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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하소연 들어주고 마음 달래주는 친구이자 스승, 신적 존재

낙동강 물돌이 모래벌판 언덕 마을이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이곳을 방문하여 생일을 맞이하는 등 세계 각국의 유명 인사는 물론 관광객들이 줄지어 찾아오고 있다. 바로 안동 하회마을이다. 마을엔 국가지정문화재만 국보 2점, 보물 2점, 국가민속문화재 9점 등 모두 13점에 이른다. 척박한 강변 모래벌판 언덕 마을에 무엇이 이런 귀중한 문화유산을 품었을까?곰곰이 마을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명쾌한 답을 찾을 수 없다. 하회마을은 예로부터 경주 허씨 터전에 광주 안씨 문전으로 풍산 류씨 배판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마을 주민들의 성씨 변천 과정을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 조상들이 말하는 풍수지리설에 길지인 배산임수형도 아니고 그 어떤 유형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그리고 보면 마을의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민의 생활 속에 깃들어 있는 정신문화에 있지 않을까? 안동은 우리 3대 문화권 중에 유교문화의 중심지이며 정신문화의 수도이기도 하다. 하회마을에는 그 옛날 마을을 개척할 당시부터 내려오는 마을 공동행사가 있다. 매년 서낭당, 국신당, 삼신당에 동신제를 지냈다. 그러다 하회탈을 쓰고 별신굿을 해 오고 있다. 그 내력은 하회탈 제작에 대한 전설로부터 시작되었다.“마을재앙에 마음 아파하며 매일 밤 삼신당 나무에 물을 떠 놓고 재앙을 막아 달라고 정성껏 비는 허 도령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어느 날 신령이 꿈에 나타나서 ‘탈을 깎아, 그 탈을 쓰고 신을 위해 굿을 하면 되느니라. 그런데 탈을 깎는 동안 누구라도 엿 보면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허 도령을 사랑한 마을 김씨 처녀가 그사이 그리움을 참지 못하고 금줄을 넘고 말았다. 하늘에서 천둥 번개가 치더니 허 도령이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김씨 처녀도 따라 죽었다. 처녀를 기리는 뜻으로 별신굿을 시작했다. 이유야 어쨌든 간에 이는 마을 주민들이 하나로 뭉치는 계기가 되었고 고난을 극복하고 흥겨움을 안겨주었다.”마을 주민은 서낭당을 상당, 국신당을 중당, 삼신당을 하당이라 불렀다. 삼신당은 마을 한 가운데 자리 잡고 당집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 않으며 삼신할매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 대상은 느티나무이다. 약 600년 전 풍산 류씨 입향조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이 나무는 잉태의 소원을 비는 곳으로 유명한데, 연리지를 관찰할 수 있다. 삼신당은 별신굿을 시작하는 장소이기도 하다.하회별신굿탈놀이는 안동 하회마을에서 12세기 중엽부터 상민(常民)들에 의해서 연희(演戱)가 되어온 탈놀이이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5년 또는 10년에 한 번 정월 보름날 또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해 왔다. 탈놀이는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기 위하여 마을굿의 일환으로 연희가 되었다. 탈을 쓴 광대가 양반을 해학적으로 풍자하여 온갖 쓴소리를 내뱉는다. 이는 서민의 유일한 언로였으며 흥겨움까지 주었다. 놀이마당, 무동마당 등 여덟 마당으로 구성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 수호신에게 매년 올리는 동신제나 별신굿을 한 때 미신으로 폄하여 금지하기도 했다. 종교적 측면으로 그리 볼 수 있으나 고유 전통 민속신앙은 우리의 삶에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부계 중심의 남아선호사상의 사회 환경에서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는 보고도 못 본채, 듣고도 못 들은 채, 하고 싶은 말도 못 한 채 참고 9년의 시집살이를 했다는 말이 있다. 이렇게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은 억압된 사회에서 소원을 빌고 하소연할 탈출구로 삼신당 느티나무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삼신당 느티나무는 이를 들어주고 해결해 주는 친구이며 스승이요 신적 존재였을 것이다. 그때 사회 환경이 옳다면 민속신앙 역시 옳은 것일 것이고, 그때 사회 환경이 바르지 않다면, 민속신앙을 미신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오늘날 자유로운 시대는 농촌과 도시, 산중 마을에도 절이 있고 예배당이 있어 신앙심을 키울 수 있고 스님, 목사, 신부 등 성직자가 있어 고해하고 마음을 추스르며 안정을 찾을 수 있다. 그러하므로 오늘날 동신제는 점점 그 기능이 빛이 바래고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마을의 결속과 단합의 동기를 부여하는 것으로 동신제와 별신굿탈놀이 만한 것이 또 있을까. 제사를 올리는 시기는 대부분 정월 대보름날이다. 이는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정월은 가장 신성하며 이날 뜨는 달이 가장 깨끗하고 신비스러워 소망한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새로 시작하는 명분으로 이것보다 더 좋은 날은 없을 것 같다. 물질적인 외형의 그 무엇보다 정신적인 마음의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합심하여 기원한 내용을 이루기 위하여 단합하고 실천하는 동기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믿음은 우리가 경험한 일이기도 하다. 하회마을이 평화롭고 풍요로운 마을로 발전하고 임진왜란 때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유성룡과 같은 걸출한 인재가 많이 배출된 것도 유형의 자연환경보다 무형의 정신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지 싶다. 하회마을의 고택도 지형도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특별한 무엇을 찾아보지는 못했다. 오히려 낙동강변 모래벌판 위에 세워진 것은 자연조건으로 따져보면 불리한 조건이지, 유리한 조건은 아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주민들이 행복하게 살아온 것은 삼신당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뭉치고 단합한 결과가 아닐지 싶다. 삼신당 느티나무에 소원을 빌고 인내하면서 살아온 우리 할머니 어머니의 위대함은 민속신앙으로부터 인내심과 응집력을 키운 덕분이 아닐는지 모르겠다.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물과 영양소를 빨아들이고 하늘에서 빛에너지와 탄소를 받아들여 누구의 도움 없이 자연의 무한한 에너지로 스스로 독립적으로 살아간다. 뭍 생명체를 품고 그들의 먹이를 제공하고 삶을 이어가도록 기꺼이 희생을 감내한다. 나무야말로 남의 생명체를 먹고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유일한 생명체이기도 하다. 그리고 보면 나무를 신의 반열에 올려놓아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늘 우리 가까이에서 도움을 주는 나무야말로 신령이 깃들여 있다고 한들 누가 무어라 할까.안동 하회탈 별신굿놀이는…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 709-3번지 삼신당은 별신굿판의 시작이고 동신제의 마지막 장소다. 그곳에 640살 느티나무 노거수가 살아가고 있다. 키 17m, 몸의 둘레 15m, 앉은 자리는 22m다. 마을굿을 통해 별신굿이 추구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주술적인 행위로써 탈을 만들고 탈춤을 추게 된 것이다. 서낭당에서 신내림을 받는 강신(降神)이나 신을 마을로 맞이하는 무동(舞童), 상상의 동물인 주지 한 쌍을 등장시킨 탈춤판은 마을을 정화하는 것이다. 암수의 싸움에서 암컷이 이기고 성행위를 하는 것은 생산을 북돋워 풍농을 기원하는 주술적인 행위다. 강신(降神), 오신(娛神), 송신(送神) 과정으로 구성돼 있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6-12

신임·이임 감사들 행차 굽어보며 태평성대 빌었던 노송

문경새재 옛길은 역사의 길이다.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오가며 과거시험 보러 가는 등용문의 길이며 낙향의 길이다. 외침으로부터 조선의 수도 한양을 지키는 고갯길이다. 이런저런 우리 조상의 삶이 스며있는 애환의 아리랑 고갯길이며 인생길이다.이제 옛 기억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건강을 위한 치유와 명상의 숲길로 재탄생하여 힐링하는 사람들로 물결치고 있다. 신록의 계절 오월의 어느 주말 문경새재 녹색 숲길을 찾았다. 넓은 주차장부터 만차이다. 영남인뿐만 아니라 전국, 세계인들이 찾아오고 있다. 무엇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산속 숲길에는 유명한 가수의 공연도 명사의 강연도 인위적인 그 어떤 행사도 놀이기구도 없다. 그저 나무들이 운집한 울창한 녹색의 숲에는 맑은 계곡물 흐르는 소리, 새들의 지저귐, 바람 소리 등 자연의 소리뿐이다. 그러나 녹색의 숲길에 들어서면 볼 수도 없는 신선한 공기가 쭈그러진 우리의 가슴을 부풀게 하고 축 늘어진 어깨가 으쓱해지고 동공을 키우며 마음을 매료시킨다.넓은 푸른 잔디광장 끝에는 주흘산과 조령산 자락을 끌어당겨 성벽으로 묶어 놓고 중앙에 주흘관이라는 육중한 성문을 만들어 놓았다. 문짝 없는 성문은 밀려드는 사람들을 마다하지 않고 품었다. 먼저 조선 관리의 공덕비가 한 줄로 서서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새재의 숲길은 오월의 따가운 햇살을 나뭇잎들이 가리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 위에는 녹색의 향을 뿌렸다. 길 따라 깊은 숲속에서 계곡물이 흘러내리고, 길옆 도랑에는 계곡물을 끌어들여 또 다른 작은 물길을 터놓았다. 물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낮은 곳으로 흐르니 극히 자연스러운 데 반하여 나는 숲길을 거슬러 오르니 숨이 차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본성이나 인간은 높은 곳으로 오르고 싶은 욕망 때문에 늘 힘들어한다. 무거운 욕심의 짐 내려놓으려고 하나, 그것 또한 마음뿐이다. 물길은 내림의 길이고 인생길은 오름의 길인가 보다. 맑은 물소리는 자연의 소리와 하모니를 이루어 녹색 숲의 깊은 늪에 빠져들게 했다.주흘관(主屹關)과 조곡관(鳥谷關) 중간 지점 용추연(龍湫淵)이 있었다. 용추연은 계곡 바위 위에서 떨어지는 폭포 아래에 깊은 소가 있는 곳으로 오랜 세월 동안 자연이 빚어 만든 절경으로 많은 시인 묵객이 노래하던 곳이다.아름다운 용추연 있는 곳에 교귀정(交龜亭)이 있었다. 교귀정은 조선시대 경상도 신구감사 교인식을 거행한 교인처(交印處)를 말한다. 교귀정에는 소나무 노거수가 늘 함께하고 있었다.짐작하건대 언뜻 보아도 나이가 삼사백 살은 되어 보인다. 거북등 같은 육각형 수피가 뚜렷이 몸을 감싸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렇고, 몸 둘레의 굵기는 2.6m이고 키는 8m나 되었다. 외모로 보아도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 온 범상치 않은 경륜을 말해 주고 있었다. 교귀정 주변에는 이 외에도 여러 그루의 소나무 노거수가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뭐니 해도 문경새재 숲길의 절정은 용추연과 돌에 새겨진 그 노래 시비, 교귀정과 그 지킴이 소나무 노거수가 있는 이곳이 아닌가 싶다.교귀정 노거수는 청렴, 절개, 사랑, 효도의 표징으로 관리의 서약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소나무는 우리 민족의 삶과 문화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민족의 나무라 할 수 있다. 부임하는 관리에게는 응원의 격려를, 떠나는 관리에게는 감사의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이제는 할 일이 없어졌는지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노송은 여유를 즐기며 교귀정을 지키고 있다. 새알 같은 둥근 바위에 “이 교귀정 소나무는 … 마치 여인이 춤을 추는 듯 새재를 찾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다. 보면 볼수록 특이한 형태와 수형으로 그 신비감을 더해 준다”라고 소나무 노거수를 찬양한 글이 새겨져 있었다. 교귀정 노거수가 이렇게 오랫동안 산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불됴심’이라 새겨진 길가 비석 때문이 아닐까. 새재 길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불조심이라는 경구의 표석을 보고 마음에 새기고 조심한 덕분이 아닐까. 그러나 교귀정 소나무는 하필 물도랑을 낼 때 뿌리 밑으로 내는 바람에 뿌리가 많이 상한 탓에 가지가 고사한 흔적이 여기저기 보여 안타까움을 자아내었다. 지난봄, 여름, 가을, 겨울에도 이 길 위를 걷고 또 오늘도 걸었다. 사계절 걸으면서 듣는 숲속의 바람 소리는 제각각 다르게 느껴졌다. 숲의 위치에 따라, 나무의 종류에 따라, 지형에 따라, 고도에 따라, 음지, 양지에 따라, 날씨에 따라 달랐다. 또한 마음의 평온 여부에 따라 달랐다. 숲은 소리의 고향이 아닌가 싶다. 문경새재 숲길이라는 장소는 변함없는데, 계절에 따라 또 다른 모습과 느낌으로 다가온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이 찾아와 신발을 벗어놓고 맨발로 걷는 사람도 많다. 발을 씻을 수 있는 세족장에서 바가지로 물을 퍼 흙 묻은 발을 씻고 있는 그들의 얼굴은 환하게 밝았다. 나 또한 그들과 같이 신발을 벗어 배낭에 넣고 맨발로 녹색의 숲길을 걸었다. 대지의 흙에 맨발바닥 살을 갖다 대니 묘한 촉감이 감정선을 자극했다.산이며, 하늘이며, 숲의 자연은 마치 사람의 얼굴과 같아서 자세히 보아야만 알 수 있으며 슬쩍 눈길만 주어서는 모른다. 하늘과 땅 사이에 물건마다 모두 주인이 있으니, 내 소유가 아니면 한 점도 취할 수 없지만, 오직 숲길에 부는 맑고 시원한 바람과 나뭇잎 사이의 따뜻한 햇살은 얼마든 취해도 막는 이 없고 아무리 사용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야말로 조물주의 끝없이 감추어 놓은 화수분이 아닐까. 옛날 우리 조상들은 산의 아름다움은 흙으로 살을 붙이고 돌로써 골격을 삼고, 초목으로 모발을 삼는다고 했다. 초목이 무성해야 살과 골격을 온전히 보전할 것이다. 문경새재 숲길은 이 모두가 잘 갖추어져 있어 우리 조상의 자연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문경새재 사계절의 숲길을 걸으면서 내 인생 한해의 삶을 반추해 본다.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면서 살아왔지만, 매번 큰 결실의 열매를 얻지는 못한 것 같다. 나의 노력이 부족 하였든지 아니면 봄에 희망의 씨앗을 제대로 뿌리고 여름에 가꾸는 데 나무와는 달리 열심히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봄의 희망이 지키지도 못할 과한 욕심이 아닐는지. 매년 후회를 하면서 늘 빈 가슴을 안고 살아왔다. 그러나 나에게 물질적으로 얻은 것은 그다지 없다 하더라도 계절을 맞이하면서 보내는 숲길에서 콩나물 같은 철학의 이삭 하나쯤은 주었다.매번 숲에 오면 숲과 한 몸이 된다. 숲에서 심호흡하고 숲의 향기를 맡고, 나무와 숲을 감상해 본다. 숲속 나무 아래에 서서 나무를 쳐다보며 허파 속 묵은 공기를 내뿜고 신선한 숲의 공기를 마셔본다. 공기의 신선한 맛을 음미하면서 온몸의 핏줄을 따라 퍼지는 것을 느껴본다. 욕심의 찌꺼기를 씻어내니 빈손으로 들어가 나올 때도 비록 빈손이지만, 텅 빈 가슴에는 기쁨의 충만감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경상감사 도임행차(到任行次)는교귀정은 도임하는 신임 감사와 업무를 마치고 이임하는 감사가 관인(官印)을 인계인수하던 곳이다. 문경새재 용추폭포 옆에 위치했다. 문경 현감 신승명(愼承命)이 1400년대 후반(1466-1488년)에 세웠다고 전해진다. 구한말에 불에 타 없어졌던 것을 1999년 중창하였다. 경상감사 도임행차는 조선시대의 ’미암일기초(尾84ED日記草)‘와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에서 보여지는데 총 300여 명으로 구성됐었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5-29

연륜 쌓인 ‘노목의 기개’서 공자의 가르침을 얻다

하늘에서 녹색의 빗물이 봄바람 붓끝에 휘몰아쳐 산천을 채색하고 있다. 겨울의 텅 빈 흑백의 산야에 풍성한 녹색의 물결이 어제와 오늘이 다르게 출렁이며 춤을 추고 있다. 녹색의 빗물이 서석지를 녹색으로 물들이고 처마 기와 골 끝에 줄지어 마당으로 떨어지는 녹색 빗물은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 동그라미를 그리며 사라진다.비 내리는 오월, 정원의 경정 마루 끝에 앉아 있노라니 몸과 마음이 녹색으로 물들어 간다. 성리학에 심취한 정원의 주인 정영방(鄭榮邦)은 경북 영양 자양산의 남쪽 자락에 터를 잡고 거처할 집을 짓고는 자연에 철학을 담은 정자와 연못이 있는 아담한 정원을 조성했다.연못은 사각형의 돌출된 부분을 두어 선비들이 좋아하는 송죽매국(松竹梅菊)을 심어 그 본성을 노래하며 삶의 본보기를 삼았다. 동북쪽 귀퉁이에 연못으로 물을 끌어들이는 도랑을 내고, 그 대각점이 되는 서남쪽 귀퉁이에 물이 흘러 나가는 도랑을 두었다. 바깥 물이 들어오면 자연히 넘쳐 나가는 자연의 섭리를 따랐다. 연못 안에 솟은 서석군(瑞石群)에서 유래하여 서석지(瑞石池)라 이름을 지었다. 크고 작은 20여 개 돌들이 각양각색의 형태로 솟아 있는 것을 보고 돌 하나하나에 선유석(仙遊石)이니 통진교(通眞橋)니 하면서 이름을 붙여 의미를 부여했다.이는 정원 주인의 학문과 인생관은 물론 은둔생활의 이상적 경지와 자연의 오묘함과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심취하는 심성을 나타낸 것이리라. 정자의 네모난 기둥에 원기둥 하나는 양을 표시하고 둥근 기둥에는 네모난 고리를, 네모난 기둥에는 둥근 고리로 음양의 사상을 재현했다.정자의 건축과 연못의 조성에도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 철학을 표현했다. 우주와 인간의 본질을 이(理)와 기(氣)의 상호작용이라면서 이(理)는 불변하는 원리나 이치를, 기(氣)는 물질적 에너지를 의미했다. 인간의 본성과 정서, 도덕적 행위를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두며, 인간이 선한 이(理)를 실현하도록 강조했다.성리학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통치 이념으로 채택되었고, 사회적 질서와 윤리적 가치를 강화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인간의 심성을 탐구하고,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본성을 강조했으나 관념적인 면이 강하여 개인의 자유나 개성, 실사구시적인 면에서는 등한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과거의 의미와는 달리 오늘날 이곳을 찾는 방문객은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고건축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경정(敬亭)이라는 정자와 그 부속건물을, 연못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서석지를, 나처럼 노거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은행나무를 보러 오지 않을까 싶다. 삼종을 한 세트로 묶어서 연당마을 서석지(瑞石池)로 통한다. 연못(蓮池)은 땅을 파거나 흐르는 물을 막아서 물을 가두어 놓은 곳을 의미한다. 못(池)은 대개 자연스럽게 형성된 느낌이 나지만, 연못이라 하면 사람이 미관을 위해 정원 등 인공적으로 만든 느낌이 난다. 연못은 스스로 작은 생태계를 구성하므로 자연스레 오랫동안 보존될수록 희귀생물의 보고로 변한다. 생태적인 정원의 연못에 인문학의 옷을 입혀 이상적인 삶을 엿볼 수 있다. 녹색에 물들면서 그 옛날 조선의 성리학에서 오늘날 생태학의 정원으로 바라보았다. 연못은 주택에 필요한 부속품이다. 삶에 있어서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연못은 건강을 답보하는 예방 의학적 측면에서도 또한 삶의 정서를 살찌우는 심리적 측면에서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연못은 정원과 함께 더운 여름에는 높은 기온을 낮추고 추운 겨울에는 낮은 기온을 높인다. 또한 습도를 조절하는 등 미세 기후를 조절하여 우리 건강에 도움을 준다. 미생물, 곤충, 새 등 다양한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데 물을 제공하는 등 많은 생명체를 불러들여 자연 생태계의 다양성을 놓인다.정원의 미적 아름다움은 정원의 주인이나 찾아오는 방문객들에게 정서를 순화시켜 심미적인 감흥에 젖어 들게 한다. 인공으로 만든 연못이 자연과 조화하여 아름다움을 더할 뿐만 아니라 작은 생태계의 핵심 구역으로 그 기능을 발휘하기도 한다.특히 은행나무는 석문 정영방 선생이 본래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부인이 가마 안에 은행나무를 가지고 와서 심었다고 하니 참으로 선생의 아내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신의 한 수라는 생각이 든다. 은행나무는 처음에는 정원의 일개 구성원인 평범한 가족이었으나 세월의 연륜이 쌓이면서 성장하여 이제는 정원의 주인격이 되었다. 언젠가 모르게 담장을 뛰어넘고 연못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자신의 존재감을 키워갔다. 이제는 어릴 적에 쳐다보았던 정자도 송죽매국도 모두 은행나무를 쳐다보는 격이 되었다.나이가 많아 주민들로부터 어른 대접으로 지팡이도 선물 받았다. 그 누구도 함부로 볼 수 없는 석문에 있는 거대한 촛대, 선바위를 볼 수 있고, 석벽을 끼고 흐르는 남이포 푸른 물도 볼 수 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정원뿐만 아니라 마을의 품격도 높여 주고 유명세는 날이 갈수록 하늘을 솟구치고 있다. 이제는 서석지 하면 은행나무 노거수를 빼놓을 수 없게 되었다.까치는 은행나무에 둥지를 틀고 아침마다 반가운 소식을 전한다. 까치 가족이 오순도순 살아가는 모습에서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교훈을 얻는다. 까마귀 새끼가 자라서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효라는 뜻으로, 자식이 자라서 어버이의 은혜에 보답하는 효성을 이르는 말이다. 또 은행나무는 행단(杏壇)을 생각하게 하고 행단은 공자를 떠올리게 한다. 공자는 15세에 지학(志學), 학문에 뜻을 두었고, 30세 이립(而立), 학문에 기초를 세웠다. 40세 불혹(不惑), 사물의 이치에 대해서 의문 나는 점이 없었고, 50세 지명(知命), 천명을 알았다. 60세 이순(耳順), 남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고, 70세 종심(從心), 뜻대로 행하여도 도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한다. 은행나무 아래에서 공자의 일생을 생각하면서 또 하나의 교훈을 얻는다.서석지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정원의 아름다움과 정자와 연못의 오묘함만 설명할 것이 아니라 정원의 연못과 은행나무의 생태와 문화를 설명하고 인문학의 옷을 입혀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내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당신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왜? “이렇게 아름다운 좋은 곳에 와서 그 옛날의 발자취를 더듬고 오늘날 문학의 옷을 입혀 스스로 침묵 속에 감동과 환희의 시간을 가지니 더 무엇을 바랄 것인가.”라고 말했다.그렇다. 비를 맞으면서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나 자신을 잊고 있다. 고금을 드나들며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 있다고 할까.영양 연당마을 서석지(瑞石池)는…서석지는 성리학자이며 문인인 정영방(鄭榮邦)이 1613년에 조선 광해군 시대 축조하였다고 전한다. 은행나무 나이는 440살, 키는 15m, 가슴높이의 둘레는 6m가 넘는다. 수관 폭이 24m이고 앉은 자리 넓이는 130여 평이나 된다. 담양의 소쇄원(瀟灑園), 보길도 세연정(洗然亭)과 함께 서서지 정원을 우리나라 3대 민간 정원으로 꼽았다.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 394-1 위치해 있으며, 중요민속자료 제108호이기도 하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5-22

천년 세월 지나며 신격화… 두려움과 경외심의 존재

오월은 신록의 계절이다. 텅 빈 숲의 나무도 푸름으로 풍성해지고, 짝을 찾느라 분주하게 지저귀던 새들도 푸른 숲에 보금자리를 틀고 알을 품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나무를 쫓아다니다 보니 나무의 성장 과정이 우리 인간의 삶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무는 살아있을 때는 부드럽고 연약하며, 죽었을 때는 딱딱하다.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부드럽고 연약함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는 생명체가 겪는 변화와 성장의 자연스러움을 상징한다. 비바람에 꽃이 떨어지는 모습은 생명의 연약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보여 준다. 꽃이 지고 난 꽃자리에 열매를 맺음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계승한다. 자연의 순환과 강인함을 또한 생명의 연속성을 드러낸다. 나무가 겪는 성장의 과정, 즉 자연의 법칙에서 인간에게도 적용되는 보편적인 원리에 대한 깊은 성찰로 교훈을 얻는다. 영덕군 지품면 신안리 512-1번지에 천년의 세월을 품고 살아가는 명품 느티나무 노거수 여행을 떠났다. 말이 천년이지 100년을 10번 곱한 숫자다. 조선 500년을 뛰어넘은 고려시대에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으니, 역사의 산증인이다. 당산나무로 신격화하여 제사를 지낼 뿐 아니라 금기 사항을 정하고 이를 무시하고 훼손하게 되면 동티가 난다고 하여 모두 두려움과 경외감을 가졌다.숲에 깃든 정령 중에 나무의 정령이 으뜸이 아닐까 싶다. 키 14m, 몸 둘레는 9m의 천년의 세월을 품은 느티나무는 가부좌 틀고 앉은 온화한 부처님으로 다가왔다. 그를 톺아보니 “나를 자세히 보아주니 고맙구나. 많은 사람이 나에게 공손히 두 손 모아 절을 하면서 소원을 빌기도 한단다”라고 말했다. 나는 물었다. “무엇을 소원하고 빌지요?” 그러자 느티나무 노거수는 말했다.“나를 장수목(長壽木)이라면서 오래오래 살게 해 달라고 빈단다. 사실 숨 쉬는 생명체로서 마을에서 가장 나이도 많고 오래 살아왔단다. 마을을 개척할 때부터 아니 마을이 들어서기 전부터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단다. 마을을 떠나지 않고 늘 주민과 함께 살고 있으니 마을 역사의 산증인이라 해도 누가 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하니 영생불멸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대리 만족할 수 있는 대상물로 나무랄 데 없지 않니?”라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었다.“나를 다산목(多産木)이라면서 특히 아들을 낳아달라고 빈단다. 수많은 꽃을 피우고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보고 하는 모양인 것 같구나. 척박한 땅에도 경사진 계곡에도 그 어느 곳에도 마다하지 않고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린단다. 한 번 뿌리를 내리면 주변 환경이나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적응하면서 자손을 번식한단다. 오늘날 삼천리 방방곡곡 마을에 나를 볼 수 있는 것만 해도 그렇지 않니?”라고 했다. 어릴 적 목격한 것이라 또 수긍했다.“나를 건강목(健康木)이라 하면서 건강을 소원한단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은 계곡에서 쏟아지는 바윗돌에도 견디어 낸 훈장이란다. 꽃과 열매가 작고 볼품이 없는 것은 에너지 분배에서 거대한 몸을 유지하는 데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란다. 사계절을 맞이하면서 변화는 나의 아름다움을 보았지 않았나. 튼튼하고 아름답고 풍성한 몸매는 어느 나무도 나를 따를 수 없지. 아름다움은 건강의 바로미터란다”라고 했다. 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나를 재생목(再生木)이라면서 놀라움을 금하지 못한단다.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가지가 부러지고 절단된 모습이 여기저기 흉터로 남아있는 것이 보이지? 이 또한 스스로 아물어 새로운 가지를 재생되어 푸른 하늘로 꿈을 키운단다. 노령의 상처 난 몸에 돋아난 어린 가지 푸른 잎이 예사롭지 않아 보이지? 늘 면역력을 키우고 항상성으로 다친 몸을 스스로 치료하는 재생능력이 있단다”라고 했다.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라 부럽기까지 했다. “나를 영속목(永續木)이라면서 부러워도 한단다. 계절 변화에 따라 봄이면 연노랑 잎이 여름이 되면서 녹색 잎으로 가을에는 고운 단풍잎으로 변했다가 겨울이 되면 미련 없이 훌훌 벗어버리고 새하얀 눈옷으로 갈아입지. 이렇게 계절 변화에 맞추어 일생을 살아간단다. 외모는 그렇지만, 나에게도 봄에는 희망의 꿈을 꾸고, 여름에는 꿈을 향한 노력을 하고, 가을에는 그 꿈을 이룬단다. 겨울에는 욕심을 내려놓고 봄을 기다린단다. 그러하니 천년의 세월을 품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라고 했다. 인간은 이루지도 못할 욕심에 짓눌러 아우성을 치고 괴로움에 잠 못 이루어 밤을 설친다. 한 번 가지면 놓지 않으려 하고 쌓아두려고만 하는 인간과는 달리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우주의 리듬을 재현하니 참으로 본받을 만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요즘은 여성목(女性木)이라면서 호들갑을 떨고 있단다. 계절에 따라 변하는 모습이 몸단장하고 아름다움을 꾸미는 여성을 연상하게 한단다. 수형 또한 여자의 오지랖과 많이 닮았다고들 한다. 곤충, 새 등 많은 생명체의 서식처가 되어 주고 휴식처, 피난처를 제공해 주고 있으니 포용과 희생정신이 여성과 많이 닮았다고 한단다”라고 했다. 그렇다. 수렵시대와 농경시대는 힘으로 상징되는 남성의 시대라면 21세기는 부드러움과 감성의 시대로 여성의 시대가 아닐지 싶기도 했다.느티나무는 우리 삶의 지향점이랄까 다양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 의미인지 2000년을 맞이할 때 무슨 나무로 새 천 년 밀레니엄나무로 할까, 나라에서 논의했다. 많은 산림 전문가와 생태학자들, 그리고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느티나무를 선호하여 산림청은 새천년 밀레니엄나무로 지정했다. 우리 삶에 본받아야 할 상징성을 많이 지닌 것을 알고는 탁월한 선택을 한 산림청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천년의 세월을 품은 느티나무는 말했다. “나를 경외하며 소원을 빌면서도 발등 위에 농기계를 올려놓고 당집을 짓고 시멘트로 나의 목을 조르고 있어 숨쉬기도 힘들다. 신격화는 아니해도 좋으니 제발 목줄을 풀어주고 무거운 시설물을 치워 주면 좋겠다”라고 했다. 그러나 나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고 주민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할 수 있어 참으로 난감할 따름이었다. 느티나무는 위대한 스승으로서 충분한 자격과 요건을 갖추었다. 나 또한 주민들과 함께 오늘도 소원을 빌며 부족함을 채우고 교훈을 얻고자 노력한다. 한국산림문학헌장비는…‘한국산림문학헌장’은 이서연 시인이 지어 2021년 11월 18일 충남 보령시 미산면 봉성리에 세웠다. ‘숲을 사랑하여 시문(詩文)으로/ 숲의 정신을 담는 산림문학은/ 나무와 돌과 흙에서/ 삶의 씨앗이 되고 뿌리가 되고 꽃이 되는 문학으로/ 숲의 미래를 여는 산림문화를 이루고 가꾼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미래가 되고 역사가 되도록/ 산림문학이 사람 사는 세상에 나무가 되어/ 숲에서 형성된 맑은 영혼이 삶의 가치를 높여 가리니/ 자연의 섭리가 문학의 향기로 퍼져/ 문학이 숲이 되고 숲이 문학이 되도록 한다’는 내용이다.(사)한국산림문학회는 2024년 5월 8일 산림문학헌장비공원 내 시비제막식과 정자현판식을 열고 15년생 배롱나무를 기념식수 했다. 산림문학회 이사장 김선길 시인의 ‘나는 한 그루 나무이려니’ 외 4기의 시비가 세워졌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5-15

물결치듯 사방으로 뻗어나간 가지 아래 짙은 그늘이

춘 사월, 화창한 봄날, 햇볕은 나무에 옷을 입히고 새들에게 사랑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느라 날은 짧기만 하다. 상춘객들은 어디 어느 곳이 더 좋다느니 화려하다느니 나름의 관광지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내 눈에 도긴개긴이란 생각이 든다.어디가 더 경치가 좋고 나쁨의 우열을 가릴 수 없다. 가는 어느 곳이나 보이는 어느 곳이나 아름다운 봄꽃으로 단장되어 움츠렸던 마음을 펴게 한다. 나목의 가지에 연노란 잎이 나자, 만개한 벚꽃이 나무와 이별을 고한다. 하늘을 종횡무진 날아다니다 꽃비로 변하여 도로에는 꽃길로 수놓는다. 자동차 창문을 살짝 열고 봄바람 기운을 맞이한다. 날아든 하얀 꽃잎이 운전석 옆자리에 살포시 내려앉아 나즐로(나 홀로 즐겁게) 노거수 탐방을 함께 하잔다.안동 와룡면 주하리 마을로 향하는 농촌 시골길은 참으로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주변 산야는 봄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오르막으로 오르는가 싶더니 또 내리막길이 나타나고 모퉁이를 돌고 나도 또 모퉁이가 나타나고, 곡선의 시골길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이 긴장과 설렘의 연속이다.주하리 천연기념물 뚝향나무 노거수를 만나러 가는 날, 생각지도 못한 호사를 누릴 줄이야 누가 알리라. 봄의 풍경에 빠져 보니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진성 이씨(眞城李氏) 주촌종택(周村宗澤) 뚝향나무 천연기념물 제314호’라는 표지석 옆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서 있는데 마침 주촌 종택에 거주하는 이세준 씨를 만나 뚝향나무에 대한 소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조선 세종 때인 1430년경 선산부사를 지낸 이정(李楨)이 평안도 정주 판관으로 있을 때 가져와 심은 것이란다. 이정이 약산산성(藥山山城) 쌓기를 마치고 귀향하면서 세 그루의 향나무를 가지고 왔는데 도산면 온혜와 외손인 선산의 박 씨에게 각각 한 그루씩 주고, 남은 한 그루를 이곳에 심었는데 유일하게 살아남았다고 했다.안내판에 “높이는 3.3m, 가슴높이의 둘레는 2.3m, 밑동 둘레는 2.4m, 가지 밑의 높이는 1.3m이고, 가지의 길이는 동쪽으로 5.8m, 서쪽으로 6.3m, 남쪽으로 5,5m, 북쪽으로 5.7m이다. 향나무와 비슷하지만 곧게 자라지 않고 전체가 옆으로 퍼지면서 자란다. 이 지방에서 많이 자라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었다.약산산성 쌓기를 마친 기념으로 향나무를 가지고 와서 심은 것으로 소위 기념식수목이며 명목인 셈이다. 우리 조상들은 아들딸을 낳았을 때 기념으로 소나무와 오동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리고 장성한 후에는 딸의 경우 혼수 기념으로 오동나무는 장롱의 재목으로, 소나무는 장례식에 사용할 관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조상의 지혜가 돋보이는 기념식수목이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기념일을 찾아 기념식수를 하면 어떨까.주하리 뚝향나무를 노송으로 불렀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한다. 노송운첩(老松韻帖)과 김성설, 이만인(1834~1897)이 지은 경류정노송기(慶流亭老松記) 도판을 보면 “우리 종가 경류정(慶流亭) 앞에는 만년송(萬年松) 한 그루가 있다. 가지와 줄기가 극히 구불구불 서리서리 얽혀서 엄연히 화개(華盖)를 우뚝 펼쳐놓은 것처럼 되었다. 높이는 겨우 몇 길도 안 되지만, 그 아래에는 백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참으로 기품인 송(松)이다. 그러나, 그 깊은 뿌리와 많은 가지, 무성한 잎으로 짙게 그늘진 모습은, 송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일찍이 덕을 힘쓰고 업적이 넓은 군자의 솜씨를 거치지 않았다면 이처럼 오래도록 무성하게 우거지지는 못했을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경류정노송기처럼 뚝향나무는 지금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땅에서 뿌리를 내린 줄기는 비틀려 꼬였고 지상 1.3m 높이에서 여러 개의 가지를 내어 사방으로 뻗었는데, 밑으로 늘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28개 지지대를 받치고 있다.그런 연유인지 몰라도 위로 자란 줄기는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린 모양으로 줄기가 뭉쳐있었다. 거대한 하나의 뭉치로 뱀이 꽈리를 틀고 숨을 죽이고 있는 모습을 방불하게 했다. 한편으로는 파도치는 물결처럼 살아 움직이는 느낌으로와 닿았다. 많은 가지가 하나로 통일되고 단결된 모습의 견고함을 느끼게 했다.밑으로 내려오지 못함에 대한 반항의 몸부림인지 자유 의지의 꺾임에 대한 분노의 표출인지 모를 일이다. 인위적인 행위의 제한에 신비로운 모습으로 다가와 보이지만, 뚝향나무 본래의 성질에 반하다 보니, 그야말로 괴이함이랄까 거대한 분재형의 예술품으로 우리 앞에 섰다. 여기에 더하여 문화재청에서는 삼각형으로 만들어 보겠다고 사람의 상투처럼 나무의 가지를 억지로 하늘로 뽑아 올리고 있다. 아래로는 지지대를 세워 못 내려가게 하고 위로는 높은 지지대를 세워 가지를 상투처럼 뽑아 올리고 있다. 뚝향나무는 한국 특산종으로 줄기가 똑바로 자라지 않고 가지는 비스듬히 자라다가 전체가 수평으로 퍼지는 점이 특징이다. 그런데 뚝향나무 본래의 성질에 반하는 이러한 행동이 오랜 세월은 괴이하면서도 아름다운 분재형의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놓았다. 보지 않으면 믿기 어려운 수형의 모습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나무 본래의 성질에 반하는 인위적인 수형의 모습에 감탄하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뚝향나무 주변에는 벚나무, 단풍나무, 장미, 박태기나무, 철쭉나무 등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이들 나무가 자라 뚝향나무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더 크기 전에 다른 곳으로 옮겨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벚꽃이 뚝향나무에 하얗게 내려앉아 광합성 작용에 방해가 되고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지금도 뚝향나무 아래 통풍이 잘되지 않아 이끼가 무성하다. 습기가 차 나무줄기에는 병충해와 균이 침입하여 나무를 상하게 하지 않을까 싶다.진성 이씨 이정이 심은 뚝향나무는 이제 이정의 분신으로 자리매김하여 후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약산산성을 성공적으로 쌓은 기념으로 고향에 심은 뚝향나무가 이정의 정신으로 변하여 600여 년을 이어오고 있다. 경류정 뚝향나무라 부르면 어떨까. 경류정은 퇴계 선생이 이름 지은 별당으로 선생의 큰집 종택이기도 하다.주변에 공원을 조성하여 주민이 뚝향나무 가지를 꺾어 삽목한 50년생 나무를 안동시에서 두 그루를 구입하여 2012년 3월 15일에 옮겨 후계목으로 심어 놓았다. 모두 어미나무처럼 형태를 잡아 키우고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후계목으로 어미나무 못지않게 우리 후손의 앞에 서서 그 신기한 모습을 뽐내고 있으리라 짐작해 본다.안동 진성 이씨 종택(安東 眞城李氏宗宅)은…14세기에 안동 지역에 정착한 송안군 이자수(松安君 李子脩)가 지었다고 전한다. 이자수는 진성 이씨의 시조 이석의 아들로 고려 시대의 문신이다.종택은 본채와 별당, 그리고 사당, 행랑채, 방앗간채로 이루어져 있다. 본채는 안채와 사랑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성리학적 생활 규범에 따라 남성과 여성의 생활공간이 구분되어 있다.본채 뒤편에 있는 사당은 내삼문이 있는 담장으로 둘러싸여서 독립적인 공간을 이루고 있다. 본채 왼쪽에 있는 별당은 이자수의 6대손인 이연이 성종 23년 1492년에 지었다고 한다. 별당의 이름인 경류정(慶流亭)은 조선 시대의 대학자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지었다. 지방민속자료 제72호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5-08

국권 찬탈 치욕의 현장, 나무는 모두를 지켜봤다

전국에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는 어긋났다. 왜 빗나간 일기예보가 이렇게 기쁠까. 문경회(文卿會·퇴직공직자 모임) 회원들은 서울 나들이로 월드컵경기장을 관람하고 남산공원에 있는 시립서울 남산유스 호텔에 숙박했다. 아침 식전에 남산공원 둘레길을 산책했다.서울 한가운데 자리 잡은 남산 공원 둘레길은 울창한 숲속에 잘 다듬어져 있었다. 녹색 상큼한 향기 마음껏 만끽하지도 못하고 국립중앙박물관 관람 관계로 중도에 멈추고 되돌아와야 했다.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언제 또 기회가 있을지 모르는 일이고 보면 아쉬움이 컸다. 오늘 모든 모임 일정을 마치고 딸아이 집에서 자고 내일 오후에 대구로 갈 기차표를 예매해 둔 상태였다. 때를 기다리기보다 기회를 만들면 된다. 다음날 서울 남산공원 둘레길을 산책하기로 마음을 먹었다.서울을 방문하는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꼭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 연인들이 사랑을 맹세하는 도심 속 로맨틱한 섬 서울 남산타워가 정상에 우뚝 서 있는 남산공원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남산케이블카, 남산타워만 생각하고 산책로인 둘레길을 놓치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남산공원 둘레길은 북측 순환로와 남측 숲길을 연결한 7.5㎞로 1시간 반이면 걸을 수 있는 도심 속 산책길이었다. 지하철 4호선 명동역을 이용하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다. 남산공원 둘레길은 사계절 아름다움을 연출하지만, 특히 봄에는 벚꽃, 개나리, 철쭉이 흐드러지고 피어 꽃길로 수놓았다.흩날리는 꽃비를 맞으며 걷다 보니 일상에 지쳐있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도 경쾌하고 가벼웠다. 푸른 나무들이 울창한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간간이 서울 도심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좋았다. 약 3.3㎞ 이어지는 북측 순환산책로는 차와 자전거의 통행이 전면 금지되고 오직 보행자만 걸을 수 있는 순수한 산책로였다. 복잡한 서울 도심에 이런 조용한 숲길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였다.숲길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남산 둘레길을 완주하고 정상에 올라 있었다. 아름다운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서울은 세계 어느 나라 수도 못지않게 발전하고 아름다운데 왜 내 마음에는 남산 둘레길 초입에서 만난 침묵하는 관저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노거수가 긴 여운을 남길까. 옛 일본 통감 관저 오른쪽에는 느티나무가 왼쪽에는 은행나무가 형제처럼 살고 있었다. 임진왜란을 전후로 남산 기슭에 느티나무가 먼저 태어나 살고 있는데 누군가 은행나무를 이곳으로 옮겨 형제처럼 살아가게 했다.지금은 관저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기억의 터’와 ‘통감 관저 터’ 빗돌만 세워 놓았다. ‘기억의 터’는 강제로 꽃다운 나이에 낯선 곳으로 끌려가 갖은 치욕을 당한 위안부를 잊지 말자고 이곳에 빗돌을 세웠다고 했다.‘통감 관저 터’ 빗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일제 침략기 통감 관저가 있었던 곳으로 1910년 8월 22일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게와 총리대신 이완용이 강제 병합 조약을 조인한 ‘경술국치’의 현장이다.” 그리고 보면 지금으로부터 꼭 114년 전인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 공식적으로 넘어간 ‘국치’의 현장이었다. 통감 관저는 조약체결 이후 ‘총독 관저’로 바뀌었고, 1939년 9월 현 청와대 자리에 총독 관저가 신축돼 옮겨가기 전까지 29년간 그 기능을 유지했다고 한다. 당시의 통감인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의 작위를 기리는 동상이 거꾸로 세워져 있었다. 내게는 그 모습이 하야시 곤스케가 자신의 아니 일본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거꾸로 매달려 빌고 있는 모습으로 비추어졌다.그때 이곳 현장에 있었던 관저와 인물들은 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아직도 현장의 역사를 증언하는 관저를 감시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노거수가 살아가고 있다. 총독 관저를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일본 총독의 개노릇을 하는 것도 모자라 나라까지 팔아먹고 자신의 배를 불린 매국노들이 누군지 노거수는 다 알고 있을 터이다.밤의 도둑고양이처럼 시도 때도 없이 관저를 찾아 드는 매국노의 숨을 죽인 게다 소리도 노거수는 보고 듣고 기록해 두었으리라. 한편으로는 외침의 봉송 대 연기에 놀라 헐떡이며 말을 타고 오르내리는 순찰대의 말발굽 소리도 보고 듣고 우국충정의 관리도 노거수는 기록해 두었으리라. 언제 나무와 의사가 교환된다면 그 옛날 매국노는 누구고 충신은 누구인지 만천하에 밝혀지리라. 모두가 수치스러움에 입을 다물고 노거수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는지도 모른다.왼쪽의 감시인 은행나무는 나이가 400살, 키 21.3m, 가슴 높이 둘레 5.94m이다. 오른쪽 감시인 느티나무는 나이 450살, 키 23m, 가슴 높이 둘레 6.37m이다. 지금은 ‘기억의 터’와 ‘관저의 터’를 내려다보면서 남산 둘레길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있는 증인으로 거듭나고 있다. 아름다운 이곳을 어떻게 알고 여기에 침략국 원수의 관저를 지었는지 모를 일이다.그 위세라면 궁궐도 강탈할 수 있을 텐데, 겸손을 가장하고 아름다운 우리 강산의 정수를 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우리는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노거수를 역사의 산증인으로 ‘기억목(記憶木)’으로 이름을 붙여주고 천연기념물 반열에 올려 서울 남산공원 상징물로 자리매김해야 하지 않을지 싶다. 기억목은 귀띔해준다. “자강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며, 누굴 원망하고 미워하기보다 스스로 잘못은 없는지 그들에게 어떤 빌미를 주지 않았는지 반성부터 해 보라 한다.” 4월의 봄은 나목의 나뭇가지에 푸른 옷을 입히고 꽃을 피워 외침에 희생된 영혼들을 위로하고 있는 것 같다. 봄바람에 숲은 파도처럼 푸른 물결이 끊임없이 출렁인다.서울처럼 한 나라의 수도가 산으로 둘러싸인 곳은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물다. 높고 낮은 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푸른 한강이 그림처럼 흐르는 서울의 중심에 우뚝 자리한 남산은 우리나라의 보배이다. 남산 정상에는 사랑의 자물쇠가 빼곡히 달려 있었다. 열쇠를 통에 넣어버렸으니 잠긴 자물쇠는 영원히 열리지 않는 것처럼 사랑 또한 지속될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증언해 줄 느티나무, 은행나무 노거수를 이제는 기억목 노거수로 남산의 상징물로 천년만년 살아가기를 희망해 본다. 서울 남산공원 둘레길 산책하면서 우리의 아픈 역사 현장을 지키고 있는 노거수를 보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다짐해 본다. 목멱산(木覓山) 봉수대전국의 봉수가 집결되었던 곳으로 경봉수(京712F雄)라고도 불렸다. 봉수제도는 신호체계에 따라 연기나 불을 피워서 변방의 긴급한 사정을 중앙까지 전달하여 알리며, 해당 지역의 주민들에게도 알려 빨리 대처하도록 하는 일종의 통신수단이다.산봉우리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불을 피워서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제1 봉수대는 함경도-강원도-양주 아차산, 제2 봉수대는 경상도-충청도-광주 천립산, 제3 봉수대는 평안도 강지-황해도-한성 무악 동봉, 제4 봉수대는 평안도 의주 황해도 해안-한성 무악 서봉, 제5 봉수대는 전라도-충청도-양천 개화산에 이르는 봉수를 받았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5-01

땅에 엎드려 기어가듯 ‘겸손의 자세’로 뿌리 내려

날씨만 맑고 포근하다면 겨울 여행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겨울임에도 맑고 푸른 하늘에서 따뜻한 햇살이 시골 마을에 내리쬐고 있다. 이럴 때 나즐로(나 홀로 즐겁게) 노거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신명이 나서 눈앞에 펼쳐지는 공허한 자연마저 마음속엔 꽉 찬 느낌으로 다가온다.봄 여행은 때로는 춘곤증에 시달리고, 여름 여행은 모기, 쇠파리 등 갖은 벌레가 어디 가나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들어 성가시게 굴기도 하고 때로는 시골길 풀숲에 뱀이 나타날까 봐 두렵고 무섭기도 하다. 가을 여행은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을 볼 때면 괜스레 감상적이어서 마음이 울적하기도 하다. 그러나 날씨만 괜찮다면 겨울 여행은 이 모두를 잠재우고 그저 목적하는 바를 즐겁게 이룰 수 있어 좋다. 고즈넉한 시골 마을 길을 굽이굽이 돌면서 경북 청도 명대리 32번지에 살아가는 뚝향나무 노거수를 찾았다. 작은 동산을 배경으로 운계사가 있고 조금 더 큰 산자락 끝을 붙잡고 모암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운계사(雲溪詞)는 1670년에 건축된 정면 3칸의 단출한 목조 기와로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 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다. 선생을 배향하는 모암재(慕庵齋)로 가는 길가에 1994년 9월 29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00호로 지정된 뚝향나무 노거수가 살아가고 있다.땅에 엎드려 기어가는 뚝향나무는 모양에서도 범상치 않지만, 절효 선생과 깊은 관계가 있다. 절효(節孝)란 절(節)은 절조로 절개와 지조를 뜻하고 효(孝)는 효성으로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섬기는 마음이나 태도를 뜻한다. 절효 선생은 돌아가시고 없지만, 그 정신만은 오로지 뚝향나무에 옮겨져 오늘날까지 후손은 물론이고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노거수와는 달리 땅에 엎드려 겸손의 자세로 살아가고 있으니 쉽게 찾기도 어렵다. 어렵사리 찾았다고 해도 키는 작고 덩치만 옆으로 길게 퍼져 카메라 렌즈에 쉽게 담기도 어렵다. 주변에 단풍나무, 소나무, 사철나무가 함께 살아가고 있어 세월이 흐른 뒤에는 서로에게 적대적인 방해물로 애를 때울 것이 분명해 보여 일찍이 다른 곳으로 옮겨 주어야 할 것 같다.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뚝향나무 노거수를 렌즈에 담았다. 나이는 350살 정도이고 키는 5m, 밑둥치 둘레는 1m, 수관 폭 앉은 자리는 30m나 된다고 안내판에 기록되어 있었다. 앉은 자리의 넓이는 키의 6배 정도나 되고 보니 참으로 놀랍다. 뚝향나무는 줄기와 가지가 비스듬히 자라다가 개울과 땅을 덮은 모양새를 취하고 있었다. 나무 아래 옹달샘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확인할 수 없었다. 나뭇가지가 우거져서 밑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겨우 나무 아래 개울로 들어가 보니 7주로 보였다. 그러나 안내문에 따르면 모두 한 그루에서 나온 나무라 했다.사각형 철제 막대 위에 얹혀 있는 뚝향나무 가지가 자유 분방하게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역동적인 모양은 차곡차곡 쌓인 세월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개울을 완전히 덮고 있어 비가 많이 와서 홍수라도 난다면 참으로 난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걱정이 앞선다.향나무는 강한 향기를 가지고 있어 제사 때 향료로 사용되었으며 정원이나 공원의 울타리용으로 많이 심고 있다. 위로 자라는 향나무보다는 볼품이 다소 떨어지는 경향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조경용보다는 주로 비탈진 언덕이나 둑에 심는 것이 대부분이다.언덕에 심어진 뚝향나무는 비탈진 사면 따라서 자라기 때문에 빗물로 인한 토사의 유실을 방지하고, 흙을 움켜쥔 나무뿌리로 말미암아 땅을 단단하게 하는 효과가 있는 나무이다. 키가 작다 보니 한삼덩굴 등 여타 덩굴식물이 얕보고 나무를 타고 올라 휘감고 있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뚝향나무는 절효 선생 후손에 관한 에피소드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후손 김용석은 딸만 낳고 가문의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부인이 뚝향나무 아래 샘에 촛불을 켜고 지극 정성으로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뚝향나무에 빌었다. 그 정성 탓인지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6·25 한국 전쟁이 일어나 군에 입대했다. 부인은 어렵게 얻은 아들이 무사히 전쟁을 치르고 돌아오기만을 뚝향나무에 빌고 또 빌었다. 그 덕분인지 전쟁터에서 총알을 13발이나 맞았는데도 살아서 돌아왔다. 이 기적 같은 모든 일들이 뚝향나무 덕분이라고 믿었다. 뚝향나무가 조금이라도 상하게 되면 집안의 사람이 다친다든지 도둑을 맞는다든지 좋지 않은 일이 꼭 일어났다고 한다. 우연의 일이라 넘기기에는 너무 신기하여 집안의 대소사를 뚝향나무에 먼지 신고를 하는 등 경배하고 지금까지 보호하고 있다는 것이다.”뚝향나무 노거수와 절효 선생은 한 몸이란 생각이 든다, 뚝향나무를 보면서 우리 선조의 절개와 지조, 부모에 대한 효성을 본받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후손과 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아 뚝향나무 노거수를 잘 보호하여 수백 수천 년을 함께 번영해 나가기를 희망해 본다. 절효(節孝) 김극일 선생은…청도 명대리 뚝향나무는 조선 시대 효자인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운계사 사당 앞에 있다. 절효 선생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머니를 위해 몸의 종기를 입으로 빨고 아버지의 병세를 위해 설사를 입으로 맛보았다고 한다.부모가 돌아가신 후 시묘살이 6년을 했는데, 호랑이가 무덤 곁에서 새끼 젖 먹이는 것을 보고는 제사를 지내고 남은 음식을 가축 기르듯이 호랑이 새끼에게 먹여 주었다고 한다.아버지에게 천첩(賤妾) 두 사람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살아 계실 때와 같이 섬겼고, 두 분이 돌아가시자 모두 기년복(朞年服)을 입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임금에게도 알려져 정문(旌門)에 향리 유림과 제자들이 그 효행을 후세에 귀감으로 삼고자 사시호(私諡號·학력은 높은데 지위가 낮아 나라에서 시호를 내리지 않을 때 일가나 고향 사람, 제자들이 올리던 시호)를 절효(節孝)라 하여 절조와 효성의 본보기로 삼았다.청도군 이서면 서원리 자계서원(紫溪書院)에 위와 같은 내용의 정려비가 있다. 김극일(金克一) 선생을 배향하는 재사이다. 선생의 자는 용협(用協)이고 호는 모암(慕庵)이다. 의흥 현감 김서의 아들로 야은 길재(吉再) 선생의 문인이다.향리에서 후학들의 훈도에 힘쓰다 75세에 돌아가셨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4-24

자유·조화·인내·자신감… 흉내 낼 수 없는 연륜의 감정

노거수를 찾아다니면서 매번 느끼는 감정은 다르지만, 노거수의 기이함과 신비한 모습의 이미지에서 나름의 여러 가지 의미와 교훈을 깨닫고 배운다. 노거수는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어떤 영적인 깨달음의 감정과 즐거움의 감흥을 준다.키보다 앉은 자리의 지름이 무려 3배나 훌쩍 뛰어넘는 둥근 동산 모양이랄까, 아름다운 반달 모양의 늘 푸른 노거수가 있다. 경북 청송 장전리 산 18번지에 살아가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313호 향나무이다. 나이 400살임에도 불구하고 키는 7.5m밖에 되지 않으나 앉은 자리는 지름 25m나 된다.가슴 높이 둘레가 5m이고 그 지점에서 네 가지가 사방으로 자신감 넘치게 뻗어 자라고 있다. 네 가지의 나무 둘레도 2m에서 1.5m로 다 합치면 원 줄기보다 더 굵다. 줄기에서 뻗은 가지가 땅을 딛고 발돋움하여 하늘로 비상하는 자세로 보이기도 하고, 문어발처럼 땅에 기어다니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400년은 결코 만만한 세월이 아니다. 향나무 수형을 자세히 살펴보면 외관상으로는 세 그루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 그루일 가능성이 크다. 나무 크기로나 줄기의 굵기 등으로 보아 같은 시대에 심은 것은 아닌 것 같다. 고령의 몸은 썩은 부위를 깨끗이 도려내고 방수, 방부 처리하여 원형을 영구히 보존하려는 미라처럼 보였다.나라에서도 노거수의 위대한 삶에 격려의 뜻으로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의미로 지팡이 14개를 선물했다. 특이하게도 향나무는 마치 거대한 덩굴식물을 연상하게 했다. 여기저기 이리저리 엉키고 감긴 가지의 기이한 모습에서 오랜 세월이 숨어들어 꿈틀거리며 살아 숨 쉬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러한 노거수는 그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수형이다. 신묘하여 신령스러운 기운을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늙은 몸에서 풍기는 여유로움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신통할 따름이다.그러나 오늘날 우리 인간사회에서는 나무와는 달리 현대 문명은 늙음이라는 단어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늙음은 쓸모없음의 동의어이며 우리는 늙었다는 말을 거의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어르신이나 연장자와 같은 완곡한 말로 이를 회피하기도 한다. 지난날 노인은 위대한 존엄성의 상징이지만, 오늘날은 부담스러운 존재로 여기기도 하는 것 같다.왜 노인은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는가? 노인이 되면 행위보다 있음이 강조되는데, 우리의 문명은 행위에 몰두해 순수한 있음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기 때문일까. 늙음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인 걸 모르는지, 노인의 부정적인 의미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향나무 노거수의 나뭇가지가 뒤엉켜 있는 모습에서 자유, 조화, 인내, 끈기, 자신감을 느끼게 한다. 오랜 세월이 아니면 도저히 흉내를 낼 수 없는 연륜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사계절 내내 푸른 잎이 촘촘히 감싸고 있어 그의 품속으로 들어가 보지 않고는 그의 연륜을 느낄 수 없다. 거대한 몸은 푸른 이끼 옷으로 입혀져 젊음과 공존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사계절 내내 푸른 옷을 입고 늘 푸름을 자랑하지만, 특히 겨울에는 때때로 흰 눈꽃을 피워 순수함을 느끼게도 한다. 노거수의 모습에서 본받아야 할 가치가 있듯이 노인에게서도 배워야 할 교훈이 있을 것이다.향나무 노거수를 통해서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것이 자신을 위한 길임을 깨닫게 하였다. 향나무 노거수는 400년 전 영양 남씨(英陽南氏) 입향조인 운강공(雲岡公) 남계조(南繼曹)의 은덕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묘 주변에 심은 기념식수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묘도비가 세워져 노거수와 단짝이 되었다. 40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운강공 후손들이 매년 이곳에 모여 밤을 다 함께 지새우다시피 하면서 문중의 우애와 화목을 실천하고 있다. 늙은 향나무가 매개체가 돼 그들의 문중을 끈끈한 정으로 묶었다.사람이라면 자신의 가문과 후손의 번영을 위하는 마음은 그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의외로 흔하지 않다. 나 자신만 해도 그렇다. 문중 일에 바쁘다는 핑계로 늘 등한시 하다시피 했다. 지금부터라도 문중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얼마 있으면 강선계(講先契) 100주년 기념행사가 대구시 수성구 고산 노인복지회관에서 개최된다. 강선계는 600년 전 혼인으로 맺은 인연의 끈을 1923년도 일제 강점기 시대에 조직의 목적과 운영 규약을 문서로 하여 지금까지 이어온 세 가문의 모임이다. 옥산 전씨(玉山全氏), 아산 장씨(牙山蔣氏), 밀양 박씨(密陽朴氏) 삼 성씨가 모여 문중의 친목과 화합을 돈독히 함은 물론 충의와 효도에 바탕을 두고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구국에 앞장섰다. 조선 전기의 친족 관행에서 유래된 인연을 현재까지 이어오며 더욱 활성화에 노력을 기울이는 강선계는 사료적 가치도 높다고 한다. 서구적 생활양식의 보편화로 인간관계가 파편화되고 소외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어느 가문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이러한 미담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살아있는 상징물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강선계 100주년 기념행사에 삼 성씨가 함께 조상 묘역에 기념식수로 향나무를 심자고 제안해 볼까. 향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장수목으로 울릉도 도동의 절벽 바위 위에 자라는 향나무는 2000살이 넘었다고 한다. 향나무는 우리나라 자생식물로 사계절 내내 푸름으로 단장해 있다. 특히 제사 향료로 많이 이용되고 묘역이나 우물가에 식재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 민속문화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오늘의 발걸음이 앞으로 500주년 때에는 장전리 향나무 노거수처럼 멋진 모습으로 후손들 앞에 서 있지 않을까. 에크하르트 톨에(Eckhart Toll)는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라는 저서에서 “우리의 삶 전체의 여행이 궁극적으로는 이 순간에 내딛는 발걸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언제나 이 한 걸음만이 존재하며, 이 한 걸음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무엇을 만나는가는 이 한 걸음의 성질에 달려 있다. 즉 미래는 우리의 지금의 의식 상태에 달려 있다”라고 했다. 그렇다. 지금 우리의 늙음도 따지고 보면 먼 젊은 시절에 내디딘 발걸음으로 이루어졌다. 지금 시작의 발걸음이 세월의 연륜이 더해 미래의 현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대부분 인간은 영적 차원이 들어오는 게 대개 늙음을 통해서라고 한다. 그래서 노인은 존경받고 존중받았다. 노인은 지혜의 저장고였으며 깊이의 차원을 제공했다. 향나무 노거수의 삶과 마찬가지로 우리 노인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인데…. 오늘날 노인의 삶이 초라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청송군 천연기념물·도 기념물 현황은청송은 천연기념물 노거수가 많은 고장이기도 하다. 안덕면 장전리 산 18 향나무 노거수, 수령 400년. 부남면 홍원리 547 개오동나무 노거수, 수령 450년. 파천면 관리 721 외 17필 왕버들 노거수, 수령 380년. 파천면 신기리 659 외 15필 느티나무 노거수. 수령 500년. 현서면 월정리 264(침류정) 향나무 노거수. 수령 350년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이밖에 청송읍 부곡리 왕버들은 태풍으로 쓰러져 지정이 해제됐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4-17

한국에서 가장 키 큰 은행나무에게 ‘소원을 말해봐’

문경회(文卿會)는 퇴직한 공직자들의 친목 단체이다. 매년 봄가을에 북부권, 중부권, 남부권을 번갈아 문화유적지를 찾아다니면서 우정과 삶을 살찌우고 있다. 봄비가 내리다 그치다 하는 날 양평 용문사와 은행나무를 찾았다.고즈넉한 산중의 사찰이야 어느 때라도 풍경을 즐기며 마음 수양하기에 좋으련만, 은행나무는 누가 무어라고 하여도 노란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이 제철이다. 하지만 모임 일정 관계로 봄에 용문사와 은행나무를 찾았다.녹색이 물들어 가는 용문산 용문사로 향하는 숲속 길은 계곡물 소리와 함께 마음의 땟국물을 씻어 주었다. 절의 일주문을 들어서니 극락세계에 와 있는 느낌이다. 한 번도 와보지 못한 용문사와 우리나라에서 가장 키가 큰 은행나무 노거수를 만난다는 것만으로 가슴 설렜다. 모두가 말없이 묵묵히 걸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봄의 향연을 만끽하며 걷는 것 자체가 묵언 수행이었다. 생각은 깊은 바다와 높은 하늘을 마음껏 유영하면서 끝없는 명상에 빠져들었다. 철학은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고 우리의 삶은 문학과 예술의 옷을 입혀서 아름답게 살찌우려 노력한다. 종교는 죽음에 대해서 말하고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하여 우리는 또 무엇으로 옷을 입힐까? 깊은 신앙심의 기도로 우리는 안식을 찾으려 한다. 우리의 궁극적 목적지는 어디일까? 열차에 태워진 몸처럼 가만히 있어도 안내되어 저절로 가는 곳, 무슨 애쓸 필요가 있을까? 애쓴다고 해서 되지도 않을 일을, 누가 가보고 온 사람도 없는 곳을, 그런데도 극락이니 천당이니 하여 가겠다고 빌고 또 빈다. 인간의 끝없는 욕심도 모자라 오늘도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이 용문사 부처님과 은행나무 앞에서 소원을 빌고 있다.걸음은 멈추어지고 묵언 수행도 끝이 났다. 연노란 잎을 단 하늘로 치솟은 거대한 은행나무 노거수가 우리 앞에 버티어 섰다. 놀라움에 아무 생각 없이 경배의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합장했다. 몸이 그렇게 반응했다. 딱히 소원도 없었다. 거대함과 아름다움에 마음은 홀라당 뺏겨 버렸다. 노란 은행잎 단풍을 주어 책갈피에 넣어 때때로 펼쳐보곤 했던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주마등처럼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아름다운 연노란 은행잎 앞에 왜 지난 어린 시절의 노란 은행잎 추억이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다.그러나 그것도 잠시 잠깐이었다. 은행나무라 하면 노란 단풍잎을 매달고 노란 은행 열매를 생각했는데, 이슬 안개에 목욕하고 나온 연노란 은행나무 잎은 고목에 핀 아름다운 꽃과 같았다. 그 녹색의 향기는 또 어떠하리, 오방색 천이 은행나무에 걸쳐져 있고, 주변에는 노란 소원지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살찌우고 행복하게 하는 민속문화가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은행나무와 용문사는 하나로 생각되었다. 용문사를 세우고 은행나무를 심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은행나무는 용문사를 쳐다보면서 용문사의 보살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은행나무는 용문사를 내려다보면서 용문사 수호신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은행나무가 없는 용문사를 생각하면 외롭고 삭막할 것이다.지나가는 사람들의 흘리는 말을 주워 들어보면 용문사 절보다 은행나무가 더 유명하며 많은 사람이 찾는다고 했다. 중국 관광객까지 나무에 매료되어 기념사진을 찍고 소원지를 매달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런 것 같다. 변화가 없는 용문사보다 사계절 변하는 은행나무가 더 친근감이 들고 마음을 끌었다.용문사 절은 649년 신라 진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세웠다고 한다. 은행나무 노거수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고 갔는데 그것이 자랐다는 설이 함께 전해지고 있다.원효와 의상대사가 당나라로 유학 가던 중 하룻밤을 유숙하면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세상사 마음먹기에 달렸다)”라는 크나큰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그렇다. 마음먹기에 따라 우리의 삶도 불행과 행복으로 갈라질 것이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인지를 알면서도 그 무엇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만물의 열매는 씨앗을 둘러싸고 있는 깍지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태양이 없는 밤은 모두를 같게 하고 태양이 있는 낮은 모두를 다르게 한다.같으면서도 다른 것이 세상의 만물이며 이치이다. 생과 사라는 삶과 죽음은 하나의 이음줄에 서있는, 높고 낮음과 귀하고 천함이 없는 평등한 물상이다. 있는 위치에서 즉 놓여 있는 곳에서 역할을 충실할 따름이다. 못하고 잘하고, 나쁘고 좋고, 필요 있고 필요 없음의 구분은 시와 때가 되면 바뀌고 변한다. 거대한 은행나무 앞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물들었다.아무도 나를 해치지 않으려 하는데 나는 왜 내 자신이 무기력하고 나약하여 스스로 무너지려 하는지 모르겠다. 삶은 한 편의 꿈같은 것일까, 그 종말 또한 한 줌의 재로 끝난다는 것일까. 사람을 제외하면 어떤 생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 어떤 수컷 거미는 자신 몸의 살점을 암컷의 먹이로 주며 죽어가는데,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니 미물만도 못한 것일까. 불교에서는 죽는다는 건 동시에 다른 어떤 것으로 태어나는 것이라는 윤회설을 믿고 있다.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처럼 우리 또한 은행나무 아래에서 마음먹기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는다.조선 시대 태종은 용문사 은행나무를 세상 모든 나무의 왕이라 했다. 세종대왕은 당상관 직첩의 벼슬을 내렸다. 불타 없어진 사천왕문을 대신한다고 천왕목(天王木)이라 불렀다. 나라에 위기가 있을 때마다 울기도 하고 전쟁과 환란에 함께 하였다고 하여 호국목(護國木)이라 불렀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부인이 정성껏 빌면 아들을 얻는다고 하여 사랑목이라 불렀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면서 민속문화 유산으로 깊숙이 자리 잡았다. 1천100살이 훌쩍 넘은 나이임에도 매년 350여㎏의 은행이 열린다고 하니 청춘목(靑春木)이랄까, 다산목(多産木)이라는 이름을 덧붙여도 좋겠다.은행나무에는 금기 사항이 있어 이를 어기면 천벌을 받는다는 징벌담의 설화가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이곳 용문사는 의병 활동 근거지였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일본군이 용문사를 불태웠지만, 은행나무는 무사했다고 한다. 어떤 연유로 불에 타지 않고 살아남았는지 천운을 타고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옛날 은행나무를 베고자 톱을 대었을 때 나무에 피가 나오고 맑던 하늘이 흐려지면서 천둥 번개가 쳤기 때문에 중지했다는 이야기도 내려오고 있다. 믿거나 말거나 신령스러운 은행나무 노거수인 만큼 별의별 믿기 어려운 전설이 뭉쳐서 내려오고 또 덧붙여서 내려가고 있다.우리 일행은 용문사를 빠져나왔다. 그 어디에도 우리들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우리 마음속에 그 흔적이 남아있을 뿐이다.용문사 호국목 은행나무 노거수는우리나라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로 알려졌다. 1962년 12월 7일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됐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5번지에 위치했다. 키 42m, 가슴 높이의 둘레 15.2m, 앉은 자리의 폭 28m이고, 나이는 최하 기준으로 1천100살로 안내되고 있다. 탄소동위원소 연대 측정기를 이용하여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있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4-10

고목 붉은 줄기선 용기를, 푸른 솔가지선 희망을 보았다

700년이나 살아온 소나무에서 비상하는 청룡과 똬리를 튼 붉은 뱀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의 모습에서 힘찬 기운과 안식의 편안함을 느꼈다. 무심하게 흐르는 세월에 딱딱하게 굳어져 가는 고목의 붉은 나무줄기에서 용기와 바람에 손짓하는 푸른 솔가지에서 희망을 보았다.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도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았다. 세월의 모진 풍파에 굴하지 않고 사계절을 맞이하고 보내면서 고귀한 품격을 다듬고 빛을 발하는 노거수를 보면서 내 늙음의 후줄근한 모습을 벗어던지고 밝은 웃음 가득한 얼굴로 일신우일신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오늘도 노거수를 찾아다니면서 늘 힘을 얻고 새로운 무엇인가 지혜를 터득하고 배운다.청룡과 함께 붉은 뱀이 똬리를 틀고 동거하는 모습은 황홀경 그 자체이다.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꿈에서만 볼 법한 괴이하고 신비한 모습이다. 용과 뱀이 동거하다니, 그야말로 상상의 세계에 온 느낌이다. 용은 신비한 조화능력이 있어 수많은 신화와 설화, 전설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용은 비구름을 몰고 다니고 천둥 번개 등 날씨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요술도 함께 지니고 있다. 반대로 뱀은 실제의 동물이면서도 불구하고 인류 문화 발전에 가장 오래된 의식에 관여해 왔다. 지혜와 의술의 상징이기도 하면서 남을 해치려는 사악함, 욕심 등 나쁜 이미지를 품고 있기도 하다. 뱀은 지느러미와 다리, 날개도 없으면서 산, 들, 사막, 바다, 강 등 어느 곳이든 용케도 살아가는 지혜로움과 무섭고 사악한 이미지를 함께 가지고 있다. 용과 뱀은 우리 민속 문화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이런 상상의 용과 현실의 뱀이 동거하는 모습은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천향리 804번지에 있는 부귀와 장수, 상록을 상징하는 700년이 훌쩍 넘은 석송령에서 볼 수 있었다.키 11m, 가슴높이 둘레가 4.2m, 나무 폭이 동서 34m, 남북 22m, 앉은 면적은 1,000m²에 이르는 거대한 소나무 노거수였다. 주민들은 노령의 몸을 유지하기 위해 나무 지팡이를 무려 79개를 선물하고 편한 팔걸이 돌기둥 5개를 설치하여 주었다. 그 신비함과 그 영험함을 알리기 위하여 제단을 설치하고 금줄을 쳐 놓았다. 또한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철책 울타리를 설치하여 자물쇠를 채워 철통같은 방비를 해 놓았다. 매년 정월 대보름날 새벽이면 제단에 제물을 놓고 제사를 드리고 있었다. 그 누구도 마을 주민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드나들 수 없어 용과 뱀이 동거하는 것을 외부 사람들은 알지도 보지도 못했을지 모른다. 알려고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범인의 일상이고 보면 뭐 그리 나무랄 일도 아니다 싶었다.늘 푸른 솔잎 속에는 밑둥치에서 몸을 뒤틀면서 솟아올린 아름드리 줄기에는 거북등처럼 육각형의 껍질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밑둥치에서 뒤틀면서 힘차게 불끈 솟은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몸은 바로 힘의 원천이며 청룡이 하늘로 승천하려는 모습으로 비추어졌다.문어발처럼 다섯 개의 팔은 하늘을 향하여 비상하려는 청룡이었다. 그 모습은 웅대하다 못해 미래를 향한 무한한 발전의 원동력으로 가슴에 와 닿았다. 가슴 속 심장의 고동이 요동치면서 나를 흥분하게 했다. 느지막한 황혼에 이런 뿌듯하고 황홀함을 느낄 수 있을까 하고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갑진년 청룡의 해에 사라져가는 불꽃이 다시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마음이 눈을 대신했다. 붉은 근육질의 몸에 청룡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자세히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아 슬그머니 위로 고개를 돌렸다. 청룡의 몸에 붉은 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놀라움에 그만 발이 얼어붙고 말았다. 얽히고설킨 뱀의 똬리는 그 누구도 떼어놓지 못할 것 같았다. 한두 마리가 아닌 가족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었다. 징그럽고 사악함이 아니라 아름답고 지혜로움의 상징물로 다가왔다. 황혼에도 끝없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아등바등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우애와 평화, 지혜로움을 달라고 빌었다. 인간 태생이 욕심 덩어리인 것을 뻔히 알면서, 이 또한 욕심이 아닐지 의심하면서 부끄러움을 느꼈다.청룡의 품에 뱀의 똬리는 큰 사각형 모양의 연리지를 만들어 놓았다. 이는 수백 년이라는 세월이 아니면 도저히 만들 수 없는 희귀한 연리지였다. 신비함에 나도 모르게 경배의 기도를 드렸다. 도저히 혼자 보고 넘길 수 없었다. 함께 간 H 교수를 불렀다. 그도 석송령의 아름다움에 빠져 여기저기로 방향을 바꾸어 가면서 석송령의 신비한 모습을 카메라 렌즈에 담기 바빴다. 와서 보더니 감탄해 마지않았다. 카메라에 오롯이 잘 담아 사진전에 출품해 보라면서 소나무 연리지에 대한 유래를 들려주었다. 그 뜻을 알고는 더욱 신통하다면서 놀라워했다. 똬리를 튼 붉은 뱀을 품은 펼쳐진 푸른 잔솔가지 사이로 드나드는 빛의 음양과 바람이 묘한 느낌을 주었다. 흩날리는 솔향은 혈액을 타고 더덕더덕 붙은 몸속 땟물을 말끔히 씻어내고 솔잎은 바람의 빗자루가 되어 허공을 향해 설렁설렁 비질하니 빗살 끝에 닿은 하늘은 더욱 눈이 시리도록 맑았다. 몸도 마음도 맑은 하늘도 모두 하나의 자연이 되었다.잠에서 깨어나듯 정신을 수습하여 주변을 살펴보니 석송령의 자식 둘이 어머니 곁을 지키며 건장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2세의 자식은 번식과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서 1996년 9월 28일 종자를 받아 1997년 3월 24일 싹을 틔웠다. 그리고 1998년 4월 3일 예천읍 생천리 실증 시험 포장에 옮겨 키운 후 2002년 10월 19일 이곳으로 돌아왔다고 했다.나이 27세가 되도록 아직 이름이 없다니 언제까지 두고만 볼 것인지, 어미의 모습을 딴 용과 뱀을 의미하는 뜻을 가진 이름은 어떨까. 아무튼 어머니처럼 재산을 증식할 줄도 알고 수굿하게 마을 사람살이에 끼어들어 흔쾌히 모은 재산을 내놓는 훌륭한 목품(木品)으로 자라야 할 텐데.석송령 앞에는 거대한 바윗돌에 노래비를 세워놓았다. 나무에 대한 시비는 본 적이 있어도 나무에 대한 찬양의 노래비는 처음 보았다. 석송령의 아름다운 푸른 자태를 칭송한 노래였다. 한 몸이 된 청룡과 붉은 뱀의 모습은 보지 못했는지, 청룡의 영험함과 붉은 뱀의 지혜를 칭송하지 못했는지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의 영험함과 지혜를 노래했으면 하는 바람을 해본다. 청룡과 붉은 뱀이 한 몸이 된 석송령의 기이하고 신비한 아름다운 모습은 세월이 빚어놓은 생명이 깃든 진품·명품으로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석송령 노래비는…송문헌이 작곡하고 석만수가 작사한 석송령 노래는 2021년 8월 노래비로 만들어졌다. 아래는 석송령 노래비에 새겨진 가사다.천년세월 돌고 돌아 석관천을 들어서니 칠 백년 석송령이 그림같이 장관일세.푸른 솔 아름다운 절경이로다. 바람 따라 뭉게구름 휘감고 춤을 춘다 아~한평생 욕심 없이 옷 한 벌로 사는구나. 오고 가는 나그네가 가던 길을 멈추네.천년세월 돌고 돌아 식관천을 들어서니 칠 백년 석송령이 그림같이 장관일세.오는 님 반가웁게 맞이하면서 가는 님 다시 오라 말없이 손짓하네 아~푸른 솔 가지마다 새들 노래 즐겁구나. 오고 가는 나그네가 가던 길을 멈추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4-03

특별한 꿈 덕에 이름 얻고 재산 물려받은 ‘건물주 소나무’

과학적 논리로 증명할 수 없지만, 꿈의 영험함을 믿고 있다. 어머니로부터 이야기들은 태몽은 늘 내 삶에 영향을 끼쳤다. 때로는 내가 직접 꾼 꿈으로부터 그 영험함을 실감하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남들은 황당하다고 말할 때 ‘꿈같은 소리 하네.’라고 하면서 핀잔을 주지만, 지난밤 꿈이 상서롭거나 불길할 때면 그날은 늘 긴장하고 조심했다.아무도 앞날의 일을 예측할 수 없는 우리의 삶에 꿈은 내게 특별한 예언으로 다가왔다. 지나고 나서 꿈풀이 해 보면 전부는 아닐지라도 예언이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어 놀랍기도 했다. 그런데 특별한 꿈으로 인하여 뜻밖에 횡재를 한 소나무 노거수가 예천군 감천면 천향리 804번지 마을 주민이 되어 부자로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마을 살림살이에 기부도 하고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주는 등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궁금증은 하늘을 찔렀다.한창 마을 나무 노거수를 식생 조사할 때이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2002년 봄이다. 아지랑이 피어나는 따뜻한 봄날, 계명대학교 식생조사팀과 함께 현장 조사를 위해 선바람에 꿈으로 대박 난 주인공이 사는 예천으로 향했다.산세 좋고 물 맑은 예천은 예향의 고장이다. 예부터 성품이 온화한 주민들은 문향의 고장답게 어진 선비들이 많이 나온 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예천이 선비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학문을 숭상하는 선비들이 후학을 양성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던 탓일 것이다.석송령이 있는 천향리는 백두대간 옥녀봉에서 발원하는 석관천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석평, 샘발, 진발, 귀리, 베트리 등 5개의 자연부락으로 올망졸망 산자락과 하천 주변에 어우러져 있었다. 석송령은 역사적 유래와 함께 생동감으로 감동을 안겨 주었었다.“이곳 석평마을 이수목(李秀睦)이라는 사람은 재산은 넉넉했으나 물려줄 슬하에 자식이 없어 근심이 많았다. 그는 문득 나무에 재산을 물려준다면 오랫동안 잘 지켜지리라는 생뚱맞은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마을 당산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꿈에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꿈에서 깬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게 바로 자신이 낮잠을 잘 수 있도록 그늘을 지워준 당산 소나무였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곧바로 군청으로 달려가 소나무를 자식이라 생각하고 석송령(石松靈)이란 이름을 지어 호적에 올렸다. 석송령(石松靈)은 석평마을에서 생명을 얻은 나무여서 석(石)씨의 성을 붙이고 영혼이 있는 소나무라는 뜻에서 소나무라는 송(松)과 신령하다는 영(靈)을 써서 석송령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자신의 전 재산 5천87㎡ 토지를 등기까지 하여 물려주었다.”다른 나라에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석송령은 1928년부터 매년 재산이 증식되어 지금은 건물주란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재산이 늘어나 토지가 6천248m²나 되고 건물도 천향보건진료소, 마을회관, 만수당 등이 있다. 이를 소유한 석송령은 누가 뭐래도 부자다.박정희 전 대통령도 이런 미담을 전해 듣고 500만 원의 하사금을 보태어 주었다. 매년 임대료로 벌어들인 돈은 세금을 내고 나머지 돈은 금융기관에 예치하여 장학사업 등 어려운 마을 살림살이에도 보태주었다.이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래가 없는, 오늘날의 가진 자의 사회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실천운동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신문이나 방송에 오르내려 그 유명세로 마을의 품격을 높여주고 주민들에게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석송령 이름만큼이나 탄생의 설화도 재미있었다. “석송령이 마을에 자리 잡은 건 700여 년 전이다. 당시 영주 풍기 지역에 큰 홍수가 나서 마을 앞 석관천에 온갖 잡동사니가 떠내려왔다. 그 가운데 뿌리째 뽑힌 한 그루의 소나무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본 주민이 나무의 운명을 안타까워하며 건져내 개울 옆에 심은 것이 시작이었다.” 이러한 애틋한 식목담(植木談)만큼이나 나무를 보호하고 가꾸어 왔을 것이 분명하다. 그때부터 소나무는 마을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마을 수호신 나무로 자리매김했다. 소나무는 마을 주민에 의해 이름과 재산도 얻고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반면에 마을 주민은 소나무로부터 마을의 단합, 평화에 이어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마을 주민과 석송령은 마치 한 몸체가 된 것처럼 더불어 살아가고 있었다.석송령 노거수에 대한 설화를 보면 조상의 지혜로움이 잘 나타나 있다. “일본 강점기 때의 일이다. 일본 순사(巡査)가 석송령을 제거하여 대한제국의 민족정기를 말살하고, 일본 군함 건조 재료로 사용하고자 했다. 순사는 인부를 동원하여 나무를 베려고 자전거를 타고 석송령 부근의 개울을 건너오다 갑자기 자전거 핸들이 뚝 부러져 넘어지면서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다. 인부들은 노거수의 거대하고 우람한 모습에 놀라 영험한 나무라 믿고 겁에 질려 달아났다고 한다.”이때는 이미 마을 주민들이 송계(松契)를 조직하여 나무를 보호하고 있을 때였다. 석송령을 해치려 일본 순사가 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주민들이 사전에 어떤 방법으로든지 이를 막기 위하여 준비하지 않았을까? 일본 순사의 죽음이 단순 우연의 사고일까? 그러하지 않다는 의심이 강하게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국법은 무너져 있고 약육강식의 지배사회에서 마을의 질서와 평화의 구심점이 된 송계의 주인공 석송령을 해치려 하는데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사람들은 부귀, 장수, 상록을 상징하고 있는 석송령 노거수가 마을을 수호해 주고 있다고 믿고 있다. 석송령에서 매년 정월 대보름날 새벽에 주민들은 한 해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다. 마을 제사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막걸리를 들고 나무의 주변을 돌면서 술을 대접한다.이러한 민속문화는 나무를 보호하고 사랑하는 행동으로 이어지고, 나아가서는 석평마을의 단합과 발전으로 평화로운 마을 건설에 밑바탕이 되었다. 특히 마을 제사를 지낼 때 쓰는 하얀 고깔을 가져다 태워서 아들 없는 사람이 먹으면 아들을 낳고, 공부하는 학생이 먹으면 공부를 잘한다고 하여 마을 제사를 지낼 때는 고깔을 가지려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석송령 노거수에 더 많은 미담이 입혀져 마을 주민들과 함께 천대 만대 만수무강하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해 본다.늘 푸른 기상을 지닌 한민족의 표상 소나무는육송(陸松), 적송(赤松), Red Pine은 수형이 곧고 수피는 붉은색을 띠고 있다. 금강송, 강송, 춘양목이라고 부른다. 해송(海松), 흑송(黑松), Black Pine은 수피가 흑갈색이며 동아는 흰색을 띠고 있다. 모두 상록 침엽교목이다. 송(松)은 나무 목(木)에 벼슬을 뜻하는 공(公)을 붙여 벼슬을 해도 좋을 만큼 훌륭한 나무라는 의미도 있다. 하나의 인격체로 생각해 궁궐 복원을 위해 소나무를 벨 때도 반드시 예를 갖추어 ‘어명이요’를 세 번 알리고 나서야 톱을 댄다. 속리산 정이품송은 나라로부터 벼슬을 하사 받았고, 예천 석송령은 재산을 상속받았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3-27

청도김씨 집안 절부들의 영혼 달래는 마을 터줏대감

내가 왜 노거수를 찾아다닐까? 하고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다.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나무 실체의 아름다움에 이야기가 덧붙여져 있어 감정이 이입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나무가 다 똑같다고 하는 사람을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똑같아 보이는 나무일지라도 사는 위치, 나이, 생김새 등 삶의 꼴이 모두 다르다. 나무를 찾아서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면 희로애락에 춤추며 좋아하기도 하고 절규하며 마음 아파하기도 한다. 한 그루의 노거수를 이해하고 품는 것은 한 권의 양서를 읽음과 다름이 없이 삶의 영혼을 살찌게 한다.나무 한 그루 없는 마을이라면 얼마나 삭막할까, 나무 한 그루 없는 집이라면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울까. 나무 한 그루 없는 도로라면 얼마나 심심하고 무료할까. 새들이 찾아와 노래를 불러주려 해도 앉을 자리가 없고, 바람이 먼 곳에서 찾아와 좋은 소식을 전해 줄래도 멈추어 쉴 자리가 없다. 도로를 따라 열 지어 서 있는 가로수는 차들을 인도하고 운전자와 동승자에게 볼거리를 제공해 주며 심심함을 덜어준다.인공으로 심은 나무라면 식목담이라는 태생의 이유를 다 가지고 있다. 그것이 노거수라면 도서관에 소장된 역사책처럼 나이테에 꼼꼼히 기록해 두었을 것이리라. 쉬어가고 붙잡아 둘 노거수가 있는 집과 마을이라면 어디라도 찾아가 이야기를 듣고 또 나누고 싶다.500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한 집안의 절부(節婦)들이 울부짖는 영혼을 잠재우는 낙화송(落花松) 노거수가 있다기에 단숨에 찾아 나셨다. 상주시 화동면 판곡리 마을 423번지에 낙화담(落花潭) 한 가운데 홀로 살아가고 있었다. 낙화담은 조선시대 초기 만들어진 연못으로 임진왜란 때 여자들이 왜군을 피해 이곳에서 투신하면서 낙화담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면적이 190㎡로 채 60평이 안 되는 작은 연못이지만, 당시에는 매우 컸다고 한다.낙화담 연못 가운데에 있는 낙화송 노거수는 아름다운 꽃이 떨어진다는 이름에서부터 슬픔이 묻어난다. 키 13m, 흉고 둘레 2m, 수관 폭 20m에 이르며 나이는 550살이나 되었다.열악한 환경임에도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 연못 한가운데 흙으로 조그만 동산을 쌓아 그곳에 소나무를 심어놓았다. 큰 화분에 담겨있는 분재형 소나무 같다. 뿌리가 더 이상 옆으로 뻗어나갈 수 없어 나이에 비해 왜소해 보이지만, 연륜과 아름다움만큼은 어느 소나무 노거수 못지않다.마을 주민들은 소나무 노거수를 마을의 수호목이자 상징물로 여겨 소중히 보살피고 있다. 나라에서도 1982년 10월 26일 보호수로 지정하여 정성껏 보호하고 있다. 판곡리 마을 청도김씨(淸道金氏) 집안 절부의 영혼을 위무하고 품어주는 낙화송이 위대해 보인다.오늘날 장례문화 중의 하나인 수목장의 시초가 아닐까. 전쟁의 비극은 전쟁에 참여한 의병이나 장수만의 문제가 아닌 한 집안을 몰살하는 참담함임을 낙화송은 말하고 있다. 한 마을의 절부들이 울부짖는 원혼을 품고 있는 낙화송 노거수를 추모의 마음으로 천연기념물 반열로 품격을 올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낙화담 연못 한가운데 있는 노거수로 들어갈 수 있게 철제 다리로 연결해 놓았다. 마을 주민들이 선물한 지팡이 10개를 짚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낙화담 주변에는 아픈 역사를 잊지 않으려고 아니 잊지 말라고 의사 제단 비, 위령비, 의적 찬양 시비, 제실 등을 짓고 의병장 김준신과 절부들의 영혼을 추모하고 있었다. 낙화송은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위령 나무로 그 어느 문화재보다 값어치 있고 정감이 갔다.낙화담에 얽힌 이야기는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역사의 아픈 사연을 오늘날 곱씹어 본다.‘김준신은 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당시 상주 목사 김해를 찾아가 방비를 서둘러야 한다고 하다가 오히려 유언비어로 세상을 어지럽힌다고 하여 감옥에 갇혔다. 왜군이 쳐들어오자 다급해진 목사는 기병 백여 명을 내주면서 먼저 출전케 하고 자신은 나중에 뒤따르겠다고 했으나 남쪽에서 도망쳐 오는 난민들을 왜적으로 오인하고 발길을 되돌리고 말았다. 칠곡 석전에 이르러 원군을 기다리던 김준신은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체할 수 없어 부하들을 이끌고 대구 인근까지 진출했다. 이때 왜군은 이미 대구를 함락하고 금호강을 건너 북상하는 중이었다. 황급히 상주 본진으로 되돌아와 북천전투에 참여하여 수백 명의 왜적의 목을 베고 임진년 4월 25일 32세의 나이로 장렬히 순직했다.큰 피해를 당한 왜군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40여 리 떨어진 이곳 판곡리까지 쳐들어와 그의 가족은 물론 마을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이때 부녀자들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입향조가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파 놓았던 못에 투신하였다. 훗날 유림의 발의로 김준신의 공적이 조정에 알려져 정조(正祖)가 의사(義士)로 칭하였고, 1820년 순조는 통훈대부 사헌부 종3품의 집의로 추증했다.’ 이 이야기는 실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다.노산 이은상 선생은 1973년 ‘낙화담의적천양시(落花潭義蹟闡揚詩)’를 짓고 일초 김현승 선생이 쓴 시비가 가슴을 아리게 한다.임진년 풍우 속에 눈부신 의사 모습/ 집은 무너져도 나라는 살아났네//절사곡(節士谷) 피 묻은 역사야 어느 적에 잊으리/ 설악산 높은 봉에 본대로 이르는 말//꽃은 떨어져도 열매는 맺았다고/ 오늘도 낙화담 향기 바람결에 풍기네.//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지극한 아들 이야기가 낙화담과 함께 문중의 문집에 기록되어 전해오고 있다.“구사일생으로 김준신의 아들은 목숨을 건졌다. 난이 평정된 뒤에 아들 백일은 아버지가 전사한 곳을 찾아가 밤낮으로 울며 아버지의 유해라도 찾으려 하였으나 알 길이 없었다. 아들 백일은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축수하기를 ‘아버님 돌아가신 자리이거든 제가 든 이 술잔을 엎어 주십시오’ 하고, 제사에 들일 잔을 들고 다녔는데, 상주 서문의 토성 근방에까지 갔다. 그때 바람 한 점 없었는데 갑자기 잔이 엎어졌다. 백일은 드디어 그 자리의 흙을 파서 그 땅에 여막을 짓고 3년을 시묘살이 했다. 그 슬퍼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하늘이 아버지의 충혼과 아들의 효성에 감동한 탓이다’ 하고 다들 기이하다고 여겼다 한다.”낙화담, 첨모재, 위령비, 시비, 낙화송은 모두 우리의 문화재이다. 특히 살아 숨 쉬는 낙화송 노거수에 정이 더 감은 무엇 때문일까. 의병장 김준신의 위국충절과 아들 백일의 효심, 낙화담에 뛰어내린 판교리 절부들의 원혼 때문일까. 전쟁으로 희생된 모든 분께 고개 숙여 고인의 명복을 기원해본다. 낙화담(落花潭)이란 명칭은낙화담이 자리한 곳은 마을을 개척할 때 풍수지리설에 따라 마을 뒤쪽은 산이 감싸 찬바람을 막아주고, 앞은 훤히 트여 양지바르며, 들은 크지 않지만 땅이 기름져 수십 가구가 먹고살기에 충분해 보인다.그러나 멀리 보이는 백화산의 뾰족한 봉우리가 화기(火氣)를 머금고 있어 오랜 세월에 걸쳐 발복(發福)할 수 없다고 하여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 마을 한복판에 커다란 못을 팠다고 한다. 제아무리 강한 불꽃이라도 이 정도의 물은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임진왜란 때 마을 여자들이 왜군을 피해 이곳에서 투신하면서 낙화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3-20

솔향 품은 거대한 몸, 하늘 향해 뻗은 단아한 육솔

“노거수 아래 낮잠을 자는 나를 보았다. 단잠을 자고 있는데 누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얼떨떨한 정신에 눈을 떴다. 백두산 호랑이 한 마리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이제 호랑이로부터 도망도 못 치고 큰일이 났다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두려움보다는 친근감이 갔다. 호랑이는 긴 꼬리를 흔들며 등에 올라타라는 시늉을 했다. 호랑이 등은 참으로 포근했다. 호랑이는 천천히 산의 능선을 오르내리면서 산천을 주유하며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하였다.”동물의 왕국에서나 볼 법한 호랑이의 등에 올라탔다니, 호젓한 산중 고찰 뒤편 산신각 벽화에 그린 할아버지와 호랑이가 생각났다. 참으로 실제와 같은 묘한 단꿈을 생각하면서 문경 청화산 자락에 있는 농암면 화산리 942번지 제292호 천연기념물 반송 노거수를 찾았다.계곡 깊숙한 곳에 숨어있기라도 하듯이 반송은 늠름한 자태로 청화산 등산로 초입에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깊은 산속의 적막을 깨뜨리는 것은 청화산 자신이었다. 소란스럽고 시끌벅적한 것이 싫어서 조용하고 한적한 산을 찾아 힐링하고자 하는데, 때 아닌 겨울 산, 자신 몸에서 흘러내리는 청아한 개울 물소리와 나뭇가지에서 내는 솔바람 소리는 무한한 침묵에 대항하는 듯했다.그러나 산중의 물소리와 바람 소리는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악기보다 아름답게 들려 그 무엇보다 힐링이 되었다. 솔향 품은 거대한 노거수를 카메라 렌즈에 담을 때 갑자기 개울에서 후닥닥하는 소리와 함께 고라리 한 마리 놀란 듯 쏜살같이 숲속으로 사라졌다. 지난 단꿈 생각과 함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푸른 솔가지에 매달아 놓은 오방색 띠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몰라도 겨울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이 반송의 손에 쥐어진 장난감으로 생각되었다. 높은 산봉우리 시루봉 큰 바위 2개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나무의 안위가 염려되어 높은 곳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것일까. 계곡물 합류 지점에 사는 반송은 넘쳐나는 계곡물에 언제 떠내려갈지 목숨이 위태롭다는 느낌이 들었다.어릴 적 홍수 때에는 목숨이 간당간당 했을지도 모른다. 형제처럼 주변에 세 그루의 동생 소나무 노거수를 데리고 있었다. 그들 나이도 300년은 훌쩍 넘었다. 계곡물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으려 뿌리 손은 계곡 언덕의 바위를 꽉 부여잡고 있었다. 푸른 이끼는 얼싸 좋다 하고 반송의 몸에 착 달라붙어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참으로 묘한 공생의 동거를 하고 있었다.산중에 살아가는 반송 노거수는 자연이 창조한 예술 작품이다. 노거수의 아름다움을 칭송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높이 솟은 노거수 나뭇가지 곡선의 자유로움에서 무한한 곡선미를 느낀다. 둘째, 겨울임에도 전시장 벽에 걸린 한 폭의 그림과 같은 푸름의 미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소나무만이 가능한 일이다. 셋째, 몸의 수피에서 느끼는 연륜의 미는 존경하는 스승과 진배없다. 넷째, 우산처럼 치렁치렁 늘어뜨린 솔가지의 균형과 조화미는 안정감을 주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다섯째, 거대한 몸을 지탱하기 위하여 땅을 파고든 뿌리의 강인함에서 보는 끈기의 미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여섯째, 하늘을 향한 붉은 줄기와 단아한 수형에서 나오는 절제의 미를 느낀다. 산중 자연에서 살아가는 반송의 노거수를 여섯 가지의 미를 상징하여 육솔(六松)이라 부르면 어떨까. 옛 이름도 되찾고…,문화와 예술은 무어라 하여도 자연의 미를 최상으로 여긴다. 인공으로 창조한 미는 어딘가 모르게 좀 부족한 부분을 느낄 수 있지만, 자연의 미는 어디 하나 흠잡을 때 없다. 문화와 예술은 삶을 윤택하게 하고 마음을 순화시키고 맑게 해 준다.누군가 말했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적은 인간이다. 오직 인간만이 인간을 제어할 수 있다. 이제 이 지구상에는 생물학적으로 인간을 위협할 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위험한 인간을 인간답게 승화시키는 것은 문화와 예술이다.” 그렇다, 문화와 예술은 사회를 건강하게 하고 궁극적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이런 면에서 산림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산림 문학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삶을 살찌게 한다. 특히 노거수는 문학 작품의 대상 이전에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는 스승과 같은 존재이다.화산리 천연기념물 육솔의 노거수도 해코지하면 천벌을 받는다는 설화를 가지고 있다. 설화도 하나의 문화이며 문학이다. 실제 경험을 과장하였든지 아니면 상상으로 지어낸 허구는 세상에서 매우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문학은 인간을 감화시킬 수 있다. 말하자면 사회생활의 정신이자 기술로, 인간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볼 때 허구 없이는 어떤 예술이나 재능도 완성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거나 감동시키고 싶다면 우리가 줄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진심이 담긴 믿음을 주어야 한다. 자연 그 자체는 인간이 삶에 대해 호감을 느끼고 인내하도록 만든다. 노거수 설화 속에 담긴 금기 사항이나 지향하는 마음은 아름다움으로 향하는 길이다. 나무를 보호하는 것으로 아름다움을 마음속에 담을 수 있다. 영적 요소의 존재는 미의 완성에 불가결하다.나무 보호는 자연 사랑으로 이어져 공생의 길을 터놓았다. 그리고 세월이 만들어 놓은 소나무의 다양한 미는 우리가 지향하는 미의 결정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의 자연스러운 행위는 아름답기 때문이다. 또한 노거수를 보고 있으면 황홀감에 빠진다.인간이 창조한 작품은 아무리 오랫동안 작업을 해도 작가의 한 생애에 끝이 난다. 그러나 나무의 아름다운 미는 수백 년 동안 이루어 놓은 자연의 작품이니 비교할 수 없다. 자연의 물상을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기쁨이요, 충만이다. 아름다움은 조화와 균형 속에 있다. 사계절이 한 해를 가득 채운다. 인간의 마음에도 사계절이 있다. 육솔의 노거수를 보면서 봄의 문턱에서 깨끗한 겨울의 상념들을 달콤하게 새김질해 본다. 노거수와 함께 전하는 설화육솔 노거수는 징벌담의 설화를 가지고 있는 노거수로 키 24m, 가슴 높이 둘레 5.1m, 나이 400살 훌쩍 넘어섰다. 나뭇가지가 여섯 개라서 육송이라고도 불렀다.노거수에 대한 고사와 설화는 여러 유형으로 구분해 이해할 수 있다. 식목담(植木談)은 마을을 개척한 사람이나 역사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람이 심었다는 노거수에 대한 고사이다.이인계시담(異人啓示談)은 꿈속에 낯선 사람이 나타나 계시하는 대로 이행하면 반드시 유리한 상황이 전개된다는 노거수 설화이다.현몽담(現夢談)은 당산나무에 꿈 이야기가 부가되어 있는 것으로 꿈속에 목신이 나타나 인간에게 계시하는 것으로 사람과 대결한다거나 괴질을 물리친다는 노거수 설화이다.풍수담(風樹談)은 풍수지리설이 포함된 노거수 설화이다.환생담(還生談)은 사람이나 동물이 죽은 후 나무로 환생하여 신앙의 대상이 되거나 신성시되는 설화로서 징벌담과 마찬가지로 노거수의 설화로서 빈도가 높다. 하나의 노거수에 고사와 설화를 복합적으로 포함하는 경우도 많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3-13

빨려들 것 같은 웅장함에 오랜 세월의 연륜까지

길일을 택하여 나즐로(나 홀로 즐겁게) 노거수 탐방에 나섰다. 길일을 택한다고 하여 사주나 주역 풀이가 아니라 날씨나 교통 혼잡, 나의 일정 등을 고려하여 편안한 날을 잡는다는 의미이다.상주시 화서면 상현리 천연기념물 제293호 반송 노거수를 찾았다. 대구에서 상주-청원 간 30번 고속도로를 달리다 화서 IC를 빠져나와 화서면 소재지 화서초등학교 뒤편 도로를 따라 상현리 마을로 향했다. 내비게이션은 지름길로 좁은 농로 길을 안내했다. 이를 무시하고 멀리서도 보이는 거대한 소나무 노거수에 빨려들 듯 끌려갔다. 마을 앞 허허로운 공간을 소나무 한 그루가 꽉 채워주었다.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방문객을 위한 주차장과 화장실, 쉼터용으로 정자를 설치해 놓아 반송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더 없는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마을 앞 넓은 공간에 천연기념물 반송 노거수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다. 그 늠름하고 우람한 모습에 압도당하여 고개를 숙이고 경배를 드렸다. 해는 하늘 중천에 있지만, 소나무 키를 벗어나지 못하고 나뭇가지에 걸려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그림자를 밟으면서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죄스러운 마음이 들 정도로 경외감이 들었다.키 15m, 가슴 높이 나무 굵기 5.1m, 수관 폭 28m나 되었다. 크기만큼이나 오랜 세월의 연륜이 나무 곳곳에 묻어났다. 나이가 무려 500살이라 했다. 양팔을 벌려 노거수를 안아 보았다. 심호흡하면서 노거수와 교감해 보았다. 그 웅장한 힘의 에너지를 가슴에 담고 연륜으로 얻은 삶의 지혜를 가르쳐 달라고 마음속으로 소원했다. 기운이 솟고 정신이 맑아졌다.주변 공원에는 예쁜 돌탑을 8개나 쌓아 놓아 옛 이름을 연상하게 하였다. 돌탑은 시간과 노력의 상징물이다. 꾸준한 노력과 인내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반송이라는 소나무 성질의 일반명사 대신에 탑송이라는 옛 이름이 더 정감이 갔다. 앞으로 탑송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주고 싶다.주민들의 나무 사랑이 돋보였다. 나무 주변에는 빗물이 잘 빠지도록 물 빠짐 작은 도랑을 설치해 놓았다. 나무 둘레에 목책을 설치하여 함부로 들어가서 나무를 훼손하지 못하게 해 놓았다. 그로 인하여 답압 피해를 막을 수 있게 되었다.처음 나무를 심었을 때 뿌리 주변에 북을 돋우어서 심었는지 아니면 오랜 세월로 인하여 흙이 빗물에 씻겨 주변의 땅이 낮아졌는지는 몰라도 나무의 생육에는 최적지로 만들어 놓았다. 주변의 환경을 보아도 먼 옛날 마을 주민이 심지 않았을까 싶다. 어떤 연유로 인공 식재를 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을 경관은 물론 마을 품격까지 올려놓은 우리 조상의 지혜로움이 돋보였다. 워낙 나무가 거대하다 보니 나뭇가지의 부러짐을 방지하기 위해 지지대를 세우고 가지와 가지를 서로 줄로 연결하여 묶어 놓았다. 100여 년 전에 벼락으로 인하여 고사한 나뭇가지는 수피를 벗기고 균이나 충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방수 방부처리를 해 놓았다. 반송이라는 이름처럼 나무의 수형은 우산형으로 나뭇가지가 땅을 향해 흙과 맞닿을 듯 치렁치렁 늘어져 있었다. 빛을 향하는 나무의 속성으로 보아 푸른 하늘로 뻗어나가야 할 나뭇가지가 반대로 흙냄새 맡으려는 듯 땅으로 뻗어가는 모습이 신기해 보였다. 먼 훗날 땅과 맞닿아 뿌리와 서로 만나리라.주변에 빛을 방해하는 그 무엇도 없어 자유로움인지 아니면 나무의 DNA가 그런 것인지 참으로 신통방통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뿌리는 예상컨대 틀림없이 연리근일 것이다. 하늘로 뻗어 올린 줄기를 봐도 그렇고 웅장한 수형을 보아도 그렇다. 나무의 수관 폭만큼 뿌리도 뻗어나간다고 하니 상상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몸을 지탱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뿌리의 강인함을 새삼 느끼게 해 준다. 보이지 않는 도움에 나무는 살아가고 있다. 우리 또한 이러한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옛날부터 이 소나무 노거수에는 이무기라는 상상의 동물이 살고 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주민들은 나뭇가지가 부러져도 가져가지 않을뿐더러 나무 아래 떨어진 솔갈비도 긁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정월 대보름날이면 마을 주민들이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마을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이러한 노거수 설화는 마을을 지키고 주민들의 재앙을 막아주는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노거수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노거수 설화의 향유집단인 마을 주민들은 인간 행위에 대한 노거수의 징벌과 영험을 이야기하면서 노거수를 신성시하였다. 노거수는 마을 주민들의 어떤 운명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암시를 나타내기도 한다. 예를 들면 당산나무를 베어낸 사람이나 가족이 결국은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는 어느 마을에서든지 쉽게 찾아볼 수 있다.오랜 세월 동안 조상 대대로 마을의 역사를 직접 체험하며 또한 후손까지 살아가는 당산나무는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다. 노거수 설화는 민속문화, 민속신앙의 차원에서 노거수가 보호되는 설화로서 설화 속에는 우리 조상의 자연숭배 사상, 조상숭배 사상, 영혼 불멸의 사상 등이 있다. 이러한 노거수 설화는 전승 집단의 의식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 흥미와 교훈을 주기도 하며, 삶의 지혜를 얻게 해 준다. 그뿐만 아니라, 마을의 결속을 강화하고 마을의 경관을 이루는 노거수를 보호해 주는 기능으로 발전하여 전체적 생태계 천이의 자연성과 생물 다양성을 높여주는 기능으로 발전하였다.상주 상현리 천연기념물 탑송도 노거수 설화로 인하여 오늘날까지 50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무탈하게 살아오고 또 앞으로 살아갈 것이다. 우리 조상들의 나무사랑을 설화로 옷을 입혀 보호한 지혜로운 삶에 감탄할 따름이다. 늘 느끼는 감정이지만, 노거수와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있고 싶어 떠날 때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고 몇 번이고 되돌아보곤 한다.노거수에 얽힌 설화들노거수에 대한 고사와 설화는 여러 유형으로 구분하여 이해할 수 있다. 징벌담(懲罰談)은 당산나무를 신성시해야 하고 제사를 소홀히 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으로 가장 대표적인 노거수 설화이다.영험담(靈驗談)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견하거나 인간에게 풍요를 가져다주고, 당산나무에 해를 가하면 울거나 혈흔을 나타내는 영험이 있다는 노거수 설화이다.동물담(動物談)은 노거수에 특정 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그 생물에게 위해를 가하면 천벌을 받는다는 설화이다. 동물담의 노거수 설화 속에는 뱀이 높은 빈도로 나타나고 있다. 뱀은 사탄과 같은 사악함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하지만, 당산집 또는 당산나무를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킴이 동물로도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3-06

해송숲 마른 수풀 위 겨울 햇살이 내려앉다

텅 빈 푸른 하늘 아래 겨울 바닷가 해변의 숲, 울진 월송정 숲을 찾아 걷는다. 겨울은 비움의 계절이다. 높고 넓은 파란 하늘도 텅 비었다. 하늘을 뒤덮은 뭉게구름도 볼 수 없다. 깊고 넓은 푸른 바다도 조용하다. 바다는 적막한 해변을 끊임없이 속삭이며 수만의 동굴을 배 불릴 뿐 해변을 삼킬 듯 성난 파도의 흰 물보라는 볼 수 없다. 금빛 모래밭 해변도 조용하다. 밀물처럼 밀려오던 피서객 인파도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하얀 모래만 햇볕에 반짝인다. 들판도 텅 비었다. 누렇게 익은 황금벌판의 벼들도 볼 수 없다. 수풀로 속이 꽉 찬 산도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휑하다. 자연은 모두 비우고 있는데, 우린 무언가 잃어버린 것 같이 허전하고 쓸쓸하여 그 무언가를 채우고 싶은 욕망에 몸부림친다. 도시 번화가의 뒷골목을 헤매고 때론 유명한 고적의 문화재와 관광지를 찾아 먹거리 볼거리 머물 곳을 찾지만, 이 모두가 우리 본연의 외로움을 채워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말초신경만 자극할 뿐 다음 날이면 후유증에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 이열치열이란 말이 있듯이 비움의 계절, 겨울에 우리 또한 비움으로 쓸쓸함과 그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울진 평해 월송리 겨울 바닷가 송림은 여름의 무더운 열기도 가을의 곱게 물든 단풍잎도 사라지고 텅 빈 나의 가슴을 채워줄 것이라고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어찌 생각해 보면 채우려면 비워야 하고 비워야 채워지는 법이 아닐까.지난 가을 이곳을 찾아 습지 생태 탐방길을 걸었다. 조류 탐조대에 올라 주변을 살펴보았을 때 사구습지 내 갈대와 마름의 싱싱한 자태는 사라지고 볼품없는 몰골만이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사구습지는 생태학적으로 유의미한 곳이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파도에 생성된 사구로 인하여 뒤쪽 배후에 습지가 생긴 것으로 그리 흔치 않다. 삭막한 사구습지가 강한 동류의식과 연대감으로 다가와 외로운 내 마음을 위무했다.해송으로 밀집된 숲속 마른 수풀 위로 겨울 햇살이 내려앉아 한낮의 오수를 즐기고 있다. 솔바람과 파도 소리가 정겹다. 맑은 하늘, 푸른 바다, 흰 모래밭, 늘 푸른 소나무 숲은 흐린 동공을 맑게 한다. 눈길을 끄는 화려한 물상들이 보이지 않으니, 생각의 샘물이 가슴을 적시며 온몸을 타고 흐른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나 할 것 없이 너무 많은 것들에 대해 걱정하고,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미래의 행복을 꿈꾸면서 현재의 몸과 영혼을 파괴하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본다, 있다면 지금 멈추어야 한다. 지금을 최고의 멋진 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내려놓고 비울수록 더 많이 행복해질 것이다.미래만을 위해 달려가는 것도, 과거의 일들에 괴로워하는 것도 멈추어야 한다. 그래야만 시간적 여유와 마음의 평화를 가질 수 있다. 멈춤은 과한 욕망을 내려놓는 것이고 이것은 바로 비움에서 시작된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의 같은 시간대라는 평범한 진리를 왜 잊으며 살아갈까.숲을 빠져나와 바라보이는 곳에 팽나무 노거수가 있다기에 찾았다. 원추형의 팽나무가 느티나무 노거수와 이웃하여 살아가고 있었다. 팽나무와 느티나무 노거수는 소나무 숲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느티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었으나 팽나무는 아직 무명의 노거수로 서러움에 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느티나무 노거수보다 내가 무엇이 모자라는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팽나무 노거수는 가지가 조화롭게 뻗어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 여름에 잎이라도 무성히 있다면 정말 풍성해 보일 것이다. 겨울이라 잎을 떨군 채 앙상한 가지만 겨울바람에 회초리를 들고 허공을 삿대질하고 있다. 하늘에 무슨 원한이 있길래 바람이 불 때마다 회초리를 휘두르는지 모르겠다. 옆에서 푸른 대나무가 함께 소리를 지른다. 응원의 함성이런가. 송림 속에는 멋진 소나무가 숨어 있었다. 이곳 팽나무가 있는 송림과 월정리 생태 습지 숲, 월송정을 연결하여 멋진 풍광을 연출하면 관광자원으로 최상의 자원이 될 것 같다. 사계절 테마 여행길로 안성맞춤이란 생각이 들었다. 관동팔경 중의 하나인 월송정 송림은 입구에서부터 소나무 노거수가 도열해서 맞이했다. 월송정은 여름이면 많은 피서객이 찾아온다. 지금은 텅 비어 허허롭기까지 하다. 월송정에 올라 푸른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겨울 바다 풍경의 분위기에 젖어 들었다. 하늘과 바다가 입맞춤하고 있다. 무슨 사랑의 말을 주고받을까. 아니면 무언으로 애무만 할까. 먼 파도가 밀려와 소리만 지르다 사라진다, 생과 사가 끝없이 이어지는 파도에 묘한 감정이 이입된다. 사라지면 또 새로운 것이 나타나기를 수없이 반복하고 있다. 하늘은 바다를 품고 바다는 하늘을 떠받들고 있다. 월송정 송림 사이로 밤에는 달이 스며들어 잠들고, 낮에는 햇살이 스며들어 한낮의 오수를 즐긴다. 월송정에는 옛 시인묵객이 써 놓은 액자가 걸려 있었다. 아마 월송정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노래였으리라.숲속 흙길을 걸으면 불안감과 우울증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말이 생각났다. 현대인 질병의 원인은 잘못된 생활 습관과 과중한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다. 숲속의 맑은 공기는 우리의 피를 맑게 한다. 맑은 피는 질병을 막아주고 피로를 풀어준다. 발바닥 작은 신경을 자극하여 시각, 후각, 촉각 등 오감이 작동한다. 피트니스 클럽의 러닝머신보다 흙길을 걷는 것이 건강에 더 좋다. 흙냄새는 흙 속 미생물인 방선균이 만들어 내는 휘발성 물질인 지오스민의 냄새로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지오스민은 숲속 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처럼 심리적 안정을 주는 효과가 있다. 숲은 박테리아와 흙에서 사는 진균류, 나무 등에서 휘발성 테르펜 등 다양한 향기를 뿜어내는 고유한 냄새의 보고이다.이런저런 이유로 숲에서 비전 퀘스트를 하면 좋을 것 같다. 비전 퀘스트란 자신을 깨닫고 비전을 찾으려는 현대인의 육체적 영적인 숲 여행이다.미국 환경심리학자 카플린(kaplan)은 ‘비전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것을 글로 적고, 관찰하고, 숲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또 황혼의 하루해가 서산에 저물면 숲속의 바람 소리와 함께 나즐로(나 홀로 즐겁게) 여행의 발걸음도 멈춘다. 나그네와 숲은 어둠 속에 잠이 든다. 욕망에 몸부림치던 영혼도 겨울의 비움을 깨닫고 봄을 기다리며 함께 평화롭게 잠이 든다. 습지(濕地)란 뭘까지구상에서 가장 영양물질이 풍부한 생태계다. 각종 생물의 서식지다. 특히 미생물 및 유기물이 풍부하다. 일반적인 습지의 기능을 보면 수질 정화, 지하수 저장, 침식조절, 생물종 서식처, 산란처 제공, 교육 학습 장소 제공, 홍수 범람원 방지, 물질 생산 등이다.람사르 협약에서는 습지의 물리적, 생물학적, 화학적 구성요소, 토양물, 식생, 동물간의 상호작용으로 물 저장, 홍수 억제, 호안의 안전성 확보, 침식조절, 지하수 보충 및 유지, 수질 정화, 기후 환경적 안정화 등 생태와 환경에 유익한 기능을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특히 사구습지는 세계적으로 그리 흔치 않은 습지로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2-28

발길 닿는 곳마다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문화유산

경주 천군동 신라인들이 인공으로 조성한 고양수(高暘藪)를 지난 가을 햇덧에 찾아 해껏 돌아다녔다. 고양수 숲은 오늘날 황성공원으로 개명하여 울창한 참솔 수림으로 시민의 문화, 체육, 휴식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신라 천 년의 수도 경주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적인 역사문화 도시다. 도시 전체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유일한 곳이다. 눈길 가는 곳마다 발길 닿는 데마다 문화재로 가득 찬 노천 박물관이다. 석굴암,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첨성대 등 다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로 명품 문화재가 많다. 그중에서도 남들이 무어라 하던지 나는 살아 숨 쉬는 황성공원의 옛 이름인 ‘고양수’를 제일의 문화재로 올려놓고 싶다. 진흙 속의 진주처럼 고양수 숲이 품은 노거수는 숨겨진 문화유산의 진수가 아닐까. 신라 경주는 숲의 도시였으리라. ‘삼국유사’에 천경림(天鏡林), 신유림(神遊林), 계림(鷄林), 나정(蘿井) 숲, 고양수(高暘藪) 등 숲 이름이 등장한다. 그중 고양수는 경주 형산강 들판의 넓은 평지에 조산을 만들고 나무를 심어 조성한 숲이다. 숲을 조성하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오로지 시민의 울력으로 나무를 심고 물을 주며 풀을 베는 작업은 예삿일이 아니다. 오늘날 공원 조성처럼 시민의 건강과 휴식을 제공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숲을 조성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옛날 우리 조상들은 숲을 성소로 여겼던 만큼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로 서낭나무, 당산나무라 하였다. 이처럼 나무와 숲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았기에 오늘날까지 유산으로 남아 우리를 품고 있지 않나 싶다.고양수 숲은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등 다양한 수종의 노거수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주류는 참나무와 소나무로 구성된 참솔 숲이다. 참솔. 그 이름만으로 힐링이 된다. 다람쥐, 청설모가 도토리를 찾고 있다. 소쩍새, 꿩, 뻐꾸기가 숲속 나뭇가지 위에 둥지를 틀어 살아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잠자리, 나비, 메뚜기, 딱정벌레, 말똥구리, 장수풍뎅이, 사슴벌레, 매미 등 수많은 곤충과 미생물이 함께 작은 생태계를 이루며 살고 있는 생명의 숲이다. 신라인의 생명을 존중하는 자연관을 엿볼 수 있다. 함부로 살생하지 말라는 화랑도 ‘세속오계’가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상이 아닌 숲에서 자연 발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숲의 참나무는 다양한 모습으로 눈길을 끈다. 참나무는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갈참나무, 떡갈나무 등 수종이 다양하다. 몸매가 날씬한 상수리나무가 어찌 배불뚝이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굴참나무 보굿은 아버지 손등을 연상하게 하여 연민의 정을 느낀다. 숲의 소나무는 즐비하게 들어서서 서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진선미를 겨루고 있다. 진선미를 골라 몸매의 아름다움을 카메라 렌즈에 담고 가슴에도 담았다. 숲의 느티나무는 괴목(槐木)이라는 이름으로 옛날에는 삼공의 벼슬자리에도 올랐다. 오늘날에는 새천년 밀레니엄 나무로 국민의 선택을 받아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몸에서 무한한 힘을 느낀다.난분분한 나뭇잎들이 만추의 스산함을 더하고 있다. 숲은 세월이 빚어 놓은 예쁜 잎과 잘 익은 열매를 내려놓고 꽉 찬 공간을 비우고 있다. 비워야 또 채울 수 있다는 자연의 섭리를 따르고 있다. 그것이 춥고 삭막한 겨울을 지내기 위한 최선의 방편일 지도 모른다. 또다시 만화방창한 봄이 되면 숲은 새 희망의 꿈을 꽃피우겠지. 그때도 나 또한 이곳을 찾아 환호작약 하리라. 숲속 황톳길을 시민들이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걷고 있다. 천천히 또는 빠르게 황톳길을 걷고 있다. 잔잔한 웃음 띤 얼굴에는 거친 숨소리도 들린다. 나도 따라 걸어본다. 묘한 발바닥 촉감에 신경이 곤두선다. 모든 감각 기능을 총동원하여 숲속을 걷는다. 건강에 좋다고 하니 기분이 덩달아 좋아진다. 비용도 들지 않고, 계절에 구애됨도 없고, 신체에도 무리가 가지 않아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이다. 숲은 배움의 장이며 심신 수련장이란 생각이 든다.오늘날 인간의 수명이 늘어남으로 건강 문제는 삶의 질적인 문제와 직결된다. 환경이 옛날과 같지 않게 오염돼 건강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정신적 스트레스가 더 많은 질병을 유발하고 있다. 숲과 나무는 우리 몸속의 병원균을 죽이고 정혈작용으로 혈액순환이 잘되게 한다. 오늘날 숲의 사계절 체험은 우리 몸을 치유하는 대체의학으로 아로마 치유, 명상 치유, 자연 치유 등으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숲은 스트레스를 줄이고, 웰빙의 최적 장소가 아닐까. 숲은 병원이며 명의란 생각이 든다.숲속을 걷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맑은 것이 흐린 것의 근원이 되고, 움직이는 것은 고요한 것의 터전이 된다고 한다. 숲속은 맑고 고요하며 어찌 보면 순간순간 아름다운 꽃과 같다. “영혼이 피로하거든 산으로 가라”고 한 어느 독일 시인의 말이 생각난다. 숲은 조금도 숨기지 않고 흉허물 없이 대할 수 있다. 초목의 행복은 빛에 있다. 나무와 숲은 빛을 섭취하고 하늘로 무럭무럭 뻗어나간다. 우리의 행복은 사랑에 있다. 사랑에 물들면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슬픔과 외로움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숲의 요소들은 동물, 식물, 경관이다. 풋풋하고 신선한 신록의 봄 숲, 싱그러운 녹음이 우거진 여름 숲, 단풍이 곱게 물던 가을 숲, 고요와 적막이 감도는 겨울 숲, 사계절 내내 우리에게 평화와 안식을 선물한다. 신라 고양수 자연의 숲이 만신창이로 변해가고 있다. 숲 사이 아스팔트길은 숲을 파편화시키고 미생물을 감옥에 가두었다. 변하는 공원의 동물과 새, 곤충 등 뭍 생명체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떠나거나 떠날 채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경기장에서 지르는 함성에 장수풍뎅이는 그만 놀라 땅으로 곤두박질을 친다. 운도 지독히 없는지 지나가는 취객의 비틀걸음에 밟혀 소리도 못 지르고 세상을 하직한다.상수리나무는 비닐봉지 쥔 사람의 무차별적인 발길질에 다람쥐와 약속한 마지막 몇 알의 도토리도 못 지키고 그만 손을 놓는다.다람쥐는 공원 숲을 빠져나가는 비닐봉지 속 도토리만 애처로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숲의 나무는 동물, 곤충, 미생물의 생활 터전이고 그들의 집이다.황성공원이 아닌 신라 천년의 고양수란 숲이 그립다. 태초에 인간은 숲에서 출현하여 숲에서 살다가 또다시 숲으로 돌아간다는 자연의 섭리를 신라인은 이미 깨달은 것일까. 숲과 노거수가 더는 훼손되거나 줄어드는 일이 없기를 희망해 본다.‘고양수’라는 이름의 숲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이름이 바뀌면 규모와 성질도 변한다. 숲의 주인 나무를 쫓아내고 그곳에 주민센터를 비롯해 공설운동장, 충혼탑, 동상, 시비, 실내체육관, 시립도서관, 호림정, 테니스장, 롤러스케이트장, 씨름장, 레포츠공원, 게이트볼장 등이 들어섰다. 원래의 규모에서 70%가 줄어 30%만 겨우 숲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숲이 붕대를 감고 숨을 헐떡이며 누워 있는 느낌마저 든다. 누구도 치료해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 고양수가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 이 정도라도 형상을 유지하며 보존돼 있다는 것도 다행일까./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2-21

천하명당 찾다 희생된 영혼 지키는 ‘무송’

말 무덤과 노비 무덤을 지키는 춤추는 무송 노거수는 문경시 동로면 적성리 965번지 황장산 자락의 도로변에 살아가고 있다. 소나무가 춤추는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무송(舞松)이라 이름을 짓고 그곳을 무송대(舞松臺)라 하였다.무송대 거대한 바위 위에 마총(馬塚·말 무덤)과 노총(奴塚·노비 무덤)이 무송(舞松·춤추는 소나무) 노거수가 삼각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 말 무덤 앞에는 마총이라는 작은 비석과 노비 무덤 앞에는 노총이라는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어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다,소나무 노거수 앞에는 무송대(舞松臺)라는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무덤의 영혼이 소나무로 화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굵은 가장이에서 뻗어 나온 붉은 나뭇가지가 용수철같이 몇 번이나 굽혀진 모습에서 응집된 힘을 느낄 수 있다. 이곳 무송대는 풍수지리설 연주패옥(聯珠佩玉) 형세에 관련된 전설이 있다. ‘1592년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조선에 온 명군의 부장 두사충(杜思忠)은 당시 명성이 높은 풍수지리학자로서 조선에 귀화한 사람이다. 그가 조선의 팔대명당(八大明堂) 가운데 하나라고 전하는 연주패옥을 문경시 동로면 적성리에서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벽제관(碧蹄館) 전투의 패전으로 문책을 당하게 되었으나 약포(藥圃) 정탁(鄭琢) 대감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게 되었는데, 은혜를 입은 대가로 연주패옥의 명당을 정탁 대감의 신후지지(身後之地·살아있을 때 미리 잡아둔 묏자리)를 이 일대에 잡아두고 묘지로 사용토록 그 위치를 정 대감의 심복인 말을 돌보는 머슴에게 가르쳐 놓았다. 그 후 정탁 대감은 천하의 명당 연주패옥을 자기 아들에게 찾아보도록 그 위치를 알고 있는 머슴과 함께 문경으로 내려보냈는데, 현 위치에 이르러 그 명당의 위치가 어디냐고 머슴에게 묻자, 타고온 말이 갑자기 뒷발질하여 머슴이 즉사하고 말았다. 천하의 명당을 잃게 된 아들은 화가 나서 말의 목을 베어 이곳에 묻고 머슴도 말의 무덤 옆에 묻어주었다.’명당에 묻히려다 애마도 충복 노비도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연에 가슴이 아렸다. 지금도 이 명당을 찾으려는 풍수가가 있다고 한다. 죽어서도 후손들에게 벼슬을 내려주고 싶은 조상의 마음이야 이해할 수 있다지만, 오늘날에까지 명당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심지어 돌아가신 조상을 잘 모셔야 한다면서 설, 추석 명절에 제사 음식 준비와 집안 손님맞이로 맏며느리들이 심한 후유증을 겪는다고 한다. 이는 죽은 조상이 산 후손을 괴롭히는 것이다.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를 물리친다는 삼국지 역사소설을 읽은 적은 있지만, 죽은 조상이 산 후손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일은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예전에 한 스님이 다비식에서 타들어 가는 장작더미 불꽃을 바라보면서 장례문화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인도에는 마지막 인생을 출가하여 살면서 천상에 태어나기 위해서 신의 강인 갠지스강에 목욕하러 간다고 했다. 그곳에서 죽으면 화장할 때 돈이 많고 적음에 따라 시체 태우는 장작 수가 결정되지만, 그렇다고 돈을 많이 벌려고 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외국 관광객은 잘못 알고 거지로 오인하기도 한다고 했다. 인연에 따라 살면서 장작 수가 적어 시체가 일부 타지 않고 남아있으면 강에 던져 물고기의 밥이 되어 사라진다고 했다.어떤 나라는 조장(鳥葬)의 풍습이 있어 사람이 죽으면 칼질해 산에 갖다 놓는다고 했다. 그러면 독수리가 달려들어 10여 분 만에 사체 살점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기를 기다렸다가 남은 뼈는 수습하여 갈아서 주먹밥을 만들어 던져놓으면 독수리들이 받아 삼킨다고 했다. 남은 해골은 가져와 바가지로 사용한다고 했다. 어떤 지역에는 개장(犬葬)의 풍습이 있어 사람이 죽으면 사찰 주변에 시신을 던져놓으면 수십 마리의 개들이 달려들어 시체를 먹어 치운다고 했다. 외국 관광객이 개한테 물리어 항의하자 사찰 주변의 개들을 모두 사살한 사실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도 이런 풍습이 남아있다고 한다.시신 훼손과 같은 장례는 죽은 사람을 모독하는 것이 아닌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실제로 남미 페루를 여행한 적이 있었다. 우르밤바에서 마추픽추로 가는 도중에 들린 마을에는 집 안 선반 위에 조상의 해골을 모셔놓은 것을 보았다. 나에게는 소름이 끼치는 장면이지만, 그들에게는 일상생활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이 밖에도 나라마다, 지역마다 다양한 장례문화가 있다고 했다. 장례문화가 다른 것은 기후의 영향과 비용 때문이라고 했다. 땅에 묻어도 시체가 썩지 아니하는 지역에는 매장은 곤란하다고 했다. 문화야 어떻든 간에 죽음에 대하여 애도하는 마음은 똑같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보면 장례문화를 가지고 선진국이니 미개국이니 구분하고 차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스님은 부도를 만들에 안장한다고 했다. 우리의 장례문화도 많이 변했다. 묘봉을 만드는 매장보다는 화장하여 유골을 납골당. 수목장 등에 모시거나 산천에 뿌리기도 한다. 조상들이 명당이라고 하여 모신 산소가 벌초할 때면 뱀이나 벌에 쏘여 후손이 다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궁금하다. 옳고 그름의 문제이기보다 장례문화의 변화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명당을 찾는다고 산의 나무를 베어내거나 땅을 훼손하는 일은 환경보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무송 노거수는 수령 340년이라고 하나 연주패옥 명당 이야기를 보면 지금으로부터 432년 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니, 나무의 나이는 400년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큰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린 것으로 보아 다른 노거수보다 자람이 더디었다. 20여 년 전 노거수의 키 8m, 가슴 높이 둘레 2.5m, 수관 폭 14.5m가 지금도 그때의 크기와 별다르지 않았다. 말과 머슴의 무덤을 만든 후 소나무를 심었든지 아니면 그 후 황장산 소나무 솔씨가 바람에 날아와 자연 발아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주민들이 보호하여 온 것만으로도 민속 문화적 가치가 있는 소나무 노거수이다. 고도 359m, 위도 36.775994, 경도 128.289548 있는 무송 노거수 품격을 높여주면 어떨까.명당으로 희생된 충성스러운 말과 머슴의 영혼을 지키는 춤추는 무송 노거수가 건강하게 오래도록 살아가기를 기원한다. 연주패옥의 명당 이야기를 보면서 명당은 형이하학적인 땅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조상의 은덕과 삶을 추모하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했다.연주패옥(聯珠佩玉) 형세란…선녀인 옥녀가 화장하기 위하여 거울을 보며 목걸이를 벗어놓은 형세를 가진 곳에 산소를 쓰면 옥관자(玉貫子) 서 말, 금관자(金貫子) 서 말이 나온다는, 즉 벼슬한 사람이 많이 태어난다는 명당을 말한다. 옥관자(玉貫子)는 조선 시대 옥을 재료로 하여 망건의 당줄을 꿰게 만들어 달던 작은 고리. 금관자(金貫子)는 망건(網巾)에 부착된 금으로 된 작은 고리로, 당줄을 꿰어 걸어 넘기는 구실을 한다. 조선 시대 정2품, 종2품 관리가 사용하였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2-14

한 몸처럼 얽히고설킨 ‘사랑나무’ 연리지

질풍노도의 청소년 시절 앞날이 궁금했다. 혈기 왕성한 때라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으나, 가난이라는 궁핍과 시골 농촌의 힘든 농사일의 굴레가 몸과 마음을 묶어 놓았다. 유년 시절 집안 농사일을 도우며 함께 뛰어놀던 동네 형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둘씩 도시로 살길을 찾아 떠났다.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마을 사람도 알음알음으로 시골 농촌을 떠났다. 청소년 시절 그믐날 감감한 밤을 걷는 기분으로 방황하고 있을 때이다. 팔만대장경에 답이 있다면서, 깨달음을 얻은 스님은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고향 청도 호거산 운문사를 찾았다. 운문사(雲門寺)는 신라 진흥왕 527년에 한 신승이 3년간 수도하여 깨달음을 얻은 후, 다섯 곳에 절을 창건하였는데, 그중 대작갑사가 현 운문사이다. 600년 신라 원광 국사가 귀산과 추항 두 화랑에게 세속오계를 전수한 곳이기도 하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원동력이 되었다. 1277년 일연 스님이 주지로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집필하여 우리의 고대 역사를 5천년의 역사로 끌어올려 놓았다. 현재는 승가대학과 대학원이 개설되어 전국 최대 규모의 비구니 교육 도량으로 자리매김한 고찰이며 명찰이다.소문만 듣던 운문사는 산중에 숨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을 앞을 흐르는 동창천의 발원지를 따라 이어지는 꼬불꼬불한 길은 끝도 없이 연속되었다.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맡긴 채 창밖의 풍경에 눈길을 보내면서 나의 미래를 그려 보았다. 버스 종착 정류장에 내려 숲이 무성한 솔밭 길을 한참 걸었다.숲속 시원한 솔바람이 목덜미를 핥고 지나갔다. 마침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고즈넉한 숲속에 웅장한 절이 나타났다. 댓바람에 주지 스님이 묵는 곳을 찾아서 막무가내로 주지 스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졸랐다. 재무 스님이라는 젊은 여 스님이 가로막았다. 스님이 머무르는 도량이니 못 들어간다고 했다. 그냥 물러설 수는 없었다. 몸으로 밀치고 들어갔다. 어쩔 수 없는지 주지 스님이 계시는 방으로 안내했다. 주지 스님을 기다리는 동안에 별의별 생각이 떠올랐다. 부자가 될 것인지, 높은 사람이 될 것인지, 성공할 것인지, 궁금한 것도 많았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 주지 스님이 들어왔다. 생각을 멈추고 주지 스님을 톺아보았다. 인자하고 엄숙해 보였다. 일어나서 공손하게 큰절을 올렸다. 주지 스님께서 놓여진 과자를 먹으라고 했다. 먹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이었다. 용기를 내어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저의 손금을 좀 보아주세요”라고 했다. 주지 스님께서는 “손금 볼 줄 모릅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또 얼굴을 내밀고는 “저의 관상을 보아주세요”라고 했다. 주지 스님께서는 “관상을 볼 줄 모릅니다”라고 했다. 제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앞으로 성공할 것인지 봐 달라고 했다. 주지 스님은 또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 주지 스님께서는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반문했다.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 질문이다. 그야말로 어이가 없는 질문이다. 나의 이러한 부끄러운 언행에 주지 스님은 얼마나 당혹스럽고 황당하였을까? 그러나 주지 스님은 조금 뜸을 들인 후 조용히 말씀하셨다. “젊은이, 젊은이의 앞날 인생은 손금에도 관상에도 나타나 있지 않아요”라고 했다. 나의 앞날을 점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하나로 여기까지 왔는데, 실망의 눈길로 주지 스님을 바라보았다. 이제 일어나 돌아가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일어서려 했다. 그러자 주지 스님은 “젊은이, 젊은이 앞날의 운명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어요, 자신의 앞날은 자신이 개척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자신이 쓴 불교에 관한 서적을 내게 주면서 한번 읽어보라 했다. 그 주지 스님은 안말례 스님이었다.원하는 답을 듣지 못한 채 인사를 드리고 물러났다. 올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웅장하고 아름다운 소나무가 눈길을 끌었다. 늘 푸른 솔잎이 햇살에 반짝이며, 바람에 출렁이며 춤을 추었다. 이런 거대하고 아름다운 소나무가 절 마당의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니 놀랍기만 했다. 우산처럼 늘어뜨린 푸른 솔가지 잎 사이로 붉은빛을 띤 근육질의 몸통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고 나무 밑으로 들어갔다. 동서남북으로 뻗친 줄기가 우산살처럼 사방으로 늘어뜨려져 있었다. 우산살이야 일정한 간격으로 짜져 있지만, 솔의 가지는 얽히고설킨 모양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두 나뭇가지가 만나 하나의 몸이 되었다. 그때는 신기한 것으로만 여기고 몰랐지만, 사랑과 효의 나무라 하여 모두가 귀히 여기는 소나무 연리지였다.소나무도 스스로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연리지로 만드는 능력이 있는데, 이는 그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는다. 단지 도움을 받았다면, 공간과 세월이라는 자연이었다. 공간과 세월은 우주의 바탕인데 이는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고 그렇다고 누구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불변의 진리이다. 미래의 인생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석가모니도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경이로운 소나무 품속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가슴에 품고 온 책을 밤새도록 읽고 또 읽었다. 반야심경을 이해하고, 읽다 보니 개경계를 외우게까지 되었다.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隅), 아금문견득수지(我今聞見得修持),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意)-끝없이 심히 깊은 미묘한 법은 백천만겁 만나기 어려우니, 이제 보고 듣고 배우니, 부처님의 진실한 뜻 바로 알기 원하노라-.그로부터 50여 년이 훌쩍 지나 운문사를 찾았다. 많은 신도와 관광객이 찾아와 처진 소나무 노거수를 보고 감탄을 자아내었다. 소원을 빌기도 하고 소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촬영하기도 했다. 나에게는 아름다움보다 자신감과 자신을 찾게 해준 스승 같은 신령스러운 나무다. 방황을 끝나게 해준 나무에 경배했다. 운문사 처진 소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되었다. 키가 6m, 둘레가 3.5m, 수관 폭은 24m로 키의 4배나 된다. 나무의 키에 비해 수관 폭이 이렇게 넓은 소나무 노거수는 아마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보기가 드물 것이다. 매년 봄에 비구니 스님들은 막걸리를 소나무 뿌리 주변에 뿌려주고 있다.원광 국사의 화랑도 세속오계의 이름을 따서 처진소나무를 화랑송(花郞松)으로 부르면 어떨까. “젊은이, 젊은이 앞날의 운명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어요, 자신의 앞날은 자신이 개척하는 것입니다”라고 한 주지 스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는 듯 지난 추억이 아삼아삼하다. 화랑송 노거수를 자주 찾아가 볼 수 없지만, 주지 스님이 한 말씀은 내 가슴속에 남아 미래를 설계하고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다.원광국사의 화랑도와 세속오계운문사는 원광국사가 일생의 좌우명을 묻는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를 주었다고 하는 역사적인 절이다. 사군이충(事君以忠),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고, 사친이효(事親以孝), 효로써 부모를 섬기고, 교우이신(交友以信),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고, 임전무퇴(臨戰無退), 싸움에서 물러서지 말고, 살생유택(殺生有擇),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일 때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는 게 바로 세속오계다.화랑도의 세속오계는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성취하는데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리고 고려왕조의 항몽 정신과 조선왕조의 의병 정신, 대한제국의 독립 정신으로 이어져 불굴의 민족정기로 자리매김해 오늘날에 이어지고 있다. 혈기 왕성한 청소년 시절에 배우고 터득한 정신은 일생의 버팀목이 된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2-07

산줄기 바위 움켜잡고하늘로 용솟음 치는비천하는 청룡의 자태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포항 계원리는 대숲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는 아담한 항구마을이다. 520살 용송 노거수가 응회암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리고 마을 터줏대감으로 살아가고 있다기에 선바람에 찾아 나섰다. 괭이갈매기는 항구 뱃머리에 앉아 따스한 햇살에 날개를 말리고, 늙은 어부부부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따고 있는 풍경이 참으로 정겹다. 그때 한 점의 바닷바람이 일어 한낮의 정적을 깨고 뱃머리 태극기가 펄럭인다. 괭이갈매기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탐하고 물고기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파닥인다. 어부가 손에 든 빨간 고무대야는 시나브로 물고기로 가득 찼다. 어부 곁에서 물고기를 구경하던 아이들이 저 멀리 할머니의 고함에 쏜살같이 방파제로 달려간다. 할머니의 낚싯대에 매달린 물고기가 공중에 날아올랐다. 방파제에 앉아 불을 피우고 냄비에 채소를 썰어 넣고 있던 아들과 며느리가 눈길을 주는가 싶더니, 대수롭지 않은 듯, 하던 일을 계속한다. 물고기 매운탕 요리를 할 모양인 것 같다. 할머니 가족의 행복한 분위기를 깨트릴 것 같아 멀찌감치 바라보다 용송으로 발걸음을 향했다.언덕 위 용송 노거수는 몸에 금줄을 두르고 있었다. 금줄은 마을 수호신 당산목으로 제사를 받는 경배의 나무이니 함부로 손대지 말라는 금지의 표시이기도 하다. 외모는 꿈틀거리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용의 모습 같아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우람한 근육질의 몸통 줄기에서 뻗은 나뭇가지는 하늘이 아닌 땅으로 향하고 있다. 그중 한 줄기의 나뭇가지는 땅에 닿다시피 자라다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함을 알아차렸는지 방향을 바꾸어 수평으로 자라고 있다. 눈이 있고 생각을 하는 것 같아 노거수에 영혼이 깃든 듯한 느낌을 받았다.하늘에서 여름 폭우로 마을을 물바다로 만들고, 겨울 폭설로 마을 고샅길을 메우면 주민은 난리 북새통이다. 그러나 용송 노거수는 폭우로 몸을 씻어 더욱 푸름을 자랑하고 폭설로 눈꽃을 피워 아름다운 모습을 뽐낸다. 그저 하늘에 감사하며 붉은 태양을 쳐다보면서 살아간다. 바다를 향한 산줄기 언덕 바위를 움켜잡고 꿈틀거리며 용솟음치는 늘 푸른 용송은 비천하는 청룡의 모습이다. 한 번쯤은 기도 꺾이고 시르죽을 뻔한데도 꿈틀거리며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자태는 무한한 에너지와 함께 자강의 삶을 느끼게 한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수백 년을 주민과 동고동락하며 살아가고 있는 신령한 용송 노거수는 철인이란 생각이 든다.조선 시대 중앙 관료들 중에는 죄를 짓거나, 권력 싸움에 밀려나거나, 간신배들의 모함으로 이곳 장기로 유배와 귀양살이를 한 이들이 적지않다. 그들은 임금님이 있는 한양을 그리워하고 억울함을 글이나 시로 표현하며 소견세월 했다. 바다를 바라보면서 자신을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눈앞에 펼쳐지는 하늘과 바다, 산은 우리 삶의 현장이며 터전이다. 그러나 고마움보다 원망의 눈으로 대하는 경우가 많다. 하늘의 날씨가 덥다고 불만이고 춥다고 불평한다. 바다가 거칠다고 불평하고 안개가 끼었다고 불만이다. 그렇다고 하늘과 바다는 우리의 불만과 불평이나 원망을 들어주지 않는다. 용송의 삶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면 그들의 삶이 크게 달라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어촌마을에서 용왕에게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건 드물지 않은 일이다. 고요한 바다도 때로는 성난 파도로 돌변하여 고깃배를 침몰시키고 어부를 바다에 수장하기도 한다. 부모를 잃은 자식, 자식을 잃은 부모, 또 이들 형제자매들의 슬픔의 고통을 누가 겪어보지 않고 알 수 있을까. 파손된 고깃배야 또다시 만들면 되지만, 잃은 가족은 다시 돌아올 수 없으니 그 애통한 심정은 이루 말 수 없을 것이다. 바다는 생활의 터전이지만, 언제 또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몰라 늘 두려움의 대상이다.사람은 죽으면 선산의 땅에 묻혀 구천에서 가족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지만, 어부가 바다 위에서 뜻밖의 재난을 당하여 죽으면, 아무도 찾아올 수 없는 바다에 묻혀 심해를 떠도는 영혼이 되고 만다. 주민들은 용송에 희생된 이들의 영혼이 용궁에서 편안한 안식과 이런 불행한 일이 앞으로 일어나지 않기를 비는 제를 올린다. 이뿐만이 아니다. 용송은 주민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구심점이며, 또한 마을의 평화와 풍어를 기원하는 수호신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고 삶에 위안이 된다면 이 또한 미신이 아니라 민속문화로 어촌 주민들의 생활 방편이다.아주 어릴 때이다. 어머니는 나에게 태몽을 꾼 이야기를 해주었다. “밝고 둥근 보름달을 내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용띠의 해에 너를 낳았다. 너는 커서 보름달처럼 빛이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었다.그로부터 보름달은 유난히도 크고 밝아 보였다. 하늘과 바다가 입맞춤하는 수평선에서 찬란히 빛나는 해와 달의 기운과 아름다움을 가슴에 담고 살았다. 새해 해맞이와 정월 대보름 달맞이는 평소와 같은 해와 달일지라도 느끼는 감정은 달랐다. 새해 아침 해돋이와 정월 보름달 맞이를 하면서 소원을 빌었다. 그때마다 어머니가 하신 태몽 꿈을 생각하고 꼭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 굳게 믿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걸 믿었다는 내가 우습기도 하다. 그러나 가난을 벗어던진 것만으로 절반의 성공은 거두지 않았나 싶다.신라 문무왕은 죽어 동해의 용왕이 되어 나라 앞바다를 지키겠다고 했다. 혹여나 문무왕의 영혼이 용송으로 옮겨오지는 않았는지. 등대처럼 바다를 바라보며 어촌을 지키고 바다에 희생된 어민의 영혼을 보듬어 주는 용송 노거수! 그 푸름이 만대에 이어지리라 믿어본다. 갑진년 청룡의 해를 맞이하여 늘 푸른 용송 노거수에 가족을 위해 바다에서 물질과 고기잡이하다 희생된 어민의 영혼을 위로하고 우리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해 보면 어떨까?/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1-31

하늘로 날아오를 듯 날개 펼친 이름 없는 소나무

경북 청송(靑松)은 늘 푸른 솔의 고장이다. 낙동정맥의 크고 작은 산줄기에 에워싸여져 함부로 범접하기 힘들다. 청송으로 처음 전근을 오거나 부임한 사람들은 산 고갯마루 길을 넘을 때마다 오지란 생각에 눈물을 흘리고, 청송을 떠날 때는 정들어 섭섭한 마음에 눈물 흘린다고 한다. 나 또한 그랬다. 청송이란 고장은 올 때도 떠날 때도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지금이야 산 고갯마루를 넘는 도로는 터널을 뚫어 빠르고 편하게 청송을 드나들 수 있지만, 그 옛날에는 산 고갯마루를 넘는 버스는 곡예사와 다름없었다.청송의 자연은 아름답다. 깨끗한 하천은 녹색의 산자락을 부여잡고 굽이굽이 돌면서 골골이 흐른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은 산마루에 걸터앉아 가던 길을 멈추고 숨결을 고른다. 맑은 공기, 깨끗한 물, 늘 푸른 솔, 산소 카페의 고장이다. 청송인은 예와 효뿐만 아니라 조선의 선비처럼 곧은 절개와 고결하고 순결한 성품을 닮기 위해 늘 송죽매난(松竹梅蘭)을 가까이하고 문예를 즐기며 좋아한다. 남북으로 가로지른 길 따라 아담한 마을에는 솔밭과 함께 옹기종기 고구마 줄기처럼 형성되어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청송읍 소재지에서 국도를 따라 영천으로 가다가 금곡리 도로변 무명의 소나무 노거수를 찾았다. 높은 언덕 위에 숨어서 살던 노거수가 우회도로가 생기면서 본의 아니게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접근할 길이 마땅찮아 절개된 풀숲 언덕을 기어올랐다. 사과밭을 지나 겨우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아직 무명이어서인지 나이, 키, 몸 둘레 등을 기록한 이름표도 없었다.많은 사람이 노거수 나이에 대해서 궁금해한다. 오래된 나무의 나이를 측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나무는 한 해에 하나씩의 나이테를 새기기 때문에 나이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살아있는 노거수 나이테를 헤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몸에 구멍을 뚫어 나이테 수를 세어 본다는 것도 해서는 안 될 짓이다. 나이테 측정기로 나무를 뚫어 본다고 해도 오래된 노거수는 속이 비어 나이테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이런저런 이유로 노거수의 나이를 정확히 측정하기는 힘들다. 기록이나 이웃 사람들의 이야기 등 다른 나무와 비교하거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나이를 측정할 수밖에 없다. 가장 궁금하게 여기면서 정확히 아는 것은 힘든 일이다.소나무 노거수의 나이는 알 수 없지만, 굵기와 수형에서 세월의 연륜을 느낄 수 있었다. 범상치 않아 보였다. 도로 옆 언덕 위에 푸른 하늘을 날아오르는 학의 날갯짓 모습이었다. 날으는 학이라 하여 비학송(飛鶴松)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눈옷을 입은 날이면 설송(雪松)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가까이 가서 보니 용송(龍松)이라 해도 좋을 것 같았다. 하늘을 향한 범상치 않은 가장이 모습이 용틀임하는 용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바라다보는 방향에 따라 비학송으로 보였다, 설송으로 보였다, 용송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나의 대상물이 다양한 모습으로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만이라도 비학송, 설송, 용송이라는 몇 가지 별호를 붙여주고 보호수라는 이름표를 달아주고 싶다.소나무 노거수는 잎의 녹색을 강조하기 위해 여름에 촬영한다고 하지만, 예외가 있구나, 청량한 하늘 아래 은세계의 비학송은 지상천하(地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다. 그림자로 보아 햇볕에 남아있는 솔가지의 잔설이 주변 경관과 조화롭다. 흰 눈으로 목욕한 녹색의 솔잎은 더욱 짙고 금방이라도 날갯짓하며 날아오를 것 같다. 아름다움은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편안하게 하고. 또한 기쁘게 한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아름다운 미를 창조하고 또 그것을 찾아 노래하고 있다.소나무 노거수는 고결하고 숭고한 모습으로 마음을 정결하게 해준다. 맑은 하늘 아래 소나무 노거수는 순결함을 자랑이라도 하듯 흰 눈옷을 입고 자태를 뽐내고 있다. 티 없이 맑은 모습은 아름답다기보다 맑고 순수해 고결한 품위를 갖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다. 바쁜 생활 속에 자신도 잃어버리고 경쟁 사회에 내몰려 허상을 쫓아다니느라 구정물에 몸은 더럽히고 허물에 마음은 주접이 든다. 설송을 보고 있으면 고결한 품성을 갖춘 사람으로 닮아가고 싶어진다. 소나무 노거수는 울퉁불퉁한 붉게 물든 근육질이 오른쪽을 돌면서 나선형 곡선을 이루고 있다. 근육질의 몸통이 하늘 높이 치솟으면서 붉게 물들고 솔가지는 용의 발톱을 하고 있다. 땅에 덮인 흰 눈에 대비된 종아리의 검은 근육질은 더욱더 검게 보인다. 몸통의 거북 등 껍질은 수백 년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연륜이 있어 보인다. 용은 상상의 동물로써 우리에게 무한한 힘과 용기, 가능성을 심어준다. 올해는 갑진년 청룡의 해이다. 청룡이 상징하는 행운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기원해본다.인공적으로 심어져 기른 것인지, 자연적으로 생육하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태풍에 의해 훼손될 수도 있고 낙뢰로 훼손될 수 있다. 송진이 많은 소나무는 낙뢰에 의하여 불이 붙으면 모두 타버린다. 독립적으로 생육하는 수목은 낙뢰와 태풍, 돌풍의 과도한 에너지의 집중으로 피해를 쉽게 입을 수 있다. 따라서 주변에 에너지를 분산할 수 있는 단목군 수준의 수림 조성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주변은 묘소가 있고 개인의 사과밭이 있어 그것도 어려울 것 같다. 도로변에서 접근할 수 있는 길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발자국만 남기고 떠나려니 미안한 마음이 앞서 두 팔 벌려 안아본다. 얼마나 덩치가 큰지 품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만수무강을 마음속으로 기원해 본다.노거수에 대해 뭐가 궁금한가요첫째, 수령이 얼마나 되었는지? 둘째, 크기와 수형은 어떤지? 셋째, 언제 누가 심었는지, 아니면 자생한 나무인지? 궁금증은 이처럼 크게 대별된다.노거수 안쪽 나이테 부분이 잘 썩어 정확한 수령 측정이 힘들다면 기록이나 이웃 사람들의 이야기 등 다른 나무와 비교하여 나이를 측정할 수 있다. 크기는 실제로 도구를 가지고 가슴 높이의 둘레 길이를 재어보면 된다. 이를 흉고 둘레라 한다. 수관 폭은 동서남북으로 뻗은 가지의 길이를 재어본다. 인공인지 자생한 나무인지는 기록을 통하여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로 알 수 있다.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특별한 일을 기억하기 위해 나무를 심었다. 옛사람들은 아들을 낳으면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었으며,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었다. 아들은 소나무처럼 사철 푸른 절개를 가진 선비가 되라는 의미였고, 오동나무는 딸이 시집갈 때 장롱을 만들어 주기 위해 심었다.소나무는 솔처럼 생긴 잎 모양새와 가마솥 설거지에 사용되었던 솔에서 유래한 이름이라 한다. 예전에는 솔방울로도 가마솥 설거지를 하였다. ‘솔’은 정감이 가는 이름이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