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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힘으로 이룬 치산치수 ‘신의 한 수’가 되다

등록일 2024-12-25 18:35 게재일 2024-12-26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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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장은재의 명품 노거수와 숲 탐방 <br/>(58) 안동 하회마을 만송정(萬松亭) 솔숲
만송정 솔숲은 자연의 위대함과 인간의 손길이 조화를 이뤄낸 상징이다.

다사다난했던 갑진년 힘과 권력으로 상징되는 용의 해는 저물어간다. 두 진영으로 양분된 국론분열이 더욱 가슴을 아린다. 마지막 달랑 한 장 남은 달력을 보면서 안동 하회마을 출신 류성룡 선생이 생각나 만송정 솔숲으로 향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의 침략을 예측하고 훈련도감을 설치했다. 그러나 그의 외침은 허공의 메아리가 되고 결국 일본의 침략으로 국토는 유린당했다. 그러고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하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자는 징비록을 남겼다. 그의 형인 류운룡 선생은 매년 강물 범람으로 거듭되는 마을의 침수 피해를 예방하고자 주민들과 함께 마을 북쪽 강변에 1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홍수로부터 보호했다. 오늘날 만송정이라 부르는 솔숲이다. 솔숲 속을 거닐면서 류성룡 선생은 10만 양병설을 생각하고 징비록을 저술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만송정 솔숲은 추운 겨울임에도 충절의 상징, 푸르름을 띤 채 곧고 의연하게 서 있었다.

조선 중기 학자이자 정치가인 류운룡이

강물 범람 해결하려 소나무 1만그루 심어

여름엔 수해 막고 주민에 휴식공간 제공

겨울엔 찬 북서풍 막으며 기후조절 역할

철학적 사색과 학문 탐구·후학양성까지

물질적 혜택 넘어 정신적 안식처 역할도

마을 휘도는 낙동강·강변에 펼쳐진 솔숲

맞은편 절벽 부용대의 조화는 작품 같아

만송정 솔숲으로 가는 느티나무·벚나무 뚝방길.
만송정 솔숲으로 가는 느티나무·벚나무 뚝방길.

낙동강이 굽이굽이 흐르는 하회마을, 그 곡선의 중심에서 만송정 솔밭은 마을과 자연을 하나로 엮는 생명줄이다. 만송정 솔숲은 자연의 위대함과 인간의 손길이 조화를 이뤄낸 상징이며, 하회마을 주민들이 세상과 자연에 건넨 가장 진중한 대답이다. 숲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짙어지고, 그 안에 깃든 사연은 더욱 깊어진다. 하회마을은 낙동강이 마을을 휘감아 돌며 만든 유려한 지형으로 유명하다. 낙동강의 물길은 부드럽게 마을을 품었고, 마을 사람들은 이 품속에서 삶을 일구었다. 그러나 낙동강은 언제나 온화한 품성만을 보여주진 않았다. 장마철이면 강물이 넘쳐흐르고, 마을의 들판과 집들은 물에 잠기기 일쑤였다. 주민들은 낙동강의 은혜와 위협을 동시에 느끼며 강과 공존할 방법을 찾았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만송정(萬松亭) 솔숲이다.

겸암(謙巖) 류운룡(柳雲龍)은 풍수지리적으로 마을 맞은편의 북쪽 64m 높이의 절벽, 부용대의 기운이 세고 이곳이 허하여 이를 보완하기 위해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솔밭에 만송정이 세워져 있었으나 대홍수 때 물이 넘쳐 유실되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이름만 남아 있다. 치산치수(治山治水) 사업은 보통 나라가 맡아 하는 일이지만, 마을 주민이 힘을 합쳐 일궈 낸 미담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여름에는 수해를 막고 마을 사람들의 휴식 공간을 제공하며 겨울에는 찬 북서풍을 막아주는 미세 기후를 조절하는 역할도 한다. 솔숲은 단순히 재해를 예방하는 것을 넘어, 기후변화 대응과 지속 가능한 발전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해 오고 있다. 강변 숲 조성은 산림으로 하천을 관리하였으니, 치산치수를 동시에 한 것으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신의 한 수가 아닐까 싶다.

숲의 소나무 뿌리는 강가의 흙을 단단히 잡아주고, 울창한 숲은 바람과 물길을 막아주는 자연의 방벽이 되었다. 만송정은 처음부터 자연의 일부였지만, 주민의 지혜와 손길로 그 의미를 더했다. 주민들이 하나둘 정성스럽게 심은 소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었고, 숲은 세월이 흐르면서 하회마을의 상징이 되었다. 만송정의

소나무 숲은 생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숲은 낙동강의 흐름과 조화를 이루며 하회마을의 지속 가능한 환경을 유지하는데 기여했다.

만송정은 단순히 강변의 숲이 아니다. 하회마을 주민들의 삶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주민들은 강물이 들이닥칠 때 숲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만송정은 물질적 혜택을 넘어선 정신적 안식처로도 작용했다. 소나무 숲의 고요함과 위엄은 하회마을 주민들에게 자연과 삶에 대한 깨달음을 주는 스승과 같았다. 주민들은 만송정 숲을 거닐며 자연 속에서 학문을 논하고,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겼다. 소나무의 굳건함과 늘 푸른 자태는 그들에게 자연의 이치를 깨닫게 하고, 스스로 되돌아보게 하는 매개체였다. 만송정은 하회마을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산책로와 휴식 공간을 제공하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하회마을의 자연유산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만송정은 하회마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자연적 배경이며, 조선시대의 자연관과 조화로운 삶의 방식을 체험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부용대 겸암정자에서 바라본 만송정.
부용대 겸암정자에서 바라본 만송정.

강 건너편 부용대에 서서 솔숲을 내려다보면, 낙동강이 부드럽게 휘돌아 흐르는 곡선과 함께 만송정의 짙은 녹음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용대는 이름 그대로 연꽃이 피어난 듯한 절경을 자랑하지만, 그 풍경의 완성은 만송정이 있어야 가능하다. 숲은 단순히 나무의 집합이 아니라 마을의 숨결을 담고 있는 듯하다. 소나무 하나하나가 뿜어내는 푸르른 기운이 낙동강 물길을 따라 마을 곳곳으로 스며드는 느낌이다. 숲을 가꾼 주민들의 손길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하회마을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소나무 한 그루에 깃든 정성과 지혜, 그리고 자연을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만송정은 지금도 이렇게 당당히 서 있을 수 있다. 부용대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하회마을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자연의 조화가 만들어낸 위대한 작품이다.

오늘날 하회마을을 방문하는 이들은 만송정 솔숲을 들어서기 전에 낙동강 둑 위에 조성된 느티나무와 벚나무의 터널 길을 거닐게 될 것이다. 봄에는 흩날리는 꽃비로 걷는 즐거움을 더해 줄 것이고 여름은 풍성한 그늘로 흐르는 땀을 씻어 줄 것이다. 나무 아래 거닐면서 자연의 위대함과 인간의 지혜가 만난 순간을 느낀다. 숲은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만송정은 인간의 손길로 조성되었지만,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 속에 녹아들어 완성된 공간이다. 만송정과 낙동강, 그리고 부용대가 어우러진 풍경은 하회마을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낙동강이 만든 곡선은 마치 자연이 그려낸 걸작의 예술 작품처럼 보인다. 강변에 펼쳐진 만송정은 자연의 일부로서 그 작품의 색을 더하고, 부용대는 풍경을 한눈에 담는 액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하회마을과 만송정, 그리고 낙동강과 부용대가 어우러진 풍경은 단순히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앞으로도 우리가 지켜야 할 공존의 가치와 방향성을 제시한다. 솔숲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솔숲을 돌아 흘러가는 강물처럼 어려운 정치 난국이 하루빨리 지나가기를 기원하면서 푸른 만송정 솔숲의 솔향을 마음껏 마시면서 어깨를 편다.

겸암 류운룡(柳雲龍)과 만송정 솔숲

류운룡은 조선 중기(1539~1601)의 학자이자 정치가다.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계승했으며 성리학 발전에 기여했다. 만송정 솔숲도 조성했다. 동생 류성룡(1542~1607)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보좌하며 나라를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고 후대에 교훈을 남기기 위해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으로 ‘징비록’을 집필했다.

‘겸암’에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세상의 이치를 따르고자 한 그의 철학이 담겨 있다. 만송정과 겸암정자는 류운룡이 자연 속에서 학문을 탐구하고 철학적 사색을 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장소다. 겸암정자는 부용대 절벽 위에 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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