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작가가 만난 ‘이 한 사람’<br/>오세윤 문화재 전문 사진작가
우리가 보는 것보다 때론 한 장의 사진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터만 남은 유적지의 황량함이나 유물에 내려앉은 시간의 더께를 담아내기에 한 장의 사진만한 것이 또 있을까. 문화유산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오세윤’ 이름 석 자를 알 것이다. 모른다해도 그가 찍은 사진을 한 번쯤은 봤을 것이다. 지금까지 촬영한 박물관 도록만 300여 권. 2000년대 이후 전국 국립박물관과 문화재청에서 발간하는 보고서나 도록의 대부분을 촬영하고 있다. 국내 문화재 관련 저작들의 상당수 사진도 그의 작품이다.
경주학연구원 한편에 있는 그의 작업실 당호는 ‘여진당(如眞堂)’이다. 이영훈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사진을 참되게 찍으라고 지어주었단다. 문화유산에 대한 안목과 애정을 렌즈에 담아내는 사진가에게 맞춤한 이름이다.
대학 갈 돈 탈탈 털어 마련한 카메라로 웨딩촬영 아르바이트 등 나서 등록금 마련
강우방 전 경주박물관장 제안으로 신라 기와 도록 만들며 문화재 촬영 본격 시작
하루종일 산에 머무르며 만든 경주 남산 사진첩, 유네스코 등재 도움돼 보람 느껴
“사람들 알아주면 반갑고, 몰라줘도 내 일 하면 그만… 언제든지 계속해서 찍을 것”
-사진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가졌나.
△중고교를 다니던 70년대는 칼라 필름이 없었다. 사진관에서 필름 한 통을 사면 카메라를 빌려줬다. 하루는 친구 집에 갔다가 ‘캐논 AE-1’ 카메라에 매료됐다. 촬영렌즈와 파인더렌즈가 따로 있던 이전 카메라와 달리, 찍는 눈과 보는 눈이 같은 ‘일안 반사식(SLR:Single lens reflex)’에다 줌 렌즈까지 갖췄다. 줌을 당겨 바라본 렌즈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것이다. 친구 아버지가 일본을 오가던 보따리상인데, 부모님이 지불할 거라고 거짓말하고 카메라를 가져왔다.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작동시켜보며 카메라를 속속들이 탐구했다. 아버지에게 들켜 압수당하기 전까지 말이다.
-첫 카메라를 가지게 된 건 언제인가.
△사진만큼 책을 좋아해서 국문과를 지원해 경주로 오게됐다. 부모님이 주신 입학금과 등록금, 방값, 생활비를 모으니 액수가 제법 컸다. 몽땅 들이부어 ‘니콘 F3’를 샀다. 그 이후로 카메라를 끌어안고 동아리방이나 친구 자취방을 떠돌았다. 등록을 안 하니까 지도 교수였던 고(故) 김형수 선생이 나를 불렀다. 사정을 들은 교수님이 그 자리에서 경리 과장을 불러, 반드시 등록할 친구니 기한을 연장해 주라고 했다. 웨딩 촬영 아르바이트 등을 해서 여름방학 직전에 등록금을 냈다. 당시 공사 중이던 동국대병원에서 벽돌도 날랐다. 다행히 장학금을 받아 부담이 덜했다.
-문화재 사진을 찍게 된 계기는.
△대학 강의 중에 삼국유사 강독이 있었다.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다보면 유적지 안내판이 수업내용 그대로였다. 신기한 마음에 관심이 커졌고 그때부터 문화재에 빠져든 것 같다. 필름 값을 벌기 위해 대학 때부터 교내외 행사를 촬영했다. 야외 웨딩 촬영 개념이 없을 때라 은행에 가서 여성잡지를 뒤져보기도 했다. 박물관에서 의뢰받은 문화재 촬영도 종종 했다. 사진은 좋았지만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마침 IMF때라 사진관 일이 녹록치 않았다. 그때 박물관 일을 제안한 사람이 강우방 전 경주박물관장이다.
-경주박물관에서 한 첫 작업을 기억하나.
△신라 기와를 촬영하고 도록으로 만들었다. 기존의 정형화된 앵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지금이야 문화재 도록에 이미지 사진이 흔하지만 당시만 해도 불필요한 사진으로 폄하했다. 여러모로 공을 들인 신라 기와 도록은 문화재 도록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고 평가받고 있다. 촬영을 배워본 적이 없어서 다르게 찍을 수 있었다. 혼자 작업하다 보면 시행착오가 많지만 내 것이 되는 순간 큰 힘을 발휘한다.
-문화재청이나 국립박물관이 내놓은 도록이나 연구서적에 실린 사진 대부분을 촬영하지만 맨 뒷장의 이름 석 자가 전부다. 얼굴 없는 사진가라 불리는데.
△사진쟁이는 카메라 뒤에 있어야 한다. 카메라 앞에 서기 시작하면 끝난 것이다. 카메라 앞에서 무슨 사진을 찍나. 일본 슈지츠대학의 가종수 교수와 캄보디아 고대 유적을 촬영하러 갔을 때였다. 우연히 만난 한국인 관광객이 문화재 사진가 가운데 오세윤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알아주면 반갑고 몰라줘도 내 일을 하면 그만이다.
-타국에서 듣는 이름 석 자가 반가웠겠다. 문화재를 촬영하면서 보람이 있다면.
△경주 남산의 경우 도록을 찍고 유네스코에 등재됐다. 심사를 할 때 벽돌만한 사진첩을 쭉 돌렸는데 남산을 와보지 못한 위원들이 남산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진은 모두 필름으로 촬영했다. 도록을 만들면서 남산을 수두룩하게 다녔다. 적당한 때를 기다리며 하루종일 산에 머물러보기도 하고 뱀에 물려 식겁한 곳도 남산이다.
-문화유적마다 촬영하기 적당한 때가 있나.
△물론이다. 그래서 피사체에 대한 사전 이해가 중요하다. 경주학연구원에서 20년 넘게 공부하는 이유다. 신라 초기 작품인 배리 삼존석불은 눈동자가 없고 눈두덩이 부어 있어서 위에서 빛을 비춰야 미소가 살아난다. 이목구비며 목의 삼도(三道)까지 세밀하게 표현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은 측면광이 필요하다. 탑 아래 부조를 찍으려면 빛이 넓게 들어오는 늦가을 오전이 좋다. 한여름의 이른 아침은 북쪽 면까지 빛이 든다.
-사진은 그야말로 빛의 과학이네.
△사진은 빛으로 그린 그림이다. 문이과적 소양을 두루 발휘하지 않으면 몸이 고생한다. 전남 영암 월출산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을 촬영하러 간 적이 있다. 불상은 남향이 일반적이라 새벽에 출발했는데 막상 가보니 서쪽을 바로보고 있었다. 어쩔 도리가 있나. 산중에서 6시간 넘게 기다렸다.
-문화유산에 대한 이해와 인내심과 더불어 문화재 사진가에게 필요한 덕목은 뭔가.
△유물을 이해하고 유물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물러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촬영하다가도 위험하다 싶으면 카메라를 빼야 한다. 경주 항공을 찍고 싶어 헬기 조종을 배웠다. 2인승 헬기를 조종하며 사진을 찍다가 엔진이 꺼지는 바람에 죽다 살아났다. 지금은 드론이 대신하니 그럴 일이 없다.
-전국의 문화재 발굴 현장을 다니며 촬영을 하다 보면 기억에 남는 일도 많겠다.
△경남 함안에 있는 고분을 촬영하다 고고학계에 길이 남을 발견을 했다. 말이산 고분군은 일제강점기에 도굴되어 재조사를 한 아라가야 유물로, 무덤 내부를 붉게 칠한 주칠(朱漆)고분이다. 붉은 벽을 촬영하러 들어갔는데 천장에 무수한 구멍이 뚫려있었다. 조사 결과 무덤을 만들 당시 새긴 별자리인 성혈(星穴)임이 밝혀졌다. 성혈이 무덤방에서 발견된 건 처음이라 당시 언론에서 떠들썩하게 다뤘다.
-일제시대 경주 문화재를 촬영한 사진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노세 우시조라는 일본인이 1920년대 촬영한 유리건판 사진이다. 일본의 문화재 전문 사진업체인 아스카엔이 소장하던 걸 경주학연구원이 일본에 가서 찍어왔다. 고해상 디지털 카메라로 유리 필름을 찍고 반전시키는 방식이다. 700장 이상 찍어서 돌아왔고, 7만 장이 아직 일본에 남아 있다. 나머지도 촬영하기로 코로나 전에 MOU를 맺었지만 예산이 걸림돌이다. 행정담당자는 확실한 결과물을 원하지만 7만 장 안에 뭐가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나 건축물의 수리 전 단계를 볼 수 있는 귀한 자료임은 분명하다. 먼저 찍어온 자료들을 토대로 한 후속 연구도 필요하다.
-문화재를 촬영하다보면 안타까운 일도 많이 보겠다.
△남북이 공동으로 진행한 개성 만월대 발굴조사에 참여했다. 만월대는 송악산 기슭에 위치한 고려의 궁궐터이다. 북한 사람들은 송악산을 누운 여인네를 닮았다며 오마니산이라고 부른다. 2007년 발굴조사가 시작되어 중단과 재개를 반복했고 2018년 12월에 갑작스럽게 철수했다. 나는 네 차례 북한을 방문해 만월대 발굴유적을 촬영했다. ‘남북공동 발굴조사보고서’ 1권의 표지 사진도 직접 찍은 것이다. 궁궐터의 주 건물지와 계단을 한 앵글에 담고 싶어 개성공단에서 가로등 수리용 차를 섭외해왔다. 발굴된 유적은 평양으로 옮겼고 숙소는 개성공단에 있었다. 만월대에 남한의 현장 사무실도 있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생각하면 안타깝고, 이산가족이 된 느낌도 든다.
-쉴 때는 주로 뭘 하나.
△축구선수들이 쉬는 시간에 족구를 하듯, 짬이 날 때마다 내 사진을 찍는다. 바삐 찍을 필요도 없고 대상을 감상하며 물러서보기도 하고 다가가보기도 하며 촬영을 즐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분황사 주차장에 간다. 시야가 탁 트여 음악을 틀어놓고 남산을 바라보기 좋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고 그날의 촬영지를 정한다. 창림사 탑 옆에 앉아서 언덕 아래를 내려다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그냥 보고 있다가 안 찍고 내려올 때도 많다. 예전에는 악착같이 찍으려 했지만 요즘은 눈으로도 찍고 온다.
-경주에 살면서 웬만한 건 렌즈에 담지 않았나. 앞으로 더 담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어제와 오늘의 경주가 다르다. 그날 못 찍으면 영원히 못 찍는다. 석조 조각을 좋아한다. 돌 조각에서 피가 도는 생명감을 느낀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실크로드를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다. 올해는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을 다녀왔다. 아침에 나올 때 카메라가 없으면 불안하다. 언제든지 찍을 수 있도록 한 몸처럼 지니고 다닌다. 내가 제일 잘 하는 것이 사진이다. 사진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계속 찍을 것이다.
오세윤 사진가는
경북 김천 출생으로 경주 동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0년대부터 문화유산 사진을 촬영하기 시작했으며 정형화된 앵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문화유적을 표현해왔다. 문화재를 전문으로 찍은 1세가 한석홍, 김대벽, 안장헌 이라면 오세윤 작가는 1.5세대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대부터 전국 국립박물관과 문화재 유물과 국보 사진 대부분 그가 촬영하고 있다. 대표 전시로는 ‘신라를 찾아서’와 국립경주박물관 신라미술관 특별전 ‘천년 묵은 옛터에 풀은 여전히 새롭네(한석홍·안장헌·오세윤 3인전)’가 있다. ‘경주 남산’ 도록 발간에 참여해 남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기여했다. 우수한 문화유산을 널리 알린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3월에 문화재청장 표창을 받았다.
/배은정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