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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엎드려 기어가듯 ‘겸손의 자세’로 뿌리 내려

등록일 2024-04-24 19:55 게재일 2024-04-25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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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청도 명대리 경상북도 기념물 절효(節孝) 뚝향나무 노거수
땅에 엎드려 기어가는 모양을 가진 청도 뚝향나무 노거수.

날씨만 맑고 포근하다면 겨울 여행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겨울임에도 맑고 푸른 하늘에서 따뜻한 햇살이 시골 마을에 내리쬐고 있다. 이럴 때 나즐로(나 홀로 즐겁게) 노거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신명이 나서 눈앞에 펼쳐지는 공허한 자연마저 마음속엔 꽉 찬 느낌으로 다가온다.

봄 여행은 때로는 춘곤증에 시달리고, 여름 여행은 모기, 쇠파리 등 갖은 벌레가 어디 가나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들어 성가시게 굴기도 하고 때로는 시골길 풀숲에 뱀이 나타날까 봐 두렵고 무섭기도 하다. 가을 여행은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을 볼 때면 괜스레 감상적이어서 마음이 울적하기도 하다. 그러나 날씨만 괜찮다면 겨울 여행은 이 모두를 잠재우고 그저 목적하는 바를 즐겁게 이룰 수 있어 좋다.

 

조선시대 효자 절효 김극일 선생

위패 모시는 운계사 사당 앞 비탈에

350년간 반경 30m 옆으로 뻗어가

자유분방하게 차곡차곡 세월 쌓아

집안 대소사 해결 ‘영험한 기운’에

후손 대대로 수호수로 모시며 경배

고즈넉한 시골 마을 길을 굽이굽이 돌면서 경북 청도 명대리 32번지에 살아가는 뚝향나무 노거수를 찾았다. 작은 동산을 배경으로 운계사가 있고 조금 더 큰 산자락 끝을 붙잡고 모암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운계사(雲溪詞)는 1670년에 건축된 정면 3칸의 단출한 목조 기와로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 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다. 선생을 배향하는 모암재(慕庵齋)로 가는 길가에 1994년 9월 29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00호로 지정된 뚝향나무 노거수가 살아가고 있다.

땅에 엎드려 기어가는 뚝향나무는 모양에서도 범상치 않지만, 절효 선생과 깊은 관계가 있다. 절효(節孝)란 절(節)은 절조로 절개와 지조를 뜻하고 효(孝)는 효성으로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섬기는 마음이나 태도를 뜻한다. 절효 선생은 돌아가시고 없지만, 그 정신만은 오로지 뚝향나무에 옮겨져 오늘날까지 후손은 물론이고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노거수와는 달리 땅에 엎드려 겸손의 자세로 살아가고 있으니 쉽게 찾기도 어렵다. 어렵사리 찾았다고 해도 키는 작고 덩치만 옆으로 길게 퍼져 카메라 렌즈에 쉽게 담기도 어렵다. 주변에 단풍나무, 소나무, 사철나무가 함께 살아가고 있어 세월이 흐른 뒤에는 서로에게 적대적인 방해물로 애를 때울 것이 분명해 보여 일찍이 다른 곳으로 옮겨 주어야 할 것 같다.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뚝향나무 노거수를 렌즈에 담았다. 나이는 350살 정도이고 키는 5m, 밑둥치 둘레는 1m, 수관 폭 앉은 자리는 30m나 된다고 안내판에 기록되어 있었다. 앉은 자리의 넓이는 키의 6배 정도나 되고 보니 참으로 놀랍다.

뚝향나무는 줄기와 가지가 비스듬히 자라다가 개울과 땅을 덮은 모양새를 취하고 있었다. 나무 아래 옹달샘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확인할 수 없었다. 나뭇가지가 우거져서 밑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겨우 나무 아래 개울로 들어가 보니 7주로 보였다. 그러나 안내문에 따르면 모두 한 그루에서 나온 나무라 했다.

사각형 철제 막대 위에 얹혀 있는 뚝향나무 가지가 자유 분방하게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역동적인 모양은 차곡차곡 쌓인 세월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개울을 완전히 덮고 있어 비가 많이 와서 홍수라도 난다면 참으로 난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걱정이 앞선다.

향나무는 강한 향기를 가지고 있어 제사 때 향료로 사용되었으며 정원이나 공원의 울타리용으로 많이 심고 있다. 위로 자라는 향나무보다는 볼품이 다소 떨어지는 경향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조경용보다는 주로 비탈진 언덕이나 둑에 심는 것이 대부분이다.

언덕에 심어진 뚝향나무는 비탈진 사면 따라서 자라기 때문에 빗물로 인한 토사의 유실을 방지하고, 흙을 움켜쥔 나무뿌리로 말미암아 땅을 단단하게 하는 효과가 있는 나무이다. 키가 작다 보니 한삼덩굴 등 여타 덩굴식물이 얕보고 나무를 타고 올라 휘감고 있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뚝향나무는 절효 선생 후손에 관한 에피소드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후손 김용석은 딸만 낳고 가문의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부인이 뚝향나무 아래 샘에 촛불을 켜고 지극 정성으로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뚝향나무에 빌었다. 그 정성 탓인지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6·25 한국 전쟁이 일어나 군에 입대했다. 부인은 어렵게 얻은 아들이 무사히 전쟁을 치르고 돌아오기만을 뚝향나무에 빌고 또 빌었다. 그 덕분인지 전쟁터에서 총알을 13발이나 맞았는데도 살아서 돌아왔다. 이 기적 같은 모든 일들이 뚝향나무 덕분이라고 믿었다. 뚝향나무가 조금이라도 상하게 되면 집안의 사람이 다친다든지 도둑을 맞는다든지 좋지 않은 일이 꼭 일어났다고 한다. 우연의 일이라 넘기기에는 너무 신기하여 집안의 대소사를 뚝향나무에 먼지 신고를 하는 등 경배하고 지금까지 보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뚝향나무 노거수와 절효 선생은 한 몸이란 생각이 든다, 뚝향나무를 보면서 우리 선조의 절개와 지조, 부모에 대한 효성을 본받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후손과 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아 뚝향나무 노거수를 잘 보호하여 수백 수천 년을 함께 번영해 나가기를 희망해 본다.

절효(節孝) 김극일 선생은…

청도 명대리 뚝향나무는 조선 시대 효자인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운계사 사당 앞에 있다. 절효 선생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머니를 위해 몸의 종기를 입으로 빨고 아버지의 병세를 위해 설사를 입으로 맛보았다고 한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 시묘살이 6년을 했는데, 호랑이가 무덤 곁에서 새끼 젖 먹이는 것을 보고는 제사를 지내고 남은 음식을 가축 기르듯이 호랑이 새끼에게 먹여 주었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천첩(賤妾) 두 사람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살아 계실 때와 같이 섬겼고, 두 분이 돌아가시자 모두 기년복(朞年服)을 입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임금에게도 알려져 정문(旌門)에 향리 유림과 제자들이 그 효행을 후세에 귀감으로 삼고자 사시호(私諡號·학력은 높은데 지위가 낮아 나라에서 시호를 내리지 않을 때 일가나 고향 사람, 제자들이 올리던 시호)를 절효(節孝)라 하여 절조와 효성의 본보기로 삼았다.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 자계서원(紫溪書院)에 위와 같은 내용의 정려비가 있다. 김극일(金克一) 선생을 배향하는 재사이다. 선생의 자는 용협(用協)이고 호는 모암(慕庵)이다. 의흥 현감 김서의 아들로 야은 길재(吉再) 선생의 문인이다.

향리에서 후학들의 훈도에 힘쓰다 75세에 돌아가셨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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