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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망태기 채워주던 선배 해녀… 그들에 도움되고 싶었죠”

등록일 2023-03-27 18:08 게재일 2023-03-28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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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작가가 만난 ‘이 한 사람’<br/>성정희 구룡포리 어촌계장
성정희 구룡포리 어촌계장.
성정희 구룡포리 어촌계장.

요즘은 다르겠지만 고기잡이배 촬영을 가면 여자 스텝은 승선이 거부되던 일이 흔했다. 바다마을에는 미신이 많고 그들이 경외하는 신(요왕할멈이나 영등할매)에 여성성을 부여하면서도 정작 어촌사회는 남성 위주였다. 뿌리 깊은 남성 중심 문화는 어업인의 의식에도 드러난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의 실태 조사를 보면 남성 어업인은 스스로를 어업 경영주로 인식하는 반면 여성은 어업활동의 보조적 역할로 인식했다. 뱃일에 집안일까지 남성보다 곱절을 일하면서도 스스로를 낮춘 것이다. 그러니 어촌사회의 실질적 주체인 어촌계는 어떻겠는가. 제주를 제외하면 여성 어촌계장은 보기 힘든 귀한 존재다. 40년 가까이 물질을 해온 해녀이자 구룡포리 어촌계를 이끄는 성정희 어촌계장을 구룡포 해녀사랑방 ‘바당꽃’에서 만났다 

‘포항 첫 여성’·‘경북 1호 해녀 출신’ 어촌계장, 지난 2015년 동료 구해 이름 알리기도

파독 간호사 꿈꿨지만 결혼으로 접어… 대구서 고향 돌아와 30대 늦깎이 해녀 변신

유네스코에 등재도 되는 시대지만 대부분 해녀들 여전히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어

해녀비즈니스타운·해녀학교 조성 다양한 수익창출·분배 연구, 행복한 구룡포 꿈꿔

- 한창 바쁜 철이라고? 약속 잡기가 쉽지 않았다.  

△3월 중순부터 4월 말까지 ‘미역철’이다. 짧지만 해녀들이 고소득을 올리는 시기이다. 경북에서 해녀가 채취하는 미역은 전국 자연산 미역 생산량의 절반을 넘는다. 해녀들에게 미역이 ‘봄’이고 봄이 ‘미역’이다.

- 바다에서 ‘농번기’ 그러니까 ‘어번기’가 바로 지금이네.

△보통 2월부터 6월까지 어번기라 하지만 한겨울을 빼면 연중 일을 한다. 6월까지 해삼을 채취한다. 70년대만 해도 넘쳐나던 해삼이 지금은 귀해졌다. 7월에 가장 맛있는 멍게도 요즘은 보기 힘들고 홍합도 멸종되다시피 했다. 대신 10년 전에는 없던 소라가 넘쳐난다. 가을에는 말똥성게를 채취한다. 둥글고 가시가 짧아 말똥같이 생겼다고 말똥성게다. 말똥성게 하고 나면 문어 차례다. 문어는 12월부터 5월까지 주로 잡는다. 전복은 9~10월 산란기를 제외하고 연중 작업이다.

- 문어는 값이 좋은 만큼 작업이 힘들다고.

△워낙 영리하고 난폭해서 잘못 건드리면 위험하다. 물속에서 문어를 만나면 반가우면서도 겁부터 난다. 나처럼 대통시러운(덤벙대는) 해녀는 못 잡고, 경험이 많은 상군들이 잘 잡는다.

- 상군 해녀는 어떻게 되나.

△연륜과 실력이 있어야 한다. 구룡포 해녀 40명 가운데 10명 정도가 상군이다. 상군은 수심 10미터 넘게 내려가는데 나는 수심을 못 타서 상군은 못 된다. ‘숨’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기에 중, 하군이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상군이 될 수 없다. 스킨 스쿠버를 배워봐도 실력이 안 늘더라.

- 바닷속 자원 사정이 늘 같지는 않나 보다. 채취하는 해산물에도 시류가 있나.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꽁치나 오징어가 풍부했고 전복이나 말똥성게는 취급도 안 했다. 당시 주품목은 천초(우뭇가사리)나 도박(해조), 미역 같은 해조류였다. 모래사장이 부족해서 학교 운동장이나 밭에 널어 말릴 정도로 천초와 도박이 수두룩했다. 양식이 활발하지 않은 때라 미역 값이 특히 좋았다. 미역 부스러기를 줘도 떡과 바꿔먹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동네 대소사를 챙기던 한학자로, 배는 안 타셨지만 집에 큰 미역돌이 있었다. ‘미역짬’이라고도 하는 미역바위를 밭처럼 사고팔았다.

- 가장 하기 어려운 작업은.

△성게는 잡는 것도 힘들고 뒷일도 많다. 대여섯 시간 쪼그려 앉아 까다 보면 관절이 남아나질 않는다. 미역도 마찬가지다. 남해는 밖으로 드러난 갯바위가 많지만 동해는 바닷속에 있으니 물속에서 작업해야 한다. 낫으로 끊은 미역 줄기를 옮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지금은 크레인이 있지만 예전에는 젖은 미역을 손으로 끌어올렸다. 손질해서 일일이 뒤집어가며 말리는 후작업도 만만찮다. 그것뿐인가? 가을에는 미역바위를 닦아야 포자가 잘 정착한다. 기세 작업은 밭매기와 비슷하다. 물속에서 숨 안 쉬고 맨다고 생각해 보라. 농기구는 종류도 천차만별이더구먼 어촌은 죄다 수작업이다. 누가 장비를 좀 개발해주면 좋겠다.

- 2015년도인가, 동료를 구한 해녀로 성정희 이름 석 자가 뉴스를 탔다.

△해녀는 살기 위해 숨을 멈춰야 한다. 자신의 숨을 넘어서는 순간 ‘물숨’을 먹게 된다. 간호사 출신이라 그런지 물질하는 틈틈이 주변을 살핀다. 같이 물에 들어간 해녀가 2분이 넘도록 안 올라오더라. 다행히 숨넘어가는 해녀를 끌어올려 심폐소생술로 골든타임을 지켰다. 이 일을 겪고 생각해 보니 30년 물질을 하는 동안 응급처치 한 번을 못 배웠다. 뱃사람들은 소양교육이니 안전교육을 하는데 말이다. 해경에 가서 따졌더니 바로 와서 교육을 시켜줬다. 요즘은 응급구조사 자격증을 가진 해남이 있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작년에도 응급상황의 80대 해녀를 살려냈다. 구룡포 1호 청년 해남이다. 작년에 들어왔는데 벌써 상군을 능가할 정도로 물질이 능숙하다.

태왁을 잡고 물질하는 성정희 해녀.
태왁을 잡고 물질하는 성정희 해녀.

- 간호사가 어쩌다 해녀가 됐나.  

△보통 해녀들은 10대에 물질을 시작하지만 나는 30대 중반에 한 늦깎이 해녀이다. 구룡포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대구로 진학했다. 당시엔 여학생이 도시로 유학 가는 일이 드물었다. 구룡포에선 처음일 것이다. 동생 둘까지 대구로 와서 뒷바라지도 같이 했다. 졸업하고 서독에 가려로 간호 학원을 다녔다. 독일로 파견된 간호사와 광부가 외화을 벌어주던 시기였다. 병원에 근무하다 결혼을 하면서 파독 간호사의 꿈은 접었다. 남편이 사업을 했는데 잘 안됐다. 도시에서 공부한 잘난 딸, 걱정하실까 봐 어머니 생전엔 표도 못 내고 빈집에 돼서야 돌아왔다. 돌아와보니 말똥성게를 전량 일본으로 수출하며 고소득을 올리고 있었다. 남편은 평생 처음인 오징어 배를 타고 나는 물질을 시작했다. 위로 오빠가 셋인데, 외양선 1등 항해사와 대형 유조선 선장 출신도 있으니 바다를 터전 삼아 살 핏줄인가 싶다.

- 구룡포가 고향이니 물질은 금방 배웠겠다.

△눈만 뜨면 바다에서 놀았으니 수영 실력은 기가 막힌다. 그러면 뭘 하나. 일을 안 시켜줬다. 6개월 이상 거주하고 60일 이상 어촌계 활동을 해야 계원 자격증이 나온다는 거였다. 구룡포 어촌계에선 작업을 못 하고 타지로 원정 갈 때 따라나서 일수를 채웠다. 물질은 서툴렀지만 해녀들 뒤를 따라다니며 잡는 법을 익혔다. 나는 사실 물질 보다 작업을 잘 따왔다. 작업할 해녀가 없는 지역은 바다를 팔았다. 해녀가 없으니까 작업권을 위탁하는 것이다. 열댓 명씩 팀을 꾸려 남의 바다로 작업하러 다녔다.

- 늦깎이 해녀가 어촌계장이 되기로 결심한 이유는.

△가난하던 시절, 선배 해녀의 친절을 잊지 못한다. 물질이 서툴러 비어있던 내 망태기에 슬쩍 물건을 넣어주던 따뜻함을. 지금 나는 부자는 아니어도 살만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해녀들은 여전히 빈곤하다. 어촌계 일을 제안받고 처음엔 엄두가 안 났다. 그러다 해녀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2년간 리더 교육이나 연수 등을 찾아다니며 공부를 했다. 해녀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천한 직업으로 인식되어 왔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제주 해녀는 유네스코에 등재되기까지 했는데 똑같은 일을 하는 육당 해녀(육지 해녀)는 왜 안 되나 싶더라. 선거 나갈 때만 해도 여자가 무슨, 이라는 비아냥도 있었지만 어촌계 발전에 남녀가 어딨냐고, 능력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받아쳤다.

- 꿈꾸는 어촌계의 모습은.

△충남 태안군 어느 어촌계는 계원들에게 수천만 원의 배당금에다 퇴직금까지 준단다. 우리는 배당금 한 번 못 받아봤다. 구룡포를 찾는 관광객은 늘었지만 먹거리 시장은 부족하다. 구룡포리 어촌계 사무실 자리에 ‘해녀 비즈니스타운’을 건립할 계획이다. 해녀가 잡은 걸 직거래하면 해녀도 좋고 소비자도 좋은 일 아닌가. 부산이나 제주도 어촌계를 찾아다니며 수익 창출과 분배 방식을 연구하고 있다. 구룡포리를 행복한 마을로 만들고 싶다. 열심히 하다 보면 되지 않을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한다.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는 말은 않을 것이다.

- 어촌계장이자 해녀로서 바라는 바가 있다면.

△내가 물질을 시작할 때만 해도 구룡포 해녀는 100명이 넘었다. 지금은 40여 명으로 대다수가 고령이다. 이대로 두면 해녀 문화는 사라질 운명이다. 현재 우리 마을에는 4명의 젊은 해녀·해남이 있다. 어촌계 최고의 보물이다. 폐교를 리모델링한 ‘해녀학교’를 열어 최정예 엘리트 해녀 20명을 모아 최상의 어촌계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처음에는 해녀가 더 들어오면 밥그릇 뺏기는 일이라는 인식도 있었다. 하지만 바다는 어떻게 가꿔가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자원이다. 성게 수출도 준비 단계에 있다. 해녀는 정년퇴직이 없고 시간 투자 대비 고소득이다. 해녀만큼 일한 대가가 돌아오는 직업도 많지 않으니 젊은이들이 과감하게 도전해 보면 좋겠다.

 

성정희 어촌계장은 

1952년 구룡포에서 태어나 구룡포에서 초,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경북여상을 다녔다. 졸업 후 간호사로 근무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해녀가 됐다. 구룡포수협 최초의 여성 이사를 거쳐, 2021년 4월 18일 치러진 구룡포리 어촌계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선거 당시 ‘어촌뉴딜 300 사업’ 청사진을 제시했으며, 지난해에는 동해안 첫 해녀축제인 ‘구룡포 해녀의 밤’을 개최했다. 40여 년간 해녀문화 계승·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22 자랑스러운 도민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나름 관리하는 해녀라고 자부한다. 피부 관리도 받고 독서도 즐긴다.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은 수차례 정독했다. 좋은 말은 내 것으로 만들고자 메모를 한다. 최근 메모는 “최후까지 살아남는 사람들은 가장 힘이 센 사람이나 영리한 사람들이 아니라 변화에 민감한 사람들”이라는 찰스 다윈의 말이다.

/배은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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