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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정치’가 아닌 ‘진심’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새마을운동의 바른 정신

△경제살리기에 두팔을 걷다나라가 어려울 때 국민이 나서야 된다고 생각해요. 역사를 봐도 항상 그렇게 해왔구요. 나라가 힘들면 결국 국민이 힘드니까 스스로 해결해야죠.경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IMF 당시 금모으기 운동을 해서 전국에서 구미새마을회가 1등도 했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았어요. 10원 동전모으기, 재활용품 수집 등 작은 일이었지만 나라살림에 도움이 되는 일을 많이 했어요.사람들은 금모으기 운동 밖에 기억하지 못하지만. 동전모으기 운동은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어요. 학생들은 돈이 없으니까 10원 동전이라도 모아서 나라살림에 보탬이 되라고 시작했죠. 학생들도 적극 동참했었어요. 당시 모금 금액이 얼마인지는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학생들이 모은 10원 동전을 도청에 전달했어요. 매년 해오던 사업이긴 하지만 재활용품수집경연대회도 나라살림을 위한 모금이었죠.당시 동네 주민들이 적극 도와주었어요. 너나할 것 없이 모두가 동참해 고철 등을 모아 기금을 마련했어요. 지금 생각하도 우리 국민만큼 애국심이 강한 나라는 없을 거에요. 나라가 어려울 때 마다 나라를 지킨 국민들이니까요. 새마을운동도 애국심에서 비롯된 거에요.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런 봉사를 할 수가 없거든요.北 돕는 것에 정치잣대 안돼어려운 사람 외면말고 도우면마음·진심이 반드시 통해△어려운 가정환경의 학생들을 돕다난 공부를 안해서 좋은 대학에 못 간거지, 환경이 어려워서 공부를 목 했던 것은 아니거든요. 또 아버지가 지역에서 존경받는 교육자이셔서 그런지 어려운 환경으로 학업을 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요.그러다 우연히 전자공고 학생 2명이 가정이 어려워 학업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학비를 졸업할 때까지 내가 내주었어요. 점심시간에 불러내서 밥도 해먹이고, 교복도 해주고 했어요.그 학생들이 졸업을 한지가 벌써 30년 가까이 되는 것 같아요. 잘 살고 있을거라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작년에 한번 찾아왔더라구요. 얼마나 반갑던지. 지금 김천우체국에서 근무하고 있다면서 꿀 한병하고 유과 한상자를 들고 왔어요.그동안 먹고 살기 바빠서 찾아 뵙지 못했다면서. 정말 그때 감사했다고 말하는데 눈물이 다 나더라구요.그래도 날 이렇게 기억해주고 번듯하게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또 한번은 남편 제자 중에 김천여고에 들어갔는데 교복 살 형편이 안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김천 동신양잠점에 가서 교복을 하나 맞춰 주었어요.그 학생 부모님이 항아리 장사를 하시는데 고맙다면서 멋진 항아리를 주시기도 했어요. 아직도 그 항아리가 집에 있어요. 항아리를 볼때마다 생각이 나요.돈이 없어 공부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진짜 말이 안되는 것 같아요. 자기가 하기 싫어서 안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하고 싶은데도 못하는 것은 안되는 거에요. 그런 일이 없도록 이 사회가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어린 학생들에게 어른들이 좀 더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간섭을 하라는 것이 아니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에요. 구미시새마을부녀회가 주관하는 바자회가 있어요.내가 회장을 맡고 있을 당시에는 그 수익금으로 장학금을 지급했었어요. 지금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회장을 맡았던 5년동안은 그렇게 했어요. 금오공과대학교 학생들에게 매년 200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했죠. 한 학생에 100만원씩. 2명에게 장학금을 주었어요. 비록 큰 금액은 아닐지라도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은 새마을운동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제발 어린 세대들이 새마을운동을 지붕만 고쳐주는 그런 사업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그 정신을 제대로 배웠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요. △남을 위한 마음이 세상을 움직여 1990년인가 정확하게 기억은 안나는데 아마 맞을 거에요. 당시 경기도 파주에 물난리가 나서 많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구미시새마을회가 도움을 주기로 했어요.간장, 고추장, 수건, 라면 등 생필품을 챙겨 트럭 2대에 싣고 파주로 갔어요. 트럭 2대분을 싣고 현장에 가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하더라구요. 물난리라는 걸 TV로만 봤지, 현장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가서 생필품을 나눠 주고 마음으로 위로를 해드리고 왔어요.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잊을 때 쯤 구미에서도 물난리가 났어요. 1991년 8월로 기억하는데 강평동이 완전히 물바다가 됐어요.뉴스에도 보도가 되고 했는데, 그 뉴스를 봤는지 파주에서 예전에 도와줘서 고맙다며 쌀 100포를 싣고 왔어요. 그걸 함께 수해민들에게 나눠주는데 정말 고맙더라구요.이래서 서로 돕고 살아야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 지역과 국가가 있어서는 안되요. 지금은 잘 살아도 언제 어려워 질지도 모르는게 세상살이 잖아요.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절대 외면하면 안되는 거에요.이 지역에서 40년 넘게 새마을 봉사활동을 하면서 느낀점은 절대 어려운 사람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거에요. 그건 새마을정신에도 어긋나는 일이에요. 가끔 북한을 돕는 일에 정치적인 해석을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해요.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을 하는 사람이 정치적인 잣대를 갖고 일을 해서는 안되는 거죠. 정치는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어려운 사람을 진심으로 도우면 되는 거에요.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그 진심을 알거든요. 그런 진심이 세상을 움직이는 거에요. 정치가 세상을 움직이는건 아니에요. 사람들이 이 사실을 좀 깨달았으면 좋겠어요.▲ 조순란 전 구미시새마을부녀회장이 그동안 받은 상장과 감사패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모든 책임은 나에게가끔 사람들이 물어봐요. 구미시새마을부녀회장 임기가 3년씩 두번인데 6년이 아니라 5년만 한 이유가 뭐냐고. 참 부끄러운 일이라 대답하기가 곤란해요.그냥 마음에 묻고 살아야지. 다 내 잘못이니까. 사실 5년째 되던해에 내가 스스로 물러났어요. 어떻게보면 불명예스러운 일이죠. 40년 넘게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해 왔는데 그 경력에 큰 오점을 남긴거에요.당시 바자회에 쓰라고 한 업체가 상품으로 스폰을 해줬었어요. 좋은일을 하는 거니까. 그런데 스폰을 받은 물건이 다른 곳에 쓰여졌어요. 비록 내가 한 일은 아니지만, 내가 회장이고 책임자니까 그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난거죠.이런 불미스런 일을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당시의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절대 아니에요. 변명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단지 누구나 자신의 직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에요.요즘 사람들은 항상 남 탓을 하잖아요. 위에 높으신 분들이 더 그러는 것 같아요. 지도자라면 밑에서 잘못한 일도 스스로 책임을 질줄 알아야해요. 사람을 잘못 쓴것도 지도자의 책임이니까요.지도자가 밑에 사람이 한 잘못을 회피한다면 그건 지도자가 아니죠. 새마을운동은 지도자 교육이라는 걸 하잖아요. 그건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 때문이에요.지도자가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시민들이 믿고 따르는 거니까. 난 새마을운동을 정말로 신바람나게 일했어요. 즐거운 마음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고 자부해요. 그리고 새마을 지도자라서 항상 조심했어요. 내가 하는 언행에 있어 신중하게 했어요. 내가 잘못을 하면 새마을 전체에 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비록 명예스럽지 못하게 회장직을 중간에 그만 두었지만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아요.다만, 책임을 져야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에요. 그래야 우리같은 국민들이 편하게 살 수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라도 사람들이 새마을운동에 좀 더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해요. 그래야 지도자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알 수 있으니까.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8-08-31

IMF 당시 십시일반 모아 양파망에 담아간 금·달러 ‘전국 1등’ 영광으로

▲ 조순란 전 구미시새마을부녀회장이 자신이 큰 손으로 불리우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조순란(68) 전 구미시새마을부녀회장은 1949년 12월 1일 김천에서 3남4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남편 일 도우며 봉사활동 시작새마을부녀회 뿐 아니라동네 부녀회장 지내며‘큰 손’ 으로 불릴만큼마을·지역 위해 활발한 활동김천에서 교직에 몸 담고 있던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예의범절 교육을 엄하게 받았다. 부친은 당시 대구사범을 나와 17세에 초등학교 교사로 시작해 26세부터 학교장을 역임했다.평생 교육계에 몸 담은 아버지는 항상 남을 위한 봉사활동도 많이 해 지역에서 가장 큰 어른으로 존경을 받았다. 조 회장과 형제들은 혹여 아버지의 명예에 누가 될까 품행에 각별히 신경을 많이 썼다.조 회장은 24세에 결혼한 후 26세 때 남편의 직장 문제로 구미로 이전해 처음으로 새마을운동을 접하게 됐다. 조 회장은 부모님이 평소 지역에서 남을 위한 일을 많이 하신 것을 옆에서 보고 자랐던 터라 봉사는 그에게 당연한 것이었다고 말한다.봉사활동에 누구보다 열정을 가진 그를 주위사람들은 큰 손 회장이라 부른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퍼주는 손이 크다는 이유다. 조 회장은 구미시새마을부녀회 부회장, 구미시새마을부녀회장을 거치면서 새마을유공자상, 내무부장관 표창, 새마을중앙회 공로상 등을 수상했다.△아버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딸아버지는 평생을 교육에 몸 담으신 분이셨어요. 항상 책을 가까이하고 배우는 것을 좋아하셨어요. 굳이 나의 아버지가 아니더라도 진심으로 존경할만한 그런 분이셨죠. 대구사범도 1등으로 졸업하고, 항상 장학생 자리를 놓치지 않으셨대요.26세 때 교장이 되셨으니 어려운 점도 많았을텐테 현명하게 잘 풀어내셨던 것 같아요. 어린 나이에 교장이 되셨으니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선생들과 지내기가 말처럼 쉽지 않았을거 아니에요.그런데도 어느 누구에게도 손가락질 한번 안받고 평생을 사셨으니 그것만으로도 존경을 받을 만 한거죠.우린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그런지 형제가 모두 잘 됐어요. 나만 빼고.나는 고3때 속된 말로 농띠라는 것을 쳐서 대학을 못 갔어요. 형제들 중에 유일하게. 다른 형제들은 좋은 대학 나와서 모두 좋은 직장에 들어갔어요. 그래서인지 전 아버지에게는 아픈 손가락이었던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많이 죄송해요.공부만 그런게 아니에요. 결혼도 마찬가지에요. 결혼 당시 남편의 집안은 정말 많이 가난했어요. 그래도 성실한 남편만 믿고 결혼했어요. 남편은 6형제에 장남이었어요.결혼 후 내가 모든 시동생을 거둬야했죠. 내가 나이어린 시동생들 목욕탕에서 씻기고 키워 장가 다 보냈어요. 사실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어요. 돈이 없어서 아침 저녁은 항상 국수를 먹을 정도였어요.아버지는 그런 내가 항상 마음에 걸리셨을 거에요. 아버지는 내가 결혼을 했는데 6개월 동안 혼인신고를 못하게 하셨어요. 아마도 내가 그 고생을 참지 못하고 되돌아 올거라 생각하셨던 같아요.지금 생각하면 아버지가 농사꾼이었으면 아마 바로 친정으로 도망갔을 거에요. 하지만 아버지가 명색이 교육자로 지역에서 존경 받는 어른이신데 차마 그럴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결심했죠. 지금부터라도 아버지 기대에 부응하는 딸이 되어야 겠다고.항상 솔선수범하고, 모범이 되는 사람이 되자. 남들에게 상처주는 일 하지 않고 봉사하며 살겠다고 다짐했어요. △남편을 따라 구미로 이사24살 때 결혼해 26살이 되던 해 구미로 오게 됐어요. 남편이 김천에서 체육관을 하고 있었는데, 작은 아버지가 성진고등학교 야간부에 계셨는데 체육선생이 필요하다고 해서 구미로 오게 됐어요.야간 학교니까 체육선생을 하면서 합기도 영비관을 운영했어요. 한 5년을 그렇게 일하다가 구미시체육회 사무국장으로 근무하게 됐죠.처음에는 구미 원평3동에서 살았어요. 그러다 한우 아파트 15평을 분양받아 살게 됐어요. 그런데 주민들이 나보고 아파트 부녀회장을 맡아달라고 부탁을 하는 거에요.처음에는 왜 나더러 부녀회장을 맡으라고 하는지 몰랐는데, 남편이 체육회 사무국장이다보니 무슨 행사 때마다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을 봤었나봐요. 나중에 알았는데 주민들이 부지런해 보여서 추천을 했다고 하더라구요. 당시엔 남편을 위해 일을 많이 했어요. 경기가 있으면 선수들 밥 굶지 말라고 김밥 100인분 만들어 주기도 하고, 체육인의 밤 같은 행사가 있으면 새벽부터 장을 봐서 지짐도 굽고 여러 음식을 만들어 대접했어요.그러면 행사에 오신 시장님이나 서장님 같은 분들이 사무국장 아내 분 때문에 이런 행사를 잘 치를 수 있다고, 사무국장님은 정말 장가 잘 가신거라고 치켜세워 주셨어요.그런 식으로 나름 소문이 나기 시작해서 지역에서 여러 봉사일을 맡게 되었죠. 그래서 새마을운동도 하게 된 거구요. △큰 손으로 불리게 되다결혼을 한 뒤부터 봉사하며 살겠다고 마음을 먹어서 그런지 봉사할 수 있는 곳에서 나를 많이 찾았어요.처음 구미에 와서 원평3동 총무를 하다가 한우아파트에 입주한 뒤에는 부녀회장을 맡았고, 형곡동 2주공에서도 부녀회장을 지냈어요.구미시새마을부녀회 부회장을 4년동안 하고 부녀회장을 5년동안 맡아했죠.사람들이 나더러 큰손이라고 부르는데 그건 아마도 내가 손이 커서 그런 것 같아요.무슨 일을 하던 부족하면 안된다고 생각해 매번 푸짐하게 해서 그런가봐요. 처음 큰손으로 불리우게 된 것은 학교 어머니회 회장을 하고 있던 때였어요.당시 금오초등학교 어머니회장을 했었는데 교장 선생님이 아버님이랑 잘 아는 사이였어요. 그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학교에 복사기가 없어 학생들 시험 때마다 힘들다고 하시더라구요.그래서 당시 600만원을 주고 복사기를 학교에 기증했어요. 선생님들이 많이 고마워 하셨어요.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교육자이셨기 때문에 학생들 가르치는데 불편함이 없어야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거에요.금오여고 어머니회장을 했을 때에는 학교 전 교실에 커튼과 선풍기를 달아줬어요. 스승의 날이면 음식을 해서 선생님들에게 대접했구요.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을 존경해야 한다는 것을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한 거에요. 이런 일들 때문에 큰손으로 불리운 것 같아요. 하지만 진짜 큰손은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시작됐어요.IMF 당시 금모으기 운동, 10원 동전 모으기 운동 등에서 큰손의 힘이 발휘됐어요.△금 모으기 운동때 전국 1등 하기도내가 4대 구미시새마을부녀회장이었어요.1995년부터 2000년까지 5년동안 부녀회장을 했는데 그 중 가장 어려웠던 일이 바로 금모으기 운동이었어요. 부담감도 컸구요. 나라가 힘든 상황에 처해 있으니 새마을회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이고, 그러니 당연히 지도자들이 나서 솔선수범 해야했어요.정말 이 일은 잘하고 싶었어요. 다행이 많은 분들이 동참해 주셨어요. 역대 전 회장님들도 많이 도와주셨구요.금모으기 운동이었지만 당시 달러도 받았어요. 내 기억으로는 달러도 많이 받았어요. 금액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금액이 상당히 많았어요. 미안하다면서 그냥 현금으로 주시는 분들도 많았거든요.그 많은 금과 달러, 현금을 들고 직접 새마을중앙회까지 가서 내야했는데 너무 겁이 나는 거에요. 그래서 이화자 전 회장님과 함께 새마을호를 타고 갔어요.그런데 어디에 금을 넣고 갈까 고민하다가 양파망에 넣어 갔어요. 사람들 눈에 별로 띄지도 않을 것 같고 해서. 지금 기억에 모은 금의 부피가 큰 양파망에 반 이상 찼었어요. 무게도 무지 무거웠구요. 그래도 어렵게 들고 간 보람은 있었어요. 구미시가 전국에서 1등을 했으니까.지금 생각해도 나라를 위해 무엇이라도 했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해 준 금모으기 운동이었어요. 그때 우리 국민이 이 나라를 정말 많이 사랑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어요.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8-08-30

새마을운동의 참 의미 ‘봉사’로써 세대간 격차 줄어들 수 있기를

△ 새마을알뜰벼룩장터를 만들다구미시 새마을부녀회장을 2006년 맡게 된 이후 당시 남유진 구미시장의 권유로 알뜰벼룩장터를 만들게 됐어요.재사용이 가능한 물건들이 너무 쉽게 버려지는 것을 조금이나마 막아보자는 취지였죠. 한마디로 ‘아나바다’운동이죠. 그런데 남 시장님이 물건 가격은 무조선 1천원 이상은 안된다고 못을 박았어요. 가격이 너무 저렴하니까 사실 하기가 쉽지 않았죠. 시장님과 가격 절충을 해야했어요. 다른 곳에서 열리는 벼룩장터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대구 두류공원, 서울 뚝섬 같은 곳에 다녀왔었어요. 그 곳에서는 전부 가격이 자율에 맡겨져 있더라구요. 그런 내용들을 몇번이나 시장님에게 건의했는데 정말 씨알도 안먹혔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2007년 처음으로 새마을알뜰벼룩장터를 열었어요. 제법 괜찮은 물건들도 나왔어요. 그런데 괜찮은 물건도 조금 못한 물건도 모두 1천원이니까 파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거에요.국수 같은 음식도 1천원, 옷도 1천원, 장남감도 1천원이니 파는 사람들이 힘들어하죠. 국수를 팔기 위해서도 면을 뽑고 육수를 준비하려면 적어도 3일은 걸리는데 말이에요. 나중에 알았는데 그래서 새마을부녀회에다 그 일을 맡긴거에요. 다른 단체에서는 그렇게 못하니까. 손해보면서 누가 하려고 하겠어요. 오롯이 봉사라고 생각하고 해야하는 일이에요. 처음 그렇게 고생했어도 계속 열리고 하니까 어느정도 기틀이 잡히기 시작하더라구요.지금도 매월 둘째주 토요일에 시청 후면 주차장에서 열리고 있어요. 구미에 오면 꼭 한번은 가봐야 하는 곳으로 추천하고 싶어요.새마을운동으로 단 한푼도 벌어본 적 없어잘못된 언론 이야기로 젊은 세대들이 오해젊은 지도자 나와 기성세대 이끌어줘야젊은이들에게 지도자의 기회를 줘야새마을운동이 더 활기차게 될 것△ 아무리 어려워도 남 탓은 하지말자부녀회장이 되고 나서 해외에도 몇 번 나가게 됐어요. 당시 새마을세계화운동이 한창이었거든요.간혹 해외 나가서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에요. 우리가 놀러가는게 아니잖아요. 정말 안가보면 몰라요. 얼마나 열악한 곳에 가는지를. 한번은 몽골 수와바트라에 가는데 비행기에서 내려 버스로 13시간을 이동해요. 그런데 길도 비포장이고, 먼지가 버스 안으로 막 들어와요.버스 안에 있는데 바닥에서 먼지가 막 올라오더라구요. 당시 하얀옷을 입고 갔었는데 아주 까맣게 되기도 했어요. 천으로 입도 가리고 가야할 정도였죠. 그렇게 어렵게 도착하니 밤이 됐더라구요. 근데 허허벌판에 길 위에서 잠을 자야했어요. 아무것도 없이 그냥 맨 땅바닥에 누워 자는거에요.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머리는 먼지로 다 엉켜있고.처음에는 ‘나를 이런 곳에 대체 왜 데려왔지’라는 생각을 했어요. 너무 힘드니까 남 탓을 했던거죠. 그러다 하늘을 봤는데 정말 별이 곧 쏟아져 내릴 것만 같더라구요. 그렇게 한동안 별을 보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여기 온 것도 다 이유가 있겠지. 남 탓을 하지 말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생각한 ‘남 탓을 하지 말자’가 지금 저의 좌우명이에요. 내가 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으면 내가 노력을 더 해서 끌고 가면 되는거다. 그렇게 믿고 살아가고 있어요.아무튼 그때 그런 마음이 생기니까 불평불만도 없어지고, 일을 더 열심히 했어요. 당시 말도 안통하고 무엇부터 해야할지 몰라 허둥대기도 했지만 뭐라도 하려고 하는 나를 보면서 그 사람들도 마음을 열어주는게 느껴졌어요. 몸은 힘들었지만 나에겐 큰 가르침을 받게 해 준 고마운 곳이에요.△ 젊은 세대에게 새마을운동의 기회를 주어야언젠가 언론에서 새마을은 지금까지 장사를 많이 했으니 이제 내려놓을 때가 됐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봤어요. 하지만 이건 정말 잘못된 말이에요. 나부터 새마을운동으로 단돈 100원도 벌어본 적이 없어요. 구미시부녀회장 할적에 500만원, 경북도부녀회장 할적에 1천만원의 돈을 내면서 했어요.언론에서 알지도 못하면서 막 떠들어대니까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새마을운동을 오해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사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어떻게 새마을운동에 대해 알 수 있겠어요. 가르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그리고 새마을운동과 그 정신은 옆에서 누가 교육한다고 되는게 아니라고 생각해요.새마을운동 자체가 생활이 되어야하는 거죠. 새마을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식구들은 새마을운동에 대해 잘 알아요. 옆에서 항상 보는 거니까. 새마을운동을 접하지 않은 사람들은 절대 모르죠. 그런 와중에 기성 세대라는 사람들은 “옛날에 우리는 어떻게 했다. 정말 어려운 시절이었다”라고 말을 하는데 그걸 경험하지 못한 지금 젊은 세대들이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그냥 마지못해 듣고 흘리는거지.새마을운동이 앞으로 젊은 세대들에게 잘 전달이 되려면 기성 세대가 생각을 열어야해요. 젊은 세대들에게 기회를 주어야해요.젊은 세대들이 봉사를 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거에요. 사실 부녀회장만 해도 어른들, 즉 나이든 분들만 하게끔 하거든요. 젊은 사람들에게 지도자의 자리를 주어야한다고 생각해요.그래야 새마을운동의 지도자로서 책임감도 가질 수 있을 거고, 직접 해 봄으로서 새마을운동이 이런 것이라는걸 알게 되겠죠.새마을지도자가 꼭 나이가 든 사람이 할 필요가 없어요. 항상 앞장서서 누구보다 열심히 해야하는 자리니까 젊은 사람들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면 지금보다 더 활기찬 새마을운동이 될거라 믿어요.그렇다고 기성 세대가 물러나라는 소리는 아니에요. 옆에서 조언을 해주면 되는거니까. 이제는 젊은 새마을지도자가 나이 든 회원들을 이끌면서 봉사하는 그런 모습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럴 수 있다면 새마을운동의 종주도시인 구미에서 그런 모습이 제일 먼저 나오길 바래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가장 해 주고 싶은 말이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에요. 옛날에는 배고픔이 가장 힘들었다고 하잖아요.전 배고픔을 아는 세대는 아니지만, 지금보다는 풍족하진 못했다는 거에요. 저보다 앞의 세대가 배고픔을 겪은 세대죠.그런 세대들이 힘들게 노력한 덕분에 저의 세대는 배고픔을 모르고 자랐고, 지금의 세대는 먹는거에 있어서는 넘치는 세대가 된거죠. 하지만 사람이 먹는것만 해결된다고 사는게 아니잖아요.요즘 젊은 세대들이 혼족이니, 혼밥, 혼술을 한다고 들었어요. 혼자 하는거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그렇더라구요.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있는 동물이 아니잖아요. 사회적 활동을 해야만 하는 동물이고, 그래야 성취감도 생기고 행복해 질 수 있는 거라 생각해요. 젊은이들이 이젠 그만 인터넷 가상세계 이런 곳에서 벗어나 사회로 나왔으면 해요. 그리고 그 사회로 나오는 길목에 새마을운동이 있었으면 하구요.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이제 젊은이들이 지도자가 되어 어른들과 함께 손잡고 지역사회와 국가를 위해 봉사를 하면서 이 사회를 이끌어 주었으면해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젊은이들의 뜻이 갈 수 있는 길이 새마을이었으면 해요.그러기 위해서는 기성세대들도 많은 것을 내려 놓아야하구요. 새마을운동이 뭐에요. 국민운동이에요. 누구나가 할 수 있는거에요. 젊은이들도 새마을운동이 나쁘다 좋다 말로만 하지말고 몸소 한번 실천을 해보고 새마을운동에 대해 이야기해야 되는 거에요.새마을운동이 봉사로 세대간의 격차를 줄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새마을운동의 옛 구호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처럼 모두가 잘사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8-08-24

협찬받은 무대복 입고 전국대회 ‘장려상’… 최선 다한 결과 가슴 벅차

▲ 김선애 전 경상북도새마을부녀회장이 구미시새마을여성합창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김선애(56) 전 경상북도새마을부녀회장은 1962년 11월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당시 의성에서 새마을부녀회장을 하던 모친의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봉사와 새마을운동을 접했다. 1985년 결혼을 한 후 대구에서 살면서도 봉사활동에 참여했다.이후 남편 직장때문에 구미로 이전한 뒤 구미시새마을여성합창단장을 시작으로 새마을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2006년 구미시새마을부녀회장을 6년간 역임하고 2012년부터 올해 2월까지 경상북도새마을부녀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12년동안 구미시와 경상북도 새마을부녀회장을 역임하면서 알뜰장터와 새마을대청소 등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올해 2월 경북도새마을부녀회장에서 물러난 뒤에는 지역 봉사활동에만 전념하고 있다.구미 새마을여성합창단장 시절보조금 없어 발품팔아 단원 구색 갖춰단원들 자비로 전국대회 출전도베트남서 첫 해외공연… 열악한 조건에도땀 흘리며 마치자 끊임없는 박수세례△봉사는 대가를 바라고 하는게 아니다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어요. 어릴적 기억에 어머니가 새마을부녀회장을 오래 하셨어요. 지금은 임기가 있어 임기가 끝나면 다른 사람이 하지만, 당시에는 부녀회장을 하면 임기라는게 없었던 것 같아요.시골이었으니까 더 그랬겠죠. 그리고 우리집이 구판장을 했으니까 당연히 어머니가 부녀회장을 하신거 같아요. 시골동네여서 그런지 어머니가 부녀회장이고 다른 아주머니들은 모두 부녀회원이었어요. 동네 전체 아주머니 모두가 부녀회원이었죠. 내 기억으로는 동네에서 무슨 일만 있으면 어머니를 비롯해 동네 아주머니 모두 모여 일을 했어요.지금 생각해도 그땐 단합이 참 잘되었던 것 같아요. 어머니도 매우 적극적인 성격이셨기에 동네 잔치, 동네 청소 등 모든 일에 적극적이셨어요. 내가 대구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 하기 전까지 어머니가 하시는 일들을 옆에서 보면서 자랐죠. 제가 조금 철이 들고나서는 어머니가 하는 일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저리 열심히 일을 하는지 몰랐거든요.나중에 알았죠. 그게 봉사였고, 새마을운동이라는 것을. 사춘기 시절 어머니께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돈을 주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하냐고 물어 본 적이 있었요. 그때 어머니는 웃으면서 “봉사는 댓가를 바라고 하는게 아니다”라고 대답하셨는데 그 말이 잊혀지지 않아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바로 새마을정신이 아니었나 싶어요.△구미시새마을여성합창단장을 맡다결혼하고 대구에서 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 직장문제로 구미로 오게 됐어요. 대구에서도 봉사활동을 했었으니까 구미에 와서도 봉사활동을 계속했죠.지역에서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다보니 여러사람들을 알게됐어요. 그러다 어느날 한 지인분이 새마을여성합창단장직에 나를 추천하셨어요. 난 합창단원을 한 적도 없고, 합창단에 대해 솔직히 아는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거절을 했죠. 거절은 했는데 너무 신경이 쓰이는 거에요.그래서 여성합창단에 대해 조금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이게 원래는 송정어머니회 합창단이었다가 나중에 없어지면서 새마을합창단에 편입이 되었더라구요.근데 보조금이나 이런게 없다보니 사실상 운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어요. 그러니 활동하기가 많이 어려웠던거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았어요.합창단에 대해선 모르지만 대외적인 일은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또 부단장이 있으니까 내부적인 일은 부단장이 하고 외부적인 일은 단장이 하면 되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구미시새마을여성합창단장을 하기로 결정했죠.근데 막상 합창단을 보니까 힘든 점이 한 둘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내가 합창단에 대해 잘 모르고, 외부인이다보니 보이지 않는 텃새 같은 것도 조금 있었구요. 그런건 사실 별 문제는 아니었고 진짜 문제는 너무 열악한 환경이었어요.합창단원들이 무대에 서려면 그래도 무대복이라도 변변한게 하나 쯤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어요. 그래서 발품을 팔았죠. 돈이 없으니 발품이라도 팔아야 했어요. 다행히 대구에서 생활할때 아시는 분이 섬유공장을 하고 계셔서 무대복을 만들 수 있는 천을 협찬을 받고, 무대복을 만드는 것도 전부 협찬을 받았어요. 구두도 협찬을 받고.그분들에게 그냥은 못가니까 연락해서 점심이나 하자고 약속을 잡고 밥 먹으면서 부탁을 했죠. 그렇게 발품을 팔아 단원들의 복장을 다 갖출 수가 있었죠. 꾸준히 봉사활동을 하면서 맺은 인연으로 그분들이 도와주신거죠. 지금도 그때 도와준 분들에게 감사하죠. 참 고마운 분들이었어요. △전국합창대회에서 장려상을 받다합창단이 어느정도 구색이 갖추어진 뒤로 여러 무대에 오를 수 있었어요. 매년 두 차례 정기연주회와 각종 행사에 특별출연을 했죠. 그래도 구미시새마을여성합창단이니만큼 구미를 알릴 수 있는 합창단이 되고 싶었어요.좀 더 전문적인 합창단이 되어야했죠. 하지만 재정적으로 열악하다보니 전문가를 모시기가 사실 어려웠어요. 지역 대학에는 음대가 없다보니 다른 지역에 계신 분들이 오셔야 하는데 교통비 드리기도 빠듯한 실정이었으니 사실상 어려웠어요.사실 반주자와 지휘자는 전문가가 해야하는 거에요. 시에서 보조금을 주긴 했는데 사실상 그분들에겐 너무 적은 금액이었죠. 사실상 봉사개념으로 봐야 했어요.그래도 그런 분들이 계셔서 전국대회에 나갈 수 있었어요. 보조금은 전부 그분들에게 줄 수 밖에 없으니 단원들은 모두 자비로 했어요. 연습하고 난 뒤 밥이나 간식 같은 건 모두 단원들이 자비로 했죠. 그만큼 합창단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어요. 그런 열정으로 전국대회에 나가게 됐어요.내가 단장을 맡고 처음 나가는 전국대회가 바로 제주도에서 열리는 탐라전국합창경연대회였어요. 2004년도에 열린 대회에 우리가 참가했어요. 그때 장려상을 수상했어요. 비록 1등은 아니었지만 열악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물이었기에 그 의미가 남달랐어요. 그래서인지 당시 언론에서도 많이 다뤄주었어요.신문에 우리가 장려상을 탄게 보도가 많이 되었죠. 새마을여성합창단이 새마을운동의 발원지인 구미를 전국에 알렸다며 많은 분들이 축하해 주셨어요. 지금 생각해도 가슴 한켠이 뜨거워 지는게 참 고맙고 대견하게 생각해요. 그 일을 계기로 많은 행사에서 우리를 찾아주셨어요.환경연수원의 숲속음악회, 금오공대 총동창회 축하공연, 길거리 공연 등 지역의 크고 작은 행사에는 꼭 우리 새마을여성합창단이 함께 했죠. 참 행복했어요. △해외 공연으로 새마을운동을 알리다전국 대회에서 입상을 한 뒤 해외 공연까지 가게 됐어요. 제일 기억에 남는 해외 공연이 처음으로 간 베트남 공연이었어요. 첫 해외 공연이라 사실 기대했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너무 시설이 열악한 거에요. 정말 너무 놀랐어요.공연장이라고 마련된 곳이 그냥 천막이 쳐진 곳이었고, 그 더운날에 냉방은 전혀 안되어 있었어요. 대형 선풍기가 있었는데 그건 또 관람하는 사람들 쪽으로 되어 있었죠. 그래도 공연을 하러 간 이상 공연을 무사히 마쳤죠. 정말 열심히 했어요. 무대에 조명 장치가 없어 단원들이 노래를 하면서 손전등을 돌려가며 노래를 불렀으니까요.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땐 진지했어요. 정말 좋은 공연을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진심으로 공연을 열심히 하니까 통하더라구요. 그사람들도 우리가 무대복을 입고 땀을 줄줄 흘려가며 공연을 하니까 감동을 받았었나봐요.박수가 끊임없이 나왔어요. 베트남에서 그렇게 열정적인 박수를 받은 사람들은 아마 우리 합창단원밖에 없을 거에요. 무엇을 하더라도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게 새마을운동이잖아요. 난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우리 단원들은 공연으로 베트남 사람들에게 새마을운동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 것이라고.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8-08-23

새마을금고 저축했던 女직공, 고향에 선물한 소 한마리로 ‘장관 표창’

나이 어린 10대 여직공들 위해새마을운동 교육·절약정신 심어줘공단 내 근로자 90% 이상이 새마을금고 회원고기잡는 법 가르쳐주는 새마을운동어려움 딛고 일어서도록 돕는 것이 진정한 복지△새마을운동 교육으로 어린 직공들을 선도하다구미국가산업단지 내 직물협업단지에서 근무하는 80%이상이 미혼 여성이었어요. 대부분 나이가 어린 10대 여성들이었죠. 그 애들도 참 고생을 많이 했어요. 힘들었을 거에요.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당시 동구방직과 코오롱 회사 안에 고등학교가 있었어요. 시내에 한 곳도 있었구요. 초창기에는 대부분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일도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니까 어린 애들이고 하니 그런것이었지만 월급도 오르고 하니 하나 둘씩 노는데 정신이 팔리기 시작했어요.촌에서 자라 이곳에 와서 돈을 제법 벌게되니 씀씀이가 커지기 시작한거죠. 그렇다고 여긴에선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고. 어렵게 번 돈이니 절약하며 아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어요. 회사에는 일만 잘 시키면 되지 그런것까지 간섭을 하려 들지 않았구요. 또 어린 여자애들이 돈이 있다는 소문이 나니까 야간에 그 여자들을 꼬시려는 남자들도 생기고. 풍기가 문제가 되기 시작했어요.그냥 가만히 둘 문제가 아니었어요. 그도 그런것이 이런 안좋은 소문들이 나기 시작하니까 시골 가족들이 딸을 공장에 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거에요.당시에는 유교적인 사상이 강해서 안그래도 딸을 객지로 보내 일을 시키는것을 꺼려하는데 풍기 문제가 생기니까 더욱 안보내려고 했어요. 이런말을 하는게 좀 그렇지만 당시 구미공단에 딸을 보내면 시집은 못보낸다는 소문까지 있었어요.일단 사람이 있어야 공단이 돌아가니까 시골 면장과 사전에 이야기를 하고, 마을회관 같은 곳에서 구직 설명회를 가졌어요. 그 설명회는 일을 하는 당사자가 아닌 그의 부모들에게 하는 거였죠. 월급은 얼마나 주고, 밥과 기숙사 시설은 어떻고, 올바른 교육을 시키기 위해 이런 교육 등을 한다고 설명했죠. 그리고 회사측의 배려로 그 부모들에게 공장 견학까지 시켜주었어요. 그랬더니 사람을 구하는 일은 좀 해결이 되었어요. 그리고 어린 여성 근로자들을 선도하기 위한 새마을운동 교육을 함께 진행했어요.일단 풍기 문제는 당시 구미경찰서의 도움을 받아 매일 야간에 순찰활동을 벌였죠. 또 1976년부터는 구미경찰서와 선도교육을 실시했어요. 처음에는 반응이 좋지 않았어요. 그도 그럴것이 야간 쉬는 시간에 잡아두고 이런저런 것들을 하지 말라는 교육이었으니 좋아하지 않았죠. 하지만 120여회 정도 반복적으로 하니까 풍기문란 행위는 거의 사라졌어요.그때 구미경찰서 손승락 보안과장과 같이 일을 했는데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마운 사람이었어요. 정말 물심양면으로 많은 걸 도와주었지요. △절약정신을 심어주다풍기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되고 나서는 사치와 낭비를 추방해야 했어요. 시골에서 올라와 어렵게 번 돈을 함부로 쓰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건전소비생활교육이란 것을 5년동안 300여차례에 걸쳐 진행했어요. 저축을 통해 미래를 설계하는 방법을 주로 교육했어요.어린 직공들어었지만 미래 설계에 대한 관심을 굉장히 높았어요. 지금보다 미래에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이 다들 있었으니까요. 저축을 하기 위해선 돈을 맡길 곳이 필요했죠. 그래서 1979년 3월 회원 45명에 출자금 6만5천원으로 새마을금고를 발족했어요.당시 새마을금고 담당하는 여직원 한명과 둘이서 모든 업무를 봤죠. 힘들었어요. 내 일은 하면서 금융업무도 봐야했으니. 힘들었지만 보람도 있었어요. 공단 내 근로자 90% 이상이 새마을금고 회원이 돼 저축을 하게 됐으니까요. 거기에 사업자금, 농사자금, 주택자금, 학자금 등을 필요할 때 언제든지 빌려 쓸 수 있게 됐으니까요.그리고 그냥 돈만 모으도록 교육하지 않고, 충효 교육도 같이 했어요. 어렵게 번 돈을 미래의 자신을 위해 쓰는 것도 맞지만 키워 준 부모에게도 보답을 해야한다고 가르쳤어요.그러다 어느날 한 어린 여직공이 공단에서 3년 정도 일을 했는데 처음으로 고향에 갈 일이 생겼는데 부모님께 어떤 선물을 하면 좋을지 물어보는 거에요. 고향이 강원도 인제라고 했어요. 그래서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니 소를 한마리 사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죠. 그래서 큰 소를 하나 선물했나봐요.거기에다 마을 어른들을 모시고 경로잔치까지 열어 주었더라구요. 그 소식을 듣고 잘했구나 생각했는데 며칠 후에 그 마을 동장이라는 사람에게서 편지가 왔어요. 이 여 직공이 마을 사람들에게 새마을운동 교육으로 저축도 하고 공부도 하고 있고 있다는 설명을 했나봐요. 편지에는 ‘선생님 이런 험악한 세상에 아이들을 잘 교육시켜 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이었어요. 정말 힘이 나더라구요. 많이 고마웠어요. 그래서 새마을 운동의 좋은 사례라고 생각해 이 여 직공의 이야기에 대한 공적조서와 마을 동장 편지를 함께 제출했어요.그 후 1년 뒤에 여 직공이 당시 내무부 장관 표창을 받게 됐어요. 그 소식이 또 고향마을에 알려지게 됐구요. 마을에서는 내무부 장관 표창을 받은 사람이 처음이라며 잔치까지 열어주었다고 하더라구요. 지금 생각해도 뿌듯하고 고마워요.△구미시새마을협의회장을 맡기까지구미국가산업단지 내 직물협업단지에서만 새마을 운동 지도자 활동을 했는데 열심히 하다보니 그게 소문이 났나봐요.한번은 공단동에서 날 찾아와 새마을동협의회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하는 거에요. 당시 국가공단 전체를 맡아달라는 거였어요. 그때가 1978년 이었으니까 지금처럼 국가공단이 크진 않았어요.섬유관련 업체가 대부분이었고, 전자 관련 기업들이 들어오기 시작할 때였어요. 낮에는 나의 고유업무를 봐야하고 저녁에는 새마을교육을 나가야 하고 정말 힘들었지만, 공단동 새마을협의회장을 맡기로 했어요. 앞에서 이야기 한 것들을 공단 전체로 확대해 일을 진행했죠.그러다 1981년에 구미시새마을협의회장을 맡게 됐어요. 사실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어요. 아시겠지만 새마을협의회장은 돈을 받고 하는게 아니라 돈을 내고 하는 자리에요.월급쟁이인 저에게는 사실 부담이었거든요. 그래도 동협의회장들이 회의를 거쳐 추대한 것을 못하겠다고 할 수만은 없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죠. 당시 집에서는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렇지 않아도 새마을교육을 한답시고 집에 붙어있지도 않는 사람이 얼마 되지도 않는 월급에서 돈을 내고 구미시새마을협의회장을 한다고 하니 좋아할 리가 없었죠.그래도 집사람이 하지 말라는 소리는 안했어요. 싫은 기색은 있었지만 말은 하지 않더라구요. 지금 생각해도 고맙죠. 내가 새마을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말없이 날 도와 준 집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니까요.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새마을운동당시에는 검소하고 절약하고 열심히 일해서 잘사는 것이 새마을 운동이었다면 지금은 모두가 더불어 잘 사는 것이 새마을 운동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은 혼자 잘 산다고 되는게 아니거든. 더불어 잘 살아야하는 거지. 내가 좀 잘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베풀줄도 알아야한다는 뜻이에요.사람은 베풀 줄도 알아야하고 남을 도울 줄도 알아야해요. 도움을 받은 사람은 언젠가 나도 남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 하구요. 내가 생각하는 새마을운동은 바로 이런거에요.가끔 메스컴에서 보면 복지정책이라고 여러가지 나오던데. 난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하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 사람들이 어려움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진정한 복지라고 생각해요.가끔 주위에 받는거에 익숙한 사람들이 있어요. 도움을 받는데 익숙해진 사람들. 난 그건 잘못된 거라 생각해요.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 생각에는 지금이 고기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새마을운동과 그 정신이 가장 필요한 때인 것 같아요.새마을운동의 참모습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내 말에 수긍할 것이라 믿어요. 그 믿음을 가지고 새마을운동과 정신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래요.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8-08-17

공장 새마을운동으로 ‘경쟁 아닌 협동, 같이 살아가는 동지’ 깨달아

이헌영(88) 전 구미시새마을협의회장은 1930년 안동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6.25전쟁 중인 1952년 배고픔이 싫어 자원해서 군에 입대했다. 8년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대구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1971년 구미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될 당시 구미로 왔다. 공단 내 직물협업단지의 공장을 관리하는 직물협업회 상무이사로 근무하면서 새마을운동을 처음 접하게 된다. 자진해 새마을운동 지도자 교육을 받은 이 전 회장은 당시 직물공장에서 근무하는 나이어린 근로자들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새마을운동 교육을 시작했다.직물협업단지에서 시작한 그의 새마을교육은 이후 공단전체로 확대됐다. 이후 공단동 새마을협의회장을 거쳐 구미시새마을협의회장과 경상북도새마을협의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이 전 회장은 90이 다 되어가는 나이임에도 지금까지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1973년 28개 구미 직물공장 관리당시 경쟁 심했던 각 공장들 설득해‘새마을체육대회’ 개최직장윤리·애사심·협동심 크게 고취△ 전쟁통에 배고픔이 싫어 군에 자원입대난 안동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자랐어요. 당시 어릴때는 남들이랑 다 똑같아요. 시골이다 보니 모두가 힘든 시기였어요. 어릴적 시절에 대해서는 별로 할 이야기가 없어요. 배고팠던 기억밖에 없으니까요. 그 배고픔이 싫어 군대에 입대했어요. 6.25가 한창이던 1952년에 입대했어요.군에 가면 밥을 많이 준다는 말만 믿고. 그 당시에 굶어 죽으나 총 맞아 죽으나 별반 다를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만큼 배가 고팠어요. 군에 가니까 정말 밥은 많이 주더군요. 전쟁 중이라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지만, 악착같이 살아 남았어요. 전쟁이 끝나고도 한동안 군에 있었어요.지금 사람들은 이런 말하면 웃을지 모르지만, 난 당시 끼니 걱정하기 싫어서 군에 남았어요. 8년 간 군생활을 했죠. 제대 후에는 대구에서 직장 생활을 했어요. 그러다 구미에 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구미로 가게 됐어요. △국가산업단지 조성을 위해 구미에 첫 발을 딛다군 제대 후 대구에서 일반 직장에 다니다가 1972년 6월 구미로 가게 됐어요. 당시 구미에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하고 있었는데 산업단지 내 직물협업단지를 조성하는게 나의 일이었어요. 당시 산공부에서 직물업체를 관리하도록 구미직물협업회를 조직했는데 내가 상무이사로 있었죠.공단에 중소기업들을 유치해 수출품을 만들려고 했기에 체계가 잡히지 않은 중소기업들을 관리하는 조직이 필요했던거고, 그게 바로 직물협업회였어요. 그 일을 맡아하기로 하고 처음 구미에 왔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와요.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냥 황무지였어요.주민들이 살고 있는 자연부락만 군데군데 있을 뿐이었어요. 자연부락의 주민들도 공업단지 조성으로 이주하기에 바빴어요.그때 9만5천평의 공장부지를 조성하는게 나의 주 업무였는데, 건물 철거에서부터 묘지 이장, 정지작업 등 해야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너무 힘들었어요.당시에는 변변한 이동수단이 없어 조성되는 공단을 걸어다녀야 했고, 밥을 먹고 잠을 잘 곳도 마땅치 않아 여간 힘든게 아니었어요. 그래도 참고 일을 하니까 결국 공장이 하나 둘 들어서고, 산업단지의 모습이 갖춰지기 시작하더라구요.1973년 하반기부터는 일부 공장이 가동을 시작해 수출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어요.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뜨거워지는게 감격스럽고 뿌듯했어요. 그때 그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어요.△새마을운동 지도자가 되기로 결심하다국가산업단지가 조성이 되고 직물협업단지에는 28개의 직물공장이 입주했어요. 지금은 자동화나 기계화가 되어 있으니 일하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당시에는 직기 하나에 사람 1명이 필요했기 때문에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구하기 위해 구미로 왔어요.직물협업단지에 28개의 공장이 있고, 그 공장에 직기가 6천여대가 넘게 있었으니 갑자기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죠. 전국에서 한꺼번에 4천여명이 공단에 들어왔어요. 이 중 80%이상이 미혼여성이었죠. 아무래도 천을 짜는 일이라 어린 여성들이 많았어요.배고픈 시절이라 처음에는 끼니만 해결되면 월급을 주지 않아도 된다며 공장을 찾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래도 어떻게 월급을 주지 않을 수 있겠어요. 국가에서 관리하는 국가산업단지인데. 직물공장이 대부분 영세업체이긴 해도 수출품을 제조하는 공장이어서 많지는 않지만 월급은 줄 수 있는 기업들이었어요. 그렇게 처음에는 모든 일이 수월하게 진행이 되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곧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죠. 새롭게 만들어진 공장이고 직원 대부분이 경력이 없는 젊은 여성들이다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경력이 쌓인 여성직공들의 이직이 많아진거에요.그 이직이라는 것이 바로 옆에 있는 공장으로 이동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구요. 그러니 업체간에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기껏 기술을 가르쳐 놓으니까 옆 공장에서 월급 조금 더 올려주고 빼내가니 사이가 좋아질리 없잖아요.공장이 28개뿐이니 처음에는 사장들도 서로 잘 지냈는데, 기술자를 빼가는게 문제가 되어 사장들의 사이가 급격하게 나빠졌고, 공장마다 다른 공장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하는 사태까지 일어났어요. 그러니 자연히 생산능률도 떨어졌구요.공단을 관리하는 나로서는 가만히 보고 있을수만은 없없어요. 그러던 중 공장새마을운동이란 걸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공장 사장들을 찾아가 새마을운동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런데 어느누구도 하지 않으려 했어요.그래서 내가 새마을운동 지도자가 되기로 한 거에요. 1975년 4월 사비로 상공부 제2 새마을연수원 지도반에 입교해 교육을 받았어요. 그게 저와 새마을운동의 첫 만남이었죠. △단합만이 살길이다막상 새마을지도자 교육을 받고 돌아왔는데 어느 업체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더라구요.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새마을운동은 행동이고 실천이다라는 교육까지 받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우선 공장새마을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경영자와 관리자가 새마을운동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했어요. 그래서 24개 업체의 사장들로 구성된 새마을 산업시찰단을 조직해 우수새마을업체였던 한일합섬 등 12개 업체를 차례로 시찰하고 추진사례를 듣도록 했어요. 큰 기업의 업무추진사례 등은 중소기업에게 큰 도움이 되다보니 새마을 산업시찰단은 잘 운영이 되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경력직들의 이직으로 인해 사장들의 관계는 좋지 않았어요. 사장들의 관계가 좋지 않으니 당연히 직원들도 다른 공장직원들과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죠.난 이런 문제가 직장윤리와 애사심이 없어서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공단에 있는 전 사원들이 참여하는 단합행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추진했어요. 예상은 했지만 반대가 무척 심했어요. 겉으로의 반대 명분은 회사가 하루 쉬면 손해가 막대하다는 거였어요. 또 체육대회를 하고 나면 그 다음날 힘들어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반대하는 이유였어요. 하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거였죠. 다른 공장직원들과 한 자리에 두게 되면 이직을 할 수 있는 빌미를 줄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계속 찾아가 설득하는 방법 이외에는. 계속 찾아가니까 나중에는 만나주지도 않는 사장까지 생겼죠.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어요.그러다 끈질긴 설득에 지친 13개 업체가 참여하는 새마을체육대회가 결국 열리게 되었어요. 2천여명이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기회사 선수들을 응원하면서 분위기가 고조되었어요. 참가한 직원들도 사장도 모두가 만족하는 대회가 됐어요. 체육대회 이후 직원들이 애사심을 가지게 되면서, 무단으로 전출하는 일이 사라지기 시작했어요.그러니 당연히 생산성도 크게 향상되었구요. 체육대회는 그 후 1976년 17개 업체가 참여했고, 1978년에는 21개 업체에서 3천여명이 참가하면서 아주 큰 행사가 되었어요. 다른 공단에서도 부러워하는 연례행사가 된 거죠.자연히 사장들도 사이가 좋아졌구요. 서로 경쟁만하는 사이가 아니라 협동해 같이 살아가야하는 진짜 동지가 된거죠. 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8-08-16

모두가 협동해 재난을 이겨내는 것이 ‘새마을 정신의 본 가치’

△ 고철 모으기로 환경보호까지당시에는 새마을행사라고 해서 여러가지 행사들이 많았어요. 그 중 고철 모으기가 있었는데 우리 비산동이 구미 27개 읍면동에서 1등을 한 적도 있어요.비산동이 공단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어서 큰 고철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이런 고철을 치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장정 1∼2명으로는 옮길 수 없는 것들이 많았거든요. 중장비를 동원할 수 없으니 모두 사람의 힘으로 옮겼죠.물론 동네 몇몇 분들이 고철을 실을 수 있는 차량 등의 협찬은 있었지만, 차량에 옮기는 것은 모두 사람 힘으로 해야만 했어요. 지금은 고철이 돈이 되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어요. 그냥 쓰레기와 똑같았죠. 그러다보니 고철 덩치가 크면 그냥 버리고 가는 거에요. 그걸 그대로 방치하면 고철에서 나오는 녹 등으로 환경오염 문제도 있을 것 같아 정말 열심히 치웠어요.특히 이 동네는 공단 부근이다보니 공사하다가 버린 고철부터 시작해 타다가 버린 자전거 등 고철이 정말 많았어요. 거기에 비라도 한번 많이 오면 강변에 떠내려오는 고철도 상당했어요. 물론 쓰레기도 많았지만 고철도 상당했어요. 아마도 비산동이 지대가 낮으니까 비가 많이 오면 이 곳으로 쓰레기 등이 다 떠내려 오는 것 같아요.지금은 정비가 되서 그렇진 않지만 당시에는 침수가 자주 됐어요. 지금 생각하면 우리 주민들은 단순히 고철만 모은 게 아니에요. 정말 자신들이 사는 삶의 터전을 깨끗하게 가꾸기 위해 자발적으로 고철을 모으고, 쓰레기를 치운 거에요. 이러한 것들이 진정한 새마을운동이라고 생각해요. 믿을지 모르겠지만 당시 고철을 비산동에서만 70여t 정도 모았어요. 모두 사람의 힘으로만. 그래서 비산동이 구미에서 고철 모으기 1등을 한거에요.내 삶 터전위해 마을 주민들 자발적 봉사오로지 사람의 힘으로 고철 70여t 모아젊은이들의 새마을운동 외면 아쉬워인성·예의·지혜 배울수 있는 ‘ 정신운동’△재난도 새마을정신으로 이겨내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비산동은 지대가 낮아 장마철 침수가 많은 곳이었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비산동이 그리 잘 사는 동네가 아니였어요. 판자촌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죠. 대부분의 주민들이 이 곳 토박이가 아닌 일자리를 찾아 여기로 온 나같은 외지인들이었죠. 열악한 상황이었어요. 그래도 다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마음 만큼은 따뜻한 사람들이었어요. 2004년인가 2005년인가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그때 물난리가 크게 한번 났었어요. 당시 새마을협의회는 복구작업을 하고 부녀회는 끼니 때마다 라면을 끊여주었어요. 몇 날 며칠을 작업에 매달리면서 정말 힘들었어요. 마을 안쪽까지 완전 침수가 되서 정말 힘들었어요. 강변에 있던 식당들은 더했어요. 남아 있는게 별로 없었으니까.힘든 시기였지만 새마을협의회 말고도 다른 단체에서도 발 벗고 도와주어서 힘이 많이되었어요. 힘든 일이 닥치니까 모두가 하나가 되더라구요. 이 동네가 당시 다른 지역에서 직장을 찾아 모인 사람들이다보니 약간의 서먹함이랄까 그런게 있었거든요. 아무래도 고향도 다르고 그러니까. 그랬던 사람들이 매일 진흙범벅이 되서 같이 일하니까 그런 서먹함들이 없어지더라구요. 모두가 협동해서 고난을 이겨낸거죠. 그게 새마을운동 정신이라고 생각해요.그리고 그때부터 각자의 고향은 달라도 제2의 고향은 구미인 사람들이 남았어요. 같은 공통분모를 찾은 거죠. 당시 비산동사무소 직원들도 주민들이 하나가 되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어요. 복구작업이 끝나면 공무원들이 막걸리 같은 걸 가지고 와서 같이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기도 했거든요. 어떻게 보면 물난리가 고향이 각기 다른 우리 주민들을 하나로 만들어 준 것 같아요.△새마을운동은 인성교육내가 새마을운동이 무엇이다라고 정의를 내릴 만한 사람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생각을 이야기하자면 새마을운동은 인성교육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지금이나 예전이나 젊은 사람들은 윗사람 이야기를 잘 안들었어요. 안 듣는 강도의 차이가 있을뿐이죠. 저도 어릴적에 부모님 말씀 안들었어요. 그렇게 공부하라고 하셨는데 전 공부에 별 관심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부모님의 삶을 존중했고 그분들의 충고는 마음에 깊이 새겼어요.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어른들에 대한 공경의 마음을 더욱 강해졌어요. 그 분들과 봉사활동을 하면서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삶의 지혜 같은 걸 배웠거든요. 그분들을 통해서 사회생활에서 지켜야 할 예의와 규범 등을 배웠어요. 조금 잘났다고 어깨에 힘주는 사람을 대하는 방법, 정말 어려운 사람들을 마음으로 대하는 방법 등을 배웠어요. 이런 건 절대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이에요. 전 요즘 젊은 사람들이 새마을운동에 많이 참여했으면 좋겠어요. 다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거든요. 지금의 젊은이들은 동네 이웃에 사는 사람이 누군인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그러면 자신이 사는 지역을 위한 일을 하기가 어렵죠. 서로 같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젊은이들이 이웃주민을 잘 알았으면 해요. 그렇다고 강제할 수는 없겠죠.다만 새마을운동이 좀 더 대중화가 된다면 젊은이들이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해요.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 새마을운동을 너무 괄시하는 것 같아요. 새마을운동은 그런 게 아닌데. 새마을운동은 사람들이 서로 같이 살아가는 걸 도와주는 정신운동이에요. 새마을운동 자체가 인성교육이에요. 우리 사회가 그걸 좀 제대로 알았으면 해요.△새마을운동가를 존중하는 사회가 되었으면새마을운동가를 활동하다가 지금은 봉사활동에만 참여하고 있는데 느낀 점이 많아요. 나의 젊음을 새마을운동과 같이 했는데 지금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조금 섭섭한 마음이 있어요. 나뿐만 아니라 이전에 새마을운동에 참여하신 많은 분들이 그렇게 생각하실 거에요.그렇다고 우리가 이만큼 했으니 좀 알라달라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지금 이 사회가 새마을운동을 폄하하지 말고, 제대로 인식해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요. 지금 젊은이들은 새마을운동이 무슨 정치조직 정도로 아는 것 같아요. 새마을운동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더라구요. 그건 옳지 않은 거잖아요. 새마을운동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고 이해한다면 새마을운동가를 자연스럽게 존중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 믿어요. 그리고 새마을운동 조직에서도 새마을운동가 원로들이 참여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실 구미에는 새마을운동가 원로들이 참여하는 새마을후원회라는 것이 있어요. 난 새마을후원회 사무장을 4년동안 했어요. 초대 회장은 박병군 전 구미시새마을협의회장님이 하셨고, 이후 저도 회장직을 4년동안 했어요. 임기는 2년인데 연임해서 4년을 했죠.▲ 배병희 전 비산동 새마을협의회장이 비산동주민센터 앞에서 예전과 달라진 동네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락현기자회원 자격은 구미시 27개 읍면동 협의회장, 부녀회장을 했던 사람들이에요. 새마을운동을 했던 지도자들을 모아 지금 새마을운동을 지원하기 만든 조직이에요. 우리가 주축이 되지 않고 지금의 새마을협의회가 하는 봉사활동을 뒤에서 보조해주는 역할이죠. 새마을 한마음 대회라든지 연말 평가대회 등을 도와주기도 하고, 여름철 금오산 야영지 휴지줍기 등도 하고 있어요. 알뜰 벼륙시장에서는 직접 솜사탕 기계를 가져가 아이들에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팝콘도 만들어주곤 해요. 큰 일은 아니지만 새마을운동 지도자로서 끝까지 이 지역을 위해 작은 봉사를 하고 싶은 거에요. 우리 새마을운동가들은 정말 진심으로 지역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이에요. 제발 사회가 우리를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서로가 존중하는 사회가 되어야 우리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더 열심히 봉사를 할 수 있으니까요./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8-08-10

흙탕길 정비·골목청소 등 작은 손길 모여 마을 자체가 변화 ‘큰 보람’

▲ 배병희 전 비산동 새마을협의회 회장이 비산동 강변 나룻터 축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배병희(60) 전 비산동 새마을협의회장은 1958년 부산에서 4남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산 동희공고에서 전기과를 졸업하고 공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고향인 부산에서 직장을 구하기 힘들어 작은 형님이 있는 구미로 왔다. 전기와 관련된 자격증이 있어 당시 대우전자에 입사해 처음 새마을운동을 접했다.직장새마을에서 받은 새마을 교육으로 새마을운동에 눈을 뜨고 난 뒤 2001년부터 비산동새마을협의회장을 8년간 했다. 그 기간동안 구미시 새마을회 총무를 겸직하기도 했다.비록 구미시 새마을회장이나 경북도 새마을회장직을 맡은 적은 없지만,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지역에서는 가장 열심히 새마을운동을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일을 찾아서 했던 인물로 꼽힌다. 2017년 1월까지 구미시 새마을 후원회장을 맡아오다 지금은 봉사활동만 하고 있다.대우전자서 새마을운동 처음 접해2001년 비산동 새마을협의회장 맡아낙후된 마을 개선, 동네축제도 열어△직장을 찾아 구미로고향은 부산이에요. 부산 사상구에서 살았어요. 내 기억으로는 그 곳은 도시도 아니고 촌구석도 아닌 그런 곳이었어요. 도시와 촌이 반반씩 공존했다고 할 수 있죠. 우리집은 평범한 가정이었어요.전 4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어요. 어릴적부터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공부는 솔직히 못했어요. 그래서 공고로 진학해 전기과를 전공했어요.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남들은 대학에 갔지만 전 바로 공군에 입대했어요. 남들보다 일찍 군대를 다녀왔죠. 그래도 군대를 일찍 다녀오니 자신감 하나는 충만해 있었던 것 같아요. 솔직히 겁이 없었다는 말이 더 맞을 거에요. 제대하고 나서 직장을 가지려고 했는데 잘 안되더라구요. 당시 부산에서는 직장을 구하기는 힘들었어요. 하지만 구미는 산업화가 시작되고 있었기에 좋은 일자리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구미로 갔어요.그때가 내가 제대한 직후였으니 1980년도였어요. 작은 형님이 먼저 구미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형님을 보니 구미에서 직장을 가져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엔 형님 공장에서 일을 했었어요.전기와 관련된 일을 했죠. 대략 3년정도 근무했어요. 그러던 중 아버님이 젊은 나이에 대기업에서 일을 해야되지 않겠나라고 하셔서 대우전자에 입사신청을 했어요. 운이 좋아서인지 바로 대우전자라는 대기업에 취업을 하게 됐어요.그때가 1984년이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새마을운동이란 걸 알게 됐어요.△난생 처음 학생장을 맡다1984년 대우전자에 입사를 했는데 직장새마을회에 가입을 하라고 하더라구요. 전 처음 그게 뭔지도 몰랐어요. 어리기도 했었고 부산 출신이라 구미에서만큼 새마을운동을 접하지 못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일단 직장새마을회에 들어가니까 4박5일 동안 새마을연수를 보내더군요. 우리 회사에서는 나를 포함해 20명이 연수를 다녀왔어요.연수를 받은 사람들은 우리 회사 사람들을 포함해 대략 100여명 정도 됐던 것 같아요. 교육은 새마을운동이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모두가 잘 살기 위해서는 회사에서도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새마을정신으로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뭐 그런 내용이었어요.새마을지도자라는 분들도 나오셔서 성공담을 들려주시기도 했구요. 연수를 받으면서 새마을운동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했어요. 사실 당시 젊은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죠.어린 나이에 돈을 버니 자칫 돈을 함부로 쓰거나 나태해 질 수도 있었는데 처음부터 그런 교육을 받으니 미래를 위해 저축을 해야겠다는 생각하고 실천에 옮겼으니까요.몰랐던 새마을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니 수업이 너무 재밌는거에요. 학창시절 그렇게 수업 듣기가 싫었는데 그 곳에선 내가 열심히 하는 게 다른 사람들 눈에도 보였었나봐요. 학창 시절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 학생장을 나에게 맡기더라구요.짧은 연수기간이었지만 100여 명을 대표하는 학생장을 맡았다는 자부심과 책임감에 최선을 다했어요. 난생 처음 장을 해본 것이었으니 더 그랬던 것 같아요.남들은 웃을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그 짧은 4박5일간의 학생장이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에요.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 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처음 알게 됐으니까요. 제 인생에서 가장 큰 가르침을 준 학생장 시절이에요.△동네부터 깨끗하게대우전자에 입사한지 10년만에 개인사업을 하고 싶어 직장을 그만 두게 되었어요. 회사를 그만 두기 전까지 직장새마을회에서의 활동은 충실하게 했어요. 하지만 직장새마을회의 일이란게 그리 많지가 않았어요. 물론 당시에는 회사에도 구미시청처럼 새마을과가 있었어요. 하지만 일이라곤 남들보다 조금 일찍 출근해 공장 내부를 깨끗하게 청소한다던지 인근 도로에서 교통정리를 한다던지 그런 일이 대부분이었죠.그러다 퇴직 후 개인사업을 하다가 내가 살던 비산동 새마을협의회장을 맡게 됐어요. 그때가 2001년도 였어요. 2001년부터 2009년까지 8년간 했으니까. 비산동은 낙동강을 끼고 있는 지대이다보니 여름에는 모기도 많고, 마을길은 항상 진흙탕이었어요. 또 6.25 당시 격전지이기도해서 많이 낙후가 되어있었죠.그래도 산업화로 인해 공단이 들어서니까 주말이면 공장 근로자들이 데이트하러도 많이 오고, 낚시를 하러도 왔었어요. 지금은 낚시를 못하지만 당시엔 낚시를 할 수 있었거든요. 주말에 사람들이 북적이니까 동네에 활기가 생기더라구요. 유명한 매운탕집도 생기구요.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기 시작하니 문제점들도 생기기 시작했어요.동네가 원래 지저분하다보니 오는 사람들도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기 일쑤였고, 당시 차가 많은 시절이 아니었음에도 아무 곳에나 주차하는 차량들로 민원이 생기기 시작한 거에요. 그래서 새마을협의회가 나섰죠. 당시 동네에 저를 비롯해 젊은 친구들이 많았어요. 한마디로 힘좋은 청년들이 많았다는 거죠.젊은 사람들이 많으니 항상 의욕도 넘치고, 무슨 일이든 혈기왕성하게 했어요. 우선 동네부터 깨끗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시에서 조금 지원을 받아 동네 골목길 정비 등을 시작했죠. 매일 새벽 청소도 하고, 주말에는 강변에서 차량통제도 하구요. 동네가 깨끗해지고 교통정리도 되니까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그러니 동네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청소를 하고 동네를 정비하더라구요. 동네 자체가 변화하기 시작하는 걸 보고 많은 보람을 느꼈어요. △동네 특색을 축제로주말이면 사람들이 많이 찾기는 했지만 그걸로 만족하기는 뭔가 부족했었어요. 우리 동네만의 특색을 살릴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겠다는 생각를 했어요. 비산동만의 특색이 무엇인지 고민하다보니 나룻터 생각이 나더라구요. 그래서 매년 비산동 강변 나룻터 축제를 열기로 했어요.반응이 정말 좋았어요. 반응이 좋으니 시에서도 지원을 해주더군요. 축제를 한번 하기 위해선 주민들이 10여 일 전부터 많은 준비를 해야했어요. 아무 대가도 없이 일만 하는 게 마음이 걸려 축제기간에는 동네주민들에게는 공짜로 축제를 즐길 수 있도록 했어요.어차피 동네주민들이 하는 축제니까 그 정도의 혜택은 있어야한다고 생각했어요. 동네주민들도 좋아했고, 더 열심히 축제를 준비하고, 손님들을 맞이하더군요. 또 지역특산물을 전시하면서 팔 수 있도록 했어요. 당시 축제를 보러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공장 근로자들이었는데 다른 지역에서 직장을 찾아 구미에 온 사람들었으니 구미 특산물을 알리기도 하고 판매도 할 수 있으니까요. 이것도 반응이 엄청 좋았어요.나룻터 축제에서 특산물 판매가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정기적인 바자회를 열기로 하고, 2년에 한번 바자회도 열었어요. 비산동새마을협의회가 주축이 되긴 했지만, 비산동의 다른 단체에서도 많은 지원과 참여를 했었어요. 특히 새마을부녀회가 만든 국밥이 제일 인기가 있었어요. 구미시청 직원들도 점심 때 일부러 국밥 먹으러 오기도 했으니까요. 축제는 축제였어요. 동네주민들에게는 축제 기간뿐만 아니라 준비하는 시간 모두 축제였던 것 같아요./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8-08-09

콩 심은데 콩 나는 ‘農心진리’ 이 시대 젊은이들이 제대로 이해하길

▲ 김교상 회장이 젊은 세대들에게 조언을 하고 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새마을운동은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것중국 명성촌에 ‘명선 새마을회관’을 지어 준 이후 새마을운동을 다른 나라에서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세계 어딜가든 못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까요.어려운 사람들에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줘야한다고 생각했죠. 선산군과 구미시가 통합이 된 후 내가 구미시 새마을회 회장을 하게 됐으니 세계화 사업을 한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죠.그러다 1995년 7월 새로운 구미시장에 김관용 시장이 당선됐어요. 김 시장도 새마을세계화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명선 새마을회관 이후 2000년에 베트남에 보건소를 지어주었어요.2000년에 착공해 2002년 3월 보건소를 준공했는데 당시 준공식에는 남유진 구미부시장도 함께 했었어요. 당시 새마을운동은 이들이 필요한 부분에 돈을 주고 만들게 하는게 전부였어요. 그러다보니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죠.우리가 새마을회관이나 보건소 같은걸 지어주면 자기들이 알아서 운영을 해야하는데 그렇게 못하는 거에요. 시설 운영비를 우리에게 요구했었어요.처음에는 낡은 시설을 고쳐주고 했었는데, 그건 진정한 새마을운동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거죠. 새마을운동은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거니까. 그때부터 새마을세계화 운동이 새로운 방법으로 다시 시작하게 됐어요. 지금 생각하면 새마을운동이야말로 계속적으로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해요.새싹처럼 항상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실천해야 하니까요. 새마을운동가들은 항상 어제보다는 오늘을, 오늘보다는 내일을 위해 더 열심히 살았어요. 저도 그랬구요. 요즘 젊은사람들이 예전 우리처럼 어떠한 고난에도 내일에 희망을 찾고,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래요.새마을운동에 대한 갖은 오해와 폄하지도자들이 적극 나서 바로 잡아야‘오늘’보다 ‘내일’을 생각하는 봉사가새마을운동의 참된 정신△새마을운동에 대한 오해는 항상 있었다선산군과 구미시가 통합이 되긴 했어도 새마을운동에는 큰 변화가 없었어요. 오로지 봉사만 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니까 갈등 같은게 생기지 않았던거죠.하지만 분위기는 그리 좋지 못했어요. 아마 내 기억으론 김영삼 대통령 때 새마을운동 분위기가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말 그대로 찬밥 신세였죠.하지만 1995년도에 김관용 시장이 다른 곳은 몰라도 구미에서만은 새마을운동을 해야된다고 했어요. 새마을운동 창시자인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에서마저 새마을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였죠.나를 포함해 새마을운동가들도 똑같은 생각이었어요. 그때 김 시장이 아마 시청 사회진흥과를 새마을과로 바꾸었어요. 과 명칭은 정확하게 기억이 안나지만, 새마을과가 맞을 겁니다. 과의 명칭을 바꾸고 구미체육관을 박정희체육관으로 이름을 바꾸니까 여러 곳에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어요. 금오공대, 사회시민단체 등이 반발했었죠. 반대가 심했어요. 지금 새마을운동테마공원을 반대하는 것처럼 말이죠.하지만 당시 새마을운동가들은 반대의 목소리를 듣고만 있지 않았어요. 우리가 직접 나서서 반대하는 사람들을 만나 설득했어요. 구미체육관을 박정희체육관으로 변경하기 위한 글도 썼어요. 그리고 전국적으로 왜 구미가 새마을운동을 이어가려고 하는지 알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새마을지도자 대회를 유치하려고 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새마을지도자 대회가 서울에서만 열렸어요. 한번도 지방에서 열린적이 없었죠. 지방에서 어떻게 전국 새마을지도자 대회를 할 수 있냐고하는 말들이 많았지만, 결국 해냈어요.2002년일거에요. 그때 구미시가 최초로 전국 새마을지도자 대회를 열었어요. 정말 구미시가 왜 새마을운동을 해야하고, 그 정신을 이어가야만 하는지에 대한 결과물과 같은거였어요.지금은 광역단체까지만 전국 새마을지도자 대회를 연다고 들었어요. 기초단체 중에는 유일하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국 행사를 연것으로 만족해야겠죠. 하지만 전국 새마을지도자 대회를 단순히 구미에서 열었다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에요. 왜 구미에서 열렸는가가 중요한 것이죠.사실 새마을운동에 대한 오해는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왔어요. 새마을운동가라면 그 오해를 풀기 위한 노력을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아쉬운것은 지금은 그러한 노력을 별로 하지 않는 것 같아요. 보세요 지금도 새마을운동을 폄하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 사람들은 새마을운동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거에요.그렇다면 새마을운동가들이 그들에게 새마을운동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설명을 해야해요. 그래야 새마을운동이 지속될 수 있어요. 가만히 있는다고 되는게 아니잖아요. △지도자가 왜 중요한지 알려준 새마을운동 새마을운동은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것을 솔선수범해 하는 것이에요. 힘들고, 더럽고, 위험하고, 거기에 돈을 받고 하는 것도 아닌 것이 바로 봉사라는 것이죠. 또 그 봉사를 찾아 하는것이 바로 새마을운동이구요. 하지만 남들이 다 하기 싫어하는 일에 사람들을 동참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죠. 그래서 지도자가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죠.세계적으로 우리나라 새마을운동과 비슷한 운동이나 캠페인 같은게 많아요. 하지만 실제 빈곤에서 탈피하게 해준 운동은 새마을운동이 유일하죠.이유는 바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예전에 TV광고에 이런 것이 있었어요. 금성사에서 나온 TV선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광고에서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라고 나와요.지도자를 잘 선택해야만 그 나라가 잘 살 수 있듯이 새마을운동도 마찬가지에요. 대통령은 국민들이 선거라는 제도로 뽑는 것이지만, 새마을운동 지도자는 교육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다른점이긴 하지만,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이웃동네를 비교하게 되죠. 그러면 주민들이 먼저 알아요. 윗동네가 왜 더 빨리 발전하는지, 자기동네가 왜 뒤쳐지는지를.새마을운동은 주민참여 운동이에요. 지도자 혼자 할 수 있는게 아니죠. 즉 지도자는 그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역할이에요.공동체 의식을 갖도록 만들어주고, 할 수 있다는 의지를 심어주는 것이 지도자에요. 새마을운동은 전 국민들에게 지도자는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교육해 왔어요. 하지만 새마을운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새마을운동 지도자들이 제 위치에서 일을 하지 못하다보니 지금의 이런 사태까지 온 것 같아요.지도자는 항상 ‘지금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잘 판단하고, 오늘보다 내일, 내일보다는 미래를 생각하면서 계획을 잡아가야 하는데 그게 잘 이어지지 못하고 있어요. 한 사람의 지도자의 임기가 끝나면 다음 지도자는 전임자의 활동을 받아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하는데 이상하게도 단절이 되고 있는 것 같거든요. 그렇다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창출이 되는 것도 아니고. 신구 지도자들이 모여 현안문제에 대해 논의 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젊은 세대들이 농심(農心)의 뜻을 알았으면요즘 젊은 세대들은 보면 안타깝죠. 우리는 배고픔으로 힘들어했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들의 힘든 점은 너무 복잡한 문제들로 엮여있는 것 같아요.내가 한가지 조언을 한다면 초대 새마을운동 중앙회 회장을 하신 김준 박사가 쓴 농심(農心)이란 글이 있는데, 그 농심을 제대로 이해하길 바래요.농심의 내용은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라는 단순한 진리에요. 농사꾼은 자신이 심은 걸 알고 어떻게든 그걸 잘 가꾸려고 노력하죠.콩을 심어 좋은 콩이 나오길 바라면서 모든 노력과 정성을 들이는 것이 농부꾼이죠. 하지만 지금의 젊은이들은 콩을 심어놓고 금이 나오길 바라는 것 같아요.더 솔직히 이야기하면 흙은 싫어하면서 땅은 좋아하는게 보여요. 젊은이들이 농심을 제대로 이해하길 바래요. 젊은이들이 농심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한 운동이 바로 새마을운동이라는 것도 알았으면 하구요. 새마을운동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오늘보다는 내일을, 내일보다는 미래를 생각하며 일하는 것이에요. 지금의 젊은 세대들도 미래를 위해 노력하면서 자신의 열매를 잘 가꾸어 나가길 바랍니다.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8-08-03

중국 오지마을에 회관 건설… ‘새마을운동 세계화’의 첫 시작이었죠

세계 최빈국이었던 한국이 농업근대화와 산업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요인이 있겠으나 그 중 하나가 바로 새마을운동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계가 한국의 경제성장 성공의 기적 뒤에 새마을운동 정신이 있었음을 알고 그 정신을 배우려 하고 있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새마을운동을 홀대하고 있다. 새마을운동기록이 지난 2013년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다. 사실 새마을운동이 정치적인 요인으로해서 시비의 대상이 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정치적 시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신들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던 새마을운동가들이 있었기에 새마을운동의 정신과 가치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제 새마을운동은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새마을운동이 과거에만 국한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새마을운동은 지금의 세대로 넘어오면서 새마을 정신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본지는 이웃을 위해 묵묵히 새마을운동에 전념해 온 5명의 새마을운동가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의 세대들에게 새마을운동과 그 정신을 전달하고자 한다.김교상(77) 전 구미시새마을회 회장은 1942년 영주에서 2남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적부터 학업비를 스스로 벌어 학교를 다녔다. 학업비를 벌기위해 고등학교는 강원도 원주로 가야했다.어렵게 공부해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에 진학한 뒤, 건설사에서 근무했다. 군 복무 시절 공민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친 것이 인연이 돼 제대 후 새마을문고 일을 도왔다.이후 1995년부터 2003년까지 새마을운동 구미시 지회장을 역임했고, 2008년부터는 경상북도 민방위 강사로도 활동했다. 1987년 내무부장관 표창, 1991년 대통령 표창, 1997년 새마을 훈장 근면장, 법무부장관 표창, 2002년 자랑스런 구미사암 대상, 2004년 자랑스런 도민상을 수상했다.군에서 문맹퇴치 위해 한글 가르치다마을문고 일하며 새마을운동 참여1995년 시작으로 2003년까지17년간 새마을회 회장직 맡아△ 공부를 위해 안해본 일이 없었던 학창시절비록 농사를 짓은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아버지의 교육열은 남다르셨어요. 사람은 배워야한다는 확고한 신념 같은게 있으셨어요. 하지만 당시 먹고살기 힘든 시절에 자식들 학비를 감당하기는 어려우셨어요.그래서 어릴적부터 인삼재배하는 일을 도우면서 공부를 해야했지요. 영주니까 인삼재배를 하셨거든요. 순흥초등학교와 소수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진 아버지 농사일을 도왔어요. 그러다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독립을 했지요. 돈을 벌어야했으니까.영주에서 아버지 농사일을 돕는걸로는 고등학교 학비를 마련에 한계가 있었어요. 그래서 일자리를 찾아 강원도 원주까지 가게 됐어요.어린 나이에 혼자 생활하는게 쉽지 않았죠. 공부도 해야하고 돈도 벌어야했으니까. 원주에 있는 육민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새벽엔 신문배달, 낮에는 구두닦이를 했어요.그러다 과자공장에서 일을 하게됐어요. 공장에 다니면서 몸은 힘들었지만, 규칙적인 생활이 가능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다시는 하고싶지 않은 그런 생활인데, 당시에는 공장에서 규칙적으로 일하고, 월급도 꼬박꼬박 나오는게 너무 감사했던 시절이었어요.그렇게 어렵게 공부해서 서울에 있는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에 들어갔어요. 대학에 들어가서도 학비를 벌기위해 일은 해야했지만, 즐거웠어요. 대학 다니면서 취업이 됐으니까.당시엔 기업들이 인재를 구하기 위해 대학생들에게 학비를 대납해 주는 조건으로 졸업 후 일정기간 의무적으로 근무하게 하는 것이 있었어요. 저도 그런 조건으로 대선건설이라는 기업에 들어갔었어요. 보통은 졸업 후에 회사를 다녔지만, 전 생활비도 벌어야했기에 학생 신분으로 기업에 들어가 일했어요. 일찍 제 전공분야 현장에 들어간 것이죠.공사현장 일도 하고, 밤에 경비같은 것도 서고하면서, 창고같은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했어요. 몸은 비록 힘들었지만, 즐거운 청춘시절이었어요.△군에서 한글 가르친 인연 새마을문고로 이어져대학생활을 하다 군대에 가게됐죠. 그때가 1962년 4월에 군에 입대했어요. 당시엔 한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군대에도 한글을 가르쳐주는 학교가 있었는데 그걸 공민학교라고 했어요.주로 교관이나 장교들이 가르쳤는데, 나 같은 대학생이 들엉오면 조교로서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도록 했어요.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이 그렇게 보람된 일이라는 걸 그때 깨달었어요. 사회에 나가서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제대를 하고 나서 보니까 마을문고라는 것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마을문고 일을 시작했어요. 당시 마을문고 일이라는 것이 일종의 문명퇴치운동과 비슷했어요. 본래는 농촌지역에 책을 보급하는 것이 마을문고의 일이긴 한데 한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한글을 가르쳐 주고, 책을 읽도록 했어요.그러다 마을문고가 새마을회와 통합이 되었어요. 그래서 저도 그때부터 새마을문고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새마을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이죠. △가장 오랫동안 근무한 새마을회 회장제대 후 대선건설사에서 근무를 하다 회사 사정이 안 좋아져서 그만두게 됐어요. 그래서 대구의 화성산업에서 일을 하게 됐어요. 나중에는 내가 건설회사를 직접 만들어 운영을 하기도 했고요.지역에 내려와서도 새마을문고 일을 계속 했었요. 그러다 1982년에 선산군 새마을문고 회장을 했어요. 4년동안 새마을문고 회장을 한 뒤 1986년 3월 22일부터 선산군 새마을 지회장을 맡았어요. 선산군 지회장을 하고 있는 도중 1994년에 선산군이 구미시와 통합이 되었어요.통합이 되면서 내가 1995년 1월 1일부터 구미시 새마을회 회장이 됐어요. 그런데 내가 잘해서 한게 아니었어요. 당시 구미시 회장은 이용원씨 였는데, 그 분이 양보를 해준거죠. 친구이기도 했으니까.그 친구의 양보로 새마을문고 회장 4년을 빼고도 17년동안 새마을회 회장을 하게 됐죠. 2003년 4월 2일까지 회장을 했으니 아마도 최장기간 회장직을 한 사람일거에요.△최초로 새마을세계화 운동을 시도새마을회장직을 오래도록 한 만큼 많은 일을 했고, 많은 일도 있었던 것 같아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최초의 새마을세계화 운동을 한 것이에요.내가 선산군 회장일때 중국 길림성 화룡시 투도진 명성촌이란 곳에 새마을 회관을 하나 지었주었어요. 1992년에 공사를 시작해 1994년도에 완공했죠.당시엔 국제 새마을화를 생각도 못하고 있을 때였어요. 그런데 그걸 우리 선산군 새마을회가 한 것이죠.당시 600만원이라는 돈을 모아서 명선 새마을회관을 지었어요. 중국 명성촌의 ‘명’자와 선산의 ‘선’자를 따서 ‘명선’이라고 이름을 지었었요. 당시 준공식에 많은 지도자들이 와서 축하해 주었어요.그렇게 새마을운동 세계화를 시작했죠. 그런데 여기에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중국과 수교가 안된 1992년 중국을 통해 백두산에 가는 거였는데, 버스가 비포장 도로를 달리다 중간에서 고장이 났어요. 차를 고치지도 못하고, 다른 차를 기다리자니 언제 올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그러다 가까운 마을로 일단 가게 됐는데 그 곳이 바로 명성촌이었어요.한 250세대가 사는 마을이었는데 주민 수는 1천명이 넘었어요. 대부분 조선족이어서 한국말을 잘 하더라구요. 그런데 한국말을 사용하면서 누가 만든 줄은 모르더라구요. 그래서 이 곳에 회관을 하나 지어주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회관이 있으면 책도 가져다주고, 교육도 시킬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죠.사실 문고를 지어주고 싶었는데 문고는 허가가 안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노인회관을 지어준다하고 새마을회관을 지은거에요. 그런데 명성촌이 백두산 가는 길목에 있다보니 백두산을 찾는 관광객들이 회관에 걸린 새마을기를 보고는 이 마을을 방문하기 시작했대요. 새마을운동 홍보도 되고, 마을 수입에도 좋은 영향을 준 사례라고 할 수 있죠.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8-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