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고고학 연구자<br/>김호상 진흥문화재연구원 이사장
경주 황룡사를 안다고 말하지만 금당지 장육존상의 받침돌에 스며든 신라인의 미적 감각을 발견하는 이는 드물다. 넓적한 바윗돌 위에 앉아 있었을 1장 6척 불상을 상상하며 1천500년 전 신라인들의 바람과 조우하는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황량하기 그지없는 절터에서 오래도록 시간을 보내야만 목격할 수 있는 귀중한 앎이다. 역사적인 안목은 물론 시간을 거슬러 한 시대를 만나고자 하는 열망, 신라인을 향한 순수한 경외심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유적지만큼 잘 들어맞는 곳도 없다. 기나긴 시간의 강을 건너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혹여나 이 사람과 동행한다면 가능할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경주지역 유적 발굴에 참여하고 신라역사를 연구했으며, 경주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30년째 시민을 대상으로 신라문화유적 답사를 진행하고 있는 김호상 이사장을 경주시 석장동에 위치한 진흥문화재연구원에서 만났다.
‘불명 유구’ 취급 경주 출토 숯가마 지나치지 않고 ‘한국 숯가마 연구사’ 최초 정리
문화유산 보존·보호 사명감 컸던 대학시절엔 직접 사진 찍어 관련 전시회 열기도
부시 전 미국 대통령, 시진핑 당시 중국 부주석 등 주요 인사 문화유산 안내 도맡아
“유적지 잘 설명하는 비법이요? 흥미도 중요하지만 역사적 사실 해쳐서는 안되죠”
-들어오는 길이 복잡하고 좁은 농로여서 애를 좀 먹었다. 이곳 진흥문화재연구원에서는 어떤 일을 하나.
△문화재 발굴을 전문으로 하는 법인이다. 전국의 발굴업체는 110개 정도인데 그 중 대구·경북지역에 가장 많은 20개가 밀집해 있다. 국내 발굴조사는 1970년대까지 국가주도로 이뤄지다가, 80년대부터 대학박물관이 이끌었으며, 2000년대 이후 매장문화재 기관들이 주도하고 있다. 진흥문화재연구원은 2014년 설립해 경주 천군동 유적을 비롯해 분황로, 서면 도리길, 괘릉리, 대릉원 중앙로 등 40여 곳을 발굴했다.
-수천 년을 묻혀있던 유물과 만나는 일인 만큼 가슴 뛰는 순간이 많았을 것 같다.
△이전에는 ‘불명 유구’로 취급됐던 숯가마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밝혀냈다. 90년대 중반, 경주 경마장 건설예정부지 발굴조사에서 숯가마가 대량으로 나왔다. 드문드문 나오기는 했지만 한꺼번에 나오기는 처음이었다. 기와나 토기를 굽던 가마와 달리 숯가마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불명 유구’나 불에 탄 ‘소토(燒土) 유적’으로 취급되어왔다. 불타고 남은 재 이외에 별다른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경주 경마장 예정부지는 국내 대표적인 토기 집단군이기도 해서 일본의 가마 연구자 후지와라 마나부(藤原學) 선생을 초청했는데 발굴현장을 둘러보더니 일본에도 소수만 보이는 숯가마라고 알려줬다. 당시 숯가마에 대한 연구는 전무했다. 일본 오사카에 있는 가마전문박물관인 스이타(吹田) 시립박물관으로 연수를 가서 마나부 선생의 사사를 받아 2003년 박사학위논문으로 한국 숯가마 연구사를 최초로 정리했다.
-신라사람들은 가마에서 생산한 숯으로 뭘 한 건가.
△신라 전성기 경주에는 17만8천936호가 살았고, 숯으로 밥을 해먹었다는 삼국유사 기록이 있다. 하층민은 장작을 땠겠지만 귀족은 숯을 썼다. 신라 귀족은 금입택(金入宅)이라고 해서 금을 입힌 집에서 호화롭게 생활했기에 그을음 없는 숯을 선호했다. 숯에는 흑탄과 백탄이 있고 가마 구조도 다르다. 활활 타는 숯을 흙이나 재로 덮어 만든 백탄은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고급연료로 제철에 사용했다. 아궁이를 막아 산소공급을 중지시켜 만든 흑탄은 취사용이었다. 신라인들은 가마에서 숯을 구워 양질의 숯을 다량으로 누린 것이다.
-불명 유구이던 신라 숯가마에 이름을 부여한 고고학자지만 대학에서 국사학을 전공했다.
△80년대만 해도 국내에는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거의 없었다. 서울대를 비롯해 몇몇 대학에 고고학과가 있었는데 대부분 서양의 이론들을 다루었고 실제 발굴은 역사학과에서 담당했다. 90년대 들어 고고학과와 문화인류학과가 생기면서 연구가 분화됐다. 지금은 그마저도 경계가 허물어져 자연과학분석을 도입해 고고학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대학시절부터 발굴현장에 살다시피 했다고.
△대학박물관이 발굴을 주도하던 80년대는 학생들의 현장참여가 활발했다. 강의실 수업과 발굴 실습 가운데 선택할 수 있었는데 답답한 강의실보다야 현장이 좋았다. 학기 중에는 경주박물관으로 등교하고 방학에는 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일했다. 발굴은 고된 작업이다. 첫 직장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월성 발굴현장이었다. 땡볕 아래 하루 종일 땅을 파고 흙을 나르다보면 철조망 너머 관광객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면 나만 빼고 벚꽃 대궐에 있었다. 선배들이 없었다면 호미를 내던지고 다른 길로 갔을 것이다. 선배들도 일이 익숙한 후배가 편하니까 잘 한다는 꼬드김에 넘어가 지금까지 왔다. 처음에는 선배들에 이끌려서 나중에는 후배들에 떠밀려서 여기까지 온 것 같다.
-대학 4학년 때 문화재 관련 전시회를 열었다고.
△대학생활을 마무리하며 문화유산의 중요함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싶었다. 문화유산 보존과 보호라는 사명감이 컸던 시절이다.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청계천에서 거금 40만 원을 주고 카메라를 구입해 유적지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경주읍성이나 폐사지 같은 훼손되거나 조명받지 못한 곳들을 촬영해 학생복지관에 전시했다. 매년 전시를 열겠다며 나름 포부가 컸지만 한 번으로 끝났다.
-문화재 보호의식이 지금보다 더 부족하던 시대 아닌가.
△개발논리가 우선하던 시대여서 유적이 파헤쳐지기 일쑤였고 어이없는 과정을 많이 목격했다. 포항시 신광면에 위치한 영일 냉수리 고분도 지방도로 공사 중에 훼손됐다. 보호분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긴급하게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할 때 학생 신분으로 참여했다. 그렇게 문화재 보호의 소중함을 알릴 필요성을 깨달았고 대학을 졸업한 1991년부터 매달 시민들을 상대로 문화유적 안내를 해오고 있다. 6명으로 시작해 지금은 3~40명이 참여한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신라문화진흥원을 조직해 유적답사와 문화행사, 강좌도 진행한다.
-한미정상회담을 비롯해 국내외 주요 인사가 경주에 올 때마다 문화유산 안내를 도맡았다.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2005년 한미정상회담 때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불국사로 안내했고, 2009년에 시진핑 당시 중국 부주석을 월성으로 안내했다. 두 사람은 여러모로 결이 달랐는데, 부시 대통령은 질문도 하고 활달한 반응이었지만 시진핑 주석은 조용히 경청하는 모습이었다.
2009년 남북정상회담 때는 북한 김기남 단장을 대릉원과 불국사로 안내했다. 남북한을 비교해서 유적을 설명하는데 북측 안내자가 “동무, 북한이나 남한이라 하지 말고 북측, 남측이라고 하라우”라고 했던 기억도 난다.
-경주를 찾는 해외 인사들에게 먼저 권하는 장소가 있나.
△한미정상회담 당시 회의가 끝나고 한두 시간 안에 둘러볼 수 있는 문화유적을 선정해야 했다. 첨성대와 월지는 다소 밋밋하게 생각됐고, 헬기를 타고 남산을 갈 수도 없어 종교적인 거부감만 없다면 불국사와 석굴암을 제안했다. 불국사는 석가탑과 다보탑도 아름답지만 최고의 정수는 축대이다. 축대 아래는 자연석으로 얼기설기 쌓고 위쪽은 다듬은 돌을 배치했는데, 위아래가 만나는 지점이 압권이다. 울퉁불퉁한 것을 평평하게 깎은 것이 아니라. 평평한 윗돌을 아랫돌에 맞춰 울퉁불퉁하게 다듬었다. 이를 ‘거랭이 기법’이라 하는데, 흔들리면서 안정을 찾아가고 자연스러움을 중시하는 한국의 오랜 문화라고 설명했다. 못을 박지 않고 나무를 결구하는 방식이나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간직한 화강암 석재의 불상도 감탄을 자아냈다. 부시 전 대통령이 불국사를 보며 한국문화에 감탄했다는 기사가 신문에도 크게 실렸다. 혹자는 우리나라 유적을 두고 거대하고 화려한 해외 유적에 비해 볼품없다는 말을 하는데,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소중하게 여기며 필요한 만큼만 다듬어 쓰는 유일무이한 우리 문화재의 가치를 몰라본 얘기다.
-경주 유적지를 잘 설명하는 비법이 있나.
△뛰어난 언변으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사람들도 많지만, 있는 그대로의 가치에 집중하려는 편이다. 흥미도 중요하지만 재미를 위해 역사적 사실을 해쳐서는 안 된다.
-경주문화유적을 알리는 저술 작업을 하면서 낭산을 첫 번째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낭산(狼山)은 신라로 들어가는 출입구이자 신라 문화의 광맥과도 같은 곳이다. 신라 왕이 살던 왕궁이 월성이고, 무덤이 대릉원이라면, 제사를 지낸 신전이 낭산이다. 사천왕사와 황복사, 분황사, 선덕여왕릉 등의 유적이 남아있고 거문고의 명인 백결선생과 향가 ‘도솔가’와 ‘제망매가’를 지은 월명의 설화가 전해오는 곳이다. 그럼에도 ‘낭산’은 ‘남산’으로 자주 오인될 만큼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낭산은 산의 지형이 이리가 길게 엎드린 모습이라고 ‘이리 낭(狼)’자를 따서 부른 이름이다. 경주 도심에 인접한 해발 115m의 나지막한 구릉으로 하루나 반나절이면 충분히 둘러본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특별전 ‘낭산, 도리천 가는 길’(9월 12일까지)이 열리고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
-우리나라 사람치고 경주 한번 안 다녀온 이는 없다. 경주를 새롭고 깊이 있게 보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문화유산 해설사와 동반하거나 안내서를 참고해 걸어서 둘러보길 권한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 첫 장에서 가을이면 불쑥불쑥 경주를 찾고 싶다고 했다. 어디를 가나 정겨운 모습에 마음이 느긋해지고 은은한 향수를 호흡할 수 있는 곳이라고 쓰고 있다. 경주의 매력을 온전히 느끼려면 느긋한 도보 여행이 제일이다. 차량보다는 도보로 여유를 갖고 유적에 담긴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바란다.
-신라 역사를 연구하고 경주의 아름다움을 계속해서 알리고 계시는데, 앞으로 더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일연은 신라를 두고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 塔塔雁行)’이라 했다. 별처럼 많던 사찰과 날아가는 기러기처럼 줄지었던 탑들은 사라졌지만 흔적은 남아있다. 경주에 남은 2~300개의 폐사지가 더 이상 파괴되지 않도록 관심을 이어갈 것이다. 또 잘 알려지지 않은 유적들을 제대로 알리는 저술 작업을 계속할 예정이다. 경주 답사여행의 꼼꼼한 길잡이가 되는 자료집이 됐으면 한다. 신라역사를 연구하고 경주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알리는 일을 지금처럼 해나갈 것이다. /배은정 작가
김호상 이사장은
동국대학교 국사학과에서 고고학을 배우고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조사원과 동국대학교·위덕대학교 박물관 전임연구원,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조사연구실장을 거쳐 현재 재단법인 진흥문화재연구원(매장문화재 발굴전문기관) 이사장으로 재임하고 있다. 1991년부터 매월 첫째 주 일요일마다 시민들과 문화유적 답사를 떠난다. 문화유적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해 신라유적을 중심으로 안내서 발간작업을 하고 있으며, 첫 번째 작업으로 ‘신의 숲 왕의 산, 낭산’을 지난해 출간했고 현재는 신라왕궁 유적을 집필중이다.
배은정
1974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학과 졸업. TBC·포항MBC·경북교통방송 작가. ‘포항문화의 상징과 공간’ 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