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김차진 포항제철소 제선설비부 포스코 명장(名匠)
포스코 제철소의 현장은 수많은 기술인의 땀과 경험 위에서 돌아간다. 고장이 나면 고치는 일을 넘어, 설비의 구조 자체를 바꾸며 현장을 개선해 온 기술자들이 있다.
포스코 명장으로 선정된 김차진 씨 역시 그런 현장 기술인 중 한 사람이다. 농촌에서 자라 몸으로 부딪히며 살아온 그는 제철소에 입사한 이후 줄곧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辛抱해라.”
입사하던 날 아버지가 남긴 한마디는 그의 삶을 지탱해 온 좌우명이 됐다. 고장 난 설비를 고치는 기술자에서 설비의 구조를 바꾸는 기술자로 성장하기까지, 그가 걸어온 현장의 시간을 들어봤다.
- 포스코 명장에 이르기까지의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지?
어린 시절은 짧았지만 몸으로 부딪히며 하루를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농번기에는 부모님을 도와 논밭에서 일했고, 농한기에는 산에 올라 땔감을 해다 나르며 생활했다.
그 시절의 경험은 포스코에 입사한 이후에도 현장에서 맡은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밑바탕이 됐다.
현장 업무는 늘 기본에 충실하려 했다. 그 위에 설비를 하나씩 개선해 나가면 노력한 만큼 성과가 눈에 보였고 그 효과가 수치와 결과로 검증됐다.
그 과정이 늘 설레고 긴장됐으며,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그게 지금까지 현장을 떠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다.
입사를 위해 집을 나설 때 아버지의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는 해방 직전까지 일본에서 17년 동안 도금기술자로 일하셨다.
근대식 제철소가 어떤 곳인지 누구보다 잘 아셨기에, 제게 남긴 말씀은 단 하나였다. “辛抱(신보)해라.”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뎌야 한다는 뜻이었다.
막상 입사하고 동촌 생활관에 들어갔을 때는 솔직히 꿈이 아닌가 싶었다. 흰 쌀밥에 고기국이 나오고, 하얀 매트리스 커버가 덮인 독신료 침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여기서 뼈를 묻겠다.’ 그 각오로 지금까지 현장을 지켜왔고, 그 시간이 쌓여 오늘의 포스코 명장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자주변형돼 반복 교체해야 하는 주선기
단순 복구 넘어 구조의 개선으로 효율화
우수제안 채택··· 도전 정신 갖는 계기로
설비 개선 기본은 문제를 정확히 아는 것
완벽한 도면 이해 위해 색칠해 가며 외워
‘스페인 구상’은 노력 결실 맺은 아이디어
3고로 보조냉각반 설치 실패 아찔했지만
시련은 오히려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용기
발로 뛴 결과 4고로서는 결국 해법 찾아
포스코의 큰 힘은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
후배들 조급함보다 과정에 충실한다면
수소환원제철도 반드시 결실 돌아올 것
- 회사 생활 중 ‘이건 내 인생을 바꿨다’고 느낀 순간이 있다면 어떤 때였는지?
정비 업무를 하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다. 고장이 나면 고치고, 다시 고치는 일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런 시기가 있었다. 일도 사람도 모두 버겁게 느껴지던 때였다. 그때 우연히 눈에 들어온 설비가 주선기였다.
주선기는 고로에서 나온 쇳물을 거푸집에 부어 일정한 형태로 굳히는 부대설비다.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쇳덩이가 작업 중 떨어지지 않도록 받쳐주는 안전격자가 늘 문제였다.
뜨거운 열과 무게를 견디지 못해 자주 변형됐고, 그때마다 교체 작업이 반복됐다.
그 순간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꼭 이렇게 자주 고쳐야만 할까?’
단순히 고장을 복구하는 대신 구조 자체를 바꿔보자는 발상이었다.
부품 형태와 교체 방식을 개선해 반복 작업을 줄일 수 있는 방향으로 직접 시험했고, 석 달간 효과를 검증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이 개선안이 처음으로 우수제안에 채택됐고, 그게 내 회사 생활의 터닝포인트가 됐다.
그전까지는 주어진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일을 계기로 ‘내가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바꿀 수도 있구나’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 이후로 현장은 단순한 일터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각하고 도전하는 공간이 됐다.
- 현장에서 설비 개선이나 문제 해결을 할 때, 자신만의 노하우나 접근 방식이 있다면?
설비 개선의 기본은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아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비를 겉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도면과 현물을 함께 놓고 머릿속에서 구조를 입체적으로 그려본다. 나는 항상 설비를 3D 그림처럼 이해하려고 했다.
요즘처럼 좋은 프로그램이 없던 시절에는 도면을 직접 옮겨 색칠하면서 하나하나 구조를 익혔다.
마침 새로운 프로그램이 도입되면서, 그동안 머릿속에만 있던 생각과 노하우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됐다.
업무가 끝난 뒤나 휴무일에도 혼자 남아 자료를 정리했고, 그때 쌓은 기록들은 지금도 내 보물이다.
‘스페인 구상’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결과다. 과거 박태준 회장님이 과감하게 ‘하와이 구상’으로 제철소 건설을 이끄셨던 것처럼, 고로의 핵심 냉각설비인 스테이브 쿨러(Stave Cooler) 교체를 위해 스페인 아르셀로미탈 제철소를 벤치마킹했고, 그 과정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우리 현장 여건에 맞게 구체화했다.
아이디어는 크기보다 속도가 중요하다. 작은 생각이라도 떠오르면 미루지 않는다. 밤을 새워서라도 바로 정리하고 글과 그림으로 구체화한다. 설비는 기다려주지 않고, 개선의 타이밍도 그렇기 때문이다.
- 수많은 도전과 시련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 과정에서 어떻게 극복하고 다시 도전할 수 있었는지?
돌이켜보면 실패의 아픔이 오히려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됐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3고로 보조냉각반 설치를 시도했다가 실패했을 때다.
그때는 경험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고로를 너무 얕잡아봤다.
조업 성적은 좋았지만, 고로 본체 냉각설비인 스테이브 쿨러가 예상보다 훨씬 빨리 마모되면서 냉각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 철피가 벌겋게 달아오르는 상황이었고, 급한 불부터 꺼야 했다.
별다른 준비 없이 보조냉각반을 설치하면 될 거라고 판단했다. 고로를 잠시 멈추고 철피에 구멍 뚫어 설치하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철피를 뚫고 들어간 드릴이 안쪽까지는 도저히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그 이후에는 철피에 물을 뿌리며 조업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정말 울음을 삼켰다. 중도에 포기한다는 건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고로라면 자신 있다고 생각했던 내가 그 자만으로 실패했다는 사실이 가장 괴로웠다.
하지만 그 실패를 그냥 아픔으로만 남겨두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도전할 때는 달라져야 했다.
가용 인력을 총동원하는 한편, 작업 전 훈련과 시뮬레이션도 철저히 실시했다. ‘두 번의 실패는 안 된다’는 각오였다.
그 경험은 이후 4고로에서의 도전으로 이어졌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해외 사례까지 직접 찾아 나섰고, 결국 외부에 답이 없다는 걸 인정하고 내부에서 해법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시련은 끝이 아니라 다음 도약을 준비하는 과정이 됐다.
돌아보면 나를 성장시킨 것은 성공보다 실패였다. 실패를 통해 겸손해졌고 더 깊이 준비하는 법을 배웠다.
그게 내가 다시 현장에 설 수 있었던 이유다.
- 다양한 자격증을 취득한 이유와 그것이 현장에서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
자격증은 많이 따는 것보다 언제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현장에서 꼭 필요하다고 느낀 자격증만 선별적으로 취득해 왔다.
산업안전기사는 작업의 기본이 되는 안전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기계정비산업기사는 설비를 구조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취득했다.
용접기능장은 결국 현장에서 손으로 책임져야 하는 순간을 대비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자격증은 기술인의 출발선이지, 목표는 아니라고 본다. 현장에서는 이미 그 다음 단계의 문제들을 다뤄야 했고, 그 과정은 개선 성과와 적용 결과로 검증돼 왔다. 여러 차례의 표창 역시 그런 현장 중심의 선택이 쌓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 후배들을 어떻게 대하고, 어떤 방법으로 성장하도록 돕고 있는지?
후배들을 대할 때는 항상 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린다. 지금의 후배들과 같은 연령대였을 때 내가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는지, 무엇이 가장 막막했는지를 기준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그때의 어려움을 반면교사 삼아, 후배들이 같은 시행착오를 조금이라도 덜 겪도록 돕는 게 선배의 역할이라고 본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실패를 대하는 태도다. 포스코의 큰 힘은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에 있다. 현장은 정답이 없는 문제를 다루는 곳이고 도전에는 반드시 실패가 따른다. 그래서 나는 후배들에게 실패를 숨기지 말라고 한다.
대신 왜 실패했는지, 다음에는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하자고 이야기한다.
특별한 교육 방식을 갖고 있지는 않다. 후배들에게 무엇을 강요하기보다는 현장에서 먼저 고민하고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다. 기술은 가르칠 수 있지만 태도는 결국 보고 배우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앞에서 묵묵히 일하는 선배로 남아 있는 것, 그것만으로도 후배들은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좌우명인 ‘하심’과 ‘겸손’은 현장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
내가 말하는 하심(下心)은 나 자신을 일부러 낮추는 태도다. 직급이나 경력, 명장이라는 호칭을 내려놓고 먼저 다가가면 상대도 마음의 벽을 낮춘다. 그렇게 되면 후배들은 훨씬 편하게 질문하고 고민을 털어놓게 된다.
재미있는 건 그렇게 가까워진 후배들로부터 오히려 내가 더 많은 도움을 받는다는 점이다.
현장은 늘 변하고 젊은 후배들은 새로운 시각과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질문 하나, 관찰 하나가 나에게는 또 다른 배움이 된다. 도움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함께 성장하는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하심이 곧 겸손이라고 생각한다. 겸손은 단순히 나를 낮추는 게 아니라 나 역시 배우는 사람이라는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다.
현장에서는 나보다 먼저 설비를 만지는 후배도 있고 나보다 더 빠르게 변화를 감지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 그것이 내가 현장에서 실천하려는 하심과 겸손이다.
- 마지막으로, 명장으로서 앞으로의 목표와 다짐, 그리고 앞으로 50년을 이끌어갈 포스코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포스코의 지난 50년이 축적과 성장의 시간이었다면 앞으로의 시간은 또 다른 도전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한 지역, 한 회사에서 긴 시간을 함께해 올 수 있었던 것은 개인의 기술과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했으며, 회사를 믿고 함께 버텨온 동료들, 그리고 제철소와 삶을 함께해 온 지역 사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처럼 축적된 경험과 협업의 힘은 새로운 산업 환경을 마주한 지금 더욱 중요한 자산이 되고 있다.
특히 수소환원제철로 대표되는 새로운 제철 패러다임은 현장 기술인들에게도 전혀 다른 시각과 준비를 요구하고 있다.
그런 변화를 바라보며 명장으로서의 역할 역시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의 목표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도 현장이 흔들리지 않도록 기본을 지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설비와 공정은 바뀌어도 안전과 품질을 대하는 자세, 문제를 끝까지 파고드는 태도만큼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
현장에서 쌓아온 경험이 있다면 그것을 새로운 기술과 연결해 후배들이 시행착오를 줄이는 데 보탬이 되고 싶다.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조급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수소환원제철처럼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영역일수록 차근차근 이해하고 준비하는 시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당장의 결과보다 과정에 충실하다 보면, 그 노력은 반드시 자신에게 돌아온다. 그렇게 쌓인 개인의 성장이 다시 현장을 단단하게 만들고, 조직 전체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선순환이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포스코의 다음 시대 역시 이런 현장 기술인들의 꾸준한 도전 위에서 완성될 것이라 생각한다.
▶ 김차진 명장은··· △ 포항제철소 제선설비부 고로정비섹션 (포스코 명장) △1958년 3월 17일생 △ 경주공업고등학교 졸업 △ 50년 근속 (1976년 3월 5일 입사) △ 2010년 올해의 용선인 △ 2011년 포스코패밀리대상 △ 2014년 정비명인 △ 2015년 철강기능상 △ 2016년 포스코기술대상 △ 2016년 포스코명장
/김진홍경제에디터 kjh25@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