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작가가 만난 ‘이 한 사람’<br/>김주식 불꽃 디자이너
국내 3대 불꽃쇼에 드는 포항국제불빛축제가 4년 만에 포항의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불꽃은 사그라들어도 그날의 밤하늘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역대 최대 규모로 치러진 축제에서 사람들은 한국팀의 ‘그랜드 피날레’를 단연 압권으로 기억한다. 벅찬 감동의 불꽃쇼 뒤에는 20년 경력의 김주식 불꽃 디자이너가 있다. 그는 불꽃 디자인을 불꽃이라는 물감으로 밤하늘에 그림을 그리는 일로 비유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그저 태어나지 않는다. 찰나의 예술이라는 불꽃은 1초를 서른 번으로 쪼개고 색과 위치, 모양을 철저하게 계산해 배치한 결과라고 한다.
찰나의 예술이라는 불꽃은 1초를 서른 번으로 쪼개고 색·위치·모양을 철저하게 계산해 배치한 결과
‘포항국제불빛축제’의 웅장했던 불꽃쇼… 세팅부터 철수까지 100여 명의 인력이 4개월 넘게 공들여
“해외 권위 있는 대회서 인정받고파… 우리나라의 불꽃 연출·기술력으로 세계에 감동을 전하고 싶어”
-올해 포항국제불빛축제의 그랜드 피날레는 단연 압도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포항국제불빛축제는 10여 년째 연출하는 축제라 애정이 크다. 포항국제불빛축제가 열린 형산강 무대는 부산 광안리와 비견되는 최장 거리의 무대다. 무대의 장점을 살려 웅장하고 가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노르웨이 출신의 작곡가인 토마스 베르게르센(Thomas J. Bergersen)의 ‘지구 생성(Creation of Earth)’을 선곡한 것도 장엄하고 강렬한 분위기를 위해서다. 화약은 컬러가 다채롭게 구현되는 종류로 사용했다. 하나의 색이 단발류로 터지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발이 여러 색으로 변하는 식이다. 역동적인 퍼포먼스로 웅장함과 감동을 전하고자 했다.
-한 편의 웅장한 서사시를 연상케 했다. 형산강에서 열린 올해 포항국제불빛축제를 디자인할 때 포인트를 준 부분은.
△연기가 하늘에 꽉 차기 전인 초반에는 고가의 ‘타상 불꽃’과 ‘장치 불꽃’을 사용해 연출 효과를 극대화했다. ‘타상 불꽃’은 하늘 높이 올라 높은 고도에서 터지는 불꽃이고, ‘장치 불꽃’은 낮은 고도에서 터진다. ‘타상 불꽃’의 경우 점화된 다음 하늘로 올라가는 시간이 있어서 개화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장치 불꽃’은 점화하자마자 바로 볼 수 있어 섬세한 연출이 가능하다. 그랜드 피날레의 중반부에는 다양한 색상의 ‘장치 불꽃’을 사용했다. 작은 불꽃이 분수나 지뢰처럼 분출되거나 혜성의 불꼬리처럼 길게 늘어진 형태를 봤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후반부에는 형산강 전체를 골드빛의 불꽃으로 표현했다.
-국내 3대 불꽃쇼로 꼽히는 포항국제불빛축제만의 차별성은 무엇인가.
△포항국제불빛축제가 열리는 형산강의 최고 장점은 국내 최장거리의 무대에서 초대형 불꽃 연출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2019년 형산강에서 1킬로미터 불꽃쇼를 처음 시작했다. 이번에도 열흘 동안 현장을 오가면서 하루에 7~8킬로미터는 족히 걸었다. 물론 부산불꽃축제가 열리는 광안리도 무대 길이로 치면 포항 버금간다. 하지만 관람석과의 거리는 포항이 으뜸이다. 형산강의 강폭은 360미터로, 국내 불꽃쇼 가운데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불꽃을 감상할 수 있다.
-순식간에 밤하늘을 수놓고 사라지는 불꽃은 찰나의 예술로 불린다. 찰나의 불꽃쇼가 탄생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나.
△축제를 기획하고 행사 운영을 총괄하는 프로젝트 매니저(PM)가 있다. 프로젝트 매니저가 축제조직위원회, 문화재단과 큰 틀에서 윤곽을 잡으면 디자인이 시작된다. 계절이나 현장 상태를 충분히 확인한 다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음악 선곡과 편집이다. 정해진 음악의 리듬에 맞게 화약을 배치하는 작업이 그다음이다. 그렇게 작성된 ‘작업지시서(어드레스시트)’에 따라 물류팀과 기술팀은 화약을 준비한다. 현장 세팅은 행사 열흘 전부터 한다. 화약 배치를 할 땐 디자이너도 한 발 한 발 낱낱이 확인해야 한다. 혹여라도 일어날 수 있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열흘 동안 현장에서 움직인 인원이 하루 50명 정도였으니, 세팅부터 철수까지 100여 명은 족히 수고했을 것이다. 포항국제불빛축제의 불꽃쇼는 백여 명의 인력이 4개월 넘게 공을 들인 결과이다.
-음악에 불꽃을 입히는 디자인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달라.
△음악의 리듬에 맞춰 어떤 화약을 어느 위치에 얼마나 쓸지를 정하는 일이다. 불꽃의 모양과 색깔, 각도, 위치를 일일이 계산해 프로그래밍한다. 불꽃이 여러 색을 내는 것은 화약물질과 금속이 일으키는 연소반응 때문이다. 어떤 물질을 더 넣느냐에 따라 불꽃의 색과 패턴은 천차만별이므로 우리가 관리하는 불꽃 종류만 천 가지가 된다. 축제에 쓰일 수만 발의 불꽃을 음향의 파장에 맞춰 타이밍을 디테일하게 계산한다. 안전하게 화약을 터트리려면 얼마나 안전거리가 필요한지도 치밀하게 계산해야 한다.
-하늘에서 터지는 불꽃을 보며 그 뒤에 누가 있는지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어떤 계기로 불꽃 디자인을 시작하게 됐나.
△대학생이던 2000년에 ‘서울세계불꽃축제’를 보고 불꽃의 매력에 빠졌다. 화학을 공부하던 학생이라 더 마음을 빼앗겼던 것 같다. 이듬해 ‘화학류 관리기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지금까지 불꽃쇼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처음 3~4년간은 암기와 배움의 연속이었다. 불꽃마다 터지는 시간과 모양, 지속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폭죽 하나하나의 특징을 완벽하게 파악해야 불꽃을 디자인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꽃 디자이너의 요건이 따로 있나.
△자격증이 필요한 일은 아니다. 디자이너라고 하지만 사실 콘텐츠 기획에 가까운 일이다. 불꽃을 좋아하고 음악적 감각이 있으며 화약의 특성이나 발사 시스템을 잘 알면 된다.
-불꽃 디자인을 시작한 지 20년 차인데, 불꽃축제에도 트렌드 변화가 있나.
△장비의 성능이 월등하게 좋아졌다. 과거에는 사람이 음악에 맞춰 하나씩 버튼을 조작해서 불꽃을 쏘아 올렸다. 그때도 시스템은 있었지만 불완전해서 수동으로 거들어야 했다. 중소 규모의 불꽃업체가 첫 직장이었는데, 얼마나 긴장되던지 발사 버튼을 누르면서 진땀을 뺐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컴퓨터가 지시하는 전기신호로 불꽃을 자동으로 발사한다. 발사 시점을 0.03초 단위까지 조정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나왔다. 1초를 30프레임으로 쪼개어 연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덕분에 음악과 불꽃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한 편의 이야기를 하는 ‘스토리텔링 불꽃쇼’ 연출이 가능해졌다. 이처럼 한 땀 한 땀 만든 불꽃은 현장에서 영화처럼 흘러간다.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는 순간 디자이너는 뭘 하나.
△연출한 의도대로 잘 나오는지 살핀다. 수정을 거듭하면서 수없이 마주한 장면이다.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 실사와 거의 비슷하게 구현되기 때문에 지겹도록 본 장면이지만 현장의 분위기는 다르다. 현장에서는 오감으로 전해지는 공기의 울림이 있다. 화약이 펑 하고 터지면서 만드는 공기의 울림이 전율을 전한다. 무대에서 멀리 떨어져서 관람하거나 혹은 영상으로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떨림이 있다.
-오차 없이 준비해도 의도대로 안 되는 것이 현장의 속성 아닌가.
△실수로 세팅을 거꾸로 한 적이 있다. 생각보다 결과물이 좋아서 한동안 그렇게 했다. 각도가 틀린 적도 있는데 이것도 나름 괜찮았다. 의도치 않은 실수가 더 나은 연출로 이어지는 사례는 현장이 주는 선물이다.
-불꽃쇼가 끝나면 드는 감회는. 디자이너의 감회는 관람객과는 다를 것 같다.
△관중의 환호와 박수에 환희를 느낀다. 디자이너뿐 아니라 설치하고 발사까지 함께 한 모든 기술자들이 관중의 환호에 그동안의 노고를 잊는다. 화약은 세 가지의 기능이 있다. 산업적인 측면이 아니면 생명을 해치거나 혹은 살리거나. 화약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일이니 이만큼 좋은 일이 어딨겠나. 화약을 사용하는 가장 아름다운 일을 하는데 자부심을 느낀다.
-불꽃 디자이너가 생각하는 좋은 불꽃쇼는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이다. 더 크고 화려한 불꽃도 안전을 기반으로 가능하다. 그 다음으로 연출과 화약의 퀄리티가 중요하다. 그림도 물감이 좋아야 하듯이 불꽃은 화약의 품질이 중요하다. 불꽃 디자인은 밤하늘을 캔버스 삼아 불꽃이라는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다.
-앞으로 연출하고 싶은 불꽃쇼가 있나.
△한국의 불꽃 디자인 능력을 전세계에 알리고 싶다. 국내 3대 불꽃쇼를 전담해오면서 빠듯한 일정에 해외를 거의 나가지 못한다. 우리가 가진 세계적인 실력을 해외의 권위 있는 대회에서 인정받고 싶다. 우리나라의 불꽃 연출력과 기술력으로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전하고 싶다.
김주식 불꽃 디자이너는
건국대학교 화학과를 나와 중소규모 불꽃업체에서 경력을 쌓고 2012년 한화에 입사했다. 현재 한화 컨텐츠사업팀 과장이다. 포항국제불빛축제와 부산불꽃축제, 평창동계올림픽 개폐막식과 메달플라자, 전국체전 100주년 개회식 기념 불꽃쇼 등을 디자인했다. 1년에 10여 건의 불꽃쇼를 담당하고 있다. 2014년부터 포항국제불빛축제를 디자인하고 있으며 ‘2023 포항국제불빛축제’에서 웅장한 스토리텔링 기법의 연화 연출로 ‘그랜드 피날레’를 장식해 관람객들의 갈채를 받았다.
/배은정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