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엽편소설 ‘곧, 그 밤이 또 온다’
신라 천년의 비밀을 간직한 ‘월지’는 문학의 좋은 소재가 될 수도 있다. 포항에서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강(49)씨가 월지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 짤막한 소설을 보내왔다. 아래 게재한다. 2017년 심훈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온 김강 씨는 소설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고, 작가인 동시에 내과의사이기도 하다. <편집자 주>
칠흑 같은 혹은 그저 어두운 밤이었다고. 아니다. 너는 밤에 대해 조금 더 말을 하려 한다. 그날 밤에 대해 설명하려면 조금 길어지겠지만, 혹자는 이 또한 사족이라 지우라 하겠지만 그럼에도 네가 이야기하려는 이유는 밤이 다 같은 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밤은 특별했다는 것, 잣나무 꽃가루와 소나무 꽃가루가 무리지어 몰려다니는 그와 같은 밤이 돌아올 때마다 여전히 방 안을 서성인다는 것을 너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을 내쉴 때마다 가슴팍 어딘가에서 휘파람 소리가 나는 그런 밤을 겪어보지 않았다면 밤에 대해 입을 대지 말라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와 같은 밤이 돌아올 때마다 월지로 향하는 너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대략 표현하자면 그날의 밤은 이랬다. 구름에 가려진 보름달이 뜬 밤.
너와 그는 1호 누각이라 쓰인 표지석을 지나쳐 누각 안으로 들어갔다. 누각 곳곳에 조명등이 있었지만 짙고 검은 월지의 수면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서너 개씩 무리지어 올라있는 연잎들마저 검은, 흑백사진 같은 월지를 너희 둘은 가만히 보았다. 구름이 달을 벗어날 때마다 월지에 달빛이 비쳤다.
-두 가지 색만 남은 스테인드글라스 같아. 오래되어 색이 바랜. 그런데 그런 게 있나?
그가 난간을 잡고 있는 너의 손등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러게. 그러면 천삼백 년 전에는 칼라풀 했을까? 월지에 비친 달빛이.
-그랬을 수도 있겠다. 배를 띄우고 잔치를 했다지. 여러 색의 빛들이 연못위에 비춰졌을 수도 있겠어. 그런데 오빠, 여기 유물들, 전시되어 있는 것들 말이야. 저기 적혀 있는 것들 모두 사실일까? 이곳 월지 말고도 다른 곳의 땅에서 나온 유물들의 사연들, 모두 진실일까?
너와 그는 월지에 있었다.
-아홉 시 이십 분. 열 시가 되면 문을 닫습니다. 그때까지는 나오셔야 합니다.
그와 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월지의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둘은 손을 잡기도 했고 서로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걷기도 했다. 가끔 두 발이 엉켜 발걸음을 멈췄다. 어깨에 올린 팔이 저려와 슬며시 내리기도 했지만 누가 봐도 그럭저럭한 연인이었다. 어쩌면 아주 뜨거운 연인일 수도 있었다. 그의 엉덩이를 스친 너의 손바닥과 너의 볼에 붙어버린 그의 볼을 모두 우연이라 할 수는 없으니.
-구름이 달을 벗어났어.
그가 맞잡은 손을 풀어 달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는 그의 손을 따라 달을 보았다.
-그러네, 저 달 근처 목성이 있을 텐데. 달이 밝아서 그런가? 보이질 않네.
-목성은 왜?
-오늘 목성의 달, 유로파에서 물을 발견했다네.
너는 우연히 보았던 기사를 떠올렸다. 갈릴레오 탐사선이 목성의 위성 유로파에서 물을 발견했다는 기사. 너는 지구에서 목성까지의 거리와 오늘 밤 하늘 어디서 목성을 볼 수 있을지, 그리고 지구에 있는 물의 양을 검색해 읽어보았었다.
-물을 찾아서 거기까지 갔데. 지구에 무려 십삼억 삼천만 세제곱 킬로미터의 물이 있는데 말이야.
-그런 것 까지 알고 있었어? 그냥 막 던진 숫자지?
-아니. 사실이야. 오늘 오전에 잠깐 찾아봤었어. 지구에 그렇게 많은 물이 있는데 구억 육천오백육십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까지 물을 찾으러 가다니, 재밌네, 하고 생각했어.
-오빠도 주위의 많은 여자들을 두고 나를 만나러 왔잖아. 사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까지.
너와 그는 1호 누각이라 쓰인 표지석을 지나쳐 누각 안으로 들어갔다. 누각 곳곳에 조명등이 있었지만 짙고 검은 월지의 수면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서너 개씩 무리지어 올라있는 연잎들마저 검은, 흑백사진 같은 월지를 너희 둘은 가만히 보았다. 구름이 달을 벗어날 때마다 월지에 달빛이 비쳤다.
-두 가지 색만 남은 스테인드글라스 같아. 오래되어 색이 바랜. 그런데 그런 게 있나?
그가 난간을 잡고 있는 너의 손등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러게. 그러면 천삼백 년 전에는 칼라풀 했을까? 월지에 비친 달빛이.
-그랬을 수도 있겠다. 배를 띄우고 잔치를 했다지. 여러 색의 빛들이 연못위에 비춰졌을 수도 있겠어. 그런데 오빠, 여기 유물들, 전시되어 있는 것들 말이야. 저기 적혀 있는 것들 모두 사실일까? 이곳 월지 말고도 다른 곳의 땅에서 나온 유물들의 사연들, 모두 진실일까?
-당연 그렇겠지. 그런 것 확인하려고 전문가가 있는 것 아니겠어. 고증을 잘 해야지. 잘해서 입증된 것만 이야기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 그건 그렇고,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빨리 움직이자. 저기, 저 안 쪽이 좋겠어. 가자.
너는 그를 재촉해 월지를 돌아 누각 반대쪽으로 향했다. 너는 시계를 보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확인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금방이면 돼, 너는 그에게 말했고 뭔데 그래, 그는 물었다. 너는 그의 손을 잡고 묵묵히 그리고 빠르게 걸었다.
누각의 반대편에 다다라 너는 주위를 살폈고 그는 너를 살폈다. 관리인들이 사용하는 작은 보트가 바위에 둘러진 밧줄에 묶여 있었다. 연못 가장자리 바깥으로 움푹 들어간 곳, 숨어 있기 좋은 곳이었다. 관리인들이 반대쪽 누각으로 플래시를 흔들며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몇몇 커플들, 사람들이 정문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뭐 하려는 거야? 이렇게 으슥한 곳에 끌고 와서는. 오빠, 이상해.
너는 대답 없이 등에 멘 작은 가방을 내려 지퍼를 열고 신문지로 감싼 무언가를 꺼냈다. 마침 구름이 달을 벗어났고 네가 꺼낸 무언가는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게 뭐야? 뭔데?
그가 너의 곁으로 와 붙으며 물었다. 너는 그의 손바닥에 그것을 올려놓았다.
-이게….
-스테인리스에 각인을 한 거야. 너와 나, 우리의 만남, 사랑, 그런 이야기. 월지에 던져 넣으려고. 나중에, 미래에 누군가 보게.
언젠가, 아주 나중에, 몇 백 년이 지난 후에 월지의 바닥을 준설하거나 다시 발굴하는 날이 오지 않겠냐고, 그때 이 스테인리스 조각이 발견되면 우리 사랑이야기를 알게 되지 않겠냐고, 한 조각 남겨진 이야기가 그 시대를 대표하는 경우가 많으니 우리 사랑이 우리 시대의 사랑이 되지 않겠냐고, 그렇게 우리는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거라고, 너와의 사랑은 누구에게 보여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라고. 너는 흑과 백의 사진 속 유일한 붉은 얼굴로 그에게 말했고 그의 얼굴도 붉게 달아올랐다. 둘은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분명하게 하나, 둘, 셋을 헤아렸고 스테인리스 조각을 월지로 던져 넣었다.
퐁! 연 옆에 앉아 있던 개구리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너와 그는 정문으로 돌아왔다. 빠르게 걸었던 탓에 둘 다 숨이 찼다. 숨을 몰아쉬는 그와 너를 보며 관리인이 물었다.
-도대체 어디 있었던 겁니까? 분명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말했는데 기어코 들어가더니 때맞춰 나오지도 않고 말이지.
-죄송합니다.
너와 그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손을 꼭 잡은 채로.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그와 너 뒤로 관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뭘 하고 있었기에 저렇게 숨이 차는 거야. 요즘 젊은 것들이란. 쎄고 쎈게 모텔이고 방인데 말이야.
여섯 번의 여름과 다섯 번의 겨울이 지났다. 언젠가 꽃은 지는 법. 목성 주위를 돌던 갈릴레오 탐사선이 목성 궤도를 이탈하며 임무를 마친 그 해, 너와 그의 사랑도 끝났다. 여섯 번의 여름과 다섯 번의 겨울이 각인된 스테인리스 조각만이 월지의 어느 바닥에 남았다.
그것이 문제다. 밤의 어둠 속에서 더욱 반짝일 영원한 사랑의 맹서. 작은 상처를 주고받아 아픈 날도 있었지만 그것 또한 사랑이었다고, 바람 부는 세상 서로 기대며 살았고 꽃 같은 세상 온전히 서로의 것이었다고, 마지막 날 손을 잡고 입을 맞추며 눈을 감았다고 깊이 새겨놓은 각인. 월지의 작은 보트 근처 어딘가의 스테인리스 조각.
배롱나무 헐벗은 가지들을 흔들고 동백의 꽃을 툭툭 떨어뜨리며 오는 밤. 지키지 못한 것들에 대한 후회, 거짓과 진실이 뒤바뀐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한 밤. 그와 같은 밤이 오고 있다. 너는 검은 잠수복을 챙겨 나선다. 월지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고개를 집어넣고 손을 휘저어 무언가를 찾는다.
너는 문득 묻는다. 우리가 건져내야 할 것이 지난 사랑의 각인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