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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마을을 품은 왕버들과 반곡지의 로맨틱 사랑

마을을 품고 있는 저수지 제방 위로 왕버들 노거수 20여 그루가 터널을 이루고 있는 곳이 있다. 계절 따라 이어지고 펼쳐지는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은 소리 소문 없이 전국으로 퍼졌다. 이제 문화관광부 ‘전국 사진찍기 좋은 녹색 명소’로 선정되었다. ‘허삼관’ 영화가 촬영되었고, 달의 여인, 구르미 그린 달빛, 홍천기, 붉은 단심 등 인기 드라마가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늘 한번 가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아내와 함께 그곳을 찾았다. 경북 경산시 남산면 반곡지는 녹색 명소란 말처럼 나무와 물이 어우러진 녹색의 친수 환경이었다. 반곡지는 언제 조성되었으며 왕버들 나무는 왜 심었는지 정확한 연대와 기록은 안내판에 설명되어 있지 않았다. 생각건대 당시 조성 때는 오늘날 이렇게 유명해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왕버들은 뿌리가 깊고 강하여 토양을 단단히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처음 저수지를 조성할 때 주민들은 둑의 안전을 위하여 또는 홍수나 집중호우로 인한 흙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하여 심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왕버들은 물가에서 잘 자라며 물을 정화하는 기능도 다른 나무에 비하여 탁월하다. 저수지 주변 마을의 습기를 조절하고 농업용수의 질을 개선하는 효과를 기대하면서 심었을 수도 있다. 옛날 농경시대에는 왕버들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바구니나 농기구 손잡이 등 생활용품을 만들기도 했을 것이다. 왕버들은 무성한 잎으로 인해 그늘을 제공하기 때문에 주민들에게 자연스러운 휴식 공간을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그곳은 주민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회의를 하며 공동체 집회 장소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강이 없는 마을에 흘러가는 물 모아 저수지 만든 우리 조상들 지혜 탄성 제방둑엔 왕버들 심어 친수공간으로 계절마다 변하는 아름다운 주변 풍광 반곡지 물 속 살랑 드리운 왕버들에 둥지 튼 새들과 생명체 함께 살아가 오늘날에는 그런 이용 공간보다는 새로운 면모로 다시 태어나 주민은 물론 시민의 치유와 휴식처로, 명품 반곡지 왕버들을 보기 위해 먼 곳에서 관광객과 특히 사진작가들이 계절을 넘나들며 구름처럼 모여들고 있다. 우리 또한 그중에 한 사람이다. 물은 인간의 생존과 생활에 필수적인 자원이다. 역사적으로 인류 문명은 항상 물가에 형성되었다. 농업과 산업, 생활용수뿐만 아니라 문화적, 정서적 요소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 중국 문명은 황하강, 인도 문명은 인더스강이 그렇다. 서울의 한강과 대구의 낙동강이 그렇다. 모두 강 유역에 사람이 모여 살면서 문화를 꽃피웠다. 그런데 강이 없는 마을에 흘러 내려가는 물을 모아 저수지를 만들어 이용한 예는 그리 흔치 않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왕버들을 저수지 제방 둑에 심어 녹색 친수 공간을 조성한 것은 특별하다 하겠다. 단순한 수자원 저장 시설을 넘어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친수공간으로 자리잡았다. 계절마다 변하는 주변 경관은 지역 시민과 방문객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제공한다. 오랜 세월을 거쳐 자란 나무들은 자연의 시간성을 잘 보여주는 생태적 상징이다. 노거수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며, 저수지와 함께 살아온 지역의 역사이기도 하다. 봄에는 신록과 새싹이 돋아 활력을 주고, 여름에는 녹음과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며, 가을에는 황금빛 풍경을 연출하며, 겨울에는 고요한 정취를 선물한다. 계절의 변화에 따른 풍경의 정취는 사람에 따라 다르기에 많은 인기 드라마의 촬영지로 선택되었지 않았나 싶다. 특히 낮과 밤에 왕버들이 반곡지 물속에 잠들어 있는 고요한 명상의 모습이라든지, 바람의 잔잔한 물결 아래 춤추는 몸의 동작은 보는 이를 반곡지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한다. 그뿐이겠는가. 아침을 깨우는 왕버들 나뭇가지에 앉은 새들의 지저귀는 노랫소리는 또 얼마나 아름답고 듣기 좋은지 모른다. 나뭇가지를 포롱포롱 날아다니는 작은 새들의 몸짓은 앙증스럽기까지 하다. 반곡지는 품속에 왕버들 그림자를 품고 사랑을 속삭인다. 왕버들은 반곡지에 가지를 드리우고 얼굴을 어루만지며 사랑의 자장가를 들려준다. 낮이면 둥근 해가 그들의 사랑을 이어주고, 밤이면 하늘에 휘영청 뜬 밝은 달이 그들을 만나게 해 준다. 가끔 바람의 심술로 해와 달을 가리기도 하지만, 구름이 사라지고 나면 또 그들의 사랑은 시작되고 영원히 이어진다. 우리도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누구의 심술도 인내하면서 영원한 사랑을 꿈꾸며 살아간다. 왕버들과 반곡지의 사랑 속에 또 다른 많은 생명체가 숨 쉬며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새들이 나무 위에서 둥지를 틀고, 물가에서는 다양한 수생식물과 곤충이 살아가고 물속에는 물고기들이 자유롭게 뛰놀며 살아간다. 때때로 원앙새가 날아와 사랑을 속삭인다. 물닭과 오리가 찾아와 물속 고기떼를 따라다닌다. 그들은 친구와 적으로 또는 경쟁과 협조로 공존하며 살아가는 반곡지는 작은 생태계이다. 반곡지와 왕버들은 오늘날에 우리에게는 생태 감수성을 키워주고, 자연을 존중하는 태도를 함양하는 교육 교재이자 스승이다. 도시 생활에 지친 시민들이 이곳을 찾아 자연 속에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농촌의 고즈넉한 풍경을 체험한다. 아내와 함께 반곡지 주변 산책로를 따라 걷는 것 또한 황혼의 행복한 인생길이란 생각이 들었다. 필자의 시 - ‘왕버들과 반곡지’ 긴 가지로 반곡지를 부드럽게 감싸고 신록을 뿜어내는 왕버들 잔잔한 물결로 왕버들 그림자를 품고 물 향기로 인사하는 반곡지   사랑하는 이여, 너의 그림자 속에 내 마음도 잠들리라 반곡지 은빛 물결에 그대 이름을 새겨본다   사랑하는 이여, 너와 함께한 그 시간이 해와 달을 넘어 영원히 이어지리라. 왕버들 손끝으로 그대 눈빛을 그려 본다   간혹 구름이 질투하여 해와 달을 가두고 연인의 속삭임을 어지럽히려 하겠지 구름은 지나가면 그뿐 반곡지 물 향에 왕버들 아름다움은 흔들리지 않으리라.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4-16

계절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가르침을 전해주다

지난 3월 22일 토요일 경북 의성군 안평면에서 발화된 산불은 강한 바람으로 인해 인근 지역, 안동, 청송, 영양, 영덕으로 빠르게 번져 수만 헥타르의 산림을 태웠고, 30명의 사망자와 수천 명의 이재민을 발생시켰다. 특히, 영양 답곡리 만지송 등 천연기념물을 포함한 고운사, 국가유산, 주택, 농업 시설물 등 큰 피해를 보았다. 산불 진화에는 헬기와 인력이 총동원하여 가까스로 진화되었다. 피해 주민들이 일상생활로 되돌아갈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인간의 실수로 재앙을 입었기에 사람은 고통을 참고 견딘다고 하지만, 자연에 살아가는 뭇 생명체는 무슨 죄라고 삶의 터전을 잃고 동료를 떠나보내야 했다. 노거수를 찾아다니며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즐거움을 나누는 나에게는 방송을 통한 현장 모습을 보고는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아직도 산불 진화만큼은 자연의 도움이 필요한데 오히려 비 대신 바람이 불 때면 속수무책이다. 산불 예방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김천 대덕면 조룡리 섬계서원 경내 뒤뜰에 천연기념물 300호로 지정된 유주(乳柱)가 발달한 은행나무가 살아가고 있다. 섬계서원(剡溪書院)에 모신 백촌 김문기 선생이 돌아가신 1400년경에 심은 것으로 보아 나이는 600살, 키 28m, 몸 둘레 12m이다. 그의 앞에 서면 오래되고 거대함에 놀라 저절로 경외심이 발동한다. 그 모습은 계절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스승으로, 친구로 내게 다가온다. 겨울에는 그 무성한 잎을 떨군 채 발가벗겨진 몸에 앙상한 나뭇가지는 바람에 손짓을 보낸다. 겨울은 은행나무의 삶의 쉼표란 생각이 든다. 봄에 작고 연한 잎을 틔워서 여름에 무성한 잎으로 자라 펼치며, 가을에 노란 단풍잎으로 노래한다. 이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은 겨울이다. 스스로 그동안 축적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비운다. 어쩌면 이것이 삶의 이치일지도 모른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겨울은 결코 끝이 아니다. 내려놓음 또한 소멸이 아니다. 빈 가지 끝에는 이미 다음 생명을 잉태하는 눈들이 기다리고 있다. 나무가 잎을 떨굴 때, 그것은 사라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다. 우리도 살아가며 많은 것을 쥐었다가, 때가 되면 놓아야 할 순간이 온다. 그 과정이 허무가 아닌 이유는 내려놓음 속에 또 다른 시작이 있기 때문이다. 겨울 은행나무는 말없이 그 진리를 가르쳐 준다. 황혼의 내 삶에 서원 뒤뜰 묵묵히 살아가는 은행나무는 가지려고만 하고 내려놓지 않으려고 하는 나의 욕심에 또 하나의 교훈을 주었다. 겨울 가지 끝에 잉태한 연둣빛 아기는 잔잔한 바람에 고개를 내민다. 희망의 새싹은 이내 몸을 감싸고 왕성한 식욕으로 몸집을 불리겠지. 지금의 알몸에서 세월의 깊이를 느낀다. 굵고 거친 몸은 마치 오랜 세월을 묵묵히 견뎌낸 노인의 손등 같다. 삶의 흔적이 새겨진 주름과도 같은 나이테를 가슴에 품고, 수많은 계절을 맞이하고 보내면서 몸은 더욱더 단단한 근육질로 변했다. 지난여름 푸른 잎들이 생명의 싱그러움을 노래하는 모습이 보인다. 가을 노란 단풍잎이 갈 바람에 춤추는 모습이 보인다. 계절 따라 성장하고 변하는 은행나무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특히, 유주(乳株)는 마치 나무가 흘린 눈물처럼 보인다. 긴 세월을 살아오며 품은 이야기들이 방울방울 맺혀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있는 듯하다. 그것은 자연의 신비이자 생명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수백 년을 살아온 생명의 조각이자, 세월을 꿋꿋이 견뎌낸 존재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품고 있는 깊은 이야기가, 바라보는 나의 마음을 조용히 감싸준다. 은행나무는 누가 심었는지를 둘러싼 역사적 논쟁이 있는 나무로 유명하다. 가까운 마을에 살고 있는 김녕김씨와 서산정씨 간의 은행나무 노거수의 식재 주체에 대한 서로 자신의 조상이 심었다고 상반된 주장을 하여 법정 다툼까지 하였다고 한다. 은행나무를 김녕김씨 조상이 심었든, 서산정씨 조상이 심었든,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잘 가꾸고 보호하는가이다. 조선 순조 1802년에 섬계서원을 세울 때 이 은행나무를 중심으로 터를 잡아 강당과 사당 건물을 배치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나무 밑동에 불이 붙었는데, 지나가던 할머니가 호미로 긁어 불을 껐다는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왜 은행나무를 중심으로 서원을 세웠을까? 하는 물음을 던지고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서원은 조선 시대 유학 교육과 성리학 이념을 실천하는 공간이다. 특히, 섬계서원과 같은 지방 서원들은 향촌 사회의 인재를 양성하는 사설 교육기관이다. 학문을 연마하고 유교적 도덕성을 함양하는 공간이다. 은행나무는 그 자체로 교육의 상징일 수 있을 것이다. 뿌리를 깊게 내리고 수백 년을 살아가는 모습은 학문 탐구의 지속성과 연륜을 상징하며, 서원의 강학 활동과도 맞닿아 있지 않을까. 선비들이 은행나무 아래에서 독서하거나 토론을 벌이며 사색에 잠겼을 수도 있으며, 이는 자연과 조화롭게 학문을 연마하는 유교적 태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은행나무는 교육교재는 물론 나무 아래 그늘은 교육 장소로 안성맞춤일 것이다. 언제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서원의 높은 뒤뜰에 심어놓은 은행나무는 유생들 뿐만 아니라 마을을 드나드는 주민들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주었을 것이다.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다. 서원의 정원에 자리한 은행나무는 단순한 조경 요소를 넘어 유생들의 학문과 인격 수양에 중요한 교육적 역할을 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사계절 변화 속에서 성장하는 은행나무는 자연의 이치를 깨닫게 하며, 강한 생명력과 절개를 지닌 모습은 유학에서 강조하는 군자의 덕목과 일맥상통한다. 세월이 변하여 그때 영광은 어디 가고 은행나무는 홀로 서원을 지키며 가끔 찾아오는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섬계서원(剡溪書院)은…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 445-1에 위치했다. 1802년(순조 2년)에 지방 사림들이 주동이 되어 각도 사림들과 힘을 모아 김충의공 백촌 김문기 선생(金忠義公白村金文起先生)의 거룩한 충절을 추모하여 후학들로 하여금 선생의 충절과 학문을 현양하고 배우게 하고자 창건하였다. 상량문은 성균관 대사성 이노춘(李魯春)이 지었다. 세충사(世忠祠)에는 사육신의 영도자로 1456년 단종(端宗) 복위 모의를 하고 순절하신 공조판서 충정공 백촌 김문기(金文起)를 주향으로 봉안하고 같이 순절하신 맏아들 영월군수 여병제공 김현석(呂甁齊公金玄錫)을 배향으로 모시고 있다. 서원 경내 동별묘에는 영남의 삼현으로 불리우는 반곡(盤谷) 장지도(張志道) 선생과 절효(節孝) 윤은보(尹殷保) 선생, 남계(南溪) 서즐(徐騭) 선생을 추배하였다. 1866년(고종 5년)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당했다가 1899년에 강당을 다시 세우고, 1961년에 세충사를 복원하고 도·시비 1억7천만 원을 지원받아 보수하고 동별묘를 복원하였다. 도기념물로 지정(2007.12.28.)됐고, 매년 음력 3월 중정일에 유림 행사를 봉행하고 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4-09

낙동정맥 명산에게 인생철학을 배웠다

‘숲과 문화반’ 단체와 함께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의 문턱을 즈려밟고 포항 내연산 보경사를 둘러보고 계곡을 타고 선일대에 올랐다. 계곡 여기저기에 기암괴석을 빚어놓은 계곡물의 예술적 감각에 더하여 장인정신에 놀랐다. 부드럽기 그지없는 물이 수천 년을 한결같이 모난 돌과 바위를 갈고 다듬어 몽돌과 기암괴석으로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조각 예술품을 전시해 놓았다. 눈길이 자석처럼 빨려들었다. 그 듬직한 무게감과 믿음직스러움에 감동했다. 겨울 찬바람이 계곡 입구를 막아섰다. 미인송이 우리를 눈짓하여 샛길로 피해 오라고 했다. 계곡물을 마을로 끌어들인 수로는 얼음이 꽁꽁 얼어 옷소매를 여미게 했다. 하지만 향긋한 솔향에 취해 추위를 잊고 감추어놓은 심곡의 속살을 무례하게 훔쳐보았다. 딴 세상이다. 청아한 물소리가 들린다. 얼음 녹는 소리다. 따스한 햇볕 스며드는 소리다. 생명을 잉태하는 숨소리다. 봄을 부르는 희망의 찬가를 들으면서 꾸준함의 발길은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르고 올라 마침내 선인이 산다는 선일대에 올랐다. 선일대(仙逸臺) 바위에 뿌리를 내린 일송(一松), 태초에 흙 한 줌에 희망을 걸고 뿌리를 내리니 하늘도 감동하여 비바람에 흙을 실어 보냈나 보다. 바위를 감싸고 있는 그 힘차고 깊은 뿌리가 감동적이다. 선일대 난간에 환한 미소 띤 황혼의 얼굴들, 산을 배경으로 한 촛대 바위 절벽 위 선일대 소나무 노거수, 삼척갑자동방삭(三尺甲子東方朔)이어라. 삼천 년을 하루 같이 살아가는 선일대 소나무, 기암괴석의 절벽에 숨어 살아가는 소나무, 늘 푸름을 잃지 않고 우리를 맞이한다. 그 늠름한 장수의 비결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 지난해 끝자락에도 이곳을 탐하고 올해 또다시 이곳을 탐하여 오르니, 평소 뻣뻣한 허리는 유연해지고 접혔던 몸통은 펴졌다. 놀랍다. 선일대 노송이 마시는 공기를 마시고 바람과 계곡물 소리, 자연의 소리를 들어서 그런지 알 수는 없지만, 기분마저 최상이니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감동의 물결이 가슴을 적셨다. 선일대 바위 소나무를 선인송(仙人松)이라는 고유의 이름을 지어주고 경외감을 표했다. 내연산은 포항 송라에 있는 낙동정맥을 올라타고 있는 명산이다. 동해를 바라보면서 그 산자락은 유유히 월포리 해변에 발을 담그고 있는 형국이다. 그 깊은 계곡의 초입에 신라 시대 창건한 명찰 보경사를 품고 있다. 특히 관음폭포는 주변 암석과 소나무가 어우러져 독특한 자연경관을 자랑하며, 조선 시대 화가 겸재 정선이 이곳을 배경으로 한 산수 실경화에 그려 놓은 절벽의 노송은 지금도 늘 푸름을 자랑하며 굳건히 살아가고 있다. 그 살아가는 위치 또한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절벽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가 하면, 흙 한 줌도 물 한 방울도 담기 어려운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모습에서 무한한 울림을 주었다. 누가 심고 가꾸고 보호한다고 해서 이런 소나무를 탄생시킬 수는 없다. 그 스스로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에서 경외감을 표했다. 보경사 경내에는 국보급 보물도 있고 문화재도 여러 점 있지만,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단연 대웅전 앞뜰에 5층 석탑과 함께 있는 소나무 노거수이다. 나이 300살로 추정되며 키 7m,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몸 둘레는 3.65m나 되었다. 그 자태의 늠름한 모습의 아름다움을 그 어떤 글로써도 표현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굵고 거친 살결은 오랜 풍상을 견뎌낸 흔적이며, 마치 굽이치는 파도를 닮은 뒤틀린 가지들은 수많은 계절을 지나오며 자연이 빚어낸 걸작이다. 부처님의 자비를 품은 소나무다. 고결한 뿌리 깊이 내려 세월을 품었고, 우람한 줄기 휘돌아 자비를 말하고 있다. 석가모니의 지혜를 머금은 듯, 굽이굽이 감싸안은 모습은 곧 연민의 손길이라. 구도자의 길을 비추는 푸른 기운, 속세의 번뇌를 거두어 안식의 그늘을 내리시니, 그 아래 서니 바람조차 불경을 읊고, 가지마다 자애로운 미소가 깃들어 있다. 수백 년을 살아온 자비의 소나무 그 모습의 아름다움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닮았으니, 기도하는 중생 평안과 해탈을 얻는다. 수관은 동산에 떠오르는 보름달의 모습이요. 우람한 몸통은 하늘로 승천하는 용틀임의 모습이다. 보름달 휘영청 밝은 밤이면 분명히 아미타불의 환생이라. 시간을 초월한 신비로운 존재, 수많은 불자의 염원이 깃든 성스러운 염원의 공간이다. ‘숲과 문화반’을 지도하는 박용구 경북대 명예교수님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소나무 또한 깨달음의 아미타불을 줄여 아미송(阿彌松)이라 고유의 이름을 지어 칭송하였다. 또한 경내에는 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된 자연유산 탱자나무 노거수가 있다. 나이 400살, 키 6m, 몸 둘레 1m, 지상 약 160cm에서 가지가 갈라져 원형으로 자라고 있다. 내가 처음 보았을 때는 두 그루였는데, 한 그루의 안부를 사찰에 여쭈어보았더니 태풍으로 삶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예로부터 탱자나무는 사찰에 악귀를 막아낸다는 속설이 있는데 이 탱자나무 또한 그러한 경우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장수하는 탱자나무는 그리 흔치 않은 관계로 귀히 여기고 있다. 작은 부처가 나무 아래에서 나무의 장생과 건강을 지켜주고 있었다. 고대 철학자들은 숲과 나무를 보며 인생을 성찰하고 철학적 깨달음을 얻었다. 불교의 처처불심(處處佛心)과 도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처럼, 자연 속에서 깨달음을 찾고 스스로 돌아보는 삶, 즉 숲과 나무는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우리에게 인생의 길을 알려주는 철인과 같다. 나무는 오랜 기간 천천히 성장하며 깊이 뿌리를 내린다. 이는 우리에게 조급하게 결과를 바라기보다 꾸준히 노력하고 뿌리를 내리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나무처럼 우리의 삶에도 변화를 받아들이고, 순리에 따라 살아야 하지 않을까?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뿌리는 단단하게 땅에 박고 살아간다. 이는 삶에서 외부 환경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유연하게 대처하는 지혜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우리는 내연산 보경사를 둘러보고 계곡을 탐하면서, 절벽 바위 위나 틈새에서 살아가는 소나무와 경내의 아미송(阿彌松), 그리고 장수한 탱자나무를 통해 인생철학을 배웠다. 숲과 나무에 관한 고대 철학과 종교 숲과 나무는 우리 삶의 거울이자 깨달음의 원천이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소요학파는 자연을 관찰하면서 이성과 논리로 삶을 탐구했다. 숲속을 거닐면서 사유하고 토론을 하며 그것을 실천하는 산책 철학으로 발전하였다. 식물사회의 균형과 조화를 배우고 중용의 철학을 중시하여 지나침과 부족함을 피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 행복의 길이라고 했다. 스토아학파 제논은 자연법칙에 순응하며 감정을 초월하고 초연한 태도를 유지하는 자연과 일치하는 삶을 강조했다. 나무는 바람이 불어도 흔들릴 뿐, 뿌리를 깊게 내리며 인내한다. 인간도 외부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내면의 평온을 유지하는 삶을 주장했다. 그리고 불교에서 처처불심(處處佛心)이라고 하여 모든 사물과 자연 속에서 부처의 마음과 깨달음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강한 나무는 바람에 꺾이고, 유연한 풀은 바람을 따라 휘어지지만, 다시 일어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유연함과 무집착의 지혜를 배울 수 있다. 도교에서는 무위자연이라고 하여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이상적인 삶이라 했다. “나무는 성장할 때 억지로 가지를 늘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라난다. 자연스러움이 곧 도(道)”라고 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4-02

푸른 창해·창공 바라보며 해돋이 즐기는 행복한 나무

나는 변하지 않는 큼직한 바위를 품고, 누구보다 먼저 동해 아침 해돋이를 하는 나무이다. 거칠고 험한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손으로 바위를 움켜쥐고 살아가지만, 외롭지 않다. 새벽이 오면 나는 가슴을 활짝 펴고 동쪽 하늘을 바라본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에서 태양이 서서히 얼굴을 내밀면, 나의 심장은 벅차오르고 온몸이 따뜻한 기운으로 감싸인다. 밤새 바닷바람에 시린 몸을 맡겼던 나는 태양이 보내오는 부드러운 빛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두 팔을 벌려 환호한다. 황금빛 햇살이 이마를 스치고, 어깨를 감싸며 온몸 구석구석을 어루만지는 태양으로부터 받은 귀한 하루의 보따리를 설레는 마음으로 푼다. 아침 태양 빛이 여기까지 1억4960만㎞의 광활한 우주를 쉼 없이 달려왔음을 생각하면 더욱 경이롭다. 초속 30만㎞로 질주한 태양의 빛이 8분 20초 만에 마침내 나의 가슴에 닿는 순간, 나는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자연의 신비를 온몸으로 실감한다. 그 빛은 단순한 아침 햇살이 아니다. 태양과 지구의 정교한 균형 속에서 탄생한 기적 같은 선물이다. 지구는 23.5도 기울어진 채로 태양 주위를 돌며 1년에 한 바퀴를 완성하고, 기울기는 계절을 만들어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수백 년 동안 그 변화를 지켜보며 살아왔다. 또한, 지구는 하루 한 바퀴 자전하며 낮과 밤을 바꾸고, 태양을 향하는 각도에 따라 그 길이를 조율한다. 그렇게 태양과 지구는 서로 맞추어 가며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태양은 아버지, 지구는 어머니, 우리는 그들로부터 태어난 생명체, 아들딸들이 아닌가. 어찌 하늘의 태양과 대지인 지구를 경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저 먼 수평선에서 달려 온 파도는 철썩이며 나를 향해 인사를 건넨다. “오늘도 힘차게 살아가자!”며 격려라도 하듯 바위에 입 맞추고 하얀 메밀꽃을 토한다. 바람은 신선한 공기를 가득 안고 와 나를 감싸 안으며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준다. 나는 두 팔을 흔들며 기쁘게 화답한다. 향긋한 향기를 바람에 실어 바다로, 하늘로 보낸다. 매일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지만, 단 한 번도 같은 아침은 없다. 매일 새롭고 소중하다. 아침 해맞이 순간, 나는 다시금 깨닫는다. 오늘은 어제와 다르고, 내일은 또 새로운 빛으로 시작될 것임을. 그렇게 나는 어디에 찾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매일 새로운 선물을 받으며 기적을 맞이한다. 좀 더 상세하게 소개한다면, 나는 영덕군 축산면 경정리 647번지의 거대한 바위 위에 터를 잡고 천 년을 살아온 섬향나무이다. 나는 직접 받는 햇살뿐만 아니라 바다 수면에서 반짝이는 윤슬의 별빛도 함께 받아 누구보다 더 많은 축복의 빛을 받는다. 이러한 강한 햇살은 바닷가 바위 위에서 살아가는 나에게 광합성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과도한 증발로 스트레스도 받는다. 그러나 잎과 뿌리가 수분 손실을 줄일 수 있는 구조로 특화되어 있어 그런 걱정은 붙잡아 매라 한다. 비늘잎이 둥글고 길게 모여 삐죽한 형태를 이루는 것은 수분 손실을 줄이기 위한 생존 전략이다. 또한, 열매가 하얀 왁스로 덮여 있는 것도 수분 증발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육질 방울열매는 새들이 좋아하는 먹이다. 특히 3월이면 직박구리 소리로 아침은 활기차게 시작된다. 야생 먹이자원이 달리는 잔인한 봄, 3월에는 활기찬 새들의 장마당이 선다. 시끌벅적한 아침이다. 내가 스스로 살아가는 자생지랄까 생존 지역은 동해를 내려다보는 절벽으로 쉬이 다가갈 수 없이 가파르며, 바위가 켜켜이 쌓인 곳이다. 그런 절벽 바위를 은밀하다고 표현한다. 이른바 숨은 서식처로 비밀스러운 피난처, 미소 피난처이다. 최고령 나무로 울릉도 도동의 향나무는 2500~3000년을 살아왔다고 한다. 나의 동료 향나무는 극한의 환경에서 자라며, 자연이 빚어낸 듬성듬성 그루 숲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는 한국의 오래된 매향(埋香) 문화와도 연결된다. 매향 문화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향나무를 바닷가에 묻어 후손들이 다시 발굴해 사용하도록 기원하는 독특한 종교적·민속적 풍습이다. 이러한 매향 문화는 불교 신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금강산 삼일포 매향 비문은 “강릉, 삼척 등에 향나무를 베어 포구마다 물속에 묻었다”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동해안 깎아지른 절벽의 향나무 해안 경관은 세계 자연유산이고, 매향은 자랑스러운 인류 문화유산이 아니겠는가? 동해안 향나무 자생지는 한국인의 뿌리와도 맞닿아 있다. 동해안을 따라 남하한 북방 선사인이나 남해안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북상한 남방 선사인은 우리 조상을 분명히 만났을 것이다. 향기 나는 우리를 알아채지 못했을 리 만무하다. 적어도 동해안 신석기인은 향나무 풍광을 무대로 살았다는 사실을 옛 해안(古海岸)에 위치하는 울산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각석의 가장 오래된 선사 기록이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이곳은 도시의 빌딩 숲에서 겨우 몇 조각의 햇빛을 구걸하는 나무와는 다른 세상이다. 푸른 창해와 창공을 바라보면서 해변에서 아침 햇살을 맞이하는 나는 참으로 행복한 나무임을 깨닫는다. 봄의 바닷가 아침 햇살은 부드럽고 따뜻하다. 해안의 파도 소리와 신선한 아침 공기는 나를 편안하고 행복하게 감싸준다. 저 멀리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태양의 찬란한 빛이 바다를 가르고 해안으로 한 줄기 뻗친다. 윤슬이 반짝인다. 항구 어민들의 고깃배가 만선의 희망과 기쁨으로 출항과 귀항을 서두르고 갈매기가 호위하고 있다. 바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기암괴석에 붙어 살아가는 따개비의 안간힘과는 달리 미역은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다. 그 신비로움에 두 손을 모아 경건한 마음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잠자던 세포가 깨어나고, 기쁨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큰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누군가의 도움이나 방해도 없이 축복의 선물, 태양 빛을 오롯이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아침 해돋이는 희망이고 또 하루의 출발선이다. 하나 아쉬운 점은 훼손된 몸과 살아가는 바위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어망 쓰레기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고 있음이다. 매향(埋香) 문화 매향 문화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한국에서 행해졌던 독특한 종교적·민속적 풍습으로, 향나무(沈香木)를 땅에 묻어 후손들이 다시 발굴하여 사용하도록 기원하는 의식이다. 이 풍습은 불교적 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주로 바닷가에서 진행되었다. 매향(埋香)이란 ‘향나무를 묻는다’는 뜻으로, 주로 신앙적인 목적에서 수행되었다. 특정한 장소(주로 해안가)에서 불교 승려와 신도들이 모여 매향 의식을 거행했다. 향나무를 정성스럽게 땅속에 묻고, 불경을 외우며 신성한 의미를 부여했다. 매향문(埋香文)이라는 비석이나 기록을 남겨 후대에 알릴 수 있도록 했다. 현재 한국에는 여러 곳에서 매향과 관련된 유적이 발견되었다. 강원도 양양은 고려시대 매향비가 발견되었다. 경기도 화성은 매향 의식이 이루어졌음을 기록한 유물이 있다. 오늘날 매향 문화는 단순한 민속 신앙이 아니라, 향나무와 관련된 전통적인 의례로서 중요한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지닌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3-26

향나무의 강인한 생명력과 범종각 울림이 깨달음 주는 듯

자연유산인 노거수에도 품격이라는 등급이 있다. 어떤 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어떤 나무는 기념물 또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법적인 보호 아래 관리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품격에 해당하지 않는 노거수들은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어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인간 생활의 편리함에 밀려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처지에 놓이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노구의 몸으로 자연의 눈비와 바람을 맞으며 환경 악화로 인한 병해충의 위협 속에서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실정이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그저 같은 나무로 보일 수도 있지만, 무엇을 기준으로 이러한 구분이 이루어지는지 궁금해 할 수도 있다. 실제로 품격이 정해진 나무 못지않은 노거수들이 우리 주변에도 많다. 법관이 같은 법조문을 놓고도 해석에 따라 다른 판단을 내리는 것처럼, 노거수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는 일이다. 노거수와 숲을 탐방하면서 매번 느끼는 점은, ‘노거수’라는 이름만으로도 존재 가치와 법적 보호를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음에도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이 늘 아쉬울 따름이다. 노거수의 품격이라는 등급은 민속문화적, 역사적, 경관적, 생태학적 가치에 따라 보호와 보존의 필요성이 판단된다. 가장 높은 품격은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 그다음으로 기념물(記念物), 그리고 보호수(保護樹)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 역시 인간이 정한 잣대일 뿐이며, 지구의 식물사회학적 관점에서는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듯이, 노거수 또한 나름의 가치가 있는 중요한 나무일뿐이다. 천연기념물, 기념물, 보호수 모두 자연유산에 속한다. 자연유산이란 자연환경 속에서 형성된 문화적, 역사적, 학술적으로 가치 있는 유산을 뜻한다. 이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역사적·학술적·경관적·생태적 가치를 포함하는 살아 있는 유산이라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노거수는 자연유산이 아닐까? 법적인 잣대로 보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러한 기준이 반드시 옳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노거수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생명의 증인이자, 우리 민속과 역사, 문화가 깃든 자연유산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을 천연기념물, 기념물, 보호수 등으로 구분하여 보호의 정도를 달리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분류는 관리와 보호를 위한 기준일 뿐, 나무 자체의 가치를 평가하는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 사회에서도 신분이나 직업이 존재하지만,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평등하다. 인간의 가치를 사회적 지위나 재산으로 판단할 수 없듯이, 노거수 또한 크기나 지정 여부에 따라 그 존재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나무가 지닌 역사적, 문화적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법적 보호를 받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며, 자연 속에서 살아온 시간과 생태적 가치는 모두 소중하다. 더욱이 인간의 기준으로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상대적이다. 어떤 나라에서는 특정 나무를 국가적 보호 대상으로 삼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그저 평범한 나무로 여길 수도 있다. 이는 마치 문화권에 따라 특정 인물이 영웅으로 평가되거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나무를 등급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모든 노거수를 보호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우리 조상들은 오래된 나무를 신목(神木)으로 여기고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나무는 그 자체로 한 시대를 살아온 존재이며, 우리와 공존해 온 자연의 일부다. 특정 나무만 보호하고 다른 나무는 무관심하게 대한다면, 이는 자연에 대한 편협한 태도가 아닐까.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보호 기준의 차이를 넘어, 모든 노거수가 소중한 생명체이자 역사적 존재라는 인식을 갖는 것이다. 사람과 나무 모두 자연 속에서 태어나 성장하며, 시간 속에서 흔적을 남긴다. 인간이 삶의 여정을 거치며 경험과 기억을 축적하듯, 나무도 수백 년의 바람과 비를 견디며 생명의 기록을 남긴다. 우리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무도 그 존재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노거수를 법적으로 구분하여 보호하는 제도는 필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함께 살아가는 태도다. 우리는 모든 노거수를 하나의 생명체로 바라보고, 인간과 자연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 법적 보호 여부와 관계없이 노거수를 우리의 자연유산으로 인식하고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을 해 본다. 오늘도 안동시 안기동 276번지 석수암 사찰 경내에 있는 향나무를 찾아 나섰다. 나이 420살, 키 8.4m, 밑둥 둘레 4m이다.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절을 창건하면서 심었다는 전설과 1995년 6월 30일 도 기념물 106호로 지정되었다는 사실이 안내판에 적혀 있었다. 향나무는 범종각과 함께 사찰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었다. 범종은 세상의 고통을 씻어주고 중생을 깨우치는 역할을 한다. 향나무의 강인한 생명력과 범종각의 영적인 울림이 조화를 이루며,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마음의 안식과 깨달음을 주는 듯했다. 향나무는 불교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는 나무다. 한국 불교에서 의례, 건축, 상징적 의미 등 여러 방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사찰에서는 향나무를 신성한 나무로 여기며, 공간을 정화하고 부처에게 공양하는 신성한 재료로 사용한다. 향을 피우는 행위는 불법에 대한 공경을 표하며, 수행자의 정신 집중을 돕는 수행의 일부로 여겨진다. 또한, 향나무는 내구성이 강하고 특유의 향을 지녀 불교 사찰의 불상, 목탑, 불단을 만드는 데 활용되기도 한다. 향나무로 만든 불상은 시간이 지나도 부패가 덜하고 향기를 유지하여 성스러움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2022년 10월 26일 국보로 지정된 해인사 대비로전의 비로자나불 양위는 향나무 목불(木佛)이다. 사찰에서 향나무가 자주 사용되는 것은 정화 작용과 신성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향나무는 자신을 찍어 내는 도끼날에도 향내를 묻히고, 갈기갈기 찢긴 속살 조각마저 태워 인간의 심신을 향으로 위로하며 마침내 하얀 재만 남고, 바람을 거스르며 시공간을 넘어선 방향(芳香)은 향나무의 진면목이다. 특히 석수암 향나무 연리지는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오랜 세월을 거쳐 하나로 이어진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연리지는 사랑, 인연, 조화를 상징하는 자연의 기적 같은 존재로, 마치 두 사람이 긴 세월을 함께하며 깊은 정을 나누는 것 같았다. 거친 나무껍질과 휘어진 가지는 시간의 흔적을 담고, 그 속에서도 서로 의지하며 하나가 된 모습은 운명적인 연결과 깊은 유대감을 떠올리게 했다. 주변에 걸린 소원지는 사람들이 나무에 바라는 희망과 사랑을 담아 기원하는 듯하여 더욱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향나무 노거수와 범종각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마치 시간의 흐름을 담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향나무 노거수에서 뿜어 나오는 향기를 맡으면서 연리지가 상징하는 의미를 마음속 깊이 새기며 경외감에 고개를 숙였다. 천연기념물·기념물·보호수의 구분은… 각기 보호하는 개념, 보호 범위와 지정 주체가 다르다. 천연기념물은 학술적, 역사적, 경관적 가치가 있는 동·식물, 지형, 광물 등 자연물 중 국가가 지정해 보호하는 문화재다. 지정 주체는 국가유산청. 대상에는 희귀 동식물, 특별한 지형·지질, 자연환경 등이 포함된다. 기념물은 각 지방자치단체(광역지자체)가 지정한다. 국가 지정 문화재보다 지역적으로 중요한 자연물 및 유적이다. 지정 주체는 각 시·도지사고, 대상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지 않았지만, 해당 지역에서 보존할 가치가 있는 문화재 및 자연물이다. 보호수는 역사적, 학술적, 경관적 가치가 있는 오래된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정한 나무다. 지정 주체는 지방자치단체(시·군·구청)이고, 대상은 수령 100년 이상, 보호할 가치가 높은 나무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3-19

만년송 향나무 향기 아래 선조들의 절개와 충절 되새겨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참으로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속되게 말해서 과학 문명의 도움으로 언제 어디서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꾀할 수 있다. 시간과 돈만 있다면 왕권 국가의 임금도 부럽지 않다. 그런데도 자신의 노력은 하지 않고 세상이 불공평하다느니 하면서 늘 세상을 탓하며 입에는 불평불만이 가득 찬 사람도 있다. 그러나 보릿고개를 경험한 세대라면 이러한 이유는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라며 무시할 것이다. 옛날 같으면 어디를 가려고 하면 몇 시간을 기다려 버스나 기차를 타야하고, 아니면 걸어서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황혼에 조금의 여유만 있다면 생각나는 대로 자가용으로 가고 싶은 곳으로 가서 마음껏 즐기고 또 바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 모두 하루 생활권으로 가능하다. 스마트폰이라는 기기는 언제, 어디서나 전화로 연락을 할 수 있고, 가고 싶은 곳을 내비게이션이 길 안내해 주어 똑똑한 여비서를 두고 있는 회사의 사장과도 같다. 오늘도 똑똑한 여비서에게 길 안내를 부탁하고 의성 점곡면 사촌리 마을에 살고 있는 만년송 향나무와 사촌 가로숲을 하루 일정으로 찾아 나섰다. 대한민국은 도로 왕국이라는 말처럼 잘 포장된 도로 위를 자동차는 미끄러지듯 질주했다. 구불구불한 옛길은 곧은 선형의 길로 정비되고, 산 고갯길은 산의 허리를 뚫어 터널로 건설되었으며, 중간중간 쉴 수 있는 휴게소에는 먹거리도 있고 화장실도 잘 마련되어 있다. 휴게소에서 쉬면서 향긋한 카페라떼 한 잔은 운전 졸음까지 쫓아주니 친한 길동무와 진배없다. 자동차 안의 잔잔한 음악은 귀를 즐겁게 하고, 창밖의 풍경은 눈을 즐겁게 한다. 이 모든 것이 마음을 즐겁게 해 주어 도로 위 자동차 실내 음악으로 ‘나즐로’ 행복감을 느꼈다.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205번지에 향나무 앞에 나를 데려다주었다. 향나무는 조선시대 퇴계 이황의 제자인 김사원(金士元) 선생이 3년에 걸쳐 지은 만취당 건물 뒤편에 서서 만취당과 마을을 지켜보고 있었다. 만취당은 1983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가, 2014년 보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연배의 살아있는 만년송 향나무는 아직 천연기념물로 승격되지 못함에 못내 아쉬움을 남겼다. 거대한 향나무는 만년송(萬年松)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자신을 소개했다. “내 나이는 500살, 키 8m, 몸 둘레는 2.3m라오. 아직도 매년 나이를 먹으면서 키도 자라고 몸 둘레도 늘어난다오. 조선시대 송은(松隱) 김광수(松隱金光粹) (1468~1563) 선생이 심고 스스로 나를 만년송(萬年松)이라 불렀다오. 모두 선조들의 식수관과 자연 애호 사상을 본받을 수 있는 현장 학습자료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뜰에 심어온 정원수 식재의 흐름과 향나무 생태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면서도 나의 모습에서 장수와 절개, 생명력과 충절을 보고 닮도록 노력한 선조들의 지혜는 보지 못하고 있으니 섭섭하네”라고 안내문은 은연중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촌리는 만년송과 함께 노거수로 울창한 마을 숲이 있다. 이는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 서편에 남쪽과 북쪽을 이어놓은 긴 띠형의 인공 숲이다. 길이만도 약 1000m나 되며 넓이 또한 40m에 달하는 경상북도에서는 규모가 가장 큰 마을 숲이다. 주민들이 마을의 허한 부분을 보완하고자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에 울력으로 나무를 심고 숲을 조성하였다. 이는 방풍림으로 완벽한 조건을 갖추어 나라에서도 천연기념물 제405호로 지정하여 그 뜻을 기리며 보호하고 있다. 숲은 나이가 300살에서 600살 된 느티나무, 상수리나무, 팽나무, 왕버들 노거수 등 다양한 수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를 ‘사촌리 가로숲’이라 부르며 의성군에서는 매년 ‘점곡 가로숲 둘레길 걷기 대회’를 개최하고 있다고 한다. 가로숲은 마을의 품격까지도 높여줄 뿐만 아니라 경관을 아름답게 해 주고 있었다. 잘 조성된 숲길은 건강을 다지는 힐링의 장소로 최적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둘레길에는 중생대 백악기 시대의 공룡 발자국을 체험할 수도 있었다. 가장 큰 공룡의 발자국은 1.1m에 이르고, 다리의 길이는 4.4m로 추정하고 있다고 하니, 공룡이라는 집채만 한 동물이 이곳에서 살았다고 생각하니 그를 숨겨주고 먹여주는 나무와 숲은 얼마나 크고 울창할까 하는 생각에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사촌 마을은 신라 때부터 살기 좋은 마을로 꼽혀왔다고 한다. 안동김씨와 풍산류씨, 안동권씨 삼성의 집성촌으로 의성 북부의 반촌이다. 특히 송은 김광수, 서애 류성룡, 천사 김종덕 등 숱한 유학자들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마을에서 태어나 대소과에 급제한 사람이 무려 49명이나 된다고 하니 흥미로운 마을이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이 마을에서 3명의 정승이 태어난다고 한다. 신라시대 나천업, 조선시대 류성룡에 이어 한 사람이 더 나올 것이라고 주민들은 기대하고 있다. 그래서 마을 어른들은 출가한 여인들이 친정으로 돌아와 아기를 낳는 것을 원치 않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어느 고을이고 있는 것을 보면 뭔가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다는 암시를 주는 교훈적인 이야기로 선조들의 삶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사촌리 마을은 영남 8대 명당으로 선비와 학자들의 고장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전국의 3대 장수촌의 하나로 꼽기도 했다. 1970년에는 70세 넘는 노인들이 5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는 물론이고 일제 강점기에도 의병을 일으켜 구국 항쟁의 선봉에 섰다. 이 모두는 향나무와 가로숲 등 나무를 사랑한 자연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나무에 얽힌 이야기를 찾다 보면 아름다운 풍경뿐만 아니라 내면의 삶까지 볼 수 있어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무아지경에 빠진다. 오늘날에도 안동김씨 문중 회의는 이곳 향나무와 함께하고 있는 만취당에서 열린다고 한다. 늘 푸른 향나무의 향긋한 향기를 맡으면서 절개와 충절의 정신을 본받고자 노력하지 않을까 싶다. 일본 가이스카 향나무와 우리 향나무 한국의 향나무는 동해안 지역(강원도, 울릉도, 독도 등)에 자생하는 반면, 일본의 가이스카 향나무는 자연 자생지가 없다. 이는 한국 향나무를 일본에서 조경용으로 개량한 변종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가이스카 향나무를 단순히 일본 나무로 배척하기보다는, 한국과의 연관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백제는 조경, 건축, 도자기, 불교문화 등을 일본에 전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식물 역시 이러한 교류 속에서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 가이스카 향나무를 단순히 일본 나무로 여기고 배척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3-12

세월의 손길이 빚어낸 예술작품이 전하는 ‘위로의 선율’

노거수를 찾아 떠나는 길은 마치 인생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것과 같다. 오래된 나무는 수백 년을 살아오며 그 자리에서 세월을 견디고, 바람을 맞고, 비를 머금으며 수많은 이야기를 품어왔다. 그런 나무를 직접 찾아가 손으로 쓰다듬고, 나무와 마주하여 숨을 고르는 일은 단순한 여가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잊고 지냈던 자연의 아름다움을 되새기는 순간이며, 우리의 삶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하는 특별한 경험이다. 오늘날 소셜 미디어를 통해 화려한 공연이나 값비싼 여행이 곧 여가의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진정한 여가는 꼭 돈을 들여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노거수 앞에서 느끼는 경이로움과 숲속 자연에서 느끼는 감동의 물결은 비싼 티켓이나 화려한 무대 없이도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수백 년을 한자리에서 지켜온 나무는 마치 삶의 스승처럼 우리를 맞이한다. ‘너의 어려움과 슬픔도 인내하면 곧 지나가리라’고 하는 듯한 여유로운 자태를 뽐내며,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화려한 장식이 아니라 깊이 있는 내면임을 조용히 일깨운다. 우리는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야 비로소 자연이 주는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 젊었을 때는 속도와 성취가 중요하게 여겨지고, 눈에 보이는 성공이 우선시된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느린 것의 아름다움, 변하지 않는 것의 가치, 그리고 자연과 함께하는 시간이 주는 위로를 점점 더 크게 느끼게 된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듯이, 인생의 전반부는 본문을 쓰는 과정이고 후반부는 그것을 되새기며 주석을 다는 과정이다. 노거수와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인생의 주석을 달아가며 지나온 길을 돌아볼 수 있다. 노거수는 시간을 품은 존재이며, 인간이 쌓아온 문화와 감정을 품고 있는 하나의 역사다. 나무 아래에서 우리는 소박하지만 깊이 있는 여가를 즐길 수 있다. 값비싼 티켓을 손에 쥐지 않아도, 여행의 흔적을 인스타그램에 남기지 않아도, 노거수와 함께하는 순간은 우리에게 최고의 선물이 된다. 진정한 여가는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시간을 선물하는 일이다. 노거수를 찾아 떠나는 길에서 우리는 자연의 품 안에서 한걸음 멈추어 서고, 바람과 대화하며,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발견하게 된다. 펀플레이션이 지속되면서 사람들은 여가 활동을 소셜 미디어에 남기며 자신을 표현한다. 이제 여가 활동은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 자신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 됐다. 명품 노거수와 숲을 탐방하면서 보고 느낀 감정을 글로 표현하여 신문에 연재하는 것 또한 일종의 여가 활동을 소셜 미디어에 남기며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경주는 신라문화의 본고장으로 발길 닿는 곳마다 눈길 가는 곳마다 문화재로 가득 찬 볼거리의 고장이다. 그래서 경주시는 도시 전체가 국립공원이고 노천 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도 경주에는 살아있는 문화재인 많은 노거수가 살아가고 있다. 그중에서도 경주 양동마을은 고택마다 집의 품격을 높여주고 집 지킴이로 향나무, 회화나무, 느티나무, 왕버들 등 노거수가 살고 있다. 특히 서백당 향나무 노거수는 그 오래됨과 아름다움에 많은 관광객이 찾아들고 있다. 봄볕을 머리에 이고 오르막 내리막 마을 길을 걷다 보니 또 다른 관광객들을 만나 그들과 합류했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등줄기에 맺힌 땀방울은 내의를 적시었다. 삼삼오오 양산을 받쳐 들고 햇볕을 가렸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그리워하던 따뜻한 햇볕이 오늘따라 외면당하고 있으니 이 무슨 변고일까. 나이 드신 문화 해설가는 종갓집 고택으로 안내하여 조선시대 양반 집 구조와 살림살이, 생활의 애환 등을 재미나게 설명해 주었다. 입담 좋은 문화 해설가의 설명에 웃으면서 전통 마을의 고택을 둘러보는 재미는 또한 짭짤했다. 양동마을은 월성 손씨 가문과 여강 이씨 가문이 정착해 서로 협동하고 경쟁하며 살아온 유서 깊은 조선시대의 양반마을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201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 마을은 500여 년이 넘는 오늘날까지 전통의 향기를 품은 채 150여 호의 기와집과 초가집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은 한옥, 서당, 정자, 영당 등 20여 채나 되었다. 두 가문은 사돈지간으로 협력과 보이지 않는 가문의 경쟁으로 조선시대 문신과 성리학자 등 걸출한 인재들을 배출하였다고 했다. 역시 발전을 위해서는 선의의 경쟁은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덕 위에 있는 국가민속문화재 서백당 고택에 들어섰다. 고택 건축물의 아름다움보다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향나무 노거수였다. 담벼락으로 둘러쳐진 고택은 그 옛날의 건물을 위한 담벼락이 아니었다. 바로 향나무를 품고 보호하는 담벼락으로 변신했다. 향나무로 다가가기보다 먼저 그 웅대한 자태에 놀라 한참을 톺아보다 카메라 렌즈에 고상한 품위를 담았다. 평지에 축담을 세우고 집을 짓는 것처럼 축담 위에 앉아 있는 향나무의 모습이 여유로워 보였다. 처음부터 향나무를 배려한 식재가 놀라웠다.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고즈넉한 뜰 한가운데, 수백 년을 살아온 향나무의 웅장한 자태는 성인의 모습을 연상했다. 굵고 뒤틀린 줄기마다 세월이 새겨져 있고, 마치 세상의 풍파를 묵묵히 견뎌온 듯한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서백당의 주인인 손소(孫昭)가 심은 향나무는 나이 600살, 키 15m, 몸 둘레 3.6m, 수관 폭 14.7m로 민속 문화적 가치로 보아 천연기념물 반열에 올려놓아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따스한 햇살이 나무의 거친 결을 따라 부드럽게 스치며 반짝인다. 비틀리고 꼬인 줄기는 마치 세월의 손길이 빚어낸 예술 작품처럼 신비롭고도 장엄하다. 짙푸른 가지들은 하늘 향해 힘차게 뻗어 나가고, 그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초록빛 물결을 만들어낸다. 바람에 실려 오는 은은한 향기가 마음 깊숙이 스며든다. 방문객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이 나무를 바라본다.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키며 수많은 이들의 발길을 맞이한 나무는, 마치 묵묵한 현자처럼 아무 말 없이 모든 이야기를 들어준다. 마치 세월을 지나온 나무가 전하는 오래된 이야기, 자연이 들려주는 위로의 선율 같다. 서백당(書百堂)은… 국가민속문화재 제23호다. 경주손씨 입향조인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 1433~1484)가 조선 세조 때인 1459년에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손소는 청송부의 속현인 안덕현(安德縣)에서 태어나, 25세인 1457년에 풍덕류씨(豊德柳氏) 류복하(柳復河)의 사위로 양동마을에 정착하였다. 서백당 편액이 보이는 사랑채는 손소의 아들 문신인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1463~1529)과 외손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손소 선생은 세조 5년(1459)에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주부·병조좌랑을 역임했으며, ‘이시애의 난’ 때 종사관으로 출정하여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이후 안동부사·진주목사를 역임하였다. 1484년 양동마을 자택에서 별세했는데 조정에서는 매계 조위(梅溪 曺偉, 1454 ~1503) 선생을 치전관(致奠官)으로 양동마을 손소 빈소에 보내 조문하게 하였다고 한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3-05

고고한 향과 웅장한 수형… 그 신성함에 홀리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소비 심리가 변화하면서 그중에도 여가 비용 상승이 증가하고 있다. 제한됐던 사회적 활동에 대한 보상 심리가 작용한 탓일까 ‘지금 제대로 즐기자’라는 태도로 높은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 특히 현장성을 중시하는 공연과 스포츠 이벤트의 인기가 급증하며 2024년 프로야구는 사상 최초로 1000만 관중을 기록했다. 또한, 젊은 세대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경험을 중시하며 고가의 소비를 망설이지 않는다. 이는 특별관 영화, 팝업스토어, 체험형 전시 등의 인기를 견인하고 있으며, 여행 또한 단순한 휴식이 아닌 개성과 가치를 반영한 경험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부터 나즐로(나 홀로 즐거운) 명품 노거수와 숲 탐방 체험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작은 여가 비용으로 큰 즐거움의 개성과 가치를 반영한 체험을 하고 있으니 일찍부터 트렌드 변화의 감을 잡은 탓일까. 오늘도 경북 울진군 죽변면 화성리 산 190번지 천연기념물 향나무 노거수와 마주하고 서 있다. 향긋한 향기가 몸을 감싸면서 혈류를 타고 나의 가쁜 숨소리를 잠재운다. 경사진 산자락을 타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다 보니 숨이 찼다. 심호흡으로 숨 차는 것이 진정되고 머리가 맑아지면서 기분도 또한 상쾌했다. 웅장한 향나무를 톺아보았다. 거대함과 묘한 줄기의 뒤틀림에서 나오는 곡선의 아름다운 미가 눈을 사로잡고 무한한 즐거움에 감정선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름다움에 대한 감흥이 일어나 몸에 저절로 소름이 돋는다. 웬만한 아름다움에도 쫓기는 일상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지나친 일들이 부지기수인데 이렇게 고요한 나무 아래에서 나 홀로 흥분하고 있으니 이 또한 무슨 괴이한 일인가. 공활한 푸른 가을 하늘처럼 내 마음 또한 그같이 한량없다. 화성리 마을 뒷산 자락 중턱에 살아가고 있는 향나무는 나이가 약 500살로 추정되며, 키는 14m, 가슴 높이 둘레 4.5m의 우산 모형의 수형이다. 외과 수술을 하였지만, 아직도 건강한 모습이다. 향나무는 측백나뭇과에 속하는 상록 침엽 교목으로, 노송나무라고도 불린다. 나무껍질은 회갈색이고 세로로 얇게 갈라지며, 꽃은 4-5월에 피며 열매는 9-10월에 자흑색으로 익는 나무이다. 주로 정원수나 관상용으로 가꾸며, 목재는 특유의 향기가 좋아 귀중한 가구재나 약재로 사용된다. 우리나라 중부 이남과 울릉도에 주로 자생하며, 중국, 일본 등에도 분포한다. 향나무는 전국에 골고루 분포하고 널리 심었던 자원식물이다. 한반도 동해안의 나무이고, 한국인의 나무라는 것을 노거수 탐방으로 알 수 있었다. 향나무 자생 개체군은 오랫동안 남획되었다. 일상에서 흔히 보는 향나무는 모두 심은 것으로 유래 되는데, 이는 민속 생활 문화와 무관하지 않은 결과이다. 고급 향의 재료로 향나무를 주목했던, 유교문화가 창성한 조선시대에 더욱 성행했다. 향교, 서원, 사찰, 무덤, 우물가 등 사람이 관리하는 장소에서 흔히 보는 크고 작은 향나무는 그런 맥락의 문화적 소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식물생태보감에 김종원 교수는 “일본열도에서 향나무 자생지라고 알려진 사례는 여태껏 없다. 오히려 식재 기원이라는 방증만 차고 넘친다. 모두 6세기 백제에서 전래된 불교문화가 크게 번창했던 곳이다”라고 기술하여 향나무는 동해안의 나무이고 한국인의 나무임을 말하고 있다. 가이즈카(Kaizuka) 향나무를 일본 나무로 알고 배척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이는 잘못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생각되지만, 한편으로 얼마나 맺힌 원한이 많으면 그럴까 싶다. 향나무 노거수가 무슨 요술을 부리는가 싶은 생각이 든다. 고요한 수림 속에 향나무와 마주하며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데 왜 이렇게 기분이 상쾌하고 좋을까? 나무가 뿜어내는 향기를 내가 들이마시고 사람이 뿜어내는 이산화탄소를 나무가 받아 마시며 교호 작용하는 탓일까? 그 동안 도시의 혼탁한 공기 속의 양이온에 몸의 균형은 깨어지고 찌들어 그로 받은 스트레스는 일상의 생활을 그리 유쾌하지 못하게 했다. 양이온 과다 흡수로 우리 몸의 신경전달 물질의 일종인 세로토닌의 분비가 과다 촉진되어 자극에 대한 반응을 무디게 만들었다. 신체에서 보내는 여러 가지 정보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니 늘 몸이 무겁고 마음도 개운하지 못했다. 세로토닌의 생성을 막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자연에서 지내는 것이 최상이 아닐까 싶다. 음이온은 식물이 광합성을 하는 숲에 많고 특히 향나무, 소나무와 같은 침엽수림에 더 많다고 한다. 향나무에서 나는 향기는 우리의 심장과 신경, 근육 등 자율 신경을 진정시키고 신진대사를 촉진한다. 이는 세포의 장기 기능을 강화하여 혈액을 정화하고 혈액 순환도 잘 되어 혈색까지 좋아지니 즐기면서 건강도 챙기는 이보다 더 좋은 여가 체험이 있을까 싶다. 우람한 줄기의 거친 질감에서 세월의 흔적과 강인함을 느끼고, 독특하게 휘거나 꼬이거나 구부러진 모습에서 곡선의 아름다운 미가 참으로 인상적이다. 중앙 원 줄기에는 갈라진 틈이나 옹이가 오랜 세월 동안 자라면서 형성된 특징적인 무늬 또한 특별했다.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가지가 땅으로 처져 있었다. 그러나 일부 가지는 그와 반대로 하늘 높이 쭉 뻗어 자란 모습에서 자유 분망함과 힘찬 삶의 생기를 느꼈다. 처진 가지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받들어주기 위하여 지지대를 무려 10개나 세워 놓았다. 주변에 철제 울타리를 설치하고 천연기념물이라는 안내 표시판도 설치해 놓았다. 주민들의 나무사랑 자연관을 엿볼 수 있었다. 동해안에는 향나무 노거수가 많다. 보호수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정성껏 돌보는 노거수가 부지기수다. 서해안과 남해안 마을과는 색다른 풍광이다. 동해안 마을공동체는 뜻을 모아 특정 공간에 향나무를 심어 기르며 마을 안녕과 평화,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신성한 곳을 지켜 내는 일을 향나무에 의탁한 셈이다. 이는 매향(埋香) 문화의 시발점 혹은, 출발점이 아닐까 싶다. □ 울진 화성리 천연기념물 향나무 노거수 줄기는 상록 교목성으로 곧게 자란다. 잎의 조건에 따라 둥치에서 구분되기도 한다. 약간 적갈색이고, 세로로 잘게 갈라지면서 떨어지는 껍질 질이 발달한다. 굵고 늙으면 속이 빈다. 잎은 길이 약 1.5mm. 비늘잎은 묵은 가지에서 나고, 긴 원통형으로 빼곡하게 모여 달린다. 길이 약 1cm 비늘잎은 보통 2~3개씩 돌려나면서 달리고, 닿으면 다칠 정도로 날카롭다. 비늘잎은 어린줄기나 상처를 심하게 입은 줄기 또는 가지에서 주로 나고 협한 생육 조건일수록 많다. 노간주나뭇잎은 길이 2cm 정도로 예리한 비늘잎이 있다. 측백나뭇잎은 비늘잎이 붙어서 납작하고 부챗살처럼 펼쳐진다. 꽃은 4~5월에 피고, 암수딴꽃이지만 암수한몸도 흔하다. 비늘잎이 변형된 묵은 가지에 피며 암꽃은 짧은 비늘 잎줄기 끝에, 수꽃은 눈에 띌 정도로 긴 비늘 잎줄기 끝에 달린다. 열매는 방울열매로 씨가 2, 3개 들어 있고, 겉이 흰 가루 같은 것으로 덮인다. 서식처는 해안단구 및 해식애 절벽 바위, 내륙 하식애 석회암 등이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2-26

‘청렴과 지조’ 선비 닮은 나무 곁에 두고 쉼에서도 배움 찾아

청송 월정리 침류정에 올라서니 주변의 다채로운 경관이 어울려 한 폭의 수채화 같다. 나지막한 산자락 끝, 하천에 발을 담근 경사진 언덕에 석축을 쌓아서 그 난간 위에 전망대와 같은 누각을 올려놓았다. 나뭇가지 새들의 노랫소리, 맑은 물 흐르는 하천, 주렁주렁 달린 빨간 사과는 나의 귀와 눈을 사로잡고 침샘을 돋게 했다. 도로변 따라 뿌리줄기에 매달린 고구마처럼 옹기종기 모인 농촌 마을은 간간이 자동차가 지나다닐 뿐 조용히 낮의 끝자락 아니 밤의 시작 저녁을 맞이하고 있다. 서녘 하늘 붉은 노을에 포물선을 그리며 서산으로 달려온 붉은 태양이 산마루에 걸터앉아 잠시 숨을 고르며 쉬고 있다. 고즈넉한 농촌의 평화로운 풍경 속에 나 또한 풍경 속 자연의 하나가 되어 있는 모습을 그리면서 회광반조에 눈시울을 붉힌다. 여름에도 이곳 침류정 향나무, 회화나무 아래에서 힐링을 한 적이 있다. 그 여름의 열기와 열정, 풍성한 에너지는 누구에게 돌려주었는지, 텅 빈 침류정 나뭇가지들이 갈바람에 이별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오늘 또다시 침류정 난간에 기대어 옛 조상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면서 또 다른 정취와 감흥에 빠져 들었다. 청송 월정리 침류정은 하천 건너 낮은 언덕 좌측으로부터 침류정(枕流亭), 오월헌(梧月軒), 동와정(東窩亭)에는 향나무, 회화나무, 은행나무가 살아가고 있다. 오월현 서당 앞뜰에는 도 기념물로 지정된 나이 350살, 키는 10m, 몸 둘레는 4m 50cm인 우람한 향나무와 동와정 서당 앞뜰에 100년을 훌쩍 넘긴 향나무 노거수 한 그루가 있다. 그리고 침류정 누각 주변에는 나이 200살, 키 15m, 몸 둘레는 3m 40cm이나 되는 회화나무 네 그루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들 노거수는 침류정을 지은 김성진의 제자들이 심었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주변의 노거수는 조경수로써 침류정과 서당의 품격을 높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학문과 충효 정신을 길러주었을 것이다. 침류정과 오월헌, 동와정은 조선시대의 별서이며 서당이다. 별서는 본가와는 별도로 마련된 집이나 정원으로 휴식과 사색, 문화생활을 즐기기 위해 만든 공간이다. 단순히 생활 공간을 넘어,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심미적 가치관이 반영된 독특한 건축물과 정원이다. 오늘날 아름다운 경관이나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세워진 정자나 전망대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자연경관이 뛰어난 산기슭, 강변 등 자연을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곳에 터를 잡고 침류정을 짓고 주변에 나무를 심어 정원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곳에 의성김씨 김성진의 월정리 문중은 서당을 세워서 젊은이를 독서와 시문을 짓고 학문을 탐구했다. 그러한 덕분에 학문과 소양을 겸비한 의성김씨 후손들은 오늘날까지도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어 국가와 지역사회에 큰 공헌을 하고 있다. 침류정 향나무는 경관을 꾸미는 요소뿐만 아니라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향나무는 사시사철 푸른 잎을 유지하여 청렴함과 불변의 의지를 상징한다. 유생과 선비는 향나무의 삶과 마주하면서 자신도 향나무의 상징처럼 청렴하고 강직한 삶의 자세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를 다졌을 것이다. 특히 향나무는 제사와 같은 의식에서 향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조상 숭배와 경건함을 표현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유학 사상과 맞물려 은연중에 마음에 새기고 몸에 배었을 것이다. 회화나무 또한 예로부터 선비 나무라 하여 유교적 학문과 관계가 깊으며, 문묘에 회화나무를 심는 전통이 있었던 것도 이러한 상징성을 보여준다. 나무들은 단순한 조경의 역할을 넘어 학문적 영감과 유교적 이상을 실현하는 데도 중요한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그러한 것을 유도하기 위하여 향나무와 회화나무를 선택하여 조경수로 심었지 않았나 싶다. ‘침류정기(枕流亭記)’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곳의 풍광 속에서 왜 흐르는 물만을 취하여 정자의 이름으로 삼았는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잔에 넘치는 물이 천리를 흘러가며 무궁한 이로움을 준다. 작은 집이 잔에 넘치는 물의 근원과 같다. 오래 갈수록 더욱 많아지고, 멀리 갈수록 더욱 빛날 것이다. 흐름을 이어가고 맑음을 유지하는 것이 침류(枕流)의 교훈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낮이면 태양은 정열을 불태우고, 밤이면 달과 별은 전설을 노래한다. 태양이 어둠을 살라먹고 동쪽 하늘에 솟아올라 서쪽 하늘 아래로 숨어들면서 그 어둠을 토해낸다. 밝음으로써 가까운 주변의 사물이 보이고 어둠으로써 먼 하늘의 별들이 보인다. 밝으면 보이고 어두우면 보이지 않는다는 말도 어불성설인 것 같다. 낮의 시작은 새벽이요, 그 끝은 저녁이다. 그러나 밤의 시작은 저녁이요, 그 끝은 새벽이다. 서로를 물고 이어주면서 낮과 밤, 밝음과 어둠이 하나가 되어 하루를 이룬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하루의 시작은 새벽이라고 한다. 맞는 말인 것 같으면서도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그렇지도 않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생각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자기만의 생각이 옳다고 우기고 주장하며 편을 가르고 있으니 참으로 난감하다. 산기슭 강변에 자리 잡은 침류정 향나무, 회화나무 노거수는 다채롭고 아름다운 특별한 경관을 창출하여 학생들에게는 학문과 예술의 전당 역할을 했다. 이는 산림 문학의 발전에 중요한 토대를 제공했다. 선비들은 자연을 관찰하고 그 아름다움과 생동감을 문학적 소재로 삼았다. 이는 자연을 노래하는 산림 문학의 시작점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산림 문학은 자연을 중심으로 한 문학으로, 자연 속에서 삶의 이치를 깨닫고 철학적, 유교적 사유를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나무는 예술과 문학의 소재이며 학생에게는 배움의 교재이다. 그러나 오늘날 조선시대 별서와 서당은 그 역할의 꼭짓점을 찍고 퇴색된 지도 오래되었다. 이렇게 허물어져 가는 별서와 서당을 힐링과 문학, 예술의 창작 공간으로 재탄생했으면 하는 바람을 해 본다. 서서히 어둠의 그림자는 드리워지고 침류정 향나무, 회화나무 노거수는 반짝이는 별들의 노랫소리에 잠이 들면서 옛 영광의 꿈을 꾼다. 청송 월정리 침류정, 오월헌, 동와정은… 침류정(枕流亭)은 경북 청송군 현서면 월정리 264번지에 있는 정자다. 1992년 11월 26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66호로 지정됐다. 조선 중기 학자인 김성진(1558∼1634)이 후배 양성에 전념하기 위해 지은 정자다. 김성진(金聲振)은 학식이 높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후학을 위해 문집 목판각을 만들고 책을 인쇄해 널리 보급했다. 임진왜란(1592) 뒤인 1600년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성진은 의성김씨 청송 입향조인 김한경(金漢卿)의 증손으로 임진왜란 때 동생들을 창의케하고 자신은 노모를 피난시켰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집이다. 오월헌(梧月軒)은 ‘오동나무에 걸린 달’을 뜻하며 김성진(金聲振)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서당이다. 오른쪽 방은 강학재(講學齋)이고 왼쪽 방은 돈의재(敦誼齋)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대청을 중앙에 놓고, 그 좌우에 각각 온돌방 1칸을 배치했다. 동와정(東窩亭)은 조선 선조 때 통정대부장악원정(通政大夫掌樂院正)을 지낸 김흥서(金興瑞)가 후학을 가르치며 말년을 보낸 정자다. 동와(東窩)란 동쪽에 있는 움집이란 뜻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집이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2-19

엄마·처녀 소나무 잇따라 떠난 후 홀로 마을 지키는 장군송

우리는 먼 하늘 이름 모를 별에서 나 홀로 지구로 여행을 온 나그네이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생전과 사후는 모른다. 그러나 많은 사람과 함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지향하다 떠날 때는 또한 나 홀로 떠난다. 건강하고 행복한 여행을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지만, 인간은 채우지도 못하는 끝없는 욕심 때문에 나그네 여행길은 힘들고 고단하다. 때로는 과한 욕심에 눈멀어 나락으로 떨어져 돌이킬 수 없는 막다른 골목길에 봉착하여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우리의 인생길은 미리 볼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고 되돌아올 수도 없는 외길이며 첫길이자 마지막 길이다. 한 번뿐인 인생길, 창공의 바람처럼, 청산의 물처럼, 산야의 노거수처럼 자연과 함께 자유롭게 걷고 싶다. 그 인생길이 슬프고 아프면 슬프고 아픈 대로, 기쁘고 즐거우면 또한 기쁘고 즐거운 대로 나그네의 운명이라 여기고 안분지족하면서 천천히 그리고 부끄러움이 없는 길을 걷고 싶다. 오늘도 나즐로(나 홀로 즐겁게) 노거수 여행길에 나셨다. 노거수에 대한 고사와 설화가 있다. 그중에서도 환생담은 사람이나 동물이 죽은 후 나무로 환생하여 신앙의 대상이 되거나 신성시되는 설화이다. 포항시 남구 연일읍 인주리 산 15번지에 살아가고 있는 소나무 노거수는 이러한 환생담의 설화를 가지고 있는 노거수로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옛날 경북 포항 연일읍 인주리 운제산 자락 조용하고 아담한 시골 마을에 득대란 청년이 살았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된 어머니를 모시고 여동생과 가난하지만, 오손도손 정답게 살고 있었다. 가장 노릇을 하며 어려운 집안일은 물론 부모님께 지극정성이고 여동생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오빠였다. 그러나 남자로서 씩씩하게 자라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호연지기를 키우면서 공부와 무술을 열심히 배우고 익혔다. 그러던 어느 해 나라에서 큰 전쟁이 일어났다. 득대 청년은 평소 생각하던 바대로 어린 동생에게 어머니를 잘 모실 것을 당부하고 전장으로 떠났다. 문무 겸비한 청년이라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임금님으로부터 대장군이란 칭호를 하사받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대장군이 된 득대는 금의환향했다. 고향 조박골에 당도해 보니 온 마을은 도적들이 몰려와 가축이며 양식을 모두 털어 가고 마을 처녀들도 모두 붙잡아 갔다는 청천벽력에 아연실색했다. 단숨에 도적들 소굴로 달려간 득대는 도적의 두목을 죽이고 도적들을 멀리 쫓아내고 잡혀간 마을 처녀들을 모두 구했다. 그러나 동생은 도적들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였다. 시신으로 돌아온 딸을 본 어머니는 충격으로 그만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와 동생을 마을이 보이는 산자락에 묻은 득대는 묘 앞에서 여드레 동안 어머니와 동생을 생각하며 통곡하다 그 자리에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나라와 마을을 위해 큰일을 한 득대를 어머니와 동생 옆에 나란히 묻어 주었다. 몇 년이 지난 후 세 사람의 묘 위에 소나무가 한 그루씩 자라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세 사람의 영혼이 소나무가 되어 마을의 수호신으로 환생했다고 믿어 장군 소나무, 엄마 소나무, 처녀 소나무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매년 정월에 세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아름다운 이야기와 한 그루의 장군 소나무만 남아 있다. 수년 전 엄마 소나무가 죽고 나자, 처녀 소나무마저 그 뒤를 따라 죽었다 한다. 그 흔적만이 남아 설화를 뒷받침하고 있다. 지금도 장군 소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마을의 번영과 평화를 위해 마을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다. 또한 마을 주민들도 조상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가슴에 담고 장군 소나무를 잘 보호하며 가꾸고 있다는 설화가 지금까지 주민들로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우리는 장군 소나무 노거수 설화에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부모님에 대한 효도와 동생에 대한 형제간의 우애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를 모시고 여동생과 살아가면서 가장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평소에 문무를 익혀 전쟁이 일어났을 때 주저 하지 않고 전장에 나아가 혁혁한 공을 세우고 승리로 이끌었다는 이야기는 충성심과 애국심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어머니와 동생의 묘소에 쓰러져 죽은 득대 청년을 주민들은 어머니와 동생 옆에 함께 묻어 영혼을 위로해 주었다. 무덤에 소나무가 자라자 득대와 그의 어머니와 동생이 환생하였다고 믿고 마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주민들의 화합과 단결심을 보여주고 있다. 전쟁으로 인하여 득대란 청년의 행복한 가정은 물론 마을의 평화도 풍비박산이 났다. 전쟁으로 인한 물적 인적 피해는 나라뿐만 아니라 국민 개인적으로도 씻을 수 없는 불행을 가져왔다. 전쟁은 먼 설화 속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오늘날도 하마스와 이스라엘 전쟁은 하마스가 먼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였으나 이를 물리치고 오히려 하마스를 초토화시켜 종전의 협상에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러시아가 먼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영토의 일부분을 점령하였으나 우크라이나는 국제 사회의 무기 지원만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형국이라 종전의 협상도 어렵게 하고 있다. 옳고 그름을 떠나 힘이 약하면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는 것이 오늘날 국제 사회의 현실이다. 유비무환으로 스스로 강해지는 자강의 길만이 나라를 지키고 우리의 행복을 지키는 길임을 장군 소나무 설화의 이야기 속에서 깨달았다. 노거수 설화는 마을 신화의 성격을 지니면서 마을의 중심 공동체 공간으로 애향심과 단결심, 애국심과 충성심을 도모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마을을 바라볼 수 있는 운제산 자락, 언제나 마을 주민의 행동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여 바른 행동을 유도한다. 나무로 환생한다는 설화는 마을 주민 자치 교육의 수단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공동체 사회 규범을 노거수 설화로 엮는 선조들의 지혜를 엿 볼 수 있다. 노거수에 얽힌 고사와 설화는 징벌담은 당산나무를 신성시해야 하고 제사를 소홀히 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으로 가장 대표적인 노거수 설화다. 영험담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견하거나 인간에게 풍요를 가져다주고, 당산나무에 해를 가하면 울거나 혈흔을 나타내는 영험이 있다는 노거수 설화다. 동물담은 노거수에 특정 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그 생물에게 위해를 가하면 천벌을 받는다는 설화. 동물담의 노거수 설화 속에는 뱀이 높은 빈도로 나타나고 있다. 뱀은 사탄과 같은 사악함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하지만, 당산 집 또는 당산나무를 보존하기 위한 수단인 동시에 지킴이 동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 식목담은 마을을 개척한 사람이나 역사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람이 심었다는 노거수에 대한 고사다. 이인계시담은 꿈속에 낯선 사람이 나타나 계시하는 대로 이행하면 반드시 유리한 상황이 전개된다는 노거수 설화다. 현몽담은 당산나무에 꿈 이야기가 부가되어 있는 것으로 꿈속에 목신이 나타나 인간에게 계시하는 것으로 사람과 대결한다거나 괴질을 물리친다는 노거수 설화. 풍수담은 풍수지리설이 포함된 노거수 설화로 보면 된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2-12

만고풍상 견디며 푸르름 잃지 않은 노송과 황홀한 해맞이

을사년 뱀의 해를 맞이하여 새로운 마음의 다짐을 갖고자 새벽 5시에 집을 나서 팔공산 인봉 신선송을 찾아 나섰다. 어둠 속으로 자동차들은 헤드라이트를 켜고 새벽부터 도로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북지장사로 가는 좁은 산길로 접어들었다. 경사진 오르막길에 굽은 산길은 앞을 밝히는 헤드라이트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몸의 감각과 정신 집중으로 무난히 북지장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아직 주변은 어둠이 깔려 사물을 잘 분간할 수 없었다. 인봉의 소나무와 함께 해맞이할 요량으로 가파른 경사진 올레길을 따라 올랐다. 숨이 차서 고개를 들고 심호흡하는데 어두운 밤하늘 숲속 나뭇가지에 밝게 빛나는 달이 등불처럼 걸려 있었다. 밝은 한 줄기 달빛이 어슴푸레하게나마 어둠을 몰아내고 숲속의 산길을 밝혀 주었다. 길 위에 내려앉아 있는 달빛을 지르밟으면서 들숨과 날숨을 세어가면서 한 발짝 두 발짝 천천히 올랐다. 마침내 거대한 바위가 앞을 가로막았다. 아 이것이 팔공산 인봉이구나 직감하고 잠깐 그를 톺아보았다. 주변을 살피면서 바위에 오르는 길을 찾았다. 북쪽으로 가서 살펴보니 내려가는 등산길이 있고 바위로 오르는 길은 없었다. 그러면 남쪽에 오르는 길이 있겠지, 하면서 발걸음을 돌렸다. 그곳에도 가파른 바위 낭떠러지로 길은 없었다. 다시 한번 이쪽저쪽을 가보면서 살펴보았지만, 길은 찾을 수 없었다. 새벽에 어디 전화해서 물어볼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했다. 어둠이 걷히기를 기다렸다. 그 시간이 오히려 나에게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산행하다 보면 많은 사람이 “산(山)과 봉(峰)을 어떻게 구분하지?”하고 묻는다. 그렇다. 어떤 것은 산이라 하고 또 어떤 것은 봉이라 하니 헷갈리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산은 주로 산맥이나 산줄기의 큰 덩어리를 이루는 전체적인 지형을 의미하고 봉은 산의 일부로 특히 뾰족하게 솟은 산봉우리를 지칭하지 않나 싶다. 한라산, 설악산, 팔공산 등 높이와 면적이 넓은 지역을 포괄적으로 지칭하고 봉은 팔공산의 동봉, 서봉, 인봉 등 산의 한 부분으로 특정 지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팔공산의 지명과 유래를 생각하는 동안 어느 순간에 어둠은 산속으로 숨어들고 동쪽 하늘에 붉은 서기가 돌았다. 이제는 정말 오르는 길을 찾아야만 했다. 일어나서 다시 북쪽에서 남쪽으로 거대한 바위를 따라 훑었다. 거대한 바위가 조각나 떨어져 길을 막고 있었다. 떨어진 바위를 타고 넘었다. 그러자 바위와 바위 사이 좁은 공간에 노끈이 보였다. 겨우 몸 하나 지나갈 정도의 좁은 바위틈 사이를 비집고 노끈을 잡고 몸을 솟구쳐 올랐다. 인봉(579m), 거대한 바위 위에 올라섰다. 그곳에는 천년의 세월을 함께한 신선이 선물했다는 소나무 한 그루가 살아가고 있었다. 키는 불과 2m 남짓하고 큰 줄기 몸 둘레는 60cm, 작은 줄기 몸 둘레는 50cm 정도의 단아한 우산형의 자태였다. 너무나 완벽한 비율의 분재형 소나무였다. 분재형 소나무라면 화분과 흙, 물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곳 소나무는 화분 대신에 큰 바위들이 서로 맞물려 하늘로 솟구쳤다고 할까, 아니면 하늘을 받들고 있다고 할까, 아무튼 뾰족한 산봉우리 큰 바윗덩어리 위 좁은 틈새 열악한 환경에 뿌리내리고 살아가고 있었다. 바위 틈새에 있는 눈곱만한 흙은 비바람이 실어 오고 또 만들었지 않나 싶다. 화분에 있는 소나무도 시시때때로 물을 주지 않으면 주접이 들고 결국 생을 마감한다. 그런데 바위 위에 살아가는 소나무는 누가 물을 주고 보살핀단 말인가. 그리고 보면 자연이 힘을 합쳐 소나무를 다듬고 키우지 않았나 싶다. 바람은 멀리서 구름을 실어 오고 팔공산은 새벽마다 찬 이슬로 목을 축여주고 가끔 내리는 비는 바위 틈새에 머물러 소나무의 생명줄을 붙잡아주지 않았을까 싶다. 인봉은 팔공산 노적봉에서 뻗어 내린 능선 위에 다시 한 번 힘차게 솟구친 거대한 바위덩어리이다. 동서남북 사방을 막힘없이 조망할 수 있어 가슴이 뻥 뚫어졌다. 동산에 잉태의 붉은 산기를 더욱 짙게 물들이고 있다. 붉은 태양이 하늘로 힘차게 솟구쳐 오르고 있다. 햇귀의 기운이 막힘없이 이곳 인봉 신선송에 쏟아져 내린다. 나는 신선송과 함께 새해 해맞이를 했다. 동으로 뻗은 푸른 솔가지 솔잎이 반짝반짝 빛났다. 환상적인 해돋이 풍경의 순간을 맞이하여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신선송의 자태에 나도 모르게 두 손 합장하여 경외심을 표했다. 그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면서 그에게 나라의 안녕과 평화를 빌었다. 돋을볕은 먼저 팔공산의 높은 봉부터 찾아 들었다. 천왕봉(1192m), 비로봉(1176m), 동봉(1167m), 삼성봉(1150m)이 자리한 팔공산 정상의 봉우리를 밝혔다. 돋을볕으로 아침 세수를 하는 팔공산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들어왔다. 팔공산 치맛자락 접힌 명승지에 신라 고찰 동화사가 자리 잡고 통일대불상이 조용히 인봉을 바라보고 있다. 팔공산을 바라볼 수 있는 가장 멋진 곳, 인봉 바위 위에서 수백 년 동안 만고풍상을 견디며 여전히 푸르름을 잃지 않고 살아 있는 신선송과 황홀한 아침 해맞이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언제나 변함없이 무언의 신비를 전해 주고 있는 것 같은 신선송과 함께 팔공 백 리 능선을 바라보니 마음이 숙연하다. 아침 돋을볕이 서서히 산 아래로 내려와 시가지를 밝히고 있다. 낙동강이 대구 시민의 젖줄이라면 팔공산은 시민의 품이요 산소 카페이며 에너지의 발원지이다. 저 멀리 서쪽으로 눈 덮힌 가야산이 보이고 남쪽 앞산과 비슬산이 대구 시내를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팔공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자락의 봉들이 이어진 스카이라인 조망은 그 무엇보다 아름답다. 조선 시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은 1748년 팔공산을 유람하고 남긴 남유록(南遊錄)에서 “반쯤 시든 소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고색창연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라며 팔공산 인봉 소나무를 예찬했다. 이를 근거로 소나무 나이를 300살로 보기도 한다. 그때도 지금과 같다고 하니 300살을 더 보태어 600살이라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팔공산 인봉 소나무는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우리에게 불망의 ‘인봉 신선송’이다. 바위 위에 올려놓은 자연이 다듬은 바위 분재 소나무이다. 팔공산 국립공원 상징물과 천연기념물로 ‘인봉 신선송’은 생태학적으로나 문화적 가치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고색창연한 신선송의 고고한 자태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의 방문으로 뿌리가 노출되고 답압으로 생육환경이 날로 열악해지고 있어 팔공산국립공원관리공단이 관심 가져 주었으며 하는 바람을 해 본다. 필자의 시 ‘팔공산 인봉 신선송’ 팔공산 인봉 바위에신이 씨앗을 뿌리고 다듬은천년의 숨결로 뿌리내린 신선송새해의 빛을 가장 먼저 품는구나. 비바람에 흔들려도 꺾이지 않고눈보라에 휩싸여도 잎을 잃지 않는바위틈새 깊이 내려진 뿌리는 세월을 뚫고하늘로 뻗은 두 팔은 내일의 태양을 부른다. 그 뿌리는 깊고, 심지는 강하여붉게 떠오르는 아침의 태양처럼꿋꿋하고 단아한 자태희망의 등불이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2-05

처진 모습이 아름다운, 늘 푸른 소나무는 변함이 없구나

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과 나무가 200년이 훌쩍 지난 오늘날까지 같은 공간에 함께 하고 있다. 시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영세불망(永世不忘)하고 있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서유민 군수(徐有民 郡守)와 천연기념물 처진 소나무 노거수이다. 서유민(徐有民)은 자는 원경(元卿)이요. 본관은 달성으로 200여 년 전 1826년(순조 26년) 8월에 삼동 현령으로 부임하여 1828년(순조 28년) 3월까지 근무하고 가산 군수로 이동한 목민관이다. 그리고 천연기념물 처진 소나무 노거수는 나이 240살, 키는 14m, 몸 둘레는 2m 넘는 아름답고 우람한 늘 푸른 소나무이다. 서유민은 목민관으로 주민의 추앙과 이목을 끌었고, 늘 푸른 소나무는 나뭇가지가 아래로 처진 모습이 아름답고 우람하여 경외심과 이목을 끌었다. 사람은 주민들로부터 청렴한 목민관으로 영원히 잊혀지지 않도록 영세불망비를 세워 후손에게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소나무는 내외적인 아름다움과 고결한 지조의 상징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나라에서 문화재로 보호하고 있다. 이 둘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두 주인공이 함께하고 있는 곳은 경북 청도 매전면 동산리 151-1번지이다. 지역 주민이 그의 공적을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하기 위하여 영세불망비를 세워 그를 기리고 있는 곳도 그리 흔치 않다. 얼마나 훌륭한 공적을 쌓았으면 그를 위해 주민들이 영세불망비까지 세웠을까. 지금의 공직자와 선량은 이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하다. 대통령과 국무위원, 주요 공직자들이 줄줄이 선량들의 탄핵으로 직무가 정지되어 대행이라는 낯선 행정의 일면을 보고 있다. 또한 국회의 선량들은 공직자의 탄핵발의가 일상화되어 나라의 국제 신인도가 떨어지고, 국민으로부터 법 위반으로 고소 고발로 몇 년간 재판을 받는 해괴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옳고 그름의 판단을 신속하게 헌법과 법률, 양심에 따라 해 주어야 할 사법부 판사 나리는 진영의 논리에 갇혀 국민을 양분하고 있지 않은지 의심마저 들게 하고 있다. 이런 엄중한 현실의 와중에도 불구하고 국민은 두 진영으로 나누어 한양의 겨울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묵묵히 생업을 이어가는 국민은 불안에 불면을 겪고 있다고 한다. 서유민 군수와 늘 푸른 소나무 노거수가 이를 보고 무슨 말을 해 줄까 궁금하다. 주민들은 늘 푸른 소나무 곁에 서유민 군수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세워 그의 선정을 후손에게 길이 기억하게 했다. 매년 9월 초에 문화재 보호 재단에서 주변 잡초를 제거하고 깨끗하게 단장하고 있다. 아마 천연기념물 처진 소나무가 없었다면 서유민의 영세불망비도 찾기도 어렵거니와 그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훼손되었거나 자취를 감추었을지도 모른다. 영세불망비와 소나무라는 한 세트의 그림은 참으로 오묘하다. 영세불망비의 주인공은 200여 년 전에 돌아가시고 없지만, 그의 선정은 살아 숨을 쉬는 문화재 소나무와 함께 돌비석에 새겨져 오늘날까지 그의 선정 미담의 숨결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소나무는 또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의 옷을 입고 있다. 1980년대 450원에 출시된 솔이라는 브랜드의 담배가 있었다. 당시 고급 담배로 1986년까지 단일 브랜드로 시장점유율 60%를 기록하며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2005년에 단종되어 지금은 나오지 않지만, 애연가라면 담배 겉표지의 그림을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바로 처진 소나무가 솔 담배에 그려진 모델이 된 소나무라고 한다. 아마 그로 인해 1982년 천연기념물 제295호로 품격이 올려지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우리나라 처진 소나무 중 가장 전형적이고 희귀한 유송(柳松)으로 전국에서 독특한 모양새를 자랑하는 가치가 높은 소나무라고 한다. 그러나 건강에 해로운 담뱃갑의 겉표면에 경고의 문구 대신에 덩그렇게 실려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지금은 그 브랜드의 담배가 단종되었다니 참으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소나무는 비틀린 줄기와 가지의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소나무의 모습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비유하는 듯하다. 이는 세월의 풍파를 겪으며 자연이 만들어낸 조형미이다. 인간이 조각한 작품처럼 보이지만, 자연의 손길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소나무의 푸른 잎은 생명력과 불멸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우리 문화에서 소나무는 변함없는 의지와 장수를 상징하는 나무로 자주 등장한다. 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는 고결함과 지조를 지키는 군자의 덕목을 표현하는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밖에도 아래로 처진 나뭇가지는 마치 고개를 숙인 모습처럼 보인다. 이는 겸손함과 인내의 미덕을 상징할 수 있다. 고개를 높이 들기보다 내려 숙이는 행위는 동양 철학에서 지혜와 성숙함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공자는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군자는 겸손해야 한다”라고 가르쳤다. 소나무의 가지도 그러한 겸손한 자세를 표현하는 듯하다. 또한 오랜 세월의 무게를 견뎌온 흔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소나무가 오랜 시간 성장하면서 가지가 아래로 처지는 모습은 나이가 들수록 깊어지는 연륜과 삶의 지혜를 상징한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경험과 지혜를 축적하고, 겉으로는 약해 보일지라도 내적으로 단단함을 유지하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담고 있는 듯하다. 또한 처진 나뭇가지 모습은 오히려 독특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었다. 이는 인간의 삶에서도 완벽함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상처와 세월의 흔적 역시 고유한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겸손, 연륜, 순응, 포용, 그리고 인간의 한계를 통한 아름다움이라는 깊은 인문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자연의 모습에서 삶의 철학과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늘 푸른 소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닌,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소나무와 영세불망비라는 한 세트의 그림에서 그 속에 숨어 있는 조상의 깊은 뜻이 무엇인지 오늘날 스스로 영혼이 없다는 자조적인 공직자와 무소불위의 권한과 권력을 위임받은 선량들이 보고 무언가 느꼈으며 하는 바람을 해본다. 군수 서유민 영세불망비는… 경북 청도군 매전면 동산리 151-1번지에 위치했다. 1828년(순조 28년)에 만들어졌고, 비석 높이는 90cm, 너비는 38cm다. ‘선정에 부지런히 힘쓰시니 일마다 밝게 다스려졌네, 그 은혜 윤택하여 폐단을 막으니 군수님 떠나가셔도 더욱 생각나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유민(徐有民)의 자는 원경(元卿). 본관은 달성으로 1826년(순조 26년) 8월에 삼동 현령에서 도임하여 1828년(순조 28년) 3월에 가산 군수로 옮겨갔다. 선정비가 매전면 동산리 외에 금천면 임당리 명포마을, 청도읍성에도 남겨져 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1-22

휘어진 가지·두터운 줄기… 오랜 세월의 흔적을 품다

을사년 새해 벽두부터 뱀은 꼬리를 흔들며 머리를 치켜들고 금방이라도 덤벼들 듯이 독을 뿜고 있다. 지난 연말에도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그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권력의 칼날은 숲은 아랑곳하지 않고 산을 지키는 못난 나무만 찍어내려 하고 있다. 수학 문제를 공식에 따라 풀다 보면 답이 저절로 나오는데, 답부터 정해놓고 공식에 맞추려 한다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먼저 사회 불안부터 잠재우기 위해 국내외를 둘러보고 주변의 좌우를 살피며 나라와 국민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찾으면 될 것이 아닌가 싶다. 복잡하게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어려운 국란을 우리 모두 잘 극복하리라 믿으며 다시 보고 싶은 의성군 안사면 월소리 693번지에 살고 있는 소나무 노거수를 찾아 나섰다. 월소리 마을 입구에 마을 수호신처럼 늠름하게 서 있는 소나무를 보니 이 난국도 숱하게 세월을 이겨낸 소나무처럼 무난히 극복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반송의 수형으로 반듯하게 자라고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심은 것으로 보였다. 마을 어른에게 물어 본 결과 소나무는 조선 중기 광해군(1608~1623) 재위 때 평산 신씨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심었다고 했다. 그분은 무슨 마음으로 소나무를 기념식수로 심었을까? 그것도 들판을 지나 마을 입구에 심었을까? 몇 년생의 소나무를 심었을까? 이런저런 의문을 가지면서 우람한 소나무에 경외심으로 가만히 다가가서 살며시 안아 보았다. 평산 신씨 할아버지의 따뜻한 마음과 함께 의문은 풀렸다. 소나무는 당산나무로 마을 주민들로부터 제사를 받으며 또한 기념물로 보호를 받고 있다. 마을 주민 평산 신씨의 후손들은 마을을 드나들면서 마을 입구에 우뚝 서 있는 늠름하고 우람한 늘 소나무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조상의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그 마음을 헤아려 볼 것이다. 그리고 보면 그분은 뭉치고 단합하는 마을의 공동체 정신의 함양과 조상을 기리고 섬기는 효 사상을 은연중에 심어주는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마음에서 소나무를 심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보며 그분은 성공한 셈이다. 소나무와 함께 공적비가 하나 세워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나무를 심은 사람의 공적비가 아니고 기념물로 지정받는데 공이 큰 마을 출신 사람의 공적비였다. “공적비 신현수(申鉉守) 지정일 1994년 6월 8일. 상기인은 월소리 소나무를 문화재 기념물로 지정받는 데 그 공로가 다대함으로 그 뜻을 기리고자 주민의 정성을 모아 여기 영원불멸의 비를 세우다. 2006년 4월 월소리 주민 일동.” 이런 행위가 바로 마을을 하나로 단합하는 공동체 정신의 발로이다. 또한 마을 주민이 얼마나 이 나무를 사랑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좀 더 높은 품격의 나무로 올려 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공적비의 주인공은 고향을 떠났지만, 그의 마음은 늘 고향의 소나무와 함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이곳 월소리 출신으로 감사원에서 청렴한 공직자로 그 임무를 수행한 밑바탕에는 늘 푸른 소나무의 곧은 절개, 청렴의 이미지가 한 몫 하지 않았나 싶다. 주민들이 다시 한 번 뭉쳐서 천연기념물 반열에 올려놓으면 어떨까 싶다. 문화적, 생태적 가치로 보아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보여진다.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소나무가 있는 신보 마을에 다른 여타 자연부락 마을보다 인물이 많이 난다며 자랑했다. 그렇다. 마을을 개척하면서 기념식수로 심은 소나무는 오랜 시간 자라면서 마을 주민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쳤을 것이다. 생태적, 문화적, 심리적, 경제적은 물론이고 마을의 공동체 정신과 조상을 기리는 효 사상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마을 입구에 자라는 소나무는 오가는 사람들의 눈에 띄어 소나무처럼 닮아가지 않았을까 싶다. 휘어진 가지와 두터운 줄기는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이 소나무를 ‘조상의 나무’라 불렀을 것이다. 모르면 몰라도 나무를 심은 평산 신씨 조상은 마을의 번영과 자손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소나무를 선택하여 마을 입구에 기념식수를 했을 것이다. 마을의 품격을 높여주는 소나무 노거수는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있어 나무 아래에 넓은 그늘은 주민들의 쉼터로 이용하고 있다. 나이가 400살, 키 11m, 가슴높이 둘레가 3.2m, 그 앉은 자리 폭은 17m이란다. 소나무 가지가 땅에 닿을 정도로 쳐져 우산 모형을 하고 있다. 나무 아래에는 체육시설을 설치하여 주민들은 시간 나는 대로 운동을 하면서 건강을 다지고 있다. 오늘도 마을의 88세 어른께서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나를 보더니 나무에 대한 고마움을 이야기해 주었다. 나무 아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말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했다. 옛날과 다르게 사람이 뜸한 마을에서는 사람 만나기가 그리 쉬운 일도 아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소나무 노거수가 있으니, 그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출향 인사들이 고향을 방문하면서 나무 아래 쉬고 있는 어른에게 용돈까지 건네주니 얼마나 좋은가. 마을 어귀에 있는 노거수는 그냥 쉼터가 아니라 사람을 만나는 만남의 장소, 요즘 도시의 카페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나무는 마을 공동체의 유대를 상징하는 중심축처럼 보인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두터운 줄기는 마치 마을을 지켜온 세대들의 역사와 연대를 나타내는 듯하다. 네 갈래로 갈라진 가지는 함께 나누고 협력하는 공동체의 조화로움을 상징하며, 푸르게 뻗은 나뭇잎은 미래 세대의 번영을 암시한다. 나무를 심은 조상의 손길은 후손들에게 자연을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과 효의 정신을 전하는 듯하다. 마을의 중심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조상의 은덕과 희생을 기리고, 세대 간의 연결고리를 이어주는 존재로 느껴진다. 후손들은 어린 시절에 소나무 아래에서 뛰놀며 자랐을 것이고 친구들과 웃고, 잎 사이로 내려오는 햇살을 느끼며 마음의 평온을 찾곤 했을 것이다. 소나무의 존재는 마을 사람들에게 단순한 나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나무는 후손에게 조상의 가르침과 정체성을 전하는 살아있는 교과서이다. 세월이 흘러 마을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후손도 친구는 만날 수 없어도 소나무는 마주할 것이다. 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을 것이고 잎은 더 짙어졌고, 가지는 더 넓게 퍼져 있었을 것이다. 소나무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세월을 뛰어넘어 이어지는 가르침이자 마을의 정신이다. 세월이 흘러도 소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그 아래에서 수많은 세대가 서로를 기억하고, 사랑하며, 하나 되는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400년의 세월 속에서 소나무는 이렇게 우리의 삶을 품고 있었다. 선한 영향력을 지닌 소나무는… 생태적 영향: 탄소 흡수 및 공기 정화, 생물 다양성 증진, 토양 보호.문화적·역사적 영향: 기념비적 가치, 전통과 신앙, 정체성 강화.심리적·정서적 영향: 심리 안정, 힐링 공간 제공.경제적 영향: 관광 자원, 부동산 가치 상승, 자연 교육 자원.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1-15

하늘과 대화하 듯 뻗어나간 가지에는 생명·시간의 흔적이…

겨울 찬 바람이 푸른 솔가지 빗자루로 허공을 향해 설렁설렁 비질하니 빗살 끝에 닿은 하늘은 더욱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맑다. 하늘이 푸르고 맑으니 내 몸과 마음도 푸르고 맑은 자연이 되었다. 바람의 손끝에 솔향은 흩날리고 지난해 바위틈에 숨어 있던 역겨운 메케한 냄새를 쓸어 내고 더덕더덕 붙은 몸속 땟물을 말끔히 몰아낸다. 삼송(三松)은 마치 세월의 이야기와 자연의 예술을 동시에 품은 존재처럼 다가온다. 고요한 하늘을 배경으로 서서, 푸른 솔가지 잎을 부드럽게 늘어뜨리고 있다. 그 가지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필선처럼 보이며, 그 선율은 바람에 따라 흔들리며 마치 자연의 교향곡을 연주하는 듯하다. 강인한 줄기와 뒤엉킨 가지들은 소나무가 겪어온 시간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삼송(三松)은 더욱 가까이 다가와 그 복잡하고도 아름다운 곡선을 드러낸다. 마치 하늘과 대화를 나누는 듯 뻗어나간 가지들은 자유로움과 생동감으로 가득하다. 나무의 표면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은 그 자체로 자연이 그려낸 작품이며, 굵고 뒤틀린 줄기와 조화를 이루는 잔가지들은 생명력의 끊임없는 확장을 보여준다. 푸른 하늘과 녹색의 솔잎이 만나 이루는 풍경은 소나무가 품은 고요함 속의 생동감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서로를 보완하며 소나무의 두 얼굴을 보여준다. 멀리서 보면 우아하고 기품 있는 자연의 위엄이 느껴지고, 가까이서 보면 생명과 시간의 흔적이 담긴 예술적 디테일이 드러난다. 삼송은 그 자리에서 하늘과 땅을 잇는 다리가 되어, 자연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묵묵히 노래하고 있는 듯하다. 삼송(三松)의 내 외모에서 풍기는 원근에서 느끼는 이미지를 보면서 내 늙음의 후줄근한 모습을 벗어던지고 밝은 웃음 가득한 얼굴로 ‘일신우일신’ 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삼송(三松)은 김천시 증산면 유성리 마을에 살아가고 있는 쌍계사지 세쌍둥이 소나무이다. 삼송은 제일 큰 형은 키가 13m, 몸 둘레는 2.5m이다. 그리고 둘째는 키가 15m, 몸 둘레는 2.1m이다. 그리고 막내는 키가 11m, 몸 둘레는 2.1m로 처진 소나무로 만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쌍계사지가 시루봉 바로 아래에 있고 보면 삼송은 절의 마당에 부처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았나 싶다. 나무의 나이로 보아 키나 몸 둘레가 지금보다 더 클 것 같은 데, 이곳을 방문하는 신도나 삼사백 년 전 1000여 명의 스님이 절에서 수행하였다 하니, 오고 가는 사람들의 발자국에 자람이 더디었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모두 10m가 훌쩍 넘긴 날씬한 몸매는 찾아오는 사람이나, 그저 모르고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삼송의 푸르름의 아름다움에 그를 톺아보았을 것이다. 김천은 사통팔달 교통요지이며 산세가 아름답고 품이 넓어 오랫동안 수도처로 직지사와 청암사, 수도암 등 여전히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김천은 요즘 핫하게 뜨는 경북의 혁신도시이기도 하다. 특히 이곳 유성리에 ‘무흘구곡 전시관’을 세워 대가천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한 폭의 산수화처럼 담은 58경과 무흘구곡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일종의 문화생태계를 이루어 무릉도원이라 해도 좋을 듯하다. 이곳 유성리 출신 이창재는 중앙부처를 두루 근무하고 경북도 감사관을 거쳐 고향 김천 부시장으로 공직을 마치고 고향에서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후배 공무원이다. 그는 내가 노거수를 찾아다닌다는 것을 알고, 쌍계사지 삼송을 소개하고 안내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삼송을 보고 자라면서 늘 푸름과 곧은 절개, 그 끈질김을 교훈으로 삼았다고 했다. 그렇다. 소나무뿐만 아니라 모든 나무는 우리 인간에게 지혜를 터득하게 해 주고 교훈을 준다는 사실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우리가 알고 있다. 그의 덕분에 삼송을 만나게 되고 즐거움을 느꼈으니, 김천에 있는 멋진 연리근의 느티나무와 조룡리 천연기념물 은행나무를 안내해 보여주었다. 어부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중 복사꽃이 피어 있는 수풀 속으로 잘못 들어갔는데 숲의 끝에 이르러 강물의 수원이 되는 깊은 동굴을 발견하고 그 동굴을 빠져나오니 평화롭고 아름다운 별천지가 펼쳐졌다고 한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1천 6백여 년 전 도연명이 말한 무릉도원이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초목이 무성하면 봄이 온 걸 알고 나무가 시들면 바람이 매서움을 아노라, 비록 세월 적은 달력 없지만 사계절은 저절로 한 해를 이루나니, 기쁘고도 즐거움이 많은데 어찌 수고로이 꾀쓸 필요 있으랴.”라는 자신의 심경을 담은 글을 썼다. 무릉도원 같은 무흘구곡을 찾아 옛 선비들처럼 자연을 노래하며 심신을 수련하는데 이곳만 한 곳이 있을까 싶다. 무흘구곡(武屹九曲)은 조선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김천에서 성주로 흐르는 대가천을 따라 자리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노래한 곳으로 제1곡 봉비암(鳳飛巖)에서부터 성주 댐을 거쳐 김천시 증산면 수도암 아래쪽 계곡에 자리한 제9곡 용소폭포까지 약 35㎞ 구간의 맑은 물과 기암괴석 등, 절경을 읊은 시이다. 봄에는 개울을 따라 흘러내리는 눈 녹임 물은 버들강아지 꽃피우고, 여름에는 용소에서 떨어지는 폭포수는 개울을 훑고 핥으며 그간의 땟물을 씻어내어 보는 이로 하여금 시원함과 답답함을 해소한다. 가을에는 단풍 물로 개울을 수놓고, 겨울에는 하얀 눈으로 옷 해 입고 봄맞이 채비를 한다. 참으로 고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곳 삼송(三松)은 무흘구곡 상류의 시작점이요 옥류정이 위치해 있다. 주변의 경관은 그 정점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연맹이 말한 무릉도원이 아닐까 싶다. 무흘구곡에다 누군가 삼송(三松)의 시를 지어 넣어 무흘십곡으로 하면 어떨까. 쌍계사지는? 김천 증산면 유성리 시루봉 아래 신라 현안왕 3년(859) 도선(道詵) 국사는 쌍계사를 창건하였다. 쌍계사 대웅전은 전면 5칸 측면 3칸 25집으로 조선 최대 규모 최고 수준의 건축물로서 천정의 그림과 석가여래입상인 쾌불(길이 32m, 폭 8m)은 수작으로 꼽힌다. 쾌불은 가뭄이 심할 때에는 대웅전 마당에 걸고 기우제를 지내면 바로 비가 내렸다고 전한다. 쌍계사는 1000여 명의 스님들이 수행한 17~18세기 한국불교 경학사의 화엄학(華嚴學) 대가의 가풍과 선(禪과) 교(敎)의 맥을 이은 불교사에 있어 중요한 사찰이다. 남아 있는 비문을 통해 조선시대 불교 탄압의 산물인 사찰의 부역(負役), ‘쌍계사 한지제작’ 등의 시대사도 알 수 있다. 쌍계사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당시 대웅전 일부가 임시 증산면사무소로 사용되었는데, 수도산에 남아 있는 북한군 패잔병들의 방화로 인하여 7월 14일 전소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대웅전 터는 증산면에서 향토문화재 복원사업으로 복원하게 되었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1-08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절벽 위 푸른 노송시간 초월한 자연의 위대한 생명력 느껴져

2025년 뱀띠 새해를 맞이하여 지혜롭고 진중하게 어려움을 극복하고 변화에 슬기롭게 대처하는 한 해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내연산 향로봉을 오르면서 계곡의 아름다움에 반해 또다시 이곳을 찾으리라고 마음을 먹은 지 10여 년이 훌쩍 지났다. 그러던 차 노거수회를 창립한 이삼우 회장님의 전화를 받고 내연산 계곡의 비경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겸재 정선이 그린 ‘내연산폭포도’와 ‘고사의송관란도’에 그려진 노송이 이 계곡 암벽 위에 실제 자라고 있다고 하면서 함께 가서 보기를 권했다. 300여 년 전 그린 작품에 나오는 소나무가 실제 현존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뛰었다. 천원권 지폐에 실린 ‘계상정거도’는 예술적 감각과 조선의 자연미를 상징적으로 잘 묘사한 문화적 의미가 깊은 겸재 정선의 작품이다. 내연산 계곡의 아름다운 자연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인정한 마당에 그림 속의 노송을 천연기념물 반열로 올려놓는 것이 옳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바위 위나 틈새에 살아가는 소나무 사진 마니아들도 있다. 그 끈질긴 삶의 모습에 매료되어 위험천만한 곳도 아랑곳 하지 않고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어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다. 우리 국민 또한 그러한 암벽의 바위 소나무를 환호한다. 우선 미루고 보는 나의 성격과 빠른 세월 때문에 어영부영하다 보니 그로부터 수개월이 훌쩍 지났다. 더는 늦출 수 없다고 생각하여 지난 연말에 노송을 찾아 나셨다. 먼저 겸재 정선의 ‘내연산 폭포’ 진경산수화를 찾아 노송의 위치를 마음속으로 새겼다. 화가의 붓끝에 내 마음을 싣고 캠퍼스를 종횡무진으로 누비었다. 듬뿍 묻힌 붓끝을 꾹 눌러 대담하고 굵은 선으로 폭포 주변 바위의 견고함과 자연의 역동성을 표현해 나갔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부드럽고 유려한 선으로 표현되어, 거친 바위와 대비를 이루었다. 먹의 농담을 활용해 산과 바위의 질감을 묘사하고, 채색으로 나무와 폭포, 바위, 산 등 자연을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그 붓끝의 마침은 아니나 다를까 기암괴석 절벽 위 천년송이었다. 만고에 움직일 수 없는 깎아지른 큰 바위 절벽 폭포 위에 충절의 푸른 노송을 심어 놓았다. 암벽 바위 위에 살아가는 노송을 찾아내어 그림 속에 담아 영원히 잊혀지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불멸의 ‘겸재 천년송’으로 재탄생해 놓았다. 그런 악조건의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푸른 소나무는 끈질김과 굳센 의지를 말해주었다. 하늘 높이 우뚝 솟은 바위산은 무한한 가능성을 말해주고 계곡을 타고 흐르는 맑은 물은 동해에 발을 담그고 영원히 마르지 않는 꿈을 꾸고 있다. 붓끝은 하나의 망설임도 없이 흐르는 물처럼 때로는 휘몰아치는 바람처럼 거침없었다. 그렇게 하여 그림 속 소나무의 실제 위치와 형태 등 생태를 상상해 가슴에 품었다. 현장에 도착했다. 학소대 기암절벽과 바위암 선일대, 물보라를 일으키는 연산폭포 등 한 폭의 산수화로 펼쳐 놓은 풍경이었다. 내연산의 풍광을 보며 300년 전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여기서 시작됐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현장의 복잡함 자연의 풍경을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움과 힘찬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다순함은 궁극의 세련됨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단순함은 가장 복잡한 과정을 통과한 마지막 결정체인 다이아몬드와 같기에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내연산의 절벽과 낙하하는 물줄기, 주변의 수목이 조화를 이루며, 단순하면서도 장엄한 분위기를 담았다. 자연 속에 담긴 유교적 이상과 조화로운 인간 정신을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겸재의 그림은 내연산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게 해주었다. 그뿐만 아니다. 모르고 무심하게 지나칠법한 높은 암벽 바위를 붙들고 살아가는 끈질긴 소나무의 생명력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노송을 보고도 그곳을 찾아가는 데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절벽의 바위 위에 있는지라 접근할 수 없었다. 이삼우 노거수회 회장님과 통화를 하고 스케치한 그림을 카카오톡으로 송부받아 겨우 접근 할 수 있는 바위 틈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천년송 가까이 갔을 때도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로서는 더 이상 접근할 수 없어 멀찌감치서 사진을 촬영하고 그 생명의 끈질김을 감상하고 겨우 엎드려 팔을 뻗쳐 손으로 악수하고 심호흡했다. 절벽 바위 위에는 다섯 그루의 소나무가 살아가고 있었다. 나이를 짐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저 천년송 오 형제라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덩치가 큰 소나무는 그래도 약간의 흙냄새를 맡을 수 있지만, 나머지는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아마 납작하고 가느다란 긴 뿌리가 멀리 계곡으로 발을 뻗고 있지 않을까? 그저 신비할 따름이다. 겸재의 붓끝에서 피어난 그림 속 노송을 눈으로 직접 마주하니, 그의 마음에 스며들었을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늘을 향해 구불구불 뻗어나간 가지는 마치 시간을 초월한 손짓처럼 보였다. 천년의 세월을 견디며 이 자리를 지켜온 노송은 단순한 나무 그 이상이었다. 그 안에는 자연의 고고한 품격과 생명력, 그리고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노송 아래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 나무를 타고 흐르는 시간의 숨결, 바위 속 깊이 자리 잡은 뿌리가 전해주는 묵직한 에너지가 온몸을 감쌌다. 그의 붓끝이 그린 단순한 풍경은 자연과 인간의 공존, 그리고 시간이 쌓아 올린 경외의 기록이었다. 이 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려는 식물학자이며 향토 사학자이시고 노거수회를 창립한 이삼우 기청산식물원 원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 또한 이 나무가 단지 한 그루의 나무를 넘어 자연유산임과 동시에 우리 삶에 깊이 스며든 문화유산으로 남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나는 겸재의 그림 속에서 이 폭포와 노송이 어우러진 장면을 떠올렸다. 그가 붓끝으로 표현하려 했던 것은 단지 자연의 형태가 아니라, 자연을 대하는 그의 철학과 마음이었음을 깨달았다. 노송과 폭포는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초월한 자연의 위대함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스승이다. 이러한 자연유산을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이야말로 우리에게 자연의 진정한 가치를 일깨운다. 만약 이 노송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다면,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나무를 보호하는 것을 넘어, 자연과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일이 될 것이다. 겸양의 미덕으로 평생을 살아온 겸재 정선의 삶의 철학과 도덕을 본받을 수 있을 것이다. 겸재 정선의 붓끝에서 태어난 천년 노송과 폭포는 여전히 우리 곁에서 숨 쉬고 있다. 겸재 정선(1676~1759)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가다.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畫)를 창시했다. 1733년 영조 때 청하 현감을 지냈다. 부채 그림인 ‘고사의송관란도(高士倚松觀瀾圖)’와 ‘청하 내연산폭포도’에 등장하는 소나무와 아주 흡사한 소나무가 현재도 내연산 폭포 벼랑 위에서 자라고 있다. 그림 속의 소나무를 현재 벼랑 위의 소나무로 특정하고 ‘겸재송’이라 최초로 이름한 것은 포항의 이삼우(李森友) 기청산식물원 원장이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한국의 자연과 전통미를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계상정거도(천원권 지폐에 실린 그림), 인왕제색도, 금강전도, 월송정, 망양정 등 많은 작품이 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1-01

백성의 힘으로 이룬 치산치수 ‘신의 한 수’가 되다

다사다난했던 갑진년 힘과 권력으로 상징되는 용의 해는 저물어간다. 두 진영으로 양분된 국론분열이 더욱 가슴을 아린다. 마지막 달랑 한 장 남은 달력을 보면서 안동 하회마을 출신 류성룡 선생이 생각나 만송정 솔숲으로 향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의 침략을 예측하고 훈련도감을 설치했다. 그러나 그의 외침은 허공의 메아리가 되고 결국 일본의 침략으로 국토는 유린당했다. 그러고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하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자는 징비록을 남겼다. 그의 형인 류운룡 선생은 매년 강물 범람으로 거듭되는 마을의 침수 피해를 예방하고자 주민들과 함께 마을 북쪽 강변에 1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홍수로부터 보호했다. 오늘날 만송정이라 부르는 솔숲이다. 솔숲 속을 거닐면서 류성룡 선생은 10만 양병설을 생각하고 징비록을 저술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만송정 솔숲은 추운 겨울임에도 충절의 상징, 푸르름을 띤 채 곧고 의연하게 서 있었다. 낙동강이 굽이굽이 흐르는 하회마을, 그 곡선의 중심에서 만송정 솔밭은 마을과 자연을 하나로 엮는 생명줄이다. 만송정 솔숲은 자연의 위대함과 인간의 손길이 조화를 이뤄낸 상징이며, 하회마을 주민들이 세상과 자연에 건넨 가장 진중한 대답이다. 숲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짙어지고, 그 안에 깃든 사연은 더욱 깊어진다. 하회마을은 낙동강이 마을을 휘감아 돌며 만든 유려한 지형으로 유명하다. 낙동강의 물길은 부드럽게 마을을 품었고, 마을 사람들은 이 품속에서 삶을 일구었다. 그러나 낙동강은 언제나 온화한 품성만을 보여주진 않았다. 장마철이면 강물이 넘쳐흐르고, 마을의 들판과 집들은 물에 잠기기 일쑤였다. 주민들은 낙동강의 은혜와 위협을 동시에 느끼며 강과 공존할 방법을 찾았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만송정(萬松亭) 솔숲이다. 겸암(謙巖) 류운룡(柳雲龍)은 풍수지리적으로 마을 맞은편의 북쪽 64m 높이의 절벽, 부용대의 기운이 세고 이곳이 허하여 이를 보완하기 위해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솔밭에 만송정이 세워져 있었으나 대홍수 때 물이 넘쳐 유실되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이름만 남아 있다. 치산치수(治山治水) 사업은 보통 나라가 맡아 하는 일이지만, 마을 주민이 힘을 합쳐 일궈 낸 미담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여름에는 수해를 막고 마을 사람들의 휴식 공간을 제공하며 겨울에는 찬 북서풍을 막아주는 미세 기후를 조절하는 역할도 한다. 솔숲은 단순히 재해를 예방하는 것을 넘어, 기후변화 대응과 지속 가능한 발전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해 오고 있다. 강변 숲 조성은 산림으로 하천을 관리하였으니, 치산치수를 동시에 한 것으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신의 한 수가 아닐까 싶다. 숲의 소나무 뿌리는 강가의 흙을 단단히 잡아주고, 울창한 숲은 바람과 물길을 막아주는 자연의 방벽이 되었다. 만송정은 처음부터 자연의 일부였지만, 주민의 지혜와 손길로 그 의미를 더했다. 주민들이 하나둘 정성스럽게 심은 소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었고, 숲은 세월이 흐르면서 하회마을의 상징이 되었다. 만송정의 소나무 숲은 생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숲은 낙동강의 흐름과 조화를 이루며 하회마을의 지속 가능한 환경을 유지하는데 기여했다. 만송정은 단순히 강변의 숲이 아니다. 하회마을 주민들의 삶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주민들은 강물이 들이닥칠 때 숲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만송정은 물질적 혜택을 넘어선 정신적 안식처로도 작용했다. 소나무 숲의 고요함과 위엄은 하회마을 주민들에게 자연과 삶에 대한 깨달음을 주는 스승과 같았다. 주민들은 만송정 숲을 거닐며 자연 속에서 학문을 논하고,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겼다. 소나무의 굳건함과 늘 푸른 자태는 그들에게 자연의 이치를 깨닫게 하고, 스스로 되돌아보게 하는 매개체였다. 만송정은 하회마을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산책로와 휴식 공간을 제공하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하회마을의 자연유산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만송정은 하회마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자연적 배경이며, 조선시대의 자연관과 조화로운 삶의 방식을 체험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강 건너편 부용대에 서서 솔숲을 내려다보면, 낙동강이 부드럽게 휘돌아 흐르는 곡선과 함께 만송정의 짙은 녹음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용대는 이름 그대로 연꽃이 피어난 듯한 절경을 자랑하지만, 그 풍경의 완성은 만송정이 있어야 가능하다. 숲은 단순히 나무의 집합이 아니라 마을의 숨결을 담고 있는 듯하다. 소나무 하나하나가 뿜어내는 푸르른 기운이 낙동강 물길을 따라 마을 곳곳으로 스며드는 느낌이다. 숲을 가꾼 주민들의 손길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하회마을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소나무 한 그루에 깃든 정성과 지혜, 그리고 자연을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만송정은 지금도 이렇게 당당히 서 있을 수 있다. 부용대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하회마을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자연의 조화가 만들어낸 위대한 작품이다. 오늘날 하회마을을 방문하는 이들은 만송정 솔숲을 들어서기 전에 낙동강 둑 위에 조성된 느티나무와 벚나무의 터널 길을 거닐게 될 것이다. 봄에는 흩날리는 꽃비로 걷는 즐거움을 더해 줄 것이고 여름은 풍성한 그늘로 흐르는 땀을 씻어 줄 것이다. 나무 아래 거닐면서 자연의 위대함과 인간의 지혜가 만난 순간을 느낀다. 숲은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만송정은 인간의 손길로 조성되었지만,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 속에 녹아들어 완성된 공간이다. 만송정과 낙동강, 그리고 부용대가 어우러진 풍경은 하회마을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낙동강이 만든 곡선은 마치 자연이 그려낸 걸작의 예술 작품처럼 보인다. 강변에 펼쳐진 만송정은 자연의 일부로서 그 작품의 색을 더하고, 부용대는 풍경을 한눈에 담는 액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하회마을과 만송정, 그리고 낙동강과 부용대가 어우러진 풍경은 단순히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앞으로도 우리가 지켜야 할 공존의 가치와 방향성을 제시한다. 솔숲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솔숲을 돌아 흘러가는 강물처럼 어려운 정치 난국이 하루빨리 지나가기를 기원하면서 푸른 만송정 솔숲의 솔향을 마음껏 마시면서 어깨를 편다. 겸암 류운룡(柳雲龍)과 만송정 솔숲 류운룡은 조선 중기(1539~1601)의 학자이자 정치가다.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계승했으며 성리학 발전에 기여했다. 만송정 솔숲도 조성했다. 동생 류성룡(1542~1607)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보좌하며 나라를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고 후대에 교훈을 남기기 위해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으로 ‘징비록’을 집필했다. ‘겸암’에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세상의 이치를 따르고자 한 그의 철학이 담겨 있다. 만송정과 겸암정자는 류운룡이 자연 속에서 학문을 탐구하고 철학적 사색을 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장소다. 겸암정자는 부용대 절벽 위에 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2-25

배꼽인사로 맞이하는 풍채 좋은 거인을 만나다

산자수명한 청송에 처음 부임했을 때 일이다. 우연한 기회에 ‘할아버지가 손자를 업고 있는 형상의 소나무 노거수’를 만났다. 폐교된 초등학교 교실 앞 운동장에 홀로 외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첩첩산중 마을이라 모두 도시로 떠나고 학생 수가 줄어 분교가 되더니 끝내 그 이름마저 사라졌다. 폐교된 학교를 리모델링하여 ‘클라이밍 등 산악 스포츠 아카데미’를 운영하면 어떨까, 활용 방안을 찾기 위하여 현장을 방문했을 때 텅 빈 교실 구석에는 거미줄이 운동장에는 흩날리는 흙먼지만이 난무했다. 학생과 선생님이 없으니 귀곡산장 같아 을씨년스러움이 살을 파고들어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소나무가 이를 잠재우고 노구의 몸으로 방문객에게 정중히 배꼽인사로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많은 소나무를 보아 왔지만, 작은 키에도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그의 품에 안길 수 없었다. 키는 난쟁이 임에도 앉은 풍채는 거인의 모습이었다. 그의 모습에서 삶이 순탄하지만은 않음을, 우여곡절을 겪었음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기암괴석이나 높은 산의 바위 틈바구니 등 악조건에 살아가는 노송이라면 몰라도 다른 나무와 경쟁도 없는 넓은 학교 운동장에서 살아가는 나무는 이런 불구의 모습일 수가 없었다. 소나무의 지난 삶이 어떠했는지 내 어린 추억과 맞물려 스멀스멀 떠올랐다. 짐작건대 선생님께 혼난 개구쟁이 어린 학생 응석을 받아주다 허리가 굽었나, 아니면 어린 학생 눈높이에서 이야기하다 그랬을까 하는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시골 산중이라 그 흔한 장난감이나 놀이시설이 없어 어린 학생들과 친구가 되어 놀아주며 목말 태워 주다 그랬을까. 아니면 개구쟁이의 짓궂은 장난에 이런 불구가 되었을까. 이제는 목마를 탈 아이들도 장난을 칠 개구쟁이도 없어 마냥 쓸쓸한 불구의 몸으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외로운 할아버지 신세가 되었다. 푸름은 옛날과 다름이 없으나 등 굽은 노송의 모습에서 짠한 안쓰러움이 앞섰다. 이 학교 출신 노인들에 의하면 학교 다닐 때 말을 탄다고 하면서 12명이나 나무에 올라탔다고 했다. 나이는 대략 200년으로 추측했다. 이런 내용도 모르는 조경업자가 1억 원이라는 비싼 값을 제시하면서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하였으나 마을 주민들의 거센 반대로 무산되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고향에서 편안하게 일생을 살면서 추억을 간직한 채 품위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한 주민들의 마음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소나무는 지난 시절에는 어린 학생들의 친구가 되어 단순한 나무 이상의 존재로, 학생들은 소나무의 끈기와 강인함을 보면서 살아가는 데 많은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폐교된 학교를 리모델링하여 ‘클라이밍 등 산악 스포츠 아카데미’를 운영하였을 때는 도전적인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끈기와 강인함의 메시지를 또 전달했을 것이다. 등반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성취감을 느끼는 과정에서 소나무를 보며 자연 속에서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특히 클라이밍과 같은 도전적인 스포츠와 결합했을 때 소나무의 강인함과 고요함은 선수들에게 균형 잡힌 심신 단련과 내면의 성찰을 위한 환경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제는 ‘클라이밍 등 산악 스포츠 아카데미’의 운영은 수명을 다하고 또 다른 ‘휴, 청송’이라는 회의와 숙박을 할 수 있는 자연 속 생활형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소나무는 이곳을 찾아 숙박하면서 자연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정신 수양의 매개체로서 역할을 다할 것이다. 소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해 피톤치드를 많이 방출하며 심리적 안정과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을 준다. 이렇게 소나무는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끈기와 강인함, 푸름의 용기로 상징되는 이미지는 찾아오는 많은 방문객에게 큰 울림의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까이에 천혜의 자연 얼음골에 인공폭포가 있다. 청송군 주왕산면 내룡리 1번지에 수부정(水浮亭) 식당이 마주하는 절벽에 자리를 잡고 있다. 깊은 계곡 주변에는 기암괴석과 바위 등 수목이 울창할 뿐만 아니라 특별한 기후의 현상도 나타난다. 한 여름철 섭씨 32도 이상만 되면 돌너덜에 얼음이 끼고 32도 이하가 되면 얼음이 녹는다. 이곳 탕건봉 바위 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62m의 인공폭포는 1998년 공직 생활 시절 특이하고 빼어난 자연경관에 매료되어 필자가 제안하여 인공폭포를 만들었다. 겨울에는 빙벽으로 발전하여 지금의 아이스 클라이밍 월드컵이 열리는 명소로 탈바꿈하였다. 이는 수부정 식당을 운영하면서 인공폭포를 관리하는 김필상씨의 실수 덕분이라고 한다. 그는 지역 토박이로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사람인데 겨울에 인공폭포에 물을 흐르게 하고는 저녁에 잠그는 것을 잊어 버렸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절벽에 떨어지는 폭포는 하얀 빙벽으로 변해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봄, 여름, 가을에는 인공폭포의 물보라가 겨울에는 하얀 빙벽의 아름다움이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는 청송군의 효자 관광지이다. 지금까지 국내는 물론 국제 아이스 클라이밍대회를 계속해서 개최 해오고 있다. 시대의 변화와 행사는 시간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우리의 기억에서도 가물가물 멀어져 가지만, 소나무 노거수는 이를 지켜보고 그 하나하나를 자신의 나이테에 매년 꼼꼼히 새겨놓는다. 노송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나무 몸통과 가지에 스며든 이끼는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품고 있다. 굽이굽이 자란 나무의 곡선은 자연의 우연이 만들어낸 예술작품 같고, 고요한 초록빛으로 둘러싸인 소나무 노거수는 평화와 안식을 선사한다. 자연과 하나 되어 숨 쉬는 소나무의 모습은 인간에게 겸손함과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하늘로 솟아오르지 않고 수평으로 뻗어나간 나무의 몸은 굽이진 삶의 역경을 견디며 꿋꿋이 살아온 존재를 연상시킨다. 붉게 빛나는 껍질은 태양을 머금은 듯 따스하고, 거친 표면 속에는 내면의 강인함이 느껴진다. 누구든 자연과 삶의 깊은 교감을 경험할 수 있을 듯하다. 햇살이 소나무 사이로 스며들며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평화롭고 조화로운 세상을 꿈꾸게 한다. 시간이 지나도 그 자리를 지키며 삶의 지혜를 전하는 소나무야말로 우리의 참 스승이 아닐까. 청송의 또 다른 매력 아이스클라이밍 ▲청송 전국 아이스클라이밍 선수권대회 페스티벌기간: 2025. 1. 4.(토) ~ 5.(일) ▲UIAA아이스클라이밍월드컵 기간: 2025. 1. 10.(금) ~ 1. 12.(일) 장소: 청송 얼음골 아이스클라이밍 월드컵 경기장 (경북 청송군 주왕산면 팔각산로 140(내룡리 22-4)경기종목 : 아이스클라이밍 난이도·속도 경기문의 : 청송군 문화경제과 체육진흥팀(054-870-6207) ▲휴 청송(회의와 숙박을 할 수 있는 자연 속 생활형)숙박시설: 2인실(10개), 가족실(2개), 단체실(1개)회의실: 1실(45인~50인 컴퓨터, 음향 및 프로젝트 사용 가능)시설: 족구장, 텐트 야영장, 어린이 놀이기구, 샤워실, 화장실, 세탁실 (경북 청송군 주왕산면 팔각산로 11-4 문의: 054-873-8991)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2-18

“한 그루 잘 키우면 벤츠도 사”산주들 설득해 만든 명품숲

만추(晩秋)는 늦은 가을이라는 계절적인 의미를 넘어, 늦가을의 고즈넉한 아름다움, 쓸쓸함 그리고 지나간 시간의 여운 같은 추억이 담긴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우리의 가슴을 물들게 한다. ‘100대 명품 숲’의 하나인 울주 소호리 산192 한독 참나무숲을 만추에 ‘숲과 자연’이라는 공부 모임 회원들과 함께 탐방에 나셨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레는데 만산홍엽의 아름다운 산자락을 타고 곡예 하듯이 고갯길과 꼬부랑길을 따라 차로 오르내리면서 드라이브하는 것은 즐거운 미지의 오지 탐험 같다. 누군가는 산 고개 넘어 무엇이 있을까 궁금하여 잿길만 찾아다니는 마니아도 있다고 한다.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만추의 산은 단풍으로 곱게 물들고 반면에 도로변 논밭의 오곡은 벌써 농부들이 갈무리하여 덩그렇게 속을 다 내보여 감흥과 쓸쓸함이 교차했다. 도착한 곳은 소호리 산192 한독 참나무 숲을 조성한 김종관 박사님 댁이었다. 마을로부터 좀 떨어진 외딴 산자락 끄트머리에 있는 동향의 아담한 주택이었다. 그는 고려대학교 임학과를 졸업하고 사유림 경영 사업에 뛰어들어 오늘날의 소호리 참나무숲을 탄생시킨 장본인이다. 1974년 시작된 한독 산림 협력사업으로 독일의 임업 기술자들과 함께 오지 중의 오지인 이곳 깡촌 소호리 마을 주민들을 설득하여 ‘대한민국 100대 명품 숲’으로 올려놓았다. 이후에도 베트남, 몽골 등 외국 산림 녹화사업에 한평생을 헌신했다. 그의 파란만장한 산림녹화, 사유림 경영 사업 이야기는 ‘소호리 산192’라는 소설로 탄생했다. 언젠가 또 한 편의 인생과 숲이라는 분야의 다큐멘터리로 그의 드라마틱한 삶을 조명할지 모를 일이다. 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임에도 이곳에 다시 돌아와 주민들과 함께 산림 경영으로 잘 사는 마을을 만들고자 주름진 이마에 맺힌 부부의 땀방울은 영롱한 이슬방울처럼 아름답게 느껴졌다. 김 박사님의 안내로 ‘소호리 산192 한독 참나무숲’으로 갔다. 그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아 지금은 100대 명품 숲으로 선정되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50년이 지난 지금 참나무는 평균 키가 20m가 넘으며 가슴높이 둘레가 80cm나 된다면서 그는 지난 일들을 전쟁 승리 장군의 무용담처럼 거침없이 그리고 쉼 없이 설명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민둥산이 된 산을 지속 가능한 산림 경영을 위해 “200년 된 참나무 한 그루를 베어 팔면 벤츠 승용차 한 대를 살 수 있다”라고 하면서 산주들을 설득했다고 당시의 어려움을 털어 놓았다. 설명 들으면서 울울창창한 참나무 숲속으로 들어갔다. 4800㏊ 산림 대부분이 사유림으로 많은 수의 산주가 동의해야 추진이 가능한 사업이라는 것까지만 듣고 더는 설명을 듣지 못했다. 왜냐면 수림의 비탈길을 한 줄로 이어져 올랐기 때문에 맨 꽁지에 붙어 오르는 나는 그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이제부터 나 홀로 시간이다. 비슷한 크기의 참나무가 미끈하고 큰 키의 잘생긴 자신의 몸매를 자랑이라도 하듯이 주변을 둘러쌌다. 다른 산의 참나무림이랄까 숲과는 그 모습이 달랐다. 나무 목재로 10층의 건물도 짓는다고 하니 경제성은 충분할 테고, 간벌하고 또 그곳에 어린나무를 심어 키우면 앞으로 계속해서 베고, 심고를 반복할 수 있어 산에서도 돈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벨 때는 돈이 생기고 녹색 숲일 때는 맑은 공기와 같은 공익적 가치와 그곳에서 힐링을 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사업이 있을까 싶다. 참나무는 소나무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나무이다. 이름도 나무 중 가장 재질이 좋고 진짜 나무란 의미의 ‘참’이다. 상수리부터 굴참, 떡갈, 신갈, 갈참, 졸참나무까지 6종을 보통 ‘참나무’라고 부른다. 활엽수인 참나무 아래에 그늘에도 잘 자라는 전나무나 잣나무 같은 침엽수가 조화롭게 조성된 숲은 울주 소호리 참나무 숲이 유일할 것 같다. 숲속에는 수령이 40~45년 가까이 되는 참나무들이 전나무, 잣나무와 함께 자라고 있었다. 이는 곧게 자라는 침엽수들 덕분에 참나무는 경쟁하여 자기도 곧고 굵게 자랐다. 나무와 나무 사이 공간이 좁아지니 참나무는 옆으로 가지를 뻗지 않고 곧게 잘 자랐고 결국 숲은 경제성 있는 보기 좋은 울창한 숲으로 변해 있었다. 참나무를 간벌하면 아래 전나무가 후계목이 되고 전나무를 간벌하고 나면 또 잣나무가 후계목이 될 수 있도록 조림되어 있었다. 나무 아래 땅 위에는 나뭇잎으로 빈틈없이 깔려있어 땅속에 살아가는 미생물과 작은 동물들은 겨울나는데 아무런 걱정도 없겠다 싶다. 나무와 이별한 낙엽은 이렇게 또 희생정신으로 이불이 되고 먹이가 되는 것을 볼 때면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이 든다. 낙엽 위에 떨어진 도토리는 흙을 만날 수 없어 뿌리를 내릴 수 없겠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러나 산까치나 다람쥐 등이 땅속에 파묻어 놓고 때로는 잊어버려 뿌리를 내리고 어린나무로 자란다고 하니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낙엽이 땅을 덮는다고 하지만, 바람이 이를 밀어내고 짐승이 뒤집혀 놓아 도토리는 흙과 교우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게 마련이다. 마침, 도토리 한 알이 몸속의 기운을 내밀고 새싹으로 변하여 줄기가 아닌 뿌리로 변하여 땅속으로 스며들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대단한 힘이다. 참으로 괴이한 현상이다. 어떻게 부드럽고 연약한 새싹이 거친 땅을 파고들까. 보고 또 보아도 신기한 생명의 힘을 느꼈다. 나무는 자신을 보호한 녹색의 잎을 가을이 되면 미련 없이 또 어김없이 원래의 곳으로 보내드린다. 뿌리에서 빨아올린 물을 나뭇잎에 불어넣어 녹색의 옷으로 자신을 보호하지만, 가을이라는 계절이 올 때면 물의 공급을 멈추고 나뭇잎은 원래의 모습인 울긋불긋한 단풍의 모습으로 변하고 붙잡아 주던 물의 손길이 끊어지면 원래의 곳으로 돌아간다. 이별이 아닌 또 다른 모습으로 또 다른 일을 시작한다. 그렇게 나무의 생명은 끝이 아니라 변하고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의 순환이 아닐까 싶다. 경사진 숲의 비탈길은 낙엽으로 인하여 미끄러웠다. 그 미끄러움이 오히려 종아리 근육을 키우는 데는 도움이 된다니 이것 또한 불평할 일이 아니다 싶다. 드디어 비탈길은 끝나고 넓고 평탄한 임도가 나타났다. 주변의 산 능선, 골짜기 등 먼 곳을 조망할 수 있어 좋았다. 맞은편 산에는 일본잎갈나무의 단풍이 붉게 물들어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했다. 여름 같았으면 볼 수 없는 경관을 만추에는 볼 수 있으니 이 또한 가을 산행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언제까지 임도를 다 돌아다니며 걸을 수는 없으니, 공부 모임의 지도교수이며 김종관 박사의 대학 동기이기도 한 박용구 교수님께서 여기서 기념 촬영을 하고 돌아가자고 제안했다. 맞은편 동쪽 백운산과 남서쪽 고헌산, 북쪽 문복산 자락의 물송골봉이 병풍처럼 해발 500m 이상의 고지대인 소호리 마을을 둘러싸고 있었다. 국토 면적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산림행정의 수장이신 임상섭 산림청장은 얼마 전 이곳 소호리 참나무숲을 찾아 “대한민국 100대 명품 숲을 지역경제 활성화로 이어 미래세대를 위한 자원보존과 산림의 사회적 기능을 유지해 나가겠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이제 산림을 보존으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사회적 기능과 소득으로 이어지도록 산림행정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만추의 계절에 만난 ‘소호리 한독 참나무 숲’의 탐방은 우리 산림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흐뭇했다. 대한민국 100대 명품 숲은… 국토녹화 50주년을 맞아 전국의 집 가까운 숲 가운데 산림청이 우리나라의 생태적, 역사적, 문화적, 경관적 가치를 지닌 숲을 선정해 발표한 것이다. 생태적 가치(희귀 식물과 다양한 생물이 서식하는 건강한 숲)를 지닌 숲, 역사·문화적 가치(오래된 숲, 전통적인 이야기가 깃든 숲)를 가진 숲, 휴양·경관적 가치(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힐링 공간으로 활용이 가능한 숲)를 간직한 숲을 지정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2-11

선비의 기개 닮은 거대한 품엔 풍류와 배움 함께 숨 쉬어

영귀봉(靈龜峰)과 서원(書院)을 감돌고 흐르는 죽계천 맑은 물에 은행나무와 솔숲이 목욕재계한다. 솔잎에 매달린 이슬방울은 죽계천 윤슬의 반짝임과 솔숲으로 스며든 아침 햇살로 불을 밝힌 듯 유난히도 반짝인다. 유생들과 함께 둥그렇게 성생단(省牲壇)을 둘러싸고 있다. 뭔가 성스러운 의식이 시작되는 모양이다. 살이 통통 오른 소 한 마리가 멀뚱멀뚱한 큰 눈으로 콧김을 내뿜고 있다. 서원의 관리가 향사 의식의 순서를 적은 홀기(笏記)에 따라 제향 제물을 올려 두고 흠집 여부를 살펴 보고 있는 중이다. 성생의(省牲儀) 또는 충돌례(充腯禮) 등으로 불리며 제물을 검사하고 품평하는 생간품(牲看品)을 하고 있다. 서쪽에 선 축관이 준비한 제물이 적합한지를 ‘돌(腯)’하고 물으니, 헌관이 좋다고 판단하여 ‘충(充)’하니 의식은 끝이 나고 제물을 준비한다. 이곳 순흥 출신의 고려 시대 대학자 안향의 학문 정신을 기리는 행사 의식 중 제물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솔숲 속 소수서원 지도문 앞 성생단 양옆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처음부터 오늘날까지 향사 준비 과정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축관과 헌관은 제물로 사용 함에 새끼를 밴 암소와 병들거나 약한 소는 제외하고, 참여한 제관들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양이 될 수 있도록 그 기준을 삼으라고 암시했을지도 모른다. 성인을 섬기고 그 정신을 이어받는 향사 일에 제관이나 유생들은 힘들다거나 불평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제물은 결국 알게 모르게 참여한 사람들의 배를 채워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향사나 제사에 참여도 저조하고 그로 인하여 힘들어하며 불평하니 옛날과는 희비가 엇갈린다. 안향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이며 동방 신 유교의 비조(鼻祖)라고 한다.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周世鵬)이 이곳에 사묘를 세워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백운동 서원을 창건했다. 이를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다. 한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서원은 홍역을 치렀지만, 소수서원은 역사적 중요성과 상징성이 높았기 때문에 완전히 폐지되지 않고 있다가 그 후 다시 복원하여 지금까지 잘 보존하여 유지되어 오고 있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원래 이곳에는 통일신라시대 숙수사(宿水寺)라는 절이 있었다. 절의 상징 조형물인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무슨 사유인지 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소수서원이 들어섰다. 그리고 주변에는 울창한 숲을 조성하고 서원을 출입하는 지도문 양옆에 은행나무 암그루와 수그루 두 그루를 심어 놓았다. 소나무는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항상 푸름을 간직하는 것이 선비의 기개와 닮았기 때문에 학자수(學者樹)라 불렀다. 그리고 우람하고 하늘 높이 치솟은 은행나무는 할아버지와 손자 간의 세대를 잇고 인내와 기다림을 상징하는 나무로 공손수(公孫樹)라 불렀다. 이러한 상징적인 자연물을 늘 가까이 하면서 잊지 말라고 하는 숨은 뜻이 담겨있지 않을까 싶다. 자연에서 휴식하고 수양하는 일은 조선 시대 성리학을 배우는 하나의 수업 과정이기도 하다. 솔숲은 낙락장송(落落長松)이라 불리는 건장한 소나무로 울울창창하다. 숲은 서원의 경관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기록에 따르면 선조 1586년에 평창의 유생 이충언이 소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또한 효종 1654년에 영귀봉 아래에서 남쪽 나래에 이르기까지 소나무 1000여 그루를 심었는데 산 것이 겨우 500여 그루였다고 한다. 그 후 소를 방목하거나 화재가 나지 않도록 하고 소나무를 더 심어 지금의 숲으로 무성하게 했다고 한다. 서원을 짓고 주변에 나무를 심어 숲속 서원으로 만들어 놓았다. 조상의 나무사랑, 숲 사랑, 자연사랑이 돋보이는 사례로 오늘날까지 우리는 아늑하고 아름다운 풍광에 심신을 치유받는다. 푸른 하늘로 힘차게 솟아있는 솔숲의 은행나무 노거수 두 그루는 나이 500살 동갑내기이다. 키 21m, 가슴둘레 4m의 수나무는 소나무에 둘러싸여 있다. 키 25m, 가슴둘레 5m의 암나무는 죽계천 언덕 위에 있다. 수피가 벗겨져서 그런지 밑둥치에서 많은 줄기가 뻗어 올랐다. 서로 마주 보며 건강하게 살아가는 부부 은행나무이다. 오늘따라 노란 옷으로 갈아입고 노란 꽃잎을 방문객의 머리 위에 뿌리고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솔숲의 풍광이다.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된 소수서원의 이름에 걸맞게 은행나무도 천연기념물로 품격을 올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소수서원과 소수박물관에는 국보와 보물, 안향과 주세붕 초상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문화재를 더욱 품위 있게 받쳐주는 것은 서원을 감싸고 흐르는 죽계천 맑은 물과 푸른 솔숲, 거대한 암수 두 그루의 은행나무 노거수가 아닐까 싶다. 이들 삼박자가 없다면 소수서원 역시 덩그런 벌판 위에 세워진 하나의 건물에 불과할 것이다. 특히 소수서원에 영혼을 불어넣고 활기를 띠게 하는 것은 살아 숨 쉬는 자연물인 솔숲과 은행나무이다. 죽계천 주변에는 솔숲과 함께 은행나무를 중심으로 각종 풍류를 즐기며 경각심을 고취하는 시설물과 글귀가 있다. 푸른 솔숲에 노랗게 물든 단풍잎의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맑은 죽계천에 비친 노란 단풍 옷을 입은 은행나무는 또 어떠하고. 이런 환상적인 경관에 취하면서도 또 배울 것은 배우는 삶 속에 풍류와 배움이 함께하는 길을 걷도록 해 두었다. 주세붕(周世鵬)이 경(敬)이라는 글자를 바위에 새겨 놓은 경자암(敬字巖), 푸른 산의 기운과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취한대(翠寒臺),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인 경렴정(景濂亭) 등 죽계천을 끼고 있어 자연을 조망하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모임과 풍류, 심신을 수양하던 장소로 풍광이 수려한 곳에 위치하여 유생들은 시연(詩宴)을 베풀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웠다. 이곳에서 우리 조상의 다양한 삶을 그려 보는 재미 또한 솔솔하다. 소수서원의 은행나무와 솔숲은 자연과 인간이 빚어낸 조화의 정수다. 500년 세월을 견딘 은행나무는 유생들의 굳건한 의지를 상징하고, 적송의 푸름은 선비의 절개를 닮았다. 죽계천 맑은 물과 경자암의 글귀는 학문의 숭고함과 성인의 공경을 일깨운다. 솔숲 사이를 걸으면 자연의 품에서 선비의 기개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은행나무의 거대한 품은 후학을 품는 서원의 정신과 같고, 소나무의 긴 가지는 하늘을 향해 쉼 없이 뻗어 나가는 학문을 닮았다. 이곳은 학문과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진 조선 유생들의 이상향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힐링의 장소로 탈바꿈하지 않았나 싶다.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이 곱게 물든 은행나무 단풍 아래 가을 정취에 넋을 잃고 있다. 소수서원과 소수박물관은… 소수서원은 지방에 설립한 사립 고등교육기관이다. 조선시대 서원 중에서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돈암서원, 병산서원, 무성서원, 도동서원의 9개 서원이 2019년 7월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서원’이란 이름으로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됐다. 소수박물관은 성리학을 주제로 선비문화를 조명한 유교 전문 박물관이다. 한국선비문화수련원은 정신문화를 계승함과 동시에 인성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현대에 ‘유(儒)와 한(韓)’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문화 재창달 교육원이고, 선비촌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터다. 선비세상은 대한민국 K-문화 테마파크다. 한옥, 한복, 한식, 한글, 한지, 한음악의 6개 한국문화를 기반으로 하여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인터랙티브 콘텐츠와 첨단매체를 통해 선비정신을 폭넓게 체험할 수 있는 복합 문화 체험공간으로 역할한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2-04

은행나무처럼 깊이 뿌리 내린 흔들리지 않는 충절과 신념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하겠다고 한 선량들이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그 외침은 산 메아리로 허공을 맴돌며 패거리 문화를 양산할 뿐 아무런 감동이 없다. 국가나 국민보다 개인적으로나 자신의 이익과 당리당략에 치우친 논리 개발로 궤변을 늘어놓고 우격다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삿대질하며 남 탓을 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그들은 알고 하는지 모르고 하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언론을 통해서 보도되는 국내외 정세를 보면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의견을 하나로 모우고 뭉치기는커녕 서로 자기주장만 되풀이하고 파벌과 분열의 씨앗을 키울 뿐이다. 이럴 때 충절과 신념의 표상이 된 포은 정몽주 선생이 더욱 그립다. 가을빛이 완연한 영천의 임고서원. 그 입구에 이르면 은은하게 노랗게 물든 잎사귀들이 반기는 500년 된 은행나무가 우뚝 서 있다. 은행나무는 키 30m, 가슴둘레 5.95m, 앉은자리 폭 22m에 달한다. 거인의 임고서원 은행나무는 그 자체로 오랜 세월과 굳건한 신념을 상징한다. 무수한 계절을 지나오며 바람과 비를 견뎌낸 그 자태는 흡사 살아 숨 쉬며 말 없는 교훈을 속삭이는 것만 같다. 나무 곁에 서면 은행나무의 물음이 들려온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이 물음은 이 고장 출신 포은 정몽주 선생을 아는가? 라는 물음으로 들린다. 임고서원은 포은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그는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끝까지 지킨 충신으로, 신념을 지키기 위해 생애를 걸었던 역사적 인물이다. 고려가 흔들리던 시절, 그는 굳은 신념으로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었다. 조선 건국이라는 새로운 물결 속에서도 그의 충성심은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은행나무로 변신하였다. 그의 길은 외롭고도 험난했으며, 마침내 그 길의 끝에서 그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의 충절은 후대에 빛나는 유산으로 남았다. 임고서원은 그가 남긴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세워진 공간이다. 그리고 이곳을 지켜온 은행나무는 그의 이야기를 말없이 이어가고 있다. 가을이 되면 은행나무는 황금빛으로 변하며 찬란한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그 아래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포은 선생의 이야기를 되새긴다. 충절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선생의 시조 단심가(丹心歌)를 읊조려 본다. 단심가에서 드러나는 신념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는 단순한 충성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에 대한 고백이자 헌신이다. 이에 포은 선생 자당이 지은 ‘백로가(白鷺歌)’를 보면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울세라/청강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는 시조에서 보듯이 포은의 충절은 어머니로부터 배운 가정교육의 의미를 일깨워 준다. 그 어머니 그 아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선생은 단지 왕조에 충성한 것이 아니다. 그가 지킨 것은 바로 자신의 신념이었다. 그는 외부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고려를 위해 자신을 내던졌다. 그에게 충절이란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었고, 그의 삶 그 자체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삶을 보며 진정한 충성이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된다. 은행나무처럼 깊이 뿌리를 내린 신념은 어떤 시대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 신념이 있기에 그의 이야기는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은행나무는 임진왜란 중에 부래산에 세워진 서원이 소실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불길 속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서원 앞을 지키고 있다. 마치 충절의 상징처럼 굳건히 서 있는 나무는 가을마다 황금빛으로 물들어 그 자태를 뽐낸다. 사람들은 은행나무 아래에서 삶의 의미를 되새기며, 나무가 지닌 고귀한 가치를 마음에 새긴다. 이곳을 지키며 자라는 은행나무는 말 그대로 ‘살아있는 역사’이다. 오랜 세월을 견디며 서 있는 나무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조상들이 물려준 정신의 상징이다. 그 정신은 바로 포은 정몽주 선생이 지킨 충절과 신념이다. 노랗게 물던 우람한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우리의 삶을 돌아본다.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를 곱씹어본다. 마치 뿌리 깊이 내린 은행나무처럼, 우리가 세상 속에서 뿌리내릴 수 있는 신념과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은행나무는 500년의 세월을 견디며 서 있지만, 그것은 누군가의 손길과 보호 덕분이었다. 공직에 있을 때 모셨던 이곳 출신 이남철 선배님은 여러 지역의 자치단체장을 역임하고 퇴직 후 포은 정몽주 선생의 숭모사업회장과 임고서원 충효문화수련원장을 역임했다. 임고서원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선생의 충효 정신을 늘 강조했다. 선생의 가르침과 함께 나무를 보호하며 그의 신념을 이어갔다. 충절과 신념이란 거창한 말이 아니라, 꾸준히 이어가야 하는 일상의 다짐임을 은행나무는 조용히 일러준다. 우리는 때로 흔들리기도 하고, 쉽게 포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은행나무와 서원 앞에서는 삶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충절은 단지 왕조에 대한 충성뿐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에 대한 충성이었다. 그가 은행나무처럼 뿌리 깊이 신념을 내렸기에 오늘날까지도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세우고, 그 가치를 위해 살겠다는 결심을 포은 선생을 대신하여 은행나무는 말없이 우리에게 전한다. 임고서원과 포은 정몽주 임고서원은 고려 말의 충신인 포은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조선 명종 1553년에 경상북도 영천시의 부래산에 처음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선조 1603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재건되었고, 여러 번 중건과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서원은 고종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폐지되었으나, 1965년에 복원되었다. 포은 정몽주 선생은 고려 충숙왕 1337년에 태어났으며, 일찍부터 학문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며 고려 말기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국정을 바로잡고 외교에 큰 공을 세웠다. 특히 명나라와의 외교를 원만히 하고, 내부적으로는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 등 고려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조선 개국 세력과의 갈등 속에서 1392년에 이방원에 의해 피살당하여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의 죽음은 고려의 마지막 충신으로 여겨져 후세에 큰 영향을 남겼다. 선생의 비문에는 그의 출생, 학문적 업적, 정치적 기여, 그리고 그가 고려 말기 혼란 속에서도 충절을 지킨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의 행적을 기리는 동시에 후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과 충절을 본받기를 기원하는 문장들이 기록되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