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홍수, 산불 등의 재난은 지자체 단위로 되풀이되지만, ‘재난지역 선포’와 같은 사후 조치에 집중됐다. 사전 예방 차원의 체계적 방재 시스템이 자리 잡지 못한 것이다.
이번 기획은 지자체 실정에 맞는 문화유산 방재 시스템을 구축 필요성을 제시하고, 농어촌 곳곳의 소중한 유산을 어떻게 지켜낼지를 탐구한다.
고령화 등으로 재난에 더 취약해진 자연 속 국가 유산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한국형(K)-문화유산 방재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마련해야 하는데, 일본의 경험을 토대로 경북은 물론, 전국 차원의 정책 수립에 필요한 시사점을 제공할 예정이다.
<글 싣는 순서>
1. 산불 등 재난에 취약한 국내의 문화유산
2. 실제 재난으로 소실된 지역별 문화유산
3. 일본의 문화재 방재 연구기관 경험
4. 일본의 문화재 방재 정책 성공 사례
5. 한국형(K)-문화재 방재 정책의 방향성
◇ ‘괴물 산불’이 삼킨 문화재
지난 3월 영남권 하늘은 붉은 연기와 불길로 뒤덮였다. 낮인지 밤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둑한 하늘 아래 산등성이마다 불덩이가 튀어 오르며 전선을 따라 불길이 번졌다. 마을 사람들은 젖은 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은 채 허겁지겁 짐을 챙겼지만 거센 화염 앞에 대부분의 살림살이는 두고 달아나야 했다. 공포와 혼란 속에서 누군가는 울음을 터뜨렸고 누군가는 멍하니 타들어 가는 집과 산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번 산불로 5개 시·군의 주택 4457채가 불에 탔고, 27명이 소중한 목숨을 잃었다. 이재민도 3501명으로 잠정 집계됐다. 피해 산림은 약 10만 ㏊에 이르러 서울시 면적을 크게 웃돌았다. 강풍 탓에 물줄기는 허공으로 흩어졌고, 불길은 바람결에 따라 순식간에 방향을 바꿨다. 진화작업에 나선 한 소방대원은 “물이 닿기도 전에 불길이 다음 능선으로 넘어가 있었다”며 당시의 무력감을 전했다.
문화재 피해는 더욱 뼈아팠다. 천년 고찰인 경북 의성의 고운사가 전각 대부분을 잃었고, 안동 만휴정 원림과 청송의 고택, 서당 등도 불길에 휩싸였다. 안동 지산서당·구암정사, 영양 송석재사 등 조선시대 건축물 또한 상당수가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폭발음처럼 ‘쾅’ 하고 기와가 튀어 오를 때마다 주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쳤다. 매캐한 연기는 골짜기를 메우며 호흡을 막았고, 불길이 옮겨 붙은 나무들은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주민 박모씨(68)는 떨리는 목소리로 “산 전체가 불을 뿜는 괴물 같았다. 그 앞에서는 사람도, 기계도 아무 힘을 쓰지 못했다”고 말했다.
천년 고찰 고운사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불길은 대웅전 기단까지 파고들며 불상을 위협했다. 사찰 관계자는 “소방대가 철수한 뒤에는 두 손 놓고 불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주민들은 허탈하게 무너진 절터를 바라보며 “집이 타는 것도 서럽지만, 조상들이 지켜온 유산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걸 보니 더 가슴이 미어진다”고 울음을 터뜨렸다.
화마는 건물을 삼키는 데 그치지 않았다. 산속에서 지켜온 천년의 기억까지 함께 태워버렸다. 불길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잿빛 기와 조각과 그을린 기둥뿐이었다. 현장에서는 “문화재를 지키기에는 우리의 방재 체계가 너무 허술했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 노인은 “나라가 재난지역 선포만 할 게 아니라, 애초에 문화재를 지킬 방법을 마련했어야 한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 자동소화설비 ‘제로’···제도의 공백
이번 피해는 단순한 돌발 상황이 아니라 예견된 재난이었다. 지난 6월 서울 성북동 명승 ‘성북동 별서’ 내 목조건축물 송석정에서 발생한 화재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당시 건물에는 스프링클러 등 자동소화설비가 전혀 설치돼 있지 않았고, 결국 소방당국은 기와 지붕을 굴착기로 철거하는 ‘파괴 진화’에 나서야 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사례가 비단 송석정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임오경 의원실이 국가유산청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국내 주요 목조 문화유산 대부분은 자동소화설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다. 서울 흥인지문(보물),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국보) 등 국가적 상징물도 포함돼 있다.
제도의 허점도 뚜렷하다. 현행 ‘소방시설 설치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은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에 자동소화설비 설치를 의무화하고 있으나, 전통 사찰·문화재·종교시설은 예외로 규정돼 있다. 이 때문에 전국의 목조 문화재 상당수가 여전히 소화기나 소화전에만 의존하는 실정이다.
◇ 반복되는 관리 부실
국가유산청이 지난 4년간 소방 점검을 벌인 결과에 따르면, 138건의 개선 권고 중 절반을 넘는 70건(50.7%)이 소화기 문제였다. 여기에는 ‘안전핀이 빠진 소화기’, ‘노후로 인한 기능 저하’, ‘감지기 미작동’ 등 시설 기본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사례들이 포함됐다. 특히 점검 지적 건수는 2021년 9건에서 2022년 19건, 2023년 20건, 그리고 2024년 22건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경북 지역의 구체적 현장 점검 결과도 같은 흐름을 보여준다. 안동 봉정사에서는 ‘소화기 분산 배치 필요’, 하회마을 양진당에서는 ‘부엌에 소화기 비치 필요’, 청송 후송당 고택에서는 ‘주기적 점검 요망’이라는 권고가 내려졌다.
소화시설 외에도 화재 대응 핵심 장비의 고장 사례가 잇따랐다. 자동화재속보 통신선 불량, 불꽃·연기 감지기 미작동 등 58건의 설비 문제가 최근 4년간 지적됐다.
◇ 기후위기와 산불
기후위기가 한국의 문화유산을 지키는 방재 체계의 허술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기상청에 따르면 지난 100여 년간 한국의 평균 기온은 약 1.8도가 상승했다. 여기에 가뭄과 강풍이 겹치면서 산불은 갈수록 대형화·장기화하는 양상이다.
산림청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불은 연평균 546건에 이른다. 특히 2022년에는 756건으로 가장 많은 건수가 기록됐고, 피해 면적도 2만4797㏊에 달했다. 이처럼 산불 발생 빈도가 증가하면서 전통 목조건축물 등 국가유산은 언제든 재난의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취약성을 안고 있다.
영남권 산불 또한 이러한 기후 조건이 겹친 결과였다. 당시 순간 풍속은 시속 20m를 넘었고, 건조주의보가 이어진 탓에 불길은 순식간에 확산했다. 국제 연구기관 ‘세계기상특성(WWA)’은 이번 한국 대형 산불을 분석하며 “기후변화로 인해 유사한 조건이 발생할 확률이 약 2배 높아졌고, 화재 강도 역시 평균보다 15%가량 강해졌다”고 평가했다.
◇ 대안은?
문화유산 방재 체계의 취약성은 이미 여러 차례 드러났지만, 법과 제도는 여전히 뒷걸음질에 머물러 있다. 현행 ‘소방시설 설치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는 목조 문화재와 같은 국가유산에 스프링클러 등 자동소화설비를 의무화하는 조항이 없다.
일본 문화청은 2011년 동일본대지진 이후 문화재 방재 지침과 매뉴얼을 전국적으로 보급했으며, 문화재보호법 개정을 통해 방재 시설 설치와 내진·방화 강화에 국가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 또 지자체와 주민, 연구기관이 합동으로 방재 훈련을 정례화해 대응력을 높이고 있다.
특히 교토의 ‘리츠메이칸대학 역사도시방재연구소'는 아시아 각국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국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문화유산 방재 시뮬레이션 훈련과 재난 대응 매뉴얼 보급이 정례화됐으며 연구 성과는 국제 학술지를 통해 공유된다.
국내에서도 유사한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국가 차원의 통합 방재 기관 설립과 더불어, 자동소화설비·열감지·원격 모니터링 시스템을 문화재별 특성에 맞춰 확충하는 것이 시급하다. 또, 산림청과 소방청, 지자체가 함께하는 재난 대응 네트워크를 제도화해 초기 대응력을 높이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문화유산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의 뿌리이자 후손에게 물려줄 삶의 자산이다. 이번 영남권 산불은 그 뿌리를 지키는 일이 결코 뒤로 미룰 수 없는 과제임을 다시 확인시켰다. 지금 필요한 것은 사후 복구가 아니라, 피해를 막아내는 선제적이고 과학적인 방재 시스템이다.
/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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