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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타임 놓친 트라우마 기한 없이 반복… 완치 위한 치료를”

등록일 2022-08-15 19:57 게재일 2022-08-16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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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작가가 만난 ‘이 한 사람’<br/>김상호 대구한의대 부속포항한방병원 한방신경정신과 교수
김상호 대구한의대 부속포항한방병원 한방신경정신과 교수
김상호대구한의대 부속포항한방병원 한방신경정신과 교수

트라우마에도 골든타임이 있다. 학계에 따르면 재난에 대한 심리적 반응은 3단계로 나타난다. 망연자실하며 일주일을 보낸 뒤에 불안과 우울, 두려움과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며,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3개월을 넘기면 만성기로 들어간다. 완치기회를 놓친 트라우마는 기한 없이 반복된다. 포항 지진 1년 후에 실시한 시민의식조사에서 트라우마 고위험군은 40%가 넘었다. 지진 3년 후에도 비슷한 수치였다.

포항에서 지진 트라우마 환자를 연구한 김상호 교수는 ‘재난 트라우마의 한의사 진료 매뉴얼’을 최초로 개발했다. 인적·물적 의료자원이 제한적인 대규모 재난상황에서 즉각적인 심리지원이 가능하도록 한 한의학적 의료 지원 안내서이다.

 

‘재난 트라우마의 한의사 진료 매뉴얼’ 최초 개발

지진 등 대규모 재난 발생땐 빠른 심리상담 지원

침 치료 등 호흡·명상기법 활용 마음의 상처 치유

‘뮤지컬 하는 한의사’로 5년째 포항시민연극단 활동

26일 시청서 ‘나의 꿈’ 공연 앞둬… 맹활약중이라고

역할극 등 진료에 적용, 심리 치료 효과에도 도움 돼

 

-재난 트라우마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2017년 11월 포항에서 지진이 발생하고 병원에서 단체 의료지원을 나갔다. 그리고는 1년 넘게 잊고 지냈는데 연구재단의 지원과제를 준비하다 이재민들이 여전히 텐트에서 생활하며 트라우마를 겪는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를 계기로 재난 트라우마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했다. 진료팀을 꾸려 흥해 보건지소 재난심리지원센터의 협조 하에 이재민을 대상으로 의료지원활동을 펼치며 진료 매뉴얼을 개발했다.

 

-트라우마 치료는 어떻게 하나.

△현재의 재난심리지원은 심리적 중재가 주로 활용된다. 재난의학에서는 피해자를 생존자라고 하는데, 그들은 심리적 증상뿐만 아니라 불면과 어지럼증, 두통, 피로 등 다양한 신체증상을 호소한다. 한의에서는 침 치료와 더불어 호흡이나 명상을 함께하는 심신(心身)중재 방식을 활용한다. 해외에서는 귀에 놓는 이침(耳針, Ear Acupuncture)을 활용해서 재난 구호 활동을 펼친 사례가 많다. ‘경혈 자극을 통한 감정자유기법’과 호흡이나 명상 같은 안정화기법도 사용한다.

 

-트라우마 치료에 이침을 주로 사용하는 이유는.

△침 치료는 기본적으로는 이완 효과가 있다. 귀는 자율신경계 중에도 미주신경과 연결되어 이침은 불안이나 불면 치료에 효과적이다. 원래 이침은 미국에서 마약 중독 환자들의 금단증상에 사용됐다. 9.11테러를 계기로 재난 트라우마 치료에 본격적으로 활용됐으며,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덮친 대규모 참사 현장에도 쓰였다.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국경없는 침술사회’라는 민간단체도 존재한다. 한의사가 없는 일본에서는 침이나 마시지, 한약을 의사들이 활용한다.

김상호 교수의 연극무대에서 가족 사진.
김상호 교수의 연극무대에서 가족 사진.

-재난 현장에 적용 가능한 최초의 한의진료지원 매뉴얼이라고.

△사실은 세월호 이후에 이뤄졌어야하는 작업이다. 세월호 사건 당시 진도에서의 한의사협회 의료지원 활동을 기록한 논문이 나왔지만 매뉴얼 작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번에 개발한 ‘재난 트라우마의 한의사 진료 매뉴얼’은 재난현장에서의 한의진료지침을 제시하고, 검사방법을 표준화했으며, 단계별 대처방법과 증상별 진료 프로토콜을 정리했다. 30명 가까운 검토위원과 자문위원의 도움을 받았다.

 

-재난 현장에서의 한방 진료 매뉴얼이 해외에는 있나.

△최근 이 매뉴얼을 소개하는 논문을 투고해 국제 학술지 JICM(Journal of Integrative and Complementary Medicine)의 게재가 확정됐다. 재난 현장에서 전통의학을 체계적으로 활용한 좋은 사례라고 평가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1차 의료 현장에서 전통의학 활용을 권고한다. 1차 의료나 공공의료 강화를 위해 그 나라가 가진 문화적 특성을 고려하고, 의료인적자원을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공공 보건 의료에 한의사가 배제되어 있다.

 

-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나.

△의료지원 첫날, 대피소 밖에 나와 기다리던 70대 할머니다. 지금도 내원해서 진료를 받는다. 여전히 텔레비전이 거꾸러지고 세면대가 박살난 그날 경험을 생생하게 떠올리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 악몽에 시달린다. 할머니 댁에서 예전 사진을 봤는데, 지진을 겪으면서 몰라보게 나이든 모습이었다.

마음이 힘든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생각만 해도 고된 일이다. 환자의 마음 한 부분을 꺼내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마다 진을 빼는 일일 것이다. 환자들의 힘든 얘기를 듣다보면 고된 마음이 전염되지는 않을까. 스스로를 듣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김상호 교수는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돌보고자 선택한 일이며, 마음에 상처를 많이 입는 시대인 만큼 본인만의 특급 처방전 하나씩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의학을 그것도 신경정신 분야를 선택한 계기는.

△고등학교 때는 공과대학을 목표로 공부했다. 학교 대표로 포항공대 캠프에 참여하기도 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IMF 외환위기가 터졌는데 위기 조짐을 읽은 아버지가 한의대 진학을 권유했다. 학습량이 많아 버거울 때도 있었지만 공부가 잘 맞아 감사하게 생각한다. 한의대에서 봉사활동을 같이했던 선배가 자신만의 분야를 가지라며 서너 과를 추천했는데, 마음치유에 관심도 있고, 개인적으로 불안이나 긴장 같은 내면적인 어려움을 겪었기에 신경정신과를 선택했다.

 

-불안이나 긴장감이 높은 편인가.

△학창시절에는 공부도 운동도 노는 것도 뭐든 잘 하고 싶었다. 되돌아보면 부모님의 인정이나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민감했던 것 같다. 남들 보기에는 모범생이지만 사람에 대한 불안 수준이 높고 낯가림이 심했다. 출석을 부르면 순서가 되기 전부터 긴장하는 학생이었다.

 

-마음을 들어주는 일이 힘들지는 않나. 어디에다 털어놓는 편인가.

△힘든 마음을 듣는 일이 쉽지 않지만, 나는 듣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해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직업적 사명감이 있다. 물론 오래 듣다보면 집중이 안 되고 용량의 한계를 느낀다. 학창시절부터 그런 스트레스를 운동으로 풀었다. 운동을 하면 두통이나 스트레스가 개선되는 걸 중학생 때 깨달았고, 달리기며 축구, 농구를 가리지 않고 했다. 코로나19 전에는 마라톤을 했고 요즘은 바다수영에 빠져있다. 수영에 나름 자부심이 강했는데 바다에서 겸손해졌다. 포항시민연극단 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이래봬도 무대에 다섯 차례나 오른 뮤지컬 배우이다.

 

-뮤지컬 하는 한의사라니 독특하다. 어떻게 시작했나.

△아이와 아내가 먼저 시작했고, 남자배우가 필요하다는 꼬드김에 넘어가 5년째 하고 있다. 포항문화재단 소속의 포항시민연극단에는 10대부터 70대까지 30여명이 활동한다. 70대 최고령 단원이 대본을 가장 먼저 외우고, 드로잉이 취미인 아내가 팸플릿의 그림 도안을 도맡아 한다.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아 현재 맹연습중이다. 오는 26일, 포항시청 대잠홀에서 열리는 ‘나의 꿈’이라는 뮤지컬이다.

김상호 교수가 바다수영을 하는 모습.
김상호 교수가 바다수영을 하는 모습.

-가족 전체가 연극에 푹 빠져 사는 것 같다. 연극 경험이 진료에도 도움이 되나.

△불안과 불면을 겪는 취업준비생이 어머니와 내원한 적이 있다. 상담을 해보니 따돌림이나 학대당한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힘들어하고 있었고, 즉석에서 역할극을 제안했다. 첫 만남이었지만 바로 해야겠다 싶었다. 모녀는 상대의 입장에서 대화하며 속마음을 털어놓았고, 환자가 지금 너무 행복하다고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역할극의 치료효과는 뭔가.

△대부분의 고통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온다. 고통은 주관적인 감정이므로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필요하지만 쉽지 않다. 역할극은 자신의 고통을 한 발자국 떨어져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환자들에게 취미활동을 권하기도 하나.

△환자마다 가지고 있는 정신건강의 자원이 다르다. 내가 해보니 좋더라고 무작정 권하지는 않는다. 일단 반드시 처방하는 것은 걷기다. 정신과 환자 대부분은 활동량이 떨어진다. 버겁지 않는 선에서 활동량을 늘려가며 생활리듬을 정상화하고 몸의 에너지를 얻도록 한다.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는 오전 걷기를, 이완을 위해서는 저녁 걷기를 처방한다. 예전에 즐겼던 취미생활을 다시 해보는 것도 좋다.

 

- 후학 양성을 위해서도 힘쓰고 계신다.

△공중보건의로 복무를 마치고 한방병원에 근무하며 선배의 추천으로 한의대에서 강의할 기회가 있었다. 학생들과 늦게까지 토론하며 교감하는 일이 가슴 뛸 정도로 즐거웠다. 진료도 하고 학생도 만났으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하다, 대학 은사의 추천으로 포항에 왔다. 고등학생 때 참가했던 포항공대 캠프 이후 두 번째로 온 포항에서 지금껏 살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대구한의대에서 학생들을 만난다.

 

-진료와 연구, 강의로 바쁜 나날들인데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시민들의 아픈 마음을 보듬는 일을 계속하면서 환자와의 에피소드를 기록해두고 싶다. 진행 중인 재난 트라우마와 우울증 연구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고, 연구자로도 계속 성장하고 싶다. 포항에 살아서 감사한 일이 많다. 바다수영을 꾸준히 하고 기회가 되면 다이빙도 배울 예정이다. 오래도록 아내와 연극무대에 오를 것이며, 무엇보다 서로 사랑하는 가정이 되도록 노력하고 싶다.

 

김상호 교수는

 

경희대 한의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학교한방병원 한방신경정신과에서 일반·전문수련의 과정을 마쳤다. 공중보건의로 복무를 마쳤는데 첫 근무지인 흑산도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경기도 수원에 있는 한방병원에서 근무하며 상지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지도교수의 추천을 계기로 대구한의대학교 부속 포항한방병원에 내려와 현재 교수로 재직하며 한방신경정신과학회 교육이사, 대한한방병원 중앙수련교육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포항지진을 계기로 재난 트라우마를 연구하고 ‘재난 트라우마의 한의사 진료 매뉴얼’을 개발했다. 사진 촬영과 마라톤, 바다 수영을 수준급으로 즐기며 포항시민연극단에서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배은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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