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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효를 상징하는 삼구정과 함께하는 마을 숲, 삶의 교훈으로

나뭇잎이 물드는 가을에 농촌 마을을 찾아들면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바로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 머문다는 당우와 곱게 물들어 가는 당산나무가 한 세트가 되어 풍요롭고 평화로운 가을을 맞이하는 풍경이다. 또한 굽이쳐 흐르는 계곡물을 바라볼 수 있는 바위 언덕 언저리나 마을의 동산 숲속의 스토리가 있는 정자와 나무는 부부의 인연처럼 절경의 주인공이 되어 한 폭의 가을 풍경화를 연출한다. 가던 길을 멈추고 가을 풍경화 속으로 빠져들어 그들의 품에 안겨 옛이야기를 들어본다. 끝없는 욕망과 불안에 지친 마음은 안정을 찾고 야생마 같은 거친 나의 삶에도 고운 단풍 물이 스며든다. 농촌 마을의 당우와 당산목, 정자와 노거수는 풍요와 평화를 선물하는 우리 전통 민속 생명 문화의 자연자산이다. 특히 안동은 노거수의 고장이다. 서울 면적의 2.5배나 클 뿐만 아니라 어느 지역보다 마을에는 노거수가 많이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당우와 정자도 많다. 안동 풍산에서 하회마을로 들어가다 보면 오른쪽에 넓은 들을 바라보고 있는 소산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지방 문화재가 무려 7점이나 있다. 이런 문화재를 품게 된 것도 마을 숲속에 있는 삼구정과 느티나무와 소나무 등 노거수가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공직에 있을 때 안동 출신 국장으로부터 지역 신문 기사를 펼쳐 놓고 열변을 토하면서 소산마을을 자랑하던 것이 아삼아삼하다. 안동김씨 집성촌 마을로 전통과 효심이 살아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라면서 역사적 고증을 들어가면서 설명하는 모습에서 안동인의 자긍심이 짙게 묻어났다. 그리고 한참 뜸을 들이신 후 “이 마을을 좀 더 품위 있는 역사적 마을로 가꾸어 볼 아이디어가 없을까?”라고 물었다. 안동은 우리나라 삼대 문화권 중 유교문화권의 중심지이다. 안동은 정신문화의 수도라는 표어를 내걸고 물질문명의 이 시대에 행복의 근원은 정신에 있다면서 끈질기게 목소리 높이고 있다. 그 자긍심 또한 대단하다. 이러한 주민의 정신 바탕에는 정자와 마을 숲, 노거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삼구정만 해도 그렇다. 조선 시대 문신 김영수와 그의 형제들이 어머니 예천권씨를 위해 1496년 마을 동산 위에 정자를 짓고 그곳에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세 개 있는 것을 보고 삼구정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정자 이름에서 어머니가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기원하는 아들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정자와 함께 있는 느티나무와 소나무 역시 우리 삶에 중요한 가치 개념으로 삼고 있는 건강, 장수, 다산, 절개, 사랑 등을 상징하고 있다. 이러하니 마을에 훌륭한 인물들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궁하면 통한다고 마침 중앙정부에서 ‘2002 월드컵 축구 경기 맞이 공원 조성’ 사업비가 내려왔다. 삼구정 주변의 마을 숲과 문화재 등을 연계하는 역사가 숨 쉬는 인문, 생태 마을을 조성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의 문화재와 함께 삼구정에 담긴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마을을 품은 숲과 숲을 이룬 나무의 중요성을 나타내고 싶었다. 마을 주민과 이장, 안동김씨 종친회장 등 관계 어르신들과 삼구정에 모여 사업 내용을 설명하고 의견을 구했다. 종친회에서도 문중 재산을 희사하겠다면서 흔쾌히 동의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열변을 토하면서 소산마을과 안동을 자랑하던 안동 출신 김휘동 국장이 2002년 7월 1일 자로 민선 3기 안동시장으로 취임했다. 아마 감회가 남다르지 않았나 싶다. 때마침 환경부에서 주관하는 자연보호에 대한 의식 함양과 소재를 제공하여 방송을 포함한 문화·예술 부문과의 자연생태에 대한 공감대 형성을 범국민운동으로 확산하고자 방송작가, 소설가, 시인 등 원로작가 생태기행이 있었다. 2000년 3월 10일부터 1박 2일간 26명으로 구성된 원로작가 자연생태 기행 대표로는 경북 청송 출신 소설가 김주영 작가였다. 자연생태 기행 안내를 맡아 일정 중에 하회마을 대신 소산마을을 방문할 것을 권했다. 김명자 환경부 장관도 일행과 함께 소산마을을 방문했다. 문화재는 물론 삼구정 정자와 마을 숲, 노거수를 둘러보고는 전통과 효심이 살아있는 마을이라면서 모두 감탄했다. 원로작가들에게 마을 숲과 노거수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과 공익적 환경가치를 설명하고 글의 소재로 많이 사용해 달라고 부탁도 했다. 안동 부용대 옥연정사에 갔다. 버스에 내리면서 두 눈을 수건으로 가리고 손을 잡고 오르막 숲속 오솔길을 택해 부용대로 걸어서 올라갔다. 그리고 정상에서 수건을 내렸다. 모두가 놀랐다.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을 끼고 있는 하회마을의 자연경관에 감탄을 자아내었다. 하회마을과 만송정 숲, 굽이 흐르는 푸른 낙동강과 반짝이는 모래사장이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했다. 하회마을에 갔으며 전체의 마을 경관을 조망할 수 없을 것인데 여기로 오기를 잘했다고 모두 이구동성으로 칭찬했다. “사랑하는 이여 언제라도 님이 오시는 날만 기다릴지니 아니 오신 듯 다녀가시옵소서”라는 원로작가들의 표어가 마음에 들었다. 가끔 소산마을을 찾아 삼구정 누대에 올라 주변 숲의 노거수를 바라보기도 하고 숲속을 거닐어 본다. 어머니의 건강을 보살피는 아들의 효심이 얼마나 극진했으면 삼구정이라는 이름을 지었을까, 그리고 어머니는 또 얼마나 자식을 사랑했으면 이러한 자식의 효심을 불렀을까, 오늘날 옛 제도가 맞지 않다고 야단이다. 모두 버리더라도 부모의 사랑과 자식의 효도는 영원했으면 하는 바람을 해 본다. 삼구정 아래 이곳 출신 삼당 김영이 지은 빗돌에 새겨진 “빈 배에 섯는 백로/ 벽파에 씻어 흰가/네 몸이 저리 흰들 마음조차 흴쏘냐/ 만일 마음이 몸과 같으면 너를 좇아 놀리라.”라는 시조 한 수는 소산마을의 순결하고 청렴한 정신을 가장 잘 노래한 시조라고 여겨진다. 소산마을의 삼구정 주변에 자리한 느티나무 노거수는 그중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 존재이다. 삼구정을 건립할 때 심었다면 나이가 530살이 된다. 나무는 마치 오랜 세월 동안 침묵하며 우리에게 전해줄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조선 시대의 유교 문화가 아직도 살아 숨 쉬는 마을이었고, 그 중심에는 삼구정과 느티나무 노거수가 있다. 세월의 흐름을 견디며 마을의 역사를 지켜본 생명의 증인이자, 마을 주민들의 삶을 묵묵히 지켜봐 준 친구였다. 노거수를 보호하는 이유는 단지 오랜 세월을 살아남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오랜 시간 동안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서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전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오랫동안 살아있음이 그리고 앞으로 오랫동안 살아갈 생명이기에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효를 상징하는 삼구정과 함께하는 마을 숲, 노거수는 그저 오래된 자연물이 아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살아남은 역사이자,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교훈이다. 소산마을 지방문화재는 뭐가 있을까 삼구정(三龜亭)은 장수의 상징인 거북처럼 생긴 세 개의 바윗돌이 정자 뜰에 놓여 있어 붙여진 것으로, 노모의 장수를 비는 뜻도 담겨 있다. 청원루(淸遠樓)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 선생이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풀려난 뒤 이곳에 내려와 머물면서 ‘미운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뜻으로 청원루라 이름 지었다. 양소당은 안동 김씨 종택(安東金氏 宗宅)이다. 조선 성종(成宗) 때의 명신 김영수(金永銹) 선생이 연산군(燕山君) 7년(1501년)에 지은 집이기도 하다. 동야고택은 공자가어(孔子家語)의 노인(魯人) 동야필사(東埜畢事)를 인용 영조(英祖) 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뒤 면시(面試)에서 답안에 공자가어의 노인 동야필사를 인용한 것에서 유래했다. 묵제고택은 감찰공파(監察公派) 자손이 누대에 걸쳐 세거(世居)해 온 집이다. 비안공 구택은 조선 세종(世宗) 때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지낸 안동 김씨 김삼근(金三根, 1419-1465) 선생이 살던 집이다. 삼소재는 선안동(先安東) 상락 김씨(上洛金氏) 시조의 18대손인 김용추(金用秋, 1651-1711) 공의 종택이다, 현종(顯宗) 15년(1674년)에 건립됐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9-04

평생을 내어주며 속이 텅 비어버린 우리네 부모님 같은…

오동나무는 아니지만 오동나무와 비슷하다고 하여 개오동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잎이나 꽃의 생김새와 냄새가 오동나무와 비슷하고 목재도 오동나무처럼 윤이 난다. 습기에 견디는 성질이 강하여 가구나 악기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것 또한 비슷하다. 둘 다 양지에 사는 속성수로서 수명이 짧은 선구성 하록 교목이다. 개오동나무는 능소화과로서 긴 콩꼬투리를 닮은 삭과의 길이가 20~35cm이지만, 현삼과의 오동나무는 둥근 콩 모양의 삭과가 5cm 정도로 완전히 다른 종류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거수인 개오동나무 노거수가 경북 청송군 부남면 홍원리 547번지에 살고 있다. 나이 450살, 키 14m, 가슴둘레 4.25m로 민속문화와 생태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8년 12월 23일에 천연기념물 401호로 지정되었다. 매년 정월 보름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내고 있는 귀한 민속 식물자원이다. 개오동나무를 만나러 갔다. 마을로 들어가는 첫째 나무는 아직 젊은 청춘 나무이고 둘째, 셋째는 늙은 부모님이랄까 할아버지 할머니 나무이다. 나무의 모습에서 우리 세대의 부모님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세대의 부모님은 자식들을 위해 무한한 사랑을 주시면서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입는 옷이며, 먹는 음식이며, 자는 잠자리조차 변변치 못했다. 먹을 것이 있으면 먼저 자식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근검절약하여 한푼 두푼 모든 돈은 모두 자식을 위한 일에 쏟아부었다. 문풍지가 떨면서 소리치는 추운 겨울, 따뜻한 방구들 아랫목은 늘 자식들에게 양보하고 자다가도 깨어나 포근한 솜이불을 자식 몸을 덮어주느라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늘 부족함을 느끼고 미안한 마음으로 살았다.그런데 우리는 우리만을 위해서 고집을 부렸다. 더 좋은 것, 더 풍족한 것을 원했다. 그러다 보니 늘 부모님을 원망하고 그 못남을 불평했다. 떼쓰고 대꾸하고, 심지어 울고불고하면서 항의의 표시로 입을 닫고 침묵하거나 심지어 가출까지 했다. 부모님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기는커녕 친구와 비교하고 이웃과 비교하면서 못난 부모님으로 마음을 상하게 하고 가슴을 후며 파는 아무런 생각도 죄의식도 없이 막무가내로 철없는 행동을 해 댔다. 이제 속이 시꺼멓게 타버려 아무것도 내어줄 것도 없다. 개오동나무 노거수처럼 몸은 찢어지고 속은 텅 비었다.개오동나무 노거수 역시 가지는 욕심을 내어 어미로부터 더 많은 것을 빼앗으려다 이제는 한 몸에서 태어난 가지가 둘로 나누어졌다. 꼭 자식들이 부모님 재산을 더 가지려고 싸움하다 의절한 것 같아 씁쓰레한 기분마저 들게 했다. 노거수 또한 젊은 시절에는 우람하고 멋있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몰골이 말이 아니다. 내어줄 것 아니 내어줄 것까지 다 내어주고 자신은 허기와 외풍에 견딜 수 없어 겨우 주민들의 외과 수술과 지팡이 선물의 도움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마을 주민들의 도움으로 과거의 영광을 안고 추억하며 굳건히 살아가고 있다.봄이 되면 또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무더운 여름을 견디면서 가을이 되면 잘 익은 긴 콩깍지 탄생시킨다. 겨울이 되어도 긴 콩깍지 열매 떠날 채비도 하지 아니하고 나뭇잎처럼 끈질기게 매달려 있다. 어미로부터 독립할 생각을 하지 않고 삭막한 겨울까지 부모의 품에 안겨있다. 오늘의 젊은 세태를 보는 것 같아 열매가 안쓰러움을 넘어 얄밉기까지 하다. 오늘날 젊은 세대들은 결혼과 출산을 늦추거나 부모님 품에서 살아가는 캥거루족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신조어가 생기고 있다. 부모님은 노후의 자신 몸조차 보전키 어려운데 이 또한 무슨 업보란 말인가.우리의 부모님 세대는 일제 강점기 시대 나라 잃은 슬픔을 안고 나라도 개인도 곳간이 텅텅 비어 자력으로 어찌해 볼 도리도 없는 형국이 되었다. 침략자 일본은 시도 때도 없이 갖은 명목을 붙여 공출을 요구했다. 이 모두가 못 배운 탓이라 여기고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는 데 희생했다. 자신의 노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식들이 성공하고 행복한 모습만 꿈꾸며 살아왔다. 장성한 자식들은 부모의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며 안갚음에는 인색했다. 오히려 부담스러워하고 외면하기까지 하기도 한다. 노거수는 외세의 침략과 어려운 환경에서도 주민들은 노거수를 경외하면서 보살펴 주었다. 침략자들도 물러가고 우리 자력으로 국력을 키우고 살만해지니 이제는 노거수를 그전처럼 대해주지 않고 있다. 주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오히려 경제발전에 방해가 된다고 눈치까지 주고 있어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천연기념물 홍원리 개오동나무 노거수는 마을 주민들의 지극정성 보살핌으로 노후를 행복하게 보내고 있다.서울에서 고향인 청송 홍원리까지, 다시 대구에서 서울까지 걷으면서 길 위에서 만나는 서민의 이야기와 지난 역사를 오늘날 재해석한 ‘남듬길(進處道)’의 저자 조대환 변호사가 이곳 홍원리 출신이다. 험난한 정치적 환경 속에서도 원칙을 지키려 했던 조 변호사의 올곧은 애국충정을 책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자서전을 넘어, 권력과 법치주의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인간적 고뇌를 깊이 있게 조명했다. 그의 부모는 자신의 중한 병을 돌아가실 때까지 숨기면서 자식이 나라의 공무에 전념하게 했다. 또한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 심상택 이사장도 개오동나무 노거수를 보고 자란 홍원리 출신이다. 산림청 산림복지국장으로 재임 시 인문학에 관심이 많아 한국산림문학회 활성화에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상투를 고집하고 사신 분으로 ‘상투할배집’이라 불리었다 한다. 시골 농촌의 어려운 환경에 자식을 공부시키고 또 공무에 전념하기 위하여 자신의 희생을 당연시한 이러한 힘은 지난 나라 잃은 슬픈 역사의 경험에서 우러나는 우국 충절이 아닐까.우리 부모 세대의 어르신들은 오천 년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업적을 남기신 분들이다. 보릿고개라는 헐벗은 삶 속에서 인재를 양성하여 산업화를 이룩하였고, 이어 민주화도 이루었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양날의 칼처럼 좀처럼 양립하기가 어렵다. 이를 인재 양성으로 극복한 우리 부모 세대들의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지혜가 돋보인다. 나라 발전에 공헌한 돌아가신 어르신들에게는 영혼을 위로하고 살아계시는 어르신들에게는 예와 효를 다할 것을 다짐해 본다.이웃 꽃밭고개라는 화전등(花田嶝) 마을에 항일의병기념공원이 있다. 적원일기(赤猿日記)라는 청송지역에서 일어난 의병 활동의 진중일기가 청송에서 발견된 것도 우연만이 아닌 것 같다. 청송에서 공직에 근무할 때 항일 의병기념관 건립에 정성을 쏟았다. 청송은 자연도 수려하지만, 우국충정의 고장임을 새삼 느꼈다. 조대환 변호사 부모님 같은 분이 어디 한 분밖에 없겠는가. 대부분 부모님이 다 그러하실 것이다. 개오동나무 노거수를 뒤로하고, 아내와 함께 청송 항일의병기념공원을 방문하여 항일 의병 역사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부모 세대 어르신들의 희생정신에 고개를 숙였다. 청송 항일의병기념공원은…경북 청송군 주왕산면 상평리 313-1에 위치했다. 2011년 전국 항일 의병들을 추모해 ‘항일의병기념공원’이 화전동에 세워졌다. 의병의 날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6월 1일이다. 2022년 1월부터 경북도 독립운동기념관에서 위탁 운영하고 있으며, 연락처는 054-870-6550. 입장료와 주차비는 무료다. 시설물은 창의루(倡義樓), 동재 인의예지재(仁義禮智齋), 서재 효제충신재(孝弟忠信齋), 충의사(忠義祠) 등. 2701개의 위패가 봉안돼 있고, 무명의병용사충혼탑과 2개의 명각대(名刻臺)가 있다.적원일기(赤猿日記)는 청송의진이 결성되기 직전인 1896년 3월 2일부터 본진의 활동이 종료된 5월 25일까지 85일간의 청송의병 활동을 김숭진(金崧鎭), 심의식(沈宜植), 오세로(吳世魯), 서효격(徐孝格) 등이 매일 상세히 기록한 진중일기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8-28

싫고 좋음 없이 모두를 품어 안는 한수정과 함께 400년

41. 봉화 한수한반도 야생에서는 멸종되었다는 백두산 호랑이를 만났다. 호랑이는 우리 전통 민속문화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찰이나 마을에 있는 산신각에는 호랑이와 함께 백발에 수염이 있는 신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한반도 지형을 호랑이가 포효하는 모습으로 상징하거나 용감한 사람을 호랑이로 일컬었다.한민족 삶의 곳곳에 호랑이는 용감한 기질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로 인하여 호랑이의 용감무쌍한 기질을 은연중에 우리 민족의 기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 운동과 일제 강점기 때의 독립운동이 활발히 일어난 것도 모두 이러한 용감무쌍한 호랑이의 상징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경북 봉화 문수산 자락 수림 속에서 포효하는 호랑이의 모습이 얼마나 의젓하고 품위 있는지, 붉은 털에 검은 줄무늬를 한 호랑이는 용감무쌍 그 자체란 생각이 든다. 고개를 들고 “어흥”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산울림이 크게 메아리쳐 계곡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뭍 짐승이 놀라 숨죽이는 순간에 한 바퀴 몸을 뒹군다. 날렵 용감무쌍한 백두산 호랑이의 기상이 내 가슴에 박히는 순간이었다.상징성 문화로 백두산 호랑이와 마을 노거수는 우리 전통 민속문화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우리 민족의 용감한 기상을 상징하는 백두산 호랑이는 야생에서 그 실체가 사라져 민속문화에서도 서서히 잊혀 가는 반면에 다행히 노거수 문화는 아직도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한수정(寒水亭)은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134번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 건축물이다. 정자 3면에 맞닿게 연못을 만들고 주변에는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다. 작은 생태계가 만들어졌다. 연못은 해와 달, 정자, 나무 등 찾아온 모든 물상을 좋아하고 싫어함을 가리지 않고 모두 품어 안는다. 연못에 비추어진 물상을 보면서 포용의 의미를 배운다. 느티나무 노거수는 마을 공동체의 중심이 되어 주민들의 결속과 단합을 그리고 장수, 건강, 절개, 끈기 등 노거수의 다양한 상징성이 우리 삶의 여정에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찬물같이 맑은 정신으로 공부하는 정자라 하여 한수정이라 이름을 붙인 이곳은 조선 선비문화를 비롯한 산림 문학 등 인문학적인 소양을 배울 수 있는 도서관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정자와 연못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 안에 숨 쉬며 살아가는 느티나무 노거수가 있다. 한수정이 1608년에 세워졌다고 하니 느티나무 역시 그 당시에 조경수로 심었을 것이다. 그리고 보면 나이가 400년 훌쩍 넘었다. 봉화 한수정은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47호로 지정되었다가, 다시 대한민국의 보물 제2048호로 승격되었다. 그런데 정자와 함께한 느티나무 노거수는 공적에서 제외되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400여 년 전 담장 안의 나무가 담장을 허물고 바깥세상에 그 억울함을 토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답할 때가 아닌가 싶다.사실 호랑이를 만날 수 있게 된 것도 우연한 기회라면 기회였다. 경북 봉화군 춘양면에 소재한 한국산림과학고등학교 제2회 한국산림문학회 미래목 청소년 글짓기 공모전 시상식에 참석했다. 이날 행사를 스케치 해보면 김선길 산림문학회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장차 산림 분야의 진출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게 하는 행사로써, 산림 분야의 미래를 밝히는 청소년들이 꿈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이서연 부이사장은 작품 심사 소감을 설명하면서 우수한 작품이 많이 나왔다며 제한된 수상자를 가리는데 힘들었다고 했다. 윤정란 산림과학고등학교 교장은 글짓기 공모전에서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데 큰 힘이 되었으며 앞으로 산림 문학적 소양을 갖도록 지도하는 데 힘을 쏟겠다고 했다. 황욱준 경상북도 산림레저관광과장이 도지사를 대신하여 운문부 대상인 경북도지사상을 ‘우리 반은 숲이다’라는 작품을 쓴 사공효주에게 수여했다. 최영태 남부지방산림청장이 산림청장을 대신하여 산문부 대상인 ‘서정은 희망과 무한을 안고’라는 작품을 쓴 오재현에게 수여했다.행정, 교육, 산림문학회가 삼위일체가 되어 미래목을 육성 발전시킨다면 우리의 금수강산은 지구촌 제일의 강산이 되지 않을까. 인문학적 소양은 개인의 삶과 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미래목 청소년 글짓기 공모전” 사업이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행사를 마치고 ‘백두대간수목원’ 백두산 호랑이를 보러 갈 것을 모두 원했다. 늦은 시간이라 볼 수 있을지 조마조마했는데 마침 수목원에 근무하고 있는 동문인 안경환 박사의 친절한 안내로 백두산 호랑이 ‘무궁이’를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한수정은 우리 조상의 선비문화와 산림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지난 가을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마루에 앉아 느티나무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나무는 우리가 늘 마시는 공기를 신선하게 해주고, 마시는 물을 깨끗하게 정화 시켜 주고, 주변의 소음을 줄여 준다. 침침한 눈을 맑게 해주고, 오감을 활성화하여 기분을 좋게 해준다. 나무와 함께 있을 때 가장 편안한 기분이 든다. 왜일까? 이는 영적인 충만감에 젖어있는 나무들의 심리적 진동을 인간이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심호흡을 해 본다. 자연에 가까워지면 병은 없어지고 자연에 멀어지면 병은 가까워진다. 행복의 기본은 건강이다.”나무와 숲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산림문학이다. 노거수는 우리 인생길에 지혜와 교훈, 위안을 주어 우리 삶의 여정을 아름답게 살찌운다. 앞으로 노거수와 숲에 대한 깊은 사고의 글을 쓰리라. 다짐해 본다. 사단법인 한국산림문학회는…2000년 대형 산불로 동해안 일대의 막대한 산림자원이 소실되자 이를 안타까워한 많은 산림공직자가 산림청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묶어 ‘아까시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란 문집을 펴냈다.조연환 산림청 사유림지원국장의 제안에 따라 산림공직자 38명이 모여 산림문학회를 출범. 2009년 3월 3일 산림청장 허가 제111호로 (사)한국산림문학회가 설립됐다.설립 목적은 산림 문학의 발전과 산림문화 창달. 회원 상호간의 친목 도모이고, 산림문학회지 발행 및 산림문화 창달에 관한 출판 사업. 산림 문학 연구발표회, 강연회 및 강좌 개최. 저명작가 초청 및 출판물의 교류. 기타 목적 달성에 필요한 사업 등을 진행해왔다.산림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으로서 문학회의 목적에 찬동하고 회원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는 개인 및 단체면 가입할 수 있다. 신입회원은 이사 2인의 추천을 받아 이사회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제8대 이사장은 김선길, 상임 부이사장은 이서연, 사무차장은 강준혁이다. 사무실은 서울 동대문구 회기로 57 국립산림과학원 내 나무병원 2층에 위치해 있다. 홈페이지는 http://kofola.or.kr/, 연락처는 02-3293-2004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8-21

부러지고 굽은 몸통은 ‘인고의 연륜’ 새겨놓은 훈장

매번 올 때마다 특별한 감흥을 주는 성밖숲은 생명 문화의 산실이라는 느낌을 준다. 우리나라 버드나무 종류는 40여 종에 달한다. 그 가운데서도 왕버들은 가장 큰 교목이면서 장수하는 나무이다. 수관 폭이 어느 나무보다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어 여름에 그늘을 제공하는 나무로는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왕버들 단일 수종의 노거수로 숲을 이룬 곳은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이곳이 유일한 곳일 것이다. 숲은 나무들과 그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많은 동식물이 어우러져 사는 공동체 마을이다. 탄생과 성장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생사의 과정이 계절마다 펼쳐지는 삶의 현장이고 무대이다. 황혼이 되니 외로움이 차가운 겨울바람처럼 옆구리를 찌르며 찾아든다. 어딘가에 정을 주고 외로움을 달래려고 애를 쓴다. 하천에 자유롭게 헤엄치면서 사는 예쁜 물고기는 어항이라는 감옥에 넣어두어야 하고 또한 먹이를 주어야만 함께 할 수 있다. 창공을 자유롭게 나는 새들도 새장 우리에 가두고 먹이를 주어야 한다. 우아하게 하늘을 나는 나비와 잠자리는 가까이하기에는 먼 당신이다. 꿀을 주는 꽃을 쫓아다닌다. 그들의 본성을 짓뭉개고 자유를 빼앗아 나의 외로움을 달랠 수는 없다. 아무것도 줄 수 없는 나를 멀리하는 것은 당연하다.예쁜 꽃도 화무십일홍이라 친해지려고 하면 지고 만다. 이들은 단지 만질 수도 없고 그들이 안전하다고 하는 거리에서 바라만 보아야 한다. 그러나 나무와 숲은 계절 따라 새 옷으로 단장하고 언제나 한 곳에서 묵묵히 살아간다. 그의 모습은 늠름하고 세월이 갈수록 연륜이 더해져 나의 경외심까지 빼앗는다. 외로워 찾아가면 언제나 변함없이 맞이해 주는 나무와 숲은 황혼의 반려목으로 위안은 물론 지혜와 교훈을 준다. 성밖숲을 찾는 이유도 그러하다.성밖숲의 사계절은 독특한 모습을 띠고 우리를 부른다. 겨울은 곱게 물든 단풍잎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졸가리가 겨울바람 매 맞는지 윙윙거리며 우는 소리 낸다. 옹두리 훈장을 몸에 달고 추운 겨울바람에 맞서고 있는 고령의 왕버들을 보면 역경을 극복하는 힘을 얻게 한다. 봄의 성밖숲은 거칠고 노쇠한 몸에서 고운 연노랑 잎을 틔우는 모습에서 생명력의 끈질김을 배우게 한다. 나뭇가지의 잔설을 녹이고 녹색의 정원으로 물들어 가는 모습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한다. 태고로부터 내려오는 자연이 연주하는 바람과 나뭇잎의 합창하는 노래를 들으며 마음은 즐겁다. 여름은 무성한 녹색 잎에서 맑고 신선한 공기가 뿜어져 나오고 새들이 노래하는 공연장이다. 맥문동 보랏빛 꽃은 왕버들이 앉은 꽃방석인가 아니면 꽃목걸이인가. 푸른 이끼로 몸을 단장하고 노익장을 과시하는 왕버들 노거수를 볼 때면 경외감이 절로 든다. 가을은 그 무성한 녹색의 잎이 노란 단풍으로 물든다. 뜨거운 여름과 태풍에도 끄떡없던 녹색 잎이 만추에는 새들의 작은 날갯짓에도 못 이겨 꽃비처럼 우수수 낙하한다. 이렇게 또 겨울을 맞고 봄을 기다리는 왕버들 숲을 거닐면서 황혼의 나를 돌아보면 왕버들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왕버들과 친근해지면 질수록 묘한 느낌이 나를 붙잡는다. 고령의 왕버들 가지는 일부 고사 되었거나 비바람으로 부러져 나가기도 했다. 굵은 원줄기는 온전하지 못하고 몸통 속은 구멍이 뻥 뚫어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의 몸통 줄기나 피부의 모습은 세월을 맞이하고 보낸 인고의 연륜을 새겨놓은 훈장이 아닐까. 하늘 높이 뻗지 못하고 굽은 모습, 속살을 모두 내어주고 텅 빈 모습, 몸에 이끼 옷을 걸친 것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반 천 년의 역사 기록물이고 아픈 추억의 흔적이 아닐까. 나뭇잎의 크기와 두께는 하늘 쪽 나뭇가지에는 작으며 엷다. 반대로 뿌리 쪽 나뭇가지에는 잎이 넓고 두껍다. 또한 가장자리 잎은 안쪽 잎보다 작고 엷다. 빛에너지를 받은 환경조건에 따라 잎의 모양을 달리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보면 공정과 공평이 똑같이 대하고 균등하게 나누는 것이 아닌 조건에 따라 달리하고 차등을 두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잎도 위치에 따라 모양과 두께가 변하는 것을 보면서 현재 내 위치를 원망하기보다 위치에 맞게 내가 변해야겠다는 교훈을 터득한다. 지난 일제 강점기에 일본 학자들이 성밖숲과 같은 마을 숲을 보고 “인류 문화사적으로 독창적인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토지와 야생에 대한 지속 가능한 이용에 대한 가장 모범적인 사례다”라고 하면서 놀라워했다고 한다.세계 어느 곳도 마을 숲을 만들고 보호하고 가꾸어 온 나라는 없다. 성밖숲 운동장과 잔디광장도 왕버들 숲으로 돌려주면 어떨까. 20여 년 전만 하더라도 60여 그루가 넘던 왕버들 노거수가 지금은 50여 그루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500살이라는 나이의 한계령을 넘은 왕버들이 고령의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태풍이나 노화로 사라져가고 있다. 일찌감치 대비하는 것이 숲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우리는 문명에 이끌려가며 천복으로부터 유리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인간의 본성과 자연의 신비주의 영역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는 현실의 간극을 좁혀보려고 계절 따라 성밖숲을 찾아 생명 문화를 이해코자 한다. 생명 문화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생명체들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문화를 의미한다. 인간이 자연을 존중하고 보호하며, 이를 통해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어 가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생명과 관련하여 성주에는 세종대왕자 태실이 있다. 가장 많은 왕자의 태를 보관하고 있는 전국에서도 유일무이한 곳이다. 성밖숲을 ‘생명문화숲’으로 개명하면 어떨까? 성 밖이란 어감이 왠지 아웃사이드란 느낌이 든다. ‘생명문화숲’과 ‘태실’을 연계한 생명 문화를 꽃피울 수는 없을까? 성주 경산리 성밖숲은…천연기념물 403호다,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446-1번지 일원에 조성된 마을숲이다. 나이가 약 300~5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왕버들 52그루가 자라고 있다.숲은 노거수 왕버들로만 구성된 단순림으로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가슴높이 둘레가 1.84~5.97m(평균 3.11m), 나무 높이는 6.3~16.7m(평균 12.7m)에 달한다. 성밖숲은 조선시대 성주읍성의 서문 밖에 만들어진 인공림으로 풍수지리설에 의한 비보림수(裨補林水)인 동시에 하천 범람에 대비한 수해방비림이기도 하다.성밖숲에 대한 기록은 성주읍의 옛 문헌인 ‘경산지(京山誌)’, 및 ‘성산지(星山誌)’ 등에 수록되어 있다.구전에 의하면 조선 중기 성밖 마을에서 아이들이 이유 없이 죽는 일일 빈번하였는데, 한 지관이 말하기를 “마을에는 족두리 바위와 탕건 바위가 서로 마주 보기 때문에 이러한 재앙이 발생하니, 이를 막기 위해 두 바위와 중간 지점 이곳에 밤나무 숲을 조성해야 한다”라고 하여 숲을 조성했더니 우환이 사라졌다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마을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밤나무를 베어내고 왕버들로 다시 조성했다고 한다. 성밖숲은 마을의 풍수지리 및 역사·문화·신앙에 따라 조성되어 마을 사람들의 사회적 활동과 토착적인 정신문화의 재현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전통적인 마을 비보림(裨補林·풍수지리설에 따라 마을의 안녕을 위해 조성된 숲)으로 향토성과 문화적 의미를 동시에 가진 곳이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8-07

도청신도시 랜드마크 된 ‘천년숲’ 300년 터줏대감

천년숲 솔밭 황톳길을 맨발로 걷는다. 소나무 가지에 어둠이 떨어질 듯하면서 매달려 앞길에 솔향을 뿌리고 있다. 황톳길을 붙들고 있는 어둠은 한 걸음 다가가면 한 걸음 물러서기를 반복하면서 붉은 흙 내음을 토해내고 있다.끈질기게 따라붙는 내 발걸음에 어둠은 사라지고 그림자로 변해 이제 함께 걸어가고 있다. 도심 속 울창한 산림 속에 잘 다듬어진 황톳길은 시민의 심신을 풀어주고 건강을 다져준다. 향긋한 솔 향기와 흙 내음이 가슴 속 폐부 깊숙이 들어와 몸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쌓인 먼지를 훌훌 털어 깨끗이 정화시켜 준다고 생각해 보라, 천금의 보약이 따로 없지 않은가. “아 좋다”는 말이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무심결 튀어나오지 않을까. 한 줄기 동살은 솔숲을 충전하고 나의 소진된 에너지는 솔숲이 충전시켜 준다. 동살은 하루의 시작 프로그램을 켠다. 새벽 산책으로 시작되는 하루는 가슴을 억누르고 있는 잡다한 삶을 방해하는 땟물을 말끔히 씻어 낸다.어제의 잘못을 반성하고 속죄하며 내일을 위한 꿈을 위해 한걸음 발걸음을 뗀다. 새벽의 발걸음은 명쾌하고 단호하다. 솔잎 끝에 매달린 영롱한 이슬방울이 청초하다. 곧 사라지기에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걸까. 그런 면에서 인간도 이슬방울과 다를 것이 있을까 싶다. 곧 사라지는 영롱한 이슬방울 속으로 동살 숨어들어 간다. 영롱한 이슬방울 내 눈 속으로 살며시 들어온다. 인생도 이슬방울 같은 것, 끝없는 욕심을 내려놓고 안분지족하면 인생은 반짝이는 이슬방울처럼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경상북도청. 교육청 결산 검사’ 위원에 위촉되어 경북도청 신청사에 간 적이 있다. 퇴임 후 첫 방문이라 옛 동료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가슴이 설레었다. 경북도청은 1896년 8월 4일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중앙공원 자리에 있는 경상도 관찰사 건물에서 시작했다. 건물이 협소하여 1966년 4월 1일 북구 산격동으로 건물을 신축하여 이전했다. 1981년 7월 1일 대구 직할시로 승격됨으로써 경북도청 청사는 본의 아니게 소속 관할이 아닌 대구광역시에 있게 되었다. 그리고 2016년 3월 10일 경북 안동시 도청대로 455로 이전하여 신도시가 탄생했다. 신도시에서 숙박하면서 안동 풍천면 갈전리 천년숲, 천연지, 검무산을 새벽 산책했다. 신도시의 랜드마크로 ‘천년숲’ 9.16ha 규모의 명품을 조성했다. 지난해 산림청이 뽑은 대한민국 최우수 도시숲에도 선정되었다고 한다. 무궁화동산, 느티나무광장, 잔디광장, 야생화 동산, 유아숲체험원 등 다양한 주제로 만들어져 시민들이 많이 찾고 있었다.맨발로 걷는 0.8㎞의 황톳길에는 돌구슬지압과 황토 오감만족탕 등의 체험시설과 세족장을 갖추고 있었다. 누가 무어라고 해도 천년숲의 터줏대감은 숲 초입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느티나무 노거수가 아닐까.그의 나이는 300살, 키 21m, 가슴둘레 9m 15cm, 앉은 자리 폭이 31m이다. 나이로 보나 키와 몸의 덩치로 보나 숲에서는 제일가는 용감무쌍한 어른이며 수문장이다. 그 늠름하게 생긴 모습에서 우리는 무한한 신뢰를 보내며 숲의 대장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무언가 가슴이 두근거리며 삶의 현실을 깨닫고 힘이 솟구친다.천년숲은 칼춤을 추는 검무산과 천년지와 어깨동무하면서 다정히 이웃으로 함께 하고 있다. 검무산 기상과 천년지 아량을 본받아 시민을 품는 천년숲 영원하리라. 흐트러진 운동화 들메끈을 조이고 천년지로 향했다. 수초 사이로 물고기 첨벙거리며 고요한 아침의 정적을 깨뜨리고 있다. 뒷짐을 지고 저수지 둘레길을 걷는다. 동쪽 하늘의 붉은 햇무리 속에 둥근 해가 얼굴을 내민다. 천년지는 윤슬의 웃음을 지으며 찬란한 아침 햇살을 품는다. 하늘의 태양과 구름도 품는 천년지 아량 영원하리라.내친김에 검무산에 올랐다. 천년숲을 내리다 보는 큰 바위 얼굴 산이다. 그 모습에서 용감무쌍한 기상이 보인다. 가파른 경사로 미끄러짐을 방지하고 쉽게 오르도록 정상까지 나무 계단을 설치해 놓았다. 한 계단 한 계단 인내하여 오른 덕분에 정상에서 신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천년지에서는 뽀얀 안개 피어오르고, 천년숲에는 아침 햇살이 반짝인다. 아침의 동살 맞이하고 신비스러운 풍경을 감상하는 검무산을 천년산으로 개명하여 기상을 영원히 간직하리라. 현재는 융합과 협업의 시대이다. 천년숲은 하드웨어인 자연유산이다. 이를 더욱 빛나게 할 수 있는 것은 소프트웨어이다. 천년숲을 중심으로 한 삼총사 천년산과 천년지를 묶어 또 다른 하나의 명품 천년 삼총사가 탄생했으면 좋겠다. 숲과 산, 저수지는 나무와 물에 관련된 자연 유산이다. 여기에 소프트웨어인 문학의 옷을 입힌다면, 우리의 각박한 삶의 여정에 자연의 중요성과 그 아름다움을 깨닫고 그로부터 지혜와 교훈을 얻어 우리의 삶은 더욱 풍요롭게 살찌울 것이다.새벽 일찍 일어나 어둠 속을 산책하다 보면 동쪽 하늘이 붉게 불타오른다. 이내 동살 기운이 어둠을 살라 먹고 세상을 훤하게 밝힌다. 새벽 산책 중 만나는 동살 기운은 하루의 에너지를 듬뿍 안겨준다. 몸과 마음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시르죽은 모종이 단비를 맞아 손을 펴고 고개를 드는 것처럼 잠자던 의욕이 기지개를 켠다. 천년숲, 천년지, 천년산으로 이어지는 도민의 발걸음은 영원하리라. 숲은 피로에 지친 우리의 심신을 위무하고, 단련하여 행복한 꽃길만 걸으리라. 천년숲이 중심 코어로 에코톱이 되어 삶을 노래하는 산림문학숲이 되리라.필자의 시 ‘천년숲 삼총사’솔숲 속 흙길을 맨발로 걸으며어둠은 사라지고 아침 햇살이 스며든다.이슬방울 속 빛나는 아침의 약속천년숲 느티나무, 그 고귀한 존재검무산에 펼쳐진 신비로운 풍경천년지에 펼쳐진 반짝이는 윤슬천년숲 천년산 천년지 자연의 삼총사천년의 세월 우리를 품어준다.천년 숲, 산, 지(池), 자연 문화유산삶의 여정을 살찌우는 산림문학의 영원한 주제이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7-31

액운 막기 위해 300년 전 만든 인공 숲에 오랜 세월 수호신으로

경북 영양군 현리에는 마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조산단 느티나무 노거수가 있다. 현리 마을에서 바라보면 봉화, 영덕으로 가는 우회도로 분기점 가까이 마을 앞 들판에 우뚝 서 있다. 마을 입구에 자리 잡고 오랜 세월 동안 마을을 지켜온 수호신 느티나무 노거수이다.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마을의 전통과 신앙, 그리고 주민들의 삶과 깊이 얽혀 있는 상징적인 나무이다. 조산단 느티나무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 그리고 전통을 이어가는 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다.조산단은 약 300년 전, 마을 주민들이 불길한 기운을 막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작은 인공 산이다. 당시 주민들은 풍수지리 사상에 따라, 서쪽으로 열린 마을 지형이 불길한 기운을 불러온다고 믿었다. 이를 막기 위해 서쪽에 인공 구릉을 만들고, 그 위에 나무를 심어 놓은 전통 마을 숲 흔적을 보여주는 사례이다.지금은 숲이 사라지고 당산목 느티나무만 덩그렇게 벌판에 우뚝 서서 외로움을 홀로 이겨내고 있다. 그 외로움이 나에게 전해 와 가까이 다가서서 두 팔 벌리고 안아 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마을 숲이 사라져 홀로 쓸쓸하고 외롭겠지만, 우리는 당신이 있어서 행복합니다.”라고 위로의 말을 전했다.필자의 시‘조산단(造山檀) 느티나무 노거수’서쪽 바람 막아선느티나무 한 그루마을의 수호신봄이면 연두 잎사귀여름엔 짙은 녹음가을엔 붉은 잎 물들고겨울엔 나목 되어 서리 맞네.농부의 그늘새들의 안식처뿌리 깊게 내려앉아생명을 품어 안고정월 대보름마을 사람 불러 모아안녕과 번영 노래하네.영양 현리의 역사 조산단 느티나무 노거수. 영양읍은 동쪽과 북쪽 그리고 남쪽으로는 아담한 산맥이 둘러 있어 복조리 형상을 이루고 있으나 서쪽으로는 가까이 울타리가 될 만한 산이 없어 열려있는 형국이다. 마을 주민들은 이곳으로 액운이 미친다고 하여 이 재난을 예방하기 위한 노력으로 300여 년 전 인위적으로 조산을 만들었다.조산단의 느티나무는 마을 주민들에게 재난을 막아주는 신목으로 여겨오고 있다. 특히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에 주민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동신목으로 불리는 마을 나무이다.조산단은 단순한 인공 산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풍수지리적 지혜와 생태적 균형을 고려한 전통적인 마을 숲 조성 방법이다. 이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추구하며, 지역 사회의 안전과 평안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산단 느티나무와 같은 사례는 이러한 조산의 의미와 중요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조산단은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 생태적 공간이다. 이곳은 다양한 생명체가 공존하는 작은 생태계로, 지역의 생물 다양성을 높이고 생태계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는 현대의 환경 보호와 생태 복원 노력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전통적인 조산단의 개념은 오늘날의 에코톱(ecotope) 개념과 다를 바 없다. 이런 것으로 보아 우리 조상들은 일찍부터 자연 생태계의 다양성과 건강성을 유지하려고 민속 신앙 차원으로 끌어올린 세계에도 유래를 찾기 어려운 자연관을 엿볼 수 있다.조산단의 느티나무는 마을의 보호목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마을 주민들에게 농사철에는 그늘을 제공하며, 휴식처가 되어주었다. 또한, 다양한 생명체의 서식처로서 생태적 균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새와 곤충, 다양한 식물이 공존하며, 자연 생태계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그리고 주민들은 이 나무를 통해 자연의 순환, 영속성을 느끼고, 계절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의 순환 속에서 느티나무는 마을 주민들에게 지속적인 안식과 평안을 제공해 왔다.현재 조산단에는 느티나무만 남아 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마을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많은 상징성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건강과 장수를 상징하는 의미로 마을 주민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한 나무를 경외하면서 자신도 본받고 심은 마음을 은연중 키워가고 있다. 우리 인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을 누구나 변함없이 염원한다. 이는 마을의 생태적 건강을 증진하는 것은 물론 주민들에게 자연과의 조화를 느끼게 한다. 조산단 느티나무는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마을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느티나무 아래에서 주민들은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마을 공동제사를 지내며, 공동체의 결속을 다진다. 마을의 중요한 행사와 의식의 중심이 되기도 한다. 음력 정월 대보름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이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지내며, 한 해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한다. 이러한 전통적인 의식은 마을 주민들에게 정서적 안정과 공동체 의식을 제공한다.경북 영양군 현리의 조산단 느티나무 노거수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마을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주민들의 신앙을 담고 있는 상징적인 존재이다. 조산단 느티나무는 풍수지리적 지혜와 생태적 균형을 고려한 전통적인 마을 숲 조성 방법의 중요한 사례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추구하는 철학을 잘 보여주고 있다.느티나무는 앞으로도 마을 주민들에게 지속적인 안식과 평안을 제공하며, 마을 나무의 역할을 이어갈 것이다. 우리의 전통과 자연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을 생각하게 한다.조산단 느티나무 노거수는 마을의 생태적, 문화적, 신앙적 중심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며, 마을 사람들의 삶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 낸 이 작은 조산단은, 우리가 자연을 어떻게 대하고, 전통을 어떻게 이어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적 자연 유산이 아닐까.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7-24

모진 세월 어떻게 견디셨는지요? 700살 나무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오래됨과 거대함에 놀랐다. 나이가 700살, 키가 30m, 허리둘레 10m 훌쩍 넘었다. 경북 안동 녹전면 사신리 257-6번지에 살고 있는 느티나무 노거수이다. 1982년 11월 9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한국의 자연 유산이다. 나이와 외모에 놀라 고개 숙이고 경외감을 표했다. “어떻게 모진 세월의 풍파에도 불구하고 큰 몸을 유지하면서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지요?” 노거수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래 말을 하지 못하지, 아니 내가 알아듣지 못할지도 모르지.” 한참을 노거수 주위를 서성이며 쳐다보고 있으니 마을 어른이 지팡이를 짚고 나오시더니 말없이 정자에 올라앉으셨다. 그리고 나무와 지는 해를 바라보셨다. 하루의 해가 동쪽 하늘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이제 서쪽 산마루에 올라앉아 마무리를 지으려 한다. 모두가 황혼에 물들어 가는데 느티나무 노거수만은 늠름한 모습으로 모두를 압도하고 있다.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했다.어떻게 그런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을까? 지는 서쪽 하늘의 해는 여름 더위의 열기도 거두어 갈 모양이다. 벌써 한 낮의 온기와 차이가 남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을 어른도 느티나무 노거수도 나도 말이 없다. 침묵으로 더 많은 생각을 마음속으로 표현하고 있다. 마침 조용한 정적을 깨고 푸드덕하는 소리가 나 쳐다보니 매에 쫓긴 참새가 나뭇잎 속으로 숨어들어 용케도 죽음을 면했다. 참새는 느티나무 노거수 품에 안겼다. 느티나무 노거수는 약자의 피난처였다. 품속에서 매미 소리가 들렸다. 느티나무 노거수 품은 참새와 매 등 작은 생명체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고 쉼터이다. 적으로부터 피난처이고 놀이터이다. 그들에게 먹이를 공급해 주고 삶을 이어가도록 희생을 감내한다.나무는 흙에 뿌리를 내리고 흙 속의 영양분과 물을 빨아 먹는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얼굴과 몸을 내밀어 호흡하면서 빛에너지를 섭취한다. 다른 생명체들이 뿜어내는 이산화탄소를 먹고 다른 생명체들이 호흡하는 신선한 산소를 뿜어낸다. 지구상에 무한히 있는 흙과 물, 공기와 햇볕으로 살아간다.다른 생명체를 먹어야만 살아가는 인간을 비롯한 다른 생명체와는 다르게 스스로 지구상 무한히 많은 자원으로 독립해서 살아간다. 인간처럼 미래를 걱정하면서 창고를 만들어 쓸데없이 많이 쌓아 놓지는 않는다. 가을 되면 가지에 매달린 잎을 떨어뜨려 흙의 영양분으로 되돌려 놓는다. 공기와 물을 깨끗이 정화하여 지구의 청소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욕심이 없고 남을 품고 배려하는 것을 보니 갑자기 노거수가 성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철이 없던 시절, 나뭇가지에 톱질하고 겨울엔 몸속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그래도 나무는 참고 인내하면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으려고 했다. 몸뚱이의 속은 시꺼멓게 타고 속살은 없어지더라도 용케 피부를 재생하여 살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태풍이라도 만나면 허리가 부러지고 심지어 다시는 재생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를 때도 있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딱따구리는 몸을 쪼아 구멍을 내고 그 속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그래도 원망하기는커녕 기꺼이 몸을 내어주고 품어주었다. 이런 희생정신에 창조주도 감동하여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는 하도록 했다. 잎에는 독성물질과 고약한 냄새를 몸에는 가시로 몸을 보호하도록 했다.사람을 비롯한 생명체는 죽으면 다른 생명체의 먹이가 되든지 아니면 땅에 묻혀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나무는 삶을 마감해도 또 다른 삶이 기다린다. 물론 사람과 마찬가지로 후손 나무를 위하여 흙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경우에는 인간을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종이가 되어 역사의 기록을 담고, 집의 튼튼한 기둥과 서까래가 되어 인간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해 준다. 의자가 되고 탁자가 되고 칼잡이도 되어 우리의 생활 도구가 된다. 이밖에 이루 말할 수 없이 인간이 필요한 기계나 도구의 재료로 사용된다. 아름다운 무늬의 장신구가 되고 보석함이 되어 늘 우리 가까이에서 함께 하고 있다.생전의 모습을 사진으로 촬영하여 거실이나 전시실에 걸어두고 늘 감상하면서 그 아름답고 늠름한 모습에 감탄의 미소를 띠고 있다. 음악으로 작곡되어 눈을 감고도 나무의 모습을 다른 누구의 상징물로 대신하여 그리워하며 애달파 하고 있다. 이 모두가 생전의 나무 성품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결국에는 흙으로 돌아가 후손목의 자양분이 된다.말없이 있던 노거수가 말을 해 왔다. “인간도 나를 보살펴 주기도 하지만, 실제로 나를 도와주는 것은 자연이란다. 바람은 때로는 나를 힘들게 하지만, 나를 강하게 만든단다. 어릴 때는 바람에 꺾이지 않기 위하여 부드러움을 간직하지. 그리고 자라면 그동안 면역력이 생겨 버틸 수 있단다. 바람은 기능을 잃어버린 몸의 가지를 제거해 주고 영글지 못하는 열매를 떼어내어 준단다. 나를 괴롭히는 벌레를 나로부터 떨어지게 한단다. 구름과 비는 목마른 나에게 물을 주어 새로운 힘을 돋우어 준단다. 자연이 이렇게 알게 모르게 나를 돕고 있단다. 그러니 너무 날씨 탓만 하지 말게나. 이 외에도 말해 줄 것이 많다마는 스스로 한번 생각해 보렴.”노거수는 생명체라면 가리지 않고 품고 안았다. 제 것을 내어주고 그들의 생명을 이어주었다. 그저 참고 인내하면서 사계절을 맞이하고 보내면서 그에 맞는 옷을 갈아입고 살아간다. 자연에 몸을 맡기고 천수를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는 지혜의 책을 보관하고 있는 도서관이며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종합병원이다.나무 없는 마을이라면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울까. 새들이 찾아와 노래를 불러 줄래도 앉을 자리가 없고, 바람이 먼 곳에서 찾아와 좋은 소식을 전해 줄래도 멈추어 쉴 자리가 없다. 장수한 노거수는 마을의 역사를 도서관의 역사책처럼 나이테에 꼼꼼히 기록해 두었을 소중한 생명체다. 우리 삶의 여정에 마주치는 노거수는 지혜와 교훈, 위안을 준다. 노거수가 담고 있는 역사적, 문화적, 생태적 가치를 탐구하는 산림 문학은 우리의 삶의 영혼을 살찌게 하리라 믿는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7-17

수문장처럼 우뚝 선 채 젊은 연인의 ‘슬픈 환생담’ 간직

시골 농촌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산과 들, 강으로 뛰어다니면서 놀았다. 자연에서 뛰어놀던 어릴 적 생활의 그리움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았다. 도시에 살면서 마음은 항상 시골 나무와 숲 등 자연을 동경했다. 공직에서 퇴직한 후 도시의 화려한 조명 불빛에서 탈출하여 마음속에 그리던 나무와 숲에서 새들이 노래하는 시골 산촌 마을로 달음질쳤다.나의 목가주의 전원생활은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여유와 자유를 찾았다. 나즐로(나 홀로 즐겁게) 노거수를 찾아다니는 것이 이제는 취미가 되었다. 어슴푸레한 갓밝이에 출발하여 동산의 해가 하늘에 포물선을 그리며 서산으로 넘어갈 때 산 그림자와 함께 귀가했다. 황혼의 삶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사계절 내내 즐거움을 탐해도 시간은 짧기만 했다.노거수는 나의 반려목이면서 길라잡이고 스승이다. 반려동물처럼 떼쓰거나 보채지도 배신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내가 찾을 때까지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노거수 설화의 향유집단인 마을 주민들은 인간 행위에 대한 노거수의 환생담을 이야기하면서 노거수를 신성시한다. 노거수의 환생담(還生談)은 마을 주민들의 어떤 운명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암시를 나타내기도 한다.예를 들면 사람이 죽어서 나무로 환생했다는 이야기이다. 나무를 베어낸 사람이나 가족이 결국은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는 어느 마을에서든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조상 대대로 마을의 역사를 직접 체험하며 또한 후손까지 살아가는 당산나무는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다. 노거수 설화는 민속문화, 민속신앙의 차원에서 노거수가 보호되는 설화로서 설화 속에는 우리 조상의 자연숭배 사상, 조상숭배 사상, 영혼 불멸의 사상 등이 있다.이러한 노거수 설화는 전승 집단의 의식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 흥미와 교훈을 주기도 하며, 삶의 지혜를 얻게 해준다. 그뿐만 아니라, 마을의 결속을 강화시키고 마을의 경관을 이루는 노거수를 보호해 주는 기능으로 발전하여 전체적 생태계 천이의 자연성과 생물 다양성을 높여주는 기능으로 발전하였다.경북 상주시 은척면 두곡리 마을 입구에 수문장처럼 우뚝 서 있는 은행나무는 젊은 연인에 관한 슬픈 환생담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은행나무 밑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는 이야기이다.‘이 마을에 강 참봉이라는 부자 양반이 살고 있었다. 손자 강기석 대에 이르러 불행히도 손부(강기석의 부인) 허씨가 병을 앓아 실명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월선이라는 계집아이를 얻어서 잔심부름을 맡아 하도록 하였다.월선은 영리하고 부지런할 뿐만 아니라 열대여섯이 되니 마음씨도 얼굴도 고와서 모두의 칭송을 받았다. 그때 마침 강참봉의 현손 한수도 월선의 또래였는데, 월선을 한번 보고서는 연모하는 정이 간절하였다. 그러나 천비 월선과의 결합은 사실상 당시로 보아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한수는 학문보다는 월선을 만날 궁리에 더 몰두하였다. 결국 두 청춘 남녀는 신분도 잊은 채 밀회의 정을 나누었다. 이러한 사실을 안 아버지는 부인과 상의하여 강 건너 마을에 사는 포양 김씨댁 규수와 결혼을 시키기로 했다. 월선은 자신의 비천한 신분을 생각하고 한수 도령의 행복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홀몸도 아닌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면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였다. 며칠 뒤 한수는 소나무에 목을 맨 채 자결한 월선을 발견하였다. 눈물을 흘리며 월선의 장례를 혼자 치러 주었다. 얼마 뒤에 한수는 김씨댁 규수에게 장가들었다. 다시 새 정에 젖어 월선을 잊게 되었고 귀여운 아들까지 낳게 되었다. 그런데 그 월선의 무덤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자라는 것을 월선의 넋이라고 생각하여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베어 버렸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바로 귀여운 아들이 죽었다. 이듬해 봄이 되니 은행나무가 또 자라 있었다. 이번에도 나무를 베어 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부인이 앓아눕더니 병명도 모른 채 그만 죽고 말았다. 흉사가 계속해서 이어지자, 강참봉은 용한 점쟁이를 불러 그 연유를 물었다. 점쟁이는 은행나무는 원통히 죽은 월선의 넋이며, 나무에 제사를 정성껏 지내고 지금이라도 한수와 월선은 부부가 된다는 허락을 해주지 않으면 이보다 더 비통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점괘를 뽑았다. 대가 끊긴다는 엄청난 점괘에 강참봉 내외는 점쟁이가 시키는 대로 제사를 후히 지내고 사후(死後)에라도 월선을 현손 며느리로 맞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소문은 이웃 마을에 파다하게 퍼지었고 두 그루였던 은행나무 옆에 또 한 그루가 새로 돋아 세 그루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조차 세 그루 은행나무는 월선과 그녀의 아들(뱃속의 아이) 그리고 한수 아내의 넋이 환생한 것이라고 믿고 보호했다. 세 그루는 자라면서 서로 얽히고설켜 하나처럼 변하였다 한다.이런 환생담은 사람이나 동물이 죽은 후 나무로 환생하여 신앙의 대상이 되거나 신성시되는 설화로써 징벌담과 마찬가지로 노거수의 설화로써 빈도가 높다. 은행나무를 베고 나니 사람이 죽는다는 이야기로써 결국은 나무를 보호하고 신성시함으로써 액운이 멈춘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역으로 신성시되는 나무를 대입시켜 당시의 악습을 타파하려는 민중의 억압된 삶을 고발하려는 내용을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음이 엿보인다. 노거수 설화로 불합리한 사회상을 바로잡고자 문학의 힘을 빌린 산림문학인의 저력이 돋보인다.이러한 설화 속에는 우리 조상의 자연숭배 사상, 조상숭배 사상, 영혼 불멸의 사상 등이 혼재하여 오늘날까지 우리 민속문화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그저 나무를 보호하고 사랑하라고만 하는 것보다 나무에 설화의 산림문학 옷을 입혀 나무를 신적 존재로 올려놓는 문학인의 지혜로움이 아닐지 싶다.환생담은 나무를 보호하고 사랑하는 행동으로 이어지고, 나아가서는 두곡리 마을의 단합과 발전으로 평화로운 마을 건설의 밑바탕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환생담 은행나무 노거수에 더 많은 미담이 입혀져 마을 주민들과 함께 천대 만대 만수무강하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해 본다. 두곡리 은행나무의 환생담노거수에 대한 고사와 설화는 징벌담. 영험담, 동물담 등 크게 여덟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여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환생담은 사람이나 동물이 죽은 후 나무로 환생하여 신앙의 대상이 되거나 신성시되는 설화로서 징벌담과 마찬가지로 노거수 설화로 빈도가 높다.경북 상주시 은척면 두곡리 640번지 외 4필지. 1987년 5월 10일 도 기념물 지정. 수령 470년. 수고 15m, 흉고 둘레 8.4m, 수관 폭 22m, 마을 주민들은 은행나무를 덕목(德木) 나무라 부른다.6·25 전쟁 때 마을 주민들의 피해가 하나도 없었다고 하여 마을을 지켜주는 덕목 나무라 믿고 있다. 암 그루로 은행 열매의 생산량이 많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7-10

정신적 마음을 보호하는 신성한 ‘신내림 나무’

보굿이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찢겨 나간 살결에는 보기 민망한 속살을 감추어 놓았다. 주민들의 정성으로 보듬고 꿰매었지만, 큰 상흔은 훈장처럼 남아있었다. 거구의 늙은 몸을 지탱하기 힘들까 봐 노파심에 마을 사람들은 지팡이를 선물해 주는 배려심도 잊지 않았다. 키는 아파트 6층보다 높은 13m이고 몸 둘레는 장정 세 사람이 두 팔 벌려 안아야 겨우 안을까 말까 한 3m 50cm이다. 나이는 400살, 사람의 나이로 치면 150세를 넘긴 즉, 한계 수령을 훌쩍 뛰어넘었다. 우리나라에서 생존하고 있는 뽕나무 중에는 서울 창덕궁 천연기념물 뽕나무와 쌍벽을 이루지만, 크기와 매년 열리는 오디의 양과 잎의 생산량 등 모든 면에서 유일무이하게 단연 최고이다. 늙음의 추함보다는 지혜로움과 늠름하고 우람한 모습에서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이가 바로 경상북도 기념물 제1호에서 국가 천연기념물(제559호) 반열에 오른 상주시 은척면 두곡리 뽕나무 노거수이다.검붉은 오디는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혀 고샅길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꿈틀거리는 누에를 밟는 느낌과 함께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어릴 적 악몽과 그리운 추억이 잇따라 떠올랐다. 누에와 한방에서 자고 살았다. 누에가 밥을 달라고 고개를 내저으며 아우성치다 그만 천리만리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만다. 채반에서 떨어진 누에가 잠결 속에 몸부림치는 내 몸에 압사당하여 방바닥과 옷은 푸른 핏물로 얼룩졌다. 아침에 일어나 만신창이가 된 누에를 볼 때마다 어젯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는 몸서리를 치곤했다.대문을 들어서는 아버지 바지게 위에는 새까만 오디가 달린 뽕나무 가지가 춤을 추었다. 대청마루 위에 놓인 뽕잎을 딸 때면 어머니는 먼저 오디부터 따서 나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 새콤달콤한 오디는 입과 손을 진한 핏빛으로 물들였다.누에고치에서 실을 뽑고 난 뒤 덩그렇게 남은 번데기를 얻어먹으려고 온종일 이웃집 할머니 물레질 옆에 서서 기다렸다. 눈앞의 주름 잡힌 번데기는 징그럽기도 하지만, 입안에 씹히는 번데기의 고소한 감칠맛에 방앗간 참새처럼 번질나게 이웃집을 드나들던 그리운 추억은 지금도 엊그제 일 같다.뽕나무는 인류 역사와 함께했다고 한다. 고대 중국의 은나라 때부터 시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중국을 거쳐 유럽으로 가는 실크 로드는 우리의 누에고치에서 뽑은 명주가 중국과 유럽인들의 몸을 감싸고 또 멋을 내는 비단길이다.수천 년을 이어온 양잠도 기계문명의 발달로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 시절 비단은 부와 명예의 상징물이기도 하고 비단 장수 왕서방 이야기처럼 우리 서민의 애환이 담긴 산업이다. 뽕나무 노거수는 흔치 않은데 어떻게 천연기념물 노거수가 되었는지 천운을 타고났다고나 할까, 아니면 잠사의 고장답게 양잠의 상징적 의미로 보호하고 가꾸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뽕나무 노거수는 그저 오래되고 거대한 나무로써 만의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전설과 고사의 주인공으로서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스승이요 살아 숨 쉬는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자연이 빚어내고 주민이 다듬은 진품명품의 예술품으로 마을의 품격을 높여주고 찾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준다. 석가모니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고 공자는 은행나무 아래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나무 숲속을 거닐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성현들도 나무는 인간의 영원한 스승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특히 옛날부터 뽕나무는 부상목(扶桑木)이라 하여 신내림 나무로 신성시했다. 신상구(愼桑龜) 고사의 옷을 입혀 교만함을 삼가고 겸손을 가르쳤다. 이제는 누에를 치는 양잠의 뽕나무에서 고사의 ‘신상구 부상목’으로 이름표를 달아보면 어떨까.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실크 로드는 자연스럽게 스피릿 로드로 이름이 바뀔지 누가 알 수 있을까. 육체적 몸을 보호하기 위한 양잠 산업은 새로운 의류 산업에 밀려났지만, 정신적 마음을 보호하는 고사의 ‘신상구(愼桑龜) 부상목(扶桑木)’ 은 우리 모두의 스승으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공연히 자신을 자랑하는 말 몇 마디로 죽음을 맞이한 뽕나무(桑)와 거북(龜)을 생각하여 늘 말하기를 삼가(愼)라는 뜻에서 신상구(愼桑龜)라는 말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오늘날 자기 자랑에 도취한 사람을 많이 본다. 특히 사회지도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돈 자랑, 힘 자랑, 학벌 자랑, 가문 자랑에 바빠 겸손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로 인하여 낭패를 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학벌을 자랑하려다 학력 허위 기재를 하거나 청렴을 자랑하려고 있는 재산을 숨기려다 결국은 자드락 나서 국민으로부터 비난받는 부끄러운 사회지도자들을 심심찮게 본다.신상구 고사의 또 다른 뜻을 잊고 된통 뒤통수를 맞은 경험이 있다. 가까운 지인들과 돈독한 정을 나누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친목 모임 가졌다.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여 학벌을 과시하고 외국어 능력을 은근슬쩍 뽐내기도 했다. 다방면에 높은 식견을 가진 양 자랑했다. 외국 여행에 가이드를 자청하면서 여행 경비를 입금토록 하고, 노후 생활을 보장해 준다며 투자금도 받아 챙기고, 곧 돌려준다며 돈도 빌려갔다. 그리고는 연락을 끊었다. 교만의 자기 자랑은 남들로부터 시새움을 받기도 하지만, 그것이 능력으로 보여 모두 홀라당 넘어가 재산적 손실과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나름대로 배우고 세상을 안다는 우리는 부끄럽고 창피스러워 어디 하소연도 못 하고 속앓이를 했다.교만의 말이 화를 불러오기 쉽다. 잘난 척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한편으로는 교만의 자랑이 능력으로 보일 수 있다. 능력 있는 사람을 믿고 따르는 것 또한 인간 세상이다. 신상구 고사에서 교만함을 삼가고 겸손의 미덕은 물론이고 자기 자랑을 일삼는 교만한 사람을 조심해야 하겠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단했다.상주 은척면 두곡리 천연기념물 뽕나무 노거수를 신상구 고사의 시조(始祖) 나무로 ‘신상구 부상목’이라고 부르면 어떨까.신상구(愼桑龜)란…중국 오나라 때 한 효자가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였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꿈에 나타난 신령이 “수백 년 된 거북이를 잡아 고아 먹으면 병이 나을 수 있다”고 했다.고생 끝에 천년 묵은 거북이를 잡아서 지게에 지고 오다 뽕나무 노거수 아래에서 쉬는데 거북이가 “나는 100년을 삶아도 힘이 세어 죽지 않는다”라는 말을 뽕나무가 듣고 “뽕나무 장작으로 삶으면 금방 죽고 만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집에 와서 거북이를 삶아보니 그야말로 쉽게 죽지 않아 뽕나무를 베어 와서 그 뽕나무 장작불로 삶으니 쉽게 죽고 말았다”라는 이야기로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고사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7-03

700년 세월 ‘할배나무’ 다섯 가지 하늘 향해 뻗어가다

옛날 마을에 큰 홍수가 났는데 수형이 반듯한 어린 느티나무 한 그루가 떠내려 오는 것을 이 마을에 이주해 살고 있던 안동 권씨 입향조가 목격했다. 신기하게 여겨 어린 느티나무를 어렵게 건져 자기 집 방안에 두었다. 흙도 없고 물도 주지 않았지만, 한 달이 지나도 죽지 않고 살아있기에 집안 좁은 뜰에 심었다. 나무가 점점 자라 집안에 둘 수 없어 좋은 날을 받아 마을 입구 개울가에다 옮겨 심었다.자식이 없던 안동 권씨는 마치 친자식처럼 나무를 돌보았다. 이런 정성 탓인지 나무는 쑥쑥 자라 우람한 모습이 될 때쯤 권씨는 병으로 죽게 되었다. 죽을 때 권씨는 느티나무를 가리키며 “내가 죽거든 저 나무를 나로 알고 술 한 잔 권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무덤 자리를 정한 풍수지리가 ‘무자천손(無子天孫)’터라고 말하고 떠났다.어떻게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하고 외롭게 죽어 간 권씨의 자손이 천대를 잇는다는 말인가? 마을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하면서 지관의 말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까맣게 잊어버렸다.권씨가 심은 느티나무는 우람하게 커 갈수록 다섯 가지가 동, 서, 남, 북, 중앙 다섯 방향을 상징하듯이 단정하게 자랐고, 권씨의 유언에 따라 마을 사람들이 ‘할배 나무’라 부르며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이때부터 할배 나무는 절 받는 당산목이 되었고, 권씨를 마을 입향조로 모시게 되었다. 아들이 없어 후손은 끊어졌지만, 자손이 없는 권씨의 분신으로 마을 주민들은 매년 정월 대보름날 제수를 장만해 정성껏 제사를 지내고 있다.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할배 나무는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손자·손녀를 자청한 사람들의 정성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나라에서 풍년 농사를 위하여 저수지를 만든다고 했다. 할배 나무를 그대로 저수지에 수장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사 비용으로 4억 원이 넘는 돈을 감당할 수도 없거니와 7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한자리에서 살아온 할배 나무가 다른 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다행히도 포항 노거수회에서 손자·손녀를 자처해 150m 남쪽 산기슭, 포항시 신광면 마북리 70번지로 나이 740살, 키 20m, 가슴 둘레 6.8m인 할배 나무를 이사시켰다.세계에서도 유래를 찾기 어려운 미담으로 우리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칠월칠석에는 노거수회에서 회원들이 막걸리를 대접하고 천수를 다하기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세월은 쉼 없이 흐르고, 사회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해 가고 있는데 아직도 우리 사회는 자식으로 대를 이어가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부자지간 또는 조손간에 유산을 볼모로 효도 계약서를 쓰기도 하고, 계약 위반을 이유로 무효 소송까지 벌이는 슬픈 일이 벌어지고 있다. 깜냥도 안 되는 자식에게까지 지위와 부를 넘겨주려고 하다 불법, 특혜 의혹에 휘말려 패가망신을 당하고 있는 높은 양반이나 부자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무자천손 할배 나무를 본보기로 이제는 뭔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가 이어지고 남는 것은 자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심은 나무가 천 년을 가고 우리가 쌓은 탑이 천 대를 이어간다. 보이지 않는 ‘화향 천리 품향 만리’라 하였으니, 우리의 미풍양속이 만대를 잇는다. ‘무자천손 노거수 설화’에서 나무 생명의 귀중함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노거수는 전통 마을 공동체 문화의 독특한 산물로서 ‘전통 마을 나무’다. 세계화와 첨단과학 시대라 하여 이를 미신이나 원시 토속신앙으로 폄하하는 것은 특색 있는 문화 기반을 바탕으로 하는 세계화의 경쟁 속에서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다.노거수는 분명 독특한 우리의 생명 문화이다. 노거수는 보존 가치가 있는 민속 문화유산이며, 전통 마을 나무로서 민속 생태학적 국민 교육과 녹색 갈증을 풀어줄 중요한 국가 자연자산이다.무자천손 느티나무 설화에서 나무 생명의 귀중함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문학인들이 먼저 옛 노거수 설화에다 오늘날 새로운 문학과 예술의 아름다운 옷을 입혀보면 어떨까? 사단법인 노거수회는…설립연도는 1992년. 이삼우 원장(기청산 식물원)이 노거수를 중요한 자연자산이자 문화유산으로 인식해 시민사회운동으로 경북 포항 지역을 중심으로 시작했다.설립 목적은 산림환경 전반에 관한 조사연구와 향토 순례를 통해 노거수. 희귀수목 및 보전 가치가 높은 숲에 대한 보호 운동을 전개하고 출판 및 홍보를 함으로써 산림환경 보전과 향토 사랑 실천운동을 국민 속에 뿌리내리게 하는데 있다.그간 진행한 사업은 ▲산림생태 탐사, 향토 순례 및 기행 ▲노거수. 희귀수목 및 보전 가치가 높은 숲에 대한 보호와 복원, 연구 활동 ▲산림문화의 발굴 및 보전과 창달 ▲법인의 사업과 관련한 홍보 및 출판사업 ▲국내외 관련 학회, 업체, 국제기구와의 교류. 협력 및 정보의 교환 ▲기타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사업 등이다.주요 활동 내용을 살펴보면 ▲노거수 보호, 구명, 조사 활동(399그루) ▲마을 숲 조사(40곳, 마을숲 복원(3곳), 해당화 자생지 복원 ▲포항시 보호수 안전 진단 용역 수행 ▲모감주나무 천연기념물 군락지(371호) 발견 및 지정 ▲내연산 망개나무 군락지 조사 및 국내 최대 개체 보고 등이 있다.가입 자격은 자연 및 노거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능하다, 가족 단위 활동 역시 권장한다. 임원은 명예회장 이삼우, 회장 이문수, 사무국장 박영규, 회원 강기호 박사(국립세종수목원 본부장) 외 118명이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6-26

노거수의 설화에 담긴 남녀의 사랑과 나무 보호 메시지

지역 자치단체가 머지않은 미래에 소멸한다고 그 대책에 골몰하고 있다. 생산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인구 절벽 현상 때문이다. 한국 전쟁이 끝난 후 베이비 붐 세대를 거치면서 인구 증가로 골머리를 앓던 정부는 각종 인센티브제를 도입하여 출산 억제 정책을 널리 홍보하고 강하게 밀어붙인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역으로 출산 장려 정책을 쏟아 내놓고 있지만, 별 효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왜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까? 혼인 적령기 세대는 주택, 육아, 교육비 등 경제, 사회 문제로 어려움을 호소하며 결혼과 출산을 늦추고 있다. 심지어 솔로 살기를 원하고 자식 낳기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경북 고령 어곡리 마을 앞 들판 한 가운데에 살아가고 있는 왕버들에 대한 전설은 오늘날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당시에는 불효의 심정으로 용서를 구하는 내용이지만, 세월이 흘러 오늘날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님에 대항하여 가출까지 하여 결혼하였으니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전설은 나무 사랑으로 승화하여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아주 오랜 옛날 마을에 마음씨 착한 가난한 농부와 그와는 반대로 많은 재산과 하인을 거느린 마음씨 고약한 부자가 살았다. 가난한 농부 집에는 잘생긴 아들이 있었으며, 고약한 부잣집에는 예쁜 딸이 있었다. 농부는 가난하게 사는 것이 한이 되어 아들을 자기처럼 가난하게 살지 않도록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자신의 고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사랑하는 아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아들 잘되기만 바라고, 그것을 큰 낙으로 삼고 살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글 읽는 소리가 자랑스러웠다. 논에서 우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혹시 아들의 공부에 방해가 될까 봐 쫓아다니다 밤을 지새운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오늘도 총각은 글 읽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글 읽는 소리가 멀리 부잣집 귀여운 딸의 귓가에까지 들려왔다. “저렇게 낭랑하게 글을 읽는 도련님은 누구일까?” “글 읽는 소리가 아름다우니 인물 또한 얼마나 잘 생겼을까?” 이렇게 생각하며 방문을 열고 보니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가을 하늘의 둥근 보름달 빛이 훤히 비추었다. 아가씨는 자신도 모르게 글 읽는 소리에 이끌려 가난한 농부의 아들 글방 바로 앞까지 다다랐다. 한편 열심히 글을 읽던 총각은 인기척 소리에 글을 읽다 말고 문을 열었다. 달빛 속에 나타난 선녀와 같은 처녀를 보고 그만 흠모하게 되었다. 처녀 역시 총각의 공부하는 모습에 반하여 서로가 깊은 사랑을 하게 되었다.이들이 서로 사랑하게 된 것을 알게 된 양가의 부모님들은 결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두 청춘남녀는 아무리 해도 부모님을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사랑을 이루기 위하여 부모님 곁을 떠나게 되었다. 막상 부모의 뜻을 순종치 않음이 큰 죄인인 줄 알면서도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두 사람은 마지막 부모님 앞에 엎드려 “아버지 어머니 저희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가 떠나면서 부모님이 보시는 마을 앞에 나무를 심어 놓겠습니다. 이 나무가 싱싱하게 잘 자라면 저희도 금실 좋게 잘살고 있는 줄 아시고, 만약에 이 나무가 말라 죽으면 저희도 죽은 줄 아십시오.” 하직 인사를 고한 뒤 먼 곳으로 떠났다. 양가 부모는 자고 나면 나무를 쳐다보고 무럭무럭 자라면 그들이 잘 사는 줄 알고, 시들면 걱정하며 살았다. 왕버들은 무럭무럭 잘 자라 마을의 정자나무가 되었다. 나무가 싱싱하게 잘 자라면 자식이 잘살고, 말라 죽으면 자식도 죽었다니 기가 막히는 고별인사다. 부모 입장에 어찌 나무를 보호하고 잘 가꾸지 아니하겠는가! 이보다 더한 나무 보호 메시지가 어디 있을까? 청춘남녀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왕버들 노거수에 입혀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들의 순결한 사랑의 징표로 왕버들을 내세워 나무 보호 자연관을 우리 민족의 DNA에 잉태하게 했다. 나무를 함부로 훼손하거나 벌목함으로써 망한 나라나 소멸한 도시를 볼 때 왕버들 설화는 나무 사랑, 자연사랑 헌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왕버들 설화는 청춘남녀의 사랑 이야기에다 나무를 심고 보호하라는 깊은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나무와 숲은 인류의 보금자리이다. 인류의 보금자리가 사라지면 그 결과는 너무나 뻔하다. 오늘날 인구 절벽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전설의 주인공 부름을 받고 새벽 일찍 일어나 만나러 갔다. 나무는 예전과 달리 키와 앉은자리가 턱없이 작아지고 줄어들었다. 왕버들은 굵은 두 줄기가 절단되고 잔가지 끝부분은 고사 되었다. 전설 속의 나무 사랑은 사라지고 알게 모르게 나무가 살아가야 할 터전은 공장과 도로로 변했다. 인간의 편리함과 물건 생산을 위한 일들이 결국 우리 모르게 인구 절벽으로 내몰고 있지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지구 인구부양능력 수치를 넘어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동 수단인 자동차, 기차, 배, 비행기 등 그들이 머물 차고와 다닐 도로, 생산을 위한 단지 확보를 위해 나무와 울창한 산림이 사라져가고 있다. 늘어나는 도로는 생태계를 파편화시키고 생물종의 다양성과 개체수가 줄어 궁극적으로 멸종 위기로 내몰고 있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내뿜는 배기가스는 지구를 온난화하고 생산으로 자원은 고갈되어 가고 있다. 이는 인구 증가와 다름이 없다. 지구의 옷을 벗기고 몸에 생채기를 내니 지구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극단의 자구적인 노력을 취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바로 지구 온난화로 이어지는 이상 기후는 가뭄과 홍수, 태풍, 지진, 화산, 산불 등 지구 생태계의 균형과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항상성이 아닐까. 인구 절벽 또한 청춘 남녀의 DNA 유전자 정보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지 않았을까.서울과 같은 인구 집중의 수도권은 지구 인구부양능력과 생태발자국 수용 능력 수치를 넘어서지 않았나 싶다. 오늘날의 청춘남녀 결혼, 출산 회피 문제에 대한 결혼과 출산 장려 정책의 밑바탕에는 지구 자원 소비와 생활 방식의 변화가 먼저 시작점이 아닐지 싶다. 사랑목 왕버들 노거수 전설에서 조상의 나무 사랑 자연관을 알고 다시 한 번 나무와 숲의 중요함을 깨단했다.고령 왕버들과 인구부양능력은…경북 고령군 성산면 어곡리 410번지에 자리한 왕버들은 위도 35.743024 경도 128.362479에 위치했다. 나이는 250살, 2003년 11월 6일 조사 결과 키 14m, 가슴 높이 둘레 3.5m, 앉은 자리 넓이는 17m다.지구 인구부양능력은 사용 가능한 자원으로 얼마나 많은 인구를 지탱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이는 자원의 양과 인구 사이의 균형을 의미하며, 지속 가능한 발전과 직결된다. 인구 증가와 자원 소비의 균형을 맞추는 데 중요한 기준이다.생태발자국은 우리가 소비하는 자원의 양을 그 자원 생산에 필요한 땅 면적으로 환산한 것이다. 지구의 지속 가능성과 인간의 생활 방식 사이의 균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항상성(Homeostasis)이란 생명체가 외부 환경의 변화에도 내부 환경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능력을 말한다. 생명 유지에 필수적이며, 생존과 진화에 있어 중요한 특징이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6-19

하소연 들어주고 마음 달래주는 친구이자 스승, 신적 존재

낙동강 물돌이 모래벌판 언덕 마을이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이곳을 방문하여 생일을 맞이하는 등 세계 각국의 유명 인사는 물론 관광객들이 줄지어 찾아오고 있다. 바로 안동 하회마을이다. 마을엔 국가지정문화재만 국보 2점, 보물 2점, 국가민속문화재 9점 등 모두 13점에 이른다. 척박한 강변 모래벌판 언덕 마을에 무엇이 이런 귀중한 문화유산을 품었을까?곰곰이 마을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명쾌한 답을 찾을 수 없다. 하회마을은 예로부터 경주 허씨 터전에 광주 안씨 문전으로 풍산 류씨 배판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마을 주민들의 성씨 변천 과정을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 조상들이 말하는 풍수지리설에 길지인 배산임수형도 아니고 그 어떤 유형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그리고 보면 마을의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민의 생활 속에 깃들어 있는 정신문화에 있지 않을까? 안동은 우리 3대 문화권 중에 유교문화의 중심지이며 정신문화의 수도이기도 하다. 하회마을에는 그 옛날 마을을 개척할 당시부터 내려오는 마을 공동행사가 있다. 매년 서낭당, 국신당, 삼신당에 동신제를 지냈다. 그러다 하회탈을 쓰고 별신굿을 해 오고 있다. 그 내력은 하회탈 제작에 대한 전설로부터 시작되었다.“마을재앙에 마음 아파하며 매일 밤 삼신당 나무에 물을 떠 놓고 재앙을 막아 달라고 정성껏 비는 허 도령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어느 날 신령이 꿈에 나타나서 ‘탈을 깎아, 그 탈을 쓰고 신을 위해 굿을 하면 되느니라. 그런데 탈을 깎는 동안 누구라도 엿 보면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허 도령을 사랑한 마을 김씨 처녀가 그사이 그리움을 참지 못하고 금줄을 넘고 말았다. 하늘에서 천둥 번개가 치더니 허 도령이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김씨 처녀도 따라 죽었다. 처녀를 기리는 뜻으로 별신굿을 시작했다. 이유야 어쨌든 간에 이는 마을 주민들이 하나로 뭉치는 계기가 되었고 고난을 극복하고 흥겨움을 안겨주었다.”마을 주민은 서낭당을 상당, 국신당을 중당, 삼신당을 하당이라 불렀다. 삼신당은 마을 한 가운데 자리 잡고 당집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 않으며 삼신할매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 대상은 느티나무이다. 약 600년 전 풍산 류씨 입향조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이 나무는 잉태의 소원을 비는 곳으로 유명한데, 연리지를 관찰할 수 있다. 삼신당은 별신굿을 시작하는 장소이기도 하다.하회별신굿탈놀이는 안동 하회마을에서 12세기 중엽부터 상민(常民)들에 의해서 연희(演戱)가 되어온 탈놀이이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5년 또는 10년에 한 번 정월 보름날 또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해 왔다. 탈놀이는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기 위하여 마을굿의 일환으로 연희가 되었다. 탈을 쓴 광대가 양반을 해학적으로 풍자하여 온갖 쓴소리를 내뱉는다. 이는 서민의 유일한 언로였으며 흥겨움까지 주었다. 놀이마당, 무동마당 등 여덟 마당으로 구성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 수호신에게 매년 올리는 동신제나 별신굿을 한 때 미신으로 폄하여 금지하기도 했다. 종교적 측면으로 그리 볼 수 있으나 고유 전통 민속신앙은 우리의 삶에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부계 중심의 남아선호사상의 사회 환경에서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는 보고도 못 본채, 듣고도 못 들은 채, 하고 싶은 말도 못 한 채 참고 9년의 시집살이를 했다는 말이 있다. 이렇게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은 억압된 사회에서 소원을 빌고 하소연할 탈출구로 삼신당 느티나무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삼신당 느티나무는 이를 들어주고 해결해 주는 친구이며 스승이요 신적 존재였을 것이다. 그때 사회 환경이 옳다면 민속신앙 역시 옳은 것일 것이고, 그때 사회 환경이 바르지 않다면, 민속신앙을 미신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오늘날 자유로운 시대는 농촌과 도시, 산중 마을에도 절이 있고 예배당이 있어 신앙심을 키울 수 있고 스님, 목사, 신부 등 성직자가 있어 고해하고 마음을 추스르며 안정을 찾을 수 있다. 그러하므로 오늘날 동신제는 점점 그 기능이 빛이 바래고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마을의 결속과 단합의 동기를 부여하는 것으로 동신제와 별신굿탈놀이 만한 것이 또 있을까. 제사를 올리는 시기는 대부분 정월 대보름날이다. 이는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정월은 가장 신성하며 이날 뜨는 달이 가장 깨끗하고 신비스러워 소망한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새로 시작하는 명분으로 이것보다 더 좋은 날은 없을 것 같다. 물질적인 외형의 그 무엇보다 정신적인 마음의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합심하여 기원한 내용을 이루기 위하여 단합하고 실천하는 동기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믿음은 우리가 경험한 일이기도 하다. 하회마을이 평화롭고 풍요로운 마을로 발전하고 임진왜란 때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유성룡과 같은 걸출한 인재가 많이 배출된 것도 유형의 자연환경보다 무형의 정신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지 싶다. 하회마을의 고택도 지형도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특별한 무엇을 찾아보지는 못했다. 오히려 낙동강변 모래벌판 위에 세워진 것은 자연조건으로 따져보면 불리한 조건이지, 유리한 조건은 아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주민들이 행복하게 살아온 것은 삼신당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뭉치고 단합한 결과가 아닐지 싶다. 삼신당 느티나무에 소원을 빌고 인내하면서 살아온 우리 할머니 어머니의 위대함은 민속신앙으로부터 인내심과 응집력을 키운 덕분이 아닐는지 모르겠다.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물과 영양소를 빨아들이고 하늘에서 빛에너지와 탄소를 받아들여 누구의 도움 없이 자연의 무한한 에너지로 스스로 독립적으로 살아간다. 뭍 생명체를 품고 그들의 먹이를 제공하고 삶을 이어가도록 기꺼이 희생을 감내한다. 나무야말로 남의 생명체를 먹고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유일한 생명체이기도 하다. 그리고 보면 나무를 신의 반열에 올려놓아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늘 우리 가까이에서 도움을 주는 나무야말로 신령이 깃들여 있다고 한들 누가 무어라 할까.안동 하회탈 별신굿놀이는…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 709-3번지 삼신당은 별신굿판의 시작이고 동신제의 마지막 장소다. 그곳에 640살 느티나무 노거수가 살아가고 있다. 키 17m, 몸의 둘레 15m, 앉은 자리는 22m다. 마을굿을 통해 별신굿이 추구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주술적인 행위로써 탈을 만들고 탈춤을 추게 된 것이다. 서낭당에서 신내림을 받는 강신(降神)이나 신을 마을로 맞이하는 무동(舞童), 상상의 동물인 주지 한 쌍을 등장시킨 탈춤판은 마을을 정화하는 것이다. 암수의 싸움에서 암컷이 이기고 성행위를 하는 것은 생산을 북돋워 풍농을 기원하는 주술적인 행위다. 강신(降神), 오신(娛神), 송신(送神) 과정으로 구성돼 있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6-12

신임·이임 감사들 행차 굽어보며 태평성대 빌었던 노송

문경새재 옛길은 역사의 길이다.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오가며 과거시험 보러 가는 등용문의 길이며 낙향의 길이다. 외침으로부터 조선의 수도 한양을 지키는 고갯길이다. 이런저런 우리 조상의 삶이 스며있는 애환의 아리랑 고갯길이며 인생길이다.이제 옛 기억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건강을 위한 치유와 명상의 숲길로 재탄생하여 힐링하는 사람들로 물결치고 있다. 신록의 계절 오월의 어느 주말 문경새재 녹색 숲길을 찾았다. 넓은 주차장부터 만차이다. 영남인뿐만 아니라 전국, 세계인들이 찾아오고 있다. 무엇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산속 숲길에는 유명한 가수의 공연도 명사의 강연도 인위적인 그 어떤 행사도 놀이기구도 없다. 그저 나무들이 운집한 울창한 녹색의 숲에는 맑은 계곡물 흐르는 소리, 새들의 지저귐, 바람 소리 등 자연의 소리뿐이다. 그러나 녹색의 숲길에 들어서면 볼 수도 없는 신선한 공기가 쭈그러진 우리의 가슴을 부풀게 하고 축 늘어진 어깨가 으쓱해지고 동공을 키우며 마음을 매료시킨다.넓은 푸른 잔디광장 끝에는 주흘산과 조령산 자락을 끌어당겨 성벽으로 묶어 놓고 중앙에 주흘관이라는 육중한 성문을 만들어 놓았다. 문짝 없는 성문은 밀려드는 사람들을 마다하지 않고 품었다. 먼저 조선 관리의 공덕비가 한 줄로 서서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새재의 숲길은 오월의 따가운 햇살을 나뭇잎들이 가리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 위에는 녹색의 향을 뿌렸다. 길 따라 깊은 숲속에서 계곡물이 흘러내리고, 길옆 도랑에는 계곡물을 끌어들여 또 다른 작은 물길을 터놓았다. 물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낮은 곳으로 흐르니 극히 자연스러운 데 반하여 나는 숲길을 거슬러 오르니 숨이 차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본성이나 인간은 높은 곳으로 오르고 싶은 욕망 때문에 늘 힘들어한다. 무거운 욕심의 짐 내려놓으려고 하나, 그것 또한 마음뿐이다. 물길은 내림의 길이고 인생길은 오름의 길인가 보다. 맑은 물소리는 자연의 소리와 하모니를 이루어 녹색 숲의 깊은 늪에 빠져들게 했다.주흘관(主屹關)과 조곡관(鳥谷關) 중간 지점 용추연(龍湫淵)이 있었다. 용추연은 계곡 바위 위에서 떨어지는 폭포 아래에 깊은 소가 있는 곳으로 오랜 세월 동안 자연이 빚어 만든 절경으로 많은 시인 묵객이 노래하던 곳이다.아름다운 용추연 있는 곳에 교귀정(交龜亭)이 있었다. 교귀정은 조선시대 경상도 신구감사 교인식을 거행한 교인처(交印處)를 말한다. 교귀정에는 소나무 노거수가 늘 함께하고 있었다.짐작하건대 언뜻 보아도 나이가 삼사백 살은 되어 보인다. 거북등 같은 육각형 수피가 뚜렷이 몸을 감싸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렇고, 몸 둘레의 굵기는 2.6m이고 키는 8m나 되었다. 외모로 보아도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 온 범상치 않은 경륜을 말해 주고 있었다. 교귀정 주변에는 이 외에도 여러 그루의 소나무 노거수가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뭐니 해도 문경새재 숲길의 절정은 용추연과 돌에 새겨진 그 노래 시비, 교귀정과 그 지킴이 소나무 노거수가 있는 이곳이 아닌가 싶다.교귀정 노거수는 청렴, 절개, 사랑, 효도의 표징으로 관리의 서약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소나무는 우리 민족의 삶과 문화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민족의 나무라 할 수 있다. 부임하는 관리에게는 응원의 격려를, 떠나는 관리에게는 감사의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이제는 할 일이 없어졌는지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노송은 여유를 즐기며 교귀정을 지키고 있다. 새알 같은 둥근 바위에 “이 교귀정 소나무는 … 마치 여인이 춤을 추는 듯 새재를 찾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다. 보면 볼수록 특이한 형태와 수형으로 그 신비감을 더해 준다”라고 소나무 노거수를 찬양한 글이 새겨져 있었다. 교귀정 노거수가 이렇게 오랫동안 산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불됴심’이라 새겨진 길가 비석 때문이 아닐까. 새재 길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불조심이라는 경구의 표석을 보고 마음에 새기고 조심한 덕분이 아닐까. 그러나 교귀정 소나무는 하필 물도랑을 낼 때 뿌리 밑으로 내는 바람에 뿌리가 많이 상한 탓에 가지가 고사한 흔적이 여기저기 보여 안타까움을 자아내었다. 지난봄, 여름, 가을, 겨울에도 이 길 위를 걷고 또 오늘도 걸었다. 사계절 걸으면서 듣는 숲속의 바람 소리는 제각각 다르게 느껴졌다. 숲의 위치에 따라, 나무의 종류에 따라, 지형에 따라, 고도에 따라, 음지, 양지에 따라, 날씨에 따라 달랐다. 또한 마음의 평온 여부에 따라 달랐다. 숲은 소리의 고향이 아닌가 싶다. 문경새재 숲길이라는 장소는 변함없는데, 계절에 따라 또 다른 모습과 느낌으로 다가온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이 찾아와 신발을 벗어놓고 맨발로 걷는 사람도 많다. 발을 씻을 수 있는 세족장에서 바가지로 물을 퍼 흙 묻은 발을 씻고 있는 그들의 얼굴은 환하게 밝았다. 나 또한 그들과 같이 신발을 벗어 배낭에 넣고 맨발로 녹색의 숲길을 걸었다. 대지의 흙에 맨발바닥 살을 갖다 대니 묘한 촉감이 감정선을 자극했다.산이며, 하늘이며, 숲의 자연은 마치 사람의 얼굴과 같아서 자세히 보아야만 알 수 있으며 슬쩍 눈길만 주어서는 모른다. 하늘과 땅 사이에 물건마다 모두 주인이 있으니, 내 소유가 아니면 한 점도 취할 수 없지만, 오직 숲길에 부는 맑고 시원한 바람과 나뭇잎 사이의 따뜻한 햇살은 얼마든 취해도 막는 이 없고 아무리 사용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야말로 조물주의 끝없이 감추어 놓은 화수분이 아닐까. 옛날 우리 조상들은 산의 아름다움은 흙으로 살을 붙이고 돌로써 골격을 삼고, 초목으로 모발을 삼는다고 했다. 초목이 무성해야 살과 골격을 온전히 보전할 것이다. 문경새재 숲길은 이 모두가 잘 갖추어져 있어 우리 조상의 자연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문경새재 사계절의 숲길을 걸으면서 내 인생 한해의 삶을 반추해 본다.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면서 살아왔지만, 매번 큰 결실의 열매를 얻지는 못한 것 같다. 나의 노력이 부족 하였든지 아니면 봄에 희망의 씨앗을 제대로 뿌리고 여름에 가꾸는 데 나무와는 달리 열심히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봄의 희망이 지키지도 못할 과한 욕심이 아닐는지. 매년 후회를 하면서 늘 빈 가슴을 안고 살아왔다. 그러나 나에게 물질적으로 얻은 것은 그다지 없다 하더라도 계절을 맞이하면서 보내는 숲길에서 콩나물 같은 철학의 이삭 하나쯤은 주었다.매번 숲에 오면 숲과 한 몸이 된다. 숲에서 심호흡하고 숲의 향기를 맡고, 나무와 숲을 감상해 본다. 숲속 나무 아래에 서서 나무를 쳐다보며 허파 속 묵은 공기를 내뿜고 신선한 숲의 공기를 마셔본다. 공기의 신선한 맛을 음미하면서 온몸의 핏줄을 따라 퍼지는 것을 느껴본다. 욕심의 찌꺼기를 씻어내니 빈손으로 들어가 나올 때도 비록 빈손이지만, 텅 빈 가슴에는 기쁨의 충만감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경상감사 도임행차(到任行次)는교귀정은 도임하는 신임 감사와 업무를 마치고 이임하는 감사가 관인(官印)을 인계인수하던 곳이다. 문경새재 용추폭포 옆에 위치했다. 문경 현감 신승명(愼承命)이 1400년대 후반(1466-1488년)에 세웠다고 전해진다. 구한말에 불에 타 없어졌던 것을 1999년 중창하였다. 경상감사 도임행차는 조선시대의 ’미암일기초(尾84ED日記草)‘와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에서 보여지는데 총 300여 명으로 구성됐었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5-29

연륜 쌓인 ‘노목의 기개’서 공자의 가르침을 얻다

하늘에서 녹색의 빗물이 봄바람 붓끝에 휘몰아쳐 산천을 채색하고 있다. 겨울의 텅 빈 흑백의 산야에 풍성한 녹색의 물결이 어제와 오늘이 다르게 출렁이며 춤을 추고 있다. 녹색의 빗물이 서석지를 녹색으로 물들이고 처마 기와 골 끝에 줄지어 마당으로 떨어지는 녹색 빗물은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 동그라미를 그리며 사라진다.비 내리는 오월, 정원의 경정 마루 끝에 앉아 있노라니 몸과 마음이 녹색으로 물들어 간다. 성리학에 심취한 정원의 주인 정영방(鄭榮邦)은 경북 영양 자양산의 남쪽 자락에 터를 잡고 거처할 집을 짓고는 자연에 철학을 담은 정자와 연못이 있는 아담한 정원을 조성했다.연못은 사각형의 돌출된 부분을 두어 선비들이 좋아하는 송죽매국(松竹梅菊)을 심어 그 본성을 노래하며 삶의 본보기를 삼았다. 동북쪽 귀퉁이에 연못으로 물을 끌어들이는 도랑을 내고, 그 대각점이 되는 서남쪽 귀퉁이에 물이 흘러 나가는 도랑을 두었다. 바깥 물이 들어오면 자연히 넘쳐 나가는 자연의 섭리를 따랐다. 연못 안에 솟은 서석군(瑞石群)에서 유래하여 서석지(瑞石池)라 이름을 지었다. 크고 작은 20여 개 돌들이 각양각색의 형태로 솟아 있는 것을 보고 돌 하나하나에 선유석(仙遊石)이니 통진교(通眞橋)니 하면서 이름을 붙여 의미를 부여했다.이는 정원 주인의 학문과 인생관은 물론 은둔생활의 이상적 경지와 자연의 오묘함과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심취하는 심성을 나타낸 것이리라. 정자의 네모난 기둥에 원기둥 하나는 양을 표시하고 둥근 기둥에는 네모난 고리를, 네모난 기둥에는 둥근 고리로 음양의 사상을 재현했다.정자의 건축과 연못의 조성에도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 철학을 표현했다. 우주와 인간의 본질을 이(理)와 기(氣)의 상호작용이라면서 이(理)는 불변하는 원리나 이치를, 기(氣)는 물질적 에너지를 의미했다. 인간의 본성과 정서, 도덕적 행위를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두며, 인간이 선한 이(理)를 실현하도록 강조했다.성리학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통치 이념으로 채택되었고, 사회적 질서와 윤리적 가치를 강화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인간의 심성을 탐구하고,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본성을 강조했으나 관념적인 면이 강하여 개인의 자유나 개성, 실사구시적인 면에서는 등한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과거의 의미와는 달리 오늘날 이곳을 찾는 방문객은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고건축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경정(敬亭)이라는 정자와 그 부속건물을, 연못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서석지를, 나처럼 노거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은행나무를 보러 오지 않을까 싶다. 삼종을 한 세트로 묶어서 연당마을 서석지(瑞石池)로 통한다. 연못(蓮池)은 땅을 파거나 흐르는 물을 막아서 물을 가두어 놓은 곳을 의미한다. 못(池)은 대개 자연스럽게 형성된 느낌이 나지만, 연못이라 하면 사람이 미관을 위해 정원 등 인공적으로 만든 느낌이 난다. 연못은 스스로 작은 생태계를 구성하므로 자연스레 오랫동안 보존될수록 희귀생물의 보고로 변한다. 생태적인 정원의 연못에 인문학의 옷을 입혀 이상적인 삶을 엿볼 수 있다. 녹색에 물들면서 그 옛날 조선의 성리학에서 오늘날 생태학의 정원으로 바라보았다. 연못은 주택에 필요한 부속품이다. 삶에 있어서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연못은 건강을 답보하는 예방 의학적 측면에서도 또한 삶의 정서를 살찌우는 심리적 측면에서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연못은 정원과 함께 더운 여름에는 높은 기온을 낮추고 추운 겨울에는 낮은 기온을 높인다. 또한 습도를 조절하는 등 미세 기후를 조절하여 우리 건강에 도움을 준다. 미생물, 곤충, 새 등 다양한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데 물을 제공하는 등 많은 생명체를 불러들여 자연 생태계의 다양성을 놓인다.정원의 미적 아름다움은 정원의 주인이나 찾아오는 방문객들에게 정서를 순화시켜 심미적인 감흥에 젖어 들게 한다. 인공으로 만든 연못이 자연과 조화하여 아름다움을 더할 뿐만 아니라 작은 생태계의 핵심 구역으로 그 기능을 발휘하기도 한다.특히 은행나무는 석문 정영방 선생이 본래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부인이 가마 안에 은행나무를 가지고 와서 심었다고 하니 참으로 선생의 아내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신의 한 수라는 생각이 든다. 은행나무는 처음에는 정원의 일개 구성원인 평범한 가족이었으나 세월의 연륜이 쌓이면서 성장하여 이제는 정원의 주인격이 되었다. 언젠가 모르게 담장을 뛰어넘고 연못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자신의 존재감을 키워갔다. 이제는 어릴 적에 쳐다보았던 정자도 송죽매국도 모두 은행나무를 쳐다보는 격이 되었다.나이가 많아 주민들로부터 어른 대접으로 지팡이도 선물 받았다. 그 누구도 함부로 볼 수 없는 석문에 있는 거대한 촛대, 선바위를 볼 수 있고, 석벽을 끼고 흐르는 남이포 푸른 물도 볼 수 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정원뿐만 아니라 마을의 품격도 높여 주고 유명세는 날이 갈수록 하늘을 솟구치고 있다. 이제는 서석지 하면 은행나무 노거수를 빼놓을 수 없게 되었다.까치는 은행나무에 둥지를 틀고 아침마다 반가운 소식을 전한다. 까치 가족이 오순도순 살아가는 모습에서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교훈을 얻는다. 까마귀 새끼가 자라서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효라는 뜻으로, 자식이 자라서 어버이의 은혜에 보답하는 효성을 이르는 말이다. 또 은행나무는 행단(杏壇)을 생각하게 하고 행단은 공자를 떠올리게 한다. 공자는 15세에 지학(志學), 학문에 뜻을 두었고, 30세 이립(而立), 학문에 기초를 세웠다. 40세 불혹(不惑), 사물의 이치에 대해서 의문 나는 점이 없었고, 50세 지명(知命), 천명을 알았다. 60세 이순(耳順), 남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고, 70세 종심(從心), 뜻대로 행하여도 도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한다. 은행나무 아래에서 공자의 일생을 생각하면서 또 하나의 교훈을 얻는다.서석지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정원의 아름다움과 정자와 연못의 오묘함만 설명할 것이 아니라 정원의 연못과 은행나무의 생태와 문화를 설명하고 인문학의 옷을 입혀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내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당신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왜? “이렇게 아름다운 좋은 곳에 와서 그 옛날의 발자취를 더듬고 오늘날 문학의 옷을 입혀 스스로 침묵 속에 감동과 환희의 시간을 가지니 더 무엇을 바랄 것인가.”라고 말했다.그렇다. 비를 맞으면서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나 자신을 잊고 있다. 고금을 드나들며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 있다고 할까.영양 연당마을 서석지(瑞石池)는…서석지는 성리학자이며 문인인 정영방(鄭榮邦)이 1613년에 조선 광해군 시대 축조하였다고 전한다. 은행나무 나이는 440살, 키는 15m, 가슴높이의 둘레는 6m가 넘는다. 수관 폭이 24m이고 앉은 자리 넓이는 130여 평이나 된다. 담양의 소쇄원(瀟灑園), 보길도 세연정(洗然亭)과 함께 서서지 정원을 우리나라 3대 민간 정원으로 꼽았다.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 394-1 위치해 있으며, 중요민속자료 제108호이기도 하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5-22

천년 세월 지나며 신격화… 두려움과 경외심의 존재

오월은 신록의 계절이다. 텅 빈 숲의 나무도 푸름으로 풍성해지고, 짝을 찾느라 분주하게 지저귀던 새들도 푸른 숲에 보금자리를 틀고 알을 품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나무를 쫓아다니다 보니 나무의 성장 과정이 우리 인간의 삶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무는 살아있을 때는 부드럽고 연약하며, 죽었을 때는 딱딱하다.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부드럽고 연약함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는 생명체가 겪는 변화와 성장의 자연스러움을 상징한다. 비바람에 꽃이 떨어지는 모습은 생명의 연약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보여 준다. 꽃이 지고 난 꽃자리에 열매를 맺음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계승한다. 자연의 순환과 강인함을 또한 생명의 연속성을 드러낸다. 나무가 겪는 성장의 과정, 즉 자연의 법칙에서 인간에게도 적용되는 보편적인 원리에 대한 깊은 성찰로 교훈을 얻는다. 영덕군 지품면 신안리 512-1번지에 천년의 세월을 품고 살아가는 명품 느티나무 노거수 여행을 떠났다. 말이 천년이지 100년을 10번 곱한 숫자다. 조선 500년을 뛰어넘은 고려시대에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으니, 역사의 산증인이다. 당산나무로 신격화하여 제사를 지낼 뿐 아니라 금기 사항을 정하고 이를 무시하고 훼손하게 되면 동티가 난다고 하여 모두 두려움과 경외감을 가졌다.숲에 깃든 정령 중에 나무의 정령이 으뜸이 아닐까 싶다. 키 14m, 몸 둘레는 9m의 천년의 세월을 품은 느티나무는 가부좌 틀고 앉은 온화한 부처님으로 다가왔다. 그를 톺아보니 “나를 자세히 보아주니 고맙구나. 많은 사람이 나에게 공손히 두 손 모아 절을 하면서 소원을 빌기도 한단다”라고 말했다. 나는 물었다. “무엇을 소원하고 빌지요?” 그러자 느티나무 노거수는 말했다.“나를 장수목(長壽木)이라면서 오래오래 살게 해 달라고 빈단다. 사실 숨 쉬는 생명체로서 마을에서 가장 나이도 많고 오래 살아왔단다. 마을을 개척할 때부터 아니 마을이 들어서기 전부터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단다. 마을을 떠나지 않고 늘 주민과 함께 살고 있으니 마을 역사의 산증인이라 해도 누가 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하니 영생불멸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대리 만족할 수 있는 대상물로 나무랄 데 없지 않니?”라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었다.“나를 다산목(多産木)이라면서 특히 아들을 낳아달라고 빈단다. 수많은 꽃을 피우고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보고 하는 모양인 것 같구나. 척박한 땅에도 경사진 계곡에도 그 어느 곳에도 마다하지 않고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린단다. 한 번 뿌리를 내리면 주변 환경이나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적응하면서 자손을 번식한단다. 오늘날 삼천리 방방곡곡 마을에 나를 볼 수 있는 것만 해도 그렇지 않니?”라고 했다. 어릴 적 목격한 것이라 또 수긍했다.“나를 건강목(健康木)이라 하면서 건강을 소원한단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은 계곡에서 쏟아지는 바윗돌에도 견디어 낸 훈장이란다. 꽃과 열매가 작고 볼품이 없는 것은 에너지 분배에서 거대한 몸을 유지하는 데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란다. 사계절을 맞이하면서 변화는 나의 아름다움을 보았지 않았나. 튼튼하고 아름답고 풍성한 몸매는 어느 나무도 나를 따를 수 없지. 아름다움은 건강의 바로미터란다”라고 했다. 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나를 재생목(再生木)이라면서 놀라움을 금하지 못한단다.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가지가 부러지고 절단된 모습이 여기저기 흉터로 남아있는 것이 보이지? 이 또한 스스로 아물어 새로운 가지를 재생되어 푸른 하늘로 꿈을 키운단다. 노령의 상처 난 몸에 돋아난 어린 가지 푸른 잎이 예사롭지 않아 보이지? 늘 면역력을 키우고 항상성으로 다친 몸을 스스로 치료하는 재생능력이 있단다”라고 했다.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라 부럽기까지 했다. “나를 영속목(永續木)이라면서 부러워도 한단다. 계절 변화에 따라 봄이면 연노랑 잎이 여름이 되면서 녹색 잎으로 가을에는 고운 단풍잎으로 변했다가 겨울이 되면 미련 없이 훌훌 벗어버리고 새하얀 눈옷으로 갈아입지. 이렇게 계절 변화에 맞추어 일생을 살아간단다. 외모는 그렇지만, 나에게도 봄에는 희망의 꿈을 꾸고, 여름에는 꿈을 향한 노력을 하고, 가을에는 그 꿈을 이룬단다. 겨울에는 욕심을 내려놓고 봄을 기다린단다. 그러하니 천년의 세월을 품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라고 했다. 인간은 이루지도 못할 욕심에 짓눌러 아우성을 치고 괴로움에 잠 못 이루어 밤을 설친다. 한 번 가지면 놓지 않으려 하고 쌓아두려고만 하는 인간과는 달리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우주의 리듬을 재현하니 참으로 본받을 만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요즘은 여성목(女性木)이라면서 호들갑을 떨고 있단다. 계절에 따라 변하는 모습이 몸단장하고 아름다움을 꾸미는 여성을 연상하게 한단다. 수형 또한 여자의 오지랖과 많이 닮았다고들 한다. 곤충, 새 등 많은 생명체의 서식처가 되어 주고 휴식처, 피난처를 제공해 주고 있으니 포용과 희생정신이 여성과 많이 닮았다고 한단다”라고 했다. 그렇다. 수렵시대와 농경시대는 힘으로 상징되는 남성의 시대라면 21세기는 부드러움과 감성의 시대로 여성의 시대가 아닐지 싶기도 했다.느티나무는 우리 삶의 지향점이랄까 다양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 의미인지 2000년을 맞이할 때 무슨 나무로 새 천 년 밀레니엄나무로 할까, 나라에서 논의했다. 많은 산림 전문가와 생태학자들, 그리고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느티나무를 선호하여 산림청은 새천년 밀레니엄나무로 지정했다. 우리 삶에 본받아야 할 상징성을 많이 지닌 것을 알고는 탁월한 선택을 한 산림청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천년의 세월을 품은 느티나무는 말했다. “나를 경외하며 소원을 빌면서도 발등 위에 농기계를 올려놓고 당집을 짓고 시멘트로 나의 목을 조르고 있어 숨쉬기도 힘들다. 신격화는 아니해도 좋으니 제발 목줄을 풀어주고 무거운 시설물을 치워 주면 좋겠다”라고 했다. 그러나 나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고 주민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할 수 있어 참으로 난감할 따름이었다. 느티나무는 위대한 스승으로서 충분한 자격과 요건을 갖추었다. 나 또한 주민들과 함께 오늘도 소원을 빌며 부족함을 채우고 교훈을 얻고자 노력한다. 한국산림문학헌장비는…‘한국산림문학헌장’은 이서연 시인이 지어 2021년 11월 18일 충남 보령시 미산면 봉성리에 세웠다. ‘숲을 사랑하여 시문(詩文)으로/ 숲의 정신을 담는 산림문학은/ 나무와 돌과 흙에서/ 삶의 씨앗이 되고 뿌리가 되고 꽃이 되는 문학으로/ 숲의 미래를 여는 산림문화를 이루고 가꾼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미래가 되고 역사가 되도록/ 산림문학이 사람 사는 세상에 나무가 되어/ 숲에서 형성된 맑은 영혼이 삶의 가치를 높여 가리니/ 자연의 섭리가 문학의 향기로 퍼져/ 문학이 숲이 되고 숲이 문학이 되도록 한다’는 내용이다.(사)한국산림문학회는 2024년 5월 8일 산림문학헌장비공원 내 시비제막식과 정자현판식을 열고 15년생 배롱나무를 기념식수 했다. 산림문학회 이사장 김선길 시인의 ‘나는 한 그루 나무이려니’ 외 4기의 시비가 세워졌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5-15

물결치듯 사방으로 뻗어나간 가지 아래 짙은 그늘이

춘 사월, 화창한 봄날, 햇볕은 나무에 옷을 입히고 새들에게 사랑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느라 날은 짧기만 하다. 상춘객들은 어디 어느 곳이 더 좋다느니 화려하다느니 나름의 관광지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내 눈에 도긴개긴이란 생각이 든다.어디가 더 경치가 좋고 나쁨의 우열을 가릴 수 없다. 가는 어느 곳이나 보이는 어느 곳이나 아름다운 봄꽃으로 단장되어 움츠렸던 마음을 펴게 한다. 나목의 가지에 연노란 잎이 나자, 만개한 벚꽃이 나무와 이별을 고한다. 하늘을 종횡무진 날아다니다 꽃비로 변하여 도로에는 꽃길로 수놓는다. 자동차 창문을 살짝 열고 봄바람 기운을 맞이한다. 날아든 하얀 꽃잎이 운전석 옆자리에 살포시 내려앉아 나즐로(나 홀로 즐겁게) 노거수 탐방을 함께 하잔다.안동 와룡면 주하리 마을로 향하는 농촌 시골길은 참으로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주변 산야는 봄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오르막으로 오르는가 싶더니 또 내리막길이 나타나고 모퉁이를 돌고 나도 또 모퉁이가 나타나고, 곡선의 시골길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이 긴장과 설렘의 연속이다.주하리 천연기념물 뚝향나무 노거수를 만나러 가는 날, 생각지도 못한 호사를 누릴 줄이야 누가 알리라. 봄의 풍경에 빠져 보니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진성 이씨(眞城李氏) 주촌종택(周村宗澤) 뚝향나무 천연기념물 제314호’라는 표지석 옆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서 있는데 마침 주촌 종택에 거주하는 이세준 씨를 만나 뚝향나무에 대한 소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조선 세종 때인 1430년경 선산부사를 지낸 이정(李楨)이 평안도 정주 판관으로 있을 때 가져와 심은 것이란다. 이정이 약산산성(藥山山城) 쌓기를 마치고 귀향하면서 세 그루의 향나무를 가지고 왔는데 도산면 온혜와 외손인 선산의 박 씨에게 각각 한 그루씩 주고, 남은 한 그루를 이곳에 심었는데 유일하게 살아남았다고 했다.안내판에 “높이는 3.3m, 가슴높이의 둘레는 2.3m, 밑동 둘레는 2.4m, 가지 밑의 높이는 1.3m이고, 가지의 길이는 동쪽으로 5.8m, 서쪽으로 6.3m, 남쪽으로 5,5m, 북쪽으로 5.7m이다. 향나무와 비슷하지만 곧게 자라지 않고 전체가 옆으로 퍼지면서 자란다. 이 지방에서 많이 자라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었다.약산산성 쌓기를 마친 기념으로 향나무를 가지고 와서 심은 것으로 소위 기념식수목이며 명목인 셈이다. 우리 조상들은 아들딸을 낳았을 때 기념으로 소나무와 오동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리고 장성한 후에는 딸의 경우 혼수 기념으로 오동나무는 장롱의 재목으로, 소나무는 장례식에 사용할 관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조상의 지혜가 돋보이는 기념식수목이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기념일을 찾아 기념식수를 하면 어떨까.주하리 뚝향나무를 노송으로 불렀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한다. 노송운첩(老松韻帖)과 김성설, 이만인(1834~1897)이 지은 경류정노송기(慶流亭老松記) 도판을 보면 “우리 종가 경류정(慶流亭) 앞에는 만년송(萬年松) 한 그루가 있다. 가지와 줄기가 극히 구불구불 서리서리 얽혀서 엄연히 화개(華盖)를 우뚝 펼쳐놓은 것처럼 되었다. 높이는 겨우 몇 길도 안 되지만, 그 아래에는 백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참으로 기품인 송(松)이다. 그러나, 그 깊은 뿌리와 많은 가지, 무성한 잎으로 짙게 그늘진 모습은, 송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일찍이 덕을 힘쓰고 업적이 넓은 군자의 솜씨를 거치지 않았다면 이처럼 오래도록 무성하게 우거지지는 못했을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경류정노송기처럼 뚝향나무는 지금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땅에서 뿌리를 내린 줄기는 비틀려 꼬였고 지상 1.3m 높이에서 여러 개의 가지를 내어 사방으로 뻗었는데, 밑으로 늘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28개 지지대를 받치고 있다.그런 연유인지 몰라도 위로 자란 줄기는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린 모양으로 줄기가 뭉쳐있었다. 거대한 하나의 뭉치로 뱀이 꽈리를 틀고 숨을 죽이고 있는 모습을 방불하게 했다. 한편으로는 파도치는 물결처럼 살아 움직이는 느낌으로와 닿았다. 많은 가지가 하나로 통일되고 단결된 모습의 견고함을 느끼게 했다.밑으로 내려오지 못함에 대한 반항의 몸부림인지 자유 의지의 꺾임에 대한 분노의 표출인지 모를 일이다. 인위적인 행위의 제한에 신비로운 모습으로 다가와 보이지만, 뚝향나무 본래의 성질에 반하다 보니, 그야말로 괴이함이랄까 거대한 분재형의 예술품으로 우리 앞에 섰다. 여기에 더하여 문화재청에서는 삼각형으로 만들어 보겠다고 사람의 상투처럼 나무의 가지를 억지로 하늘로 뽑아 올리고 있다. 아래로는 지지대를 세워 못 내려가게 하고 위로는 높은 지지대를 세워 가지를 상투처럼 뽑아 올리고 있다. 뚝향나무는 한국 특산종으로 줄기가 똑바로 자라지 않고 가지는 비스듬히 자라다가 전체가 수평으로 퍼지는 점이 특징이다. 그런데 뚝향나무 본래의 성질에 반하는 이러한 행동이 오랜 세월은 괴이하면서도 아름다운 분재형의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놓았다. 보지 않으면 믿기 어려운 수형의 모습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나무 본래의 성질에 반하는 인위적인 수형의 모습에 감탄하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뚝향나무 주변에는 벚나무, 단풍나무, 장미, 박태기나무, 철쭉나무 등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이들 나무가 자라 뚝향나무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더 크기 전에 다른 곳으로 옮겨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벚꽃이 뚝향나무에 하얗게 내려앉아 광합성 작용에 방해가 되고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지금도 뚝향나무 아래 통풍이 잘되지 않아 이끼가 무성하다. 습기가 차 나무줄기에는 병충해와 균이 침입하여 나무를 상하게 하지 않을까 싶다.진성 이씨 이정이 심은 뚝향나무는 이제 이정의 분신으로 자리매김하여 후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약산산성을 성공적으로 쌓은 기념으로 고향에 심은 뚝향나무가 이정의 정신으로 변하여 600여 년을 이어오고 있다. 경류정 뚝향나무라 부르면 어떨까. 경류정은 퇴계 선생이 이름 지은 별당으로 선생의 큰집 종택이기도 하다.주변에 공원을 조성하여 주민이 뚝향나무 가지를 꺾어 삽목한 50년생 나무를 안동시에서 두 그루를 구입하여 2012년 3월 15일에 옮겨 후계목으로 심어 놓았다. 모두 어미나무처럼 형태를 잡아 키우고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후계목으로 어미나무 못지않게 우리 후손의 앞에 서서 그 신기한 모습을 뽐내고 있으리라 짐작해 본다.안동 진성 이씨 종택(安東 眞城李氏宗宅)은…14세기에 안동 지역에 정착한 송안군 이자수(松安君 李子脩)가 지었다고 전한다. 이자수는 진성 이씨의 시조 이석의 아들로 고려 시대의 문신이다.종택은 본채와 별당, 그리고 사당, 행랑채, 방앗간채로 이루어져 있다. 본채는 안채와 사랑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성리학적 생활 규범에 따라 남성과 여성의 생활공간이 구분되어 있다.본채 뒤편에 있는 사당은 내삼문이 있는 담장으로 둘러싸여서 독립적인 공간을 이루고 있다. 본채 왼쪽에 있는 별당은 이자수의 6대손인 이연이 성종 23년 1492년에 지었다고 한다. 별당의 이름인 경류정(慶流亭)은 조선 시대의 대학자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지었다. 지방민속자료 제72호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5-08

국권 찬탈 치욕의 현장, 나무는 모두를 지켜봤다

전국에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는 어긋났다. 왜 빗나간 일기예보가 이렇게 기쁠까. 문경회(文卿會·퇴직공직자 모임) 회원들은 서울 나들이로 월드컵경기장을 관람하고 남산공원에 있는 시립서울 남산유스 호텔에 숙박했다. 아침 식전에 남산공원 둘레길을 산책했다.서울 한가운데 자리 잡은 남산 공원 둘레길은 울창한 숲속에 잘 다듬어져 있었다. 녹색 상큼한 향기 마음껏 만끽하지도 못하고 국립중앙박물관 관람 관계로 중도에 멈추고 되돌아와야 했다.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언제 또 기회가 있을지 모르는 일이고 보면 아쉬움이 컸다. 오늘 모든 모임 일정을 마치고 딸아이 집에서 자고 내일 오후에 대구로 갈 기차표를 예매해 둔 상태였다. 때를 기다리기보다 기회를 만들면 된다. 다음날 서울 남산공원 둘레길을 산책하기로 마음을 먹었다.서울을 방문하는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꼭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 연인들이 사랑을 맹세하는 도심 속 로맨틱한 섬 서울 남산타워가 정상에 우뚝 서 있는 남산공원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남산케이블카, 남산타워만 생각하고 산책로인 둘레길을 놓치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남산공원 둘레길은 북측 순환로와 남측 숲길을 연결한 7.5㎞로 1시간 반이면 걸을 수 있는 도심 속 산책길이었다. 지하철 4호선 명동역을 이용하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다. 남산공원 둘레길은 사계절 아름다움을 연출하지만, 특히 봄에는 벚꽃, 개나리, 철쭉이 흐드러지고 피어 꽃길로 수놓았다.흩날리는 꽃비를 맞으며 걷다 보니 일상에 지쳐있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도 경쾌하고 가벼웠다. 푸른 나무들이 울창한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간간이 서울 도심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좋았다. 약 3.3㎞ 이어지는 북측 순환산책로는 차와 자전거의 통행이 전면 금지되고 오직 보행자만 걸을 수 있는 순수한 산책로였다. 복잡한 서울 도심에 이런 조용한 숲길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였다.숲길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남산 둘레길을 완주하고 정상에 올라 있었다. 아름다운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서울은 세계 어느 나라 수도 못지않게 발전하고 아름다운데 왜 내 마음에는 남산 둘레길 초입에서 만난 침묵하는 관저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노거수가 긴 여운을 남길까. 옛 일본 통감 관저 오른쪽에는 느티나무가 왼쪽에는 은행나무가 형제처럼 살고 있었다. 임진왜란을 전후로 남산 기슭에 느티나무가 먼저 태어나 살고 있는데 누군가 은행나무를 이곳으로 옮겨 형제처럼 살아가게 했다.지금은 관저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기억의 터’와 ‘통감 관저 터’ 빗돌만 세워 놓았다. ‘기억의 터’는 강제로 꽃다운 나이에 낯선 곳으로 끌려가 갖은 치욕을 당한 위안부를 잊지 말자고 이곳에 빗돌을 세웠다고 했다.‘통감 관저 터’ 빗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일제 침략기 통감 관저가 있었던 곳으로 1910년 8월 22일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게와 총리대신 이완용이 강제 병합 조약을 조인한 ‘경술국치’의 현장이다.” 그리고 보면 지금으로부터 꼭 114년 전인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 공식적으로 넘어간 ‘국치’의 현장이었다. 통감 관저는 조약체결 이후 ‘총독 관저’로 바뀌었고, 1939년 9월 현 청와대 자리에 총독 관저가 신축돼 옮겨가기 전까지 29년간 그 기능을 유지했다고 한다. 당시의 통감인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의 작위를 기리는 동상이 거꾸로 세워져 있었다. 내게는 그 모습이 하야시 곤스케가 자신의 아니 일본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거꾸로 매달려 빌고 있는 모습으로 비추어졌다.그때 이곳 현장에 있었던 관저와 인물들은 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아직도 현장의 역사를 증언하는 관저를 감시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노거수가 살아가고 있다. 총독 관저를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일본 총독의 개노릇을 하는 것도 모자라 나라까지 팔아먹고 자신의 배를 불린 매국노들이 누군지 노거수는 다 알고 있을 터이다.밤의 도둑고양이처럼 시도 때도 없이 관저를 찾아 드는 매국노의 숨을 죽인 게다 소리도 노거수는 보고 듣고 기록해 두었으리라. 한편으로는 외침의 봉송 대 연기에 놀라 헐떡이며 말을 타고 오르내리는 순찰대의 말발굽 소리도 보고 듣고 우국충정의 관리도 노거수는 기록해 두었으리라. 언제 나무와 의사가 교환된다면 그 옛날 매국노는 누구고 충신은 누구인지 만천하에 밝혀지리라. 모두가 수치스러움에 입을 다물고 노거수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는지도 모른다.왼쪽의 감시인 은행나무는 나이가 400살, 키 21.3m, 가슴 높이 둘레 5.94m이다. 오른쪽 감시인 느티나무는 나이 450살, 키 23m, 가슴 높이 둘레 6.37m이다. 지금은 ‘기억의 터’와 ‘관저의 터’를 내려다보면서 남산 둘레길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있는 증인으로 거듭나고 있다. 아름다운 이곳을 어떻게 알고 여기에 침략국 원수의 관저를 지었는지 모를 일이다.그 위세라면 궁궐도 강탈할 수 있을 텐데, 겸손을 가장하고 아름다운 우리 강산의 정수를 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우리는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노거수를 역사의 산증인으로 ‘기억목(記憶木)’으로 이름을 붙여주고 천연기념물 반열에 올려 서울 남산공원 상징물로 자리매김해야 하지 않을지 싶다. 기억목은 귀띔해준다. “자강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며, 누굴 원망하고 미워하기보다 스스로 잘못은 없는지 그들에게 어떤 빌미를 주지 않았는지 반성부터 해 보라 한다.” 4월의 봄은 나목의 나뭇가지에 푸른 옷을 입히고 꽃을 피워 외침에 희생된 영혼들을 위로하고 있는 것 같다. 봄바람에 숲은 파도처럼 푸른 물결이 끊임없이 출렁인다.서울처럼 한 나라의 수도가 산으로 둘러싸인 곳은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물다. 높고 낮은 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푸른 한강이 그림처럼 흐르는 서울의 중심에 우뚝 자리한 남산은 우리나라의 보배이다. 남산 정상에는 사랑의 자물쇠가 빼곡히 달려 있었다. 열쇠를 통에 넣어버렸으니 잠긴 자물쇠는 영원히 열리지 않는 것처럼 사랑 또한 지속될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증언해 줄 느티나무, 은행나무 노거수를 이제는 기억목 노거수로 남산의 상징물로 천년만년 살아가기를 희망해 본다. 서울 남산공원 둘레길 산책하면서 우리의 아픈 역사 현장을 지키고 있는 노거수를 보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다짐해 본다. 목멱산(木覓山) 봉수대전국의 봉수가 집결되었던 곳으로 경봉수(京712F雄)라고도 불렸다. 봉수제도는 신호체계에 따라 연기나 불을 피워서 변방의 긴급한 사정을 중앙까지 전달하여 알리며, 해당 지역의 주민들에게도 알려 빨리 대처하도록 하는 일종의 통신수단이다.산봉우리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불을 피워서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제1 봉수대는 함경도-강원도-양주 아차산, 제2 봉수대는 경상도-충청도-광주 천립산, 제3 봉수대는 평안도 강지-황해도-한성 무악 동봉, 제4 봉수대는 평안도 의주 황해도 해안-한성 무악 서봉, 제5 봉수대는 전라도-충청도-양천 개화산에 이르는 봉수를 받았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5-01

땅에 엎드려 기어가듯 ‘겸손의 자세’로 뿌리 내려

날씨만 맑고 포근하다면 겨울 여행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겨울임에도 맑고 푸른 하늘에서 따뜻한 햇살이 시골 마을에 내리쬐고 있다. 이럴 때 나즐로(나 홀로 즐겁게) 노거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신명이 나서 눈앞에 펼쳐지는 공허한 자연마저 마음속엔 꽉 찬 느낌으로 다가온다.봄 여행은 때로는 춘곤증에 시달리고, 여름 여행은 모기, 쇠파리 등 갖은 벌레가 어디 가나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들어 성가시게 굴기도 하고 때로는 시골길 풀숲에 뱀이 나타날까 봐 두렵고 무섭기도 하다. 가을 여행은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을 볼 때면 괜스레 감상적이어서 마음이 울적하기도 하다. 그러나 날씨만 괜찮다면 겨울 여행은 이 모두를 잠재우고 그저 목적하는 바를 즐겁게 이룰 수 있어 좋다. 고즈넉한 시골 마을 길을 굽이굽이 돌면서 경북 청도 명대리 32번지에 살아가는 뚝향나무 노거수를 찾았다. 작은 동산을 배경으로 운계사가 있고 조금 더 큰 산자락 끝을 붙잡고 모암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운계사(雲溪詞)는 1670년에 건축된 정면 3칸의 단출한 목조 기와로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 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다. 선생을 배향하는 모암재(慕庵齋)로 가는 길가에 1994년 9월 29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00호로 지정된 뚝향나무 노거수가 살아가고 있다.땅에 엎드려 기어가는 뚝향나무는 모양에서도 범상치 않지만, 절효 선생과 깊은 관계가 있다. 절효(節孝)란 절(節)은 절조로 절개와 지조를 뜻하고 효(孝)는 효성으로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섬기는 마음이나 태도를 뜻한다. 절효 선생은 돌아가시고 없지만, 그 정신만은 오로지 뚝향나무에 옮겨져 오늘날까지 후손은 물론이고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노거수와는 달리 땅에 엎드려 겸손의 자세로 살아가고 있으니 쉽게 찾기도 어렵다. 어렵사리 찾았다고 해도 키는 작고 덩치만 옆으로 길게 퍼져 카메라 렌즈에 쉽게 담기도 어렵다. 주변에 단풍나무, 소나무, 사철나무가 함께 살아가고 있어 세월이 흐른 뒤에는 서로에게 적대적인 방해물로 애를 때울 것이 분명해 보여 일찍이 다른 곳으로 옮겨 주어야 할 것 같다.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뚝향나무 노거수를 렌즈에 담았다. 나이는 350살 정도이고 키는 5m, 밑둥치 둘레는 1m, 수관 폭 앉은 자리는 30m나 된다고 안내판에 기록되어 있었다. 앉은 자리의 넓이는 키의 6배 정도나 되고 보니 참으로 놀랍다. 뚝향나무는 줄기와 가지가 비스듬히 자라다가 개울과 땅을 덮은 모양새를 취하고 있었다. 나무 아래 옹달샘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확인할 수 없었다. 나뭇가지가 우거져서 밑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겨우 나무 아래 개울로 들어가 보니 7주로 보였다. 그러나 안내문에 따르면 모두 한 그루에서 나온 나무라 했다.사각형 철제 막대 위에 얹혀 있는 뚝향나무 가지가 자유 분방하게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역동적인 모양은 차곡차곡 쌓인 세월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개울을 완전히 덮고 있어 비가 많이 와서 홍수라도 난다면 참으로 난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걱정이 앞선다.향나무는 강한 향기를 가지고 있어 제사 때 향료로 사용되었으며 정원이나 공원의 울타리용으로 많이 심고 있다. 위로 자라는 향나무보다는 볼품이 다소 떨어지는 경향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조경용보다는 주로 비탈진 언덕이나 둑에 심는 것이 대부분이다.언덕에 심어진 뚝향나무는 비탈진 사면 따라서 자라기 때문에 빗물로 인한 토사의 유실을 방지하고, 흙을 움켜쥔 나무뿌리로 말미암아 땅을 단단하게 하는 효과가 있는 나무이다. 키가 작다 보니 한삼덩굴 등 여타 덩굴식물이 얕보고 나무를 타고 올라 휘감고 있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뚝향나무는 절효 선생 후손에 관한 에피소드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후손 김용석은 딸만 낳고 가문의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부인이 뚝향나무 아래 샘에 촛불을 켜고 지극 정성으로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뚝향나무에 빌었다. 그 정성 탓인지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6·25 한국 전쟁이 일어나 군에 입대했다. 부인은 어렵게 얻은 아들이 무사히 전쟁을 치르고 돌아오기만을 뚝향나무에 빌고 또 빌었다. 그 덕분인지 전쟁터에서 총알을 13발이나 맞았는데도 살아서 돌아왔다. 이 기적 같은 모든 일들이 뚝향나무 덕분이라고 믿었다. 뚝향나무가 조금이라도 상하게 되면 집안의 사람이 다친다든지 도둑을 맞는다든지 좋지 않은 일이 꼭 일어났다고 한다. 우연의 일이라 넘기기에는 너무 신기하여 집안의 대소사를 뚝향나무에 먼지 신고를 하는 등 경배하고 지금까지 보호하고 있다는 것이다.”뚝향나무 노거수와 절효 선생은 한 몸이란 생각이 든다, 뚝향나무를 보면서 우리 선조의 절개와 지조, 부모에 대한 효성을 본받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후손과 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아 뚝향나무 노거수를 잘 보호하여 수백 수천 년을 함께 번영해 나가기를 희망해 본다. 절효(節孝) 김극일 선생은…청도 명대리 뚝향나무는 조선 시대 효자인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운계사 사당 앞에 있다. 절효 선생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머니를 위해 몸의 종기를 입으로 빨고 아버지의 병세를 위해 설사를 입으로 맛보았다고 한다.부모가 돌아가신 후 시묘살이 6년을 했는데, 호랑이가 무덤 곁에서 새끼 젖 먹이는 것을 보고는 제사를 지내고 남은 음식을 가축 기르듯이 호랑이 새끼에게 먹여 주었다고 한다.아버지에게 천첩(賤妾) 두 사람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살아 계실 때와 같이 섬겼고, 두 분이 돌아가시자 모두 기년복(朞年服)을 입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임금에게도 알려져 정문(旌門)에 향리 유림과 제자들이 그 효행을 후세에 귀감으로 삼고자 사시호(私諡號·학력은 높은데 지위가 낮아 나라에서 시호를 내리지 않을 때 일가나 고향 사람, 제자들이 올리던 시호)를 절효(節孝)라 하여 절조와 효성의 본보기로 삼았다.청도군 이서면 서원리 자계서원(紫溪書院)에 위와 같은 내용의 정려비가 있다. 김극일(金克一) 선생을 배향하는 재사이다. 선생의 자는 용협(用協)이고 호는 모암(慕庵)이다. 의흥 현감 김서의 아들로 야은 길재(吉再) 선생의 문인이다.향리에서 후학들의 훈도에 힘쓰다 75세에 돌아가셨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4-24

자유·조화·인내·자신감… 흉내 낼 수 없는 연륜의 감정

노거수를 찾아다니면서 매번 느끼는 감정은 다르지만, 노거수의 기이함과 신비한 모습의 이미지에서 나름의 여러 가지 의미와 교훈을 깨닫고 배운다. 노거수는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어떤 영적인 깨달음의 감정과 즐거움의 감흥을 준다.키보다 앉은 자리의 지름이 무려 3배나 훌쩍 뛰어넘는 둥근 동산 모양이랄까, 아름다운 반달 모양의 늘 푸른 노거수가 있다. 경북 청송 장전리 산 18번지에 살아가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313호 향나무이다. 나이 400살임에도 불구하고 키는 7.5m밖에 되지 않으나 앉은 자리는 지름 25m나 된다.가슴 높이 둘레가 5m이고 그 지점에서 네 가지가 사방으로 자신감 넘치게 뻗어 자라고 있다. 네 가지의 나무 둘레도 2m에서 1.5m로 다 합치면 원 줄기보다 더 굵다. 줄기에서 뻗은 가지가 땅을 딛고 발돋움하여 하늘로 비상하는 자세로 보이기도 하고, 문어발처럼 땅에 기어다니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400년은 결코 만만한 세월이 아니다. 향나무 수형을 자세히 살펴보면 외관상으로는 세 그루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 그루일 가능성이 크다. 나무 크기로나 줄기의 굵기 등으로 보아 같은 시대에 심은 것은 아닌 것 같다. 고령의 몸은 썩은 부위를 깨끗이 도려내고 방수, 방부 처리하여 원형을 영구히 보존하려는 미라처럼 보였다.나라에서도 노거수의 위대한 삶에 격려의 뜻으로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의미로 지팡이 14개를 선물했다. 특이하게도 향나무는 마치 거대한 덩굴식물을 연상하게 했다. 여기저기 이리저리 엉키고 감긴 가지의 기이한 모습에서 오랜 세월이 숨어들어 꿈틀거리며 살아 숨 쉬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러한 노거수는 그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수형이다. 신묘하여 신령스러운 기운을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늙은 몸에서 풍기는 여유로움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신통할 따름이다.그러나 오늘날 우리 인간사회에서는 나무와는 달리 현대 문명은 늙음이라는 단어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늙음은 쓸모없음의 동의어이며 우리는 늙었다는 말을 거의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어르신이나 연장자와 같은 완곡한 말로 이를 회피하기도 한다. 지난날 노인은 위대한 존엄성의 상징이지만, 오늘날은 부담스러운 존재로 여기기도 하는 것 같다.왜 노인은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는가? 노인이 되면 행위보다 있음이 강조되는데, 우리의 문명은 행위에 몰두해 순수한 있음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기 때문일까. 늙음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인 걸 모르는지, 노인의 부정적인 의미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향나무 노거수의 나뭇가지가 뒤엉켜 있는 모습에서 자유, 조화, 인내, 끈기, 자신감을 느끼게 한다. 오랜 세월이 아니면 도저히 흉내를 낼 수 없는 연륜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사계절 내내 푸른 잎이 촘촘히 감싸고 있어 그의 품속으로 들어가 보지 않고는 그의 연륜을 느낄 수 없다. 거대한 몸은 푸른 이끼 옷으로 입혀져 젊음과 공존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사계절 내내 푸른 옷을 입고 늘 푸름을 자랑하지만, 특히 겨울에는 때때로 흰 눈꽃을 피워 순수함을 느끼게도 한다. 노거수의 모습에서 본받아야 할 가치가 있듯이 노인에게서도 배워야 할 교훈이 있을 것이다.향나무 노거수를 통해서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것이 자신을 위한 길임을 깨닫게 하였다. 향나무 노거수는 400년 전 영양 남씨(英陽南氏) 입향조인 운강공(雲岡公) 남계조(南繼曹)의 은덕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묘 주변에 심은 기념식수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묘도비가 세워져 노거수와 단짝이 되었다. 40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운강공 후손들이 매년 이곳에 모여 밤을 다 함께 지새우다시피 하면서 문중의 우애와 화목을 실천하고 있다. 늙은 향나무가 매개체가 돼 그들의 문중을 끈끈한 정으로 묶었다.사람이라면 자신의 가문과 후손의 번영을 위하는 마음은 그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의외로 흔하지 않다. 나 자신만 해도 그렇다. 문중 일에 바쁘다는 핑계로 늘 등한시 하다시피 했다. 지금부터라도 문중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얼마 있으면 강선계(講先契) 100주년 기념행사가 대구시 수성구 고산 노인복지회관에서 개최된다. 강선계는 600년 전 혼인으로 맺은 인연의 끈을 1923년도 일제 강점기 시대에 조직의 목적과 운영 규약을 문서로 하여 지금까지 이어온 세 가문의 모임이다. 옥산 전씨(玉山全氏), 아산 장씨(牙山蔣氏), 밀양 박씨(密陽朴氏) 삼 성씨가 모여 문중의 친목과 화합을 돈독히 함은 물론 충의와 효도에 바탕을 두고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구국에 앞장섰다. 조선 전기의 친족 관행에서 유래된 인연을 현재까지 이어오며 더욱 활성화에 노력을 기울이는 강선계는 사료적 가치도 높다고 한다. 서구적 생활양식의 보편화로 인간관계가 파편화되고 소외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어느 가문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이러한 미담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살아있는 상징물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강선계 100주년 기념행사에 삼 성씨가 함께 조상 묘역에 기념식수로 향나무를 심자고 제안해 볼까. 향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장수목으로 울릉도 도동의 절벽 바위 위에 자라는 향나무는 2000살이 넘었다고 한다. 향나무는 우리나라 자생식물로 사계절 내내 푸름으로 단장해 있다. 특히 제사 향료로 많이 이용되고 묘역이나 우물가에 식재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 민속문화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오늘의 발걸음이 앞으로 500주년 때에는 장전리 향나무 노거수처럼 멋진 모습으로 후손들 앞에 서 있지 않을까. 에크하르트 톨에(Eckhart Toll)는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라는 저서에서 “우리의 삶 전체의 여행이 궁극적으로는 이 순간에 내딛는 발걸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언제나 이 한 걸음만이 존재하며, 이 한 걸음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무엇을 만나는가는 이 한 걸음의 성질에 달려 있다. 즉 미래는 우리의 지금의 의식 상태에 달려 있다”라고 했다. 그렇다. 지금 우리의 늙음도 따지고 보면 먼 젊은 시절에 내디딘 발걸음으로 이루어졌다. 지금 시작의 발걸음이 세월의 연륜이 더해 미래의 현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대부분 인간은 영적 차원이 들어오는 게 대개 늙음을 통해서라고 한다. 그래서 노인은 존경받고 존중받았다. 노인은 지혜의 저장고였으며 깊이의 차원을 제공했다. 향나무 노거수의 삶과 마찬가지로 우리 노인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인데…. 오늘날 노인의 삶이 초라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청송군 천연기념물·도 기념물 현황은청송은 천연기념물 노거수가 많은 고장이기도 하다. 안덕면 장전리 산 18 향나무 노거수, 수령 400년. 부남면 홍원리 547 개오동나무 노거수, 수령 450년. 파천면 관리 721 외 17필 왕버들 노거수, 수령 380년. 파천면 신기리 659 외 15필 느티나무 노거수. 수령 500년. 현서면 월정리 264(침류정) 향나무 노거수. 수령 350년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이밖에 청송읍 부곡리 왕버들은 태풍으로 쓰러져 지정이 해제됐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4-17

한국에서 가장 키 큰 은행나무에게 ‘소원을 말해봐’

문경회(文卿會)는 퇴직한 공직자들의 친목 단체이다. 매년 봄가을에 북부권, 중부권, 남부권을 번갈아 문화유적지를 찾아다니면서 우정과 삶을 살찌우고 있다. 봄비가 내리다 그치다 하는 날 양평 용문사와 은행나무를 찾았다.고즈넉한 산중의 사찰이야 어느 때라도 풍경을 즐기며 마음 수양하기에 좋으련만, 은행나무는 누가 무어라고 하여도 노란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이 제철이다. 하지만 모임 일정 관계로 봄에 용문사와 은행나무를 찾았다.녹색이 물들어 가는 용문산 용문사로 향하는 숲속 길은 계곡물 소리와 함께 마음의 땟국물을 씻어 주었다. 절의 일주문을 들어서니 극락세계에 와 있는 느낌이다. 한 번도 와보지 못한 용문사와 우리나라에서 가장 키가 큰 은행나무 노거수를 만난다는 것만으로 가슴 설렜다. 모두가 말없이 묵묵히 걸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봄의 향연을 만끽하며 걷는 것 자체가 묵언 수행이었다. 생각은 깊은 바다와 높은 하늘을 마음껏 유영하면서 끝없는 명상에 빠져들었다. 철학은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고 우리의 삶은 문학과 예술의 옷을 입혀서 아름답게 살찌우려 노력한다. 종교는 죽음에 대해서 말하고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하여 우리는 또 무엇으로 옷을 입힐까? 깊은 신앙심의 기도로 우리는 안식을 찾으려 한다. 우리의 궁극적 목적지는 어디일까? 열차에 태워진 몸처럼 가만히 있어도 안내되어 저절로 가는 곳, 무슨 애쓸 필요가 있을까? 애쓴다고 해서 되지도 않을 일을, 누가 가보고 온 사람도 없는 곳을, 그런데도 극락이니 천당이니 하여 가겠다고 빌고 또 빈다. 인간의 끝없는 욕심도 모자라 오늘도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이 용문사 부처님과 은행나무 앞에서 소원을 빌고 있다.걸음은 멈추어지고 묵언 수행도 끝이 났다. 연노란 잎을 단 하늘로 치솟은 거대한 은행나무 노거수가 우리 앞에 버티어 섰다. 놀라움에 아무 생각 없이 경배의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합장했다. 몸이 그렇게 반응했다. 딱히 소원도 없었다. 거대함과 아름다움에 마음은 홀라당 뺏겨 버렸다. 노란 은행잎 단풍을 주어 책갈피에 넣어 때때로 펼쳐보곤 했던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주마등처럼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아름다운 연노란 은행잎 앞에 왜 지난 어린 시절의 노란 은행잎 추억이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다.그러나 그것도 잠시 잠깐이었다. 은행나무라 하면 노란 단풍잎을 매달고 노란 은행 열매를 생각했는데, 이슬 안개에 목욕하고 나온 연노란 은행나무 잎은 고목에 핀 아름다운 꽃과 같았다. 그 녹색의 향기는 또 어떠하리, 오방색 천이 은행나무에 걸쳐져 있고, 주변에는 노란 소원지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살찌우고 행복하게 하는 민속문화가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은행나무와 용문사는 하나로 생각되었다. 용문사를 세우고 은행나무를 심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은행나무는 용문사를 쳐다보면서 용문사의 보살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은행나무는 용문사를 내려다보면서 용문사 수호신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은행나무가 없는 용문사를 생각하면 외롭고 삭막할 것이다.지나가는 사람들의 흘리는 말을 주워 들어보면 용문사 절보다 은행나무가 더 유명하며 많은 사람이 찾는다고 했다. 중국 관광객까지 나무에 매료되어 기념사진을 찍고 소원지를 매달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런 것 같다. 변화가 없는 용문사보다 사계절 변하는 은행나무가 더 친근감이 들고 마음을 끌었다.용문사 절은 649년 신라 진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세웠다고 한다. 은행나무 노거수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고 갔는데 그것이 자랐다는 설이 함께 전해지고 있다.원효와 의상대사가 당나라로 유학 가던 중 하룻밤을 유숙하면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세상사 마음먹기에 달렸다)”라는 크나큰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그렇다. 마음먹기에 따라 우리의 삶도 불행과 행복으로 갈라질 것이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인지를 알면서도 그 무엇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만물의 열매는 씨앗을 둘러싸고 있는 깍지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태양이 없는 밤은 모두를 같게 하고 태양이 있는 낮은 모두를 다르게 한다.같으면서도 다른 것이 세상의 만물이며 이치이다. 생과 사라는 삶과 죽음은 하나의 이음줄에 서있는, 높고 낮음과 귀하고 천함이 없는 평등한 물상이다. 있는 위치에서 즉 놓여 있는 곳에서 역할을 충실할 따름이다. 못하고 잘하고, 나쁘고 좋고, 필요 있고 필요 없음의 구분은 시와 때가 되면 바뀌고 변한다. 거대한 은행나무 앞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물들었다.아무도 나를 해치지 않으려 하는데 나는 왜 내 자신이 무기력하고 나약하여 스스로 무너지려 하는지 모르겠다. 삶은 한 편의 꿈같은 것일까, 그 종말 또한 한 줌의 재로 끝난다는 것일까. 사람을 제외하면 어떤 생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 어떤 수컷 거미는 자신 몸의 살점을 암컷의 먹이로 주며 죽어가는데,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니 미물만도 못한 것일까. 불교에서는 죽는다는 건 동시에 다른 어떤 것으로 태어나는 것이라는 윤회설을 믿고 있다.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처럼 우리 또한 은행나무 아래에서 마음먹기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는다.조선 시대 태종은 용문사 은행나무를 세상 모든 나무의 왕이라 했다. 세종대왕은 당상관 직첩의 벼슬을 내렸다. 불타 없어진 사천왕문을 대신한다고 천왕목(天王木)이라 불렀다. 나라에 위기가 있을 때마다 울기도 하고 전쟁과 환란에 함께 하였다고 하여 호국목(護國木)이라 불렀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부인이 정성껏 빌면 아들을 얻는다고 하여 사랑목이라 불렀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면서 민속문화 유산으로 깊숙이 자리 잡았다. 1천100살이 훌쩍 넘은 나이임에도 매년 350여㎏의 은행이 열린다고 하니 청춘목(靑春木)이랄까, 다산목(多産木)이라는 이름을 덧붙여도 좋겠다.은행나무에는 금기 사항이 있어 이를 어기면 천벌을 받는다는 징벌담의 설화가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이곳 용문사는 의병 활동 근거지였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일본군이 용문사를 불태웠지만, 은행나무는 무사했다고 한다. 어떤 연유로 불에 타지 않고 살아남았는지 천운을 타고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옛날 은행나무를 베고자 톱을 대었을 때 나무에 피가 나오고 맑던 하늘이 흐려지면서 천둥 번개가 쳤기 때문에 중지했다는 이야기도 내려오고 있다. 믿거나 말거나 신령스러운 은행나무 노거수인 만큼 별의별 믿기 어려운 전설이 뭉쳐서 내려오고 또 덧붙여서 내려가고 있다.우리 일행은 용문사를 빠져나왔다. 그 어디에도 우리들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우리 마음속에 그 흔적이 남아있을 뿐이다.용문사 호국목 은행나무 노거수는우리나라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로 알려졌다. 1962년 12월 7일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됐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5번지에 위치했다. 키 42m, 가슴 높이의 둘레 15.2m, 앉은 자리의 폭 28m이고, 나이는 최하 기준으로 1천100살로 안내되고 있다. 탄소동위원소 연대 측정기를 이용하여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있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