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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은 가장 원초적인 민족 정신이 스며들어 있어”

등록일 2023-03-13 19:51 게재일 2023-03-14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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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작가가 만난 ‘이 한 사람’<br/>박창원 민속학자
지게상여놀이 음원 채록 장면. 맨앞 가운데 선소리꾼 허리춤에 녹음기가 보인다.(1990년)

모든 단어에 시제가 있다면 민속은 과거형에만 머물지 않는다. 예스럽기 그지없는 민속은 지난 시대의 잔존 형태가 아니라 살아서 꿈틀대는 생물이다. 지역의 민속문화가 살아움직이는 현장을 10여 년 전, ‘다시 듣는 포항의 토속민요’ 공연으로 목격했다. 사라져가는 포항의 민요를 지역의 젊은 소리꾼들이 복원하는 무대였다. 이어서 끊어져가는 전통을 잇고자 포항흥해농요보존회가 출범했다. 주민들은 농요의 복원을 위해 엎드려서 모를 찌고 지게를 지고 도리깨질을 하는 행위와 노래를 엮어 재현했다. “옹헤야”의 포항 흥해 버전인 “에헤 화이요”로 하나 되어 돋우던 신명이 잊히지 않는다. 줄다리기는 암줄과 수줄을 연결시켜야 시작된다. 원형 그대로의 포항민요가 보존될 수 있도록 갯목(암줄과 수줄을 연결하는 통나무)을 끼운 이가 박창원 민속학자이다. 40여 년 동안 지역의 민속문화를 발굴하고 전승을 위해 애쓰고 있는 박창원 민속학자를 포항문화원에서 만났다.

 

청하중 국어교사로 부임, 사투리 시작으로 동네서 전해오는 노래·설화 수집

학교 인근 강부용 할머니의 민요·지게 상여 놀이 등 알음알음 주민과 만나

포항 국가·도지정 무형문화재 전무… 무형 문화유산 보존 관심 더 가져야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상식… 근거와 과정 밝혀 세간의 오해를 바로잡을 것

 

-포항의 민속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82년에 청하중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했다. 고향이 고령으로 같은 경북권인데도 말씨부터 달랐다. 말로 정착된 문학을 구비문학이라고 한다. 동네 주민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바로 구비문학이었다. 사투리를 시작으로 동네에서 전해오는 노래와 설화를 수집했다. 교지에 연재한 것이 세간에 알려졌고, 1990년에는 ‘영일군사’ 민속 편 집필에 참여했다. 그 후로는 녹음기를 들고 포항 지역 골짜기마다 다니며 전설과 신화, 민요, 민담, 놀이, 세시, 풍속 등을 채록했다. 그렇게 모은 자료를 분석하고 해석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해 민속학을 공부했다.

 

-민속자료 채집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지나.

△살아있는 자료가 나오려면 생활에서 얻어지는 채록이 바람직하다. 주민들과의 만남은 자연스레 이뤄졌다. 어느 동네 누가 소리를 잘 한다더라는 식으로 알음알음 대상자들을 만났다. 학교 인근에 사시는 강부용 할머니는 나물을 잘 아셨다. 산에 같이 간 적이 있는데 신기하게도 나물마다 노래가 있었다. 고사리를 보면 “올라가는 올꼬사리 너러가는 늦꼬사리”라며 고사리를 캐서 나물을 무치는 과정을 읊조렸다. (올꼬사리는 일찍 올라오는 고사리, 늦꼬사리는 늦게 올라오는 고사리를 말한다.) 젊어서 혼자되신 어르신이 노래로 외로움을 달랬구나 싶을 정도로 노래를 많이 아셨다. 민속놀이의 경우 현장에서 채록하고, 조용한 곳에 따로 모셔 또 한 번 확인했다. 지게상여놀이는 상여꾼의 허리춤에 녹음기를 달아 채록했다.

 

-수집된 자료들은 보존 활동의 바탕이 되고 있다.

△묻혀 있던 송라면 화진1리의 구진마을 앉은 줄다리기를 발굴해 학술지에 발표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알려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포항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송라 앉은 줄다리기 재현행사’가 송라의 축제가 됐다. 지역의 사라져 가는 구전민요를 채록해 낸 자료집은 포항흥해농요보존회의 보존과 전승 활동에 기틀을 마련했다. 현재 흥해농요는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 신청해 놓은 상태이다. 지금까지 포항에 국가나 도지정 무형문화재는 한 점도 없는 실정이다. 시간이 흐르고 전승환경이 바뀐 곳에 전통 민속은 온전하기 어렵다. 20년, 30년 전에 조사한 민속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도 있다. 무형의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관심이 필요하다.

민요 채록 장면. 청하면 미남리 강부용 할머니와.(1992년)
민요 채록 장면. 청하면 미남리 강부용 할머니와.(1992년)

-‘동해안 민속을 기록하다’ 저서의 서문을 연 ‘민속은 생물’이라는 문장이 인상적이다.

△얼마 전에 죽장에서 주민들이 찾아왔다. 죽장면 지역에서 전해내려오는 지게상여놀이를 경상북도 무형문화유산으로 신청하고 싶다는 얘기였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해서는 전승의 맥이 중요하다. 과거로부터 어떻게 전승이 되어 있고, 현재 어떻게 이어가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후진을 양성할 것인지가 명확해야 한다. 흥해농요의 경우 기능보유자가 생존하고, 보존회를 중심으로 전승 노력이 활발하며, 학술 세미나로 문화재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지게상여놀이도 기능보유자가 살아계셨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죽장 지게상여놀이는 일제강점기에 끊어졌다가 1980년대 발굴됐는데, 초창기와 지금의 모습에 차이가 크다. 초창기에는 지게목발소리, 짱치기, 어사령 등을 포함했지만 지금은 지게상여놀이 하나로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장례 풍습이 어떻게 놀이가 됐나.

△상여를 메고 장지까지 운반하는 운구 행렬은 상여소리를 부르고, 잠시 쉬는 동안 앞소리꾼이 상주에게 노자를 요구하기도 한다. 장례 때의 운구 풍습 자체가 놀이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애도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추모해야 할 장례를 즐거움의 놀이판으로 바꾼 것에서 민중의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전국에서 지게상여놀이를 도 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한 지역은 3곳이다. 죽장 지게상여놀이의 효과적인 전승을 위한 연구가 필요하다.

 

-지역 곳곳에서 전해내려오는 설화도 다수 발굴했다.

△설화는 신화, 전설, 민담으로 나뉜다. 뭉뚱그려 전하던 포항지역 설화에서 신화를 분리했다. 영일만 지형이 움푹 팬 배경으로 거인 신화가 전해온다. 일본 역사(力士)가 조선의 창해 역사와 겨루다가 넘어지면서 손을 짚었는데 그곳이 움푹 꺼지면서 영일만이 되었다는 설화다. 창해 역사는 키가 하늘을 찌를 듯하고 몸집이 태산만하며, 손바닥 하나가 영일만 크기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내연산을 지키는 산신인 할무당 신화가 있다. 산속에 신당을 차려놓고 오랫동안 제사를 모시는 걸 보고 관심이 생겨 논문까지 썼다. 할무당을 모신 신당인 백계당은 이후 포항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지역 인물에 대한 전설로는 권달삼을 조명했다. 흥해 사람들의 술자리나 시장통에서 흔하게 들리는 기이한 행적이 재미있어 녹음기를 둘러메고 수집하러 다녔다.

 

-권달삼이 그렇게나 유명했나.

△워낙 입담이 뛰어나서 ‘산에는 산삼, 바다에는 해삼, 육지에는 달삼’이라고 했다. 평양의 봉이 김선달, 서울의 정수동, 경주 정만서, 영덕 방학중과 비슷한 류의 기인이다. 이들에 비해 권달삼(1881-1952)은 다소 후대의 인물로 유일하게 생존 연대가 확실하다. 권달삼 이야기의 배경에는 흥해시장이 많다. 제사를 지낼 돈이 없어 과일전에 가서 사과와 배 앞에 지방을 붙여놓고 절을 한 다음, 어물전에 가서 조기 앞에 지방을 붙여 놓고 절을 해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권달삼 설화로 만든 국악뮤지컬이 영일민속박물관에서 공연된 적이 있다. 그때 울산에 거주하는 외손녀를 초청했다. 흥해시장에 권달삼 거리를 만들어 그를 기억했으며 하는 바람이다.

 

-권달삼과 같은 기인의 설화가 유행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근대화 과정에서 계급 문화는 흐려지고 권위주의는 땅에 떨어졌다. 권달삼은 돈 많고 권세 있는 사람들을 희롱했고 권세가들이 당하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쾌감을 느끼고 박수를 쳤다. 권달삼이 꾀를 부리는 목적은 대게 기본적인 생계유지였다. 권달삼의 행적에서 보여주는 재치와 웃음은 한국문학의 풍자적, 해학적 전통을 잇고 있다.

 

-옛사람들의 민속문화가 지금을 사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의미는.

△민속은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 이뤄낸 생활문화이다.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는 지역문화를 잘 농축하고 있으며, 가장 원초적인 민족의 정신이 스며들어 있다. 물질문명이 발달하면서 민속에 대한 믿음과 역할이 축소될 수밖에 없지만, 민족의 정체성이 담긴 민속문화를 소홀해서는 안 된다. 포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자산 중 무형문화재가 될 만한 것에는 죽장면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지게상여놀이, 여성들의 줄다리기 놀이인 앉은줄다리기, 흥해지역의 농요, 월월이청청이 등이 있다. 대부분의 민속놀이는 전승 단절의 위기로, 국가나 지자체가 의도적으로 관심을 갖고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소멸된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생물의 본성을 어쩌겠나. 다만 그들 중 민속놀이로 전승 가능한 것들을 발굴해 놀이화하면 어떨까. 월포의 후릿그물 당기기 놀이는 원래 어부의 노동이었지만 지금은 피서철 체험놀이로 행해지지 않나. 생명력 있는 놀이를 눈여겨보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현대적 쓸모를 고민해도 좋겠다.

 

- 30여 년간 지역 민속문화를 찾아다녔는데 앞으로 더 하고 싶은 연구가 있나.

△5년 전 퇴임하면서 매년 책 한 권을 쓰자고 다짐했다. 그만큼은 아니지만 한두해에 한 권씩 썼다. 포항지역 민요에 관해 쓴 3권을 ‘포항민요전집’으로 집대성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 중에 잘못 알려진 것들이 많다. 호미곶 지명의 유래부터 오류가 보인다. 조선시대 풍수지리학자인 남사고가 포항 장기의 명승명당으로 호미등을 처음으로 언급했다는 ‘산수비록’은 실체조차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다. 잘못 전해지는 부분들의 근거와 과정을 밝혀 세간의 오해를 바로잡는 작업을 해 나갈 계획이다.

 

박창원 민속학자
박창원 민속학자

박창원 민속학자

 

경북 고령 출신으로 영남대 국문과와 한국교원대 대학원에서 국어교육학을 졸업했다. 1982년 청하중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해 2017년에 교장으로 퇴임했다.

1990년대초부터 사라져가는 지역의 토속민요를 채록해 ‘포항지역 구전민요’, ‘소리로 듣는 포항의 민요’, ‘흥해의 민요’, ‘북송리의 마지막 소리꾼 김선이의 흥해농요’등의 자료집을 냈다.

흥해의 문화인물인 권달삼의 행적과 일화를 채록한 ‘흥해의 기인 권달삼 이야기’와 30여년 간 지역의 민속문화를 정리한 ‘동해안 민속을 기록하다’, ‘포항의 민속놀이’ 등을 저술했다. ‘수필문학’으로 문단에 등단한 수필가이기도 하며 수필집으로 ‘향기있는 사람’이 있다.

청하중학교에서 35년간 근무했고 지금도 청하에 살고 있다. 조선시대 건립된 청하읍성이 겸재 정선의 ‘청하성읍도’ 그대로 복원되기를 ‘맑고 푸른 터’ 청하 사람으로서 소망한다.

 

/배은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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