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땀방울이 희망의 꽃으로 새마을운동가 구술 채록<br />① 김교상 전 구미시새마을회 회장(上)
세계 최빈국이었던 한국이 농업근대화와 산업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요인이 있겠으나 그 중 하나가 바로 새마을운동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계가 한국의 경제성장 성공의 기적 뒤에 새마을운동 정신이 있었음을 알고 그 정신을 배우려 하고 있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새마을운동을 홀대하고 있다. 새마을운동기록이 지난 2013년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다. 사실 새마을운동이 정치적인 요인으로해서 시비의 대상이 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정치적 시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신들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던 새마을운동가들이 있었기에 새마을운동의 정신과 가치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제 새마을운동은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새마을운동이 과거에만 국한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새마을운동은 지금의 세대로 넘어오면서 새마을 정신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본지는 이웃을 위해 묵묵히 새마을운동에 전념해 온 5명의 새마을운동가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의 세대들에게 새마을운동과 그 정신을 전달하고자 한다.
김교상(77) 전 구미시새마을회 회장은 1942년 영주에서 2남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적부터 학업비를 스스로 벌어 학교를 다녔다. 학업비를 벌기위해 고등학교는 강원도 원주로 가야했다.
어렵게 공부해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에 진학한 뒤, 건설사에서 근무했다. 군 복무 시절 공민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친 것이 인연이 돼 제대 후 새마을문고 일을 도왔다.
이후 1995년부터 2003년까지 새마을운동 구미시 지회장을 역임했고, 2008년부터는 경상북도 민방위 강사로도 활동했다. 1987년 내무부장관 표창, 1991년 대통령 표창, 1997년 새마을 훈장 근면장, 법무부장관 표창, 2002년 자랑스런 구미사암 대상, 2004년 자랑스런 도민상을 수상했다.
군에서 문맹퇴치 위해 한글 가르치다
마을문고 일하며 새마을운동 참여
1995년 시작으로 2003년까지
17년간 새마을회 회장직 맡아
△ 공부를 위해 안해본 일이 없었던 학창시절
비록 농사를 짓은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아버지의 교육열은 남다르셨어요. 사람은 배워야한다는 확고한 신념 같은게 있으셨어요. 하지만 당시 먹고살기 힘든 시절에 자식들 학비를 감당하기는 어려우셨어요.
그래서 어릴적부터 인삼재배하는 일을 도우면서 공부를 해야했지요. 영주니까 인삼재배를 하셨거든요. 순흥초등학교와 소수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진 아버지 농사일을 도왔어요. 그러다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독립을 했지요. 돈을 벌어야했으니까.
영주에서 아버지 농사일을 돕는걸로는 고등학교 학비를 마련에 한계가 있었어요. 그래서 일자리를 찾아 강원도 원주까지 가게 됐어요.
어린 나이에 혼자 생활하는게 쉽지 않았죠. 공부도 해야하고 돈도 벌어야했으니까. 원주에 있는 육민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새벽엔 신문배달, 낮에는 구두닦이를 했어요.
그러다 과자공장에서 일을 하게됐어요. 공장에 다니면서 몸은 힘들었지만, 규칙적인 생활이 가능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다시는 하고싶지 않은 그런 생활인데, 당시에는 공장에서 규칙적으로 일하고, 월급도 꼬박꼬박 나오는게 너무 감사했던 시절이었어요.
그렇게 어렵게 공부해서 서울에 있는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에 들어갔어요. 대학에 들어가서도 학비를 벌기위해 일은 해야했지만, 즐거웠어요. 대학 다니면서 취업이 됐으니까.
당시엔 기업들이 인재를 구하기 위해 대학생들에게 학비를 대납해 주는 조건으로 졸업 후 일정기간 의무적으로 근무하게 하는 것이 있었어요. 저도 그런 조건으로 대선건설이라는 기업에 들어갔었어요. 보통은 졸업 후에 회사를 다녔지만, 전 생활비도 벌어야했기에 학생 신분으로 기업에 들어가 일했어요. 일찍 제 전공분야 현장에 들어간 것이죠.
공사현장 일도 하고, 밤에 경비같은 것도 서고하면서, 창고같은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했어요. 몸은 비록 힘들었지만, 즐거운 청춘시절이었어요.
△군에서 한글 가르친 인연 새마을문고로 이어져
대학생활을 하다 군대에 가게됐죠. 그때가 1962년 4월에 군에 입대했어요. 당시엔 한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군대에도 한글을 가르쳐주는 학교가 있었는데 그걸 공민학교라고 했어요.
주로 교관이나 장교들이 가르쳤는데, 나 같은 대학생이 들엉오면 조교로서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도록 했어요.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이 그렇게 보람된 일이라는 걸 그때 깨달었어요. 사회에 나가서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제대를 하고 나서 보니까 마을문고라는 것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마을문고 일을 시작했어요. 당시 마을문고 일이라는 것이 일종의 문명퇴치운동과 비슷했어요. 본래는 농촌지역에 책을 보급하는 것이 마을문고의 일이긴 한데 한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한글을 가르쳐 주고, 책을 읽도록 했어요.
그러다 마을문고가 새마을회와 통합이 되었어요. 그래서 저도 그때부터 새마을문고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새마을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이죠.
△가장 오랫동안 근무한 새마을회 회장
제대 후 대선건설사에서 근무를 하다 회사 사정이 안 좋아져서 그만두게 됐어요. 그래서 대구의 화성산업에서 일을 하게 됐어요. 나중에는 내가 건설회사를 직접 만들어 운영을 하기도 했고요.
지역에 내려와서도 새마을문고 일을 계속 했었요. 그러다 1982년에 선산군 새마을문고 회장을 했어요. 4년동안 새마을문고 회장을 한 뒤 1986년 3월 22일부터 선산군 새마을 지회장을 맡았어요. 선산군 지회장을 하고 있는 도중 1994년에 선산군이 구미시와 통합이 되었어요.
통합이 되면서 내가 1995년 1월 1일부터 구미시 새마을회 회장이 됐어요. 그런데 내가 잘해서 한게 아니었어요. 당시 구미시 회장은 이용원씨 였는데, 그 분이 양보를 해준거죠. 친구이기도 했으니까.
그 친구의 양보로 새마을문고 회장 4년을 빼고도 17년동안 새마을회 회장을 하게 됐죠. 2003년 4월 2일까지 회장을 했으니 아마도 최장기간 회장직을 한 사람일거에요.
△최초로 새마을세계화 운동을 시도
새마을회장직을 오래도록 한 만큼 많은 일을 했고, 많은 일도 있었던 것 같아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최초의 새마을세계화 운동을 한 것이에요.
내가 선산군 회장일때 중국 길림성 화룡시 투도진 명성촌이란 곳에 새마을 회관을 하나 지었주었어요. 1992년에 공사를 시작해 1994년도에 완공했죠.
당시엔 국제 새마을화를 생각도 못하고 있을 때였어요. 그런데 그걸 우리 선산군 새마을회가 한 것이죠.
당시 600만원이라는 돈을 모아서 명선 새마을회관을 지었어요. 중국 명성촌의 ‘명’자와 선산의 ‘선’자를 따서 ‘명선’이라고 이름을 지었었요. 당시 준공식에 많은 지도자들이 와서 축하해 주었어요.
그렇게 새마을운동 세계화를 시작했죠. 그런데 여기에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중국과 수교가 안된 1992년 중국을 통해 백두산에 가는 거였는데, 버스가 비포장 도로를 달리다 중간에서 고장이 났어요. 차를 고치지도 못하고, 다른 차를 기다리자니 언제 올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그러다 가까운 마을로 일단 가게 됐는데 그 곳이 바로 명성촌이었어요.
한 250세대가 사는 마을이었는데 주민 수는 1천명이 넘었어요. 대부분 조선족이어서 한국말을 잘 하더라구요. 그런데 한국말을 사용하면서 누가 만든 줄은 모르더라구요. 그래서 이 곳에 회관을 하나 지어주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회관이 있으면 책도 가져다주고, 교육도 시킬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죠.
사실 문고를 지어주고 싶었는데 문고는 허가가 안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노인회관을 지어준다하고 새마을회관을 지은거에요. 그런데 명성촌이 백두산 가는 길목에 있다보니 백두산을 찾는 관광객들이 회관에 걸린 새마을기를 보고는 이 마을을 방문하기 시작했대요. 새마을운동 홍보도 되고, 마을 수입에도 좋은 영향을 준 사례라고 할 수 있죠.
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