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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엄마·처녀 소나무 잇따라 떠난 후 홀로 마을 지키는 장군송

우리는 먼 하늘 이름 모를 별에서 나 홀로 지구로 여행을 온 나그네이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생전과 사후는 모른다. 그러나 많은 사람과 함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지향하다 떠날 때는 또한 나 홀로 떠난다. 건강하고 행복한 여행을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지만, 인간은 채우지도 못하는 끝없는 욕심 때문에 나그네 여행길은 힘들고 고단하다. 때로는 과한 욕심에 눈멀어 나락으로 떨어져 돌이킬 수 없는 막다른 골목길에 봉착하여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우리의 인생길은 미리 볼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고 되돌아올 수도 없는 외길이며 첫길이자 마지막 길이다. 한 번뿐인 인생길, 창공의 바람처럼, 청산의 물처럼, 산야의 노거수처럼 자연과 함께 자유롭게 걷고 싶다. 그 인생길이 슬프고 아프면 슬프고 아픈 대로, 기쁘고 즐거우면 또한 기쁘고 즐거운 대로 나그네의 운명이라 여기고 안분지족하면서 천천히 그리고 부끄러움이 없는 길을 걷고 싶다. 오늘도 나즐로(나 홀로 즐겁게) 노거수 여행길에 나셨다. 노거수에 대한 고사와 설화가 있다. 그중에서도 환생담은 사람이나 동물이 죽은 후 나무로 환생하여 신앙의 대상이 되거나 신성시되는 설화이다. 포항시 남구 연일읍 인주리 산 15번지에 살아가고 있는 소나무 노거수는 이러한 환생담의 설화를 가지고 있는 노거수로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옛날 경북 포항 연일읍 인주리 운제산 자락 조용하고 아담한 시골 마을에 득대란 청년이 살았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된 어머니를 모시고 여동생과 가난하지만, 오손도손 정답게 살고 있었다. 가장 노릇을 하며 어려운 집안일은 물론 부모님께 지극정성이고 여동생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오빠였다. 그러나 남자로서 씩씩하게 자라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호연지기를 키우면서 공부와 무술을 열심히 배우고 익혔다. 그러던 어느 해 나라에서 큰 전쟁이 일어났다. 득대 청년은 평소 생각하던 바대로 어린 동생에게 어머니를 잘 모실 것을 당부하고 전장으로 떠났다. 문무 겸비한 청년이라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임금님으로부터 대장군이란 칭호를 하사받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대장군이 된 득대는 금의환향했다. 고향 조박골에 당도해 보니 온 마을은 도적들이 몰려와 가축이며 양식을 모두 털어 가고 마을 처녀들도 모두 붙잡아 갔다는 청천벽력에 아연실색했다. 단숨에 도적들 소굴로 달려간 득대는 도적의 두목을 죽이고 도적들을 멀리 쫓아내고 잡혀간 마을 처녀들을 모두 구했다. 그러나 동생은 도적들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였다. 시신으로 돌아온 딸을 본 어머니는 충격으로 그만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와 동생을 마을이 보이는 산자락에 묻은 득대는 묘 앞에서 여드레 동안 어머니와 동생을 생각하며 통곡하다 그 자리에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나라와 마을을 위해 큰일을 한 득대를 어머니와 동생 옆에 나란히 묻어 주었다. 몇 년이 지난 후 세 사람의 묘 위에 소나무가 한 그루씩 자라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세 사람의 영혼이 소나무가 되어 마을의 수호신으로 환생했다고 믿어 장군 소나무, 엄마 소나무, 처녀 소나무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매년 정월에 세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아름다운 이야기와 한 그루의 장군 소나무만 남아 있다. 수년 전 엄마 소나무가 죽고 나자, 처녀 소나무마저 그 뒤를 따라 죽었다 한다. 그 흔적만이 남아 설화를 뒷받침하고 있다. 지금도 장군 소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마을의 번영과 평화를 위해 마을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다. 또한 마을 주민들도 조상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가슴에 담고 장군 소나무를 잘 보호하며 가꾸고 있다는 설화가 지금까지 주민들로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우리는 장군 소나무 노거수 설화에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부모님에 대한 효도와 동생에 대한 형제간의 우애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를 모시고 여동생과 살아가면서 가장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평소에 문무를 익혀 전쟁이 일어났을 때 주저 하지 않고 전장에 나아가 혁혁한 공을 세우고 승리로 이끌었다는 이야기는 충성심과 애국심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어머니와 동생의 묘소에 쓰러져 죽은 득대 청년을 주민들은 어머니와 동생 옆에 함께 묻어 영혼을 위로해 주었다. 무덤에 소나무가 자라자 득대와 그의 어머니와 동생이 환생하였다고 믿고 마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주민들의 화합과 단결심을 보여주고 있다. 전쟁으로 인하여 득대란 청년의 행복한 가정은 물론 마을의 평화도 풍비박산이 났다. 전쟁으로 인한 물적 인적 피해는 나라뿐만 아니라 국민 개인적으로도 씻을 수 없는 불행을 가져왔다. 전쟁은 먼 설화 속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오늘날도 하마스와 이스라엘 전쟁은 하마스가 먼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였으나 이를 물리치고 오히려 하마스를 초토화시켜 종전의 협상에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러시아가 먼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영토의 일부분을 점령하였으나 우크라이나는 국제 사회의 무기 지원만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형국이라 종전의 협상도 어렵게 하고 있다. 옳고 그름을 떠나 힘이 약하면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는 것이 오늘날 국제 사회의 현실이다. 유비무환으로 스스로 강해지는 자강의 길만이 나라를 지키고 우리의 행복을 지키는 길임을 장군 소나무 설화의 이야기 속에서 깨달았다. 노거수 설화는 마을 신화의 성격을 지니면서 마을의 중심 공동체 공간으로 애향심과 단결심, 애국심과 충성심을 도모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마을을 바라볼 수 있는 운제산 자락, 언제나 마을 주민의 행동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여 바른 행동을 유도한다. 나무로 환생한다는 설화는 마을 주민 자치 교육의 수단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공동체 사회 규범을 노거수 설화로 엮는 선조들의 지혜를 엿 볼 수 있다. 노거수에 얽힌 고사와 설화는 징벌담은 당산나무를 신성시해야 하고 제사를 소홀히 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으로 가장 대표적인 노거수 설화다. 영험담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견하거나 인간에게 풍요를 가져다주고, 당산나무에 해를 가하면 울거나 혈흔을 나타내는 영험이 있다는 노거수 설화다. 동물담은 노거수에 특정 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그 생물에게 위해를 가하면 천벌을 받는다는 설화. 동물담의 노거수 설화 속에는 뱀이 높은 빈도로 나타나고 있다. 뱀은 사탄과 같은 사악함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하지만, 당산 집 또는 당산나무를 보존하기 위한 수단인 동시에 지킴이 동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 식목담은 마을을 개척한 사람이나 역사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람이 심었다는 노거수에 대한 고사다. 이인계시담은 꿈속에 낯선 사람이 나타나 계시하는 대로 이행하면 반드시 유리한 상황이 전개된다는 노거수 설화다. 현몽담은 당산나무에 꿈 이야기가 부가되어 있는 것으로 꿈속에 목신이 나타나 인간에게 계시하는 것으로 사람과 대결한다거나 괴질을 물리친다는 노거수 설화. 풍수담은 풍수지리설이 포함된 노거수 설화로 보면 된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2-12

만고풍상 견디며 푸르름 잃지 않은 노송과 황홀한 해맞이

을사년 뱀의 해를 맞이하여 새로운 마음의 다짐을 갖고자 새벽 5시에 집을 나서 팔공산 인봉 신선송을 찾아 나섰다. 어둠 속으로 자동차들은 헤드라이트를 켜고 새벽부터 도로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북지장사로 가는 좁은 산길로 접어들었다. 경사진 오르막길에 굽은 산길은 앞을 밝히는 헤드라이트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몸의 감각과 정신 집중으로 무난히 북지장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아직 주변은 어둠이 깔려 사물을 잘 분간할 수 없었다. 인봉의 소나무와 함께 해맞이할 요량으로 가파른 경사진 올레길을 따라 올랐다. 숨이 차서 고개를 들고 심호흡하는데 어두운 밤하늘 숲속 나뭇가지에 밝게 빛나는 달이 등불처럼 걸려 있었다. 밝은 한 줄기 달빛이 어슴푸레하게나마 어둠을 몰아내고 숲속의 산길을 밝혀 주었다. 길 위에 내려앉아 있는 달빛을 지르밟으면서 들숨과 날숨을 세어가면서 한 발짝 두 발짝 천천히 올랐다. 마침내 거대한 바위가 앞을 가로막았다. 아 이것이 팔공산 인봉이구나 직감하고 잠깐 그를 톺아보았다. 주변을 살피면서 바위에 오르는 길을 찾았다. 북쪽으로 가서 살펴보니 내려가는 등산길이 있고 바위로 오르는 길은 없었다. 그러면 남쪽에 오르는 길이 있겠지, 하면서 발걸음을 돌렸다. 그곳에도 가파른 바위 낭떠러지로 길은 없었다. 다시 한번 이쪽저쪽을 가보면서 살펴보았지만, 길은 찾을 수 없었다. 새벽에 어디 전화해서 물어볼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했다. 어둠이 걷히기를 기다렸다. 그 시간이 오히려 나에게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산행하다 보면 많은 사람이 “산(山)과 봉(峰)을 어떻게 구분하지?”하고 묻는다. 그렇다. 어떤 것은 산이라 하고 또 어떤 것은 봉이라 하니 헷갈리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산은 주로 산맥이나 산줄기의 큰 덩어리를 이루는 전체적인 지형을 의미하고 봉은 산의 일부로 특히 뾰족하게 솟은 산봉우리를 지칭하지 않나 싶다. 한라산, 설악산, 팔공산 등 높이와 면적이 넓은 지역을 포괄적으로 지칭하고 봉은 팔공산의 동봉, 서봉, 인봉 등 산의 한 부분으로 특정 지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팔공산의 지명과 유래를 생각하는 동안 어느 순간에 어둠은 산속으로 숨어들고 동쪽 하늘에 붉은 서기가 돌았다. 이제는 정말 오르는 길을 찾아야만 했다. 일어나서 다시 북쪽에서 남쪽으로 거대한 바위를 따라 훑었다. 거대한 바위가 조각나 떨어져 길을 막고 있었다. 떨어진 바위를 타고 넘었다. 그러자 바위와 바위 사이 좁은 공간에 노끈이 보였다. 겨우 몸 하나 지나갈 정도의 좁은 바위틈 사이를 비집고 노끈을 잡고 몸을 솟구쳐 올랐다. 인봉(579m), 거대한 바위 위에 올라섰다. 그곳에는 천년의 세월을 함께한 신선이 선물했다는 소나무 한 그루가 살아가고 있었다. 키는 불과 2m 남짓하고 큰 줄기 몸 둘레는 60cm, 작은 줄기 몸 둘레는 50cm 정도의 단아한 우산형의 자태였다. 너무나 완벽한 비율의 분재형 소나무였다. 분재형 소나무라면 화분과 흙, 물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곳 소나무는 화분 대신에 큰 바위들이 서로 맞물려 하늘로 솟구쳤다고 할까, 아니면 하늘을 받들고 있다고 할까, 아무튼 뾰족한 산봉우리 큰 바윗덩어리 위 좁은 틈새 열악한 환경에 뿌리내리고 살아가고 있었다. 바위 틈새에 있는 눈곱만한 흙은 비바람이 실어 오고 또 만들었지 않나 싶다. 화분에 있는 소나무도 시시때때로 물을 주지 않으면 주접이 들고 결국 생을 마감한다. 그런데 바위 위에 살아가는 소나무는 누가 물을 주고 보살핀단 말인가. 그리고 보면 자연이 힘을 합쳐 소나무를 다듬고 키우지 않았나 싶다. 바람은 멀리서 구름을 실어 오고 팔공산은 새벽마다 찬 이슬로 목을 축여주고 가끔 내리는 비는 바위 틈새에 머물러 소나무의 생명줄을 붙잡아주지 않았을까 싶다. 인봉은 팔공산 노적봉에서 뻗어 내린 능선 위에 다시 한 번 힘차게 솟구친 거대한 바위덩어리이다. 동서남북 사방을 막힘없이 조망할 수 있어 가슴이 뻥 뚫어졌다. 동산에 잉태의 붉은 산기를 더욱 짙게 물들이고 있다. 붉은 태양이 하늘로 힘차게 솟구쳐 오르고 있다. 햇귀의 기운이 막힘없이 이곳 인봉 신선송에 쏟아져 내린다. 나는 신선송과 함께 새해 해맞이를 했다. 동으로 뻗은 푸른 솔가지 솔잎이 반짝반짝 빛났다. 환상적인 해돋이 풍경의 순간을 맞이하여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신선송의 자태에 나도 모르게 두 손 합장하여 경외심을 표했다. 그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면서 그에게 나라의 안녕과 평화를 빌었다. 돋을볕은 먼저 팔공산의 높은 봉부터 찾아 들었다. 천왕봉(1192m), 비로봉(1176m), 동봉(1167m), 삼성봉(1150m)이 자리한 팔공산 정상의 봉우리를 밝혔다. 돋을볕으로 아침 세수를 하는 팔공산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들어왔다. 팔공산 치맛자락 접힌 명승지에 신라 고찰 동화사가 자리 잡고 통일대불상이 조용히 인봉을 바라보고 있다. 팔공산을 바라볼 수 있는 가장 멋진 곳, 인봉 바위 위에서 수백 년 동안 만고풍상을 견디며 여전히 푸르름을 잃지 않고 살아 있는 신선송과 황홀한 아침 해맞이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언제나 변함없이 무언의 신비를 전해 주고 있는 것 같은 신선송과 함께 팔공 백 리 능선을 바라보니 마음이 숙연하다. 아침 돋을볕이 서서히 산 아래로 내려와 시가지를 밝히고 있다. 낙동강이 대구 시민의 젖줄이라면 팔공산은 시민의 품이요 산소 카페이며 에너지의 발원지이다. 저 멀리 서쪽으로 눈 덮힌 가야산이 보이고 남쪽 앞산과 비슬산이 대구 시내를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팔공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자락의 봉들이 이어진 스카이라인 조망은 그 무엇보다 아름답다. 조선 시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은 1748년 팔공산을 유람하고 남긴 남유록(南遊錄)에서 “반쯤 시든 소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고색창연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라며 팔공산 인봉 소나무를 예찬했다. 이를 근거로 소나무 나이를 300살로 보기도 한다. 그때도 지금과 같다고 하니 300살을 더 보태어 600살이라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팔공산 인봉 소나무는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우리에게 불망의 ‘인봉 신선송’이다. 바위 위에 올려놓은 자연이 다듬은 바위 분재 소나무이다. 팔공산 국립공원 상징물과 천연기념물로 ‘인봉 신선송’은 생태학적으로나 문화적 가치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고색창연한 신선송의 고고한 자태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의 방문으로 뿌리가 노출되고 답압으로 생육환경이 날로 열악해지고 있어 팔공산국립공원관리공단이 관심 가져 주었으며 하는 바람을 해 본다. 필자의 시 ‘팔공산 인봉 신선송’ 팔공산 인봉 바위에신이 씨앗을 뿌리고 다듬은천년의 숨결로 뿌리내린 신선송새해의 빛을 가장 먼저 품는구나. 비바람에 흔들려도 꺾이지 않고눈보라에 휩싸여도 잎을 잃지 않는바위틈새 깊이 내려진 뿌리는 세월을 뚫고하늘로 뻗은 두 팔은 내일의 태양을 부른다. 그 뿌리는 깊고, 심지는 강하여붉게 떠오르는 아침의 태양처럼꿋꿋하고 단아한 자태희망의 등불이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2-05

처진 모습이 아름다운, 늘 푸른 소나무는 변함이 없구나

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과 나무가 200년이 훌쩍 지난 오늘날까지 같은 공간에 함께 하고 있다. 시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영세불망(永世不忘)하고 있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서유민 군수(徐有民 郡守)와 천연기념물 처진 소나무 노거수이다. 서유민(徐有民)은 자는 원경(元卿)이요. 본관은 달성으로 200여 년 전 1826년(순조 26년) 8월에 삼동 현령으로 부임하여 1828년(순조 28년) 3월까지 근무하고 가산 군수로 이동한 목민관이다. 그리고 천연기념물 처진 소나무 노거수는 나이 240살, 키는 14m, 몸 둘레는 2m 넘는 아름답고 우람한 늘 푸른 소나무이다. 서유민은 목민관으로 주민의 추앙과 이목을 끌었고, 늘 푸른 소나무는 나뭇가지가 아래로 처진 모습이 아름답고 우람하여 경외심과 이목을 끌었다. 사람은 주민들로부터 청렴한 목민관으로 영원히 잊혀지지 않도록 영세불망비를 세워 후손에게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소나무는 내외적인 아름다움과 고결한 지조의 상징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나라에서 문화재로 보호하고 있다. 이 둘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두 주인공이 함께하고 있는 곳은 경북 청도 매전면 동산리 151-1번지이다. 지역 주민이 그의 공적을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하기 위하여 영세불망비를 세워 그를 기리고 있는 곳도 그리 흔치 않다. 얼마나 훌륭한 공적을 쌓았으면 그를 위해 주민들이 영세불망비까지 세웠을까. 지금의 공직자와 선량은 이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하다. 대통령과 국무위원, 주요 공직자들이 줄줄이 선량들의 탄핵으로 직무가 정지되어 대행이라는 낯선 행정의 일면을 보고 있다. 또한 국회의 선량들은 공직자의 탄핵발의가 일상화되어 나라의 국제 신인도가 떨어지고, 국민으로부터 법 위반으로 고소 고발로 몇 년간 재판을 받는 해괴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옳고 그름의 판단을 신속하게 헌법과 법률, 양심에 따라 해 주어야 할 사법부 판사 나리는 진영의 논리에 갇혀 국민을 양분하고 있지 않은지 의심마저 들게 하고 있다. 이런 엄중한 현실의 와중에도 불구하고 국민은 두 진영으로 나누어 한양의 겨울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묵묵히 생업을 이어가는 국민은 불안에 불면을 겪고 있다고 한다. 서유민 군수와 늘 푸른 소나무 노거수가 이를 보고 무슨 말을 해 줄까 궁금하다. 주민들은 늘 푸른 소나무 곁에 서유민 군수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세워 그의 선정을 후손에게 길이 기억하게 했다. 매년 9월 초에 문화재 보호 재단에서 주변 잡초를 제거하고 깨끗하게 단장하고 있다. 아마 천연기념물 처진 소나무가 없었다면 서유민의 영세불망비도 찾기도 어렵거니와 그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훼손되었거나 자취를 감추었을지도 모른다. 영세불망비와 소나무라는 한 세트의 그림은 참으로 오묘하다. 영세불망비의 주인공은 200여 년 전에 돌아가시고 없지만, 그의 선정은 살아 숨을 쉬는 문화재 소나무와 함께 돌비석에 새겨져 오늘날까지 그의 선정 미담의 숨결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소나무는 또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의 옷을 입고 있다. 1980년대 450원에 출시된 솔이라는 브랜드의 담배가 있었다. 당시 고급 담배로 1986년까지 단일 브랜드로 시장점유율 60%를 기록하며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2005년에 단종되어 지금은 나오지 않지만, 애연가라면 담배 겉표지의 그림을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바로 처진 소나무가 솔 담배에 그려진 모델이 된 소나무라고 한다. 아마 그로 인해 1982년 천연기념물 제295호로 품격이 올려지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우리나라 처진 소나무 중 가장 전형적이고 희귀한 유송(柳松)으로 전국에서 독특한 모양새를 자랑하는 가치가 높은 소나무라고 한다. 그러나 건강에 해로운 담뱃갑의 겉표면에 경고의 문구 대신에 덩그렇게 실려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지금은 그 브랜드의 담배가 단종되었다니 참으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소나무는 비틀린 줄기와 가지의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소나무의 모습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비유하는 듯하다. 이는 세월의 풍파를 겪으며 자연이 만들어낸 조형미이다. 인간이 조각한 작품처럼 보이지만, 자연의 손길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소나무의 푸른 잎은 생명력과 불멸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우리 문화에서 소나무는 변함없는 의지와 장수를 상징하는 나무로 자주 등장한다. 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는 고결함과 지조를 지키는 군자의 덕목을 표현하는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밖에도 아래로 처진 나뭇가지는 마치 고개를 숙인 모습처럼 보인다. 이는 겸손함과 인내의 미덕을 상징할 수 있다. 고개를 높이 들기보다 내려 숙이는 행위는 동양 철학에서 지혜와 성숙함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공자는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군자는 겸손해야 한다”라고 가르쳤다. 소나무의 가지도 그러한 겸손한 자세를 표현하는 듯하다. 또한 오랜 세월의 무게를 견뎌온 흔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소나무가 오랜 시간 성장하면서 가지가 아래로 처지는 모습은 나이가 들수록 깊어지는 연륜과 삶의 지혜를 상징한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경험과 지혜를 축적하고, 겉으로는 약해 보일지라도 내적으로 단단함을 유지하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담고 있는 듯하다. 또한 처진 나뭇가지 모습은 오히려 독특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었다. 이는 인간의 삶에서도 완벽함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상처와 세월의 흔적 역시 고유한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겸손, 연륜, 순응, 포용, 그리고 인간의 한계를 통한 아름다움이라는 깊은 인문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자연의 모습에서 삶의 철학과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늘 푸른 소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닌,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소나무와 영세불망비라는 한 세트의 그림에서 그 속에 숨어 있는 조상의 깊은 뜻이 무엇인지 오늘날 스스로 영혼이 없다는 자조적인 공직자와 무소불위의 권한과 권력을 위임받은 선량들이 보고 무언가 느꼈으며 하는 바람을 해본다. 군수 서유민 영세불망비는… 경북 청도군 매전면 동산리 151-1번지에 위치했다. 1828년(순조 28년)에 만들어졌고, 비석 높이는 90cm, 너비는 38cm다. ‘선정에 부지런히 힘쓰시니 일마다 밝게 다스려졌네, 그 은혜 윤택하여 폐단을 막으니 군수님 떠나가셔도 더욱 생각나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유민(徐有民)의 자는 원경(元卿). 본관은 달성으로 1826년(순조 26년) 8월에 삼동 현령에서 도임하여 1828년(순조 28년) 3월에 가산 군수로 옮겨갔다. 선정비가 매전면 동산리 외에 금천면 임당리 명포마을, 청도읍성에도 남겨져 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1-22

휘어진 가지·두터운 줄기… 오랜 세월의 흔적을 품다

을사년 새해 벽두부터 뱀은 꼬리를 흔들며 머리를 치켜들고 금방이라도 덤벼들 듯이 독을 뿜고 있다. 지난 연말에도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그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권력의 칼날은 숲은 아랑곳하지 않고 산을 지키는 못난 나무만 찍어내려 하고 있다. 수학 문제를 공식에 따라 풀다 보면 답이 저절로 나오는데, 답부터 정해놓고 공식에 맞추려 한다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먼저 사회 불안부터 잠재우기 위해 국내외를 둘러보고 주변의 좌우를 살피며 나라와 국민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찾으면 될 것이 아닌가 싶다. 복잡하게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어려운 국란을 우리 모두 잘 극복하리라 믿으며 다시 보고 싶은 의성군 안사면 월소리 693번지에 살고 있는 소나무 노거수를 찾아 나섰다. 월소리 마을 입구에 마을 수호신처럼 늠름하게 서 있는 소나무를 보니 이 난국도 숱하게 세월을 이겨낸 소나무처럼 무난히 극복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반송의 수형으로 반듯하게 자라고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심은 것으로 보였다. 마을 어른에게 물어 본 결과 소나무는 조선 중기 광해군(1608~1623) 재위 때 평산 신씨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심었다고 했다. 그분은 무슨 마음으로 소나무를 기념식수로 심었을까? 그것도 들판을 지나 마을 입구에 심었을까? 몇 년생의 소나무를 심었을까? 이런저런 의문을 가지면서 우람한 소나무에 경외심으로 가만히 다가가서 살며시 안아 보았다. 평산 신씨 할아버지의 따뜻한 마음과 함께 의문은 풀렸다. 소나무는 당산나무로 마을 주민들로부터 제사를 받으며 또한 기념물로 보호를 받고 있다. 마을 주민 평산 신씨의 후손들은 마을을 드나들면서 마을 입구에 우뚝 서 있는 늠름하고 우람한 늘 소나무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조상의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그 마음을 헤아려 볼 것이다. 그리고 보면 그분은 뭉치고 단합하는 마을의 공동체 정신의 함양과 조상을 기리고 섬기는 효 사상을 은연중에 심어주는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마음에서 소나무를 심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보며 그분은 성공한 셈이다. 소나무와 함께 공적비가 하나 세워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나무를 심은 사람의 공적비가 아니고 기념물로 지정받는데 공이 큰 마을 출신 사람의 공적비였다. “공적비 신현수(申鉉守) 지정일 1994년 6월 8일. 상기인은 월소리 소나무를 문화재 기념물로 지정받는 데 그 공로가 다대함으로 그 뜻을 기리고자 주민의 정성을 모아 여기 영원불멸의 비를 세우다. 2006년 4월 월소리 주민 일동.” 이런 행위가 바로 마을을 하나로 단합하는 공동체 정신의 발로이다. 또한 마을 주민이 얼마나 이 나무를 사랑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좀 더 높은 품격의 나무로 올려 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공적비의 주인공은 고향을 떠났지만, 그의 마음은 늘 고향의 소나무와 함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이곳 월소리 출신으로 감사원에서 청렴한 공직자로 그 임무를 수행한 밑바탕에는 늘 푸른 소나무의 곧은 절개, 청렴의 이미지가 한 몫 하지 않았나 싶다. 주민들이 다시 한 번 뭉쳐서 천연기념물 반열에 올려놓으면 어떨까 싶다. 문화적, 생태적 가치로 보아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보여진다.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소나무가 있는 신보 마을에 다른 여타 자연부락 마을보다 인물이 많이 난다며 자랑했다. 그렇다. 마을을 개척하면서 기념식수로 심은 소나무는 오랜 시간 자라면서 마을 주민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쳤을 것이다. 생태적, 문화적, 심리적, 경제적은 물론이고 마을의 공동체 정신과 조상을 기리는 효 사상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마을 입구에 자라는 소나무는 오가는 사람들의 눈에 띄어 소나무처럼 닮아가지 않았을까 싶다. 휘어진 가지와 두터운 줄기는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이 소나무를 ‘조상의 나무’라 불렀을 것이다. 모르면 몰라도 나무를 심은 평산 신씨 조상은 마을의 번영과 자손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소나무를 선택하여 마을 입구에 기념식수를 했을 것이다. 마을의 품격을 높여주는 소나무 노거수는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있어 나무 아래에 넓은 그늘은 주민들의 쉼터로 이용하고 있다. 나이가 400살, 키 11m, 가슴높이 둘레가 3.2m, 그 앉은 자리 폭은 17m이란다. 소나무 가지가 땅에 닿을 정도로 쳐져 우산 모형을 하고 있다. 나무 아래에는 체육시설을 설치하여 주민들은 시간 나는 대로 운동을 하면서 건강을 다지고 있다. 오늘도 마을의 88세 어른께서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나를 보더니 나무에 대한 고마움을 이야기해 주었다. 나무 아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말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했다. 옛날과 다르게 사람이 뜸한 마을에서는 사람 만나기가 그리 쉬운 일도 아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소나무 노거수가 있으니, 그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출향 인사들이 고향을 방문하면서 나무 아래 쉬고 있는 어른에게 용돈까지 건네주니 얼마나 좋은가. 마을 어귀에 있는 노거수는 그냥 쉼터가 아니라 사람을 만나는 만남의 장소, 요즘 도시의 카페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나무는 마을 공동체의 유대를 상징하는 중심축처럼 보인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두터운 줄기는 마치 마을을 지켜온 세대들의 역사와 연대를 나타내는 듯하다. 네 갈래로 갈라진 가지는 함께 나누고 협력하는 공동체의 조화로움을 상징하며, 푸르게 뻗은 나뭇잎은 미래 세대의 번영을 암시한다. 나무를 심은 조상의 손길은 후손들에게 자연을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과 효의 정신을 전하는 듯하다. 마을의 중심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조상의 은덕과 희생을 기리고, 세대 간의 연결고리를 이어주는 존재로 느껴진다. 후손들은 어린 시절에 소나무 아래에서 뛰놀며 자랐을 것이고 친구들과 웃고, 잎 사이로 내려오는 햇살을 느끼며 마음의 평온을 찾곤 했을 것이다. 소나무의 존재는 마을 사람들에게 단순한 나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나무는 후손에게 조상의 가르침과 정체성을 전하는 살아있는 교과서이다. 세월이 흘러 마을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후손도 친구는 만날 수 없어도 소나무는 마주할 것이다. 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을 것이고 잎은 더 짙어졌고, 가지는 더 넓게 퍼져 있었을 것이다. 소나무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세월을 뛰어넘어 이어지는 가르침이자 마을의 정신이다. 세월이 흘러도 소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그 아래에서 수많은 세대가 서로를 기억하고, 사랑하며, 하나 되는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400년의 세월 속에서 소나무는 이렇게 우리의 삶을 품고 있었다. 선한 영향력을 지닌 소나무는… 생태적 영향: 탄소 흡수 및 공기 정화, 생물 다양성 증진, 토양 보호.문화적·역사적 영향: 기념비적 가치, 전통과 신앙, 정체성 강화.심리적·정서적 영향: 심리 안정, 힐링 공간 제공.경제적 영향: 관광 자원, 부동산 가치 상승, 자연 교육 자원.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1-15

하늘과 대화하 듯 뻗어나간 가지에는 생명·시간의 흔적이…

겨울 찬 바람이 푸른 솔가지 빗자루로 허공을 향해 설렁설렁 비질하니 빗살 끝에 닿은 하늘은 더욱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맑다. 하늘이 푸르고 맑으니 내 몸과 마음도 푸르고 맑은 자연이 되었다. 바람의 손끝에 솔향은 흩날리고 지난해 바위틈에 숨어 있던 역겨운 메케한 냄새를 쓸어 내고 더덕더덕 붙은 몸속 땟물을 말끔히 몰아낸다. 삼송(三松)은 마치 세월의 이야기와 자연의 예술을 동시에 품은 존재처럼 다가온다. 고요한 하늘을 배경으로 서서, 푸른 솔가지 잎을 부드럽게 늘어뜨리고 있다. 그 가지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필선처럼 보이며, 그 선율은 바람에 따라 흔들리며 마치 자연의 교향곡을 연주하는 듯하다. 강인한 줄기와 뒤엉킨 가지들은 소나무가 겪어온 시간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삼송(三松)은 더욱 가까이 다가와 그 복잡하고도 아름다운 곡선을 드러낸다. 마치 하늘과 대화를 나누는 듯 뻗어나간 가지들은 자유로움과 생동감으로 가득하다. 나무의 표면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은 그 자체로 자연이 그려낸 작품이며, 굵고 뒤틀린 줄기와 조화를 이루는 잔가지들은 생명력의 끊임없는 확장을 보여준다. 푸른 하늘과 녹색의 솔잎이 만나 이루는 풍경은 소나무가 품은 고요함 속의 생동감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서로를 보완하며 소나무의 두 얼굴을 보여준다. 멀리서 보면 우아하고 기품 있는 자연의 위엄이 느껴지고, 가까이서 보면 생명과 시간의 흔적이 담긴 예술적 디테일이 드러난다. 삼송은 그 자리에서 하늘과 땅을 잇는 다리가 되어, 자연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묵묵히 노래하고 있는 듯하다. 삼송(三松)의 내 외모에서 풍기는 원근에서 느끼는 이미지를 보면서 내 늙음의 후줄근한 모습을 벗어던지고 밝은 웃음 가득한 얼굴로 ‘일신우일신’ 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삼송(三松)은 김천시 증산면 유성리 마을에 살아가고 있는 쌍계사지 세쌍둥이 소나무이다. 삼송은 제일 큰 형은 키가 13m, 몸 둘레는 2.5m이다. 그리고 둘째는 키가 15m, 몸 둘레는 2.1m이다. 그리고 막내는 키가 11m, 몸 둘레는 2.1m로 처진 소나무로 만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쌍계사지가 시루봉 바로 아래에 있고 보면 삼송은 절의 마당에 부처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았나 싶다. 나무의 나이로 보아 키나 몸 둘레가 지금보다 더 클 것 같은 데, 이곳을 방문하는 신도나 삼사백 년 전 1000여 명의 스님이 절에서 수행하였다 하니, 오고 가는 사람들의 발자국에 자람이 더디었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모두 10m가 훌쩍 넘긴 날씬한 몸매는 찾아오는 사람이나, 그저 모르고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삼송의 푸르름의 아름다움에 그를 톺아보았을 것이다. 김천은 사통팔달 교통요지이며 산세가 아름답고 품이 넓어 오랫동안 수도처로 직지사와 청암사, 수도암 등 여전히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김천은 요즘 핫하게 뜨는 경북의 혁신도시이기도 하다. 특히 이곳 유성리에 ‘무흘구곡 전시관’을 세워 대가천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한 폭의 산수화처럼 담은 58경과 무흘구곡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일종의 문화생태계를 이루어 무릉도원이라 해도 좋을 듯하다. 이곳 유성리 출신 이창재는 중앙부처를 두루 근무하고 경북도 감사관을 거쳐 고향 김천 부시장으로 공직을 마치고 고향에서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후배 공무원이다. 그는 내가 노거수를 찾아다닌다는 것을 알고, 쌍계사지 삼송을 소개하고 안내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삼송을 보고 자라면서 늘 푸름과 곧은 절개, 그 끈질김을 교훈으로 삼았다고 했다. 그렇다. 소나무뿐만 아니라 모든 나무는 우리 인간에게 지혜를 터득하게 해 주고 교훈을 준다는 사실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우리가 알고 있다. 그의 덕분에 삼송을 만나게 되고 즐거움을 느꼈으니, 김천에 있는 멋진 연리근의 느티나무와 조룡리 천연기념물 은행나무를 안내해 보여주었다. 어부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중 복사꽃이 피어 있는 수풀 속으로 잘못 들어갔는데 숲의 끝에 이르러 강물의 수원이 되는 깊은 동굴을 발견하고 그 동굴을 빠져나오니 평화롭고 아름다운 별천지가 펼쳐졌다고 한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1천 6백여 년 전 도연명이 말한 무릉도원이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초목이 무성하면 봄이 온 걸 알고 나무가 시들면 바람이 매서움을 아노라, 비록 세월 적은 달력 없지만 사계절은 저절로 한 해를 이루나니, 기쁘고도 즐거움이 많은데 어찌 수고로이 꾀쓸 필요 있으랴.”라는 자신의 심경을 담은 글을 썼다. 무릉도원 같은 무흘구곡을 찾아 옛 선비들처럼 자연을 노래하며 심신을 수련하는데 이곳만 한 곳이 있을까 싶다. 무흘구곡(武屹九曲)은 조선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김천에서 성주로 흐르는 대가천을 따라 자리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노래한 곳으로 제1곡 봉비암(鳳飛巖)에서부터 성주 댐을 거쳐 김천시 증산면 수도암 아래쪽 계곡에 자리한 제9곡 용소폭포까지 약 35㎞ 구간의 맑은 물과 기암괴석 등, 절경을 읊은 시이다. 봄에는 개울을 따라 흘러내리는 눈 녹임 물은 버들강아지 꽃피우고, 여름에는 용소에서 떨어지는 폭포수는 개울을 훑고 핥으며 그간의 땟물을 씻어내어 보는 이로 하여금 시원함과 답답함을 해소한다. 가을에는 단풍 물로 개울을 수놓고, 겨울에는 하얀 눈으로 옷 해 입고 봄맞이 채비를 한다. 참으로 고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곳 삼송(三松)은 무흘구곡 상류의 시작점이요 옥류정이 위치해 있다. 주변의 경관은 그 정점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연맹이 말한 무릉도원이 아닐까 싶다. 무흘구곡에다 누군가 삼송(三松)의 시를 지어 넣어 무흘십곡으로 하면 어떨까. 쌍계사지는? 김천 증산면 유성리 시루봉 아래 신라 현안왕 3년(859) 도선(道詵) 국사는 쌍계사를 창건하였다. 쌍계사 대웅전은 전면 5칸 측면 3칸 25집으로 조선 최대 규모 최고 수준의 건축물로서 천정의 그림과 석가여래입상인 쾌불(길이 32m, 폭 8m)은 수작으로 꼽힌다. 쾌불은 가뭄이 심할 때에는 대웅전 마당에 걸고 기우제를 지내면 바로 비가 내렸다고 전한다. 쌍계사는 1000여 명의 스님들이 수행한 17~18세기 한국불교 경학사의 화엄학(華嚴學) 대가의 가풍과 선(禪과) 교(敎)의 맥을 이은 불교사에 있어 중요한 사찰이다. 남아 있는 비문을 통해 조선시대 불교 탄압의 산물인 사찰의 부역(負役), ‘쌍계사 한지제작’ 등의 시대사도 알 수 있다. 쌍계사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당시 대웅전 일부가 임시 증산면사무소로 사용되었는데, 수도산에 남아 있는 북한군 패잔병들의 방화로 인하여 7월 14일 전소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대웅전 터는 증산면에서 향토문화재 복원사업으로 복원하게 되었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1-08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절벽 위 푸른 노송시간 초월한 자연의 위대한 생명력 느껴져

2025년 뱀띠 새해를 맞이하여 지혜롭고 진중하게 어려움을 극복하고 변화에 슬기롭게 대처하는 한 해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내연산 향로봉을 오르면서 계곡의 아름다움에 반해 또다시 이곳을 찾으리라고 마음을 먹은 지 10여 년이 훌쩍 지났다. 그러던 차 노거수회를 창립한 이삼우 회장님의 전화를 받고 내연산 계곡의 비경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겸재 정선이 그린 ‘내연산폭포도’와 ‘고사의송관란도’에 그려진 노송이 이 계곡 암벽 위에 실제 자라고 있다고 하면서 함께 가서 보기를 권했다. 300여 년 전 그린 작품에 나오는 소나무가 실제 현존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뛰었다. 천원권 지폐에 실린 ‘계상정거도’는 예술적 감각과 조선의 자연미를 상징적으로 잘 묘사한 문화적 의미가 깊은 겸재 정선의 작품이다. 내연산 계곡의 아름다운 자연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인정한 마당에 그림 속의 노송을 천연기념물 반열로 올려놓는 것이 옳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바위 위나 틈새에 살아가는 소나무 사진 마니아들도 있다. 그 끈질긴 삶의 모습에 매료되어 위험천만한 곳도 아랑곳 하지 않고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어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다. 우리 국민 또한 그러한 암벽의 바위 소나무를 환호한다. 우선 미루고 보는 나의 성격과 빠른 세월 때문에 어영부영하다 보니 그로부터 수개월이 훌쩍 지났다. 더는 늦출 수 없다고 생각하여 지난 연말에 노송을 찾아 나셨다. 먼저 겸재 정선의 ‘내연산 폭포’ 진경산수화를 찾아 노송의 위치를 마음속으로 새겼다. 화가의 붓끝에 내 마음을 싣고 캠퍼스를 종횡무진으로 누비었다. 듬뿍 묻힌 붓끝을 꾹 눌러 대담하고 굵은 선으로 폭포 주변 바위의 견고함과 자연의 역동성을 표현해 나갔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부드럽고 유려한 선으로 표현되어, 거친 바위와 대비를 이루었다. 먹의 농담을 활용해 산과 바위의 질감을 묘사하고, 채색으로 나무와 폭포, 바위, 산 등 자연을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그 붓끝의 마침은 아니나 다를까 기암괴석 절벽 위 천년송이었다. 만고에 움직일 수 없는 깎아지른 큰 바위 절벽 폭포 위에 충절의 푸른 노송을 심어 놓았다. 암벽 바위 위에 살아가는 노송을 찾아내어 그림 속에 담아 영원히 잊혀지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불멸의 ‘겸재 천년송’으로 재탄생해 놓았다. 그런 악조건의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푸른 소나무는 끈질김과 굳센 의지를 말해주었다. 하늘 높이 우뚝 솟은 바위산은 무한한 가능성을 말해주고 계곡을 타고 흐르는 맑은 물은 동해에 발을 담그고 영원히 마르지 않는 꿈을 꾸고 있다. 붓끝은 하나의 망설임도 없이 흐르는 물처럼 때로는 휘몰아치는 바람처럼 거침없었다. 그렇게 하여 그림 속 소나무의 실제 위치와 형태 등 생태를 상상해 가슴에 품었다. 현장에 도착했다. 학소대 기암절벽과 바위암 선일대, 물보라를 일으키는 연산폭포 등 한 폭의 산수화로 펼쳐 놓은 풍경이었다. 내연산의 풍광을 보며 300년 전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여기서 시작됐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현장의 복잡함 자연의 풍경을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움과 힘찬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다순함은 궁극의 세련됨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단순함은 가장 복잡한 과정을 통과한 마지막 결정체인 다이아몬드와 같기에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내연산의 절벽과 낙하하는 물줄기, 주변의 수목이 조화를 이루며, 단순하면서도 장엄한 분위기를 담았다. 자연 속에 담긴 유교적 이상과 조화로운 인간 정신을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겸재의 그림은 내연산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게 해주었다. 그뿐만 아니다. 모르고 무심하게 지나칠법한 높은 암벽 바위를 붙들고 살아가는 끈질긴 소나무의 생명력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노송을 보고도 그곳을 찾아가는 데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절벽의 바위 위에 있는지라 접근할 수 없었다. 이삼우 노거수회 회장님과 통화를 하고 스케치한 그림을 카카오톡으로 송부받아 겨우 접근 할 수 있는 바위 틈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천년송 가까이 갔을 때도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로서는 더 이상 접근할 수 없어 멀찌감치서 사진을 촬영하고 그 생명의 끈질김을 감상하고 겨우 엎드려 팔을 뻗쳐 손으로 악수하고 심호흡했다. 절벽 바위 위에는 다섯 그루의 소나무가 살아가고 있었다. 나이를 짐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저 천년송 오 형제라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덩치가 큰 소나무는 그래도 약간의 흙냄새를 맡을 수 있지만, 나머지는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아마 납작하고 가느다란 긴 뿌리가 멀리 계곡으로 발을 뻗고 있지 않을까? 그저 신비할 따름이다. 겸재의 붓끝에서 피어난 그림 속 노송을 눈으로 직접 마주하니, 그의 마음에 스며들었을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늘을 향해 구불구불 뻗어나간 가지는 마치 시간을 초월한 손짓처럼 보였다. 천년의 세월을 견디며 이 자리를 지켜온 노송은 단순한 나무 그 이상이었다. 그 안에는 자연의 고고한 품격과 생명력, 그리고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노송 아래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 나무를 타고 흐르는 시간의 숨결, 바위 속 깊이 자리 잡은 뿌리가 전해주는 묵직한 에너지가 온몸을 감쌌다. 그의 붓끝이 그린 단순한 풍경은 자연과 인간의 공존, 그리고 시간이 쌓아 올린 경외의 기록이었다. 이 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려는 식물학자이며 향토 사학자이시고 노거수회를 창립한 이삼우 기청산식물원 원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 또한 이 나무가 단지 한 그루의 나무를 넘어 자연유산임과 동시에 우리 삶에 깊이 스며든 문화유산으로 남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나는 겸재의 그림 속에서 이 폭포와 노송이 어우러진 장면을 떠올렸다. 그가 붓끝으로 표현하려 했던 것은 단지 자연의 형태가 아니라, 자연을 대하는 그의 철학과 마음이었음을 깨달았다. 노송과 폭포는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초월한 자연의 위대함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스승이다. 이러한 자연유산을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이야말로 우리에게 자연의 진정한 가치를 일깨운다. 만약 이 노송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다면,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나무를 보호하는 것을 넘어, 자연과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일이 될 것이다. 겸양의 미덕으로 평생을 살아온 겸재 정선의 삶의 철학과 도덕을 본받을 수 있을 것이다. 겸재 정선의 붓끝에서 태어난 천년 노송과 폭포는 여전히 우리 곁에서 숨 쉬고 있다. 겸재 정선(1676~1759)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가다.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畫)를 창시했다. 1733년 영조 때 청하 현감을 지냈다. 부채 그림인 ‘고사의송관란도(高士倚松觀瀾圖)’와 ‘청하 내연산폭포도’에 등장하는 소나무와 아주 흡사한 소나무가 현재도 내연산 폭포 벼랑 위에서 자라고 있다. 그림 속의 소나무를 현재 벼랑 위의 소나무로 특정하고 ‘겸재송’이라 최초로 이름한 것은 포항의 이삼우(李森友) 기청산식물원 원장이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한국의 자연과 전통미를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계상정거도(천원권 지폐에 실린 그림), 인왕제색도, 금강전도, 월송정, 망양정 등 많은 작품이 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1-01

백성의 힘으로 이룬 치산치수 ‘신의 한 수’가 되다

다사다난했던 갑진년 힘과 권력으로 상징되는 용의 해는 저물어간다. 두 진영으로 양분된 국론분열이 더욱 가슴을 아린다. 마지막 달랑 한 장 남은 달력을 보면서 안동 하회마을 출신 류성룡 선생이 생각나 만송정 솔숲으로 향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의 침략을 예측하고 훈련도감을 설치했다. 그러나 그의 외침은 허공의 메아리가 되고 결국 일본의 침략으로 국토는 유린당했다. 그러고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하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자는 징비록을 남겼다. 그의 형인 류운룡 선생은 매년 강물 범람으로 거듭되는 마을의 침수 피해를 예방하고자 주민들과 함께 마을 북쪽 강변에 1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홍수로부터 보호했다. 오늘날 만송정이라 부르는 솔숲이다. 솔숲 속을 거닐면서 류성룡 선생은 10만 양병설을 생각하고 징비록을 저술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만송정 솔숲은 추운 겨울임에도 충절의 상징, 푸르름을 띤 채 곧고 의연하게 서 있었다. 낙동강이 굽이굽이 흐르는 하회마을, 그 곡선의 중심에서 만송정 솔밭은 마을과 자연을 하나로 엮는 생명줄이다. 만송정 솔숲은 자연의 위대함과 인간의 손길이 조화를 이뤄낸 상징이며, 하회마을 주민들이 세상과 자연에 건넨 가장 진중한 대답이다. 숲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짙어지고, 그 안에 깃든 사연은 더욱 깊어진다. 하회마을은 낙동강이 마을을 휘감아 돌며 만든 유려한 지형으로 유명하다. 낙동강의 물길은 부드럽게 마을을 품었고, 마을 사람들은 이 품속에서 삶을 일구었다. 그러나 낙동강은 언제나 온화한 품성만을 보여주진 않았다. 장마철이면 강물이 넘쳐흐르고, 마을의 들판과 집들은 물에 잠기기 일쑤였다. 주민들은 낙동강의 은혜와 위협을 동시에 느끼며 강과 공존할 방법을 찾았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만송정(萬松亭) 솔숲이다. 겸암(謙巖) 류운룡(柳雲龍)은 풍수지리적으로 마을 맞은편의 북쪽 64m 높이의 절벽, 부용대의 기운이 세고 이곳이 허하여 이를 보완하기 위해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솔밭에 만송정이 세워져 있었으나 대홍수 때 물이 넘쳐 유실되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이름만 남아 있다. 치산치수(治山治水) 사업은 보통 나라가 맡아 하는 일이지만, 마을 주민이 힘을 합쳐 일궈 낸 미담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여름에는 수해를 막고 마을 사람들의 휴식 공간을 제공하며 겨울에는 찬 북서풍을 막아주는 미세 기후를 조절하는 역할도 한다. 솔숲은 단순히 재해를 예방하는 것을 넘어, 기후변화 대응과 지속 가능한 발전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해 오고 있다. 강변 숲 조성은 산림으로 하천을 관리하였으니, 치산치수를 동시에 한 것으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신의 한 수가 아닐까 싶다. 숲의 소나무 뿌리는 강가의 흙을 단단히 잡아주고, 울창한 숲은 바람과 물길을 막아주는 자연의 방벽이 되었다. 만송정은 처음부터 자연의 일부였지만, 주민의 지혜와 손길로 그 의미를 더했다. 주민들이 하나둘 정성스럽게 심은 소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었고, 숲은 세월이 흐르면서 하회마을의 상징이 되었다. 만송정의 소나무 숲은 생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숲은 낙동강의 흐름과 조화를 이루며 하회마을의 지속 가능한 환경을 유지하는데 기여했다. 만송정은 단순히 강변의 숲이 아니다. 하회마을 주민들의 삶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주민들은 강물이 들이닥칠 때 숲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만송정은 물질적 혜택을 넘어선 정신적 안식처로도 작용했다. 소나무 숲의 고요함과 위엄은 하회마을 주민들에게 자연과 삶에 대한 깨달음을 주는 스승과 같았다. 주민들은 만송정 숲을 거닐며 자연 속에서 학문을 논하고,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겼다. 소나무의 굳건함과 늘 푸른 자태는 그들에게 자연의 이치를 깨닫게 하고, 스스로 되돌아보게 하는 매개체였다. 만송정은 하회마을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산책로와 휴식 공간을 제공하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하회마을의 자연유산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만송정은 하회마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자연적 배경이며, 조선시대의 자연관과 조화로운 삶의 방식을 체험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강 건너편 부용대에 서서 솔숲을 내려다보면, 낙동강이 부드럽게 휘돌아 흐르는 곡선과 함께 만송정의 짙은 녹음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용대는 이름 그대로 연꽃이 피어난 듯한 절경을 자랑하지만, 그 풍경의 완성은 만송정이 있어야 가능하다. 숲은 단순히 나무의 집합이 아니라 마을의 숨결을 담고 있는 듯하다. 소나무 하나하나가 뿜어내는 푸르른 기운이 낙동강 물길을 따라 마을 곳곳으로 스며드는 느낌이다. 숲을 가꾼 주민들의 손길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하회마을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소나무 한 그루에 깃든 정성과 지혜, 그리고 자연을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만송정은 지금도 이렇게 당당히 서 있을 수 있다. 부용대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하회마을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자연의 조화가 만들어낸 위대한 작품이다. 오늘날 하회마을을 방문하는 이들은 만송정 솔숲을 들어서기 전에 낙동강 둑 위에 조성된 느티나무와 벚나무의 터널 길을 거닐게 될 것이다. 봄에는 흩날리는 꽃비로 걷는 즐거움을 더해 줄 것이고 여름은 풍성한 그늘로 흐르는 땀을 씻어 줄 것이다. 나무 아래 거닐면서 자연의 위대함과 인간의 지혜가 만난 순간을 느낀다. 숲은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만송정은 인간의 손길로 조성되었지만,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 속에 녹아들어 완성된 공간이다. 만송정과 낙동강, 그리고 부용대가 어우러진 풍경은 하회마을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낙동강이 만든 곡선은 마치 자연이 그려낸 걸작의 예술 작품처럼 보인다. 강변에 펼쳐진 만송정은 자연의 일부로서 그 작품의 색을 더하고, 부용대는 풍경을 한눈에 담는 액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하회마을과 만송정, 그리고 낙동강과 부용대가 어우러진 풍경은 단순히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앞으로도 우리가 지켜야 할 공존의 가치와 방향성을 제시한다. 솔숲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솔숲을 돌아 흘러가는 강물처럼 어려운 정치 난국이 하루빨리 지나가기를 기원하면서 푸른 만송정 솔숲의 솔향을 마음껏 마시면서 어깨를 편다. 겸암 류운룡(柳雲龍)과 만송정 솔숲 류운룡은 조선 중기(1539~1601)의 학자이자 정치가다.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계승했으며 성리학 발전에 기여했다. 만송정 솔숲도 조성했다. 동생 류성룡(1542~1607)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보좌하며 나라를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고 후대에 교훈을 남기기 위해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으로 ‘징비록’을 집필했다. ‘겸암’에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세상의 이치를 따르고자 한 그의 철학이 담겨 있다. 만송정과 겸암정자는 류운룡이 자연 속에서 학문을 탐구하고 철학적 사색을 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장소다. 겸암정자는 부용대 절벽 위에 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2-25

배꼽인사로 맞이하는 풍채 좋은 거인을 만나다

산자수명한 청송에 처음 부임했을 때 일이다. 우연한 기회에 ‘할아버지가 손자를 업고 있는 형상의 소나무 노거수’를 만났다. 폐교된 초등학교 교실 앞 운동장에 홀로 외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첩첩산중 마을이라 모두 도시로 떠나고 학생 수가 줄어 분교가 되더니 끝내 그 이름마저 사라졌다. 폐교된 학교를 리모델링하여 ‘클라이밍 등 산악 스포츠 아카데미’를 운영하면 어떨까, 활용 방안을 찾기 위하여 현장을 방문했을 때 텅 빈 교실 구석에는 거미줄이 운동장에는 흩날리는 흙먼지만이 난무했다. 학생과 선생님이 없으니 귀곡산장 같아 을씨년스러움이 살을 파고들어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소나무가 이를 잠재우고 노구의 몸으로 방문객에게 정중히 배꼽인사로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많은 소나무를 보아 왔지만, 작은 키에도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그의 품에 안길 수 없었다. 키는 난쟁이 임에도 앉은 풍채는 거인의 모습이었다. 그의 모습에서 삶이 순탄하지만은 않음을, 우여곡절을 겪었음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기암괴석이나 높은 산의 바위 틈바구니 등 악조건에 살아가는 노송이라면 몰라도 다른 나무와 경쟁도 없는 넓은 학교 운동장에서 살아가는 나무는 이런 불구의 모습일 수가 없었다. 소나무의 지난 삶이 어떠했는지 내 어린 추억과 맞물려 스멀스멀 떠올랐다. 짐작건대 선생님께 혼난 개구쟁이 어린 학생 응석을 받아주다 허리가 굽었나, 아니면 어린 학생 눈높이에서 이야기하다 그랬을까 하는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시골 산중이라 그 흔한 장난감이나 놀이시설이 없어 어린 학생들과 친구가 되어 놀아주며 목말 태워 주다 그랬을까. 아니면 개구쟁이의 짓궂은 장난에 이런 불구가 되었을까. 이제는 목마를 탈 아이들도 장난을 칠 개구쟁이도 없어 마냥 쓸쓸한 불구의 몸으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외로운 할아버지 신세가 되었다. 푸름은 옛날과 다름이 없으나 등 굽은 노송의 모습에서 짠한 안쓰러움이 앞섰다. 이 학교 출신 노인들에 의하면 학교 다닐 때 말을 탄다고 하면서 12명이나 나무에 올라탔다고 했다. 나이는 대략 200년으로 추측했다. 이런 내용도 모르는 조경업자가 1억 원이라는 비싼 값을 제시하면서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하였으나 마을 주민들의 거센 반대로 무산되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고향에서 편안하게 일생을 살면서 추억을 간직한 채 품위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한 주민들의 마음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소나무는 지난 시절에는 어린 학생들의 친구가 되어 단순한 나무 이상의 존재로, 학생들은 소나무의 끈기와 강인함을 보면서 살아가는 데 많은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폐교된 학교를 리모델링하여 ‘클라이밍 등 산악 스포츠 아카데미’를 운영하였을 때는 도전적인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끈기와 강인함의 메시지를 또 전달했을 것이다. 등반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성취감을 느끼는 과정에서 소나무를 보며 자연 속에서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특히 클라이밍과 같은 도전적인 스포츠와 결합했을 때 소나무의 강인함과 고요함은 선수들에게 균형 잡힌 심신 단련과 내면의 성찰을 위한 환경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제는 ‘클라이밍 등 산악 스포츠 아카데미’의 운영은 수명을 다하고 또 다른 ‘휴, 청송’이라는 회의와 숙박을 할 수 있는 자연 속 생활형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소나무는 이곳을 찾아 숙박하면서 자연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정신 수양의 매개체로서 역할을 다할 것이다. 소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해 피톤치드를 많이 방출하며 심리적 안정과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을 준다. 이렇게 소나무는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끈기와 강인함, 푸름의 용기로 상징되는 이미지는 찾아오는 많은 방문객에게 큰 울림의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까이에 천혜의 자연 얼음골에 인공폭포가 있다. 청송군 주왕산면 내룡리 1번지에 수부정(水浮亭) 식당이 마주하는 절벽에 자리를 잡고 있다. 깊은 계곡 주변에는 기암괴석과 바위 등 수목이 울창할 뿐만 아니라 특별한 기후의 현상도 나타난다. 한 여름철 섭씨 32도 이상만 되면 돌너덜에 얼음이 끼고 32도 이하가 되면 얼음이 녹는다. 이곳 탕건봉 바위 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62m의 인공폭포는 1998년 공직 생활 시절 특이하고 빼어난 자연경관에 매료되어 필자가 제안하여 인공폭포를 만들었다. 겨울에는 빙벽으로 발전하여 지금의 아이스 클라이밍 월드컵이 열리는 명소로 탈바꿈하였다. 이는 수부정 식당을 운영하면서 인공폭포를 관리하는 김필상씨의 실수 덕분이라고 한다. 그는 지역 토박이로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사람인데 겨울에 인공폭포에 물을 흐르게 하고는 저녁에 잠그는 것을 잊어 버렸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절벽에 떨어지는 폭포는 하얀 빙벽으로 변해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봄, 여름, 가을에는 인공폭포의 물보라가 겨울에는 하얀 빙벽의 아름다움이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는 청송군의 효자 관광지이다. 지금까지 국내는 물론 국제 아이스 클라이밍대회를 계속해서 개최 해오고 있다. 시대의 변화와 행사는 시간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우리의 기억에서도 가물가물 멀어져 가지만, 소나무 노거수는 이를 지켜보고 그 하나하나를 자신의 나이테에 매년 꼼꼼히 새겨놓는다. 노송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나무 몸통과 가지에 스며든 이끼는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품고 있다. 굽이굽이 자란 나무의 곡선은 자연의 우연이 만들어낸 예술작품 같고, 고요한 초록빛으로 둘러싸인 소나무 노거수는 평화와 안식을 선사한다. 자연과 하나 되어 숨 쉬는 소나무의 모습은 인간에게 겸손함과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하늘로 솟아오르지 않고 수평으로 뻗어나간 나무의 몸은 굽이진 삶의 역경을 견디며 꿋꿋이 살아온 존재를 연상시킨다. 붉게 빛나는 껍질은 태양을 머금은 듯 따스하고, 거친 표면 속에는 내면의 강인함이 느껴진다. 누구든 자연과 삶의 깊은 교감을 경험할 수 있을 듯하다. 햇살이 소나무 사이로 스며들며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평화롭고 조화로운 세상을 꿈꾸게 한다. 시간이 지나도 그 자리를 지키며 삶의 지혜를 전하는 소나무야말로 우리의 참 스승이 아닐까. 청송의 또 다른 매력 아이스클라이밍 ▲청송 전국 아이스클라이밍 선수권대회 페스티벌기간: 2025. 1. 4.(토) ~ 5.(일) ▲UIAA아이스클라이밍월드컵 기간: 2025. 1. 10.(금) ~ 1. 12.(일) 장소: 청송 얼음골 아이스클라이밍 월드컵 경기장 (경북 청송군 주왕산면 팔각산로 140(내룡리 22-4)경기종목 : 아이스클라이밍 난이도·속도 경기문의 : 청송군 문화경제과 체육진흥팀(054-870-6207) ▲휴 청송(회의와 숙박을 할 수 있는 자연 속 생활형)숙박시설: 2인실(10개), 가족실(2개), 단체실(1개)회의실: 1실(45인~50인 컴퓨터, 음향 및 프로젝트 사용 가능)시설: 족구장, 텐트 야영장, 어린이 놀이기구, 샤워실, 화장실, 세탁실 (경북 청송군 주왕산면 팔각산로 11-4 문의: 054-873-8991)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2-18

“한 그루 잘 키우면 벤츠도 사”산주들 설득해 만든 명품숲

만추(晩秋)는 늦은 가을이라는 계절적인 의미를 넘어, 늦가을의 고즈넉한 아름다움, 쓸쓸함 그리고 지나간 시간의 여운 같은 추억이 담긴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우리의 가슴을 물들게 한다. ‘100대 명품 숲’의 하나인 울주 소호리 산192 한독 참나무숲을 만추에 ‘숲과 자연’이라는 공부 모임 회원들과 함께 탐방에 나셨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레는데 만산홍엽의 아름다운 산자락을 타고 곡예 하듯이 고갯길과 꼬부랑길을 따라 차로 오르내리면서 드라이브하는 것은 즐거운 미지의 오지 탐험 같다. 누군가는 산 고개 넘어 무엇이 있을까 궁금하여 잿길만 찾아다니는 마니아도 있다고 한다.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만추의 산은 단풍으로 곱게 물들고 반면에 도로변 논밭의 오곡은 벌써 농부들이 갈무리하여 덩그렇게 속을 다 내보여 감흥과 쓸쓸함이 교차했다. 도착한 곳은 소호리 산192 한독 참나무 숲을 조성한 김종관 박사님 댁이었다. 마을로부터 좀 떨어진 외딴 산자락 끄트머리에 있는 동향의 아담한 주택이었다. 그는 고려대학교 임학과를 졸업하고 사유림 경영 사업에 뛰어들어 오늘날의 소호리 참나무숲을 탄생시킨 장본인이다. 1974년 시작된 한독 산림 협력사업으로 독일의 임업 기술자들과 함께 오지 중의 오지인 이곳 깡촌 소호리 마을 주민들을 설득하여 ‘대한민국 100대 명품 숲’으로 올려놓았다. 이후에도 베트남, 몽골 등 외국 산림 녹화사업에 한평생을 헌신했다. 그의 파란만장한 산림녹화, 사유림 경영 사업 이야기는 ‘소호리 산192’라는 소설로 탄생했다. 언젠가 또 한 편의 인생과 숲이라는 분야의 다큐멘터리로 그의 드라마틱한 삶을 조명할지 모를 일이다. 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임에도 이곳에 다시 돌아와 주민들과 함께 산림 경영으로 잘 사는 마을을 만들고자 주름진 이마에 맺힌 부부의 땀방울은 영롱한 이슬방울처럼 아름답게 느껴졌다. 김 박사님의 안내로 ‘소호리 산192 한독 참나무숲’으로 갔다. 그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아 지금은 100대 명품 숲으로 선정되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50년이 지난 지금 참나무는 평균 키가 20m가 넘으며 가슴높이 둘레가 80cm나 된다면서 그는 지난 일들을 전쟁 승리 장군의 무용담처럼 거침없이 그리고 쉼 없이 설명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민둥산이 된 산을 지속 가능한 산림 경영을 위해 “200년 된 참나무 한 그루를 베어 팔면 벤츠 승용차 한 대를 살 수 있다”라고 하면서 산주들을 설득했다고 당시의 어려움을 털어 놓았다. 설명 들으면서 울울창창한 참나무 숲속으로 들어갔다. 4800㏊ 산림 대부분이 사유림으로 많은 수의 산주가 동의해야 추진이 가능한 사업이라는 것까지만 듣고 더는 설명을 듣지 못했다. 왜냐면 수림의 비탈길을 한 줄로 이어져 올랐기 때문에 맨 꽁지에 붙어 오르는 나는 그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이제부터 나 홀로 시간이다. 비슷한 크기의 참나무가 미끈하고 큰 키의 잘생긴 자신의 몸매를 자랑이라도 하듯이 주변을 둘러쌌다. 다른 산의 참나무림이랄까 숲과는 그 모습이 달랐다. 나무 목재로 10층의 건물도 짓는다고 하니 경제성은 충분할 테고, 간벌하고 또 그곳에 어린나무를 심어 키우면 앞으로 계속해서 베고, 심고를 반복할 수 있어 산에서도 돈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벨 때는 돈이 생기고 녹색 숲일 때는 맑은 공기와 같은 공익적 가치와 그곳에서 힐링을 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사업이 있을까 싶다. 참나무는 소나무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나무이다. 이름도 나무 중 가장 재질이 좋고 진짜 나무란 의미의 ‘참’이다. 상수리부터 굴참, 떡갈, 신갈, 갈참, 졸참나무까지 6종을 보통 ‘참나무’라고 부른다. 활엽수인 참나무 아래에 그늘에도 잘 자라는 전나무나 잣나무 같은 침엽수가 조화롭게 조성된 숲은 울주 소호리 참나무 숲이 유일할 것 같다. 숲속에는 수령이 40~45년 가까이 되는 참나무들이 전나무, 잣나무와 함께 자라고 있었다. 이는 곧게 자라는 침엽수들 덕분에 참나무는 경쟁하여 자기도 곧고 굵게 자랐다. 나무와 나무 사이 공간이 좁아지니 참나무는 옆으로 가지를 뻗지 않고 곧게 잘 자랐고 결국 숲은 경제성 있는 보기 좋은 울창한 숲으로 변해 있었다. 참나무를 간벌하면 아래 전나무가 후계목이 되고 전나무를 간벌하고 나면 또 잣나무가 후계목이 될 수 있도록 조림되어 있었다. 나무 아래 땅 위에는 나뭇잎으로 빈틈없이 깔려있어 땅속에 살아가는 미생물과 작은 동물들은 겨울나는데 아무런 걱정도 없겠다 싶다. 나무와 이별한 낙엽은 이렇게 또 희생정신으로 이불이 되고 먹이가 되는 것을 볼 때면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이 든다. 낙엽 위에 떨어진 도토리는 흙을 만날 수 없어 뿌리를 내릴 수 없겠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러나 산까치나 다람쥐 등이 땅속에 파묻어 놓고 때로는 잊어버려 뿌리를 내리고 어린나무로 자란다고 하니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낙엽이 땅을 덮는다고 하지만, 바람이 이를 밀어내고 짐승이 뒤집혀 놓아 도토리는 흙과 교우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게 마련이다. 마침, 도토리 한 알이 몸속의 기운을 내밀고 새싹으로 변하여 줄기가 아닌 뿌리로 변하여 땅속으로 스며들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대단한 힘이다. 참으로 괴이한 현상이다. 어떻게 부드럽고 연약한 새싹이 거친 땅을 파고들까. 보고 또 보아도 신기한 생명의 힘을 느꼈다. 나무는 자신을 보호한 녹색의 잎을 가을이 되면 미련 없이 또 어김없이 원래의 곳으로 보내드린다. 뿌리에서 빨아올린 물을 나뭇잎에 불어넣어 녹색의 옷으로 자신을 보호하지만, 가을이라는 계절이 올 때면 물의 공급을 멈추고 나뭇잎은 원래의 모습인 울긋불긋한 단풍의 모습으로 변하고 붙잡아 주던 물의 손길이 끊어지면 원래의 곳으로 돌아간다. 이별이 아닌 또 다른 모습으로 또 다른 일을 시작한다. 그렇게 나무의 생명은 끝이 아니라 변하고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의 순환이 아닐까 싶다. 경사진 숲의 비탈길은 낙엽으로 인하여 미끄러웠다. 그 미끄러움이 오히려 종아리 근육을 키우는 데는 도움이 된다니 이것 또한 불평할 일이 아니다 싶다. 드디어 비탈길은 끝나고 넓고 평탄한 임도가 나타났다. 주변의 산 능선, 골짜기 등 먼 곳을 조망할 수 있어 좋았다. 맞은편 산에는 일본잎갈나무의 단풍이 붉게 물들어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했다. 여름 같았으면 볼 수 없는 경관을 만추에는 볼 수 있으니 이 또한 가을 산행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언제까지 임도를 다 돌아다니며 걸을 수는 없으니, 공부 모임의 지도교수이며 김종관 박사의 대학 동기이기도 한 박용구 교수님께서 여기서 기념 촬영을 하고 돌아가자고 제안했다. 맞은편 동쪽 백운산과 남서쪽 고헌산, 북쪽 문복산 자락의 물송골봉이 병풍처럼 해발 500m 이상의 고지대인 소호리 마을을 둘러싸고 있었다. 국토 면적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산림행정의 수장이신 임상섭 산림청장은 얼마 전 이곳 소호리 참나무숲을 찾아 “대한민국 100대 명품 숲을 지역경제 활성화로 이어 미래세대를 위한 자원보존과 산림의 사회적 기능을 유지해 나가겠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이제 산림을 보존으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사회적 기능과 소득으로 이어지도록 산림행정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만추의 계절에 만난 ‘소호리 한독 참나무 숲’의 탐방은 우리 산림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흐뭇했다. 대한민국 100대 명품 숲은… 국토녹화 50주년을 맞아 전국의 집 가까운 숲 가운데 산림청이 우리나라의 생태적, 역사적, 문화적, 경관적 가치를 지닌 숲을 선정해 발표한 것이다. 생태적 가치(희귀 식물과 다양한 생물이 서식하는 건강한 숲)를 지닌 숲, 역사·문화적 가치(오래된 숲, 전통적인 이야기가 깃든 숲)를 가진 숲, 휴양·경관적 가치(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힐링 공간으로 활용이 가능한 숲)를 간직한 숲을 지정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2-11

선비의 기개 닮은 거대한 품엔 풍류와 배움 함께 숨 쉬어

영귀봉(靈龜峰)과 서원(書院)을 감돌고 흐르는 죽계천 맑은 물에 은행나무와 솔숲이 목욕재계한다. 솔잎에 매달린 이슬방울은 죽계천 윤슬의 반짝임과 솔숲으로 스며든 아침 햇살로 불을 밝힌 듯 유난히도 반짝인다. 유생들과 함께 둥그렇게 성생단(省牲壇)을 둘러싸고 있다. 뭔가 성스러운 의식이 시작되는 모양이다. 살이 통통 오른 소 한 마리가 멀뚱멀뚱한 큰 눈으로 콧김을 내뿜고 있다. 서원의 관리가 향사 의식의 순서를 적은 홀기(笏記)에 따라 제향 제물을 올려 두고 흠집 여부를 살펴 보고 있는 중이다. 성생의(省牲儀) 또는 충돌례(充腯禮) 등으로 불리며 제물을 검사하고 품평하는 생간품(牲看品)을 하고 있다. 서쪽에 선 축관이 준비한 제물이 적합한지를 ‘돌(腯)’하고 물으니, 헌관이 좋다고 판단하여 ‘충(充)’하니 의식은 끝이 나고 제물을 준비한다. 이곳 순흥 출신의 고려 시대 대학자 안향의 학문 정신을 기리는 행사 의식 중 제물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솔숲 속 소수서원 지도문 앞 성생단 양옆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처음부터 오늘날까지 향사 준비 과정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축관과 헌관은 제물로 사용 함에 새끼를 밴 암소와 병들거나 약한 소는 제외하고, 참여한 제관들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양이 될 수 있도록 그 기준을 삼으라고 암시했을지도 모른다. 성인을 섬기고 그 정신을 이어받는 향사 일에 제관이나 유생들은 힘들다거나 불평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제물은 결국 알게 모르게 참여한 사람들의 배를 채워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향사나 제사에 참여도 저조하고 그로 인하여 힘들어하며 불평하니 옛날과는 희비가 엇갈린다. 안향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이며 동방 신 유교의 비조(鼻祖)라고 한다.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周世鵬)이 이곳에 사묘를 세워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백운동 서원을 창건했다. 이를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다. 한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서원은 홍역을 치렀지만, 소수서원은 역사적 중요성과 상징성이 높았기 때문에 완전히 폐지되지 않고 있다가 그 후 다시 복원하여 지금까지 잘 보존하여 유지되어 오고 있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원래 이곳에는 통일신라시대 숙수사(宿水寺)라는 절이 있었다. 절의 상징 조형물인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무슨 사유인지 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소수서원이 들어섰다. 그리고 주변에는 울창한 숲을 조성하고 서원을 출입하는 지도문 양옆에 은행나무 암그루와 수그루 두 그루를 심어 놓았다. 소나무는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항상 푸름을 간직하는 것이 선비의 기개와 닮았기 때문에 학자수(學者樹)라 불렀다. 그리고 우람하고 하늘 높이 치솟은 은행나무는 할아버지와 손자 간의 세대를 잇고 인내와 기다림을 상징하는 나무로 공손수(公孫樹)라 불렀다. 이러한 상징적인 자연물을 늘 가까이 하면서 잊지 말라고 하는 숨은 뜻이 담겨있지 않을까 싶다. 자연에서 휴식하고 수양하는 일은 조선 시대 성리학을 배우는 하나의 수업 과정이기도 하다. 솔숲은 낙락장송(落落長松)이라 불리는 건장한 소나무로 울울창창하다. 숲은 서원의 경관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기록에 따르면 선조 1586년에 평창의 유생 이충언이 소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또한 효종 1654년에 영귀봉 아래에서 남쪽 나래에 이르기까지 소나무 1000여 그루를 심었는데 산 것이 겨우 500여 그루였다고 한다. 그 후 소를 방목하거나 화재가 나지 않도록 하고 소나무를 더 심어 지금의 숲으로 무성하게 했다고 한다. 서원을 짓고 주변에 나무를 심어 숲속 서원으로 만들어 놓았다. 조상의 나무사랑, 숲 사랑, 자연사랑이 돋보이는 사례로 오늘날까지 우리는 아늑하고 아름다운 풍광에 심신을 치유받는다. 푸른 하늘로 힘차게 솟아있는 솔숲의 은행나무 노거수 두 그루는 나이 500살 동갑내기이다. 키 21m, 가슴둘레 4m의 수나무는 소나무에 둘러싸여 있다. 키 25m, 가슴둘레 5m의 암나무는 죽계천 언덕 위에 있다. 수피가 벗겨져서 그런지 밑둥치에서 많은 줄기가 뻗어 올랐다. 서로 마주 보며 건강하게 살아가는 부부 은행나무이다. 오늘따라 노란 옷으로 갈아입고 노란 꽃잎을 방문객의 머리 위에 뿌리고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솔숲의 풍광이다.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된 소수서원의 이름에 걸맞게 은행나무도 천연기념물로 품격을 올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소수서원과 소수박물관에는 국보와 보물, 안향과 주세붕 초상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문화재를 더욱 품위 있게 받쳐주는 것은 서원을 감싸고 흐르는 죽계천 맑은 물과 푸른 솔숲, 거대한 암수 두 그루의 은행나무 노거수가 아닐까 싶다. 이들 삼박자가 없다면 소수서원 역시 덩그런 벌판 위에 세워진 하나의 건물에 불과할 것이다. 특히 소수서원에 영혼을 불어넣고 활기를 띠게 하는 것은 살아 숨 쉬는 자연물인 솔숲과 은행나무이다. 죽계천 주변에는 솔숲과 함께 은행나무를 중심으로 각종 풍류를 즐기며 경각심을 고취하는 시설물과 글귀가 있다. 푸른 솔숲에 노랗게 물든 단풍잎의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맑은 죽계천에 비친 노란 단풍 옷을 입은 은행나무는 또 어떠하고. 이런 환상적인 경관에 취하면서도 또 배울 것은 배우는 삶 속에 풍류와 배움이 함께하는 길을 걷도록 해 두었다. 주세붕(周世鵬)이 경(敬)이라는 글자를 바위에 새겨 놓은 경자암(敬字巖), 푸른 산의 기운과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취한대(翠寒臺),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인 경렴정(景濂亭) 등 죽계천을 끼고 있어 자연을 조망하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모임과 풍류, 심신을 수양하던 장소로 풍광이 수려한 곳에 위치하여 유생들은 시연(詩宴)을 베풀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웠다. 이곳에서 우리 조상의 다양한 삶을 그려 보는 재미 또한 솔솔하다. 소수서원의 은행나무와 솔숲은 자연과 인간이 빚어낸 조화의 정수다. 500년 세월을 견딘 은행나무는 유생들의 굳건한 의지를 상징하고, 적송의 푸름은 선비의 절개를 닮았다. 죽계천 맑은 물과 경자암의 글귀는 학문의 숭고함과 성인의 공경을 일깨운다. 솔숲 사이를 걸으면 자연의 품에서 선비의 기개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은행나무의 거대한 품은 후학을 품는 서원의 정신과 같고, 소나무의 긴 가지는 하늘을 향해 쉼 없이 뻗어 나가는 학문을 닮았다. 이곳은 학문과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진 조선 유생들의 이상향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힐링의 장소로 탈바꿈하지 않았나 싶다.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이 곱게 물든 은행나무 단풍 아래 가을 정취에 넋을 잃고 있다. 소수서원과 소수박물관은… 소수서원은 지방에 설립한 사립 고등교육기관이다. 조선시대 서원 중에서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돈암서원, 병산서원, 무성서원, 도동서원의 9개 서원이 2019년 7월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서원’이란 이름으로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됐다. 소수박물관은 성리학을 주제로 선비문화를 조명한 유교 전문 박물관이다. 한국선비문화수련원은 정신문화를 계승함과 동시에 인성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현대에 ‘유(儒)와 한(韓)’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문화 재창달 교육원이고, 선비촌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터다. 선비세상은 대한민국 K-문화 테마파크다. 한옥, 한복, 한식, 한글, 한지, 한음악의 6개 한국문화를 기반으로 하여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인터랙티브 콘텐츠와 첨단매체를 통해 선비정신을 폭넓게 체험할 수 있는 복합 문화 체험공간으로 역할한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2-04

은행나무처럼 깊이 뿌리 내린 흔들리지 않는 충절과 신념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하겠다고 한 선량들이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그 외침은 산 메아리로 허공을 맴돌며 패거리 문화를 양산할 뿐 아무런 감동이 없다. 국가나 국민보다 개인적으로나 자신의 이익과 당리당략에 치우친 논리 개발로 궤변을 늘어놓고 우격다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삿대질하며 남 탓을 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그들은 알고 하는지 모르고 하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언론을 통해서 보도되는 국내외 정세를 보면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의견을 하나로 모우고 뭉치기는커녕 서로 자기주장만 되풀이하고 파벌과 분열의 씨앗을 키울 뿐이다. 이럴 때 충절과 신념의 표상이 된 포은 정몽주 선생이 더욱 그립다. 가을빛이 완연한 영천의 임고서원. 그 입구에 이르면 은은하게 노랗게 물든 잎사귀들이 반기는 500년 된 은행나무가 우뚝 서 있다. 은행나무는 키 30m, 가슴둘레 5.95m, 앉은자리 폭 22m에 달한다. 거인의 임고서원 은행나무는 그 자체로 오랜 세월과 굳건한 신념을 상징한다. 무수한 계절을 지나오며 바람과 비를 견뎌낸 그 자태는 흡사 살아 숨 쉬며 말 없는 교훈을 속삭이는 것만 같다. 나무 곁에 서면 은행나무의 물음이 들려온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이 물음은 이 고장 출신 포은 정몽주 선생을 아는가? 라는 물음으로 들린다. 임고서원은 포은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그는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끝까지 지킨 충신으로, 신념을 지키기 위해 생애를 걸었던 역사적 인물이다. 고려가 흔들리던 시절, 그는 굳은 신념으로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었다. 조선 건국이라는 새로운 물결 속에서도 그의 충성심은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은행나무로 변신하였다. 그의 길은 외롭고도 험난했으며, 마침내 그 길의 끝에서 그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의 충절은 후대에 빛나는 유산으로 남았다. 임고서원은 그가 남긴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세워진 공간이다. 그리고 이곳을 지켜온 은행나무는 그의 이야기를 말없이 이어가고 있다. 가을이 되면 은행나무는 황금빛으로 변하며 찬란한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그 아래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포은 선생의 이야기를 되새긴다. 충절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선생의 시조 단심가(丹心歌)를 읊조려 본다. 단심가에서 드러나는 신념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는 단순한 충성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에 대한 고백이자 헌신이다. 이에 포은 선생 자당이 지은 ‘백로가(白鷺歌)’를 보면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울세라/청강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는 시조에서 보듯이 포은의 충절은 어머니로부터 배운 가정교육의 의미를 일깨워 준다. 그 어머니 그 아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선생은 단지 왕조에 충성한 것이 아니다. 그가 지킨 것은 바로 자신의 신념이었다. 그는 외부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고려를 위해 자신을 내던졌다. 그에게 충절이란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었고, 그의 삶 그 자체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삶을 보며 진정한 충성이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된다. 은행나무처럼 깊이 뿌리를 내린 신념은 어떤 시대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 신념이 있기에 그의 이야기는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은행나무는 임진왜란 중에 부래산에 세워진 서원이 소실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불길 속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서원 앞을 지키고 있다. 마치 충절의 상징처럼 굳건히 서 있는 나무는 가을마다 황금빛으로 물들어 그 자태를 뽐낸다. 사람들은 은행나무 아래에서 삶의 의미를 되새기며, 나무가 지닌 고귀한 가치를 마음에 새긴다. 이곳을 지키며 자라는 은행나무는 말 그대로 ‘살아있는 역사’이다. 오랜 세월을 견디며 서 있는 나무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조상들이 물려준 정신의 상징이다. 그 정신은 바로 포은 정몽주 선생이 지킨 충절과 신념이다. 노랗게 물던 우람한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우리의 삶을 돌아본다.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를 곱씹어본다. 마치 뿌리 깊이 내린 은행나무처럼, 우리가 세상 속에서 뿌리내릴 수 있는 신념과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은행나무는 500년의 세월을 견디며 서 있지만, 그것은 누군가의 손길과 보호 덕분이었다. 공직에 있을 때 모셨던 이곳 출신 이남철 선배님은 여러 지역의 자치단체장을 역임하고 퇴직 후 포은 정몽주 선생의 숭모사업회장과 임고서원 충효문화수련원장을 역임했다. 임고서원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선생의 충효 정신을 늘 강조했다. 선생의 가르침과 함께 나무를 보호하며 그의 신념을 이어갔다. 충절과 신념이란 거창한 말이 아니라, 꾸준히 이어가야 하는 일상의 다짐임을 은행나무는 조용히 일러준다. 우리는 때로 흔들리기도 하고, 쉽게 포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은행나무와 서원 앞에서는 삶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충절은 단지 왕조에 대한 충성뿐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에 대한 충성이었다. 그가 은행나무처럼 뿌리 깊이 신념을 내렸기에 오늘날까지도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세우고, 그 가치를 위해 살겠다는 결심을 포은 선생을 대신하여 은행나무는 말없이 우리에게 전한다. 임고서원과 포은 정몽주 임고서원은 고려 말의 충신인 포은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조선 명종 1553년에 경상북도 영천시의 부래산에 처음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선조 1603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재건되었고, 여러 번 중건과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서원은 고종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폐지되었으나, 1965년에 복원되었다. 포은 정몽주 선생은 고려 충숙왕 1337년에 태어났으며, 일찍부터 학문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며 고려 말기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국정을 바로잡고 외교에 큰 공을 세웠다. 특히 명나라와의 외교를 원만히 하고, 내부적으로는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 등 고려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조선 개국 세력과의 갈등 속에서 1392년에 이방원에 의해 피살당하여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의 죽음은 고려의 마지막 충신으로 여겨져 후세에 큰 영향을 남겼다. 선생의 비문에는 그의 출생, 학문적 업적, 정치적 기여, 그리고 그가 고려 말기 혼란 속에서도 충절을 지킨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의 행적을 기리는 동시에 후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과 충절을 본받기를 기원하는 문장들이 기록되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1-27

깊이 깃든 전설과 함께 우리 이야기를 담은 은행나무

고향인 청도를 오고 갈 때면 길목에서 쉼터를 제공해 주고 반겨주는 고마운 분이 있다. 청도 대전리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서원리 자계서원 은행나무, 원리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삼총사이다. 서원리 은행나무는 자계서원에 배향되는 탁영 김일손 선생의 상징물이고 원리 은행나무는 사대천왕과 함께 천년 고찰 적천사의 호위 무사다. 대전리 은행나무 노거수는 내려오는 전설로 인하여 나무를 함부로 할 수 없는 신적인 존재로 각인되어 보호받으며 마을을 홍보하는 홍보대사이다. 원리의 은행나무와 마찬가지로 생태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나라의 보호를 받는 귀족계급의 나무이다. 삼총사로부터 쉼터를 제공받고 가르침과 교훈을 얻고 있으니 그곳 나무 밑은 나에게는 안락한 카페요, 나무는 인자하신 스승님이다. 삶에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달래 주며 힘과 용기를 준다. 그분들 품에 안겨 편안히 쉬기도 하고 늠름하고 우람한 모습을 닮으려고 노력한 지도 벌써 십수 년이 지났다. 요즘 차를 몰고 시골길을 달리면 주변은 만산홍엽으로 아름다움에 취해서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오늘도 아내와 함께 조상 묘사를 지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청도군 이서면 대전리 638번지 마을 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은행나무를 찾아 쉬었다 왔다. 주민들은 나무 방책에다 작은 돌로 주변을 경계 지우고 그에게 물리적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귀한 손님에게 주인이 제공한 푹신한 방석에 곧게 앉은 자세이었다. 정자를 설치하고 대리석으로 앉을 자리는 물론 주차장까지 조성하여 방문객의 편의를 돕고 있었다. 우람한 은행나무의 아름다운 단풍을 배경으로 오후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연인들이 기념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하늘 높이 솟은 나무의 우람한 모습과 노란 단풍으로 물들어 가는 아름다운 모습에 취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무가 되어갔다. 아직 노란 단풍이 물들어 가는 중이라 주말인 11월 23일 토요일 전후로 정점을 찍을 듯싶다. 산그림자가 어둠의 이불로 마을과 은행나무를 덥고 동산으로 달음질칠 때 마을을 빠져나왔다. 대전리 천연기념물 301호 은행나무는 키 30.4m, 가슴둘레 8.8m의 수나무이다. 밑둥치에서 처음 두 가지가 자라 하나로 붙고 나중에 또 새로운 가지가 자라 또 하나로 되어 지금은 모두 하나의 큰 줄기로 탄생했다. 이렇게 다수의 수간(樹幹) 다발로 왕성하게 성장하면서 웅장한 수형을 보여주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낙엽이 질 때 소리 없이 조용히 지면 이듬해에 풍년이 들고, 여러 차례 바람에 흩날려서 낙엽이 지면 흉년이 든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식물 개체의 생장 환경이 양호하면 일정 기간 내에 낙엽이 지며, 생장 환경이 불량하면 각각의 수간별로 낙엽이 지는 시기가 다르기 때문인데, 노거수의 건강성을 가늠하는 생활 속의 과학이다. 많은 사람이 노거수 나이가 얼마인지 묻는다. 아마 정확히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누군가 기념식수로 심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이면 몰라도 그렇지 않는다면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그럴 때면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 수백 년을 살아오고 있는 신령 같은 분의 나이를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얼버무려버린다. 물론 과학적으로 나이를 측정하는 방법은 있지만, 경비도 많이 들고 고령의 노거수 몸을 상처 내는 일은 좋은 방법도 아니고 또 해서도 안 될 일이다. 나이는 400년 정도 된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나라 은행나무 중 가장 오래된 1300년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전설에 따르면, 1300년 전 이곳을 지나가던 한 도사가 원래 이곳에 있던 우물의 물을 마시려다가 빠져 죽었으며, 그 후 우물에서 이 나무가 자라났다고 한다. 또 다른 비슷한 전설로, 이 마을을 지나가던 한 여인이 물을 마시려다가 빠져 죽었는데 주머니에 있던 은행의 싹이 터서 자랐다고 한다. 이 은행나무는 수나무지만 때로는 은행이 달리는 수도 있다고 전해 온다. 마을 당산나무로 취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전설이 아닌 실제 사건이었을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설정해 보았다. 재미 삼아 전설의 나이가 맞는지 조사자의 나이가 맞는지 궁금하여 나름대로 나무의 나이를 계산해 보았다. 가슴높이 둘레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1982년엔 8.5m이었고 2005년 조사에서 8.65m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23년 동안 15cm 굵어졌다. 이는 일 년에 평균 6.5mm씩 굵어진 셈이다. 이러한 가슴높이 둘레의 증가를 고려한 대전리 은행나무 노거수의 나이는 2005년에 1,330세가 된다. 이 수령은 전설로 전해지는 수령 1982년 당시 1308세이고, 2005년 1331세이다. 공교롭게도 거의 일치하고 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설의 이야기가 맞는지 조사자의 기록이 맞는지는 나무만이 알 것이다. 그러나 전설의 나이가 맞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로 등극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의흥 예씨(義興芮氏) 세거지인 이곳 청도 대전리는 ‘한밭’으로도 불리며, 골이 깊고 들이 넓어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경북 예천 부군수를 역임한 예경해 시인은 이곳 대전리 출신이다. 2019년 시집 ‘누고?’를 출간했다. 이 시집은 경상도 사투리를 활용하여 서민들의 삶과 정서를 생동감 있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표제작인 ‘누고?’는 성형수술 후 할아버지를 찾아간 손녀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 간의 소통과 정체성의 변화를 다루고 있다. 또한, 예경해 시인은 전통과 현대, 서정과 비밀, 사랑과 사투리, 고향과 도시, 선(禪)과 해학 사이의 역설적인 시학을 추구했다. 그는 이곳에 태어나서 살면서 천 년 묵은 은행나무에서 영감을 받아 서정시를 창작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무는 우리의 삶에 문학과 예술 등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지구상 다양한 인류 문화 가운데 노거수 사랑은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전통문화가 아닐까 싶다. 필자의 시 ‘은행나무’ 오랜 세월 뿌리내린 너아득한 세월을 넘어 깊이 깃든 전설과 함께우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구나.긴 세월을 품고 서서말없이 나를 반겨주는 너 바람에 실린 낙엽 소리에풍년을 속삭이는 나무 고단한 몸 기댈 때마다넌 조용히 힘을 주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1-20

주렁주렁 은행 열매·땅과 맞닿은 가지들… 금빛 물들다

청도는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화랑도 세속오계를 창시한 원광법사가 주지로 있은 고찰 호거산 운문사와 삼국유사를 집필한 일연 스님이 역사 자료를 수집한 비슬산 대견사가 있는 고장이다. 고구려는 평양, 백제는 부여, 신라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반도를 삼국이 삼분하여 적대하면서 서로 국경 침략 등 백성은 편안할 날이 없었다. 분열된 한민족을 하나로 만든 신라 삼국통일 군사 훈련 중심이 된 곳도 이곳이며, 우리의 역사를 오천 년으로 끌어올린 삼국유사의 역사 자료를 수집한 장소도 이곳이다. 화랑도는 삼국통일의 원동력이며 삼국유사는 우리 역사의 뿌리를 기술하였다. 이러한 유서 깊은 역사의 고장인 청도는 산자수명하고 인재 또한 많아 예나 지금이나 살기 좋은 고장이다. 역사적 인물로 탁영 김일손(1464~1498)은 조선 중기 사관으로 무오사화에 희생된 청도인이다. 그는 절효 김극일의 손자로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486년 성종 때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서원리에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짓고 학문에 열중했다. 김종직 문하에 들어가 김굉필, 정여창, 남효온 등과 교류하면서 다시 벼슬길에 나가 이조정랑을 지냈다. 언관(言官)에 재직하면서 훈구파의 불의와 부패를 공격하고 사림파의 중앙 정계 진출을 돕기도 했다. 춘추관에 근무할 때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어 1498년 반역죄로 34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조의제문은 항우가 초나라 회왕 의제를 죽이고 권력을 찬탈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초나라 의제를 조상하는 형식이었지만, 세조가 권력을 찬탈한 부당성을 풍자한 것이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복권되고 순조 때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그의 굽히지 않는 올곧은 성품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아마 젊은 시절에 운계정사에 심어 놓은 은행나무의 역할이 크지 않았나 싶다. 선생이 직접 심은 은행나무가 지금까지 우람하게 자라면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탁영(濯纓)이란 호는 맑은 물에 갓끈을 씻는다는 의미로 중국의 고대 서적인 초사(楚辭) 굴원의 글에 나오는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물이 맑을 때 갓끈을 씻고, 탁할 때 발을 씻겠다는 비유로 세상의 혼탁한 일에 연연하지 않고 고결하게 살아가려는 마음가짐의 표현이다. 비록 현실이 혼탁하더라도 자신의 고결함과 깨끗함을 유지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 손수 서원 내 은행나무를 심고 그를 닮고자 하지 않았을까 싶다. 자계서원이 있어 마을을 서원리라는 이름의 지명을 붙였고, 자계서원을 상징하는 것은 나이 500살을 훌쩍 넘긴 은행나무 노거수이다. 청도군청 김윤길 행정안전복지국장의 도움으로 굳게 닫힌 서원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은행나무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키 15m, 가슴 높이 둘레 4.4m 두 그루가 우람하게 자라고 있었다. 한 그루는 5가지 줄기가 하나로 뭉쳐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모두 암그루로 은행 열매가 나뭇가지에 너무 많이 열려서 가지가 땅에 맞닿아 있었다. 1983년 7월 2일 보호수로 지정되었지만, 나무의 수령이나 그 크기 등 역사 문화적 가치로 보아 천연기념물 반열에 올려놓아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몇 년 전 11월 5일 자계서원을 찾았을 때는 은행나무가 가을 하늘과 서원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오리의 발과 닮았다 하여 압각수(鴨脚樹)란 이름을 가진 은행나무의 노란 단풍잎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은행나무 아래에는 하늘에서 나풀나풀 춤추며 내려앉은 노란 압각수 잎으로 덮었다. 자계서원의 은행나무 노란 단풍잎의 절정을 볼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치 않다. 그해의 기후와 날씨에 따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청도의 진산인 아름다운 남산을 바라보면서 아담한 동산을 배경으로 앞에는 비슬산에서 발원한 청도천이 흐르고 있는 서원리는 유서 깊은 자계서원을 품고 또한 자계서원은 은행나무를 품고 평화롭게 가을을 물들이고 있다. 유교와 관련된 서원에서는 은행나무가 인문학적 다양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은행나무는 지구상에 하나뿐인 속과 과의 나무이다. 화석식물이라 할 만큼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살아온 나무이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1200년이 지났지만,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 서원에 다니는 유생들에게 은행나무는 지식과 학문의 지속성, 변치 않는 가치를 상징하면서 교훈을 주었을 것이다. 서원은 조선시대 교육의 중심으로 지속적인 학문을 추구하는 교육 공간이라는 점에서 은행나무는 이러한 교육의 가치관과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 은행나무는 천천히 자라며 장수하는 나무이다. 그러면서도 건강하고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학문의 길에 들어선 유생들에게 이와 같이 지혜와 인내, 꾸준한 끈기의 노력을 상기시킨다. 이는 선비 정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은행 열매는 약재로 쓰이며, 나무의 모습 또한 우람하면서도 단정하여 선비의 지조와 품격을 떠오르게 한다. 서원에서 수양하고 학문을 닦는 선비들은 이러한 은행나무의 상징성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확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서원의 은행나무는 단순히 조경의 일부가 아닌 유교적 가치와 관련된 상징적, 정신적 요소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유교적 사상에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마당에 은행나무는 이러한 사상을 잘 반영하는 나무이다. 자연에서 인간이 본받아야 할 원리를 찾는 데 의미를 두었고 은행나무의 모습과 생명력은 자연의 본질을 잘 드러낸다. 서원은 학문을 탐구할 뿐만 아니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추구하는 공간이기도 하므로, 은행나무는 그 상징적 의미를 강화한다. 서원 내의 은행나무는 학문적 가치, 정신적 수양,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는 조선시대 철학의 핵심을 상징하고 있다. 탁영 김일손 선생처럼 나 또한 그러한 삶을 살아가리 마음먹으면서 노란 은행잎처럼 내 마음도 곱게 물들어 간다. 자계서원은 처음에는 은행나무를 담장 안으로 품었지만, 지금은 은행나무가 자계서원을 품고 탁영 김일손 선생의 올곧은 성품을 대변하고 있다. 은행나무를 닮고자 손수 심은 선생의 나무 사랑은 나에게 진한 감동을 주었다. 청도 서원리 자계서원(紫溪書院)은…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는 1400년경 김극일(金克一)이 입향하여 정착한 김해김씨 집성촌이다. 선조 1578년에 사당의 중수와 함께 학사 곳간 등의 새로이 세워져 서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자계서원이 되었다. 김일손이 형벌을 당할 때 그의 고향에 있는 냇물이 별안간 붉게 물들어 사흘 동안 물 색깔이 되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며 그런 까닭에 붉은 시내라는 뜻의 자계(紫溪)라 불리게 되었다. 1615년에 절효 김극일, 삼족당 김대유를 병향하고, 현종 1661에는 나라의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받는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고종 1871에 흥선대원군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4년에 사림과 후손들에 의해 김용희(탁영 14세손)의 사재로 복원되었다. 1975년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었다. 솟을삼문인 유직문(惟直門), 서원에서의 여러 행사를 하거나 학생들이 모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던 곳인 영귀루(詠歸樓), 강당인 보인당(輔仁堂), 학생들이 공부하고 숙식하는 생활공간인 동재와 서재, 사당인 존덕사(尊德祠), 제사 준비를 하는 전사청(典祀廳) 등이 있다. 1482년 점필재 김종직이 지은 ‘절효김선생효문비명’과 대제학 조정이 지은 ‘효자승사랑김극일정려본김해’ 두 기의 비석이 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1-13

신라의 전설 깃든 840년 은행나무… 그 시간과 마주한 장대함

하늘로 치솟은 웅장한 은행나무의 모습에 놀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잠깐이었다. 먹구름이 몰려와 푸른 하늘을 가렸다. 은행 나뭇잎에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은행잎에 모여 큰 빗방울로 변해 머리 위에 떨어졌다. 천둥번개가 치면서 번갯불이 하늘을 가르고 벼락 치는 우레는 가슴을 조이게 했다. 숨돌릴 틈도 없이 빗방울은 채찍으로 변해 대지를 사정없이 때렸다. 거대하고 무성한 잎의 은행나무 아래에도 소낙비를 피할 수는 없었다. 갑자기 빗물은 도랑을 형성하고 산자락 경사진 개울로 쏟아져 내렸다. 신라 천 년 고찰 적천사로 뛰어들었다. 맞닥뜨린 것이 험상궂은 얼굴의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는 사대천왕이었다. 두려움에 간은 쪼그라들고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내 유년 시절에 청도 원리 적천사에 갔을 때 은행나무와 사대천왕을 처음 보았을 때 경험한 일이다. 화악산 적천사는 나의 고향 청도군 청도읍 소재지에서 밀양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내려가면 오른쪽에 원리 마을이 있다. 마을 고샅길을 따라 산 쪽 방향으로 올라가면 산자락에 자리 잡은 고찰이다. 고찰과 함께 원리 981번지에 나이 840살, 키 29m, 가슴둘레 9m, 앉은자리 폭이 30.8m 되는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두 그루의 서 있다. 신라 보조국사 지눌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심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은행나무는 웅장함에 경외감을 가지게 한다. 고향 가는 길에 청도 원리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노거수를 찾았다. 이곳 원리 마을 출신 대구광역시 교육청 부교육감과 대구예술대학 총장을 역임한 도정기 선배님은 늘 고향 적천사 은행나무 자랑을 나에게 늘어놓곤 했던 기억이 오늘따라 새롭게 떠오른다. 고찰로 가는 산 비탈진 오솔길은 유년 시절에는 걸어서 갔지만, 지금은 자동차로 숨 한 번 헐떡거림 없이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 노거수의 웅장한 몸집에 주렁주렁 달린 은행이 떨어져 나무 밑을 꽉 채워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잘못하여 은행을 밟기라도 한다면 신발에 그 고약한 냄새는 귀가할 때까지 따라다니며 괴롭히기 때문에 조심해서 발걸음을 옮기면서 접근했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바라보면서 가을의 정취를 만끽했다. 은행나무는 노란 옷으로 갈아입은 어머니 같은 존재로 다가왔다. 세월의 무게를 짊어진 채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나무는 인간에게 위안을 주고, 자연의 순환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을 가진 하나의 존재임을 알았다. 자연과 사람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깊은 감정을 나무 아래에서 느꼈다. 나무는 그 자체로 시간의 기록이었고, 수많은 세월 동안 이곳에서 불교 신앙을 지키며 사람들에게 몸과 마음의 쉼터를 제공했을 것이다. 나무 아래 서 있으면 마치 그 시간 속에 내가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가지에는 노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장대한 모습, 그 아름다움은 마치 세상의 모든 고요와 평안을 담고 있는 듯했다.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나무, 그 나무를 지켜온 사찰, 아니 사찰을 지켜온 은행나무, 그리고 사대천왕의 존재는 나에게 자연과 불교, 그리고 인간의 삶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가르쳐주었다. 사대천왕은 그들의 세상을 지키고, 악을 물리치며,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로서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했다. 그리고 은행나무는 그 모든 것을 묵묵히 바라보며 천년의 세월을 지켜왔다. 나는 이곳에서 자연과 신앙, 그리고 인간의 삶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경험을 했다. 은행나무는 그 자체로 생불(生佛)이라 할 수 있다. 부처가 인간 내면의 불안감을 진정시키고 평화를 주듯, 은행나무는 그 긴 세월 동안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자연의 지혜를 상징한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은 마치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마음에 평온을 가져다주고, 그 고요한 아름다움은 인간의 원초적인 두려움과 불안을 잠재운다. 인간은 종종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흔들리지만, 고요히 떨어지는 은행잎을 바라볼 때면 그 모든 걱정이 잠시나마 잊히고, 평온과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이렇듯 은행나무는 자연의 순리 속에서, 그리고 부처의 자비 속에서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선사하는 생명의 상징이다. 천년 사찰의 은행나무는 이렇게 나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생불과 같은 존재로 와 닿았다. 가을 햇살이 사찰을 비추고, 은행나무의 잎이 바람에 날리면서 내 앞에 펼쳐진 풍경은 마치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시간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이곳에 서 있으면, 마치 내가 그 시간 속에 포함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청명한 가을하늘이 저만큼 높이 솟아 있고 푸른 솔가지 위에 가을 햇살이 반짝인다. 사대천왕의 무서운 트라우마를 떨치고 붉게 물들어가는 가을 산사를 빠져나왔다. 빠져나온 내 빈자리에 누군가 또 다른 방문객이 자리를 차지하려고 오르고 있다. 은행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고요히 방문객을 맞이하고 떠나보내고 있다. 천년의 시간은 은행나무와 사찰을 지나, 나의 마음속에도 스며들었음을 적천사를 빠져나오면서 다시 한 번 느꼈다. 적천사 사대천왕은… ①동쪽의 국토를 지키는 지국천왕(持國天王): 눈알이 튀어나올 듯 부릅뜬 눈을 하고 있다. 치켜세운 눈썹과 드러난 이빨로 오른손에는 칼을 쥐고 왼발로 마귀의 등을 밟고 있다. 발밑에 깔린 마귀는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다. 단청의 화려한 색상으로 앉아 있는 키만 하더라도 4m는 족히 되었다. 선한 자에게 상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어 권선징악으로 인간을 고루 보살핀다고 한다. ②남방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검은 눈썹을 잔뜩 치켜세운 채 이를 악물고 부릅뜬 눈으로 아래를 보고 있다. 양손으로 비파를 들고 있으며 세 개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가진 마귀를 왼발로 배를 밟고 있다. 자신의 위덕을 증가하여 만물이 태어날 수 있는 덕을 베풀겠다는 서원을 한다. ③서쪽을 방어하는 광목천왕(廣目天王):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검은 눈썹을 잔뜩 치켜세운 채 입을 꾹 다물고 부릅뜬 눈은 앞을 직시하고 있다. 갑옷으로 무장하고 오른손은 용을 왼손에는 여의주를 쥐고는 왼발로 악귀의 배를 밟고 있다. 죄인에게 벌을 내려 매우 심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광목천왕의 결의에 찬 모습이 믿음직스럽게 느꼈다. ④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부릅뜬 눈으로 눈썹을 잔뜩 치켜세운 채 붉은 입술의 입을 벌리고 있다. 오른손은 삼차극(三叉戟)을 들고 있고, 왼손에는 손바닥 위에 보탑을 받들어 쥐고 왼발로 악귀의 배를 밟고 있다. 암흑계의 사물을 관리하며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고 하는 다문천왕은 다른 천왕과는 다르게 배와 발아래 이상하게 생긴 마귀가 있다. 사대천왕의 오른발 아래 악귀가 하나씩 꿇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사천왕은 고대 인도 종교에서 숭상했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고 수미산(須彌山)에 살면서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지키며 제석천(帝釋天)의 명을 받아 불법을 수호하며 팔부중을 거느리고 있다고 한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1-06

자작나무 숲 길 위에서 인생 여정의 교훈과 위안을 얻다

시골 전원생활이라는 것이 나름대로 정원을 가꾸는 등 일을 하려고 하면 끝이 없다. 정원의 일이라는 것이 그만 덮어 두면 또 그렇게 지나간다. 그러나 시골집은 사람의 손길이 가야 깨끗하다 할까, 사람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정겹다. 가만히 놓아두면 풀들이 마구 자라고 거미가 집을 짓는 등 자연성은 있어 보이되 특히, 가을이 되면 낙엽 등으로 뒤엉켜 을씨년스럽다. 주변이 아름다운 산이고 넓은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다면 사계절이 스스로 찾아올 텐데, 굳이 계절이 바뀐다고 힘들게 다른 곳을 찾아다니면서 계절의 변화를 만끽할 필요는 있겠는가 하면서 입버릇처럼 아내에게 말했다. 여태 아내가 원하는 곳을 차일피일 미루어 오늘날까지 왔다. 아내의 별호는 자작나무이다. 자작나무를 좋아하고 늘 그 숲을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우리 집 정원에도 자작나무 묘목 8그루를 심었으나 4그루는 죽고 겨우 반타작에 만족했다. 더 이상 미룬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싶어 오늘 아내와 함께 영양 자작나무 숲을 탐방하기로 했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지름길인 영덕군 창수면 삼계리와 울진군 온정면 조금리 경계를 이루는 낙동정맥의 칠보산 고갯길을 택하였다. 비가 오면 도로가 물길로 변하는 고갯길은 이곳저곳 파이고 훼손되어 그야말로 오지 탐험에 나선 일종의 어드벤쳐이었다. 오르고 내려가는 구불구불한 고갯길 바닥은 울퉁불퉁하여 아이들 놀이기구 디스코 팡팡을 연상했다. 아내는 자칫 허리를 다칠까 봐 자동차의 손잡이를 꼭 잡았다. 나는 한술 더 떠서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자작나무 숲을 보러 가는 길은 또 다른 체험과 이야깃거리를 선물했다. 그래서 여행은 목적지보다 목적지로 가는 과정이 때론 의미 있음을 깨달았다. 마침내 영양 죽파리에 도착하여 1시 30분 차를 타고 자작나무숲으로 향했다. 얼마 가지 못해 전기차가 고장이 났다. 좁은 편도 차선이라 차를 치우고 다른 차가 올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일행과 함께 오솔길 같은 계곡 따라 난 도로를 걸었다. 울창한 숲으로 우거진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은 그 자체의 풍광으로도 우리의 심신은 힐링 되었다. 계곡의 이곳저곳을 들추어 훔쳐보며 자연의 묘미와 신비감에 넋을 잃었다. 그런데 일반 상식을 벗어난 형태의 소나무를 보고 놀랐다. 완벽한 ㄴ자로 꺾여 자라고 있지 않은가. 인간 사회에서도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특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도 있고 보면 식물사회라고 해서 그러지 못하라는 법은 없지만, 어쨌든 우리의 이목을 끌기에 범상하고 귀한 소나무였다. 차가 고장나서 걸었던 것이 오히려 행운으로 이어졌다면서 웃으니 기분 또한 좋았다. 과정은 또 하나의 이야깃거리를 보태어 주었다. 목적지인 자작나무숲에 도착했다. “와!” 하는 감탄사가 나와 아내의 입에서 동시에 나왔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 웃었다. 아내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런 아내를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자작나무 수피는 종이처럼 하얗게 벗겨지고 얇아서 사랑하는 연인들끼리 사랑의 글귀를 쓰기도 하는 낭만적인 나무라며 나무 자랑을 늘어놓았다. 사람은 좋아하는 풍광이 있으면 사진으로 추억을 남겨놓고 싶은가 보다. 얼마 동안 나무 감상보다는 사진 찍기에 모두가 여념이 없었다. 모두 산책 코스를 택하여 아늑한 자작나무숲 품속에 안겼다. 아내는 얼마 가지 않아 이곳이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장소라며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나무를 바라보면서 가을 자연의 정취를 만끽하고 싶어 했다. 아내를 남겨두고 숲 전체를 관망하고 싶은 욕망에 혼자 오솔길을 따라 정상의 전망대로 향했다. 눈앞에 펼쳐진 오솔길은 흰색의 피부를 가진 날씬한 몸매의 여인이 줄지어 서서 반겨 주는 기분이었다. 경험해 보지 않고는 이 순간의 기쁨과 즐거움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혼자 두고 온 아내 생각에 빠른 걸음으로 오르다 보니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어 빗방울처럼 땅에 뚝뚝 떨어졌다. 큰 들숨과 날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전망대에 올라섰다. 자작나무숲은 계곡 품에 숨어들어 보이지 않고 산자락 경사면을 기어오르는 일부 숲이 구름 사이로 뚫고 나온 한 줄기 빛에 노랗게 물들어 가는 잎들이 물결치며 물비늘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푸른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흰 구름과 푸른 산들이 겹치면서 불룩하게 솟은 산마루, 하늘과 맞닿은 스카이라인이 눈앞에 펼쳐졌다. 풀벌레 소리, 새들의 소리 등 자연의 소리가 들렸다. 시원한 한 줄기 갈바람이 이마와 등줄기 땀을 식혔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은 떨어지고 있었다. 나무로부터 떠나감의 슬픈 이별이 아닌 나풀나풀 춤을 추며 님의 만남의 발걸음만 같았다. 아내는 자작나무숲 품속에 취하여 잠들고 나는 가을 하늘의 흰 구름과 푸른 산이 붉게 물들어가는 가을풍경에 취해 잠들었다. 함께 늙어가는 평생 반려자로서 서로 다름을 알았다. 오를 때는 발걸음 옮기는 데 몸이 집중했다면 내려갈 때는 쫓는 눈에 마음이 집중되었다. 오를 때는 보지 못한 것을 내려갈 때는 눈에 보였다. 숲길은 조명등을 비추는 것처럼 어둠과 밝음이 교차 되었다. 가을을 맞이하여 오솔길에는 노란 자작 나뭇잎으로 방문객의 발걸음 앞에 뿌려 놓았다. 즈려밟고 가란다. 나무의 배려심에 발걸음은 가볍다. 만지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미안한 마음 가지면서 살며시 몸을 만져본다. 살결은 너무나 희다. 손끝에 닿는 느낌이 매끄럽다. 손을 떼어 보니 흰 가루가 묻었다. 숲속 벤치에 앉아 편안히 눈을 감고 이제 내가 자작나무를 품어본다. 정원에 자작나무를 심고 자라는 모습을 그려 본다. 자작나무는 형태와 살아 가는 모습에서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가장 먼저 새싹을 틔우는 나무로 새로운 시작과 재생, 회복의 상징으로 여긴다. 특히 북유럽에서는 봄의 시작을 알리는 나무로 여겨지며, 생명의 순환과 재탄생을 상징한다. 그리고 나무껍질의 하얀색은 여러 신화와 전설, 문학에서 자주 등장하며, 정화와 깨끗한 에너지, 지혜와 영적인 보호를 상징하기도 한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며, 불리한 조건에서도 강한 생명력을 발휘하여 끈기, 사랑, 희망을 상징하기도 한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자작나무가 여성의 아름다움과 사랑을 상징하는 나무로 여겨지고 있다. 이처럼 자작나무는 자연의 순환과 인간의 내면적 성장을 연결하는 중요한 상징적 역할을 한다. 우리 부부는 자작나무숲 길 위에서 인생 삶의 여정에 교훈을 얻고 심신을 위로받는 시간이 되었다. 자작나무 숲 자작나무 가지 위로 하얀 구름의 숨결이 내려앉네. 갈바람이 스친 자작나무숲 노란 잎새가 나풀나풀 춤추며 내려앉네. 가을빛 속에 잠긴 하얀 피부 쓸쓸함과 고요함을 품은 채 오후 햇살에 반짝이는 순간 노란 가을옷 입고 미소 지으며 춤추네. 가을이 되고 자작나무숲이 되어 나도 따라 웃고 춤을 추네. 영양 죽파리 자작나무숲은... 1993년 산림청과 영양군이 조림한 것으로 국내 최대 규모인 30.6ha다. 가을철 평일 하루 300명, 주말 600명 정도가 방문한다. 주차료와 전기차 이용은 무료다. 전기차는 22명이 정원, 첫 출발은 아침 9시 30분이고 마지막 출발은 오후 3시 30분. 1시간 간격으로 왕복 운행한다. 예약은 불가하고 선착순 탑승이다. 우천시 전기차는 다니지 않는다. 이동 거리는 4.7km, 15분에서 20분이 소요된다. 자작나무 숲길 길이는 1.52km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0-30

연못 둘러싼 노거수들 순흥도호부 흥망성쇠 지켜본 산증인

긴 무더운 여름 날씨도 가을이라는 계절을 맞이하여 몽니를 부려 보지만, 끝내 힘을 잃고 꼬리를 내린다. 더위와 함께 하늘을 짓누른 무거운 뭉게구름도 걷히고 청명한 하늘에 가벼운 새털구름이 우리의 짓눌린 마음을 꿈틀거리게 한다. 시원한 갈바람이 불 때면 우리는 어디론지 떠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이를 이용한 각 지방자치 단체는 지역의 먹거리, 볼거리 행사를 개최하여 사람들로 욱적북적거린다. 지역경제를 살린다는 명목이지만, 북적이는 사람들과 얄팍한 상혼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이럴 때 여름 더위에 쌓였던 심신의 피로를 풀고자 한다면 호젓한 자연에서 힐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영주 순흥면 옛 도호부 관아의 정원을 찾았다. 당시의 건물은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그 유물과 산 증인 노거수만은 남아 나의 허전한 마음을 다잡아 주고 채워주었다. 오늘날 더위 못지않게 복잡다단한 사회의 고단한 삶에 새로운 에너지 창출을 위해 힐링은 필수이다. 옛날 우리 조상은 생활 터전의 가까운 장소에 연못을 조성하고 주변에 나무를 심어 정원을 조성했다. 그리고 그곳에 정자를 짓고 정신적 풍류를 즐겼다. 오늘날 힐링의 일종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으로 소생태계, 즉 인공적인 작은 자연을 조성했다. 그곳엔 무더위와 강한 햇볕도 부드럽게 공손해지고 시원한 그늘은 덩달아 따라온다. 바람도 찾아와 솔가지와 나뭇잎을 흔들어 시원한 휘파람 소리를 낸다. 푸른 개울물이 봇도랑으로 물고기 가족을 데리고 들어오고 하늘의 빗물이 연못에 내려앉으면 나비, 개구리, 오리, 왜가리, 갈대, 수련 등 자연의 생명체들이 찾아든다. 정원의 녹색 나무와 숲이 우리의 이성을 찾아주고 정원 숲과 연못에 찾아오고 또 살아가는 생명체로 하여금 우리의 감성을 일깨워준다. 정자에 앉아 정원의 사계절 풍경을 보고 감상하는 것만으로 이성과 감성을 오가면서 오감을 느끼고 즐길 수 있다. 이 얼마나 한가하고 평화로운 힐링의 장소가 아닌가. 이뿐일까?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듯이 정원에 들어서면 문학과 음악, 예술적 영감이 우리의 단조로운 삶을 풍요롭게 살찌운다. 정원은 우리 삶을 살찌우는 화수분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지금은 영주시 순흥면사무소로 그 명칭이 순흥면 행정복지센터로 되어 있지만, 경내에는 연못, 숲, 봉도각 정자 등 많은 문화유적이 남아 우리 조상 삶의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었다. 먼저 경내로 들어서니 우람한 느티나무 노거수가 맞이하고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내리니 또 다른 건장한 느티나무와 연리송(連理松)이 마중했다. 연리송은 만나기도 어렵지만, 그 나무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상징성은 다른 어떤 물체보다 강렬하게 우리를 압도한다. 주민들도 연리송을 길수(吉樹)와 비파송(琵琶松)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연리지는 보통 동종 간, 이종 간에 가지가 서로 융합되어 있는 경우가 가끔 있으나, 이곳의 연리송은 두 수간이 용처럼 굽이치면서 연리되어 있는 것이 특이했다. 주민들은 두 가지의 금실이 좋다 해서 ‘금송송(金松松)’이라고 불렀다. 그뿐만 아니라 소나무 수형의 아름다움에서 오는 미적 감각에 놀랐다. 쭉 뻗어 올린 미인의 몸매에 아래로 처진 가지의 곡선미와 푸른 잎은 나에게 겸손의 미덕으로 다가왔다. 잘 다듬어진 담장 따라 머리와 양손이 떨어져나간 석불입상(石佛立像), 지방관 선덕비, 순흥도호부 초석, 순흥척화비 등 역사적 유물이 세워져 있었다. 지방관들의 선정비는 비가림막도 없이 가을비를 맞으며 서있었다. 부서진 모서리는 세월의 탓인지 아니면 비석치기 탓인지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삼권을 손에 쥐고 주민들을 쥐락펴락했을 권력이 권력의 보검을 놓는 순간 하나의 돌비석이 되어 공적을 몇 자의 글로 전하고 있었다. 반면에 민초의 정려비는 비가림막의 정자를 세우고 매년 마을의 주민이나 집안의 후손이 경배하고 보살피고 있는 것을 볼 때면 권력의 무상함을 느꼈다. 순흥도호부 시절의 건물에 사용되었던 주초석과 비석좌대 그리고 누각석은 나를 슬프게 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선비 5백여 명이 국권 회복을 위해 항거하자 일본은 군사를 투입해 의병에 동조한 순흥부를 없애고 1907년 11월에 고을을 방화했다. 그로 인하여 관아와 석빙고, 고가 180여 호가 전소되고 고을의 백성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이러한 지난 역사적 사실을 눈으로 보고 나이테에 기록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산증인으로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얼마나 속이 상하고 분통이 터졌으면 텅 빈 속을 하늘로 까발려 놓았을까. 나이 420살의 증인 느티나무 노거수는 유비무환의 자세가 중요함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계단을 딛고 올라서니 정원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봉도각(鳳島閣)을 둘러싸고 있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라는 뜻의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원리에 따라 둥근 모양의 연못에 단을 쌓고 그 위에 정자를 세웠다. 좌측의 연못은 사각형을 이루었고 북쪽에 돌다리를 놓아 정자로 출입하고 있었다. 조덕상(趙德常) 순흥부사가 건립하였다고 하는 봉도각의 ‘봉도(逢島)’란 신선이 산다는 봉래(逢萊)를 뜻한다. 당시 관원, 아전들의 휴식소로 삼았다고 한다. 정원의 주변에는 죽헌남정광기념비(竹軒南政廣記念碑), 애국지사 최봉환 선생 추모비(愛國志士崔鳳煥先生追慕碑)를 비롯하여 순흥 경로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경로소는 조선시대 때는 약국의 기능을 하며 ‘경로국(敬老局)’으로 불리다가 그 후 지역의 어르신들이 모여 각종 대소사, 가문의 다툼, 이웃의 분쟁 등을 해결하는 곳으로 이용되어 향촌 제도의 기능을 수행하며 400여 년을 이어 온 전국 유일의 ‘경로소(敬老所)’라고 한다. 정원의 주인은 왕버들이 아닌가 싶다. 왕버들 한 그루는 나이 400살, 키 20m, 가슴높이 둘레는 6m를 훨씬 넘었다. 또 다른 한 그루는 펑퍼짐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일어서지 못하는 장애인으로 보였다. 잘려 나간 줄기며 속이 텅 빈 모습에서 아픈 역사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듯했다. 지금으로부터 270년 전 1754년 관아 뒤편의 정원을 조성할 때, 왕버들은 이미 130살이라는 나이를 먹었다 하니 왕버들을 그대로 둔 채 연못과 정자의 위치, 방향, 모양을 결정하고 다양한 수종의 나무를 심어 정원을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하겠다. 얼마나 우리 조상들은 나무를 보호하고 사랑하였는지 그 슬기로움을 엿볼 수 있다. 연못 주변의 왕버들과 소나무, 느티나무 노거수들은 순흥도호부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산 증인으로서 지방행정의 관청에 서서, 지역 주민의 끈기와 정신, 역사와 문화를 전해주는 살아 숨 쉬는 문화재이다. 순흥 봉도각 연비어약(鳶飛魚躍) 내용은... 惡侯玉弩(슬피옥찬) 산뜻한 구슬 안엔黃流在中(황류재중) 황금 잎이 붙었네.豐弟君子(기제군자) 점잖은 군자 남게復寧協陵(복녕협릉) 복과 녹이 내리네.鳶飛戾天(연비려천) 솔개는 하늘을 날고魚躍于淵(어약우연) 고기는 연못에서 뛰네.豐弟君子(기제군자) 점잖은 군자 남게遹不作人(하부작인) 어찌 인재를 잘 쓰지 않으리. “솔개가 하늘에 날고 고기가 연못에서 뛴다”라는 성군(聖君)의 다스림으로 세상이 조화롭고 정도(正道)에 맞게 운행된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0-23

‘부부의 연’ 맺은 팽나무와 말채나무

경산시 자인면 서부리 72-1번지 나즐로(나홀로 즐겁게) 자인 계정숲을 찾았다. 작은 구릉지로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로 구성된 혼효림의 도시 숲으로 보기 드문 자연 원림이다. 이팝나무, 말채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참느릅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원림으로 과거 경산 자인지역에 자생한 나무를 알 수 있어 앞으로 산림을 복구할 때 중요한 사료적 가치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생태적, 학문적인 것과는 별개로 한 장군과 관련된 무형유산과 지방 수령의 선덕비를 소장하고 있는 노천 역사박물관이라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산책 중 재미있는 스토리를 전해주는 혼인목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팽나무와 말채나무가 한 몸이 되어 혼인목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두 나무가 한 몸으로 서로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주민들은 나무 앞에 산신 제단을 설치하여 고단한 삶을 나무에 의지하면서 소원을 빌고 위로를 받고 있었다.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은 하늘의 천신과 땅의 지신, 또는 인간과 연결해 주는 것이 나무라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마을 나무나 특별한 나무를 신이 깃들여 있다고 믿어 신목으로 귀하게 여기며 정성껏 제사를 드리고 보호했다. 이러다 보니 그러한 나무가 있는 곳을 신성한 땅, 숲으로 여겼다. 지금까지 숲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경산 자인 계정숲도 그러한 곳이 아닐까 싶다. 계정숲에는 이곳 출신 한 장군 묘와 시중당, 진충묘, 한 장군 오누이와 여원화상 등 시설물과 조선 왕조 시대 사또라 부르는 고을 수령 공덕비, 선정비가 31기나 있었다. 팽나무는 느릅나무과로 수피는 회색이다. 꽃은 4~5월에 피며 열매는 10월에 적갈색으로 익는다. 경북은 동해안 지역에 많이 분포하며 내염성과 병충해에도 강하다. 여름에는 녹음이 짙어 정자목, 방풍림으로 할머니처럼 오지랖이 넓다고 할 수 있는 나무이다. 이에 비해 말채나무는 층층나무과로 수피는 검은색으로 그물처럼 갈라진다. 꽃은 취산화서로 6월에 피고 열매는 9~10월에 흑색으로 익는다. 다른 나무에 비해 왜소해 보이지만, 나뭇가지는 말을 부리는 말채로 할아버지처럼 작은 거인의 인격자 나무이다. 팽나무와 말채나무의 혼인목은 바로 우리들의 할머니 할아버지 같은 존재로 다가왔다. 혼인목으로 부부의 연을 맺어 사랑목으로 주민들에게 삶의 모범이 되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잘 다듬어진 산책길에는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무릎 높이나 가슴높이에 보기 흉한 혹부리를 달고 있는 참나무를 볼 때면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는 아마 주민들이 도토리를 줍기 위하여 더 많은 열매를 맺으라고 두들겨 패던 흔적이 아닐까 싶다. 그것도 매년 얻어맞다 보니 혹부리가 되어 아픈 고통의 역사를 몸에 세겨두지 않았나 싶다. 우리가 아픈 역사를 잊지 말자고 기념탑을 세우거나 역사를 기술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싶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우리의 가난한 시절,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하여 고육지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제는 하나의 전설로 남아 우리의 과거를 뒤돌아보게 하는 역사적 산물로 교훈이 되고 있다. 한 장군 묘 앞에서 그 옛날 역사적 사실을 더듬어 보았다. 산책길에 세워둔 안내 표지판에는 ‘경산자인단오제’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신라시대부터 전승되어 오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 민속축제란다. 단오절에 한 장군 묘 대제를 올리고 여원무, 자인팔광대, 자인단오굿 등 각종 민속 연희를 연다고 한다. 이러한 제례 의식과 충의 정신 그리고 다채로운 민속놀이는 독특한 양식의 예술성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여원무는 자인 도천산에 기거하면서 주민들을 괴롭히던 왜적을 버들못으로 유인하기 위해 한 장군이 그의 누이와 함께 꾸민 춤으로 화려한 꽃관을 쓰고 장정들이 여자로 가장하여 추었던 화관무라고 한다. 이 외에도 단오제 때에는 자인면 계정숲을 중심으로 주로 농사철에 부르던 들소리로 11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는 ‘자인계정들소리’로는 들지신밟기, 망깨소리, 모찌기소리, 논매기소리, 메타작소리, 방아타령, 칭칭이, 목도소리, 보억사소리, 모내기소리, 어사잉어가 있다고 한다. 이 모두 어릴 적에 들어본 적이 있는 소리들이었다. 경산 자인 계정숲은 이제 이 지역의 지난 유무형의 역사를 한데 묶은 역사박물관과 자연 생태적 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숲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여 새들의 천국이 되고 많은 생명체가 찾아드는 생태계로 거듭나도록 모두가 보호에 앞장서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바로 우리 건강을 지키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숲의 가장자리에 즐비하게 늘어선 수령의 공덕비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비석이 깨끗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깨지고 흠이 간 부분을 이어 붙인 흔적이 있는 것도 있었다. 이는 과한 공적의 자랑으로 아이들의 비석치기 놀이가 어른들의 비석치기 대상이 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어쨌든 지방 수령의 선덕비는 역사적 유물임이 분명한데 그동안 방치하다시피 한 것을 이제 한데 모아 계정숲에 줄 세워 놓았다. 세월에 이길 장사가 없는 것처럼 선정비도 비바람에 두들겨 맞아 비문 해석도 어렵게 하고 있었다. 무덤 속의 생활 도구나 몸의 장신구는 문화재라 하여 박물관에 온도, 습도까지 맞추어 영구히 보존하고 있는 것을 볼 때 형평성에 맞추어서라도 선정비는 최소한 비바람이라도 막을 수 있는 보호 장치라도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계정숲이 품어 온기라도 불어넣어 주고 있어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황처사학유공비 (黃處士鶴有功碑) 내용은 무릇 사람에게 공덕이 있는데도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으면 잊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없다.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며 선행을 행하도록 장려하는 뜻을 펼칠 수가 없다. 저 처사 황학은 외촌에 사는 사람이다. 그가 단을 세우고 성인께 임금의 장수를 비는 것은 타고난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며, 가산을 기우려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사람으로 행해야 할 도리와 연관된 것이다. 우리 자인 고을은 가장 고질적인 병폐가 가산의 환곡이었다. 처사 황학께서 몹시 분해하며 그 병폐를 혁파할 마음을 가지셨다. 임신년으로부터 시작하여 밭과 농막을 팔아 자금을 마련하여 열일곱 번이나 상경하였다. 여러 번 새 당상관에게 청을 넣고, 자주 여섯 판서에게 호소하였다. 또 비변사에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일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병폐를 혁파하려는 마음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임금이 행차하는 길에 나가 호소하다가 의금부에 체포되었다. 그래서 석 달 동안이나 지루하게 갇혀 있다가 풀려나 다행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임오년에 이르러 다시 순영에 환곡의 콩 구백 석을 다른 진에서 옮겨오는 것에 대해 글을 올리니, 이때가 정상국께서 절제사로 계실 때이다. 이어서 다시 환곡 쌀 사백 석을 본진에 귀속시켜 달라는 글을 올리니, 이때가 김상국께서 절제사로 계실 때이다. 또 김 어사께서 남쪽으로 오시는 날을 맞이하여 산역인 박송학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권면하여 이끌고서 남아 있는 환곡 칠백 석을 혁파하였다. 처사께서 스스로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세분 대신의 두터운 은혜이다. 어찌 그 공을 노래하지 않으며, 그 덕을 기리지 않겠는가.“ 이에 자인 고을의 백성들에게 말을 꺼내 환기시켜 비석에다 새겨 그 덕을 찬양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위대한 업적이 어찌 세상에 드물지 않겠는가? 오직 이 고을의 어른아이 할것 없이 모든 사람이 그 공을 잊거나 그 사적을 민멸하게 하는 것을 차마 하지 못하여 이 짧은 비석을 길가에 세워서 잊지 못하는 뜻을 보이노라. -1842년 8월 기록함·처사 황학·건립연대 1842년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0-09

한강 선생의 충의 실천하며 수백 년간 서원을 지킨 느티나무

비구름 안개가 산천을 덮으며 점점 퍼져 간다. 구불구불한 시골 산길은 끝도 보이지 않는다. 모퉁이를 돌면 또 모퉁이가 나오고 하얀 구름안개 꽃은 달리는 자동차까지도 에워서 싼다. 피어오르는 하얀 구름안개 꽃 속을 헤집고 지나가는 길섶에는 풍성한 녹색 물결이 출렁인다. 펼쳐지는 녹색 자연은 가슴을 물들이고 꿈속 같은 어린 시절의 과거로 돌려놓는다. “go back to the past”. 하얀 구름안개 꽃을 헤집고 옛 유생들은 하염없이 이 산길을 걷고 또 걸어 선비 선생님이 계시는 성주 신정리 회연서원으로 걸어갔겠지. 골짜기에 피어오르는 는개는 신비로운 기운이 감도는 듯한 느낌을 주었겠지. 녹색 산길을 돌고 돌 때마다 배움의 신비감은 더해져만 갔겠지. 회연서원으로 가는 길은 성리학의 깨우침일까, 자연 만물의 생과 사는 이(理)와 기(氣)의 합체와 이별의 조화인가. 마음은 배움으로 향하고 몸은 서원으로 향하는 유생들이 보인다. 도중에 흰 두루미가 푸른 볏논에 모양새 나게 앉는 꿈속 같은 아름다운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꽃잎처럼 나풀거리거나 나뭇잎처럼 살랑거림도 없다. 그렇다고 하늘로 던진 돌멩이가 땅으로 뚝 떨어지는 속도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천천히 그리고 우아하게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정적이면서 내려오는 동적인 모습은 정중동이랄까, 우주의 중력의 법칙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그들만의 특급 비밀인지 모를 참으로 평화스럽고 아름다운 행위 예술이었다. 아름다움의 절정은 마지막으로 긴 다리를 살짝 굽히면서 연착륙을 시도 하는 모습이야말로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소름이 돋는 순간이었다. 오로지 잿빛으로 물들인 하늘과 짙은 녹색의 산야는 신비감을 더했다. 기(氣)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의해 우주 만물이 생성되고… 우주 만물에는 이(理)가 깃들여 그 본성이 나타나고… 기(氣)와 이(理)를 가지고 우주 만물의 생성과 소멸의 원리, 질서를 논하는 성리학자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을 향배하는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에 있는 회연서원(檜淵書院) 느티나무 노거수를 찾았다. 정구 선생은 이이 퇴계 선생과 남명 조식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운 성리학을 바탕으로 실천적 실용주의를 지키면서 후학을 가르치신 분이다. 회연서원은 학문을 강론하고 후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요즘의 지방 학교와 같다.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지난 역사와 함께 주변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여가를 즐기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정문에 우뚝 서 있는 느티나무 노거수야말로 한강 선생의 충의를 실천하며 서원을 지키고 있어 선생의 숨결이 스며있지 않을까 싶다. 현도루(見道樓) 망루 위에 오르니 회연서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유생들이 강당에 모여 앉아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낭랑한 목소리로 글 읽는 모습이 보인다. 서원으로 들어서는 대문 앞에 서 있는 우람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마주 서서 유생을 맞이한다. 지금은 400살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키 20m, 가슴둘레가 5m이다. 경내 뜰 정원에는 매화나무, 회화나무, 소나무, 배롱나무 등 여러 수종의 나무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백매원(百梅園)이라 부르고 있다. 꽃 피는 봄이면 모를까 뭐니해도 나이가 제일 많고 몸집도 제일 큰 정문에 서 있는 느티나무가 제일 높은 어른 같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서원 유생들의 등교 시 품성을 점검하는 규율부장 선생님 같다. 아니 한강 정구 선생이 느티나무로 환생한 것이 아닐까도 싶다. 선생은 성리학을 배우고 실천하여 사회의 질서를 바로 세우고자 했다. 선생의 사상적 유산과 성리학적 가치를 충의로 연결하여 이를 전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느티나무가 하여 왔지 않나 싶다. 대가천 물을 남으로 돌린 봉비암을 업고 회연서원은 수백 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수도산에서 발원한 대가천이 무흘구곡(武屹九曲)을 노래하면서 깎아지른 듯 봉비암(鳳飛巖) 단예를 조각해 놓았다. 봉비암은 무흘구곡 중 제1곡의 자리이다. 대가천의 아름다운 계곡을 오르내리며 시를 지어 무흘의 절경을 노래한 것이 무흘구곡이다. 9곡의 굽이마다 이름을 지어 의미를 부여하고 나아가 이학(理學)으로 상징화함으로써 1곡에서 9곡에 이르는 과정이 단지 산수의 아름다움을 노래했지만, 한편으로 도학의 근원을 찾아가는 일종의 수양 과정이기도 하다. 조선의 무흘구곡 문화는 산림 문학의 원류란 생각이 든다. 구곡 문화는 유학을 바탕으로 자연, 문학, 예술이 조화롭게 혼합하여 빚어진 조선 유학의 꽃이요, 진수라 할 수 있다. 완전한 구곡 문화의 향유는 구곡원림과 구곡시, 구곡도를 모두 갖춘 것으로 완성된다고 한다. 서원을 둘러싸고 있는 원림은 물론 산의 숲과 나무, 계곡, 바위, 폭포 등 모든 자연물은 산림 문학의 대상이다. 이를 그림으로 표현하여 시를 짓는다거나 음악으로 표현한 노래 가사도 산림 문학의 범주에 포함된다 해도 좋을 것 같다. 우리 조상들은 마을을 드나들면서 마을 어귀에 있는 당산목 앞에서 몸가짐을 되돌아보았듯이 유생들 또한 서원을 드나들면서 늘 맞닥뜨리는 규율부장 선생님 느티나무를 보면서 충의를 불태웠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변함없이 우뚝 서 있는 꼿꼿함에서 충을 보았고 수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한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모습에서 의를 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자연물의 상징성에서 늘 깨닫고 배우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느티나무 또한 그러하지 않을까. 수백 년 동안 한자리에서 서원을 지키면서 선비들의 몸가짐과 행동을 보았을 것이니 회연서원 느티나무 노거수는 조선의 선비라 해도 좋을 듯하다. 이제는 학생을 가르치는 서원은 문화재가 되어버렸다. 현도로 망루에서 보는 경관이 어쩜 이렇게도 아름다운지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곱게 가지런히 쌓은 돌담은 서원의 지붕과 어울리고 병풍처럼 서원을 둘러싸고 있는 봉비암 숲은 하늘과 맞닿은 듯 고요, 적막, 평화로움으로 내게 다가왔다. 회연서원과 한강 정구 선생, 그리고 성리학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은 1654년에 한강 정구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한강 정구의 학문적 업적과 가르침을 후대에 전파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 서원은 한강 정구의 성리학적 사상을 보존하고, 성리학을 연구하는 중요한 장소다. 한강 정구(寒岡 鄭逑) 선생은 1543년에 태어나 1620년에 사망했다.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이자 교육자로 이황과 이이를 잇는 중요한 학자로 평가된다. 성리학의 실천적 측면을 강조하고, 학문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진왜란 중 의병 운동을 했으며 도덕적 자기 수양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의 학문은 조선 중기 이후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성리학(性理學)은 중국 송나라 주자(朱子)에 의해 집대성된 유교 철학이다. 조선시대 이황과 이이에 의해 발전되었다. 이(理)는 만물의 본질적 원리이고, 기(氣)는 그것을 실현하는 물질적 요소다. 인간과 우주의 원리를 이(理)와 기(氣)로 설명하며, 도덕적 자기 수양을 중시하는 유교 철학이다. 성리학은 도덕적 인간이 사회적 실천을 통해 이상적인 사회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9-25

600년 넘게 마을 공동체 안녕과 평화의 지킴이 역할

노거수에 대한 고사와 설화에는 노거수의 실질적인 수령을 가늠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거수를 보호해야 하는 마을 공동체의 필연적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실체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내용을 포함하는 가상의 설화를 가지고 있다. 특히 자연재해에 대한 취약한 마을의 구조와 자연환경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그런 사례가 있다. 마을 공동체의 안녕과 평화의 지킴이로서 특정 수목의 식재와 보호는 그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노거수의 고사와 설화는 현장의 자연환경 조건에 대한 간접적인 정보가 포함되는 한편 나무를 지켜주는 강력한 보호 수단이 된다. 조선시대 흥해군 관아의 동헌인 제남헌(포항 영일민속박물관) 앞뜰에 나이 640살, 키와 맞먹는 몸 둘레 6.7m 되는 회화나무 두 그루가 살고 있다. 동헌(東軒)은 조선왕조 지방 관청의 중심 건물이다. 수령(守令), 즉 사또(使道)라고 불리던 부사, 목사, 군수, 현령, 현감 등의 지방관이 직무를 보는 관청 건물로서, 오늘날의 시군 청사 본관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회화나무는 당시의 관아 건물과 함께 생각해 보면 아름다운 정원수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또한 청렴과 지조를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조선 선비들이 애호하는 나무로 집무실 앞 뜰에 심어 나쁜 유혹과 흐트러지는 마음가짐을 다잡지 않았나 싶다. 이웃 청하현 관아(포항 청하면사무소)에도 회화나무 노거수가 살고 있다. 그러나 이 회화나무는 정원수가 아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바람과 습기를 예방하는 치료제로 심은 나무란다. “조선시대 광해군 때의 유명한 풍수지리학자인 성지(?-1623년)가 영남 지방의 산세를 조사하고자 흥해 지날 때 동해를 따라 내려오는 낙동정맥을 잇는 비학산 정상에 올라 흥해 분지를 바라보고 ‘과연 천년 옛 고을의 승지’라 하였다고 한다. 그는 당대의 이름난 풍수가요 조정의 권문세가와 대신들도 앞다투어 초청하던 어전 관상감으로 유명한 사람이라 흥해 군수는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환대하였다. 그는 ‘흥해는 다풍질(多風疾, 바람과 질병이 많은 곳)이라서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5대 이상 그 후손이 세거할 곳이 못 된다’라고 하였다. 그 연유를 묻자 ‘흥해의 지세와 지리를 자세히 살펴보니 먼 옛날 선사시대에 이곳은 필시 큰 호수였을 것이다. 수만 년 동안 호수였던 이곳을 동편 낮은 곳의 산맥을 절단하여 그곳으로 호수의 물을 흘러가게 하여 평야를 이루게 하였으므로 가뭄에도 물 걱정이 없겠으나 그 반면에 습기가 많아 필시 괴질이 많이 돌고 피부병을 앓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자리에 참석한 마을 노인 한 분이 ‘과연 그렇다. 이 고을에는 괴질을 앓는 사람이 많은데, 그 원인을 말했으니, 처방도 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성지는 ‘바람과 습기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회화나무를 많이 심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회화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하여 물을 섭취하는 양이 4~5배나 많으므로 지하의 습기를 제거하는 양 또한 4~5배나 되므로 지하의 습기를 제거하는 데는 최선의 방법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흥해 군수는 고을 전체에 지시하여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집마다 회화나무 심기를 권장하여 그 후 물 좋고 농사 잘되는 사람 살기 좋은 고장으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이는 흥해지역에 내려오는 회화나무에 대한 전설이다. 회화나무는 우리 민속문화에도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조경 측면에서 보면 나무 없는 삭막한 마을에 녹음이 짙고 단풍이 아름답게 물이 드는 나무를 선택하여 심기를 권유하였다는 것은 지방 수령으로 탁월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회화나무는 중국이 원산지지만, 오랜 옛날 우리나라로 도입되었다. 낙엽교목으로 키가 30m까지 자라 여름에는 녹음이 짙고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어 정자나무나 기념식수로 안성맞춤이다. 또한 열매가 겨우내 열려있다 보니 직박구리 같은 새들이 열매를 먹으러 많이 모여 자연적이다. 7, 8월에 꽃이 피고 열매는 9, 10월에 황색으로 익으며 꼬투리는 잘록잘록한 모양이다. 꽃과 열매는 약용으로 사용되며 꽃봉오리는 황색의 염료를 만들기도 하여 옛날에는 일상생활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인문학적으로는 예로부터 선비 나무라 하여 서원이나 향교, 문중의 제실 등 많이 심었다. 특히 선비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집의 마당이나 마을 어귀에 심기도 하였다. 이러하다 보니 통용되는 명칭이 많아서 헷갈리기도 한다. 회화(槐花)나무, 회나무, 홰나무, 괴나무, 괴화(槐花)나무 등 많은 이름이 지역마다 다르게 불리고 있다. 회화나무는 은행나무와 함께 학자수(學者樹)라 통한다. 이는 중국 주나라 때 삼괴구극(三槐九棘)이라고 해서 회화나무 3그루와 가시나무 9그루를 심어놓고 여기에 정승 3명, 고급관료 9명 등을 세웠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궁궐이나 정승이 태어난 고택, 문묘 등지에서 회화나무를 심어 길상 목으로 여겨왔다. 임금이 친히 상으로 하사하거나 기념식수로 심어 오늘날 수령이 몇백 년 이상의 회화나무 노거수가 궁궐이나 향교, 서원 등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회화나무 괴(槐)를 풀어보면 나무 목(木)과 귀신 귀(鬼)가 되므로, 회화나무를 귀신 쫓는 나무라고 하여 잡귀를 쫓기 위해 회화나무를 심었다고도 한다. 수형이 제멋대로 뻗는 듯하면서도 단정한 모습이 학자의 기개를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 회화나무는 수형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여름에는 녹음이 짙어 주민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다워 주변의 건물과 함께 멋진 뷰를 선물한다. 겨울에는 열매가 오래도록 달려 있어 새들이 찾아와 나목의 삭막함과 겨울의 쓸쓸함을 달래 준다. 회화나무는 더위와 가뭄 그리고 오염에 아주 잘 견디며 성지의 말대로 왕성한 증산작용으로 땅속의 지하수를 정화하고 초겨울까지 잎을 달고 있으니 방풍 방습 기능이 있는 유용한 식물 자원이란 생각이 든다. 회화나무 주변에 세워진 대원군척화비, 항왜혈전기념비, 흥해군수 공덕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이들의 주인공은 모두 사라지고 없는데 회화나무 노거수만이 덩그렇게 남아 그 역사를 더듬어 보게 한다. “어떻게 하면 이런 비석을 세우지 않는 날이 올까?”라고 회화나무 노거수에 한 번 물어나 볼까. 필자의 시 ‘회화나무 노거수’ 관아 뜰에 서서 세월을 품은 그대 말없이도 깊은 지혜로 바람을 막아주네. 고요한 관아의 품속에서 그대의 잎은 흩날리고 긴 역사의 그림자는 그대 아래에 머물러 있다. 학자수 회화나무 나 그대를 닮으리라는 흥해 사또의 고백이 들리는 듯하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9-18

참혹한 동족상잔 ‘비극의 역사’와 함께 하다

요즘 단체 카톡방에 79주년 8·15 광복절에 관한 논쟁의 불이 타오르고 있다. 광복절에 기모노와 기미가요가 흐르는 오페라 ‘나비부인’을 방영한 방송국을 지탄하고 있다. 물론 오페라 장면 중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그 오랜 일본 강점기 시대를 끝내고 해방을 맞은 날을 기념하는 날에 방영되었으니 어떤 변명이라도 이해하기 어렵다. 독립기념관 관장 인사에 반발한 광복회장은 숭고한 8·15 광복절 국가 기념식에 불참하고 따로 기념행사를 개최하여 국민 분열 행위로 손가락질 받고 있다. 이 또한 어떤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광복절 기념행사와는 무관한 일로써 수긍하기 어렵다. 조선 왕조시대 당파 싸움 같은 소모적인 정쟁 같아 또다시 주변국이 얕잡아 야욕의 불꽃을 피울까 우려스럽다. 장훈(張勳) 선수를 일본 야구인들은 영웅이라 부른다. 생애 홈런 504개와 안타 3085개를 치는 등 기록적인 선수 생활을 했다. 하지만 당시 프로선수 등용문인 고시엔 대회에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한 번도 나가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실력으로 1990년 일본 야구의 전당에 입성했다. 또한 전 일본 고등학교 야구대회 2024년 고시엔(甲子園) 대회에서 한국계 고등학교인 교토국제고(京都国際高)가 우승배를 거머쥐면서 한국어로 된 교가를 우승할 때마다 일곱 번이나 일본 전국에 울려 퍼졌다. 이처럼 교포들의 뭉친 하나 된 단결의 힘과 우수한 능력만이 반일을 뛰어넘어 극일로 나아감을 우리는 보았다. 광복절에 대한 논쟁은 광복절에 대한 추모와 국민의 자긍심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내부 분열의 씨앗이 될 뿐이다. 교포 장훈 선수와 교토국제고의 활약이 국민의 자긍심을 높이고 일본인들에게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보여주어 과거와 같은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하지 못하도록 하나의 쐐기를 박는 극일의 길이다. 우리는 일본의 침략에 국권이 빼앗겨 나라 잃은 슬픔을 경험해 보지 않아도 그 고통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다. 러시아가 이웃 나라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여 일부의 영토를 빼앗아 점령하고 통치하고 있다. 세계 각 국가가 국제법상 불법이고 나쁜 짓이라고 하면서도 응징하지 못하고 있다. 유엔 평화군이 있지만, 무용지물인 것 같다. 약소국인 우크라이나는 각국의 도움을 요청하지만, 원하는 만큼의 지원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국민은 억울하게 지옥 같은 고통의 삶에 시달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침략자의 땅따먹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심보일까. 생명체가 지향하는 본성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서식처를 확보하는 것이고. 둘째, 번식한 개체들이 살아가 위해 서식처를 넓히는 것이다. 이는 ‘동물의 왕국’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많이 보아 왔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자손이 점점 늘면서 씨족에서 부족으로 그리고 부족이 모여 국가로 발전되었다. 대부분 민족 단위로 국가가 탄생했다. 주변국을 침략하여 삶의 터전을 넓히고 재물을 빼앗아 끝없는 욕망의 배를 불렸다. 이렇게 불변의 진리처럼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다. 평화 공존을 부르짖으면서도 극단적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밑바탕에는 생명체가 지향하는 유전자, DNA 본능에 따른 행위를 자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 보면 스스로 강해지는 것만이 나라를 지키고 평화 공존의 번영을 누릴 수 있다. 칠곡군 가산면 유학산 자락 학산리 1034번지 다부동 전투에서 ‘지게 부대원’을 숨겨준 느티나무 노거수를 만나러 갔다. 이곳 유학산은 6·25 한국 전쟁 때 낙동강을 사수하기 위하여 수많은 남과 북의 젊은 군인과 경찰, 주민들이 전사한 곳이다. 이곳에서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24일까지 55일간 유학산 고지 점령 전투에서 아홉 번이나 빼앗고 뺏기는 싸움이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적군과 아군을 포함하여 2만7500여 명의 인적 손실 피해를 보았다. 당시 참전한 대대장은 전투의 절반은 지게 부대원이 수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회고를 남기고 있다. 승리를 이끈 지게 부대원의 몸을 숨겨주고 휴식하게 장소 제공해 준 것은 바로 500살 먹은 느티나무 노거수라고 한다. 키 18m, 가슴둘레가 7m, 앉은 자리 폭이 18m나 되는 거인 느티나무 노거수가 지금도 계곡가에 주민들의 보호를 받으며 온전히 살아가고 있다. 비처럼 쏟아지는 폭탄과 총탄이 하늘을 덮고 땅이 진동할 때도 느티나무 노거수는 꼼짝하지 않고 현장을 지키며 지게 부대원들을 숨겨주고 전투를 목격한 역사의 산증인이다. 지난 역사를 나이테에 고스란히 기록하여 먼 훗날 우리의 후손에게 전해 줄 것이다. 참혹한 동족상잔의 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이곳에 느티나무 노거수에 아내와 함께 머리 숙여 경외감을 표했다. 김만섭 학산리 마을 이장으로부터 6.25 전쟁 당시의 치열한 전투 상황과 ‘지게 부대원’의 활약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다부동 전투에는 군인도 아닌 무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지게 부대원’이라고 하는 생소한 이름의 부대로 군번도 계급장도 없었다. 주민들로 군복을 받지 못해 평상복으로 식량과 탄약 등 40~50kg 짊어지고 가파른 유학산 고지를 올라가 전쟁물자를 날랐다. 그리고 내려올 때는 부상병을 업고 내려왔다. 오직 대한민국 국군과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 하나로 죽음의 전장 속을 누비다 하루 평균 50여 명 지게 부대원이 전쟁 동안 모두 2800여 명이나 희생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주민들의 애국 애향심에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느티나무와 함께 있는 돌탑이 희생된 지게 부대원의 영혼을 추모하는 위령탑으로 다가왔다. 예전에는 마을 동제를 지내고 있었으나 지금은 중단되었다. 무속인들이 이곳을 찾아 제를 지낸 음식을 그대로 방치하는 등 주민들의 생활에 불편을 주고 있어 노거수에 근접하지 못하도록 철책을 둘러쳐 놓았다. 주민들은 주변에 경쟁하는 음나무를 베어내고 정자를 철거하는 등 환경 개선에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느티나무 노거수와 함께 있는 돌탑을 없애 공간을 넓게 확보하려 했으나 마을 할머니와 어르신들이 극구 반대하여 옛 원형 그대로 잘 보존하고 있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느티나무가 여성이라면 돌탑은 남성으로 상징되기 때문이다. 양과 음이 함께 마을 수호신으로서 역할을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파란 하늘 아래 유학산과 마을, 느티나무 노거수 모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풍성하고 평화로운 가을맞이를 하고 있다. 귀가하는 도중에 유학산 자락에 있는 다부동 6·25 전적기념관에 들러 희생자를 추모했다. 다부동 전적기념관은… 1950년 8월 l일에서 9월 24일까지 55일간 전개된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최대 격전지인 칠곡군 가산면 유학산 혈투의 현장에 세워져 있다. 암벽을 오르며 9번에 걸친 백병전 끝에 결국 유학산 고지를 점령함으로써 전쟁의 최대 위기를 넘기고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전사한 희생 장병을 1994년 9월부터 1997년 1월까지 8차례에 걸쳐 육군 제50사단 장병들이 유학산 일대에서 발굴한 259기의 유해가 ‘구국용사의 묘’에 합장되어 있다. 구국용사충혼비, 구국경찰충혼비도 세워져 있다. 격전지였던 유학산 자락에 적진을 향해 진격하는 전차 형상으로 지어진 다부동전적기념관 상단에는 기념 조형물이, 기념관 주위로 국군이 사용했던 무기와 북한군 노획 무기가 함께 전시돼 있다. 백선엽 장군, 이승만, 트루먼 대통령의 동상도 함께 서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