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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단위에서 공동체 안녕 비는 굿은 동해안별신굿 유일”

등록일 2023-05-08 18:33 게재일 2023-05-09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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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작가가 만난 ‘이 한 사람’<br/>정연락 동해안별신굿 전승교육사
정연락 동해안별신굿 전승교육사

사전에서 ‘굿’을 찾으면 ‘종교 제의’보다 ‘신명나는 구경거리’가 먼저 나온다. 여러 사람이 모여 떠들썩하게 노는 신명 한 판이 지난 2일 포항시 송라면 방석 1리에서 펼쳐졌다. 방파제 앞 간이무대에서 밤새도록 이어지는 무박 2일의 굿판은 노래와 춤, 연극과 사물놀이가 어우러진 문화공연 콘텐츠의 보고였다. 16개의 굿거리는 각각 독립적인 주제와 색깔로 펼쳐졌다. 흥이 난 주민들은 굿판으로 나와 춤을 추거나 “얼씨구”, “아이고 내 팔자야” 같은 후렴구를 넣으며 축제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굿판의 무녀와 악사는 젊은 세대가 많았다. 한때 무속신앙으로 천대받던 별신굿이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으면서 배움을 청하는 국악도가 많아진 덕이다. 동해안별신굿의 최연소 전승교육사로 지정받아 별신굿의 현대화와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는 동해안별신굿보존회 정연락 사무차장과 만났다. 인터뷰는 행사 전날 따로 자리를 마련해 진행됐다.

 

고교시절 사물놀이부터 접하면서 30여 년 한길

동해안별신굿은 예능 배워 대물림되는 세습무

핵심전승 ‘샤먼 킹’ 김석출 만신 포항서 나고 자라

5대부터 양자·양녀 들여 세습되는 학습무 형태

무악은 타악기로만 반주 자유로움·즉흥성 탁월

포항서는 송라·호미곶·구룡포 등 9곳서 이어져

현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협의 중

 

-굿을 어떻게 접하게 됐나.

△고교 시절 청소년 수련단체 활동을 하며 사물놀이부터 접했다. 야구 선수를 하다 부상으로 그만둔 상황이라 사물놀이에 더 푹 빠졌던 것 같다. 포항에는 사물놀이를 배울 곳이 없어 찾던 중 당시 부산 시립국악관현악단의 타악 연주자던 김정희 선생(이 시대 마지막 화랭이라고 불린 인물로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희과 교수)이 구룡포에 거주하는 사실을 알게 됐다. 19살부터 그 아래 들어가서 배웠다. 남들이 미쳤다고 할 정도로 틈만 나면 연습하고 굿판마다 잔심부름을 하며 따라다녔다. 그러다 하루는 현재 동해안별신굿보존회장인 김동연 양어머니가 “내 아들 할래?”라고 툭 말을 던졌고, 그 한 마디가 인연이 되어 30여 년 한 길을 걸어왔다.

 

-동해안별신굿에서 최연소 전승교육사로 지정받았다고.

△국가무형문화재는 인간문화재로 불리는 보유자를 정점으로, 명예보유자-전승교육사-이수자-전수생이라는 전승체계를 가지고 있다. 김석출(1922-2005) 명장 가계의 최고령인 김영희 선생이 명예보유자이고, 아래로 5명의 전승교육사가 있다. 나는 마흔 살에 동해안별신굿 전승교육사가 됐다. 다른 부문의 전승교육사들의 평균 연령이 70대이니 상당히 이른 편이다.

 

-흔히들 굿을 하는 무당은 신내림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동해안별신굿은 신내림이 아니라 예능을 배워서 대물림되는 세습무이다. 동해안별신굿의 근간은 인간문화재 김석출 만신(무당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김석출 명장은 조부에게 무업을 배운 3대 세습무이고, 현재 굿판을 함께 하는 김영희(김석출의 장녀), 김동연(김석출의 2녀), 김동언(김석출의 3녀), 김동열(김동언의 남편), 김영숙(김석출의 형인 김호출의 며느리) 선생이 4대이다. 내가 속한 5대부터는 양자나 양녀를 들여 세습되는 학습무 형태이다. 요즘 국내 대학 국악과에는 동해안별신굿이 필수 커리큘럼이다. 타악 수업 중에서도 가장 난도가 높다. 동해안별신굿을 배우고 싶어 보존회로 찾아오는 국악도가 많다.

 

-동해안별신굿을 배우고 싶어 하는 이유는 뭔가.

△동해안별신굿의 무악(巫樂)은 타악기로만 반주된다. 남성 악사들에 의한 타악 장단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복잡하고 정교한 경지를 보여준다. 서양에 재즈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동해안별신굿이 있다고 할 정도로 자유스러움과 즉흥성이 뛰어나다. 호주의 유명 재즈 드러머가 김석출 명인으로 인해 음악 인생에 큰 변화를 겪는 여정은 영화 ‘땡큐 마스터 김’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90년대 영국 런던 로열홀에서 동해안별신굿 공연을 보고 한국에 배우러 온 사이먼 빌리지라는 친구가 있었다. 김정희 선생 아래서 나와 함께 별신굿을 공부하고 박사논문까지 썼는데, 지금은 영국 더럼대학교 인류학과 교수로 있다.

 

-동해안별신굿이 전승되는 데 있어 포항의 역할은.

△동해안별신굿의 핵심 전승자가 포항에서 나고 자란 김석출 명장이다. 한국 3대 무당으로 서쪽은 김금화, 진도의 박병천, 동쪽은 김석출을 꼽는다. 그중에서도 김석출 명장은 무당의 왕이라는 의미로 ‘샤먼 킹’이라 불렸다. 따라서 포항에는 동해안별신굿 원형의 텍스트가 많다. 8,90년대 중반까지 영일만축제 기간에 동해안별신굿 공연을 하면 포항실내체육관이 꽉 찰 정도로 관객이 많았다. 하지만 90년대부터 한동안 단절되었고 최근에 와서 다시 관심을 받고 있다.

 

-김석출 명장에 관해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태평소와 장구, 꽹과리 등 모든 민속 악기에 탁월했다. 손수 만들어 분 태평소 연주는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러 ‘김석출류 태평소 산조’를 일구었다. 세계 각국의 전통음악가나 재즈음악가와 교류하며 음반을 남겼다. 동양철학에 능해 사주나 이사 방위, 신수를 손으로 짚어보는 수장(手掌)을 잘 봤다.

 

-포항 송라면 방석리에서 열린 동해안별신굿을 주민들은 풍어제라고 부른다. 풍어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82호이고 동해안별신굿은 제82-1호인데, 어떤 관계인가.

△원래 명칭은 동해안별신굿이 맞지만, 일제강점기 무속신앙으로 굿을 금지하면서 풍어를 위한 기원이라고 구슬려 풍어제라는 용어를 썼다고 들었다. 동해안은 수심이 깊고 바람이 강해 80년까지만 해도 바다에서 생사를 달리하는 어민들이 많았다. 이들의 영혼을 달래고 풍어를 기원하며 마을이 화합한다는 의미도 있다. 마을 단위에서 공동체가 잘 되도록 비는 굿은 동해안별신굿이 유일하다.

 

-요즘도 별신굿을 하는 마을이 많이 남아있나.

△최길성 민속학자의 조사에 따르면 1970년대에는 동해안 마을 200곳에서 별신굿을 했지만 지금은 80곳으로 줄었다. 어업량이 저조하고 마을 구성원이 부재한 탓이다. 현재 포항에는 송라면의 지경, 화진, 방석과 호미곶면의 대보, 강사, 구룡포읍의 삼정, 구룡포리, 장기면의 황바우(계원리) 수영포(영암리) 등 9곳에서 이어진다. 6개 마을에서 이어지는 부산보다 많다. 다만 부산의 굿판은 6박 7일 일정으로 규모가 크지만 포항은 무박 2일이 일반적이다.

 

-방석리 동해안별신굿의 진행 과정은.

△부정굿, 당맞이굿, 하회굿, 세존굿, 조상굿, 성주굿, 천왕굿, 놋동이굿(놋 세숫대야를 입을 물고 하는 굿), 심청굿, 손님굿, 제면굿. 용왕굿, 꽃노래, 뱃노래, 등노래, 거리굿을 한다. 한 굿거리마다 무녀 1명과 악사 예닐곱 명이 참여하며 보통 1~3시간 걸린다. 방석리 별신굿을 위해 보존회원 20여 명이 왔고, 이들이 돌아가면서 공연을 한다.

 

-마을마다 내용의 차이가 있나.

△마을마다 풍습이 다르다. 예전 포항 이가리의 경우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지신밟기를 했지만 방석리는 하지 않는다. 대신 방석리에는 무당 하나를 바다에 빠뜨리는 풍습이 있다. 바다에 용떡을 띄워 헌식하고 돌아오면서 ‘액맥이(액막이)’의 하나로 굿판에 처음 온 남성 악사를 물에 빠뜨린다. 조사리도 이 풍습이 있었지만 지금은 굿을 안 하니 방석리가 유일하다.

지난 2일 포항 송라면 방석리에서 펼쳐진 동해안별신굿 모습.  /김수정 사진작가 제공
지난 2일 포항 송라면 방석리에서 펼쳐진 동해안별신굿 모습. /김수정 사진작가 제공

-굿판을 장식하는 종이꽃인 지화도 직접 만든다고.

△우리 윗세대 악사들은 모두 지화(紙花)를 만들었다. 지금은 나를 포함해 한두 명만 만든다. 지화는 일상의 공간을 신성한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매개체이다. 지화를 놓은 그곳이 굿당이 되고 신들이 좌장 한다. 지화는 수개월 전에 만들어 숙성시켜야 한다. 큰 종이를 오려서 성형해놓고 잠을 재운 뒤 꽃을 끼워 완성해야 단단하게 고정된다.

 

-굿판에 오르는 악사이자 지화 공예가이며 별신굿 연구자기도 하다. 현재 가장 몰두하는 작업은 무엇인가.

△지화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고 2006년부터 매년 한두 차례 전국에서 전시를 열고 있다. 예전에는 굿판의 지화를 그대로 재현했다면 지금은 시대에 맞게 새로운 시도를 한다. 지화는 전시 작품으로도 무대 소품으로도 훌륭하다. 미학자와 디자이너, 미술사학자들과 함께 지화의 예술적 가치를 논한 자리가 있었는데 세계적인 경쟁력을 인정하더라. 올해도 3개의 전시를 준비 중이고, 내년에는 프랑스 파리문화원에서 전시와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할 예정이다.

 

-동해안별신굿의 발전을 위해 바라는 바가 있다면.

△동해안별신굿은 무악(巫樂), 무가(巫歌), 무무(巫舞), 연희극(巫劇), 지화(紙花) 5가지 분야로 나뉜다. 무악은 원체 관심이 집중되는 분야이고, 춤은 아내(홍효진 이수자)가 학위를 받았으며, 지화 연구는 내가 이어가고 있다. 노래 가사 격인 무가는 90년대 초까지 연구가 한창 이뤄지다 지금은 뜸한 상황이다. 동해안별신굿은 장편의 서사 무가가 탁월하고, 굿판에서 무녀의 기량은 서사 무가의 구연 능력을 든다. 무가 쪽 연구가 더 이뤄져야 균형이 맞지 않을까 싶다. 현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협의가 진행 중이다. 그러면서 생기는 또 하나의 바람은 전승관이다. 김동연 보존회장이 10여 년간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로 활동하면서 전국에서 배움을 청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들과 별신굿을 배울 공간이 만들어지길 바란다.

 

 

정연락 전승교육사는

 

포항 출신으로 1997년 동해안별신굿 보존회 악사로 입문했다. 고(故) 김석출 명인을 비롯해 당대 최고의 악사들에게 무악과 지화 제작 전반에 걸친 세습무 학습을 사사 받았다. 동해안별신굿의 학문적 체계화를 위해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석·박사를 취득했다. 동해안별신굿의 특색 중 하나인 지화로 15여 차례 전시를 했고, 한국의 무가를 주제로 10여 권을 저술했다. 동해안별신굿보존회 30주년 기념공연 ‘회상’(국립극장, 2015)을 비롯해 ‘굿이로구나’(부산국립국악원, 2019), ‘세자매 이야기’(서울 남산국악당, 2021), 탄생 100주년 명인 오마주 ‘김석출’(국립무형유산원, 2022) 등을 기획·연출하고 국내외 다수의 공연과 전시를 통해 동해안별신굿의 대중화와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다.

 

 

배은정 1974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학과 졸업. TBC·포항MBC·경북교통방송 작가. ‘포항문화의 상징과 공간’ 공저

/배은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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