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포항 성내리 동헌 회화나무
노거수에 대한 고사와 설화에는 노거수의 실질적인 수령을 가늠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거수를 보호해야 하는 마을 공동체의 필연적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실체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내용을 포함하는 가상의 설화를 가지고 있다. 특히 자연재해에 대한 취약한 마을의 구조와 자연환경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그런 사례가 있다. 마을 공동체의 안녕과 평화의 지킴이로서 특정 수목의 식재와 보호는 그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노거수의 고사와 설화는 현장의 자연환경 조건에 대한 간접적인 정보가 포함되는 한편 나무를 지켜주는 강력한 보호 수단이 된다.
제남헌 앞뜰에 나이 640살, 키와 맞먹는 몸 둘레 6.7m되는 회화나무 두 그루
방풍 방습이 뛰어난 회화나무, 다풍질의 흥해를 살기 좋은 고장으로 발전시켜
예로부터 선비 나무라 하여 서원 등에 많이 심어… 잡귀를 쫓기 위해 심기도
조선시대 흥해군 관아의 동헌인 제남헌(포항 영일민속박물관) 앞뜰에 나이 640살, 키와 맞먹는 몸 둘레 6.7m 되는 회화나무 두 그루가 살고 있다. 동헌(東軒)은 조선왕조 지방 관청의 중심 건물이다. 수령(守令), 즉 사또(使道)라고 불리던 부사, 목사, 군수, 현령, 현감 등의 지방관이 직무를 보는 관청 건물로서, 오늘날의 시군 청사 본관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회화나무는 당시의 관아 건물과 함께 생각해 보면 아름다운 정원수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또한 청렴과 지조를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조선 선비들이 애호하는 나무로 집무실 앞 뜰에 심어 나쁜 유혹과 흐트러지는 마음가짐을 다잡지 않았나 싶다. 이웃 청하현 관아(포항 청하면사무소)에도 회화나무 노거수가 살고 있다.
그러나 이 회화나무는 정원수가 아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바람과 습기를 예방하는 치료제로 심은 나무란다. “조선시대 광해군 때의 유명한 풍수지리학자인 성지(?-1623년)가 영남 지방의 산세를 조사하고자 흥해 지날 때 동해를 따라 내려오는 낙동정맥을 잇는 비학산 정상에 올라 흥해 분지를 바라보고 ‘과연 천년 옛 고을의 승지’라 하였다고 한다. 그는 당대의 이름난 풍수가요 조정의 권문세가와 대신들도 앞다투어 초청하던 어전 관상감으로 유명한 사람이라 흥해 군수는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환대하였다.
그는 ‘흥해는 다풍질(多風疾, 바람과 질병이 많은 곳)이라서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5대 이상 그 후손이 세거할 곳이 못 된다’라고 하였다. 그 연유를 묻자 ‘흥해의 지세와 지리를 자세히 살펴보니 먼 옛날 선사시대에 이곳은 필시 큰 호수였을 것이다. 수만 년 동안 호수였던 이곳을 동편 낮은 곳의 산맥을 절단하여 그곳으로 호수의 물을 흘러가게 하여 평야를 이루게 하였으므로 가뭄에도 물 걱정이 없겠으나 그 반면에 습기가 많아 필시 괴질이 많이 돌고 피부병을 앓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자리에 참석한 마을 노인 한 분이 ‘과연 그렇다. 이 고을에는 괴질을 앓는 사람이 많은데, 그 원인을 말했으니, 처방도 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성지는 ‘바람과 습기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회화나무를 많이 심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회화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하여 물을 섭취하는 양이 4~5배나 많으므로 지하의 습기를 제거하는 양 또한 4~5배나 되므로 지하의 습기를 제거하는 데는 최선의 방법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흥해 군수는 고을 전체에 지시하여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집마다 회화나무 심기를 권장하여 그 후 물 좋고 농사 잘되는 사람 살기 좋은 고장으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이는 흥해지역에 내려오는 회화나무에 대한 전설이다.
회화나무는 우리 민속문화에도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조경 측면에서 보면 나무 없는 삭막한 마을에 녹음이 짙고 단풍이 아름답게 물이 드는 나무를 선택하여 심기를 권유하였다는 것은 지방 수령으로 탁월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회화나무는 중국이 원산지지만, 오랜 옛날 우리나라로 도입되었다. 낙엽교목으로 키가 30m까지 자라 여름에는 녹음이 짙고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어 정자나무나 기념식수로 안성맞춤이다. 또한 열매가 겨우내 열려있다 보니 직박구리 같은 새들이 열매를 먹으러 많이 모여 자연적이다. 7, 8월에 꽃이 피고 열매는 9, 10월에 황색으로 익으며 꼬투리는 잘록잘록한 모양이다. 꽃과 열매는 약용으로 사용되며 꽃봉오리는 황색의 염료를 만들기도 하여 옛날에는 일상생활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인문학적으로는 예로부터 선비 나무라 하여 서원이나 향교, 문중의 제실 등 많이 심었다. 특히 선비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집의 마당이나 마을 어귀에 심기도 하였다. 이러하다 보니 통용되는 명칭이 많아서 헷갈리기도 한다. 회화(槐花)나무, 회나무, 홰나무, 괴나무, 괴화(槐花)나무 등 많은 이름이 지역마다 다르게 불리고 있다. 회화나무는 은행나무와 함께 학자수(學者樹)라 통한다. 이는 중국 주나라 때 삼괴구극(三槐九棘)이라고 해서 회화나무 3그루와 가시나무 9그루를 심어놓고 여기에 정승 3명, 고급관료 9명 등을 세웠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궁궐이나 정승이 태어난 고택, 문묘 등지에서 회화나무를 심어 길상 목으로 여겨왔다. 임금이 친히 상으로 하사하거나 기념식수로 심어 오늘날 수령이 몇백 년 이상의 회화나무 노거수가 궁궐이나 향교, 서원 등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회화나무 괴(槐)를 풀어보면 나무 목(木)과 귀신 귀(鬼)가 되므로, 회화나무를 귀신 쫓는 나무라고 하여 잡귀를 쫓기 위해 회화나무를 심었다고도 한다. 수형이 제멋대로 뻗는 듯하면서도 단정한 모습이 학자의 기개를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
회화나무는 수형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여름에는 녹음이 짙어 주민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다워 주변의 건물과 함께 멋진 뷰를 선물한다. 겨울에는 열매가 오래도록 달려 있어 새들이 찾아와 나목의 삭막함과 겨울의 쓸쓸함을 달래 준다. 회화나무는 더위와 가뭄 그리고 오염에 아주 잘 견디며 성지의 말대로 왕성한 증산작용으로 땅속의 지하수를 정화하고 초겨울까지 잎을 달고 있으니 방풍 방습 기능이 있는 유용한 식물 자원이란 생각이 든다. 회화나무 주변에 세워진 대원군척화비, 항왜혈전기념비, 흥해군수 공덕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이들의 주인공은 모두 사라지고 없는데 회화나무 노거수만이 덩그렇게 남아 그 역사를 더듬어 보게 한다. “어떻게 하면 이런 비석을 세우지 않는 날이 올까?”라고 회화나무 노거수에 한 번 물어나 볼까.
필자의 시 ‘회화나무 노거수’
관아 뜰에 서서
세월을 품은 그대
말없이도 깊은 지혜로
바람을 막아주네.
고요한 관아의 품속에서
그대의 잎은 흩날리고
긴 역사의 그림자는
그대 아래에 머물러 있다.
학자수 회화나무
나 그대를 닮으리라는
흥해 사또의
고백이 들리는 듯하다.
/글·사진=장은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