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는 지역민의 뿌리이자 거울이다. 지역민의 역사 알기는 지역의 정체성 찾기이며 이러한 정체성을 가진 위에서야 지역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환경은 발전할 수 있다. 포항 지역사 연구가 생소하던 시절. 황인 선생은 지역사 연구의 선구적 길을 걸어왔다.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지역사의 현장을 발굴하고 해석하는 일에 힘을 쏟았으며 문화재 보존에도 앞장서 왔다. 역사에 대한 전문성과 사명감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교직에서 정년퇴임하고도 활발하게 활동해 온 선생을 동해면 도구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작년 녹내장 수술을 한 탓에 건강이 예전 같지 않다면서도 남다른 기억력과 넘치는 열정으로 인터뷰는 한나절 남짓 이어졌다.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지역사의 현장을 발굴하고 해석하는 일에 힘 쏟아와
황보인의 비석 찾으러 가던 길에 돌무더기 헤집어 보다 마제석검 손잡이 발견
바닷가 산책하다 흥선대원군 친형 흥인군 공덕비 발견… 장기 목장성 존재 밝혀
“역사는 사견 들어가도 부풀리거나 폄하해서도 안 돼죠… 꾸미지 말고 기록해야”
-포항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1977년 동해중학교에 역사 교사로 부임하면서부터다. 수업에 들어가 보니, 희귀 성씨인 ‘황보’ 성이 한 반에도 여럿이었다. 계유정난(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킨 난) 당시 영의정이던 황보인의 집성촌이 학교와 가까운 구룡포읍 성동 3리였다. 황보인의 비석을 찾으러 가던 길에 심상치 않은 큰돌을 발견했다. 밭일하던 노인이 잔돌을 골라내어 큰돌 주변에 모으며 구시렁댔다. 돌무더기를 헤집어보니 파손된 마제석검 손잡이가 있었다. 당시 지역 방송 기자였던 박이득 전 포항예총 회장에게 제보했고, 포항 공당리 고인돌이 전국으로 전파를 타며 특종으로 다뤄졌다.
-포항의 고인돌은 기계면에 많지 않나.
△기계면에 대규모로 분포하지만 구룡포와 동해, 흥해 등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4~5년 돌아다니며 정리한 고인돌 보고서를 문교부(1990년 교육부로 개칭)에 올렸더니 모 대학 고대사 교수가 대학원생 3명과 찾아왔다. 포항시 기계면 일대에 고인돌 수십 기가 있고 형산강 건너쪽은 발견되지 않는다고 문교부에 보고하니, 내 보고서를 내밀더라는 것이다. 그때가 80년도 즈음으로 기억한다. 문교부에 보낸 글은 남아있지 않고, 1999년 ‘영일군사’에 관련 내용을 실었다.
-포항에 산재한 고인돌은 어떻게 해석되나.
△청동기 고인돌 사회는 평등사회에서 계급사회로 발전되는 과정이다. 수장이 거느린 인원을 계산하면 포항에 선사문화가 발달했음을 알려준다. 날씨가 따뜻해 살기 좋고 먹거리가 풍부하며, 동해와 형산강이 외부의 침입을 막았던 덕이다. 포항에는 500여 기가 넘는 고인돌이 있었지만 무관심과 개발로 훼손되고 300여 기가 남았다. 포항에서 발견되는 선사유적으로 암각화와 선돌(立石)도 있다. 선돌은 청동기시대 부족 간의 경계를 표시하거나 어떤 특별한 사건을 기념해 세웠다. 동해면 신정리에 있는 ‘할배 짝짓돌’과, 도구리의 ‘할매 짝짓돌’에 대한 것은 박일천 초대 민선시장이 집필한 ‘일월향지’에 실려있다. ‘할매 짝짓돌’은 동해초등학교에 있었지만 ‘할배 짝짓돌’을 찾지 못하다가 신정 1리 마을 앞 수로 공사로 발견됐다. 청년회에서 경로잔치를 하면서 마을에 세워 지금까지 수호신으로 보존된다. 포항에 현재 남은 선돌은 5개이다.
-선사문화가 발달했던 포항의 고대사회는 어땠나.
△포항 지역은 청동기 이래 고대 소국이 발전되다 신라에 병합된다. 경주 지역에 강력한 고대국가가 발달한 배경에는 포항의 풍족한 선사문화가 한몫했다고 여겨진다. 신라 왕경 주변의 풍성한 수확물이 신라 지배층을 뒷받침한 것이다. 포항의 고대사회는 청하와 신광, 흥해에 산재한 삼국시대 고분을 통해 확인된다. 주인이 확실한 무덤은 없고 도굴이 심한 상태지만, 영일만과 형산강을 경계로 남북이 뚜렷이 구분된다. 북방적인 문화 요소와 남쪽에서 올라온 가야적인 요소가 수용되는 길목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고구려 장수왕은 청하 고현까지 남하했으므로, 신광 냉수리 고분군에서는 고구려 양식이 나타난다. 청하에는 고구려 군사가 철새처럼 되돌아가길 기원하는 ‘회학지(回鶴池)’와 고구려군이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는 ‘도끼재’가 있다.
-고려시대 인물인 배천희 국사의 행적을 발견하게 된 과정은.
△고려시대 포항에는 1군(흥해)과 5현(연일, 청하, 신광, 기계, 장기)이 있었다. 흥해가 군으로 승격된 건 배천희 국사의 고향이라서다. 흥해읍 행정복지센터 뒤에 ‘순국반공 위령탑’을 탁본하러 갔다가 알게 된 사실이다. 위령탑의 글씨를 쓴 해공 신익희는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과 대한민국 국회의장을 지낸 대단한 명필가이다. 탁본을 하고 들른 중국집에서 노인 한 분이 조상 중에 대단한 스님이 있다고 했다. 무덤은 흥해에 있고, 비석은 수원 광교산 창성지에 있다며 족보까지 펼쳐 보였다. 고려말 고승인 진각국사 배천희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머리가 쭈뼛 섰다. 화엄종계의 승려로는 유일하게 국사가 된 인물이다. 왕명에 따라 목은 이색이 짓고 승려 혜잠이 새긴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명(眞覺國師 大覺圓照塔碑銘)’은 보물 제14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마침 탁본 전시를 앞두고 있었는데 반드시 떠서 전시장에 걸고 싶어 수원으로 갔다. 막상 가보니 비석은 수원성으로 이전됐고 탁본은 정부 승인 없인 안 된단다. 탁본은 해야겠고 별 수가 있나. 나흘 동안 시청으로 출근하니 단 한 장을 조건으로 허락이 떨어졌다. 탁본하던 날 함박눈이 내렸는데도 글씨가 하나도 안 번졌다.
-포항에 남은 진각국사의 유적은 어떤 것이 있나.
△진각국사의 고향인 흥해 양백리 백산에 무덤과 유허비가 있다. 길이 험해서 한참을 헤매다 찾았는데 묘 앞에 당간지주 혹은 왕릉의 호석 모양의 돌기둥 2개가 남아있다. 당시 승려들은 화장을 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국사의 부도는 아직 찾지 못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부도 대신 무덤을 만들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국사의 묘 옆에 말 무덤이 있고 관련한 설화도 전해온다. 최근 문중에서 안내판을 세웠다.
-조명해야 할 포항의 인물들이 많다고.
△한의학의 대가 석곡 이규준이 동해면 임곡리 태생이다. 북쪽은 동무 이제마, 남쪽은 석곡 이규준을 ‘근대 한의학의 양대 산맥’이라 부른다. 동해면에 살면서도 석곡의 존재를 몰랐는데, 제자들이 매년 10월 마지막 일요일에 묘소를 참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매년 전국에서 100여 명이 모이지만 정작 포항시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외지인으로는 처음으로 참배 행사에 참여했다. 이후 석곡을 조명하는 사업들이 이어졌고 동해에 석곡의 이름을 딴 도서관이 건립됐다. 그리고 10년 넘도록 학생들을 데리고 참배한 의병대장도 있다. 구한말 영남지방 대표적인 의진(義陳)인 장기의진을 이끈 의병장이다. 조명받지 못한 인물이라 보훈지청으로부터 의병도 아닌 사람을 왜 참배하느냐는 항의도 받았다. 결국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제694호)을 추서 받고 대전국립묘지로 이장됐다.
-포항에서 발견된 유물 가운데 독특한 것이 있다면.
△조선시대 충비(忠婢) 즉 ‘계집종’ 비석이 3기나 있다. 광남서원의 충비 단량비, 곡강천의 참포에 있는 충비 순량비, 연일읍 연화재의 충비 갑연비이다. 갑연 비석은 조선왕조실록(순조 30년11월21일 조)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단량은 조선시대 영의정 황보인의 여종으로 계유정난 때 황보인의 손자 ‘단’을 물동이에 숨겨 탈출했다. 단량의 덕으로 혈통을 유지한 것이다. 여종을 위한 비석은 전국적으로 드물어 역사적 가치가 높고, 포항 사람들의 인간미를 보여준다.
-아는 만큼 보인다니 사소한 것도 예사로 보지 않을 것 같다.
△흥환리 바닷가를 산책하다 흥선대원군의 친형인 흥인군 이최응의 공덕비를 발견했다. 블록으로 담을 쌓고 슬레이트로 지붕을 덮은 구조물을 처음에는 그저 어촌의 그물 창고거니 했다. 태풍으로 지붕이 날아간 뒤 보니 2개의 비석이 있었다. 목장의 감목관인 민치억과 흥인군의 공덕비였다. 이로써 조선시대 군마를 방목하며 국가의 군마 조달에 큰 역할을 한 ‘장기 목장성’의 존재가 드러났다. 비각을 세우기 위해 터 고르기를 하던 중 비석 하나가 더 발견됐다. 울부 김노연의 공덕비로 장기 목장성이 울산 목장성의 관할임이 적혀 있었다.
-당장은 아니어도 결국에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는 사례도 있다고.
△장기면에 있는 고석사 약사여래불은 약초나 정병이 없어 이상하게 여겨졌다. 일제강점기에 덧바른 석고를 떼어내니 유려한 선이 드러났지만, 훼손이 심해 문화재 등록은 어려웠다. 그러다가 불교미술사의 대가인 문명대 교수에 의해 최초의 통일신라시대 미륵불 의좌상(倚坐像)임이 밝혀졌다. 의자에 앉은 모습을 형상화한 의좌상은 국내에선 보기 드물어 경주 삼화령과 법주사를 포함해 단 3구뿐이다.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아쉬운 때는.
△충비 단량 비석은 아직까지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했다. 후손들이 다시 만든 비석을 비각 안에 넣고 원래의 것은 비바람에 방치했기 때문이다. 당시 문화재 지정을 위한 현지실사가 나왔다가 이걸 보고 그냥 가버렸다. 또 장기면 죽정리에 있는 태봉산은 신라시대 왕자의 태(胎)를 안치한 ‘잡인출입금지’의 기록이 남아있지만, 무관심 속에 도굴의 표적이 되어 태를 묻은 태실은 파헤쳐 지고 장대석이 흩어져 버렸다.
-향토사가로서 바라는 바가 있다면.
△역사는 사견이 들어가서도 부풀리거나 폄하해서도 안 된다.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꾸미지 말고 기록돼야 한다. 그런 면에서 연오랑 세오녀 테마공원은 고증이 상당히 아쉽다. 블루밸리산업단지 개발 과정에서 20여 기의 고인돌이 사라졌다. 사라지는 고인돌의 체계적 보존과 활용방안이 마련되길 바란다. 포항에 특히나 많은 봉화대와 등대는 훌륭한 관광자원이다. 불빛축제 때 등대와 봉화도 밝히면 얼마나 멋지겠나. 역사는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정체성이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먹고살기 바빠서 생각을 못 하고 살았지만 우리가 왜 살아야 하고 어떤 마음으로 지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이 바로 역사와 문화이다.
/배은정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