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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문무왕부터 경순왕까지… 영욕의 역사와 함께하다

동궁과 월지는 신라의 왕과 왕자, 귀족들의 생활공간인 동시에 그들이 국빈과 연회를 열던 장소였다.사철 내내 희귀한 짐승이 뛰고 새가 날며 온갖 아름다운 꽃이 피어있던 곳이었고, 통일신라 예술의 정점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건축물과 조각, 예술품들이 가득한 미려한 정원이기도 했을 동궁과 월지.여기서 신라 왕들은 구체적으로 뭘 했을까? 궁금증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멀리는 1천350년, 가까이 잡아도 1천 년 이전의 아득한 역사에 대한 호기심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일 터.월지와 동궁은 각종 고문헌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다. 때로는 짤막하게, 어떤 경우엔 그보다 상세하게. 그 사례들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동궁과 월지는 어떤 곳들을 포함한 영역이었는가를 알아보자. 한국고대사탐구학회가 발행한 김병곤의 논문 ‘신라 동궁의 역할과 영역-임해전 및 안압지와의 상관성을 중심으로’에는 아래와 같은 설명이 등장한다.“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5년간의 시차를 두고 건립되고 동궁 관련 명문 유물이 다수 출토된 안압지와 임해전을 동궁 부속 시설로 이해한다.또한 ‘삼국사기’ 직관지에 따르면 동궁 부속 관서로 동궁아, 어룡성, 세택, 급장전, 월지전, 승방전, 포전, 월지, 용왕전 등이 있는데 안압지의 신라시대 명칭을 월지로 간주하고 월지전, 월지악전은 안압지 관리 부서로 그리고, 급장전과 포전은 안압지와 임해전에서 개최된 연회를 지원하는 부서로 보았다.그 결과 안압지 주변 일대는 물론 ‘신번동궁세택’명 청동접시 등이 수습된 인왕동 왕경 유적 일대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동궁 영역으로 추정하기에 이르렀다. 동궁은 태자의 권위를 드러내며 독자적인 주거 공간의 제공과 군왕에 어울리는 자질 향상을 위해 각종 교육을 실시하는 장소였다.”‘삼국사기’에 여러 차례 언급되는 동궁과 월지적지 않은 부속 건물을 두고 철저한 관리를 통해 고대왕국 신라의 권위와 위상을 높였던 것과 더불어 왕의 자리를 이어받을 왕자를 교육하는 귀한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던 동궁과 월지.그곳이 어떤 변화 과정과 사건을 겪었는지 추정해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고문헌이 ‘삼국사기’다.이희준의 논문 ‘동궁과 월지 동편 신라왕경 유적의 조성 시기 및 성격 검토’에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월지 관련 언급을 보기 좋게 정리한 표가 실려 있다. 다음은 그걸 다시 요약한 것이다.△문무왕 14년 2월(674년) 궁 내에 못을 파고 가산을 만들고, 화초를 심고 진이한 금수를 길렀다.△문무왕 19년 8월(679년) 동궁을 짓고 궁궐 안팎 여러 문의 이름을 지었다.△효소왕 6년 9월(697년) 임해전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경덕왕 11년 8월(752년) 동궁아를 설치하고 상대사 1인, 차대사 1인을 두었다.△혜공왕 5년 3월(769년) 임해전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소성왕 2년 4월(800년) 폭풍으로 인해 나무가 부러지고 기왓장이 날아가고 임해문과 인화문이 파괴되었다.△애장왕 5년 7월(804년) 임해전을 중수하고 새로 동궁 만수방을 지었다.△헌덕왕 14년 1월(822년) 동복 아우 수종을 부군으로 삼고 월지궁에 들였다.△문성왕 9년 2월(847년) 평의전과 임해전을 중수하였다.△헌안왕 4년 9월(860년) 왕이 임해전에 군신을 모았다.△경문왕 7년 1월(867년) 임해전을 중수하였다.△헌강왕 7년 3월(881년) 임해전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연이 무르익자 왕이 거문고를 타고 좌우에서 노래를 부르며 매우 즐겁게 놀고 파하였다.△경순왕 5년 2월(931년) 고려 태조가 기병 50여 명을 거느리고 수도 근방에 이르러 만나기를 요청하였다. 왕이 백관과 더불어 교외로 나와 맞이하고 궁으로 들어와 마주 대하며 정성을 다하여 극진히 예우하고 임해전에 모셔 연회를 베풀었다.간략하게만 봐도 자그마치 250여 년의 세월, 10명이 넘는 왕이 고문헌 속에 등장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역사를 볼 때 동궁과 월지는 통일신라의 번성과 쇠락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을 것이다.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이 만들었고, 이후 많은 왕들에 의해 낡고 허물어진 건물을 고쳤던 때를 거쳐 새롭게 등장한 왕국 고려에 의해 국운이 기울던 시기까지 신라의 역사와 함께 한 게 바로 동궁과 월지다.통일신라 왕들의 환희와 고통 지켜봤을 공간통일신라를 완성한 문무왕은 무열왕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유신 등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제압한 그는 당나라 세력까지 축출한 탁월한 전략가인 동시에 동궁과 월지의 건설을 명령한 통치자이기도 했다.그로부터 시작된 월지와 동궁의 역사는 이후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부침(浮沈)을 거듭한다.여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효소왕은 원선, 당원과 같은 나이 많은 대신들의 도움으로 안정적인 국정을 유지했고, 할아버지가 만든 월지의 근사한 건물에서 신하들에게 화려한 잔치를 열어줄 수 있었다.소성왕은 800년 음력 6월에 왕위에 오른 지 2년도 되지 않아 사망한다. 그가 죽던 해에는 전과 달리 잦은 기상 이변이 있었고, 그로 인해 월지와 동궁의 일부가 파손되기도 했다.소성왕의 맏아들이었던 애장왕이 이를 중수한 것은 동궁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아버지를 기억 속에서 불러내기 위한 행위이기도 했을 것 같다.7세기에 만들어진 동궁과 월지는 9세기에 이르러서도 문성왕, 헌안왕, 경문왕 등에 의해 보다 아름답게 다시 만들어졌고, 여기서는 왕과 귀족, 외국 사신들의 크고 작은 연회가 펼쳐졌다.신라의 제49대 왕인 헌강왕은 글 읽기를 좋아했으며 한 번 본 글귀는 모두 입으로 읊을 수 있을 정도로 명석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왕이 된 후에도 문화와 예술에 기반한 정치를 펼친 그는 신명도 남달랐던 듯하다.최고 권력자가 월지의 근사한 풍경을 보며 직접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헌강왕의 기질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그래서일까. 일부 사학자들은 그를 두고 “사회적 안정과 풍요로움을 누렸으나, 중앙 귀족들과 함께 향락적 문화를 즐기는 데만 몰두하고 신라 하대 사회의 불안정성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다”는 비판적 평가를 내놓기도 한다.동궁과 월지에 관련된 ‘삼국사기’의 언급 중 가장 비극적인 건 경순왕 때의 기록이다.모두가 알다시피 927년부터 935년까지 왕위에 있었던 경순왕은 신라의 마지막 왕이다. ‘고려 태조에게 나라를 바친 왕’이라는 불명예스런 사실은 경순왕에 관한 역사적 평가를 인색하게 만들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56대 992년간 지속됐던 고대왕국 신라는 사라졌다.만약 동궁과 월지가 살아 숨 쉬는 생명체였다면 경순왕이 고려 태조를 비롯한 다른 나라 병사들을 신라의 선대왕들이 아꼈던 공간에 초청해 굴욕적으로 접대하던 모습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을까.빛과 어둠, 햇살과 그림자가 공존했던 신라의 역사. 동궁과 월지의 역사 역시 장구하고 드라마틱했던 신라사(新羅史)의 주요한 한 부분이었을 것이 분명하다.인간은 사라져도 신라 유적은 여전히 남았으니…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간행한 ‘신라사 총론’은 경순왕대의 신라 멸망과 그 이후를 이렇게 쓰고 있다.“935년 경순왕이 반란국가의 하나였던 신흥 고려 태조 왕건에게 천년 사직을 바친 뒤 신라 역사의 위용과 그 찬란했던 문화는 한국인의 뇌리에서 차츰 잊혀져갔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천년 고도 경주는 동경(東京)으로 격하되었지만, 그래도 3경의 하나로 중시되었다.하지만, 조선시대가 되면서 8도의 하나인 경상도 감영의 소재지로 다시 격하되었다가 그나마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에는 대구로 감영이 옮겨짐에 따라 일개 부(府)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후략)”1천 년 가까이 이어지던 고대왕국 신라의 역사가 종말을 고하기 4년 전인 931년 동궁과 월지에서 이뤄졌던 경순왕과 왕건의 만남. 이는 기나긴 우리 역사 속에 존재하는 행운의 하나였을까? 아니면 불행한 사건이었을까? 누구도 쉽게 대답을 내놓을 수 없는 질문이다.‘삼국사기’의 기록에 등장하는 왕들 외에도 ‘아름다운 화원’ 동궁과 월지에서 기쁨과 슬픔을 맛보며 제 삶의 한 부분을 보낸 신라의 왕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그들은 최상위 권력자였지만, 태어나고 성장하고 쇠하고 결국에는 소멸하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의 환희와 고뇌를 오롯이 기억하는 건 이제는 유적으로 남은 동궁과 월지가 아닐지.취재를 위해 동궁과 월지를 여러 차례 찾았다. 그때마다 실감했다. 인간의 유한함과 시간의 무한함을. 또한 진지하게 생각했다. 역사의 연구와 복원이 왜 중요한 것인가를./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9-01

1천300년 간극을 뛰어넘어 현대인에게 말을 걸다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에드워드 카(Edward Carr·1892~1982)는 말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대화’란 무엇인가. 소통을 위한 노력과 다름없을 터. 과거와 현재의 인간이 원활하게 소통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학습이 필요하다. 그 역할은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는 현대인들의 몫이다.1천 년이란 아득한 시간 너머에 존재했던 신라의 역사에 관해 제대로 ‘대화’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그 시대를 통찰하려는 우리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앞서 말한 연구와 학습이다.‘발굴’은 이 연구와 학습의 매우 중요한 방편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게 사학자들의 공통적인 의견.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펴낸 ‘신라사 총론’은 발간사를 통해 과거 신라인들과 대화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역사서의 편찬은 단순한 과거의 정리가 아니다. 그것을 통해 위대한 민족사의 한 부분을 정리하고, 민족자존을 되찾고,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더불어 아래와 같은 이야기로 오늘날 신라 역사 찾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역사를 보는 관점은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해왔지만 변치 않는 역사의 가치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징검다리가 되어 미래의 우리 삶을 규정짓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배우는 지혜일 것이다.이미 신라는 오래전 사라진 나라지만, 우리는 그 역사와 문화를 통해 현재를 살고 미래를 살아갈 수 있다. 역사와 문화를 찾는 것은 우리의 정신과 혼을 찾는 일이다.”이런 인식은 에드워드 카의 역사에 관한 정의와 맥락이 닿아있고, 역사 공부의 중요성은 한국과 영국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알려준다. ‘신라인과의 대화’를 위해 시작된 동궁과 월지 발굴그렇다면 통일신라시대 왕과 귀족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신라 건축과 미술의 아름다움을 추측할 수 있게 해주는 수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온 유적 동궁과 월지의 발굴은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을까?신라인과 적극적으로 대화하기 시작한 현대인들의 노력이 출발된 시기를 ‘시사상식사전’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고려시대의 ‘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있는데,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 ‘안압지의 서편에는 임해전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어, 현재의 자리를 안압지로 추정하고 있다. 1975년 준설을 겸한 발굴조사에서 회랑지를 포함하여 26개의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해 신라 건물터로 보이는 3곳과 안압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연못 바닥에서 당시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2만4천여 점의 전돌과 기와, 쇠스랑·호미·낫·작살·화살촉 등의 철제 도구들이 다량 출토됐다. 특히 임해전터에서 출토된 보상화문전에 새겨진 기년명(紀年銘)은 문무왕 때 만들어진 것임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답사여행의 길잡이-경주’편은 여기에 아래와 같은 부연을 덧붙인다. 이를 통해 동궁과 월지 축조와 발굴 사이에는 1천300여 년의 간극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동궁과 월지는 안압지(雁鴨池)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후대의 발굴 조사를 토대로 2011년 7월 ‘동궁과 월지’로 명칭이 바뀌었다. 동궁과 월지는 신라 천년의 궁궐인 반월성에서 동북쪽으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통일 시기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많은 부를 축적한 왕권은 극히 호화롭고 사치한 생활을 누리면서 크고 화려한 궁전을 갖추는데 각별한 관심을 두었다. 그리하여 통일 직후 674년에 동궁과 월지를 만들었으며, 679년에는 화려한 궁궐을 중수하고 여러 개의 대문이 있는 규모가 큰 동궁을 새로 건설하였다.동궁을 비롯한 궁궐이 있던 안압지는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정원이다. 동궁과 월지와 주변의 건축지들은 당시 궁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새 동궁, 곧 임해전의 확실한 위치는 알 수 없으며 다만 건물터의 초석만 발굴됐다.”멀고 먼 세월 저편 고대 왕국의 흔적을 찾아내고, 그것을 연구함으로써 당대의 모습을 해석해 알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것들을 해낸 사람들의 수고는 칭찬받아 마땅하다.‘발굴’의 사전적 의미는 땅속이나 큰 덩치의 흙, 돌무더기 따위에 묻혀 있는 것을 찾아서 파내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 유적과 유물의 발굴’에는 이런 사전적 의미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담겼다.동궁과 월지 발굴에 참여했다는 건 시간을 초월해 과거의 신라 사람들과 오늘을 사는 현대인이 대화할 수 있는 매개체 역할을 수행했다는 게 아닐까? 그러한 노력이 천년왕국 신라의 실체를 우리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서게 했을 것이다. 1975년부터 시작된 발굴 통해 향후 연구 과제 찾아내2020년 10월 발행된 책 ‘못 속에서 찾은 신라’는 1975년 동궁과 월지 발굴에 참여했던 이들의 생생한 증언을 담고 있어 주목받았다.학술연구서의 하나로 이 책을 만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이종훈 소장은 다음과 같은 말로 동궁과 월지 발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1975년은 신라 왕경과 통일신라 연구에 있어 획기로 남을만한 중요한 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연못지 발굴조사인 안압지(월지) 발굴조사가 시작된 해이기 때문이다.안압지 발굴조사를 통해 우리는 통일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많은 양의 와전류, 목기류, 금속류 등의 출토 유물은 현재까지도 신라왕경 연구에 뺄 수 없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특히 문서목간과 더불어 건축사 연구에 있어 한 획을 그을만한 신라시대 건축부재도 다양하게 출토돼 고고학뿐만 아니라 문헌·건축·보존 연구에 큰 영감을 가져다준 발굴조사이기도 했다.”‘못 속에서 찾은 신라’엔 당시 발굴에 참여한 학자와 조사원들이 전해주는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다수 담겼다.1975년 발굴되기 이전 동궁과 월지를 추억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비단 역사를 전공하는 학생이 아니라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런 것들이다.“준설 전에는 그냥 유적지로 생각했어요. 임해정이라고 일제강점기 때 지은 건물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와서 구경하고 그랬어요. 주변엔 상가가 몇 채 있었는데 관광객이 오면 먹을 것 등을 팔고 그랬죠. 아무 정비도 없이 그저 연못만 덩그러니 있었어요.”“발굴이 시작될 당시엔 고기들이 많이 나와서 연못에서 큰 고기들은 잡아 불국사의 못에 넣기도 했지요. 그게 맞는지 안 맞는지 모르지만, 큰 거는 무거워서 고기 한 마리를 지게에 짊어지고 갔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발굴 현장에 갔을 때는 붕어가 상당히 많아 안주로 만들어 약주도 한잔 했습니다.”동궁과 월지에서 살았던 신라인들과의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기 전 풍경을 보여주는 가벼운 추억담은 본격적인 발굴조사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당연한 수순처럼 진지해진다.책에 따르면 1975부터 1년 이상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나온 유물의 수량은 총 3만 3천여 점에 달한다. 유물들은 대부분 연못의 서쪽에 복원된 건물지를 중심으로 호안석축 내부 반경 6m 거리 내의 바닥토층에서 출토됐다고 한다.월지에서는 기와, 벽돌, 건축부재, 불상, 용기, 숟가락, 배, 주사위, 금동제 가위, 목간 등 다양한 유물이 나왔다. 이 유물들은 통일신라의 건축, 불교미술, 생활상, 오락문화 등 통일신라 초창기 신라인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로 지금도 역할하고 있다.지속적 발굴조사로 동궁과 월지 실체 규명되기를동궁과 월지에 대한 조사와 발굴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그렇기에 반세기 전 발굴에 참여했던 선배 조사원들은 지금 발굴에 참여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모든 여건들이 옛날보다 좋아졌으니까 선배들이 못한 것은 후배들이 과감히 새로 조사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따스한 격려에서부터, “발굴이라는 것은 단시간 내에 빨리하려고 생각하면 안 되고 차근차근 침착하고 정확하게 해야 한다”는 충고까지.덧붙여 1975년 발굴 참여 학자와 조사원들은 입을 모아 이런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46년 전 열악했던 여건 속에서 졸속으로 진행된 안압지 발굴과 보고서에는 미비한 점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수십 년 후 이어진 같은 지역에서의 후배들의 발굴조사로 안압지 발굴의 미비점들이 보완됐으면 한다. 지속적인 발굴조사와 연구 결과가 동궁의 실체와 그 생활상을 규명하는데 중요 자료로 활용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위와 같은 선배들의 뜻을 잘 알고 있는 현재 발굴조사원들은 올해 초 작성된 ‘경주 동궁과 월지 조사·연구 마스터플랜’에서 다음과 같은 방향을 설정했다고 한다.“동궁과 월지의 복원은 장기간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는 사업이기 때문에 조사 및 연구의 범위를 명확히 하고, 타 문화유산의 조사·연구 사례 분석, 관련 전문가 의견 분석, 외부 환경 분석, 관련 정책 분석, 대상지의 정비, 조사와 연구 결과의 활용 방안 등을 토대로 체계적인 조사 및 연구의 방향과 전략을 제시해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에 대한 균형적이고 통합적인 중장기 계획을 세울 것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8-25

이건 전부 오로지 바이러스 십구 때문이야, 아니 십팔 때문이야

문학은 인간에게 ‘위로’를 선물할 수 있다. 갑작스레 나타난 바이러스로 인해 온 세상이 공황에 빠져 있는 지금. 소설가 김강 씨가 1천 년 전 신라 동궁에서 열린 연회를 소재로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된 후의 경주를 상상해 마음 따스해지는 작품을 썼다. 이를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김강 씨는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쓴 작가인 동시에 내과의사다. 편집자 주연꽃이 만발하네. 사람도 만발이네. 어휴, 도로 양쪽에 주차해놓은 차들 좀 봐. 사람들도 장난 아니게 많겠지. 땡볕에 고생 좀 하겠는걸. 그래도 휑한 것보다는 낫지. 십팔인지 십군지 하는 바이러스. 난 왜 자꾸 십구보다 십팔이라고 하는 거지? 아무튼, 그 사태가 해결되었으니 망정이지 어쩔 뻔 했어. 경주로 단체 관광을 올 생각을 했겠어? 가게 문 열어놓고 면상을 맞대며 한숨만 쉬고 있겠지. 그러니 저 정도 줄 설 수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행이다 생각해야지. 그렇지 않아?어허, 벌써 일어서지 마. 아직 조금 더 가야 해. 저기 보이는 게 첨성대니까 여기는 대릉원쯤 되겠네. 차 밀리는 것을 봐서는 내리려면 한참 남았어. 안압지, 아니 월지 근처에 간다 해도 주차도 해야 하고 우리가 일어선다고 바로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아무튼 시간이 걸릴 거야. 앉아 있어. 조금만 기다리자고.참, 내가 하나만 일러줄게. 월지를 둘러보고 나면 보통 옆에 있는 연 밭으로 가거든. 가기 싫어도 가게 돼 있어. 사람들이 모두 거기로 갈 거니까. 연 밭에 가거든 꽃대 아래를 살펴봐. 선명한 분홍의 덩어리가 붙어있는 걸 볼 수 있을 거야. 예뻐. 뭘 것 같아? 그거 왕우렁이 알이야. 왕우렁이 알 본 적 없지? 있다고? 외래종이라고? 이 사람이. 글로벌 시대에 토종, 외래종 구별이 가당키나 해?허, 참. 아직도 저러고 있네. 저기 맨 앞자리에 앉아있는 둘 보이지? 서로 고개를 외로 돌리고 앉아 있잖아. 중국집 하는 앤드류하고 빵집 주인 왕 씨야. 일 년 전이었나? 앤드류와 왕 씨가 다퉜어. 이후로 둘 사이가 회복이 안 되더라고. 그래서 오늘 내가 특별히 상가 번영회 총무한테 부탁을 했지. 둘이 같이 앉혀보라고. 아직까지는 의미 없네, 의미 없어. 하긴 한 번 틀어진 사이가 쉽게 풀리진 않겠지.다툰 이유가 뭐냐고? 다투는데 이유가 있나. 쌓인 것들이 폭발하는 거지. 그냥 쌓이겠어? 특별히 어느 한 사람을 두고 쌓인 거겠어? 세상이 그랬던 거지. 올해가 이천이십삼 년이니 사 년 전 바이러스 십구가 나타났지. 한창 기승을 부렸고 거리두기다 방역강화다 해서 상가 분위기가 영 아니었어. 누구하나 웃지 않던 시절이었지. 하루 종일 가게에 앉아 텅 빈 거리만 보고 있었어. 그렇게 멍하니 보다 보면 이상한 생각도 나고 곱게 보이던 것도 미워 보이고 그러는 거잖아.물론 둘 사이가 저렇게 된 계기는 있지. 도화선 같은 것 말이야. 그러니까 그날은 재활용 쓰레기를 수거해가는 날이었어. 여름이었어. 더웠지. 예전 같으면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그날따라 빵집 왕 씨가 자기 가게에서 나온 폐지들을 쓰윽 본 거야. 그런데 이게 뭐야? 빵집에서 나온 폐지들 틈에 당근 상자가 보인 거지. 당근 상자 안에 흙도 조금 남아 있고, 물기도 좀 있고 하여튼 좀 그랬나 봐. 왕 씨가 상자를 들고 중국집으로 갔어. 앤드류를 불러냈지.이름이 왜 앤드류냐고? 외국인이었어. 지금은 한국인이고. 교포 2세야. 앤드류 김. 모국 방문한다고 들어왔다가 자장면 맛에 반해서 눌러앉았어. 귀화도 했고. 우리 상가에서 중국집을 한 지가 벌써 이십 년 다 되어가. 빵집 왕 씨하고 비슷한 시기에 개업을 했으니까. 하여튼 왕 씨가 중국집 문을 열고 앤드류에게 이리 나와 보라고 했어. 고운 말, 부드러운 말투였겠어?넓은 홀, 여남은 테이블 중 딱 한 테이블에 손님들이 있었어. 정수기 관리하시는 분들이었다지 아마? 상가 장사가 안 되니까 정수기 관리하시는 분들이 자기들 거래 업체를 돌아가며 방문해서 사 먹어주기도 하고 그랬나 봐. 고마운 일이지.아무튼 자장면을 먹고 있던 손님들이 자장면 면발을 입에 문 채 고개를 돌려 왕 씨를 보았지. 탕수육 소자 정도는 추가로 시켜줬으면 하고 손님들을 바라보던 앤드류는 들고 있던 메뉴판을 놓쳤고. 메뉴판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소리가 조금 크게 났어. 근데 그 소리를 들은 왕 씨가 또 오해한 거지.이게 뭘 잘했다고? 지금 던진 거야? 너, 던진 거지?앤드류가 얼마나 황당했겠어?아니 그게 아니고, 놀라서 메뉴판을 놓친 건데.왕 씨도 그 말을 듣고는 아차 했을 거야. 그런데 어떻게 해. 그 상황에서. 그랬어? 내가 오해했네. 미안. 그럴 수는 없었을 것 아니야? 왜 못 그러냐고? 보통은 그러기 힘들지. 왕 씨는 물러설 수가 없었어.이 자식이 말끝도 흐리고. 이제 아래위도 없다 이거지? 그래 아래위 없다 치자. 그렇게 나오겠다면 나도 그렇게 대해주면 되니까. 그건 그렇고, 이 박스 왜 우리 쪽에 갖다 놓은 건데? 이 당근 박스 말이야. 우리는 당근 쓸 일 없거든.그렇게 말하고는 당근 박스는 중국집 바닥에 던져버렸어. 박스에 있던 흙과 마른 잎사귀들이 중국집 바닥에 흩어졌지. 어머나. 손님들이 소리를 질렀어. 그렇게 시작된 거야. 앤드류가 박스를 집어 들고 박스에 인쇄된 영농조합 명칭을 가리키며 우리는 여기서 당근을 사지 않는다, 말했지만 왕 씨 귀에 들어올 리 없었지. 우리 상가에서 당근을 쓸 가게는 중국집 말고는 없거든. 빵집에서는 고로케 만들 때나 간혹 쓰기는 하겠지만, 왕 씨 말로는 쓰는 양이 많지 않아 박스로 사서 쓰지는 않는다 하더라고.그날 둘은 드잡이를 하는 상황까지 갔어. 좌우로 상가가 늘어선 텅 빈 거리 한 복판에서 큰 목소리와 욕설이 오고 갔지. 결국 파출소에서 온 경찰이 중재를 하고 나서야 끝났어. 사실 그게 경찰까지 올 일은 아니지. 빈 박스야 누구 것이든 모아 놓으면 되는 것이고. 설령 자기 것이 아닌 박스가 들어와 있다고 해도 누구 것인지 찾아 나서는 사람도 잘 없지. 자기 일하기도 바쁘니까 말이야. 그리고 그 박스가 중국집 것도 빵집 것도 아닐 수도 있잖아.상가에 있는 가게 중 누구든 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담아올 때 썼던 빈 박스 중 하나일 수도 있지. 그러니까 평소 같으면 별 문제가 될 일이 아니었다는 거야. 이건 전부 오로지 바이러스 십구 때문이야, 아니 십팔 때문이야. 저 두 사람 그 전에는 사이가 좋았거든.그런데 내가 누구냐고? 누구기에 저 둘의 사연을 이리도 잘 아냐고? 나, 상가 번영회장이지. 번영회장이면 우리 상가에서 벌어지는 일은 다 알지. 암, 다 알고말고. 오늘 이 행사를 기획하고 밀어붙인 사람도 나야.이제 바이러스 십구 사태도 마무리 되었으니 좋은 일이 생기지 않겠어. 상가에도 활기가 돌 것이고. 그러니 풀 것은 풀고 사과할 건 사과하고 해야지. 다툰 것이야 저 둘이지만 상가의 다른 가게 사장들 사이도 그리 썩 좋았던 것은 아니니까. 굳이 말하려면 많아. 저기 있는 둘도 그렇고, 맨 뒤에 앉아 있는 저 둘도 그렇고. 그래서 다 같이 가자고 했어.저기 누각 보여? 누각 앞에 연못이 있어. 월지. 동궁은 어디냐고? 동궁은 없어. 동궁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자리만 있지. 태종무열왕 알지? 문무대왕도 알고? 원래는 그 태종무열왕의 아들이자 문무대왕의 동생인 김인문의 집이었다네. 김인문이 당나라에 가서 외교를 잘 했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을 이끌어냈지. 문무대왕이 그 공을 치하해서 집을 하사했는데, 이후 나당 연합이 깨어지면서 상황이 바뀐 거야. 당나라 군대가 신라와 전쟁을 하러 오면서 김인문을 앞장세워서 온 거지. 김인문을 신라 왕으로 삼겠다는 것이었어. 김인문은 역적이 되었고 문무대왕은 집을 헐어버렸지. 그 자리에 동궁과 월지를 만든 거야. 소설가 김강 동궁에 얽힌 이야기 하나만 더 할까?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왕건을 초대했고 동궁에서 큰 연회를 열었어. 견훤으로부터 신라를 구해달라는 것이었지만, 아닌가? 구해줘서 고맙다는 것이었나? 아무튼. 그 자리에서 왕건에게 신라를 맡아 달라 부탁을 했다네. 신라의 백성들을 위해서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그게 쉬운 결정이었겠어? 잠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려와. 동궁에 대해서 어찌 그리 잘 아냐고? 신문만 잘 봐도 다 알게 되어 있어. 신문에 연재기사로 나왔었거든. 장사도 안 되고 하니 하루 종일 신문을 정독했거든.다 왔네. 이제 곧 내리겠어. 내릴 준비하자고. 그러고 보니 말이야. 앤드류는 김 씨고 빵집은 왕 씨니까. 옛날에 경순왕과 왕건이 만났던 것하고 같네. 김 씨와 왕 씨가 만난 거잖아. 차에서 내리면 저 둘을 불러놓고 경순왕과 왕건 이야기를 해줘야겠어. 괜찮은 명분이 될 것 같지 않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그렇지 않아?동궁을 배경으로 한 따뜻한 일화가 한 가지 더 생기는 거지. 대략 천 년 만에 말이야.

2021-08-18

신라왕실·귀족 화려한 생활상 한눈에

박물관을 찾는다는 건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인식하고 미래를 추측하는 행위에 가깝다. 우리가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수백 년 전 혹은, 수천 년 전 사람들의 생활상을 미루어 짐작하며 살피는 게 바로 박물관 방문이 아닐지.동궁과 월지는 7세기에 만들어졌다. 21세기를 사는 누구도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했다. 그러니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통일신라시대 사람들은 어떤 걸 먹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을까?”국립경주박물관 안에는 월지관이 있다. ‘코로나19 사태’에다가 폭염으로 아스팔트가 녹아내릴 정도의 무더위였지만, 기자가 경주를 찾은 7월 말에도 월지관을 포함한 경주박물관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방학을 맞은 아이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알려주고 싶은 아버지와 어머니, 신라의 유물에 관심을 가진 역사학도들, 거기에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서 서라벌 사람들의 과거 행적을 살피는 연인들까지 남녀노소 불문이었다.이들을 반겨 맞는 월지관은 어떤 곳일까. 경주시청 문화관광 홈페이지의 설명부터 확인해보자.“월지관은 경주 동궁과 월지(안압지)에서 발견된 약 3만 점의 통일신라시대 문화재 중에서 엄선한 1천100여 점의 문화재를 주제별로 전시해 통일신라 문화, 특히 왕실의 생활문화 전반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월지는 신라 동궁 안에 있던 인공 연못. 조선시대 이래 오랫동안 안압지로 불렸으나 신라 사람들은 월지라고 했다. 문무왕 14년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월지관에는 용면문와, 금동판불상(보물 제1475호), 금동초심지가위(보물 제1844호) 등 신라 왕실과 귀족의 화려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문화재들이 전시돼 있다.” 청아한 연꽃… 경주박물관 주위 풍경 더위 식혀줘자가용이 아닌 대중교통으로 경주를 찾는 여행자도 월지관이 자리한 국립경주박물관을 쉽게 찾을 수 있다. KTX 기차가 멈추는 신경주역에선 버스로 25분, 경주고속버스터미널과 시외버스터미널에선 시내버스를 타고 10분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 동궁과 월지, 그리고 경주박물관이다.만약 버스에서 내렸다면 박물관에 입장하기 전 동궁과 월지부터 둘러보고, 인근 연못에 하얗게 무더기로 피어있는 연꽃과 만나보기를 권한다. 쏟아지는 여름 햇살과 폭염에 등줄기로 땀이 흘러내릴 수도 있지만, 연분홍과 하얀색이 하모니를 이루는 청아한 연꽃의 자태는 짜증스런 더위를 식혀주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연꽃은 더러운 진흙 속에서도 특유의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 그렇기에 동양은 물론 서양에서도 예부터 연꽃을 귀하게 취급해왔다.신라는 부정할 수 없는 ‘불교왕국’이었다. 이를 반영하듯 동궁과 월지 주변에 환하게 꽃을 피운 연꽃은 불교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관련된 ‘두산백과’의 부연이다.“불교의 출현에 따라 연꽃은 부처의 탄생을 알리려 꽃이 피었다고 전하며, 불교에서의 극락세계에서는 모든 신자가 연꽃 위에 신(神)으로 태어난다고 믿었다. 인도에서는 여러 신에게 연꽃을 바치며 신을 연꽃 위에 앉혔다. 불교에서도 부처상이나 승려가 연꽃 대좌에 앉는 풍습이 생겼다. 중국에서는 불교 전파 이전부터 연꽃이 진흙 속에서 깨끗한 꽃이 달리는 모습을 속세에 물들지 않는 군자의 꽃으로 표현했고, 종자가 많이 달리는 현실을 다산의 징표로 하였다. 중국에 들어온 불교에서는 극락세계를 신성한 연꽃이 자라는 연못이라고 생각하여 사찰 경내에 연못을 만들기 시작했다.”2021년 속세의 무더위를 ‘내세의 꽃’이라 불리는 연꽃을 바라보며 잠시잠깐 식혔다면 이제 월지관으로 갈 차례다.모처럼 경주를 찾았으니 당연지사 월지관 지척의 신라역사관과 신라미술관, 옥외전시장과 어린이박물관도 돌아볼 기회를 놓칠 수 없다.이 모든 전시장을 품에 안은 경주박물관을 찾은 날은 한낮 기온이 섭씨 35도를 오르내렸다. 그야말로 땡볕이었다. 그럼에도 입장하는 관람객들은 QR코드 체크와 체온 확인 등을 질서 있게 거치며 코로나19 방역에 적극 협조하고 있었다. 토기와 기와… 신라 왕실의 문화를 만나는 시간월지관은 개방감을 주는 2층 형태로 설계됐다. 자연스런 동선을 따라 1층을 거쳐 2층으로 가면 아래층 중앙부가 훤히 보여 시원스러운 느낌을 준다.동궁과 월지 발굴·조사에선 많은 수의 토기가 출토됐다. 그렇기에 월지관에선 다양한 형태의 토기를 확인할 수 있다.실용성은 물론 수려한 조형미까지 두루 갖춘 통일신라시대의 토기를 보고 있으면 ‘1천200~1천300여 년 전에도 저런 예쁜 도자기에 물과 술, 음식을 담아 먹었다니 신라인의 생활수준은 지금에 비해도 결코 낮지 않았네’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그렇다면 신라의 토기는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져 어떻게 유통된 것일까?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펴낸 책 ‘유적과 유물로 본 신라인의 삶과 죽음’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이런 문장이다.“삼국시대 이후 토기의 생산과 공급은 왕실 및 중앙 귀족에 의해 관리됐으며 전업공인 집단에 의해 대량생산이 이루어졌다. 경주 손곡동·물천리 토기 가마군은 왕실에 의해 이루어진 대량 생산 체제를 보여주는 대표적 유적이다. 이 지역은 토기를 대량생산 할 수 있는 환경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 토기 가마의 입지는 충분한 연료 공급, 토기 제작을 위한 작업 공간, 가마 축조를 위한 적합한 지형(고도·경사도·풍향 등), 소비자와의 교통로 등 복잡한 요인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중략) 경주 지역에서는 5~6세기 손곡동·물천리 토기 가마군을 중심으로 왕실과 국가 주도의 대규모 생산 활동이 이뤄졌다. 그 후 7~8세기 이후에는 북쪽으로 화산리 가마군, 서남쪽으로는 화곡리 가마군 등 다원화된 거점을 중심으로 생산 활동이 있었고, 여기에서 생산된 토기와 기와가 왕경에 공급된 것으로 이해된다.”앞서 언급했지만, 월지관엔 동궁과 월지에서 발견된 유물 1천 점 이상이 전시돼 있다.신라 장인의 빼어난 조각기술을 실감하게 해주는 불상(佛像)에서부터 서라벌 사람들이 사용하던 숟가락과 당시 건물에 달려 있던 문고리까지. 그중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있으니 바로 기와다.꽃무늬를 새긴 것에서부터 도깨비의 형상을 조각한 것까지 신라의 기와가 보여주는 모습은 다채롭고도 인상적이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1천 년 전 기와를 만든 신라인의 숨결까지 느껴지는 듯했다.‘한국의 박물관: 기와’라는 책에선 통일신라시대 기와에 관한 서술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설명을 통해 월지관에 전시된 기와의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추정해보는 것도 흥미롭다.“통일신라시대의 기와는 7세기 후반 고신라의 전통을 바탕으로 고구려 및 백제의 영향과 당나라의 자극에 힘입어 폭넓은 복합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한 양식변화를 낳고 있다. 통일신라 초기는 우리나라의 와전사(瓦塼史·기와의 역사)에 있어서 크나큰 전환점이 되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각각 특색 있게 전개돼 온 삼국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성당문화(盛唐文化)의 외연적인 자극에 따라 유래 없는 복합과정을 거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중략) 월지에서 출토된 ‘조로2년(調露二年)’명의 보상화문전의 예로써 통일신라의 문화는 신라의 통일과 함께 급속도로 발전하였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국토의 확장에 따르는 국력의 신장은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토목공사를 일으키게 하였고 그중에서도 궁전, 사찰 등 목조건축의 성황과 이에 따르는 장식성의 강조로써 지붕을 치장하는 일이 크게 일어나게 된다.” 신라 나무배도 월지관의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미려한 형상으로 밥상이나 술상 위에 오른 토기를 사용했고, 예술작품에 가까운 기와로 장식된 건물에서 삶을 영위했던 신라의 왕과 귀족들.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호사스러움은 화려한 석조 건축기술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대 캄보디아 크메르 왕조나 중세 유럽의 귀족들도 부러워할 정도였을 것 같다.월지관에서 빼놓지 않고 살펴봐야 할 출토 유물 중엔 목선(木船·나무로 만든 배)도 있다. 박물관 1층 가운데 전시된 것이다.이 배가 발견된 것은 1975년 4월. 1천 년 이상 연못 속에 꼭꼭 숨겨져 있던 목선은 월지의 중도와 소도 사이에서 뒤집힌 채 모습을 드러냈다. 이걸 옮기는 건 쉽지 않은 문제였다.심하게 부식돼 스펀지와 유사한 상태였던 목선은 3개월의 이동 준비기간을 거쳐 지금으로부터 46년 전 햇볕 뜨겁던 여름날 20여 명 인부들에 의해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그 와중에 선체가 두 조각으로 부러지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며.어쨌건 이런 과정을 거쳐 한국에서 발견된 목선 중 가장 오래 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동궁과 월지의 나무배는 현재 월지관 환한 조명 아래서 21세기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 1천 년 전 그 배에 올랐던 신라 사람들은 지금의 이런 상황을 상상이나 해봤을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8-11

연못 서쪽 5개 건물 아래 등서 1만8천여 점 우르르

대부분의 인간은 100년을 살지 못한다. 그러나 지적 호기심은 인간보편의 것이라서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과거와 미래를 궁금해 한다.미래는 현재를 통찰함으로써 일정 부분 예측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이 살기 이전 시간인 과거는 어떤 방식으로 알 수 있을까?고문헌을 통한 해석, 입에서 입으로 이어져온 옛이야기의 채록과 종합 등 여러 가지 방식의 연구 형태가 있을 수 있다. 유물을 통해서 과거를 유추하는 것도 그중 한 방법이다.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매혹적인 궁원(宮院) 동궁과 월지가 어떤 모습이었고, 거기서 왕과 귀족들은 어떤 방식의 삶을 살았던 것인지 떠올릴 수 있게 해주는 유물들이 적지 않다.역사학계에 의하면 현재까지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1만8천여 점이 넘는다. 월지와 주변 건물에서 나온 것이 1만 5천여 점, 발굴 조사가 진행된 ‘가 지구’에서 1천300점이 넘게 출토됐다고 한다.동궁과 월지에서 발견된 유물은 주로 연못 서쪽에 있는 5개 건물지를 중심으로 연못 안쪽 반경 6m 내외의 토양층에서 나왔고, 그 종류는 와전류, 용기류, 목재류, 토기류, 금속류, 철제류, 석제류, 동물뼈 등으로 다양하다고 알려져 있다. 연못 속 유물들, 1974년 첫 모습을 드러내다그렇다면 통일신라의 높은 미적 감각과 예술성을 보여주는 동궁과 월지의 유물들은 언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까. 땅 속에 그 형상을 감추고 있던 각종 유물이 1천 년 세월을 뛰어넘어 환한 햇살 아래 나타난 것은 1974년이다.그 요약된 과정을 이상준의 논문 ‘동궁과 월지 조사 연구 현황과 과제’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동궁과 월지) 유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은 1971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수립되면서부터다. 이 계획에는 경주시의 사적지를 15개 지구 단위로 구분하고, 이중 ‘월성지구’ 개발에 안압지, 계림, 반월성을 포함하였다. 안압지는 준설 및 개수, 조림, 토지 매입이 주요 사업 내용이었는데 발굴조사는 사업에 포함되지 않았다.당시에는 연못 발굴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월성을 발굴해 장기적으로 궁성을 복원하고자 하였다. 1974년 드디어 연못 준설이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다량의 기와를 비롯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옴에 따라 해당 공사를 중단하고, 이듬해인 1975년부터 1976년까지 발굴조사를 추진하게 되었다.발굴 결과 ‘동궁과 월지’의 정확한 규모와 호안의 축조 상태, 3개의 인공섬과 입수·배수 시설, 주변 건물지의 배치 구조 등이 확인됐다. 이후 발굴 결과를 토대로 1977년부터 1980년까지 복원·정비 공사를 실시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통일을 위한 전쟁 과정에서 넓은 영토와 보다 많은 자산을 축적한 신라는 7세기 중반 화려한 궁궐과 정원을 만들며 국력을 내외에 과시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축조된 것이 동궁과 월지다.그런 까닭에 거기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당시 신라 고위층의 생활방식과 주거양식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당대의 국교 역할을 했던 불교가 어떤 방식으로 예술화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줬다.동궁과 월지의 조사발굴은 1974년 이후 쭉 이어졌는데 1980년엔 연못 서쪽 호안에 접해 세워졌던 5개의 건물터 중에서 3개를 복원했고,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는 초석을 복원해 노출시켰다.한국문화유산답사회에 따르면 이 유물들은 당시 왕과 군신들이 이곳에서 잔치를 벌일 때 못 안으로 빠진 것과 935년 신라가 멸망해 동궁이 폐허가 된 뒤 홍수 등 천재로 인하여 못 안으로 쓸려 들어간 것, 그리고 신라가 망하자 고려 군대가 동궁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면서 못 안으로 물건들을 쓸어 넣어 버린 것 등으로 추정된다.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발행한 책 ‘신라의 유적과 유물’에도 동궁과 월지의 유물 출토 과정과 실재했던 건물에 관한 내용이 간략하게 설명돼 있다.“1975년 안압지(월지) 준설공사 중에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면서 2년에 걸쳐 실시된 발굴조사를 통해 동서200m·남북180m에 이르는 대형 연못과 대형 건물지군이 확인됐으며, ‘월지’명 유물들과 ‘의봉사년개토(儀鳳四年皆土·의봉은 당나라 연호로 의봉사년은 679년에 해당)’명 기와 등이 출토됐다.이밖에 태자와 그 가족들이 거처하는 전각과 동궁 예하 궁아들, 만수방과 같은 건물들이 거기에 존재하였다. 임해전의 정문은 임해문으로 추정되고, 또 동궁에 인화문이 있었으며, 안압지에서 발견된 목간에 보이는 여러 문들도 거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유물은 신라 번성기 고위층의 생활상 보여줘그렇다면 신라가 통일 이후 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한 시기에 조성된 동궁과 월지에선 어떤 유물들이 나왔을까?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최근 발간한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동궁과 월지의 유물들 중 가장 많이 출토된 것은 와전류(기와 종류)로 주로 서편 건물지 아래 연못 바닥면에서 수습됐다고 한다.기와편에 보이는 문양의 종류는 100여 종이 넘고, 전돌 역시 20여 종에 달한다는 것이 이어지는 설명.그것들 외에도 치미편, 귀면와, 이형와 등 5천700여 점이 출토됐다는데, 출토된 유물 중에서 보상화문 전편에 음각된 문양전을 통해 제작 연대를 추정할 수 있었고, 또 암키와 등 문양에 양각으로 앞서 말한 ‘의봉4년개토’라 새겨진 명문 기와를 확인하면서 제작 연대를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동궁과 월지 발굴조사에선 기와류와 함께 각종 토기와 자기, 금속과 나무로 만들어진 유물도 상당수 나왔다.돌베개가 출간한 ‘답사여행의 길잡이-경주’에는 동궁과 월지 출토 유물 중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 몇 가지가 소개돼 있다.이 책의 설명에 의하면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된 불상들은 7세기에서 10세기 초에 만들어진 불상들로 통일신라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이 가운데 ‘금동아미타삼존판불’의 본존은 화려한 연꽃의 2중 대좌 위에 설법인을 하고 당당히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 좌우에는 협시보살이 허리를 한껏 휘어지게 하고 서 있다.본존과 보살에 별도의 두광이 있고 이를 감싼 큰 광배가 전체를 연결하고 있어서 완벽한 삼존 구도를 느낄 수 있는 높이 27㎝의 이 판불(板佛·동판 등에 새기고 채색한 불상)은 통일신라 전기의 불상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금동초심지가위’도 이채롭다. 당시 신라 왕족과 귀족들의 기품을 보여주듯 초의 심지를 자르는 데 썼던 길이 25.5㎝의 이 가위는 잘린 심지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날 바깥에 반원형의 테두리를 세웠고, 화려한 당초무늬 장식까지 갖췄다.이외에도 당나라의 제작 기법을 따른 ‘칠기 연꽃봉오리 장식’과 해학과 익살이 느껴지는 도깨비가 새겨진 ‘귀면와’, 고대 유물 가운데서는 보기 드문 나무로 만든 주사위(주령구) 등도 동궁과 월지에서 모습을 드러낸 귀한 유물들이다.이 가운데 주령구(酒令具)는 신라인들의 술자리 놀이방식을 어렴풋이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 흥미롭다. ‘위키백과’는 주령구를 이렇게 설명한다.“1975년 경주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된 정사각형 면 6개와 점추이 육각형 면 8개로 이루어진 14면체 주사위다. 정사각형 면의 면적은 6.25평방센티미터, 육각형 면의 면적은 6.265평방센티미터로 확률이 거의 14분의1로 균등하게 돼있다. 재질은 참나무다. 각 면에는 다양한 벌칙이 적혀 있어 신라인들의 풍류를 보여주고 있다.”실제로 발굴된 주령구에는 재밌는 벌칙(?)들이 쓰여 있어 신라 왕과 귀족들의 주석(酒席)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노래가 없더라도 춤을 춘다’ ‘다른 사람이 놀려도 화내지 않는다’ ‘술 세 잔을 단숨에 마신다’ ‘간지럼을 태우더라도 참는다’ 등 주령구에 적힌 문구를 볼라치면 1천 년 전 신라 사람들 역시 오늘날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신라 동궁과 월지의 본래 모습 제대로 재현하려면…앞서 언급된 논문 ‘동궁과 월지 조사 연구 현황과 과제’를 쓴 이상준은 “발굴 당시의 모습을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은 현재의 모습이 동궁과 월지의 전부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 당시에는 그 권역이 지금보다 훨씬 범위가 넓었고, 수많은 전각들이 즐비한 웅장한 모습”이었다고 말한다.이에 덧붙여 그는 동궁과 월지가 가지는 역사 속 위상을 되찾고, 제대로 된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는 ‘기존에 생산돼 있는 고고 자료에 대한 철저한 분석’ ‘원래 범위에 대한 보다 철저한 확인’ ‘용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수로 조사·연구’ ‘주차장지를 비롯한 남쪽 지역에 대한 재발굴’ 등이 필요하다고 조언하고 있다.이는 비단 동궁과 월지 관련 유물의 조사발굴만이 아닌, 다른 지역 역사 유적에 대한 조사와 발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귀담아 들을 가치가 충분한 지적일 듯하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7-28

정치·문화·예술 ‘통일신라 최전성기’ 꽃피우다

예술과 문화를 꽃피우기 위해서는 탄탄한 정치·경제적 토대가 우선돼야 한다는 것은 이미 역사를 통해 증명된 바 있다.나라의 곳간이 텅텅 비어있고, 외세의 침략이 빈번한 상황에서 대규모의 화원을 조성하고, 신하들을 위로하며 격려할 공간을 만들고, 왕자의 교육과 왕위 계승에 도움을 줄 궁전을 축조하는 왕은 없거나 드물 듯하다.경주의 대표적 유적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동궁과 월지도 이런 전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고대왕국 신라가 만든 동궁과 월지의 발굴조사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경주 동궁과 월지 조사·연구 마스터플랜 수립 연구’에서 동궁과 월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사적 제18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의 궁원지로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 제30대 문무왕 14년(674) 2월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그곳에 온갖 화초를 심고 진기한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953년 신라가 고구려에 귀부(歸附)할 때까지 262년간 왕이 군신(群臣)을 위해 항연을 베풀었던 장소이자 태자(太子)가 거처하는 동궁(東宮)으로 알려져 있다.”이 설명처럼 동궁과 월지는 7세기 중반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이 시기의 신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분명 국력과 나라의 기세가 약했을 때는 아닐 것이다. 태종무열왕에서부터 시작된 신라의 전성기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펴낸 책 ‘신라사 총론’은 위의 질문에 아래와 같이 답하고 있다.“신라 중대(654~780)는 제29대 태종무열왕대부터 제36대 혜공왕대까지로, 태종무열왕과 그 직계 후손이 재위한 시기였다. 중대 초기 신라는 당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다.그러나 당이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려는 야욕을 보이자 신라는 이를 무력으로 물리치고 드디어 삼국통일을 달성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이전보다 영토와 인구가 크게 늘어나고, 발달된 선진 문물을 수용함으로써 이후 100여 년에 걸쳐 유례없는 번영을 이룩하였다.”앞서의 언급처럼 ‘신라 중대’가 ‘유례없는 번영을 이룩한’ 시기라면 태종무열왕과 그의 아들 문무왕, 손자 신문왕이 통치했던 7세기 중후반은 신라 번영기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는 동궁과 월지가 만들어진 때와도 일치한다.그렇다면 나라의 힘을 키워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하고, 불교문화와 예술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까지 만들어 통일신라의 골격을 형성시킨 태종무열왕, 문무왕, 신문왕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당나라와 연합해 백제를 굴복시킨 태종무열왕은 654년부터 661년까지 신라를 통치했다. 그의 이름 김춘추는 굳이 역사서만이 아니라 신라를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서도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다.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였던 태종무열왕에 관해서는 흥미로운 기록들이 많은데, ‘두산백과’가 소개하는 것들을 인용하면 이렇다.“‘삼국사기’에 따르면, 무열왕은 풍채가 영준하고 거동이 위엄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세상을 다스리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그가 하루에 쌀 서 말과 꿩 아홉 마리를 먹었으며,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는 아침과 저녁 두 끼만 먹었는데도 하루에 쌀 여섯 말과 술 여섯 말, 꿩 열 마리를 먹었다고 나온다.‘삼국사기’에는 무열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인 642년에 딸인 고타소가 백제군에게 죽임을 당하자 직접 고구려로 가서 원병을 요청해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으려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진골(眞骨) 출신의 최초 신라 왕이었다. 그는 정치적 욕망의 실현을 위해 당대의 거물 김유신의 누이와 정략결혼을 했는데, 그 이유를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와 정략적인 측면에서 혼인함으로써, 왕위에서 폐위된 진지왕계와 신라에 항복해 새로이 진골귀족에 편입된 금관가야계간의 정치적·군사적 결합이 이루어졌다.즉, 진지왕계인 김용춘·김춘추는 김유신계의 군사적 능력이 그들의 배후세력으로 필요하였다. 또한 금관군주 김구해계(金仇亥系)인 김서현·김유신은 김춘추계의 정치적 위치가 그들의 출세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아버지가 닦아 놓은 터전에서 통일 이룬 문무왕아버지 김춘추와 어머니 문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신라 제30대 왕에 오른 문무왕은 김유신 등과 힘을 합쳐 고구려를 제압하고 당나라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삼국 통일을 이뤄냈다. 그는 661부터 681년까지 20년간 신라를 통치했다.‘동궁과 월지의 건설자’이기도 한 문무왕이 이뤄낸 삼국 통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역사학자들이 적지 않다. 이와 관련해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신라의 삼국 통일’ 중 한 대목을 읽어보자.“현재 ‘한국사’ 교과서에는 ‘신라가 당을 축출함으로써 삼국 통일이 완수되며,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은 하나가 되어 단일한 민족문화와 사회를 만들 수 있었다’고 묘사되어 있다.또 ‘이 시기의 예술세계는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켜 통일과 균형의 아름다움을 통해 불교세계의 이상을 실현하였다’고 하여 신라의 삼국 통일이 갖는 민족사적 의의와 통일 이후 신라의 문화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에서 보여준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헌신적 지도력, 신라 화랑의 빛나는 용기 등에 대해서도 신라 당대부터 끝없는 찬사가 이어져왔다.”‘인물한국사’에 의하면 문무왕은 태자 시절부터 아버지 태종무열왕 이상의 능력을 보여줬다고 한다. 아래와 같은 서술이다.“아버지가 왕위에 오르기도 전인 진덕여왕 때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고, 늦게 왕위에 오른 아버지를 도와 병부령(군사에 관한 업무를 총괄하던 우두머리)의 자리에서 나라의 기강을 잡았다.아버지는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한 승전보 속에 생애를 마쳤지만, 아들은 계속되는 백제의 부흥운동을 제압하고, 고구려를 쳐서 멸망시킨 다음 당나라 군사마저 쫓아내기까지 과중한 임무를 맡아야 했다.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태종무열왕의 업적이 화려한 서곡에 불과할 정도로 문무왕은 통일의 주역으로서 자신의 몫을 다했다.”동궁과 월지 등 현재까지도 그 흔적이 남이 있는 유적을 여럿 만들어낸 문무왕은 죽음과 묘지 선택까지 드라마틱했다.그의 묘는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앞바다 바위 아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해변에서 200m쯤 떨어진 곳이다. 사람들은 이를 ‘문무대왕릉’이라 부르고 있다.최고 권력자인 왕의 유택(幽宅)이 땅 위 거대한 봉분 속이 아닌 유실의 위험성이 높은 바다 한가운데 마련된 이유는 “내가 죽으면 용이 되어 우리 백성들을 괴롭히는 왜구를 막아 내겠다”는 문무왕의 유언 때문이었다고 한다.정치적으로나 문화·예술적으로 ‘성공한 군주’라 평가 받는 문무왕이지만, 그와 아버지 태종무열왕이 이뤄낸 삼국 통일에 관해서는 비판적 평가도 없지 않다.세상사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책 ‘신라의 삼국 통일’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실려 있다.“‘한국사’ 교과서나 개설서에는 ‘신라의 삼국 통일은 당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였고 고구려의 고토 만주를 잃어버린 불완전한 통일’이라는 통일의 한계점을 강조하는 부정적 시각도 반드시 곁들여져 있다.심지어 ‘신라의 삼국 통일은 통일이 아니며, 단지 백제의 멸망에 불과하다. 고구려를 이어 발해가 등장했기 때문에 삼국시대에서 양국시대 또는, 남북국시대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는 통일 자체를 부정하는 견해까지도 나와 있다.”신문왕, 장인까지 처형하며 왕권을 강화하다문무왕 사후 신라 제31대 왕에 오른 신문왕은 문무왕의 장자다. 태자가 된 것은 665년, 681년에 왕의 자리에 올랐고 12년간 재위했다. 그는 신라 역사 속에서 강력한 전제 왕권을 만들어낸 통치자로 평가받고 있다.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김용만은 ‘인물한국사’에서 왕권의 강화를 위해 장인까지 처형한 신문왕에 관해 아래와 같이 쓴다.“681년 7월 1일 삼국 통일의 영웅 문무왕이 세상을 떠났고, 16년간 태자 자리에 있던 정명이 왕위에 올라 신문왕이 되었다. 신문왕은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있던, 냉정하면서도 판단력과 실천력이 뛰어난 임금이었다. 그는 즉위한지 한 달 만인 8월 8일 반란 모의죄로 소판(蘇判) 김흠돌, 파진찬(波珍6E4C) 흥원, 대아찬(大阿6E4C) 진공 등을 처형했다. 놀랍게도 김흠돌은 신문왕의 장인이었다.”여기서 이름이 언급된 김흠돌, 흥원, 진공 등은 삼국 통일까지의 전쟁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신문왕이 즉위 직후에 그들을 처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역사학계는 외척들의 호가호위(狐假虎威)와 왕 주변에 포진한 귀족들의 저항을 싹부터 잘라내려는 의도에서였다고 보고 있다.이 추정은 김흠돌 처형 이후 신문왕이 왕의 권력과 권위를 넘볼 이들이 없는 집안의 여자를 새로운 왕비로 택했다는 것에서 힘을 얻는다.동궁과 월지가 만들어지던 7세기 중후반은 삼국 통일에 이은 왕권 강화로 대규모의 토목공사가 별다른 걸림돌 없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무열왕, 문무왕, 신문왕으로 이어지는 이 시기는 ‘통일신라 최전성기’로 불리는 8세기 초중반의 토양으로 역할하지 않았을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7-21

천년왕국 신라 ‘다른 보물들’ ‘또 다른 매력’으로 손짓하네

이탈리아 로마에 가서 콜로세움만 보고 오는 사람이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 로마에 갔다면 콜로세움과 함께 도시에 즐비하게 들어선 수많은 고대 유적을 보고, 이탈리아 전통가요인 칸초네가 흘러나오는 카페에서 얇고 담백한 피자 한 판은 맛보게 된다. 어떤 관광객이건.프랑스 파리에 간다면 어떨까? 딱 에펠탑만 보고 파리를 떠나는 여행자가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게 분명하다. 센 강에서 유람선도 타보고, 그 유명한 프랑스 포도주도 한 병 마시고, 밤에는 물랑 루즈에 가서 화려한 쇼도 보게 된다. 그게 새로운 도시를 발견하는 즐거움이다.경주도 마찬가지다. 단 하나의 유적이나 유물과 만나기 위해 긴 시간 자가용이나 버스, 기차를 타고 경주에 가는 이들은 드물다. 그 사람이 특정한 유물이나 유적 한 가지만을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라면.동궁과 월지는 빼놓을 수 없는 경주 여행의 보물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곳만을 하루 종일 돌아볼 수는 없는 일 아닌가.그러기엔 동궁과 월지 주변에 너무나 많은 천년왕국 신라의 ‘다른 보물들’이 흩어져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다. 걸어서 30분 안팎이면 갈 수 있는 곳에 있으니 크게 힘을 들일 필요도, 번거로울 것도 없다. 동궁과 월지 지척엔 또 다른 관광 랜드마크가…흥미로운 관광지로서 동궁과 월지의 위상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수원대학교 양정석 교수는 ‘세계유산으로서 동궁과 월지의 가치와 보존’에서 이렇게 쓴다.“사적 제18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경주 동궁과 월지는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26번지에 위치한다. 이 유적은 사적으로 지정된 1963년부터 2011년 명칭이 변경되기 전까지는 경주 임해전지로 불렸다.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경주 임해전지나 동궁과 월지보다는 안압지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고 있다. 이미 임해전지라는 명칭으로 사적 지정이 되었지만, 발굴조사 당시에도 그리고 보고서가 나온 후에도 그 명칭은 안압지였다. 이렇게 안압지로 잘 알려져 있던 경주 동궁과 월지는 현재 경주 역사문화관광의 랜드마크가 되었다.”양 교수의 표현처럼 동궁과 월지는 떠오르는 21세기 경주 관광의 랜드마크다. 낮과 밤이 모두 흥미롭고 아름답다. 이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하지만, 앞서 말했듯 동궁과 월지 한 곳만을 방문하기에는 뭔가 아쉽다. 왜냐? 주위에 ‘또 다른 경주 역사문화관광의 랜드마크’가 여럿 있기 때문이다.지난 5년 동안 취재를 위해 경주를 50여 차례 찾았다. 그 경험을 토대로 신라 역사와 문화의 향기를 품고 있는 동궁과 월지 주변 관광지 몇 곳을 소개하려 한다. 더불어 젊은 여행자들에게 각광받고 있는 경주의 핫 플레이스까지.‘코로나19 사태’가 전 세계를 덮치기 전엔 적지 않은 유럽 사람들을 경주에서 볼 수 있었다.2017년 초여름이다. 20대 초반의 독일 여대생 둘을 만났다. 자기들 상식의 영역에선 ‘작은 산’처럼 보이는 능(陵·왕의 무덤)이 줄줄이 늘어선 생소한 풍경에 크게 뜬 눈으로 입을 벌리고 서 있는 그녀들에게 물었다. “어때요? 놀랍죠?”“네. 근데 저게 정말 무덤 맞나요?”멀고 먼 유럽에서 10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날아온 독일 학생 둘을 깜짝 놀라게 한 경주의 유적지는 다름 아닌 대릉원이었다.동궁과 월지에서 천천히 걸어도 채 30분이 걸리지 않는 곳에 자리한 신라의 또 다른 보물. ‘나무위키’는 대릉원을 이렇게 설명한다.“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옛 신라의 왕, 왕비, 귀족층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고분 밀집 지역. 사적 제512호다. 대릉원이란 이름의 기원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미추 이사금을 대릉에 장사지냈다’는 부분에서 따와 지었다.대릉원이라고 하면 좁게는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황남동 고분군 쪽을, 넓게는 바깥쪽의 노서동, 노동동 고분군 등을 포함한다.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데다 경주 시가지에 있어 접근성이 좋고, 천마총처럼 신라 왕릉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 고분도 있기에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은 거의 필수로 찾는 곳 중 하나다.”대릉원이 매혹적인 건 거대한 왕들의 무덤을 볼 수 있다는 것만이 아니다. 능의 앞뒤로는 철마다 다른 꽃들이 피어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으며, 여기에 더해 대릉원을 둘러싼 돌담길은 낭만적인 연인들의 산책 코스로도 그저 그만이다. 천마총을 봤다면 다음은 길 건너 첨성대로대릉원에 들어가서 천마총을 보지 않는다면 소가 빠진 만두를 먹는 것과 같지 않을까? 천마총은 동산처럼 솟아 있는 경주의 왕릉 내부가 어떤 형태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비단 역사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둘러볼 가치가 충분하다며 경주시 문화관광 홈페이지가 천마총 방문을 권한다.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대릉원의 고분군 중 유일하게 공개하고 있는 155호 고분 천마총은 옆에 위치한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위해 시범적으로 발굴한 곳이다. 당시 기술로는 황남대총 같이 거대한 규모의 무덤을 발굴하기가 힘들었기 때문.1973년 발굴 과정에서 부장품 가운데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이 그려진 말다래(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가죽 같은 것을 말의 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놓은 기구)가 출토돼 천마총(天馬塚)이 되었는데, 이 천마가 말을 그린 게 아닌 기린을 그린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천마총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축조된 고분으로 추정되는데 금관, 금모자, 새 날개 모양 관식, 금 허리띠, 금동으로 된 신발 등이 피장자가 착용한 그대로 출토되었다. 천마총 금관은 지금까지 출토된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한 것이다.”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는 우리들 생각처럼 명확하고 분명한 게 아니다. 인간의 삶 내부에는 언제나 죽음이 똬리를 틀고 있고, 삶 이후의 죽음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그게 최고의 권력을 행사했던 왕이건, 이름 없이 살다간 필부(匹夫)건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인간의 본질을 고민하게 하는 공간 대릉원과 천마총을 살펴봤다면 다음은 거길 나와 조그만 도로를 건너 첨성대와 만나보면 어떨까.대릉원에서 10분쯤 걸어가면 여행자의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첨성대.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석조 건축물은 신라 선덕여왕 때(632~647년)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펴낸 책 ‘신라의 학문과 교육·과학·기술’은 신라의 천문과 역법을 설명하며 첨성대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신라의 천문학을 논할 때 우리는 흔히 두 가지 측면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하나는 신라 왕궁 월성의 북쪽 노지에 우뚝 서 있는 첨성대(국보 31호)의 존재이고, 다른 하나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수록된 30건의 일식 기록이다.첨성대는 그 말뜻이 별을 바라보는 대라는 점에서 일찍부터 천문관측대로서의 조형물이라는 인식이 팽배하였고, 정상부에 놓인 우물정자형 사각 틀과 아래로 갈수록 넓어지면서 둥그스름해지는 상방하원 형태의 곡선형 조형미가 가히 신라인의 하늘 이상을 잘 담아내는 것으로 주목받았다.”그 옛날 신라인들의 미적 감각과 빼어난 과학기술을 알게 해주는 첨성대는 중년의 한국인들에겐 ‘수학여행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로도 유명하다.1970~80년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던 이들의 집에는 까까머리나 갈래머리를 하고 교복을 입은 채 첨성대 앞에서 친구들과 포즈를 잡고 찍은 사진 한두 장은 있기 마련.그래서일까? 첨성대 주변에선 들뜬 목소리로 자녀들에게 자신의 청춘시절을 이야기해주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경주, 특히 첨성대가 보이지 않는 곳이라면 쉽게 포착되지 않을 정겹고 훈훈한 풍경이다. 경주 와서 황리단길을 빼놓으시려고?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즐거움 중 빼놓을 수 없는 하나가 ‘맛집’ 아닐까. 경주를 찾는 이들에게 이미 고유명사로 자리 잡은 황리단길은 독특한 감각의 인테리어로 꾸며진 카페와 세계 각국의 요리를 세련되게 차려내는 식당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황리단길 역시 대릉원, 첨성대와 묶어서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다. 산보하듯 걸으면 금방이다. 한국관광공사의 설명을 보자.“황남동 포석로 일대의 ‘황남 큰길’이라 불리던 골목길로, 전통한옥 스타일의 카페나 식당, 사진관 등이 밀집해 있어 젊은이들의 많이 찾는 곳이다. 황리단길이라는 이름은 황남동과 이태원의 경리단길이 합쳐진 단어로 ‘황남동의 경리단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960~70년대 낡은 건물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어 옛 정취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거리다.”정갈하게 개조된 한옥 레스토랑에서 크림파스타를 먹거나, 늘어선 기와지붕이 한눈에 보이는 루프탑 주점에서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이켠다면 여행의 기쁨이 보다 커질 게 분명하다. 주머니가 가벼운 관광객이라면 황리단길 길거리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좋다.이처럼 동궁과 월지 주변엔 ‘또 다른 매력’을 갖추고 사람들의 발길을 기다리는 곳이 적지 않다. 이 여름이 다 가기 전 그 매력에 빠져보길 권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7-14

천삼백 년 전 저 달빛은 빛바랬을까, 눈부셨을까

신라 천년의 비밀을 간직한 ‘월지’는 문학의 좋은 소재가 될 수도 있다. 포항에서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강(49)씨가 월지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 짤막한 소설을 보내왔다. 아래 게재한다. 2017년 심훈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온 김강 씨는 소설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고, 작가인 동시에 내과의사이기도 하다. 편집자 주칠흑 같은 혹은 그저 어두운 밤이었다고. 아니다. 너는 밤에 대해 조금 더 말을 하려 한다. 그날 밤에 대해 설명하려면 조금 길어지겠지만, 혹자는 이 또한 사족이라 지우라 하겠지만 그럼에도 네가 이야기하려는 이유는 밤이 다 같은 밤이 아니기 때문이다.그러니까 그 밤은 특별했다는 것, 잣나무 꽃가루와 소나무 꽃가루가 무리지어 몰려다니는 그와 같은 밤이 돌아올 때마다 여전히 방 안을 서성인다는 것을 너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을 내쉴 때마다 가슴팍 어딘가에서 휘파람 소리가 나는 그런 밤을 겪어보지 않았다면 밤에 대해 입을 대지 말라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와 같은 밤이 돌아올 때마다 월지로 향하는 너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대략 표현하자면 그날의 밤은 이랬다. 구름에 가려진 보름달이 뜬 밤. 너와 그는 월지에 있었다.-아홉 시 이십 분. 열 시가 되면 문을 닫습니다. 그때까지는 나오셔야 합니다.그와 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월지의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둘은 손을 잡기도 했고 서로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걷기도 했다. 가끔 두 발이 엉켜 발걸음을 멈췄다. 어깨에 올린 팔이 저려와 슬며시 내리기도 했지만 누가 봐도 그럭저럭한 연인이었다. 어쩌면 아주 뜨거운 연인일 수도 있었다. 그의 엉덩이를 스친 너의 손바닥과 너의 볼에 붙어버린 그의 볼을 모두 우연이라 할 수는 없으니.-구름이 달을 벗어났어.그가 맞잡은 손을 풀어 달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는 그의 손을 따라 달을 보았다.-그러네, 저 달 근처 목성이 있을 텐데. 달이 밝아서 그런가? 보이질 않네.-목성은 왜?-오늘 목성의 달, 유로파에서 물을 발견했다네.너는 우연히 보았던 기사를 떠올렸다. 갈릴레오 탐사선이 목성의 위성 유로파에서 물을 발견했다는 기사. 너는 지구에서 목성까지의 거리와 오늘 밤 하늘 어디서 목성을 볼 수 있을지, 그리고 지구에 있는 물의 양을 검색해 읽어보았었다.-물을 찾아서 거기까지 갔데. 지구에 무려 십삼억 삼천만 세제곱 킬로미터의 물이 있는데 말이야.-그런 것 까지 알고 있었어? 그냥 막 던진 숫자지?-아니. 사실이야. 오늘 오전에 잠깐 찾아봤었어. 지구에 그렇게 많은 물이 있는데 구억 육천오백육십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까지 물을 찾으러 가다니, 재밌네, 하고 생각했어.-오빠도 주위의 많은 여자들을 두고 나를 만나러 왔잖아. 사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까지.너와 그는 1호 누각이라 쓰인 표지석을 지나쳐 누각 안으로 들어갔다. 누각 곳곳에 조명등이 있었지만 짙고 검은 월지의 수면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서너 개씩 무리지어 올라있는 연잎들마저 검은, 흑백사진 같은 월지를 너희 둘은 가만히 보았다. 구름이 달을 벗어날 때마다 월지에 달빛이 비쳤다.-두 가지 색만 남은 스테인드글라스 같아. 오래되어 색이 바랜. 그런데 그런 게 있나?그가 난간을 잡고 있는 너의 손등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그러게. 그러면 천삼백 년 전에는 칼라풀 했을까? 월지에 비친 달빛이.-그랬을 수도 있겠다. 배를 띄우고 잔치를 했다지. 여러 색의 빛들이 연못위에 비춰졌을 수도 있겠어. 그런데 오빠, 여기 유물들, 전시되어 있는 것들 말이야. 저기 적혀 있는 것들 모두 사실일까? 이곳 월지 말고도 다른 곳의 땅에서 나온 유물들의 사연들, 모두 진실일까?-당연 그렇겠지. 그런 것 확인하려고 전문가가 있는 것 아니겠어. 고증을 잘 해야지. 잘해서 입증된 것만 이야기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 그건 그렇고,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빨리 움직이자. 저기, 저 안 쪽이 좋겠어. 가자.너는 그를 재촉해 월지를 돌아 누각 반대쪽으로 향했다. 너는 시계를 보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확인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금방이면 돼, 너는 그에게 말했고 뭔데 그래, 그는 물었다. 너는 그의 손을 잡고 묵묵히 그리고 빠르게 걸었다.누각의 반대편에 다다라 너는 주위를 살폈고 그는 너를 살폈다. 관리인들이 사용하는 작은 보트가 바위에 둘러진 밧줄에 묶여 있었다. 연못 가장자리 바깥으로 움푹 들어간 곳, 숨어 있기 좋은 곳이었다. 관리인들이 반대쪽 누각으로 플래시를 흔들며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몇몇 커플들, 사람들이 정문으로 돌아가고 있었다.-뭐 하려는 거야? 이렇게 으슥한 곳에 끌고 와서는. 오빠, 이상해.너는 대답 없이 등에 멘 작은 가방을 내려 지퍼를 열고 신문지로 감싼 무언가를 꺼냈다. 마침 구름이 달을 벗어났고 네가 꺼낸 무언가는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그게 뭐야? 뭔데?그가 너의 곁으로 와 붙으며 물었다. 너는 그의 손바닥에 그것을 올려놓았다.-이게….-스테인리스에 각인을 한 거야. 너와 나, 우리의 만남, 사랑, 그런 이야기. 월지에 던져 넣으려고. 나중에, 미래에 누군가 보게.언젠가, 아주 나중에, 몇 백 년이 지난 후에 월지의 바닥을 준설하거나 다시 발굴하는 날이 오지 않겠냐고, 그때 이 스테인리스 조각이 발견되면 우리 사랑이야기를 알게 되지 않겠냐고, 한 조각 남겨진 이야기가 그 시대를 대표하는 경우가 많으니 우리 사랑이 우리 시대의 사랑이 되지 않겠냐고, 그렇게 우리는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거라고, 너와의 사랑은 누구에게 보여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라고. 너는 흑과 백의 사진 속 유일한 붉은 얼굴로 그에게 말했고 그의 얼굴도 붉게 달아올랐다. 둘은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분명하게 하나, 둘, 셋을 헤아렸고 스테인리스 조각을 월지로 던져 넣었다.퐁! 연 옆에 앉아 있던 개구리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너와 그는 정문으로 돌아왔다. 빠르게 걸었던 탓에 둘 다 숨이 찼다. 숨을 몰아쉬는 그와 너를 보며 관리인이 물었다.-도대체 어디 있었던 겁니까? 분명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말했는데 기어코 들어가더니 때맞춰 나오지도 않고 말이지.-죄송합니다.너와 그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손을 꼭 잡은 채로.주차장으로 걸어가는 그와 너 뒤로 관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어디서 뭘 하고 있었기에 저렇게 숨이 차는 거야. 요즘 젊은 것들이란. 쎄고 쎈게 모텔이고 방인데 말이야. 소설가 김강 여섯 번의 여름과 다섯 번의 겨울이 지났다. 언젠가 꽃은 지는 법. 목성 주위를 돌던 갈릴레오 탐사선이 목성 궤도를 이탈하며 임무를 마친 그 해, 너와 그의 사랑도 끝났다. 여섯 번의 여름과 다섯 번의 겨울이 각인된 스테인리스 조각만이 월지의 어느 바닥에 남았다.그것이 문제다. 밤의 어둠 속에서 더욱 반짝일 영원한 사랑의 맹서. 작은 상처를 주고받아 아픈 날도 있었지만 그것 또한 사랑이었다고, 바람 부는 세상 서로 기대며 살았고 꽃 같은 세상 온전히 서로의 것이었다고, 마지막 날 손을 잡고 입을 맞추며 눈을 감았다고 깊이 새겨놓은 각인. 월지의 작은 보트 근처 어딘가의 스테인리스 조각.배롱나무 헐벗은 가지들을 흔들고 동백의 꽃을 툭툭 떨어뜨리며 오는 밤. 지키지 못한 것들에 대한 후회, 거짓과 진실이 뒤바뀐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한 밤. 그와 같은 밤이 오고 있다. 너는 검은 잠수복을 챙겨 나선다. 월지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고개를 집어넣고 손을 휘저어 무언가를 찾는다.너는 문득 묻는다. 우리가 건져내야 할 것이 지난 사랑의 각인뿐인가?

2021-07-07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왕권의 절정과 저무는 왕조의 비애

경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 황리단길과 대릉원, 첨성대를 거쳐 인왕동에 이르면 국립경주박물관 맞은편에 위치한 동궁과 월지가 사람들을 맞이한다.‘오래된 미래’라 불러도 좋을, 1천 년 저편에서 빛나는 고대 왕국 신라가 영화를 누렸던 흔적이 2021년을 사는 여행자와 마주하는 순간이다.한 600년 전쯤엔 오늘날 우리가 그랬듯 조선시대의 명문장가가 이곳을 찾았던 모양이다. 조선 초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김시습(1435~1493). ‘매월당’이란 호로 더 유명한 김시습은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세 살 때부터 외조부로부터 글자를 배우기 시작해 다섯 살 때는 시를 지을 줄 아는 신동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문집 ‘매월당시집(梅月堂詩集)’엔 다음과 같은 시가 실렸다. 안하지(安夏池) 옛 터못을 뚫어 물을 채우니 물고기 소라 자라고물길을 당겨 중심에 대니 콸콸 흐르네여기서 놀이하다 신라는 나라를 잃었는데지금은 봄물로 좋은 벼가 자라나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간행한 ‘우리 조상들이 다녀간 신라 왕경 경주’에 따르면 김시습은 21세 때인 세조 원년(1455년)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절망해 머리를 깎고 승려가 돼 전국을 떠돌았다.역사 유적과 아름다운 산천을 보며 글을 짓고 시를 썼던 그는 지금의 경주 남산 인근에 ‘금오산실’을 짓고 칩거한 적이 있다. 은둔의 예술가로 살았던 것이다.그곳에서 7년간 머물며 한문 소설 ‘금오신화’를 집필한 김시습은 경주 일대 명승고적을 돌아보면서 시 또한 많이 지었다고 한다.신라 왕과 귀족, 외국 사신들의 ‘놀이 공간’?세월의 무상함과 폐허 위에 남겨진 기억의 파편을 형상화한 듯 보이는 ‘안하지 옛 터’는 현재의 동궁과 월지를 지목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 시에서 ‘못’은 월지를 말한다. ‘안하지’는 안압지(월지의 옛 명칭)의 다른 이름이다.김시습의 ‘안하지 옛 터’ 중 ‘여기서 놀이하다 신라는 나라를 잃었는데…’라는 3행은 의미심장하다. 유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놀이’는 유학자가 지양해야 할 행위다.이는 동궁과 월지가 웅장한 모습을 현실에서 드러내고 있던 신라시대엔 ‘놀이’를 하다가 ‘나라를 잃은’ 공간이 있었다는 이야기일까? 김시습의 시에 쓰인 ‘놀이 공간’은 임해전(臨海殿)을 지칭하고 있는 듯하다.임해전은 국가에 경사스런 일이 있이 있거나, 멀리 이방에서 귀빈이 방문했을 때 왕과 신하들이 연회와 접대장으로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시대 건축물이다.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만든 책 ‘신라의 통치제도’에서 역사학자 주보돈은 월지와 동궁, 임해전에 관해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월지는 궁 바깥이 아니라 궁 안에 존재한 연못이었다. 거기에는 주요 건물로서 임해전이란 부속 건물을 세워 국왕 주도의 연회나 외국 사신 접대를 거행하던 곳이었다. 따라서 월지는 본래부터 동궁의 부속 건물이 아니었다. 동궁보다 먼저 건설된 점도 그를 방증하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치 동궁에 소속한 듯이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또 동궁은 월지궁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월지가 동궁 소속 연못이었다고 섣불리 단정하기는 어렵다.”월지가 동궁 소속 연못이었는지, 동궁의 부속 건물이었는지는 학자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하지만, 임해전이 왕이 신하와 사신들에게 베푼 잔치가 열린 곳이라는 주장에는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역시 임해전을 이렇게 설명한다.“삼국시대 신라의 안압지 서쪽에 있었던 궁궐 건물이다. 안압지, 곧 월지가 있던 궁성은 태자가 거처하던 동궁이 된다. 673년에 문무왕의 아우인 김인문이 임해군공(臨海郡公)의 작호를 지녔던 점을 생각할 때 임해전은 곧 김인문의 처소이거나 본디 그와 관련된 건물이 아닌가 짐작된다. 안압지를 끼고 있는 임해전은 나라에 경사스런 일이 있을 때나 귀한 손님들이 왔을 때 군신들의 연회 및 귀빈의 접대 장소로 이용되었다. 임해전은 867년(경문왕 7년) 1월에 중수되었다. 이는 경문왕이 자신의 왕위에 도전하는 세력들의 반란을 진압한 뒤,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과시하기 위한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행해진 것이라 하겠다. 1970년대 중반에 발굴·조사된 유적은 이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통일신라 융성 흔적 증명해줄 임해전의 위치는인공적으로 조성한 커다란 연못 위에 배를 띄우고, 귀한 꽃과 희귀한 동물이 뛰어놀게 만든 월지에서 나라의 최고위층과 외국 왕을 대신한 사절단이 좋은 술과 안주를 나눴던 공간으로 추정되는 임해전.화려한 잔치가 펼쳐지던 그때가 ‘신라의 호시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통일 이후 신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번영을 누렸고, 임해전은 그 번성의 한복판에서 환히 웃는 사람들의 파티장으로 역할했을 것으로 짐작된다.그랬다. 옛사람들도 현대인과 다르지 않게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유희의 인간)였다.김시습은 신라가 멸망한 수백 년 뒤에 이곳을 찾아 그림자조차 사라진 임해전의 번성기 모습을 그려봤을 것이다. 존재와 소멸 사이의 간극을 아프게 되새기며, 그때는 이미 논으로 변한 과거 왕국의 흐릿한 기억을 더듬었을 듯하다.여기서 궁금증 하나. 600여 년 전 김시습이 추억했고, 2021년 우리가 그 흔적을 더듬어 반추하는 임해전은 처음 만들어질 땐 어디쯤 세워진 것일까?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신라의 건축과 공예’에서 이 의문을 풀어줄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 다음과 같다.“월지는 경주시 인왕동, 월성 동북쪽에 잇다. 주위는 평탄지로 광활하고 논밭으로 되어 있으며 남서쪽에 월성이 마치 병풍을 두른 듯 막고 있다. 발굴되기 이전 월지 주변에는 버드나무가 드문드문 심어져 있고, 동과 북쪽 연못 변에는 야트막한 언덕이 솟아 있어 아늑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또 연못 동쪽 호반 변에는 1926년에 건립된 ‘임해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연못 서쪽 평탄지에는 임해전지라고 생각되는 동서 지점의 지상에 화강석의 석구(石溝)가 노출돼 있어 대규모 건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이 설명에 의하면 임해전은 월지의 평탄지 주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해 이희준의 논문 ‘동궁과 월지 동편 신라왕경 유적의 조성 시기 및 성격 검토’는 좀 더 범위를 좁혀 임해전의 위치를 이야기하고 있다.“안압지와 주변 지역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 문무왕대 세워진 동궁(월지궁)과 주요 관청이 있던 곳으로 동궁을 세우기 전에 먼저 못을 파서 원지(園池·정원과 연못)을 만들고(674년) 그 후에 동궁을 축조(679~680)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궁 안에는 국가 대사와 관련해 안압지를 바라보며 연회를 베풀던 임해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동궁 안에 자리한 안압지(월지)를 마주하고, 왕과 국빈이 잔치를 열었던 건물’인 임해전. 보다 정확한 위치 파악을 위해선 앞으로도 역사학계와 전문가들의 지속적인 조사와 발굴이 필요하지 않을까.‘삼국사기’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관련 기록들임해전은 신라의 전성기는 물론, 쇠퇴기까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주요한 ‘실물 키워드’이기도 하다.1145년 김부식이 고려 인종의 명령으로 편찬한 기전체 역사서 ‘삼국사기(三國史記)’엔 고려 건국 직전에 존재했던 신라 왕조에 대한 기록이 세세하게 남겨져 있다. 여기엔 임해전 관련 기록도 여럿이다.효소왕 6년 9월(697년)과 혜공왕 5년 3월(769년)엔 “왕이 임해전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소성왕 2년 4월(800년)을 다룬 대목에선 “거센 폭풍으로 인해 나무가 부러지고 기왓장이 날아갔으며 임해문과 인화문이 파괴됐다”는 역사가 실렸다. 그 외에도 “문성왕 9년 2월(847년) 평의전과 임해전을 중수했다”는 사실까지 확인할 수 있다.보다 흥미로운 기록은 “헌강왕이 임해전에서 직접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놀았다”는 서술과 신라가 기울어가던 경순왕 5년 2월(931년)엔 “태조(왕건)를 임해전에서 극진하게 예우하며 접대했다”는 것이다.이 짤막한 기록들엔 고대 왕의 인간적 면모와 떠오르는 왕조(고려) 앞에 머리 숙인 저무는 왕조(신라)의 비애가 고스란히 담겼다.이런 걸 감안하면 임해전은 단순한 ‘놀이 공간’이 아닌 신라의 흥망을 지근거리에서 가장 정확하게 지켜본 주요한 역사 유물로 평가돼야 하지 않을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6-30

절대 권력 이을 후계자 위한 군왕의 첫번째 내리사랑으로

모두가 짐작하겠지만 고대의 왕은 현대의 통치자와는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이 달랐다. 오늘날의 대통령이나 수상은 선거라는 제도를 거쳐 국민들로부터 위임 받은 권력을 일정 기간 동안 행사하는 사람이다. 민주주의의 성장이 가져온 결과다.반면 고대의 왕들은 신(神)이나 하늘을 대신해 백성을 통치하는 사람으로 인식됐다. 대부분은 선출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전해지는 방식을 통해 최고 권력자의 지위를 승계했다.고대왕국 신라도 마찬가지였다. 다수의 신라시대 왕들은 자신의 핏줄을 이어받은 아들을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 아들이 없을 경우 딸이 왕이 되거나, 방계 혈족이 권력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었으나, 그런 경우는 많지 않았다.1천300여 년 전 지금의 경주시 인왕동에 우뚝 솟아 그 미려함과 웅장함을 뽐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동궁’은 왕의 아들, 즉 태자(太子·왕조시대의 차기 왕위 계승자)가 머물며 교육받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절대 권력의 바통을 손앞에 두고 있던 왕의 아들이 당대의 석학들로부터 학문을 배우며, 왕가의 관습과 제도를 익히고, 때로는 유유자적 산책을 즐겼을 동궁을 ‘나무위키’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신라의 별궁으로, 신라의 태자가 사는 곳이었다. 왕이 사는 법궁인 경주 월성과는 원화로를 사이에 두고 북동쪽으로 매우 가까이 있으며 황룡사의 남서쪽에 있다.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과도 아주 가깝다. 궁궐은 신라 때는 수십 개 전각이 늘어서 있었지만 지금은 1, 3, 5호 건물지 3개만 복원한 상태다.또한 이곳의 심벌은 월지라는 이름의 인공 호수인데, 사실 궁궐로서의 이미지보다는 과거 통칭이었던 안압지라는, 월지 호수와 누각으로서 훨씬 잘 알려져 있다. 이 인공호수는 신라 왕궁 안쪽의 친수구역으로 경복궁의 경회루처럼 풍류와 연회 장소로 만든 곳이다.”신라인의 생활상 알 수 있는 유물 쏟아진 곳동궁과 그 일대 유적들은 고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물들로 평가받고 있다. 거기에다 통일신라시대 정원의 원형이 잘 보존돼 있고, 당시의 건축 형태를 유추할만한 실마리도 여러 군데서 찾을 수 있다.또 하나 특이한 점은 통상의 고대 유물들처럼 무덤에서 출토된 죽은 자를 위해 부장품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사용된 물건이 다수 발견됐다는 것이다. 문고리, 빗과 가위, 목간, 물품 제조일자 꼬리표, 그릇 등의 신라시대 유물은 동궁과 월지에 유명세를 더해줬다.동궁은 신라가 국력을 키워가며 고구려와 백제를 제압해 삼국통일을 이룬 직후에 축조된 것이라 이야기된다.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나라가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추지 못했거나, 힘이 약해졌을 때는 성을 만들어 낼 다수의 백성들과 건축 기술자를 동원해 이런 대규모 공사를 진행하기가 어렵지 않겠는가.왕의 권력과 왕위를 이을 후계자의 권위가 어느 때보다 강력했기에 만들어졌을 동궁. 그 막전막후의 과정을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는 ‘신라의 왕권 강화와 발전’(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발행)을 살펴보자.“문무왕은 679년 2월에 궁궐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중수하였다. 8월에는 처음으로 동궁을 짓고 비로소 내외제문(內外諸門)의 이름을 정하였으며, 사천왕사를 완성하고 남한성을 증축하였다. 또 681년 6월에는 수도에 대규모 토목공사를 계획하였다.(…중략) ‘삼국유사’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문무왕이 수도에 성곽을 쌓으려 하였다고 밝혀 나성을 쌓으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나성 축조에만 한정되지 않고, 중대왕실의 통치이념을 구현할 수 있는 도성으로의 혁신을 시도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외부의 침입을 막아줄 성을 쌓고, 불교를 중히 여기던 그 시절답게 나라가 관리하는 거대한 사찰을 세우고, 왕국의 중심도시를 새롭게 만들어가던 7세기 신라.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태자의 거처이자 교육장인 동궁을 만들었다는 건 왕이나 필부(匹夫) 모두 마찬가지로 자신의 자식을 귀하게 생각하고 아끼는 마음은 다를 바 없다고 말하면 지나치게 확대된 해석일까? 이 질문에 답해줄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왕의 후계자가 머물던 곳은 월지궁? 동궁?신라 35대 왕인 경덕왕은 아들이 태어나지도 않았던 상태에서 동궁을 보수했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신라의 왕권 강화와 발전’을 다시 인용한다.“745년(경덕왕 4년) 동궁이 수리된다. 동궁이라는 곳은 왕실의 후계자가 거처하는 곳인데, 아직 왕자가 태어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동궁을 수리한다는 것 자체가 경덕왕의 후사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고 할 수 있다.752년(경덕왕 11년) 8월에 동궁아관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시기에도 왕자는 출생하지 않았다. 사료 상에는 경덕왕에게 공주가 태어났다는 기록이 없으나, 동궁을 수리하거나 동궁아관을 설치했을 당시 왕자의 출생을 기대할 만한 일이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다.”이처럼 ‘왕자의 출생을 기대할 만한 일’이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태어날 아이가 머물 공간을 깔끔하게 리모델링 하고, 아들이 교육받고, 신변을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기관을 설치한 경덕왕.경덕왕은 아버지가 아닌 형으로부터 권력을 승계 받은 왕이었다. 그랬기에 더더욱 왕위를 물려줄 아들을 갈망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건 경덕왕은 우여곡절 끝에 수리한 ‘동궁의 주인’이 될 아들을 낳았고 그가 8살에 왕위에 오른 혜공왕이다.여러 명의 왕자들이 인품 훌륭한 학자에게 교육받던 공부방이자, 보디가드가 딸린 안전가옥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시대의 동궁.사람들은 동궁과 ‘월지궁’을 같은 공간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몇몇 사람들은 동궁과 월지궁을 헛갈려 하는데, 이 두 명칭에 대해서는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간행한 ‘신라의 유적과 유물’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월지는 월성 북편에 위치한 안압지의 원래 명칭이고, 이곳에 월지궁이 있었는데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동지로 불리기도 했다. 헌덕왕대의 기록을 보면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어 수종을 태자로 삼아 월지궁에 들게 한 사실과 이 지역을 발굴·조사 하였을 때, 태자 혹은 동궁이라는 명문의 유물이 출토된 것을 미루어 보면 월지 주변에 태자궁이 있었음이 확실하다.문무왕대에 대대적으로 월성을 중수하고 궁궐의 구조도 재편하였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때 월지궁이 동궁으로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월지에는 연희를 위한 임해전이 있어 이 지역은 동궁으로 쓰인 동쪽과 연희를 위한 공간인 서쪽 임해전으로 이원적 궁궐 구조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위의 설명처럼 사실 안압지(월지)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에는 월지란 이름을 가진 것 외에도 ‘동궁’이란 이름이 새겨진 유물이 상당수 나왔다.이에 일부 역사학자들은 왕족이 거처하는 월지궁은 동궁의 다른 명칭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고 말한다.역사의 부침 겪은 신라의 동궁동궁과 월지궁의 관계는 ‘통일신라의 궁원지, 동궁과 월지의 조사와 연구’에 실려 있는 이재환의 논문 ‘신라 동궁과 고대 동아시아 동궁 체계 비교 검토’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이재환은 “월지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월지와 월지궁, 태자, 동궁, 동궁관 간의 연결고리를 너무도 명확하게 보여준다”며 “출토 유물과의 대응이 모호한 급장전을 제외하고, 동궁관으로 구분된 9개 관부 중 8개 관부에 각각 대응하는 유물들이 월지에서 모두 출토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주장에 이어지는 문장을 보자.“이를 감안할 때 월지가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그 주변의 궁명은 월지궁으로 보이는데, 동궁관이 월지전과 월지악전을 관할 하에 두고 있으므로 월지궁이 곧 동궁이며, 동궁관의 다른 관부 관련 유물들도 월지에서 출토되었고, 태자와 동궁 관련 유물 또한 월지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이 동궁은 왕위 계승 예정자의 동궁이기도 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동궁이라 불렸을 수도, 월지궁이라 불렸을 수도 있는 아득한 옛날 신라의 건축물. 권력의 승계가 구체적으로 준비되던 그곳이 정확히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추측할 뿐이며, 조사와 발굴 작업을 토대로 동궁의 원형을 찾기 위한 현대인의 노력이 존재할 뿐.신라가 역사 속에서 더 이상 힘을 뻗어나가지 못하고 사라진 후 동궁 역시 과거의 화려한 빛을 잃어갔다. ‘고려사’ 등의 문헌에서도 이름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사학자들에 따르면 고려는 멸망한 신라 왕조의 흔적과 유물을 없애기 위해 동궁의 전각들을 무너뜨리고 허물었다고 한다.일제강점기에는 동궁이 있던 자리 일부를 동해남부선 철도 건설을 위해 훼손하기도 했다. 이처럼 신라 왕자들의 거처는 달콤한 꿈에서부터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악몽까지를 다양하게 거치며 오늘에 이르렀다.역사의 부침은 인간만이 아니라 유적과 유물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일까? 동궁과 월지를 걷다보면 고대 왕국 태자들의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들리는 듯하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6-23

진귀한 금수 노니던 절대권력의 상징은 시간의 흐름속에 쇠락한 연못으로…

어떤 위대한 사람이 만들어 탄탄하게 구축한 권력이라도 10년을 지속해 이어지기가 힘들고, 모든 이들이 입을 모아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어여쁜 꽃도 열흘 밤낮이 지나면 시든다는 이야기가 있다.세칭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이다. 명멸을 거듭했던 우리 땅의 고대·중세 왕국들도 이 냉혹한 명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니, 그 나라 안에 만들어진 거대한 축조물과 조형물도 유사한 길을 걸었다.7세기 중반 신라가 통일왕조의 골격을 완성하던 시기에 축조된 안압지(현재 명칭 월지) 역시 만들어질 당시의 위상과 품격을 시간의 흐름 속에 잃어갔다.왕조의 이름이 두 번이나 바뀌고, 천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후 조선 후기 사람인 강위(姜瑋·1820~1884)가 신라의 중심도시 경주를 찾았고, 거기서 한때 번성의 절정을 누렸던 안압지의 흔적을 본 모양이다.강위는 실학자이자 개화사상가였다. 1873년과 이듬해에 걸친 두 번의 중국 여행을 통해 근대 문물에 눈뜬 그는 역관들과도 친숙해 해외 사정을 잘 알았다. 또한, 서세동점(西勢東漸·서양이 동양을 지배하게 될 것이란 예측)의 위기를 우려한 선비였다. 그런 강위가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겼다. 열두 봉우리 낮아졌고아름다운 전각도 황폐해졌는데푸른 못은 옛날 같고기러기는 길게 우는구나천수사 분향한 곳 찾지를 말 것을들풀에 깊이 묻힌 내불당 자취.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펴낸 ‘신라의 건축과 공예’는 위의 시를 인용하며 “고려 왕조가 되면서 안압지의 관리가 소홀해졌다는 것을 강위의 시문을 통해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더불어 위 시를 통해 “안압지가 화려한 모습을 잃고 기러기 떼의 서식지로 전락하며 황폐해졌음을 유추할 수 있다”고 부연하고 있다.당시 안압지(雁鴨池)로 불리던 오늘날의 월지는 앞서 이야기된 시를 근거로 해석하자면 왕과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대신들, 나라의 주인이 될 왕자와 당대의 대학자들이 오가던 국가의 주요 랜드마크에서 ‘기러기와 오리가 무리 지어 노니는 그저 그런 평범한 연못’이 된 것이다.만들어질 당시의 안압지는…누구도 정확하게 예상하기 힘든 역사의 흐름 속에서 안압지는 쓸쓸한 풍광을 담은 쇠락한 연못으로 변해갔다.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의 막바지에 이르는 1천150년의 속절없는 시간 속에서.그러나, 안압지가 조성될 당시부터 이런 보잘것없는 모습이었던 건 분명 아닌 듯하다.국립경주문화연구소가 낸 ‘경주 동궁과 월지 조사연구 마스터플랜 수립 연구보고서’에 등장하는 아래 서술을 보면 안압지가 만들어질 당시의 모습을 대략적으로나마 유추해볼 수 있다.“동궁과 월지(안압지) 주변 일대는 신라시대 왕경(王京)의 중심부로 월성, 황룡사지, 분황사, 구황동 원지(九黃洞 苑池), 전랑지(殿廊地) 등 왕궁과 국찰 관련 유적이 밀집되어 있다.신라는 5∼6세기대 중앙집권화 단계를 거치면서 계획적인 행정도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현재까지 확인된 신라의 주요 사찰과 계획도시로서의 왕경은 대체로 이 시기 이후에 조영된 것으로 보인다.”한창 힘을 뻗어나가며 당대 유일의 한반도 고대 왕국으로 진화 중이던 신라의 한가운데 자리했던 안압지는 인근에 왕이 머물던 거처가 있었고, 주위에 나라가 후원하던 거대한 사찰이 존재했던 요지 중에 요지에 건설된 인공 연못이었다. 앞서 말한 연구보고서는 이렇게 이어진다.“동궁과 월지와 남쪽에 위치하는 월성은 신라 궁성과 관련된 궁궐 및 원지유적이다. 월성은 통일신라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신라의 왕궁터이며, 현재 동문지 발굴조사 및 해자, 월성 내부에 대한 조사가 진행 중이다.월성 서쪽에서 확인된 대형 건물지는 관청과 관련된 시설로 추정하고 있고, 국립경주박물관의 미술관 및 연결통로 구간에서 발견된 ‘남궁지인(南宮之印)’명 명문과 2012년 박물관 남측 부지 발굴조사를 통해 이 지역이 궁궐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이런 설명을 통해 우리는 통일신라시대를 전후한 서라벌의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다. 안압지와 동궁, 월성….당시 그것들의 규모와 아름다움은 과연 어떠했을까? 이 궁금증은 천년을 지속된 신라 역사에 관한 의문과 함께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각종 고문헌에 등장하는 ‘안압지’라는 명칭‘신라 천년의 공예와 건축’에 의하면 안압지라는 이름이 문헌에 처음 나타나는 건 조선 성종(1469~1494) 때다. 그즈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렸다.“안압지는 천주사 북쪽에 있으며, 문무왕이 궁 안에 못을 만들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어 무산십이봉을 상징하여 화초를 심고 짐승을 길렀으며, 서쪽에 임해전이 있었다. 그 주춧돌과 섬돌이 밭이랑 사이에 남아있다.”영화를 누리던 신라 시절을 지나 800년 후 조선시대에 다시 본 안압지의 흔적은 농민이 경작하던 밭의 주춧돌과 섬돌 정도로만 남아있었던 것이다. 막막하고 쓸쓸한 풍경인 동시에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잔해(殘骸)’라는 허무한 문학적 수사가 떠오른다.여기에 더해 ‘동경잡기(東京雜記)’는 ‘동국여지승람’과 유사한 내용을 싣고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지 못하나 애장왕 5년 갑신년에 중수한 바 있다”고 첨가하고 있다.그로부터 300년 이상의 세월이 더 흐른 뒤인 1783년 간행된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에도 안압지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이런 문장이다.“궁내에 연못을 파고 돌을 쌓아 중국의 무산 십이봉의 형상을 한 산을 만들어 꽃을 심고 진기한 새를 길렀다. 그 서쪽에 임해전이 있었으며, 지금 그 연못을 안압지라고 부른다.”안압지 조영의 사상적 배경과 준공 시기는지금 이 시간 세상에 존재하는 누구도 안압지가 만들어지던 당시를 살아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안압지가 조성된 정확한 이유와 이를 지시한 문무왕의 마음 속 뜻을 알 수 없다. 다만 추측할 뿐이다.그렇다면 안압지가 만들어진 사상적 배경은 뭘까? 이 역시 앞서 말한 이유로 인해 학설이 분분하다.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유적의 건설 이유가 “신을 대신해 백성을 통치하는 왕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서” 혹은, “절대 권력자 어머니의 내세 삶을 편안하게 해주려고” 등으로 학자마다 견해가 갈리는 것처럼.안압지 조영의 사상적 배경이 어떤 것이었느냐에 관해서도 ‘신라의 건축과 공예’는 언급하고 있다. 이런 내용이다.“…그간 다양한 학설이 주장되었다. 중국의 무산 십이봉설에서부터 시작하여, 통일 왕권을 과시하는 기념사업과 문무왕 자신을 위한 환경 조성 사업설, 신선 사상과 불교의 정토사상설, 산신(山神) 신앙과 용왕 신앙, 그리고 천신(天神) 신앙설, 또 불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 같다는 주장과 아미타불신앙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까지 많은 주장이 있다.”위의 서술에서 안압지 건설에 영향을 미친 사상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면 안압지의 준공 시점과 건립 시기는 1978년 문화공보부에 의해 간행된 ‘안압지에 대한 발굴조사보고서’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해당 부분을 요약하면 ‘삼국사기’의 기사는 안압지 공사가 준공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 보고서는 이렇게 이어진다. 축약해 옮긴다.“674년 2월에는 안압지가 완성돼 이미 온갖 화초가 심어지고 진귀한 새와 짐승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안압지 공사를 완성하려면 1년의 공사 기간으로는 조성하기 힘들며, 꽃나무를 심어서 그것이 착근되고 새와 길짐승이 살 수 있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또한 동궁의 창건 또한 문무왕 19년(679년) 8월 이후의 일로 기록돼 있다. 동궁 역시 상당한 공사 기간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안압지의 조성은 674년 이전에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1천300여 년 전 만들어진 안압지는 이처럼 번성과 쇠락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21세기 현재는 발굴과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 안압지가 사고할 수 있는 인격체였다면 자신의 오늘을 어떻게 판단하고 말할지 궁금하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6-16

정치·외교적 수완과 문화·예술 감각 갖춘 ‘돌올한 군왕’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압도하며 한반도 유일의 고대 왕국으로 커가던 7세기 중후반. 동궁과 월지는 그즈음 왕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졌다.아득한 세월이 흐른 뒤에 미미하게 남겨진 흔적과 역사 속 문헌을 토대로 복원된 이 사적지는 누구도 이론(異論)을 내놓을 수 없는 21세기 경주의 주요 유적이자 매혹적인 여행지로 자리하고 있다.이를 증명하듯 관광과 문화를 도시의 주된 중심축으로 삼고 발전하고자 하는 경주시의 문화관광 홈페이지는 자랑스럽게 ‘동궁과 월지’를 여행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이런 설명을 통해서다.“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왕건을 초청해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년)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쪽과 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일제강점기엔 철도가 지나가는 등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회랑지를 비롯해 크고 작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 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해 서쪽 못가의 신라 건물터로 보이는 5개 건물터 중 3곳과 안압지를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기자를 포함해 경주를 찾는 이들은 불국사와 대릉원, 첨성대와 김유신의 유택(幽宅)을 빼놓지 않고 찾게 된다. 이는 언급한 유적지가 간직하고 있는 ‘천년의 신라 혼’을 확인하는 행위와 다름없기 때문.여기에 ‘신라인의 정신’이 담긴 유적지 하나를 더 포함시키고자 한다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동궁과 월지가 아닐까”라고 답할 듯하다.바로 이 동궁과 월지가 상상력이 아닌 현실의 거대하고 미려한 실물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한 사람은 누구일까? 이는 비단 몇몇 사람들만의 궁금증은 아닐 것이다. 기자 역시 궁금하다. 과연 누굴까?건축물은 최고 권력자 권위의 상징으로…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를 불문하고 권력자들은 자신의 통치 기간이 타자(他者)에게 호의적으로 평가될 업적으로 가득하기를 열망한다. 이것은 이전에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쉽게 깨어지지 않을 권력의 간과할 수 없는 속성이다.그래서다. 한반도는 물론 가까이서 명멸을 거듭했던 아시아의 숱한 왕조와 유럽의 명망 높은 가문들은 오랜 세월 사라지지 않고 자신들의 치세(治世)를 기억하게 해줄 건축물을 만드는데 골몰했다. 여기에 천문학적 재화를 쏟아 붓고 엄청난 노동력을 투입했음은 물론이다.지난 2018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를 찾았다. 거기 머무는 기간의 절반은 직업을 가진 샐러리맨으로 지냈고, 절반은 가벼운 마음의 여행자로 보냈다.비엔나 국립 오페라극장과 그 주변을 취재했던 일이 끝난 후, ‘비엔나 여행자’로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이 쇤브룬 궁전이었다.많은 관광객들의 심정과 마찬가지로 한때 전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화와 몰락을 가장 가까이에서 엿보고 싶었다. 이쯤이면 누가 이런 질문을 던질 것도 같다. 쇤부른 궁전은 대체 어떤 곳이냐? ‘위키백과’가 나서 이런 대답을 내놓는다.“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궁전이자 방문객이 가장 많은 유적지 중 하나다. 문화적으로도 가장 뜻 깊은 곳이기도 하다. 쇤브룬 궁전의 정원은 한 시절 유럽을 호령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품격과 취향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50만 평에 이르는 대지와 궁궐은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됐고, 쇤브룬 공원 안에 있는 비엔나 동물원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이다.18세기 중엽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여름 별장으로 지어진 쉰브룬 궁전은 1892년부터 빈 13구역 히칭에 위치해 있다. 이 궁전의 이름은 1619년 마티아스 황제가 사냥하다가 샘터를 발견했을 때 ‘이 얼마나 아름다운 샘인가’라고 외쳤다는 일화에서 유래됐다.”해가 떨어질 무렵. 수백 명의 여행자와 적지 않은 숫자의 비엔나 시민들이 쇤브룬 궁전의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여유로운 발걸음으로.때는 장미가 피던 초여름 무렵. 색깔을 달리하는 꽃들과 잘 정돈된 정원수, 여기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귀여운 아기들까지 더해져 쇤부른의 광대한 정원은 더없이 근사한 풍광을 연출하고 있었다.‘쇤부른’은 막시밀리언 2세, 동궁과 월지의 창조자는‘쇤부른 궁전’이라는 오스트리아의 관광 명소를 만든 일등공신은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인 막시밀리안 2세다. 그는 ‘쇤부른 궁전 정원의 창조자’로 불린다.16세기 중반 카터부르크 지역을 사들여 동물원을 만들라고 명령한 막시밀리안 2세는 진귀한 동물들이 뛰노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했던지, 다시 아름다운 꽃과 희귀한 식물들까지 대량으로 식재해 식물원까지 조성하게 한다. 쇤부른 궁전의 매혹적인 대(大) 정원은 여기서 시작됐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이는 450여 년 전을 기록한 유럽 역사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900여 년이나 앞서 동양의 고대 왕국 신라는 ‘국립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불러도 좋을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게 어디냐고? 많은 이들이 짐작했겠지만 동궁과 월지다.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여행자들을 매료시키는 쇤부른 궁전과 정원을 만들라고 명령한 이가 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언 2세라면, 동궁과 월지 조성을 명령한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라는 질문.이 질문과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인용된 이희준의 논문 ‘동궁과 월지 동편 신라왕경 유적의 조성 시기 및 성격 검토’를 펴봐야 한다. 거기엔 이런 내용이 실렸다. ‘삼국사기’의 기사(記事·역사적 사실을 적은 글) 중 일부다.“문무왕 14년(674년) 궁 안에 못을 파고 가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금수를 길렀다.”“문무왕 19년(679년) 동궁을 짓고 궁궐 안팎 여러 문의 이름을 정했다.”이제 의문이 풀렸다. 맞다. 문무왕이다. 그는 동궁과 월지를 만든 신라의 왕. 요즘 방식으로 위트 있게 말하자면 ‘동궁과 월지의 건축주’라고 부를 수도 있을 듯하다.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책 ‘신라의 왕권 강화와 발전’에는 문무왕의 기질과 업적을 간략하게 정리한 대목이 등장한다. 요약하자면 이렇다.“문무왕은 현실적 난제들을 해결하고자 일찍부터 외교,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 결과 마침내 고구려를 멸망시키면서 삼국 간에 장기간 치열하게 전개되던 전쟁을 종식시켰다. 또한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을 위해 일시 군사동맹을 맺었던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하였다.또 자신의 세력기반인 무열왕계와 김유신계를 적절히 활용해 권력기반을 강화하는 데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왕권 강화를 위한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신문왕(문무왕의 아들)대에 전제왕권이 확립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이처럼 문무왕은 정치적인 측면과 외교 차원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현명한 통치자였다. 이 부분에 대해선 역사학계에서도 별다른 이견이 없다.여기에 월지와 동궁까지 조성하고 축조함으로써 문무왕은 정치·외교적 수완과 함께 고급스런 문화·예술적 취향까지 드러냈다. ‘돌올한 신라의 왕’ 중 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해 보인다.통일시대 열어간 문무왕은 어떤 사람이었을까현대인들의 진일보한 상상력조차 발휘되기 어려운 까마득한 옛날 근사한 인공 연못을 만들고 오만 가지 화초를 심어 월지를 조성한 사람. 당시로선 보기 힘들었을 동물들까지 거기서 뛰놀게 만들어 자신의 권위와 통일신라의 힘을 보여주고자 했던 인물.한 걸음 더 나아가 향후 왕위를 이어갈 태자들이 교육과 인격 수양을 할 공간인 동궁까지 건설토록 지시한 문무왕의 문화적 감수성은 보통이 아니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른바 ‘문무겸비(文武兼備)의 지도자’가 아니었을지.고운기와 장선환의 ‘인물한국사’는 문무왕을 ‘신라를 신라답게 만든 장본인’이라 평가하며 그의 삶을 이렇게 약술하고 있다.“신라 제30대 문무왕(재위 661∼681년)은 태종무열왕과 문명왕후의 아들이다. 어머니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아버지를 도와 국사의 중대한 책무를 다하였으며, 왕위에 올라서는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하는 일의 거의 전부를 해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삼한을 통합한 실질적인 왕으로, 이후 신라의 국격(國格)을 한 단계 높인 명군으로 추앙받는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6-09

천년왕국의 내밀한 서사를 간직하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도 이 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경주는 아름답고 비밀스러우며 놀라운 고대 천년왕국 신라의 숨결을 간직한 도시다.”단순히 시내를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역사책에서 얻는 이상의 지식과 감흥을 얻어낼 수 있는 공간이 바로 경주다.우리 땅 어디에 이만한 역사 학습의 공간이 또 있을까? 10번을 다시 찾아도 서라벌이 안팎으로 간직한 천년왕국의 내밀함을 모두 헤아리기는 힘들다.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젊은이들의 활력으로 넘치는 황리단길을 지나 거대하게 솟은 대릉원의 고분을 바라보며 걷다보면 어느덧 첨성대가 보이고, 이내 ‘동궁(東宮)과 월지(月池)’에 이르게 된다.낮에는 조용한 연못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길 수 있고, 화려한 조명이 불을 밝히는 밤이면 갓 연애를 시작한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각광받는 경주의 손꼽히는 명소. 신라 역사에 관심을 가진 아이들에게는 현장 학습의 기회를 제공하고, 가족들끼리의 피크닉도 즐길 수 있는 곳. 동궁과 월지는 매력적인 경주의 보물 중 하나다.이곳엔 많은 이야기와 사연들이 숨겨져 있다. 아무리 큰 상상력의 날개를 펴도 가닿기 힘든 아득한 옛날인 1천300여 년 전 만들어져 21세기에 이른 지금까지 제 안에 간직한 비밀을 다 드러내지 않고 있는 동궁과 월지.본지는 2021년 특집기사로 ‘아름다운 신라 화원 동궁과 월지’를 기획해 연재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지난 역사를 통해 현재를 인식하고 미래를 준비한다’는 의도에서 마련된 것이다. 독자들의 관심과 애정 어린 질책을 기대한다. 월지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경주시 인왕동에 위치한 월지는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8호로 지정됐다. 보기에 따라서는 곳곳에 산재한 다른 연못과 별 다를 바 없이 느껴질 수도 있지만, 월지는 그 안에 신라 천년의 역사를 담고 있는 아주 특별한 연못이다.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간행한 책 ‘신라의 유적과 유물’은 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월지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군신이 모여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임해전의 위치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주조에 ‘안압지는 천주사 북에 있다. 문무왕이 궁내에 연못을 파고 돌을 쌓아 무산 12봉을 상징하고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를 길렀다’고 기록돼 있다.”안압지는 2011년 월지로 불리기 이전의 연못 명칭이다. 연못 서쪽에는 임해전터가 있다.앞서 언급된 고문헌 ‘삼국사기’의 기록을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여기서 월지와 동궁의 건립 당시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을 터.“문무왕 14년(674년)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宮內穿池造山 種花草 養珍禽奇獸) 또한, 같은 왕 19년에는 궁궐을 화려하게 중수하고 동궁을 지었다(重修宮闕 頗極壯麗 創造東宮).”기자는 취재로 서너 번, 경주 여행을 하며 다시 두어 번 동궁과 월지를 방문했다. 20세기에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들은 7세기 지금의 경주 땅 신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사람들이 웃고 울며 살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그러나, 미루어 짐작은 가능하다. 역사 공부는 그래서 필요한 게 아닐까. 신라의 국력이 나날이 커져가던 문무왕 통치 시기. 권력자들은 대내외에 힘을 드러낼 수 있는 매력적인 공간을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아시아의 태국과 캄보디아가 거대한 석조 건축물을 축조해 왕의 권위를 높였고, 더 멀리는 로마와 그리스가 미려하고 웅장한 건물을 만들어 자신들의 능력을 드러냈듯이.신라의 태자가 머문 것으로 추정되는 월지와 동궁은 축조 후에도 여러 차례 개축과 중수를 거쳤다.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삼국사기’를 인용해 아래와 같이 동궁과 월지의 변모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679년에 궁궐을 매우 화려하게 고쳤다고 하였고, 804년(애장왕 5년), 847년(문성왕 9년), 867년(경문왕 7년)에는 임해전을 중수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697년(효소왕 6년) 9월과 769년(혜공왕 5년) 3월, 860년(헌안왕 4년) 9월, 881년(헌강왕 7년) 3월에는 군신들이 연회를 가졌다고 하였으며, 931년에는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초청하여 주연(酒宴)을 베풀고 위급한 정세를 호소하기도 하였다.”이처럼 여러 왕에 의해 보수가 명해진 월지와 동궁은 통일신라 시기의 중요한 역사와 함께 한 빼놓을 수 없는 유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임해전(臨海殿)에 대한 궁금증월지의 서쪽에는 임해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임해전터로 보이는 곳에는 아직도 밭이랑 사이에 초석과 섬돌이 남아 있다고 한다.“동궁과 월지는 임해전이 속한 통일신라의 동궁지로 알려진 곳”이란 게 앞서 언급한 책에 실린 내용.임해전에 관해서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 ‘삼국사기’ 효소왕 6년(697)조다. 여기 실린 바에 따르면 임해전은 왕이 군신(群臣)에게 연회를 베풀던 장소였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안압지(월지) 서쪽에 임해전이 있는데 언제 창건되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짤막하게 기록돼 있다고 한다.이러한 옛날 기록을 볼 때 임해전은 안압지와 유사한 시기(674년 전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앞에서 말한 대로 7세기 후반은 신라가 여러 차례의 전쟁을 통해 힘을 과시하며 삼국통일을 이룬 시기다.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이어지던 전투에서는 주목받는 전략가와 장수, 용기를 보인 병졸이 있기 마련. 이런 사람들을 치하하기 위한 연회가 자주 열릴 수밖에 없었을 터다.동궁과 월지를 돌아보다가 임해전터에 서있으면 당시 신라 왕과 공을 세운 신하들이 술잔을 앞에 놓고 터뜨리는 호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이런 상상을 뒷받침하듯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포함한 여러 고문헌에는 임해전에 관련한 서술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이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안압지를 끼고 있는 임해전은 나라에 경사스런 일이 있을 때나 귀한 손님들이 왔을 때 군신들의 연회와 귀빈 접대 장소로 이용되었다. 769년(혜공왕 5년) 3월 이곳에서 왕이 베푼 연회가 있었고, 860년(헌안왕 4년) 3월에는 경문왕이 화랑으로 활동할 때 헌안왕이 이곳에서 베푼 잔치에 참석했다가 사위로 택해지기도 했다. 또, 881년(헌강왕 7년) 3월에는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향연을 베풀고서 흥에 겨워 직접 거문고를 탔고, 신하들은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놀았다고 한다.”임해전은 백제 의자왕 때 세워진 망해정(望海亭)에서 착상을 얻어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맥락과 성격은 임해전 앞에 있던 안압지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는 게 학계의 견해.안압지에는 무산(巫山) 12봉을 본떠서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다.현대에 와서 진행된 발굴 결과 안압지에서는 세 섬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곧 삼신산(三神山)을 상징한다는 게 통설이다.이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삼신산은 신선이 살고 있다고 전하는 중국 바다의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州山)의 3산으로, 안압지가 단순한 못이 아니라 바다로 상징되었다는 증거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동궁을 둘러싼 논란은 아직도 현재진행형동궁은 말 그대로 신라의 왕자가 머물며 공부하던 궁이다. 최고 권력자로부터 후계자로 지목된 인물이 기거했으니, 그 규모와 화려함이 대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동궁은 태자의 권위를 드러내는 생활공간인 동시에 빼어난 학자들로부터 왕이 되기 위한 수업을 받는 학습공간이기도 했을 것이다.동궁의 역할에 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분분하다. 사학자 김병곤은 논문 ‘신라 동궁의 역할과 영역-임해전 및 안압지와의 상관성을 중심으로’를 통해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동궁과 월지에서 동궁은 문무왕 19년(679년)에 만든 곳으로 태자의 권위를 드러내며 독자적인 주거 공간의 제공과 군왕에 어울리는 자질 향상을 위해 각종 교육을 실시하는 장소였을 것으로 보며, 이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큰 이견이 없다. 하지만 연회를 베풀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월지 및 그 인근의 전각과 태자의 교육기관인 동궁이 하나로 묶여있는 점은 동궁 및 그에 속하는 관청의 위치 문제, 월지궁 혹은 임해전과의 구분, 사적 명칭 문제 등 현재까지도 많은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월지와 동궁, 임해전은 각각 그 안에 천년의 시간 속에 축적된 내밀한 스토리를 품고 있다. 또한 관련된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의 갖가지 사연을 지켜봤을 게 분명하다.앞으로의 연재를 통해 흥미로운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심정으로 동궁과 월지에 얽힌 모든 것을 독자들과 함께 차근차근 알아가고자 한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