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영주 순흥도호부 정원 봉도각과<br/>연리송·느티나무·왕버들 노거수
긴 무더운 여름 날씨도 가을이라는 계절을 맞이하여 몽니를 부려 보지만, 끝내 힘을 잃고 꼬리를 내린다. 더위와 함께 하늘을 짓누른 무거운 뭉게구름도 걷히고 청명한 하늘에 가벼운 새털구름이 우리의 짓눌린 마음을 꿈틀거리게 한다. 시원한 갈바람이 불 때면 우리는 어디론지 떠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이를 이용한 각 지방자치 단체는 지역의 먹거리, 볼거리 행사를 개최하여 사람들로 욱적북적거린다. 지역경제를 살린다는 명목이지만, 북적이는 사람들과 얄팍한 상혼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이럴 때 여름 더위에 쌓였던 심신의 피로를 풀고자 한다면 호젓한 자연에서 힐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영주 순흥면 옛 도호부 관아의 정원을 찾았다. 당시의 건물은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그 유물과 산 증인 노거수만은 남아 나의 허전한 마음을 다잡아 주고 채워주었다.
경내엔 건장한 느티나무·연리송 마중
두 수간 용처럼 굽이치며 연리해 특이
주민들 “금실좋다” ‘금송송(金松松)’ 별칭
머리와 양손이 떨어져 나간 석불입상과
가을비에 젖은 선정비는 권력무상 느껴
순흥도호부 시절 주초석·비석좌대 남아
을사늑약 항거의 흔적으로 쓸쓸히 자리
아름드리 소나무들로 둘러싸인 봉도각
주변엔 조선시대 약국 기능 ‘순흥 경로소’
이후 각종 대소사·분쟁 등을 해결하는
향촌제도 기능 수행하며 400년 이어와
오늘날 더위 못지않게 복잡다단한 사회의 고단한 삶에 새로운 에너지 창출을 위해 힐링은 필수이다. 옛날 우리 조상은 생활 터전의 가까운 장소에 연못을 조성하고 주변에 나무를 심어 정원을 조성했다. 그리고 그곳에 정자를 짓고 정신적 풍류를 즐겼다.
오늘날 힐링의 일종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으로 소생태계, 즉 인공적인 작은 자연을 조성했다. 그곳엔 무더위와 강한 햇볕도 부드럽게 공손해지고 시원한 그늘은 덩달아 따라온다. 바람도 찾아와 솔가지와 나뭇잎을 흔들어 시원한 휘파람 소리를 낸다. 푸른 개울물이 봇도랑으로 물고기 가족을 데리고 들어오고 하늘의 빗물이 연못에 내려앉으면 나비, 개구리, 오리, 왜가리, 갈대, 수련 등 자연의 생명체들이 찾아든다.
정원의 녹색 나무와 숲이 우리의 이성을 찾아주고 정원 숲과 연못에 찾아오고 또 살아가는 생명체로 하여금 우리의 감성을 일깨워준다. 정자에 앉아 정원의 사계절 풍경을 보고 감상하는 것만으로 이성과 감성을 오가면서 오감을 느끼고 즐길 수 있다. 이 얼마나 한가하고 평화로운 힐링의 장소가 아닌가. 이뿐일까?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듯이 정원에 들어서면 문학과 음악, 예술적 영감이 우리의 단조로운 삶을 풍요롭게 살찌운다. 정원은 우리 삶을 살찌우는 화수분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지금은 영주시 순흥면사무소로 그 명칭이 순흥면 행정복지센터로 되어 있지만, 경내에는 연못, 숲, 봉도각 정자 등 많은 문화유적이 남아 우리 조상 삶의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었다. 먼저 경내로 들어서니 우람한 느티나무 노거수가 맞이하고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내리니 또 다른 건장한 느티나무와 연리송(連理松)이 마중했다.
연리송은 만나기도 어렵지만, 그 나무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상징성은 다른 어떤 물체보다 강렬하게 우리를 압도한다. 주민들도 연리송을 길수(吉樹)와 비파송(琵琶松)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연리지는 보통 동종 간, 이종 간에 가지가 서로 융합되어 있는 경우가 가끔 있으나, 이곳의 연리송은 두 수간이 용처럼 굽이치면서 연리되어 있는 것이 특이했다. 주민들은 두 가지의 금실이 좋다 해서 ‘금송송(金松松)’이라고 불렀다. 그뿐만 아니라 소나무 수형의 아름다움에서 오는 미적 감각에 놀랐다. 쭉 뻗어 올린 미인의 몸매에 아래로 처진 가지의 곡선미와 푸른 잎은 나에게 겸손의 미덕으로 다가왔다.
잘 다듬어진 담장 따라 머리와 양손이 떨어져나간 석불입상(石佛立像), 지방관 선덕비, 순흥도호부 초석, 순흥척화비 등 역사적 유물이 세워져 있었다. 지방관들의 선정비는 비가림막도 없이 가을비를 맞으며 서있었다. 부서진 모서리는 세월의 탓인지 아니면 비석치기 탓인지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삼권을 손에 쥐고 주민들을 쥐락펴락했을 권력이 권력의 보검을 놓는 순간 하나의 돌비석이 되어 공적을 몇 자의 글로 전하고 있었다. 반면에 민초의 정려비는 비가림막의 정자를 세우고 매년 마을의 주민이나 집안의 후손이 경배하고 보살피고 있는 것을 볼 때면 권력의 무상함을 느꼈다. 순흥도호부 시절의 건물에 사용되었던 주초석과 비석좌대 그리고 누각석은 나를 슬프게 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선비 5백여 명이 국권 회복을 위해 항거하자 일본은 군사를 투입해 의병에 동조한 순흥부를 없애고 1907년 11월에 고을을 방화했다. 그로 인하여 관아와 석빙고, 고가 180여 호가 전소되고 고을의 백성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이러한 지난 역사적 사실을 눈으로 보고 나이테에 기록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산증인으로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얼마나 속이 상하고 분통이 터졌으면 텅 빈 속을 하늘로 까발려 놓았을까. 나이 420살의 증인 느티나무 노거수는 유비무환의 자세가 중요함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계단을 딛고 올라서니 정원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봉도각(鳳島閣)을 둘러싸고 있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라는 뜻의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원리에 따라 둥근 모양의 연못에 단을 쌓고 그 위에 정자를 세웠다. 좌측의 연못은 사각형을 이루었고 북쪽에 돌다리를 놓아 정자로 출입하고 있었다. 조덕상(趙德常) 순흥부사가 건립하였다고 하는 봉도각의 ‘봉도(逢島)’란 신선이 산다는 봉래(逢萊)를 뜻한다. 당시 관원, 아전들의 휴식소로 삼았다고 한다. 정원의 주변에는 죽헌남정광기념비(竹軒南政廣記念碑), 애국지사 최봉환 선생 추모비(愛國志士崔鳳煥先生追慕碑)를 비롯하여 순흥 경로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경로소는 조선시대 때는 약국의 기능을 하며 ‘경로국(敬老局)’으로 불리다가 그 후 지역의 어르신들이 모여 각종 대소사, 가문의 다툼, 이웃의 분쟁 등을 해결하는 곳으로 이용되어 향촌 제도의 기능을 수행하며 400여 년을 이어 온 전국 유일의 ‘경로소(敬老所)’라고 한다.
정원의 주인은 왕버들이 아닌가 싶다. 왕버들 한 그루는 나이 400살, 키 20m, 가슴높이 둘레는 6m를 훨씬 넘었다. 또 다른 한 그루는 펑퍼짐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일어서지 못하는 장애인으로 보였다. 잘려 나간 줄기며 속이 텅 빈 모습에서 아픈 역사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듯했다. 지금으로부터 270년 전 1754년 관아 뒤편의 정원을 조성할 때, 왕버들은 이미 130살이라는 나이를 먹었다 하니 왕버들을 그대로 둔 채 연못과 정자의 위치, 방향, 모양을 결정하고 다양한 수종의 나무를 심어 정원을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하겠다. 얼마나 우리 조상들은 나무를 보호하고 사랑하였는지 그 슬기로움을 엿볼 수 있다. 연못 주변의 왕버들과 소나무, 느티나무 노거수들은 순흥도호부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산 증인으로서 지방행정의 관청에 서서, 지역 주민의 끈기와 정신, 역사와 문화를 전해주는 살아 숨 쉬는 문화재이다.
순흥 봉도각 연비어약(鳶飛魚躍) 내용은...
惡侯玉弩(슬피옥찬) 산뜻한 구슬 안엔
黃流在中(황류재중) 황금 잎이 붙었네.
豐弟君子(기제군자) 점잖은 군자 남게
復寧協陵(복녕협릉) 복과 녹이 내리네.
鳶飛戾天(연비려천) 솔개는 하늘을 날고
魚躍于淵(어약우연) 고기는 연못에서 뛰네.
豐弟君子(기제군자) 점잖은 군자 남게
遹不作人(하부작인) 어찌 인재를 잘 쓰지 않으리.
“솔개가 하늘에 날고 고기가 연못에서 뛴다”라는 성군(聖君)의 다스림으로 세상이 조화롭고 정도(正道)에 맞게 운행된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글·사진=장은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