇠 복사를 해준다. 바닥을 창문 높이까지 돋운 방에는 텔레비전과 밥솥, 이부자리까지 살림살이가 살뜰히 마련되어 있었다. 지내시기에 비좁지 않은지 물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단다. 손수레로 장사하던 시절에 비하면 대궐이라고 했다. 오는 길에 사 온 간식거리를 내놓았다. 죽도시장 난전에서 파는 옥수수빵을 군것질 삼아 대화는 자연스럽게 과거로 흘렀다. ‘죽도열쇠’의 역사는 194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 씨의 남편인 고(故) 김흥준 씨(1999년 작고)는 이북 출신으로 인민군 장교였다가 한국전쟁이 터지기 1년여 전에 국군에 귀순했다. 혈혈단신 내려온 남한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고윤기 씨와는 서울에서 만났다. 부유한 집안 출신의 서울내기 고 씨는 사랑에 빠져 남편을 따라나섰다. 고생길이 훤한 고 씨의 선택을 부모도 말리지 못했다. 서울에서 강릉, 울산, 부산 등지를 거쳐 터전을 잡은 곳이 포항이었다. 비록 가진 것은 없으나 젊고 명석한 머리와 고치고 만드는 손재주가 뛰어난 남편은 낡은 손수레 하나를 마련했다. 연장을 싣고 시장통을 누비던 손수레가 바로 죽도열쇠의 시작이었다. 열쇠 수리에 필요한 재료와 장비뿐 아니라 지퍼나 라이터, 석유풍로 같은 잡화를 취급하는 난전이었다. “장사가 잘되었어. 우리 아저씨가 손재주가 좋았거든.” 그러다 지인의 소개로 세 평 정도의 땅을 얻어 가게를 냈다. 금은방을 운영하던 사장이 옆자리가 하나 비었으니 얼른 오라고 알려준 데가 여기였다. 목수를 불러 판잣집을 짓고 장사를 시작한 것이 1982년, 노점 생활을 한 지 30여 년 만이었다. □ 열쇠점은 다섯 식구의 삶의 터전 고 씨에 따르면 죽도 다리 위에서 난전을 시작했고, 가게도 멀지 않은 곳에 냈다. 가게 앞으로 개천이 흘렀다. 바로 눈앞이 물이었지만, 지대가 높아서 넘친 적은 없었다. 고 씨는 개천이 흙으로 덮이고, 아스팔트 도로가 깔리는 도시의 변화를 고스란히 지켜봤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군 장교로 참전한 김흥준 씨는 폭탄 파편이 폐에 박히는 부상을 입고 제대했다. 제대 후에는 예비군 훈련대장을 맡았다. 고 씨는 훈련병들의 식사까지 손수 준비해 손수레에 싣고 연병장까지 날랐다. 남편뿐 아니라 훈련병들의 식사까지 챙기는 것은 소대장 아내의 책무라고 여겼다. 훈련이 없는 날에는 생계를 위해 시장에 나가 난전을 펼쳤다. 때마침 영일만에 제철소가 들어선 뒤 주택과 자동차가 늘면서 열쇠 수리 일감도 많아졌다. 고윤기 씨가 포항에 터를 잡았을 때가 스물한 살이었다. 남편과는 서너 살 차이였다. 고 씨의 친정은 서울 종로에 택시회사와 주유소를 소유했을 만큼 부자였다. 1931년생인 그녀는 일제강점기와 광복이라는 혼란한 시대를 보내면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남편과 만나서 포항까지 오게 된 사연을 이야기해달라고 하니 힘든 시절은 떠올리기 싫다며 진저리를 냈다. “여기서 같이 놀던 친구들은 다 갔어. 놀러 오는 사람도 없고 찾는 이도 없고 그래.” 다들 변했지만 홀로 변하지 않은 섬과도 같은 가게를 지켜온 이유는 다섯 식구의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세 아들은 수업이 끝나면 집이 아닌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 씨는 밥을 지어서 출근했다. 성장한 아들들이 아버지의 출장길을 따라나서면, 고 씨는 가게에 남아 손님을 맞았다. 세 아들 모두 손재주가 있었지만, 둘째 김건식 대표가 특히 두각을 나타냈다. 습득이 빠르고 머리가 비상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김 대표는 10년 전에 가게를 키워 독립했다. “잘되어서 나가니 무척이나 기쁘지.” □ 두 아들도 열쇠업에 종사 인터뷰하는 내내 손님은 없었다. 요즘은 손님이 있는지 물으니, 오전에 벌써 열쇠 세 개를 복사했다고 했다. 고 씨는 열쇠 하나당 5000원이니 제법 벌었다며 자랑했다. 앉아서 쉴 틈도 없이 바쁘던 시절에 비하면 초라한 액수다. 한창때에는 손님이 내미는 열쇠를 어느 회사 제품이라는 것까지 알아맞힐 정도로 실력이 출중했다. 그런 기술자도 세월은 어쩔 수 없었다. 육칠십 대까지 노안이라곤 없던 눈이 침침해져서 세 대의 복사기 중 두 개는 놀리는 실정이다. 그렇지만 시력만 빼면 예전의 실력 그대로다. “집에서 놀면 뭐 해? 가게에 나와서 그냥 놀다가 집에 가서 자고, 아침이 되면 밥을 해서 또 나오는 거야. 딴 거 없어. 손님 있으면 일하고, 없으면 노는 거지.” 손님이 한 명도 없는 날도 있다. 허탈한 마음이야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다음 날이 되면 툴툴 털고 출근한다. 젊은 시절부터 대낮에 빨래를 해본 적이 없다. 낮에는 가게 일로, 밤에는 집안일로 늘 바쁘게 살아온 삶이 몸에 밴 탓이다. 여생을 편안히 보내도 될 텐데 왜 아직도 비좁은 가게를 떠나지 못하는 걸까. “나는 여기서 늙었어. 우리 아이들도 다 여길 거쳤지. 우리 영감님이 하던 거라, 되든 안 되든 내가 지키는 거야.” 세 아들 모두 이곳에서 자라며 일을 배우고 밥벌이를 했다. 세월이 흘러 맏아들은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두 아들은 여전히 열쇠업에 종사한다. 고 씨에게 이 작은 가게는 가족을 지탱해준 고마운 공간이다. 이제는 이곳 말고는 가고 싶은 곳도, 마땅히 갈 곳도 없다고 말한다. □ 94세 할머니 열쇠공 가끔 “안 열리는 자물쇠가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호통부터 친다. 안 열리는 열쇠는 없다는 것이다. 모든 자물쇠는 열리게끔 만들어졌고, 열고자 하면 안 열릴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도 혹시 안 열리면 “우리 건식이에게 가면 다 열린다”고 덧붙였다. 아들에 향한 믿음과 애정이 묻어났다. 지금도 자택이 있는 용흥동에서 가게까지 20분 남짓을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고 씨다. 자전거를 20년 가까이 타다 보니 다리에 근력이 생겼다며 바짓단을 걷어 보였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고 씨의 일상은 변함없다. 아침마다 도시락을 챙겨 가게로 출근한다. 젊은 시절 다섯 식구의 끼니를 챙겨 가게로 향했던 것처럼 길을 나선다. 세 평 남짓한 가게의 자물쇠를 열고 오래된 과거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가 앉는다. 여전히 제 할 일을 기다리는 오래된 열쇠들 사이에 우두커니 앉아 손님을 기다린다. 죽도동에 가면 70여 년을 하루처럼 그 자리를 지키는 94세의 할머니 열쇠공을 만날 수 있다. 글 : 배은정 소설가 사 진 : 김 훈 작가

2025-09-17

‘별의 고장’ 영천, 신기한 연리목 노거수 발견

경북 영천시는 별의 고장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1.8m 반사 망원경과 태양 플레어 망원경 등 다수의 천체 관측 시설을 보유하고 있는 보현산천문대가 있다. 국내에서 발견한 소행성 13개 중 12개가 이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1.8m 반사 망원경의 이름은 도약이며, 1만 원권 지폐의 뒷면 도안에도 존재한다. 광활한 우주의 별들을 관측한다는 것은 마음 설레는 일이다. 대구와 포항 간 고속도로 영천 나들목을 빠져나와 청송과 보현산천문대로 가는 구불구불한 길을 가다 보면 오리장 숲(五里長林)을 만나게 된다. 우주의 소행성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오리장 숲에서 신기한 연리목 노거수를 발견했다. 지난 청송군청에 근무할 때 대구를 오갈 때면 가끔 내려서 숲속의 연리근 회화나무와 느티나무를 만나 그 신비함을 체험하곤 했다. 아름드리 거목 울창한 ‘오리장 숲’… 수령 150∼300년 된 300여 그루 서식·천연기념물 제404호 지정 회화·느티나무 한 몸처럼 자라난 연리목, 사랑나무라 불리며 세 번 돌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도 아름드리 거목의 울창한 숲이다. 수령이 150년에서 300년, 줄기 둘레 3m, 키 10여m 이상의 노거수 300여 그루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도로와 하천을 따라 길게 조성된 숲은 왕버들, 말채나무, 팽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 은행나무, 굴참나무 등 다양한 수종의 노거수가 살아가고 있다. 오리장 숲은 1999년 4월 6일 천연기념물 제404호로 지정되어 나라에서 자연유산으로 보호 관리하고 있다. 예부터 마을 앞을 따라 오리(五里)에 걸쳐 뻗어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도로 확장과 개발로 본래의 숲이 많이 사라지고 군락지 몇 곳만 남았지만, 여전히 마을을 품에 안은 채 푸르름을 자랑하고 서 있다. 숲에 들어서면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거대한 나무들이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연리목(連理木) 회화나무와 느티나무이다. 다른 두 뿌리에서 돋아난 나무가 몸을 맞대고 한 생명을 이루듯 자라난 나무이다. 자천리 오리장 숲의 연리목은 나무 둘레만도 4m가 넘는다. 마치 회화나무가 느티나무를 양팔로 안은 모습이다. 예로부터 회화나무는 학자수(學者樹)라 하여 선비 나무라 하였다. 그리고 느티나무는 오지랖이 넓은 수형과 뭇 생명을 품는 여성목이라 했다. 그리고 보면 남자가 여자를 포근히 감싸 안은 형상의 모습이다. 주민들은 이를 보고 사랑 나무라 하여 나무 주위를 세 번 돌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귀하게 여기고 있다. 우리 인간 세상에서 사랑보다 더 큰 가치가 있을까. 사랑에 웃고 울며 목숨을 거는 인간 세상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연리목 앞에 서면, 이런 사랑에 대한 오래된 전설이 떠오른다. 옛날 중국에서는 하늘에는 비익조(比翼鳥)가 살고, 바다에는 비목어(比目魚)가 살고, 땅에는 연리지가 있다고 했다. 비익조는 암수가 각각 한쪽 날개와 한쪽 눈만 가지고 있어 서로가 합쳐져야만 날 수 있는 새이고, 비목어는 눈이 하나밖에 없어 좌우가 붙어야만 헤엄칠 수 있는 물고기다. 홀로는 온전히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함께해야만 완전해지는 생명체이다. 연리목 또한 그러하다. 두 그루의 나무가 하나로 뭉쳐서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연리지는 원래 중국의 후한서 채옹 편에 나오는 말로써 효심의 상징으로 전해졌지만, 당나라 시인 백낙천의 장한가라는 시가 나온 후에는 사랑의 나무란 의미가 덧붙였다. 그의 대표작 장한가(長恨歌)는 중국 당나라 황제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찬란하게 노래하면서도, 결국 파국으로 끝나는 역사적 비극을 노래했다. 궁의 온천에서 꽃처럼 피어난 사랑은 황제의 총애와 권세의 그늘 속에 더욱 농밀해졌으나, 그 뜨거운 사랑은 끝내 나라를 기울게 할 만큼 무겁고 치명적이었다. 권력과 사랑을 얻은 대가는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대가로 끝이 났다. 역사는 냉정했다. 안녹산의 반란, 즉 안사의 난이 일어나면서 당나라의 전성기는 무너졌다. 반란의 두목인 안녹산과 양귀비의 관계를 의심한 황제 호위병들은 피난길에 황제에게 양귀비의 목숨을 요구했다. 결국 황제의 피난길에서 양귀비는 군사들의 원망을 받아 마외역에서 목숨을 잃었다. 황제는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명령으로 사랑하는 양귀비의 죽음을 보게 되었다. 황제와 양귀비의 사랑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그러나 시인 백낙천은 사랑을 오히려 죽음 너머에도 이어지는 영혼의 결합으로 승화하여 노래했다.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자.” 이 맹세는 천지가 무너져도 사라지지 않는 사랑의 영원을 증언한다. 그래서 장한가는 단순한 옛 황제와 미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사랑의 가장 숭고하면서도 비극적인 진실을 보여주는 불멸의 서정시가 된 것이다. 오늘날 자천리 오리장 숲의 연리목은 그 시와 전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하다. 뿌리는 따로지만 줄기와 가지를 하나로 엮어 살아가는 나무는 인간의 삶과 사랑을 닮았다. 혼자서는 완전하지 못한 불완전한 존재가 서로를 의지하며 비로소 온전해지는 모습, 그것이 바로 인간의 진정한 삶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죽음이 둘을 갈라놓아도 사랑하는 마음은 언제나 하나로 연결되어 숭고함을 잇고 있다. 사랑이란 믿음이라는 세상에서 무성히 그리고 온전히 자라고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자천리 천연기념물 오리장 숲 연리목 앞에서 시인 백낙천의 장한가에서 그 의미를 찾아 되새겨본다. 별의 고장 영천, 보현산천문대에서 별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꿈, 오리장 숲에서 나무에 기대어 살아온 마을 사람들의 염원, 이곳을 찾아 연리목 앞에 선 나의 소망, 이 모두는 하나로 이어져 있는 듯하다. 별빛과 숲, 전설의 시가 한곳에 만나는 자천리 오리장 숲. 이곳은 단순한 풍경을 넘어, 우리가 어떻게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야 하는지를 말없이 가르쳐주는 역사책이다. 자연을 자세히 보고 명상하면 자연은 우리의 지혜를 일깨워주는 스승과 같다. 연리목 아래서 바라본 하늘은 더없이 높고 깊고 푸르다. 언젠가 나 또한 이 땅에서 인연을 마무리하더라도 누군가와 함께한 사랑이 연리목처럼 하나의 흔적으로 남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의미 있지 않을까 싶다. 자천리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이 숲을 마을의 수호림으로 여겼다. 홍수와 바람을 막아내고, 제방을 지켜주며, 때로는 신령이 깃든 신목으로 모셔졌다.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 사람들은 숲에서 제사를 올렸다. 숲이 푸르고 잎이 무성하면 그해 풍년이 들리라 믿었고, 나무의 기운이 약하면 흉년을 점쳤다. 숲의 생태는 곧 마을의 운명과 맞닿아 있었다. 근대화와 함께 제사의 전통은 끊어졌다. 그러다 2003년부터 마을 이장 협의회 주도로 다시 기원제가 부활했다. 노후화된 재단은 새로 정비되었고, 면민의 정성이 담긴 돌비석이 숲 한켠에 서 있다. 숲은 마을의 역사와 신앙, 삶의 기억을 간직한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다. 백낙천(白樂天)의 장한가(長恨歌)는… 양귀비(楊貴妃)와 당나라 황제 현종(玄宗) 둘의 로맨스가 워낙 유명했으므로 시를 지어 노래했는데 그것이 유명한 장한가이다. 생전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이 언약했다고 하는데, 당나라의 시인 백낙천이 당 현종과 양귀비의 비극적인 사랑을 장한가라는 장대한 서사시로 읊었다.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의 무릎을 베고 누워 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장한가의 끝 구절로 이렇게 노래했다.​ 현종은 안녹산의 난으로 꽃다운 나이에 비명에 간 양귀비를 잊지 못해 늘 이 말을 되뇌었다고 한다. 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장생전) 7월 7일 장생전에서 夜半無人和語時(야반무인화어시)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우리의 맹세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선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연리지) 땅에선 연리지가 되자고 간곡히 언약한 말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하늘과 땅은 차라리 끝이 있을지라도, 此恨綿綿無絶期(차한면면무절기) 님을 사모하는 이 마음의 한은 끝이 없으리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9-17

은어, 잡는 독특한 방법이 있다

한국과 일본, 중국과 대만 정도의 지역에만 분포하는 은어는 최대 30cm 정도까지 자라는 물고기다. 맑은 물이 아니면 살지 못하기에 조선의 선비들은 시문(詩文)을 통해 은어의 깨끗하고 정갈한 습성을 자신들의 청빈에 비유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건 만주 지방의 은어는 압록강에서는 사는데, 송화강엔 서식하지 않는다고 알려졌다. 아마도 물의 맑고 탁함이 그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낚시 고수는 생물학자 이상으로 은어의 이동 경로를 잘 파악하고 있다. 강태공들에게 최고의 손맛을 선사하는 물고기이기 때문이다. 매년 4~5월은 바다에서 월동한 은어가 하천으로 올라오는 시기다. 9월이면 산란을 하고, 알을 낳은 은어는 한 마리 빠짐없이 죽는다. 생사(生死)의 덧없음을 미물도 보여주는 것. 은어를 잡는 독특한 낚시 방법은 여러 번 들어도 들을 때마다 흥미롭다. 하천 여울진 곳에 영역을 형성해 일정 구역에서만 활동하는 은어는 동족이지만 다른 은어가 자기 구역에 드나드는 걸 반기지 않는다. 이를 이용해 은어 잡는 법은 아래와 같다. 일단 은어 한 마리를 잡아 그걸 낚싯줄에 묶는다. 그 줄에 여러 개의 낚시 바늘을 주렁주렁 매단다. 아직 죽지 않은 은어를 포획한 곳과 다른 구역에 던져 놓으면 그 은어를 쫓아내기 위해 다른 은어들이 몰려들고, 당연한 수순처럼 낚시 바늘에 여러 마리의 은어가 걸린다. 은어를 미끼로 은어를 잡는 것이다. 이 기상천외한 은어 낚시 방법을 이이제이(以夷制夷·오랑캐로 오랑캐를 잡는다)라 불러도 좋을까? 만약에 조선 선비들이 아직 살아있다면 “어째서 청류귀공자를 오랑캐에 비유하는가”라며 화를 낼 지도 모르겠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9-16

왕피천에 사는 ‘귀공자’를 만난 적 있나요?

‘은어(銀魚)’라... 세상이 붙인 이름에서부터 귀족티가 줄줄 흐른다. 은처럼 빛나는 물고기란 뜻인가, 그게 아니면 은처럼 값져서 귀한 사람의 밥상에 오르는 생선이란 의미인가? 식자(識者)라고 말할 것까지는 없겠으나, 시대불문 출간되는 소설을 꾸준히 따라 읽어간 한국문학 애호가들에게 ‘은어’의 이름을 드높인 사람이 두 명 있다. 울진 왕피천·영덕 오십천 물 맑고 깨끗 ‘청류귀공자’ 별칭 지닌 은어 살기 적합 ‘조선왕조실록’에도 여러 차례 기록 등장 높은 품계의 맛있게 잘 말리는 기술자 입맛 까다롭던 연산군 은어구이 즐겨 1990년대 중반. 당시 주목받는 신진 소설가로 이름을 높여가던 윤대녕이 ‘은어낚시통신’이란 제목의 단편집을 출간한다. 그 책의 표제작은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물론, 나이 지긋한 독자까지 적지 않은 이들이 아껴가며 읽은 20세기 막바지 빼어난 소설 가운데 하나다. 시시껄렁한 이야기 하나를 보태자면, 서울의 유명한 대형서점 가운데 한 곳에선 책의 제목만 보고 ‘은어낚시통신’을 소설 판매대가 아닌 ‘취미 서적’으로 분류해 진열했었다고. 오래전 일이니 지금 와서 그게 사실인지 풍문인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여기에 편견 없이 한국 소설을 읽고 거침없이 평가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한다’는 거장 문학평론가 김윤식(2018년 별세)이 ‘은어’와 ‘윤대녕’에게 날개를 달아준다. 앞서 언급된 작품을 “존재의 시원(始原)을 찾아가는 문장”이라 상찬한 것이다. 그로부터 30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 김윤식은 죽었고, 윤대녕도 갑년을 훌쩍 넘긴 문단 중견이 됐다. 책이 나왔을 때 군대를 다녀온 복학생이던 기자는 뜬금없게도 소설에 담긴 은유와 함의가 아닌 ‘은어 맛’이 궁금해졌다. 그때까진 은어를 먹어본 적이 없었으니. 경상북도 울진 왕피천과 영덕의 오십천은 물이 맑고 깨끗하다. ‘청류 귀공자’란 별칭을 지닌 은어가 살기에 딱 좋은 환경. 20세기 낚시꾼들은 은어가 바다에서 민물로 이동하는 계절이면 단단히 채비를 하고 은어잡이에 나섰다. 낚은 은어는 자신도 먹고, 이웃에게도 나눴다고. 은어는 회로도 먹고, 구이로도 먹고, 때로는 조림도 해먹는다. 지난 7월. 울진으로 취재여행을 갔다. 동해선 울진역에서 왕피천으로 가는 길. 나이 지긋한 택시기사에게 물었다. “요즘도 왕피천에서 은어가 잡히나요?” 그에게서 건조하고 간명한 대답이 돌아왔다. “옛날에 비하면 거의 안 잡힌다고 봐야죠.”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 기사는 프로 수준의 은어낚시 솜씨를 가진 죽마고우가 있고, 그 덕분에 몇 해 전까진 은어회를 먹었다고 했다. 기자가 은어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먹어본 건 7년 전 경북 봉화군의 한 식당에서다. 구이와 조림이 상에 차려졌는데, 잔가시가 너무 많아 발라내기가 거추장스러웠다. 책에서 읽기엔 ‘은어의 살에선 싱싱한 수박향이 난다’고 했는데, 글쎄…. 비릿한 풀향을 느낀 것도 같은데, 잘 모르겠다. 내 입엔 맞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자연산이 아닌 양식이라서 그랬나? ‘조선왕조실록’엔 은어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400~500년 전엔 수조와 냉장 시설이 장착된 트럭이 없었으니, 살아있는 상태론 왕에게 은어를 보낼 수 없었다. 그랬기에 은어를 맛있게 잘 말리는 기술자를 나라에서 가려 뽑았고 그의 품계가 꽤 높았다는 기록, 성격만이 아니라 입맛까지 까다롭던 연산군이 은어구이를 좋아했다는 이야기 따위가 전한다. 먹는 ‘은어’가 아닌 소설집 ‘은어낚시통신’에 얽힌 후일담도 있다. 소설가 윤대녕은 기자 초년병이던 2004년 제주도에서 만나 새벽까지 통음한 적이 있다. 소설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영화배우 전지현에 관해 이야기 나눴던 기억이 난다. 그보다 3년 전인 2001년 9월엔 평론가 김윤식의 퇴임 강연을 취재하러 서울대에 갔었다. 당시 연합뉴스 문학담당 기자였던 이성섭과 동행했는데, 교수 한 명의 퇴임 강연에 그토록 많은 기자가 몰린 것을 이전에도 이후에도 보지 못했다. “과연 김윤식”이란 말이 나올 법했다. ‘은어낚시통신’을 읽고 ‘존재의 시원’을 말했던 김윤식. 시원이 있다면 종국(終局) 또한 있을 텐데, “존재의 종국은 뭘까요?” 묻고 싶지만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없다. 이렇게 쓰고 나니 아주 조금 서글퍼지는 감정을 감추기 어렵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9-16

지자체 실정 맞는 방재 시스템으로 문화재 살린다

태풍, 홍수, 산불 등의 재난은 지자체 단위로 되풀이되지만, ‘재난지역 선포’와 같은 사후 조치에 집중됐다. 사전 예방 차원의 체계적 방재 시스템이 자리 잡지 못한 것이다. 이번 기획은 지자체 실정에 맞는 문화유산 방재 시스템을 구축 필요성을 제시하고, 농어촌 곳곳의 소중한 유산을 어떻게 지켜낼지를 탐구한다. 고령화 등으로 재난에 더 취약해진 자연 속 국가 유산을 지키는 데 필요한 ‘한국형(K)-문화유산 방재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마련해야 하는데, 일본의 경험을 토대로 경북은 물론, 전국 차원의 정책 수립에 필요한 시사점을 제공할 예정이다. <글 싣는 순서> 1. 산불 등 재난에 취약한 국내의 문화유산 2. 실제 재난으로 소실된 지역별 문화유산 3. 일본의 문화재 방재 연구기관 경험 4. 일본의 문화재 방재 정책 성공 사례 5. 한국형(K)-문화재 방재 정책의 방향성 ◇ 말로만 하는 방재, 현장은 ‘구멍투성이’ 2008년 숭례문 화재는 한국 문화재 방재 정책의 분기점이었다. 문화재청은 이후 IoT 기반 무인 경비, 1·2차 감지구역을 활용한 화재·침입 경보, 정기 안전 점검과 재난 유형별 매뉴얼 등 ‘한국형 방재’의 틀을 세웠다. 2030년까지 목조 국가 유산 방재시설을 고도화하고 2040년까지 석조·동산 문화재까지 첨단 설비를 확대한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하지만 2021년 문화재청의 방재환경 모니터링 결과는 냉혹했다. 경북 경주 기림사 대적광전은 감지기와 소화전이 기준에 미치지 못했고 귀래정은 자동화재속보설비와 CCTV가 아예 없었다. 대구 북지장사 지장전은 화재 수신기가 이쑤시개로 고정돼 있었고, 동화사 대웅전은 전기배선 노후와 관제 모니터가 불량으로 방치돼 있었다. 현장 전문가들은 “설비가 있어도 관리 인력이 부족해 유사시 제대로 작동할지 장담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기후 위기까지 겹치며 위험은 더욱 커졌다. 경주는 지정문화재만 900여 건으로 전국 최다를 자랑하지만, 태풍·폭우·산불 등 복합재난에 가장 취약하다. 2016년 지진은 ‘지진 안전지대’라는 인식을 무너뜨렸고 태풍 ‘힌남노’는 불국사·석굴암 인근 산사태를 불러왔다. 산림의 18%가 소나무 재선충으로 고사해 산불 확산 위험도 크다. ‘종이 매뉴얼’에 머문 방재 대책으로는 더는 버틸 수 없다는 경고다. ◇ “문화재도 생명이 있고 유한하다···재난 대비가 곧 생명선” 경주 신라문화유산연구원 김형석 연구원은 문화재 보존을 ‘영원한 가치’로만 바라보는 시각이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문화재를 과거의 고정된 유산이 아니라 “생명이 있고 유한한 존재”로 이해해야 한다며 보존 구역에 있다는 이유로 무조건 생명을 연장하려는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 연구원은 경주의 지형과 산림 구조를 가장 큰 위험 요소로 꼽았다. 그는 경주가 국토의 70% 이상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지정 문화재만 900여 건에 이르며 산림의 18%가 소나무 재선충 피해를 입어 산불 확산 위험이 특히 크다고 말했다. 불이 붙기 쉬운 소나무 위주의 식생은 “산불을 키우는 연료가 된다”는 점도 강조했다. 2016년 경주 지진과 태풍, 가을 집중호우가 석굴암과 불국사를 반복적으로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그의 설명이다. 대책을 묻자 김 연구원은 일본의 사례를 언급했다. 일본은 모든 문화재 건조물에 ‘문화재 보존·활용계획’을 세우고 국가·지자체·민간이 협력하는 체계를 갖췄다는 것이다. 그는 “문화청이 정책과 재정을, 지자체가 지역 방재계획을, 소유자가 일상 점검을 담당하며 대형 재해가 발생하면 ‘문화재 레스큐’가 즉시 가동된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주민 훈련과 매뉴얼 정비, 방화문·스프링클러 설치, 내진 보강,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이 체계적으로 진행된다는 점도 덧붙였다. 한국이 배워야 할 점에 대해 김 연구원은 한국의 산악 지형이 일본보다 산불 위험이 훨씬 크다고 지적하며 사건 후 특별 예산으로 단기 복구에 나서는 방식은 한계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후변화로 재해는 늘어날 것이며 문화재 방재를 사회적·교육적 가치로 공유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 “문화유산도 재난 환경 변화에 맞춰야” 백민호 강원대 소방방재학부 교수는 국가 유산이 지닌 ‘역사성과 장소성’이 오늘날 재난 취약성으로 되돌아오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문화재는 과거의 기후와 사회 조건 속에서 살아남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며 “기후 변화로 재난 양상이 변했고 과거 안전지대였던 입지조차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고 말했다. 또 “문화재를 영원한 존재로만 보는 인식에서 벗어나 구조적·비구조적 대책을 병행하고 관리 인력과 제도를 현실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 교수는 국가 유산이 재난에 취약한 이유에 대해 “역사성과 장소성이 문화유산의 강점이자 약점인데, 사찰·산중 유적처럼 인적이 드문 곳이 많아 전기·소방 등 기반 시설이 부족하고 기후가 변하면서 과거엔 안전했던 입지가 오히려 위험 요소가 됐다”라고 설명했다. 최근 재난 환경 변화와 관련해서는 과거에는 마을과 산사가 공생하며 숲을 관리했지만, 지금은 인구가 줄고 숲은 울창해져 오히려 불길을 키운다고 지적했다. 그는 “산불은 과거보다 확산 속도가 빠르다. 지진도 더 이상 예외가 아니다”고 경고했다. 백 교수는 “2005년 낙산사 산불, 2008년 숭례문 화재를 계기로 법은 정비됐지만, 문화유산은 전국에 흩어져 있고 환경이 모두 달라 일률적 적용이 어려워서 개별 유산의 특성과 위치를 반영한 맞춤형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자동 소화설비나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려면 관을 매립하고 못을 박아야 하는데 이 과정이 문화재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어 시설 설치가 어렵다고 한 백 교수는 “전력 차단이나 지형 제약으로 실제 화재 때 장비가 작동하지 못할 수도 있어 설치만큼 유지·관리, 현장 대응 역량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또 “일본은 설계·시공·유지관리를 일원화하고 현지 관리자가 장비를 직접 조작·훈련하도록 하는 시스템이고, 우리는 관리 업체가 자주 바뀔 뿐만 아니라 바뀌면서 도면과 현장이 달라지는 데다 장비가 제 기능을 못 하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구조적 대책과 비구조적 대책을 병행해야 한다”고 지적한 백 교수는 “물리적 설비를 강화하는 동시에 관리 인력의 전문성을 높이고 매뉴얼을 현실화해야 하고, 문화재는 영원하지 않다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문화재를 과거의 유산이 아닌 현재 살아 있는 존재로 바라보고 국가·지자체·민간이 함께하는 ‘한국형 문화유산 방재 시스템’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9-16

“노포는 오래 버틴 사람이 만든 자리”

죽도시장에서 40여 년 개복치로 가업을 지켜온 것이 결코 쉬울 수 없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IMF, 코로나19, 태풍, 불황의 파도가 쉴 새 없이 닥쳤다. 하지만 이 대표는 개복치를 꿋꿋이 지켜냈다. 장사는 정직하게 해야 고객들이 믿고 다시 온다는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왔다는 그의 목소리에는 단단한 확신이 묻어났다. ‘시장’이 아니라 ‘사람’이 그 자리를 만들어왔다는 자부심이었다. 부모가 35년, 내가 41년 넘게 이어온 가업 대학서 다양한 과정 수료•日 견학 등 노력 생선 넘은 생명, 상품 넘은 사명으로 지켜 어획량 급감… 동해서 사라져가는 개복치 해체 기술•노하우 등 전통 명맥 끊길수도 누군가는 계속 다뤄 다음 세대로 이어야 단순히 생선 장사가 아닌 인생을 거는 일 내가 이 생선을 왜 다루는지 잊지 않아야 포항의 고유한 역사를 개복치에 접목해 새 관광 자원으로 발전시켜 나가길 바라 “사람들은 노포를 오래되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노포는 오래 버틴 사람이 만든 자리죠.” 가업을 이어받은 사람들의 어깨는 무겁다. 부모 세대가 35년, 본인이 41년 넘게 이어온 수산물 유통의 중심에 ‘개복치’가 있다. 생선을 넘는 생명, 상품을 넘는 사명으로 개복치를 지켜온 이영태 대표는 수산 분야에서 권위자가 되고 싶은 포부가 있다. 그만큼 노력도 많이 했다. 서울대학교 해양정책 최고과정, 경북대학교 산업대학원, 한동대학교 해양수산 CEO 과정, 계명대학교 최고위과정 등을 수료했다. 선진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을 견학하기도 했다. 경력이 오래되었다고 안주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꾸준히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였다. 그래야만 고객에게 좋은 품질의 먹을거리를 제공할 수 있고 유통 또한 발전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생선 장수라고 부르지만, 나는 개복치로 포항을 알린다는 생각으로 일해요. 개복치가 포항에 왔다가 그냥 사라지는 생선이 아니라 여기에 뿌리내리게 하는 것, 그게 내 사명이라 여깁니다.” 이 대표는 앞으로도 개복치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가공식품 개발, 체험형 매장, 젊은 요리사와의 협업까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죽도시장의 작은 생선가게 안에는 개복치를 세상에 알린 한 남자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역 가업의 본질은 ‘상속’이 아니라 ‘기억의 실현’이라는 그의 말은 시장 어귀를 지키는 오래된 간판처럼 묵직하게 다가온다. 동해안에서 사라진 개복치 개복치는 동해안에서 매년 5월 보리누름에서 11월 나락누름 사이에 잘 잡혔다. 그래서 죽도시장에서는 1990년대 중반까지 ‘개복치 떼기’라 불리는 도매 행위가 활발했다. 하지만 수온과 해류의 경로 변화 등으로 개복치 어획량이 급격하게 감소했다. 포항, 강구 등 동해에서 잡히던 것이 해양 생태계 변화로 남해와 서해에서 출현 빈도가 높아지고 있으며 지금은 대만에서 많이 잡힌다. 이제는 개복치의 공급량보다 수요량이 많다. 서울 63빌딩 뷔페에 개복치를 공급하다가 물량이 부족해 제공하지 못한 적도 있고, 중국 칭다오 수산박람회에서 130톤을 주문받았지만 공급을 미룬 적도 있다. 개복치가 많을 때는 한 해 70톤 이상 취급했고, 부산, 통영에서 잡힌 개복치가 하루 50마리 넘게 태영수산으로 들어왔다. 그럴 때는 이 대표가 밤늦게까지 개복치 55마리를 해체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연간 물량이 하루치가 안 될 정도로 저조하다. 어느 해는 1년간 포항수협과 구룡포수협에 위판된 개복치가 12마리, 전체 양이 1070킬로그램에 불과할 때도 있었다. 현재 태영수산에서 판매하는 대부분의 개복치는 대만 해역에서 수입한 것이다. 이 대표는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대만 해역의 개복치를 들여왔다. “포항에서는 개복치가 안 잡히지만 포항의 이름으로 계속 알리고 싶어 수입을 결정했죠.” 이 대표는 개복치를 ‘지키는’ 일을 넘어 ‘보여주는’ 일을 하고 있다. 세계대표자대회 수출상담회, 수산박람회, 글로벌 회의, 죽도시장 퓨전 수산물 요리축제, 메가쇼(국내 최대 소비재 박람회), 팔도밥상페어까지 이어지는 개복치 홍보의 여정은 전 세계로 확대되고 있다. 그는 단순히 ‘생선을 판다’는 생각을 넘어 ‘식문화’를 만들어간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노포의 또 다른 과제는 ‘지속’이다. 개복치의 저변 확산이 지속되고, 다음 세대로 해체 기술이나 상품의 노하우, 유통기술이 이어지는 일은 중요하다. “개복치는 사라지는 생선입니다. 기술도 유통도 기억도 같이 사라지겠죠. 그걸 막기 위해 누군가는 계속 개복치를 다루어야 합니다.” 지금 포항에서 개복치를 전문적으로 유통하는 곳은 손에 꼽힌다. 생선이 사라지면 먹는 사람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 생선을 지켜온 전통 방식, 생선을 다루는 손의 감각, 생선을 기다리는 시간, 유통 노하우가 함께 사라진다. “가게 문을 닫는 순간, 이 생선은 다시 ‘듣도 보도 못한 물고기’로 돌아갈 수 있어요. 그런 생각을 자주 해요.” 개복치 전문 유통은 인생을 걸어야 하는 일 이 대표는 개복치 홍보에 온 정성을 쏟고 있다. 하지만 76년간 개복치 유통을 이어온 열정과 노력이 자신에게만 한정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 느낀다. “내 손에서 끝나면 안 되잖아요. 다음 사람이 이어야 해요. 누군가 기술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세대에 어떻게 이 노하우가 이어질 수 있을지, 여전히 과제로 남는다. 최근에는 노포의 지속을 ‘가업 승계’가 아닌 ‘지속 가능한 가치’에서 찾는 시도가 많아졌다. 그는 “자식에게 물려주고도 싶지만 고생할까 봐 권하지는 못한다”며 “자식들이 원하지 않으면 강요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단순히 생선 장사가 아니라 인생 전체를 걸어야 하는 일이니까 선뜻 넘기기 어려운 거죠. 누구든 이 일에 진심이 있다면 기꺼이 넘길 겁니다.” 이 대표는 기술을 배우는 것보다 중요한 건 ‘개복치에 대한 책임감’이라고 강조했다. 손님 한 명 한 명의 입맛과 반응을 기억하고, 계절에 따라 맛이 변하는 생선을 이해하며, 무엇보다 자신이 이 생선을 왜 다루는지를 잊지 않는 마음이 전수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대표는 누군가가 개복치 일을 이어간다면, 개복치의 가치를 잘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했다. 지역 협동조합, 로컬푸드 플랫폼, 청년 창업 프로그램과 연계해 노포 기술을 보존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지방의 소규모 노포들이 직면한 문제는 단순한 ‘경영 승계’가 아니라, ‘지방 산업 문화의 단절’이라는 점에서 지역사회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포항 역사와 개복치를 접목해 관광 자원으로 만들고 싶어 “죽도시장 안에 개복치를 소개하는 전시 공간이 마련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몇 해 전부터 교육과 홍보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해양수산부, 지방자치단체와 연계해 개복치에 대한 연구, 기록, 시식 행사를 열고자 하는 구상도 있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기에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하고 싶다. 포항의 고유한 역사를 개복치에 접목해 새로운 관광 자원으로 발전시킨다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다. 개복치는 포항이 ‘스스로의 바다’를 기억하는 상징이다. 영일만에 개복치가 사라졌다고 해서 개복치에 대한 기억마저 사라지게 두지 않겠다는 이영태 대표 같은 사람이 있는 한 포항은 ‘개복치를 기억하는 도시’로 남게 될 것이다. <끝> 글 = 정미영 수필가 사진 = 김 훈 작가

2025-09-14

“꾸준함을 더한 ‘작은 실천’ ‘원리 향한 집념’ 실력 키워”

- 포스코 명장으로 선정된 소감과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포항제철소 압연설비2부 STS압연정비섹션에서 근무하고 있는 신재석이다. 1987년 포스코에 입사해 어느덧 38년째 압연정비 분야에서 한 길을 걸어왔다. 올해, 포스코 명장이라는 영예로운 자리에 오르게 되어 감회가 남다르다. 명장이라는 타이틀은 내게 큰 자부심이자, 동시에 무거운 책임감을 안겨준다. 사실 명장이란 목표는 나에게도 한때는 너무 멀고 막연하게만 느껴졌다. ‘명장이 되겠다’는 거창한 꿈을 품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매일매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오늘 내가 현장에서 개선할 수 있는 한 가지, 이번 달에 꼭 이루고 싶은 작은 변화, 올해 반드시 남기고 싶은 성과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명장이라는 자리까지 오게 된 것 같다. 포스코에서의 시간은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수많은 기계 설비와 마주하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상황, 그리고 현장에서 크고 작은 난관들을 겪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으로 한 걸음씩 나아갔다. 명장이라는 자리는 결코 혼자만의 힘으로 오를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함께 땀 흘린 동료들, 선배와 후배, 그리고 나를 믿어준 회사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다. 냉연정비과에서 ‘정비인의 길’ 시작 문제 설비 직접 조립하며 원리 터득 현장에서 부딪히며 ‘기술 본질’ 이해 2022넌 냉천 범람 당시 침수 제철소 ‘비상 복구용 다용도 유압장치’고안 발전기에 전기공급 위기 해결하기도 노하우·경험쌓은 후배들큰성장위해 해외법인 현장근무도 적극 권하고파 - 어린 시절과 포스코 입사 전 성장 스토리도 말해달라. 나는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에서 태어났다. 상동은 낯익은 곳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두메산골도 아니었다. 당시 상동은 텅스텐 광산촌으로, 속된 말로 ‘잘나가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의 생활상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수입이 좋아 자녀들이 과외수업을 받을 정도였지만, 광산에서 일하지 않는 이들은 농사를 지어 광산촌에 납품하며 빈곤한 생활을 이어갔다. 나 역시 광산과는 거리가 먼 농가에서 9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터 하교 후 곧바로 소에게 풀을 먹이는 일을 맡았다. 소를 데리고 산에 오르는 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어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생각의 틀, 방법의 틀을 만들게 되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틀에 꾸준함을 더해 성과를 이뤄내는 습관이 자리 잡았다. 고향인 상동을 떠난 것은 포철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포항으로 오게 되면서였다. 포철공고를 선택한 이유는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가난한 농부인 아버지와 많은 식솔을 생각하면 대학 진학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포철공고를 졸업할 때쯤 자연스럽게 포스코 입사를 결심했다. - 포스코에서의 첫 시작은 어땠는지? 나는 포스코 압연정비부 냉연정비과에서 정비인의 길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설비를 새로 구축하고 안정화하는 시기여서, 선배들도 모든 것을 완벽히 아는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이 갖춰진 상태도 아니었기 때문에, 설비에 문제가 생기면 직접 뜯어보고 조립하면서 원리를 스스로 터득해야 했다. 단순히 고장 난 부품을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고쳐서 다시 사용하는 일이 많았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그만큼 현장에서 부딪히며 배우는 경험이 나를 성장시켰고, 기술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줬다. - 현장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무엇인가? 이처럼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며 얻은 경험을 통해, 나는 기술개발에서 ‘원리를 이해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단순히 주어진 방법을 따르기 보다는, ‘왜 이렇게 되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원인을 파악하려고 했다. 실제로 기름 농도를 측정하는 센서를 활용해, 냉각수에 섞여 나온 기름의 양을 알아낸 적도 있다. 이런 응용이 가능했던 건 센서의 원리를 잘 이해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후배들에게도 항상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직접 부딪히고 고민하면서 원리를 스스로 터득하라”고 조언한다. 이런 과정에서 진짜 실력이 쌓이고, 작은 성취라도 스스로 의미를 찾으면 힘든 일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내면의 힘과 지혜가 생긴다. - 제철소가 침수된 위기 상황에서 ‘비상 복구용 다용도 유압장치’를 고안해 문제를 해결했다고 들었다. 이런 발상의 전환은 어떻게 가능했는지? 2022년 냉천 범람으로 인해 제철소가 침수되고, 전기가 끊기면서 유압 시설까지 멈춰버린 현장을 마주했을 때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 제품이 설비에 그대로 물려 있는 상태라, 전기가 복구되더라도 바로 시운전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떠올린 것이 ‘비상 복구용 다용도 유압장치’였다. 설비에 임시로 유압을 공급할 수 있는 장치인데, 비상용 발전기를 연결해 전기를 공급하면 이동식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이 장치 덕분에 설비에 물려 있던 제품을 안전하게 빼내고, 전기를 복구해 바로 시운전을 할 수 있었다. 사실 이 장치가 획기적인 기술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위기 상황에서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방법을 떠올릴 수 있었던 건, 평소에 현장 문제를 깊이 고민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습관 덕분이었다. 정비업무를 하면서 늘 ‘만약 이런 상황이 오면 어떻게 대응할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대안을 머릿속에 그려왔다. 이번에도 그 경험이 발상의 전환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위기 속에서 현장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늘 새로운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느낀다. - 명장이 된 이후, 후배 양성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최근 들어 후배 양성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다. 가능하다면 후배들이 해외에 나가 현장을 직접 경험해보길 권하고 싶다. 설비에 대한 노하우와 경험이 쌓이면 해외 법인에서 근무할 기회가 주어지기도 하는데, 막상 현지에 도착하면 상황이 절대 녹록지 않다. 본사에서는 문제를 함께 풀어줄 동료와 전문가가 많지만, 해외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 문제가 생기면 모두가 나만 바라보는 상황이 펼쳐진다. 이런 상황은 실로 엄청난 부담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포스코 대표, 더 나아가 국가대표’라는 책임감을 절실히 느꼈다. 자연스럽게 ‘최고의 전문가가 돼야겠다’는 각오가 생기고, 실제로도 큰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이 소중한 경험을 어떻게 하면 더 많은 후배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앞으로도 후배들이 책임감을 느끼고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선배로서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지식을 나누는 데 힘쓰고 싶다. - 기술 특허, 수상 경력, 그리고 자격증까지 화려한 성과를 이루었는데, 그 원동력은 무엇인가? '멈추지 않고 작은 실천들을 행하는 것’이 내 삶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이, 현장에서 마주치는 문제를 그냥 넘기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개선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압연기능장, 용접기능장, 산업안전기사 등 여러 자격증을 취득했고, A등급 7건을 포함해 총 69건의 특허도 출원했다. 이런 성과들이 쌓일 때마다 스스로도 자부심을 느낀다. 또, 오랜 시간 불우 아동을 1대1로 돕는 자원봉사를 하면서, 나눔의 기쁨과 책임감도 배우고 있다. 앞으로도 내 삶에서 작은 실천들을 이어가며 주변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 마지막으로, 명장으로서 앞으로의 목표와 다짐은 무엇인가? ‘명장’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는 단순히 기술력이나 경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 같다. 이제는 나의 경험과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하고, 현장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며, 더 나은 포스코를 만들어가는 데 힘을 보태야 한다는 사명감이 더 크게 다가온다. 앞으로도 늘 그랬듯,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에 집중하며, 현장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다하고 싶다. ‘포스코 명장’ 신재석 포항제철소 압연설비2부 STS압연정비섹션 부장은… △ 1968년 1월 5일생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 졸업 △ 1987년 7월 입사 (근속연수 38년) △ 2006년 포스코 창립기념 모범사원 선정 △ 2021년 경상북도 최고장인 선정 (기계분야) △ 2023년 대한민국 우수숙련기술인 선정 (기계분야) △ 2023년 국회의원 표창장 (봉사 부문) △2025년 포스코 명장 /김진홍경제에디터 kjh25@kbmaeil.com

2025-09-14

“개복치에 한평생 매달린 게 헛되지는 않았네요”

개복치는 수질과 빛 등의 스트레스에 매우 민감하다. 유통 중 폐사율이 높고, 살아 있는 상태로 출하하기 어렵다. 기온과 수온의 변화에 민감하고, 피부가 얇고 물렁해 쉽게 상한다. 운반과 손질도 까다로워 이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곳이 드물다. 그래서 개복치는 전문적인 해체 기술이 필요하다. 해체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쓸개를 터트리면 안 된다. 쓸개가 터지면 개복치 전체에 쓴맛이 퍼져 판매할 수가 없다. 아가미 이빨에 독이 있어 조심스럽게 도려내야 한다. 날개 지느러미를 먼저 잘라내고 배 쪽을 절개해 내장류를 분리해 제거한 뒤, 피부를 벗기고 몸통을 분할한다. 일반 생선처럼 삼등분(머리-몸통-꼬리)이 아니라 살 부위 중심으로 나눈다. 그런 다음 살을 분리하고 부위별로 분류한다. 1980∼90년대, 포항은 죽도시장과 동빈내항을 중심으로 어시장 체계가 재편되었다. 이 흐름에 맞춰 이영태 대표는 개복치 전문 유통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때가 1984년이었다. 부모 세대의 수산물 유통 경험을 기반으로, 개복치 유통 노하우를 포항에서 최초로 정착시킨 것이다. 포장 방식, 수조 온도 유지, 도착 즉시 손질 처리 체계를 개발해 개복치의 상품화를 이끌었다. 41년 전 처음 제조 시도한 껍질로 만든 수육 쫄깃한 청포묵처럼 초고추장 곁들여 먹어 유통 노하우 포항서 최초 정착 ‘상품화’로 지역 경조사 상차림에 ‘단골 메뉴’로 등극 2012년 버리는 살코기로 만든 장조림 히트 포항시 추천으로 ‘개복치 명인’ 신청 추진 중 SNS 등서 입소문 ‘자자’ 택배시스템도 갖춰 “전통은 지키되 시대 흐름에 맞춰 가야죠” 개복치 수육과 장조림 개발 태영수산은 개복치를 좀 더 먹기 편한 대중적인 음식으로 보급하기 위해 개복치 가공식품인 수육과 장조림을 개발해 판매하고 있다. 현재 개복치 가공식품은 상표등록 보유 및 포항시의 추천으로 ‘대한민국 식품, 개복치 명인’으로 신청을 추진 중인데, 이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박정자 씨는 개복치를 전문적으로 유통하려고 보니 개복치를 뚝뚝 잘라 파는 방식으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시어머니가 개복치를 팔 때는 뚝뚝 잘라서 2000원, 3000원 이렇게 대강 팔았어요. 그날 팔지 못한 건 버릴 수밖에 없었고요. 장사를 이렇게 해서야 뭐가 되겠냐 싶더군요.” 박정자 씨는 손님들이 개복치를 간편하게 사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숱한 시행착오를 걸쳐 탄생한 것이 개복치 수육으로, 개복치의 겉껍질을 벗겨 삶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41년 전에 태영수산이 처음 시도했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개복치 껍질에 각종 재료를 넣고 푹 고아 껍질이 흐물흐물해지면 틀에 넣어 굳힌 음식으로 초고추장에 곁들여 먹는다. 피쉬 콜라겐으로 피부 미용과 뼈 건강에 도움이 되는 저칼로리 영양식이기도 하다. 모양은 청포묵과 비슷하고 비린내가 거의 없으며 단백하고 쫄깃한 식감으로 남녀노소가 즐길 수 있는 깔끔한 맛이다. 비린내가 없도록 개발한 수육은 포항에서 경조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 되었다. 1990년대에는 대방예식장, 목화예식장, 청솔밭에 납품했으며 나중에는 포항의료원 장례식장, 포항시민장례식장 등에 공급했다. 끊임없는 고민과 연구 끝에 개복치 상품화에 성공 새길을 여는 일은 수고스럽고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하다. 개복치 수육을 상품화하는 과정도 그랬다. ‘그냥 대충 잘라서 팔걸’ 하고 여러 번 후회하기도 했다. 문어처럼 삶아서 팔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해체 작업을 거쳐 먹을 수 있는 부위와 먹을 수 없는 부위를 선별해 각각 조리법에 맞게 요리해야 하므로 시작부터 까다롭기 그지없다. 예전에는 개복치를 잘라서 팔면 손님들이 집에서 조개껍데기나 감자껍질 벗기는 숟가락으로 가죽처럼 질긴 개복치 껍질에 붙은 속살을 직접 벗겨냈다. 이렇게 벗겨낸 속살을 삶거나 쪄서 채반이나 짚 위, 대나무 발 위에 얹어 식힌 다음, 하얗게 덩어리가 되면 닭가슴살처럼 뜯어 먹었다. 그 모습이 불편해 보인 이 대표 부부는 손님들이 편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연구해 조리법을 바꾸었다. 부부는 요리사가 아니라 장사하는 사람이었지만 맛을 내기 위해 요리사처럼 고민하고 여러 시도를 해보았다. 비린내를 없애려고 식초, 마늘, 생강, 소금, 간장, 된장 등을 넣어보고, 식감을 위해 불 조절, 삶는 시간 조절을 되풀이하는 몇 년 동안 버려진 개복치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노력 끝에 태영수산만의 개복치 수육이 탄생했다. 수육이 맛있다고 소문나자, 가게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독립해 상점을 차렸는데, 그 수가 일곱이나 되었다. 경쟁자가 많아지니 수육 판매만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새로운 걸 개발하게 되었다. 그렇게 개복치 장조림을 2012년에 개발했다. 개복치 속살에 물, 식초, 설탕, 간장을 넣고 비린내를 제거하기 위해 태국 고추, 마늘 등을 넣어 조린 요리다. 요리 비법은 사흘 동안 달이고 식히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간장에 조려서 보관이 쉬우며, 짭짤한 맛과 쫄깃쫄깃한 식감으로 입맛이 없을 때 밥반찬으로 기가 막힌다. 개복치 장조림을 개발하는 데에도 사연이 많았다. 개복치 껍질로 수육을 만들어 팔다 보니, 버려지는 살코기를 감당할 수 없었다. 죽도시장에서 살코기 한 통을 쓰레기로 버리는데 1만 원이 들었다. 쓰레기 버리는 값이 100만 원이나 드니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당시 박정자 씨의 친정은 청송에서 사과 과수원을 했다. 사과나무 아래에 개복치 살코기를 갖다 묻으면 비료가 될 것 같아 흙구덩이를 파서 묻고 난 뒤에 등겨를 덮었는데, 며칠 뒤 친정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너희들 나무 밑에 뭐 했냐?” 고기 냄새를 맡고 멧돼지가 산에서 내려와 사과나무 밑을 들쑤셔서 과수원이 엉망이 된 것이다. 이렇게 골치 아픈 살코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장조림으로 만들어 판매하게 되었는데 시장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현재 중국, 홍콩, 베트남 등 여러 나라에 수출을 추진 중이다. “포항 가면 개복치, 개복치는 태영수산” 개복치의 도톰한 살은 젓갈과 장조림, 뼈와 내장은 국거리, 껍질은 수육, 이 밖에도 회, 두루치기, 대창구이 등으로 상품화되었다. 개복치를 꾸준히 연구하면서 조리법을 바꾸다 보니 손님들의 반응도 달라지면서 고객층도 확대되었다. 이 대표는 가공식품 개발과 함께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정성을 쏟았다. 급격하게 바뀌는 식문화와 유통 질서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것이다. 택배로 개복치를 구입할 수 있는 시스템도 갖추어 놓았다. “이제는 매장에서만 파는 시대가 아니잖아요. 노포라고 해서 전통만 고집해서야 되겠습니까. 전통을 지키되 시대 흐름에 맞춰 가야죠.” 그런 노력 덕분에 태영수산도 개복치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여러 언론매체에 소개되고 SNS와 유튜브에 화제가 되면서 입소문이 났다. 인스타그램을 보고 찾아왔다는 젊은 층과 외지 손님도 많이 늘었다. 강릉, 광주, 심지어 제주에서도 개복치 상품을 찾는다. 이 대표는 “인스타그램에서 보고 왔어요”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의 뿌듯함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사람들이 “포항 가면 개복치, 개복치는 태영수산”이라는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대표는 “개복치에 한평생 매달린 게 헛되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글= 정미영 수필가·사진= 김훈 작가

2025-09-10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그리고 봄’ 촬영지 주산지

금강산의 봄 풍경이 마치 황금처럼 빛나고 생동감이 넘친다고 해서 금강산(金剛山)이라 하고, 여름은 안개와 구름이 자욱한 모습이 신선이 사는 산과 같다고 하여 봉래산(蓬萊山)이라 한다. 가을은 붉게 물든 산의 모습에서 풍악산(楓嶽山)이라 하고, 겨울은 눈으로 덮여 마치 깨끗하고 청정한 골짜기 같다고 하여 개골산(皆骨山)이라 불리 운다. 이렇게 계절별 산의 아름다운 모습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경북 청송 주왕산 자락에 주산지라 불리는 저수지 또한 계절별로 아름다움을 표출하고 있다.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김기덕 감독은 주산지는 어느 한 계절에도 머무르지 않는다고 하면서 2003년 ‘봄. 여름, 가을, 겨울…그리고 봄’이라는 주산지를 배경으로 영화를 제작했다. 신비스러운 주산지의 사계절 변화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주산지 자연은 살아있는 생명체로 이루어져 있기에 계절을 달리하면서 시시각각으로 변모하는 자연의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 봄에는 생명의 탄생을, 여름에는 성장의 신비함을, 가을에는 황혼의 화려함을, 겨울에는 한 생명의 침묵을 노래한다. 그 중심에는 물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하늘에 목을 내밀고 물속에서 살아가는 왕버들 노거수이다. 주왕산 깊은 계곡에 자리한 ‘주산지’ 조선시대 농업용 저수지로 만들어져 사계절 신비로운 풍경, ‘황홀’ 그 자체 영화 촬영지로 유명… 명소로 우뚝 청송 주산지 상징 ‘왕버들’ 고사 위기 현재 300년 왕버들 6그루, 총 28그루 생태복원 등 ‘노거수 살리기’ 진행 중 주산지는 주왕산 깊은 계곡 속에 있어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계곡을 따라 30여 분을 걸어 들어가야 볼 수 있다. 주산지는 약 300년 전 1721년 조선 경종 때 농업용 저수지로 길이 100m, 너비 50m, 수심 8m로 축조되었다. 마을 주민의 울력으로 계곡의 잘록한 동쪽과 서쪽의 산자락을 부여잡고 묶어 놓으니 자연스럽게 분지에 물이 고여 산속의 작은 호수가 되었다. 주민이 만든 주산지에 계절별 풍경은 주왕산 신이 숨겨놓은 특별 전시장의 걸작품이다. 걸작품을 바라보는 순간, 나 또한 작품 속 일부가 되고 고요 속에 스며든다. 주산지는 사계절 내내 우리에게 기다림과 변화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신비로운 풍경은 마음속에 오래도록 잔잔히 머문다. 주산지도 사계별로 그 아름다움이 달라 별도의 계절별 이름을 붙여도 좋을 것 같다. 주왕산 치맛자락이 주산지를 감싸고 있으면서 때때로 치맛자락을 들쳐 흔들기라도 하면 그 풍광은 180도로 변하여 또 다른 선경의 황홀함에 빠져든다. 주왕산 자락에 자리한 주산지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다. 그리고 주산지 물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왕버들이 사계절 내내 변주곡처럼 다양한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전국의 많은 사람이 이곳의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기 위하여 또는 즐기기 위하여 찾아오고 있다. 계절별 풍광은 서로의 계절이 더 아름답다고 뽐내면서 자랑하는 것만 같다. 어느 계절이 못하고 좋음이 없이 모두가 훌륭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영화 촬영의 배경 지역으로 부각하여 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그리고 주산지 절경은 사진작가들의 1순위 촬영지로서 주왕산국립공원의 대표적인 경관자원이자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어쩐 일인지 물속 왕버들은 점점 쇠약해져 고사 되어만 갔다. 주왕산 주산지 하면 물속 왕버들이 압권인데, 이에 주왕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는 나무의 수세가 약화 되어 점점 쇠퇴해 가는 왕버들을 살리고 보완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기청산식물원 강기호 박사(현 국립세종식물원 본부장)가 맡아 진행되었다. 이에 나는 자문 위원으로 참여했다. 왕버들 고사 원인을 분석했다. 1987년 더 많은 농업용수 확보를 위하여 2m 둑 높이 공사를 한 결과 주왕산 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저수지에 모이면서 연중 만수로 인하여 저수지 주변에 살던 왕버들이 완전히 물에 잠기어 오늘날까지 물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오고 있다. 그러나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수문이 열리면 수면이 하강하여 왕버들 줄기에 난 부정근이 햇볕에 노출되어 줄기와 잎에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해 주지 못하여 수세가 약화 되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리고 수면이 낮아지면서 노출된 뿌리 주변의 경사가 심해 뿌리를 덮고 있던 흙이 유실되었다. 그 두 가지가 원인으로 밝혀졌다. 이에 노출된 뿌리를 낙엽이나 부엽토로 덮어주고 종종 물을 뿌려서 건조하지 않도록 하고 토양의 경사가 급하여 덮은 부엽토가 흘러내릴 수 있는 곳에는 돌쌓기하기로 하였다. 먼저 주산지 물속 왕버들이 고사한 빈자리에 이식할 왕버들을 찾기로 했다.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낙동강 상류 지역인 청송 파천면 신기리 하천에 왕버들이 군락을 지어 살아가고 있었다. 이곳에 살고 있는 가슴높이 둘레가 25cm 정도 되는 왕버들 4그루를 선택하여 이식했다. 이제 주산지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왕버들은 모두 28그루나 된다. 저수지 축조 당시에 살고 있던 나이 300살, 가슴 높이의 둘레가 2.4m 이상인 왕버들 노거수 6그루가 아직도 주왕산 주산지 사계의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는 주역으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가끔 이곳 물속의 왕버들을 찾는다. 볼 때마다 다른 풍광 다른 느낌을 받는다. 봄은 생명의 기운이 잔잔한 수면 위로 봄 햇살이 반짝이며 나무의 그림자를 어루만진다. 수면에 비친 풍경은 마치 꿈결처럼 아름답다. 산새들의 지저귐이 물 위로 울려 퍼지고, 봄바람에 이따금 물결이 일 때 주산지는 마치 초록빛 꿈의 호수이다. 여름은 자연이 그려낸 초록의 싱그러움이 온 세상에 넘쳐흘러 젊음과 희망을 느끼게 한다. 저수지에 물안개가 스며들면 풍경은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이다. 온천에 몸 담근 실루엣 걸친 왕버들은 푸른 향기 뿜어내는 천사이다. 가을의 왕버들 잎사귀는 붉고 노란빛으로 물들어 저수지에 담아 놓은 꽃바구니이다. 갈바람에 나뭇잎들은 하늘과 물속에서 춤춘다. 겨울의 주산지는 얼음과 눈으로 덮이면서 고요함을 더한다. 적막하지만, 그 안에서 묵직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내가 간택한 왕버들이 주산지 왕버들 후계목이 되어 잘 자라고 있었다. 사계절을 맞이하고 보내면서 영화 같은 소설 같은 아름다움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필자의 시] 주산지 왕버들 초록 꿈을 물들이는 녹화(綠花) 가지에 생명이 피어난다. 물안개 속 고요한 숨결 푸르름이 주산지에 깊게 뿌리내린다. 곱게 물든 단풍 수면 위 춤사위 바람이 꾸며 놓은 콘서트장 앙상한 가지에 서린 하얀 숨 고요 속에서도 생명은 깨어 있다. 주산지를 떠난 물속 왕버들 빈자리에 후계목 네 분을 모셔 오는 날 사계를 맞이하고 또 보내면서 만세무강을 기원한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9-10

다식, 다이어트의 적이지만 달콤한 유혹을 어찌...

다식(茶食)은 다소 떫고 쌉쌀한 차를 마시는 문화와 함께 발달해왔다. 한국과 더불어 중국과 일본에도 차에 곁들여 먹는 달콤한 과자가 있는 건 이 때문이다. 적지 않은 여행자들이 일본을 다녀올 때면 ‘일본판 다식’이라 불러도 좋을 화과자(和菓子)를 사온다. 화과자의 설탕 함유량이 엄청나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 일본 역시 녹차와 홍차를 마시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건 화과자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다. ‘나무위키’는 다식을 “한과의 일종으로 신라와 고려시대에 널리 성행했던 차(茶) 문화와 함께 생겨난 과자”라고 정의하며, “곡물가루를 꿀에 반죽하여 모양을 만든 것이기에 과도하게 달다. 두께는 동전 4~5개를 쌓아놓은 정도고, 크기는 손톱 만하게 작지만 하나만 먹어도 씁쓸한 녹차나 다류가 땡긴다”고 부연하고 있다. 그렇기에 체중 조절을 위해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이 먹기엔 적절한 음식이라고 할 수 없는 게 다식이다. 과도한 당분이 그 이유일 터. 하지만, 쳐다보기 아까울 정도로 예쁘고 화려한 동시에 혓바닥을 녹일 듯한 매혹적인 단맛은 다식을 쉽게 끊을 수 없게 만든다. 우리가 시나브로 커피와 담배에 중독되는 것처럼. 그렇기에 가능하면 먹는 양을 적절하게 조절하고, 송홧가루나 콩가루, 밤이나 참깨 등 몸에 덜 해로운 재료로 만든 다식을 선택하는 게 다식에 의한 폐해(?)를 미연에 방지하는 지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9-09

안동 양반들 별식 ‘헛제삿밥’과 ‘다식’을 아시나요?

아래 기사는 본지 홍성식 기자가 한국기자협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연재하고 있는 ‘역사와 스토리가 있는 영남 음식’을 일부 수정·보완한 것이다…/편집자 주 경상북도 안동은 기자들에게 매력적인 취재처가 분명하다. 가까이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사에서부터 멀리는 16세기 조선 성리학의 빛나는 편린,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으니. 서원(書院)과 고택(故宅)의 고풍스런 검은 기와는 또 어떤가. 어떤 사람이건 설레게 만드는 힘이 있다. 도처에 역사적 숨결이 깃든 하회마을을 산책하듯 유유자적 걸으며 그 옛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삶을 떠올리고, 밤이 이슥해지면 박재서나 조옥화가 빚은 ‘쨍한’ 안동소주 한 잔 맛보는 것. 이만한 여행지를 찾기가 쉽지 않다. 좋은 술엔 먹음직한 음식이 따르는 게 정한 이치. 안동엔 먹을거리도 적지 않다. 아예 골목 하나를 통째 차지하고 들어서 군침을 돌게 만드는 안동 갈비는 헐하진 않지만 비싼 값을 한다. 석쇠에 잘 구운 한우 갈비를 먹고 나면 서비스로 나오는 찌개도 더할 나위 없이 맛있다. 발골(拔骨) 과정에서 생기는 자투리 고기와 매운 풋고추를 넣어 칼칼하게 입 속을 정리해준다. 짜지도 싱겁지도 않게 소금간이 잘 배어든 고등어를 구워 먹는 것도 안동 여행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안동 간고등어는 아이들에겐 ‘밥도둑’ 주당들에겐 ‘술도둑’이라 불릴 만하다. 안동식혜도 그렇다. 대체 누가 식혜에 고춧가루와 무를 넣을 생각을 할까? 안동 사람들이 아니라면. 기자가 마셔본 바 숙취 해소에도 그저 그만이다. 서너 해 전이다. 나흘을 안동에 머물렀다. 취재 반·휴가 반의 여유로운 일정이었다. 그때 또 하나 안동의 별미와 즐겁게 조우했다. 이름하여 ‘헛제삿밥’. 흥미로운 작명이다. 안동엔 제 나름 양반이라 큰소리치는 가문이 여럿이다. 그런 집엔 제사가 많다. 그럴 수밖에 없다. 부친과 모친, 조부와 조모만이 아니라, 증조부와 고조부 제사까지 모시는 경우가 흔한 탓이다.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은 정갈하고 담백하다. 자극적인 양념을 최대한 배제한 것이 대부분. 그런데, 비단 제사 때가 아니라도 이런 것들이 먹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날이면 이른바 ‘양반 집안’에선 탕국을 끓이는 동시에 생선과 전을 굽고, 온갖 나물을 데쳐 가마솥에 갓 지은 고슬고슬한 밥과 함께 야식으로 먹었다. 요즘 애들이 밤늦게 피자나 양념통닭을 배달시켜 먹는 것처럼. 그게 ‘헛제삿밥’의 유래라면 유래다. 헛제삿밥의 백미(白眉)는 갖은 나물을 넣은 비빔밥이다. 거긴 고추장 대신 집에서 만든 조선간장을 넣어 간을 맞춘다. 안동의 제각각 가문마다 비빔밥 맛이 다른 이유다. 헛제삿밥은 집에선 만들어 먹기가 번거롭고 힘도 든다. 그러나 걱정 마시라. 지금이 어떤 시절인가? 안동엔 헛제삿밥을 전문으로 파는 식당에 몇 군데 있다. “어느 식당이 최고”라고 다툴 필요도 없다. 대부분 식당이 다 먹을 만하니까. 글을 쓰는 지금도 입 안 가득 침이 고인다. 박재서 명인이 빚은 알코올도수 45%의 안동소주를 반주로 헛제삿밥을 먹었던 날을 떠올리면, 그깟 왕후장상(王侯將相)이 부럽지 않다. 안동엔 종갓집이 많다. 대부분의 종가(宗家)는 날아갈 듯한 기와를 이고 선 멋들어진 고택(古宅)이다. 퇴계종택, 학봉종택, 농암종택, 경당종택, 제산종택 등이 그렇다. 그것들 가운데 학봉종택과 농암종택에선 하룻밤 자는 호사도 누렸다. 이른바 ‘종택(고택) 스테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농암종택에선 종손과 아침을 함께 먹었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깔끔한 밥상이 수 세기 전 선비의 조반(朝飯)이 어떠했는지 짐작케 해줬다. 학봉종택에서 맛봤던 다식(茶食)은 색깔과 디자인 면에서 ‘미슐랭 3스타’에 올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었다. 그날 밤 앞에 놓인 다과상 위에선 계절과 무관하게 각기 다른 빛깔의 장미가 피어났고, 잣과 흑임자는 별로 다시 태어났으며, 조청에 절인 사과와 잘 말린 곶감은 혀를 녹였다. 20세기 이전이라면 헛제삿밥도, 다식도 양반들만 먹었을 게 분명하다. 힘겨운 매일의 노동과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궁핍 속에서 가난한 백성이 그런 걸 만들어 먹는 건 언감생심이었을 터. 그래. 정말이지 다행이다. 기자가 살고 있는 지금이 양반과 상것의 구분이 사라져 형식적 평등이라도 이뤄진 21세기라는 게.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9-09

‘복구보다 예방’ 일본 문화재 방재 정책···성공 사례로 배운다

태풍, 홍수, 산불 등의 재난은 지자체 단위로 되풀이되지만, ‘재난지역 선포’와 같은 사후 조치에 집중됐다. 사전 예방 차원의 체계적 방재 시스템이 자리 잡지 못한 것이다. 이번 기획은 지자체 실정에 맞는 문화유산 방재 시스템을 구축 필요성을 제시하고, 농어촌 곳곳의 소중한 유산을 어떻게 지켜낼지를 탐구한다. 고령화 등으로 재난에 더 취약해진 자연 속 국가 유산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한국형(K)-문화유산 방재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마련해야 하는데, 일본의 경험을 토대로 경북은 물론, 전국 차원의 정책 수립에 필요한 시사점을 제공할 예정이다. 사찰엔 방화문·스프링클러 설치 산림 인접 지역 방화대·내진 보강 홍수·쓰나미엔 모래주머니 활용 지자체, 지역 맞는 방재계획 수립 사찰 고택 소유자, 일상점검·보존 주민 주도적 참여 ‘복구보다 예방’ <글 싣는 순서> 1. 산불 등 재난에 취약한 국내의 문화유산 2. 실제 재난으로 소실된 지역별 문화유산 3. 일본의 문화재 방재 연구기관 경험 4. 일본의 문화재 방재 정책 성공 사례 5. 한국형(K)-문화재 방재 정책의 방향성 ◇ 제도적 기반과 법적 토대 일본의 문화재 방재 정책은 1950년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을 기초로 한다. 이 법은 1949년 나라 호류지 금당 화재 사건을 계기로 마련됐다. 금당 내부 벽화가 불타버리자 ‘국가의 보물도 재해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라는 비판이 쏟아지면서 사회적 충격이 확산했고, 문화재를 법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후 이 법은 대형 지진과 화재를 거치며 방재 조항이 강화됐다. 현재는 문화청이 정책과 지침을 마련하고 내진 보강과 방재 설비에 대한 재정 지원을 맡는다. 지자체는 지역 문화재에 맞는 방재계획을 수립하고 사찰이나 고택 같은 소유자는 일상 점검과 보존을 담당한다. 대형 재해 발생 시에는 문화청 주도로 ‘문화재 레스큐’가 가동돼 전문가가 파견되고 관·민 협력으로 응급조치가 이뤄진다. ◇ 교토 니넨자카 화재 2024년 1월 교토의 대표적 관광지 니넨자카에서 발생한 화재는 일본 문화재 방재 정책의 성과를 보여준 대표 사례다. 좁은 골목길에 전통 목조 건물이 밀집한 이곳은 자칫하면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러나 화재 발생 직후 주민들이 시민용 소화전을 가동해 불길을 초기 단계에서 잡는 데 성공했다. 이 소화전은 교토시와 리쓰메이칸대 역사도시방재연구소가 협력해 설치한 장치로 평소 주민 훈련을 통해 사용법이 공유돼 있었다. 덕분에 소방차가 도착하기 전 불길이 확산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교토시는 이 사건을 ‘지역 공동체가 주체가 된 문화재 방재의 모범’으로 평가했다. ◇ 노토 반도 지진 2024년 1월 1일 발생한 규모 7.6의 노토 반도 지진은 이시카와현 전역에 큰 피해를 남겼다. 사망자가 수백 명에 달했고, 수십 건의 지정 문화재가 붕괴하거나 손상됐다. 그러나 2007년 지진 이후 내진 보강을 거친 건물은 이번에도 무사했다. 문화청과 이시카와현은 즉각 ‘문화재 레스큐’를 가동해 전문가를 파견, 붕괴 건물에서 불상과 고문서를 반출하고 응급 조치를 시행했다. 특히 이시카와현은 문화재 위치를 디지털 대장으로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해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일부 시설은 방화·내수 보존상자와 반출 매뉴얼을 사전에 준비해 현장에서 즉시 활용할 수 있었다. 문화청은 “사전 보강, 긴급 레스큐, 디지털 관리, 현장 장비 준비가 결합된 다층적 성과”라고 평가했다. ◇ 도시형 문화재 방재와 주민 협력 교토·나라와 같은 전통 도시는 목조 건물이 빽빽이 들어서 화재 확산 위험이 높다. 일본은 이런 곳에 ‘연단건물’ 개념을 적용해 건물군 단위의 내화성을 높이고 피난로를 확보하고 있다. 교토시는 골목마다 소형 소화 펌프와 호스를 비치하고 주민들이 이를 직접 다루는 훈련을 주기적으로 진행한다. 또 전통 가옥 내부 통로를 활용해 화재 시 대피로로 쓸 수 있도록 했다. 주민 참여는 제도화된 훈련으로 이어진다. 일본은 매년 1월 26일을 ‘문화재 방재의 날’로 지정해 전국 문화재 현장에서 일제히 방재 훈련을 실시한다. 교토는 여름에도 한 차례 추가 훈련을 시행한다. 문화청은 “문화재 방재는 지역사회가 주체가 될 때 실질적 성과를 거둔다”고 강조한다. ◇ 미래 전망과 과제 일본은 최근 ICT, AI, 드론, 3D 스캔 등 첨단 기술을 문화재 보호에 적극 도입하고 있다. 문화청은 2023년 기준 3만 건 이상의 문화재를 디지털 아카이브화했으며 일부는 디지털 트윈으로 복원해 재난 발생 시 신속 복원이 가능하도록 준비하고 있다. 드론은 지진과 홍수 이후 문화재 피해 현황을 신속히 파악하는 데 활용된다. 기후변화로 폭염, 산불, 홍수 같은 재해가 잦아지면서 문화재는 더욱 큰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일본은 복원보다 예방에 무게를 두고 정책을 재설계하고 있다. 한국 역시 산불로 인한 문화재 피해가 잦은 만큼 일본의 예방 중심 정책과 주민 참여형 성공 사례는 중요한 참고가 될 수 있다. ◇ 교토가 주는 교훈 일본의 문화재 방재 정책은 법과 제도, 성공 사례만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이다. 그러나 책상 위 자료만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고민이 있다. 기자는 해답을 얻기 위해 7월 13일 교토 리쓰메이칸대 역사도시방재연구소를 찾았다. 연구소 내부는 마치 재난의 기록관 같았다. 벽면에는 지진과 화재로 무너진 문화재 사진과 복구 과정을 담은 패널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요시토미 신타 교수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일본의 경험과 한국이 참고할 과제를 조목조목 말했다. 요시토미 신타 교수는 “일본 문화재 건조물은 한국보다 산중 입지가 적어 산불 피해 사례가 드문 대신에 모든 건조물은 ‘문화재 보존·활용계획’을 작성해 방재계획에 포함하면서 연구기관과 연계해 고도화된 방재계획을 마련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문화재보호법’을 기반으로 국가·지자체·민간이 협력한다”라면서 "문화청은 정책과 재정 지원을, 지자체는 지역 문화재 방재계획을, 소유자는 일상 점검을 담당한다. 대형 재해 시에는 문화재 레스큐 체제가 가동된다”고 문화재 방재 체제를 설명했다. 자연재해 대응 방식에 대해서는 평상시 주민 훈련과 매뉴얼 정비가 이뤄지고, 사찰에는 방화문·스프링클러를 설치한다고 했다 또, 산림 인접 지역은 방화대를 두고 지진에는 내진 보강을 실시하며, 홍수·쓰나미에는 모래주머니·고상화·디지털 아카이브를 활용한다고 했다. 요시토미 신타 교수는 “한국은 산악 지형 문화재가 많아 산불 위험이 높다. 일본은 지형적 위험이 적어 대비가 부족했지만 앞으로 강화가 필요하다”라면서 “문화재는 전통 기법을 유지해야 하므로 내화 자재로 교체하기는 어려워서 물 공급·효과적 방수·피해 최소화가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기후변화로 재해는 늘어날 것이고, 사건 후 특별 예산으로 단기 대응하는 방식은 지속적이지 못하다"라면서 "문화재 방재를 사회적·교육적·공동체적 가치로 인식하고 사회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글·사진/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9-09

“책임감 무거운 ‘최연소 주임’ 영예 ‘포스코 명장’ 꿈 이룰 밑거름으로”

코크스 오븐 연소·유지 보수 담당하며 신기술 습득 ‘공정 개선’ 앞장 “세계적으로도 드문 ‘핫 아이들링’ 작업의 성공 완수는 큰 자부심” -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포스코 화성부 2코크스공장의 박우진 주임이다. 울산마이스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포스코에 입사했다. 학생 시절 포항제철소 현장 견학에서 “나도 이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품었고, 결국 입사했다. 현재는 2코크스공장 노체연소 파트에서 약 10년째 근무 중이며, 코크스 오븐의 유지·보수와 관리를 담당하고 있다. 입사 초기엔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배웠지만, 이제는 책임감을 갖고 후배들을 이끌며 함께 성장하고 있다. - 현재 코크스공장에서 맡고 있는 역할은? △나는 포스코 포항제철소 코크스공장에서 ‘문제 해결사’ 역할을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코크스 오븐의 연소와 유지·보수를 담당하는 ‘노체연소 파트’에서 일하고 있다. 코크스 오븐은 제철소 핵심 설비 중 하나로, 한 번 멈추거나 문제가 생기면 전체 생산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우리 파트에서는 오븐이 항상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가동되도록 설비를 정기 점검하고 상태를 꼼꼼히 모니터링하고 있다. 만약 이상이 발견되면 즉시 조치해 생산 차질을 최소화하는 것이 나의 핵심 업무다. 특히, 오븐 내부 내화벽돌이 고온에서 마모되거나 손상되면 세라믹 용접 등 특수 기술을 활용해 보수 작업을 진행한다. 이 때는 높은 집중력과 정확성, 협력사와의 긴밀한 협업이 필요하다. 결국, 나의 역할은 설비 이상을 사전에 예방하고, 발생 시 신속히 해결해 작업자들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현장에서 항상 긴장감을 갖고,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고 있다. - 새로운 시도나 개선으로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든 경험은? △현장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은 ‘핫 아이들링(Hot Idling)’ 작업이었다. 이는 코크스의 수급을 조절해야 할 때, 오븐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생산량을 줄이는 비상 운전 방식이다.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시도되는 고난이도 작업인데, 3개월에 걸쳐 이 작업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핫 아이들링은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자주 발생할 수 있는 작업이다. 그래서 동료들과 함께 밤낮없이 온도와 가스 흐름을 꼼꼼히 관리하며, 안정적인 오븐 운영이 되도록 협력했다. 이 과정에서 단순 설비 관리만이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 전체 시스템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고 팀워크의 가치를 실감했다. 덕분에 작업 후 오븐을 다시 원활하게 가동할 수 있었고, 이 경험은 팀원 모두에게 큰 자부심이 되었다. 이 일을 통해 “위기는 언제든 올 수 있지만, 철저한 준비와 협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앞으로도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고, 더 나은 변화를 만들어가고 싶다. - 최연소 주임으로서 느끼는 책임감이나 특별히 신경 쓰는 부분이 있는지? △27세 나이로 ‘최연소 주임’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현장에 투입됐다. 이 타이틀은 나에게 큰 자부심이자 동시에 무거운 책임감을 안겨줬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배들과 협력사 동료들에게 신뢰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스로를 더욱 엄격하게 관리하며, 항상 한 단계 더 성장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가장 신경 썼던 부분은 ‘안전’과 ‘소통’이다. 코크스 오븐은 제철소의 핵심 설비이기 때문에, 운전과 관리 모든 부분을 꼼꼼하게 살피며 관리해야 한다. 그래서 현장 상황을 더욱 세심하게 파악하고, 안전 수칙을 철저히 준수하며 일하고 있다. 또한, 연배가 높은 선배들과 원활하게 소통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역할이라 생각한다. 때로는 배우는 자세로, 때로는 책임 있는 관리자의 입장에서 의견을 나누며 서로 신뢰를 쌓아가고 있다. 젊은 세대인 만큼 새로운 기술이나 방식을 빠르게 습득할 수 있다는 점을 강점으로 삼아, 공정 개선과 혁신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도 ‘최연소 주임’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현장에서 신뢰받는 동료가 되고 싶다. - 예비 후배들에게 꼭 자랑하고 싶은 포스코의 장점은? △포스코의 가장 큰 강점은 단연 ‘사람 중심의 기업문화와 복지 제도’다. 단순히 일만 잘하는 회사가 아니라, 직원과 그 가족의 삶까지 세심하게 배려하는 다양한 제도가 잘 갖춰져 있다. 가장 와닿았던 복지는 ‘생애주기별 가족친화제도’다. 결혼, 임신, 출산, 육아 등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맞춤형 지원이 제공된다. 결혼축하금과 신혼여행지원금, 임신기 건강검진 지원, 출산휴가와 출산축하금, 육아휴직, 자녀 장학금 등 실질적인 복지 혜택이 체계적으로 마련되어 있다. 실제 최근 아내의 건강검진을 회사 지원으로 미리 챙길 수 있었고, 결혼축하금과 신혼여행지원금 같은 세심한 배려 덕분에 마음이 한결 놓였다. 회사가 직원뿐 아니라 가족까지 챙긴다는 사실을 크게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사내 문화와 여가 생활을 즐길 수 있는 기회도 많다. 콘서트, 연극, 강연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어 직원들이 재충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외에도 휴양 시설, 교육 지원, 자기계발 지원 등 폭넓은 복지 제도가 마련되어 있어 ‘직원들이 안정적으로 근무할 수 있는 회사’라는 확신을 준다. 포스코는 단순히 ‘철강업’이라는 이미지에 머무르지 않는다. 직원의 삶 전반을 든든하게 뒷받침해주는 회사라는 점에서, 후배들에게 꼭 자랑하고 싶은 특별한 직장이다. -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나 목표가 있다면? △가장 큰 목표는 언젠가 ‘포스코 명장’이 되는 것이다. 명장은 단순히 뛰어난 기술자가 아니라 오랜 경험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현장을 선도하고 후배들을 이끄는 존재다. 코크스 오븐의 관리와 유지보수는 오랜 경험과 노하우가 필요한 영역이기에, 매일의 경험이 나를 더욱 단단하게 성장시키고 있다. 앞으로는 개인의 성장에만 머무르지 않고, 후배들을 교육하고 이끌 수 있는 위치에 서고 싶다. 내가 걸어온 길이 좋은 길잡이가 되어, 후배들이 한 단계 더 성장한 숙련된 기술인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만약 ‘포스코 명장’이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을 얻게 된다면, 그 기쁨과 의미를 동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배우는 자세로 모두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코크스공장을 만들어가겠다. /김진홍경제에디터 kjh25@kbmaeil.com

2025-09-07

“무사고·무정지 스마트공정 실현 현장형 전문 인재로 성장하고파”

쇳물가공 주연료 ‘코크스’생산·방출된 에너지로 전기생산 업무 맡아 “협업·신뢰로 건강한 조직문화 구축, 모두다 성장할 환경조성 목표” - 자기소개를 해달라. △포스코 화성부 2코크스공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남영민 주임이다. 2015년 포스코에 입사해 올해로 10년 차다. 포항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지역과 국가 산업 발전을 이끄는 상징인 포스코를 자연스럽게 동경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 그리고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경영 철학은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닮아 있었다. 반세기 축적된 경험과 안정적인 시스템을 갖춘 기업에서 다양한 도전을 할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꼈고, 전문 기술인으로 성장하고자 입사했다. 현재는 유능한 선후배들과 함께 자부심을 가지고 현장을 지키며, 매일 새로운 각오로 업무에 임하고 있다. - 현재 포스코 포항제철소 코크스공장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내가 일하는 화성부는 철 생산 공정의 출발점이다. 화성부에서는 철 생산에 꼭 필요한 원료를 가공하고, 용광로에서 쇳물을 만들 때 주연료로 쓰이는 코크스를 생산한다. 코크스는 석탄을 높은 온도에서 가열해 만드는데, 철 품질을 결정짓는 데 아주 중요하다. 원료 품질을 꼼꼼히 관리하고, 생산 과정에서 나오는 부생가스를 정제하는 등 환경 관리에도 힘쓰고 있다. 나는 석탄을 가열해 코크스를 생산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 에너지를 활용해 전기와 증기를 만들어 에너지 절감에 이바지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또한 작업 일정 관리, 설비 점검, 문제 발생시 신속 대응도 한다. 사전에 설비를 철저히 점검하고, 일정을 체계적으로 관리해 생산에 차질이 없도록 노력하고 있다. 교대조 주임으로서 팀원들의 각자 역량에 맞는 업무와 역할을 분담한다. 경험 많은 직원에게는 설비 점검이나 문제 해결을, 신입사원에게는 기록 정리나 자료 관리 업무를 배정해 빠르게 적응하도록 돕고 있다. - 일하면서 가장 큰 성취감을 느꼈던 순간은? △입사 초기에는 30년 이상 근무한 선배들의 노하우에 의존해 업무를 익혀야 했다. 선배들의 경험과 기술을 빠르게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모든 설비의 특징과 조작법, 트러블 조치 방법 등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습관이 생겼다. 꾸준히 기록 정리하다 보니, 실제 상황에서도 원인과 결과를 신속히 파악해 업무 매뉴얼에 따라 대응할 수 있었다. 덕분에 후속 공정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었고, 동료들로부터 위기 상황에서 빠르고 차분하게 대응한다는 평가를 받았을 때 큰 보람을 느꼈다. 특히 2023년, 입사 8년 차에 주임으로 임명되는 영광을 얻었다. 당시 공장은 10년 차 미만의 신입사원이 많았고, 선배들의 정년퇴직으로 조직이 젊어지던 시기였다. 어린 나이에 주임을 맡으며 걱정과 설렘이 동시에 찾아왔고, 개인 역량만으로는 건강하고 효율적인 조직을 만들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래서 소통과 화합의 중요성을 더욱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공장 특성상 동료끼리 어울릴 기회가 적어 서먹한 분위기가 이어지곤 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간단한 다과회를 마련해 편하게 소통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그 결과, 구성원들 사이 유대감이 생기고 양보와 협업이 자연스러워지며 조직 분위기도 한층 밝아졌다. 작은 변화를 시도했을 뿐인데, 모두가 한마음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 설비보전산업기사, 용접산업기사 등 여러 자격증을 취득한 걸로 알고 있다. 이 자격증들이 현장에서 어떻게 도움이 되고 있는지, 본인만의 역량 강화 비결이 있다면? △자격증 취득 과정은 단순히 자격을 갖추는 것을 넘어, 실질적으로 역량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준비를 통해 설비의 작동 원리와 구조, 트러블 원인 진단과 조치 방법까지 체계적으로 익힐 수 있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설비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응할 자신감도 생겼다. 앞으로도 제선기능장, 에너지관리기사, 산업안전기사 등 자격증 취득을 통해 전문성을 강화하고, 현장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인재로 성장하고 싶다. - 국내 철강업계의 미래를 책임질 세대로서,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철강산업은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선배들이 쌓아온 실패와 성공의 경험이 고스란히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과 혁신이 공존하는 산업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를 토대로 다양한 변수와 트러블의 원인·해결책을 데이터화하고, 안전을 강화하는 것이 우리 세대의 핵심 과제라 본다. 앞으로 철강산업의 경쟁력은 설비 자동화와 데이터 기반의 예지 보전(Predictive Maintenance)에 달려 있다. 나는 풍부한 경험과 데이터를 결합해 무사고·무정지의 스마트 공정을 실현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 또한, 협업과 신뢰를 바탕으로 건강한 조직문화를 만들어, 모두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목표이다. - 후배 양성에도 관심이 많은 거로 알고 있다. 현장에서 후배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철강업계에 들어올 예비 철강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후배들의 열정적인 에너지에서 늘 자극을 받는다. 새로운 시각으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적극적으로 소통하라고 조언한다. 무엇보다 꿈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나 역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가 따라온다고 믿으며 살아왔고 실제로 대부분 좋은 성과를 얻었다. 각자의 강점을 돌아보고 이를 최대한 살려 성장하길 바란다. 또한 워라밸(Work-Life Balance)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가족을 위해 일하고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가족의 지지도 필요하다. 일과 가정은 모두 삶의 중요한 축이기에 균형 유지는 필수다. 예비 철강인 여러분도 자신의 꿈과 강점을 믿고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가길 바라며, 일과 삶의 균형도 꼭 지키길 응원한다. /김진홍경제에디터 kjh25@kbmaeil.com

2025-09-07

“맹아 발아해 살아났다”… 500여년 노거수가 남긴 이야기

볼품이랄까 몰골은 말이 아니지만, 경북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376-2번지 한 자리에 500여 년을 살아온 느티나무 노거수를 만났다. 성내리 마을은 조선시대 영해부(영덕, 영양, 울진)의 관아가 있던 유서 깊은 문향의 마을이다. 마을 주민의 보호 속에 느티나무 노거수는 원 줄기는 고사 되었지만, 다른 줄기가 길게 뻗어 담장에 몸을 걸치고 있었다. 수세는 매우 약해 보였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시멘트 담장으로 둘러쳐진 좁은 공간에 팽나무와 함께 나무의 신이 좌정한 당우와 갇혀 있다시피 했다. 영덕 성내리 노거수는 마을의 시간과 기억을 지탱하는 살아 있는 뿌리 신령스럽게 여겨 제사를 올렸으며, 나무는 그들의 기원을 묵묵히 품어 이런 자연의 경외는 학문을 숭상하고 의를 중시하는 정신으로 이어져 목은•신돌석 같은 위인의 정신적 바탕은 이 땅의 나무로부터 길러진 것 주민들이야 나무를 훼손하지 못하도록 높은 담장으로 접근을 막았다지만, 노거수는 햇볕과 바람, 뿌리에서 물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여 생육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었다. 앞으로 나무의 지속적인 성장과 건강을 위해서 통풍이 잘되도록 담장을 헐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해 본다. 담장 문에는 열쇠가 채워져 있어 들어가 자세히 볼 수 없었다. 다행히 성내리 마을 박광환 노인회장과 조청해 주민이 친절하게 사다리를 가져다주어 담장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나무 앞에는 제단과 노동신위(路東神位)란 비가 세워져 있었다. 박광환 노인회장은 정월 대보름날이면 온 마을이 이 나무 아래 모여 제사를 올리며 마을의 안녕과 기원의 소지를 태운다고 했다. 영해 향교에도 제사를 지내는 나무가 있다고 하면서 한번 가 보기를 권했다. 아내와 함께 그곳으로 발걸음 옮겼다. 영해 향교 주차장에 자동차를 세워 두고 몇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곳에 제당과 함께 느티나무와 향나무 노거수에 금줄이 쳐져 있었다. 나무 앞 안내판에 “영해 향교 내 이 자리는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이 지역에 파병 윤씨가 틀을 잡고 영해 박씨가 세를 누리며 살던 때부터 토속신에게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재사를 올리던 곳이다. 지금은 300여 세대의 보금자리로서 매년 정월 보름날의 전통 제례에 따라 마을 제사를 올리고 있다.”라고 하는 설명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고사한 느티나무에서 맹아가 발아하여 자라고 있는 나무의 주변에 목책을 둘러쳐서 보호하고 있었다. 이를 보면서 성내리 마을 주민은 노거수 보호의 지극함을 느꼈다. 한 마을에 두 곳의 나무를 당산목으로 제사를 지내는 곳도 그리 흔치 않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말에서 내려 걸어서 향교로 들어가라는 하마비(下馬碑) 돌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이는 겸손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아온 조선 선비의 품의가 돋보였다. 영해 향교에도 대문에는 열쇠가 채워져 있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 담장 안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마침 문화재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방문하는 바람에 함께 들어갈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언덕 위에 있는 영해향교 마당에서 또 다른 노거수와 마주했다. 바로 회화나무 두 그루다. 회화나무는 예로부터 선비의 기상과 학문적 이상을 상징하는 나무로, 선비나무, 학자수(學者樹)라고도 불렸다. 옛사람들은 회화나무를 집 안에 심으면 학문이 높은 인물이 나오고, 대문 앞에 심으면 잡귀가 드나들지 않는다고 믿었으며, 특히 양반가에서는 출세와 벼슬, 학덕을 상징하는 길상목으로 여겼다. 회화나무 가지마다 맑은 기품을 품고 서 있는 모습은 오래전 학문에 정진하던 선비들의 의연한 뒷모습을 닮았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들이 은은히 흔들려, 마치 경전의 장(章)이 바람에 읽히듯 속삭인다. 향교의 마루에 앉아 글을 읽던 선비들은 이 나무를 두고 “하늘의 지혜가 깃든 스승”이라 여겼을 것이다. 회화나무는 정신을 바로 세우는 묵언의 교사였다. 회화나무는 향교의 담장을 넘어 저 멀리 칠보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풍경이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곳에서는 동해의 바다를 볼 수 없지만, 칠보산 정상이라면 동해의 푸른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이다. 칠보산을 보면서 동해의 무한한 에너지를 생각했을 것이다. 요산요수( 樂山樂水)란 말이 있다. “이는 자연 풍광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길게 산다.”고하는 뜻이 품어 있는 말이다. 회화나무와 칠보산을 바라보면서 동해를 연상하게끔 하는 이 풍광은 선비들의 삶에 자연히 스며들지 않았나 싶다. 영해 향교는 고려 후기, 충목왕 1346년에 세워졌다. 수백 년 동안 책 읽는 소리와 향내가 흘렀다. 임진왜란의 불길에 소실되었다가, 다시 중건되고, 또다시 고쳐 세워지며, 마치 불사조처럼 살아온 건물이다. 이곳의 기둥들은 세월을 버텨낸 나무의 뼈처럼 우직하고, 회화나무는 그 역사를 곁에서 묵묵히 증언해 왔다. 나무를 경외시하는 영해 주민의 자연관을 보면서 그들의 삶이 보였다. 나무의 넉넉한 품은 주민들의 정신적 뿌리로 작용하여 이곳 출신의 사람들에게 삶의 지혜와 용기를 주지 않았나 싶다. 향교와 바로 이웃한 괴시리 전통 마을은 목은 이색 선생의 고향이다. 기와 담 골목마다 세월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2백 년, 3백 년을 견뎌낸 고택들이 흙담에 기대어 서 있다. 마을을 걸으면 시간의 속도가 느려지고, 선비들의 발자취가 돌길에서 소곤거린다. 목은 선생은 혼란의 고려 말에 학문의 불씨를 지켜낸 대학자이다. 정도전과 정몽주, 이성계에게 사상적 뿌리를 내리게 한 것도 바로 그의 학문이었다. 목은의 정신은 곧 새로운 나라 조선의 근간이 되었다. 또한 영해는 의병장 신돌석 장군을 낳은 고장이다. 평민 출신으로 의병을 일으켜 태백산 호랑이라 불리던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산맥을 넘어 퍼졌고, 그의 전술은 일본군조차 두려워했다. 끝내 배신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그 울분과 정의는 지금도 영해 땅의 바람 속에 살아 숨 쉰다. 성내리의 노거수는 마을의 시간과 기억을 지탱하는 살아 있는 뿌리다. 사람들은 나무를 신령스럽게 여기고 제사를 올렸으며, 나무는 그들의 기원을 묵묵히 품었다. 이런 자연의 경외는 학문을 숭상하고 의를 중시하는 정신으로 이어졌다. 목은 같은 대학자와 신돌석 같은 영웅이 태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의 정신적 바탕은 바로 이 땅의 나무로부터 길러진 것이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노거수 앞에 서면, 시간은 고요히 흐르고, 인간은 겸허해진다. 바람에 흔들리되 쓰러지지 않는 나무처럼, 우리도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한다. 노거수는 지금도 말을 걸어오는 현재의 존재다. 그것은 마을을 지켜온 뿌리이자, 사람을 길러낸 품이며, 역사를 이어온 숨결이다. 영해의 노거수와 향교, 그리고 그 땅에서 태어난 이들이 남긴 정신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한 그루의 노거수처럼 묵직한 울림으로 서 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신돌석 장군은... ---------------------------------------------------------------------------- 신돌석 장군(申乭石, 1878~1908)은 경북 영덕 출신으로, 평민 신분에서 항일 의병장이 된 인물이다. 본명은 신태호이나 어린 시절 이름인 ‘돌석’으로 불렸다. 1896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분노한 그는 100여 명의 동지를 모아 의병 활동을 시작했고, 1906년 을사늑약 이후 본격적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일본군과 관군을 공격했다. 의병은 최대 3천 명에 달했으며, 울진·삼척 등 동해안 일대에서 기습과 유격전을 펼치며 일본군을 크게 괴롭혔다. 일본군은 그를 ‘태백산 호랑이’라 불렀다. 그러나 1908년, 배신한 옛 부하의 손에 독살당하며 짧은 생을 마쳤다. 비록 활동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신분을 넘어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며 항일의 상징으로 기억되는 독보적 인물이다. 영해에 신돌석 장군의 기념 공원이 있다.

2025-09-03

천년의 숲에서 만나는 쉼

■경북 제1호 지방정원 사람을 쉬게 하는 건 그늘이다. 그늘을 내리는 건 나무다. 수많은 여름 길 위에서, 여름 땡볕 아래서 알게 되었다. 답사는 단지 보는 일이 아니다. 걷고, 멈추고, 그 안에 자신을 비우는 일이다. 그 일을 온전히 할 수 있는 곳에는 나무가 있었다. 바람이 흐르고, 고요가 깃든 숲이 있었다. 천년의 숲 정원은 역시 그런 장소다. 몸이 먼저 쉬고, 마음이 따라 멈추는 곳. 천년의 숲 정원은 동남산 자락, 메타세쿼이아 숲 사이로 이어진 정원이다. 이름부터 남다르지 않은가. ‘경상북도 지방정원 천년의 숲 정원’. 2022년 6월, 경북 제1호 지방정원이 되었고, 전국에서 여섯 번째로 지정된 대형 숲 정원이다. 행정도시 한편에 마련된 인공 정원이 아닌, 오래된 숲을 따라 조성된 살아 있는 공간이다. 숲의 바람은 깊고 부드럽다. 천년의 숲 정원은 단지 나무만 드리운 장소가 아니다. 사계절을 품은 식물들이 꽃을 피우고 지는 사이, 숲은 계절을 전한다. 경북의 제1호 지방정원이자 전국 여섯 번째 대형 숲 정원 동남산 자락 32.8ha 규모… 9개 주제로 다채롭게 펼쳐져 계절을 품은 다양한 식물들이 꽃 피우고 지며 사계절 전해 바람에 실린 물소리와 아이들 웃음… 선계에 온 듯한 기분 ■종합안내도로 먼저 읽는 숲 정원 입구에 설치된 종합안내도를 먼저 짚고 가야 할 것이다. 하나의 거대한 숲에 각각의 특색을 갖춘 작은 정원들이 마련되어 있다. 각각의 이름은 곧 정원의 성격이 되고, 성격을 읽다 보면 곧 숲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나무 아래 있으면 시간도 함께 눕는다. 천년의 숲 정원은 32.8ha 규모로, 사계절정원과 꽃보라정원, 미르정원 등 9개의 주제 정원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정원은 단순히 나무와 꽃을 모아놓은 곳이 아니라, 살아 있는 풍경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안내도에는 각각의 길목에 숲의 성격과 정원의 이름이 그려져 있다. 물이 흐르는 곳엔 생태연못이 있고, 숲이 깊어지는 곳엔 무궁화정원과 전통정원이 숨어 있다. ■누구나 풍경이 되는 외나무다리 사람들은 사진을 찍기도 하고, 종이 팸플릿을 들고 천천히 걷기도 한다. 처음 만나는 길은 세상의 둔탁한 길과 숲 사이를 잇는다. 입구를 지나 정원 안으로 몇 걸음 들어서자, 아치형 돌다리가 보인다. 돌다리 너머로 곧게 뻗은 길을 따라 나무들이 나란히 서 있다. 흠잡을 데 없이 쭉 뻗은 길은 시원함마저 선사한다. 작은 개울 위에 다소곳이 놓인 돌다리는 흙길과 숲 사이를 잇는 첫 번째 통로다. 바닥은 물기 없이 말랐어도 짙은 나무 그늘은 큰 위로가 된다. 무심코 건너려던 찰나, 갑자기 눈앞이 환하게 트인다. 숲의 결이 단숨에 드러난다. 돌다리 아래 길게 뻗은 개울은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일직선으로 흐르는 물길은 곧고 맑다. 개울 양옆으로 나무들이 서 있다. 나무들은 흐르지 않는다. 대신 하늘을 찌를 듯 자라며 시간을 쌓는다. 나무 사이사이로 햇살이 내리고, 바람은 길게 불어간다. 숲과 숲이 마주 보는 개울 어디쯤 외나무다리 하나가 누워 있다. 개울을 중심으로 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마치 오래전부터 자리를 지켜온 것처럼. 어느 하나 흐트러짐 없이 곧고 빼곡하다. 그러나 하나의 나무는 개울을 가로지르며 이쪽과 저쪽, 두 숲을 잇는다. 서 있는 나무들이 하늘과 대화한다면, 누운 나무는 땅과 물 그리고 사람을 품는다. 자신을 밟고 누구든 건너게 한다. 외나무다리는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단절된 숲을 부드럽게 이어준다. 개울, 나무, 외나무다리가 서로 맞물려 만든 풍경은 현실의 결을 벗어난다. 순간, 발밑의 흙도 하늘도 모두 아지랑이에 잠긴 듯 울렁거린다. 초록빛이 겹겹이 눈앞을 감싸고, 낮과 밤, 땅과 허공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혼몽한 감각 속, 풍경은 시각이 아닌 감각의 결로 스며든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젖어드는 몽환의 숲 말이다. 초록은 단지 색이 아닌 숨결처럼 피어오르며 현실의 감각은 서서히 멀어진다. 숲길을 걷고 있지만, 허공을 걷는 느낌처럼 가볍다. 어디선가 초록의 요정이 따라오는 것 같다. 나무 사이로 비현실의 기운이 일렁이고, 나무 하나가 하품하며 문득 걸어 나와 말을 걸 것 같다. 물소리는 주문처럼 흐르고, 바람은 또 다른 속 사귐처럼 들린다. 눈을 감고 뜨는 사이, 어딘가 묘하고 낯선 세계로 이어지는 문이 열릴 것 같다. 숲은 나를 부드럽게 혼몽의 가장자리로 이끈다. 넋을 놓고 한참을 바라본다. 외나무다리 위에 선 사람과 물 위에 비친 사람의 실루엣은 바람 따라 흐트러졌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그림자는 풍경 속 또 하나의 선이 되고, 움직임 없는 울림으로 번진다. 나는 카메라를 들지 않는다. 셔터 소리조차 정적을 깨뜨릴까 조심스럽다. 바라만 보아도 머리끝까지 환하게 밝아지고 맑아진다. 숲은 그늘이 아니라 빛이다. 나무들이 햇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햇살을 이끄는 거다. ■마음 끌리는 대로 걷는 여러 개의 정원 무궁화 길은 길게 이어진 절정의 무대다. 흰색, 분홍빛, 연보라 꽃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나란히 나란히 나아간다. 벌들이 왕왕대며 꽃 사이를 분주히 옮겨 다닌다. 작은 날갯짓이 떨림처럼 느껴지고, 그 진동이 공기를 따라 퍼져나간다. 벌들의 왕왕거림은 흡사 어떤 언어처럼 들린다. 무궁화는 피어 가만가만하고, 벌은 피어 있는 시간의 중심을 장악한다. 꽃보라정원에는 자줏빛 에키네시아가 촘촘히 피어 있다. 중심이 짙고 가장자리가 연한 꽃잎들은 불꽃처럼 퍼지고, 정원의 숨결을 물들인다. 나비 한 마리가 꽃 위에 내려앉는다. 이 정원은 향과 빛, 그리고 고요의 흐름이 겹쳐진 꿈같은 공간이다. 사계절정원은 계절을 담은 시간의 병풍 같다. 봄의 잔잔한 화사함과 여름의 생동이 맞닿아 꿈틀댄다. 마치 계절끼리 바통을 주고받듯 색을 물려준다. 꽃들의 배열은 의도되지 않은 질서처럼 자연스럽고 자유롭다. 한 걸음마다 계절이 바뀌고, 두 걸음마다 향이 바뀐다. 계절을 건너는 숲속의 작은 환상이 펼쳐지듯 아름답다. 미르정원은 작은 언덕을 중심으로 원을 그린다. 곡선은 마치 우주의 축선처럼 부드럽고 정확하다. 물길이 중심을 따라 흐르고, 바람은 둥글게 돌아 나간다. 발아래 그림자마저 곡선을 따라 흘러간다. 미르정원은 중심이 아니라 흐름에서 완성된다. 걸으면 걸을수록 안쪽으로 들어가고, 그 끝은 다시 출발점이 된다. 암석원에는 거칠고 단단한 에너지가 솟구친다. 물결처럼 배치된 암석에서 자연의 오래된 기도문이 읽힌다. 돌 사이사이로 자라는 식물들이 바위의 숨을 이어간다. 무언가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침묵의 식물 정원이다. 그 안에서 모든 경계는 희미해지고, 생명은 느리게 이어진다. 수변정원은 물을 품은 세계다. 정원 둘레를 따라 흐르는 물줄기 위로 햇빛이 부서지고, 물풀과 수생식물이 서로 얽힌다. 바람은 물 위에서 한층 더 가볍게 흘러간다. 물소리는 말보다 깊고, 리듬보다 자유롭다. 수면 위에 떠 있는 부레옥잠은 마치 시간을 잊은 것처럼 고요하다. 왕의 정원은 단정하고 절제되어 있다. 잘 다듬어진 수목과 포석, 그리고 조용히 선 돌 하나까지도 품위가 있다. 이곳의 침묵은 권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깊은 통찰처럼 다가온다. 지나가는 바람조차 자세를 낮추는 듯, 정원은 스스로의 무게로 자리를 지킨다. 천년의 미소원은 가벼운 입꼬리처럼 휘어진 오솔길을 따라 펼쳐진다. 꽃과 풀, 나무가 서로의 거리를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친밀하다. 이름 덕분일까. 모든 것이 웃고 있는 듯하다. 풍경이 조용히 인사하고, 나무가 작은 농담을 건네는 듯한 느낌. 발길이 부드러워지는 정원이다. 5산 3물길은 천년의 숲 정원의 골격이다. 다섯 개의 숲 언덕과 세 개의 물길이 교차하며 숲의 숨결과 언어와 품격을 결정한다. 각각의 산은 거대한 힘차게 솟아 있고, 물은 그 사이를 잇는 실처럼 흘러간다. 직접 걸어야만 이해되는 지도 같다. ■시간과 그늘의 여운 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린다. 연둣빛 옷과 모자를 쓴 작은 존재들이 나무 사이를 종종거리며 걷는다. ‘아···.’ 숲 어디에서부터 따라온 요정 같다. 바람 끝에 실린 물소리와 나뭇잎의 떨림, 아이들의 웃음이 겹쳐져 현실의 가장자리처럼 느껴진다. 빛은 공기 중에 머물고, 모든 것이 조금 떠 있는 듯한, 묘한 선계의 문턱에 서 있는 기분이다. 숲은 마지막까지 무언가를 건네려 애쓰지 않는다. 다만 오래된 쉼 하나를 내어, 나를 조용히 불러 세운다. 나무 아래 흘러간 시간이 그늘이 되고, 그늘이 다시 나아갈 용기가 된다. 걷고, 바라보고, 멈춘 모든 순간이 어느새 내 안의 풍경이 된다. 천년의 숲은 단지 꽃과 나무를 품은 정원이 아니다. 이 숲에는 사람이 있고, 쉼이 있고, 오래 기억될 여운이 있다. 발걸음을 떼어 돌아 나와서도 한참 거기 남은 듯한, 그런 여운으로 숲은 내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끝>

2025-09-03

짜장면은 음식이 아닌 ‘추억’

50대를 넘긴 사람들에게 짜장면은 음식이 아니다. 추억이다. 졸업식이나 입학식이 있던 날. 1500원짜리 꽃다발을 들고 학교를 찾아온 엄마가 사주던 500원짜리 짜장면. 그날의 기억은 언제 떠올려도 애틋하고 훈훈하다. 고소한 냄새까지 고스란히 소환된다. 짜장면은 양파와 감자 등 채소와 돼지고기를 춘장과 함께 볶아 굵은 면발 국수에 올려 먹는 한국화된 중국 요리다. 물과 녹말가루를 넣지 않고 재료를 볶아낸 간짜장, 여러 가지 해물을 더한 삼선짜장, 고기와 채소를 잘게 다져 소스를 만든 유니짜장 등이 모두 우리에게 익숙한 메뉴. 대중가요 노랫말에도 등장하고, 영화나 TV 드라마에서도 무시로 볼 수 있는 짜장면은 그 유래가 어디에 있는지를 두고 아직도 논쟁 중이다. 다만, 19세기 후반 중국 산둥에서 하역 작업을 위해 인천으로 건너온 노동자들이 춘장에 국수를 비벼먹는 걸 보고 만들게 됐다는 게 유력한 가설. 중국과 일본 요리는 물론 유럽 요리, 미국식 스테이크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됐지만, 짜장면은 아직도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외식 메뉴 가운데 하나다. 앞서도 말했지만 중년 이상의 세대에게 짜장면은 음식이 아닌 추억이므로. 1960년대 20~30원이던 짜장면은 1970년대 중반엔 200~250원으로 가격이 올랐고, 현재는 7000원 안팎을 지불해야 먹을 수 있다. 트러플 등 귀한 재료를 넣어 호텔 중식당에서 판매하는 짜장면은 5만원도 넘는다고.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9-02

이젠 맛볼 수 없는 ‘청송 마법사’의 짜장면

아래 기사는 본지 홍성식 기자가 한국기자협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연재하고 있는 ‘역사와 스토리가 있는 영남 음식’을 일부 수정·보완한 것이다./편집자 주 얼핏 봐도 여든 안팎의 노인이다. 머리숱은 성글고, 눈가엔 자글자글 주름이, 팔뚝엔 검버섯이 점점이 피었으니. 여름이었고 날씨는 뜨거웠다. 커다란 솥이 김을 뿜어대는 주방은 더 더웠을 터. 그래도, 이 영감님 “타앙~ 탕~” 수타면을 연신 치대면서 웃는다. 그 웃음, 썩 보기 좋았다. 짜장면을 포함해 중국요리에 관해서라면 누구보다 해박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선배가 주방에 들리도록 큰소리로 물었다. “128가닥인가요?” 면을 치다 말고 힐끗 홀 쪽을 돌아본 영감님의 대답은 짧았다. 역시 웃는 낯이다. “256가닥이오.” 사실 짜장면(‘자장면’이라 쓰면 이상하게 맛없게 느껴진다)을 ‘영남의 요리’라 부르기엔 무엇하다. 그러나, 이건 짜장면 이야기가 아니다. 경상북도 청송군에 살았던 ‘마법사’에 관한 전설 혹은, 설화니까 감안하고 읽어주시길. 네다섯 해 전이다. 일로 찾은 청송에서 지인을 통해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 읍내에 짜장면, 짬뽕, 탕수육 정도만을 만들어내는 단출한 식당이 하나 있는데, 청송군수와 청송경찰서장은 거길 못 간단다. 당연한 질문이 던져졌다. “왜요?” 사연은 이랬다. 한 노부부가 청송에서만 40년 가까이 중국집을 운영했다. 종업원 없이 남편은 주방을 책임지고, 아내는 홀 서빙을 맡았다. 맛있는 집은 금방 입소문이 난다. 동네 사람들만으로도 식당이 미어터졌다. 군수건 경찰서장이건, 아니 대통령이라도 왜 맛있는 짜장면이 먹고 싶지 않겠는가? 짜장면은 누구에게나 유년의 추억을 소환하는 마법 같은 음식이니까. 군수는 군청의 국과장 몇 대동하고, 경찰서장은 부하직원 두엇 거느리고 짜장면 먹으러 갔겠지. 근데, 이 식당 주인 할머니 성격이 보통 아니다. 바쁠 때는 누구도 말을 붙이기가 어렵단다. 타지에서 온 손님은 “카드 결제가 되니, 안 되니”로 다투기 싫어 아예 받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고. 그런 할머니가 군수나 서장 앞이라고 말을 참을 리 없다. “당신이 오면 직원들이 편하게 밥을 못 먹으니 앞으론 우리 집에 오지 말아요.” 이런 공포담(?)을 듣고 찾아가 식당 테이블에 앉으니 살짝 겁이 났다. 내 돈 주고 점심 먹으면서 타박이라도 들을까봐. 그런데, 기우(杞憂)였다. 식당 메뉴의 전부인 짜장면, 짬뽕, 탕수육을 각각 하나씩 주문하고, 고량주 한 병까지 청했다. “지금은 바빠서 탕수육은 안 돼.” 퉁명스레 말하면서도 잠시 후 고량주와 함께 갓 볶은 짜장소스를 조그만 그릇에 담아내 왔다. ‘강술 마시지 말고 이걸로 안주 해’라는 뜻이었겠지. 오버하는 친절보단 외려 말없는 그 배려가 더 좋았다. 영감님은 수타 경력이 56년이라고 했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다. 10대 후반에 중국집 주방에 들어가 거기서 잔뼈가 굵고, 거기서 결혼을 하고, 거기서 자식을 낳아 길렀다. 그리고, 고단하게 병든 몸이 남았다. 그럼에도 동그란 얼굴을 떠나지 않는 저 미소는 뭐지? 커다란 나무 도마에 밀가루 반죽을 종일 치대야 하는 수타는 중노동 중의 중노동이다. 20~30년쯤 하면 짜장면·짬뽕 팔아 버는 돈보다 병원 물리치료비와 한의원 침값이 더 든다고 한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크게 없었을 영감님은 오롯이 자신의 정직한 노동만으로 식구를 부양했을 터. 힘겹지만 고귀한 행위였음을 재론할 필요가 있을까? 희미하고도 선명한 미소는 지난한 56년 노동을 견디게 해준 영감님만의 진통제나 마취제가 아니었을지. 첫 방문 뒤 1년쯤 지났을 때 경북 영주시에 출장갔다가 일부러 길을 돌아 한 번 더 ‘마법 같은 짜장면’을 먹으러 그 식당에 갔다. 영감님은 물론, 나를 기억하는 할머니의 웃음까지 볼 수 있었으니 행운이었다. 그날은 탕수육도 주문해 맛봤고, “사위가 새 냉장고를 사줬다”는 할머니의 자랑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속으로 빌었다. ‘청송 256가닥 짜장면의 마법’이 오래 계속되기를. 지난달. 이 글을 쓰기 위해 청송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를 통해 비보(悲報)를 들어야했다. “그 식당 3년 전에 문 닫았어요.” 다행히 영감님과 할머니 모두 돌아가시진 않았다고 했다. 아마도 종일 수타면을 치고, 몰려드는 손님들 음식을 가져다 줄 기력이 모두 소진했기에 폐업을 선택했겠지. 누구에게나 세월이란 그런 것이므로. 그럼에도 아쉬움이 커 전화를 끊고는 이런 혼잣말을 했다. “256가닥 청송의 마법이 사라졌구나. 이젠 돌이킬 수도 없겠구나.‘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9-02

“새해 첫날 7.6 강진… 전국서 문화재 구조대 3900명 달려와”

태풍, 홍수, 산불 등의 재난은 지자체 단위로 되풀이되지만, ‘재난지역 선포’와 같은 사후 조치에 집중됐다. 사전 예방 차원의 체계적 방재 시스템이 자리 잡지 못한 것이다. 이번 기획은 지자체 실정에 맞는 문화유산 방재 시스템을 구축 필요성을 제시하고, 농어촌 곳곳의 소중한 유산을 어떻게 지켜낼지를 탐구한다. 고령화 등으로 재난에 더 취약해진 자연 속 국가 유산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한국형(K)-문화유산 방재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마련해야 하는데, 일본의 경험을 토대로 경북은 물론, 전국 차원의 정책 수립에 필요한 시사점을 제공할 예정이다. 노토반도 강타 600여명 숨지고 등록된 문화재만 460여건 피해 현장 투입 전문가•자원 봉사자 불상•고문서 등 200여건 구출 1월 26일은 ‘문화재 방재의 날’ 전국 사찰•성곽 소방훈련 시행 <글 싣는 순서> 1. 산불 등 재난에 취약한 국내의 문화유산 2. 실제 재난으로 소실된 지역별 문화유산 3. 일본의 문화재 방재 연구기관 경험 4. 일본의 문화재 방재 정책 성공 사례 5. 한국형(K)-문화재 방재 정책의 방향성 ◇ 무너지는 돌담 앞에서 7월의 교토, 한여름 특유의 습한 바람이 국제회의장 문틈을 타고 들어왔다. 리쓰메이칸대 국제회의장은 한국과 중국, 일본 3개국의 학자와 관계자들로 가득했다. 제19회 문화유산과 역사 도시 재해 저감 심포지엄이 막을 올린 7월 12일 회의장의 분위기는 무겁고 진지했다. 불과 반년 전 일본 열도를 뒤흔든 노토반도 지진의 상흔이 여전히 생생했기 때문이다. 참석자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일본 발표자들에게 향했다. 피해를 겪은 당사자의 목소리가 앞으로 다가올 재난에 어떻게 대비할지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다고 생각해서였을까. 가장 먼저 연단에 선 이는 요시토미 신타 리쓰메이칸대 역사도시방재연구소 교수였다. 회색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문화재는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기억"이라면서 "그러나 최근 재해의 빈도가 높아지며 이 기억을 잃을 위험은 점점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회의장은 고요해졌다. 이어폰을 꽂은 통역사들의 속삭임만이 흘러나왔다. 참가자들은 눈을 내리깔고 메모지에 빠르게 펜을 움직였고, 누군가는 화면에 떠오른 피해 사진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무너진 기와, 무더기로 쌓인 석재, 불에 그을린 목조 건물이 빔프로젝터에 비쳤다. 요시토미 교수의 발언은 경고이자 선언이었다. 일본은 수십 년간 방재 연구기관을 세우고 문화재 보호 시스템을 구축해왔지만, 최근 기후변화와 연쇄 재난 앞에서는 여전히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노토반도 지진의 교훈 이날 가장 주목받은 발표자는 하라다 이시카와현 교육위원회 문화재과장이었다. 그는 단상에 올라 목례를 한 뒤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를 시작했다. “새해 첫날, 진도 7.6의 강진이 노토반도를 강타했다. 사망자는 600명을 넘었고 전파된 주택만 6000여 동에 달했다”. 그는 스크린에 띄운 슬라이드를 가리키며 “한겨울 단수와 정전 속에서 주민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흩어지고 버려지는 문화재를 볼 때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지진은 문화재에도 직격탄을 날렸다. 발굴 현장은 무너지고 옛 사찰의 불상은 기둥에 깔려 부서졌다. 이시카와현에 등록된 문화재는 국·현 지정만 881건, 시·정촌 지정까지 합하면 2400건이 넘는데, 무려 460여 건이 피해를 입었다. 돌담이 갈라지고, 목조 건물은 반쯤 주저앉았으며 수백 년 된 고문서는 빗물에 젖어 갈기갈기 찢어졌다. 하라다 과장은 "지진 발생 일주일이 지나도록 피해 규모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주민은 차 안에서 추위를 견뎌야 했고 그 와중에 문화재는 폐기 위기에 내몰렸다”라면서 당시의 긴박함을 회상했다. 이때 투입된 것이 ‘문화재 구조대’였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전문가와 자원봉사자 3900여 명이 피해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들은 무너진 집터에서 불상과 고문서를 꺼내 임시 보관소로 옮겼다. 구출된 건수만 200여 건. 박물관, 지자체, 연구자들이 함께 나선 전례 없는 협력의 장이었다. 하라다 과장은 자부심을 드러내면서도 직면한 한계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응급조치는 무료로 시행했지만, 본격 수리에 들어가게 되면 소유자의 부담이 크다. 생활 재건이 우선인 상황에서 문화재 복구는 늘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미등록 문화재 문제도 이야기했다. 등록 절차가 길어 피해가 나도 지원이 닿지 않는 경우가 많고, 앞으로는 지정·등록을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청중석의 참석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화재는 공공재이면서도 사유재산인 경우가 많아 보호와 소유의 경계가 늘 고민거리였다. ◇ 연구소에서 현장까지 일본의 문화재방재 정책은 1950년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에 뿌리를 두고 있다.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면 소유자와 지자체는 반드시 방재계획을 수립해야 하며 문화청은 내진 보강과 방화 시설 구축에 재정 지원을 한다. 리쓰메이칸대 역사도시방재연구소는 그 정책을 연구와 현장으로 연결하는 중추 역할을 맡고 있다. 한신·아와지 대지진의 충격을 교훈 삼아 2003년 설립한 이 연구소는 교토라는 역사 도시를 기반으로 전통 건축물의 내진 보강 기술, 시민 방재 훈련, ICT 활용 아카이브 구축 등 다양한 실험을 해왔다. 요시토미 교수는 특히 ‘시민 참여’를 강조한다. 매년 1월 26일은 일본의 ‘문화재 방재의 날’. 이날은 전국 사찰과 성곽에서 일제히 소방 훈련이 시행된다. 불을 피운 모의 훈련에서 주민들이 소화기를 들고 뛰어드는 모습은 이제 교토의 흔한 풍경이 됐다. 교토의 전통 가옥 밀집 지역에서는 ‘시민 소화전’도 설치됐다. 2024년 1월, 교토 니넨자카에서 발생한 화재가 대형 참사로 번지지 않은 것도 이 장비 덕분이었다. 주민이 직접 물을 뿌려 불길을 초기에 잡은 것이다. 일본은 문화재를 디지털로 보존하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3D 스캔과 드론 촬영으로 기록을 남기고, 지진 위험 지역 문화재의 위치를 디지털 대장으로 관리한다. 노토반도 지진 때도 이러한 데이터가 신속한 대응에 큰 힘이 됐다. 교토 심포지엄은 화려한 선언의 자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재난을 겪은 도시가 흘린 눈물과 땀을 나누는 자리였다. 일본은 노토반도 지진을 계기로 문화재 구조대라는 혁신을 세웠고 국가·지자체·연구기관·주민이 함께하는 방재 체계를 다져왔다. 그러나 미등록 문화재의 사각지대와 소유자 부담 문제는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이번 심포지엄과 인터뷰는 분명한 메시지를 남겼다. 문화재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사회의 기억이며 미래 세대에 전해야 할 자산이라는 점이다. 일본의 경험은 한국에도 중요한 울림을 준다. 방재 없는 보존은 허상이고, 기억을 지키는 일은 국경을 넘어선 공동의 과제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글·사진/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9-02

대구 치과계 ‘국립치의학연구원’ 유치 한 목소리

대구 치과계가 국립치의학연구원 유치를 위해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작년 12월 연구원 설립의 근거가 되는 법률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으며, 보건복지부는 현재 타당성 조사와 기본계획 수립 용역을 진행 중이다. 다음 달 ‘국립치의학연구원 설립 타당성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 용역 결과가 발표될 예정이며, 정부는 올해 말까지 후보지와 공모 방식을 확정할 계획이다. 전국 치과 산업의 90% 이상이 집적된 대구는 기공·위생·의료기기 전 분야가 맞물린 융합 생태계를 갖추고 있다. 연구원이 설립되면 중복 투자를 줄이고 신기술 상용화를 촉진하는 효율적 체계를 마련하는 동시에,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는 국가 균형발전 모델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치과계가 한목소리를 내는 배경은 바로 이러한 구조적 당위성에 있다./편집자주 일자리 없어 떠나는 ‘우수 인재’ 연구•개발 기회의 장 넓혀줘야 정보석 대구치과의료기기산업협회장 정보석<사진> 대구치과의료기기산업협회장이 “국립치의학연구원이 대구에 설립돼야 지역의 심각한 인재 유출 문제를 막고 산업과 연구가 함께 성장할 수 있다”며 연구원 유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최근 대구 중구 아시아덴탈 사무실에서 만난 정 협회장은 “대구는 이미 임플란트와 치과기기 생산에서 국내 최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연구원 설립의 최적지”라고 말했다. 현재 대구치과의료기기산업협회는 제조업체, 수입업체, 도소매 업체가 함께 참여하는 지역 치과 산업의 대표 조직으로, 산업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정 협회장은 18대 집행부에서 활동한 뒤 올해 19대 회장으로 연임하며 약 3년째 협회를 이끌고 있다. 그는 “사업이사, 부회장 등을 오래 맡아 협회 운영을 가까이서 경험했기에 현안과 과제를 잘 알고 있다”며 “책임감과 무게를 크게 느끼지만, 지역 치과 산업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포부를 전했다. 협회 운영에서 가장 힘든 점으로는 전시회 유치를 꼽았다. 덴티스 등 굵직한 기업 뿐아니라 성장잠재력 큰 中企와도 시너지 세계적 치과산업 전시회 개최 등 국가경쟁력 강화 입지 구축해야 정 회장은 “대구·경북에도 치과 산업 기반이 튼튼하지만, 지역이라 세계적인 치과 산업 전시회 유치가 어렵다”면서 “독일 쾰른 같은 작은 도시가 세계 최대 전시회를 여는 것을 보면, 대구도 치과 산업 중심지로서 충분히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치과의료기기 인허가 제도와 규제 개선도 현안으로 꼽았다. 그는 “고등급 의료기기는 인허가 절차가 까다롭고 비용 부담도 크다”며 “연구원과 협력해 기술 검증과 지원 체계가 마련된다면 기업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정 회장은 대구의 치과 산업 현황과 국립연구원 유치의 필요성을 연결 지으며 “대구는 덴티스, 메가젠, 세양, 세신 등 굵직한 기업뿐 아니라 성장 잠재력이 큰 중소업체도 많다. 연구원이 설립되면 이들과 유기적으로 협력하면서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며 “무엇보다도 수도권으로 빠져나가는 청년 인재들을 붙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또 “대구·경북 지역은 경북대·영남대·계명대 등 이공계 학과와 치과 관련 학과가 밀집해 있음에도, 졸업생들이 지역 내 일자리를 찾지 못해 수도권으로 향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연구원이 설립되면 지역 기업과 연결된 연구·개발 기회가 확대돼 인재들이 지역에 머무를 수 있고, 외부 우수 인력까지 유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대구는 국내 임플란트 생산액의 20% 이상을 차지하고, 연간 수출 규모도 수천억 원에 달한다”며 “대구가 이미 국가 치과 산업의 중심지라는 점은 통계로 입증된다. 연구원 설립은 지역의 이익을 넘어 국가 경쟁력 강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마지막으로 정 회장은 “대구가 세계적인 치과 산업 전시회를 주도할 수 있는 도시로 성장하길 바란다”며 “중장기적으로는 창의적인 기술 개발이 절실하다. 연구원이 그 허브가 된다면 대구 치과 산업은 세계 시장에서 더욱 확고한 입지를 가질 것”이라고 재차 필요성을 밝혔다. AI접목 디지털 덴탈 헬스케어 등 미래분야 주도적 참여 길 열릴 것 오미정 대구·경북치과위생사협회장 오미정<사진> 대한치과위생사협회 대구·경북회장이 “국립치의학연구원이 대구로 유치되면 치과위생사와 학생들이 지역에서 전문성과 진로 기회를 넓힐 수 있는 결정적 기반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오 회장은 현재 두 번째 임기 중반부를 이끌고 있다. 그가 중점적으로 추진한 사업 가운데 하나는 ‘노인·장애인 전문 치과위생사 제도’다. 내년 3월부터 시행되는 통합돌봄 정책에 발맞춰 대구에서는 전국 최초로 수도권 외 지역에서 해당 양성과정을 대구보건대학교에서 개설한 만큼 제도에 대한 관심도가 높다. 오 회장은 “요양기관에서의 실습까지 포함된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치과위생사들의 전문성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며 “지역에서도 충분히 수준 높은 교육과정을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오 회장은 지역에서 이뤄지는 교육과 연구 기회에 대해서는 불균형 문제가 심각한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대구·경북에도 치위생학과가 있는 대학이 14곳이나 되지만, 전문 교육과 연구 기회는 여전히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면서 “배우고 싶어도 서울로 가야 하고, 교통비가 교육비보다 더 많이 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석·박사 과정, 전문 자격 과정 등 고급 교육 기회를 지역에서 확보하지 못한다면 인재는 계속 수도권으로 유출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지역대 치위생학과 14곳 되지만 전문교육·연구기회 수도권 집중 산학협력 프로젝트 등 참여 기회 커리큘럼 표준화 등 전문성 키워 문제의 해법으로는 국립치의학연구원 대구 유치를 꼽았다. 오 회장은 “연구원이 설립되면 지역 대학의 커리큘럼을 표준화하고, 산학협력 프로젝트를 통해 학생들이 직접 연구와 실습에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면서 “치과위생사뿐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도 커다란 기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대구에는 임플란트 기업과 치과 의료기기 업체가 밀집돼 있다. 연구원이 설립된다면 치과 산업, 대학, 연구 인력이 긴밀히 연결돼 폭발적인 시너지를 낼 수 있다”며 “AI와 빅데이터를 접목한 디지털 덴탈 헬스케어 같은 미래 분야에서도 치과위생사가 주도적으로 참여할 길이 열릴 것”이라고 판단했다. 협회의 단합력 역시 강점으로 내세웠다. 그는 “대구·경북 치위생사협회는 회원과 학생, 교수들이 힘을 합쳐 활동한다. 디덱스(DIDEX) 봉사단만 해도 100명 넘는 학생들이 참여하고, 14개 대학 중 10곳 이상이 협력한다”며 “학생과 현장이 함께 움직이는 구조가 갖춰져 있어 치과의사 단체도 자연스럽게 협력하게 된다”고 했다. 특히 연구원 설립이 예방과 돌봄 분야에서 치과위생사의 역할을 확장할 수 있는 발판임을 역설했다. 오 회장은 “노인의 구강 관리가 치매 예방이나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연구들은 대부분 치과위생사가 주도해왔다”면서 “치과의사가 임상과 치료에 집중한다면, 치과위생사는 구강보건과 예방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다. 연구원은 이 전문성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치과위생사가 단순 보조자가 아니라 국민 구강건강을 지키는 전문직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며 “국립치의학연구원 대구 유치는 그 과정을 앞당길 중요한 계기”라고 덧붙였다. 대구·경북, 치과기공 인재의 보고 노하우 전수할 ‘교두보’ 구축 필요 김노국 대구치과기공사협회장 “대구·경북은 치과기공 인재의 보고(寶庫)인 만큼 기공사들이 지역에 뿌리내리고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습니다.” 김노국<사진> 대구치과기공사협회장의 목표다. 김 회장은 협회장에 취임 당시 가장 먼저 주력한 것이 임원진 구성의 세대교체라고 했다. 그는 “협회 임원진을 20대 후반에서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고르게 참여하는 구조를 마련했다”며 “세대마다 생각과 취향이 다르듯 협회 운영도 다양한 의견이 반영돼야 한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협회는 봉사와 장학, 체육대회 등 회원 복지 활동을 더 폭넓게 이어갈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앞서 김 회장은 2010년 임플란트 관련 특허를 내고, 나사가 풀리지 않는 보철 구조를 개발했다. 이 기술은 현재 품질 경쟁력을 인정받아 국내 주요 치과의사들이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김 회장은 “다양한 경험이 많은 50대 이상 치기공사 수가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곳이 대구”라며 “개인적 성과를 넘어 선배와 후배 기공사들의 경험이 더해져야만 치과 산업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다. 제가 선배들에게 받은 기술을 후배들에게 아낌없이 돌려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50대이상 치기공사 전국 2번째 관련학과 졸업생 年 200명 넘지만 지역 정착 인력은 10명도 채 안돼 교육서 일자리까지 ‘선순환’ 절실 특히, 김 회장은 국립치의학연구원 대구 유치에 대해서는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김 회장은 “치의학연구원은 치과의사·기공사·치과산업체·대학이 모두 힘을 합칠 수 있는 구심점이자, 우리 업계의 미래 생존전략”이라며 “대구는 이미 치과 산업 생태계가 집적된 도시이며, 여기에 전국 기공사 면허자 중 1만 명 이상이 대구·경북 출신일 정도로 인적 자원도 풍부하다”고 전했다. 다만, 현 상황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대구·경북 치과기공소에서 젊은 기공사를 고용하고 싶어도 인재들이 다양한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빠져나간다“며 “전국에 치과기공학 전공자는 약 1000명 졸업하는데 대구·경북의 대구보건대·수성대·김천대 등에서 배출된 졸업생은 200명 이상이다. 하지만 지역에서 일하는 사람은 10명도 안 된다”고 밝혔다. 이어 “이러한 현실을 막으려면 지역에 연구원 같은 거점 기관이 꼭 필요하다”면서 “연구원이 들어서면 청년들이 지역에 남아 일하고, 선배들의 노하우가 후배들에게 자연스럽게 전수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최근 대구시치과기공사회는 대구 치과기공계의 글로벌 교류에 물꼬를 텄다. 지난 6월 엑스코에서 ‘2025 대구광역시치과기공사회 학술대회 및 치과기자재전(DDTIX 2025)’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치과기공계의 글로벌 교류와 관련 “제2회 국제학술대회를 준비 중인데, 대구시의 지원을 받아 더 큰 규모로 발전시킬 계획”이라며 “연구원 유치와 함께 국제적 위상도 키우겠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김노국 회장은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공부하고, 다시 대구에서 일하며 살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며 “치과기공사회가 회원들의 권익을 지키고, 산업과 연구, 교육이 연계되는 기반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테니 후배들이 대구를 지켜달라”고 당부했다. 글·사진/장은희기자 jangeh@kbmaeil.com

2025-08-31

왕을 살린 편지와 마을을 살린 물길

■소란을 품은 정적의 연못 한여름이 깊숙이 내려앉은 연못이 숨을 죽인 듯 고요하다. 그러나 고요함 아래, 물풀은 사방으로 뻗고 연잎은 서로의 몸을 밀치며 자리를 넓힌다. 나무는 그늘을 짙게 드리우고, 바람은 유영하듯 잘도 지난다. 아무도 없으니 고요하고, 아무도 없기에 많은 생명은 제 뜻대로 자란다. 고요하다는 건 멈춤이 아니라, 소리 없는 확장이 된다. 연못 둑을 따라 뿌리내린 나무는 제 그림자를 물 위에 드리운 채 기세를 세운다. 한쪽으로 기운 듯하지만 단단하고, 굽은 등줄기엔 시간이 층층이 내려앉아 물기 어린 흙을 힘껏 끌어당긴다. 매미는 고요를 뚫고 터지듯 운다. 서출지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울음을 받아낸다. 숨이 막힐 지경인 한낮의 열기 속에, 연못은 한치 흔들림 없이 가라앉아 있다. 수면은 팽팽한 긴장을 머금었다 풀어지며 하늘을 담는다. 연못 물은 고인 듯 살아 있고, 가늠할 수 없는 깊은 고요가 오히려 연못을 더 넓게 보이게 한다. 소란한 매미도, 바람의 숨결도 물속에 스며들 뿐, 연못은 가만가만 모든 것을 품는다. 나보다 먼저 바람이 다녀간 흔적이 연잎 위에 남는다. 잎들은 가볍게 흔들리며 그늘과 빛 사이를 나누고, 틈마다 빛은 제 몸을 풀어 번진다. 연못 가장자리에 물풀들이 빼곡히 자리 잡았다. 수면 아래에 몸을 숨긴 물고기들이 미세한 흔적을 남긴다. 개구리 한 마리가 놀란 듯 움찔하며 물속으로 뛰어든다. 그럴 때마다 연못은 가볍게 숨을 쉰다. 부레옥잠과 연꽃은 서로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는다. 저들만의 질서를 잘 이루어 사는 듯하다. 신라 소지왕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동남산 자락 완만한 기슭의 서출지 낮은 터에 남산 계곡서 흘러든 물 고여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연못으로 알려져 배롱나무•소나무 등이 주변을 감싸고 안쪽에는 연꽃 같은 수생식물이 자라 동쪽에 자리잡은 정자 이요당과 함께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내 ■글이 나온 연못 서출지 서출지(書出池)다. 경주 남산동, 동남산 자락의 완만한 기슭에 자리 잡은 연못이다. 동서로 누운 자그마한 연못은 주변에 비해 터가 낮아 물이 모이기 좋은 위치다. 남산 계곡에서 흘러든 물이 고이는 곳이니, 예로부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연못으로 알려졌다. 배롱나무와 소나무, 잡목들이 조밀하게 연못을 감싸고, 아래로는 수로가 이어져 물이 흐르도록 되어 있다. 연못 안쪽에는 붓꽃, 부레옥잠과 연꽃 같은 수생식물이 자라며, 둑을 따라 연못을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동쪽에는 이요당이 있어 연못과 함께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낸다. 이 가만가만한 공간은 남산 품 안에서 사계절 내내 다른 표정을 띠며 숨을 쉬는 공간이 된다. 8월 한낮의 햇살이 살갗을 파고든다. 연잎은 땡볕을 받아내며 얇은 그림자를 품는다. 물풀은 제각각의 자리에 번져 있고, 그 사이로 연꽃 한 송이가 조심스레 얼굴을 내밀었다. 수면이 미세하게 떨릴 무렵, 물결 위엔 오래된 전설이 한 겹 얹힌 듯 연꽃이 나를 부른다. 서출지는 처음부터 이야기를 담고 태어난 연못이다. ‘書出池(서출지)’, 한자를 풀어 보면 ‘편지가 나온 연못’이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 제2, 소지왕조(炤知王條)에는 서출지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정월 보름, 소지왕(신라 제21대 왕)이 행차를 나섰다. 남산 자락, 양피촌 들녘을 지나던 왕의 수레에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뒤를 따라 쥐 한 마리도 나타났다. 놀랍게도 쥐가 말을 했다. “저 까마귀를 따라가십시오.” 기이한 기운을 느낀 왕은 장수를 보내 까마귀를 쫓게 했다. 까마귀는 남산 남쪽, 못 가로 장수를 이끌었다. 그러나 그만 까마귀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장수가 아쉬움에 못 가장자리에 멈춰 선 그때, 물 한가운데서 거칠고 푸른 풀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났다. “이 글을 반드시 왕께 전하시오.” 장수에게 봉투를 건네고 노인은 물속으로 사라졌다. 장수는 왕에게 봉투를 전했다. 왕은 봉투를 펼쳤다. “이 봉투를 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 왕이 무슨 뜻인지 몰라 하자 옆에 있던 신하가 말했다. “두 사람은 백성이옵고, 한 사람은 왕이시옵니다. 부디 열어보소서.” 왕이 봉투를 열자 단 세 글자가 쓰인 편지가 있었다. “射琴匣(사금갑). 거문고 갑을 쏘라.” 왕은 대궐로 돌아와 왕비의 침실로 향했다. 침실엔 작은 거문고 상자가 있었다. 왕이 활을 들어 상자를 향해 시위를 당기자 왕비가 말렸다. ‘뚝’, 활에 맞은 나무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 소리가 났다. 상자 안에 승려가 죽어 있었다. 왕비와 함께 반역을 꾀했던 승려였다. 왕은 죽음을 면했고, 왕비는 곧 처형되었다. 글이 물에서 나왔다 하여 이 연못은 ‘書出池(서출지)’라 불리게 되었다. 정월 대보름날 소지왕을 살려준 까마귀에게 찰밥을 주는 ‘오기일(烏忌日)’이라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경주 지역에서도 정월 대보름날 아이들이 감나무 밑에 찰밥을 묻어두는 ‘까마귀 밥주자’라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신라 불교 공인 이전, 토착신앙과 새로운 사상의 충돌의 암시가 이 연못에 서린 까닭일까. 까마귀와 쥐는 전통 신앙의 화신처럼 등장했고, 풀 옷 입은 노인은 미래를 예언하는 매개자였을 것이다. 노인의 기이함 속에서 생명은 구원되고 왕권은 이어졌다. 이 이야기는 신라사의 균열을 보여주는 듯하다. 연못 가장자리 둑을 천천히 걷는다. 발밑엔 잔돌이 깔려 있고, 풀잎은 바람 따라 낮게 고개를 젖힌다. 한낮의 햇살이 연잎 위로 내려앉고, 수면은 고요하다 못해 멈춘 듯하다. 그 물 위로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든다. 검은 그림자가 연못을 가로지른다. 문득, 풀 옷을 입은 노인이 봉투를 내밀고, 다시 물속으로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가 누구였는지, 왜 하필 왕에게 글을 보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연못엔 여전히 노인의 신비스러운 기척이 남아 있는 듯하다. 잔잔한 수면 아래, 전설은 마치 오래된 유물처럼 가라앉아 있다. 배롱나무 꽃잎 하나가 바람에 날려 물 위로 떨어진다. 그 붉은 조각이 천천히 돌며 퍼져나간다. 까마귀와 쥐는 신이 보낸 전령이었을까. 왕비와 승려의 음모를 막은 글귀는 정말 이 물속에서 떠올랐던 걸까. 산책 끝에 다시 연못을 바라본다. 뜨거운 여름빛 아래, 서출지는 여전히 고요하다. 오래된 이야기처럼 아무도 없는 연못엔 영험한 기운이 감도는 듯하다. ■이적의 선행이 깃든 물 위의 정자 이요당 이요당은 연못 끝자락 물 위에 있다. 물과 나무 사이, 빛과 바람이 스쳐 가는 자리에 마루를 얹고 기와를 이고 앉아 있다. 유연한 지붕, 아름다운 곡선에 얹힌 시간을 가늠해 본다는 건 무의미한 일일 테다. 모든 곡선이 부드럽고, 모든 직선이 오래되어 고풍스럽다. 낮은 마루, 묵은 기둥, 모든 것이 서출지에 반영되어 한껏 품격 있는 아름다움을 더한다. 건물은 물 위에 올려져 있고, 처마는 연못을 향해 열려 있다. 수면 위를 따라 흐르는 바람이 마루를 통과하고, 연잎의 흔들림은 건물 그림자와 맞닿는다. 이요당은 물과 함께 숨 쉬는 살아있는 집이다. 이요당(二樂堂)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조선 현종 5년(1664년)에 임적(任適, 1612~1672)이 지은 정자다. 서출지 연못가에 돌을 쌓아 건물을 올렸다. 당초에는 3칸 규모였으나 이후 다섯 차례 중수를 거쳐 지금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에 ㄱ자 모양을 띠게 되었다. 남산 능선을 등진 정자는 서출지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앉아 있어 연못을 훤히 내다보는 구조다. 이요당이라는 이름은 ‘요산요수(樂山樂水)’에서 비롯되었다. 산을 즐기고 물을 즐긴다는 의미를 지닌 말로, 자연 속에서 벗처럼 지내는 선비의 삶을 담아낸다. 정자는 격식을 갖추되 화려하지 않다. 기둥은 차분히 아래로 향하고, 처마 선은 남쪽으로 부드럽게 그어진다. 마루 아래로는 연못의 기운이 스며들고, 그 기운은 다시 처마로 오른다. 임적은 남산 아래 양피촌에 살던 선비였다. 가뭄이 극심할 때, 땅속 깊은 물줄기를 찾아내어 자신의 마을은 물론, 이웃 마을까지 물이 부족하지 않도록 살폈다. 임적은 평소에도 가난한 이들을 돌보며 의복과 식량을 나누었다 전한다. 그의 덕망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았다. 이요당은 그가 자연을 벗 삼아 머물며 마음을 가다듬던 자리다. 이요당은 단순한 정자가 아니라 서출지의 전설을 내려다보는 자리이자, 삶의 물줄기를 함께 나누던 인물의 정신이 머문 공간이다. 정자에 올라 바라보면, 연못의 수면에 배롱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계절마다 연꽃이 피고 진다. 기와지붕 아래 남긴 선인의 삶은 가만가만하지만 분명한 울림으로 남는다. 이요당 건너편, 남쪽 언덕에 그의 아우 임극(任極)이 지은 산수당(山水堂)이 자리하고 있다고는 하나 오늘은 여기서 멈추기로 한다. 두 형제가 나란히 남산 자락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던 삶은 오늘날까지 연못을 거닐며 보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정자는 시간이 흘러도 기울지 않고, 정자에 깃든 선행과 겸허함은 여전히 바람결에 실려 전해진다. 가만가만 걷기 좋은 연못이다. 서출지와 이요당은 숨겨둔 마음을 꺼내보기에 좋은 자리다. 나무 그림자에 들고, 물풀 사이를 스치고 오는 바람에 젖다 보면, 어느새 잊고 지낸 누군가의 얼굴과 그리움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물풀 옷을 입은 선인이 전하듯, 마음 깊숙이 가라앉아 있던 연서 한 장이 나를 향해 조용히 떠오를지도 모를 일이다.

2025-08-27

깊은 땅속 두 그루 나무의 은밀한 사랑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볼 수 없는 것을 실제로 본다는 것은 소름 돋는 경이적인 일이다. 노거수를 찾아 나선 지도 25여 년이 지났지만, 좀처럼 보기 힘든 사실의 광경을 목격했다. 한 나무의 두 가지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붙어 하나의 가지로 된 것을 연리지(連理枝)라 하고, 두 나무의 가지가 하나의 가지로 된 것을 연리목(連理木)이라 한다. 연리지와 연리목은 좀처럼 볼 수 없는 ‘효도, 사랑, 우정의 징표’로 귀하게 여기고 많은 사람이 경외감을 가진다. 이에 대한 전설과 함께 신비롭고 또한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어두운 땅 속에서 운명처럼 서로 만나 아무런 보호막 없이 모진 세월 겪으며 마침내 한 생명의 숨결 나누는 사이로 하나의 숨결이 된 검고 굵은 뿌리줄기 마치 오래 잠든 용의 등처럼 굽이치고 무심한 비바람이 깎아낸 굴곡들마다 시간의 손길이 새겨져 신비로움 품어 그런데 땅속에 있어 보이지 않는 두 그루 나무의 뿌리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하나의 뿌리로 된 연리근(連理根) 것을 발견했다. 처음 이곳을 방문한 2003년 봄에는 알 수도 볼 수도 없었던 흙 속에 숨겨져 있었다. 10여m 떨어진 느티나무 두 그루의 굵은 뿌리가 하나로 붙은 연리근이 바깥세상으로 나와 나의 눈앞에 떡하니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찬찬히 연리근을 만져보고 또 살펴보았다. 연리지와 연리목은 가끔 보아 왔지만, 이렇게 굵은 뿌리의 연리근은 처음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은 떨렸다. 땅속에 있어야 할 뿌리가 땅 밖으로 나와 노출되어 있으니 신기할 수밖에 없다. 뿌리를 덮고 있던 흙이 빗물로 인하여 유실되어 연리근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 신비하고 경이로움에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연리근 느티나무 노거수가 살아가는 곳은 경북 김천시 농소면 월곡리 산 75번지이다. 일명 못골마을이라 한다. 마을 입구 언덕 위에 도로와 들판을 내려다보면서 살아가는 느티나무는 나이가 380살, 키 20m, 가슴둘레 4.6m, 앉은 자리 폭이 27m나 되었다. 이웃 나무는 이보다 나이도 키도 가슴둘레 굵기도 작은 느티나무이었다. 1993년 7월 7일 보호수로 지정되어 시에서 보호 관리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정자와 의자 등 편익 시설을 설치하여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었다. 연리근은 두 나무의 뿌리가 땅속 깊은 어둠 속에서 서로를 찾아와 포개지고, 마침내 한 생명의 숨결을 나누는 은밀한 사이가 된 것이다. 아무도 볼 수없는 흙 속에서 그들은 은밀한 사랑을 나누었을까.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세상에 알려져 세월과 비바람을 견디며 서로의 생을 지탱해 주는 조용한 사랑이 아직도 뜨겁게 흐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연하고 하얀 뿌리가 아무런 보호막이 없이 모진 세월의 풍파에 발가벗겨졌으니 얼마나 고통에 시달리며 살았을까. 연리근은 두 나무의 뿌리가 가까이 자라면서 접촉 부위의 형성층이 유착되어 물과 양분이 오가게 된 상태이다. 동일 수종일 때 유착이 잘 일어나지만, 토양 조건에 따라 다른 수종 사이에서도 드물게 관찰된다고 한다. 생태학적으로는 두 나무의 뿌리 경쟁 대신 상호 연결을 통한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적응으로 보인다. 이는 식물사회의 생존을 위한 협력이다. 내가 처음 올 때만 해도 나무의 뿌리는 흙 속에 있었는데, 그동안 비로 인한 흙의 유실로 뿌리가 땅 바깥으로 노출되었다. 10여m 떨어진 두 나무가 힘을 합쳐 뿌리로 경사진 흙의 유실을 붙잡고 있다. 생각해 보니 나무들이 미리 알고 생존을 위해 서로 힘을 합쳐 토양의 유실을 막아내기 위해 연리근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땅 바깥세상에 드러난 연리근의 괴이한 모습은 하나의 걸작품이고 인연은 고래힘줄 같다. 두 그루의 느티나무 뿌리가 어두운 땅속에서 어느 순간 운명처럼 서로를 만났다. 그 만남은 서로의 숨결을 느끼고 마침내 두 뿌리는 하나가 되었다. 마치 세월이 조각한 거대한 조형물 같다. 검고 굵은 뿌리줄기는 마치 오래 잠든 용의 등처럼 굽이치고, 비바람이 깎아낸 굴곡마다 시간의 손길이 새겨져 있다. 거친 살결 위로는 이끼가 푸른 숨을 내쉬고, 틈새마다 어린잎이 고개를 들어 줄기 인양 새 생명의 문장을 써 내려간다. 두 나무의 뿌리는 흙 속에서 이미 오래전 서로의 숨을 섞었을 것이다. 가뭄에도, 장마에도, 그들은 땅속 깊은 곳에서 물줄기를 나누어 마셨고 폭풍의 밤엔 서로의 몸을 버팀목 삼았다. 이제 그들의 뿌리는 누가 먼저였는지 가릴 수 없는 하나의 심장, 한 몸의 맥박이 되어 땅 위로 드러나 있다. 마주 선 두 나무가 하나의 뿌리로 이어진 모습은 연인보다 더 깊은 결속이다. 형제보다 더 질긴 인연을 보여준다. 연리근이라 불리는 이 결속은 힘겨운 세월을 살아내는 나무들의 동맹이자 연대다. 폭풍이 몰아쳐도, 가뭄이 길어져도, 서로의 뿌리에 의지하며 버텨낸 증표이다. 숨은 인연으로 땅 위에서 보이지 않아도, 땅속에서 맺어진 끊을 수 없는 연결로 외부의 시련을 무릅쓰고 이어지는 영원한 인연이 되었다. 그리고 양분의 나눔과 상생으로 뿌리를 통해 서로를 살리는 관계를 부부, 형제, 우정에 비유할 수 있겠다. 그 안에는 다투지 않고, 서로의 생존을 위해 한 몸이 되기를 택한 지혜가 깃들어 있다. 사람의 인연도 이와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억지로 끊으려 하지 않고, 서로의 결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함께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우리 인간 사회에 본보기가 아닐까. 한 뿌리의 민족이 좌우 이념으로 갈라져 두 나라의 정부를 세우고 서로를 적대시 하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계절마다 연리근 느티나무의 모습은 변주를 거듭한다. 봄이면 연둣빛 새순이 뿌리 틈새에서도 솟아나 오래된 나무의 숨결에 젊음을 더한다. 여름이면 푸른 이끼가 뿌리를 감싸고 더위를 식혀준다. 가을에는 황금빛 잎이 쌓여 마치 뿌리가 금빛 옷을 입은 듯하다. 겨울이면 앙상한 가지 사이로 흰 눈이 내려와 뿌리 위를 덮으며 오랜 결속을 포근히 감싸준다. 연리근 나무를 보면서 누군가는 형제를, 누군가는 친구를, 누군가는 연인을, 또 누군가는 오래 함께 살아온 가족을 떠올릴 것이다. 바람은 가지를 흔들지만, 그 뿌리의 결속은 흔들리지 않는다. 두 나무는 지금도 묵묵히 서서 “서로의 뿌리가 된다는 것은, 함께 늙고 함께 사는 일이라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연리근에 얽힌 전설 연리지와 유사하지만, 땅속에서 맺어진 인연이라는 점에서 더 은밀하고 깊은 사랑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연인의 환생 설화: 신분 차이로 결혼하지 못한 남녀가 죽어 각기 다른 나무로 환생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뿌리가 땅속에서 만나 하나가 된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이 세상에서는 맺어지지 못했지만, 사후 땅속에서라도 평생 함께하는 부부가 되었다”라고 말한다. ▲부부 장수 설화: 부부가 오랜 세월 한집에 살며 해로하다 죽은 뒤 무덤가에 심은 두 그루 나무가 뿌리로 이어진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집안의 화목과 번영을 상징하는 길조로 여겼다. ▲마을 수호목 설화: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연리근으로 이어져 마을의 복을 지키고 재난을 막는다고 믿었다. 매년 제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이 행해졌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8-27

풍부한 장학금·맞춤형 취업 지도로 ‘학생이 행복한 대학’ 선도

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가 2026학년도 수시모집을 시작하면서 학생 맞춤형 장학제도와 혁신적인 교육 환경으로 주목받고 있다. 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는 ‘학생이 행복한 대학, 지역과 함께 성장하는 대학’이라는 비전을 바탕으로 다양한 지원과 교육환경을 구축하고 있다. 1인당 평균 398만원 장학금 지급 경찰·공직 등 맞춤형 진로 상담 52억 투입 기숙사·강의실 보수 경주시와 신산업 전문인력 양성 □ 학생 맞춤형 지원 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는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꿈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양한 장학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학생 1인당 평균 398만 원에 달하는 장학금이 지급되며, 200여 종의 장학제도를 통해 매년 총 264억 원이 지원된다. 특히 수시 최초합격자에게는 100만 원, 충원 1차 합격자에게는 50만 원의 장학금이 주어지고, 고교 추천 인재 장학을 통해 100만 원이 지원되어 학생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여준다.   또한, 대학일자리플러스센터에서는 학생들에게 맞춤형 진로·취업 상담을 제공하며, 경찰·공직·공기업 진출을 위한 공공 인재양성반을 운영해 실질적인 취업 역량 강화를 돕는다. 통학버스와 KTX·SRT 경주역 셔틀버스 운행으로 학생들의 생활 편의도 배려하고 있다.   □ 쾌적한 캠퍼스 환경 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는 학습과 생활환경 개선에도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최근 52억 원을 투입해 기숙사와 강의실, 실습실 등 교육 공간을 전면 리모델링했다. 또한 휴게 쉼터 정비와 도서관 내 카페 및 갤러리를 조성해 학생들이 더욱 쾌적한 캠퍼스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 기부를 통해 조성된 상징 조형물과 도서관 미디어월은 대학 구성원의 자긍심을 높이고 활기찬 캠퍼스 문화를 이끌고 있다.   □ 지역 혁신 생태계 선도 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는 경북도 RISE 사업의 거점 대학으로서 지역 인재 양성과 산업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K-U시티 SMR 인력 양성’, ‘K-LEARNing 대학 평생직업 교육 체제’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한다. 경주시와 함께 ‘경주형 K-IDEA Valley’ 프로젝트를 통해 신산업 전환에 필요한 전문 인력 양성을 진행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지역 제조업 성장 지원은 물론, 평생학습 플랫폼 구축과 지역 네트워크 강화로 지역사회 발전의 핵심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 종합 메디컬 캠퍼스로서의 위상 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는 의대·한의대·간호대를 두루 갖춘 경북 유일의 종합 메디컬 캠퍼스로서 의료 인재 양성의 산실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2025학년도 의대 정원 확대에서 지역인재 전형을 76명으로 늘리고, 경북 지역 학생 32명을 새롭게 선발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는 지역 의료 인력 부족 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동시에, 대학의 건학이념을 구현하는 의미 있는 성과로 평가된다.   □ 경쟁력으로 증명된 등록률 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의 경쟁력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2025학년도 신입생 모집에서 정원 내 1816명 중 1815명이 등록해 99.9%라는 압도적인 등록률을 기록했다. 이는 대학의 교육 역량과 신뢰도를 방증하는 수치로, 학생과 학부모에게 선택받는 대학으로 자리매김했다.   □ 2026학년도 수시모집 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는 2026학년도 수시모집을 통해 학생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고 있다. 학생 중심의 모듈형 교육과정, 지역과의 상생 협력 모델, 미래형 시그니처 모듈 등 차별화된 교육시스템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다.   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 관계자는 “우리 대학은 학생이 행복한 환경을 바탕으로, 지역과 함께 성장하며 세계로 뻗어가는 글로컬 인재를 키워내고 있다”며 “2026학년도 수시모집은 학생들이 꿈을 현실로 만드는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2026학년도 수시모집 94% 선발… 전형 방법도 단순화 우리 대학 이렇게 뽑는다 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가 2026학년도 수시모집에서 전체 모집정원의 94.3%인 1747명을 선발한다. 원서 접수는 오는 9월 8일부터 12일까지 진행된다.   올해 수시모집에서는 여러 가지 변화가 이뤄져 수험생들의 부담을 크게 줄였다. 먼저, 학생부 교과 성적 산출에서 3학년 2학기 성적은 제외됐고, 한의예과와 의예과에서 과학Ⅱ 과목 가산점이 축소됐다. 또한, 한의예과와 간호학과 일부 전형의 수능최저학력기준은 기존보다 1등급 완화됐고, 불교추천 인재 전형에서는 교리문답이 절대평가(P/F)로 변경돼 더욱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전형 방법도 단순화됐다. 교과 전형은 대부분 교과 성적 100%로 선발하며, 면접전형은 교과 70%와 면접 30%를 반영한다. 면접 문항은 사전에 공개돼 수험생들이 충분히 준비할 수 있다. 종합전형은 의·한의예과와 간호학과만 단계별 전형을 적용하고, 나머지 학과는 서류 100%로 평가한다. 수능최저학력기준은 의·한의예과와 간호학과에만 적용된다.   또한, 학과 개편도 이루어졌다. 조경·정원 디자인학부는 ‘조경·정원 디자인학과’, 뷰티메디컬학과는 ‘뷰티아트산업학과’, 바이오제약공학과는 ‘바이오·화학융합학부’, 에너지·전기공학과는 ‘원자력·에너지·전기공학과’로 이름이 바뀌었다. 새로운 ‘엘리트스포츠 전공’도 신설됐다.   장학 혜택도 주어진다. 정원 내 최초합격자는 100만 원, 충원 1차 합격자는 50만 원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으며, 경주·포항·울산 지역 고교 졸업자에게는 추가로 100만 원을 지급한다. 학생 1인당 평균 장학금은 398만 원으로 전국 대학 상위권 수준이다.   강종임 입학처장은 “학생 친화적인 전형 변화와 풍부한 장학 혜택으로 수험생의 부담을 줄였으며, 많은 학생이 WISE 캠퍼스에서 꿈을 실현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자세한 내용은 입학처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황성호 기자 hsh@kbmaeil.com

2025-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