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화마의 표적이 되다 <4> 일본의 문화재 방재 정책 성공 사례
태풍, 홍수, 산불 등의 재난은 지자체 단위로 되풀이되지만, ‘재난지역 선포’와 같은 사후 조치에 집중됐다. 사전 예방 차원의 체계적 방재 시스템이 자리 잡지 못한 것이다. 이번 기획은 지자체 실정에 맞는 문화유산 방재 시스템을 구축 필요성을 제시하고, 농어촌 곳곳의 소중한 유산을 어떻게 지켜낼지를 탐구한다. 고령화 등으로 재난에 더 취약해진 자연 속 국가 유산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한국형(K)-문화유산 방재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마련해야 하는데, 일본의 경험을 토대로 경북은 물론, 전국 차원의 정책 수립에 필요한 시사점을 제공할 예정이다.
사찰엔 방화문·스프링클러 설치
산림 인접 지역 방화대·내진 보강
홍수·쓰나미엔 모래주머니 활용
지자체, 지역 맞는 방재계획 수립
사찰 고택 소유자, 일상점검·보존
주민 주도적 참여 ‘복구보다 예방’
<글 싣는 순서>
1. 산불 등 재난에 취약한 국내의 문화유산
2. 실제 재난으로 소실된 지역별 문화유산
3. 일본의 문화재 방재 연구기관 경험
4. 일본의 문화재 방재 정책 성공 사례
5. 한국형(K)-문화재 방재 정책의 방향성
◇ 제도적 기반과 법적 토대
일본의 문화재 방재 정책은 1950년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을 기초로 한다. 이 법은 1949년 나라 호류지 금당 화재 사건을 계기로 마련됐다. 금당 내부 벽화가 불타버리자 ‘국가의 보물도 재해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라는 비판이 쏟아지면서 사회적 충격이 확산했고, 문화재를 법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후 이 법은 대형 지진과 화재를 거치며 방재 조항이 강화됐다. 현재는 문화청이 정책과 지침을 마련하고 내진 보강과 방재 설비에 대한 재정 지원을 맡는다. 지자체는 지역 문화재에 맞는 방재계획을 수립하고 사찰이나 고택 같은 소유자는 일상 점검과 보존을 담당한다. 대형 재해 발생 시에는 문화청 주도로 ‘문화재 레스큐’가 가동돼 전문가가 파견되고 관·민 협력으로 응급조치가 이뤄진다.
◇ 교토 니넨자카 화재
2024년 1월 교토의 대표적 관광지 니넨자카에서 발생한 화재는 일본 문화재 방재 정책의 성과를 보여준 대표 사례다. 좁은 골목길에 전통 목조 건물이 밀집한 이곳은 자칫하면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러나 화재 발생 직후 주민들이 시민용 소화전을 가동해 불길을 초기 단계에서 잡는 데 성공했다. 이 소화전은 교토시와 리쓰메이칸대 역사도시방재연구소가 협력해 설치한 장치로 평소 주민 훈련을 통해 사용법이 공유돼 있었다. 덕분에 소방차가 도착하기 전 불길이 확산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교토시는 이 사건을 ‘지역 공동체가 주체가 된 문화재 방재의 모범’으로 평가했다.
◇ 노토 반도 지진
2024년 1월 1일 발생한 규모 7.6의 노토 반도 지진은 이시카와현 전역에 큰 피해를 남겼다. 사망자가 수백 명에 달했고, 수십 건의 지정 문화재가 붕괴하거나 손상됐다. 그러나 2007년 지진 이후 내진 보강을 거친 건물은 이번에도 무사했다. 문화청과 이시카와현은 즉각 ‘문화재 레스큐’를 가동해 전문가를 파견, 붕괴 건물에서 불상과 고문서를 반출하고 응급 조치를 시행했다. 특히 이시카와현은 문화재 위치를 디지털 대장으로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해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일부 시설은 방화·내수 보존상자와 반출 매뉴얼을 사전에 준비해 현장에서 즉시 활용할 수 있었다. 문화청은 “사전 보강, 긴급 레스큐, 디지털 관리, 현장 장비 준비가 결합된 다층적 성과”라고 평가했다.
◇ 도시형 문화재 방재와 주민 협력
교토·나라와 같은 전통 도시는 목조 건물이 빽빽이 들어서 화재 확산 위험이 높다. 일본은 이런 곳에 ‘연단건물’ 개념을 적용해 건물군 단위의 내화성을 높이고 피난로를 확보하고 있다. 교토시는 골목마다 소형 소화 펌프와 호스를 비치하고 주민들이 이를 직접 다루는 훈련을 주기적으로 진행한다. 또 전통 가옥 내부 통로를 활용해 화재 시 대피로로 쓸 수 있도록 했다. 주민 참여는 제도화된 훈련으로 이어진다. 일본은 매년 1월 26일을 ‘문화재 방재의 날’로 지정해 전국 문화재 현장에서 일제히 방재 훈련을 실시한다. 교토는 여름에도 한 차례 추가 훈련을 시행한다. 문화청은 “문화재 방재는 지역사회가 주체가 될 때 실질적 성과를 거둔다”고 강조한다.
◇ 미래 전망과 과제
일본은 최근 ICT, AI, 드론, 3D 스캔 등 첨단 기술을 문화재 보호에 적극 도입하고 있다. 문화청은 2023년 기준 3만 건 이상의 문화재를 디지털 아카이브화했으며 일부는 디지털 트윈으로 복원해 재난 발생 시 신속 복원이 가능하도록 준비하고 있다. 드론은 지진과 홍수 이후 문화재 피해 현황을 신속히 파악하는 데 활용된다. 기후변화로 폭염, 산불, 홍수 같은 재해가 잦아지면서 문화재는 더욱 큰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일본은 복원보다 예방에 무게를 두고 정책을 재설계하고 있다. 한국 역시 산불로 인한 문화재 피해가 잦은 만큼 일본의 예방 중심 정책과 주민 참여형 성공 사례는 중요한 참고가 될 수 있다.
◇ 교토가 주는 교훈
일본의 문화재 방재 정책은 법과 제도, 성공 사례만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이다. 그러나 책상 위 자료만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고민이 있다. 기자는 해답을 얻기 위해 7월 13일 교토 리쓰메이칸대 역사도시방재연구소를 찾았다. 연구소 내부는 마치 재난의 기록관 같았다. 벽면에는 지진과 화재로 무너진 문화재 사진과 복구 과정을 담은 패널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요시토미 신타 교수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일본의 경험과 한국이 참고할 과제를 조목조목 말했다.
요시토미 신타 교수는 “일본 문화재 건조물은 한국보다 산중 입지가 적어 산불 피해 사례가 드문 대신에 모든 건조물은 ‘문화재 보존·활용계획’을 작성해 방재계획에 포함하면서 연구기관과 연계해 고도화된 방재계획을 마련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문화재보호법’을 기반으로 국가·지자체·민간이 협력한다”라면서 "문화청은 정책과 재정 지원을, 지자체는 지역 문화재 방재계획을, 소유자는 일상 점검을 담당한다. 대형 재해 시에는 문화재 레스큐 체제가 가동된다”고 문화재 방재 체제를 설명했다.
자연재해 대응 방식에 대해서는 평상시 주민 훈련과 매뉴얼 정비가 이뤄지고, 사찰에는 방화문·스프링클러를 설치한다고 했다 또, 산림 인접 지역은 방화대를 두고 지진에는 내진 보강을 실시하며, 홍수·쓰나미에는 모래주머니·고상화·디지털 아카이브를 활용한다고 했다.
요시토미 신타 교수는 “한국은 산악 지형 문화재가 많아 산불 위험이 높다. 일본은 지형적 위험이 적어 대비가 부족했지만 앞으로 강화가 필요하다”라면서 “문화재는 전통 기법을 유지해야 하므로 내화 자재로 교체하기는 어려워서 물 공급·효과적 방수·피해 최소화가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기후변화로 재해는 늘어날 것이고, 사건 후 특별 예산으로 단기 대응하는 방식은 지속적이지 못하다"라면서 "문화재 방재를 사회적·교육적·공동체적 가치로 인식하고 사회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글·사진/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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