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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발길 닿는 곳마다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문화유산

경주 천군동 신라인들이 인공으로 조성한 고양수(高暘藪)를 지난 가을 햇덧에 찾아 해껏 돌아다녔다. 고양수 숲은 오늘날 황성공원으로 개명하여 울창한 참솔 수림으로 시민의 문화, 체육, 휴식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신라 천 년의 수도 경주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적인 역사문화 도시다. 도시 전체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유일한 곳이다. 눈길 가는 곳마다 발길 닿는 데마다 문화재로 가득 찬 노천 박물관이다. 석굴암,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첨성대 등 다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로 명품 문화재가 많다. 그중에서도 남들이 무어라 하던지 나는 살아 숨 쉬는 황성공원의 옛 이름인 ‘고양수’를 제일의 문화재로 올려놓고 싶다. 진흙 속의 진주처럼 고양수 숲이 품은 노거수는 숨겨진 문화유산의 진수가 아닐까. 신라 경주는 숲의 도시였으리라. ‘삼국유사’에 천경림(天鏡林), 신유림(神遊林), 계림(鷄林), 나정(蘿井) 숲, 고양수(高暘藪) 등 숲 이름이 등장한다. 그중 고양수는 경주 형산강 들판의 넓은 평지에 조산을 만들고 나무를 심어 조성한 숲이다. 숲을 조성하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오로지 시민의 울력으로 나무를 심고 물을 주며 풀을 베는 작업은 예삿일이 아니다. 오늘날 공원 조성처럼 시민의 건강과 휴식을 제공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숲을 조성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옛날 우리 조상들은 숲을 성소로 여겼던 만큼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로 서낭나무, 당산나무라 하였다. 이처럼 나무와 숲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았기에 오늘날까지 유산으로 남아 우리를 품고 있지 않나 싶다.고양수 숲은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등 다양한 수종의 노거수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주류는 참나무와 소나무로 구성된 참솔 숲이다. 참솔. 그 이름만으로 힐링이 된다. 다람쥐, 청설모가 도토리를 찾고 있다. 소쩍새, 꿩, 뻐꾸기가 숲속 나뭇가지 위에 둥지를 틀어 살아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잠자리, 나비, 메뚜기, 딱정벌레, 말똥구리, 장수풍뎅이, 사슴벌레, 매미 등 수많은 곤충과 미생물이 함께 작은 생태계를 이루며 살고 있는 생명의 숲이다. 신라인의 생명을 존중하는 자연관을 엿볼 수 있다. 함부로 살생하지 말라는 화랑도 ‘세속오계’가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상이 아닌 숲에서 자연 발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숲의 참나무는 다양한 모습으로 눈길을 끈다. 참나무는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갈참나무, 떡갈나무 등 수종이 다양하다. 몸매가 날씬한 상수리나무가 어찌 배불뚝이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굴참나무 보굿은 아버지 손등을 연상하게 하여 연민의 정을 느낀다. 숲의 소나무는 즐비하게 들어서서 서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진선미를 겨루고 있다. 진선미를 골라 몸매의 아름다움을 카메라 렌즈에 담고 가슴에도 담았다. 숲의 느티나무는 괴목(槐木)이라는 이름으로 옛날에는 삼공의 벼슬자리에도 올랐다. 오늘날에는 새천년 밀레니엄 나무로 국민의 선택을 받아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몸에서 무한한 힘을 느낀다.난분분한 나뭇잎들이 만추의 스산함을 더하고 있다. 숲은 세월이 빚어 놓은 예쁜 잎과 잘 익은 열매를 내려놓고 꽉 찬 공간을 비우고 있다. 비워야 또 채울 수 있다는 자연의 섭리를 따르고 있다. 그것이 춥고 삭막한 겨울을 지내기 위한 최선의 방편일 지도 모른다. 또다시 만화방창한 봄이 되면 숲은 새 희망의 꿈을 꽃피우겠지. 그때도 나 또한 이곳을 찾아 환호작약 하리라. 숲속 황톳길을 시민들이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걷고 있다. 천천히 또는 빠르게 황톳길을 걷고 있다. 잔잔한 웃음 띤 얼굴에는 거친 숨소리도 들린다. 나도 따라 걸어본다. 묘한 발바닥 촉감에 신경이 곤두선다. 모든 감각 기능을 총동원하여 숲속을 걷는다. 건강에 좋다고 하니 기분이 덩달아 좋아진다. 비용도 들지 않고, 계절에 구애됨도 없고, 신체에도 무리가 가지 않아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이다. 숲은 배움의 장이며 심신 수련장이란 생각이 든다.오늘날 인간의 수명이 늘어남으로 건강 문제는 삶의 질적인 문제와 직결된다. 환경이 옛날과 같지 않게 오염돼 건강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정신적 스트레스가 더 많은 질병을 유발하고 있다. 숲과 나무는 우리 몸속의 병원균을 죽이고 정혈작용으로 혈액순환이 잘되게 한다. 오늘날 숲의 사계절 체험은 우리 몸을 치유하는 대체의학으로 아로마 치유, 명상 치유, 자연 치유 등으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숲은 스트레스를 줄이고, 웰빙의 최적 장소가 아닐까. 숲은 병원이며 명의란 생각이 든다.숲속을 걷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맑은 것이 흐린 것의 근원이 되고, 움직이는 것은 고요한 것의 터전이 된다고 한다. 숲속은 맑고 고요하며 어찌 보면 순간순간 아름다운 꽃과 같다. “영혼이 피로하거든 산으로 가라”고 한 어느 독일 시인의 말이 생각난다. 숲은 조금도 숨기지 않고 흉허물 없이 대할 수 있다. 초목의 행복은 빛에 있다. 나무와 숲은 빛을 섭취하고 하늘로 무럭무럭 뻗어나간다. 우리의 행복은 사랑에 있다. 사랑에 물들면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슬픔과 외로움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숲의 요소들은 동물, 식물, 경관이다. 풋풋하고 신선한 신록의 봄 숲, 싱그러운 녹음이 우거진 여름 숲, 단풍이 곱게 물던 가을 숲, 고요와 적막이 감도는 겨울 숲, 사계절 내내 우리에게 평화와 안식을 선물한다. 신라 고양수 자연의 숲이 만신창이로 변해가고 있다. 숲 사이 아스팔트길은 숲을 파편화시키고 미생물을 감옥에 가두었다. 변하는 공원의 동물과 새, 곤충 등 뭍 생명체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떠나거나 떠날 채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경기장에서 지르는 함성에 장수풍뎅이는 그만 놀라 땅으로 곤두박질을 친다. 운도 지독히 없는지 지나가는 취객의 비틀걸음에 밟혀 소리도 못 지르고 세상을 하직한다.상수리나무는 비닐봉지 쥔 사람의 무차별적인 발길질에 다람쥐와 약속한 마지막 몇 알의 도토리도 못 지키고 그만 손을 놓는다.다람쥐는 공원 숲을 빠져나가는 비닐봉지 속 도토리만 애처로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숲의 나무는 동물, 곤충, 미생물의 생활 터전이고 그들의 집이다.황성공원이 아닌 신라 천년의 고양수란 숲이 그립다. 태초에 인간은 숲에서 출현하여 숲에서 살다가 또다시 숲으로 돌아간다는 자연의 섭리를 신라인은 이미 깨달은 것일까. 숲과 노거수가 더는 훼손되거나 줄어드는 일이 없기를 희망해 본다.‘고양수’라는 이름의 숲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이름이 바뀌면 규모와 성질도 변한다. 숲의 주인 나무를 쫓아내고 그곳에 주민센터를 비롯해 공설운동장, 충혼탑, 동상, 시비, 실내체육관, 시립도서관, 호림정, 테니스장, 롤러스케이트장, 씨름장, 레포츠공원, 게이트볼장 등이 들어섰다. 원래의 규모에서 70%가 줄어 30%만 겨우 숲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숲이 붕대를 감고 숨을 헐떡이며 누워 있는 느낌마저 든다. 누구도 치료해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 고양수가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 이 정도라도 형상을 유지하며 보존돼 있다는 것도 다행일까./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2-21

천하명당 찾다 희생된 영혼 지키는 ‘무송’

말 무덤과 노비 무덤을 지키는 춤추는 무송 노거수는 문경시 동로면 적성리 965번지 황장산 자락의 도로변에 살아가고 있다. 소나무가 춤추는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무송(舞松)이라 이름을 짓고 그곳을 무송대(舞松臺)라 하였다.무송대 거대한 바위 위에 마총(馬塚·말 무덤)과 노총(奴塚·노비 무덤)이 무송(舞松·춤추는 소나무) 노거수가 삼각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 말 무덤 앞에는 마총이라는 작은 비석과 노비 무덤 앞에는 노총이라는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어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다,소나무 노거수 앞에는 무송대(舞松臺)라는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무덤의 영혼이 소나무로 화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굵은 가장이에서 뻗어 나온 붉은 나뭇가지가 용수철같이 몇 번이나 굽혀진 모습에서 응집된 힘을 느낄 수 있다. 이곳 무송대는 풍수지리설 연주패옥(聯珠佩玉) 형세에 관련된 전설이 있다. ‘1592년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조선에 온 명군의 부장 두사충(杜思忠)은 당시 명성이 높은 풍수지리학자로서 조선에 귀화한 사람이다. 그가 조선의 팔대명당(八大明堂) 가운데 하나라고 전하는 연주패옥을 문경시 동로면 적성리에서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벽제관(碧蹄館) 전투의 패전으로 문책을 당하게 되었으나 약포(藥圃) 정탁(鄭琢) 대감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게 되었는데, 은혜를 입은 대가로 연주패옥의 명당을 정탁 대감의 신후지지(身後之地·살아있을 때 미리 잡아둔 묏자리)를 이 일대에 잡아두고 묘지로 사용토록 그 위치를 정 대감의 심복인 말을 돌보는 머슴에게 가르쳐 놓았다. 그 후 정탁 대감은 천하의 명당 연주패옥을 자기 아들에게 찾아보도록 그 위치를 알고 있는 머슴과 함께 문경으로 내려보냈는데, 현 위치에 이르러 그 명당의 위치가 어디냐고 머슴에게 묻자, 타고온 말이 갑자기 뒷발질하여 머슴이 즉사하고 말았다. 천하의 명당을 잃게 된 아들은 화가 나서 말의 목을 베어 이곳에 묻고 머슴도 말의 무덤 옆에 묻어주었다.’명당에 묻히려다 애마도 충복 노비도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연에 가슴이 아렸다. 지금도 이 명당을 찾으려는 풍수가가 있다고 한다. 죽어서도 후손들에게 벼슬을 내려주고 싶은 조상의 마음이야 이해할 수 있다지만, 오늘날에까지 명당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심지어 돌아가신 조상을 잘 모셔야 한다면서 설, 추석 명절에 제사 음식 준비와 집안 손님맞이로 맏며느리들이 심한 후유증을 겪는다고 한다. 이는 죽은 조상이 산 후손을 괴롭히는 것이다.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를 물리친다는 삼국지 역사소설을 읽은 적은 있지만, 죽은 조상이 산 후손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일은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예전에 한 스님이 다비식에서 타들어 가는 장작더미 불꽃을 바라보면서 장례문화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인도에는 마지막 인생을 출가하여 살면서 천상에 태어나기 위해서 신의 강인 갠지스강에 목욕하러 간다고 했다. 그곳에서 죽으면 화장할 때 돈이 많고 적음에 따라 시체 태우는 장작 수가 결정되지만, 그렇다고 돈을 많이 벌려고 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외국 관광객은 잘못 알고 거지로 오인하기도 한다고 했다. 인연에 따라 살면서 장작 수가 적어 시체가 일부 타지 않고 남아있으면 강에 던져 물고기의 밥이 되어 사라진다고 했다.어떤 나라는 조장(鳥葬)의 풍습이 있어 사람이 죽으면 칼질해 산에 갖다 놓는다고 했다. 그러면 독수리가 달려들어 10여 분 만에 사체 살점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기를 기다렸다가 남은 뼈는 수습하여 갈아서 주먹밥을 만들어 던져놓으면 독수리들이 받아 삼킨다고 했다. 남은 해골은 가져와 바가지로 사용한다고 했다. 어떤 지역에는 개장(犬葬)의 풍습이 있어 사람이 죽으면 사찰 주변에 시신을 던져놓으면 수십 마리의 개들이 달려들어 시체를 먹어 치운다고 했다. 외국 관광객이 개한테 물리어 항의하자 사찰 주변의 개들을 모두 사살한 사실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도 이런 풍습이 남아있다고 한다.시신 훼손과 같은 장례는 죽은 사람을 모독하는 것이 아닌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실제로 남미 페루를 여행한 적이 있었다. 우르밤바에서 마추픽추로 가는 도중에 들린 마을에는 집 안 선반 위에 조상의 해골을 모셔놓은 것을 보았다. 나에게는 소름이 끼치는 장면이지만, 그들에게는 일상생활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이 밖에도 나라마다, 지역마다 다양한 장례문화가 있다고 했다. 장례문화가 다른 것은 기후의 영향과 비용 때문이라고 했다. 땅에 묻어도 시체가 썩지 아니하는 지역에는 매장은 곤란하다고 했다. 문화야 어떻든 간에 죽음에 대하여 애도하는 마음은 똑같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보면 장례문화를 가지고 선진국이니 미개국이니 구분하고 차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스님은 부도를 만들에 안장한다고 했다. 우리의 장례문화도 많이 변했다. 묘봉을 만드는 매장보다는 화장하여 유골을 납골당. 수목장 등에 모시거나 산천에 뿌리기도 한다. 조상들이 명당이라고 하여 모신 산소가 벌초할 때면 뱀이나 벌에 쏘여 후손이 다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궁금하다. 옳고 그름의 문제이기보다 장례문화의 변화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명당을 찾는다고 산의 나무를 베어내거나 땅을 훼손하는 일은 환경보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무송 노거수는 수령 340년이라고 하나 연주패옥 명당 이야기를 보면 지금으로부터 432년 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니, 나무의 나이는 400년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큰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린 것으로 보아 다른 노거수보다 자람이 더디었다. 20여 년 전 노거수의 키 8m, 가슴 높이 둘레 2.5m, 수관 폭 14.5m가 지금도 그때의 크기와 별다르지 않았다. 말과 머슴의 무덤을 만든 후 소나무를 심었든지 아니면 그 후 황장산 소나무 솔씨가 바람에 날아와 자연 발아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주민들이 보호하여 온 것만으로도 민속 문화적 가치가 있는 소나무 노거수이다. 고도 359m, 위도 36.775994, 경도 128.289548 있는 무송 노거수 품격을 높여주면 어떨까.명당으로 희생된 충성스러운 말과 머슴의 영혼을 지키는 춤추는 무송 노거수가 건강하게 오래도록 살아가기를 기원한다. 연주패옥의 명당 이야기를 보면서 명당은 형이하학적인 땅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조상의 은덕과 삶을 추모하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했다.연주패옥(聯珠佩玉) 형세란…선녀인 옥녀가 화장하기 위하여 거울을 보며 목걸이를 벗어놓은 형세를 가진 곳에 산소를 쓰면 옥관자(玉貫子) 서 말, 금관자(金貫子) 서 말이 나온다는, 즉 벼슬한 사람이 많이 태어난다는 명당을 말한다. 옥관자(玉貫子)는 조선 시대 옥을 재료로 하여 망건의 당줄을 꿰게 만들어 달던 작은 고리. 금관자(金貫子)는 망건(網巾)에 부착된 금으로 된 작은 고리로, 당줄을 꿰어 걸어 넘기는 구실을 한다. 조선 시대 정2품, 종2품 관리가 사용하였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2-14

한 몸처럼 얽히고설킨 ‘사랑나무’ 연리지

질풍노도의 청소년 시절 앞날이 궁금했다. 혈기 왕성한 때라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으나, 가난이라는 궁핍과 시골 농촌의 힘든 농사일의 굴레가 몸과 마음을 묶어 놓았다. 유년 시절 집안 농사일을 도우며 함께 뛰어놀던 동네 형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둘씩 도시로 살길을 찾아 떠났다.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마을 사람도 알음알음으로 시골 농촌을 떠났다. 청소년 시절 그믐날 감감한 밤을 걷는 기분으로 방황하고 있을 때이다. 팔만대장경에 답이 있다면서, 깨달음을 얻은 스님은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고향 청도 호거산 운문사를 찾았다. 운문사(雲門寺)는 신라 진흥왕 527년에 한 신승이 3년간 수도하여 깨달음을 얻은 후, 다섯 곳에 절을 창건하였는데, 그중 대작갑사가 현 운문사이다. 600년 신라 원광 국사가 귀산과 추항 두 화랑에게 세속오계를 전수한 곳이기도 하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원동력이 되었다. 1277년 일연 스님이 주지로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집필하여 우리의 고대 역사를 5천년의 역사로 끌어올려 놓았다. 현재는 승가대학과 대학원이 개설되어 전국 최대 규모의 비구니 교육 도량으로 자리매김한 고찰이며 명찰이다.소문만 듣던 운문사는 산중에 숨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을 앞을 흐르는 동창천의 발원지를 따라 이어지는 꼬불꼬불한 길은 끝도 없이 연속되었다.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맡긴 채 창밖의 풍경에 눈길을 보내면서 나의 미래를 그려 보았다. 버스 종착 정류장에 내려 숲이 무성한 솔밭 길을 한참 걸었다.숲속 시원한 솔바람이 목덜미를 핥고 지나갔다. 마침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고즈넉한 숲속에 웅장한 절이 나타났다. 댓바람에 주지 스님이 묵는 곳을 찾아서 막무가내로 주지 스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졸랐다. 재무 스님이라는 젊은 여 스님이 가로막았다. 스님이 머무르는 도량이니 못 들어간다고 했다. 그냥 물러설 수는 없었다. 몸으로 밀치고 들어갔다. 어쩔 수 없는지 주지 스님이 계시는 방으로 안내했다. 주지 스님을 기다리는 동안에 별의별 생각이 떠올랐다. 부자가 될 것인지, 높은 사람이 될 것인지, 성공할 것인지, 궁금한 것도 많았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 주지 스님이 들어왔다. 생각을 멈추고 주지 스님을 톺아보았다. 인자하고 엄숙해 보였다. 일어나서 공손하게 큰절을 올렸다. 주지 스님께서 놓여진 과자를 먹으라고 했다. 먹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이었다. 용기를 내어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저의 손금을 좀 보아주세요”라고 했다. 주지 스님께서는 “손금 볼 줄 모릅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또 얼굴을 내밀고는 “저의 관상을 보아주세요”라고 했다. 주지 스님께서는 “관상을 볼 줄 모릅니다”라고 했다. 제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앞으로 성공할 것인지 봐 달라고 했다. 주지 스님은 또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 주지 스님께서는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반문했다.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 질문이다. 그야말로 어이가 없는 질문이다. 나의 이러한 부끄러운 언행에 주지 스님은 얼마나 당혹스럽고 황당하였을까? 그러나 주지 스님은 조금 뜸을 들인 후 조용히 말씀하셨다. “젊은이, 젊은이의 앞날 인생은 손금에도 관상에도 나타나 있지 않아요”라고 했다. 나의 앞날을 점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하나로 여기까지 왔는데, 실망의 눈길로 주지 스님을 바라보았다. 이제 일어나 돌아가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일어서려 했다. 그러자 주지 스님은 “젊은이, 젊은이 앞날의 운명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어요, 자신의 앞날은 자신이 개척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자신이 쓴 불교에 관한 서적을 내게 주면서 한번 읽어보라 했다. 그 주지 스님은 안말례 스님이었다.원하는 답을 듣지 못한 채 인사를 드리고 물러났다. 올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웅장하고 아름다운 소나무가 눈길을 끌었다. 늘 푸른 솔잎이 햇살에 반짝이며, 바람에 출렁이며 춤을 추었다. 이런 거대하고 아름다운 소나무가 절 마당의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니 놀랍기만 했다. 우산처럼 늘어뜨린 푸른 솔가지 잎 사이로 붉은빛을 띤 근육질의 몸통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고 나무 밑으로 들어갔다. 동서남북으로 뻗친 줄기가 우산살처럼 사방으로 늘어뜨려져 있었다. 우산살이야 일정한 간격으로 짜져 있지만, 솔의 가지는 얽히고설킨 모양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두 나뭇가지가 만나 하나의 몸이 되었다. 그때는 신기한 것으로만 여기고 몰랐지만, 사랑과 효의 나무라 하여 모두가 귀히 여기는 소나무 연리지였다.소나무도 스스로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연리지로 만드는 능력이 있는데, 이는 그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는다. 단지 도움을 받았다면, 공간과 세월이라는 자연이었다. 공간과 세월은 우주의 바탕인데 이는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고 그렇다고 누구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불변의 진리이다. 미래의 인생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석가모니도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경이로운 소나무 품속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가슴에 품고 온 책을 밤새도록 읽고 또 읽었다. 반야심경을 이해하고, 읽다 보니 개경계를 외우게까지 되었다.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隅), 아금문견득수지(我今聞見得修持),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意)-끝없이 심히 깊은 미묘한 법은 백천만겁 만나기 어려우니, 이제 보고 듣고 배우니, 부처님의 진실한 뜻 바로 알기 원하노라-.그로부터 50여 년이 훌쩍 지나 운문사를 찾았다. 많은 신도와 관광객이 찾아와 처진 소나무 노거수를 보고 감탄을 자아내었다. 소원을 빌기도 하고 소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촬영하기도 했다. 나에게는 아름다움보다 자신감과 자신을 찾게 해준 스승 같은 신령스러운 나무다. 방황을 끝나게 해준 나무에 경배했다. 운문사 처진 소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되었다. 키가 6m, 둘레가 3.5m, 수관 폭은 24m로 키의 4배나 된다. 나무의 키에 비해 수관 폭이 이렇게 넓은 소나무 노거수는 아마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보기가 드물 것이다. 매년 봄에 비구니 스님들은 막걸리를 소나무 뿌리 주변에 뿌려주고 있다.원광 국사의 화랑도 세속오계의 이름을 따서 처진소나무를 화랑송(花郞松)으로 부르면 어떨까. “젊은이, 젊은이 앞날의 운명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어요, 자신의 앞날은 자신이 개척하는 것입니다”라고 한 주지 스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는 듯 지난 추억이 아삼아삼하다. 화랑송 노거수를 자주 찾아가 볼 수 없지만, 주지 스님이 한 말씀은 내 가슴속에 남아 미래를 설계하고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다.원광국사의 화랑도와 세속오계운문사는 원광국사가 일생의 좌우명을 묻는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를 주었다고 하는 역사적인 절이다. 사군이충(事君以忠),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고, 사친이효(事親以孝), 효로써 부모를 섬기고, 교우이신(交友以信),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고, 임전무퇴(臨戰無退), 싸움에서 물러서지 말고, 살생유택(殺生有擇),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일 때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는 게 바로 세속오계다.화랑도의 세속오계는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성취하는데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리고 고려왕조의 항몽 정신과 조선왕조의 의병 정신, 대한제국의 독립 정신으로 이어져 불굴의 민족정기로 자리매김해 오늘날에 이어지고 있다. 혈기 왕성한 청소년 시절에 배우고 터득한 정신은 일생의 버팀목이 된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2-07

산줄기 바위 움켜잡고하늘로 용솟음 치는비천하는 청룡의 자태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포항 계원리는 대숲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는 아담한 항구마을이다. 520살 용송 노거수가 응회암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리고 마을 터줏대감으로 살아가고 있다기에 선바람에 찾아 나섰다. 괭이갈매기는 항구 뱃머리에 앉아 따스한 햇살에 날개를 말리고, 늙은 어부부부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따고 있는 풍경이 참으로 정겹다. 그때 한 점의 바닷바람이 일어 한낮의 정적을 깨고 뱃머리 태극기가 펄럭인다. 괭이갈매기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탐하고 물고기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파닥인다. 어부가 손에 든 빨간 고무대야는 시나브로 물고기로 가득 찼다. 어부 곁에서 물고기를 구경하던 아이들이 저 멀리 할머니의 고함에 쏜살같이 방파제로 달려간다. 할머니의 낚싯대에 매달린 물고기가 공중에 날아올랐다. 방파제에 앉아 불을 피우고 냄비에 채소를 썰어 넣고 있던 아들과 며느리가 눈길을 주는가 싶더니, 대수롭지 않은 듯, 하던 일을 계속한다. 물고기 매운탕 요리를 할 모양인 것 같다. 할머니 가족의 행복한 분위기를 깨트릴 것 같아 멀찌감치 바라보다 용송으로 발걸음을 향했다.언덕 위 용송 노거수는 몸에 금줄을 두르고 있었다. 금줄은 마을 수호신 당산목으로 제사를 받는 경배의 나무이니 함부로 손대지 말라는 금지의 표시이기도 하다. 외모는 꿈틀거리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용의 모습 같아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우람한 근육질의 몸통 줄기에서 뻗은 나뭇가지는 하늘이 아닌 땅으로 향하고 있다. 그중 한 줄기의 나뭇가지는 땅에 닿다시피 자라다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함을 알아차렸는지 방향을 바꾸어 수평으로 자라고 있다. 눈이 있고 생각을 하는 것 같아 노거수에 영혼이 깃든 듯한 느낌을 받았다.하늘에서 여름 폭우로 마을을 물바다로 만들고, 겨울 폭설로 마을 고샅길을 메우면 주민은 난리 북새통이다. 그러나 용송 노거수는 폭우로 몸을 씻어 더욱 푸름을 자랑하고 폭설로 눈꽃을 피워 아름다운 모습을 뽐낸다. 그저 하늘에 감사하며 붉은 태양을 쳐다보면서 살아간다. 바다를 향한 산줄기 언덕 바위를 움켜잡고 꿈틀거리며 용솟음치는 늘 푸른 용송은 비천하는 청룡의 모습이다. 한 번쯤은 기도 꺾이고 시르죽을 뻔한데도 꿈틀거리며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자태는 무한한 에너지와 함께 자강의 삶을 느끼게 한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수백 년을 주민과 동고동락하며 살아가고 있는 신령한 용송 노거수는 철인이란 생각이 든다.조선 시대 중앙 관료들 중에는 죄를 짓거나, 권력 싸움에 밀려나거나, 간신배들의 모함으로 이곳 장기로 유배와 귀양살이를 한 이들이 적지않다. 그들은 임금님이 있는 한양을 그리워하고 억울함을 글이나 시로 표현하며 소견세월 했다. 바다를 바라보면서 자신을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눈앞에 펼쳐지는 하늘과 바다, 산은 우리 삶의 현장이며 터전이다. 그러나 고마움보다 원망의 눈으로 대하는 경우가 많다. 하늘의 날씨가 덥다고 불만이고 춥다고 불평한다. 바다가 거칠다고 불평하고 안개가 끼었다고 불만이다. 그렇다고 하늘과 바다는 우리의 불만과 불평이나 원망을 들어주지 않는다. 용송의 삶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면 그들의 삶이 크게 달라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어촌마을에서 용왕에게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건 드물지 않은 일이다. 고요한 바다도 때로는 성난 파도로 돌변하여 고깃배를 침몰시키고 어부를 바다에 수장하기도 한다. 부모를 잃은 자식, 자식을 잃은 부모, 또 이들 형제자매들의 슬픔의 고통을 누가 겪어보지 않고 알 수 있을까. 파손된 고깃배야 또다시 만들면 되지만, 잃은 가족은 다시 돌아올 수 없으니 그 애통한 심정은 이루 말 수 없을 것이다. 바다는 생활의 터전이지만, 언제 또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몰라 늘 두려움의 대상이다.사람은 죽으면 선산의 땅에 묻혀 구천에서 가족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지만, 어부가 바다 위에서 뜻밖의 재난을 당하여 죽으면, 아무도 찾아올 수 없는 바다에 묻혀 심해를 떠도는 영혼이 되고 만다. 주민들은 용송에 희생된 이들의 영혼이 용궁에서 편안한 안식과 이런 불행한 일이 앞으로 일어나지 않기를 비는 제를 올린다. 이뿐만이 아니다. 용송은 주민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구심점이며, 또한 마을의 평화와 풍어를 기원하는 수호신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고 삶에 위안이 된다면 이 또한 미신이 아니라 민속문화로 어촌 주민들의 생활 방편이다.아주 어릴 때이다. 어머니는 나에게 태몽을 꾼 이야기를 해주었다. “밝고 둥근 보름달을 내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용띠의 해에 너를 낳았다. 너는 커서 보름달처럼 빛이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었다.그로부터 보름달은 유난히도 크고 밝아 보였다. 하늘과 바다가 입맞춤하는 수평선에서 찬란히 빛나는 해와 달의 기운과 아름다움을 가슴에 담고 살았다. 새해 해맞이와 정월 대보름 달맞이는 평소와 같은 해와 달일지라도 느끼는 감정은 달랐다. 새해 아침 해돋이와 정월 보름달 맞이를 하면서 소원을 빌었다. 그때마다 어머니가 하신 태몽 꿈을 생각하고 꼭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 굳게 믿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걸 믿었다는 내가 우습기도 하다. 그러나 가난을 벗어던진 것만으로 절반의 성공은 거두지 않았나 싶다.신라 문무왕은 죽어 동해의 용왕이 되어 나라 앞바다를 지키겠다고 했다. 혹여나 문무왕의 영혼이 용송으로 옮겨오지는 않았는지. 등대처럼 바다를 바라보며 어촌을 지키고 바다에 희생된 어민의 영혼을 보듬어 주는 용송 노거수! 그 푸름이 만대에 이어지리라 믿어본다. 갑진년 청룡의 해를 맞이하여 늘 푸른 용송 노거수에 가족을 위해 바다에서 물질과 고기잡이하다 희생된 어민의 영혼을 위로하고 우리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해 보면 어떨까?/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1-31

하늘로 날아오를 듯 날개 펼친 이름 없는 소나무

경북 청송(靑松)은 늘 푸른 솔의 고장이다. 낙동정맥의 크고 작은 산줄기에 에워싸여져 함부로 범접하기 힘들다. 청송으로 처음 전근을 오거나 부임한 사람들은 산 고갯마루 길을 넘을 때마다 오지란 생각에 눈물을 흘리고, 청송을 떠날 때는 정들어 섭섭한 마음에 눈물 흘린다고 한다. 나 또한 그랬다. 청송이란 고장은 올 때도 떠날 때도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지금이야 산 고갯마루를 넘는 도로는 터널을 뚫어 빠르고 편하게 청송을 드나들 수 있지만, 그 옛날에는 산 고갯마루를 넘는 버스는 곡예사와 다름없었다.청송의 자연은 아름답다. 깨끗한 하천은 녹색의 산자락을 부여잡고 굽이굽이 돌면서 골골이 흐른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은 산마루에 걸터앉아 가던 길을 멈추고 숨결을 고른다. 맑은 공기, 깨끗한 물, 늘 푸른 솔, 산소 카페의 고장이다. 청송인은 예와 효뿐만 아니라 조선의 선비처럼 곧은 절개와 고결하고 순결한 성품을 닮기 위해 늘 송죽매난(松竹梅蘭)을 가까이하고 문예를 즐기며 좋아한다. 남북으로 가로지른 길 따라 아담한 마을에는 솔밭과 함께 옹기종기 고구마 줄기처럼 형성되어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청송읍 소재지에서 국도를 따라 영천으로 가다가 금곡리 도로변 무명의 소나무 노거수를 찾았다. 높은 언덕 위에 숨어서 살던 노거수가 우회도로가 생기면서 본의 아니게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접근할 길이 마땅찮아 절개된 풀숲 언덕을 기어올랐다. 사과밭을 지나 겨우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아직 무명이어서인지 나이, 키, 몸 둘레 등을 기록한 이름표도 없었다.많은 사람이 노거수 나이에 대해서 궁금해한다. 오래된 나무의 나이를 측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나무는 한 해에 하나씩의 나이테를 새기기 때문에 나이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살아있는 노거수 나이테를 헤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몸에 구멍을 뚫어 나이테 수를 세어 본다는 것도 해서는 안 될 짓이다. 나이테 측정기로 나무를 뚫어 본다고 해도 오래된 노거수는 속이 비어 나이테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이런저런 이유로 노거수의 나이를 정확히 측정하기는 힘들다. 기록이나 이웃 사람들의 이야기 등 다른 나무와 비교하거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나이를 측정할 수밖에 없다. 가장 궁금하게 여기면서 정확히 아는 것은 힘든 일이다.소나무 노거수의 나이는 알 수 없지만, 굵기와 수형에서 세월의 연륜을 느낄 수 있었다. 범상치 않아 보였다. 도로 옆 언덕 위에 푸른 하늘을 날아오르는 학의 날갯짓 모습이었다. 날으는 학이라 하여 비학송(飛鶴松)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눈옷을 입은 날이면 설송(雪松)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가까이 가서 보니 용송(龍松)이라 해도 좋을 것 같았다. 하늘을 향한 범상치 않은 가장이 모습이 용틀임하는 용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바라다보는 방향에 따라 비학송으로 보였다, 설송으로 보였다, 용송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나의 대상물이 다양한 모습으로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만이라도 비학송, 설송, 용송이라는 몇 가지 별호를 붙여주고 보호수라는 이름표를 달아주고 싶다.소나무 노거수는 잎의 녹색을 강조하기 위해 여름에 촬영한다고 하지만, 예외가 있구나, 청량한 하늘 아래 은세계의 비학송은 지상천하(地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다. 그림자로 보아 햇볕에 남아있는 솔가지의 잔설이 주변 경관과 조화롭다. 흰 눈으로 목욕한 녹색의 솔잎은 더욱 짙고 금방이라도 날갯짓하며 날아오를 것 같다. 아름다움은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편안하게 하고. 또한 기쁘게 한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아름다운 미를 창조하고 또 그것을 찾아 노래하고 있다.소나무 노거수는 고결하고 숭고한 모습으로 마음을 정결하게 해준다. 맑은 하늘 아래 소나무 노거수는 순결함을 자랑이라도 하듯 흰 눈옷을 입고 자태를 뽐내고 있다. 티 없이 맑은 모습은 아름답다기보다 맑고 순수해 고결한 품위를 갖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다. 바쁜 생활 속에 자신도 잃어버리고 경쟁 사회에 내몰려 허상을 쫓아다니느라 구정물에 몸은 더럽히고 허물에 마음은 주접이 든다. 설송을 보고 있으면 고결한 품성을 갖춘 사람으로 닮아가고 싶어진다. 소나무 노거수는 울퉁불퉁한 붉게 물든 근육질이 오른쪽을 돌면서 나선형 곡선을 이루고 있다. 근육질의 몸통이 하늘 높이 치솟으면서 붉게 물들고 솔가지는 용의 발톱을 하고 있다. 땅에 덮인 흰 눈에 대비된 종아리의 검은 근육질은 더욱더 검게 보인다. 몸통의 거북 등 껍질은 수백 년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연륜이 있어 보인다. 용은 상상의 동물로써 우리에게 무한한 힘과 용기, 가능성을 심어준다. 올해는 갑진년 청룡의 해이다. 청룡이 상징하는 행운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기원해본다.인공적으로 심어져 기른 것인지, 자연적으로 생육하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태풍에 의해 훼손될 수도 있고 낙뢰로 훼손될 수 있다. 송진이 많은 소나무는 낙뢰에 의하여 불이 붙으면 모두 타버린다. 독립적으로 생육하는 수목은 낙뢰와 태풍, 돌풍의 과도한 에너지의 집중으로 피해를 쉽게 입을 수 있다. 따라서 주변에 에너지를 분산할 수 있는 단목군 수준의 수림 조성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주변은 묘소가 있고 개인의 사과밭이 있어 그것도 어려울 것 같다. 도로변에서 접근할 수 있는 길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발자국만 남기고 떠나려니 미안한 마음이 앞서 두 팔 벌려 안아본다. 얼마나 덩치가 큰지 품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만수무강을 마음속으로 기원해 본다.노거수에 대해 뭐가 궁금한가요첫째, 수령이 얼마나 되었는지? 둘째, 크기와 수형은 어떤지? 셋째, 언제 누가 심었는지, 아니면 자생한 나무인지? 궁금증은 이처럼 크게 대별된다.노거수 안쪽 나이테 부분이 잘 썩어 정확한 수령 측정이 힘들다면 기록이나 이웃 사람들의 이야기 등 다른 나무와 비교하여 나이를 측정할 수 있다. 크기는 실제로 도구를 가지고 가슴 높이의 둘레 길이를 재어보면 된다. 이를 흉고 둘레라 한다. 수관 폭은 동서남북으로 뻗은 가지의 길이를 재어본다. 인공인지 자생한 나무인지는 기록을 통하여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로 알 수 있다.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특별한 일을 기억하기 위해 나무를 심었다. 옛사람들은 아들을 낳으면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었으며,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었다. 아들은 소나무처럼 사철 푸른 절개를 가진 선비가 되라는 의미였고, 오동나무는 딸이 시집갈 때 장롱을 만들어 주기 위해 심었다.소나무는 솔처럼 생긴 잎 모양새와 가마솥 설거지에 사용되었던 솔에서 유래한 이름이라 한다. 예전에는 솔방울로도 가마솥 설거지를 하였다. ‘솔’은 정감이 가는 이름이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1-24

구룡포항 언덕 위에 남아있는 아픈 역사

구룡포항 언덕 위에는 일본 침탈문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조상은 그들에게 우리 선진 문물과 문화를 전하여 주었건만, 일본은 은혜를 잊고 우리의 수산물을 수탈하여 기름진 배를 채웠다. 그들이 떠나간 지 아니, 달아난 지 70년이 훌쩍 넘어섰다. 일본 핍박에 시달린 주민들의 원통하고 분한 마음을 그들이 세운 거대한 눈먼 규화목 송덕비를 보고는 짐작할 수 있다.구룡포 주민은 규화목 송덕비 얼굴을 시멘트로 짓뭉개 눈먼 규화목 송덕비로 만들어 버렸다. 분노의 표출이 아닐까 싶다. 얼마든지 넘어뜨리고 부수어 버릴 수 있을 것인데, 남겨 놓은 것은 아픈 역사를 잊지 말고 기억하며 자강하자는 큰 뜻이 있지 않을까 싶다.구룡포항에는 과거와 현재의 문화가 공존해 있다. 언덕 아래에는 말로만 듣던 일본풍의 집들로 들어찬 적산가옥을 보고 적이 놀랐다. 100여 년 전 일본인들이 살았던 일본식 가옥이 해방된 지 70여 년이 넘어섰지만, 아직도 500m 거리에 80여 채의 주택, 여관, 요리점 등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거리를 활보하는 그들의 오만한 몸짓과 요란한 나막신 소리 대신 국내외 관광객들이 이집 저집을 드나들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근대문화 역사 거리를 체험하고 있다. 그들이 남기고 간 문화유산으로부터 문화해설사는 그들의 만행을 하나하나 폭로하고 있다.언덕 위 구룡포 공원에는 먼바다와 구룡포항을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거대한 규화목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일제 강점기 때 구룡포 앞바다 방파제 축조와 도로 개설 등에 공을 세운 일본인 도가와 야스브로를 기리기 위하여 일본인들이 본국에서 규화목을 가져와 1944년경에 세웠다”라고 안내문에 기록되어 있다.일제 강점기인 1906년 가가와현 어업단 소전조(小田組) 80여 척이 고등어 등 어류 떼를 따라 구룡포에 이주하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속내는 일제 강점기에 풍부한 어족자원을 수탈하여 그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로 인하여 구룡포 주민들은 가렴주구에 시달리며 핍박과 고통에 시달렸을 것이란 생각에 미치자 억장이 무너진다. 희생된 주민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탑을 세우기는커녕 그들의 악행을 찬양하는 송덕비를 세웠다니 하늘도 통탄할 일이다.규화목 송덕비 주위에는 그때의 실상을 낱낱이 보고 증명할 증인이 아직도 살아 있다. 향나무 노거수이다. 향나무 노거수는 이곳으로 이주하여 온 일본인이 가져다 심었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가이스카라고 하는 향나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향나무 노거수 주변에 일본인들이 전쟁터에 나가기 전 승리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였다는 포탄 모양의 돌조각이 세워져 있다.이 밖에도 일본 민속신앙인 신토의 신을 모시는 신사 터 초석, 신사를 참배하기 전에 손을 씻는 초우츠야가 설치되어 있다. 침략 실상을 향나무 노거수 생육 모습이 증언하고 있다. 침략자들의 억압에 시달린 주민들의 분풀이이었을까. 죄 없는 향나무가 만신창이가 된 채 목숨줄을 부지하고 살아가고 있다. 몸은 찢기고 뜯기어 흉터로 얼룩져 몰골이 말이 아니다. 분노한 주민들은 조상의 영혼 앞에 향불로 그의 몸을 죗값으로 불태우지 않았나 싶다.이제는 그곳에 대한민국 재향군인회가 충혼탑을 세워 놓았다. 향나무 노거수는 과거의 지위를 잃고 새로운 주인인 충혼탑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잘못을 뉘우치고 참되게 살고자 새 주인인 충혼탑을 지키고 있는 향나무 노거수의 가련한 모습에 일말의 동정심이 간다. 이참에 의견을 모아 보호수라는 품계나 천연기념물이라는 더 높은 품계의 지위를 올려주면 어떨까 싶다. 이제는 용왕당, 구룡, 향나무 노거수가 다 함께 구룡포항의 평화와 풍어를 기원하고 있다. 구룡포항 언덕 위에는 향나무 외에도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노거수가 등대처럼 동해를 바라보고 있다. 은행나무는 동쪽과 서쪽의 몸 살갗이 다르다. 노란 단풍잎은 만추가 지나고 겨울의 문턱까지 떨구지 않고 끈질기게 매달고 있다.새천년 밀레니엄 느티나무 노거수 역시 힘자랑이라도 하는 듯 우람하게 서 있다. 침략의 아픔을 경험한 노거수는 반일을 넘어 극일로 나아가고 용서와 화해로 스스로 힘을 키우는 자강을 하라는 메시지로 보였다. 구룡포항의 ‘적산가옥 거리’와 언덕 위 ‘눈먼 규화목 송덕비’를 우리의 기억에서 잊지 말도록 ‘구룡포 근대문화 역사 기억의 공원’으로 탈바꿈하면 어떨까 싶다.나라를 되찾은 지도 벌써 한 세기가 다가오지만, 언제까지 아픈 역사의 굴레에 갇혀서 우리끼리 친일이니 반일이니 서로를 탓하며 살아야 할까. 침략자들의 속내는 국론을 갈라놓고 서로를 향해 삿대질하고 싸우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이런저런 상념에 빠졌다. 세계사적으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강대국은 약소국을 침략하여 그들의 야욕의 배를 불렸다. 중세 유럽이 그랬고 근대 산업사회에도 부국강병 정책으로 약소국은 그 희생물이 되었다.세계 평화를 부르짖고 있지만, 현대사회에서도 전쟁은 끊이지 않는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가자지구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으로 어린아이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있다. 약소국의 설움일까. 강대국의 횡포일까. 마냥 이웃끼리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미래를 약속할 수는 없지 않을까. 자강의 길만이 오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란 생각이 든다.조용한 아침의 나라, 호랑이 꼬리에 터전을 잡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그 옛날 구룡포 주민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보인다. 밀려오고 밀려나는 바다 물결에 씻긴 황금 모래 빛 백사장에 아이들이 뛰어놀고, 풍어로 만선의 고기잡이배들이 윤슬에 물 띠를 그리며 기적을 울린다. 갈매기가 창공을 날아오르며 반긴다. 이런 평화로운 마을을 짓밟아 놓고 무슨 덕을 지었다고 칭송의 노래를 부른단 말인가. 눈먼 규화목 송덕비와 향나무 노거수는 “오욕의 역사를 잊지 말라고,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아픈 역사를 곱씹어보게 한다. 오늘 나즐로(나 홀로 즐거운) 노거수 탐방은 자강의 길이 무엇인지, 애국의 길이 무엇인지 곰곰이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다. 규화목(硅化木)이 뭘까?내부가 무기 광물로 채워져 화석화 된 ‘나무 화석’을 규화목이라 한다.나무의 해부학적 구조가 온전히 보존된 경우는 연륜연대학으로 나무의 나이테를 분석하여 고기후와 고환경을 연구할 수 있다. 다양한 세포로 구성된 복합 조직으로 미세구조와 배열 상태를 바탕으로 나무의 종류를 구분할 수 있다.우리나라 규화목 발견 장소는 경상북도 천연기념물 제146호 칠곡 금무봉 나무고사리 화석 산지, 포항시 금광동 신생대 규화목 화석 산지 등이 있다.구룡포 공원에는 과메기 문화관, 생활문화관. 구룡, 충혼탑, 충혼각, 용왕당과 일본의 신사 터 초석, 쵸우츠야, 포탄 돌, 봉헌, 규화목 송덕비 등 시설물이 있다. 적산가옥 거리에는 일본 가옥과 우리 가옥이 공존해 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1-17

우산처럼 펼쳐진 노거수 품속 아름다운 효행 이야기가…

사계절 언제나 같은 모습을 고집부리는 넓고 푸른 바다, 동해는 왠지 싫지 않다. 언제나 똑같은 변함없는 경관일지라도 계절 따라 느끼는 감정이 다르기 때문일까. 포항에서 삼척으로 이어지는 해안 길 따라 펼쳐지는 동해는 매번 다른 느낌의 감정이 가슴에 와닿는다. 그리고 보면 자연의 대상물이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속 감정이 호불호를 좌우한다는 생각이 든다. 쓸모가 없고 볼품이 없다고 하는 자연의 물상도 모르면 몰라도 알고 보면 존재 이유가 있고 그만한 가치가 또한 있다. 이처럼 만물에도 존재가치가 있거늘, 인간이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언론 기사를 보면 생명을 경시하는 희한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자식이 부모를 죽이거나 학대하는 패륜아가 있는가 하면 부모 역시 살기 힘들다고 어린 자식의 목숨을 함부로 하고 학대하는 일도 있다. 이러한 일들이 대부분 정신적 피폐에서 오는 물질적인 재산과 관련된 것이라 우리를 슬프게 한다. 반면에 집안이 가난하였지만, 병든 아버지를 극진히 모시고 산 아름다운 효행의 이야기가 소나무 노거수와 함께 전해 내려오고 있어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울진에서 소광리 금강송 군락지 가는 불영계곡 길 초입에 있는 행곡리 천연기념물 ‘처진 소나무 노거수’와 ‘주명기 효자비’이다. 소나무와 효자비는 한 세트의 멋진 조화로운 그림이다. 상상력으로 그린 추상화가 아니라 실존하는 풍경화이다. 긴 그림자와 함께 웅장함에 저절로 두 손을 합장하여 경배했다. 지난해 울진 산불에도 살아남았다. 물을 뿌리고 방염포를 부착하는 등 선제 대응에 나선 산림청과 산불 진화 관계인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었다. 인근에는 산불로 산림이 아직도 검게 그을려 있었다. 용케도 살아남아 줘서 감사하다는 눈짓을 보내니 푸른 솔가지가 반짝이며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한다.소나무 원래 키는 14m이었으나 지금은 10m로 줄었다. 바닷바람의 짓궂은 장난이나 시샘 탓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360년이라는 모진 세월을 용케도 살아남아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마을 개척 당시에 숲이었으나 차츰 사라지고 지금은 처진 소나무 한 그루만 덩그렇게 남아 ‘주명기 정려각’과 함께 하고 있다. 땅으로 향한 늘 푸른 솔가지의 흔들림은 갓 샤워하고 나온 여인의 긴 머리카락 날리는 듯 싱그럽고 청초하다. 살았으나 죽었으나, 나뭇가지에 붙어있거나 떨어져 있거나 한결같이 함께 있는 솔잎에서 부부의 사랑과 형제의 우정을 느낀다. 이를 부부 사랑과 형제 우정의 징표로 생각하고 우리 조상들은 소나무를 특히 가까이하였던 것이 아닐까 싶다.우산처럼 펼쳐진 소나무 품속으로 들어가니 솔향이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힘껏 배불리 솔향을 들어 마시었다 내뱉었다. 기분이 상쾌하고 정신이 맑았다. 마음이 편안하고 몸이 가벼움을 느꼈다. 피톤치드 성분이 혈액을 타고 전신으로 유영하면서 정혈작용을 하는가 보다. 나무 위를 쳐다보니 붉은 나뭇가지에 이름 모를 파란 잎의 어린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어떻게 자랄 수 있을까 궁금했다. 새가 씨앗을 물고 와서 이곳에 떨어뜨렸는지 아니면 나뭇가지에 새의 배설물이 그곳에 붙었는지 알 수 없다. 겨우살이란 식물은 새똥에 묻어나와 나뭇가지에 자란다고 알고 있었지만, 이것은 아니다 싶었다. 어쨌든 묘한 동거를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신비스럽다. 이대로 소나무 품속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지만, 갈 길이 멀어 빠져나왔다.‘주명기 효자비’의 비문을 번역한 안내문을 살펴보았다. “주명기(朱命杞)는 본관은 신안(新安)이며 호는 치암(治巖)이고 지평(持平) 경안(景顔)의 후손이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나, 전신불수가 된 아버지를 정성껏 모셨다. 아버지가 병으로 지친 원기를 회복시키고자 매일 붕어죽을 만들어 드렸는데, 추운 겨울에도 강으로 나가 얼음을 깨고, 그물을 놓아 붕어를 잡았다. 아버지 병이 위급할 때는 손가락을 계속 끊어, 그 흐르는 피를 받아 죽에 타서 드시게 하여 소생시켰다. 부친상을 당하였을 때는 여막을 치고 묘를 지켰다. 바쁜 와중에서도 효경과 소학 등 유학 관련 서적을 탐독하여 성리학과 관련한 나름의 해설서를 만들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다. 이와 같은 효행을 유림이 나라에 건의하여 포상과 함께 1875년 정려되고, 사헌부 감찰에 증직되었다. 1877년(고종 14)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비를 세웠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늘 푸른 소나무처럼 부모에 효도하라는 메시지로 들렸다.요즘 인구가 감소한다고 난리이다. 머지않아 사라지는 자치단체 시군이 생기고, 국가 경쟁력이 떨어져 경제가 어려워진다고 한다. 과거에는 경제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고 출산 억제 정책을, 지금은 반대로 출산 장려 정책을 내놓았다. 전쟁 중에서도 많은 자녀를 낳았고 전쟁의 후유증과 보릿고개라는 먹고 살기 어려운 시기에도 인구는 늘어났다. 지금은 경제 규모도 크고 훨씬 잘 살면서 결혼을 꺼리고 자식 낳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정부는 결혼과 출산 장려 정책으로 주택 마련 대출에 특혜, 육아비 지원, 육아휴직 등 모두가 경제적인 문제로 보고 있다. 공감하는 바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다. 그보다 부모와 자식 간 사랑과 효도가 먼저란 생각이 든다. ‘주명기 효자비’에서 보듯이 자식이 부모에 지극 정성으로 효도한다면 누가 아이 낳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부모의 재산을 탐하고 노리는 자식들로 인하여 부모는 효도계약서를 요구하고 있다. 또 자식은 돈 없는 부모를 업신여기며 천대하기까지 한다. 부모는 자식이 두렵고 자식은 부모가 부담스러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판국에 누가 자식을 낳아 부모가 되고 싶을까. 부모는 자식을 사랑으로 자식은 부모에게 효를 다하는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것이 먼저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모는 머지않아 자신의 자화상이라는 것을 우리 젊은 세대는 알아야 할 것이다. 처진 소나무 노거수를 효행송(孝幸松)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싶다. 부모에 대한 효와 자식에 대한 사랑은 행복의 바로미터가 아닐까.울진 행곡리 효행송(孝幸松) 노거수는…1999년 4월 6일 천연기념물 419호로 지정됐다.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 672, 고도 37m, 경도 129.368483, 위도 36.972772에 위치해 있다. 나이가 약 350년(2012년 기준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약 14m, 가슴높이 둘레는 약 3m, 수관 폭은 15m에 이른다. 수형은 처진 우산형으로 가지가 가늘고 길어서 아래로 늘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충북 보은의 정이품 소나무와 유사하다. 천전동 마을이 생겨날 때 심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 마을의 상징목으로 보호받고 있다. 소나무는 소나무과의 상록침엽교목으로 솔, 소나무, 송목(松木) 또는 소오리나무로 부르기도 한다. 나무껍질은 붉은 갈색으로 거북의 등처럼 갈라진다. 꽃은 4월 하순부터 5월 상순에 핀다. 소나무는 우리나라 수종 중에 가장 넓은 분포 영역을 가지며, 중국, 러시아, 일본 등에도 분포한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1-10

아름드리 곧은 줄기 한민족의 기상 닮아

지구에서 가장 큰 유라시아대륙의 동쪽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시작과 끝이다. 시작과 끝은 하나이다. 동에서는 시작이요, 서에서는 끝이다. 한반도는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난다. 다시 말해 백두산 천지에서 시작한 백두대간은 남으로 향하면서 동서로 지맥을 뻗어 골격을 유지하고 태백산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남서로 방향을 바꾸어 지리산 천왕봉에 안착한다.대간은 하나의 정간과 열세 개의 정맥을 만들고 대간을 사이에 두고 정간과 정맥은 크고 작은 산과 강을 만들었다. 산은 강을 건너지 못하고 강은 산을 넘지 못한다. 강은 산을 구분 지우고 산은 강의 발원지이다. 이렇게 산줄기와 물줄기는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람의 몸에는 혈맥이 흐르듯이 산과 강은 지맥이 흐른다. 인걸은 지령이란 말이 있다. 특히 백두산 천지와 지리산 천왕봉은 예로부터 신성시하며 경배하였다. 명산인 지리산은 영호남을 품고 지맥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지리산 반야봉과 명선봉을 양어깨에 올려놓고 있는 구름도 쉬어간다고 하는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 와운 마을, 지리산 해발 800m 고지에 신령스러운 할매송과 할배송이 천년의 세월을 품고 살아오고 있다. 그 이름은 천연기념물 424호 ‘지리산 천년송’이다. 우리 한민족 기상의 표상이다. 동해에 솟아오르는 새해 아침 햇귀의 기운을 지리산 천년송 노거수가 받아 대간에 뻗어 내린 정간과 정맥의 기운에 점화시키리라.새벽 일찍 하얀 숫눈길을 밟으며 지리산 치맛자락 주름 속을 들추며 산중 와운 마을로 향했다. 손전등 불빛이 어둠을 밀어내자, 일행의 분신인 그림자가 나타나 동행해주어 적적함을 덜어 주었다. 천상의 마을로 가는 심심 계곡의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어둠 속에 반짝거리며 쏟아져 내렸다. 마침내 푸르스름한 동살에 감싸인 ‘지리산 천년송’이 얼굴을 내밀었다. 나도 모르게 경이로움에 고개를 숙이고 두 손 모아 경배했다.장정 세 사람이 두 팔을 벌려 안아야 할 만큼 거대한 풍채였다. 장엄한 모습은 우리 민족의 곧은 절개와 굳은 의지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아름드리 곧은 줄기는 거북등 같았다. 검고 거친 육각형 주름은 인고의 세월을 방증했다. 푸른 치마 속 감추어진 붉은 속살의 수줍음은 한민족의 심상이런가 싶다. 하늘로 뻗어 올린 줄기의 기운은 공간의 틈새를 가지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었다.지리산 능선에 우뚝 선 장송(長松)일지라도 바람이 원하면 춤을 추고 허리를 숙였을 것이다. 구름이 심술을 부려 장대비로 두들기면 제풀에 꺾일 때까지 고스란히 맞으며 순응했을 것이다. 하얀 눈이 내리는 날이면 푸름은 더욱 날을 세웠을 것이다. 곧은 절개와 굳은 의지, 인내와 순응은 자연으로부터 배운 지혜가 아닐까 싶다.장송의 곧은 줄기에서 올곧은 정직한 기개를 보았다. 만 가지의 곡선에서 타협의 부드러운 미를 보았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기운! 잎에서 뿜어내는 녹색 향기! 엄숙하고 과묵한 풍모! 고결한 기상! 진리와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진선미의 결정체이다. 아~ 이것이 천년 삶의 원천이다. 나무는 인간의 스승이다.” 경이롭고 신비스러움에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시간의 흐름도 잊었다. 찬란한 아침 돋을볕이 천년송 가지에 내려앉았다. 펼쳐진 설산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환희의 전율에 오감이 곧추섰다. 들숨과 날숨으로 희망의 풍선이 부풀어 올랐다. 어디선가 이름 모를 산새가 파란 하늘로 날아올랐다. 점점이 보이다가 하늘을 여행하는 흰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바람은 나뭇가지 눈을 털어내고 달랑달랑 매달린 솔가지 이슬방울은 아침 햇살에 영롱하게 빛났다. 해가 중천에 왔을 무렵 와운 마을 주민들이 지리산 천년송으로 올라왔다. 먼저 할배송에 정성껏 장만한 돼지머리를 비롯한 산중 음식으로 제사를 지냈다. 전국에서 온 관광객들의 일부는 제사에 참석했다. 그들은 마을과 주민들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했다.하늘의 천신을 이어주는 할배송에 재앙을 피하고 복을 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할배송에 오방색 옷을 입히고 기원 주머니를 매달았다. 장구와 북을 치면서 흥건하고 질펀하게 한바탕 춤사위를 벌였다. 모두가 한패가 되었다. 천신도 지신도 흡족하였으리라. 지금 이곳에는 지난 아픈 상처도 아물고 오직 평화와 즐거움만이 있을 뿐이었다.지리산 천년송은 푸른 날개를 활짝 펴고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모습이었다. 마치 남원 광한루에서 그네를 타고 푸른 하늘로 날아오르는 춘향이 같았다. 춘향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절개도 ‘지리산 천년송’ 기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2024년은 갑진년(甲辰年) 청룡의 해이다. 비상하는 청룡처럼 영호남을 품은 ‘지리산 천년송’의 새해 힘찬 사랑의 기운이 영호남을 뛰어넘어 한반도 전역을 뜨겁게 달구리라 소망한다. 천연기념물 노거수란 뭘까?문화재보호법과 시행령에 그 절차와 기준이 정해져 있다. 천연기념물 노거수란 오래되고(古木) 거대한(巨木) 나무를 말한다. 노거수의 품격으로는 천연기념물, 기념물, 보호수가 있다. 천연기념물은 인위적이거나 자연적으로 형성된 국가적, 민족적 또는 세계적 유산으로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또는 경관적 가치가 큰 노거수를 말한다.역사적 가치로는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고유한 식물로 저명한 것 ▲문헌, 기록, 구술 등의 자료를 통하여 우리나라 고유의 생활 또는 민속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 ▲전통적으로 유용하게 활용된 고유의 나무로 지속해서 계승할 필요가 있는 것이어야 한다.또한, 학술적 가치로 ▲국가, 민족, 지역, 특정 종으로 학술적가치가 있는 것 ▲특수한 환경에 자생하거나 진귀한 가치가 있어 학술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어야 한다.경관적 가치로는 ▲자연물로서 느끼는 아름다움, 독특한 경관 요소 등 뛰어나거나 독특한 자연미와 관련된 것 ▲최고, 최대, 최장, 최소 등의 자연현상에 해당하는 식물이어야 한다.노거수(老巨樹)는 거목(巨木), 노목(老木), 명목(名木), 신목(神木), 당산목(堂山木), 정자목(亭子木) 등으로도 불린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1-03

마침내 하늘 닿은 그곳에 만고충절 ‘장군솔’

구름 위를 거닐면서 선녀를 만나는 꿈을 꾸었다. 길몽이라 믿으면서 또 잠이 들었다. 아침 안개가 무언가 감추려는 듯 산허리를 감쌌다. 겨우 찾은 입구에는 두 마리의 개가 지키고선 낯선 이방인을 보고 연신 짖어대었다. 잭이 콩나무를 타고 하늘나라 거인의 집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안개구름 속으로 한 계단 한 계단 나무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랐다. 70도 경사진 계단은 397개나 되었다. 오르다가 멈추어 가쁜 숨을 고르고 또 오르기를 반복하여 마침내 하늘에 닿았다. 고생만큼 기쁨은 컸다. 계단으로 시작해 계단으로 끝나는 곳에 영양 답곡리 천연기념물 만지송 노거수가 기다렸다. 그 아름답고 웅장한 모습에 놀랐다. 이런 묘한 감정은 언제, 어디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천상의 선녀를 만난 것처럼 몽환적인 분위기에 빠졌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주민들은 이 나무를 ‘장수 나무’ 또는 ‘장군송’으로 부르기도 했다. ‘어떤 장수가 이 나무를 심으면서 나무의 생존 여부가 자신의 성공과 실패에 연결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인이 이 나무에 지극정성으로 빌면 나무의 영험함으로 아들을 낳게 된다는 속설도 함께 전한다.” 나라를 위해 전쟁터로 나가는 장수의 성공과 실패가 나무의 살고 죽음과 연결된다고 하니 주민들에게 나무는 태극기와 같은 애국심의 상징물이 되고, 만고충절(萬古忠節)의 나무로 마음속에 심어졌을 것이다. 어찌 보호하지 않을 수 있을까. 또한 마을을 보호해 주는 신통한 능력까지 있다고 주민들은 믿고 있다. 40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아름답고 웅장한 소나무 노거수를 그 옛날 나무를 심은 장수를 생각하면서 만고 충절의 ‘장군솔(將軍松)’이라 별호를 붙여주고 싶다.아름답고 웅장한 장군솔을 무엇으로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자연은 신이 창조해낸 가장 위대한 예술이며 모든 예술의 영원한 주제이다. 소나무 노거수의 형태적 아름다움과 내재 된 정신적 미학을, 푸른 잎과 붉은 가지의 조화를 화가라면 어떻게 표현할까? 화려한 색감의 수채화가 좋을까? 은은한 멋이 있는 수묵화가 좋을까? 신라의 화가 솔거라면 늘 푸른 잎에서 희망을, 붉은 가지 용틀임하는 모습에서 용기를 모두 함께 담아 그려놓을 수 있을 텐데. 나무와 숲은 음악 작품의 소재이고 주제이며 악상 발견의 장소이다. 자연의 노랫소리 들린다. 새소리, 벌레 울음소리,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바람 소리 등 묘한 소리가 하모니가 된 원시적 자연의 노랫소리다. 자연이 만든 화음을 들으니, 마음이 정화되고 안정된다. 숲에서 들리는 자연의 소리로도 훌륭한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느끼는 감정을 음악가라면 어떻게 표현할까? 베토벤과 모차르트라면 피아노나 바이올린 소리로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산림 문학 시에다 곡을 붙여서 만든 서정적인 가곡으로 표현해 보면 어떨까. 최상의 감정 표현이 그저 ‘좋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 슬플 뿐이다.바람이 솔가지를 스쳐 지나간다. 묘한 바람 소리에 귀 기울여 들어본다. 바람의 세기에 따라 미세한 감정의 차이를 느낀다. 바람이 솔가지를 스칠 때마다 쉬이익, 쉬이익하는 통소 소리 같은 송뢰가 들리고 때로는 솨악, 솨아악 하는 파도 소리 같은 송도가 들린다. 미세한 자연의 솔바람 소리의 떨림이 나의 감정선을 자극한다. 어느 악기라도 이런 자연의 소리를 그대로 흉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평소에는 시끄럽게만 느껴졌던 소리가 이렇게 아름답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통방통하다.사진작가라면 사실 그대로를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사진 한 장 속에는 소리, 냄새 등 무궁무진한 스토리가 있다. 사진은 인간적이면서도 자연이 지니는 원초적인 에너지를 함축하고 한순간을 영원히 정지시킨다. 그림이 덧셈의 예술이라면 사진은 뺄셈의 예술이다. 주변의 군더더기는 모두 없애 버리고 중점적인 포인트만 담아 강조할 수 있다. 가장 아름다운 풍광과 모습은 순간적으로 나타나 순식간에 사라진다. 사진은 이 순간을 담아낼 수 있으니 오늘 마음껏 실력 발휘 좀 해 볼까 싶다. 장군솔의 이모저모를 이곳저곳 옮겨 다니면서 순간의 아름다운 모습을 렌즈에 훔쳐 담고 가슴에도 담았다. 지금의 아름다운 느낌의 감정을 시로 표현해 본다.‘천상의 만고충절 장군솔/안개구름 사라지자늘 푸른 옷에 옥구슬 별이 대롱대롱/아침 햇살에 반짝이네.천상의 만고충절 장군솔/안개구름 사라지자붉은 속살의 기운/가슴을 불태우네.‘범인이 고상하고 멋진 표현을 한다는 욕심 자체가 애당초 부질없는 짓인 것 같다. 문학, 예술가들이 와서 장군솔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펼쳐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해 본다. 자연이 빚어놓은 장군솔은 어느 예술작품보다 훌륭하다. 또한 문학, 예술작품 대상물이기도 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천상에서 놀다가 산에 기대어 세워 놓은 긴 나무 사다리 계단을 타고 다시 인간 세상으로 내려왔다. 마을에서 장군솔을 바라보니 동산에 떠오르는 푸른 보름달 같기도 하고, 서산에 걸린 푸른 반달 같기도 하다. 용이 꽈리를 틀고 있는 모습 같은 붉은색의 만 가지가 아직도 머리에 맴돌고 있다. 나무는 살아 있는 모습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서로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나무야말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예술품이고 숲은 그들을 진열한 박물관이다. 장군솔의 건강함에서 아름다움을 보았고, 아름다움에서 건강함을 보았다. 건강과 아름다움은 하나로 연결되는가 보다. 우리의 아름답고 행복한 모습도 건강한 삶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장군솔을 보고 깨달았다. 채우지도 못할 물질적 욕심은 뒤로하고 감추어진 노거수를 찾아 헤매고 찾은 노거수의 숨겨진 고유성과 진리를 또 찾았다. 수백 년 쌓아온 노거수의 공덕과 지혜는 문학, 예술이 되어 민속 문화의 꽃을 피우고 우리 삶에 즐거움과 행복을 안겨주었다. 문학은 우리 삶의 질을 높여주고, 예술은 우리 영혼을 맑게 해 준다. 한 해를 보내면서 영양 답곡리 장군솔에 나라의 번영과 평화가 무궁하리라 빌어본다.장군솔 노거수의 이름이 지어진 사연장군솔 노거수는 영양군 석보면 답곡리 산 159번, 고도 313m, 위도 36.54343, 경도 129.138582에 위치해 있다. 수령 420년, 키 15m, 가슴둘레 4.4m, 앉은 자리 폭 20m. 다섯 줄기에 23개의 지지대가 설치돼 있다. 1982년 11월 10일 보호수로 지정됐다. 1998년 12월 23일 만지송(萬枝松)이라는 이름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다. 만지송이라는 이름은 가지가 여러 갈래로 갈라진 모양에서 유래했다. 소나무 품종은 반송(盤松)이다. 나무의 생김새가 쟁반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3-12-27

어부들의 안전과 풍어를 가져다 주었던 ‘죽변항의 수호신’

겨울 해변의 풍경은 삭막하고 차갑게 느껴진다. 그러나 해변 모래밭을 거닐고 있거나 산책하는 연인을 볼 때면 낭만적인 분위기가 마음을 따뜻하게 녹인다. 붉은 기운을 뿜으며 동해에 솟아오르는 아침 해맞이는 언제나 가슴이 벅차오른다. 푸른 바다에 보석처럼 반짝이는 물비늘은 한 줄기 햇살이 만든 자연의 걸작품이다. 그 풍경은 언제 보아도 장관이며 늘 나에게 용기를 심어 준다. 더더욱 고기잡이배들이 새벽의 정적을 깨고 뱃고동 소리를 울리면서 항구를 드나들 때면 항구의 아침은 활기에 차 넘친다.그 옛날 신비의 섬 울릉도에서 바다를 건너 이곳 울진 죽변항에 정착한 노거수가 있으니 바로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297-2번지에 주소를 두고 살아가고 있는 향나무이다. 그는 출렁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찬란한 아침의 장관을 맞이하는 죽변항의 수호신이다. 그의 삶을 높이 평가하여 나라에서는 1964년 1월 31일 천연기념물 제158호로 품계를 높여주었다. 지난해 여름 울진에 살고 있는 집안 조카 집을 아내와 함께 방문했다. 가족과 함께 해변에 있는 횟집으로 점심 먹으러 갔다. 물회가 유명하고 맛있다고 하여 한 그릇을 뚝딱 먹고는 죽변항에 정박해 놓은 낚싯배를 보러 갔다. 그는 바다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을 배에 태워 연안 근처 체험 낚싯배를 운전하고 있었다. “겁나고 위험하지 않니?”라고 물어보니 해양경찰과 항상 연락하고 있어 안전하다고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대왕 문어를 잡고 낚싯배를 운영하는 것이 재미도 있고 행복하다고 덧붙여 말했다.우리를 ‘폭풍 속으로 드라마 세트장’으로 안내하여 주변의 아름다운 바다 풍경을 구경시켜 주었다. 우린 ‘하트해변’을 보면서 ‘용의 꿈길’을 걷고 등대를 둘러보고 죽변항을 구경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는 “세계 4대 인류 문명의 발상지는 모두 강을 끼고 있었지만, 오늘날 세계 80억 인구 중에 삼분의 이가 바다에서 60km 이내에 살고 있다. 바다가 우리 삶의 중심축으로 변해가고 있다.”라고 말해 주면서 자긍심을 심어 주었다.지난해 제대로 보지 못한 울릉도에서 왔다는 후정리 향나무 노거수를 올해 ‘나즐로(나 홀로 즐겁게) 노거수 여행’에서 마주했다. 그는 1916년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발행 ‘거수(巨樹)·노수(老樹)·명목지(名木誌)’ 기록에 416살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올해는 523살이 된다. 산 나이로 따지면 죽변항의 터줏대감이다. 이를 주민들도 인정하고 죽변항 수호신으로 경배하며 제사를 모시고 있다.향나무 노거수 전설에 콘텐츠의 옷을 입혀본다. “그 옛날 죽변항은 괭이갈매기가 모래밭에 앉아 졸거나 창공을 나르며 고깃배를 호위하고 있다. 어부들은 작은 항구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바쁘다고 총총거리며 뛰거나 서둘지도 않는다. 느긋하게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향나무 한 그루가 괭이갈매기 안내를 받으며 울릉도에서 망망대해 동해를 건너 울진 죽변항에 도착했다. 주민들은 울릉도에서 떠밀려온 것으로 알고 울릉도가 바라보이는 바닷가 언덕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향나무는 밑둥치에서 두 가지로 하늘로 뻗어 자랐다. 한 줄기는 곧게 하늘로 자랐으나 다른 한 줄기는 도로변으로 비스듬히 누워 자랐다. 가지는 아래로 처졌다. 마을 주민들은 더 이상 쓰러지지 않도록 서로의 몸에 쇠사슬로 묶거나 지팡이로 지지해 주었다.그리고 보니 쌍둥이 향나무 노거수라 해도 좋을 듯하고 처진 향나무 노거수라 해도 좋을 듯하다. ‘쌍둥이’란 말은 함께 한다는 외롭지 않다는 느낌이 있으나 ‘처진’다는 말은 뭔가 힘이 빠지는 느낌이 있어 아무래도 ‘쌍둥이’란 말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주민들의 사랑에 감동한 향나무는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어부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풍어를 가져다주었다. 향나무 노거수는 주민들의 보살핌을 받고 주민들은 향나무의 멋진 모습과 진한 향기에 기쁨과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서로 상생하면서 사랑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향나무는 울릉도와 울진 죽변항을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 맺어 주었다”푸른 하늘 흰 구름의 배경에 구불구불한 가지에 몽실몽실한 잎은 향나무 고유의 미를 한껏 높여 놓았다. 눈길을 뗄 수 없다. 아름다움에 빠져 한참을 몸과 마음이 정지 화면이 되었다. 고사 된 두 가지를 제거하지 않고 방부, 방수 처리하여 미라로 만들어 놓았다. 동물 형상의 조형 작품 같았다.또 다른 향나무 두 그루는 하나는 언덕 아래로, 다른 하나는 언덕 위로 누워서 자라고 있다. 땅속에 있어야 할 뿌리가 거의 모두 땅 밖으로 노출되다시피 하여 보는 사람으로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했다. 나무의 생명의 끈질김은 우리 인간의 생명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향나무 노거수는 당집을 가지고 있었다. 통나무집으로 지붕은 기와를 얹었다. 태극 문양을 가슴에 달고 바닷가 도로변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인사를 주고받으면 앞으로 수백 년 세월을 또 보낼 것이다. 햇살이 내리쬐는 바다에는 윤슬이 보석처럼 반짝거리고 향나무 노거수 푸른 잎에는 바닷바람이 입맞춤하고 있다. 조그만 항구의 쌍둥이 향나무 무궁하여라. 울진군민의 지극한 나무 사랑울진군은 맑고 깨끗한 바다와 하늘, 그리고 솔이 울창한 산을 가지고 있는 살기 좋은 아름다운 고장이다. 특히 울진군 죽변항은 해산물의 보고이며 동해안 어업 전진기지이다. 울릉도와 직선 거리상 가장 가까운 곳이기도 하다.향나무는 측백나뭇과의 상록침엽교목으로 전국에 분포한다. 동해안 지방의 해안과 울릉도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잎에는 인엽과 침엽의 종류가 있다. 침엽은 흔히 3륜생이고 아래가지에 많다. 인엽은 둔두로서 끝이 가지에 거의 붙는다. 자웅이주 또는 드물게 자웅동주로서 꽃은 4~5월에 피고 열매는 다음 해 9~10월에 자흑색으로 익는다.본 향나무는 1916년 일제 강점기에 조사한 내용을 보면 한반도 전역에 향나무 25주 중 경북에 3그루가 기록되어 있다. 당시 수고는 9m, 수령은 416년으로 기재되어 있다. 현재 수령을 계산하면 523년이 된다. 키는 13.5m이다. 울릉도에서 파도에 떠밀려 내려온 향나무 노거수를 심었다는 전설로 보아 울진 군민의 나무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3-12-20

노거수 아래 망망대해… 우주에 떠 있는 지구를 상상케 해

포항에서 울진으로 동해 해안선을 따라가 보면 올망졸망한 아름다운 크고 작은 항구가 즐비하다. 바다는 맑고 푸르며 해안 모래밭은 파도에 씻겨 햇살에 반짝인다. 해안을 따라 바다에 닿아있는 나지막한 산자락 모양이 예쁜 주름치마 입은 여인의 모습으로 겹쳐 보인다.천혜의 아름다운 섬 울릉도를 가장 짧은 시간에 오가는 뱃길이 여기 후포항에 있다. 작지만, 아름다움으로 치면 후포항은 세계 3대 미항이라 불리는 나폴리, 시드니, 리우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다.영덕과 울진 경계 사이에 있는 후포항 등기산 공원은 신석기 유물을 품은 팽나무 노거수가 자생하고 있다. 자연과 문화, 역사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마을 동산처럼 오르기 쉬워 많은 사람이 찾는다. 볼거리와 먹을거리 못지않게 생각거리가 있는 곳, 울진군 후포항에 있는 등기산 공원의 신석기 유물을 품은 팽나무 노거수를 찾았다. 먼저 등기산 정상에 있는 원통 모형의 신석기 유적관에 들어섰다. 유적관에는 이곳 등기산에서 발굴된 BC 10,000년에서 BC 2,000년 사이 살았던 우리 조상의 무덤 모형을 전시해 놓았다.계단식 구덩이에 집단 매장 무덤으로 20세 전후로 보이는 남녀 유골이 40인 이상으로 나왔다고 한다. 유골의 남녀 성비가 비슷하다고 한다. 그리고 100여 점이 넘는 장대형 석부들이 유골 위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농경 생활 이전의 수렵 생활을 하던 우리 조상의 무덤으로 여타 발굴된 무덤과는 달랐다.불현듯 인신 공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40인 이상의 유골 주인이 20대 전후의 젊은 남녀로 성비가 비슷하다는 것도 그렇고 전망 좋은 언덕 위 구덩이에 묻혔다는 사실도 그렇다. 고대 중국에서는 동지에는 하늘에 제사 지내고 하지에는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전 세계 어디서나 신에게 올리는 제사는 제물을 바쳤다. 이때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 공양이 최고의 제물로 여겼다고 한다.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는 것이 너무 끔찍한 일이라 머리를 도리질하면서 부정해 보지만,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인신 공양은 바다와 하늘에 대한 최고의 예우가 아닐까 싶다. 사실 하늘에 지내는 제사의 제물보다 정성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그 간절함의 소원을 빌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그 이상의 정성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신석기 유적관을 나와 등기산 공원 산책길을 걸었다. 팽나무 노거수 아래에서 먼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막힘없이 망망대해를 180도까지 시야를 넓혀서 볼 수 있다. 수평선은 희끄무레한 물안개 띠로 직선이 아닌 둥그렇게 그어져 있다. 이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끝도 없는 무한히 넓은 우주 공간에 떠 있는 지구를 상상해 본다.배를 육지로 인도하는 작은 항구의 등대가 있는 이곳은 바다를 조망하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바다는 물론 아름다운 후포항과 주변의 자연경관을 오롯이 한눈에 넣을 수 있다. 바다에 떠 있는 조각배는 밤하늘에 떠 있는 초승달을 연상케 한다.어찌 보면 바다와 하늘은 닮은 듯 다르고 다른 듯 닮았다. 여자와 남자, 어머니와 아버지와 같은 음양의 느낌으로 와닿았다. 먼바다 수평선 구름 띠에 숨어 바다와 하늘이 밀회를 즐기고 있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너머는 볼 수 없으나 상상하는 것으로 즐겁다.팽나무 노거수에 눈길이 옮겨갔다. 위아래를 톺아보면서 그의 묘한 모습에 소름이 돋는다. 나무는 곧은 한줄기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이 보통인데 눈앞의 팽나무는 여러 가지가 뭉치고 꼬이고 비비대면서 묘한 모습이다. 위로 또는 옆으로 뻗어나간 가지의 모습이 어쩜 그렇게 특이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지. 보는 이로 하여금 넋을 잃게 한다. 카메라 렌즈에 들어온 모습은 낚시꾼에게는 대어이고, 약초를 캐는 사람에게는 대물처럼 나에게는 대박이다. 자연의 걸작품을 카메라 렌즈에 담는 것은 누구의 허락도 제지도 없다. 순간의 멋진 모습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세월이 해풍과 합작한 팽나무의 신비스러운 모습을 톺아보니 기쁨과 즐거움 배가된다.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언덕 위 팽나무는 과히 대장부 기개답다. 앞뒤 위아래 탁 트인 언덕 위라 무엇 하나 막아주는 방패막이도 없다. 그런데도 세차게 휘몰아치는 바닷바람에 맞서 늠름하게 살아가는 그 인내와 용기에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인내와 용기의 배짱을 좀 일찍 배웠다면 나 또한 살아가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가까이 다가가 살며시 두 팔 벌려 안아 본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온다. 눈을 감고 그 기운을 받는다. 지난 세월 힘들다고 포기하고 주저한 적이 얼마나 많았든가. 용기를 잃지 않고 참고 인내하면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면 더 나은 삶을 살았을 것이 아닐까 생각하니 아쉬움이 남는다.잘 다듬어진 공원 산책길에는 각 항구의 등대, 교회 모형, 전망대, 조형물, 스카이워크 등 다양한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햇살을 먹으면서 바닷바람에 춤추는 팽나무 노거수에 따뜻한 온기를 느낀다. 가까이하고 싶은 감정의 샘물이 솟는다.신석기 유물을 품은 팽나무 노거수는 묘한 모습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한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을 볼 수 있고 세계 3대 미향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후포항을 내려다볼 수 있는 등기산 공원을 ‘후포항 팽나무숲 공원’으로 부르고 싶다.팽나무에겐 최적의 환경 갖춘 등기산 공원팽나무는 해안단구 및 하안단구의 돌출 지형에서 통기성과 통수성이 우수한 토양 환경에서 잘 자란다. 뿌리가 발달 되어 강한 바람에도 견딘다. 그런 토양 환경이라면 등기산 공원이 최적지가 아닐까 싶다.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이 언제나 불어오고 있다. 하늘에는 햇살이 막힘없이 푸른 잎에 쉽게 닿을 수 있다. 동해안, 남해안 지역은 팽나무의 서식처이다. 팽나무는 가지와 잎이 무성하여 방풍림, 정자목으로 안성맞춤의 나무이다.신석기 유적관을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고 등기산을 지키는 자생 팽나무 노거수 품격을 높여주면 어떨까? 성주 성 밖 왕버들숲처럼 등기산을 ‘후포항 팽나무숲 공원’으로 조성하면 어떨까.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3-12-13

마을 뒤 높은 곳에 터잡은 거대하고 우람한 자태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에 따라서 인물의 태어남과 기질이 형성된다고 믿어 왔다. 그런 연유로 마을이나 산의 지형을 함부로 변형하거나 훼손하는 일을 싫어하고 못마땅했다. 10여 년 전인가 영덕 인량리 전통 민속문화 마을 노거수를 찾았다. 그때 알고 지내는 지인이 인량리 마을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사회적으로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나는 곳이라 하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마을 뒷산에 송전탑이 세워져 지나가게 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마을의 지기가 끊어지고 약해진다고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이 마을 출신 박약회 회장이며 인성교육 전문가로 변신한 한국 PC 아버지로 불리는 전 삼보컴퓨터 이용태 회장을 찾았다. 마을의 지기가 끊어지고 약해져 큰 인물이 나지 않을 수 있다면서 이 사업을 중단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때 이 회장께서 하시는 말씀이 걸작이었다. ‘요사이 마을에 아이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무슨 인물이 태어난다고 합니까?’ 마을 주민들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인량리 마을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을 등에 업고 넓은 평야를 안고 있다. 낙동정맥에서 발원한 송천을 사이에 두고 원구리 마을과 마주하고 있다. 풍수지리로 볼 때 배산임수형의 마을이 아닐까 싶다. 두 마을은 서로 경쟁과 협력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옛날부터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해 왔다. ‘영해부지(寧海府誌)’에 의하면 “인량리는 팔성종실(八姓宗室)이 거주하고 있는 곳으로 예부터 순후하고 예의와 겸양이 있고 효행과 학문이 높은 선비가 많아 벼슬이 끊이지 않으니 영해부 내에서 으뜸가는 마을이라 했다.” 재령이씨 이애(李璦)가 건립한 충효당 종택을 비롯하여 민속문화재 유산이 무려 9점이나 있는 마을이다. 민속문화란 민간 생활과 결부된 풍속, 신앙, 전설 등 민간에 전하여 내려오는 문화를 말한다. 특히 민속문화는 마을 주민과 마을 나무라 일컬어지는 동신목 노거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량리 마을에는 마을 뒤 산자락 충효당 종택과 은행나무(459-1번지), 마을 서쪽 비보림의 팽나무(438번지), 마을 앞 남쪽 들판 서낭당 회화나무, 팽나무(250번지) 노거수가 있다. 한 마을에 이런 다양한 노거수가 살아가고 있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지령(地靈)은 높은 산의 신령이 아니라 바로 마을 숲과 노거수가 있는 마을과 그 나무들이 지령이 아닐까 싶다.충효당 종택 은행나무는 1982년 10월 29일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나이 520살, 키 22m, 가슴둘레 5m가 넘는다. 앉은 자리 폭이 무려 24m로 면적은 130평이 넘었다. 암그루로 매년 많은 은행을 생산하고 있다. 거대하고 우람한 나무가 마을 뒤 높은 곳에 있어 멀리서도 그의 존재를 알아볼 수 있다. 은행나무 노거수는 마을의 전통 고유 경관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마을의 랜드마크 기능과 마을 역사의 표징이 되고 있다. 또한 충효당이라는 건축물과 입향조 이애란이라는 인물과 관련된 역사의 산 공유물로서 그 증거 및 보완 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다. 마을 서쪽 비보림은 2004년 4월 17일 새천년 기념 숲으로 지정되었다. 걸출한 품위와 멋있는 외모를 갖춘 팽나무 노거수는 2007년 2월 12일 보호수로 지정하였다. 나이는 350살이고 키는 14m이다. 가슴둘레는 3m가 훌쩍 넘고 앉은 자리 넓이는 90평이나 되었다. 비보림에는 마을 주민들이 느티나무, 주목을 심어 소나무와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풍수지리적으로 비보림(裨補林)은 풍수상의 모자라고 허한 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조성한 숲을 말한다. 엽승림(擫蕂林)은 풍수상의 불길한 기운이 마을에 미치지 못하도록 차단하기 위하여 조성한 숲을 말한다. 어쨌든 마을 숲은 방풍, 방수, 방온 등 미세 기후를 조절하고 지역 주민과 지역의 야생 생물들의 생활과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숲 생태계이다.팽나무 노거수 나무줄기 위에 어린 노간주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나무뿌리 부근에서 자란 여러 줄기가 자라면서 몸집을 불려 지금은 하나의 원줄기로 변환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화합의 상징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원추형 수형이 아름답다. 가로로 자란 큰 줄기에 세로로 자라는 어린줄기가 꼭 엄마 등에 업힌 어린아이 같다. 예전에는 당산목이었으나 지금은 마을 앞 서낭당으로 옮겨서 동신제를 지내고 있다. 거대한 팽나무 아래 함께 동거하고 있는 어린 회화나무의 모습이 안쓰럽게 보인다. 마을 앞 남쪽 들판 서낭당에 회화나무, 팽나무(250번지) 노거수가 살아가고 있다. 1996년 12월 6일 보호수 지정하여 기와로 얹은 돌담으로 경계를 지우고 남쪽으로는 철책을 둘러쳐서 당산목과 당우를 보호하고 있다. 태풍에 쓰러져 누워서 살아가고 있는 회화나무 나이는 500살이다. 가슴둘레는 약 3m, 키는 8m라 해야 옳은지 아니면 15m라 해야 맞을지 모르겠다. 상처가 나 곪아 있는 몸에 자라고 있는 줄기 모습이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기 모습으로 겹쳐 보인다. 엄마의 몸을 빌려 살아가는 염량 거미를 생각나게 한다. 누운 회화나무를 떠받들고 있는 팽나무 모습이 거룩해 보인다. 이제 팽나무와 회화나무는 한 몸으로 살아가고 있다.마을 숲과 노거수는 우리의 삶에 여러모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가치와 기능은 다양하다. 전통 민속문화로 자리매김한 마을 숲과 노거수를 땅의 효율성과 생활의 편리성만 따져서 함부로 훼손하거나 제거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서낭당에 세워진 정자에 마을 노인들만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외롭게 보였다. 옛날과 같이 손자 손녀와 함께 정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언제쯤 볼 수 있을까. 마을에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그날을 기다리며 어르신들의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미래 우리의 자화상을 보는 것만 같았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노거수는 어떤 가치와 기능을 가졌을까?전통 민속문화의 자연자산인 노거수는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아래 그걸 간략하게 요약해본다.△지구환경을 구성하는 환경재의 기능이다. 인류 공동의 자연자산 즉 공유자산으로서 금전적 가치가 아니라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의 비사용가치, 즉 존재가치가 있다. △학술적 잠재 자연식생의 기능이다. 자연적 기원의 노거수는 그 지역의 잠재 자연식생 정보를 제공한다. △생물다양성과 생물서식공간의 기능이다. 노거수 한 그루에는 수많은 생물 종의 삶의 터전이다. 지역의 생물다양성 중심지로서 지역 고유의 생물종다양성과 유전자 다양성을 저장하는 종자은행(Seed Bank)이다. △환경조절의 공익 가치이다. 노거수는 수원함양, 대기정화, 토양정화, 토사유출 방지, 산소생산, 소음방지, 기상완화, 쓰레기 처리 등의 다양한 공익적 가치를 유지하고 증진한다. △미적 가치이다. 자연미를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가치이다. △지역의 이정표 기능이다. 노거수종을 따라서 지명을 붙인 사례가 많다. △생명·우주 기능이다. 노거수는 지역 주민과 어린이의 영속적 교육재료가 되며 수령과 수명을 고려한 생물체의 생명환을 이해하는 학습자료이다. △교육, 홍보 기능이다. 노거수는 생태환경과 웰빙에 대한 영상매체를 이용한 교육적 수단으로 유효하며 생태관광 자산이다.

2023-12-06

수백년 한결같이 서로 품으며 마을의 수호신 되다

영덕군 창수면 수리마을에서 사계절을 맞이하고 보내며 전원생활을 한 지도 벌써 15년 훌쩍 넘었다. 영해에서 창수면 수리로 가는 농촌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다. 뿌리줄기에 붙어있는 고구마처럼 길 따라 옹기종기 붙어있는 자연부락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정겹다.마을마다 작은 마을 숲에는 당우와 함께 당산목이라 불리는 노거수가 있다. 주민들은 마을 수호신으로 모시고 동제를 지낸다. 특히 영해면 원구리 마을 숲 당산목은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집으로 오가는 길목에 있는지라 오갈 때마다 들리곤 한다. 이제는 나의 중간 기착지 힐링 쉼터가 되었다. 숲속을 거닐면서 나무가 뿜어내는 산소를 마음껏 들어 마실 수 있다. 마을을 둘러보면서 아름다운 고택과 정원의 나무들을 감상할 수 있다. 덤으로 마을 앞에 펼쳐지는 넓은 들판은 여름에는 푸름으로 왕성한 기운을 느끼게 하고 가을에는 황금물결로 마음에 풍성함을 채워준다. 힐링하기에 원구리 마을은 안성맞춤의 장소가 아닐까 싶다.원구리 마을은 낮은 언덕 자락에 터전을 잡은 마을로 넓은 들을 소유하여 예로부터 비교적 풍족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아왔다. 주민들은 넓은 들판과 고래불 해변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숲을 조성하고 자연을 가까이했다. 어린나무들은 세월에 힘입어 아름드리 큰 나무의 무성한 숲으로 성장하여 휴식처를 제공했다.또한 마을을 지켜주는 방패막이가 되고 아름다움과 품격을 높여주었다. 숲과 마을은 상생의 윈윈(win-win) 전략으로 자연생태계의 지속 가능한 발전과 공존의 이치를 터득했다. 그들은 서로를 품고 살아가는 나무와 주민들이다.숲속에는 많은 수종의 나무가 있지만, 주인공은 600살 되는 세 그루의 당산목 느티나무 노거수이다. 놀랍게도 당산목은 마을을 대표하는 영양 남씨, 무안 박씨, 대흥 백씨 삼 성씨의 단합과 경쟁의 시스템으로 묶어 놓았다. 삼 성씨는 당산목을 경배하면서 단합하고 때로는 선의의 경쟁을 했다. 그들은 힘을 모아 서원을 짓고 학문을 연마하고 정자를 지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향유하고 예와 학문을 숭상했다.한 마을에 성씨별로 서원이 세 개나 지어지고 정자가 세워진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나라가 없으면 가문도 없다는 애국정신으로 남의록, 남경훈, 박세순, 백충언, 백사언 등 임란 공신 다섯 명이 모두 삼 성씨의 종손이면서 의병장으로 나라 지키는데 앞장섰다는 미담은 듣고 들어도 다시 듣고 싶다.마을은 아니지만, 문중 간 화합의 장을 열어가고 있는 삼 성씨, 아산 장씨(蔣), 밀성 박씨(朴), 옥산 전씨(全)의 모임인 강선계(講先契)는 1391년경부터 지금까지 630년간 아름다운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마을 숲에는 소나무, 왕버들, 팽나무, 회화나무 등 많은 노거수가 있지만, 제단 앞에 있는 당산목 느티나무 세 그루는 600살 됨직하고 크기도 비슷하다. 제단 왼쪽 느티나무는 지상 50㎝ 높이에서 다섯 가지가 뻗어 하늘로 높이 솟아올랐다. 키는 21m, 몸 둘레 8m, 앉은 자리는 26m가 넘는다.오른쪽 느티나무는 지상 1m 높이에서 네 가지를 뻗어 하늘로 높이 솟아올랐다. 가운데 느티나무는 조금 늦게 태어났는지 양보의 미덕을 발휘하여 서쪽으로 45도 비스듬히 기울어 비켜나 자라고 있다. 양보와 경쟁의 질서를 조화롭게 지키면서 수백 년을 한결같이 평화롭게 숲의 가족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또 한쪽에서는 왕버들과 소나무가 형제처럼 함께 부대끼며 묘한 동거를 하고 있다. 곧은 절개의 소나무가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을 터이고, 왕버들 역시 큰 덩치와 힘자랑을 멈추지 않을 터인데 앞으로도 계속 사이좋게 공존해 갈 것인지 궁금하다. 저녁 햇살이 몸을 낮춘다. 대지에 엎드린 지피식물이 어둠의 이불이 펼쳐지기 전 마음껏 만찬을 즐긴다.마을의 무안 박씨 경수당 종택에는 아름다운 향나무 노거수가 건재하게 살아가고 있다. 1570년에 건립한 99칸의 종택 대청에는 퇴계 이황이 쓴 ‘경수당’ 현판이 있다. 그보다 나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124호 향나무에 더 눈길이 끌렸다. 나이가 무려 700살이 훌쩍 넘었다. 키는 6m, 몸 둘레는 3m이지만, 앉은 자리 둘레는 4.7m나 되었다. 울릉도에 자라고 있는 약 300년생 향나무를 경수당 건립자인 박세순(朴世淳)이 이식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향나무는 무미건조한 고택의 품격을 높여주고 있다. 향나무 노거수 한 그루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는 용을 그리고 눈동자를 찍는 것과 같은 화룡점정이랄까 금상첨화란 생각이 든다. 전통은 만들기도 어렵고, 지키는 것, 또한 어렵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노력 없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지키려는 의지와 노력이 합쳐질 때만 가능한 일이다. 아직도 세 문중이 집성촌을 이루고 오순도순 살아가면서 우리의 전통문화인 동신제를 매년 정월 대보름날 지내고 있다. 신의 경지까지 올려놓고 경배하면서 나무를 보호하고 사랑하는 민족은 세계사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도 어려울 것이다.나무 사랑, 나아가 자연 사랑으로 이어지는 전통 민속문화인 동신제가 차츰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원구리 마을의 ‘영양 남씨, 무안 박씨, 대흥 백씨’ 삼 성씨는 오늘날까지 동신제를 지내며 맥을 이어오고 있다. 마을의 단합과 결속의 중심인 된 마을 숲의 수목들이 주민들과 오래도록 장수하며 전통의 맥을 이어가길 기원해 본다.귀향한 남성근씨가 들려준 원구리 마을 동신제 이야기마을 숲속에 있는 당산목 주변을 깨끗이 청소한다, 마을 삼 성씨 어른들이 모여 앉아 왼쪽 세끼 줄을 꼬아 만든 금줄을 악귀와 부정을 막기 위해 제관들의 집에 두른다. 그리고 마당과 길에 황토를 뿌린다. 이때부터는 외부 사람들은 드나들 수 없다. 출입을 막는 것은 악귀가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마을 삼 성씨에서 각각 한 명의 제관을 선출한다. 제관으로 선출된 세 명은 1년 동안 흉사 등에 출입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나 지금은 한 달 보름 정도로 줄었다. 그동안 나쁜 생각도 하지 않고 몸과 마을을 정갈히 가다듬는다. 음력 정월 대보름날 하루 전날에 목욕재계하여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한다. 목욕은 용당 샘물을 이용하였으나 지금은 일반 목욕탕을 이용한다.영해 시장에 가서 동제에 사용할 제수를 마련한다, 먼저 생선가게에서 문어, 가오리 등을 산다. 그리고 과일 가게에서 사과 배 등을 산다. 마지막으로 떡을 준비한다. 제물은 크고 좋은 것을 골라 흥정하지 않고 달라는 대로 돈을 주고 산다. 소지를 준비하고 제기를 닦는 일은 제관만이 하는 일이다. 제수는 어물 위주로 하고 육고기는 닭고기만 사용한다. 제관과 마을 주민이 제당으로 가서 행사를 준비한다. 제물을 제단에 놓을 때는 바깥에서 안쪽의 순서로 놓는다. 이렇게 모든 준비는 끝이 난다.동신제를 올리는 순서는 먼저 제관과 참석자가 절을 하고 신을 맞이하는 참신을 한다. 그리고 초헌관이 땅에 있는 신이 세상으로 올라오라는 신호로 세 번 술을 따른다. 초헌관은 다시 절을 하고 참석자 모두 엎드린다. 그리고 축문을 읽는다. 아헌관이 두 번째 잔을 올리고 절을 한다. 종헌관이 마지막으로 잔을 올리고 절을 한다. 부복하고 산신제는 모든 참석자가 절을 하고 축문을 태운다. 신과 주민, 출향 인사 순으로 소원을 빌며 주민의 이름을 기재한 소지를 태워 하늘로 날려 보낸다. 모든 음식을 조금씩 잘라서 신을 위하여 주변 땅에 묻는다. 그리고 음복한다. 이렇게 동신제는 끝이 난다. 제관은 무릎도 풀고 옷도 벗을 수 있다. 오늘 있었던 동제 이야기를 나눈다.정월 대보름 아침에는 금줄을 벗기고 마을 사람 맞을 준비를 한다. 동신제 경비 등 결산보고를 한다. 주민들의 화합 시간을 갖는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3-11-29

“와송의 강인하고 끈질긴 생명력은 차라리 아름답다”

와송(臥松) 노거수는 우리 민족성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민족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한 기질을 민족성이라 말한다. 단일 민족인 우리 한민족은 절개와 지조가 있으면서 청초함을 갖추었다.척박한 토양 환경에도 끈질기게 살아가는 애국가에 나오는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이 한 줄의 가사가 증명해 주고 있다.고난을 극복하고 세계사에 우뚝 선 나라로 국제사회에 미담의 주인공으로 회자 되고 있다. 송죽매란(松竹梅蘭)은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사군자로 우리 조선의 선비들이 즐겨 심고 노래한 것을 보더라도 그렇다.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늘 푸른 소나무는 화려하지 않으면서 깨끗하고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청초하기까지 하니 우리 민족성과 많이 닮았다. 젊음의 기개처럼 젊은 소나무는 부러져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는 절개와 지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노거수가 되면 살아온 연륜만큼이나 지혜로움을 보여준다. 곧은 줄기의 불그스레한 모습은 엷은 미소를 띤 온화한 할아버지 얼굴 같다. 가지의 곡선은 세월의 연륜에서 빚어진 은은함과 부드러움, 공간 조화의 미덕을 보여준다.소나무는 우리 민족과 함께 동고동락한 반려자로 민속문화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삶을 보아도 그렇다. 할머니는 마을 당산나무인 소나무에 누구보다 먼저 새벽에 들러 아들딸 낳아달라고 소원했다. 그리고 아들딸 낳으면 할아버지는 집 사립문에 금줄을 치고 솔가지를 걸고 그해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그리고 죽으면 소나무로 만든 관속에서 마을 뒤 선산의 솔밭에 묻혔다. 우리 조상은 소나무로 시작해 소나무로 끝나는 인생사라 해도 좋을 것 같다. 포항시 장기면 두원리 386번지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소나무 노거수는 절개와 지조에 더하여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1992년 9월 14일 보호수로 지정하여 나라의 보호를 받고 있다. 나이는 340살이며 키는 15m, 가슴둘레는 3m 넘는다.뿌리 부근에 두 줄기의 형제가 나와 자랐는데 그중 한 줄기가 태풍에 밑둥치가 부러져 꺾이어 드러누운 채 살아가고 있다.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라 주민 누구도 가져가지 않고 자연 방치되었다. 소나무는 생명줄을 놓지 않고 죽을힘 다해 버티어 살아남았다. 아마 혼자 힘으로는 버티어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형제의 뿌리가 영양분과 물을 공급해 주었으리라. 한 형제가 넘어졌으니 일으켜 세우지는 못하더라도 뿌리에서 도왔을 것이다. 형제의 도움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비록 누워서 살아가고 있지만, 건재한 모습이 오히려 어느 소나무보다 진한 감동을 주었다.부러져 꺾어진 부분에는 벌레나 균의 침입으로 인하여 부식되었다. 그러나 삶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보통의 소나무라면 벌써 숨통이 끊어졌을 터인데 그 강인한 생명줄을 부여잡고 있는 모습이 애처롭다기보다 아름답게 여겨졌다. 참으로 기이하다고 할까, 경이로운 모습도 모습이지만, 살려는 강인한 의지력에 놀랄 뿐이다.몸은 비록 장애일지라도 그의 꿈과 이상은 푸른 하늘을 향하고 있음을 그의 모습에서 볼 수 있었다. 세월이라는 시간만이 만들 수 있는 자연의 걸작품이다. 누워서 살아간다고 와송(臥松)이라 부르고 싶다. 끈질긴 생명의 힘을 보여주는 불굴의 의지를 지닌 와송 노거수는 우리에게 귀감이 아닐 수 없다.얼마 전 신문 기사에 산주가 아름다운 소나무 노거수를 팔아서 주민들이 반발하는 기사를 읽었다. 원상복구 문제까지 번진 일이다. 아름다운 소나무는 정원의 조경수로서 최고의 나무라면서 값을 따지지도 않고 사는 경우가 흔히 있는 것 같다. 조경업자는 산이든 들이든 어디에 있든지 상관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사려고 한다. 물론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고 나무를 감상할 수 있는 공원이라면 그 또한 나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돈이 많다고 해서 개인의 정원에 함부로 사서 심는다는 것은 너무 이기적이라 생각이 아닐까. 여기 와송 노거수는 절대로 옮길 수 없다. 주민들이 허락하지 않겠지만, 어느 조경업자도 이식하여 살릴 재간은 없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손을 댄다면 와송 노거수는 지금까지 지켜온 절개와 지조를 죽음으로 증명해 보일런지도 모른다.소나무는 우리 민족성과 많이 닮았다. 오천 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은 동북아 작은 한반도에서 끊어질 듯하면서도 끊어지지 않고 그 맥을 이어왔다. 이웃 나라의 끊임없는 간섭과 침략에도 굳건히 살아남았다.강대국의 말발굽에 짓밟혀 가면서도 아픔을 참고 살아남았다. 제국주의 아래 씨를 말리려는 민족 말살에도 굴하지 않고 고초를 참으면서 맥을 이었다. 한반도를 붉게 물들이려 하는 세력의 집단으로부터도 푸른 기운을 싹틔우며 자리를 지켰다. 무소불위의 일부 세력의 권력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온몸으로 저항했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자유와 민주, 산업화에도 늘 그 중심에 섰다. 금융위기도 빠르게 극복하고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도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르고 슬기롭게 극복했다. 곧은 절개와 늘 푸른 소나무처럼 불멸의 민족으로 지구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민족을 닮은 소나무한낮이 기울 때 가을 햇살로 인해 소나무 노거수의 온전한 전체 모습을 사진기에 담기에는 어려웠다. 겨울, 그 모두가 잎을 떨구고 나목으로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소나무는 그때야 자신의 푸름을 자랑한다. 특히 눈이 내린 날에 더욱더 푸름이 빛을 발한다. 하얀 눈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겨울 소나무 노거수를 본다면 그 누구도 감탄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흰 눈과 푸른 소나무의 풍경은 우리 민족의 모습으로 겹쳐 보인다. 흰옷을 좋아하고 즐겨 입으며 푸른 기상을 닮으려는 우리 민족이 아니었던가. 주변 다른 나무를 적절히 제거하고 불굴의 의지를 상징하는 와송 노거수를 천연기념물로 격상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해본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3-11-22

고인돌 무덤 ‘호위무사’로 지켜온 200여 년 세월

아들이 없는 큰아버지 앞으로 입양이 되었다. 양부가 돌아가시자 졸지에 문중의 종갓집이 되고 아내는 덩달아 종갓집 며느리가 되었다. 일 년에 지내는 제사 만 4대 봉제사와 설 추석 명절 합쳐 매월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조상을 정성껏 모셔야 화를 면하고 복을 받는다고 하는 어릴 적 부모님과 마을 어른들의 말씀을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들어왔던 터여서 힘들었지만, 제사를 정성껏 모셨다. 나야 피를 받은 조상님이라 어쩔 수 없다지만, 아내는 그런 힘든 일을 감내해야 할 이유를 찾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추석 명절이 다가오면 조상의 묘소 찾아 벌초하고 묘사를 지냈다.매년 하는 일이지만, 옛날과는 달리 묘소가 있는 산이 수림으로 우거져 묘소로 가는 길이 없어지고 묘에는 잡풀과 어린나무들이 자라고 있어 벌초하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신문 기사를 통하여 벌초하러 나섰다가 벌에 쏘이거나 뱀 등에 물리어 곤욕을 치렀다는 기사를 종종 보았다. 그러다 보니 벌초도 자손이 아니라 대행을 해주는 업자가 생기기까지 했다. 머지않아 산에 매장을 하고 벌초하며 묘사를 지내는 매장 문화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 것이란 생각이 든다.오늘날 장례문화도 많이 변하고 있다. 장례를 집에서 행하던 풍습이 장례예식장으로 장소가 변했다. 매장 문화도 시신을 화장하여 유골을 납골당에 모시거나 수목장 등 다양한 방법을 선택하고 있다. 유골함을 묻고 봉분 없이 묘비만 세우기도 한다. 유골을 산천에 뿌려 묘 없이 장례를 치르게도 더러 하는 것 같다.특히 외국의 경우를 보면 상상하기도 어려운 끔찍하게 생각되는 것도 있다. 죽은 사람의 시신에 칼질하여 배를 갈라서 산 위에 갖다 놓으면 독수리가 달려들어 순식간에 살점 하나 없이 다 먹고 뼈만 남는다. 유족들은 기다렸다가 유골을 수습하여 갈아서 주먹밥을 만들어 던져주면 독수리는 그거마저 먹어버린다고 한다.어떤 지역은 사람이 죽으면 사찰 주변에 시신을 던져 놓으면 수십 마리 개들이 달려들어 시체를 먹어 치운다고 한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이렇게 장례문화가 다양한 것은 기후와 죽음에 대한 민속 신앙이 다르기 때문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청동기 시대 성행하여 철기시대까지 존속한 거석문화의 일종인 고인돌 무덤이 포항시 기계면 문성리 151번지에 팽나무 노거수가 묘비석처럼 함께 있다. 문성리 마을은 대한민국 근대화를 이룩한 새마을 운동 발상지이기도 하다. 근면, 자조, 협동의 정신으로 농촌 근대화를 이룩한 선구적인 마을이다.고인돌은 지역에 따라 한국과 일본은 지석묘(支石墓),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유럽에서는 돌멘(Dolmen)이라 불렀다. 고인돌은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어 전 세계적인 관심 속에 보존 관리되고 있다. 이곳은 지석이 있는 기반식 고인돌로 인근에서는 보기 드문 거대한 고인돌 규모이다. 지석은 죽은 사람의 이름, 생몰, 연월일, 행적, 무덤의 좌향 등을 적어 무덤 앞에 묻는 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곳 지석의 크기는 가로 185cm, 세로 35cm, 높이 45cm이며 주변에 여러 기의 무덤이 함께하고 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고인돌 무덤도 보기 어렵지만, 팽나무 노거수와 함께 있는 것은 더더구나 보기 어렵다.고인돌 무덤을 팽나무 노거수가 호위무사처럼 지키고 있다. 팽나무는 소금기와 바닷바람에 강한 수종으로 동해안과 남해안 지역에 해송과 함께 자생한다. 동남부 해안지방에는 마을 수호신으로 모시는 당산나무는 흔히 팽나무인 경우가 많다. 뿌리가 잘 발달 되어 있고 바람과 공해에 강할 뿐만 아니라 느티나무나 은행나무만큼이나 장수목이다.예로부터 방풍림이나 녹음을 위해 마을 주변이나 정자목으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자못 고인돌의 중압감 속에서도 팽나무 노거수의 친근감이 느껴져 쉽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팽나무 노거수는 키가 20m 되고 몸 둘레가 3m, 수관 폭은 17m가 넘었다. 1995년 11월 18일에 보호수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었다.푸른 담쟁이덩굴이 크고 묵중한 고인돌을 감싸고 푸른 이끼는 거대한 팽나무 노거수 몸을 감쌌다. 팽나무 노거수 열매는 가을이 되면 검붉게 익는데 까맣게 익은 것으로 보아 검팽나무인 것 같다. 인공인지 자생인지 모르지만, 팽나무 노거수 나이가 200살이 넘었다고 한다. 고인돌과 노거수에 금줄이 쳐져 있고 지석에는 술과 과일이 놓아져 있는 것으로 보아 팽나무 노거수는 마을 주민들로부터 제사를 받는 신목(神木)이었다.포항 노거수회를 창립하여 노거수 보호에 앞장서 오신 이삼우 노거수회 명예회장(현 기청산식물원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우리 민족은 노거수에는 신령이 깃들여 있다고 믿어 왔고, 울창한 삼림 속에는 신이 존재한다고 인식해 왔다. 노거수라는 자연물을 통하여 보다 큰 영감과 안녕을 기원했다. 단군신화 속에 나오는 신단수(神檀樹)나 신수(神樹),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박(朴)은 점을 치는 나무의 의미가 담겨있다. 이는 수목에 대한 선조들의 심원적 사고를 이해할 수 있다. 자연의 위대한 생명력에서 활력을 부활시키고 자연과 더불어 산다는 철학으로 자연과 친밀하여 위대한 감화력을 얻으려는 욕구의 발로이다.”고인돌 무덤만 덩그렇게 있는 것보다 팽나무 노거수와 함께 있는 고인돌 무덤이 더욱 친근감이 들고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한다. 우리의 장례문화도 산림을 훼손하는 매장 문화에서 산림을 보호하는 납골당, 수목장 문화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해 본다.동해안의 수목장 나무는 여타 나무보다 팽나무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름도 모르지만, 이곳에 묻힌 조상님의 명복을 빌고 팽나무 노거수의 무병장수를 기원한다. 고인돌 무덤에 묻힌 조상의 넋이 마을 수호신 팽나무로 화신한 것이 아닐까. 팽나무 노거수에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해 본다. 맑고 파란 하늘의 가을 햇살이 푸른 잎을 곱게 물들이고 있다.정겨운 단어 ‘포구나무’팽나무는 흔히 포구나무, 달주나무, 마태나무, 폭나무, 펑나무이라고도 부른다. 콩알만 한 팽나무 열매를 작은 대나무 대롱의 아래위로 한 알씩 밀어 넣고 꼬챙이를 꽂아 탁하고 치면 공기 압축으로 아래쪽의 열매는 팽 소리를 내면서 날아간다. 이것을 팽총이라고 한다. 팽총의 총알인 ‘팽’이 열리는 나무란 뜻으로 팽나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포구나무라고 하는 말이 더 친근하다. 해안가 배가 들락거리는 갯마을의 포구에는 어김없이 포구나무 한두 그루 서 있다. 포구에 그림처럼 서 있는 나무를 연상할 수 있는 포구나무란 말이 더 정겹다.20여 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는 고인돌 주변이 깨끗이 단장되었는데 지금은 잡풀들로 우거져 더 이상 들어가 볼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고인돌과 주변 수기의 묘지를 호위무사처럼 지키고 서 있는 팽나무 노거수는 아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문성리 마을은 근면, 자조, 협동 새마을정신으로 대한민국 농촌 근대화를 이룩한 선구적인 마을이다. 역사성과 희귀성, 문화유산을 지키는 보호수인 팽나무를 천연기념물의 반열로 품격을 올려주면 어떨까?/글·사진=장은재 작가

2023-11-15

바른 사회 만드는 효(孝)의 실천, 은행나무에게 배워볼까

어릴 적 초등학교 다닐 때이다. 교실은 부족하고 학생은 넘쳐나서 오전 오후반으로 나뉘어 수업했다. 때로는 야외에서 하나, 둘 구령을 붙이며 선생님 따라다니며 학교 운동장 나무숲 그늘에서 공부했다. 책도 공책도 연필도 필요 없었다.선생님의 몸짓과 말씀에 눈과 귀를 기울이고 부모님과 어른들에 대한 예절을 하나둘 배웠다. 바람이 불어 운동장 흙먼지를 덮어쓰기도 했지만, 그런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산이나 들로 돌아다니면서 흙과 나무와 노는 것이 일상생활로 자리 잡혔기 때문에 아무런 불편함도 느끼지 못했다. 친숙한 자연이 교과서이었다. 자연에 대한 호기심으로 마을 어른들에게 꼬리를 문 질문을 쏟아내면 아예 손을 내저으면서 그만 물어보라고 하시면서 학교 선생님에게 여쭈어보라고 했다. 궁금한 질문은 교실보다 야외에서 더 많았다.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오늘날과 같은 학교는 없었다. 학문과 예절은 지방 서원에서 가르쳤다. 학문뿐만 아니라 덕망 있는 조상을 배향하기도 했다. 오늘 명품 노거수 탐방은 고즈넉한 숲속 운곡서원에 있는 경주시 강동면 왕신리 78번지 은행나무 노거수를 찾았다. 서원과 은행나무는 그 옛날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운동장 나무숲 아래에서 글짓기 공부도 하고 숲과 나무를 대상으로 그림도 그렸다. 달리기할 때 목표물이 되거나 반환점이 되었다. 쉬는 시간에도 나무숲에서 놀았다. 숲과 나무는 교실이고 놀이터이며 교과서이고 친구였다.운곡서원은 조선 정조 1784년 세워져 안동 권씨 시조이자 고려 개국 공신인 권행 선생과 그의 후손 권산해, 권덕린 공을 배향하고 있었다. 오늘날 지방사립학교로 청소년을 교육했다. 서원 동쪽 계곡 용추대 위에 유연정(悠然亭)이 세워져 주위 자연경관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었다.운곡서원과 유연정, 은행나무는 한 세트로 여겨졌다. 나무 아래 펼쳐진 계곡 따라 흐르는 물소리, 숲속 나뭇잎 사이로 흐르는 바람 소리, 파도처럼 물결치는 숲속에서 지저귀는 새소리 등 이곳저곳에서 나오는 자연의 소리가 합쳐진 화음은 마음을 평온케 했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가을 햇살에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눈을 감고 천지의 소리에 몸을 맡겼다.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370년을 훌쩍 넘긴 은행나무의 장성한 줄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의 원천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경이롭다. 3m나 쭉 뻗어 올린 하나의 힘찬 줄기가 다시 여러 가지로 나누어 하늘로 솟구쳤다. 거침없음과 거대함에 놀랍다. 키가 무려 30m, 몸의 둘레가 6m로 어른 네 사람이 팔을 벌려 안아야 할 정도이다. 앉은 자리의 폭 지름이 26m나 되니 덩치만으로도 주변 모두를 압도하고 있다.노랗게 물든 은행잎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노란 단풍잎은 또 어떠할까, 바닥을 수놓은 노란 융단은 얼마나 부드러울까. 아기 이불 같은 부드러운 융단을 살며시 밟으면서 걷는 느낌은 또 어떨까. 수나무라 노란 은행은 볼 수 없지만, 대신 고약한 냄새를 풍기지 않아 좋다. 은행나무의 연륜과 거대함, 그리고 아름다움에 심취하여 진작 중요한 것을 놓칠 뻔했다. 눈의 현혹에서 벗어나 행단에서 제자에게 효도를 가르치는 공자를 상상해 보았다. 공자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전 문명권에 깊은 영향을 끼친 세계 3대 성인 중 한 사람이다.많은 사람이 운곡서원의 은행나무 노거수를 찾는다. 은행나무의 웅장함과 단풍의 아름다움만 즐길 것이 아니라 공자의 효에 대한 가르침을 자녀들에게 한번 상기시켜 주면 어떨까. 요즘 효를 물질적으로만 하려는 자녀들도 있는 듯하다. 효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은 효는 진정한 효가 아니다. 실제로 공자는 효가 도덕의 완성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라고 보았고, 최대의 덕목인 인(仁)도 효를 통해서 얻어진다고 보았다.효는 부모의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을 뜻하지 않으며, 부모를 생명의 원천으로 인식하고 공경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효도의 목적은 부모와 자식을 모두 번영하게 하는 것이다. 공자는 가사(家事)를 돌보는 것, 그 자체로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라 말했다. 이것은 가정 윤리가 단지 개인의 일일 뿐만 아니라 가정을 통해, 그리고 가정에 의해 공동의 선이 실현된다는 것을 말한다. 무너져 가는 가정 윤리를 운곡서원 은행나무 노거수를 통해 공자의 효 사상을 본받았으면 하는 바람을 해본다.화석식물이라 불리는 은행나무는 중국이 원산지로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불교와 유교가 도입되면서 향교, 서원 등에 심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무는 우리의 스승이라 했거늘 공손수(公孫樹)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은행나무를 보면서 효도와 자애를 가슴에 새겨본다.운곡서원 은행나무 노거수 천연기념물 지정됐으면…은행나무(Ginkgo biloba L.銀杏)는 중국이 원산지이다. 암수딴그루로 움직이는 정자(精子)가 있는 식물로 유명하다. 1문 1강 1목 1과 1속 1종만이 현존하는 식물로 화석식물이라고도 한다. 새, 다람쥐, 청설모 등 동물들은 은행 종자를 먹지 않는다. 운곡서원(雲谷書院)의 은행나무 노거수는 권종락이 단종 때 권산해의 억울함을 달래기 위해서 서울을 왕래할 때 영주 순흥에 있는 큰 은행나무의 가지를 꺾어다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가까이에 도연명의 자연사상을 본받기 위하여 유연정이 세워져 있다. 운곡서원과 유연정 그리고 은행나무를 한 세트로 그중 은행나무 노거수를 도 기념물이나 천연기념물로 품격을 높여주면 어떨까 싶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3-11-08

늘 한자리서… 위안과 용기 주는 가르침의 산실

요즘 아침 산책하다 보면 심심찮게 반려견을 데리고 나온 시민들을 만난다. 다양한 종류의 강아지에서부터 어미 개까지 촐랑거리며 걷기도 하고 뛰면서 주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지만, 때로는 큰 덩치의 험상궂은 불도그를 볼 때면 나도 모르게 움찔하면서 주춤거리거나 멀찌감치 떨어져 걷게 된다.반려견 주인은 괜찮다고 하나 그것은 그들의 생각이고 지나는 나는 그렇지 못하다. 더하여 가끔 반려견들이 본 변이 산책길에 그대로 방치되어있는 것을 보면 그리 유쾌하지만 않다. 날이 갈수록 주변을 돌아보아도 그렇고 언론 보도에도 반려동물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당연히 반려동물을 키우는데 드는 먹이, 치료 등 그에 따른 경제적 시장도 엄청나게 커져만 간다. 키우다 무슨 사정인지 모르지만, 유기되는 반려동물도 늘어나고 있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는 것이 현실이다. 반려(伴侶), 사전에서는 동무, 동반자로 표현한다. 사회가 다원화된 만큼 각자의 반려 또한 기호와 사정에 따라 다원화되는 추세다. 나의 반려는 노거수(老巨樹)다. 오래전부터 반려목 노거수를 키우고 있다. 아니 나의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이 더 맞겠다. 내가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위안과 용기를 받고 있으니 말이다.경주 토함산 자락 외동읍 괘릉리 328번지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소나무이다. 마을 주민들에게는 경배의 대상인 노거수가 내 마음 안 깊숙이 자리한지도 오래 되었다. 마을 주민들에게도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경외하다. 언제 찾아가도 늘 한자리에 머물면서 곧은 절개와 푸름을 자랑한다. 그를 보면 허물어졌던 내 의지도 되살아나고 흔들리는 정의감도 바로 선다. 무언의 가르침, 스승이나 다름없다.20년 전에 처음 만났다. 지금은 한 개지만 그 당시에는 당집을 2개 가지고 있었다. 뿌리에서 뻗어 나온 힘찬 줄기도 4개나 되었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 웅장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와 푸른 솔가지의 아름다움에 반해 ‘노거수 생태와 문화’ 책 표지 사진으로 사용했다. 그간 이 반려목 소나무 노거수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줄곧 용기를 얻었다.노거수는 몸통의 둘레가 무려 10m이다. 그의 키와 맞먹는다. 나뭇가지는 아래로 늘어 떨어져 땅과 맞닿을 정도이다. 푸른 하늘 공간에 배열한 마디마디 굽은 잔가지의 모습은 예술작품 같고 꽈리를 틀고 있는 뱀처럼 붉은빛을 띠고 푸른 솔잎을 입에 물고 내려다보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그 누구든지 한번 접하면 황홀함에 넋을 잃고 그의 품속으로 빨려들게 된다. 반려목 노거수에 기대어 두 팔로 감싸 안고 얼굴을 갖다 맞댔다. 가을 햇살에 따뜻한 온기가 내 얼굴에 전해 왔다. 숨을 깊게 들어 마시다 뱉곤 했다. 솔향이 혈액을 타고 전신에 퍼졌다. 잡념이 사라지니 마음이 편하다.생명의 역사 속에서 단일 생명체로 가장 몸집이 크고 오래 사는 생명체는 노거수가 아닐까 싶다.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중심 역할을 함은 물론이다. 주민들은 매년 공동 제사를 지낸다. 마을 수호신을 존중하는 예(禮)다. 동제를 통하여 마을 주민들은 화합과 결속의 동기를 다지는 등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곤 한다. 노거수 생태계가 동민들에게 철학적 사고를 담아내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마을 주민들에게 노거수와 당집이 있는 공간은 신성함의 발로다. 출입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자연 그 자체를 신격화하고, 간혹 가지가 부러지거나 자연 고사하더라도 가져가 사용하지 않는다. 방치함으로써 생태적으로 분해자, 생산자, 소비자라는 고리로 자연순환을 이루게 해주는 것이다. 이는 자연보호 최상의 방법이다. 고서를 들춰보면 우리 조상의 나무 사랑은 그 어느 민족도 따라올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반려동물 키우듯이 반려목 노거수를 키워보면 어떨까. 헤르만 헤세는 ‘나무야말로 진리를 말하는 가장 훌륭한 설교자라고 고백하였다.’ 그렇다. 마음이 이끄는 곳, 나만의 노거수를 찾아서 그곳에 머물면서 자연과 동화되어 보자. 자연에 대한 경외감, 평온함, 충만감과 고립감에서 탈출하여 이웃에 대한 유대감, 삶에 대한 애착심 그리고 이 모든 것에 교감하면서 감사의 마음이 몸과 마음속에 스며들고 또 우러나올 것이다. 내 마음속에 안고 있는 고민의 문제도 가을 햇살에 영글어 가는 벼알처럼 알곡으로 변할 터이다.아프로디테 말고는 ‘이 세상에서 꽃만큼 사랑스러운 것도 식물만큼 소중한 것도 없을 것이다. 인류 삶의 진정한 모체는 이 대지를 뒤덮고 있는 녹색식물이다. 녹색식물이 없다면 우리는 숨 쉬지도 먹지도 못할 것이다. 우리는 나무가 존재함으로써 덩달아 존재하는 작은 생명체일 뿐이기에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무의 존재를 절대시해야 한다’라고 했다. 나는 식물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하고 편안한 기분을 느낀다. 그것은 영적인 충만감에 젖어 있는 식물들의 심미적 진동, 에너지 파동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노거수는 이제 나의 반려목이 되었다. 기독교를 창시한 예수의 말씀을 담은 성경에도 에덴동산에서 금단의 열매를 맺는 나무 이야기를 하였고,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 역시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공자 역시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우리 주변 명찰이나 서원에 은행나무와 회화나무가 있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경주 양동마을에는 고택마다 노거수가 있다. 거기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스승이며 가르침의 산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요즘도 나홀로 명품 노거수를 탐방하는 길은 행복하다. 많은 가르침을 받고 또 즐기고 있다. 반려동물처럼 경제적으로 부담도 없고, 여행을 간다고 어디다 맡길 필요도 없다. 반려목 노거수는 자연이 연출하는 사계절의 아름다운 작품을 늘 품고 있어 무상으로 감상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쉽고 가치 있는 일은 없을 듯하다. 인간과 나무와 관련된 모든 것을 산림문화라 부른다. 시나 수필, 소설을 가미시켜 삶의 질을 높여 주는 표현 활동에 대해선 산림 문학이라 나름 정의해본다. 오늘도 나홀로 노거수 생태와 문화를 탐방하면서 거대함, 숭고함, 아름다움을 노래한다.나무사랑외동읍 괘릉리 328번지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소나무는 나이가 320살쯤 된다. 마을 주민들의 극진한 보살핌과 정성이 엿보인다. 그러나 고령의 이 노거수는 지금 상처가 덧나 안타까움을 더한다. 아예 한줄기는 태풍에 부러진 채 땅에 누워있다. 다른 한 줄기는 반쯤 부러져 다른 동료 줄기 가지에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부러진 한 줄기는 생명이 간당간당하면서도 주민이 쥐어준 지팡이에 의존해 끈질긴 생명줄을 이어가는 모양새다. 세파 속에 다소 힘에 부쳤는지 줄기 모두 서쪽을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자라고 있다. 자연에 동화된 그 모습을 보니 경이롭기까지 하지만, 노거수는 부러진 몸 줄기 사이사이로 염증을 앓고 있다. 빗물이 스며든 것이 병을 유발한 원인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호수나 천연기념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 얼마나 고통이 심할까하는 생각에 측은지심이 발동하여 내 눈물샘을 자극한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3-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