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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더이상 반려동물을 물건으로 취급 말아야 한다”

민법상 반려동물은 ‘물건’으로 취급된다.‘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란 조항이 신설된 개정안은 국회에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돈만 지불하면 원하는 동물을 살 수 있고, 원하지 않으면 버릴 수 있다. 구매자를 보호하기 위한 매매계약서에는 동물의 기본 정보와 건강에 관한 사항을 적도록 하지만 구매자의 사육 능력이나 사육환경에 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 반려동물 인구에 비례해서 유기동물의 수가 늘어나는 이유이다.겨울비가 장맛비처럼 내리던 저녁. 어둠이 내린 시골길을 더듬어 포항시동물보호센터를 찾았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구조되었다는 강아지가 유리 부스 안에서 부산스럽게 오가며 끙끙 앓았다.직원의 말로는 사람의 손을 많이 탄 모양인데 도대체 어떤 사연으로 버려졌을까. 김태연 센터장과 만난 사무실은 어린 강아지들을 보호하는 집중실과 문 하나로 통하는 위치했다. 김 센터장과 인터뷰하는 내내 낯선 곳에서 첫날을 맞은 강아지들의 불안한 짖음이 이어졌다. -포항시동물보호센터에는 어떤 동물들이 생활하나.△현재 130여 마리의 개와 10여 마리의 고양이를 보호한다. 지난 11월에만 63마리의 개를 구조했다. 12마리가 원래 주인을 찾았고, 39마리는 새로운 주인을 찾았다. 건강상의 이유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폐사한 개체가 25마리이다. 개와 고양이 외에 토끼나, 햄스터, 염소나 앵무새도 구조한 적이 있다. 야생 동물의 경우, 건강상의 문제가 없으면 방사하고 나머지는 경상북도 야생동물구조센터로 인계해 치료하거나 야생 적응 훈련 등을 받도록 한다. 다섯 명의 직원이 돌아가면서 구조와 보호, 방문자 응대까지 한다.-주된 유기 장소는 어디인가.△우리 센터에서는 연간 천여 마리를 구조해서 보호한다. 대부분 도심 지역에서 발견되며, 드물게 센터 앞에 묶어두고 가는 경우도 있다. 봄과 여름철에 구조하는 수가 늘어나는 편이다. 유기가 많아서라기보다 그 시기에 번식하는 길고양이나 들개가 많은 영향인 듯하다. -유기동물의 구조 과정과 보호 시스템은 어떠한가.△센터나 관공서를 통해 신고가 들어오면 구조 담당자가 현장으로 출동한다. 동물의 안전 확보를 위해 포획 틀이나 구조물을 설치하기도 한다. 대부분은 개와 고양이고 그중에서도 개의 비중이 월등하다. 입소한 동물은 전염병이나 기생충 전파를 예방하기 위해 1주일 정도 대기실에서 지낸다. 그러면서 동물보호 관리시스템을 통해 주인을 찾는 공고를 열흘간 올린다.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새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기본적인 건강 관리를 하며 사진도 예쁘게 찍는다. 고양이도 동일한 공고 과정을 거친 뒤에 고양이 전용 보호동에서 지낸다. -주인을 못 찾으면 어떻게 하나. 안락사를 시키는 기준이 있는지.△주인을 찾지 못해서 삼사년 씩 센터에서 지내는 아이들도 있다. 건강상의 문제로 자연사하는 경우도 있고 불가피하게 안락사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안락사를 선택하는 첫 번째 이유는 다른 동물이나 사람에게 해를 끼칠 때이다. 전염병에 걸렸거나 고령으로 정상 생활이 힘들 때도 안타깝지만 안락사를 선택한다.-포항시동물보호센터는 강아지 사진을 잘 찍기로 유명하다고 들었다.△센터에서 구조하는 동물의 60% 정도가 입양된다. 많을 때는 한 달에 50마리가 넘는다. 입양을 원하는 사람들은 사진 한 장으로 첫 인상을 결정한다. 사진을 예쁘게 찍어 올리면 확실히 입양률이 높다. 센터 한 쪽을 스튜디오처럼 꾸며서 강아지들을 촬영한 지 3년 정도 됐다. 지금은 다른 지자체에서도 많이 따라하지만 첫 시작이 포항이다. 서울에서 취재해 갔을 정도로 유명하다. 현재 입양 업무 다수는 포항시산림조합 숲마을에 위치한 ‘포항시유기동물입양센터’로 옮겼다. 포항시동물보호센터는 구조와 보호 업무를 위주로 한다.입양을 원하신다면 도심에서 더 가까운 포항시유기동물입양센터를 찾아달라. 김태연 포항시동물보호센터장 -피치 못할 사정으로 파양하기 위해 보호센터를 찾는 사람도 있는지.△올해부터 입대나 건강상의 이유로 반려동물을 더 이상 키우기 어려운 경우, 지자체의 심사를 거쳐 동물보호센터에서 동물을 인수하여 보호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이전까지는 누구에게 부탁하거나 새로운 주인을 찾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파양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궁핍이고, 홀로 사는 노인의 요양원 입소나 사망 등으로 지인들이 센터로 연락하는 경우도 많았다.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동물보호센터는 앞서 언급한 부득이한 사정이 아니라 단지 키우기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파양을 받아주는 곳은 아니라는 점이다. -현재의 동물보호 시스템에서 아쉬움이 있다면.△입양 후에 아이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늘 궁금하고 염려스럽다. 현재의 시스템은 구조와 보호에 집중하고 있고 입양 후 동물들의 생사나 복지를 담당하기 어렵다. 입양 후 일정 기간 의무적으로 입양자들이 입양 동물의 근황을 시스템에 올리도록 강제하는 조치가 있으면 어떨까 싶다. -센터장께서도 반려동물을 키우시는지.△대학생 때 유키라는 하얀색 암컷 페키니즈를 키웠는데 유기견 출신이었다. 처음 키우다 보니 배변 훈련이나 산책 등 어려움이 컸다. 12년 정도 키우다가 병으로 떠나보냈는데, 상실감이 얼마나 컸던지 여전히 마음 한쪽이 아린다. 지금은 열 살 된 고양이를 키운다. 사랑스럽고 위안을 주는 존재지만, 고양이 털 알레르기가 있는 가족이 있어 안타까움도 가진다. 동물을 키우려는 분들은 반드시 미리 확인하길 바란다.-수의학 공부를 하면서 자신의 길을 의심해 본 적은 없는지.△수의과대학 6년 동안 그런 고민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학업이 버거운 면도 있었지만 가장 큰 갈등의 순간은 따로 있었다. 본과 3학년에 살아있는 동물을 치료하는 전공수업이 있었다. 그때 관리하던 동물에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고 골든타임을 넘겨 안락사시켰다. 과연 이 길을 계속 걷는 게 맞는지, 나 자신이나 동물을 위해서 옳은 선택인지 한동안 심각하게 고민했다.-동물권 인식이 확산하면서 개 식용을 비롯해 산천어축제, 소싸움, 승마 체험 등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온다.△이해당사자들 사이에 첨예한 의견대립이 있는 이슈들이다. 결국 사회적 합의를 거쳐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 추구해야 할 가치를 법으로 녹여내야 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식용견 문제의 경우 수십 년간 케케묵은 갈등을 유발하다 올해부터 실질적으로 식용견 사육을 금지하는 법을 시행하고 있지만, 식용견 협회 등의 반발은 여전히 거세다. 소싸움 대회도 학대 요소가 명백하지만 지자체마다 이해관계가 얽혀있어 쉽지 않다. 결국 동물의 복지 증진과 그에 따른 동물권 증진이라는 시대정신을 현실에 투영시키는 것은 일방의 도덕적 우위에만 의지해 실현할 수 없다. 보다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논의해야 한다.-동물에게 법적 권리를 부여하는 나라도 있다는데 동물권을 어디까지 보장해야 할까.△우리나라 민법은 동물을 물건으로 본다. 동물은 물건이 아니라고 규정하는 유럽이나 미국과 차이가 있다. 법은 시대정신을 반영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 갈등을 야기한다. 현재 동물권과 관련한 시대정신은 더 이상 동물을 물건으로 취급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동물의 권리는 차근차근 늘어날 것이고 미국처럼 재산을 상속받는 동물이 나타날 수도 있겠다.-동물권 증진을 요구하는 한편에서는 동물 학대가 심각한 사회문제이다. 동물을 대하는 인식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는 것 같다.△예전과 비교하면 동물을 대하는 태도나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마당에 묶어 기르는 시골 개만 봐도 그렇다. 예전에는 잔반을 주거나 목줄이 짧아서 움직이기 힘들었지만, 요즘은 대부분 사료를 먹이고 목줄을 길게 해서 기른다.반면 일부지만 동물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동물을 키우는 건 시혜를 베푸는 일이 아니다. 동물과 함께하며 그들과 생태계를 공유하는 것은 어쩌면 지구에 사는 존재로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의무가 아닐까. 한 번쯤 고민해보길 소망한다.-동물을 대하는 인식 격차를 해소하는 방법이 있을까.△동물권 증진과 관련해서 축산업에는 과연 동물권을 보장하느냐고 반문하는 분들이 있다. 좁은 케이지, 스툴 안에서 알을 낳고 분만하는 양계·양돈농장, 인위적으로 수정시켜서 지속해서 송아지를 낳게 만드는 한우 사육 농장들 모두 시대정신에 비춰봤을 때 분명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지점이 있다. 하지만 기존의 산업과 동물권 증진의 시대정신이 부딪히는 현시점에서 시대정신만 고집하는 것은 기존 산업 종사자들에게 가혹하다. 해당 산업 자체적으로도 동물권리증진을 고민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고 동물복지농장 인증제도를 도입하는 등 법적, 제도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다.저 역시나 동물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폭넓게 생명으로 존중받고 권리를 보장받기를 바란다. 하지만 본인의 의견만을 고집하는 방식은 동물권 이슈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옳지 않다.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나와 다른 생각을 마주하다 보면 동물들이 존중받고 인간과 행복하게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이 하루빨리 오리라 믿는다. /배은정 작가김태연 센터장은포항 흥해에서 태어나 포항고등학교를 다녔고 강원대학교에서 수의학을 공부했다. 포항시청 축산과에서 공중방역 수의사로 근무한 뒤, 경기도 안산시에서 동물병원을 개원했다. 4년여 전, 연로한 부모님과 가까이서 지내고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포항시동물보호센터의 민간위탁 법인인 영일동물플러스 이사장이자 포항시동물보호센터장이다.

2023-12-18

“피해자 목소리를 지켜내는 일이 ‘인권 활동’의 목표죠”

모든 사람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고, 똑같은 존엄과 권리를 가진다. ‘세계인권선언’의 첫 문장이다. 인권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리는 당연한 권리를 말한다. 두 발을 딛고 사는 땅이나 한순간도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공기, 생존에 필수인 햇빛처럼 소중하지만 늘상 곁에 있으려니 하기 쉽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최근 공개한 ‘2023 인권의식 실태조사’를 보면, 1년 전보다 인권 상황이 더 나빠졌다는 인식이 증가했다. 인권침해에 가장 심각하게 노출되는 대상은 경제적 빈곤층이었다. 인권은 누구나 동등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김용식 경북노동인권센터장은 약자의 편에서 인권을 지켜온 사람이다. 김 센터장이 말하는 인권 활동의 목표는 피해자의 옆에 서서 그들의 목소리를 지키는 일이다. -인권은 당연한 권리지만 당연하게 누리지 못하는 요즘이다.△곳곳에서 인권이 공격의 대상이 되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직장에서는 노동자가 괴롭힘을 당하고, 시설에서 장애인, 노인이 학대당한다. 정부의 존재 이유를 헌법에서도 국민의 기본권 보장 즉 인권 보장을 분명히 하는데도, 현실에서 행정력은 작동되지 않고 사법기관은 여전히 기존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한마디로 인권은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겨울나무와 같은 처지라 말할 수 있다.-인권의 여러 종류 가운데 노동인권을 중심으로 내건 이유는.△우리 사회의 인권 척도를 노동인권의 틀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출발했다. 인권 문제는 기본적으로 한 사회 속의 구성원과 구성원 또는 집단과 집단, 개인과 개인, 집단과 개인 등 다양한 층위에서 제기된다. 하지만 다양하게 제기되는 인권문제에 대한 접근 또는 이를 보장하기 위한 서비스는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 즉 사람의 노동을 통해 발현된다. 그런 측면에서 노동인권센터라고 한 것이다. 노동인권센터는 노동문제를 중심에 두면서 지역과 사회 전반의 인권 현안을 함께 하겠다는 포부로 출발했다.-경북노동인권센터는 어떤 사람들을 도와주나.△월급을 떼인 노동자가 가장 많고, 직장에서 괴롭힘이나 성희롱 등을 당했거나, 해고나 징계를 당한 노동자, 산업재해 피해자들이다. 80%는 일터에서 생긴 문제이다. 다음으로는 장애인 학대, 보복성 징계나 해고를 당한 공익신고자들이 많다. 이외에도 학교폭력으로 찾아오는 학생과 부모, 석산 개발, 폐기물 소각장, 매립장 설치, 수해나 산불 피해 등 일상에서 위협받는 사람들이나 재난지역 주민들과도 함께한다. 1년에 들어오는 민원만 600~800건이다.-그 많은 민원을 어떻게 상담하고 지원하나.△일반적인 프로세스라면 불가능하다. 민원인 대부분이 행정기관의 문턱을 넘기지 못하거나, 노동조합이 없는 분들이다. 문턱을 넘는 것만 도와주면 스스로 해결한다. 변호사나 노무사, 시·도의원을 연결해 주기도 한다. 나의 역량으로 모두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저 민원인이 됐다고 할 때까지 옆에 서 드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무리한 요구라고 판단되는 민원은 어떻게 하나.△나는 판단하지 않는다. 오죽 억울했으면 나한테까지 왔을까를 생각한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내용도 있지만 왜 그런 말을 하게 됐는지를 주목한다. 성장 과정에서 일상적으로 피해를 당해오다 사건을 계기로 피해를 자각하게 된 것이다. 대부분 민원인이 본인이 그런 입장이 될지는 몰랐다고 말한다. 켜켜이 쌓인 문제가 발현된 것이다. 발현된 그 순간의 목소리를 지키는 것이 인권 활동의 목표이다. 물론 세 차례 이상 만나면서 신뢰가 쌓인 뒤로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할 때도 있다.-타지역과 비교해 경북 지역의 노동 인권 감수성의 수준은 어느 선인가.△전국적으로 시행되는 인권 관련 지표 조사 등을 보면 대부분의 영역에서 낮은 수치를 기록하는 현실이다. 예를 들어 경상북도에서 인권증진 조례가 만들어진 것이 2013년이지만, 인권보장 및 증진위원회가 만들어진 것은 전국에서 꼴찌였다. 경북의 인권 현실이 녹록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경북노동인권센터는 변호사와 노무사, 노동조합과 시민단체 활동가 300여 명의 순수 후원으로 운영된다. 전국 대부분 지역의 노동센터는 조례에 근거해 지원받지만, 경북을 비롯해 몇몇 곳만 민간 단체이다.-인권 활동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있나.△1990년대 초반 서울 대학로 인근에서 근무했다. 당시는 길거리 검문검색이 일상이었는데, 누가 시민의 걸음을 멈춰 세우고 가방을 뒤지는 권한을 주었을까? 늘 고민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세계인권선언문 읽기 모임을 안내하는 손바닥만 한 포스터를 보게 됐다. 1993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인권대회 참가자들이 주축이었다. 국내에서 조직적으로 참가한 첫 세계인권대회이다. 이를 계기로 한국의 인권 인식은 폭력행위에 저항하는 자유권에서 사회권 차원으로 확장됐고 국가인권기구 설립 운동으로 이어졌다.-활동을 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낀 일이 있다면.△인권 침해를 당해 어디에도 호소할 데가 없거나, 공익 제보를 원하는 분들이 우리 인권센터를 물어물어 찾아왔을 때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보람은 인권을 배우면서 함께 한 사람들과 국가인권기구 설립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법이 제정되고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을 지켜보며 감격스러웠다. 물론 기대에는 못 미치지만, 존재만으로 기여하는 바가 크다. 피해 당사자들은 강력한 몽둥이를 바라지만 국가인권위는 솜방망이를 크게 휘둘러야 강해진다. 인권 제도는 형벌 제도가 아닌데도 인권위는 지나치게 입증을 강조한다. 억울한 입장에 서서 51%만 그렇게 보이면 권고해야 한다.-안타까운 순간을 목격하는 일도 많을 것 같다.△인권침해를 당한 피해자나 공익 제보자 대부분이 가까운 지인에게조차 별난 사람으로 취급받거나 위험한 인물로 낙인되는 현실이 가장 안타깝다. 그리고 사건으로 짚는다면 경주시체육회 철인3종경기 고(故) 최숙현 선수 사건이다. 생전에 최 선수의 지인이 찾아와 사건을 접수해서 대응 방안을 찾던 중 최 선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했는데 최 선수가 상처받을까 조심하는 사이 사고가 나버렸다. 그 후 가해자들이 처벌받고, 국민체육진흥법의 목적이 “국위 선양”이 아니라 “체육인 인권 보장”로 변경되는 등 성과가 컸지만, 고인을 살리지 못해 안타깝다. 온갖 구설을 물리치고 끝까지 처벌을 원했던 최 선수의 부모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핑 돈다. 가해자들이 처벌받고 시스템이 바뀌어도 딸은 돌아오지 못하지만, 다시는 그런 아이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끝까지 하겠다고 결심했고, 아직도 민사 소송이 진행 중이다. -피해 정도가 경미한 경우는 어떻게 하나. 가해자의 인권을 침해할 가능성도 있지 않나.△피해 정도는 따지지 않는다. 본인이 피해라고 하면 피해이다. 아직 우리 사회는 상대적 약자가 피해를 보고 있다. 목소리를 낸 사람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수많은 침묵이 강요될 것이다. 물론 가해자의 인권도 침해당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진실이라도 그 과정에서 부풀림이 있을 수 있으니 늘 주의한다. 사회적 시스템으로 벌을 받아야 하지, 그 외의 것들로 배제되거나 벌에 준하는 일을 당해서는 안 된다.-인권과 관련한 일을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인권 감수성’을 높이는 방법이 있을까.△자기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기다. 감수성이라고 하면 느낌이나 감성적인 부분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하지만 인권은 인류사회가 변화 해오면서 만들어낸 가치이며, 지금도 확장되고 있는 변화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인식의 영역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인권 감수성을 높이기 위해 중요한 일은 자신의 기준이 되는 영역을 넓히는 일, 즉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우리 사회의 인권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이 시대에 인권을 더 말해야 하는 이유는.△우리나라 인권 수준은 상당히 높아졌다. 현재는 조례를 통한 전면적 수용과 개인적 수용의 갈림길에 있다. 개별적 구제를 통한 확산은 느리고 한계가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처럼 지자체 차원에서 인권증진 조례를 제정해야 한다. 가까운 대구에서 인권 기구가 폐지됐다. 학생 인권 문제로 교사가 고통당한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러한 얘기들 자체가 반인권적인 이야기다. 인권은 누구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가 사람들이 가장 평화롭게 사는 세상이다. 인권이 흐릿해지는 지금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가 외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인권을 더 말해야 한다.-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지 하며 활동했지, 한 번도 뭘 이루고 싶다는 생각은 없이 지금까지 왔다. 그래도 한 가지를 말한다면 인권 침해를 당하거나, 공익신고로 고통받는 분들 곁을 지키는 노동인권센터에서 정년을 맞는 것이다.김용식 센터장은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2000년에 포항에 내려와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포항근로자종합복지관에서 공단노동자를 대상으로 교육을 담당했다. 그 뒤 이주노동자센터에서 상담 활동을 하며 인권 분야에 몸을 담그게 됐다. 도가니 사건이 영화로 알려지면서 장애 분야 인권지킴이, 국가인권위원회 장애분야 위촉강사로도 활동했다. 포항근로자종합복지관장, 민주노총 경북지역본부 집행위원장, 경북혁신교육연구소 ‘공감’ 부소장, 국가인권위원회 위촉강사(장애 분야) 등으로 활동했다. 현재 경북이주노동자센터 운영위원장, 경상북도장애인복지위원회 위원, 경북노동인권센터장을 맡고 있다./배은정 작가

2023-12-04

기자에서 프로듀서로… 한국 현대사 현장에 그가 있었다

어떤 이의 삶은 살아온 자체로 역사가 된다. 지나간 세월을 겪어낸 다양한 분야의 원로들이 그렇다. 김수웅 선생이 포항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 것은 1959년이다. 국산 라디오가 처음으로 생산된 바로 그 해이다. 라디오가 영화와 더불어 대중문화의 꽃이던 시절이다. 당시 서울의 라디오 보급률은 60%가 넘었지만, 포항 지역에서 라디오 수상기가 있는 집은 전체 가구의 10%도 되지 않았다. 전국의 라디오 보급률인 20%의 절반 수준이었다. 그런 시절이었으니 방송국은 번듯한 건물이 아닌 이동 방송차였다. 라디오 없는 집이 수두룩하니 포항초등학교 운동장이나 영일군청, 관공서의 전봇대와 가로수에 앰프를 설치해서 방송을 나눠 들었다고. 지금에야 방송이 넘치는 시대지만 그때 방송을 나눠 들으며 같이 웃고 울던 사람들을 떠올리면 왠지 마음이 따뜻해진다. KBS포항방송국 기자와 PD를 거쳐 KBS대구총국장을 지내며 평생을 방송계에서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현장을 국민들에게 알려온 김수웅 선생의 지나온 삶을 들어봤다. -방송과 인연을 맺은 지 반세기가 지났다.△대학을 졸업하고 포항 이동방송국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 것은 1959년 7월이었다. 그때 포항국은 포항중앙초등학교 옆인 포항시 북구 동빈로 1가 84번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해병부대에서 제공한 야전용 퀀셋(Quonset: 벽과 지붕이 반원형으로 연이어진 조립식 막사) 사무실과 이동방송차가 방송국이었다. 이때 출력은 250W로 포항시와 영일군 일대가 가청 지역이었다. 퀀셋 옆에 보이는 유리창 안에 아나운서 부스가 있었고, 이동방송차의 조정실 엔지니어와 서로 보면서 방송을 진행할 수 있었다. -기자라는 직업이 생소할 때가 아닌가.△그때는 중앙일간지의 지방판이 없었던 시절이라, 라디오로 전하는 하루 3번의 지방 소식에 지역민들의 관심이 높았다. 출입처 관계자들과 지역 신문사 선배 기자들도 호의적이어서 올챙이 기자 노릇이 어렵지는 않았던 것 같다.-당시 자체 제작한 방송은.△하루 1시간 30분 전후의 자체 방송을 했다. 일일 3회의 지방 소식과 정오 서울 뉴스에 이어 방송된 대중가요프로그램 ‘노래꽃다발’의 인기가 대단했다. 음향기기와 음반을 판매하는 전파사에서 점포 밖에 스피커를 내놓고 중계할 정도였다.또한 주 1회 해병 장병을 위한 ‘해병의 밤’이란 30분짜리 프로그램도 방송했다. 앞부분 5분간의 군사 소식을 담당한 해병 포항기지사령부 정훈참모부의 김남호 중위는 전역 후 동아방송의 아나운서가 되었다. -기자 시절의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1960년 3월 초의 일이다. 최인규 내무부장관(4·19 이후 체포)이 3월 15일에 실시되는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포항을 방문했다. 자유당 후보인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부통령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출입처이던 포항지방해무청장실에서 장관을 인터뷰했다. 제대로 된 휴대용 녹음기가 없었던 시절이라 ‘암펙스 601(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까지 암펙스 사에서 생산된 휴대용 테이프 녹음기)’로 엔지니어까지 동원해야 녹음할 수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난다.그리고 다음 달에 공보실 방송관리과 주관으로 실시된 제1회 방송기자 강습에 참여했다. 전국의 각 지역국에서 한 명씩, 남산에 있는 서울중앙방송국에 모였다. 수료일을 하루 앞두고 4·19혁명이 일어났고 예정되었던 강의와 수료식이 취소되었다. 근무지로 돌아와 열흘 정도 후에 우송된 수료증은 마산방송국의 선배 것과 뒤바뀌어 있었다. 나중에 돌려받기는 했지만 4·19 직후 어수선한 시대 상황의 웃지 못할 해프닝이다.-기자를 하다 PD가 된 계기는.△군대에 가면서 촉탁직으로 일하던 기자를 그만두었다. 비록 짧은 10개월의 방송기자 생활이었지만 평생을 방송인으로 살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됐다. 내가 군 복무하던 1961년에 포항방송국은 이동방송국에서 정식 지방방송국으로 승격했다. 포항방송국에 PD로 복귀했을 때는 청사가 덕산동으로 이전되어 있었다(이동방송국으로 시작한 포항 KBS는 이후 덕수동, 해도동, 상도동 시절을 거쳤다). 자체 방송 시간은 2시간 30분 정도로, 뉴스와 아나운서가 제작하는 일부 프로그램을 제외하고 모두 내가 담당했다. PD가 적성에 맞았든지 신나게 일했던 것 같다.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해병제1상륙사단 연병장에서 열린 파월 청룡부대 결단식도 포항국에서 담당했다. 월남전에 파병된 청룡부대의 훈련하는 모습을 취재해 부산항에서 베트남으로 출항하는 날 전국으로 방송했다. 당시에는 녹음테이프를 제작해 우송했다. -포항은 특히나 해병대와 인연이 깊지 않나.△해병대는 1958년 해병포항기지 사령부가 정식 발족했고, 그해 10월 KBS포항이 이동방송차로 첫 전파를 쏘아 올렸다. 포항에 터를 잡은 시기가 비슷하다는 인연이 있다.1968년에 해병제1상륙사단 창설 13주년을 맞아 ‘우리의 해병’ PD였던 나는 사단장의 감사장을 받았다. 포항방송국 개국 이래 방송해 온 ‘해병의 시간’ 프로그램이 장병들의 사기진작은 물론 포항시민과 장병 간의 유대 강화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고 평가받았다.-포항에서 근무하며 기억에 남는 제작 프로그램이 있다면.△종합제철이 들어서기 전, 대송면에 밍크 키우는 농장이 있었는데 규모가 꽤 컸다. 전국적으로도 보기 드문 농장이라 15분짜리 탐방프로 ‘밍크농장’을 제작했다. 공보부 방송관리국에서 주관하는 지역순회방송 합평회에서 우수상을 받아 이후 서울에 진출할 때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또 1969년 봄 개편 때, 아침 시간대에 5분짜리 만평프로그램 ‘라디오 공원’을 신설했다. 대구방송국 성우였던 김삼일 씨(전 포항시립극단 상임연출)가 만평에 어울리는 구연을 해주어 좋은 평가를 받았다.그리고 일요일 아침 시간대에 나간 ‘일요방담’이란 프로그램에서 PD인 내가 직접 마이크를 잡고 지역 인사 서너 명과 세계적인 화젯거리와 지역의 관심거리를 방송했다.그 시절 서울에 진출하여 전국 대상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싶은 꿈이 있었는데, 뜻밖에도 명동에 있는 중앙국립극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는 문공부가 인사를 담당해서 가능했다.-중앙국립극장에서는 어떤 업무를 담당했나.△관리업무 전반에 관한 일이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웃지 못할 일화도 한둘이 아니다.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서다. 극단 산하(山河)의 ‘왕교수의 직업(차범석 작)’이 끝난 다음 날 출근해 보니 ‘만원사례’라고 도장이 찍힌 봉투에 5백 원짜리 지폐가 들어있었다. 입장권이 매진되면 직원 모두에게 사례하는 관례라고 했다. 8개월 반의 짧은 기간이지만 또 다른 예술의 세계를 경험하는 귀중한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지나왔다.△70년대 초반 중앙방송국 라디오부로 발령을 받아 드라마를 제외한 거의 모든 장르의 프로그램을 두루 섭렵했다. 1974년 육영수 여사 서거 당시, 광복절 기념식을 중계하면서 총성이 울리는 충격적인 현장을 목격했다.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방송인의 본분에 임했고 관련 중계와 특집방송 운행에 노력한 공로로 사장 표창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12·12사태 당시 방송국에 군인들이 들이닥칠 정도로 격동의 시대를 몸으로 겪었다. 1980년에는 TV 시대에 대응하는 라디오의 활로를 찾기 위해 노력했고 일찍이 없었던 큰 변혁이 이뤄냈다. 88올림픽 때는 방송조정관으로 해외 중계진을 지원했으며, 그 해 말 올림픽 기장(문화장)을 받았다.-30년 넘게 방송 생활을 하면서 힘들었던 순간을 꼽는다면.△90년대 초 ‘R제작1국 부국장 겸 1R제작부장, R제작1국장 직무대리’라는 긴 이름의 발령으로 제작부서를 관장했다. 방송역사상 초유의 방송 파업사태가 발생했을 때였다. 방송 민주화를 외치며 촉발된 파업은 36일간이나 이어졌고, 아끼는 후배들이 구속되어 고초를 겪었다. 간부들 중심으로 시간 메우기식 방송할 수밖에 없었던 그때가 31년 방송 생활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90년대 초반에 대구 지역 책임자가 되어 포항 지역까지 관할했다.△1992년 3월에 대구방송총국 총국장으로 발령받았다. 방송은 물론, 행정, 기술, 관할 지역국까지 감독해야 하는 자리였다. PD 출신 총국장으로서 가장 큰 보람은 일선 PD와 머리를 맞대고 페놀 사건 이후 낙동강의 환경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제작을 진두지휘한 일이었다. 5부작인 데다 편당 50분이나 되는 대형 프로그램이라 제작비와 장비 동원, 인력 운영에도 어려움이 컸던 만큼 성취감도 있었다.그리고 독도를 처음으로 밟던 순간도 잊을 수 없다. 이판석 경북지사의 초청으로 울릉중계소를 거쳐 독도에 갔는데, 선착장 시설이 미비해 접안에서 상륙까지 쉽지 않았다. 독도 언덕에서 검푸른 빛깔의 동해를 바라보며 또다시 독도 흙을 밟을 기회가 있을까 싶었는데, 그 후 독도를 가보지 못했다.-은퇴 후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나.△KBS 사우회에 독서토론위원회를 조직해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최근에 읽은 책으로 ‘갈대속의 영원’이 기억에 남는다. 알렉산더 대왕이 ‘일리아스’를 전쟁터에서도 지니고 다니면서 펼쳐봤다는 대목을 감명 깊게 읽었다.-지나온 날들을 돌아본 소회가 어떤가.△지난날의 자료들을 찾아보니 너무도 부족했다. 그나마 남아있는 수첩들을 펼쳐보니 왜 그렇게 간단히 기록했는지, 나도 모를 암호 같은 구절도 많았다. 관계자료를 철저하게 보관하지 못해 여러 뜻 있는 일들을 자세하게 남기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방송 현업에서 물러난 지 어언 30년이 되어 간다. 이제는 방송을 편안히 보고 즐기며 들을 수 있으련만 아직도 그렇지 못한 것은 은퇴방송인의 숙명이 아닌가 생각한다. /배은정 작가김수웅 전 KBS대구총국장은1936년에 포항 학산동(현 중앙동)에서 태어나 포항초등학교, 포항중·고등학교를 거쳐 영남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포항이동방송국에서 기자와 PD로 활동하다가 한국방송공사 PD, 포항방송국 방송과장과 대구방송총국 총국장, 한국방송공사 방송연수원 교수 등을 지냈다. 은퇴 후 KBS 사우회장을 지냈고 현재는 사우회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3-11-20

“드러나지 않은 포항의 다양한 이야기 더욱 발굴되길”

예술가는 돈을 이야기하고 부자는 예술을 이야기한다는 말이 있다. 진정한 예술은 돈을 좇지 않는다지만 가난한 예술가들은 돈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1980년대부터 포항에서 극단을 이끌어 온 이한엽 대표는 인터뷰 도중 여러 차례 예술이 돈을 좇는 세태를 비판했다. 가난이 숙명인 연극판. 그것도 변방의 민간 극단은 걸핏하면 물이 새고, 곰팡내 나는 지하 소극장을 전전해야 했다. 낮에는 직장인으로 밤에는 연극인으로 살아가며 사비를 털어 넣어도 적자를 면치 못한다.그러면서도 돈에 대한 꼬장꼬장한 태도의 근저에는 하고 싶은 연극을 마음대로 하겠다는 단단한 신념이 있었다.포항연극협회의 마카다연극축전의 공연작 ‘그대는 봄’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던 포항아트센터(불종로 73 석영빌딩 5층)에서 ‘극단 가인(佳人)’의 이한엽 대표를 만났다. -포항 시민들 가운데 포항아트센터를 아는 이가 얼마나 될지 싶은데도 평일 저녁의 공연이 만석이었다.△연극 ‘그대는 봄’은 한 시골 마을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온 70대 세 할머니의 이야기이다. 홀로 계신 어르신들의 외로운 삶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유쾌한 연기로 풀어내니 관객들의 반응이 좋았다. 두세 차례 관람 온 관객도 있고 지인을 이끌고 다시 찾아 준 관객도 있었다. 관람석이 80석 규모인데 엿새 동안 300∼400명의 관객이 온 것 같다.-포항연극협회의 마카다연극축전으로 열렸는데 어떤 행사인가.△‘마카’는 경상도 말로 ‘모두’라는 의미이다. 마카다연극축전은 말 그대로 모두 다 함께하는 연극 잔치라는 뜻이다. 포항연극협회원들이 소속 극단을 초월해 함께 만들어 가는 마카다연극축전은 올해로 11회째다. 연극은 다른 예술 장르와 다르게 극단 단위로 움직이니 함께 무대에 설 기회가 없다. 1년에 한 작품만이라도 해보자는 취지로 기획되었다.-포항에서 활동하는 극단은 얼마나 되나.△활동이 뜸한 극단도 있어 명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포항시립극단과 극단 가인, 포스코 내 예맥, 은하, 라인극회 등이 있다. 확실한 것은 민간 극단이 점점 줄고 있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돈이 안 되어서다. 우리 극단에서도 서울로 간 젊은 배우들이 꽤 되는데 빛을 발하기는 어렵더라. 그래서 젊은 친구들에게 연극을 하려거든 일을 가지라고 권한다. 청춘을 연극에 받치지 말라고 말한다. 내가 아는 한 연극은 빵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요즘은 지원도 다양해지지 않았나.△관(官)은 배부르게 지원해 주지 않는다. 지원을 구걸하러 다니다가 상처도 받는다. 지원하되 간섭을 말아야 하는데 현실은 안 그렇다. 물론 단돈 얼마라도 가난한 극단에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지원의 대가로 올라야 할 무대가 많은데, 연극은 준비 기간이 길고 인원이 많아서 뚝딱 안 된다. 배우들이 행사장에 나가서 달고나를 만든 적도 있다.- 시간을 좀 더 앞으로 되돌려서 연극에 입문하게 된 시절의 이야기를 해달라.△강화도가 고향이다. 중학교 3학년 때 입시에 휘둘리는 현실이 싫어 특차 전형으로 포항의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첫 무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 예술제였다. 4, 50명이 모여 6개월 정도 연습했다. 방학에 고향도 안 가고 연습에 매진했는데 끝나니 허무하더라. 공연을 마치고 기숙사까지 걸으면서 우거진 나무 사이로 하늘을 보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 나중에는 연극을 질리도록 해봐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그 경험이 내 인생을 바꾸는 촉매가 됐다. 이후 포스코 사내 연극동호회인 ‘예맥’에서 활동하다가 1988년에 극단을 창단했다.-극단 가인의 탄생인가.△당시 극단명은 ‘늘푸른공간’이었다. 영흥초등학교 건너에 ‘연극무대 늘푸른공간’이 첫 소극장이었다. 창고로 쓰던 누추한 무허가 건물이었다. 단원들이 피 끓는 동지애로 천3백여만 원을 모아 보증금을 마련하고 부족한 돈은 몸으로 때웠다. 배우들이 등짐을 져서 만든 소극장이다. 이후로는 환호동과 상도동의 지하 공간을 전전했다. ‘극단 가인’으로 이름을 바꾼 건 상도동 시절이다. 한국전력공사 대구본부 포항지사 건너 건물 지하로 들어가면서 극단 이름을 ‘가인’으로 소극장 이름은 ‘삼통아트홀’로 바꿨다.-‘삼통’은 어떤 의미인가.△ 중학생 때부터 사진을 했는데, 카메라를 둘러메고 기계나 신광 등지로 돌아다니다 어르신에게 길을 물으면 “이녁은 어디서 왔능교?”라고 되물었다. ‘이녁’은 젊은 친구를 이른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그러면서 “삼통 가라”고 알려줬는데 “곧장 가라”는 의미였다. 극장 이름에 곧장 가자는 의미를 담았다.세상일이 얄궂은 것이, 그즈음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워낙 이슈가 커서 그랬는지, 개관 기념 공연 팸플릿에 ‘삼통아트홀’이 인쇄소의 실수로 ‘삼풍아트홀’로 찍혀 나왔다. 삼통아트홀에서 공연 준비를 하던 중에 IMF가 왔다. 극장은 물론 집에도 빨간딱지가 붙었다. 삼풍이 부정을 태웠나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망했다.-어떻게 다시 일어났나.△5년 만에 다시 모였는데 한 명도 흩어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2004년 재기작으로 조창인 원작의 ‘가시물고기’를 연출하면서 연기도 했다. 오랜만에 무대에 오르니 눈물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더라. 배역에 심취한 이유도 있겠지만 그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면서 울컥해서가 아닐까.-포항아트센터는 육거리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으로 안다.△육거리 인근에서 10여 년 있었다. 처음에는 연극협회 전용 소극장으로 시작했다가 ‘극단 형영’과 ‘극단 가인’이 공동 운영했다. 그러다 7년 전에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우리 소극장은 물과 얼마나 얽히는지 걸핏하면 옥상에서 물이 새고 물난리를 겪었다.-‘극단 가인’의 단원은 몇 명인가.△20여 명인데 각자 밥벌이를 해야 하니 상시 가동은 불가능하다. 배우가 부족하니 하고 싶은 작품을 마음껏 못 한다. ‘그대는 봄’도 포항시립극단 배우들이 흔쾌히 승낙해 줘서 수월했다. 출연 배우 중 한 명이 아내인 김용화 배우이다. 극단 가인에서 연극을 시작해서 20여 년 전에 시립극단으로 갔다. 당시 결혼 전이었는데, 못 먹여 살려주겠으니 월급 받으면서 연극을 하라고 보내줬다. -부부연극인으로 사는 것은 어떤가.△아직은 낯 간지러워 안 되지만 예순이 넘으면 ‘늙은 부부 이야기’를 함께 연기하고 싶다. 7살 차이인 아내는 고교 3학년 때 극단에 들어왔다. 그땐 나와 눈도 못 마주치던 소녀가 아내가 된 것이다. 나는 예전 생각에 군림하려 들고 아내는 동등한 부부라고 주장하며 충돌이 잦았다. 아내가 시립극단으로 간 뒤로는 공립극단의 역할에 관한 견해차로 치열하게 부딪혔다. 작품은 뭔가 꼬집어줘야 하는데 관(官)에 편승하는 것처럼 보였다. 예술인은 예술이란 이름으로 양심을 표현하는 것인데 돈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싫었다.-지역에서 민간 극단으로 활동하면서 어려움이 많았겠다.△1980년대 지방에는 민간 소극장이 거의 없었다. 우리 소극장이 경북에서는 제1호이다. 단원들이 등짐을 져가며 만들었는데 살아남아야 하잖아.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것이 공연 유료화이다. 입장료 2천 원을 받고 한 명을 앉혀놓더라도 공연했다. 단 한 명도 없어 공연을 못 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연극은 공짜라는 인식을 바꿔야 했다. 문화예술 향유를 위해선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런 풍토를 만들지 않으면 문화예술의 씨가 마른다. 단돈 천 원이라도 내고 오는 관객과 초대권 손님은 인식이 다르다.-지역 소재를 무대화하는 작업에도 관심이 많다.△누구나 우리 주위의 이야기에 솔깃하다. 철강 도시라는 육중함에 짓눌려 포항의 다양한 이야기가 드러나지 않아 아쉽다. 지난 2017년에는 포항의 중심가를 흐르는 칠성천을 소재로 한 연극 ‘칠성천 오동낭구’를 선보였다. 칠성천변에서 일본군에 짓밟힌 어린 위안부의 한 맺힌 절규를 그렸다. 그리고 작년에 포항지역 스토리텔링 창작극 ‘효자동 이야기-효자칠성(孝子七星)’을 공연했다. 칠성강 건너 과부 어머니가 홀아비 만나러 가는 길에 아들이 다리를 놓아주는 이야기이다. 오는 12월 초는 학도병을 소재로 한 ‘탑산의 삽화(揷話)’를 준비 중이다. 탑산에는 한국전쟁 당시 포항여중 전투에서 격렬하게 방어전을 치른 학도병 희생자를 기리는 충혼탑과 기념관이 있다. 포항의 이야기들이 더 발굴되길 바란다. 앞으로도 지역의 이야기를 무대화해서 시민들에게 돌려주는 작업을 계속할 계획이다.-앞으로 무대에 올리고 싶은 작품은.△개인적으로는 사투리 연극제를 해보고 싶다. 동일한 작품을 각 지역 사투리로 번안해서 공연하거나, 전국 사투리로 만든 작품을 한군데 모아서 올리는 방식이다. 지역 언어는 한번 소멸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배우들에게 몸에 밴 사투리는 극복의 대상이지만 사투리가 소멸 위기에 처한 지금은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다. 지역민의 정서가 녹아있는 사투리의 문화적 가치에 관심이 크다.이한엽 대표는배우이자 연출가다. 1988년 ‘극단 가인’을 창단하고 경북 제1호 소극장을 만들었다. 한국연극협회 포항지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극단 가인’ 대표이자 포항아트센터 대표이다. 지금까지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 ‘옥수동에 서면 압구정동이 보인다’, ‘마요네즈’,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 ‘황소 지붕 위로 올리기’, ‘아버지의 가수’, ‘영일만 친구’, ‘칠성천 오동낭구’, ‘효자동 이야기-효자칠성(孝子七星)’ 등을 무대에 올렸다./배은정 작가

2023-11-06

“잠수복 입은 해녀, 흑백사진으로 돋보이게 하고 싶었죠”

만나게 될 사람은 언젠가는 만나게 된다. 김수정 사진가와는 20년 가까이 인사를 나누던 동네 이웃이었다. 특유의 활달한 붙임성으로 해녀들과 작업한다고 했을 때 만해도 이토록 진심인지 몰랐다. 그 후로는 다양한 곳에서 김수정 석 자를 듣는 일이 많아졌다.그리고 지난 봄, 포항 북구 방석리 바닷가의 질펀한 굿판에서 김 작가를 만났다. 밤을 새우는 동해안별신굿을 렌즈에 담으면서도 고단한 기색은 없었다. 되려 사라져가는 것을 기록하는 사명감으로 하나라도 놓칠까 긴장을 늦추지 않는 모습이었다.도대체 무엇이 사진가를 드센 바다와 떠들썩한 굿판으로 부르는 것일까. ‘사진의 섬 송도’ 우수작가로 선정되어 전시를 열고 있는 김수정 동해해녀사진연구소장을 ‘갤러리포항’에서 만났다. -해녀가 사용하는 어구에 초점을 맞춘 전시 포스터가 인상적이다.△해녀들이 허리에 착용하는 ‘나바리’이다. 허리띠에 납을 연결한 것으로 수심에 따라 무게를 조절한다. 수심이 얕은 곳은 가볍게 착용하고 깊은 곳은 무겁게 착용한다. 뭘 잡느냐에 따라 나바리의 무게가 다르다. 해삼을 작업할 때보다 말똥성게 작업할 때 상대적으로 가볍게 한다. 나바리는 생각보다 무겁다. 연로한 여성이 메기는 더욱 그렇다. 무거울수록 잠수하기 수월하지만 물 위로 올라오기 힘들다. 물질에 지쳐 기운이 빠지면 위험에 빠질 수 있는 만큼 무게를 신중하게 정해야 한다. 물 위로 올라가는 일은 해녀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흑백 사진만으로 이번 전시를 구성한 이유가 궁금하다.△흑백의 단순함으로 잠수복을 입은 해녀를 돋보이게 하고 싶었다. 제복 판타지라고 해야 하나. 평상시는 평범한 촌로지만 잠수복으로 갈아입으면 그렇게 멋있게 보이더라. 해녀들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 보면 모질고 기구하기 짝이 없지만 해녀들에게는 강인한 성정이 있다. 운명처럼 또는 곤궁한 삶이 밀어내어 어쩔 수 없이 물질을 하게 됐더라도, 해녀들은 하나같이 바다가 고요하고 편안하다고 말한다. 물속이 예쁘다고 하더라. 맨몸으로 드센 물살을 가르는 해녀의 강인함을 색을 섞지 않고 전하고 싶었다. -해녀들을 렌즈에 담은 지 얼마나 되나.△부친 고향이 호미곶이고 할머니와 고모는 해녀였다. 그 모습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만 하던 차에, 2019년 포항문화재단의 권역별 사업 참여로 해녀들과 안면을 튼 뒤로 귀찮다고 할 정도로 쫓아다녔다. 당시 자료를 찾아보니 동해안 해녀에 관해서는 전무했다. 기록이 없다는 건 이들의 삶이 인정받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다행히 최근 해녀 문화에 관심이 높아졌다. 지난달 구룡포와 호미곶을 주축으로 경주, 영덕까지 아울러 경북해녀협회가 출범했다. 이들과 제주해녀축제를 참석해 카메라에 담았다.-사진가와 해녀들의 친근함이 사진에 배어 나온다.△지금에야 자연스러운 표정이 나오지만, 처음에는 뒤통수밖에 못 찍었다. 해녀들과 편안해지면서 서두르지 않고 구도를 잡거나 기법을 발휘할 여유가 생겼다. ‘사진쟁이’ 왔다면서 싫은 티를 팍팍 내던 해녀의 가족도 있었다. “내 마누라 찍지 말라”며 카메라를 박살 내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얼마나 무섭던지 벌벌 떨면서 쫓겨났는데 그대로 물러서면 안 되겠더라. 다음날 다시 가서 카메라값 천만 원이 있느냐고 따졌다. 그 뒤로 만날 때마다 인사를 드리니 지금은 포기했는지 받아주신다. 아내에게 험한 일을 시키는 것에 자격지심이 있었던 것 같다. 해녀들이 사진을 남기지 않으려는 이유는 천한 직업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사돈이나 친척들에게 험한 일 하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은 거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해녀를 대하는 사회적 인식이 변하고 있다.-촬영 현장이 늘 카메라를 반기지는 않을 텐데, 노하우가 있나.△작업 현장에서 스텝을 자처한다. 누가 나바리를 안 들고 왔다거나, ‘꼬께이(가기)’에 새 줄이 필요하다면 신속하게 나선다. 바닷물이 뚝뚝 떨어지는 해녀를 태우려고 뒷좌석에 대형 비닐을 구비해 놓았다. 미역 수레를 끌고 가다가 내가 보이면 실어달라는 분도 계신다. 흔쾌히 옮겨드리면 그냥은 또 안 보내주신다. 두둑이 배를 채우고 미역까지 얻어 온다.-듣자 하니 “해녀 집의 수저 개수까지 꿰고 있다”던데.△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하다. 해녀들도 밥으로 정을 나눈다. 점심쯤 되면 밥 먹고 가라고 전화가 걸려 온다. 힘들게 잡은 전복이나 소라, 미역도 나눠준다. 촬영하다 피곤하면 한 시간씩 낮잠을 자다 나오거나, 급하면 화장실을 내어주는 해녀도 있다. 사람 사는 정이 그렇다. 나라고 빈손으로 갈 수 있나. 수박이나 생수, 바나나, 에너지바를 사 들고 간다. 언제 만날지 모르니 늘 음료를 싣고 다닌다.-몇 년을 찍어도 더 찍을 것이 남아있나.△해녀들은 기량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뉜다. 상군은 바닷일을 전업으로 하지만 중, 하군은 식당이나 농사, 해산물이나 그물을 다듬는 허드렛일도 한다. 해녀들의 부지런함은 그냥 부지런한 정도가 아니다. 한창 물질을 할 때는 며칠 따라다니다가 몸살이 날 정도였다. 해녀들은 물질을 안 하면 밭일하고, 밭일이 없으면 소일거리를 찾아서라도 쉬지 않는다. 국숫집 하는 해녀 언니네 놀러 가보면 장사를 하면서 어느 날은 오징어를 손질하고 다른 날은 성게를 다듬는다. 그러면 그걸 촬영한다. 그러니 갈 때마다 새롭다.-해녀 하면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제주 해녀를 먼저 떠올린다. 피사체로서 제주 해녀와 동해안 해녀의 차이가 있나.△제주는 배를 타고 들어가서 작업을 한다. 반면 동해는 해녀가 걸어 들어가서 작업하기 때문에 연안에서 촬영이 가능하다. 바닷속 지형이 다르니 작업 여건은 물론 수확물도 다르다.(올해 동해안은 성게와 미역 수확량이 반으로 줄었고 문어도 시원찮다.) 제주 해녀들이 유네스코에 등재된 것은 공동체 문화이다. 육지 해녀들 또한 그들만의 공동체 문화를 가지고 있고 조명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사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예술이라고 한다. 해녀를 통해 무엇을 드러내고 싶은가.△해녀의 강인한 생명력과 끈기를 존경한다. 드센 바다에도 끄떡없는 해녀들은 절대로 꺾이지 않는다. 선주이던 남편의 억 소리 나는 빚을 물질로 갚더라. 해녀들은 가족을 먹여 살리고 마을을 살렸다. 이런 분들을 기억하지 않는 것에 화가 날 정도다. 해녀 사회도 고령화가 진행된다. 60대는 젊은 축에 들어간다. 70대 초반이 최고로 활발하고 수확량이 좋다. 여든이 넘으면 보통 은퇴하지만 일을 놓지 못하는 분도 있다. 해녀들이 왕성하게 활동할 때 최대한 기록해 두고 싶다. 고된 삶을 지나온 이들의 강인함에 집중해서 말이다.-동해안별신굿도 관심을 갖고 기록하는 것으로 안다.△매 순간이 위험인 바다에서 해녀들은 민간신앙을 신봉한다. 날이 궂은 날은 궂어서 걱정이고, 운 좋은 날이 계속되어도 불안하다. 물질은 욕심낼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자칫하다가는 사람의 숨이 아닌 물의 숨 ‘물숨’을 만난다. 제주 출신의 80대 해녀는 1년에 한 번 용왕제를 지낸다. 바닷가에서 쌀과 과일을 정성들여 차리고 두 손을 모아 “용왕님 덕분에 살았다”고 빈다. 해녀들은 오래전부터 액을 막고 가정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무속에 의존했다. 코로나 사태로 미뤄졌던 굿판이 지난해부터 열리기 시작했다. 작년 구룡포 풍어제를 시작으로 영덕 금진리와 노물리, 포항 방석리와 영암 3리 등을 촬영했다. 굿판에는 낯설고 신기한 장면이 많다. 한번은 깃대를 든 아주머니가 심하게 흔들려 유심히 봤더니 깃대가 흔들리는 것이었다. 마을마다 기본 굿에 더해 색다른 굿이 있는 것도 이색적이다.-사진은 카메라가 찍는다지만 셔터를 누르는 사진가의 심성도 들어가게 마련이다.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고 싶나.△해녀들이 옷을 갈아입는 컨테이너가 있다. 작업을 기다리면서 몸도 지지고 뒹굴며 쉬는 곳이다. 해녀들은 청력이 안 좋아서 고함치는 수준으로 대화한다. 컨테이너가 윙윙 울릴 정도이다. 그 안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찍고 싶은데 아직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200여 명의 해녀 프로필 사진을 촬영했다. 시간 날 때마다 경북 동해안 해녀들을 모두 만날 계획이다. 카메라를 메고 사람을 만나는 일이 즐겁다. 해녀는 평생을 같이하고픈 피사체이다.김수정 동해해녀사진연구소장은대구대학교 디자인대학원에서 사진영상을 전공했다. 꾸미는 것보다 자연스러움을 선호하고, 역사성과 사회성을 가진 대상에 관심이 간다. 성냥공장과 한지 공장, 코발트 광산, 호스피스 환자 등을 렌즈에 담다가 2019년부터 해녀를 주로 촬영한다. 개최한 전시로는 ‘꽃·사진·포슬린(포항중앙아트홀, 2015)’, ‘빛의 그림자(부산리빈갤러리, 2018)’, ‘호랑이 꼬리 해녀 이야기(꿈틀갤러리·새천년기념관·아라예술촌)’, ‘동해, 567km(미디어갤러리, 2021)’, ‘story in 구만리(갤러리포항, 2022)’, ‘해녀(부산리빈갤러리, 2023)’ 등 10여 차례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이 있다. 동해안 해녀 문화를 다룬 저서 ‘숨과 숨사이 해녀가 산다’, ‘포항의 해양문화’, ‘바다가 보물이라’ 등에 사진작가로 참여했다./배은정 작가

2023-10-23

“수개월에서 수년씩, 한평생 발굴현장을 누볐죠”

한 분야에서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과의 만남은 설레는 일이다. 남시진 박사는 불국사와 천마총, 황남대총과 황룡사, 분황사, 감은사 등 고고학사의 굵직굵직한 현장마다 함께 했다. 국내 유적 발굴에서 실측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에 처음으로 측량과 실측을 담당하고 도면을 작성했다. 대한민국 발굴사의 시작을 알리는 천마총 발굴 조사원 중 유일한 경주 사람이다. 한국 고고학사의 오래된 사진 속에서 남시진 박사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불국사 복원을 위한 설계실, 천마총에서 금관을 수습하는 역사적인 순간, 분황사 발굴 조사를 위한 시삽식에도 그가 있다. 한국 고고학 최초의 실측가로 불리는 남시진 박사를 형산강이 내려다보이는 경주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한국 고고학사에 남을 굵직한 발굴에 다수 참여했다.△경주에서 이루어진 발굴은 거의 다 참여했다. 1969년 불국사 복원 정비를 위한 발굴이 그 시작이다. 65일간 발굴한 자료를 가지고 현지 사무실에서 바로 설계에 들어갔다. 현지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발굴조사부터 설계, 시공, 감독까지 체계를 갖추어서 추진한 것은 국내 문화유산 복원에서 불국사가 유일하다. 무설전과 비로전, 관음전, 대웅전 회랑, 극락전 회랑이 그때 복원됐다. 불국사 복원 공사 준공식이 열리기도 전에 바로 천마총 발굴에 투입됐다. 원래는 황남대총부터 발굴하려고 했지만, 한번도 도굴이 되지 않은 고분의 조사 경험이 없어 부담을 느낀 김정기 조사단장이 천마총부터 시작해 보자고 건의한 것이다.-어떤 계기로 발굴에 참여하게 됐나.△실업학교 건축과를 다니던 중에 ‘실습’으로 나갔다. 신문사 다니는 친척의 소개로 불국사 복원 현장을 소개 받았다. 학교 공부는 콘크리트 건축물 위주여서 목조가 새롭게 다가왔다. 유적지에서 도면을 그리는 일도 흥미로웠다. 발굴팀에서도 쓸만한 녀석이라고 여겨서 데리고 다녔다.-한국 고고학 최초의 실측가로 불린다. 일반적으로 발굴 현장은 고고학 전공자들이 많지 않은가.△실측이란 세워진 건물에서 부재 하나하나를 측정하여 도면을 그리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설계 도면을 작성해서 집을 짓지만, 실측은 반대로 지어진 건물을 도면화하는 작업이다. 절터를 조사하려면 건축학적 지식이 있어야 한다. 국내 발굴 현장의 책임조사원은 고고학자가 대부분이지만 일본에는 건축학 전공자도 많다. 7, 80년대는 실측가가 없어서 내가 각 대학에 강의도 다녔다. 지금은 다수의 고고학과에서 실측을 가르친다. -발굴 50주년을 맞은 천마총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가 독자적으로 발굴한 최초의 신라 고분으로 기록된다. 반세기 전에는 무덤을 파헤치는 일에 거부감이 컸다고.△발굴을 하려면 고분 정수리에 말뚝을 박아 기준점을 정해야 한다. 사과를 네 쪽으로 자르듯이, 고분을 사 등분 해서 시차를 두고 무덤을 파는 방식이다. 말뚝을 박으러 올라간 인부들이 눈치만 살피더라. 성미 급한 내가 해머로 말뚝을 몇 차례 내리치니까 그제야 인부들이 달려들어 도왔다. 그때는 이유를 몰랐는데 시간이 흘러 당시 현장에 있던 기자와 선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다 다들 꺼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천마총 발굴이 경주 사람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한 일이었나.△신라 고분은 경주 사람들에게 신앙과 같은 곳이다. 천마총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1973년은 지독한 가뭄으로 모내기가 힘들 정도였다. 사람들은 우리가 무덤을 파서 비가 안 온다고 원망했다. 발굴터에 가건물을 짓고 숙직했는데 밤에 돌을 던지고 가는 취객도 있었다. 그러다가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천마총에서 금관을 들고나오는 순간 거짓말처럼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비가 쏟아진 것이다. 금관을 수습해 나오던 학예사가 그 자리에 상자를 두고 줄행랑을 쳤다. 나중에 들어보니 금은 전기가 잘 통하는 걸 알고 그랬다고 한다. 그날의 비는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도무지 불가해한 현상이다. 당시 발굴을 주도한 조사단 8명(김정기 조사단장, 김동현·지건길·박지명 조사원, 윤근일·최병현·남시진·소성옥 조사보조원) 가운데 나를 포함해 6명이 살아있으니 믿어주지. 혹여나 나 혼자서 그 이야기를 한다면 누가 믿어주겠나. -발굴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때라 어려움도 컸을 것 같다.△지금은 컨베이어벨트가 있지만 그때는 드럼통의 반을 잘라 만든 관으로 흙을 내려보냈다. 초보자라 항시 긴장된 상태여서 한여름에도 더운지 모르고 일했다. 특종을 위해 쌍심지를 켠 기자들과 각을 세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천마총 발굴조사는 국가적 관심 사업이라 중요사항을 일일이 청와대에 보고했다. 촬영한 필름을 통째로 고속버스에 실어 보내면 문화재관리국에서 전화로 내용을 받아적고 사진을 첨부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청와대 보고 전에 언론에 보도되는 걸 막으려 사투를 벌였다.-언론 취재 경쟁이 얼마나 뜨거웠나.△중앙의 각 신문사와 방송사의 문화부장들이 경주에 내려와 있었다. 언론사에서 헬기를 띄우면 넓은 천막을 쳐서 막았다. 발굴하고 나온 사람들의 신발에 묻은 흙을 보고 추측 기사가 나왔기 때문에 내부 작업용 신발을 따로 두었다. 취재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냐면, 기자가 인부의 집까지 따라가서 돈뭉치를 내놓으면 뭐가 나왔는지 한마디만 해달라고 집요하게 물었다더라. 그때 기자가 내놓은 돈이 15만 원이었다. 하루 일당이 700원이고, 80㎏ 쌀 한 가마니가 만 원 하던 때다. 인부가 이튿날 와서 그런 일이 있었다며 끝까지 함구했다고 전해주었다. 철저하게 관리해도 자꾸 특종이 터지니, 경주가 고향이고 친척이 언론사에 있는 나부터 의심받았다. 하루는 김정기 단장이 나를 단국대학교 발굴 현장으로 지원을 보냈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특종이 터지자, 의심에서 벗어났다. 범인을 종잡을 수 없게 되자 서로를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도대체 누가 범인이란 말인가.△당시에는 팩스나 메일이 없으니 보고하려면 유선으로 내용을 불러줬다. 우체국에 가야 시외전화를 걸 수 있던 시절이다. 경주우체국 수교환사가 모 신문사 기자 부인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특종을 잡을 욕심으로 교환사를 매수하는 언론사도 있었다고 들었다. 이후로는 어쩔 수 없이 울산과 포항우체국에 가기도 했다.-학생 신분으로 발굴지에 발을 디뎠다가 나중에는 책임조사원으로 현장을 누볐다.△불국사, 천마총에 이어 황남대총과 안압지 발굴 현장에 투입됐고 군에 입대해서도 휴가 때마다 발굴터를 찾아 용돈벌이했다. 제대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황룡사에 매달렸다. 1978년에 ‘경주고적발굴조사단(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전신)’에 건축직 5급(지금의 9급)으로 취직했다. 감은사지를 시작으로 분황사지, 월성해자, 월정교, 춘양교, 전랑지(신라시대 궁궐터로 추정), 명활산성, 문경 조령원터, 여수 선소(거북선 조선소) 등에서 책임조사원으로 일했다. 특히 감은사지 2차 발굴조사는 남다른 보람과 긍지로 남아있다.-감은사지 발굴조사에 보람이 남다른 이유는.△감은사지는 1959년 김정기 박사가 일본에서 돌아와 1차 발굴을 한 곳이다. 정확히 20년 뒤 문무왕 호국 유적지 조성을 위한 2차 발굴조사가 이뤄진 것이다. 발굴보고서를 작성하면서 1차 기록과 상이한 3곳을 발견했다. 먼저 사리함 옆의 원형 구멍이 찰주공일 가능성을 제시했고(1차 보고서는 습기를 모아주는 구멍으로 기술), 김정기 박사와의 열띤 토론 끝에 금당지 기단 갑석 모양을 수정했으며, 석탑의 석질이 응회암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발굴을 통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면 더 뜻깊겠다.△사찰은 주로 탑과 금당이 일직선에 배치된다. 그런데 분황사에는 금당인 보광전의 입구가 서쪽으로 향하여 전탑을 바라보고 있지 않아 특이했는데, 발굴조사로 궁금증이 풀렸다. 고구려의 1탑 3금당(一塔三金當, 사찰에서 탑을 중심으로 동·서·북쪽에 법당을 배치하는 방식) 양식을 수입해 신라화한 것이다. 고구려는 탑을 가운데 두고 3금당이 탑을 바라보지만, 분황사는 탑을 남쪽에 두고 3금당이 모두 남향하고 있다. 나는 그걸 신라식 ‘品(품)’자형 가람배치라고 이름 붙였다. -오랜 시간 공들여야 하는 작업이라 고되지는 않나.△1년 내내 발굴 조사가 이어지면 12월까지 야외에서 유구 실측을 하게 된다. 눈이 가물거리고 배가 출출해지는 오후가 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조사갱 속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4홉짜리로 시작하면 대병으로 두세 병을 비워야 끝이 났다. 주머니 사정이 다들 마찬가지라 10원짜리 라면땅이 안주였다. 분황사 서편에 술을 외상으로 주던 구멍가게가 있었다.-수개월에서 수년씩 이어지는 지난한 발굴 현장에서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면 얘기해달라.△발굴 현장에 사내 결혼이 유독 많았다. 유물 발굴을 잘 하면 사람 발굴도 잘 한다고, 발굴은 사람 발굴이 제일이라고 우리끼리 농담할 정도였다. 동료들끼리 끈끈한 전우애 같은 것이 생겨서 발굴이 끝나도 인연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다. 2차 감은사지 발굴조사 조사단장이던 조유전 박사가 보신탕을 좋아했는데, 발굴 조사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경주에 모여 보신탕 잔치를 벌였다. 감은사지 앞 대종천에서 은어 낚시도 많이 했다. 미끼 없이 낚싯대를 흔들어 낚은 은어를 초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평생을 몸담았던 공직에서 퇴임한 뒤에는 경주로 돌아와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을 열어 매진했다.△2000년도 본청인 대전에서 근무한 10년을 제외하면 평생을 경주에서 보냈다. 건축을 전공한 기술직이라 공무원 인생이 녹록지 않았다. 현장에 실습 나온 학생이 학예직으로 들어와 더 빨리 진급하더라.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50줄에 문화재학과에 들어가 학위를 받았다. 계림문화재연구원을 열어 문화재와 두 번째 인연을 시작하고 창림사 터와 천북 신당리 고분 등을 발굴하고 조사했다.-경주 유적발굴에 얽힌 생생한 이야기가 많아 한정된 지면이 아쉬울 뿐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평생을 몸 바쳐온 일에 자부심이 크다. 남들은 자식이 문화재 분야로 나간다면 말린다고 하지만 아들이 고고학을 한다고 했을 때 자랑스러웠다. 앞으로 남은 삶은 후배들과 시민들에게 내가 쌓아온 지식을 나눠주고 싶다. 문화재 정책에 대한 자문이나 문화재 인식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 남시진 계림문화재연구원 대표이사는1951년 경주 보문동에서 태어나서 계림초등학교까지 6킬로미터를 걸어 다녔다. 경주공고 재학중이던 1969년, 불국사 복원공사 발굴조사와 설계 작업을 시작으로 경주의 문화유산 발굴조사에 참여했다. 1978년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 입사했다. 만학도로 경주대 문화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11년에는 계림문화재연구원장으로 취임해 창림사터와 천북 신당리 고분 등을 발굴하고 조사했다. 작년 12월 원장 직을 후배에게 넘겨주고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의 생생한 지식을 신문 칼럼과 저서, 강의를 통해 나누고 있다./배은정 작가

2023-10-09

필묵 속 해학·풍자… “평생 단 한 점 작품 위해 붓 들죠”

그 옛날 문인화는 어지러운 세상살이에 정신을 맑게 하는 수양의 한 가지였다지만 오늘날엔 그저 예스러운 예술의 한 장르로 여겨진다. 시를 다루는 화가는 물론 시대와 소통하는 작품이 드물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심관(心觀) 이형수의 문인화는 탁월성을 발휘한다. 심관의 화폭에는 고된 일상이 질펀하게 펼쳐지는 현재와, 사상은 빛났으나 조명받지 못한 사람들이 담긴다. 역사 속 인물이나 사건에도 현재를 읽게하는 해학과 풍자가 있다. 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가 있어서 가능한 작업이다. 심관의 화론 또한 단순하고 일상적이다. ‘밥 먹듯이 하면 이루어진다’는 것. 그렇기에 ‘만사를 아는 것은 밥 한 그릇을 아는 것에 있다’던 해월 최시형은 선생의 오랜 공부 대상이다. 나이가 들면서 발 딛고 있는 지역의 문화예술 근원에 자연스레 눈이 떠졌다는 선생은 포항을 우리나라 근대사상의 시원지라고 말한다. 지역의 문화자원을 눈 밝게 발굴해 필묵으로 재해석하는 이형수 문인화가를 포항 북구 창포동에 위치한 선생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물 맑은 영덕 오십천변이 고향이라고.△영덕 오십천변 남석동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 노닐던 오십천의 맑은 물과 바람을 아직도 기억한다. 부친은 농산물검사소에 계셨고 집안에 여유가 있어 초등학생 때부터 형과 서울에서 공부했다. 영덕에서 서울까지 하루가 넘게 걸렸다. 직통 차편이 없어서 비포장도로를 버스로 3시간 넘게 달려 안동으로 갔다. 안동역에서 중앙선을 타고 꼬박 24시간 걸려야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연료가 석탄인 기차여서 코에서 시커먼 재가 묻어났다. 길이 멀다 보니 일 년에 두 번, 방학 때만 귀향했다.-그림에 눈을 뜬 계기가 있나.△부모와 떨어져 지내면서 사춘기를 심하게 겪었고 그림으로 풀어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이당 김은호(1892-1979) 화백에게 그림 한 쪼가리를 보냈고 문하생이 됐다. 이당 선생 옆에서 먹을 갈고 청소하고 공부를 하면서 1년을 보냈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 이당의 그림을 좋아해서 몇 점 올려보내달라고 해서 보내면 수표로 돌아왔던 기억이 남아있다.-당시에 어떤 그림을 배웠나.△이당에게 처음 받은 체본(體本)은 참새였다. 이당은 자세하고 세밀한 것이 특징인 북종화의 대가인데 당시 내 나이가 어려선지 시간이 지날수록 갑갑함이 생겼다. 남종화의 대가인 옥산 김옥진(1927-2017) 화백에게 가르침을 청하니, 이당이 워낙 대가다 보니 허락을 받고 오라더라. 그렇게 해서 옥산 선생에게 남종화를 배웠다. 지금까지도 세밀한 인물화는 북종화를 그리지만, 나머지는 생략하고 활달한 맛의 남종화를 즐긴다.-포항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옥산 선생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다 군대에 갔고, 부모님이 계시던 포항으로 내려와 정착하게 됐다. 이 작업실에서 30년째 붙박이로 있다.첫 개인전은 1979년 봄에 포항 도심의 ‘용 다실’에서 했다. 당시 포항 KBS 이동린 방송국장이 전시 서문을 써주었다. 경제성장과 함께 동양화가 대유행하던 시절이라 그림이 꽤 팔렸다. 울릉도에서 온 관람객이 그림값을 깎으려고 해서 젊은 치기에 팔지 않고 버린 적이 있다.-10여 회의 개인전 중 두 차례의 독일 전시가 눈에 띈다. 독일 관람객의 반응은 어땠나.△독일에 정착한 파독 간호사들을 많이 만났는데 눈물이 날 정도로 환대해 주었다. 고국의 향수가 묻어나선지 까치나 호랑이를 그린 빨랫방망이나 다듬잇방망이를 특히나 좋아했다. 독일 현지인은 사유나 철학이 담긴 작품에 관심을 보였고 특히 대나무 그림을 좋아했다. 나 또한 사군자 가운데 필력이 매력적인 난(蘭)과 함께 곧고 강직하면서 오랜 수련이 묻어나는 죽(竹)을 선호하는 편이라 반가웠다. -영덕의 인물 3인을 조명한 전시도 주목받았다.△호랑이 그림을 추적하다 보니 고향에도 이처럼 훌륭한 분이 있음을 깨달았다. 세계적인 여중군자 장계향은 사임당보다 더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네”를 지은 나옹선사와 대학자 목은 이색까지 3인을 그렸다. 세 명 모두 송천강이 배출한 위인이다. 상류로 가면 나옹선사가 태어난 곳이 있고 중간쯤에 장계향의 시댁인 충효당이 있으며 하류에서 목은이 탄생했다. 이토록 중요한 송천강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해 아쉽다.-포항에서 주목해 봐야 할 인문학적 자산은.△포항에 역사 문화자산이 부족하다고 말하는데 물신(物神)에 빠져 등한시되고 있을 뿐. 가진 것은 많은데 몰라보고 있다. 포항 역사의 대표적인 시원으로 5천 년 전 암각화를 들 수 있다.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러 곤륜산은 가지만 산자락의 귀중한 유적을 찾는 이는 드물다.그리고 한국 근대 사상을 일군 장소인 검등골이 있다. 신광면 마북리 검등골은 동학의 제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 화전을 일구면서 동학의 기본사상을 깨우친 곳이다. 화전의 흔적과 허물어진 담장, 항아리를 묻은 화장실터가 남아있다. 상수원 보호를 명목으로 길이 막혔지만, 번듯한 길을 내어 널리 알려야 할 곳이다.검등골이 한국 근대 사상의 시원지라면, 경제를 일으킨 정신은 ‘롬멜 하우스’에서 찾을 수 있다. 포항제철 건립 당시 건설본부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롬멜 장군의 야전사령부 같다고 붙여졌다.-19세기의 해월을 지금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19세기 후반의 조선은 관직을 사고팔 정도로 그야말로 어수선한 시대였다. 지금의 시대라고 뭐 그렇게 나아졌을까. 해월은 신광 마북에서 도를 깨치고 ‘만사를 아는 것은 밥 한 그릇을 아는 것에 있다’며 밥 한 그릇을 도에 비유해 밥의 우주성을 설파했다. 그 시절 ‘사람이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설파한 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고, 해월은 포항의 정신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법 하다.강원도는 해월이 체포된 곳에 ‘마지막 피체지(被逮地)’를 알리는 표지석을 세웠다. 글을 새긴 이는 무위당 장일순으로 김지하 시인으로 그 사상이 이어진다. 체포된 곳도 비석을 세워 기념하는데 포항은 도를 닦은 중요한 장소도 저렇게 내버려 두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다.-해월의 가족들도 화폭에 담고 있다.△해월이 쫓길 당시 외동딸인 최윤은 죄인의 자식이라고 해서 아전과 강제로 결혼했다. 최윤의 아들 정순철은 동요 ‘짝짜꿍’을 만든 작곡가이다. 동학의 3대 교주 손병희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방정환과 윤극영 등과 활동하다 6·25 때 납북됐다.-역사 속 인물을 문인화 언어로 현재화시키는 작업이 인상적이다.△하나 더 얘기하자면. 해월은 보따리 하나 짊어지고 골짝을 숨어 다니며 포교했기에 ‘최 보따리’라고 불렸다. 해월의 ‘보따리 철학’은 박이문 전 포스코 명예교수의 ‘둥지의 철학’과 닮았다. 박이문은 철학의 근간이 되는 존재 차원과 의미론적 차원에 대해 “두 개의 다른 존재가 아니라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존재 전체의 양면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둥지의 철학은 ‘인간은 하늘’이라는 해월의 보따리 철학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최근에 관심을 두고 화폭에 담은 인물은.△올해는 동해안 별신굿에 대한 글을 쓰고 김석출 옹을 그렸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전위 예술가 요세프 보이스가 세상을 떠나자 그 넋을 달래는 진혼굿판을 벌일 때 김석출과 김유선 만신 부부에게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백남준은 “굿은 자기 예술의 시원이자 뿌리”라고 말한 바 있다.-요즘은 어떤 작업을 하나.△수묵 인물화 한 점에 그 사람의 삶이 담겨있다는 생각으로 인물화를 그리다가 문득 내 얼굴을 들여다보게 됐고, 나의 삶을 돌아본다는 의미에서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다양한 표정의 나를 그리고 그날 공부한 글귀를 적는다. 강요배는 “며칠간의 공부와 고뇌만으로 거대한 노동 투쟁을 그려낼 수 없다”고 했다. 요즈음은 ‘평생일점’, 일생동안 좋은 그림 한 점 그리고 간다는 심정으로 붓을 들고 있다.이형수 문인화가는 1952년 영덕에서 태어나 동국대를 졸업했다. 현재 (사)한국서가협회 초대작가이며, 경북지회 초대 지회장과 수석 부이사장을 지냈다. 사군자를 소재로 한 ‘필묵의 즐거움(2007)’, 부처님 이야기를 담은 ‘먹빛이 마음빛이다(2008)’, 민화를 주제로 서울 인사동과 독일 베를린에서 선보였던 ‘까치는 호랑이의 외로움을 안다(2010)’,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2011)’, 100일 동안 편지 형식으로 쓴 ‘붓끝에서 피어나는 고향의 마음-심관 이형수의 수묵편지(2015)’, 영덕의 인물을 주제로 한 ‘영덕문향의 멋-심관 이형수의 수묵편지(2017)’와 ‘붓으로 그린 세월(2018)’, ‘죽도시장, 여명을 밝히는 사람들(2021)’ 등의 개인전을 열었다. 2015년부터 소셜미디어에 ‘손안의 수묵편지’를 띄우며 사람들과 소통한다./배은정 작가

2023-09-18

“기온·습도·강수량·바람… 24시간 하늘 관측하지요”

태풍 시 행동 요령으로 중요한 것은 날씨 정보를 청취하며 기상 상황을 지속해 파악하는 일이다. 최근 태풍이 북상할 때, 경북 동해안이 가청권인 라디오를 청취했다면 이 사람을 만났을 것이다. 채널을 불문하고 많게는 하루에도 서너 번씩 태풍의 이동 경로와 전망을 실시간으로 알려주며 피해 최소화를 당부한 포항기상관측소 김정희 소장이다. 기상 현장의 최전선에서 23년간 날씨 서비스를 제공해 온 기상 전문가이다.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된 기상 정보를 더 밀착해서 제공하기 위해 시간을 쪼개어 주민들과 소통한다. 지난 9월 1일 자로 대구지방기상청으로 자리를 옮겼기에 지금은 ‘전(前) 소장’이 된 그녀를 지난달 말, 송도 솔밭에 있는 포항기상관측소에서 만났다. -포항 날씨의 기준은 포항기상관측소가 위치한 송도라고 들었다.△흔히 방송에서 나오는 ‘포항의 날씨’는 관측소에서 나온 값이다. 이외에 호미곶과 구룡포, 기계, 죽장, 청하에 무인 기상관측 장비가 있다. 포항기상관측소는 1943년에 운영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기상관측사 중에서도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곳이다. 처음에는 두호동에 있다가 60년대 송도로 이전했다. 국내에 80년 기상관측 역사를 가진 곳은 많지 않다.-밖에서는 몰랐는데 들어와 보니 잔디밭이 상당히 드넓다.△대기 상층의 기상 상태를 관측하는 ‘고층기상관측’을 위해서다. 관측장비를 실은 풍선을 날리려면 부지가 넓어야 한다. 포항기상관측소는 지난 2004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세계기상기구(WMO)가 지정한 고층 기후관측소로 등록됐다. 고층관측소가 되려면 관측의 연속성, 관측의 정확성, 관측 횟수와 고도, 관측기록 등의 항목별 요구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포항기상관측소는 60여 년 동안 5천여만 회의 고층관측 기록을 가진 고층관측의 메카이다. -기상관측소에서의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나.△매시간 기온과 습도, 강수량, 바람 등 기상 상황을 관측해서 전문을 만든다. 이렇게 만든 자료는 실시간으로 모여 국내외 정보통신망으로 공유한다. 지상관측 외에도 고층관측은 하루 네 차례, 오존관측은 매주 한 차례 수요일에 실시한다. 악천후일 경우 수요일 전후의 최적 일을 택한다. 이외에도 해상관측 등을 하며 특이기상 상황은 상시로 관측한다. 위험 기상 시에는 관계기관이나 언론과 협업하고 시민들의 전화나 방문도 처리한다. 태풍이 북상하는 저녁이면 전국 기상청에서 심심찮게 받는 전화가 있다. 태풍 사라가 몇 년도에 왔는지에 대한 문의다. 근무지를 옮겨도 똑같은 전화가 걸려 오는 걸 보면 사라에 대한 기억이 깊게 남은 것 같다. 이러한 일들을 주야간 교대근무로 처리하므로 관측소는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다.-고층관측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가.△관측장비를 풍선에 묶어 하늘로 띄운다. 하늘에서 풍선이 터졌을 때 천천히 내려오도록 낙하산을 매달고, 풍선에 가스를 주입하고, 넓은 야외로 이동해 기구를 날리는데 준비 과정만 한 시간이 넘는다. 만약 풍선이 터지거나 정해진 고도까지 못 가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가스가 주입된 풍선은 성인 키보다 커서, 바람이 많이 불면 풍선을 붙잡고 이동하는 것조차 힘들다. 관측소에서 비양 지점까지 백 미터 넘게 포복 자세로 기어갈 때도 있다.-고생스럽게 일일이 사람 손을 거쳐야만 하나.△고층기상 관측용 자동 발사 장치가 개발되어 작년에 도입되었다. 이 장치는 정해진 시각에 자동으로 풍선에 가스를 주입해 사람 손이 닿지 않아도 하늘로 날려준다. 하지만 안정적인 기상 상황이 아닐 때는 사람의 손이 필요하고, 오존관측의 경우 센서를 달아야 해서 수동 관측만 가능하다. 오존관측은 고층관측에 비해 손이 많이 가고 까다롭다.-오존관측은 왜 하는 것인가.△대기 중의 오존은 성층권 오존과 대류권 오존으로 구분된다. 성층권 오존은 유해 자외선으로부터 생태계를 보호하고, 태양에너지를 흡수해 지구의 기후변화에 영향을 준다. 반면 대류권 오존은 주로 배기가스로 알려진 질소산화물 등에 의해 생성되며 환경에 악영향을 미친다. 오존의 90%가량은 성층권에 분포되어 있어 성층권의 오존 관측은 기후변화 감시에 중요하다. 포항기상관측소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세계기상기구(WMO)가 인정한 오존관측소이다. 1994년부터 현재까지 30여 년간 운영 중이다. -포항기상관측소의 국제적 위상이 그 정도인지 몰랐다. 말씀을 들어보니 고층관측과 오존관측은 방식이 비슷하다.△존데(Sonde, 전파를 이용한 기상 관측 기계)를 풍선에 매달아 하늘에 띄우는 방식은 동일하다. 다만 오존관측은 사전 테스트와 당일 테스트를 모두 거쳐야 하므로 일반적인 기상관측에 비해 훨씬 많은 시간과 전문성, 세심한 관측 기술을 요구한다. 고층 관측용보다 풍선이 커서 강풍이 부는 날에는 띄우기까지 위험한 상황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최소 2명이 팀으로 움직이며 최종 관측자료 생산까지 담당한다. 오존존데 시약 제조와 고층 관측용 헬륨가스 취급 관리도 병행하고 있어 전문성이 요구된다. -하늘에서 임무를 다하고 떨어진 존데는 어떻게 되나.△풍선이 하늘에서 터지면 낙하산을 펼치면서 떨어진다. 보통 해상으로 떨어지지만, 간혹 육상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혹시나 시민들이 놀랄까 봐 설명서와 연락처를 붙여놓는다. 그래도 찜찜한지 신고하는 분들도 계시는데 존데를 발견한다면 분리해서 버리면 된다.-송도에서는 관측기구를 매단 대형 풍선이 날아가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겠다.△주민들은 자주 봐서 그런가 보다 하지만 간혹 관광객의 신고로 경찰서에서 연락이 온다. 기상장비를 매단 풍선은 희귀한 볼거리인 만큼 포항 송도로서는 굉장한 자산이라 생각한다. 고층관측 기준시간은 08시 20분, 14시 20분, 20시 20분, 02시 20분으로, 그즈음 송도해수욕장 인근이라면 하늘을 유심하게 살펴보시길 권한다.- 직원들의 노고에 비해 기상청에 대한 국민 신뢰는 낮은 편이다.△ 일상생활은 날씨와 불가분의 관계니만큼 국민적 관심은 큰데, 자연현상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일에는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어느 농민은 예보에 없던 소나기로 콩 농사를 망쳤다고 항의를 하고, 어민들은 날씨가 좋은데 왜 특보를 내려 출항을 못 하게 만드냐고 따져 든다. 관측소에서 송도삼거리만 나가도 날씨가 다르고, 해상은 육지와 완전히 다른 기상이 전개된다는 걸 충분히 설명해 드리는 수밖에 없다. 기상청은 국민 신뢰 회복을 목표로 ‘하늘을 친구처럼 국민을 하늘처럼’을 내세우고 있는데 이 문구를 늘 마음에 새긴다.- 기상청 사람들의 직업병도 있을 것 같다.△ 하늘을 수시로 쳐다본다. 구름 모양을 잘 기억하는 편이다. 1분 전에 쳐다본 구름 모양이 이렇게 변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근무지를 자주 옮기다 보니 주말부부이다. 보통 가족끼리 안부를 물을 때 “밥 먹었냐?”고 묻지만, 우리 가족은 “거기 날씨 어때?”부터 묻는다. 10년 넘게 교대근무를 하면서 굳혀진 생활 패턴도 있다. 지금은 교대근무를 안 하는데도 관측 시간만 되면 여전히 긴장한다. - 기상청에서 일하면서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가끔이지만(웃음) 칭찬받을 때가 있다. 수고했다, 기상청이 있어 태풍을 안전하게 지났다는 한마디에 힘듦이 스르륵 녹는다. 울릉도에서 3년을 근무하고 나오면서 “이렇게 열정적으로 일하는 분은 여태껏 본 적이 없다.” “계속 여기 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눈물이 다 나더라. 포항에 와서는 태풍을 대비한 유관기관 긴급대책회의에 참석해 힘을 보탰다. 또 장기예보를 분석해 불빛축제 등의 행사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도와 지자체에서 감사패를 받았다. -기후변화로 날씨의 중요성은 커졌다. 기상 전문가로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나.△우리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날씨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제공되어야 한다. 태풍이 동해안으로 빠져나가면 태풍이 지나갔다고 안도하지만, 울릉도는 그때부터 시작이다. 울릉도에 가보니 주민들이 기상예보에 소외감을 가지고 있었다. 울릉도기상관측소장으로 재직하며 울릉도, 독도에 대한 맞춤형 기상예보 시스템을 구축해 큰 호응을 얻었다. 오지나 벽지일수록 밀착형 기상서비스가 절실하다. 변방의 장수가 유능해야 나라가 튼튼하다는 말처럼 기상청의 역할이 필요한 현장에 더 관심을 두고 살필 것이다. 김정희 대구지방기상청 기상주사는 환경에 관심이 많아 대학에서 환경대기학을 공부했고, 2000년에 기상청 사람이 되었다. 국가직 공무원이라 여수와 부산, 안동 등 전국을 돌아다녔다. 이렇게 힘든 일인 걸 알았다면 이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 거라고 하지만 지난 23년간 최일선에서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기상 서비스를 제공했다. 2018년부터 3년간 울릉도기상관측소장을 지낸 뒤 2021년부터 2년간 포항기상관측소장을 지냈으며, 지난 9월 1일 자로 대구지방기상청으로 발령받았다. 우리나라 최동단 섬인 울릉도와 독도에서 위험기상 대응강화를 위해 ‘울릉도·독도 맞춤형 태풍기상브리핑’과 ‘독도기상정보표출시스템’을 구축했다. 지자체와 방재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울릉군과 포항시에서 방재업무유공 감사패를 받았다. 울릉도의 힘든 기상 상황을 떠올리며 쓴 시 ‘그해 겨울’로 기상청 문예전에서 시 부문 1위를 받았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지나간 겨울 지나/ 다시 봄이 오면/ 가족 실은 배도 고향 찾아 돌아오고/ 바다 건너 찬바람이 꽃밭이 되어 온다.” 헌신적인 공무원에게 주는 대한민국공무원상을 올해까지 3년 연속 국민에게 추천을 받았다. 기상청 내부가 아닌 국민에게 추천을 받는 일은 드문 일이다.   /배은정 작가

2023-09-04

“전 세계의 아름다운 바닷속을 더 많은 이들과 다니고파”

심해를 맨몸으로 유영하는 프리다이버의 모습은 신비로움 그 자체다.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외계의 생명체 같다고나 할까. 실제로 바닷속 환경은 우주와 가장 유사하다고 알려진다. 행성을 탐사하기 전 우주비행사들이 대서양 아래서 훈련하는 이유기도 하다. 바다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프리다이버가 많다고 한다. 바닷속 가장 신비로운 생물들에게 다가가는 빠르고 효율적 방법이 프리다이빙이기 때문이다. 우주를 유영하듯 바닷속을 헤엄치려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훈련이 필요하다. 우주를 유영하듯 바닷속을 오가는 사람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도전하는 프리다이버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 비영리 프리다이빙 단체 한국지부로 연락했고, 포항에서 ‘수심 좀 탄다’는 이수형 프리다이버와 만날 수 있었다. -프리다이빙을 사진으로는 접했지만 아직은 생소한 스포츠이다.△최근 소셜미디어를 타고 수중에서 촬영한 프리다이버 사진이 인기를 끌면서 실제로 배우려는 사람도 늘고 있다. 프리다이빙은 물속에서 호흡을 돕는 장비를 사용하지 않고 잠수하는 운동이다. 말 그대로 모든 것에서 벗어나(free) 한계에 도전한다. 국내에 도입된 지 10여 년 됐다. 종종 해외에서 배우고 들어온 사람들은 있었지만, 교육시스템을 갖추고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스킨스쿠버와 무엇이 다른가.△‘스킨스쿠버’는 스쿠버다이빙과 스킨다이빙을 아우르는 말이다. ‘스쿠버다이빙’은 공기통을 사용하는 수중 스포츠이고, ‘스킨다이빙’은 우리가 흔히 아는 ‘스노클링’이다. 프리다이빙은 장비 없이 자신의 숨을 갖고 하는 운동이므로 스쿠버다이빙에 비해 진입장벽이 낮다.-프리다이빙을 시작한 계기는.△포항이 고향이라 어릴 적부터 물에서 하는 스포츠를 좋아한다. 6년여 전 서핑 강사를 하면서 프리다이빙에도 관심을 두게 됐다. 국내에서 배우다가, 강사를 가르치는 트레이너 자격증은 필리핀에서 땄다. 그전에는 프리다이빙의 전신인 ‘스피어 피싱’을 취미로 즐겼다. 물속에서 숨을 참으며 작살이나 총으로 물고기를 잡는 원초적인 어로 활동으로 현재 국내에서는 불법이다.-훈련은 주로 어디서 하나.△제한 수역과 개방 수역이 있다. 제한 수역이라면 수영장과 다이빙 풀이 있고 개방 수역이라면 먼바다를 말한다. 포항에는 전용 풀장이 없기에 울산과 대구, 울진으로 가야 한다. 이곳들의 최대 깊이는 5미터이다. 국내 최대 수심은 경기도 용인에 있는 사설 풀장으로 수심 36미터이다.-수심 5미터를 내려가려면 숨을 얼마나 참아야 하나.△초급자가 묻는 말도 안 되는 질문 중 하나이다. 숨을 참는 건 하기 나름이다. 프리다이빙은 숨을 오래 참는 운동이 아니다. 예를 들어 10미터를 다녀오는 과정이라면, 몇 초 만에 다녀오든 상관이 없고 10미터에 도달하기만 하면 된다. 숨을 참는 시간은 훈련을 지속하면 늘어난다. 맨 처음 나는 1분 15초 정도 숨을 참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훨씬 길어졌다. 참고로 강사 자격을 따려면 최소 4분 이상 숨을 참아야 한다.-숨을 오래 참는 훈련은 어떻게 하나.△편안한 상태를 유지한 뒤 ‘호흡 충동’을 다스려야 한다. 숨을 참고 어느 정도 지나면 딸꾹질이 난다거나 침이 꼴깍 넘어가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등의 불편한 반응이 일어난다. 이산화탄소가 배출되지 못하고 몸에 쌓이면서 나타나는 호흡 충동 반응이다. 호흡 충동을 어떻게 조정하고 능숙하게 다루는지가 관건이다. 호흡 충동 간의 거리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다. 처음에는 누구나 불편하다. 욕심을 부리면 물에서 기절하는 사고가 일어난다.-숨을 참다가 기절까지 한다면 위험한 운동 아닌가.△무리하면 저산소증으로 블랙아웃(일시적 기절)이 오기도 한다. 기량을 늘리려는 선수들에게 종종 나타난다. 숨을 조금씩 늘리면 문제없다. 목표치를 수없이 반복해서 완벽해지면 조금씩 늘린다. 성급하면 안 하던 실수도 하게 되니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어서 늘 상태를 의심해야 한다. 무엇보다 프리다이빙은 2인 1조로 움직인다. 다이버의 근긴장이나 떨림, 날숨, 청색증 등을 살피는 사람을 ‘버디’라고 한다. 다이버 또한 버디에게 수신호로 상태를 알려야 한다. 올라오는 도중이나 수면으로 상승하기 직전에 블랙아웃이 올 수 있기 때문에 버디가 수면 아래 3분의 1지점까지 마중 갔다가 같이 올라온다. 이수형 프리다이버. -프리다이빙 경기는 무엇을 겨루는지 궁금하다.△먼저 정지된 상태에서 오래 숨을 참는 ‘수면무호흡(STA, Static Apnea)’이 있다. 수면에 떠서 숨을 참는 이 종목의 국내 최고 기록은 7분 30초 정도 된다. 세계 기록은 10분대이다.그리고 물속에서 멀리 나아가는 ‘수평 잠영(DYN, Dynamic Apnea)’, 모노핀을 착용하고 내려가는 ‘수직하강(CWT, Constant Weight)’, 줄을 잡고 내려가는 ‘자유하강(FIM, Free Immersion)’ 등이 있다. 더 오래, 더 깊이, 더 멀리 가느냐를 겨루는 것으로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목표 거리를 호흡이 되는 만큼 다녀오는 것이다. 마라톤의 시간 단축 훈련처럼 자신의 기록을 깨는 운동이다.-수영을 잘해야 프리다이빙을 할 수 있을 것 같다.△수강생의 3분의 1은 수영을 못 한다. 물공포증 극복이 목표인 수강생도 있다. 욕심을 버리고 천천히 하면 누구든 할 수 있다. 교육할 때도 “천천히 하세요”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한다.무리하지 않기 위해 밟아야 할 단계가 있다. 다이빙하기 전에는 반드시 짧은 수심을 오가면서 자신의 체력 상태를 점검한다. 무리하면 목 안이 찢어지거나 폐를 다친다. 표가 안 나는 상처지만 회복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므로 다이버 스스로가 조심한다. 다이빙하기 직전에는 힘을 빼고 마음을 편하게 내려놓아야 한다. 물에 들어가기 전에 준비 호흡이 필요하고, 그다음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최종 호흡을 한다. 깊게 수심을 탈 땐 숨을 멈추고,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회복 호흡을 한다. 가볍게 내뱉고 재빨리 들이마시길 세 차례 반복하고, 회복이 끝나면 버디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내야 한다.-숨을 참아가며 물속으로 들어가는 까닭은.△대부분 다른 종목은 다른 사람과 겨루는 스포츠라면 다이빙은 스스로 한계에 도전하는 스포츠이다. 나를 이기는 느낌, 성장하는 재미를 느낀다. 1년이 넘도록 진전이 없던 수강생이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을 붙들고 있더니 얼마 전에는 강사 과정에 도전하겠다고 연락이 왔더라. 프리다이빙을 가르치는 강사로서 그럴 때 흐뭇하다.-물에 들어가면 무슨 생각이 드나.△보통은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내 호흡 외에는 잡념이 사라지는 점이 프리다이빙의 매력이다. 바다로 나가면 바닷속 생물들 보는 재미에 푹 빠진다. 필리핀의 말라파스쿠아나 보홀, 사이판 로타섬, 일본의 오키나와, 미아케지마 등으로 다이빙 투어를 다닌다. 최근에는 고래를 보러 일본에 다녀왔다. 고래는 공기 방울을 싫어해서 산소통을 메면 가까이서 마주하기 힘들다. 일본은 돌고래 투어 상품이 다양하게 개발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상품화만 안 됐을 뿐 울릉도 오가는 선박에서 돌고래를 볼 수 있다.-바닷속 상황이 안 좋다고 하는데 실제로 어떤가.△바다가 너무 나빠지고 있다. 특히 해양쓰레기 문제는 심각하다. 전국이 다 그런 것 같다. 최근에 울릉도와 독도를 다녀왔는데 그나마 울릉도는 쓰레기가 적었고 독도는 다행히도 깨끗했다.-프리다이빙을 즐기기에 포항은 어떤 곳인가.△대구 경북지역에서 접근성이 이 정도로 좋으면서 시야가 잘 확보되기로는 포항만 한 곳이 없다. 하지만 전국 다이버들에게 포항은 먹거리 다이빙으로 악명이 높다. 화산지형인 제주나 울릉도와 달리 포항의 해저 지형은 밋밋한 편이다. 해저에 볼거리가 없다 보니 포항을 찾는 다이버의 90%가 전복이나 문어를 보고 온다. 그러니 다이버들이 바닷속 쓰레기를 줍는 플로빙 활동에도 어민들은 민감할 수밖에 없다. 세계적인 다이빙 포인트에서 아이디어를 구하면 어떨까? 다이버들의 성지인 이집트 바다에는 24미터짜리 코끼리 동상이 있고, 스페인의 물속에는 박물관이 있다. 바닷속에 볼거리를 만들면 관광객도 늘고 수산물을 무단으로 채취하는 사건도 감소할 것이다. 강릉은 최근 바다에 난파선을 빠뜨리고 해산물 불법 포획이 줄었다고 한다. 포항시에, 스틸아트페스티벌에서 전시한 작품을 바다에 빠뜨려 달라고 건의한 적이 있다. 로봇 태권브이 같은 조각상이 바닷속에 있다면 훌륭한 다이빙 포인트가 될 것이다.-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나.△개인적으로는 동해에서 수심 80미터 이상을 타는 것이 목표이다. 마지막으로 내려간 수심은 65미터이다. 울릉도에서 프리다이빙 대회를 개최하고 싶은 바람도 있다. 동해는 냉수대가 심해 여건상 어려움은 있지만, 울릉도 바다는 20미터 이상 시야가 확보되어 해외 어디 내놔도 부럽지 않은 다이빙 포인트이다. 전 세계의 아름다운 바닷속을 더 많은 이들과 다니고 싶다. 투어를 다녀온 사람들이 평생의 버킷리스트를 이뤄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할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전율을 느낀다.이수형 프리다이버는용인대학교에서 체육학을 공부하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격투기 종목을 두루 섭렵해 용무도 4단, 태권도 4단, 유도 3단, 주짓수 브라운 벨트 등 합이 무려 17단에 달한다. 자동차 관련 사업으로 돈도 제법 벌었지만 자유로운 생활을 쫓아 프리다이버가 됐다. 포항에서 유일하게 프리다이빙 강사를 가르치는 트레이너이며, 수중사진 강사 트레이너, CMAS(세계수중연맹) 프리다이빙 심판, 민간해양구조대원 등으로 활동한다. 다이빙 전문 여행사를 운영하며 전 세계 바닷속을 누비고 있다./배은정 작가

2023-08-21

“문화유산 활용은 더 잘 보존하고 향유할 수 있게 하는 것”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은 오래된 논쟁이다. 보존에 가치를 두는 쪽은 허울 좋은 활용은 훼손과 다름없고, 어떤 방식의 활용도 문화재 본연의 가치를 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활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존의 문화재 보존은 문화를 박제하고 화석화한다고 비판한다. 끊임없이 변동하는 문화의 속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보존과 활용은 상반된 개념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라는 주장이 제기됐고, 정부의 문화재 정책은 보존에서 활용으로 흐르고 있다.보존해야 할 ‘문화유산’과 ‘활용’이라는 단어가 병행하는 ‘경주문화유산활용연구원’의 최경남 대표를 만났다. 칠불암을 활용한 프로그램으로 문화재청이 주관하는 지역 문화재활용 우수사업 명예의 전당에 오른 곳이다. 최 대표와 약속을 잡고 찾아간 사무실은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 특유의 끈끈함과 활력이 감돌았다. -‘칠불암 5감(感) 힐링체험’의 참가자 만족도가 높다고 들었다.△문화재청이 지원하는 전통산사문화재 활용사업 6년 차에 접어드는 사업이다. 2019년부터 3년 연속으로 지역 문화재활용 우수사업으로 선정되어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경주시 담당 공무원과 상을 받으러 갔는데 문화재청장이 수여하면서 “잘 받기 힘든 상입니다.”라고 했다. 전국에 400개 넘는 문화유산 활용사업이 있지만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사업은 1년에 한두 팀 나올까 말까라고 한다.-답사와 공연 관람이 혼재하는 프로그램인가.△비슷하지만 하나가 빠져있다. 칠불암의 ‘7’을 스토리텔링 해서 문화재, 숲, 명상, 예술을 5감으로 풀어낸다. 초기에는 답사로 알고 오거나, 체험비에 대해 “문 없는 사찰에 가는데 왜 돈을 내느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 프로그램은 칠불암의 7개 스토리를 다섯 가지 감각으로 버무린 융복합 문화재 체험 행사다. 중요한 것은 예술인의 감성으로 풀어내는 문화유산 프로그램이라는 점이다. 지역 예술가들이 모든 과정을 동행하며 두런두런 대화할 수 있는 것도 특별하다.-지역 예술가들과의 만남은 어떻게 이뤄지나.△칠불암 가는 길 내내 동행한다. 해설자만 있는 기존 답사와 달리, 예술인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함께 한다. 30여 명의 지역 예술인과 문화계 인사가 1인 3역을 하며 함께 움직인다. 칠불암으로 이동하는 시간은 50분이지만 전체 운영은 5시간이 걸린다. 출발하기 전 명상부터 시작해 숲 해설가의 설명을 듣고 칠불암 주지 스님과의 만남도 있다. 한 호흡 가다듬고 천천히 하산하면서 원효 스님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사상과 요석 공주와의 사랑을 담은 연극을 볼 수 있다. 공연은 20분 정도로 주제만 전달하도록 구성했다.-문화유산 활용 대상으로 칠불암을 선택한 이유는.△칠불암은 남산 유일의 국보를 보유한 사찰로, 신선암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압권이다. 물도 전기도 부족한 곳이지만 공양간은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스님이 직접 다려 주시는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칠불암을 올라가는 초입에는 ‘칠불암 올라가는 짐’이 있고, 암자 마루 밑에는 ‘내려가는 짐’이 있다. 누구든지 마음 내키는 만큼 짐을 옮겨준다. 객도 없고 주인도 없는 모든 이들의 공간인 셈이다. 사찰이라고 하면 불국사처럼 큰 사찰을 먼저 떠올리지만 이처럼 작은 산사만의 독특한 문화가 있다. 전통 산사의 맥이 이어지는 칠불암의 매력을 전하고 싶었다. -경주와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나.△1990년대 말 보문단지 야외 공연팀 일원으로 경주에 왔다. 당시 국악을 전공하는 학생으로 일일이 뵙고 찾아다니며 배워야 하는 정순임, 정경호, 주영희, 이성애 선생 같은 쟁쟁한 대가들이 한자리에 계셔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판소리와 아쟁, 가야금, 대금 등 각 분야 대가가 모였으니, 무대는 또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거기다 보문단지 공연장은 너무 아름다웠다. 경주 사람들은 늘 봐와서 귀한지 모르겠지만 대가들의 공연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무대는 드물다. 아쉽게도 상설 공연은 끝났지만, 그때 인연으로 지금까지 경주에 정착해서 살고 있다.-국악인으로 활동하다가 문화유산 활용사업에 뛰어든 계기는.△고등학생 때 기타를 배우러 갔다가 장구에 홀려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장구 소리가 천둥처럼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장구를 치면 목탁 소리처럼 편안해지기도 했다. 국악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 동시에 사람과 만나는 도구이다. 예술이란 끝없는 자기와의 싸움이고 평생 가지고 갈 나의 정체성이다. 하지만 예술인에게도 일이 필요하고 그 일이 세상에 도움이 되기를 늘 바라왔다. 보문단지에서 공연하던 팀이 흩어지고 문화체육관광부 예술강사지원사업 국악 강사로 활동했다. 경북지역 대표로 문체부 지원정책에도 참여했고, 대한민국 국악 강사 협의회를 이끌기도 했다. 여러 분야 예술인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무대를 시도했고, 이 정도면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괜찮겠다는 자신감도 얻었다. 내가 가진 재능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이기를 바라면서 예술인의 감성으로 풀어내는 문화유산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경주문화유산활용연구원은 그렇게 탄생했다. 2017년에 설립해 이듬해부터 ‘칠불암 5감 힐링체험’ 행사를 시작했고 2020년 사단법인으로 허가받았다.-경주의 문화유산 활용단체 가운데 경주문화유산활용연구원이 갖는 차별성은.△경주문화원과 신라문화원,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경주향교, 서악서원 등 10여 곳에서 문화유산 활용사업을 하고 있다. 우리 연구원은 콘텐츠 개발 전문 단체로 주로 감성형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사업에 참여한다는 점이 강점이다. 참가자와의 교감을 중시하며 체험객의 특성 파악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일반적으로 문화재는 유지, 보존되어야 한다고 인식된다. 문화재의 상품화와 관광객 유입으로 문화재 훼손을 우려하는 시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10여 년 전부터 문화재청은 ‘최고의 보존은 활용’이라는 가치를 내걸고 활용사업을 권장하고 있다. 문화유산 활용사업은 사람이 많이 찾는 관광지가 아닌 숨겨지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을 위주로 진행한다. 또 지나가는 관광객이 아니라 프로그램 참여를 위해 모인 대상자를 위해 진행한다. 사업의 첫 번째 목표는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알리는 것이다. 그다음은 닫힌 문화재, 숨겨진 문화재를 개방하고 알리기다. 활용사업을 하기 전 향교나 서원은 춘향대제와 추향대제 그러니까 1년에 두어 번 개방했다.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빈집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 무너져 내린다. 방문객을 맞으면서 건물의 수명이 연장된 셈이다. 이처럼 문화유산 활용사업은 소중한 문화유산을 더 잘 보존하고 제대로 향유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것이 활용사업의 진정성이다.-사업을 하면서 힘든 점이 있다면.△국비 사업이라 매년 심사를 받아야 한다. 보조사업의 특성상 끊임없이 시험대에 오른다. 어제도 서류 작업을 하느라 밤을 새웠다. 프로그램의 기조는 바뀌지 않지만, 세부 사항은 매달 개선하고 체험객의 성향에 따라 내용을 조정하는 일도 끝이 없다. 체험 물품도 직접 제작하고 모객도 신경을 써야 하지만 가치있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이 있다. 광주에 우리처럼 명예의 전당에 오른 월봉서원 행사가 있다. 사업이 성공하고 체험객이 몰리면서 담당 공무원이 특진하고, 문화재활용팀이 독립됐으며, 교육체험관이 지어졌다. 경주도 그렇게 되리라 기대한다.-앞으로 더 활용하고 싶은 경주의 문화유산이 있나.△경주에는 문화유산이 다양하지만 실제로 발길이 모이는 곳은 한정되어 있다. 관광객의 다양한 취향이 반영되도록 관광지가 세분되고 분산되면 좋겠다. 신라에 푹 빠져 경주에 왔지만, 막상 와보니 지나치게 신라에만 집중하고 있다. 경주에는 신라 말고도 주민들과 함께해 온 유적지가 많다. 지금까지 조명을 덜 받은 문화유산을 알리는 작업을 하고 싶다. 현재 복원 중인 경주읍성은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담은 곳이다. 경주읍성을 주제로 ‘경주읍성 생생 나들이’를 진행한 바 있고 기회가 된다면 내년에 개선된 프로그램을 선보이려 한다.-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경주의 숨은 명소는.△사업을 하면서 보니 경주에 숨은 명소가 많았다. 배리 삼존불입상과 옥룡암 탑곡마애불상군, 삼릉숲, 감실할매부처라고 불리는 불곡마애여래좌상도 좋아하는 곳이다. 말하고 보니 모두 남산인데, 남산은 굳이 등산이 아니라도 둘레길만 걸어도 좋다. 동남산과 서남산을 잇는 셔틀버스가 있다면 더 많은 이들이 둘레길을 찾을 것이다.-수많은 경주의 명소 가운데 문화유산 활용사업의 첫 발을 뗀 곳이 남산이다. 최경남 대표에게 ‘경주 남산’은 어떤 곳인가.△‘나를 만나게 해주는 곳’이다. 신라의 시작과 끝이 함께 있는 곳. 신라를 모두 담았다고 해도 될 만큼 이야기가 많은 곳이다. 고청 윤경렬 선생을 비롯해 남산을 알리고 지켜온 어른들이 계신다. 미약하나마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 뜻을 이어가고자 한다.최경남 대표는대구예술대학교에서 한국음악을 공부하고, 중앙대학교 국악교육대학원에서 국악초등교육을 전공했으며, 동의대학교 스토리텔링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진주검무, 처용무 전수자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예술강사지원사업 국악 강사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국악 강사 협의회장을 역임했다. 신라만파식적보존회가 주관하는 ‘경주세계피리축제’와 신라처용무보존회의 ‘경주시 문화의 날’ 축하공연, 경주문화원의 ‘문화재 야행’등을 기획·운영하며 쌓은 노하우로 경주문화유산활용연구원을 설립했다. 전통산사문화재 ‘칠불암 5감 힐링체험’과 세계유산 활용 프로그램 ‘오래된 미래’, 전수교육관 활성화 사업인 ‘똑똑한 문화재 열려라 참깨’ 등을 진행하고 있다.배은정 1974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학과 졸업. TBC·포항MBC·경북교통방송 작가. ‘포항문화의 상징과 공간’ 공저/배은정 작가

2023-07-31

“文學의 숲에 들어섰으니 詩나무 돼 걸어 나와야지”

대학 시절 풍물에 빠져 지낸 지인이 필자가 포항에 있다는 말을 듣고 했던 첫마디가 ‘원만 사부가 사는 곳’이었다. 한강 이남에서 꽹과리를 가장 잘 노는 상쇠이자, 앞서 이끌기보다는 스며들어 함께 가는 보기 드문 리더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원만 사부가 포항에 풍물을 뿌리내린 ‘한터울’의 이원만 대표였다. 인연이 닿아 만나게 된 그는 만날 때마다 세상을 넓혀가는 사람이었다. 꽹과리 연주자로 시작해 국악으로 다양한 창작 공연을 선보이더니 직접 기획하고 감독한 국악창작뮤지컬 ‘강치전’은 전국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전 이 대표의 시가 실린 계간지가 우편으로 배달됐다. 시를 읽고 난 후 그를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등단을 축하드린다. 시를 쓰는 풍물꾼이 풍물 하는 시인이 되었다.△시 쓰면 시인이지, 싶어서 그냥 작품만 쌓아두고 있었는데 얼마 전 친구가 사무실에 와서 쌓인 책들을 쓱 둘러보더니 써놓은 거 보여달라더라. 그래서 몇 편 보냈더니 허락도 없이 투고해 버린 거다. 시가 계간지에 실린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출판사 측에서 신인상 추천까지 해줘서 하루아침에 시인이 되었다.-언제부터 시를 쓴 것인가.△어릴 적부터 썼고 고교 문예 동아리에서 시에 푹 빠졌다. 안도현, 이정하, 서정윤 시인 등을 배출한 대구 대건고의 ‘태동기’이다. 당시 지도 교사였던 도광의 시인을 얼마 전 찾아뵈었는데 예순이 되어 무슨 등단이냐고, 뭘 그리 오래 참았냐고 그러시더라. 그러면서 좋은 작품은 쓰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쓰면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하셨다. 그 말이 가슴속에 깊이 박혔다.-시 창작 방향을 ‘탄소 포집용 시’라고 밝힌 이유는.△팬데믹을 거치면서 ‘삶의 생태적 전환’은 지구에 붙어살기 위한 생존의 문제가 됐다. 코로나 전과 똑같이 살아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그런 고민을 하다 제주도의 ‘비자림로를 지키기 위해 뭐라도 하려는 시민모임’의 ‘그 숲에 들어간 사람들은 나무가 되어서 나왔다.’라는 표현을 접했다. 한 문장이지만 찌릿했다. 시인은 나무와 풀과 동물의 말을 인간 언어로 동시통역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에게 나무와 풀들의 말을 전하는 시를 쓰고 읽게 해서 기후변화의 감수성을 키워주면 ‘생태적 슬픔’을 느끼고 행동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탄소를 포집하는 시라고 얘기했다.-등단작인 ‘산책 간다’에서 산책을 ‘살아있는 책을 보러 간다는 말’로 표현했다. 산책하면서 시적 영감을 받는 편인가.△영감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늘 관심을 가지고 익숙해지면 자연스레 말문이 서로 트이는 것이다. 양동 마을의 둘레길, 오어지 둘레길, 그린웨이 등을 다니며 친해진 자연에 슬쩍 말을 걸어 보다가 시가 나온다. 뭔가 떠오르면 바로 메모를 하고 그것이 시가 된다. 호기심이 많아서 질문이 생기면 끝까지 파고드는 편이다. 공부는 내가 보지 못한 세상을 보여준다. 그런 인식의 변화가 나를 행복하게 하고 조금 나은 인간이 되게 하니 멈출 수가 없다. 하나의 주제에 빠지면 책장 한 칸을 채운다. 언젠가 나무에 관한 공부를 하는데 ‘나무는 존재 자체가 선물이다.’, ‘자신의 가지를 자른 사람에게도 그늘을 내준다.’는 말들이 시처럼 느껴졌다. 나무에 대한 시작(詩作)은 그렇게 시작(始作)됐다.-‘참새 무덤 이장하기’라는 시도 인상적이다.△오래 전 사물놀이 가르치러 간 학교에서 겪은 일이다. 아이들이 손으로 물을 떠서 참새에게 뿌리고 있더라. 발견했을 때는 움직임이 있었던 모양인데 내가 볼 때는 죽은 상태였다. 참새를 살리려고 애쓰는 아이들을 설득해서 은행나무 아래 묻었다. 그러면서 은행나무에 참새를 저축하는 거라고 말해주었다. 미심쩍어하는 아이들이 혹시 실망할까 봐 참새 무덤을 옆으로 옮긴 얘기다. 그걸 그대로 받아 적었으니, 아이들이 준 시이다.-아이들이 준 시라고 하지만 눈높이가 맞는 시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시이다.△시 쓰기의 시작은 동시였다. 동시와 시는 대상과 언어가 다를 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별반 다르지 않다. 사물놀이를 가르치러 다니면서 만난 아이들에게서 얻은 시로 동시집을 준비하고 있다. 내년이 한국 동요 100주년이라고 한다. 동시에 곡을 붙여 북 콘서트도 해볼 계획이다.-시인이기 이전에 꽹과리를 치는 상쇠였다. 꽹과리의 시의 공통점이 있다면.△만만하지 않다. 심금을 울린다. 늘 ‘만족과 부족’ 사이를 걷게 만든다. 그 정도가 아닐까. 꽹과리를 치면서 ‘큰 기교는 기교가 없다’라는 전통음악 이론을 접하였다. 시에 접목하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않고도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덕목으로 연결된다.-꽹과리는 시를 쓰는 데 어떤 도움이 되나.△쇠를 칠 때 물 흐르는 소리를 내라고 배웠다. 딱딱한 금속에서 부드러운 물소리라니 처음에는 기가 막히더라. 그런데 해보니까 그게 또 됐다. 진동으로 떨리는 쇠판으로 채가 들락날락하면서 희한하게 조화를 이뤘다. 그 경지를 보면 그때부터 말 그대로 환장하게 된다.꽹과리 가락의 맛을 내는 기운을 얻기 위해 일부러 찾아다니던 풍경이 있다. 태풍이 불면 바다의 들끓는 기운을 보러 갔다. 바람 많은 날 대나무밭은 일렁이는 불꽃 같다. 비학산에서의 일출도 잊을 수 없다. 막걸리가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날 커피를 마시면서 해 뜨기를 기다리는데 들판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해가 보였다. 그 후로 ‘칠채 장단(일곱 번 친다고 해서 이름 붙은 홀수 박. 끝날 듯 멈추지 않는 역동성이 특징)’을 칠 때마다 그 장면을 떠올린다. 풍물 잘하는 친구가 내가 칠채 장단을 치면 ‘맛있다’고 하더라. 풍물의 어떤 경지에 이룬 연주자들을 보면 소리의 기운이 덩어리로 천장에 모인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고 미쳐야 미친다고 하지 않나. 시는 아직 꽹과리만큼 몰입하지 못했지만, 꽹과리를 친 것이 감수성 훈련에 도움이 됐다.-35년 동안 몸담은 한터울이 ‘맏뫼골 놀이마당’에서 ‘아트플랫폼’으로 바뀐 것은 어떤 변화의 반영인가.△사물놀이와 풍물놀이 단체에서 공연 창작과 기획, 교육 콘텐츠를 연구·개발·보급하는 단체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지역 예술가들이 단순한 기능 전수가 아닌 자신의 언어를 발산하는 예술가로 자각하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다. 젊은 예술가들이 포항에 뿌리내리고 활동할 수 있는 일자리도 필요했다. 4년 전에 사회적 기업을 만든 것은 그런 고민의 결과이다.-지금까지 개발한 교육 콘텐츠를 소개한다면.△흥부전의 제비노정기를 조류 보호를 위한 창극으로 재창조한 ‘지지배배(知知拜拜)’는 아이들과 새로운 버전의 판소리 한 대목을 나누며 생태를 고민하는 교육 콘텐츠이다. 강치전을 바탕으로 만든 교육 프로그램 ‘바다가 그랬어’는 올해만 30곳에서 운영한 효자 프로그램이다. 토속민요극 ‘남의 눈에 꽃이 되고’처럼 어르신을 대상으로 한 콘텐츠도 있다.-한터울에서 기획하고 제작한 국악 가족뮤지컬 ‘강치전’이 전국 순회공연을 하고 있다. 지역의 정체성과 문화적 가치를 담은 콘텐츠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다.△포항의 예술가들이 오디션을 봐서 작품에 참여하고 그 작품이 전국에 초청받아 공연하러 다니고 있다. 한 공무원이 예술은 돈을 쓰는 분야인지 알았는데 벌어오기도 하구나, 말하더라. 코로나로 어려움은 있었지만 꾸준하게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단순히 1회 공연이 아닌 예술성을 인정받은 작품으로 활동폭을 넓히면서 다듬어 나갈 계획이다.-지금 구상하는 작품이 있나.△독도 강치 다음 타자로 고래가 등판을 준비하고 있다. 살아있는 동안 나무 천 그루의 탄소를 포집하는 고래는 죽어서도 바다를 지킨다. 해양 깊숙이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수많은 바다 생물들의 먹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해양생물 보호종 고래는 죽어서 항구에 들어오면 매립장에 묻는다. 그 장면을 사진으로 보면서 울컥했다. 쓰레기처럼 매립할 것이 아니라 먼바다로 돌려보내 주어야 한다. 자기 몸을 나눠 바다가 풍성해지는 ‘고래 낙하’를 담은 ‘WHALEFALL(웨일 폴)’을 준비 중이다. 이번에는 대본을 직접 썼고 여러 번 수정을 거쳐 탈고한 지 얼마 안 됐다. 오는 11월쯤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앞으로의 계획은.△‘강치전’이나 ‘WHALEFALL’ 같은 지역 예술가들의 창작 작품을 전국으로 유통하는 기획사도 만들고 싶고 전용 극장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개인적으로는 대본 작가의 능력도 제대로 갖추고 싶다. 주변에서 더러 나이도 있는데 일을 조금씩 내려놓지 뭘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고 한다. 이제 겨우 시인이 되었고 그걸 써야 겨우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으니 어떻게 포기하겠나. 문학이라는 숲으로 들어섰으니, 시라는 나무가 되어서 걸어 나와 봐야지, 안 그런가? 이원만 대표는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포항에서 30여 년 꽹과리를 치며 살았다. 포항의 젊은 예술가들과 사회적 기업 (주)아트플랫폼 한터울에서 기후 혼란과 공생하는 인간, 생태적 감수성 등을 담은 뮤지컬을 제작하고 문화예술교육콘텐츠를 개발해 보급한다. 5년 차를 맞는 ‘강치전’은 2020년~2023년 4년 연속 국공립예술단체 우수공연 프로그램으로 선정됐다.계간 문학나무 2023년 여름호 시 부문 신인상으로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심사를 맡은 박덕규 시인은 다음과 같이 평을 했다. 오래 연마한 흔적이 역력하지만 타성에 젖지 않았으며 ‘새로우려고 애쓴 흔적’조차 내지 않으려는 긴장이 있다./배은정 작가

2023-07-17

“공공기반 활용한 지역 연극계 동반성장이 목표죠”

예술은 특정한 누구의 것이 아니라 모두가 향유하는 권리이다. 이 같은 예술의 공공적 가치는 공립예술단의 존재 근거가 된다. 전국에 산재한 국공립극단이 만나는 ‘대한민국 국공립극단 페스티벌’이 올해로 14회를 맞았다. 내일(오는 5일)부터 한 달여간 전국 8개 극단이 경주를 찾는다. 축제를 주관하며 피날레를 장식하는 경주시립극단의 김한길 예술감독을 만났다. 경주시립극단 출범 이후 가장 젊은 감독으로 주목받았던 그는 지난 7년간 경주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경주말과 지역민의 정서를 담아왔다. 창작인으로서의 꿈과 고뇌, 지역 연극 발전을 위한 공립극단의 역할까지 그의 고민은 깊었다. -경주시립극단 예술감독으로 부임한지 벌써 7년이 됐다.△임기 2년으로 와서 지금까지 있을지 몰랐다. 집주인 할아버지가 좋은 분이어서 몇 년째 같은 집에 산다. 민간에서 공립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면서 책임감과 부담감이 컸고 공립극단으로서 역할을 고심했다. 지역민에게 문화적 향유의 기회를 제공하는 데 우선을 두고 경주의 브랜드가 될만한 소재 발굴을 고민해 왔다.-구체적으로 어떤 작품을 선보였나.△경주말과 경주 사람의 정서를 담으려 했다. 오태석의 연극 ‘자전거’를 경주 사투리로 바꾸고, 경주를 배경으로 손기호 작가가 쓴 ‘송화꽃 지면 송화 날리고’를 연출했다. 경주를 소재로 극을 쓰고 연출한 작품도 꽤 있다. 경주 웃시장(성동시장)과 아랫시장(중앙시장)을 무대로 한 악극 ‘바람아 구름아’, 일제강점기 경주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1915 경주 세금마차사건’,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를 경주 남산과 삼릉을 배경으로 만든 ‘동경이의 마술피리’ 등이다.-경주시립극단을 이끌면서 역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콘텐츠를 다양하게 선보이려고 노력했다. 코미디 작품 다음은 따뜻한 가족사, 그다음은 묵직한 주제 혹은 친근한 소재의 작품을 배치했다. 코로나로 공연이 힘들 때는 웹드라마도 제작했다. 관객 접근성에 중점을 두다 보니 아직까지 과감하고 실험적인 작품을 시도해 본 적은 없다.-경주에 오기 전부터 극단 ‘청국장’을 이끌며 소시민의 일상을 세밀하게 풀어내는 연극을 해왔다. 연극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고교 시절 별생각 없이 들어간 연극반에 깊이 빠졌다. 연극을 가르쳐 줄 교사가 없어 선배들 어깨너머로 배웠다. 첫 무대는 철학과 교수였던 강월도의 ‘알’로 기억한다. 난해한 내용이라 작품 해석이 제대로 됐을 리 없다. 참여 가능한 인원이 정해지면 서점에서 희곡을 뒤져서 공연작을 골랐다. 진로를 일찌감치 연극으로 정하고 신촌이나 명동, 대학로 무대를 찾아다녔다. 공부는 뒷전이니 집에서 좋아할 리 있나. 이근삼의 ‘연극개론’과 성경책을 챙겨서 가출까지 감행했다.-가출하면서 어떻게 책을 챙길 생각을 했나.△기독교인도 아닌데 성경책을 챙긴 건 삐뚤어지진 않겠다는 의지가 아니었을까. 당시 내게는 그 책들이 안전장치였던 것 같다. 이후로 부모님도 크게 말씀을 안 하셨다. 그러다 극단 ‘로얄 씨어터’의 ‘삼일로창고극장’이 건너 골목으로 이사를 왔고,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극단에 들어가 포스터부터 붙였다. 선배의 대타로 첫 무대에 올랐고, 제대 후 창작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마차’로 정식 데뷔했다.-배우로 연극을 시작한 것인가.△그렇다. 연기를 하면서 뭘 자꾸 끄적이는 날 보더니 당시 ‘로얄 씨어터’ 연출이던 류근해 상명대 교수가 희곡을 써보라고 했다. 그해 서울예대 극작과에 진학했다. 쟁쟁한 98학번 동기들과 희곡을 쓰고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뮤지컬 스타 정영주와 극단 ‘여행자’의 김은희 대표, 한윤섭 아동문학가 등이 동기다.-극단 ‘청국장’을 오랫동안 이끌고 있다.△처음에는 대학 친구들과 극단 ‘누에’를 창단했다. 간결하면서도 주제를 압축하는 단막극이 한국에도 필요하다는 대학 은사의 권유로 비롯됐다. 생활전선으로 나가는 단원들이 많아 오래가지 못했다. 극단 ‘청국장’은 내가 쓰고 연출한 ‘장군슈퍼’와 ‘사랑의 피아노’ 스텝들과의 의기투합이었다. 고초균으로 발효되는 청국장과 연극 작업이 비슷하다고 술자리에서 이름을 지어놓고 다음날 진짜 그걸로 할 거냐고 확인하고 그랬다.-소시민의 담백한 삶에 가치를 두는 이유는.△한 작가의 작품은 자신과 주변의 이야기를 지나 세계를 확장하는 과정을 거친다. 무대는 일상과 다른 공간이고 허구의 이야기가 극적인 언어로 펼쳐진다. 무대 언어로 꽉 찬 공간에서 쨍하도록 투명한 일상의 언어를 발견하는 것은 즐겁다. 주변에서 ‘디테일 김’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확실히 섬세한 일상 묘사에 관심이 크다. 현실적인 이유를 들자면 주로 소극장에서 공연했기 때문이다.-대한민국 국공립극단 페스티벌이 14년째 이어온다. 페스티벌에 대한 연극계의 인식이 궁금하다.△공공극단의 유일한 페스티벌로 의의가 크다. 각 지역의 공립극단은 지역의 소재와 사투리의 가치를 담은 작품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만 각 지역에 소속되어 있고 단 1회 공연이라 신작을 선보일 수 없어 아쉽다. 전국의 공립극단이 지역 민간 연극단체와 교류하며 연극의 발전에 힘쓰는 만큼, 국공립극단 페스티벌과 대한민국연극제가 서로의 곁을 내어주며 연극계 전체의 축제로 확장하는 것도 제안하고 싶다.-‘공립’과 ‘극단’은 어떻게 공존해야 할까.△국공립 단체의 예산은 세금이다. 내 또래의 연극인들은 대부분 대리운전을 비롯한 아르바이트를 한다. 안정적이라는 것은 장점이자 동시에 경계해야 하는 부분이다. 월급이 ‘연극쟁이’로서의 기질을 앗아간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있지만 개선 방법을 찾기란 쉽지 않다. 공익성과 공공성 추구라는 공립극단의 역할에 대한 고민은 계속하고 있다. 시민연극교실과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을 찾아가 그림책을 읽어주는 ‘경단(경주시립극단)이와 떠나는 그림책 여행’이 고민의 산물이다. 더불어 공공적 기반을 활용해 지역 연극계를 활성화하는 방안도 고민해야 한다. -경주 지역 연극인들과도 교류를 하나.△경주 연극계는 토양이 훌륭하다. 경주시립극단의 모태가 된 ‘에밀레 극단’이 건재하고, 인형극으로 출발한 ‘극단 깨비’는 장르를 넓히는 등 쟁쟁한 창작진이 모여있다. 이러한 토대 위에 공공 영역이 민간을 포용하면서 지역 연극계가 발전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탄탄하고 안정적이지만 신선함에 목마른 공립극단과 예술혼으로 활활 타오르는 민간 영역이 상호작용을 일으킬 것이다. 다양한 시도를 모색해 볼 가치가 있다.-페스티벌 폐막작으로 ‘1915 경주 세금마차사건’이 다시 무대에 오른다.△일제강점기 실제로 독립자금 확보를 위해 경주에서 일어난 세금마차 탈취사건을 다룬 연극이다. 무대에서 한번 관객을 만난 작품은 연습 과정에서 농축된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거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지나갔던 대사가 다르게 다가올 수도 있다. 그 사이 연극은 숙성된다. 보통은 두 달 연습해서 사흘 공연하니 늘 아쉽다. ‘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를 2주간 공연한 적이 있다. 작품에 자신이 있었기에 그럴 수 있었다. 수요 관객이 그만큼 안될 것이란 우려가 컸지만 입소문이 나면서 갈수록 관객이 늘었다.-올해의 참여작 성향은 어떤가. 주목되는 작품을 소개해준다면.△가족 콘텐츠가 늘었다. 새로운 형식이 기대되는 무대는 경남도립극단의 오브제음악극이다. 수원시립극단은 권호성 예술감독이 부임하고 첫 작품이라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악극을 자주 공연하는 경산시립극단의 무대에서 악극의 노하우를 살펴봐도 좋겠다. 한 인물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조명하는 ‘전명출 평전’을 인천시립극단이 어떻게 녹여낼지도 궁금하다. 옆 동네 포항은 물론이고 어린이극으로는 첫선을 보이는 목포, 작년과 동일한 작품으로 농익은 정도를 살피기 좋은 부산도 기다려진다. 작년 페스티벌에서 전 작품을 모두 관람한 관객이 200여명이었다. 올해도 여덟 작품 모두 놓지지 않길 바란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과 배우와의 포토타임, 내가 뽑은 최고의 배우상도 즐겨주길 바란다.-앞으로 더 해보고 싶은 시도가 있나.△더 이상의 일을 벌이기보다 임기를 잘 마무리하려 한다.(경주시 조례상 예술감독의 임기는 연임 3회로 제한된다.) ‘경주시민 연극교실’과 ‘경단이와 떠나는 그림책 여행’이 안정적으로 정착되길 바란다. 코로나로 인한 거리 두기로 관객의 기운을 온전히 받지 못한 ‘동경이의 마술피리’를 제대로 된 무대에 올리고 싶은 바람도 있다. 국공립극단 페스티벌이 끝나면 바로 다음 공연을 준비한다. 무언극인 ‘안네의 일기’로 호평을 받은 주혜자 연출이 객원으로 참여한다.-김한길 감독에게 ‘연극’이란.△과거이고 현재이며 미래이다. 연극을 시작하면서 꿈꿔왔던 대부분이 이뤄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꿈을 더 크게 꿀 걸 그랬나 싶다. 나를 대학로에서 경주로 데려온 것도 연극이니, 연극이 또 다른 미래로 나를 데려놓지 않을까. /배은정 작가김한길 경주시립극단 예술감독은서울예대 극작과를 졸업하고 대학로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 4기 동인으로 활동했다. 극단 ‘청국장’ 대표이다. 극을 쓰고 연출한 ‘장군 슈퍼’로 한국예술위원회 신진예술지원을 받았고, 2006년에는 ‘춘천 거기’로 올해의 예술상을 수상했다. ‘장군 슈퍼’, ‘슬픔 혹은’, ‘임대 아파트’로 PAF 극작상을 받았다. 2016년 경주시립극단 예술감독으로 부임해 ‘삼도봉 미스터리’, ‘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 ‘유쾌한 하녀 마리사’, ‘지금도 가슴 설렌다’, ‘열두 명의 성난 사람들’, ‘장마’, ‘귀로’, ‘1915 경주 세금마차사건’, ‘동경이의 마술피리’, 악극 ‘바람아 구름아‘ 등 12여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2023-07-03

“임업 공무 30년, 산은 늘 들인 노력보다 더 크게 보상하죠”

나무 그늘을 찾게 되는 계절이 왔다. 포항시 청하면 소재지에서 폭이 좁은 곡선도로를 15분간 오르면 무음(茂蔭)의 수목원을 만난다.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고산수목원인 경상북도수목원이다. 해발 650미터에 위치한 이곳에는 3천여 종의 식물과 백여 종의 희귀식물이 서식한다. 지형을 그대로 살린 산책로 또한 산 구릉의 굴곡을 닮았다. 수목원의 계절은 도심과 다르다. 봄꽃은 늦게 피고 단풍은 일찍 든다. 우거진 나무의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여름에는 평균 기온이 4도 이상 낮다. 구태의연한 계절과 조금씩 어긋난 계절을 만나는 건 즐거운 일이다. 경상북도수목원의 이종환 관리소장을 만났다. - 타 지역과 다른 경북수목원의 특징은 무엇인가.△전국에 68곳(국립 4, 공립 36, 사립 28)의 수목원이 있지만 고산지대는 드물다. 고산에 조성하다 보니 나무는 그냥 두고 평탄한 전답이 있던 곳에 전시원을 조성했다. 도심의 수목원보다 경관이 잘 보존되고 자연과 어우러진다. 지정 면적도 전국에서 손꼽힐 정도로 넓다.-고산지대니 수종도 다르겠다.△참나무가 우세한 혼효림이다. 고산지대 치고는 굴참나무가 많아서 양묘협회 관계자들이 신기하다고 말하더라. 굴참나무는 표피가 두껍고 나뭇잎에 수분이 많아 화재에 강한 ‘내화 수목(耐火樹木)’이다. 참나무류와 함께 우리나라 극상수종(極相樹種·안정된 숲에서 나오는 수종)인 서어나무도 많다. 서쪽에 있는 나무라는 뜻의 ‘서목’이 변한 이름이다. 줄기 모양이 사람 근육처럼 울퉁불퉁한 것이 특징이다.-수목원마다 대표하는 식물이 있다. 경북수목원이 자랑하는 희귀종이 있다면.△수목원 내 망개나무 자생지가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망개나무는 산림청 지정 희귀식물로 세계적으로 희귀한 수종이다. 충청도와 경북 북부에만 보이는 고산수종으로 경북수목원의 깃대종(한 지역의 생태계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종)이다. 경북수목원에 많이 서식하는 희귀식물은 백리향과 노랑무늬붓꽃이다. 울릉도 식물원에 일부 있고 다수의 희귀종은 관람 구역 이외에 많다.-관람객들의 출입 가능한 구역은 어디까지인가.△경북수목원의 관할구역은 2926㏊로 관람구역(55㏊)과 보존구역(2871㏊)으로 나뉜다. 수목원에 방문하면 관람구역 안의 고산식물원, 울릉도·독도식물원, 희귀식물원 등 26개 분원을 둘러보게 된다. 다음으로 수목원 등산로와 거의 유사한 14.62㎞의 생태관찰로가 있다. 관람구역은 관리팀에서 매일같이 보살피고, 생태관찰로는 수시로 점검한다. 이외 보존구역은 1년에 10㏊씩 숲가꾸기 사업을 실시하는데, 숲가꾸기의 가치를 생각하면 면적이 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수목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되나.△정규직원 7명과 공무직 6명, 산림 관리원들까지 합치면 45명 정도 된다. 주요 부서는 수목원을 관리 운영하는 운영지원팀, 식물종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보존연구팀, 생태체험 프로그램과 전시원을 관리하는 숲문화팀이다. 나를 포함해 8명은 수목원 내의 직원 숙소에서 생활하며 식물들을 보살핀다. -수목원이 공원이나 식물원과 다른 점은.△수목원의 본래 목적은 식물유전자원의 보전이다. 경북수목원은 해마다 300여 종의 종자를 채취해서 반은 자체 보관하고 나머지는 백두대간 수목원의 종자저장소(시드볼트)에 기탁한다. 두 군데에서 병행해서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함이다. 식물원은 풀과 나무 등 식물을 가리지 않는 박물관이라면 수목원은 주로 나무 위주이다. 수목원에 피는 꽃은 특별하게 다가오는지 꽃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맘때면 수국이 개화했는지를 묻는 전화가 걸려온다.-수국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은가.△여름이면 수국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삼미담(森未潭) 주변과 전시온실 앞으로 가면 산수국이 피어있다. 우리가 기다리는 수국 명소는 침상원(지면보다 낮은 정원으로 계단식으로 조성)이다. 수국으로 꾸며 놓은 화계(花階)가 두 줄 있다. 바람막이를 할 수 없는 구조라서 겨울철 추위를 잘 견디는 것이 관건이다. 이곳 찬바람이 워낙 매서워야 말이다. 올해는 꽃송이가 풍성하길 바라며 가지를 정리하는 등 여러모로 강구하고 있다.-꽃을 피우는데 그렇게 정성을 들이는지 몰랐다.△경북수목원은 고산지대라 철쭉이나 산벚처럼 산에서 자생하는 종류를 제외하곤 꽃을 잘 못 피운다. 볼거리를 원하는 관람객을 위해 작년에 장미와 맥문동을 심었다. 영하 20도 아래의 거센 겨울바람을 막기 위해 일일이 바람막이를 세운 덕에 장미가 활짝 피었다. 중앙광장 소나무 아래엔 맥문동을 5만4천본 심고 겨우내 짚으로 덮어놓았는데 곧 개화할 것이다.-계절별 수목원의 매력은 무엇인가. 관람객이 많이 찾는 계절도 궁금하다.△봄꽃은 도심보다 보름 이상 늦지만 단풍은 열흘 정도 일찍 든다. 봄은 더디고 가을은 서둘러 오는 셈이다. 관람객이 많은 계절은 가을이다. 삼미담 앞의 단풍이 절경이다. 겨울에는 눈이 있느냐는 문의가 자주 온다. 시내에 비가 오면 여긴 눈이 온다고 생각하면 된다. 눈이 귀했던 지난겨울, 지형이 움푹 들어간 전시구역만 눈이 쌓여 다들 신기하다고 했다.-경북수목원에서 반드시 보고 가야 할 하나를 꼽는다면.△삼미담(森未潭)은 꼭 들러야하는 곳이다. ‘숲에서 미래를 보는 연못’이라는 이름부터 얼마나 멋진가. 수련과 애기부들 등이 서식하고 지금은 노랑어리연꽃을 볼 수 있다. 삼미담 옆 창포원은 꽃창포로 뒤덮인 습지이다. 빽빽하게 들어찬 꽃창포 사이로 올챙이들이 꼬물거리는 재미난 곳이다. 해발 730m에 위치한 전망대 ‘영춘정(봄을 맞이한다는 뜻)’은 대부분의 관람객이 거쳐가니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반면 숲해설전시관을 지나쳐가는 경우가 많다. 수목원 입구에 위치한 전시관은 숲해설가들이 상주하며 설명을 해주고 안내서도 구비되어 있다. 지난 14일부터는 올해 새로 제작한 식물표본을 전시하고 있다. -안 그래도 식물표본실을 둘러 보고 왔는데, 제작 과정이 흥미로웠다.△식물표본은 식물의 DNA까지 가진 가장 효율적인 학술적, 교육적 식물 자료이다. 식물 연구에 가장 기본이 되는 식물표본 채집은 ‘수목원 코디네이터’가 참여한다. 채집한 식물을 세척하고 핀센으로 일일이 펴고 압착, 건조까지 품이 드는 작업이다. 레진 기법을 활용한 표본은 산뜻함과 화사함을 더한다.-지대가 높고 숲이 우거져 야생동물도 많겠다.△창포원 습지는 멧돼지들의 목욕탕이다. 습지에서 뒹구는 멧돼지의 몸집이 얼마나 큰지 섬뜩할 정도였다. 삼미담에 오래 살던 팔뚝만 한 잉어를 4년 전 수달이 잡아먹었다고 한다. 그 후 오리를 키웠지만 삵이 전멸시켰다. 올해 다시 잉어를 키우는데 수달이 올까 마음을 졸이며 지켜보고 있다.-새소리도 끊이지 않는다.△손바닥에 땅콩을 올려놓으면 곤줄박이가 날아와서 물어간다. 사무동 옆으로 할미새가 자주 보인다. 노랑할미새와 딱따구리, 어치, 직박구리, 까마귀, 참새, 박새 등도 많다. 유아숲 체험장의 목조는 딱따구리가 여기저기 구멍을 내놓았다. 수목원에는 산책하며 듣기 좋은 배경음악이 흐르는데, 지저귀는 새소리가 좋다고 볼륨을 낮춰달라는 관람객이 있었을 정도다.-면적이 넓고 탐방로, 등산로, 임도가 여러 갈래여서 관리가 쉽지 않을 것 같다.△2005년 개원해 시설이 노후된 편이다. 시설물의 유지와 보수에 투입되는 현장인력들이 안전하게 작업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애써 가꿔놓은 숲을 한순간에 잃게 되는 산불은 가장 우려되는 부분이다. 등산객들도 인화물질은 가져오지 않도록 주의를 부탁드린다.-30여 년 산림 공무원으로서 바람이 있다면.△당장 눈앞의 작은 묘목은 엉성해도 세월이 흐르면 울창한 숲이 된다. 산은 늘 들인 노력보다 더 크게 보상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수목원을 찾도록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 올해는 전망대로 가는 낡은 목계단을 복구하고 삼미담에 낮은 분수대를 세운다. ‘산림복지’라는 말이 있다. 산림을 활용해서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하는 것을 말한다. 수목원을 단장하고 쾌적한 산림을 더 많은 관람객들이 즐기도록 만드는데 자부심을 느낀다.이종환 관리소장은경북대학교 농학과를 졸업하고, 1991년 김천시청 녹지과를 시작으로 임업 공무에 몸담은 지 30년이 넘었다.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소와 산림소득개발원, 산림생태과학원, 도청 산림자원과를 거치며 산림분야 정책과 현장을 두루 섭렵했다. 주로 산림재해를 예방과 복구, 황폐화를 막는 사방 분야에 매진했다. 2020년에는 산림환경연구원 사방기술교육센터장이 되어 우수한 경북지역 사방기술을 전파하고 전문 인력을 양성했다. 지난해부터 경상북도수목원 관리소에서 일하면서 경북지역의 산림자원 보존과 식물자원화 연구를 이끌고, 도민에게 심신 휴양과 자연체험 교육장을 제공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배은정 작가

2023-06-19

“화약을 사용하는 가장 아름다운 일… 환호와 박수에 환희”

국내 3대 불꽃쇼에 드는 포항국제불빛축제가 4년 만에 포항의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불꽃은 사그라들어도 그날의 밤하늘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역대 최대 규모로 치러진 축제에서 사람들은 한국팀의 ‘그랜드 피날레’를 단연 압권으로 기억한다. 벅찬 감동의 불꽃쇼 뒤에는 20년 경력의 김주식 불꽃 디자이너가 있다. 그는 불꽃 디자인을 불꽃이라는 물감으로 밤하늘에 그림을 그리는 일로 비유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그저 태어나지 않는다. 찰나의 예술이라는 불꽃은 1초를 서른 번으로 쪼개고 색과 위치, 모양을 철저하게 계산해 배치한 결과라고 한다. -올해 포항국제불빛축제의 그랜드 피날레는 단연 압도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포항국제불빛축제는 10여 년째 연출하는 축제라 애정이 크다. 포항국제불빛축제가 열린 형산강 무대는 부산 광안리와 비견되는 최장 거리의 무대다. 무대의 장점을 살려 웅장하고 가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노르웨이 출신의 작곡가인 토마스 베르게르센(Thomas J. Bergersen)의 ‘지구 생성(Creation of Earth)’을 선곡한 것도 장엄하고 강렬한 분위기를 위해서다. 화약은 컬러가 다채롭게 구현되는 종류로 사용했다. 하나의 색이 단발류로 터지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발이 여러 색으로 변하는 식이다. 역동적인 퍼포먼스로 웅장함과 감동을 전하고자 했다.-한 편의 웅장한 서사시를 연상케 했다. 형산강에서 열린 올해 포항국제불빛축제를 디자인할 때 포인트를 준 부분은.△연기가 하늘에 꽉 차기 전인 초반에는 고가의 ‘타상 불꽃’과 ‘장치 불꽃’을 사용해 연출 효과를 극대화했다. ‘타상 불꽃’은 하늘 높이 올라 높은 고도에서 터지는 불꽃이고, ‘장치 불꽃’은 낮은 고도에서 터진다. ‘타상 불꽃’의 경우 점화된 다음 하늘로 올라가는 시간이 있어서 개화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장치 불꽃’은 점화하자마자 바로 볼 수 있어 섬세한 연출이 가능하다. 그랜드 피날레의 중반부에는 다양한 색상의 ‘장치 불꽃’을 사용했다. 작은 불꽃이 분수나 지뢰처럼 분출되거나 혜성의 불꼬리처럼 길게 늘어진 형태를 봤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후반부에는 형산강 전체를 골드빛의 불꽃으로 표현했다.-국내 3대 불꽃쇼로 꼽히는 포항국제불빛축제만의 차별성은 무엇인가.△포항국제불빛축제가 열리는 형산강의 최고 장점은 국내 최장거리의 무대에서 초대형 불꽃 연출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2019년 형산강에서 1킬로미터 불꽃쇼를 처음 시작했다. 이번에도 열흘 동안 현장을 오가면서 하루에 7~8킬로미터는 족히 걸었다. 물론 부산불꽃축제가 열리는 광안리도 무대 길이로 치면 포항 버금간다. 하지만 관람석과의 거리는 포항이 으뜸이다. 형산강의 강폭은 360미터로, 국내 불꽃쇼 가운데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불꽃을 감상할 수 있다.-순식간에 밤하늘을 수놓고 사라지는 불꽃은 찰나의 예술로 불린다. 찰나의 불꽃쇼가 탄생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나.△축제를 기획하고 행사 운영을 총괄하는 프로젝트 매니저(PM)가 있다. 프로젝트 매니저가 축제조직위원회, 문화재단과 큰 틀에서 윤곽을 잡으면 디자인이 시작된다. 계절이나 현장 상태를 충분히 확인한 다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음악 선곡과 편집이다. 정해진 음악의 리듬에 맞게 화약을 배치하는 작업이 그다음이다. 그렇게 작성된 ‘작업지시서(어드레스시트)’에 따라 물류팀과 기술팀은 화약을 준비한다. 현장 세팅은 행사 열흘 전부터 한다. 화약 배치를 할 땐 디자이너도 한 발 한 발 낱낱이 확인해야 한다. 혹여라도 일어날 수 있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열흘 동안 현장에서 움직인 인원이 하루 50명 정도였으니, 세팅부터 철수까지 100여 명은 족히 수고했을 것이다. 포항국제불빛축제의 불꽃쇼는 백여 명의 인력이 4개월 넘게 공을 들인 결과이다.-음악에 불꽃을 입히는 디자인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달라.△음악의 리듬에 맞춰 어떤 화약을 어느 위치에 얼마나 쓸지를 정하는 일이다. 불꽃의 모양과 색깔, 각도, 위치를 일일이 계산해 프로그래밍한다. 불꽃이 여러 색을 내는 것은 화약물질과 금속이 일으키는 연소반응 때문이다. 어떤 물질을 더 넣느냐에 따라 불꽃의 색과 패턴은 천차만별이므로 우리가 관리하는 불꽃 종류만 천 가지가 된다. 축제에 쓰일 수만 발의 불꽃을 음향의 파장에 맞춰 타이밍을 디테일하게 계산한다. 안전하게 화약을 터트리려면 얼마나 안전거리가 필요한지도 치밀하게 계산해야 한다.-하늘에서 터지는 불꽃을 보며 그 뒤에 누가 있는지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어떤 계기로 불꽃 디자인을 시작하게 됐나.△대학생이던 2000년에 ‘서울세계불꽃축제’를 보고 불꽃의 매력에 빠졌다. 화학을 공부하던 학생이라 더 마음을 빼앗겼던 것 같다. 이듬해 ‘화학류 관리기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지금까지 불꽃쇼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처음 3~4년간은 암기와 배움의 연속이었다. 불꽃마다 터지는 시간과 모양, 지속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폭죽 하나하나의 특징을 완벽하게 파악해야 불꽃을 디자인 할 수 있기 때문이다.-불꽃 디자이너의 요건이 따로 있나.△자격증이 필요한 일은 아니다. 디자이너라고 하지만 사실 콘텐츠 기획에 가까운 일이다. 불꽃을 좋아하고 음악적 감각이 있으며 화약의 특성이나 발사 시스템을 잘 알면 된다.-불꽃 디자인을 시작한 지 20년 차인데, 불꽃축제에도 트렌드 변화가 있나.△장비의 성능이 월등하게 좋아졌다. 과거에는 사람이 음악에 맞춰 하나씩 버튼을 조작해서 불꽃을 쏘아 올렸다. 그때도 시스템은 있었지만 불완전해서 수동으로 거들어야 했다. 중소 규모의 불꽃업체가 첫 직장이었는데, 얼마나 긴장되던지 발사 버튼을 누르면서 진땀을 뺐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컴퓨터가 지시하는 전기신호로 불꽃을 자동으로 발사한다. 발사 시점을 0.03초 단위까지 조정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나왔다. 1초를 30프레임으로 쪼개어 연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덕분에 음악과 불꽃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한 편의 이야기를 하는 ‘스토리텔링 불꽃쇼’ 연출이 가능해졌다. 이처럼 한 땀 한 땀 만든 불꽃은 현장에서 영화처럼 흘러간다.-불꽃이 밤하늘을 수놓는 순간 디자이너는 뭘 하나.△연출한 의도대로 잘 나오는지 살핀다. 수정을 거듭하면서 수없이 마주한 장면이다.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 실사와 거의 비슷하게 구현되기 때문에 지겹도록 본 장면이지만 현장의 분위기는 다르다. 현장에서는 오감으로 전해지는 공기의 울림이 있다. 화약이 펑 하고 터지면서 만드는 공기의 울림이 전율을 전한다. 무대에서 멀리 떨어져서 관람하거나 혹은 영상으로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떨림이 있다.-오차 없이 준비해도 의도대로 안 되는 것이 현장의 속성 아닌가.△실수로 세팅을 거꾸로 한 적이 있다. 생각보다 결과물이 좋아서 한동안 그렇게 했다. 각도가 틀린 적도 있는데 이것도 나름 괜찮았다. 의도치 않은 실수가 더 나은 연출로 이어지는 사례는 현장이 주는 선물이다.-불꽃쇼가 끝나면 드는 감회는. 디자이너의 감회는 관람객과는 다를 것 같다.△관중의 환호와 박수에 환희를 느낀다. 디자이너뿐 아니라 설치하고 발사까지 함께 한 모든 기술자들이 관중의 환호에 그동안의 노고를 잊는다. 화약은 세 가지의 기능이 있다. 산업적인 측면이 아니면 생명을 해치거나 혹은 살리거나. 화약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일이니 이만큼 좋은 일이 어딨겠나. 화약을 사용하는 가장 아름다운 일을 하는데 자부심을 느낀다.-불꽃 디자이너가 생각하는 좋은 불꽃쇼는 무엇인가.△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이다. 더 크고 화려한 불꽃도 안전을 기반으로 가능하다. 그 다음으로 연출과 화약의 퀄리티가 중요하다. 그림도 물감이 좋아야 하듯이 불꽃은 화약의 품질이 중요하다. 불꽃 디자인은 밤하늘을 캔버스 삼아 불꽃이라는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다.-앞으로 연출하고 싶은 불꽃쇼가 있나.△한국의 불꽃 디자인 능력을 전세계에 알리고 싶다. 국내 3대 불꽃쇼를 전담해오면서 빠듯한 일정에 해외를 거의 나가지 못한다. 우리가 가진 세계적인 실력을 해외의 권위 있는 대회에서 인정받고 싶다. 우리나라의 불꽃 연출력과 기술력으로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전하고 싶다. 김주식 불꽃 디자이너는 건국대학교 화학과를 나와 중소규모 불꽃업체에서 경력을 쌓고 2012년 한화에 입사했다. 현재 한화 컨텐츠사업팀 과장이다. 포항국제불빛축제와 부산불꽃축제, 평창동계올림픽 개폐막식과 메달플라자, 전국체전 100주년 개회식 기념 불꽃쇼 등을 디자인했다. 1년에 10여 건의 불꽃쇼를 담당하고 있다. 2014년부터 포항국제불빛축제를 디자인하고 있으며 ‘2023 포항국제불빛축제’에서 웅장한 스토리텔링 기법의 연화 연출로 ‘그랜드 피날레’를 장식해 관람객들의 갈채를 받았다. /배은정 작가

2023-06-12

지역 예술가들 ‘형산장여관’에 묵다

여관의 사전적 의미는 ‘여행객이 묵는 집’이다. 누군가에게는 어쩌다 한 번 머무는 공간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에게는 거듭 돌아오는 장소일 수 있다. 어떻든 간에 떠나는 자들의 공간인 여관은 여인숙을 밀어내고 한 시대를 풍미하다 지금은 신축 숙박업소에 밀려 사라졌거나 후줄근한 이미지로 연명한다. 포항시 남구 포스코대로 436번지에도 시류를 놓쳐버린 여관이 있었다. 과거에는 여행객이 묵었지만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지금은 예술이 묵는 곳이 된 ‘형산장여관’이다. 시간의 더께를 그대로 간직한 공간은 예술과 어우러져 상상 이상의 공간이 됐다. 형산장여관을 ‘ART436’으로 재탄생시킨 문화예술협동조합 ‘잇다’의 안성용 대표를 만났다. 그는 30년 넘도록 송도의 시간을 렌즈에 담는 다큐멘터리 사진가이다. -낡은 여관은 어떻게 갤러리가 됐나.△문화체육관광부 공모사업으로 지원받고 나머지는 예술인들이 십시일반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허가한 단체는 전국에서도 드문 것으로 안다. 지난해 인가를 받고 꿈틀로 인근의 비어있는 건물을 수소문한 결과, 포항의 스토리를 간직한 건물을 찾았지만 건물주는 예술가들에게 임대하기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매매하길 원했다. 그러다가 오랫동안 비어있던 형산장여관과 연이 닿았고 포스코 집수리 봉사 단체와 예술인이 힘을 모아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낡고 거친 그대로의 인테리어가 독특하다.△별다르게 덧댄 건 없고 벽을 턴 정도이다. 처음에 들어가 보니 10년 전 달력이 그대로였고 천장에서는 빗물이 샜다. 10개 넘는 객실마다 침대와 화장대, 화장실의 세면대와 양변기를 뜯어내니 쓰레기양이 어마어마했다. 원형을 보존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최대한 손을 덜 댔다. 전시장이라면 하얀 벽이 기본이지만 부서진 벽돌을 그대로 두었다.-칠이 벗겨진 간판도 그대로다.△사실 초기에는 관람객뿐 아니라 일부 회원들도 민망하다고 간판을 떼버리자고 했다. 여관에 들어가는 걸 누가 보고 오해라도 하면 어쩌냐는 말도 하더라. 철거는 가장 쉬운 방법이지만 한번 파괴되면 되돌리기 어렵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다들 포항역을 아쉬워하지 않나. 포항역은 포항 시민의 추억이 서린 곳이다. 역사는 한번 지워지면 복구가 안 된다. 오래된 것은 파괴할 것이 아니라 고쳐 써야 한다.-갤러리가 되기 전 형산장여관의 스토리를 들은 바 있나.△형산장여관은 1970년대 만들어졌다. 형산큰다리 건너기 직전에 위치해 포스코 협력업체나 연관업체 직원들이 출장와서 묵었다고 한다. 한창 경기가 좋을 때는 지하 주점도 제법 돈을 끌었다고 들었다. 세월이 흐르고 더 좋은 숙박시설이 생기면서 이용객이 줄었다.-형산장여관을 갤러리로 만든 주축은 문화예술협동조합 ‘잇다’이다. 예술가들이 협동조합을 조직한 이유는.△ 작가들에게 늘 아쉬운 것은 관객과 만나는 공간이다. 규격화된 공산품은 온라인으로 봐도 상관없지만 예술품은 실물을 영접해야 진가를 알 수 있다. 작가들이 재능을 마음껏 펼치고 판매를 통해 적게나마 수익을 창출하는 공간이 필요했다. ‘ART436’은 작가들의 필요를 모두 담은 공간이라고 보면 된다. 작가 개인은 이루기 어려워도 모이면 힘이 커진다.-기존 전시 공간으로는 부족한 편인가.△50만 인구라면 최소 50곳의 전시장이 있어야 한다. 포항에는 시립미술관, 문화예술회관, 중앙아트홀, 문화예술팩토리(북구청), 꿈틀로 스페이스298 등의 전시장이 있다. 이외에도 몇몇 있지만 예술을 바라보는 형편없는 시각을 드러낼 뿐이다. 시립미술관은 한국 미술의 흐름을 보여주는 공공미술관의 역할이 있다. 지역 작가들이 전시하기 좋은 곳들은 기획전만 하거나 원하는 일정을 잡기 어렵다. ‘ART436’은 지역 작가들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대관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7회 정도 전시를 했다. 현재는 포항예술문화연구소의 정기전 ‘시선의 경계’가 열리고 있다.- ‘ART436’이 된 형산장여관에 숙박객 대신 예술가들이 묵는다고.△ 1층은 갤러리이고 2~3층은 입주작가 작업실이다. 회화와 조각, 사진, 영상, 디자인, 설치, 문학 등 전 장르의 작가들이 입주해 있다. 입주작가는 공모를 통해 모집했다. 월세는 10~15만원으로 전기나 수도요금은 조합의 프로젝트를 통해 충당한다. -문화예술협동조합 ‘잇다’의 특별한 운영 원칙이 있나.△ 특별한 것은 없다. 예술품을 생산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열려있다. 예술의 사회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모여 즐겁게 참여한다. 사진을 하다 보니 주위에 사진가가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여러 장르의 작가들이 모이니 액자에만 갇혀있던 작품이 설치미술과 결합하고 장르를 넘나들면서 작품이 풍부해졌다.-궁극적인 예술 활동은 예술가 개인의 몫으로 여겨진다.△물론 장단점이 있다. 문이 항상 열려있는 나의 꿈틀로 작업실은 동네 사랑방이다. 손님이 오면 커피를 내려주는데 종이컵 수거함이 금세 꽉 찬다. 하지만 그런 만남 속에서 협업 프로젝트가 나온다. 나의 작업을 위해서는 따로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 낮에 사람을 만나느라 여유가 없는 날은 밤늦은 시간을 빌려와야 한다.-30년 넘게 포항 송도를 렌즈에 담아왔다. 요즘도 송도를 촬영하나.△강의가 없을 때는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송도를 어슬렁 거린다. 대부분의 사진 촬영이 송도 해변이나 송도의 뱃공장 주변에서 이뤄진다. 계절마다 아침저녁으로 풍경이 다르고 찾는 이들도 달라 변화무쌍하다. 뭐 그렇게 찍을 것이 많냐고 하지만 매일 찍는 사람이 더 촬영할 거리가 많다. 요즘은 동빈대교 교각 기둥이 올라가는 모습이 주요 기록 대상이다.-송도에선 너나없이 사진을 찍는다. 사진가의 렌즈가 향하는 곳은 일반과 어떻게 다른가.△사진가는 대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시각이 드러나야 한다. 내가 다른 걸 찍는다면 그건 두 가지다. 하나는 시간을 수용하는 방식이다. 사진을 찍는 순간 시간은 정지된다. 사진은 시간을 가두는 일이다. 자전거를 타는 풍경을 찍는다고 치자. 어디든 렌즈를 들이댈 수 있지만 자전거의 뒤를 표현한다면 곧 사라지는 시간이 개입된 것이다. 대상에 따라 시간을 어떻게 담을 것인가를 매 순간 고민한다. 그리고 주목하는 또 하나는, 대상과의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내용이다. 나는 한 공간에서 다른 커뮤니케이션이 생성되는 체계를 주목한다. 같은 공간 속의 인물들이 동일한 목적에 충실한 장면이 아니라 공감대가 깨진 상황을 포착한다. 다소 엉뚱하고 생뚱맞은 장면이 던지는 새로움과 신선함을 즐긴다.-송도를 고집하는 이유는 뭔가.△작가는 흉내 낼 수 없는 무엇을 해야 한다. 지난 시간을 담은 사진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 송도해수욕장의 전성기는 60~70년대였다. 내가 포항에 온 1990년대 송도는 쇠락의 길을 걸었지만 올여름 재개장을 앞두고 있다. 무려 16년 만이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목격한 기록자이다. 송도 모래사장이 도로가 되었다가 다시 해수욕장이 되는 과정을 촬영했다. 해수욕장이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살아나는 모든 시간을 기록했으니 나는 운이 좋다.-자신의 작업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작가는 작업을 함으로써 의미와 소통이 이뤄진다. 작업을 제대로 하려면 위대하게 해야 한다. 슬쩍 폼만 잡아선 안 된다는 말이다. 나는 아직 작업량이 많지 않다. 30년간 송도 촬영만 몇십만 컷을 했지만 의미 있는 작업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물리적으로 하루에 필름 10롤은 찍어야 한다. 돈으로 치면 하루 30만 원, 1년에 억 단위의 필름을 소비해야 한다. 구구한 변명이지만 현실이 그렇다.-송도의 기록을 통해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송도 사진을 전시하는 뮤지엄을 만들고 싶다. 그러려면 송도에서 촬영한 100년의 사진이 필요하다. 포항의 2세대 사진가인 이도윤 선생이 60년대부터 송도를 담았다. 선생은 한국사진작가협회의 산증인으로 사진의 미학적 측면을 추구한다. 태풍에 부서지거나 손상된 송도 풍경이 거의 없는 이유다. 황송하게도 필름을 통째로 넘겨주셔서 디지털 작업을 해놓았다. 이도윤 선생의 60년에서 80년대 송도 사진과 90년도 이후 나와 후배들의 사진이 있으니 송도 100년 사진 전시관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전국의 사진하는 친구들이 포항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사진 잘하는 도시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포항은 빛의 도시이고 사진은 빛의 예술이다. 지금까지 포항 경제의 주축이 포스코였다면 앞으로는 사진을 비롯한 문화가 차세대 먹거리가 될 것이다.-렌즈에 담고 싶은 단 한 컷이 있다면.△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아직도 송도 주변을 서성거린다. 내일 나타나길 바란다.안성용 사진가는경일대학교 사진영상학과를 졸업하고 대구대학교에서 사진학 석사와 조형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0년 포항공대 홍보과 교직원으로 포항에 정착하면서 송도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2001년부터는 전업으로 사진에 전념하고 있다. ‘더, 포항’ 외 5권의 사진집을 펴냈고, 24편의 방송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했다. 현재 포항사진작가협회 회원이며, 문화예술협동조합 ‘잇다’ 대표이사이다. 국내외 사진작가들의 축제인 ‘사진의 섬 송도’를 기획해 올해로 제7회 행사를 앞두고 있다./배은정 작가

2023-05-29

“마을단위에서 공동체 안녕 비는 굿은 동해안별신굿 유일”

사전에서 ‘굿’을 찾으면 ‘종교 제의’보다 ‘신명나는 구경거리’가 먼저 나온다. 여러 사람이 모여 떠들썩하게 노는 신명 한 판이 지난 2일 포항시 송라면 방석 1리에서 펼쳐졌다. 방파제 앞 간이무대에서 밤새도록 이어지는 무박 2일의 굿판은 노래와 춤, 연극과 사물놀이가 어우러진 문화공연 콘텐츠의 보고였다. 16개의 굿거리는 각각 독립적인 주제와 색깔로 펼쳐졌다. 흥이 난 주민들은 굿판으로 나와 춤을 추거나 “얼씨구”, “아이고 내 팔자야” 같은 후렴구를 넣으며 축제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굿판의 무녀와 악사는 젊은 세대가 많았다. 한때 무속신앙으로 천대받던 별신굿이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으면서 배움을 청하는 국악도가 많아진 덕이다. 동해안별신굿의 최연소 전승교육사로 지정받아 별신굿의 현대화와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는 동해안별신굿보존회 정연락 사무차장과 만났다. 인터뷰는 행사 전날 따로 자리를 마련해 진행됐다. -굿을 어떻게 접하게 됐나.△고교 시절 청소년 수련단체 활동을 하며 사물놀이부터 접했다. 야구 선수를 하다 부상으로 그만둔 상황이라 사물놀이에 더 푹 빠졌던 것 같다. 포항에는 사물놀이를 배울 곳이 없어 찾던 중 당시 부산 시립국악관현악단의 타악 연주자던 김정희 선생(이 시대 마지막 화랭이라고 불린 인물로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희과 교수)이 구룡포에 거주하는 사실을 알게 됐다. 19살부터 그 아래 들어가서 배웠다. 남들이 미쳤다고 할 정도로 틈만 나면 연습하고 굿판마다 잔심부름을 하며 따라다녔다. 그러다 하루는 현재 동해안별신굿보존회장인 김동연 양어머니가 “내 아들 할래?”라고 툭 말을 던졌고, 그 한 마디가 인연이 되어 30여 년 한 길을 걸어왔다.-동해안별신굿에서 최연소 전승교육사로 지정받았다고.△국가무형문화재는 인간문화재로 불리는 보유자를 정점으로, 명예보유자-전승교육사-이수자-전수생이라는 전승체계를 가지고 있다. 김석출(1922-2005) 명장 가계의 최고령인 김영희 선생이 명예보유자이고, 아래로 5명의 전승교육사가 있다. 나는 마흔 살에 동해안별신굿 전승교육사가 됐다. 다른 부문의 전승교육사들의 평균 연령이 70대이니 상당히 이른 편이다.-흔히들 굿을 하는 무당은 신내림을 받는다고 생각한다.△동해안별신굿은 신내림이 아니라 예능을 배워서 대물림되는 세습무이다. 동해안별신굿의 근간은 인간문화재 김석출 만신(무당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김석출 명장은 조부에게 무업을 배운 3대 세습무이고, 현재 굿판을 함께 하는 김영희(김석출의 장녀), 김동연(김석출의 2녀), 김동언(김석출의 3녀), 김동열(김동언의 남편), 김영숙(김석출의 형인 김호출의 며느리) 선생이 4대이다. 내가 속한 5대부터는 양자나 양녀를 들여 세습되는 학습무 형태이다. 요즘 국내 대학 국악과에는 동해안별신굿이 필수 커리큘럼이다. 타악 수업 중에서도 가장 난도가 높다. 동해안별신굿을 배우고 싶어 보존회로 찾아오는 국악도가 많다.-동해안별신굿을 배우고 싶어 하는 이유는 뭔가.△동해안별신굿의 무악(巫樂)은 타악기로만 반주된다. 남성 악사들에 의한 타악 장단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복잡하고 정교한 경지를 보여준다. 서양에 재즈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동해안별신굿이 있다고 할 정도로 자유스러움과 즉흥성이 뛰어나다. 호주의 유명 재즈 드러머가 김석출 명인으로 인해 음악 인생에 큰 변화를 겪는 여정은 영화 ‘땡큐 마스터 김’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90년대 영국 런던 로열홀에서 동해안별신굿 공연을 보고 한국에 배우러 온 사이먼 빌리지라는 친구가 있었다. 김정희 선생 아래서 나와 함께 별신굿을 공부하고 박사논문까지 썼는데, 지금은 영국 더럼대학교 인류학과 교수로 있다.-동해안별신굿이 전승되는 데 있어 포항의 역할은.△동해안별신굿의 핵심 전승자가 포항에서 나고 자란 김석출 명장이다. 한국 3대 무당으로 서쪽은 김금화, 진도의 박병천, 동쪽은 김석출을 꼽는다. 그중에서도 김석출 명장은 무당의 왕이라는 의미로 ‘샤먼 킹’이라 불렸다. 따라서 포항에는 동해안별신굿 원형의 텍스트가 많다. 8,90년대 중반까지 영일만축제 기간에 동해안별신굿 공연을 하면 포항실내체육관이 꽉 찰 정도로 관객이 많았다. 하지만 90년대부터 한동안 단절되었고 최근에 와서 다시 관심을 받고 있다.-김석출 명장에 관해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태평소와 장구, 꽹과리 등 모든 민속 악기에 탁월했다. 손수 만들어 분 태평소 연주는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러 ‘김석출류 태평소 산조’를 일구었다. 세계 각국의 전통음악가나 재즈음악가와 교류하며 음반을 남겼다. 동양철학에 능해 사주나 이사 방위, 신수를 손으로 짚어보는 수장(手掌)을 잘 봤다.-포항 송라면 방석리에서 열린 동해안별신굿을 주민들은 풍어제라고 부른다. 풍어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82호이고 동해안별신굿은 제82-1호인데, 어떤 관계인가.△원래 명칭은 동해안별신굿이 맞지만, 일제강점기 무속신앙으로 굿을 금지하면서 풍어를 위한 기원이라고 구슬려 풍어제라는 용어를 썼다고 들었다. 동해안은 수심이 깊고 바람이 강해 80년까지만 해도 바다에서 생사를 달리하는 어민들이 많았다. 이들의 영혼을 달래고 풍어를 기원하며 마을이 화합한다는 의미도 있다. 마을 단위에서 공동체가 잘 되도록 비는 굿은 동해안별신굿이 유일하다.-요즘도 별신굿을 하는 마을이 많이 남아있나.△최길성 민속학자의 조사에 따르면 1970년대에는 동해안 마을 200곳에서 별신굿을 했지만 지금은 80곳으로 줄었다. 어업량이 저조하고 마을 구성원이 부재한 탓이다. 현재 포항에는 송라면의 지경, 화진, 방석과 호미곶면의 대보, 강사, 구룡포읍의 삼정, 구룡포리, 장기면의 황바우(계원리) 수영포(영암리) 등 9곳에서 이어진다. 6개 마을에서 이어지는 부산보다 많다. 다만 부산의 굿판은 6박 7일 일정으로 규모가 크지만 포항은 무박 2일이 일반적이다.-방석리 동해안별신굿의 진행 과정은.△부정굿, 당맞이굿, 하회굿, 세존굿, 조상굿, 성주굿, 천왕굿, 놋동이굿(놋 세숫대야를 입을 물고 하는 굿), 심청굿, 손님굿, 제면굿. 용왕굿, 꽃노래, 뱃노래, 등노래, 거리굿을 한다. 한 굿거리마다 무녀 1명과 악사 예닐곱 명이 참여하며 보통 1~3시간 걸린다. 방석리 별신굿을 위해 보존회원 20여 명이 왔고, 이들이 돌아가면서 공연을 한다.-마을마다 내용의 차이가 있나.△마을마다 풍습이 다르다. 예전 포항 이가리의 경우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지신밟기를 했지만 방석리는 하지 않는다. 대신 방석리에는 무당 하나를 바다에 빠뜨리는 풍습이 있다. 바다에 용떡을 띄워 헌식하고 돌아오면서 ‘액맥이(액막이)’의 하나로 굿판에 처음 온 남성 악사를 물에 빠뜨린다. 조사리도 이 풍습이 있었지만 지금은 굿을 안 하니 방석리가 유일하다. -굿판을 장식하는 종이꽃인 지화도 직접 만든다고.△우리 윗세대 악사들은 모두 지화(紙花)를 만들었다. 지금은 나를 포함해 한두 명만 만든다. 지화는 일상의 공간을 신성한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매개체이다. 지화를 놓은 그곳이 굿당이 되고 신들이 좌장 한다. 지화는 수개월 전에 만들어 숙성시켜야 한다. 큰 종이를 오려서 성형해놓고 잠을 재운 뒤 꽃을 끼워 완성해야 단단하게 고정된다.-굿판에 오르는 악사이자 지화 공예가이며 별신굿 연구자기도 하다. 현재 가장 몰두하는 작업은 무엇인가.△지화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고 2006년부터 매년 한두 차례 전국에서 전시를 열고 있다. 예전에는 굿판의 지화를 그대로 재현했다면 지금은 시대에 맞게 새로운 시도를 한다. 지화는 전시 작품으로도 무대 소품으로도 훌륭하다. 미학자와 디자이너, 미술사학자들과 함께 지화의 예술적 가치를 논한 자리가 있었는데 세계적인 경쟁력을 인정하더라. 올해도 3개의 전시를 준비 중이고, 내년에는 프랑스 파리문화원에서 전시와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할 예정이다.-동해안별신굿의 발전을 위해 바라는 바가 있다면.△동해안별신굿은 무악(巫樂), 무가(巫歌), 무무(巫舞), 연희극(巫劇), 지화(紙花) 5가지 분야로 나뉜다. 무악은 원체 관심이 집중되는 분야이고, 춤은 아내(홍효진 이수자)가 학위를 받았으며, 지화 연구는 내가 이어가고 있다. 노래 가사 격인 무가는 90년대 초까지 연구가 한창 이뤄지다 지금은 뜸한 상황이다. 동해안별신굿은 장편의 서사 무가가 탁월하고, 굿판에서 무녀의 기량은 서사 무가의 구연 능력을 든다. 무가 쪽 연구가 더 이뤄져야 균형이 맞지 않을까 싶다. 현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협의가 진행 중이다. 그러면서 생기는 또 하나의 바람은 전승관이다. 김동연 보존회장이 10여 년간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로 활동하면서 전국에서 배움을 청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들과 별신굿을 배울 공간이 만들어지길 바란다.정연락 전승교육사는포항 출신으로 1997년 동해안별신굿 보존회 악사로 입문했다. 고(故) 김석출 명인을 비롯해 당대 최고의 악사들에게 무악과 지화 제작 전반에 걸친 세습무 학습을 사사 받았다. 동해안별신굿의 학문적 체계화를 위해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석·박사를 취득했다. 동해안별신굿의 특색 중 하나인 지화로 15여 차례 전시를 했고, 한국의 무가를 주제로 10여 권을 저술했다. 동해안별신굿보존회 30주년 기념공연 ‘회상’(국립극장, 2015)을 비롯해 ‘굿이로구나’(부산국립국악원, 2019), ‘세자매 이야기’(서울 남산국악당, 2021), 탄생 100주년 명인 오마주 ‘김석출’(국립무형유산원, 2022) 등을 기획·연출하고 국내외 다수의 공연과 전시를 통해 동해안별신굿의 대중화와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다.배은정 1974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학과 졸업. TBC·포항MBC·경북교통방송 작가. ‘포항문화의 상징과 공간’ 공저/배은정 작가

2023-05-08

“피해 아동이 사회안전망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정인이 사건’ 당시 포항의 한 교회에서는 1인 시위가 오래 이어졌다. 정인이의 외가였지만 도움은커녕 방조를 넘어 학대에 동참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포항시민은 더 분노했고 미안해했다. 어느덧 추모의 열기가 식고 사건은 잊히고 있지만 정인이가 남기고 간 것들은 있다. 수많은 정인이들을 살리기 위한 법 개정과 대응 시스템의 강화, ‘학대피해 아동쉼터(이하 쉼터)’의 확충이 그것이다. 포항에 3곳인 쉼터 가운데 한 곳인 선린나래 아동쉼터에서 이정미 원장을 만났다. 간판도 안내표지도 없는 쉼터는 보통의 가정집과 다름없는 온기가 흘렀다. -쉼터 주소가 비공개인 이유는.△아동학대 신고가 들어오면 피해 아동은 가해자와 즉시 분리된다. 아동학대 사건에서 안타까운 건 피해 아동이 모든 걸 감당해야 한다는 점이다. 피해 아동이 안전하게 귀가하기 위해서는 학대 재발 방지를 위한 준비가 갖춰져야 하고 대부분의 가해자인 부모가 본인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아이를 데리고 가는 것은 금지된다.-내부는 여느 가정집과 다름없는 이곳을 소개한다면.△공동생활 가정 형태로 운영하는 학대피해 아동쉼터로 2018년에 설립됐다. 학대피해를 입은 0세~18세 미만 여자아이들이 이용한다. 이용 기간은 최장 9개월까지 가능하며 정원은 7명이다. 코로나19 시기에는 늘 정원이 차 있었다. 지난겨울에만 정원을 넘어 생활하다 지금은 한 명이 남아있다. 한꺼번에 몰릴 때도 있고 여유가 있을 때도 있는데, 인원 감소를 곧바로 학대 감소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쉼터를 몰라서 고통받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주로 어떤 학대를 받은 아이들이 오나.△부모로부터 신체적 학대를 받은 아이들이 많다. 그 외에도 성 학대와 방임, 유기 등 이유는 다양하다. 어린아이라는 이유로 학대가 너무나 쉽게 이뤄진다. 피해 아동이 사회의 안전망 속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최전선의 방어선이 바로 이곳이다.-학대피해를 입은 아동이 쉼터로 오기까지 과정은.△학대피해가 신고되면 시청 교육청소년과 아동보호팀 전담조사관이 경찰과 함께 출동하여 가해자와 아동을 분리한다. 성폭력 피해 아동의 경우 해바라기센터에서 진술과 조사를 맡고, 아동보호전문기관이 분리된 아동을 쉼터로 보내고 퇴소 이후까지 관리를 담당한다. 이 모든 과정을 시 아동보호팀이 총괄한다. 한 아이를 구하기 위해 여러 기관이 다각도로 긴밀하게 협조하는 시스템이다.-쉼터에서 아이들의 생활은 어떠한가.△아이들은 한밤중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갑작스러운 낯선 곳이 얼마나 두렵겠나. 처음에는 사람을 까칠하게 대하고 무엇보다 타인을 신뢰하지 않는다. 성 학대를 당했다면 남성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이 크다. 시에서 입소 통보가 오면 아이들 주소를 쉼터로 옮기고 곧바로 전학을 해서 학업에 공백이 없도록 한다. 상담과 심리치료를 통해 정서적 안정과 회복을 돕고, 학원이나 캠프 등 아동 개개별이 원하는 활동을 맞춤형으로 지원한다. 쉼터에서는 아이들이 역경에 좌절하고 깨지는 유리잔이 아니라 고무공처럼 역경을 발판 삼아 꿋꿋하게 다시 튀어 오르는 회복 탄력성을 키우도록 돕는다. 아이들이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예체능 활동은 물론 과외나 다양한 체험을 전폭적으로 지원한다. 사안이 경미하거나 빨리 가정으로 돌아간 아이들은 가정으로 복귀한 뒤에도 교사에게 연락을 하거나 상담을 받으러 오기도 한다.-쉼터에서 가정으로의 복귀 절차는.△아동학대가 발생하면 정부방침은 가정 복귀를 우선 과제로 삼고 시설로 입소시킨다. 한번 복지시설에 입소하면 양육자의 원가정복귀 의사가 있더라도 절차를 밟아야 한다. 부모와 아동이 준비되면 아동보호전문기관에서 ‘원가정 복귀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아동이 별 무리 없이 적응하고 부모도 약속도 잘 지키는지, 학대가 재발하지 않는 환경이 만들어졌는지 판단하는 것이다. 또한 아동과 양육자의 상담을 함께 진행하고 안정된 상황이 되면 통합사례회의를 거쳐 퇴소하게 된다. 최종 결정은 아동보호전문기관과 시 아동보호팀, 쉼터, 경찰 등 최소 3개 이상 기관이 참여하는 ‘아동학대 사례판정위원회’가 결정한다. 아동보호전문기관은 부모가 준비됐는지 판단하고, 쉼터는 아동이 귀가해도 좋은지 의견을 제시한다.-쉼터 아동에게 원가정 복귀에 의사를 물어보면 어떻게 답하나.△피해 아동들은 대부분의 가해자인 부모를 두려워하면서도 그리워하는 양가적 감정을 지닌다. 학대받은 아이들이 모든 피해를 감당하는 현실이다. 심각한 학대 피해를 받은 경우를 제외하면 다수의 아이들은 원가정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복귀프로그램을 통해 원가정에 다녀온 아이들은 되돌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에 표정이 밝아지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재학대율도 만만치 않은 만큼 퇴소 이후의 사후 관리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경우에 따라 원가정에 복귀하는 대신 장기 쉼터나 애육원으로 가는 아동도 있다.-복지 분야에 종사한 지 얼마나 되셨는지. 처음에 사회복지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복지 분야에서 일한 지는 15년 정도 됐다. 교회 노인대학 봉사를 계기로 체계적인 돌봄에 관심이 생겼고 사회복지학과에 편입했다. 한 사람의 문제를 사회 구조의 측면에서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하는 복지 이념에 마음이 끌렸다. 사회복지의 이념인 ‘여럿이 함께’라는 말을 좋아한다. 장애인과 노인, 심리 상담 등 복지의 다양한 분야를 경험했고, 보건복지부와 포항시가 설립한 장애인 근로작업장인 포항바이오파크의 창립 멤버로도 참여했다. 제품 제조와 포장, 홍보, 판매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하다 보니 당시 동료들끼리 거길 겪고 나면 더 이상 못할 일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후에는 ‘포항 생명의 전화’에도 몸을 담았다. -전화 한 통에서 생명을 구하는 힘을 느낀 적이 있나.△생명의 전화는 국내 최장 자살 예방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민간 기관이다. 포항에만 100여 명 상담사가 24시간 상담한다. 매일같이 통화를 원하는 사람도 있고 얘기를 들어줘서 도움이 됐다는 사람도 있다. 생명의 전화에서 근무한 지 2년 차였을 때, 상습적으로 전화를 해오던 상담자가 밧줄을 옆에 두고 술을 마신다며 극단적 선택 의사를 내비쳤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에서 절박함이 느껴졌다. 통화가 끊기지 않도록 대화를 이어가며 경찰서에 신고를 했다. 경찰이 문을 따고 들어가 보니 정말 상담자가 밧줄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그날 첫 출근했던 신입 상담사가 긴박했던 상황을 목격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하루 만에 사표를 던졌다.-늘 힘든 사람들을 대하다 보면 지치지 않나.△학대받은 아동들의 사정을 듣다 보면 눈물이 안 날 수 없다. 그래도 선생님들과는 감정이입을 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설혹 무뎌지더라도 냉정하게 처신해야 아이들을 도울 수 있다. 가여운 마음은 크지만 지나치게 이입하면 교사가 지쳐서 나가떨어지게 된다. 어떻게 하면 잘 도울 수 있을지를 집중하며 문제를 객관화하고, 자신의 소진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의 경우는 사람들을 만나 에너지를 얻는다. 다양한 모임을 성심성의껏 찾아서 사람들과 교류한다. 억지로라도 시간을 만들어 공연을 보거나 여행을 하고 독서클럽을 찾는다.-사람을 만나는 일을 하면서 사람을 만나 에너지를 충전한다는 말은 축구 선수가 축구를 하며 휴식한다는 것과 비슷하게 들린다.△한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인생을 모두 가져온다고 하지 않나. 내가 경험하지 못한 걸 상대를 통해 배울 수 있다. 사람에게서 얻은 에너지는 아이들을 대할 때도 좋은 에너지로 작용한다. 내가 속한 모임 대부분은 10년 이상 가족처럼 만난 사람들이다. 세월을 같이 보내면서 늘 함께 한다는 것에 힘을 얻는다.-쉼터의 아이들도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을까.△쉼터의 아이들 또한 공동생활을 하며 서로를 보듬는 법을 알아 간다. 물론 극도의 스트레스로 심리 상태가 불안정한 아이들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공감하고 유대하는 긍정적 효과가 훨씬 크다고 본다. 상처받은 이가 나 혼자만이 아님을 깨닫고, 상처 있는 채로 서로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어린 시절의 학대는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고 트라우마로 남는다. 한창 사랑받을 나이에 상처받고 굴곡지는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아이들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잘해주는 것, 후회하지 않을 만큼 열심히 사랑해 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이정미 아동쉼터 원장은봉사 활동을 하다 ‘여럿이 함께’라는 사회복지의 이념에 매료되어 가정폭력상담사와 생명의전화 전화상담원, 사회복지사, 성폭력상담원 등의 자격을 취득했다.위덕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에서 사회복지실천을 전공하고, 노인과 장애인, 학대피해 아동들을 도우며 사회복지의 일선을 담당했다.경북농아인협회에서 수화통역사, 직업재활시설인 포항바이오파크에서 홍보 업무, 포항생명의전화 부설 가정폭력상담소에서 상담사로 일했다.현재 포항선린복지재단이 운영하는 ‘선린나래 아동쉼터’에서 학대피해를 입은 아이들이 쉼을 얻고 꿈을 가꿔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하도록 돕고 있다./배은정 작가

2023-04-24

“선악이 없는 수학은 아름답고 명료한 존재죠"

최영주 교수에게는 ‘처음’이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1980년대 미국에서 강의를 시작했을 때 동양인 여성 수학 교수는 처음이란 말을 들었다. 국내 최초로 암호학 관련 강의를 포스텍에 개설했고, 당시 캠퍼스에서 유일한 임산부였다. 국내 여성 수학자 가운데 처음으로 ‘대한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고, 정수론 국제학회지에 국내 수학자 최초로 편집위원에 선정됐으며, 한국여성수리과학회 설립에 참여했다. 한국 여성 수학자의 역사를 쓰고 있는 셈이다.최영주 교수와의 약속은 최적치를 구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른 봄에 연락이 닿아, 꽃 피는 캠퍼스에서, 4월 초로, 다시 모일로 수렴됐다. 약속 시간은 분 단위였다. 숫자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는 수학자려니 했다. 해외 수학자들과의 화상회의와 학과 세미나 사이, 포스텍 교수식당에서 최영주 교수와 나눈 대화를 정리했다. -인터뷰 전에 자료를 좀 읽었는데 외계어가 따로 없었다.△수학이 어렵게 인식되는 건 수학자들의 책임이 크다. 수학은 생활 도처에 있다. 당장 이곳에 오기 전에 들른 주차장도 수학 지식이 들어간 곳이다. 최소 면적에 최대한 많은 주차를 위해서 수학이 이용된다. 나뭇가지마다 다른 패턴이나 포물선을 그리며 내려오는 공에서도 수학을 볼 수 있다. 다만 대중들에게 어렵게 인식되는 것이 문제인데 어떤 이는 농담처럼 수학 대중화가 웬만한 수학 난제보다 어렵다는 말도 한다.-수학의 여러 분야 가운데 정수론의 새로운 방향을 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수학은 수를 연구하는 학문이고 수학의 역사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분야가 정수론이다. 나무마다 잎사귀 패턴이 다른 것처럼 수에도 패턴이 있다. 정수론은 수학의 가장 근본인 ‘수’의 패턴이나 성질을 연구하는 순수수학이다. 나는 정수론 중에도 다양한 수학적 방법을 동원해 수의 성질을 연구하는 ‘보형 형식(modular form)’을 연구한다.-수학은 특별한 재능이 필요한 학문이라고 여겨진다. 수학에 뛰어난 학생이었나.△수학을 잘 한다기보다 다른 과목을 못했다. 특히나 암기과목은 재능이 없었다. 내 답이 왜 틀렸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수학은 명료해서 좋다. 변치 않고 선악이 없다. 증명하는 방법이 다를 뿐 자체로는 변함이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이 좋아 수학과에 진학했고 대학 축제에서 만난 동갑내기(김승환 포스텍 물리학과 교수)와 결혼해 유학을 떠났다. 미국에서 정수론 분야의 석학을 만나 오래됐으면서도 낡지 않는 현대 순수수학의 핵심인 정수론에 매료됐다. -정수론은 수천 년 된 수학의 한 분야인데 아직도 풀리지 않는 문제가 남았나.△‘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 수상자 중 4분의 1이 정수론 연구자다. 정수론은 수학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분야로 난제가 많다. 모두들 알맹이를 알고 싶어 하지 않나? 수의 알맹이는 소수(素數, Prime Number)이다. 소수는 ’1과 자기 자신만으로 나눠떨어지는 1보다 큰 양의 정수‘로, 2, 3, 5, 7, 11, 13 등이다. 세상의 모든 수는 소인수분해를 통해 소수로 표현된다. 예를 들어 6은 2 곱하기 3으로 쪼개진다. 소수만 알면 모든 수의 비밀은 풀린다. 소수의 존재는 기원전에 알려졌고 소수의 분포는 독일의 수학자인 가우스가 수백 년 전에 증명했다.(가우스는 정수론을 ‘수학의 여왕’이라고 했다.) 소수의 성질을 밝히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많은 수학자들이 무한한 소수 분포나 규칙성을 밝혀내려 했지만, 어느 누구도 정답이라고 할 만한 패턴을 밝혀내진 못했다. -소수의 패턴은 왜 중요한가. 그 복잡하고 어려운 걸 어디다 쓴단 건가.△소인수분해가 유용하게 쓰이는 분야는 암호학이다. 소수를 곱해 만든 합성수를 상대에게 전달하고 소인수분해를 할 수 있으면 암호가 풀리는 것이 암호 해독의 원리이다. 소인수분해를 활용한 암호는 공용키로는 맨 먼저 나온 것이다. 현재 스마트폰이나 인터넷뱅킹 등에 두루 사용된다. 이처럼 정수론은 다양한 암호체계를 만들고 암호의 효용성과 안전성을 분석하는 핵심적인 도구를 제공한다. 암호학은 단순히 암호를 만들고 푸는 것을 넘어, 데이터를 보호하고, 전달 과정의 오류를 검증하는 수학적 방법이다. 인터넷 통신이나 화상으로 대화를 할 때 이미지가 깨지거나 잡음이 섞이는 걸 거르는 것에도 정수론이 쓰인다. 고급 정수론을 사용하면 이런 오류들을 경제적, 효율적으로 걸러낼 수 있다. 그걸 ‘오류 정정 부호(error correcting codes)’라고 한다.-국내 최초로 암호론 강의를 개설했다고.△미국에서 강의를 하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직전, 미국 국가안전보장원에서 정수론을 전공한 수학자들을 대거 채용했다. 미국 국방부가 주도하던 아르파넷 네트워크(세계 최초의 네트워크 망)를 대신해 상용 인터넷 서비스들이 시작되던 시기다. 포스텍에 부임한 1990년, 국내에서 암호학은 생소한 분야였다. 관련 강의를 개설하고 수학자가 주관하는 암호론 국제 학회를 개최했다.-지금도 암호학을 연구하나.△암호는 깨지라고 있는 것이다. 암호를 만들고 깨지고 개선하는 과정의 반복이다. 어느 날 문득 ‘현타’가 오더라.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은 피타고라스 정리처럼 2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현재는 보형 형식과 연결된 L-함수를 연구하고 있다. 언제 계산이 될 수 있을지 알 수 있는 경우가 보형 형식이다. 보형 형식은 세계 수학자들이 들러붙어 연구하는 이론이다. 나는 그 가운데 아주 실오라기 같은 이론을 정립했다. 보형 형식에 가중치라는 것이 있는데, 기존에는 정수와 반정수(정수에 1/2을 더해서 나타낼 수 있는 수) 가중치만 집중했다면, 나는 실수에 대한 이론을 개발했다. 8년 이상의 연구를 통해 실가중치 주기이론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풀리지 않는 문제를 껴안고 있으면 힘들지 않나.△아침에 일어나면 문제를 풀 생각에 신이 난다. 이렇게 저렇게 풀어봐야지 설렌다. 그러다 저녁이 되면 낙담하는 일상이 반복된다. 그래서 다른 연구자들과의 소통이 중요하다. 연구활동 중 대다수의 시간은 다른 수학자의 논문을 읽고 새로운 개념이나 이론을 접목해 본다. 방금 전에도 해외 수학자들과 화상회의로 머리를 맞댔다.-안 풀릴 땐 어떻게 하나.△산책이나 수영, 요가가 도움이 된다. 논문 하나에 5년이 걸릴 때도 있고 다음이라는 기약도 없다. 하지만 안 풀리는 문제에는 희망이 있다. 문제를 풀고 난 뒤의 기쁨은 얼마 가지 않는다. 답을 알고 나면 더 어려운 문제를 찾게 된다. 몇 년간 답이 잡힐 듯 말 듯 한 문제가 있었는데 워크숍에 가보니 후배가 풀었더라. 그럴 때를 제외하고 포기란 없다.-‘챗GPT’를 이용하면 수학자도 수월해지겠다.△요즘 틈만 나면 반려동물 다루듯 챗GPT와 대화한다. 파급력이 어마해서 교육 분야는 혁명적으로 바뀌겠지만 수학자의 일을 대신하진 못할 것이다. 수학은 문제를 푸는 일인 동시에 새로운 문제를 만드는 일이다. 문제를 풀 때도 기존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결국 수학은 새로운 길을 만드는 창조적인 일이다. 챗GPT에 정보를 제공하면 바른 답으로 수렴하겠지만 창의성을 가질 수는 없다.-수학 이외 도저히 안 풀리는 문제가 있나.△자식이 아닐까.(웃음) 물론 자식은 풀어야 하는 수학 문제와 다르다. 다만 충분히 시간을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육아보다 일을 우선으로 살았다. 여성 교수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여자라서 어떻다는 말을 듣기 싫어 일에 더 몰두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후회한다는 건 아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나의 선택지는 일이다. -최영주 교수에게 수학이란?△인간이 사고하는 영역 중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변치 않는 걸 찾기 위해 엄청나게 변해야 한다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그래서 수학은 아름답고도 간절한 것이다. 항상 더 깊은 진리에 목말라 있는 수학자의 삶은 두려움과 애달픔의 연속이다. 한동안 죽도시장 새벽 경매 구경을 자주 갔다. 긴장된 분위기의 경매장은 치열한 수 싸움의 현장이었다. 연구실에 앉아 풀리지 않는다고 낙담하는 것이 철없는 넋두리로 느껴졌다.-가장 사랑하는 수식은.△‘L-함수’이다. 한 사람이 하루 이틀 만에 만든 것이 아니라 여러 연구자들이 아이디어를 모아 만든 100년이 넘는 수식이다. 본질적이지만 여전히 주로 추측에 의존하는 현대 해석학 수론의 일부이다. 속성은 대부분 증명되지 않았고 체계적으로 정리되지도 않았다. 내가 평생 이해하고 싶은 함수이다. 지금 우리가 하는 수학이 어디에 적용될지 바로 답하는 것은 어렵다. 수학자가 찾는 것은 변치 않는 진리이고 그 진리가 어디에 쓰일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인류는 여전히 수천 년 전 수학에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이다.최영주 교수는이화여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템플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메릴랜드대, 콜로라도대 조교수를 거쳐 1990년 포스텍에 부임했다. 2002년 국내 여성 수학자 가운데 최초로 대한수학회 논문상을 수상했다. 여성 수학자들의 권리를 위해 한국여성수리과학회 설립에 참여하고 회장을 맡기도 했다.‘2008 닮고 싶고 되고 싶은 과학기술인’과 2013년 미국 수학회 초대 석학회원(펠로)로 선정됐다. 세계여성수학자대회 지역 조직위원과 세계수학자연맹 여성위원회에서 활동하며 국내외 여성 수학자의 교류에 앞장섰다. 2018년 여성 최초로 국내 수학계 최고 권위의 상인 ‘대한수학회 학술상’을 받았다. 정수론 최대 난제로 꼽히는 ‘L-함수’ 연구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큰 진보를 이끌어낸 공로였다. 제17회 경암상(2021)과 과학기술훈장 혁신장(2022)을 수상했다./배은정 작가

2023-04-10

“빈 망태기 채워주던 선배 해녀… 그들에 도움되고 싶었죠”

요즘은 다르겠지만 고기잡이배 촬영을 가면 여자 스텝은 승선이 거부되던 일이 흔했다. 바다마을에는 미신이 많고 그들이 경외하는 신(요왕할멈이나 영등할매)에 여성성을 부여하면서도 정작 어촌사회는 남성 위주였다. 뿌리 깊은 남성 중심 문화는 어업인의 의식에도 드러난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의 실태 조사를 보면 남성 어업인은 스스로를 어업 경영주로 인식하는 반면 여성은 어업활동의 보조적 역할로 인식했다. 뱃일에 집안일까지 남성보다 곱절을 일하면서도 스스로를 낮춘 것이다. 그러니 어촌사회의 실질적 주체인 어촌계는 어떻겠는가. 제주를 제외하면 여성 어촌계장은 보기 힘든 귀한 존재다. 40년 가까이 물질을 해온 해녀이자 구룡포리 어촌계를 이끄는 성정희 어촌계장을 구룡포 해녀사랑방 ‘바당꽃’에서 만났다  - 한창 바쁜 철이라고? 약속 잡기가 쉽지 않았다.  △3월 중순부터 4월 말까지 ‘미역철’이다. 짧지만 해녀들이 고소득을 올리는 시기이다. 경북에서 해녀가 채취하는 미역은 전국 자연산 미역 생산량의 절반을 넘는다. 해녀들에게 미역이 ‘봄’이고 봄이 ‘미역’이다.- 바다에서 ‘농번기’ 그러니까 ‘어번기’가 바로 지금이네.△보통 2월부터 6월까지 어번기라 하지만 한겨울을 빼면 연중 일을 한다. 6월까지 해삼을 채취한다. 70년대만 해도 넘쳐나던 해삼이 지금은 귀해졌다. 7월에 가장 맛있는 멍게도 요즘은 보기 힘들고 홍합도 멸종되다시피 했다. 대신 10년 전에는 없던 소라가 넘쳐난다. 가을에는 말똥성게를 채취한다. 둥글고 가시가 짧아 말똥같이 생겼다고 말똥성게다. 말똥성게 하고 나면 문어 차례다. 문어는 12월부터 5월까지 주로 잡는다. 전복은 9~10월 산란기를 제외하고 연중 작업이다.- 문어는 값이 좋은 만큼 작업이 힘들다고.△워낙 영리하고 난폭해서 잘못 건드리면 위험하다. 물속에서 문어를 만나면 반가우면서도 겁부터 난다. 나처럼 대통시러운(덤벙대는) 해녀는 못 잡고, 경험이 많은 상군들이 잘 잡는다.- 상군 해녀는 어떻게 되나.△연륜과 실력이 있어야 한다. 구룡포 해녀 40명 가운데 10명 정도가 상군이다. 상군은 수심 10미터 넘게 내려가는데 나는 수심을 못 타서 상군은 못 된다. ‘숨’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기에 중, 하군이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상군이 될 수 없다. 스킨 스쿠버를 배워봐도 실력이 안 늘더라.- 바닷속 자원 사정이 늘 같지는 않나 보다. 채취하는 해산물에도 시류가 있나.△내가 어릴 때만 해도 꽁치나 오징어가 풍부했고 전복이나 말똥성게는 취급도 안 했다. 당시 주품목은 천초(우뭇가사리)나 도박(해조), 미역 같은 해조류였다. 모래사장이 부족해서 학교 운동장이나 밭에 널어 말릴 정도로 천초와 도박이 수두룩했다. 양식이 활발하지 않은 때라 미역 값이 특히 좋았다. 미역 부스러기를 줘도 떡과 바꿔먹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동네 대소사를 챙기던 한학자로, 배는 안 타셨지만 집에 큰 미역돌이 있었다. ‘미역짬’이라고도 하는 미역바위를 밭처럼 사고팔았다.- 가장 하기 어려운 작업은.△성게는 잡는 것도 힘들고 뒷일도 많다. 대여섯 시간 쪼그려 앉아 까다 보면 관절이 남아나질 않는다. 미역도 마찬가지다. 남해는 밖으로 드러난 갯바위가 많지만 동해는 바닷속에 있으니 물속에서 작업해야 한다. 낫으로 끊은 미역 줄기를 옮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지금은 크레인이 있지만 예전에는 젖은 미역을 손으로 끌어올렸다. 손질해서 일일이 뒤집어가며 말리는 후작업도 만만찮다. 그것뿐인가? 가을에는 미역바위를 닦아야 포자가 잘 정착한다. 기세 작업은 밭매기와 비슷하다. 물속에서 숨 안 쉬고 맨다고 생각해 보라. 농기구는 종류도 천차만별이더구먼 어촌은 죄다 수작업이다. 누가 장비를 좀 개발해주면 좋겠다.- 2015년도인가, 동료를 구한 해녀로 성정희 이름 석 자가 뉴스를 탔다.△해녀는 살기 위해 숨을 멈춰야 한다. 자신의 숨을 넘어서는 순간 ‘물숨’을 먹게 된다. 간호사 출신이라 그런지 물질하는 틈틈이 주변을 살핀다. 같이 물에 들어간 해녀가 2분이 넘도록 안 올라오더라. 다행히 숨넘어가는 해녀를 끌어올려 심폐소생술로 골든타임을 지켰다. 이 일을 겪고 생각해 보니 30년 물질을 하는 동안 응급처치 한 번을 못 배웠다. 뱃사람들은 소양교육이니 안전교육을 하는데 말이다. 해경에 가서 따졌더니 바로 와서 교육을 시켜줬다. 요즘은 응급구조사 자격증을 가진 해남이 있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작년에도 응급상황의 80대 해녀를 살려냈다. 구룡포 1호 청년 해남이다. 작년에 들어왔는데 벌써 상군을 능가할 정도로 물질이 능숙하다. 태왁을 잡고 물질하는 성정희 해녀. - 간호사가 어쩌다 해녀가 됐나.  △보통 해녀들은 10대에 물질을 시작하지만 나는 30대 중반에 한 늦깎이 해녀이다. 구룡포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대구로 진학했다. 당시엔 여학생이 도시로 유학 가는 일이 드물었다. 구룡포에선 처음일 것이다. 동생 둘까지 대구로 와서 뒷바라지도 같이 했다. 졸업하고 서독에 가려로 간호 학원을 다녔다. 독일로 파견된 간호사와 광부가 외화을 벌어주던 시기였다. 병원에 근무하다 결혼을 하면서 파독 간호사의 꿈은 접었다. 남편이 사업을 했는데 잘 안됐다. 도시에서 공부한 잘난 딸, 걱정하실까 봐 어머니 생전엔 표도 못 내고 빈집에 돼서야 돌아왔다. 돌아와보니 말똥성게를 전량 일본으로 수출하며 고소득을 올리고 있었다. 남편은 평생 처음인 오징어 배를 타고 나는 물질을 시작했다. 위로 오빠가 셋인데, 외양선 1등 항해사와 대형 유조선 선장 출신도 있으니 바다를 터전 삼아 살 핏줄인가 싶다.- 구룡포가 고향이니 물질은 금방 배웠겠다.△눈만 뜨면 바다에서 놀았으니 수영 실력은 기가 막힌다. 그러면 뭘 하나. 일을 안 시켜줬다. 6개월 이상 거주하고 60일 이상 어촌계 활동을 해야 계원 자격증이 나온다는 거였다. 구룡포 어촌계에선 작업을 못 하고 타지로 원정 갈 때 따라나서 일수를 채웠다. 물질은 서툴렀지만 해녀들 뒤를 따라다니며 잡는 법을 익혔다. 나는 사실 물질 보다 작업을 잘 따왔다. 작업할 해녀가 없는 지역은 바다를 팔았다. 해녀가 없으니까 작업권을 위탁하는 것이다. 열댓 명씩 팀을 꾸려 남의 바다로 작업하러 다녔다.- 늦깎이 해녀가 어촌계장이 되기로 결심한 이유는.△가난하던 시절, 선배 해녀의 친절을 잊지 못한다. 물질이 서툴러 비어있던 내 망태기에 슬쩍 물건을 넣어주던 따뜻함을. 지금 나는 부자는 아니어도 살만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해녀들은 여전히 빈곤하다. 어촌계 일을 제안받고 처음엔 엄두가 안 났다. 그러다 해녀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2년간 리더 교육이나 연수 등을 찾아다니며 공부를 했다. 해녀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천한 직업으로 인식되어 왔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제주 해녀는 유네스코에 등재되기까지 했는데 똑같은 일을 하는 육당 해녀(육지 해녀)는 왜 안 되나 싶더라. 선거 나갈 때만 해도 여자가 무슨, 이라는 비아냥도 있었지만 어촌계 발전에 남녀가 어딨냐고, 능력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받아쳤다.- 꿈꾸는 어촌계의 모습은.△충남 태안군 어느 어촌계는 계원들에게 수천만 원의 배당금에다 퇴직금까지 준단다. 우리는 배당금 한 번 못 받아봤다. 구룡포를 찾는 관광객은 늘었지만 먹거리 시장은 부족하다. 구룡포리 어촌계 사무실 자리에 ‘해녀 비즈니스타운’을 건립할 계획이다. 해녀가 잡은 걸 직거래하면 해녀도 좋고 소비자도 좋은 일 아닌가. 부산이나 제주도 어촌계를 찾아다니며 수익 창출과 분배 방식을 연구하고 있다. 구룡포리를 행복한 마을로 만들고 싶다. 열심히 하다 보면 되지 않을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한다.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는 말은 않을 것이다.- 어촌계장이자 해녀로서 바라는 바가 있다면.△내가 물질을 시작할 때만 해도 구룡포 해녀는 100명이 넘었다. 지금은 40여 명으로 대다수가 고령이다. 이대로 두면 해녀 문화는 사라질 운명이다. 현재 우리 마을에는 4명의 젊은 해녀·해남이 있다. 어촌계 최고의 보물이다. 폐교를 리모델링한 ‘해녀학교’를 열어 최정예 엘리트 해녀 20명을 모아 최상의 어촌계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처음에는 해녀가 더 들어오면 밥그릇 뺏기는 일이라는 인식도 있었다. 하지만 바다는 어떻게 가꿔가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자원이다. 성게 수출도 준비 단계에 있다. 해녀는 정년퇴직이 없고 시간 투자 대비 고소득이다. 해녀만큼 일한 대가가 돌아오는 직업도 많지 않으니 젊은이들이 과감하게 도전해 보면 좋겠다.성정희 어촌계장은 1952년 구룡포에서 태어나 구룡포에서 초,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경북여상을 다녔다. 졸업 후 간호사로 근무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해녀가 됐다. 구룡포수협 최초의 여성 이사를 거쳐, 2021년 4월 18일 치러진 구룡포리 어촌계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선거 당시 ‘어촌뉴딜 300 사업’ 청사진을 제시했으며, 지난해에는 동해안 첫 해녀축제인 ‘구룡포 해녀의 밤’을 개최했다. 40여 년간 해녀문화 계승·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22 자랑스러운 도민상’ 특별상을 수상했다.나름 관리하는 해녀라고 자부한다. 피부 관리도 받고 독서도 즐긴다.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은 수차례 정독했다. 좋은 말은 내 것으로 만들고자 메모를 한다. 최근 메모는 “최후까지 살아남는 사람들은 가장 힘이 센 사람이나 영리한 사람들이 아니라 변화에 민감한 사람들”이라는 찰스 다윈의 말이다. /배은정 작가

2023-03-27

“민속은 가장 원초적인 민족 정신이 스며들어 있어”

모든 단어에 시제가 있다면 민속은 과거형에만 머물지 않는다. 예스럽기 그지없는 민속은 지난 시대의 잔존 형태가 아니라 살아서 꿈틀대는 생물이다. 지역의 민속문화가 살아움직이는 현장을 10여 년 전, ‘다시 듣는 포항의 토속민요’ 공연으로 목격했다. 사라져가는 포항의 민요를 지역의 젊은 소리꾼들이 복원하는 무대였다. 이어서 끊어져가는 전통을 잇고자 포항흥해농요보존회가 출범했다. 주민들은 농요의 복원을 위해 엎드려서 모를 찌고 지게를 지고 도리깨질을 하는 행위와 노래를 엮어 재현했다. “옹헤야”의 포항 흥해 버전인 “에헤 화이요”로 하나 되어 돋우던 신명이 잊히지 않는다. 줄다리기는 암줄과 수줄을 연결시켜야 시작된다. 원형 그대로의 포항민요가 보존될 수 있도록 갯목(암줄과 수줄을 연결하는 통나무)을 끼운 이가 박창원 민속학자이다. 40여 년 동안 지역의 민속문화를 발굴하고 전승을 위해 애쓰고 있는 박창원 민속학자를 포항문화원에서 만났다. -포항의 민속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1982년에 청하중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했다. 고향이 고령으로 같은 경북권인데도 말씨부터 달랐다. 말로 정착된 문학을 구비문학이라고 한다. 동네 주민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바로 구비문학이었다. 사투리를 시작으로 동네에서 전해오는 노래와 설화를 수집했다. 교지에 연재한 것이 세간에 알려졌고, 1990년에는 ‘영일군사’ 민속 편 집필에 참여했다. 그 후로는 녹음기를 들고 포항 지역 골짜기마다 다니며 전설과 신화, 민요, 민담, 놀이, 세시, 풍속 등을 채록했다. 그렇게 모은 자료를 분석하고 해석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해 민속학을 공부했다.-민속자료 채집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지나.△살아있는 자료가 나오려면 생활에서 얻어지는 채록이 바람직하다. 주민들과의 만남은 자연스레 이뤄졌다. 어느 동네 누가 소리를 잘 한다더라는 식으로 알음알음 대상자들을 만났다. 학교 인근에 사시는 강부용 할머니는 나물을 잘 아셨다. 산에 같이 간 적이 있는데 신기하게도 나물마다 노래가 있었다. 고사리를 보면 “올라가는 올꼬사리 너러가는 늦꼬사리”라며 고사리를 캐서 나물을 무치는 과정을 읊조렸다. (올꼬사리는 일찍 올라오는 고사리, 늦꼬사리는 늦게 올라오는 고사리를 말한다.) 젊어서 혼자되신 어르신이 노래로 외로움을 달랬구나 싶을 정도로 노래를 많이 아셨다. 민속놀이의 경우 현장에서 채록하고, 조용한 곳에 따로 모셔 또 한 번 확인했다. 지게상여놀이는 상여꾼의 허리춤에 녹음기를 달아 채록했다.-수집된 자료들은 보존 활동의 바탕이 되고 있다.△묻혀 있던 송라면 화진1리의 구진마을 앉은 줄다리기를 발굴해 학술지에 발표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알려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포항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송라 앉은 줄다리기 재현행사’가 송라의 축제가 됐다. 지역의 사라져 가는 구전민요를 채록해 낸 자료집은 포항흥해농요보존회의 보존과 전승 활동에 기틀을 마련했다. 현재 흥해농요는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 신청해 놓은 상태이다. 지금까지 포항에 국가나 도지정 무형문화재는 한 점도 없는 실정이다. 시간이 흐르고 전승환경이 바뀐 곳에 전통 민속은 온전하기 어렵다. 20년, 30년 전에 조사한 민속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도 있다. 무형의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관심이 필요하다. -‘동해안 민속을 기록하다’ 저서의 서문을 연 ‘민속은 생물’이라는 문장이 인상적이다.△얼마 전에 죽장에서 주민들이 찾아왔다. 죽장면 지역에서 전해내려오는 지게상여놀이를 경상북도 무형문화유산으로 신청하고 싶다는 얘기였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해서는 전승의 맥이 중요하다. 과거로부터 어떻게 전승이 되어 있고, 현재 어떻게 이어가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후진을 양성할 것인지가 명확해야 한다. 흥해농요의 경우 기능보유자가 생존하고, 보존회를 중심으로 전승 노력이 활발하며, 학술 세미나로 문화재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지게상여놀이도 기능보유자가 살아계셨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죽장 지게상여놀이는 일제강점기에 끊어졌다가 1980년대 발굴됐는데, 초창기와 지금의 모습에 차이가 크다. 초창기에는 지게목발소리, 짱치기, 어사령 등을 포함했지만 지금은 지게상여놀이 하나로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장례 풍습이 어떻게 놀이가 됐나.△상여를 메고 장지까지 운반하는 운구 행렬은 상여소리를 부르고, 잠시 쉬는 동안 앞소리꾼이 상주에게 노자를 요구하기도 한다. 장례 때의 운구 풍습 자체가 놀이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애도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추모해야 할 장례를 즐거움의 놀이판으로 바꾼 것에서 민중의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전국에서 지게상여놀이를 도 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한 지역은 3곳이다. 죽장 지게상여놀이의 효과적인 전승을 위한 연구가 필요하다.-지역 곳곳에서 전해내려오는 설화도 다수 발굴했다.△설화는 신화, 전설, 민담으로 나뉜다. 뭉뚱그려 전하던 포항지역 설화에서 신화를 분리했다. 영일만 지형이 움푹 팬 배경으로 거인 신화가 전해온다. 일본 역사(力士)가 조선의 창해 역사와 겨루다가 넘어지면서 손을 짚었는데 그곳이 움푹 꺼지면서 영일만이 되었다는 설화다. 창해 역사는 키가 하늘을 찌를 듯하고 몸집이 태산만하며, 손바닥 하나가 영일만 크기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내연산을 지키는 산신인 할무당 신화가 있다. 산속에 신당을 차려놓고 오랫동안 제사를 모시는 걸 보고 관심이 생겨 논문까지 썼다. 할무당을 모신 신당인 백계당은 이후 포항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지역 인물에 대한 전설로는 권달삼을 조명했다. 흥해 사람들의 술자리나 시장통에서 흔하게 들리는 기이한 행적이 재미있어 녹음기를 둘러메고 수집하러 다녔다.-권달삼이 그렇게나 유명했나.△워낙 입담이 뛰어나서 ‘산에는 산삼, 바다에는 해삼, 육지에는 달삼’이라고 했다. 평양의 봉이 김선달, 서울의 정수동, 경주 정만서, 영덕 방학중과 비슷한 류의 기인이다. 이들에 비해 권달삼(1881-1952)은 다소 후대의 인물로 유일하게 생존 연대가 확실하다. 권달삼 이야기의 배경에는 흥해시장이 많다. 제사를 지낼 돈이 없어 과일전에 가서 사과와 배 앞에 지방을 붙여놓고 절을 한 다음, 어물전에 가서 조기 앞에 지방을 붙여 놓고 절을 해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권달삼 설화로 만든 국악뮤지컬이 영일민속박물관에서 공연된 적이 있다. 그때 울산에 거주하는 외손녀를 초청했다. 흥해시장에 권달삼 거리를 만들어 그를 기억했으며 하는 바람이다.-권달삼과 같은 기인의 설화가 유행했던 배경은 무엇일까.△근대화 과정에서 계급 문화는 흐려지고 권위주의는 땅에 떨어졌다. 권달삼은 돈 많고 권세 있는 사람들을 희롱했고 권세가들이 당하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쾌감을 느끼고 박수를 쳤다. 권달삼이 꾀를 부리는 목적은 대게 기본적인 생계유지였다. 권달삼의 행적에서 보여주는 재치와 웃음은 한국문학의 풍자적, 해학적 전통을 잇고 있다.-옛사람들의 민속문화가 지금을 사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의미는.△민속은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 이뤄낸 생활문화이다.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는 지역문화를 잘 농축하고 있으며, 가장 원초적인 민족의 정신이 스며들어 있다. 물질문명이 발달하면서 민속에 대한 믿음과 역할이 축소될 수밖에 없지만, 민족의 정체성이 담긴 민속문화를 소홀해서는 안 된다. 포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자산 중 무형문화재가 될 만한 것에는 죽장면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지게상여놀이, 여성들의 줄다리기 놀이인 앉은줄다리기, 흥해지역의 농요, 월월이청청이 등이 있다. 대부분의 민속놀이는 전승 단절의 위기로, 국가나 지자체가 의도적으로 관심을 갖고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소멸된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생물의 본성을 어쩌겠나. 다만 그들 중 민속놀이로 전승 가능한 것들을 발굴해 놀이화하면 어떨까. 월포의 후릿그물 당기기 놀이는 원래 어부의 노동이었지만 지금은 피서철 체험놀이로 행해지지 않나. 생명력 있는 놀이를 눈여겨보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현대적 쓸모를 고민해도 좋겠다.- 30여 년간 지역 민속문화를 찾아다녔는데 앞으로 더 하고 싶은 연구가 있나.△5년 전 퇴임하면서 매년 책 한 권을 쓰자고 다짐했다. 그만큼은 아니지만 한두해에 한 권씩 썼다. 포항지역 민요에 관해 쓴 3권을 ‘포항민요전집’으로 집대성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 중에 잘못 알려진 것들이 많다. 호미곶 지명의 유래부터 오류가 보인다. 조선시대 풍수지리학자인 남사고가 포항 장기의 명승명당으로 호미등을 처음으로 언급했다는 ‘산수비록’은 실체조차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다. 잘못 전해지는 부분들의 근거와 과정을 밝혀 세간의 오해를 바로잡는 작업을 해 나갈 계획이다. 박창원 민속학자 박창원 민속학자경북 고령 출신으로 영남대 국문과와 한국교원대 대학원에서 국어교육학을 졸업했다. 1982년 청하중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해 2017년에 교장으로 퇴임했다.1990년대초부터 사라져가는 지역의 토속민요를 채록해 ‘포항지역 구전민요’, ‘소리로 듣는 포항의 민요’, ‘흥해의 민요’, ‘북송리의 마지막 소리꾼 김선이의 흥해농요’등의 자료집을 냈다.흥해의 문화인물인 권달삼의 행적과 일화를 채록한 ‘흥해의 기인 권달삼 이야기’와 30여년 간 지역의 민속문화를 정리한 ‘동해안 민속을 기록하다’, ‘포항의 민속놀이’ 등을 저술했다. ‘수필문학’으로 문단에 등단한 수필가이기도 하며 수필집으로 ‘향기있는 사람’이 있다.청하중학교에서 35년간 근무했고 지금도 청하에 살고 있다. 조선시대 건립된 청하읍성이 겸재 정선의 ‘청하성읍도’ 그대로 복원되기를 ‘맑고 푸른 터’ 청하 사람으로서 소망한다./배은정 작가

2023-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