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화마의 표적이 되다<2>실제 재난으로 소실된 지역별 문화유산
태풍, 홍수, 산불 등의 재난은 지자체 단위로 되풀이되지만, ‘재난지역 선포’와 같은 사후 조치에 집중됐다. 사전 예방 차원의 체계적 방재 시스템이 자리 잡지 못한 것이다. 이번 기획은 지자체 실정에 맞는 문화유산 방재 시스템을 구축 필요성을 제시하고, 농어촌 곳곳의 소중한 유산을 어떻게 지켜낼지를 탐구한다. 고령화 등으로 재난에 더 취약해진 자연 속 국가 유산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한국형(K)-문화유산 방재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마련해야 하는데, 일본의 경험을 토대로 경북은 물론, 전국 차원의 정책 수립에 필요한 시사점을 제공할 예정이다.
2016년 경주·2017년 포항 강진
불국사·보경사 등 기와 떨어져
훼손땐 100% 원형 복원 불가능
장마에 부여 고분군 토사 유실
작년 국가유산 69곳 직접 피해
한국형 방재 시스템 구축해야
<글 싣는 순서>
1. 산불 등 재난에 취약한 국내의 문화유산
2. 실제 재난으로 소실된 지역별 문화유산
3. 일본의 문화재 방재 연구기관 경험
4. 일본의 문화재 방재 정책 성공 사례
5. 한국형(K)-문화재 방재 정책의 방향성
◇ 지진이 흔들어 놓은 문화유산의 현장
2016년 9월 12일 경북 경주에서 발생한 규모 5.8의 강진은 한국이 더 이상 지진 안전지대가 아님을 보여줬다. 문화재청 조사에 따르면, 당시 불국사 등 목조건축 문화재에서 지붕 기와가 탈락하는 등 비구조적 피해가 확인됐다. 이듬해 2017년 11월 발생한 포항 지진(5.4) 때도 보경사와 내연산 사찰 등에서 기와 탈락과 구조 부재 손상 등이 이어졌다. 문화재 피해 건수는 31건에 달했다.
복원 과정에서의 취약성도 여실히 드러났다. 우리나라 국보·보물 문화재 10점 중 7점은 파손되더라도 복원에 반드시 필요한 정밀 실측조사 보고서가 없어 원형 복원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실제로 국보 24호 경주 석굴암과 보물 1744호 불국사 대웅전은 지진이나 화재로 훼손될 경우 보고서 부재로 인해 100% 원형 복원이 불가능하다.
문화재청 자료 결과, 목조건축 국보·보물 180점 가운데 9점은 ‘정밀실측조사보고서’가 없다. 여기에는 불국사 대웅전 외에도 대구 파계사 원통전, 제주 향교 대성전 등이 포함된다. 석조문화재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총 571점 가운데 70% 이상이 자료조차 없다. 경주 석굴암을 비롯해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충주 고구려비 등이 이에 해당한다.
2013년 문화재청 의뢰로 한국지진공학회가 실시한 지진재해 안전성 평가에서도 전국 석조문화재 152점 가운데 30점이 ‘경계’ 등급을 받아 내진 보강이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양호’는 23점, ‘보통’은 99점에 그쳤다. 이 평가는 지반 조건, 주변 환경, 구조 및 부재 구성, 보존 상태 등을 지표로 삼아 가중치를 적용해 산출한 결과다.
문화재청은 경주·포항 지진 이후 뒤늦게 ‘문화재 내진 보강 종합대책’을 마련해 정밀 안전진단과 보강 공사를 확대하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평가가 나온다.
◇ 산불, 불길 속에 사라져간 역사
지난 3월 경북과 강원, 경남을 휩쓴 대형 산불은 한국 문화유산 보존사에서 최악의 재난으로 기록됐다. 불길은 의성 고운사와 안동, 청송, 영양, 정선, 울산, 하동까지 이어지며 보물 2건을 포함한 문화재 30건을 집어삼켰다. 국가지정문화재 11건, 시·도지정문화재 19건이 피해를 입었다.
의성 고운사의 연수전과 가운루(보물)는 불길에 휩싸여 흔적만 남았다. 수백 년간 불교문화를 품어온 전각 두 채는 이번 산불로 완전히 사라졌다. 관덕동 석조보살좌상, 만장사 석조여래좌상 등 불상 유물도 그을음 피해를 입었다.
안동에서는 천연기념물인 구리측백나무숲 0.1㏊가 불에 탔고 만휴정 원림, 백운정, 개호송 숲 등이 잇달아 훼손됐다. 청송 역시 피해가 컸다. 기곡재사, 병보재사 등 수많은 고택과 재사가 불길에 휩싸여 사라졌다.
영양의 천연기념물 답곡리 만지송은 가지 일부가 훼손됐으며 울산 울주군의 목도 상록수림은 0.1㏊ 규모의 피해를 입었다. 강원 정선의 명승 백운산 칠족령 일대는 0.5㏊가 소실돼 경관이 크게 손상됐다. 하동에서는 고려 장군 강민첨을 기리는 두방재의 부속 건물 두 채가 전소됐고 수령 900년을 자랑하던 두양리 은행나무도 일부가 불에 탔다.
사실 산불은 한국 문화유산의 오랜 적이다. 2005년 강원 양양 산불로 사적 제495호 낙산사가 전소됐고 2008년에는 서울 숭례문(국보 제1호)이 방화로 무너져 내렸다. 2010년 부산 범어사에서는 보물 제1461호 천왕문이 화재로 소실되거나 훼손됐다. 한 승려는 “건물은 다시 지을 수 있어도, 그 안에 깃든 시간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 폭우가 삼킨 성곽과 고분
지난해 장마철 쏟아진 기록적 폭우는 전국의 문화유산을 휩쓸며 깊은 상처를 남겼다. 산불이 화마라면, 홍수는 또 다른 파괴자였다.
국민의힘 김승수 의원이 문화재청으로부터 제출받은 ‘2023년 장마철 국가 유산 피해·조치현황’ 자료에 따르면 폭우로 인해 69곳의 국가 유산이 직접 피해를 입었고 9곳의 주변 지가 파손돼 총 78곳에서 풍수해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확인됐다.
구체적인 피해 사례도 속속 보고됐다. 전북 김제 금산사 미륵전(국보)에서는 막새기와 두 장이 떨어져 나갔고, 강원 철원 한계산성(사적)의 천제단 석축 일부가 무너졌다. 충남 공주 공산성(사적, 백제역사유적지구)은 만하루 누각이 침수되고 성벽 일부가 붕괴됐으며 부여 왕릉원 고분군(사적)에서는 봉분 사면이 일부 무너져 토사가 유실됐다. 또 전남 순천 낙안읍성에서는 담장이 무너지고 내아·동헌의 기와가 떨어졌으며 성벽과 기둥까지 손상된 것으로 확인됐다.
◇ 일본, 고베 대지진 계기 문화재 방재 체계 강화
1995년 발생한 고베 대지진은 일본의 문화재 방재 정책에도 중대한 전환점이 됐다. 당시 대규모 피해를 계기로 정부는 지진 대응 체계를 전면적으로 재정비하고 건축물 내진 성능 강화를 위한 제도적 보완에 나섰다. 내진 보강 사업은 문화재를 포함한 주요 건축물까지 확대됐다.
특히 일본은 매년 1월 26일을 ‘문화재 방화의 날’로 지정해 왔다. 이는 1949년 화재로 소실된 호류지 금당(사찰의 중심 전각)을 교훈 삼아 1955년부터 시작된 제도로 문화청 주관 아래 지방자치단체·소방·주민이 함께하는 합동 훈련과 캠페인이 전국적으로 진행된다. 화재를 비롯한 재난으로부터 문화재를 지키기 위한 예방 중심의 체계가 자리 잡은 것이다.
◇ 한국형(K)-문화유산 방재 시스템의 과제
한국 역시 더 이상 복구 중심의 대응에 머물 수 없다. 앞으로는 △문화재별 위험도 평가와 맞춤형 관리계획 수립 △3D 스캔을 활용한 디지털 아카이빙 확대 △지진·산불·홍수에 대응하는 통합 매뉴얼 마련 △주민 참여형 방재단 운영과 정부 차원의 예산 지원이 필수적이다.
지진은 기와를 흔들었고, 산불은 사찰을 태웠으며, 폭우는 성곽과 고분을 무너뜨렸다. 자연재해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가차 없이 집어삼키고 있다. 복구만으로는 부족하다. 예방과 대응, 기록과 교육을 결합한 한국형 문화유산 방재 시스템 구축이 시급하다.
문화유산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건축물을 보존하는 차원을 넘어 우리의 정체성과 기억, 그리고 미래 세대와 이어지는 다리를 지켜내는 일이다.
/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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