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한국에서 가장 키 큰 은행나무에게 ‘소원을 말해봐’

등록일 2024-04-10 20:33 게재일 2024-04-11 14면
스크랩버튼
(24) 양평 용문사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한국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로 알려진 용문사 은행나무 노거수.

문경회(文卿會)는 퇴직한 공직자들의 친목 단체이다. 매년 봄가을에 북부권, 중부권, 남부권을 번갈아 문화유적지를 찾아다니면서 우정과 삶을 살찌우고 있다. 봄비가 내리다 그치다 하는 날 양평 용문사와 은행나무를 찾았다.

고즈넉한 산중의 사찰이야 어느 때라도 풍경을 즐기며 마음 수양하기에 좋으련만, 은행나무는 누가 무어라고 하여도 노란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이 제철이다. 하지만 모임 일정 관계로 봄에 용문사와 은행나무를 찾았다.

녹색이 물들어 가는 용문산 용문사로 향하는 숲속 길은 계곡물 소리와 함께 마음의 땟국물을 씻어 주었다. 절의 일주문을 들어서니 극락세계에 와 있는 느낌이다. 한 번도 와보지 못한 용문사와 우리나라에서 가장 키가 큰 은행나무 노거수를 만난다는 것만으로 가슴 설렜다. 모두가 말없이 묵묵히 걸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봄의 향연을 만끽하며 걷는 것 자체가 묵언 수행이었다. 생각은 깊은 바다와 높은 하늘을 마음껏 유영하면서 끝없는 명상에 빠져들었다.

 

고즈넉한 산중에 자리한 용문사 수호신

1천100여년 뿌리내린 은행나무 노거수

매년 350여㎏ 은행 열려 청춘목·다산목

세상의 모든 나무의 왕 등 다양한 이름도

녹색 물든 은행나무 오방색 천 두르고

주변엔 ‘소원성취’ 노란 소원지 줄잇고

사계절 거대한 자태 하늘로 쏟아 올라

철학은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고 우리의 삶은 문학과 예술의 옷을 입혀서 아름답게 살찌우려 노력한다. 종교는 죽음에 대해서 말하고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하여 우리는 또 무엇으로 옷을 입힐까? 깊은 신앙심의 기도로 우리는 안식을 찾으려 한다. 우리의 궁극적 목적지는 어디일까? 열차에 태워진 몸처럼 가만히 있어도 안내되어 저절로 가는 곳, 무슨 애쓸 필요가 있을까? 애쓴다고 해서 되지도 않을 일을, 누가 가보고 온 사람도 없는 곳을, 그런데도 극락이니 천당이니 하여 가겠다고 빌고 또 빈다. 인간의 끝없는 욕심도 모자라 오늘도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이 용문사 부처님과 은행나무 앞에서 소원을 빌고 있다.

걸음은 멈추어지고 묵언 수행도 끝이 났다. 연노란 잎을 단 하늘로 치솟은 거대한 은행나무 노거수가 우리 앞에 버티어 섰다. 놀라움에 아무 생각 없이 경배의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합장했다. 몸이 그렇게 반응했다. 딱히 소원도 없었다. 거대함과 아름다움에 마음은 홀라당 뺏겨 버렸다. 노란 은행잎 단풍을 주어 책갈피에 넣어 때때로 펼쳐보곤 했던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주마등처럼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름다운 연노란 은행잎 앞에 왜 지난 어린 시절의 노란 은행잎 추억이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잠깐이었다. 은행나무라 하면 노란 단풍잎을 매달고 노란 은행 열매를 생각했는데, 이슬 안개에 목욕하고 나온 연노란 은행나무 잎은 고목에 핀 아름다운 꽃과 같았다. 그 녹색의 향기는 또 어떠하리, 오방색 천이 은행나무에 걸쳐져 있고, 주변에는 노란 소원지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살찌우고 행복하게 하는 민속문화가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은행나무와 용문사는 하나로 생각되었다. 용문사를 세우고 은행나무를 심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은행나무는 용문사를 쳐다보면서 용문사의 보살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은행나무는 용문사를 내려다보면서 용문사 수호신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은행나무가 없는 용문사를 생각하면 외롭고 삭막할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흘리는 말을 주워 들어보면 용문사 절보다 은행나무가 더 유명하며 많은 사람이 찾는다고 했다. 중국 관광객까지 나무에 매료되어 기념사진을 찍고 소원지를 매달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런 것 같다. 변화가 없는 용문사보다 사계절 변하는 은행나무가 더 친근감이 들고 마음을 끌었다.

용문사 절은 649년 신라 진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세웠다고 한다. 은행나무 노거수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고 갔는데 그것이 자랐다는 설이 함께 전해지고 있다.

원효와 의상대사가 당나라로 유학 가던 중 하룻밤을 유숙하면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세상사 마음먹기에 달렸다)”라는 크나큰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그렇다. 마음먹기에 따라 우리의 삶도 불행과 행복으로 갈라질 것이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인지를 알면서도 그 무엇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만물의 열매는 씨앗을 둘러싸고 있는 깍지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태양이 없는 밤은 모두를 같게 하고 태양이 있는 낮은 모두를 다르게 한다.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 세상의 만물이며 이치이다. 생과 사라는 삶과 죽음은 하나의 이음줄에 서있는, 높고 낮음과 귀하고 천함이 없는 평등한 물상이다. 있는 위치에서 즉 놓여 있는 곳에서 역할을 충실할 따름이다. 못하고 잘하고, 나쁘고 좋고, 필요 있고 필요 없음의 구분은 시와 때가 되면 바뀌고 변한다. 거대한 은행나무 앞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물들었다.

아무도 나를 해치지 않으려 하는데 나는 왜 내 자신이 무기력하고 나약하여 스스로 무너지려 하는지 모르겠다.

삶은 한 편의 꿈같은 것일까, 그 종말 또한 한 줌의 재로 끝난다는 것일까. 사람을 제외하면 어떤 생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 어떤 수컷 거미는 자신 몸의 살점을 암컷의 먹이로 주며 죽어가는데,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니 미물만도 못한 것일까. 불교에서는 죽는다는 건 동시에 다른 어떤 것으로 태어나는 것이라는 윤회설을 믿고 있다.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처럼 우리 또한 은행나무 아래에서 마음먹기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조선 시대 태종은 용문사 은행나무를 세상 모든 나무의 왕이라 했다. 세종대왕은 당상관 직첩의 벼슬을 내렸다. 불타 없어진 사천왕문을 대신한다고 천왕목(天王木)이라 불렀다. 나라에 위기가 있을 때마다 울기도 하고 전쟁과 환란에 함께 하였다고 하여 호국목(護國木)이라 불렀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부인이 정성껏 빌면 아들을 얻는다고 하여 사랑목이라 불렀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면서 민속문화 유산으로 깊숙이 자리 잡았다.

1천100살이 훌쩍 넘은 나이임에도 매년 350여㎏의 은행이 열린다고 하니 청춘목(靑春木)이랄까, 다산목(多産木)이라는 이름을 덧붙여도 좋겠다.

은행나무에는 금기 사항이 있어 이를 어기면 천벌을 받는다는 징벌담의 설화가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이곳 용문사는 의병 활동 근거지였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일본군이 용문사를 불태웠지만, 은행나무는 무사했다고 한다. 어떤 연유로 불에 타지 않고 살아남았는지 천운을 타고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옛날 은행나무를 베고자 톱을 대었을 때 나무에 피가 나오고 맑던 하늘이 흐려지면서 천둥 번개가 쳤기 때문에 중지했다는 이야기도 내려오고 있다. 믿거나 말거나 신령스러운 은행나무 노거수인 만큼 별의별 믿기 어려운 전설이 뭉쳐서 내려오고 또 덧붙여서 내려가고 있다.

우리 일행은 용문사를 빠져나왔다. 그 어디에도 우리들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우리 마음속에 그 흔적이 남아있을 뿐이다.

 

용문사 호국목 은행나무 노거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로 알려졌다. 1962년 12월 7일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됐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5번지에 위치했다. 키 42m, 가슴 높이의 둘레 15.2m, 앉은 자리의 폭 28m이고, 나이는 최하 기준으로 1천100살로 안내되고 있다. 탄소동위원소 연대 측정기를 이용하여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있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수필가 장은재의 명품 노거수와 숲 탐방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