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대구 팔공산 인봉 신선송
을사년 뱀의 해를 맞이하여 새로운 마음의 다짐을 갖고자 새벽 5시에 집을 나서 팔공산 인봉 신선송을 찾아 나섰다. 어둠 속으로 자동차들은 헤드라이트를 켜고 새벽부터 도로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북지장사로 가는 좁은 산길로 접어들었다. 경사진 오르막길에 굽은 산길은 앞을 밝히는 헤드라이트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몸의 감각과 정신 집중으로 무난히 북지장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아직 주변은 어둠이 깔려 사물을 잘 분간할 수 없었다. 인봉의 소나무와 함께 해맞이할 요량으로 가파른 경사진 올레길을 따라 올랐다. 숨이 차서 고개를 들고 심호흡하는데 어두운 밤하늘 숲속 나뭇가지에 밝게 빛나는 달이 등불처럼 걸려 있었다. 밝은 한 줄기 달빛이 어슴푸레하게나마 어둠을 몰아내고 숲속의 산길을 밝혀 주었다. 길 위에 내려앉아 있는 달빛을 지르밟으면서 들숨과 날숨을 세어가면서 한 발짝 두 발짝 천천히 올랐다.
키 2m에 큰 줄기 60㎝·작은 줄기 50㎝
자연이 다듬어낸 우산형 분재 소나무
단아한 우산형 자태로 완벽 비율 뽐내
조선시대 대산 이상정의 남유록에 등장
“고색창연한 것 마음에 들었다”며 예찬
팔공산 국립공원 상징·천연기념물로
생태학적·문화적인 가치로 손색 없어
마침내 거대한 바위가 앞을 가로막았다. 아 이것이 팔공산 인봉이구나 직감하고 잠깐 그를 톺아보았다. 주변을 살피면서 바위에 오르는 길을 찾았다. 북쪽으로 가서 살펴보니 내려가는 등산길이 있고 바위로 오르는 길은 없었다. 그러면 남쪽에 오르는 길이 있겠지, 하면서 발걸음을 돌렸다. 그곳에도 가파른 바위 낭떠러지로 길은 없었다. 다시 한번 이쪽저쪽을 가보면서 살펴보았지만, 길은 찾을 수 없었다. 새벽에 어디 전화해서 물어볼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했다. 어둠이 걷히기를 기다렸다. 그 시간이 오히려 나에게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산행하다 보면 많은 사람이 “산(山)과 봉(峰)을 어떻게 구분하지?”하고 묻는다. 그렇다. 어떤 것은 산이라 하고 또 어떤 것은 봉이라 하니 헷갈리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산은 주로 산맥이나 산줄기의 큰 덩어리를 이루는 전체적인 지형을 의미하고 봉은 산의 일부로 특히 뾰족하게 솟은 산봉우리를 지칭하지 않나 싶다. 한라산, 설악산, 팔공산 등 높이와 면적이 넓은 지역을 포괄적으로 지칭하고 봉은 팔공산의 동봉, 서봉, 인봉 등 산의 한 부분으로 특정 지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팔공산의 지명과 유래를 생각하는 동안 어느 순간에 어둠은 산속으로 숨어들고 동쪽 하늘에 붉은 서기가 돌았다. 이제는 정말 오르는 길을 찾아야만 했다. 일어나서 다시 북쪽에서 남쪽으로 거대한 바위를 따라 훑었다. 거대한 바위가 조각나 떨어져 길을 막고 있었다. 떨어진 바위를 타고 넘었다. 그러자 바위와 바위 사이 좁은 공간에 노끈이 보였다. 겨우 몸 하나 지나갈 정도의 좁은 바위틈 사이를 비집고 노끈을 잡고 몸을 솟구쳐 올랐다.
인봉(579m), 거대한 바위 위에 올라섰다. 그곳에는 천년의 세월을 함께한 신선이 선물했다는 소나무 한 그루가 살아가고 있었다. 키는 불과 2m 남짓하고 큰 줄기 몸 둘레는 60cm, 작은 줄기 몸 둘레는 50cm 정도의 단아한 우산형의 자태였다. 너무나 완벽한 비율의 분재형 소나무였다. 분재형 소나무라면 화분과 흙, 물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곳 소나무는 화분 대신에 큰 바위들이 서로 맞물려 하늘로 솟구쳤다고 할까, 아니면 하늘을 받들고 있다고 할까, 아무튼 뾰족한 산봉우리 큰 바윗덩어리 위 좁은 틈새 열악한 환경에 뿌리내리고 살아가고 있었다. 바위 틈새에 있는 눈곱만한 흙은 비바람이 실어 오고 또 만들었지 않나 싶다. 화분에 있는 소나무도 시시때때로 물을 주지 않으면 주접이 들고 결국 생을 마감한다. 그런데 바위 위에 살아가는 소나무는 누가 물을 주고 보살핀단 말인가. 그리고 보면 자연이 힘을 합쳐 소나무를 다듬고 키우지 않았나 싶다. 바람은 멀리서 구름을 실어 오고 팔공산은 새벽마다 찬 이슬로 목을 축여주고 가끔 내리는 비는 바위 틈새에 머물러 소나무의 생명줄을 붙잡아주지 않았을까 싶다.
인봉은 팔공산 노적봉에서 뻗어 내린 능선 위에 다시 한 번 힘차게 솟구친 거대한 바위덩어리이다. 동서남북 사방을 막힘없이 조망할 수 있어 가슴이 뻥 뚫어졌다. 동산에 잉태의 붉은 산기를 더욱 짙게 물들이고 있다. 붉은 태양이 하늘로 힘차게 솟구쳐 오르고 있다. 햇귀의 기운이 막힘없이 이곳 인봉 신선송에 쏟아져 내린다. 나는 신선송과 함께 새해 해맞이를 했다.
동으로 뻗은 푸른 솔가지 솔잎이 반짝반짝 빛났다. 환상적인 해돋이 풍경의 순간을 맞이하여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신선송의 자태에 나도 모르게 두 손 합장하여 경외심을 표했다. 그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면서 그에게 나라의 안녕과 평화를 빌었다. 돋을볕은 먼저 팔공산의 높은 봉부터 찾아 들었다. 천왕봉(1192m), 비로봉(1176m), 동봉(1167m), 삼성봉(1150m)이 자리한 팔공산 정상의 봉우리를 밝혔다. 돋을볕으로 아침 세수를 하는 팔공산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들어왔다.
팔공산 치맛자락 접힌 명승지에 신라 고찰 동화사가 자리 잡고 통일대불상이 조용히 인봉을 바라보고 있다. 팔공산을 바라볼 수 있는 가장 멋진 곳, 인봉 바위 위에서 수백 년 동안 만고풍상을 견디며 여전히 푸르름을 잃지 않고 살아 있는 신선송과 황홀한 아침 해맞이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언제나 변함없이 무언의 신비를 전해 주고 있는 것 같은 신선송과 함께 팔공 백 리 능선을 바라보니 마음이 숙연하다. 아침 돋을볕이 서서히 산 아래로 내려와 시가지를 밝히고 있다. 낙동강이 대구 시민의 젖줄이라면 팔공산은 시민의 품이요 산소 카페이며 에너지의 발원지이다. 저 멀리 서쪽으로 눈 덮힌 가야산이 보이고 남쪽 앞산과 비슬산이 대구 시내를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팔공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자락의 봉들이 이어진 스카이라인 조망은 그 무엇보다 아름답다.
조선 시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은 1748년 팔공산을 유람하고 남긴 남유록(南遊錄)에서 “반쯤 시든 소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고색창연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라며 팔공산 인봉 소나무를 예찬했다. 이를 근거로 소나무 나이를 300살로 보기도 한다. 그때도 지금과 같다고 하니 300살을 더 보태어 600살이라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팔공산 인봉 소나무는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우리에게 불망의 ‘인봉 신선송’이다. 바위 위에 올려놓은 자연이 다듬은 바위 분재 소나무이다. 팔공산 국립공원 상징물과 천연기념물로 ‘인봉 신선송’은 생태학적으로나 문화적 가치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고색창연한 신선송의 고고한 자태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의 방문으로 뿌리가 노출되고 답압으로 생육환경이 날로 열악해지고 있어 팔공산국립공원관리공단이 관심 가져 주었으며 하는 바람을 해 본다.
필자의 시 ‘팔공산 인봉 신선송’
팔공산 인봉 바위에
신이 씨앗을 뿌리고 다듬은
천년의 숨결로 뿌리내린 신선송
새해의 빛을 가장 먼저 품는구나.
비바람에 흔들려도 꺾이지 않고
눈보라에 휩싸여도 잎을 잃지 않는
바위틈새 깊이 내려진 뿌리는 세월을 뚫고
하늘로 뻗은 두 팔은 내일의 태양을 부른다.
그 뿌리는 깊고, 심지는 강하여
붉게 떠오르는 아침의 태양처럼
꿋꿋하고 단아한 자태
희망의 등불이다.
/글·사진=장은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