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더 멋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정해진 관광지에서 인증사진을 남기고, 유명한 맛집을 찾아다니며, 시간표에 맞춰 이동하는 여행 말고 말이다. 잠시 걸음을 늦추고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내 마음 깊은 곳까지 자연을 들여보내는 여행. 그리고 그 자연 속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고, 아직 닿지 못한 삶의 경지에 한 걸음 다가서는 여행.
그런 여행을 원한다면 ‘구곡(九曲)’ 여행을 권한다.
구곡은 단순한 계곡이나 명승지가 아니다. 물길을 따라 아홉 굽이를 정하고, 그곳마다 자연과 학문, 인생의 의미를 담아 이름 붙이고 시를 남긴 선비들의 정신적 지도다. 조선의 선비들은 산수를 유람하며 시를 짓고 마음을 닦았다. 자연을 보는 일이 곧 공부였고, 걷는 일이 곧 수양이었다.
문경에는 이런 구곡이 14개가 있다. 조선시대에 설정된 화지구곡, 선유구곡, 선유칠곡, 병천구곡, 석문구곡, 산양구곡, 청대구곡, 화장구곡, 무호구곡 등 9개가 있고, 근현대에 설정된 쌍용구곡, 관산구곡, 남강구곡, 영강구곡, 조령구곡 등 5개가 있다. 그 가운데 청대 권상일 선생이 설정한 청대구곡은 지금 우리가 다시 걸어볼 만한 특별한 길이다.
청대 권상일(權相一) 선생은 1679(숙종 5)에 태어나 1759(영조 35)에 별세했다. 본관은 안동. 자는 태중, 호는 청대.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심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이다.
1710년(숙종 36)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그 뒤 저작·전적·예조좌랑·병조좌랑 등을 지냈다. 1727년(영조 3) 만경현령이 되고, 이듬해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1731년 영암군수와 사헌부장령을 지냈다. 1734년 민폐근절책과 관기숙정방안에 대하여 상소했고, 홍문관의 계청으로 경연에 참석했다. 같은 해 울산부사가 되어 춘추관편수관을 겸임하고, 구강서원을 세웠다. 뒤에 대사간·홍문관부제학·지중추부사·대사헌 등을 지내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이황을 사숙하며 이황이 수정하기 전의 사칠설을 이어받아 이(理)와 기(氣)를 완전히 둘로 분리하고, ‘이‘는 본연의 성(性)이며 ‘기‘는 기질의 성(性)이라고 주장했다.
저서로는 청대집·청대일기·초학지남(初學指南)·관서근사록집해(觀書近思錄集解)·소대비고(昭代備考)·가범( 家範)·역대사초상목(歷代史抄常目) 등이 있다. 죽림정사·근암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희정이다.
◇구곡 여행의 시작, 주자에서 문경으로
구곡의 전통은 남송의 대학자 주자(朱子)에게서 시작됐다. 그는 중국 복건성 무이산에 은거하며 아홉 굽이 계곡을 정하고 ‘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櫂歌)’라는 시를 남겼다. 배를 타고 물길을 따라 오르며 자연 속에서 도를 깨닫는 여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주자는 18세에 과거에 급제했지만 벼슬보다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공자와 맹자의 도덕 중심 유학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해 성리학을 완성했고, 그의 저술 ‘사서집주’는 조선 500년 과거시험의 기본 교재가 됐다. 조선의 선비들이 그를 정신적 스승으로 삼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비롯한 수많은 유학자들이 전국 명산대천에 자신만의 구곡을 설정했다. 자연 속에서 공부하고 자신을 닦는 길, 그것이 선비의 이상이었다. 문경의 유학자들도 이 전통을 이어받아 구곡을 설정했고, 그 정신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물 흐름 따라 내려가는 파격
청대구곡(淸臺九曲)은 다른 구곡과 조금 다르다. 주자가 물 아래에서 위로 거슬러 올라가며 구곡을 정했다면, 청대 권상일 선생은 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며 구곡을 설정했다. 흐름을 거슬러 오르지 않고 흐름을 따라 내려가는 방식이다.
이는 단순한 방향의 차이가 아니다. 사고의 전환이자 사유의 파격이다. 때로는 흐름을 거슬러야 하지만, 때로는 흐름을 따라가며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도 있다.
청대구곡은 산북면 근암마을 우암에서 출발해 금천을 따라 하류로 내려간다. 첫 굽이 우암(愚巖)에서는 바위가 물길을 감싸 안아 물이 돌아간다. 시인은 그 곁에서 아이와 함께 노닐며 오가는 한가로운 삶을 노래한다. 여행의 시작은 분주함이 아니라 여유다.
2곡 벽정(碧亭)에 이르면 높은 산과 푸른 물, 옛사람의 자취가 겹쳐진다. 선현의 초가가 층암에 기대어 있고, 작은 배가 물을 가르며 지난다. 자연 속에서 옛사람의 삶을 떠올리는 순간, 여행은 시간의 깊이를 얻는다.
3곡 죽림(竹林)에서는 학문의 전통이 이어진다. 회로당인 산양수계소를 통해 남전의 유학 전통을 떠올리며, 선현의 가르침이 맑은 물처럼 길이 흐르기를 기원한다. 여행이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사유의 길이 되는 지점이다.
4곡 가암(佳巖)에서는 물고기가 뛰고, 동쪽 들판에 창석이 솟아 있다.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는 ‘연비어약(鳶飛魚躍)’의 세계, 만물이 제 본성을 따라 살아가는 조화의 풍경이다. 시인은 노를 젓지 않고 두드리며 천천히 흐른다. 목적지보다 과정이 중요해지는 순간이다.
5곡 농청대(弄淸臺)는 청대 선생이 직접 정사를 짓고 학문을 닦던 곳이다. 작은 서재에서 성현의 글을 펼치고 여생을 보내겠다는 그의 기록은 오늘의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어디에서 마음을 쉬고 있는가.
6곡 구잔(溝棧)에서는 잔도(棧道)와 시장이 등장한다. 자연과 인간의 삶이 만나는 지점이다. 장터의 분주함 속에서도 시인은 신농씨(神農氏)의 태평성대를 떠올린다. 자연과 문명이 조화를 이루는 이상을 그린다.
7곡 관암(觀巖)에서는 두 물이 만나 하나가 된다. 나뉘었다가 다시 합쳐지는 물길을 보며 천리(天理)를 생각한다.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다. 각기 다른 길을 걷다가 결국 하나의 이치로 돌아간다.
8곡 성암(筬巖)에서는 주돈이를 떠올린다. 태극을 우주의 근원으로 보고, 연꽃처럼 세속 속에서도 맑음을 지키라고 했던 철학자다. 자연 속에서 철학을 만나는 순간이다.
마지막 9곡 소호(蘇湖)에 이르면 물길이 끝나고 마을이 나타난다. 긴 여정을 지나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그러나 돌아온 곳은 출발 전과 같지 않다. 마음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나를 연마하는 여행
구곡 여행의 본질은 풍경 감상이 아니다. 자연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을 닦는 데 있다. 천천히 걷고, 오래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는 것. 그 과정에서 마음의 먼지가 씻겨 나간다.
현대인은 빠르게 이동하지만 깊이 머물지 못한다. 많은 곳을 보지만 제대로 보지 못한다. 구곡 여행은 그 반대다. 한 굽이를 오래 바라보고, 한 줄기 물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을 비춰본다.
문경의 산수는 이미 아름답다. 그러나 그곳에 살았던 선비들의 사유와 정신을 함께 따라가면 여행은 전혀 다른 깊이를 갖는다. 청대구곡을 따라 걸으며 우리는 자연과 선현,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동시에 만난다.
이제 여행의 방식도 달라질 때가 됐다. 빠르게 소비하는 여행에서 벗어나, 나를 연마하고 마음을 맑히는 여행으로. 문경 청대구곡은 그렇게 우리를 부르고 있다.
청대구곡(淸臺九曲)
일곡이라 우암이 안아서 열지 않으니
바위 앞에 흐르는 물은 절로 돌아가네
내 집은 다만 시내 서쪽 가에 있거늘
아이와 때때로 노닐며 몇 번을 오가나
이곡이라 산이 높고 푸르름 들리려 하는 곳에
고인의 띠집이 층암의 언덕에 기대어 있네
가벼운 돛대 날카로운 노 어느 때 움직일까
서쪽 언덕 바위에 작은 배 가로지르네
삼곡이라 높다랗게 자리한 회로당은
남전의 유법이 해와 별처럼 빛나네
원하노니 영원히 폐해지지 않아서
앞에 있는 맑은 시내처럼 길이길이 흐르기를
사곡이라 양양하니 고기가 연못에서 뛰고
동쪽으로 보니 창석이 평전에 우뚝 솟았네
배를 타고 노를 두드림은 진실로 한가한 일이니
아침저녁으로 바위 앞에 작은 배를 매네
오곡이라 중반에 작은 누대 지으니
서쪽 바위 백척이라 높다랗게 솟았네
움집 안에 백발노인 한가히 일이 없어
성현의 남긴 글을 책상 위에 펼치네
육곡이라 산비탈에 잔도가 위태하고
돌을 안은 긴 봇도랑 천천히 흘러가네
서쪽의 버드나무숲 시장에는 사람들 다투어 모이니
멀리 신농씨가 교역하는 때를 생각하네
칠곡이라 구불구불 두 물이 가로질러
남으로 달리고 서로 돌며 다투는 듯하네
중간에 나뉘고 끝에 합함이 원래 천리거늘
소호에 이르지 않아서 한 길로 흘러가네
팔곡이라 창연히 가파른 벽 기이하니
주옹의 풍영대가 이곳에 존재하네
바위 사이 고적은 두 글자 전서이고
눈 아래 고산은 누에의 한 눈썹이네
구곡이 장차 다하고 산 또한 다하니
무이촌이 언덕 가 동쪽에 자리하네
원두의 물은 들판 가까이에 이어지는데
청원정에 남아 있는 고벽은 비었네
/고성환기자 hihero2025@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