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 엽편소설 ‘대략 천 년’
문학은 인간에게 ‘위로’를 선물할 수 있다. 갑작스레 나타난 바이러스로 인해 온 세상이 공황에 빠져 있는 지금. 소설가 김강 씨가 1천 년 전 신라 동궁에서 열린 연회를 소재로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된 후의 경주를 상상해 마음 따스해지는 작품을 썼다. 이를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김강 씨는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쓴 작가인 동시에 내과의사다. <편집자 주>
연꽃이 만발하네. 사람도 만발이네. 어휴, 도로 양쪽에 주차해놓은 차들 좀 봐. 사람들도 장난 아니게 많겠지. 땡볕에 고생 좀 하겠는걸. 그래도 휑한 것보다는 낫지. 십팔인지 십군지 하는 바이러스. 난 왜 자꾸 십구보다 십팔이라고 하는 거지? 아무튼, 그 사태가 해결되었으니 망정이지 어쩔 뻔 했어. 경주로 단체 관광을 올 생각을 했겠어? 가게 문 열어놓고 면상을 맞대며 한숨만 쉬고 있겠지. 그러니 저 정도 줄 설 수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행이다 생각해야지. 그렇지 않아?
어허, 벌써 일어서지 마. 아직 조금 더 가야 해. 저기 보이는 게 첨성대니까 여기는 대릉원쯤 되겠네. 차 밀리는 것을 봐서는 내리려면 한참 남았어. 안압지, 아니 월지 근처에 간다 해도 주차도 해야 하고 우리가 일어선다고 바로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아무튼 시간이 걸릴 거야. 앉아 있어. 조금만 기다리자고.
참, 내가 하나만 일러줄게. 월지를 둘러보고 나면 보통 옆에 있는 연 밭으로 가거든. 가기 싫어도 가게 돼 있어. 사람들이 모두 거기로 갈 거니까. 연 밭에 가거든 꽃대 아래를 살펴봐. 선명한 분홍의 덩어리가 붙어있는 걸 볼 수 있을 거야. 예뻐. 뭘 것 같아? 그거 왕우렁이 알이야. 왕우렁이 알 본 적 없지? 있다고? 외래종이라고? 이 사람이. 글로벌 시대에 토종, 외래종 구별이 가당키나 해?
허, 참. 아직도 저러고 있네. 저기 맨 앞자리에 앉아있는 둘 보이지? 서로 고개를 외로 돌리고 앉아 있잖아. 중국집 하는 앤드류하고 빵집 주인 왕 씨야. 일 년 전이었나? 앤드류와 왕 씨가 다퉜어. 이후로 둘 사이가 회복이 안 되더라고. 그래서 오늘 내가 특별히 상가 번영회 총무한테 부탁을 했지. 둘이 같이 앉혀보라고. 아직까지는 의미 없네, 의미 없어. 하긴 한 번 틀어진 사이가 쉽게 풀리진 않겠지.
다툰 이유가 뭐냐고? 다투는데 이유가 있나. 쌓인 것들이 폭발하는 거지. 그냥 쌓이겠어? 특별히 어느 한 사람을 두고 쌓인 거겠어? 세상이 그랬던 거지. 올해가 이천이십삼 년이니 사 년 전 바이러스 십구가 나타났지. 한창 기승을 부렸고 거리두기다 방역강화다 해서 상가 분위기가 영 아니었어. 누구하나 웃지 않던 시절이었지. 하루 종일 가게에 앉아 텅 빈 거리만 보고 있었어. 그렇게 멍하니 보다 보면 이상한 생각도 나고 곱게 보이던 것도 미워 보이고 그러는 거잖아.
물론 둘 사이가 저렇게 된 계기는 있지. 도화선 같은 것 말이야. 그러니까 그날은 재활용 쓰레기를 수거해가는 날이었어. 여름이었어. 더웠지. 예전 같으면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그날따라 빵집 왕 씨가 자기 가게에서 나온 폐지들을 쓰윽 본 거야. 그런데 이게 뭐야? 빵집에서 나온 폐지들 틈에 당근 상자가 보인 거지. 당근 상자 안에 흙도 조금 남아 있고, 물기도 좀 있고 하여튼 좀 그랬나 봐. 왕 씨가 상자를 들고 중국집으로 갔어. 앤드류를 불러냈지.
이름이 왜 앤드류냐고? 외국인이었어. 지금은 한국인이고. 교포 2세야. 앤드류 김. 모국 방문한다고 들어왔다가 자장면 맛에 반해서 눌러앉았어. 귀화도 했고. 우리 상가에서 중국집을 한 지가 벌써 이십 년 다 되어가. 빵집 왕 씨하고 비슷한 시기에 개업을 했으니까. 하여튼 왕 씨가 중국집 문을 열고 앤드류에게 이리 나와 보라고 했어. 고운 말, 부드러운 말투였겠어?
넓은 홀, 여남은 테이블 중 딱 한 테이블에 손님들이 있었어. 정수기 관리하시는 분들이었다지 아마? 상가 장사가 안 되니까 정수기 관리하시는 분들이 자기들 거래 업체를 돌아가며 방문해서 사 먹어주기도 하고 그랬나 봐. 고마운 일이지.
아무튼 자장면을 먹고 있던 손님들이 자장면 면발을 입에 문 채 고개를 돌려 왕 씨를 보았지. 탕수육 소자 정도는 추가로 시켜줬으면 하고 손님들을 바라보던 앤드류는 들고 있던 메뉴판을 놓쳤고. 메뉴판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소리가 조금 크게 났어. 근데 그 소리를 들은 왕 씨가 또 오해한 거지.
이게 뭘 잘했다고? 지금 던진 거야? 너, 던진 거지?
앤드류가 얼마나 황당했겠어?
아니 그게 아니고, 놀라서 메뉴판을 놓친 건데.
왕 씨도 그 말을 듣고는 아차 했을 거야. 그런데 어떻게 해. 그 상황에서. 그랬어? 내가 오해했네. 미안. 그럴 수는 없었을 것 아니야? 왜 못 그러냐고? 보통은 그러기 힘들지. 왕 씨는 물러설 수가 없었어.
이 자식이 말끝도 흐리고. 이제 아래위도 없다 이거지? 그래 아래위 없다 치자. 그렇게 나오겠다면 나도 그렇게 대해주면 되니까. 그건 그렇고, 이 박스 왜 우리 쪽에 갖다 놓은 건데? 이 당근 박스 말이야. 우리는 당근 쓸 일 없거든.
그렇게 말하고는 당근 박스는 중국집 바닥에 던져버렸어. 박스에 있던 흙과 마른 잎사귀들이 중국집 바닥에 흩어졌지. 어머나. 손님들이 소리를 질렀어. 그렇게 시작된 거야. 앤드류가 박스를 집어 들고 박스에 인쇄된 영농조합 명칭을 가리키며 우리는 여기서 당근을 사지 않는다, 말했지만 왕 씨 귀에 들어올 리 없었지. 우리 상가에서 당근을 쓸 가게는 중국집 말고는 없거든. 빵집에서는 고로케 만들 때나 간혹 쓰기는 하겠지만, 왕 씨 말로는 쓰는 양이 많지 않아 박스로 사서 쓰지는 않는다 하더라고.
그날 둘은 드잡이를 하는 상황까지 갔어. 좌우로 상가가 늘어선 텅 빈 거리 한 복판에서 큰 목소리와 욕설이 오고 갔지. 결국 파출소에서 온 경찰이 중재를 하고 나서야 끝났어. 사실 그게 경찰까지 올 일은 아니지. 빈 박스야 누구 것이든 모아 놓으면 되는 것이고. 설령 자기 것이 아닌 박스가 들어와 있다고 해도 누구 것인지 찾아 나서는 사람도 잘 없지. 자기 일하기도 바쁘니까 말이야. 그리고 그 박스가 중국집 것도 빵집 것도 아닐 수도 있잖아.
상가에 있는 가게 중 누구든 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담아올 때 썼던 빈 박스 중 하나일 수도 있지. 그러니까 평소 같으면 별 문제가 될 일이 아니었다는 거야. 이건 전부 오로지 바이러스 십구 때문이야, 아니 십팔 때문이야. 저 두 사람 그 전에는 사이가 좋았거든.
그런데 내가 누구냐고? 누구기에 저 둘의 사연을 이리도 잘 아냐고? 나, 상가 번영회장이지. 번영회장이면 우리 상가에서 벌어지는 일은 다 알지. 암, 다 알고말고. 오늘 이 행사를 기획하고 밀어붙인 사람도 나야.
이제 바이러스 십구 사태도 마무리 되었으니 좋은 일이 생기지 않겠어. 상가에도 활기가 돌 것이고. 그러니 풀 것은 풀고 사과할 건 사과하고 해야지. 다툰 것이야 저 둘이지만 상가의 다른 가게 사장들 사이도 그리 썩 좋았던 것은 아니니까. 굳이 말하려면 많아. 저기 있는 둘도 그렇고, 맨 뒤에 앉아 있는 저 둘도 그렇고. 그래서 다 같이 가자고 했어.
저기 누각 보여? 누각 앞에 연못이 있어. 월지. 동궁은 어디냐고? 동궁은 없어. 동궁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자리만 있지. 태종무열왕 알지? 문무대왕도 알고? 원래는 그 태종무열왕의 아들이자 문무대왕의 동생인 김인문의 집이었다네. 김인문이 당나라에 가서 외교를 잘 했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을 이끌어냈지. 문무대왕이 그 공을 치하해서 집을 하사했는데, 이후 나당 연합이 깨어지면서 상황이 바뀐 거야. 당나라 군대가 신라와 전쟁을 하러 오면서 김인문을 앞장세워서 온 거지. 김인문을 신라 왕으로 삼겠다는 것이었어. 김인문은 역적이 되었고 문무대왕은 집을 헐어버렸지. 그 자리에 동궁과 월지를 만든 거야.
동궁에 얽힌 이야기 하나만 더 할까?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왕건을 초대했고 동궁에서 큰 연회를 열었어. 견훤으로부터 신라를 구해달라는 것이었지만, 아닌가? 구해줘서 고맙다는 것이었나? 아무튼. 그 자리에서 왕건에게 신라를 맡아 달라 부탁을 했다네. 신라의 백성들을 위해서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그게 쉬운 결정이었겠어? 잠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려와. 동궁에 대해서 어찌 그리 잘 아냐고? 신문만 잘 봐도 다 알게 되어 있어. 신문에 연재기사로 나왔었거든. 장사도 안 되고 하니 하루 종일 신문을 정독했거든.
다 왔네. 이제 곧 내리겠어. 내릴 준비하자고. 그러고 보니 말이야. 앤드류는 김 씨고 빵집은 왕 씨니까. 옛날에 경순왕과 왕건이 만났던 것하고 같네. 김 씨와 왕 씨가 만난 거잖아. 차에서 내리면 저 둘을 불러놓고 경순왕과 왕건 이야기를 해줘야겠어. 괜찮은 명분이 될 것 같지 않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그렇지 않아?
동궁을 배경으로 한 따뜻한 일화가 한 가지 더 생기는 거지. 대략 천 년 만에 말이야.
저기 누각 보여? 누각 앞에 연못이 있어. 월지. 동궁은 어디냐고? 동궁은 없어. 동궁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자리만 있지. 태종무열왕 알지? 문무대왕도 알고? 원래는 그 태종무열왕의 아들이자 문무대왕의 동생인 김인문의 집이었다네. 김인문이 당나라에 가서 외교를 잘 했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을 이끌어냈지. 문무대왕이 그 공을 치하해서 집을 하사했는데, 이후 나당 연합이 깨어지면서 상황이 바뀐 거야. 당나라 군대가 신라와 전쟁을 하러 오면서 김인문을 앞장세워서 온 거지. 김인문을 신라 왕으로 삼겠다는 것이었어. 김인문은 역적이 되었고 문무대왕은 집을 헐어버렸지. 그 자리에 동궁과 월지를 만든 거야.
동궁에 얽힌 이야기 하나만 더 할까?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왕건을 초대했고 동궁에서 큰 연회를 열었어. 견훤으로부터 신라를 구해달라는 것이었지만, 아닌가? 구해줘서 고맙다는 것이었나? 아무튼. 그 자리에서 왕건에게 신라를 맡아 달라 부탁을 했다네. 신라의 백성들을 위해서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그게 쉬운 결정이었겠어? 잠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려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