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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예술은 창조물이 아닌 사회적 토양에서 피는 꽃”

예술은 사회적 토양에서 피는 꽃이라고 한다. 예술가 홀로 뚝딱 만들어내는 창조물이 아니라는 의미다. 예술이 발달한 도시에는 튼실한 밑동이 존재하며, 뿌리 깊이 간직한 수분과 양분은 대를 잇는 자양분이 된다. 찬란한 고대 문화의 성지인 경주는 한국 근현대 미술의 선두였다. 해방 직후 설립된 경주예술학교가 그 축이었다. 가난하고 피폐했던 시절, 남한 최초의 미술교육기관의 설립은 한국 근현대예술사를 통틀어서도 파격적인 사건이다. 경주의 문화적 토양이 풍부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동안 조명 받지 못했던 경주예술학교 출신들의 전시가 2015년부터 이뤄지고 있다. 경주 예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지역 예술인들의 노력 덕이다. 경주 근현대 미술사를 발굴하고 추적하며 스스로의 작품 활동 또한 성장했다고 말하는 박선영 작가를 경주미술사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났다. -최근 7번째 개인전을 일본에서 개최했다고.△작년 12월에 일본 오이타현 나카츠시 기무라 미술관에서 ‘푸른 사유·빛, 일상과 조우하다’전을 했다. 동아시아 문화예술교류의 일환으로 기무라 미술관이 진행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이다. 빛을 이용하는 작가를 공모한다고 해서 포트폴리오를 제출했고 초청을 받았다. 일본의 방역조치가 강화됐던 때라 사전 조율은 온라인으로 했고, 전시 기간에 2주간 머물며 워크숍과 오픈 스튜디오를 진행했다.-그동안의 개인전 타이틀을 보면 ‘기억의 풍경’, ‘반가사유’, ‘무엇이든 무엇도 아닌’, ‘푸른사유’ 등 주로 기억과 시간, 사유를 주제로 하고 있다. 작품을 구상할 때 주제부터 확정하고 형태를 확장시키는 편인가.△애초에 의도했든 아니든, 지나고 보니 관통하는 주제였다. 인간에게 있어서 시간은 곧 소멸이다. 언젠가는 사라지는 존재지만 그렇다고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남아서 우리에게 여전히 전해지는 것들이 있다. 어릴 적부터 세상과 현실의 이면이 궁금했고 ‘세계의 불가사의한 이야기’ 같은 류의 책을 읽곤 했다. 일상에서 경험하는 사건, 감정, 그리고 감각으로 느끼는 많은 것들은 몸의 ‘기억’으로 저장된다. 시간이 지난 후 작업을 하면서 그 ‘기억’은 칠해지고, 닦이고, 다시 덮어짐을 반복한다.-작품 전반의 푸른색이 인상적이다. 푸른색은 작가에게 어떤 의미인가.△내면의 사유적 풍경은 결국 푸른색으로 남을 때가 많았다. 내게 푸른색은 하나의 색이 아닌 무수한 스펙트럼을 지닌 색이다. 연한 파랑, 어두운 파랑, 따뜻한 파랑, 차가운 파랑, 초록색이 느껴지는 파랑, 붉은색이 도는 파란색까지. 그리는 순간의 우연성을 담은 추상 작업이 많은데, 그 과정의 결과가 대체로 푸른색 계열이었다.-코로나19를 전후로 작품의 분위기가 다르다. 드로잉 위주의 평면에서 조명과 소리를 더한 입체로의 변화는 어떤 고민의 산물인가.△팬데믹을 전후로 나와 연결된 타인과 세계에 대한 관점이 달라지면서 사진과 조명을 작업에 사용하게 되었다. 팬데믹은 공포로 다가왔고 타인과 멀어져야 했던 동시에 가깝게 연결된 세계임을 알게 해주었다. 마스크 탓에 누가 누군지 분간되지 않는 현실이 낯설면서도 마스크를 끼지 않는 행위들이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멈춰진 일상은 한편으로 사유할 시간을 제공했다. 반가사유상을 배경으로 나의 초상사진을 겹쳐 표현한 작품은 그렇게 나왔다. 경주미술협회 활동과 경주미술사 연구를 통한 지역 미술정책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이 작품의 변화로 이어진 측면도 있다. 예전에는 내 안에서만 뭔가 끌어내려고 했다면, 지금은 예술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가, 라는 고민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 드러내고자 한다. -오랫동안 ‘기억과 시간’을 주제로 작업을 한 영향인지 경주 미술사 연구에도 열심이다. 지역 근현대미술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경주의 첫 공립미술관 추진 당시 특정인의 이름을 내건 미술관 명칭을 둘러싼 논쟁이 컸다. 경주는 근현대 미술의 역사가 깊고 작가군이 상당하지만 관련 연구가 미약했다. 해방 직후 설립된 경주예술학교가 대단했다거나 황술조, 손일봉 등등의 거장이 있었다는 것만 알려진 정도였다. 그런 문제 의식에서 경주미협 내에 경주근현대미술연구회를 발족하고, 드러나지 않은 1세대 작가들의 작품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고 아카이브 자료를 발굴했다. 솔거미술관 개관전인 ‘경주미술의 뿌리와 맥 7인’을 시작으로 매년 관련 전시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70년이 지났으니 자료 수집이 쉽지 않았을 텐데.△ 경주 근현대미술은 한국 근현대미술사와 나란히 할 만큼 역사가 깊다. 세월이 지나는 동안 지방의 미술역사가 소외되어 왔고 관련 연구자도 드물다. 경주예술학교의 경우 경주시사나 예총사의 한두 페이지가 전부였다. 당시 신문 기사를 찾아 일일이 대조하고 연락이 닿는 유족들과 만났다. 집중적인 자료발굴과 유족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환경은 전시회를 통해 마련됐다. ‘1946 경주예술학교’ 전시 소식을 들은 사공침(경주예술학교 1회 졸업생)의 손녀가 자료를 들고 찾아왔다. 조희수 선생에게 사진을 보여드렸더니 또렷하게 기억을 하시더라. 경주예술학교 출신으로 유일한 생존자인 조희수 선생은 경주 근현대 미술사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든든한 조력자이다. 작품과 자료의 발굴에 있어서는 서양화가인 최용대 수석 연구원의 역할이 컸다. 최용대 선생은 경주 1세대 사진작가 최원오 선생의 아드님이다. 그리고 미술사학자인 이애선 전북도립미술관장을 만나면서 연구는 활기를 띠게 됐다. 해방 직후 설립된 경주예술학교에 관한 논문 저자로 지금까지 각별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경주가 한국 근현대미술의 중심이 된 배경은.△경주가 근대 미술문화를 선도한 배경은 탁월한 인재들에 있다. 황술조를 필두로 손일봉, 김준식, 김만술, 손수택 등이 해방을 전후로 활동했다. 경주예술학교는 경주 근대미술의 중요한 축이다. 서울대학교 미술과 보다 6개월 빨리 설립된 남한 최초의 예술전문학교이다. 서울의 중진 미술가를 교수로 초빙했을 정도로 수준도 높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좌우익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1952년 2회 졸업생 배출을 마지막으로 폐교의 수순을 밟게 된다. 재학생들은 폐교 이후 홍익대학교로 편입했다. 예술학교의 꿈을 버리지 못한 김준식은 미술과를 계림학숙으로 흡수합병한다. 이후로도 예술을 향한 열정은 꺾이지 않았고, 빛바랜 사진 뒷면에서 ‘1956년 경주미술관 건립위원회’라는 글귀가 발견되기도 했다.-경주에 인물이 많았던 이유는.△문화 예술의 저력은 오랜 역사에서 나온다. 경주에 예술가가 많았다는 건 신라 문화의 풍토가 역할을 했다고 본다. 일제강점기에 유학을 떠났던 작가들 대부분은 해방 후 귀국해서 서울이나 대구에 정착했다. 고향에 돌아와 활동한 경우는 경주가 유일했다. 신라 천년의 유구한 역사와 함께 내재된 풍부한 문화적 토양이 예술적 가치를 일찍 일깨우지 않았을까. 유학생들의 잇단 귀국은 경주의 문화 예술적 역량을 고조시켰다. 일본에서 미술교사를 한 황술조를 비롯해 손일봉과 김준식, 김만술은 일본 유학파로 수상 경력도 화려하지만 경주에 머무르며 작업을 이어갔다.-창작 활동과 미술사 연구만으로도 시간이 빠듯할 텐데 문화 기획에도 관심이 크다고.△작년에 경북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으로 70대 이상을 위한 ‘황남 골목에서 청춘을 만나다’를 기획해서 운영했다. 미술감상과 다양한 표현활동을 통해 삶을 회고하고 긍정하는 다소 거창한 목표의 프로그램이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부담스러워하던 어르신들이 점차 몰입하고 성취감을 느꼈으며, 마칠 때는 아쉬워했다. 예술을 일방적으로 건네는 것이 아닌 예술로 소통하는 소중한 기회였다. 앞으로 지속 가능한 활동을 만들기 위해 뜻있는 동료 작가들과 매주 만나 공부도 한다.-앞으로는 또 어떤 행보를 작업을 보여줄지 기대된다.△경주 미술사 정립을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다. 지금은 경주화단의 2세대 작가인 배한기, 이재건의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향후 60년대 이후 경주 현대 미술사도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경주 미술의 맥을 찾는 작업을 하다 보면 난관에 부딪힐 때가 있다. 작품 활동 또한 변수가 끼어들어 길을 잃을 때가 있지만, 우연과 필연이 섞였을 때 만들어지는 에너지라는 것이 있다. 그럴 때 희열이 크다. 생각지 못한 울림을 주는 작품을 하고 싶다. 자신만의 스타일로 독창적인 작품을 구축한 작가들, 오래도록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어온 모든 작가들을 존경한다. 나 또한 원하고 맞다면 서슴지 않으려 한다. 박선영 작가는경주 출생으로 학창 시절 내내 미술부 활동을 했다. 계명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부산대학교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 협동과정에서 미학을 전공했다. 주요 전시로는 ‘기억의 풍경’(경주라우갤러리, 2010), ‘반가사유 2020’(서울 GB갤러리, 2020), ‘무엇이든 무엇도 아닌’(경주예술의전당 알천미술관, 2021), ‘푸른사유·빛’(경주솔거미술관, 2022), ‘푸른사유?빛, 일상과 조우하다’(일본 나카츠시 기무라기념미술관, 2022) 등이 있다. 7회의 개인전과 400여 회의 단체전 및 초대기획전, 해외교류전 등에 참여했다. 한국미술협회 경주지부 17~18대 지부장을 역임하면서 솔거미술관 특별기획전을 담당했다. ‘경주미술의 뿌리와 맥 7인’을 시작으로, 경주예술학교의 처음과 끝을 함께 했던 김준식, 경주예술학교의 마지막 학생으로 홍익대 교수를 지낸 김종휘, 경주예술학교 출신의 유일한 생존자 조희수 선생을 비롯해 경주 근현대 미술사에 족적을 남긴 작가들을 조명하는 10여 회의 전시를 기획·총괄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경주지부 부설 경주미술사연구소장이자, 미술문화 콘텐츠를 개발하고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아트앤지(ARTG)미술경영연구소 대표이다./배은정 작가

2023-02-27

“연말에 집중되는 연탄 나눔… 2∼3월에 한 번 더 와주세요”

올겨울 치솟는 난방비가 화두다. 비용을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난방을 덜 가동하고 단열에 안간힘을 쏟는 분위기다. 당장 내 앞의 사정이 급할수록 주위를 살필 여유가 없는 법이다. 코로나에 이은 불황으로 기업의 후원은 줄고, 유례없는 고물가에 개인 기부 활동마저 위축되는 상황. 더 춥고 더 취약한 곳의 사정은 어떨까. 포항연탄은행 유호범 대표는 이 시기를 ‘연탄 춘궁기’, ‘연탄 보릿고개’라고 말한다. 연말 집중되는 나눔의 온기가 식어가며 연탄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때가 요즘이다. -이 질문부터 할 수밖에 없다. 아직도 연탄을 때는 곳이 많나.△연탄은행 추산으로 전국 8만 가구(2021년 기준) 이상이다. 포항연탄은행을 운영하기 시작한 2014년. 연탄을 사용하는 세대는 800가구로 조사됐고 그 가운데 도움이 필요한 취약계층 650가구를 지원했다. 연탄 소비는 차츰 감소하고 있어 현재는 400~500가구로 추산된다.-연탄을 나눌 가구는 어떻게 선별하나. 세대가 원하는 만큼 지원이 가능한가.△처음에는 대상자를 정하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가가호호 일일이 찾아다니며 조사하다 터득한 비법이 경로당이었다. 어르신들은 도움이 필요한 집과 여유가 있는 세대를 정리해 주었다. 실태조사를 바탕으로 대상자의 건강 상태와 수입 등을 기준으로 등급을 매겼다. 최하층의 경우 요청이 오는 대로 연탄을 제공한다. 이번 겨울에만 두세 번 지원한 세대도 있다. -포항연탄은행에서 지원하는 수량은 얼마나 되나.△포항연탄은행은 한 해 평균 10만여 장의 연탄을 나눔 한다. 세대당 한 번에 제공하는 연탄은 300장이니 대략 300가구에 지원하는 것으로 계산된다. 중복되는 가구를 제외하면 200가구 정도 된다. 정부의 에너지바우처 지원사업이 있지만 부족한 실정이다. 날씨가 추워지는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연탄으로 난방을 하려면 하루 평균 다섯 장을 기준으로 천여 장이 필요하지만 바우처로 구매할 수 있는 연탄은 절반에 불과하다. 복지제도는 좋아졌지만 신고제가 문제다. 방법을 몰라 혜택을 못 받는 고령층도 있다.-연탄을 때는 가구의 생활 정도는 어떤가.△고령층 그 가운데 독거노인이 다수다. 젊은 층은 어려워도 연탄을 안 땐다. 때맞춰 연탄 갈기가 보통 불편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인성 질환에다 막노동이나 농사일로 관절이 망가져 거동이 불편하고 일할 능력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연탄 나눔을 시작하던 무렵에는 송도동, 청림동, 용흥동 거주자가 많았다면 재개발이 이뤄지면서 최근엔 흥해읍 거주자가 상대적으로 많아졌다.-연탄 때는 가구가 줄어드는 건 좋은 일 아닌가.△정부는 연탄사용 가구의 보일러 교체를 지원하고 있다.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면서 저소득층의 생활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서다. 매년 연탄을 지원받던 세대가 올해는 연락이 없길래 전화를 걸어봤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가스보일러를 들였다며 하는 말이, 집 안이 추워서 생활이 어렵다고 한탄을 하더라. 가스나 기름보일러는 때면 땔수록 돈이 들지만, 연탄은 꺼트릴수록 돈이 든다. 연탄 갈기가 수고스럽지만 다른 에너지에 비해 확실히 저렴하다. 연탄 때는 집에 가보면 훈기가 감돌지만, 가스나 기름 때는 집은 그야말로 썰렁하다. 전기장판에 두터운 이불을 늘상 깔아놓아도 냉골이다. 기름 겸용 보일러가 있어도 연탄을 사용하는 어르신이 많다. 가난한 이들이 겨울을 그나마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연료는 연탄이 유일하다.-기부와 후원이 감소하고 단체 봉사가 불가능했던 코로나 시기는 어떻게 견뎠나.△연탄 나눔은 순수 후원에 의존한다. 매해 15만 장씩 하던 나눔이 코로나 첫해에는 3분의 1로 감소했다. 후원을 약속했던 기업과 단체들이 줄줄이 취소했다. 하는 수없이 긴급으로 필요한 곳에만 연탄을 제공했다. 연탄을 날라줄 봉사자가 없으니 배달료 부담도 문제였다. 코로나 기간 내내 틈날 때마다 마스크와 소독제를 들고 어르신들을 방문했다.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우려와 불안으로 거의 감금되다시피 생활하던 상황이라 눈물까지 흘리시더라. 지금은 폐차된 경차를 끌고 안 다닌 데가 없다. 다행히 지난해 말부터 후원과 봉사가 늘고 있지만 코로나 이전의 활기는 아직이다. -연탄 나눔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예닐곱 살 무렵, 고향인 경기도 양평에서 서울로 이사를 갔다. 어머니는 행상을 다녔고 아버지는 일용직 노동자였다. 이삿짐을 수시로 쌌을 정도로 힘든 시절을 보내면서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연탄은행을 만든 허기복 대표가 청년 시절에 다니던 교회의 전도사였다. IMF가 터지고 원주에서 무료급식을 하다 연탄은행을 설립한 분이다. 허기복 대표의 권유로 김천에서 연탄은행을 시작했고 영주와 포항까지 이어졌다. -난방비 대란이라는 요즘 에너지 취약계층의 상황은.△이곳이 연탄은행이기는 하지만, 가장 취약한 에너지 빈곤층은 기름보일러를 때는 세입자이다. 기름값 부담에 맘 놓고 쓸 수도 없고 거기다 보일러 수리나 교체는 엄두도 못 낸다. 그러므로 연탄은 에너지 취약계층의 상징어로 보면 된다. 기부자가 대상과 방식을 지정하는 것을 ‘지정기탁’이라고 하는데, 연탄은행 후원자의 90%가 연탄을 지정한다. 후원자들에게 난방용 등유로 변경해도 괜찮으냐고 양해를 구하기도 하는 이유다. 난방은 주거 환경이나 건강과 연계된 문제이다. 단순히 연탄 지원에 그치지 않고 수명이 다 된 연탄보일러를 교체하는 시설 개선 사업을 동반한다. 혹한기에는 방한복과 이불을, 혹서기에는 선풍기와 생수 등의 생필품 나눔도 4~5년 전부터 하고 있다. 에너지 취약층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에너지은행 사회적협동조합’을 구성해 나눔 영역을 넓히고 있다.-입춘이 지난 요즘 시기에 나눔이 더 절실하다고.△연탄 나눔은 연말에 집중된다. 소외이웃에 온정을 나누는 연말연시 분위기 덕이다. 보통 한 집에 300장씩 배달하면 한 달 반 정도 사용하니, 2~3월이면 연탄이 바닥나게 된다. ‘이월에 보리 꾸러 갔다가 얼어 죽는다’고 하지 않나. 연탄은 떨어지고 늦추위는 가시질 않아 보릿고개처럼 힘들다고 ‘연탄 춘궁기’라는 말이 있다. 연말에 찾아오는 봉사자들에게 2~3월에 꼭 한 번 더 와달라고 부탁을 드린다.-힘듦과 보람이 공존하는 나눔의 현장에서 기억에 남는 후원자가 있다면.△어느 해인가, 크리스마스 전날에 젊은 부부가 찾아왔다. 매일 천원씩 모았다며 36만5천원을 후원했고 이후로도 거의 매년 찾아온다. 처음에는 둘이서 나중에는 아이와 셋이서 말이다. 남을 돕는 나눔은 자신을 충만하게 한다. 자원봉사자들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예상외로 가까이 있음을 깨달았다거나 부족함 없는 생활을 불평했던 스스로를 반성했다고 말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현장이다 보니 간혹 기념촬영에만 집중하는 후원자나 도움을 당연시하는 수혜자도 있는데 정중하게 말씀을 드리는 편이다.-연탄은행을 운영하며 바라는 바가 있다면.△연탄 나눔에도 쏠림 현상이 있다. 시기적으로는 연말에 몰리고 지역적으로도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 포항의 경우 기업 후원은 철강공단이 위치한 남구에 집중된다. 골고루 분배되면 더불어 따뜻한 겨울나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연탄은행은 제도가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의 빈틈을 메우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공적 지원은 기초생활수급이니 차상위라느니 조건이 필요하지만 실제 현장에선 사정이 더 딱한 경우가 많다. 시청에서 연탄은행에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다. 낡은 조립식 패널 집에 거주하던 출소자였다. 구멍 뚫린 벽 사이로 찬바람이 드나들었지만 연탄난로 하나가 전부였다. 우리가 연탄보일러를 설치하고 패널을 구입해 직접 덧대주었다.-포항연탄은행이 운영된 지 9년이 됐다. 앞으로의 계획도 궁금하다.△연탄 지원을 경주 지역까지 확대하고 있다. 도움의 손길을 힘닿는 대로 뻗고 싶다. 뜻있는 분들과 얘기하고 있는 부분은 ‘연대’이다. 연탄은행은 에너지, 의료 봉사 단체는 건강, 이런 식으로 다양한 분야가 연대하면 체계적 지원이 가능하다. 또 하나는 나눔의 자력(自力)이다. 지난 2002년 원주에서 시작된 연탄은행은 전국협의회로 운영된다. 포항에서 사용되는 사업비 가운데 포항에서 충당되는 비율은 20~30%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전국협의회에서 도움을 받는다. 지역의 에너지 빈곤층을 지역민의 힘으로 도울 수 있는 자력이 생겼으면 한다. 나눔은 불평등을 극복하는 힘이라고 하지 않나. 가진 자와 덜 가진 자의 둔덕이 조금이라도 더 평평해진다면 지금보다 따뜻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유호범 포항연탄은행 대표는김천에서 목회를 하면서 연탄은행 운영을 시작했다. 포항은 산업도시라 형편이 나을 것 같았지만 그늘은 더 짙었다. 죽천리 바다 마을에 연탄 나눔을 위한 그루터기 교회를 개척하고 전국 31번째 연탄은행을 포항에 설립했다. 일요일 오후 예배는 연탄 배달 봉사로 대신한다. 정치성과 종교성을 띠지 않아야 한다는 비영리 민간단체의 원칙에 충실하기 위해 포항연탄은행을 한동대학교 인근으로 옮겼다. 연탄은행의 상징 무늬에는 쌀알과 연탄이 밥그릇에 담겨있다. 연탄은행의 정식명칭은 ‘밥상공동체 연탄은행’이고 슬로건은 ‘등 따시고 배부르게’. 에너지 빈곤층을 더 깊고 넓게 돕기 위해 ‘에너지은행 사회적협동조합 포항지부’를 조직하고 인근 도시로 나눔을 확장 중이다./배은정 작가

2023-02-13

“포항지역 500기 고인돌 중 개발·훼손으로 300기만 남아”

지역사는 지역민의 뿌리이자 거울이다. 지역민의 역사 알기는 지역의 정체성 찾기이며 이러한 정체성을 가진 위에서야 지역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환경은 발전할 수 있다. 포항 지역사 연구가 생소하던 시절. 황인 선생은 지역사 연구의 선구적 길을 걸어왔다.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지역사의 현장을 발굴하고 해석하는 일에 힘을 쏟았으며 문화재 보존에도 앞장서 왔다. 역사에 대한 전문성과 사명감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교직에서 정년퇴임하고도 활발하게 활동해 온 선생을 동해면 도구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작년 녹내장 수술을 한 탓에 건강이 예전 같지 않다면서도 남다른 기억력과 넘치는 열정으로 인터뷰는 한나절 남짓 이어졌다. -포항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1977년 동해중학교에 역사 교사로 부임하면서부터다. 수업에 들어가 보니, 희귀 성씨인 ‘황보’ 성이 한 반에도 여럿이었다. 계유정난(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킨 난) 당시 영의정이던 황보인의 집성촌이 학교와 가까운 구룡포읍 성동 3리였다. 황보인의 비석을 찾으러 가던 길에 심상치 않은 큰돌을 발견했다. 밭일하던 노인이 잔돌을 골라내어 큰돌 주변에 모으며 구시렁댔다. 돌무더기를 헤집어보니 파손된 마제석검 손잡이가 있었다. 당시 지역 방송 기자였던 박이득 전 포항예총 회장에게 제보했고, 포항 공당리 고인돌이 전국으로 전파를 타며 특종으로 다뤄졌다.-포항의 고인돌은 기계면에 많지 않나.△기계면에 대규모로 분포하지만 구룡포와 동해, 흥해 등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4~5년 돌아다니며 정리한 고인돌 보고서를 문교부(1990년 교육부로 개칭)에 올렸더니 모 대학 고대사 교수가 대학원생 3명과 찾아왔다. 포항시 기계면 일대에 고인돌 수십 기가 있고 형산강 건너쪽은 발견되지 않는다고 문교부에 보고하니, 내 보고서를 내밀더라는 것이다. 그때가 80년도 즈음으로 기억한다. 문교부에 보낸 글은 남아있지 않고, 1999년 ‘영일군사’에 관련 내용을 실었다.-포항에 산재한 고인돌은 어떻게 해석되나.△청동기 고인돌 사회는 평등사회에서 계급사회로 발전되는 과정이다. 수장이 거느린 인원을 계산하면 포항에 선사문화가 발달했음을 알려준다. 날씨가 따뜻해 살기 좋고 먹거리가 풍부하며, 동해와 형산강이 외부의 침입을 막았던 덕이다. 포항에는 500여 기가 넘는 고인돌이 있었지만 무관심과 개발로 훼손되고 300여 기가 남았다. 포항에서 발견되는 선사유적으로 암각화와 선돌(立石)도 있다. 선돌은 청동기시대 부족 간의 경계를 표시하거나 어떤 특별한 사건을 기념해 세웠다. 동해면 신정리에 있는 ‘할배 짝짓돌’과, 도구리의 ‘할매 짝짓돌’에 대한 것은 박일천 초대 민선시장이 집필한 ‘일월향지’에 실려있다. ‘할매 짝짓돌’은 동해초등학교에 있었지만 ‘할배 짝짓돌’을 찾지 못하다가 신정 1리 마을 앞 수로 공사로 발견됐다. 청년회에서 경로잔치를 하면서 마을에 세워 지금까지 수호신으로 보존된다. 포항에 현재 남은 선돌은 5개이다.-선사문화가 발달했던 포항의 고대사회는 어땠나.△포항 지역은 청동기 이래 고대 소국이 발전되다 신라에 병합된다. 경주 지역에 강력한 고대국가가 발달한 배경에는 포항의 풍족한 선사문화가 한몫했다고 여겨진다. 신라 왕경 주변의 풍성한 수확물이 신라 지배층을 뒷받침한 것이다. 포항의 고대사회는 청하와 신광, 흥해에 산재한 삼국시대 고분을 통해 확인된다. 주인이 확실한 무덤은 없고 도굴이 심한 상태지만, 영일만과 형산강을 경계로 남북이 뚜렷이 구분된다. 북방적인 문화 요소와 남쪽에서 올라온 가야적인 요소가 수용되는 길목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고구려 장수왕은 청하 고현까지 남하했으므로, 신광 냉수리 고분군에서는 고구려 양식이 나타난다. 청하에는 고구려 군사가 철새처럼 되돌아가길 기원하는 ‘회학지(回鶴池)’와 고구려군이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는 ‘도끼재’가 있다.-고려시대 인물인 배천희 국사의 행적을 발견하게 된 과정은.△고려시대 포항에는 1군(흥해)과 5현(연일, 청하, 신광, 기계, 장기)이 있었다. 흥해가 군으로 승격된 건 배천희 국사의 고향이라서다. 흥해읍 행정복지센터 뒤에 ‘순국반공 위령탑’을 탁본하러 갔다가 알게 된 사실이다. 위령탑의 글씨를 쓴 해공 신익희는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과 대한민국 국회의장을 지낸 대단한 명필가이다. 탁본을 하고 들른 중국집에서 노인 한 분이 조상 중에 대단한 스님이 있다고 했다. 무덤은 흥해에 있고, 비석은 수원 광교산 창성지에 있다며 족보까지 펼쳐 보였다. 고려말 고승인 진각국사 배천희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머리가 쭈뼛 섰다. 화엄종계의 승려로는 유일하게 국사가 된 인물이다. 왕명에 따라 목은 이색이 짓고 승려 혜잠이 새긴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명(眞覺國師 大覺圓照塔碑銘)’은 보물 제14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마침 탁본 전시를 앞두고 있었는데 반드시 떠서 전시장에 걸고 싶어 수원으로 갔다. 막상 가보니 비석은 수원성으로 이전됐고 탁본은 정부 승인 없인 안 된단다. 탁본은 해야겠고 별 수가 있나. 나흘 동안 시청으로 출근하니 단 한 장을 조건으로 허락이 떨어졌다. 탁본하던 날 함박눈이 내렸는데도 글씨가 하나도 안 번졌다.-포항에 남은 진각국사의 유적은 어떤 것이 있나.△진각국사의 고향인 흥해 양백리 백산에 무덤과 유허비가 있다. 길이 험해서 한참을 헤매다 찾았는데 묘 앞에 당간지주 혹은 왕릉의 호석 모양의 돌기둥 2개가 남아있다. 당시 승려들은 화장을 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국사의 부도는 아직 찾지 못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부도 대신 무덤을 만들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국사의 묘 옆에 말 무덤이 있고 관련한 설화도 전해온다. 최근 문중에서 안내판을 세웠다.-조명해야 할 포항의 인물들이 많다고.△한의학의 대가 석곡 이규준이 동해면 임곡리 태생이다. 북쪽은 동무 이제마, 남쪽은 석곡 이규준을 ‘근대 한의학의 양대 산맥’이라 부른다. 동해면에 살면서도 석곡의 존재를 몰랐는데, 제자들이 매년 10월 마지막 일요일에 묘소를 참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매년 전국에서 100여 명이 모이지만 정작 포항시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외지인으로는 처음으로 참배 행사에 참여했다. 이후 석곡을 조명하는 사업들이 이어졌고 동해에 석곡의 이름을 딴 도서관이 건립됐다. 그리고 10년 넘도록 학생들을 데리고 참배한 의병대장도 있다. 구한말 영남지방 대표적인 의진(義陳)인 장기의진을 이끈 의병장이다. 조명받지 못한 인물이라 보훈지청으로부터 의병도 아닌 사람을 왜 참배하느냐는 항의도 받았다. 결국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제694호)을 추서 받고 대전국립묘지로 이장됐다. -포항에서 발견된 유물 가운데 독특한 것이 있다면.△조선시대 충비(忠婢) 즉 ‘계집종’ 비석이 3기나 있다. 광남서원의 충비 단량비, 곡강천의 참포에 있는 충비 순량비, 연일읍 연화재의 충비 갑연비이다. 갑연 비석은 조선왕조실록(순조 30년11월21일 조)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단량은 조선시대 영의정 황보인의 여종으로 계유정난 때 황보인의 손자 ‘단’을 물동이에 숨겨 탈출했다. 단량의 덕으로 혈통을 유지한 것이다. 여종을 위한 비석은 전국적으로 드물어 역사적 가치가 높고, 포항 사람들의 인간미를 보여준다.-아는 만큼 보인다니 사소한 것도 예사로 보지 않을 것 같다.△흥환리 바닷가를 산책하다 흥선대원군의 친형인 흥인군 이최응의 공덕비를 발견했다. 블록으로 담을 쌓고 슬레이트로 지붕을 덮은 구조물을 처음에는 그저 어촌의 그물 창고거니 했다. 태풍으로 지붕이 날아간 뒤 보니 2개의 비석이 있었다. 목장의 감목관인 민치억과 흥인군의 공덕비였다. 이로써 조선시대 군마를 방목하며 국가의 군마 조달에 큰 역할을 한 ‘장기 목장성’의 존재가 드러났다. 비각을 세우기 위해 터 고르기를 하던 중 비석 하나가 더 발견됐다. 울부 김노연의 공덕비로 장기 목장성이 울산 목장성의 관할임이 적혀 있었다.-당장은 아니어도 결국에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는 사례도 있다고.△장기면에 있는 고석사 약사여래불은 약초나 정병이 없어 이상하게 여겨졌다. 일제강점기에 덧바른 석고를 떼어내니 유려한 선이 드러났지만, 훼손이 심해 문화재 등록은 어려웠다. 그러다가 불교미술사의 대가인 문명대 교수에 의해 최초의 통일신라시대 미륵불 의좌상(倚坐像)임이 밝혀졌다. 의자에 앉은 모습을 형상화한 의좌상은 국내에선 보기 드물어 경주 삼화령과 법주사를 포함해 단 3구뿐이다.-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아쉬운 때는.△충비 단량 비석은 아직까지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했다. 후손들이 다시 만든 비석을 비각 안에 넣고 원래의 것은 비바람에 방치했기 때문이다. 당시 문화재 지정을 위한 현지실사가 나왔다가 이걸 보고 그냥 가버렸다. 또 장기면 죽정리에 있는 태봉산은 신라시대 왕자의 태(胎)를 안치한 ‘잡인출입금지’의 기록이 남아있지만, 무관심 속에 도굴의 표적이 되어 태를 묻은 태실은 파헤쳐 지고 장대석이 흩어져 버렸다.-향토사가로서 바라는 바가 있다면.△역사는 사견이 들어가서도 부풀리거나 폄하해서도 안 된다.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꾸미지 말고 기록돼야 한다. 그런 면에서 연오랑 세오녀 테마공원은 고증이 상당히 아쉽다. 블루밸리산업단지 개발 과정에서 20여 기의 고인돌이 사라졌다. 사라지는 고인돌의 체계적 보존과 활용방안이 마련되길 바란다. 포항에 특히나 많은 봉화대와 등대는 훌륭한 관광자원이다. 불빛축제 때 등대와 봉화도 밝히면 얼마나 멋지겠나. 역사는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정체성이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먹고살기 바빠서 생각을 못 하고 살았지만 우리가 왜 살아야 하고 어떤 마음으로 지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이 바로 역사와 문화이다./배은정 작가

2023-01-30

“마음을 움직이는 음악의 힘… 몸과 마음의 병 치료”

음악은 힘이 세다. 유행가 한 소절에도 과거의 한 장면이 냄새까지 소환된다. 노래 한 곡이 힘든 시기를 견딜 힘을 주기도 한다. 시공간을 뛰어넘고 마음을 넘나드는 힘이 음악에는 있다. 그렇기에 음악(音樂)은 음약(音藥)이라는 말도 있다. 편두통에는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들으면 효과가 있고, 위장 장애에는 슈베르트의 ‘세레나데’, 저혈압에 차이콥스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고혈압에 베토벤의 ‘신세계교향곡 3번’이 좋다는 식이다. 음악이 질병 치료에 도입된 것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2차 세계대전 당시 부상병들에게 틀어주면서 본격적으로 연구됐다. 국내에도 음악을 단순한 위안을 넘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치료하는 적극적인 수단으로 사용하는 의료기관이 생겨났다. 음악이란 치료제로 몸과 마음의 병을 고치는 김정희 음악치료사를 만났다. -음악치료사는 어떤 사람인가.△스스로에게도 매일 하는 질문이지만 아직 마음에 드는 정의를 못 내린 상태다. 물론 학문적인 정의는 있다. 음악치료사는 음악을 사용해 인간의 심리적, 신체적 질병을 치료하는 사람이다. 초기 음악치료는 주로 정신질환자와 지적장애 아동을 대상으로 시행했지만, 음악치료 이론이 자리 잡고 임상 적용이 발달하면서 수술 환자나 통증 환자, 노인성 질환과 신경 손상, 언어 손상, 스트레스 조절 프로그램, 비행 청소년 행동 수정 프로그램, 가족치료까지 다양한 영역으로 확산됐다.-일반적인 음악 활동과 음악치료의 차이는 무엇인가.△분명한 치료 목적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음악 활동과 다르다. 대상자가 최우선하는 특정한 문제가 바로 치료 목적이 된다. 첫 만남 때 대상자와의 인터뷰나 의뢰기관에서 받은 정보를 참고해 치료 목표를 설정하는 진단평가를 실시한다. 음악치료사는 대상자를 이해하기 위해 연구를 치밀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적재적소에 다양한 음악적 기법들을 중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는 치료라는 말보다 수업이라고 하는 편이다.-음악치료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지나.△사전 준비는 한 편의 공연을 무대에 올리는 과정과 비슷하다. 매 회기마다 큐시트를 작성하고 시나리오를 적는다. 그걸 ‘음악치료 적용계획서’라고 한다. 대상자가 따라오지 못할 때를 대비해 플랜 B도 만들어놓는다. 음악치료는 즐거움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노래로 인사를 나누고, 다양한 악기로 즉흥연주도 한다. 악기와 음악을 선택할 때는 대상자 상태에 따라 달리 해야 한다. 같은 치료목적이라도 나이나 문화적 환경, 음악 선호도 등에 따라 치료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열 번 설명을 듣는 것보다 한번 참여해보는 걸 권한다.-치료기간은 얼마나 걸리나.△일반적으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최소 6회에서 10회 이상은 시행해야 한다고 본다. 여러 번 만날 기회가 있다면 좋지만 대부분 충분치 않다. 음악치료는 내담자와 신뢰적 관계를 형성하는데 효과적이다. 학생 징계의 일환으로 음악치료를 이수받는 학생들도 많다. 마음을 열기까지 시간이 필요하지만 라포만 형성되면 속마음을 잘 드러낸다. 드라마틱한 변화를 욕심내기 보다 무조건 공감하고 신뢰하는 어른이 한 명은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노력한다. -상담과도 유사한데 차이점은 뭔가.△상담심리 이론을 동반하지만 1순위는 음악이다. 음악치료사에 따라 말과 음악의 사용 비율이 다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음악치료사의 주요 역할은 대상자의 마음을 음악으로 끌어내주는 것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리듬에 반응하게 되어 있다. 누워서 아무것도 못하는 환자도 익숙한 노래에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언어장애를 치료하기도 한다. ‘아’나 ‘어’ 발음이 안 되는 환자가 있다면, 두 음절이 많이 들어간 노래를 따라 부르게 한다.-어떻게 음악치료를 하게 됐나.△피아노를 전공하고 대학강사로 15년 정도 학생들을 가르치며 입시 레슨과 연주 활동을 했다. 그러다 문득 좋아하는 음악을 하는데도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시 체제 안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는 일에 회의가 든 것이다. 음악으로 경쟁하는 모습이 마치 음악과 싸우는 것 같았다. 그때 음악치료라는 학문을 알게 됐다. 쉰이 넘은 나이였지만 음악으로 행복할 수 있는 일이라 망설이지 않았다. 포항에서 서울까지 2년 반을 오가며 학위를 취득했다. 음악치료는 결국 사람에 대한 공부였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많이 성장한 것이 큰 선물이다.-피아노는 언제부터 배웠나.△어린 시절을 교회를 놀이터삼아 보냈고, 어깨 너머로 피아노를 배웠다. 70년대는 피아노가 있는 가정이 드물었고, 포항에 피아노 학원도 몇 군데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때 아버지를 졸라 교습소에 갔고, 양손 연주가 가능했던 터라 체르니부터 시작했다. 피아노가 가장 쉬웠고, 잘한다는 소리만 들었기에 고민없이 피아노과에 진학했다. 클래식의 본고장에서 제대로 배우고 싶어 유학을 고민할 때, 한 선배가 성악가를 코치하는 무지칼멘테(Musicalmente)를 추천했다. 성악가에게 오페라의 전체적인 흐름이나 감정을 가르치는 일로 피아노 전공자들이 많이 한다. 어릴 때부터 노래를 좋아했고 수상 경력도 있기에 마음이 더 쏠렸다. 한국의 제1호 무지칼멘테를 꿈꾸며 이탈리아로 갔지만 결혼과 육아로 피아노만 전공하고 돌아왔다.-음악치료사는 음악을 전공해야만 하나.△ 음악치료는 다양한 임상기술이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치료 현장에서 만날 수 있는 각 대상자들의 특징과 효과적인 상호작용 방법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 음악적 기술이 합해진다. 음악적 기술이라 함은 음악의 요소, 구조, 스타일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능력과, 간단한 노래나 기억곡을 작곡·편곡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성악가만큼은 아니더라도 적절한 수준에서 노래하고 건반이나 기타 같은 악기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이런 지식만 갖춘다면 전공은 중요하지 않다. 음악으로 사람을 돕고 싶다는 마음만 있으면 필요한 공부는 하면 된다. 대학원에서 음악치료를 공부할 때 의사나 한의사, 간호사도 있었다. 통증에 시달리고 불안해하는 환자를 도울 방법을 고민하다 온 것이다. 미국에서는 음악치료가 진료에 포함된다. 메인 닥터가 물리치료 몇 번, 음악치료 몇 시간, 이런 식으로 처방을 내린다.-음악치료의 검증된 의학적 효과는 무엇인가.△스트레스는 우리 몸의 균형이 깨진 상태이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흥분과 긴장 상태가 되고 호흡과 맥박이 빨라진다. 이때 빠른 템포의 음악을 들으면 우리 몸은 외부 리듬에 반응하는 리듬 동조화 현상에 의해 혈압이나 맥박이 더욱 상승한다. 반면 느린 음악을 들으면 같은 원리로 하강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몸은 항상성을 유지한다. 음악이 신체적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는 많다. 미국 드렉셀 대학 연구진에 따르면 음악 감상으로 암 환자의 진통제나 약물 사용을 줄일 수 있다. 음악이 자율신경계와 면역시스템, 호르몬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암 환자를 치료할 때 외과적 처치뿐 아니라 우울과 불안, 정신적 고통을 완화하는데 집중하면 보다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실제로 눈에 띄게 효과를 본 사례는.△발달장애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음악치료센터에서 인턴십을 했다. 눈 맞춤을 하지 않는 자폐아를 담당했는데, 아이가 내는 작은 소리에 피아노 건반으로 반응해 주었다. 언어로는 소통이 어려웠지만 음악으로는 가능했다. 상호작용의 경험이 소복소복 쌓이면 나중에는 드럼도 친다. 센터에 오래 다닌 자폐아들은 악기로 세상과 소통했고 인간관계에서도 성장된 모습을 보였다. 음악치료는 사람과 접촉을 피하고 말문을 열지 않는 대상자와의 의사 소통 기회를 제공하며, 오랫동안 병원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만성 질환자에게 활력을 불어넣어준다.-음악치료사의 플레이리스트가 궁금하다.△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특히 가사에 신경 쓰며 듣는 편이다. 음악이 인간의 영혼에 끼치는 힘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종교음악을 많이 듣고, 아름다운 시로 만든 우리 가곡이라든지, 가요를 들어도 선한 마음이 생기게 하는 곡을 듣는다.-한 해를 시작하는 이맘때 들으면 힘이 되는 노래가 있다면.△새해에는 평범한 일상으로 채워지길 바란다. 영화 ‘미션’의 OST로 유명한 ‘넬라 판타지아’를 들으면서 평화롭고 정의로운 세상을 꿈꿔보면 어떨까. 비록 우리네 인생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평화로운 마음으로 임했으면 한다. 가사 앞부분은 이렇다. “환상 속에서 정의로운 세상을 본다. 모두가 평화롭고 정직하게 살고 있다. 나는 언제나 날아가는 구름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꿈꾼다. 영혼 깊은 곳까지 인간다움으로 가득한….김정희 음악치료사는대구 가톨릭대 피아노과를 거쳐, 이탈리아 밀라노 국립음대 피아노과를 졸업하고 이탈리아 Novara, Karol Szymanowski, Selvazzano에서 국제 연주코스를 수료했다. 대구 가톨릭대와 경북예고, 포항대, 서라벌대에 출강하다가, 행복한 음악을 하고자 숙명여자대학교 음악치료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2019년부터 음악치료사의 길을 걷고 있다. 생명의 전화 시민상담교육과 가정폭력 전문상담원 양성과정, 청소년 자살예방 교육 강사로 활동하며 다양한 아픔에 공감하고 인생 공부를 했다. 이런 경험들이 음악치료의 자양분이 되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모르는 것이 많다는 걸 느낀다. 현재 음악이 중심이 된 심리치료법인 GIM(Guided ImageryMusic)을 수련 중이다. 언젠가는 개인 음악치료실을 열어서 사람의 마음을 음악으로 위로해 주고 음악과 함께 곁에 머물러 주는 이가 되고 싶다./배은정 작가

2023-01-09

“사진은 빛으로 그린 그림… 작가는 카메라 뒤에 있어야죠”

우리가 보는 것보다 때론 한 장의 사진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터만 남은 유적지의 황량함이나 유물에 내려앉은 시간의 더께를 담아내기에 한 장의 사진만한 것이 또 있을까. 문화유산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오세윤’ 이름 석 자를 알 것이다. 모른다해도 그가 찍은 사진을 한 번쯤은 봤을 것이다. 지금까지 촬영한 박물관 도록만 300여 권. 2000년대 이후 전국 국립박물관과 문화재청에서 발간하는 보고서나 도록의 대부분을 촬영하고 있다. 국내 문화재 관련 저작들의 상당수 사진도 그의 작품이다.경주학연구원 한편에 있는 그의 작업실 당호는 ‘여진당(如眞堂)’이다. 이영훈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사진을 참되게 찍으라고 지어주었단다. 문화유산에 대한 안목과 애정을 렌즈에 담아내는 사진가에게 맞춤한 이름이다. -사진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가졌나.△중고교를 다니던 70년대는 칼라 필름이 없었다. 사진관에서 필름 한 통을 사면 카메라를 빌려줬다. 하루는 친구 집에 갔다가 ‘캐논 AE-1’ 카메라에 매료됐다. 촬영렌즈와 파인더렌즈가 따로 있던 이전 카메라와 달리, 찍는 눈과 보는 눈이 같은 ‘일안 반사식(SLR:Single lens reflex)’에다 줌 렌즈까지 갖췄다. 줌을 당겨 바라본 렌즈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것이다. 친구 아버지가 일본을 오가던 보따리상인데, 부모님이 지불할 거라고 거짓말하고 카메라를 가져왔다.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작동시켜보며 카메라를 속속들이 탐구했다. 아버지에게 들켜 압수당하기 전까지 말이다.-첫 카메라를 가지게 된 건 언제인가.△사진만큼 책을 좋아해서 국문과를 지원해 경주로 오게됐다. 부모님이 주신 입학금과 등록금, 방값, 생활비를 모으니 액수가 제법 컸다. 몽땅 들이부어 ‘니콘 F3’를 샀다. 그 이후로 카메라를 끌어안고 동아리방이나 친구 자취방을 떠돌았다. 등록을 안 하니까 지도 교수였던 고(故) 김형수 선생이 나를 불렀다. 사정을 들은 교수님이 그 자리에서 경리 과장을 불러, 반드시 등록할 친구니 기한을 연장해 주라고 했다. 웨딩 촬영 아르바이트 등을 해서 여름방학 직전에 등록금을 냈다. 당시 공사 중이던 동국대병원에서 벽돌도 날랐다. 다행히 장학금을 받아 부담이 덜했다.-문화재 사진을 찍게 된 계기는.△대학 강의 중에 삼국유사 강독이 있었다.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다보면 유적지 안내판이 수업내용 그대로였다. 신기한 마음에 관심이 커졌고 그때부터 문화재에 빠져든 것 같다. 필름 값을 벌기 위해 대학 때부터 교내외 행사를 촬영했다. 야외 웨딩 촬영 개념이 없을 때라 은행에 가서 여성잡지를 뒤져보기도 했다. 박물관에서 의뢰받은 문화재 촬영도 종종 했다. 사진은 좋았지만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마침 IMF때라 사진관 일이 녹록치 않았다. 그때 박물관 일을 제안한 사람이 강우방 전 경주박물관장이다.-경주박물관에서 한 첫 작업을 기억하나.△신라 기와를 촬영하고 도록으로 만들었다. 기존의 정형화된 앵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지금이야 문화재 도록에 이미지 사진이 흔하지만 당시만 해도 불필요한 사진으로 폄하했다. 여러모로 공을 들인 신라 기와 도록은 문화재 도록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고 평가받고 있다. 촬영을 배워본 적이 없어서 다르게 찍을 수 있었다. 혼자 작업하다 보면 시행착오가 많지만 내 것이 되는 순간 큰 힘을 발휘한다.-문화재청이나 국립박물관이 내놓은 도록이나 연구서적에 실린 사진 대부분을 촬영하지만 맨 뒷장의 이름 석 자가 전부다. 얼굴 없는 사진가라 불리는데.△사진쟁이는 카메라 뒤에 있어야 한다. 카메라 앞에 서기 시작하면 끝난 것이다. 카메라 앞에서 무슨 사진을 찍나. 일본 슈지츠대학의 가종수 교수와 캄보디아 고대 유적을 촬영하러 갔을 때였다. 우연히 만난 한국인 관광객이 문화재 사진가 가운데 오세윤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알아주면 반갑고 몰라줘도 내 일을 하면 그만이다.-타국에서 듣는 이름 석 자가 반가웠겠다. 문화재를 촬영하면서 보람이 있다면.△경주 남산의 경우 도록을 찍고 유네스코에 등재됐다. 심사를 할 때 벽돌만한 사진첩을 쭉 돌렸는데 남산을 와보지 못한 위원들이 남산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진은 모두 필름으로 촬영했다. 도록을 만들면서 남산을 수두룩하게 다녔다. 적당한 때를 기다리며 하루종일 산에 머물러보기도 하고 뱀에 물려 식겁한 곳도 남산이다.-문화유적마다 촬영하기 적당한 때가 있나.△물론이다. 그래서 피사체에 대한 사전 이해가 중요하다. 경주학연구원에서 20년 넘게 공부하는 이유다. 신라 초기 작품인 배리 삼존석불은 눈동자가 없고 눈두덩이 부어 있어서 위에서 빛을 비춰야 미소가 살아난다. 이목구비며 목의 삼도(三道)까지 세밀하게 표현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은 측면광이 필요하다. 탑 아래 부조를 찍으려면 빛이 넓게 들어오는 늦가을 오전이 좋다. 한여름의 이른 아침은 북쪽 면까지 빛이 든다.-사진은 그야말로 빛의 과학이네.△사진은 빛으로 그린 그림이다. 문이과적 소양을 두루 발휘하지 않으면 몸이 고생한다. 전남 영암 월출산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을 촬영하러 간 적이 있다. 불상은 남향이 일반적이라 새벽에 출발했는데 막상 가보니 서쪽을 바로보고 있었다. 어쩔 도리가 있나. 산중에서 6시간 넘게 기다렸다.-문화유산에 대한 이해와 인내심과 더불어 문화재 사진가에게 필요한 덕목은 뭔가.△유물을 이해하고 유물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물러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촬영하다가도 위험하다 싶으면 카메라를 빼야 한다. 경주 항공을 찍고 싶어 헬기 조종을 배웠다. 2인승 헬기를 조종하며 사진을 찍다가 엔진이 꺼지는 바람에 죽다 살아났다. 지금은 드론이 대신하니 그럴 일이 없다. -전국의 문화재 발굴 현장을 다니며 촬영을 하다 보면 기억에 남는 일도 많겠다.△경남 함안에 있는 고분을 촬영하다 고고학계에 길이 남을 발견을 했다. 말이산 고분군은 일제강점기에 도굴되어 재조사를 한 아라가야 유물로, 무덤 내부를 붉게 칠한 주칠(朱漆)고분이다. 붉은 벽을 촬영하러 들어갔는데 천장에 무수한 구멍이 뚫려있었다. 조사 결과 무덤을 만들 당시 새긴 별자리인 성혈(星穴)임이 밝혀졌다. 성혈이 무덤방에서 발견된 건 처음이라 당시 언론에서 떠들썩하게 다뤘다.-일제시대 경주 문화재를 촬영한 사진을 처음으로 공개했다.△노세 우시조라는 일본인이 1920년대 촬영한 유리건판 사진이다. 일본의 문화재 전문 사진업체인 아스카엔이 소장하던 걸 경주학연구원이 일본에 가서 찍어왔다. 고해상 디지털 카메라로 유리 필름을 찍고 반전시키는 방식이다. 700장 이상 찍어서 돌아왔고, 7만 장이 아직 일본에 남아 있다. 나머지도 촬영하기로 코로나 전에 MOU를 맺었지만 예산이 걸림돌이다. 행정담당자는 확실한 결과물을 원하지만 7만 장 안에 뭐가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나 건축물의 수리 전 단계를 볼 수 있는 귀한 자료임은 분명하다. 먼저 찍어온 자료들을 토대로 한 후속 연구도 필요하다.-문화재를 촬영하다보면 안타까운 일도 많이 보겠다.△남북이 공동으로 진행한 개성 만월대 발굴조사에 참여했다. 만월대는 송악산 기슭에 위치한 고려의 궁궐터이다. 북한 사람들은 송악산을 누운 여인네를 닮았다며 오마니산이라고 부른다. 2007년 발굴조사가 시작되어 중단과 재개를 반복했고 2018년 12월에 갑작스럽게 철수했다. 나는 네 차례 북한을 방문해 만월대 발굴유적을 촬영했다. ‘남북공동 발굴조사보고서’ 1권의 표지 사진도 직접 찍은 것이다. 궁궐터의 주 건물지와 계단을 한 앵글에 담고 싶어 개성공단에서 가로등 수리용 차를 섭외해왔다. 발굴된 유적은 평양으로 옮겼고 숙소는 개성공단에 있었다. 만월대에 남한의 현장 사무실도 있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생각하면 안타깝고, 이산가족이 된 느낌도 든다.-쉴 때는 주로 뭘 하나.△축구선수들이 쉬는 시간에 족구를 하듯, 짬이 날 때마다 내 사진을 찍는다. 바삐 찍을 필요도 없고 대상을 감상하며 물러서보기도 하고 다가가보기도 하며 촬영을 즐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분황사 주차장에 간다. 시야가 탁 트여 음악을 틀어놓고 남산을 바라보기 좋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고 그날의 촬영지를 정한다. 창림사 탑 옆에 앉아서 언덕 아래를 내려다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그냥 보고 있다가 안 찍고 내려올 때도 많다. 예전에는 악착같이 찍으려 했지만 요즘은 눈으로도 찍고 온다.-경주에 살면서 웬만한 건 렌즈에 담지 않았나. 앞으로 더 담고 싶은 것이 있다면.△어제와 오늘의 경주가 다르다. 그날 못 찍으면 영원히 못 찍는다. 석조 조각을 좋아한다. 돌 조각에서 피가 도는 생명감을 느낀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실크로드를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다. 올해는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을 다녀왔다. 아침에 나올 때 카메라가 없으면 불안하다. 언제든지 찍을 수 있도록 한 몸처럼 지니고 다닌다. 내가 제일 잘 하는 것이 사진이다. 사진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계속 찍을 것이다.오세윤 사진가는경북 김천 출생으로 경주 동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0년대부터 문화유산 사진을 촬영하기 시작했으며 정형화된 앵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문화유적을 표현해왔다. 문화재를 전문으로 찍은 1세가 한석홍, 김대벽, 안장헌 이라면 오세윤 작가는 1.5세대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대부터 전국 국립박물관과 문화재 유물과 국보 사진 대부분 그가 촬영하고 있다. 대표 전시로는 ‘신라를 찾아서’와 국립경주박물관 신라미술관 특별전 ‘천년 묵은 옛터에 풀은 여전히 새롭네(한석홍·안장헌·오세윤 3인전)’가 있다. ‘경주 남산’ 도록 발간에 참여해 남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기여했다. 우수한 문화유산을 널리 알린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3월에 문화재청장 표창을 받았다./배은정 작가

2022-12-26

“호스피스는 임박한 죽음이 아닌 귀중한 여생에 집중”

말기 암 환자나 임종을 앞둔 환자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곳이 호스피스이다. 호스피스는 환자의 고통을 줄여주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여생을 잘 마무리하고 평온한 죽음을 맞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존엄한 죽음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잘 죽는 것은 잘 사는 것이며,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수많은 이들의 마지막 여정을 지켜본 호스피스 의사에게 좋은 죽음은 어떤 것일까. 포항의료원 호스피스센터에서 내과 전문의이자 호스피스 의사인 유재훈 센터장을 만났다. 호스피스 병동은 임종의 이미지와 달리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공간은 쾌적했다. -호스피스 병동은 어떤 곳인가.△치료를 해도 근원적인 회복 가능성이 없고 수개월 이내에 사망할 것으로 진단받은 환자가 신체 고통을 줄이고 심리적 안정을 지원받는 곳이다. 죽음은 치료의 실패가 아닌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이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호스피스의 주된 역할 중 하나이다.-호스피스 서비스는 병원에서만 받을 수 있나.△호스피스 서비스는 입원형, 자문형, 가정형이 있다. 포항의료원 호스피스센터는 현재 입원형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내년부터는 중단되었던 자문형 호스피스를 재개할 계획이다. 자문형은 일반 병동에서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는 방식이다. 호스피스 팀이 집으로 방문하는 가정형은 수요는 많지만 활성화가 덜 되어 있다. -일반 병동과의 차이점은.△지금까지 병원은 의료진과 환자 중심이다. 호스피스는 의료진과 환자뿐 아니라 가족까지 확대된 개념이다. 일반 병동은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고 심장이 뛰지 않을 시 연명치료를 하게 된다. 호스피스는 주로 통증조절에 초점을 맞추고 연명의료 중단을 환자 본인이 결정할 수 있어 여생의 삶의 질을 우선순위를 두게 된다. 링거나 주사, 투약 시 환자의 의사를 존중하며, 외출이나 여행도 환자가 원하면 언제든지 다녀올 수 있다.-담당의로서 증상이 나빠질까 봐 우려되지 않나.△미리 걱정해서 환자들의 마지막 소망을 막을 수는 없다. 호스피스 환자들의 버킷리스트를 보면 정말 단순하다. 뭘 먹고 싶다거나, 어디를 가고 싶다거나, 누구를 만나고 싶다는 것등. 건강한 이들에게는 별일이 아니지만 말기 환자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움직일 수 있을 때 다니라고 말씀드린다. 일주일 뒤면 그 컨디션도 안될 때도 있다. 의료진의 판단하에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원하는 일을 하시도록 한다. 얼마 전에는 입원 당시에 외출은 엄두도 못 내던 환자가 아들의 결혼식도 다녀오고, 통증까지 조절돼 퇴원을 했다. 유재훈 포항의료원 호스피스센터장. -코로나 시기 호스피스 환자들은 더 힘들었을 것 같다.△코로나19 관련 감염병전담병원으로 지정되면서 기존 환자들을 소개(疏開)하라는 행정명령이 내려졌다. 말기 암 환자나 거동이 안되는 분들은 전국 병원에 연락해 전원시켰다. 국가적인 재난상황이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감염병전담병원 전환 하루 전까지 촉박하게 환자를 타 병원으로 어렵게 이송하면서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원망도 많이 들었고 안타까운 심정도 컸다.-호스피스 의사가 된 계기는.△주전공이 내과여서 말기 암 환자를 보게 된다. 말기 환자는 정서적 지지가 굉장히 중요한데 호스피스가 그런 역할을 담당한다. 호스피스 전문의가 된 건 6년 정도 됐다. 호스피스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자격시험을 치고 실습 과정을 거쳐야 호스피스 인정의 자격이 부여된다. 수업은 의사뿐 아니라 간호사, 사회복지사 등이 함께 토론하고 연극하는 방식이다. 호스피스 병동은 팀워크로 움직이기 때문이다.-호스피스 병동의 팀워크는 누가 만드나.△우리 병원에는 간호사 15명과 도우미 30명, 사회복지사 1명, 의사 3명이 근무한다.-호스피스 병동에서 의사의 역할은 얼마라고 말할 수 있나.△의학적 판단은 의사가 잘하겠지만 전반적인 컨디션 파악은 간호사들이 훨씬 잘한다. 일반 병동에서 의사의 역할이 70~80% 라면, 호스피스에서는 30%나 될까. 간호사가 30%를 담당하고 요양보호사와 자원봉사자, 사회복지사의 역할도 크다. 구성원 중에 한쪽만 삐끗해도 돌아가지 않는 시스템이다. 호스피스에서는 관계 자체가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의료진과 환자가 거의 가족처럼 지낸다. 이번 월드컵에도 휴게실에서 함께 TV를 보며 대표팀을 응원했다.-호스피스를 받는 시점은 어떻게 정하나.△일반적으로 혈액종양내과 전문의가 치료가 불가능한 시기를 판단한다. 대부분 전문의의 판단으로 호스피스에 오게 되지만, 환자가 치료를 거부해서 오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우선 일반 병동에 입원시켜 혈액검사와 CT 검사를 하고 치료가 가능하면 환자를 설득한다.-보통 의료 행위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지만 호스피스 의사는 죽음을 지키는 일을 한다. 일반 병동과 호스피스 병동을 오가며 느끼는 온도차가 크겠다.△의사가 해야 할 일은 다르지 않다. 호스피스가 없을 때도 말기 암 환자는 병동에 있었고 그때나 지금이나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고 처방과 처치를 하는 점은 비슷하다. 다만 그 목적이 치료보다는 돌봄에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호스피스에서는 완치보다 고통을 줄이는 데 초점을 둔다. 호스피스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환자가 많아 중압감이 큰 것이 사실이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출근해서 회진을 돌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퇴근하는 발걸음이 가볍다.-죽음을 목격하면서 쌓이는 심적 부담감은 어떻게 해결하나.△어쩔 수 없는 부분이고 이겨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죽음이든 아쉬움이 남지만 최선을 다하면 그나마 덜하다. 가능한 한 좀 더 손잡아드리고, 뭐가 불편한지 살피고, 해결할 수 없다면 상황을 솔직하게 말씀드린다. 호스피스 전문의로서 두 가지 원칙은 최선을 다한다는 것과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병명을 모른 채 고통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것보다 마지막을 긍정적으로 마무리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호스피스 팀원 모두 임종을 많이 접하다 보니 정서적 소진이 높은 수준이다. 병동 내 소진관리 프로그램으로 팀원들과 대화하고 위로하는 시간을 마련해 팀원들의 소진을 관리하고 있다.-최근 죽음의 자기결정권을 허용하는 존엄사를 둘러싼 논의가 활발하다.△삶과 죽음을 스스로 결정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적극적인 안락사를 법적으로 허용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환자는 의사의 조력을 받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지만 결국 마지막 버튼을 누르는 역할은 의사가 해야 한다. 의사들에게 버거운 짐을 지우는 일이며 심적 부담이 큰 일이다. 다만 특정 요건이 엄격하게 갖춰진 상태에서의 연명의료 중단은 찬성한다. 그리고 경제적 부담으로 죽음이 강요되는 부작용도 있을 수 있다. 말기 환자의 존엄하고 품위있는 임종을 위해서는 호스피스 지원부터 확대해야 한다.-호스피스 병동이 얼마나 부족한 상황인가.△현재 전국의 입원형 호스피스 기관 수는 96개 1천595병상이며 경북에는 12개 기관 196병상이 전부이다. 경북 지역이 전국에서 가장 부족한 수준이다. 포항에는 포항성모병원과 포항의료원 두 곳뿐인 현실이다. 포항의료원 호스피스센터는 코로나19 직전에 리모델링을 시작해 코로나 시기 두 차례 오픈했다가 문을 닫아야만 했다. 당시 언제 운영을 재개하는지 문의 전화가 끊이지 않았고, 지금도 수요가 많아서 대기하는 실정이다. 미국과 영국 등은 말기 질환 환자의 반 이상이 호스피스 치료를 받는 데 비해 우리나라는 환자가 원해도 들어갈 병실이 없다. 포항의료원은 호스피스 병상을 차츰 늘릴 계획이며, 호스피스 사업은 공공의료기관이 해야 하는 사업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삶의 질이 높아지려면 임종과 관련된 죽음의 질이 높아져야한다. 호스피스 활성화를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모든 이들이 마지막 순간을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법적, 행정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현재 암 환자 위주로 호스피스 병동이 운영되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말기 질환자가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익숙하고 편안한 각자의 집에서 받는 가정형 호스피스의 활성화도 필요하다.-한 사람이 삶을 마무리하는 호스피스에서 남은 사람들은 떠나보낼 준비를 한다. 좋은 죽음은 떠나는 이에게도 남은 이에게도 해당될텐데, 의사로서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 ‘웰다잉(well-dying)’은 무엇인가.△의사로선 환자가 되도록 덜 아프고 조금이라도 명료한 의식으로 마지막을 맞길 바란다. 호스피스는 임박한 죽음이 아니라 얼마 남지 않은 귀중한 삶에 집중한다. 마지막 나날을 충만하게 해주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 웰다잉을 위해 의사결정을 할 수 있을 때 연명치료 여부를 미리 결정해 놓는 것도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죽음을 앞두고 단 한 가지만 할 수 있다면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 호스피스 환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맞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이다. /배은정 작가유재훈 센터장은단국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병원 심장연수강좌를 수료했다. 소화기내시경학회 정회원이며 현재 경상북도포항의료원 진료부장과 호스피스센터장을 겸직하고 있다. 포항의료원 호스피스 병동은 2012년 12월 완화의료전문기관(입원형)으로 20병상이 지정되어 경상북도 최초로 운영을 시작했고, 코로나19로 운영을 중단했다가 리모델링을 거쳐 올해 10월부터 26병상을 운영하고 있다.

2022-12-12

몸짓으로 말하는 또 하나의 언어 ‘수어’… “모두의 언어 됐으면”

TV 뉴스 오른쪽 하단에는 말이 아닌 몸짓으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언어가 있다. 들리는 언어가 아닌 보이는 언어, 수어이다. 수어는 2016년 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되면서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농인의 언어가 됐다. 하단의 작은 사이즈로 갇혀 있던 수어 통역사는 코로나19 시기에 정책 발표자와 나란히 서서 화면 절반을 채웠다. 감염의 우려에도 마스크를 벗어야 했지만 일부에서 항의가 쏟아졌다. 수어의 특성을 몰라서 생긴 오해였다. 30여 년간 농인들과 인연을 맺고 수어 통역을 해온 이지영 통역사는 수어가 제2외국어처럼 자연스러운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수화라고 했고 요즘은 수어라고 한다.△‘수화’냐 ‘수어’냐는 오랫동안 논쟁이 됐다. 수화는 손으로 하는 대화라는 의미지만, 수어는 언어임을 강조한다. 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되면서, 수화와 수어를 아우를 수 있는 ‘수화언어’를 줄여 ‘수어’라고 한다. 한국수어는 한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언어이다. 수어도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고유한 어휘와 문법을 가지고 있다. 한국수어는 대한민국 농인의 고유한 언어이다.-청각장애인과 농아인, 농인도 혼재되어 쓰이는데.△‘농(聾)’은 일상생활에서 청(聽) 감각을 기능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농인’은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자신들만의 언어문화를 구축해가는 사람들이다. 농인 정체성이 뚜렷한 사람들은 청각장애인으로 불리는 걸 원치 않는다. 장애가 아니라 그냥 수어를 언어로 사용하는 소수민족으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 ‘농아인(聾啞人)’은 들을 수 없고(농) 말할 수 없는(아) 사람이라는 뜻이다. 농인은 수어로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에 ‘농인’으로 통용하고, 상대적 개념으로 ‘청인’을 쓴다.-수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청각장애인은 어떻게 하나.△성장 과정에 따라 몸짓 언어인 ‘홈 사인(home sign)’을 사용하기도 한다. 가족같이 가까운 사이에 통용되는 홈 사인은 수어 통역사도 이해하기 어렵다. 문맹 농인의 의사소통을 돕는 농인을 ‘농통역사’라고 한다.-지난 2년간 코로나19 방역 브리핑으로 수어 통역사의 역할이 많이 알려졌다.△TV 화면에서 수어 통역사가 크게 나와서 후련하다는 농인들도 많았다. 코로나19 초기에는 불안감이 컸기에 마스크를 2개씩 포개 쓰면서도 통역할 때는 벗어야 하는 비애가 있었다. 농인들은 손동작뿐 아니라 입모양이나 표정으로 소통하기 때문이다.-수어에서 표정은 얼마나 중요한가.△수어는 수지(손동작)와 비수지(표정과 몸짓)로 구성된다. ‘괜찮다’는 말도 정말 괜찮은지, 괜찮은 척하는 건지 표정으로 구분한다. 그래서 수어 통역은 손동작 외에도 표정이 강조된다. 표정과 몸짓은 소리의 크기와 음률, 음색을 나타내며 음성언어의 억양과 같다. 표정이 안 들어가면 소통이 어렵고 오해가 생길 수 있다. 농인들은 표정 없는 수어를 죽은 수어라고 한다. -포항시수어통역센터에서 20년간 근무하셨는데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수어통역센터는 장애인복지법 규정에 따른 장애인 지역사회 재활시설로, 수어 통역과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고 수어 교육을 실시한다. 포항은 2002년 개소했고 주된 업무는 생활 밀착형 통역이다. 지금은 스마트폰이 있어 농인의 불편함이 약간은 줄었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생활 전반에서 의사소통의 불편함이 크다. 팩스는 여유 있는 이들이나 썼고, 무선호출기의 숫자로 암호를 만들어 소통하기도 했다. 동시다발 통역 요청 시 최우선으로 두는 건 병원 통역이고 교통사고는 만사를 제쳐놓고 간다. 수어를 알리고 농인에 대한 인식개선을 위해 한동대 학생들과 수어문화제도 개최했다.-포항에 거주하는 농인과 수어 통역사 수는.△포항에 등록된 청각장애인 수는 4천여 명이고 그중 500여 명이 농인이다. 포항시수어통역센터의 상근 수어 통역사는 6명이고, 비상근 수어 통역사는 10명이다. 지난해 정년퇴임한 나는 비상근으로 일하고 있다.수어는 오랫동안 농인들의 제1언어이지만 공식적으로 한국어로 인정받은 것은 2016년이다. 수어 통역이 전문적으로 양성되기 시작한 것도 최근에 이르러서다.사회복지 학계에서는 수어번역 형성기를 2002년부터로 본다. 대학 과정에 수어 통역학과가 설치된 것이 바로 그 즈음. 국가 공인의 자격시험은 2006년에 이르러서야 치러졌다. 1990년대 초반부터 농인들과 연을 맺고 포항에서 처음으로 민간과 국가공인 수어통역자격증을 획득한 이지영 통역사는 포항의 제1호 수어 통역사라고 할 수 있다.-수어 통역사도 없던 시절에 수어를 배운 계기가 궁금하다.△1991년 포항제일교회에서 ‘제1회 사랑의 수어교실’이 열렸다. 그때까지 농인을 만나본 적도 없고, 수어도 전혀 몰랐지만 현수막을 보는 순간 빨려 들어갔다. 포항명도학교에서 근무하는 두 분의 특수교사에게 배웠고, 이듬해부터 교회 농아부에서 통역사로 활동했다. 내게는 장애가 있고, 장애를 인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장애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고민했었기에 수어가 소명처럼 다가왔던 것 같다. -장애를 인식한 것은 언제쯤인가.△중학생 때까지도 키가 작다고만 여겼지 장애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몸집이 자그마해서 선생님이 자전거 뒤에 태워주시기도 했다. 그러다 사춘기에 의문을 갖게 됐고 어머니에게서 사정을 들었다. 1960년대는 다들 그렇듯 가난했고, 어머니는 나를 업고 나무를 하러 다니셨다. 잠든 걸 보고 잠깐 눕혀놓고 일하다 보면 능선을 넘기도 했었는데, 아차 싶어 돌아와 보면 놀고 있었다고. 두 살 무렵 갑자기 쓰러진 나를 의사들은 가망 없다고 했지만 외할머니가 선린병원 초대 원장을 찾아가 사정을 해서 치료를 시작했다. 병원에 계속 다닐 형편이 안돼서 나중에는 어머니가 주사 놓는 법을 배워서 집에서 치료했다.-사춘기라 방황했을 법도 한데.△성경에 시각장애인을 본 예수의 제자가 “저 사람이 보지 못하는 건 누구의 죄냐?”라고 묻는 대목이 있다. 예수님은 누구의 죄가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음성으로 들렸다. 모태신앙으로 극복한 셈이다.-뒤늦게 대학에 들어간 이유는.△가난했기에 대학 갈 형편이 안됐다. 등록금을 번다고 미루다 보니 15년이 흘렀다. 원래 특수교육을 꿈꿨는데 농인들을 만나고 더 광범위한 사회복지로 바꿨다. 대학에 가보니 농인 학생들은 유리방에서 채플 예배를 봤다. 교수님께 건의해 농인들을 맨 앞줄에 앉게 하고 목사님 바로 옆에서 통역을 했다. 내성적이고 앞에 나서는 일을 두려워하는 성격이라 덜덜 떨면서 단상에 올라갔는데 신기하게도 통역을 시작하면 괜찮아졌다. 수어는 ‘문장식’과 ‘농식(요약식)’이 있고 일상생활에서는 주로 농식을 사용하는데, 농인 학생들은 토씨 하나 안 빼고 듣길 원했다. 농인들과 눈을 맞춰가며 통역을 하는데 얼마나 신이 나던지. 청인들로부터 수어 통역 덕분에 설교가 더 은혜가 된다는 말도 들었다.-언어를 배운다는 건 문화를 알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농인들은 독특한 문화 중에 하나가 두 개의 이름을 가지는 거라고.△농인들은 ‘문자 이름’과 ‘수어 이름’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특징적인 면을 부각시킨 ‘수어 이름’을 주로 부른다. 이름의 자모를 하나하나 손으로 표시하는 건 힘들기 때문이다. 여성의 수어 이름은 ‘얼굴 특징+여자를 의미하는 새끼손가락’으로 표현한다. 농인인 남편이 ‘코가 예쁜+여자’라는 이름을 지어줬다.-배우자와의 인연도 수어로 닿은 건가.△남편은 집안 행사에 수어 통역을 자주 의뢰했다. 통역을 하면서 안타까웠던 일이라면 가족들이 수화를 배우지 않는 것이다. 청인 가족들은 의사소통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농인의 입장에선 소통을 포기하고 지낸다. 불화는 사소한 오해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가족 중에 누구 하나라도 수어를 하면 소통 문제를 극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결혼을 결심하게 됐다.-방송에서 수어 통역을 오래 하셨는데.△선거방송 후보자 토론의 경우 여럿의 말을 혼자서 2~3시간 통역한다. 후보들과 같은 공간이 아니라 따로 마련된 스튜디오에서 카메라만 쳐다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인권위원회에서 수어 통역사 2명 이상을 배치하라고 권고도 내려왔지만 변화가 없는 상황이다. 후보자 연설 통역의 경우 연설문을 사전에 요청하지만 주지 않은 후보들이 있어 배경지식 없이 통역하기도 했다.-앞으로 바람이 있다면.△많은 이들이 수어를 배워 수어를 자연스럽게 쓰는 분위기가 되면 좋겠다. 한동대에서 수어를 오래 가르쳤지만 대학은 늦은 감이 있다. 어릴 때부터 수어를 제2외국어로 가르쳤으면 한다. 수어만 있으면 농인은 장애인이 아니다. 일상에서 수어라는 언어가 자연스러워지길 바란다.이지영 수어 통역사는포항에서 태어나 포항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91년 수어를 배우기 시작해서, 1997년에 한국농아인협회에서 주관하는 민간수어통역사자격증을, 2006년 보건복지부 공인 국가공인자격증을 획득했다. 농인들과 인연을 맺고 뒤늦게 사회복지를 전공하며 같은 대학에 진학한 농인들과 최고의 대학시절을 보냈다. 만학도로 영남신학대학교 사회복지학과와 나사렛대학교 재활복지대학원 국제수화통역학과를 졸업했다. 2002년부터 포항시수어통역센터에서 재직하면서 한동대학교와 포항선린대학교 한국수어 강사로 활동했다. KBS포항방송국 뉴스와 포항시청 인터넷방송 시정뉴스, 각종 선거방송 토론과 연설의 수어 통역을 담당했다. 좋아하는 수어는 ‘하나님’과 ‘은혜(덕분에)’ ‘괜찮아요’ ‘존경해요’ ‘감사합니다’이다./배은정 작가

2022-11-28

30년 어류연구 외길 걷는 물고기 박사

박무억 민물고기연구센터 소장. 연어가 되돌아오는 계절이다. 북태평양으로 긴 여정을 떠났던 연어들이 왕피천으로 돌아오고 있다. 경북 민물고기연구센터에서는 매년 100만 마리의 치어를 방류한다. 그중 되돌아오는 연어는 단 0.1%! 자그마치 3년이나 걸려 지구 반 바퀴 거리를 헤엄쳐 돌아왔으니 기특하기 그지없다. 귀한 손님을 맞이하느라 어느 때보다 분주한 박무억 소장을 울진군 근남면에 위치한 민물고기연구센터에서 만났다. -올해 연어의 귀향은 언제부터 시작됐나.△처음 연어가 올라온 건 10월 17일이다. 10월 초부터 망을 치고 기다렸다. 3년 전에 왕피천에서 방류한 연어들이 미국 알래스카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다. 매년 20톤 트럭 5대 분량인 90만~100만 마리를 방류하면 0.1~0.2%가 돌아온다. 100만 마리에 1000마리 수준이다.-0.1%의 확률이라니 더 반갑고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먼 거리를 여행하는 연어의 신통한 능력은 어디서 오는 건가.△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지만 몇 가지 가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지구 자기의 흐름을 감지해서 이동한다는 ‘자기설(磁氣說)’이다. 후각으로 찾아온다는 가설도 있는데 미국에서 후각을 마비시킨 산란기 연어가 고향을 찾지 못했다는 연구가 있다. -연어를 포획해 방류하기까지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치나.△어미로부터 채란한 알을 소독하고, 정액을 뿌려 수정시킨 뒤, 이물질을 씻어내고 소독을 두 차례 더 한다. 알이 부화해서 크기 5cm, 무게 1.5g의 치어로 성장하면 내년 3월 하천에 방류한다. 이후 2~3달 적응 기간을 거쳐 바다로 나간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가 3년이 지나면 어른 팔뚝만 해져서 돌아온다.-방류 기준이 5cm에 1.5g인 이유는.△우선은 연구소 양식장의 규모와 서식밀도를 고려해야 하고 무엇보다 어린 연어가 거친 바다에 적응할 수 있는 적절한 사이즈이기 하다. 수정란에서 부화한 치어는 3~4개월 자라면 5~7cm까지 큰다. 그때 하천과 바다의 경계에 방류하면 소금물에 서서히 적응한다. 대부분의 민물고기는 바다에 나가면 바로 죽지만 연어는 염세포가 있어 생존이 가능하다. 염세포는 몸속의 염분농도를 항상 일정하게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연어 말고도 방류하는 물고기가 많다고 들었다.△연어 이외 산천어와 송어, 다슬기와 동남참게 종자를 생산해 방류한다. 연어에 이어 곧바로 송어와 산천어 차례가 돌아오고, 다슬기도 방류하는 요즘이 최고로 바쁘다. 다슬기는 주민들의 소득 향상과 관광 마케팅을 위해 방류를 원하는 지역이 많아, 23개 시군을 4등분으로 나눠 차례로 진행한다. 이외 경북 동해안 하천의 생태계를 조사하는 것도 민물고기연구센터의 일이다.우리나라 1세대 어류학자인 고 최기철 교수는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눴다. ‘민물고기 30종 이상 아는 유망한 사람’, ‘10종밖에 모르면 평범한 사람’, ‘10종도 모르는 불행한 사람’. 민물낚시가 취미가 아닌 이상 10종 넘기기가 쉽지 않다. 민물고기 종류가 얼마 된다고 어류학자의 욕심일 뿐이라는 변명도 마땅찮다. 박무억 소장에 따르면 지구상의 민물고기는 파악이 안 될 정도로 많고 아시아에서만 700종이 알려져 있다. 민물고기연구센터가 운영하는 민물고기생태체험관에만 100종이 넘는 민물고기를 전시한다. 참고로 경북에서 많이 사는 민물고기 1위는 피라미와 비슷하게 생긴 ‘갈겨니’이다.-하천 생태계 조사는 어떻게 이뤄지나.△하천에 통발을 넣어 어자원 분포를 조사한다. 예전에 많이 잡히던 고유어종이 안 보이면 어미를 구입해 알을 받는 기술을 개발하고 자원을 조성한다. 경북도내 동해안 유입 하천인 울진 왕피천과 부구천, 영덕 오십천, 포항 곡강천, 경주 대종천이 조사 대상이다. -예전과 비교해 하천 생태계는 어떤가.△그 흔했던 송사리와 피라미나 풍뎅이처럼 생긴 물방개도 사라지고 새우도 안 보인다. 물고기가 산란을 하려면 알을 붙일 풀과 바위가 필요한데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파헤친 곳들이 너무 많다.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면 그 강은 이미 죽은 강이나 다름없다. 그 여파는 우리 인간에게 미칠 것이기에 우려스럽다.-물고기에 관심을 갖고 어류학을 연구하게 된 계기는.△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이고 강이 많지만, 학교의 생물교육은 주로 가축이나 수목 위주이고 물고기는 거의 없다. 서점에서 우연히 물고기도 사람이 기른다는 책을 봤는데 미래에는 수산양식 산업이 유망하고 세계적으로 10대 직업군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관련 서적을 탐독했고 결국 고향 경주를 떠나 제주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을 결심했다.-경주에서 제주라면 꽤 먼 데, 제주를 선택한 이유는.△1982년도 대입을 앞두고 부산과 제주의 대학 두 곳을 고민했다. 부경대의 전신인 부산수산대학교는 민물 위주였고 제주대학교는 해산어 쪽인데, 이왕이면 광대하고 생물종이 다양한 바다에서 포부를 키우고 싶었다. 지도 교수였던 노섬 선생은 국내 양식업의 선구자로 전복과 광어 양식의 토대를 만든 분이다. 교수님의 지도 아래 저희 실험실에서 넙치 양식기술을 개발했다. 현재 여든이 된 노교수는 멸종 위기에 처한 해마를 대량으로 양식하는 기술을 개발해 중국에 수출하며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한다.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는 일찍이 수산양식을 유망한 미래 산업으로 꼽았다.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피터 드러커는 “21세기에는 인터넷보다 수산양식에 투자하는 것이 더 유망하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10대에 벌써 수산양식의 발전이 가져다줄 무한한 미래를 꿈꾼 박무억 소장의 혜안이 놀랍다. 박 소장을 지도한 노섬 전 제주대 교수(2007년 퇴임)는 국내 양식·양어 업계의 대부라 불린다. 1970년대 중반 전복 양식과 80년대 말 광어 양식의 기술을 개발해 산업화의 토대를 만들었다. 박무억 소장은 노섬 교수의 연구실에서 국내 수산양식 발전사의 궤적을 함께 걸었다. -대학에서 특별히 관심가진 연구는.△흔히 우럭으로 불리는 조피볼락의 번식기구를 제어하는 기술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물고기는 대부분 알을 낳지만 볼락 종류는 새끼를 낳는다. 보통 4월에 낳는데 그 시기를 앞당기면 양식어가의 소득을 높일 수 있어 연구를 진행했다.-번식 시기를 어떻게 조정한다는 얘긴가.△조피볼락은 저수온에 강한 반면 고수온에 약하다. 여름이 되기 전에 상품성 있는 크기로 길러 출하하는 기술 개발이 절실했다. 조피볼락 암컷은 교미 후에 몸에 정자를 지니고 있다가 수온이 올라가면 체내에서 부화시켜 새끼를 낳는다. 이 시기를 조절할 수 있는 원리를 밝혀내어 볼락의 연중 종묘생산이 가능해졌다.-요즘은 어떤 물고기에 관심이 큰가.△송어의 사촌 격인 산천어이다. 송어는 바다에서 살다가 알을 낳을 때 강으로 올라온다. 하천에서 부화한 송어 새끼가 강에 남는 경우도 있는데 그게 산천어이다. 산천어는 물이 맑은 곳에 산다. 산천어 축제로 유명해졌지만 문제는 행사장에 풀어놓은 산천어 대부분이 외래종이라는 것이다. 현재 양식장에서 기르는 산천어 대부분은 러시아와 일본의 교잡종으로, 고유종보다 우세한 추세이다. 멸종 위기에 처한 토종 산천어를 복원하기 위해 강원도 고성의 비무장지대(DMZ)까지 다녀왔다. 지뢰 매설 위험지역을 피해 가며 채집했는데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비무장지대의 아름다움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비무장지대 내 계곡에서 채집한 토종 산천어 치어를 민물고기연구센터에서 사육해서 국내 최초로 인공 부화에 성공했다. 내년에 치어를 방류해 토종 산천어 보급에 나선다.-지구의 진정한 터줏대감은 물고기라는 말이 있지만 물고기의 터전은 점점 위태롭다. 물고기 연구자로서 앞으로의 바람이 있다면.△물고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환경에 민감하기 때문에 앞으로 다가올 환경변화를 미리 예측하는 지표종이기도 하다. 환경오염과 기상이변으로 강은 말라가고 토종 물고기는 멸종 위기다. 다양한 생명체의 원천이자 근거지인 수변 생태계 보호가 절실하다. 사라져가는 우리나라 고유 어종의 복원하고 자원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하고 싶다. 우리 물고기를 단 1종 1마리라도 올바르게 물려주기를 희망한다.박무억 소장은경주에서 태어나 경주고등학교를 다녔다. 군인이 되어 이름을 빛내라고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지만 물고기 연구에 푹 빠져 산 지 30년이 넘었다. 제주대학교 양식학과(현재는 해양생명과학과와 수산생명의학과로 나눠짐)에 진학하여, 노섬 교수의 지도 아래 국내 양식 산업 발전에 힘을 보탰으며, ‘조피볼락의 출산 조절을 위한 번식기구 제어’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덕에 위치한 경상북도 수산자원연구원에서 20여 년 근무했고, 2년 전 민물고기연구센터로 왔다. 물고기를 살리는 일을 하다 보니 낚시는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키운 걸 어떻게 먹을 수 있느냐고 배웠기에 생선을 즐기지도 않는다. ‘바다개척자’라는 의미를 담은 영문 이메일 주소를 사용한다./배은정 작가

2022-11-14

쏟아지는 별을 보며 자란 아이는 다르다

올해는 지구와 목성이 70년 만에 가장 가까워진 해다. 다음 기회는 무려 107년을 기다려야한다. 이번 가을이 평생에 단 한번 있는 목성 관측의 최적기라지만 하늘을 올려다봐도 별은 보이지 않고 천문대는 멀기만 하다. 예전에는 별이 이렇게나 드물지는 않았다. 개구리나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시골이 아니더라도 별 헤는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은 추억에서나 존재하는 요즘, 누구에게나 공평했던 별은 이제 찾아보는 자의 몫이다. 여기 친숙한 별자리부터 일식과 월식, 유성 같은 귀한 순간들까지 대중들과 나누는 별지기가 있다. 30여년 간 별 보는 즐거움을 전파하고 있는 홍성창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 이사를 만났다.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는 어떤 곳인가.△천문학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별 보기 안내자’ 역할을 한다. 전국 15개 지부를 운영하며 일반인들을 상대로 강의를 하거나 일식, 월식 등 중요한 천체 이벤트가 있으면 보여 주기도 한다.-천문 관측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개교 때부터 근무한 포항제철초등학교에 별자리를 투영하는 플라네타리움과 천체망원경 등이 구비된 우주과학관이 있어 자연스레 천문학과 가까워졌다. 90년대 중반부터 과학교육에 관심 있는 교사들이 ‘미래마당’이라는 모임을 만들고 해마다 과학캠프를 열었다. 당시로는 획기적으로 서울에 있는 천문학자를 초청해 영천의 한 캠핑장에서 관측을 했는데 그때 처음 본 토성의 경이로움이 지금까지 밤하늘을 보게 만들었다.-밤하늘의 별이 다 같은 별은 아니라고.△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은 태양이다. 태양의 둘레를 도는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은 움직이는 떠돌이별 즉 행성이다.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은 아니지만 태양 빛이 반사되어 별처럼 보인다. 문학에서는 별에서 살 수 있지만 과학적으로는 살 수 없다. 그나마 지구는 태양이라는 난로가 있어 생명체가 살 수 있다. 생명체가 있을만한 곳을 찾으려면 별이 아니라 별 둘레를 돌고 있는 행성이나, 행성 주위를 돌고 있는 위성에서 찾아야 한다. 홍성창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 이사 -기억에 남는 관측이 있다면.△밤하늘의 천체는 망원경으로 봐도 대부분 흐릿하다. 장시간 빛을 담은 천체사진이 훨씬 나을 때도 많다. 그래도 토성의 고리, 목성의 띠와 4대 위성, 달 표면의 구덩이, 색깔 다른 쌍성인 알비레오(백조자리), 별 무리들인 성단 등은 선명하게 확인되어 보는 재미가 있다. 미국에 개기일식 관측 원정대로 참가한 것과, 몽골의 칠흑 같은 밤도 기억에 남는다. 몽골의 투명한 밤하늘이 얼마나 부럽던지 남북한의 상황이 나아져서 북한에 별을 보러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지난 8월 ‘모두를 위한 천문학’을 주제로 세계최대규모의 국제 천문 학술대회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세계가 천문학의 대중화에 노력하고 있지만, 지역에서는 천체 관측을 누릴 기회가 부족하다.△가족끼리 저녁 먹고 들러서 별을 보고, 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민천문대가 들어서면 좋겠다. 형산강변이나 철길숲 산책로도 좋다. 포항은 일월신화가 전해오고, 곳곳에 산재한 고인돌이나 암각화에 선사시대 사람들이 눈으로 본 북두칠성이나 남두육성 같은 별자리가 새겨져있어 천문 스토리가 풍부하다. 게다가 전문 인력도 충분하다.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 회원들도 있고 천문학에 관심 있는 교사들의 모임인 경북천문교육연구회에서 활동하는 분들의 역량이 출중하다. 현재 각 학교 단위로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하고 특별한 천문현상이 있으면 시민들을 위한 공개 관측회도 하는데 잘 알려지지 않아 아쉽다. 이와 함께 강변이나 산책로에 천체망원경을 설치해 별을 보는 ‘찾아가는 천문 관측 프로그램’이나 시민을 위한 천문학 강좌를 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홍성창 이사가 제안하는 천문학의 대중화 방안은 시민천문대이다. 천문학자들이 연구를 목적으로 사용하는 천문대와 달리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볼 수 있는 곳으로, 지방자치단체가 건립한 천문대를 말한다. 2001년 대전을 시작으로 부산과 서울, 순천만, 영양, 청주, 충주, 남원 등 전국 30여 곳에 시민천문대가 있다. 일월신화를 간직하고, 용광로의 불빛으로 성장했으며 국제불빛축제가 펼쳐지는 포항에 천문대가 생긴다면 그것만큼 의미 있는 장소가 어디 있느냐고 말하는 홍성창 이사. 그는 시민들의 발길이 닿는 가까운 곳에서 누구나 별을 볼 수 있는 천문 도시를 꿈꾼다.-천문대가 도심에 있으면 별이 보이지 않을 텐데.△시민들에게 가까이 가려면 최고의 하늘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천문 관측 프로그램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상이 달과 토성인데 가로등이 밝아도 달은 보인다. 달의 분화구를 보는 것만으로 상상하는 천체의 모습이 실제와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1년에 3분의 1 정도는 토성과 목성도 관측할 수 있다.-어르신들을 위한 강좌도 진행한다고.△천문학은 나와 다른 별개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실생활과 밀착된 학문이다. 천문학은 원래 날짜와 방향을 알기 위해 시작됐다. 캄캄한 밤하늘에서도 북극성을 보고 방향을 찾을 수 있다. 달력의 기원이나 별자리와 관련한 정보를 알려드리면 어르신들이 굉장히 좋아하신다. 경북 봉화와 영양에서 천문지도사 교육을 받은 주민들은 마당에 천체망원경을 설치해 차별화된 한옥스테이를 운영하는 등 밤하늘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다른 분야도 그렇지만 특히나 별자리는 아는 만큼 보인다. 깊어가는 가을밤에 볼 수 있는 별자리는.△우리나라의 가을밤은 화려하지 못하다. 밝은 1등성이 다른 계절에 비해 적기 때문이다. 보통 한 계절에 세 계절의 별을 볼 수 있다. 초저녁에는 지난 계절의 별, 한밤중에는 그 계절 별, 그리고 자정 넘어 새벽에는 다음 계절의 별이 보인다. 11월 초저녁에 볼 수 있는 1등성은 거문고자리의 베가(직녀성)와 백조자리의 데네브, 독수리자리의 알타이르(견우성) 같은 여름별이다. 가을철 별로 분류되는 유일한 1등성은 남쪽물고기자리의 포말하우트로, 주변에 밝은 별이 없어 ‘고독한 별(The Solitary One)’로 불린다. 자정이 지나면 겨울철의 대표 별자리인 오리온자리를 볼 수 있다.-포항에서 별 보기 좋은 곳을 추천한다면.△별을 보려면 인공불빛이 없고 탁 트여야 한다. 경북 영양과 청송, 봉화 같은 곳이 그나마 은하수를 볼 수 있는 곳이다. 포항에는 신광 들판과 기북, 죽장면이 비교적 잘 보이지만 빛공해가 점점 심각해진다. 인공조명은 사람의 건강을 해치고 생태계를 위협하며 밤하늘의 별빛을 뺏어간다. 빛공해를 개선하기 위해 가로등에 갓을 씌우는 일이 시급하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국제밤하늘보호공원으로 지정된 경북 영양 수비면에서도 이런 노력들을 하고 있다.-11월에 특별한 천문현상을 만날 수 있다고.△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지는 개기월식이 오는 8일에 일어난다. 개기월식은 ‘태양-지구-달’이 일직선에 놓이면서 지구의 그림자에 달이 숨어들면서 발생한다. 지구의 그림자에 달의 일부가 들어가는 부분월식은 저녁 6시 10분부터 시작된다. 달의 전부가 지구의 그림자에 들어가는 개기월식은 7시 18분부터 8시 43분까지 관측할 수 있다. 검붉은 보름달인 ‘블러드 문(Blood Moon)’도 나타난다. 8일 오후 6시, 개기월식 공개 관측회를 포항제철초등학교에서 진행한다.-천문 관측에 관심이 생겼다면 망원경부터 사야할까.△천체 관측 초보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고가의 망원경부터 덜컥 구매하는 것이다. 일단은 눈으로 시작해보는 것이 좋다. 처음에는 쌍안경도 별 보기에 괜찮은 장비이다. 천체망원경은 상하좌우가 바뀌어 보이지만 쌍안경은 상이 바로 보이고, 무엇보다 휴대가 간편하다. 다만 쌍안경도 배율과 구경이 크면 무겁고 상이 흔들려서 삼각대가 필요하다. 맨눈으로 시작해 쌍안경, 망원경으로 이어지길 추천한다. 큰 돈 들여서 장비부터 갖추는 애호가들도 있지만 작은 망원경 하나로도 평생 하늘의 별을 다 보지 못한다.-천문학의 발전은 인간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더 큰 우주로 나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30년 가까이 별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어떤 변화를 느꼈는지. 별을 보는 경험이 주는 삶의 지혜가 있다면.△지리산에서 억누르듯 쏟아지는 별빛을 경험하며 우주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됐다. 우주는 생각 이상으로 멀고 광활하며 무엇보다 아름답다. 눈으로 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도 알려줬다. 개인적으로 교육활동에 보람이 크다. 아이들과 별을 보기 시작해서 그런지 지금도 혼자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별을 보길 좋아한다. 특히 아이들이 별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행복하다. 별을 서너 개 본 아이와 쏟아지는 별을 본 아이는 다르게 성장한다. 쏟아지는 별을 경험한 아이들은 천문학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각자가 하는 일에 도움이 되리라는 믿음은 늘 가지고 있다. 문학을 하든, 음악이나 미술을 하든, 다를 것이라 믿는다.홍성창 이사는대구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경북 청도의 공립 초등학교에서 근무했다. 1987년 개교한 포항제철초등학교로 옮기면서 천문학과 가까워졌다. 경주문화재야행 천체 관측 강사, 세계천문의 해 기념 ‘100시간 천문학’ 거리의 별 축제(2009)와 ‘별나라 우리나라’ 캠페인 집행위원(2010) 등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경북천문교육연구회 회원이자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 이사이다. 천문학의 대중화를 위한 활동으로 금성 태양면 통과 공개 관측회(2012), 네오와이즈 혜성 관측회(2020, 경북 봉화) 등을 진행했고, 개기월식이나 일식이 있을 때마다 공개 관측회를 열고 있다.배은정 1974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학과 졸업. TBC·포항MBC·경북교통방송 작가. ‘포항문화의 상징과 공간’ 공저.

2022-10-31

경주서 태어나 유적지 놀이터 삼아 성장 “이젠 돌려줄 차례”

“경주에서 시작해서 다시 경주에서 마무리하게 되어 행운이다.”지난 8월 31일 자로 신임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부임한 함순섭 관장의 말이다. 경주에서 태어난 그는 유적지를 놀이터 삼아 성장했고, 69년 역사의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에서 연구자의 꿈을 키웠다. 경주라는 문화적 토양을 자양분으로 지금까지 온 것이다. 경주가 자신을 키웠으니 이제는 돌려줄 차례라고 말하는 함순섭 관장. 그에게 경주는 그 자체가 거대한 박물관이다. -학창 시절을 보낸 경주로 돌아온 소회는.△신라 고분이 밀집된 황오동에서 자랐다. 집에서 황남대총 발굴 현장이 보였고, 친구 집 안방 자리에서 발굴이 이뤄졌다. 지금의 나를 만든 토대는 내가 태어난 경주와 어린이박물관학교이다. 정년이 2년여 남았으니 시작한 곳에서 마무리하게 된 셈이다.-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는 어떤 곳인가.△1954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를 위한 박물관 교육 프로그램이다. 진홍섭 당시 국립박물관 경주 분관장과 윤경렬 향토사학자가 만들었다. 첫 강의실은 박물관장실이었다. 한국전쟁으로 피폐했던 당시로는 획기적으로 환등기로 영화를 관람하고, 슬라이드로 문화재 사진을 봤다. 대구미문화원에서 영사기와 영화필름을 매주 빌려왔다고 한다. 운영규칙이 셋 있는데,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어떠한 명목으로도 돈을 받지 않는다. 수업은 존댓말로 한다는 것이다. 관장이 바뀌고 박물관을 나와야 했던 ‘경주어린이향토학교(1962-75)’를 거쳐, 1975년 현재 위치인 인왕동 신축 박물관으로 이전했다. 세계적으로 이처럼 오랜 역사를 가진 박물관 사회교육 프로그램은 드물다.-90년대부터 박물관장이 어린이박물관학교 교장을 겸하고 있다. 그야말로 금의환향한 셈인데 구체적으로 어떤 기억이 남아있나.△경주시립도서관 시청각실에서 수업하던 경주어린이향토학교를 다녔다. 인왕동으로 옮기고 거리가 멀어 그만뒀다가 중학생 때 친구들에 이끌려 다시 나갔다. 참여를 원하는 중학생들이 늘어나자, 1981년에 중·고등부가 만들어졌다. 경주박물관회 초대 회장을 지낸 김원주(1930~2007) 선생이 삼국유사 강독을 했는데 동국대학교 학생들이 와서 듣기도 했다. 청소년기 박물관학교는 안 가면 섭섭한 토요일의 일상이 됐고, 자연스럽게 박물관 계통의 일로 진로를 정했다.-박물관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길을 걸어왔네.△중학교 초반까지는 그림에 푹 빠져 지냈다. 화가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계림은 그림 그리기 좋은 곳이었고 화가들도 많이 찾았다. 경주는 문화적인 소양을 피부로 느낄 수 있고, 언제든지 미술 작가를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남한 최초의 예술전문학교인 ‘경주예술학교(1946-1952)’가 세워진 곳도 경주다. 우연히 일본에서 계림을 화폭에 담은 김창억 화가(전 홍익대 미대 교수)의 작품을 구입했는데 알고 보니 경주예술학교를 다닐 때 그린 거였다. 경주예술학교는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 탄생에 영향을 끼쳤다. 경주예술학교가 와해되고 좌절을 느낀 윤경렬 선생이 자라나는 어린이에게 희망을 찾았기 때문이다.-경주는 발길 닿는 곳마다 문화재가 넘쳐난다. 그중에서도 신라 금속공예를 전공한 이유는.△정양모 전 경주박물관장이 박물관학교 수강생들에게 신라금관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때 금관의 화려함과 독특한 디자인에 매료됐다. 제대로 된 금관 연구자가 없어 안타깝다며 비밀을 밝혀달라던 당부가 오래도록 뇌리에 남았다. 금관을 복제하던 삼선방을 들락날락했던 경험도 소중하다. 삼선방은 경주박물관학교 1회 출신인 김인태 금속공예명장의 공방으로 어릴 때부터 드나들며 금관의 제작기법을 가까이서 봤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유효웅 도예명장이 작업하던 동방요(현재 신라요)가 친구 집이었다. 남들은 교과서로 배우는 유물의 제작 기법을 이웃이나 친구 네에서 실물을 보며 익히는 행운을 누린 것이다. 그런 경험이 나의 귀중한 자산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로 시작해 전국 국립박물관 건립에 참여한 이력이 눈에 띈다.△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해 김해와 대구국립박물관 개관에 참여했다. 문화재나 공방 답사를 다녀선지 도면 보는 감각이 괜찮은 편이다. 어지간한 기술직 못지않다고 ‘학예 기술직’이라는 우스갯말도 한다. 박물관 시설의 효율적인 배치나 보존환경에도 관심이 많다. 항온과 항습을 유지해야하는 박물관은 에너지 소비량이 크다. 지금은 나아졌지만 90년대만 해도 전기료를 체납할 정도로 국립박물관 재정상황이 열악했다. 전기요금을 아끼려고 머리를 싸매야했다.-명색이 국립박물관인데 사정이 그 정도였나.△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하기 시작한 1991년, 첫 월급이 37만 원이었다. 생선 도매상이던 어머니가 10배는 더 벌었다. 내 월급을 보고 웃으시더라. 서울서 직장 다니던 친구들의 절반 수준으로 박봉이었고 운영 예산도 턱없이 부족했다.-서울과 영남권 국립박물관을 두루 거치며 기획한 전시가 다수다. 기억에 남는 전시가 있다면.△황남대총을 통해 신라 마립간 시기를 조명한 ‘황금의 나라, 신라의 왕릉 황남대총’(2010)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하나의 왕릉을 주제로 한 첫 특별전이었고, 전시 기간에 도록이 완판 되는 당시로선 드문 기록을 세웠다(감사하게도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다). 내 전공분야인 만큼 한 걸음 더 나아가려 노력했다. 고고학은 일본 학계의 주장이 여전한 분야다. 그걸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기존 연구와 새로운 주장, 기획자로서 시각을 담은 세 편의 논문을 나란히 실었다.우리가 아는 고고학 자료의 대부분은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것이다. 박물관이라는 단어 자체도 ‘Museum’의 일본식 번역이다. 식민지 고고학의 그림자는 앞으로 학계가 극복해야 할 화두이다. 일제강점기에 부실하게 이뤄진 조사가 다시 연구되어야 하는 이유기도 하다. 함순섭 관장의 학문적 관심은 일제에 의한 고적조사를 비롯해 해방정국으로 이어지는 경주의 문화운동 전반으로 뻗어나간다. 그것이 자신을 키운 경주에 대한 연구자 본연의 책무라고 생각한다.-일제강점기에 관심을 두게 된 배경은.△90년대부터 일제강점기 고적조사를 연구했다. 오로지 유물만 대상으로 한 평면적인 연구를 넘어 발굴과 조사 과정을 입체적으로 살피기 위해서다. 결국 유물이 출토된 일제강점기와 역사적 맥락이 이어지고 그걸 파헤치다 보면 관변단체인 경주고적보존회까지 닿는다. 그렇게 조사 범위를 넓히는 과정을 통해 지식은 총합된다. 유물 배후의 모든 맥락을 조사해야 연구가 풍성해진다.-다방면의 관심사를 대중과 칼럼으로 소통한다. 오랫동안 갈고닦는 글 솜씨가 돋보인다.△박물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능력이다. 대중적으로는 유홍준 교수가 유명하지만 부석사에 대한 글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쓴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1916~1984)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윤독하려 애쓴다. 이영훈 전 국립중앙박물관장도 후배인 내게 글을 보내오곤 했다. 교정할 때는 선후배도 없다. 직급도 권위도 내세우지 않는 윤독의 전통이 국립박물관에 이어 온다. 전시 설명문은 연구자 전원이 최소 6차례 윤독을 한다.-마음을 울린 유물이 있나.△전시된 유물보다 발굴할 때 자주 본다. 흙을 파다 보면 흙 색깔이 달라지는 지점이 있다. 아래 뭐가 묻혔느냐에 따라 흙 색깔이 다르다. 칠이 된 그릇은 노출되면 사라진다. 수습할 수 없으니 발굴자만 볼 수 있는 유물이다.-국립경주박물관에 와서 세 가지만 보고 가야 한다면.△성덕대왕 신종과 신라 금관, 백률사금동약사여래입상이나 미륵삼존불(남산 장창골 출토)을 추천한다. 불상이 전시된 신라미술관은 전시환경 개선 공사로 12월 초까지 휴관한다. 불교조각실을 신설해 이전보다 입체적으로 볼 수 있으니 기대해 달라.-국립경주박물관 수장으로서의 포부는.△국립박물관 수준은 여러모로 세계적이다. 디지털 콘텐츠 부분은 최첨단이고 설비도 마찬가지. 경주 지진에도 유물 손상은 없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교육시스템이다. 선진국에선 박물관에서 교육받은 교사에게 1차로 강의를 듣고 관람한다. 어린이박물관학교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경주박물관이 선도할 수 있는 부분이다. 퇴임까지 2년 3개월이 남았는데 욕심낼 기간은 아니다. 차별화된 전시 기획으로 경주만의 흥미로운 전시공간을 조성하는 것은 기본. 장애인 편의시설을 보강해 모든 이들이 차별 없이 이용하는 환경을 만들어나갈 계획이다. 더불어 직원들이 마음껏 쉴 공간도 마련하고 싶다. 그것만 제대로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함순섭 관장은경북대학교에서 신라 금관을 비롯한 삼국시대 금속공예를 전공했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 개관전시팀장을 맡아 용산 이전부터 개관까지 전시를 총괄했다. 경주에 오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신설되는 박물관으로 발령받아, 이외에도 국립대구박물관과 국립김해박물관의 개관을 맡았다. 기획한 주요 전시로는 ‘쇠, 철, 강’, ‘한국의 허리띠, 끈과 띠’ 등이 있다. 2010년 국립중앙박물관 용산 개관 5주년 기념 ‘황금의 나라, 신라의 왕릉 황남대총’ 특별전은 국립박물관 전시 지평을 새롭게 넓혔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 8월, 국립경주박물관 신임 관장으로 부임했다.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국립경주박물관을 통해 신라를 경험하고 신라에 더 가까워지기를 바란다.배은정 1974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학과 졸업. TBC·포항MBC·경북교통방송 작가. ‘포항문화의 상징과 공간’ 공저

2022-10-17

“올겨울 잘 넘기면 좋아질 거라는 긍정적 희망을 가지자”

강재명 포항시 감염병대응본부장 코로나19의 기나긴 터널이 끝나간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나온다. 최근 ‘팬데믹은 끝났다’고 한 미국 대통령의 말이 화제가 됐고, 국내 방역당국도 6개월 정도 뒤에 대유행이 종식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재작년부터 코로나 대응의 마지막 고비라는 말을 여러 차례 들어온 국민들은 반신반의한다. 끝날 것처럼 하다가 다시 불붙는 재유행의 반복은 이제 없는 것일까? 처음에는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선진 방역의 자부심이었다가 결국 장기화의 늪에 빠진 코로나19. 현재도 하루 만 명 이상의 확진자가 나오고, 수십 명이 사망하는 상황에서 엔데믹을 논해도 되는 것일까? 지난 2년간 포항지역 코로나19 방역의 최전선에서 위기 극복에 앞장섰던 포항시 감염병대응본부 강재명 본부장을 만나봤다. -코로나19가 발생한 지 3년이 되어간다. 정부에서는 내년이면 종식된다는데 가능할까.△한창 유행 때보다는 감소하고 있지만 아직 경북에서는 2000명 이상, 포항에서도 수백 명 이상의 확진자가 매일 발생하고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델타 변이에 비해 중증도가 감소하고 있고 국민의 절반이 감염됐으며, 90% 이상이 예방접종을 했기 때문에 올해 겨울을 잘 넘기면 상황이 좋아질 거라는 긍정적인 희망을 가져본다. 새로운 변이의 등장 같은 악재가 없다면 말이다.-큰 변수가 없다면 내년 봄에는 완전 종식을 기대해 봐도 되는 건가.△물론 완전히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치명률이 독감 수준으로 낮아지고 있지만 아직 80대 이상은 2%대의 사망률을 보인다. 상황이 좋아지더라도 코로나19는 풍토병으로 남아 독감과 비슷하거나 약간 중한 정도로 계속 유행할 것이다.-포항에서 첫 확진자가 나온 2020년 2월부터 방역의 최전선에서 치열한 날들을 보내셨다.△당시 대구에서 확진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포항에도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포항시 감염병대응본부가 꾸려졌다. 포항지역 5개 종합병원과 협의해 통합선별진료소를 포항의료원에 설치했는데, 전국에서 처음으로 제시된 민관합동 모델로 초기 코로나19가 포항에 유입되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았다. 지금은 코로나19의 특성을 잘 알고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됐지만 당시에는 의료진조차 공포가 컸고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웠다. 주말과 휴일 없이 힘든 나날이었지만 예상치 못했던 기쁨도 있었다. 시민들이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과 물품을 보내주신 것이다. 마음을 담은 손 편지들이 피로를 달아나게 만들었다.-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의료진들의 정신적 스트레스도 심각한 수준이라고 들었다.△나의 경우 2년 정도 가족이나 지인들과 만남을 자제했다. 사람들과의 교류가 삶에서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은 시간이었다. 작년 말부터 정서적인 고립이나 스트레스, 우울감이 컸고, 방호복을 입고 진료하고 폐쇄된 곳에서 따로 식사하는 것이 저를 포함한 의료진들을 지치게 했다. 2020년 2월부터 2년 3개월간 감염병 전담병원으로 역할을 하던 포항의료원이 올해 5월 전담병원에서 지정 해제되고, 여러 병동에서 코로나19 환자를 나눠서 진료하면서 일의 부담을 덜게 됐다.-의료진은 일반적인 사회적 거리두기보다 훨씬 높은 사생활 제한과 감염에 대한 압박으로 부담이 컸을 것 같다.△매일같이 확진자를 돌봐야하는 상황이고 내가 걸리면 고위험군에 전파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조심한다는 것이 조금 과했던 것 같다. 지난 8월에 나도 확진 판정을 받았고 이후 면역이 생겼다고 판단해 사람들과 만나기 시작했다. 여름휴가 때 부모님을 찾아뵙고 난 뒤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코로나 후유증으로 병원을 찾는 환자들을 공감하는데도 도움이 됐다.-코로나19 후유증으로 감염내과를 찾는 경우도 많나. 감염내과가 주로 어떤 환자들이 찾나.△대부분의 질환은 감염과 관련이 있다. 쉽게는 감기부터 시작하는데, 감염내과를 찾는 대다수는 발열은 있는데 원인을 모르는 경우다. 결핵이나 에이즈 그리고 해외여행을 다녀온 후 풍토병에 걸린 환자들도 다른 의사는 경험이 없어 힘들어한다. 가을철 유행하는 쯔쯔가무시와 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후군(SFTS) 등도 진료한다. 요즘은 코로나 감염 후유증으로 기침이나 무력감, 피로감을 호소하는 환자도 많다. 당뇨가 악화되거나 갑상선, 부신 기능이 떨어지는 후유증을 동반하기도 하는데 원인을 찾고 치료를 돕는다.-코로나19 상황에서 감염내과 전문의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경북지역 유일한 감염내과 전문의로 동분서주하셨는데 이후 변화가 있었나.△초기에는 경북에서 혼자였는데 지금은 세명기독병원에 한 분 더 계신다. 인구에 비하면 여전히 부족하고 지역 간 의료 격차는 해묵은 문제다. 사스와 메르스, 코로나19, 원숭이 두창 등 새로운 전염병은 계속되고 있다. 감염병 전문가가 더 필요하지만 감염내과는 3D 업종으로 지원자가 적다. 병원의 수익을 직접적으로 올리는 역할이 적다 보니 병원에서도 구인에 적극적이지 않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국가 감염병 대응체계를 구축하고 전문가 양성을 위한 정책적,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코로나19로 감염내과가 가장 핫한 과가 되었지만 힘들다는 인식이 커져 지원자는 오히려 줄었다.-감염내과 전문의가 된 계기가 있나.△감염내과는 발열과 관련된 질환을 진료한다. 발열 원인으로는 감염뿐 아니라 암이나 류마티스 질환 등 굉장히 광범위하다. 어려서부터 셜록 홈즈 같은 추리소설을 좋아했는데 홈즈가 범인을 찾듯 여러 가설을 세워 병의 원인을 찾아내는데 재미와 보람을 느낀다. 현대의학은 자신의 전문분야만 진료하는 경우가 많은데 감염내과는 사람 전체를 두루 살핀다. 게다가 HIV(인체 면역결핍 바이러스), 결핵 등을 제외한 대부분 감염질환은 원인만 찾으면 환자상태가 확연하게 좋아지기 때문에 보람이 더 크다. -어려운 의료 활동에 재미를 느낀다니 의사가 천부적인 일인가 보다.△의사가 되고자 한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어서다. 아무런 연고 없는 포항에 오게 된 것도 의료선교에 관심이 있어서였고, 한국인 선교사가 세운 캄보디아의 헤브론 병원으로 의료봉사를 다녀온 적이 있다. 댕기열이나 말라리아 같은 풍토병으로 어려움을 겪지만 의료가 낙후된 나라의 사람들을 도우며 큰 보람을 느꼈다.최근 실외에서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되고 코로나 관련 국내 입국 방역조치도 모두 풀렸다. 4일부터는 요양병원과 요양원의 접촉면회도 허용된다. 코로나19 여름철 재유행이 끝물에 접어들고 서서히 끝날 것이란 전망이 나오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당장 올해 겨울을 안전하게 넘겨야 한다. 강재명 본부장은 코로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신종 전염병의 유행은 계속되리란 걸 유념해야 한다고 말한다. 코로나19라는 긴 터널의 마지막 구간을 지나고 있는 지금. 주기가 점점 짧아지는 전염병 대유행을 대비하기 위해 짚어야할 과제가 많다는 얘기다.-팬데믹을 겪으면서 국내 의료체계 약점이 많이 드러났다.△가장 시급한 곳은 요양원과 요양병원이다. 고위험 환자들이 밀집되어 있고 격리가 어려운 구조여서 집단 발병이 많았다. 종합병원도 다인실 위주여서 한 명의 감염으로 순식간에 퍼지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다음으로, 코로나 시기 동안 제때 병원을 찾지 못해 위기의 순간을 보내야 했던 분만이나 소아, 투석, 수술이 필요한 환자들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 실제로 119차량에서 분만하는 황당한 일도 발생했다. 지역별로 이런 상황의 대처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의료기관이 민간이기 때문에 재난상황에서 민관의 합리적이고 신속한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포항에서는 민관협력이 잘 이뤄졌지만 국가적으로는 일방적인 행정명령과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정책으로 미흡한 점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미래의 재난을 막기 위해 이런 점들이 보완되어야 한다.- 전문 인력과 시설 부족은 사스 때부터 반복되는 문제 아닌가.△코로나 시기에 서울 한 대형병원에 마련된 감염병 전문센터의 경우 환자가 줄면서 최근 의료 인력을 다른 병동으로 옮겼다. 전염병은 언제 닥칠지 모르기에 유지관리 체계를 선제적으로 갖춰야 한다. 국가지원으로 시설을 유지하면서 평상시에는 다른 환자를 받아서 운영하고 감염병 전문 인력들은 주기적으로 훈련해야 한다. 코로나 초기 방호복을 입는 것부터 감염 환자 동선을 구축하는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평상시에 훈련이 되어야 신종 전염병을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정부는 코로나19 대응의 마지막 고비는 이번 겨울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대비해야 하나.△오늘 인터뷰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다. 올 겨울에는 독감과 코로나가 같이 유행하는 트윈데믹 가능성이 크다. 작년 겨울과 올봄에 코로나에 감염됐더라도 올 가을에 항체가가 떨어져 재감염 위험이 올라가게 된다. 코로나19와 독감이 동시에 감염되면 사망률이 2배가 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올 가을에 코로나19 2가 백신과 독감 예방접종 두 가지 모두 접종하길 바란다. 2가 백신은 코로나19 초기에 유행한 바이러스와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BA.1)를 동시에 대응하기 때문에 중증 예방효과가 크다. 특히 65세 이상 고령자와 당뇨병 등의 기저질환이 있다면 반드시 접종해야 한다.-백신 접종 후유증이 크다 보니 백신을 안 맞겠다는 분들 많다. 최근 한 조사에서도 국민 10명 중 3명은 코로나19 백신 추가 접종의향이 없다고 나왔다.△감염내과 전문의로서 예방 접종을 많이 해봤지만 여느 백신에 비해 코로나 백신의 부작용이 많았던 건 사실이다. 후유증은 부담되지만 그래도 지금은 맞아야 하는 상황이다. 부작용을 크게 겪었다면 의사의 처방을 받아 노바벡스나 스카이코비원을 접종할 수 있다. 이들 백신은 기존 백신 제작에 활용된 전통적인 유전자재조합 방식으로 제조되어 부작용 위험이 낮다.강재명 본부장은서울아산병원에서 전공의를 수료하고 감염내과 분과 전문의를 취득했으며 포항선린병원 감염내과 과장과 캄보디아 헤브론병원 내과 과장,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내과 외래 부교수를 지냈다. 현재 포항 성모병원 감염내과 과장으로 대한내과학회와 대한감염학회, 대한감염관리학회, 대한중환자학회 등의 활동을 통해 지역의 감염병 대응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오고 있다. 포항에서 첫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한 2020년 2월, 포항시 감염병대응본부장으로 위촉되어 포항지역 방역현장 최일선에서 코로나 방역을 진두지휘했다. 코로나19가 종식되는 그날까지 시민의 일상 회복을 돕는 든든한 조력자가 될 계획이다.배은정 1974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학과 졸업. TBC·포항MBC·경북교통방송 작가. ‘포항문화의 상징과 공간’ 공저./배은정 작가

2022-10-03

“우리 손으로 다함께 만든 ‘스마트시티 포항’ 꿈꿔요”

미래도시라면 무엇부터 떠오르는가? 자율주행 버스가 달리고 드론 택시가 비행하는 도시. 혹은 인공지능이 자연재난을 예측해 대응하고, 물류는 지하 터널이 담당하는 교통정체가 없는 도시. 누군가는 힘든 노동은 로봇에게 맡기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는 도시와 더 나아가 해저나 우주에 건설된 도시를 떠올릴 수도 있다. 이처럼 도시의 미래에는 시민들 각각의 바람이 담기게 된다. 시민들이 상상하는 미래의 모습이 다양할수록 실제로 만들어갈 수 있는 도시의 폭도 넓어지게 마련이다. 포항의 미래도시 연구를 주도하는 포스텍 미래도시연구센터가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간 지 4년을 맞았다. 그동안 포항은 얼마나 미래도시와 가까워졌을까? 새로운 기술을 도시에 적용해 시민의 삶을 쾌적하고 효율적으로 바꾸고자 연구하는 미래도시연구센터의 곽지영 부센터장을 만났다. -한때 U-시티가 유행했고 요즘은 스마트시티가 흔히 쓰이는 듯하다. 미래 도시는 구체적으로 어떤 도시인가.△미래도시는 현재보다 진화된 형태의 도시를 의미한다. U-시티, 스마트시티 모두 미래도시의 모습들이라 할 수 있다. ‘U-시티(ubiquitous city)’는 연구된 지 30~40년 이상 된 분야이다. IT 기술을 활용하여 도시를 자동화하는 시도로 요약된다. ‘스마트시티’는 연결성과 지능화를 특징으로 하는 4차 산업혁명의 한 형태이다. 3차 산업혁명이 U-시티처럼 자동화에 역점을 두었다면, 4차 산업혁명은 신경망처럼 연결된 센서들을 통해 수집된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도시의 상황을 이해하고 적시에 필요한 조치를 실행하게 된다. 이를 위해 사물인터넷(IoT, Internet of Things), 5G를 비롯한 차세대 통신, 인공지능 기술 등 다양한 최첨단 IT 기술이 융복합적으로 활용된다.-그렇다면 미래도시연구센터의 미래도시는 스마트시티를 말하는 것인가.△미래도시는 다양한 형태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100% 재생 에너지를 사용하고 쓰레기 배출이 없는 지속가능한 도시나, 교통과 물류 방식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도시가 될 수도 있다. 심지어 그런 도시를 해저나 화성에 건설하자는 제안도 나올 수 있다. 현재의 도시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적을 가진 무엇이든 미래도시의 영역이다. 다만, 지금으로선 스마트시티가 좀 더 진화된 형태이고, 현재도 스마트시티의 개념과 방향이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만큼, 가장 유력한 미래도시의 하나로 보고 있다. 미래도시연구센터(FOIC, Future City Open Innovation Center)라는 이름은 설립 당시 미래의 도시 기술 연구에 공과대학의 역할을 강조한 김도연 포스텍 전 총장의 제안에서 비롯됐다.-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모든 예측불허의 시간을 말한다. 미래도시연구센터가 연구하는 미래는 얼마나 먼 미래인가.△내일도 미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분명 필요하지만 현재는 없는 것들을 실현하는 것이 미래 기술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래도시는 지금 우리가 간절하게 바라는 무언가가 실현되는 세상이라고 보면 된다. 시민들이 어려움을 겪는 문제를 찾고 해결하는 것이 미래도시연구센터의 주된 연구목적이다. 미래도시는 다음 세대뿐 아니라 현세대를 위한 것이다.-도시는 굉장히 복합적인 공간이다. 미래도시를 만드는 우선순위는 뭔가.△2019년, 포항시와 스마트시티 전략을 수립하면서 미래 포항이 추구해야 할 핵심 가치를 시민 대상으로 설문 조사했다. 당시 지진 이후의 경제적 여파가 컸던 시기라 그런지 1위는 ‘경제’였고 그 다음이 ‘안전’과 ‘삶의 질’ 순으로 나타났었다. 설문조사를 기반으로 포항시를 위한 기본계획과 로드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 세 가지가 우리에게도 미래도시의 우선순위로 자리 잡았다.-지금까지 스마트시티 관련 사업의 주요 성과라면.△포항시, 포스코, 벤처기업들과 함께 수행 중인 국토부 주관 ‘스마트시티 챌린지 사업’이 가장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포항의 스마트시티 챌린지는 크게 안전, 삶의 질 측면의 도시문제 해결 관점과 지역소멸 우려를 극복하기 위한 미래 경제 동력 발굴을 목적으로, 네 가지 솔루션(도로 노면 감지, 갓길/보행로 위험요인 감지, 수요응답형 교통서비스, CCTV 영상 검색 시스템)에 대한 실증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평가 결과 최우수 지자체로 선정되어 국비 100억을 확보해 올해부터 본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안전사고 예측 시스템과 시민체감형 교통이 좋은 평가를 받은 걸로 안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술인가.△‘도로 노면 감지 시스템’과 ‘갓길/보행로 위험요인 감지 시스템’은 인공지능으로 도로의 위험요인들을 미리 파악하는 기술이다. 포항은 대형화물차들의 잦은 통행으로 균열이 심각한 도로가 많다. 또 구도심의 도로가 좁은 구간에는 불법 주정차나 적치물이 보행자 안전을 위협하기도 한다. 공용차량이나 택시 등에 비전이나 사물인터넷(IoT) 기반의 각종 센싱 장치를 장착하여 실시간으로 노면과 도로변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정비가 필요한 도로를 행정 부서에 알려 안전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서비스이다. ‘CCTV 영상 검색 시스템’은 범죄나 불법행위, 실종사건 등의 이유로 CCTV 저장 영상을 활용해야 하는 경우, 인공지능을 통해 빠르고 정확하게 원하는 영상을 찾을 수 있도록 지원한다. 나아가 범죄나 불법 징후를 자동으로 감지해 빠르게 대응할 수 있게 한다. ‘수요응답형 교통(DRT, Demand Responsive Transport)’은 승객의 요청을 받아 운행 구간이나 운행간격, 빈도 등을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신개념의 대중교통 수단이다.-올해부터 진행하는 본사업은 예비사업과 어떤 차이가 있나.△교통 분야를 비롯해 시민들의 안전 전반을 위한 사업들을 진행하고, 기술적으로는 현실을 가상에 옮겨놓고 시뮬레이션해보는 디지털 트윈(Digital Twin)과 광역 데이터 허브 등으로 범위가 확대된다. 본사업인 만큼 시민의 참여가 중요하다. 대학과 시민, 기업이 참여하는 사용자 검증단을 구성해 서비스가 실질적으로 어떤 효과를 체감하는지를 리빙 랩(Living Lab) 방식으로 검증할 계획이다.곽지영 부센터장은 스마트도시를 만드는 과정에서 시민의 참여 그 중에서도 리빙 랩의 역할을 강조했다. 리빙 랩은 우리가 사는 곳이 바로 실험실이라는 의미이다. 신기술을 들여오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직접 써보고 안 맞으면 바꿔가는 방식이다. 이러한 리빙 랩은 미래도시가 나아가야할 방향성과 맞닿는다. 시민의 필요를 우선하는 것이 도시를 더욱 공정하게 건설하는 길일 뿐 아니라 기술을 빠르고 정교하게, 무엇보다 값어치 있게 만드는 길이기 때문이다.-미래도시를 만드는데 시민의 참여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과거 공급자 주도 도시 모델의 시행착오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세계적으로도 리빙 랩 같은 시민 참여형 접근법이 도입되고 있다. 시민이 초기 개발 과정의 일원이 되어 직접 운영해보면서 잘 안 맞는 부분을 수정하고 완성하는 방식이다. 그러려면 개발자와 사용자간의 소통이 중요한데, 중간 역할을 미래도시연구센터가 담당한다. 작년엔 예비사업이었기 때문에 소규모의 시민참여단을 꾸렸지만, 본사업에서는 더 많은 시민과 학생의 참여가 필요하다.-어떻게 참여하나.△조만간 다양한 채널을 통해 모집 공고가 나갈 예정인데, 참여를 원한다면 언제든 미래도시연구센터로 문의해 주시기 바란다. 적극적인 참여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외적, 내적 보상을 비롯해 다양한 동기부여 방법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다.-미래도시를 만드는 과정에서 또 다른 고민이 있다면.△뭐니 뭐니 해도 ‘머니’라고 하듯, 자본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밑 빠진 독이 아닌 투자 대비 최대의 효용을 얻을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선은 기업을 성장시키는데 투자하는 것이다. 스마트시티를 위한 지역자금을 벤처기업을 위한 투자금 개념으로 활용해 그걸 발판으로 기업이 실증과 사업화에 성공하고 해외 시장까지 진출한다면, 지역은 당초의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환원 구조가 가능하다.-대기업에서 근무하다 대학으로 오셨다. 업무의 성격 차가 크지 않나.△포스텍으로 오기 전 삼성전자에서 13년간 근무했다. 총괄연구소에서 제품 간 연결성을 통한 새로운 사용자 경험(UX, User Experience) 제공을 모색했다. 삼성에서도 비슷한 분야에 있었기 때문에 한 번도 일의 성격이 변한 적은 없다. 기업에서 자사 제품 간의 연결성과 지능화를 모색했다면 대학에 오면서 공익적 성격인 도시로 영역이 넓어진 것뿐이다. 기본적인 프로세스는 동일하고 풀어야 할 문제가 달라지는 정도이다. 포스텍의 스마트 캠퍼스 구축도 함께 담당하고 있는데, 캠퍼스에서 문제가 해결되면 도시에도 확대 적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게 진행하고 있다.-앞으로 일어날 우리 도시의 변화가 기대된다. 교수님께서 구상하는 가장 포항다운 미래도시의 모습은 무엇인가.△스마트시티는 편리하고 안전하고 사람들한테 좋으라고 만든 기술인만큼 시민들 가까이로 들어와 그 생활 속에 스며들어야 한다. 최고 수준의 과학기술대학인 포스텍을 품은 포항 시민들도 과학기술을 생활 속에서 친근하게 누렸으면 좋겠고, 미래도시연구센터의 사업들이 그 계기가 되길 바란다. 스마트시티가 따로 잘 차려진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사는 동네에 구현되고, 타지 사람들이 구경 와서 감탄할 때, 동네 어르신이 쉬운 걸로 웬 호들갑이냐며 원리를 설명해 주시는 그런 도시가 되면 좋겠다. 먼 훗날 포항을 일컬어 ‘우리 손으로 다함께 만든 스마트시티’라는 얘기를 듣는 것이 도시공학자로서의 꿈이다.곽지영 교수는인간공학의 매력에 이끌려 포스텍 산업경영공학과에 입학, 동 대학에서 석·박사를 모두 마쳤다. 졸업 후 미국 버지니아 공과대학(Virginia Tech)에 있을 때, 집중적으로 해외인력을 유치하던 삼성전자의 입사 제의와 당시 지도교수의 권유로 입사했다. 삼성전자에서 책임, 수석, 상무를 거치며 13년간 근무했고, 2016년부터 포스텍 산업경영공학과 산학협력교수로 재직 중이다. 회사의 일원으로서 미래 상품과 서비스를 제안하는 일도 즐거웠지만, 포항의 스마트화를 연구하고 학생들과 호흡하는 지금 좀 더 보람을 느낀다. 현재 포스텍 미래도시연구센터 부센터장, 연세대학교 겸임교수를 겸하고 있으며, 경상북도 정책자문위원회 공동위원장, 지역혁신협의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배은정 1974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학과 졸업. TBC·포항MBC·경북교통방송 작가. ‘포항문화의 상징과 공간’ 공저./배은정 작가

2022-09-26

“꿈틀로 문화창작지구만의 오랜 전통 만들어 갔으면”

달빛을 은은하게 머금은 영국의 대성당과 오방색의 퀼트.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쌈솔 바느질한 등불. 영국에서 활동하는 섬유예술가 강경신(Magenta Kang)은 이민자의 삶을 씨실과 날실로 엮는다. 타국에서 살고 있지만 깊은 내면 속 한국인의 심지가 도드라지게 새겨진다. 한국의 전통직물을 영국식 직조방식으로 작업하는 그가 25년 만에 고향에서 ‘Through Korean eyes’전을 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즐겨 입던 모시옷과 제부의 상복을 뜯어 전통적인 한국 조각보 기법으로 이어 만든 작품 등이 호평을 받으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포항 도심의 꿈틀로 문화창작지구에 위치한 갤러리M(관장 최수정)에서 강경신 작가를 만났다. -얼마 만에 고향에 온 건가.△1997년에 영국으로 건너갔고 간간이 오가다 이번에 7년 만에 왔다. 최근에 두어 번 비행기 표를 끊었다가 코로나19로 취소했다. 고향에서 전시하는 건 25년 만이다. 서울과 울산을 거쳐 순회전의 마지막이 포항이다. 고향에서 전시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에 뭉클하다. 타국에서 어떻게든 작업을 이어가려고 아등바등하며 노력한 보람이 있다.-영국으로 가기 전 포항에서 한 전시는.△출국하기 전 2년 정도 포항청년작가회에서 활동했다. 그 후 연락이 끊겼다가 SNS를 통해 한 친구와 연결되어 회원들과도 인연이 닿았다. 1995∼1996년 여름으로 기억한다. 칠포와 영일대 해수욕장에 해변 설치 미술전을 열었다. 주제를 정하는 것부터 토론이 치열했다. 당시 포항제철에서 날아든 쇳가루가 심각한 이슈였기에 환경을 주제로 모기에 뜯겨가며 작품을 설치했던 기억이 있다.-영국에서 모시나 삼베 같은 전통직물로 작업을 한다니 흥미롭다.△내 작업은 크게 직조와 설치, 보자기 세 분야다. 대학원에서 ‘나의 정체성 찾기’를 주제로 논문을 쓰면서 한국 전통직물에 푹 빠졌다. 한국적인 재료를 영국식 직조 방식으로 작업한다. 영국에서 아티스트로 생존하려면 그들과 달라야한다. 재료는 어머니가 지인이 입던 옷이나 죽도시장 한복점에서 자투리 천을 모아 보내주신다.-영국의 대성당을 디자인한 작품이 많은데.△10년 넘게 거주하고 있는 케임브리지셔(Cambridgeshire)주의 일리 대성당(Ely Cathedral)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즐겨 입던 모시옷과 제부의 상복을 뜯어 쌈솔 바느질을 했다. 작품 중에 이름을 새긴 것도 있는데 일리의 전쟁추모기념비에 있는 세계대전 전사자 223명의 이름이다. LED조명을 사용한 랜턴은 지난 5월 한 달 반 동안 성당 안에 걸었던 작품이다. 3년 동안 바느질을 해서 72개를 등갓을 만들었다.-아버지의 모시옷과 삼베 이불, 상복으로 만든 작품이 인상적이다. 작가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인가.△아버지는 포항 도심인 육거리에서 도장을 파는 인장(印章)과 인쇄업을 했다. 예닐곱 살부터 매일 새벽에 깨워 서예를 가르쳐주셨는데 그때 예술을 대하는 자세를 배웠다. 그런 영향인지 일찍부터 그리는 걸 좋아했고 자연스럽게 미술을 전공하고 섬유디자이너로 일했다.-영국으로 건너가게 된 계기는.△대학에서 섬유디자인을 강의한 적이 있는데 교수로부터 그림을 달라는 황당한 부탁을 받았다. 누가 내 작품으로 외국 대학에 합격했는데 원본을 제출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작품을 제공하는 대가로 전임 강사를 제안했다. 화가 나는 한편으로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때 나이 서른이었다.-유학하던 때가 IMF 시기 아닌가.△영국 런던에 있는 센트럴 세인트 마틴 대학(Central Saint Martin College)에서 저녁에 파트타임 과정을 듣고 오전에 카페나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던 중에 한 교수가 자기 스튜디오에서 일해보자고 했다. 섬유에 붓으로 그린 패턴을 미국 뉴욕의 고급 의류매장에 판매했는데 내가 그린 디자인이 제법 많이 팔렸다. 유학생들이 귀국하던 IMF때도 조금이나마 돈을 벌었기에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지금까지 그 일을 계속하고 있는 건가.△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결혼을 했고 가정에 충실하고자 일도 그만뒀다. 그런 와중에 직조만은 개인 레슨을 받아가며 꾸준하게 작업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암투병과 수술, 이혼과 교통사고까지 연거푸 겪으면서 인생의 거센 파도를 만났다. -인생의 격랑을 어떻게 극복했나.△운 좋게도 한국인 상담사와 만났다. 홍콩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영국에서 훈련과정을 밟는 상담사와 1년 넘게 면담했다. 또 기적 같은 일도 있었다. 결혼 전에 방문했던 웨스틴 딘 대학(West Dean College)에서 ‘오픈 스튜디오’ 행사 초대장이 온 것이다. 10년 만에 그것도 이사 직전에 도착했다. 거기다 돈 한 푼 없는 상황에서 교통사고 보상금이 딱 대학원 1학기 등록금만큼 나왔다. 석사 1년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했고 장학금으로 다음 과정을 이어갔다. 한국에서 어머니가 오셔서 아들을 돌봐주셨다. 그때 어머니가 내 작품을 보더니 외할아버지를 닮았다고 하더라. 외할아버지는 만주를 오가며 일했는데 한 달이 걸려 돌아올 때마다 스웨터를 짜올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다고 했다.-어떻게 공부해서 현지 학생들을 제치고 수석을 차지했나.△죽으려고도 했을 만큼 힘든 시기를 지나 다시 살려고 시작한 것이 대학원이다. 캠퍼스에 있는 600년 된 나무에 매일 마젠타 색의 붕대를 감는 작업을 했다. ‘마젠타’는 미대에 진학해서 지은 내 이름인데 밝은 자주색을 뜻한다, 6개월간 감은 뒤 열흘간 풀어서 의자를 짰다.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한 작업이었는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주영한국문화원에서 첫 개인전 ‘마젠타 트리’를 열었다.일명 ‘마젠타 트리’를 만드는 과정은 영상으로 남아있다. 처음에는 혼자 하던 붕대 감기를 누군가가 동참하고 동네 아이들이 그 나무를 타고 놀았다. 영상과 함께 작가의 흥얼거리는 노래가 흐르는데, 기도 같기도 하고 우는소리 같기도 했다. 강경신 작가는 힘든 시기를 겪었기에 그런 작품이 나왔다고 믿는다. 고통에서 벗어나려 몰두할 일을 찾게 됐고 작품도 깊이 있게 나온 것 같다고. 무엇보다 타인의 고통을 보는 눈이 생긴 것에 감사하다고. 영상은 ‘예술은 힐링이다’라는 문구로 끝난다. 예술로 치유 받은 자신의 작품으로 누군가도 치유받기를 바라는 마음이다.-한국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영국에서 전시를 했다고 들었다.△잉글랜드 동부의 예술가 그룹 ‘우즈라이프(OuseLife)’와 일리 대성당에서 전시를 했다.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성당으로 포항에서 선보인 다수의 작품을 전시했고, 먹그림은 성당에 들어가서 스케치한 작품이다. 매년 7월이면 ‘케임브리지 오픈 스튜디오’에 참여하는데 올해는 한국에 오느라 못했다.-케임브리지 오픈 스튜디오는 80년 전통의 행사라고.△매년 7월, 예술가들의 작업실을 오픈하는 행사다. 참여 작가만 500여 명이다. 작가의 프로필과 작품, 작업실 위치 등을 앱으로 제공하고 매년 업데이트한다. 작년에는 차로 두세 시간 걸리는 런던에서 그림을 사러온 애호가도 있었다.-작업실을 오픈하고 시민과 교류하는 것은 예술가의 거리인 꿈틀로의 취지와 비슷하다.△안 그래도 작업실을 둘러보며 짚풀과 종이 공예를 배우고 있다. 영국에서는 오로지 내 작업에만 몰두했는데 고향이라 그런지 여유가 있고 영감도 얻는다. 꿈틀로에서 열리는 ‘아트마켓 298놀장’에도 가봤는데 활기가 넘쳤다. 문화의 불모지라고 여겼던 포항에서 뭔가 꿈틀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꿈틀로도 케임브리지처럼 오랜 전통을 만들어 가면 좋겠다.-나아지고 있다지만 지역 예술인의 현실이 녹록치 않다. 꿈틀로에 제안을 한다면.△지원받는 사업은 주최 측과 협상을 해야 하고 어느 정도 끌려갈 수밖에 없다. 케임브리지 오픈 스튜디오의 경우 작가들이 운영하기 때문에 활동에 제약이 적다. 예술의 자율성을 해치지 않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에서는 돌멩이를 던지면 이씨, 박씨, 김씨가 맞는다지만 영국에서는 아티스트가 맞는다고 할 정도로 예술 종사자가 많다. 예술에 대한 문턱을 낮추고 생활에서 즐기는 문화를 만들어갔으면 한다.-곧 영국으로 돌아갈 텐데 고향에서의 시간들이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하다.△개막전 축사에서 류영재 선배(포항예총 회장)가 ‘바뿌제’로 동서양을 접목시킨 예술가라고 해서 다들 폭소했다. 잊고 있던 단어인데 정감 있고 지역색이 묻어있어 나중에는 ‘바뿌제’로 전시를 해볼까 한다. 최근 한류 열풍으로 영국에도 한국 전통문화에 관심이 높아 보자기 강의나 전시 일정이 2024년까지 잡혀있다. 타국에서 가장 생각났던 음식이 신선한 미역에 싼 과메기였는데 못 먹고 가서 아쉽다. 83세 어머니가 천천히 늙으시면 더할 나위 없겠다. 강경신(Magenta Kang) 작가는포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영국으로 건너갔다. 1997년 영국 런던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 대학(Central Saint Martin College)에서 공부한 후 런던에서 텍스타일 디자이너로 일했고 2012년에 웨스트 딘 칼리지(West Dean College in Chichester)에서 섬유예술 미술 석사를 받은 후 케임브리지셔(Cambridgeshire)주 일리(Ely)에 정착했다. 11세기 일리 대성당이 지배하는 번화한 시장 마을의 일상에 매료되어 대성당과 주변 정원 등에서 영감을 얻는다. 지난 8월 서울 북촌을 시작으로 울산과 포항에서 ‘Through Korean eyes’ 순회전을 열었다. 25년 만에 다신 만난 고향의 작가들과 죽도시장 칼국수와 호떡을 사먹으며 이게 꿈이 아닐까 볼을 꼬집어볼 정도로 행복한 기억을 쌓고 오는 15일 영국으로 돌아간다.배은정 1974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학과 졸업. TBC·포항MBC·경북교통방송 작가. ‘포항문화의 상징과 공간’ 공저./배은정 작가

2022-09-12

“별처럼 많던 신라 사찰들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남아있죠”

경주 황룡사를 안다고 말하지만 금당지 장육존상의 받침돌에 스며든 신라인의 미적 감각을 발견하는 이는 드물다. 넓적한 바윗돌 위에 앉아 있었을 1장 6척 불상을 상상하며 1천500년 전 신라인들의 바람과 조우하는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황량하기 그지없는 절터에서 오래도록 시간을 보내야만 목격할 수 있는 귀중한 앎이다. 역사적인 안목은 물론 시간을 거슬러 한 시대를 만나고자 하는 열망, 신라인을 향한 순수한 경외심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유적지만큼 잘 들어맞는 곳도 없다. 기나긴 시간의 강을 건너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혹여나 이 사람과 동행한다면 가능할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경주지역 유적 발굴에 참여하고 신라역사를 연구했으며, 경주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30년째 시민을 대상으로 신라문화유적 답사를 진행하고 있는 김호상 이사장을 경주시 석장동에 위치한 진흥문화재연구원에서 만났다. -들어오는 길이 복잡하고 좁은 농로여서 애를 좀 먹었다. 이곳 진흥문화재연구원에서는 어떤 일을 하나.△문화재 발굴을 전문으로 하는 법인이다. 전국의 발굴업체는 110개 정도인데 그 중 대구·경북지역에 가장 많은 20개가 밀집해 있다. 국내 발굴조사는 1970년대까지 국가주도로 이뤄지다가, 80년대부터 대학박물관이 이끌었으며, 2000년대 이후 매장문화재 기관들이 주도하고 있다. 진흥문화재연구원은 2014년 설립해 경주 천군동 유적을 비롯해 분황로, 서면 도리길, 괘릉리, 대릉원 중앙로 등 40여 곳을 발굴했다.-수천 년을 묻혀있던 유물과 만나는 일인 만큼 가슴 뛰는 순간이 많았을 것 같다.△이전에는 ‘불명 유구’로 취급됐던 숯가마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밝혀냈다. 90년대 중반, 경주 경마장 건설예정부지 발굴조사에서 숯가마가 대량으로 나왔다. 드문드문 나오기는 했지만 한꺼번에 나오기는 처음이었다. 기와나 토기를 굽던 가마와 달리 숯가마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불명 유구’나 불에 탄 ‘소토(燒土) 유적’으로 취급되어왔다. 불타고 남은 재 이외에 별다른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경주 경마장 예정부지는 국내 대표적인 토기 집단군이기도 해서 일본의 가마 연구자 후지와라 마나부(藤原學) 선생을 초청했는데 발굴현장을 둘러보더니 일본에도 소수만 보이는 숯가마라고 알려줬다. 당시 숯가마에 대한 연구는 전무했다. 일본 오사카에 있는 가마전문박물관인 스이타(吹田) 시립박물관으로 연수를 가서 마나부 선생의 사사를 받아 2003년 박사학위논문으로 한국 숯가마 연구사를 최초로 정리했다.-신라사람들은 가마에서 생산한 숯으로 뭘 한 건가.△신라 전성기 경주에는 17만8천936호가 살았고, 숯으로 밥을 해먹었다는 삼국유사 기록이 있다. 하층민은 장작을 땠겠지만 귀족은 숯을 썼다. 신라 귀족은 금입택(金入宅)이라고 해서 금을 입힌 집에서 호화롭게 생활했기에 그을음 없는 숯을 선호했다. 숯에는 흑탄과 백탄이 있고 가마 구조도 다르다. 활활 타는 숯을 흙이나 재로 덮어 만든 백탄은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고급연료로 제철에 사용했다. 아궁이를 막아 산소공급을 중지시켜 만든 흑탄은 취사용이었다. 신라인들은 가마에서 숯을 구워 양질의 숯을 다량으로 누린 것이다. -불명 유구이던 신라 숯가마에 이름을 부여한 고고학자지만 대학에서 국사학을 전공했다.△80년대만 해도 국내에는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거의 없었다. 서울대를 비롯해 몇몇 대학에 고고학과가 있었는데 대부분 서양의 이론들을 다루었고 실제 발굴은 역사학과에서 담당했다. 90년대 들어 고고학과와 문화인류학과가 생기면서 연구가 분화됐다. 지금은 그마저도 경계가 허물어져 자연과학분석을 도입해 고고학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대학시절부터 발굴현장에 살다시피 했다고.△대학박물관이 발굴을 주도하던 80년대는 학생들의 현장참여가 활발했다. 강의실 수업과 발굴 실습 가운데 선택할 수 있었는데 답답한 강의실보다야 현장이 좋았다. 학기 중에는 경주박물관으로 등교하고 방학에는 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일했다. 발굴은 고된 작업이다. 첫 직장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월성 발굴현장이었다. 땡볕 아래 하루 종일 땅을 파고 흙을 나르다보면 철조망 너머 관광객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면 나만 빼고 벚꽃 대궐에 있었다. 선배들이 없었다면 호미를 내던지고 다른 길로 갔을 것이다. 선배들도 일이 익숙한 후배가 편하니까 잘 한다는 꼬드김에 넘어가 지금까지 왔다. 처음에는 선배들에 이끌려서 나중에는 후배들에 떠밀려서 여기까지 온 것 같다.-대학 4학년 때 문화재 관련 전시회를 열었다고.△대학생활을 마무리하며 문화유산의 중요함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싶었다. 문화유산 보존과 보호라는 사명감이 컸던 시절이다.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청계천에서 거금 40만 원을 주고 카메라를 구입해 유적지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경주읍성이나 폐사지 같은 훼손되거나 조명받지 못한 곳들을 촬영해 학생복지관에 전시했다. 매년 전시를 열겠다며 나름 포부가 컸지만 한 번으로 끝났다.-문화재 보호의식이 지금보다 더 부족하던 시대 아닌가.△개발논리가 우선하던 시대여서 유적이 파헤쳐지기 일쑤였고 어이없는 과정을 많이 목격했다. 포항시 신광면에 위치한 영일 냉수리 고분도 지방도로 공사 중에 훼손됐다. 보호분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긴급하게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할 때 학생 신분으로 참여했다. 그렇게 문화재 보호의 소중함을 알릴 필요성을 깨달았고 대학을 졸업한 1991년부터 매달 시민들을 상대로 문화유적 안내를 해오고 있다. 6명으로 시작해 지금은 3~40명이 참여한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신라문화진흥원을 조직해 유적답사와 문화행사, 강좌도 진행한다.-한미정상회담을 비롯해 국내외 주요 인사가 경주에 올 때마다 문화유산 안내를 도맡았다.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2005년 한미정상회담 때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불국사로 안내했고, 2009년에 시진핑 당시 중국 부주석을 월성으로 안내했다. 두 사람은 여러모로 결이 달랐는데, 부시 대통령은 질문도 하고 활달한 반응이었지만 시진핑 주석은 조용히 경청하는 모습이었다.2009년 남북정상회담 때는 북한 김기남 단장을 대릉원과 불국사로 안내했다. 남북한을 비교해서 유적을 설명하는데 북측 안내자가 “동무, 북한이나 남한이라 하지 말고 북측, 남측이라고 하라우”라고 했던 기억도 난다. -경주를 찾는 해외 인사들에게 먼저 권하는 장소가 있나.△한미정상회담 당시 회의가 끝나고 한두 시간 안에 둘러볼 수 있는 문화유적을 선정해야 했다. 첨성대와 월지는 다소 밋밋하게 생각됐고, 헬기를 타고 남산을 갈 수도 없어 종교적인 거부감만 없다면 불국사와 석굴암을 제안했다. 불국사는 석가탑과 다보탑도 아름답지만 최고의 정수는 축대이다. 축대 아래는 자연석으로 얼기설기 쌓고 위쪽은 다듬은 돌을 배치했는데, 위아래가 만나는 지점이 압권이다. 울퉁불퉁한 것을 평평하게 깎은 것이 아니라. 평평한 윗돌을 아랫돌에 맞춰 울퉁불퉁하게 다듬었다. 이를 ‘거랭이 기법’이라 하는데, 흔들리면서 안정을 찾아가고 자연스러움을 중시하는 한국의 오랜 문화라고 설명했다. 못을 박지 않고 나무를 결구하는 방식이나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간직한 화강암 석재의 불상도 감탄을 자아냈다. 부시 전 대통령이 불국사를 보며 한국문화에 감탄했다는 기사가 신문에도 크게 실렸다. 혹자는 우리나라 유적을 두고 거대하고 화려한 해외 유적에 비해 볼품없다는 말을 하는데,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소중하게 여기며 필요한 만큼만 다듬어 쓰는 유일무이한 우리 문화재의 가치를 몰라본 얘기다.-경주 유적지를 잘 설명하는 비법이 있나.△뛰어난 언변으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사람들도 많지만, 있는 그대로의 가치에 집중하려는 편이다. 흥미도 중요하지만 재미를 위해 역사적 사실을 해쳐서는 안 된다.-경주문화유적을 알리는 저술 작업을 하면서 낭산을 첫 번째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낭산(狼山)은 신라로 들어가는 출입구이자 신라 문화의 광맥과도 같은 곳이다. 신라 왕이 살던 왕궁이 월성이고, 무덤이 대릉원이라면, 제사를 지낸 신전이 낭산이다. 사천왕사와 황복사, 분황사, 선덕여왕릉 등의 유적이 남아있고 거문고의 명인 백결선생과 향가 ‘도솔가’와 ‘제망매가’를 지은 월명의 설화가 전해오는 곳이다. 그럼에도 ‘낭산’은 ‘남산’으로 자주 오인될 만큼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낭산은 산의 지형이 이리가 길게 엎드린 모습이라고 ‘이리 낭(狼)’자를 따서 부른 이름이다. 경주 도심에 인접한 해발 115m의 나지막한 구릉으로 하루나 반나절이면 충분히 둘러본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특별전 ‘낭산, 도리천 가는 길’(9월 12일까지)이 열리고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우리나라 사람치고 경주 한번 안 다녀온 이는 없다. 경주를 새롭고 깊이 있게 보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문화유산 해설사와 동반하거나 안내서를 참고해 걸어서 둘러보길 권한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 첫 장에서 가을이면 불쑥불쑥 경주를 찾고 싶다고 했다. 어디를 가나 정겨운 모습에 마음이 느긋해지고 은은한 향수를 호흡할 수 있는 곳이라고 쓰고 있다. 경주의 매력을 온전히 느끼려면 느긋한 도보 여행이 제일이다. 차량보다는 도보로 여유를 갖고 유적에 담긴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바란다.-신라 역사를 연구하고 경주의 아름다움을 계속해서 알리고 계시는데, 앞으로 더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일연은 신라를 두고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 塔塔雁行)’이라 했다. 별처럼 많던 사찰과 날아가는 기러기처럼 줄지었던 탑들은 사라졌지만 흔적은 남아있다. 경주에 남은 2~300개의 폐사지가 더 이상 파괴되지 않도록 관심을 이어갈 것이다. 또 잘 알려지지 않은 유적들을 제대로 알리는 저술 작업을 계속할 예정이다. 경주 답사여행의 꼼꼼한 길잡이가 되는 자료집이 됐으면 한다. 신라역사를 연구하고 경주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알리는 일을 지금처럼 해나갈 것이다. /배은정 작가김호상 이사장은동국대학교 국사학과에서 고고학을 배우고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조사원과 동국대학교·위덕대학교 박물관 전임연구원,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조사연구실장을 거쳐 현재 재단법인 진흥문화재연구원(매장문화재 발굴전문기관) 이사장으로 재임하고 있다. 1991년부터 매월 첫째 주 일요일마다 시민들과 문화유적 답사를 떠난다. 문화유적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해 신라유적을 중심으로 안내서 발간작업을 하고 있으며, 첫 번째 작업으로 ‘신의 숲 왕의 산, 낭산’을 지난해 출간했고 현재는 신라왕궁 유적을 집필중이다.배은정 1974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학과 졸업. TBC·포항MBC·경북교통방송 작가. ‘포항문화의 상징과 공간’ 공저.

2022-08-29

“골든타임 놓친 트라우마 기한 없이 반복… 완치 위한 치료를”

김상호대구한의대 부속포항한방병원 한방신경정신과 교수 트라우마에도 골든타임이 있다. 학계에 따르면 재난에 대한 심리적 반응은 3단계로 나타난다. 망연자실하며 일주일을 보낸 뒤에 불안과 우울, 두려움과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며,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3개월을 넘기면 만성기로 들어간다. 완치기회를 놓친 트라우마는 기한 없이 반복된다. 포항 지진 1년 후에 실시한 시민의식조사에서 트라우마 고위험군은 40%가 넘었다. 지진 3년 후에도 비슷한 수치였다.포항에서 지진 트라우마 환자를 연구한 김상호 교수는 ‘재난 트라우마의 한의사 진료 매뉴얼’을 최초로 개발했다. 인적·물적 의료자원이 제한적인 대규모 재난상황에서 즉각적인 심리지원이 가능하도록 한 한의학적 의료 지원 안내서이다. -재난 트라우마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2017년 11월 포항에서 지진이 발생하고 병원에서 단체 의료지원을 나갔다. 그리고는 1년 넘게 잊고 지냈는데 연구재단의 지원과제를 준비하다 이재민들이 여전히 텐트에서 생활하며 트라우마를 겪는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를 계기로 재난 트라우마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했다. 진료팀을 꾸려 흥해 보건지소 재난심리지원센터의 협조 하에 이재민을 대상으로 의료지원활동을 펼치며 진료 매뉴얼을 개발했다.-트라우마 치료는 어떻게 하나.△현재의 재난심리지원은 심리적 중재가 주로 활용된다. 재난의학에서는 피해자를 생존자라고 하는데, 그들은 심리적 증상뿐만 아니라 불면과 어지럼증, 두통, 피로 등 다양한 신체증상을 호소한다. 한의에서는 침 치료와 더불어 호흡이나 명상을 함께하는 심신(心身)중재 방식을 활용한다. 해외에서는 귀에 놓는 이침(耳針, Ear Acupuncture)을 활용해서 재난 구호 활동을 펼친 사례가 많다. ‘경혈 자극을 통한 감정자유기법’과 호흡이나 명상 같은 안정화기법도 사용한다.-트라우마 치료에 이침을 주로 사용하는 이유는.△침 치료는 기본적으로는 이완 효과가 있다. 귀는 자율신경계 중에도 미주신경과 연결되어 이침은 불안이나 불면 치료에 효과적이다. 원래 이침은 미국에서 마약 중독 환자들의 금단증상에 사용됐다. 9.11테러를 계기로 재난 트라우마 치료에 본격적으로 활용됐으며,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덮친 대규모 참사 현장에도 쓰였다.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국경없는 침술사회’라는 민간단체도 존재한다. 한의사가 없는 일본에서는 침이나 마시지, 한약을 의사들이 활용한다. -재난 현장에 적용 가능한 최초의 한의진료지원 매뉴얼이라고.△사실은 세월호 이후에 이뤄졌어야하는 작업이다. 세월호 사건 당시 진도에서의 한의사협회 의료지원 활동을 기록한 논문이 나왔지만 매뉴얼 작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번에 개발한 ‘재난 트라우마의 한의사 진료 매뉴얼’은 재난현장에서의 한의진료지침을 제시하고, 검사방법을 표준화했으며, 단계별 대처방법과 증상별 진료 프로토콜을 정리했다. 30명 가까운 검토위원과 자문위원의 도움을 받았다.-재난 현장에서의 한방 진료 매뉴얼이 해외에는 있나.△최근 이 매뉴얼을 소개하는 논문을 투고해 국제 학술지 JICM(Journal of Integrative and Complementary Medicine)의 게재가 확정됐다. 재난 현장에서 전통의학을 체계적으로 활용한 좋은 사례라고 평가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1차 의료 현장에서 전통의학 활용을 권고한다. 1차 의료나 공공의료 강화를 위해 그 나라가 가진 문화적 특성을 고려하고, 의료인적자원을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공공 보건 의료에 한의사가 배제되어 있다.-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나.△의료지원 첫날, 대피소 밖에 나와 기다리던 70대 할머니다. 지금도 내원해서 진료를 받는다. 여전히 텔레비전이 거꾸러지고 세면대가 박살난 그날 경험을 생생하게 떠올리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 악몽에 시달린다. 할머니 댁에서 예전 사진을 봤는데, 지진을 겪으면서 몰라보게 나이든 모습이었다. 마음이 힘든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생각만 해도 고된 일이다. 환자의 마음 한 부분을 꺼내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마다 진을 빼는 일일 것이다. 환자들의 힘든 얘기를 듣다보면 고된 마음이 전염되지는 않을까. 스스로를 듣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김상호 교수는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돌보고자 선택한 일이며, 마음에 상처를 많이 입는 시대인 만큼 본인만의 특급 처방전 하나씩은 필요하다고 말한다.-한의학을 그것도 신경정신 분야를 선택한 계기는.△고등학교 때는 공과대학을 목표로 공부했다. 학교 대표로 포항공대 캠프에 참여하기도 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IMF 외환위기가 터졌는데 위기 조짐을 읽은 아버지가 한의대 진학을 권유했다. 학습량이 많아 버거울 때도 있었지만 공부가 잘 맞아 감사하게 생각한다. 한의대에서 봉사활동을 같이했던 선배가 자신만의 분야를 가지라며 서너 과를 추천했는데, 마음치유에 관심도 있고, 개인적으로 불안이나 긴장 같은 내면적인 어려움을 겪었기에 신경정신과를 선택했다.-불안이나 긴장감이 높은 편인가.△학창시절에는 공부도 운동도 노는 것도 뭐든 잘 하고 싶었다. 되돌아보면 부모님의 인정이나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민감했던 것 같다. 남들 보기에는 모범생이지만 사람에 대한 불안 수준이 높고 낯가림이 심했다. 출석을 부르면 순서가 되기 전부터 긴장하는 학생이었다.-마음을 들어주는 일이 힘들지는 않나. 어디에다 털어놓는 편인가.△힘든 마음을 듣는 일이 쉽지 않지만, 나는 듣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해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직업적 사명감이 있다. 물론 오래 듣다보면 집중이 안 되고 용량의 한계를 느낀다. 학창시절부터 그런 스트레스를 운동으로 풀었다. 운동을 하면 두통이나 스트레스가 개선되는 걸 중학생 때 깨달았고, 달리기며 축구, 농구를 가리지 않고 했다. 코로나19 전에는 마라톤을 했고 요즘은 바다수영에 빠져있다. 수영에 나름 자부심이 강했는데 바다에서 겸손해졌다. 포항시민연극단 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이래봬도 무대에 다섯 차례나 오른 뮤지컬 배우이다.-뮤지컬 하는 한의사라니 독특하다. 어떻게 시작했나.△아이와 아내가 먼저 시작했고, 남자배우가 필요하다는 꼬드김에 넘어가 5년째 하고 있다. 포항문화재단 소속의 포항시민연극단에는 10대부터 70대까지 30여명이 활동한다. 70대 최고령 단원이 대본을 가장 먼저 외우고, 드로잉이 취미인 아내가 팸플릿의 그림 도안을 도맡아 한다.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아 현재 맹연습중이다. 오는 26일, 포항시청 대잠홀에서 열리는 ‘나의 꿈’이라는 뮤지컬이다. -가족 전체가 연극에 푹 빠져 사는 것 같다. 연극 경험이 진료에도 도움이 되나.△불안과 불면을 겪는 취업준비생이 어머니와 내원한 적이 있다. 상담을 해보니 따돌림이나 학대당한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힘들어하고 있었고, 즉석에서 역할극을 제안했다. 첫 만남이었지만 바로 해야겠다 싶었다. 모녀는 상대의 입장에서 대화하며 속마음을 털어놓았고, 환자가 지금 너무 행복하다고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역할극의 치료효과는 뭔가.△대부분의 고통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온다. 고통은 주관적인 감정이므로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필요하지만 쉽지 않다. 역할극은 자신의 고통을 한 발자국 떨어져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기회를 제공한다.-환자들에게 취미활동을 권하기도 하나.△환자마다 가지고 있는 정신건강의 자원이 다르다. 내가 해보니 좋더라고 무작정 권하지는 않는다. 일단 반드시 처방하는 것은 걷기다. 정신과 환자 대부분은 활동량이 떨어진다. 버겁지 않는 선에서 활동량을 늘려가며 생활리듬을 정상화하고 몸의 에너지를 얻도록 한다.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는 오전 걷기를, 이완을 위해서는 저녁 걷기를 처방한다. 예전에 즐겼던 취미생활을 다시 해보는 것도 좋다.- 후학 양성을 위해서도 힘쓰고 계신다.△공중보건의로 복무를 마치고 한방병원에 근무하며 선배의 추천으로 한의대에서 강의할 기회가 있었다. 학생들과 늦게까지 토론하며 교감하는 일이 가슴 뛸 정도로 즐거웠다. 진료도 하고 학생도 만났으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하다, 대학 은사의 추천으로 포항에 왔다. 고등학생 때 참가했던 포항공대 캠프 이후 두 번째로 온 포항에서 지금껏 살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대구한의대에서 학생들을 만난다.-진료와 연구, 강의로 바쁜 나날들인데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시민들의 아픈 마음을 보듬는 일을 계속하면서 환자와의 에피소드를 기록해두고 싶다. 진행 중인 재난 트라우마와 우울증 연구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고, 연구자로도 계속 성장하고 싶다. 포항에 살아서 감사한 일이 많다. 바다수영을 꾸준히 하고 기회가 되면 다이빙도 배울 예정이다. 오래도록 아내와 연극무대에 오를 것이며, 무엇보다 서로 사랑하는 가정이 되도록 노력하고 싶다.김상호 교수는경희대 한의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학교한방병원 한방신경정신과에서 일반·전문수련의 과정을 마쳤다. 공중보건의로 복무를 마쳤는데 첫 근무지인 흑산도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경기도 수원에 있는 한방병원에서 근무하며 상지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지도교수의 추천을 계기로 대구한의대학교 부속 포항한방병원에 내려와 현재 교수로 재직하며 한방신경정신과학회 교육이사, 대한한방병원 중앙수련교육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포항지진을 계기로 재난 트라우마를 연구하고 ‘재난 트라우마의 한의사 진료 매뉴얼’을 개발했다. 사진 촬영과 마라톤, 바다 수영을 수준급으로 즐기며 포항시민연극단에서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배은정 작가

2022-08-15

“리튬전지 폭발 위험·충전 느려짐 나노구조체 합성으로 문제 해결”

박문정 포스텍 교수 과학기술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분야로 알려져 있지만 오랫동안 성별 편향성을 드러냈다. 신약 연구에서 수컷 개체만을 사용한 결과 여성은 더 많은 의약품 부작용을 겪는다는 FDA 조사결과도 있었다. 노벨과학상에서 여성 비율은 4%에 불과하며, 뛰어난 여성 과학자들은 당대의 편견과 맞서야했다. 우리 사회 또한 과학기술 분야의 유리천장은 견고하다. 과학기술 연구개발(RD)을 담당하는 관리직 가운데 여성 비율이 10%에 불과하다. 주변에서 여성 과학자를 만날 기회는 드물다.고분자 화학 분야의 세계적인 연구자인 박문정 교수와 약속을 잡기는 쉽지 않았다. 미국 출장과 국내 여러 학회 일정 사이에 찾아간 연구실은 여성 과학자의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교수님들은 방학에 주로 뭘 하며 보내나.△포스텍은 연구중심대학이라 강의 시수가 적다. 한 학기에 보통 한 과목 반을 가르친다. 한 과목이라 하면, 한 시간 반 수업을 주 3회 한다. 강의만 빠진 거지, 학기와 다른 것이 없다. 오히려 각종 학회 일정이 몰려 더 바쁘다.-연구실 한 벽을 가득채운 아이의 사진이 인상적이다.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나.△오전 8시에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을 등교시키고 바로 출근한다. 중간에 학원을 태워주고 연구실에 데려와 저녁도 먹인다. 밤 10시까지 같이 있다가 퇴근한다. 코로나 이후 수업이나 회의가 화상으로 대체되면서 아이를 돌봐주시던 부모님이 본가로 가셨다. 처음에는 화상회의만 하면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해서 애를 먹었지만 지금은 혼자 만화책을 읽는다. 주말부부라 평일 육아는 내가 전담한다. -여성과학자의 현실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화학공학을 전공한 화학과 교수면서 미국물리학회의 ‘딜런 메달’을 한국인 최초로 받았다. 연구하는 분야가 정확히 무엇인가.△화학과의 화학공학과는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다르다. 화학은 물질의 구조와 변화를 다룬다면 화학공학은 제품개발까지 연결된다. 화공을 전공하고 화학과에 임용된 것은 운이 좋은 경우다. 나는 화학의 여러 분야 가운데 고분자화학을 연구한다. 물질의 특수한 성질을 결정짓는 가장 작은 단위가 분자이다. 고분자(高分子, high polymer)는 분자량이 크다는 의미다. 분자 하나는 쉽게 휘발되지만 고분자는 그렇지 않아 다양하게 사용된다. 플라스틱을 비롯해 생활용품 대부분이다. 쓰임새에 따라 고분자를 합성하는 연구가 고분자 화학이다. 화학 가운데서도 물리학에 가까운 물리화학을 한다. 딜런 메달은 젊은 고분자 물리화학자에게 주는 상이다.-대표적인 연구는 배터리와 인공근육으로 알려져 있다.△내 연구의 핵심은 고분자 전해질이다. 고분자 전해질이란 유동성이 없는 고체인 고분자가 이온을 잘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물질이다. 연료전지에서는 수소이온을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게, 리튬전지에서는 온도 변화에도 리튬을 안정적으로 전달할 수 있게, 인공근육에서는 미세한 동작을 잘 구현할 수 있게 고분자를 합성하는 연구를 한다.-수소차 연료전지로 시작해 전기자동차의 리튬전지 연구로 이어졌다.△미국에서 박사 후 과정을 할 때 수소연료전지 전해질을 연구했다. 국내 들어와 보니 수소연료전지로는 연구비를 받을 수 없었다. 국내 에너지정책은 정치성이 강한 탓이다. 당시 주목받던 리튬전지로 전환했고 지금까지 오게 됐다. 수소연료전지든 리튬전지든 이온이 흐르는 원리는 같다.-리튬전지의 어떤 부분을 연구하나.△전기 자동차와 스마트폰의 핵심 부품인 리튬전지는 폭발의 위험성이 있다. 리튬전지의 액체 전해질 대신 고분자 전해질을 사용하면 폭발 위험을 낮추지만 충전 속도가 느려지는 것이 문제다. 나는 이런 현상을 나노 구조체 합성을 통해 해결했다. 이온이 지나가는 통로의 폭을 좁혀 이온이 흩어지지 않도록 효율을 높인 것이다. 샤워 헤드의 물줄기를 세게 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세계 최초로 전해질 나노 구조체를 생산했고, 현재까지 이 일을 하는 연구자는 나밖에 없다. 엄청난 노하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일반에는 인공근육 연구자로 더 알려져 있다. 이전 인공근육 연구와 어떤 차이가 있나.△하버드대에서 뇌졸중 환자의 보행을 돕는 ‘엑소슈트(Exosuits)’를 개발해 주목받은 적이 있다. 운동능력의 3,40%을 향상시켜주는 일종의 입는 로봇으로, 아이언맨 슈트가 스파이더맨 슈트로 진화한 것이다. 우리 연구와 하버드의 가장 큰 차이는 전력이다. 하버드에서 만든 슈트는 가정용 전압 200볼트를 지속적으로 공급해야한다. 우리는 1.5볼트 전지 하나면 되도록 했다. 스스로 움직이는 식충식물인 파리지옥처럼 전력이 없어도 작동하는 인공근육도 개발했다. -제품으로 나와 있나.△인공근육 기반의 의료용 기구가 나와 있지만 시장이 크지 않다. 현재는 게임용 ‘햅틱 글러브(Haptic Glove, 촉각 장갑)’를 개발 중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장갑을 끼고 게임을 하면 터치 유무만 인식되지만, 가상현실(VR)이나 증강현실(AR) 게임이 실감나려면 속도와 세기까지 더 세밀해야한다. 라텍스 장갑처럼 얇고 가벼운 장치에 인공근육을 연결해 세밀한 조작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인공근육 아이디어는 파리지옥에서 얻었고, 얼음이나 커피나무를 이용한 연구도 주목받았다. 아이디어는 어디서 가져오나.△다른 분야 세미나를 굉장히 열심히 듣는다. 타 분야 연구를 듣다보면 내 분야와 접점이 보인다. 고분자의 합성에 얼음을 활용한 아이디어는 환경공학자의 논문 발표회장에서 나왔다.-되겠다 싶어 시도했는데 실패한 경우도 있나.△커피나무에 있는 카페인산을 이용해 고속 충전되는 리튬 전지를 개발했다. 수없이 많은 분자들을 들여다본 결과이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수백만의 천연 화합물 가운데 원하는 분자구조를 찾는 일은 결국 시간 싸움이다. 시도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전혀 전지 성능이 안 나오는 경우도 있다. 실패가 비일비재하다. 결국 해봐야 안다. 우리가 하는 실험 대부분이 후보군을 찾아 테스트를 하는 것이다. 후보군을 좁혀가며 심도 깊게 테스트를 반복해서 단 하나를 얻는다.-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어느 분야까지 관심을 가져봤는지.△인공근육 연구를 하면서 환자들의 심리를 공부했다. 인공근육이 드러날 때와 감춰질 때 환자의 심리 상태에 차이가 있다. 몸이 아프면 심리적으로 위축되기 쉬워, 치료과정의 세심한 배려들이 회복속도와 연관된다. 내가 하는 연구와 관련 있는 강연은 열심히 찾아듣는다.예술가가 영감을 받듯 주변에서 연구 아이디어를 얻고 다른 분야를 경청하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온 박문정 교수.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아시아인 최초로 국제순정응용화학연합(IUPAC)의 ‘젊은 과학자상’을 수상했고, 미국물리학회의 ‘딜런 메달’을 수상한 최초의 한국인이며, 고분자 화학분야 국제저널 편집위원이 된 것도 한국인으로는 처음이다. 한 번 마음먹은 것은 포기하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가는 확고함과 집념의 이 과학자는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을까.△또래들 중에 돌 사진이 없는 몇 안 되는 아이였다. 남아선호사상이 남아있던 때라 유치원도 오빠만 다녔는데 그렇게 부러웠다. 산수를 유난히 좋아했다. 네다섯 살 무렵, 옆집 살던 동갑내기와 대결을 하면서 세 자릿수 곱하기 두 자릿수를 익혔다. 친구에게 지고 밤새 울면서 연습했고 다음 날 결국 둘 다 백점을 맞았다. 초중학교에서는 반장을 도맡았는데 수학시험 0점을 맞은 친구를 집에 데리고 와서 가르쳤다. 중학생 때는 유기정학 당한 친구의 공부를 도와 성적을 엄청 올리기도 했다.-방황했던 기억은 없나.△늘 1등만 하다 경기과학고에 가니 성적은 실망스러웠고 기숙사 생활은 적응이 안됐다.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 팬이었는데 이들이 출연하는 방송을 보려고 학교 담을 자주 넘었다. 단골 치킨가게에서 감자튀김 하나 시켜놓고 텔레비전을 보고 PC통신 천리안에 글을 올렸다. 워낙 자주 가니 사장님도 그러려니 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기숙사 사감한테 한 번도 안 걸렸다.-미국에서 박사 후 과정을 마치고 포항에서 자리 잡게 된 계기는.△포스텍은 연구중심대학으로 연구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박사 후 연구원으로 있던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 가속기가 있었는데 거의 살다시피 했다. 가속기 때문에 포항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한국에는 없는 전자현미경 실험을 하러 미국까지 다녀오곤 했는데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연구시설이 가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질 높은 연구 성과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분자 화학 분야에선 이미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이공계는 여성이 소수다보니 편견이 여전하다. 여자 교수는 육아하느라 연구에 집중하지 않고 승진을 다하면 느슨해진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편견은 깨질 수도 혹은 굳힐 수도 있다.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이 분야에서 연구를 제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다. 하던 대로 하자. 그것이 나의 계획이다.박문정 교수는서울대학교에서 학사, 석사, 박사를 받고 미국 로렌스버클리연구소에서 박사 후 연구원을 했다. 현재 포스텍 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생활용품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고분자를 배터리나 의료기기와 접목해 활용도를 높이는 연구를 한다. 여성과학기술자상(2015), 미래창조과학부가 수여하는 젊은 과학자상(2016), 국제순정응용화학연합(IUPAC)의 젊은 과학자상(2016) 수상에 이어 한국인 최초로 ‘딜런 메달(John H. Dillon Medal)’을 받았다. 미국 물리학회에서 박사학위 이후 12년 내의 젊은 과학자에게 수상하는 메달이다. 현재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화학회지 ‘매크로몰리큘러스(Macromolecules)’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배은정 1974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학과 졸업. TBC·포항MBC·경북교통방송 작가. ‘포항문화의 상징과 공간’ 공저/배은정 작가

2022-08-08

“행복을 음미할 줄 알려면 인문학 공부가 필요하다”

한 분야에 평생을 몸담은 이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철학서다. 인생의 벽 앞에 먼저 부닥쳐본 누군가의 경험담만큼 실속 있는 지혜는 없다. 앞에 놓인 갈림길을 동시에 갈 수 없지만 다른 길을 선택한 이들의 이야기는 통섭의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어느 시구처럼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며, 타인의 삶을 경청하는 것은 또 다른 우주와 조우하는 일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공동체의 희망은 잘 듣는 힘에 있다. 마음을 다해 듣고 쓰겠다. 편견 없이 질문하고, 귀 기울여 공감하며, 왜곡 없이 쓰는 겸손한 기록자가 되겠다. 한국인의 행복수준은 경제력이나 복지수준에 훨씬 못 미친다. 올해 유엔 세계행복 보고서가 발표한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146개국 가운데 59위로 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다. 심지어 전 세대에서 행복도보다 불행도가 높게 나타난 설문조사도 있었다. 코로나19와 장기화된 경기침체로 삶의 질은 더 나빠졌다.행복보다 불행을 더 가까이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 여기 행복을 찾아 길벗하자는 인문학자가 있다. 포항에서 인문학 공동체 ‘열린행복아카데미’를 개설해 14년째 운영해오고 있는 박희택 원장이다. 정치학을 전공한 그는 불교시민사회운동에 몸담았으며, 수녀들이 운영하는 복지시설 마리아의 집 운영위원장을 역임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행복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지만 정작 행복하다는 사람은 드물다.△“사람들은 불행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면서도 불행의 원인들을 향해 달려가고, 행복을 바라면서도 무지하기 때문에 행복의 원인들을 원수처럼 물리친다”는 말이 있다. 행복하고 싶으면 이미 주어진 행복의 원인들을 음미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인문학 공부가 필요하다.-‘열린행복아카데미’가 그런 곳인가.△‘열린행복’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행복이며, 풍성하게 열매 맺는 행복을 의미한다. 2009년 8월부터 길벗들과 인문고전을 읽으면서 시작됐다. 우리 시대의 3대 위기를 생태, 인성, 빈부로 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생명공경, 인문공부, 복지이타(福祉利他)의 실천을 추구한다. 독서클럽, 인문학당, 사회복지회 등을 부설기관으로 두고 있다.-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공부하는 이유가 있나.△혼자 읽어서 도달할 수 없는 지혜를 같이 읽으면 도달할 수 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사회적 촉진’ 현상이다. 한 독서운동가의 말처럼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고 혼자 읽다 보면 내 수준에 지식을 가두게 된다. 종종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책에 나온 대로 바뀌길 강요하게 되는 이유다. 소속감과 친밀감이 넘치는 공부모임을 경험하는 일 또한 의미가 크다.-생명공경과 인문공부와 복지이타를 설파하지만 알고 보니 정치학을 전공했더라. 현실정치는 불신과 혐오의 대상이 된지 오래인데.△정치학은 공동체의 행복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윤리학은 개인의 행복을, 정치학은 공동체의 행복을 추구한다. 그래서 윤리학을 정치학의 입문이라 한다. 아버지의 영향인지 공동체의 행복에 관심이 많았다. 어릴 적 우리 집 사랑방은 밤마다 북적거렸다. 담배연기가 자욱하도록 시국담론이 이어졌고 나는 어른들 틈에서 귀 기울여 들었다. 우리 집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신문을 받아봤다. 아버지는 인근 마을을 아울러 관혼상제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나라 돌아가는 일에 늘 관심이 많은 향촌 지식인이었다. 그런 영향으로 정치학에 관심을 가졌고, 특히 동양정치사상에 매료되어 문사철(文史哲)을 두루 공부했다. 박희택 ‘열린행복아카데미’ 원장 -대학에서는 복지학을 가르쳤고 유교와 불교, 노장사상에 관한 강의도 한다. 이렇게나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이도 드물 듯하다.△복지학은 행복학이다. 박사논문에서 신라의 삼국통일 기반이 불교에 기초한 복지정책임을 규명했다. 역사적 복지정치학을 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고전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해 정치학과 복지학을 거쳐 다시 인문학으로 귀결됐다. 인문학은 인간 본연의 길을 모색하는 학문이니, 다른 길을 걸어온 것처럼 보여도 늘 인문의 맥락 위에 있었다.-어릴 적에 어떻게 고전을 접했나.△60년대 문교부가 고전읽기대회를 전국적으로 개최했다. 시골학교에서 공부 좀 하는 아이들이 학교 명예를 걸고 출전했다. 문교정책으로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게 한 아주 전향적인 정책이었다.부모님 옆에서 밭일을 거들며 ‘박씨부인전’이나 ‘삼국유사’를 얘길 해드리면 크게 흐뭇해하셨다. 고향이 경남 창원군 대산면인데, 고전읽기 군 대회에서 성과를 얻고 도 대회까지 출전했다. 선생님 댁에서 합숙까지 했었다. 일찍부터 고전을 접해선지 군대에선 내무반에 뒹굴던 ‘노자’와 ‘맹자’를 반복해서 읽었다.- 경주, 포항과는 어떻게 인연이 됐나.△ 80년대부터 불교시민사회운동에 참여했고, 민족자주통일불교운동협의회, 전국불교운동연합, 참여불교재가연대, 종교평화위원회 등에서 크고 작은 역할을 하다가 불교 종립대학인 위덕대학교 개교(1996) 준비과정에 참여했다. 문교부장관을 지낸 손제석 초대 총장을 도와 대학 아이덴티티 작업을 하고 기획업무를 초기에 7년간 맡았다.박 원장은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고 했다. 스스로 내세우길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를 빛내길 잘 하는 사람이 있다. 박 원장은 분명 후자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포항에서 전쟁고아와 사회적 약자들을 돌본 거인 남대영 신부의 자취를 정리하고, 조선시대에 여중(女中)군자로 불린 장계향의 사상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했다.-남대영 루이 델랑드 신부에 관한 학계의 사실상 첫 논문 저술자라고.△본심(本心)에 바탕하여 인연이 성숙되었다. 경주에 내려와서 줄곧 인근 포항에 있는 큰 공동체인 사회복지법인 성모자애원에 관심이 갔다. 그러던 차에 사회복지학부에 수녀 두 분이 편입했다. 설립자 남 신부님에 대한 학문적인 접근이 거의 안 된 상태여서, 자료를 요청하고 목록을 작성해서 연구에 들어갔다. 2012년에 신부님에 관한 첫 논문을 발표했다. 지역사회에 반향을 일으켜 이듬해 ‘포항을 빛낸 인물’로 남대영 신부가 선정되는 계기가 됐다.-가톨릭 신부이기에 일반 시민들은 종교지도자로 범주화하지만, 한국 사회복지 역사로 보면 ‘남대영복지’라는 개념이 있을 정도로 선구적 인물이라고.△남대영 신부(1895~1972)는 한국의 주요 수도회인 예수성심시녀회와 성모자애원을 설립한 한국 사회복지의 선구자이다. 한국전쟁기에 포항 송정리에서 800여 명의 전쟁고아와 사회적 약자들을 보살폈다. 당시에는 한국 최대 규모의 복지시설이었다. 1968년 포항제철에 자리를 내어주고 현재의 대잠동으로 이주할 당시 건물이 무려 35채가 넘었다. 신부님은 생의 마지막까지 헌신하다 포항에 묻혔지만 조명이 덜 되어 안타깝다.-수녀님들과 유럽으로 성지순례도 다녀왔다고 들었다.△2013년 수녀님들의 성지순례에 연구자로 포함시켜 주셨다. 수녀님 12명에 남자는 ‘아름다운 사람 루이델랑드’를 쓴 안병호 작가와 나뿐이었다. 남 신부의 고향인 프랑스 노르망디 빠리니와 성모발현지들, 이탈리아 가톨릭 성지를 12일간 순례했다. 시녀회 총원(대구)에 건립된 남대영기념관에 가면 빠리니홀이 있는데 그 이름도 내가 제안했는데 수도회에서 받아줬다.-장계향학의 대표학자로도 불린다. 어떻게 연구하게 됐나.△장계향(1598~1680)은 여중군자로 불린 유일한 인물이다. 경북도는 경북여성인물 선양 제1호로 장계향을 선정했지만 초기에는 교육프로그램 정도만 운영했다. 2010년 경북여성정책개발원 객원연구위원으로서 참여해 장계향의 삶과 정신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데 나섰다.-한글로 된 최초의 요리서인 ‘음식디미방’의 저술 이외에도 업적이 많은가.△공자의 군자불기(君子不器) 즉 군자는 한 가지 덕성만 갖춘 사람이 아니라는 말에 꼭 부합되는 인물이 장계향이다. 현모양처는 물론이고, 퇴계학파의 학맥을 잇게 한 교육자이며, 시서화(詩書畵)에도 능했다. 조선 중기 전란기에는 도토리죽을 끓여 구휼에 나선 사회사업가였다. 중용 사상가와 조리 과학자의 면모도 있다. 경북 영양의 아름다운 두들마을과 수비지역을 문화적으로 개척한 중심도 장계향이다. 장계향학을 집대성한 세 권의 총서를 기획했고, 두들마을에 있는 장계향 추모공간의 명칭을 짓는데도 역할을 해서 보람됐다. 영남대학교가 개설한 한국여성리더십학과에서도 장계향학을 강의했다.- 뭘 하나 파고들면 끝을 보는 편인데, 더 조명하고 싶은 인물이 있나.△근래에는 영성 대가 헨리 나우웬의 저서를 촘촘히 읽고 있다. 지금까지 연구한 포항의 거인 남대영과 여중군자 장계향, 그리고 현대 한국밀교 중흥조인 회당 손규상(1902~1963)을 ‘내가 만난 행복리더’라는 이름으로 한 권에 묶는 작업을 하고 싶다. 학문적으로 성취하고 싶은 바는 유불도기(儒佛道基)를 아우르는 회통(會通)인문학의 성과를 내는 것이다. 종교는 이념의 궁극이라 양보가 없다. 회통하고 대화해야 갈등이 사라지고 평화가 온다. 종교를 잘못 믿으면 자칫 허위와 환상에 빠지기 쉬운데, 이를 인문정신으로 초극(超克)하는 길을 밝히고 싶다.-인터뷰 내내 생각거리들을 던져줘서 드넓은 인문의 세계를 여행한 느낌이다. 꿈꾸는 인문 공동체는 어떤 모습인가.△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남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나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군자보살’이라고 칭하곤 하는데, 군자보살은 스스로 행복하고 남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을 말한다. 인류가 축적해온 지혜를 통해 오류를 줄이면서 행복해지는 공부가 인문학이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공부한 바를 현장으로 연결시켜야 한다. 내년에는 독서와 강의를 결합한 ‘열린행복독서대학’을 열 계획이다. 함께해온 길벗들이 강사로 참여해 그동안 쌓은 인문소양을 나눌 것이다. 길벗들 가운데 각 분야 전문가가 많다.박희택 원장은한양대학교에서 정치학을 배우고 서울대학교에서 정치학박사를 받았다. 위덕대학교 사회복지학부 교수와 사회복지대학원 원장을 지내면서 복지정치론과 사회복지정책론 등을 가르쳤다. 불교아카데미 원장, 성모자애원 이사, 포항환경운동연합 상임의장, 장계향아카데미 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회복지법인 우리공동체 대표이사이다. 2009년부터 ‘열린행복아카데미’를 설립해 길벗들과 ‘생명공경·인문공부·복지이타’의 길을 걸으면서, 강독과 강연, 칼럼과 방송을 통해 대중들에게 인문향기를 전하고 있다. 배은정1974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학과 졸업. TBC·포항MBC·경북교통방송 작가. ‘포항문화의 상징과 공간’ 공저/배은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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