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경산 계정숲과 산신제단 혼인목 노거수
경산시 자인면 서부리 72-1번지 나즐로(나홀로 즐겁게) 자인 계정숲을 찾았다. 작은 구릉지로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로 구성된 혼효림의 도시 숲으로 보기 드문 자연 원림이다. 이팝나무, 말채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참느릅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원림으로 과거 경산 자인지역에 자생한 나무를 알 수 있어 앞으로 산림을 복구할 때 중요한 사료적 가치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생태적, 학문적인 것과는 별개로 한 장군과 관련된 무형유산과 지방 수령의 선덕비를 소장하고 있는 노천 역사박물관이라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산책 중 재미있는 스토리를 전해주는 혼인목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도시 숲으로 보기드문 자연원림 ‘계정숲’
이팝나무·참느릅나무 등 각종 수종 즐비
한 몸으로 부둥켜 안고 살아가는 혼인목
산신제단 만들어 귀히 여기며 보호해 와
한 장군묘부터 31개의 공덕·선정비까지
유무형 역사 지닌 역사박물관 역할도 톡톡
팽나무와 말채나무가 한 몸이 되어 혼인목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두 나무가 한 몸으로 서로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주민들은 나무 앞에 산신 제단을 설치하여 고단한 삶을 나무에 의지하면서 소원을 빌고 위로를 받고 있었다.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은 하늘의 천신과 땅의 지신, 또는 인간과 연결해 주는 것이 나무라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마을 나무나 특별한 나무를 신이 깃들여 있다고 믿어 신목으로 귀하게 여기며 정성껏 제사를 드리고 보호했다.
이러다 보니 그러한 나무가 있는 곳을 신성한 땅, 숲으로 여겼다. 지금까지 숲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경산 자인 계정숲도 그러한 곳이 아닐까 싶다. 계정숲에는 이곳 출신 한 장군 묘와 시중당, 진충묘, 한 장군 오누이와 여원화상 등 시설물과 조선 왕조 시대 사또라 부르는 고을 수령 공덕비, 선정비가 31기나 있었다.
팽나무는 느릅나무과로 수피는 회색이다. 꽃은 4~5월에 피며 열매는 10월에 적갈색으로 익는다. 경북은 동해안 지역에 많이 분포하며 내염성과 병충해에도 강하다. 여름에는 녹음이 짙어 정자목, 방풍림으로 할머니처럼 오지랖이 넓다고 할 수 있는 나무이다.
이에 비해 말채나무는 층층나무과로 수피는 검은색으로 그물처럼 갈라진다. 꽃은 취산화서로 6월에 피고 열매는 9~10월에 흑색으로 익는다. 다른 나무에 비해 왜소해 보이지만, 나뭇가지는 말을 부리는 말채로 할아버지처럼 작은 거인의 인격자 나무이다. 팽나무와 말채나무의 혼인목은 바로 우리들의 할머니 할아버지 같은 존재로 다가왔다. 혼인목으로 부부의 연을 맺어 사랑목으로 주민들에게 삶의 모범이 되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잘 다듬어진 산책길에는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무릎 높이나 가슴높이에 보기 흉한 혹부리를 달고 있는 참나무를 볼 때면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는 아마 주민들이 도토리를 줍기 위하여 더 많은 열매를 맺으라고 두들겨 패던 흔적이 아닐까 싶다.
그것도 매년 얻어맞다 보니 혹부리가 되어 아픈 고통의 역사를 몸에 세겨두지 않았나 싶다. 우리가 아픈 역사를 잊지 말자고 기념탑을 세우거나 역사를 기술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싶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우리의 가난한 시절,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하여 고육지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제는 하나의 전설로 남아 우리의 과거를 뒤돌아보게 하는 역사적 산물로 교훈이 되고 있다.
한 장군 묘 앞에서 그 옛날 역사적 사실을 더듬어 보았다. 산책길에 세워둔 안내 표지판에는 ‘경산자인단오제’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신라시대부터 전승되어 오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 민속축제란다. 단오절에 한 장군 묘 대제를 올리고 여원무, 자인팔광대, 자인단오굿 등 각종 민속 연희를 연다고 한다.
이러한 제례 의식과 충의 정신 그리고 다채로운 민속놀이는 독특한 양식의 예술성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여원무는 자인 도천산에 기거하면서 주민들을 괴롭히던 왜적을 버들못으로 유인하기 위해 한 장군이 그의 누이와 함께 꾸민 춤으로 화려한 꽃관을 쓰고 장정들이 여자로 가장하여 추었던 화관무라고 한다.
이 외에도 단오제 때에는 자인면 계정숲을 중심으로 주로 농사철에 부르던 들소리로 11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는 ‘자인계정들소리’로는 들지신밟기, 망깨소리, 모찌기소리, 논매기소리, 메타작소리, 방아타령, 칭칭이, 목도소리, 보억사소리, 모내기소리, 어사잉어가 있다고 한다. 이 모두 어릴 적에 들어본 적이 있는 소리들이었다.
경산 자인 계정숲은 이제 이 지역의 지난 유무형의 역사를 한데 묶은 역사박물관과 자연 생태적 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숲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여 새들의 천국이 되고 많은 생명체가 찾아드는 생태계로 거듭나도록 모두가 보호에 앞장서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바로 우리 건강을 지키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숲의 가장자리에 즐비하게 늘어선 수령의 공덕비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비석이 깨끗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깨지고 흠이 간 부분을 이어 붙인 흔적이 있는 것도 있었다. 이는 과한 공적의 자랑으로 아이들의 비석치기 놀이가 어른들의 비석치기 대상이 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어쨌든 지방 수령의 선덕비는 역사적 유물임이 분명한데 그동안 방치하다시피 한 것을 이제 한데 모아 계정숲에 줄 세워 놓았다. 세월에 이길 장사가 없는 것처럼 선정비도 비바람에 두들겨 맞아 비문 해석도 어렵게 하고 있었다. 무덤 속의 생활 도구나 몸의 장신구는 문화재라 하여 박물관에 온도, 습도까지 맞추어 영구히 보존하고 있는 것을 볼 때 형평성에 맞추어서라도 선정비는 최소한 비바람이라도 막을 수 있는 보호 장치라도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계정숲이 품어 온기라도 불어넣어 주고 있어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황처사학유공비 (黃處士鶴有功碑) 내용은
무릇 사람에게 공덕이 있는데도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으면 잊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없다.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며 선행을 행하도록 장려하는 뜻을 펼칠 수가 없다. 저 처사 황학은 외촌에 사는 사람이다. 그가 단을 세우고 성인께 임금의 장수를 비는 것은 타고난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며, 가산을 기우려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사람으로 행해야 할 도리와 연관된 것이다.
우리 자인 고을은 가장 고질적인 병폐가 가산의 환곡이었다. 처사 황학께서 몹시 분해하며 그 병폐를 혁파할 마음을 가지셨다. 임신년으로부터 시작하여 밭과 농막을 팔아 자금을 마련하여 열일곱 번이나 상경하였다. 여러 번 새 당상관에게 청을 넣고, 자주 여섯 판서에게 호소하였다. 또 비변사에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일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병폐를 혁파하려는 마음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임금이 행차하는 길에 나가 호소하다가 의금부에 체포되었다. 그래서 석 달 동안이나 지루하게 갇혀 있다가 풀려나 다행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임오년에 이르러 다시 순영에 환곡의 콩 구백 석을 다른 진에서 옮겨오는 것에 대해 글을 올리니, 이때가 정상국께서 절제사로 계실 때이다. 이어서 다시 환곡 쌀 사백 석을 본진에 귀속시켜 달라는 글을 올리니, 이때가 김상국께서 절제사로 계실 때이다. 또 김 어사께서 남쪽으로 오시는 날을 맞이하여 산역인 박송학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권면하여 이끌고서 남아 있는 환곡 칠백 석을 혁파하였다.
처사께서 스스로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세분 대신의 두터운 은혜이다. 어찌 그 공을 노래하지 않으며, 그 덕을 기리지 않겠는가.“ 이에 자인 고을의 백성들에게 말을 꺼내 환기시켜 비석에다 새겨 그 덕을 찬양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위대한 업적이 어찌 세상에 드물지 않겠는가? 오직 이 고을의 어른아이 할것 없이 모든 사람이 그 공을 잊거나 그 사적을 민멸하게 하는 것을 차마 하지 못하여 이 짧은 비석을 길가에 세워서 잊지 못하는 뜻을 보이노라.
-1842년 8월 기록함·처사 황학·건립연대 1842년
/글·사진=장은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