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중략)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윤동주, ‘별헤는 밤’ 중에서-◆청년문사 송몽규, 시인 윤동주, 두 청년을 애도하며밤새 창을 두드리며 울다간 바람 소리에 잠을 설쳤다. 꼭 만나야 할 인연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아직 연변 조선족자치주를 떠나지 못했다. 희붐한 아침, 일행을 태운 버스는 둔덕을 조심스레 오르고 있었다. 죽은 사람의 혼을, 주검을 운구하는 영여(靈輿)와 상여(喪輿)처럼, 느린 버스 안에서 모두는 침묵했다.길림성 용정시가 내려다보이는 허청리촌(合成利村) 둥산(東山), 나직한 둔덕엔 겨우내 바싹 마른 옥수수 잎사귀만 바람에 바스락대고 있었다. “여기입니다.” 길잡이 양진오 교수가 버스를 세워 본능처럼 무덤이 즐비한 기슭으로 걸어간다. 잠시 후 “이쪽입니다.” 손짓하는 양진오 교수의 목소리가 높고 밝다. 수많은 무덤 중 나무 울타리가 둘러쳐진 작은 무덤이었다. 여러 개의 비석이 먼저 눈에 띈다. ‘詩人尹東柱之墓[시인 윤동주지묘]’, 낮은 봉분엔 떼가 잘 자라지 않아 한기마저 느껴진다. 울타리와 비석이 없었다면 우리는 분명 지나쳤을 것이다. ◆시인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 청년문사 송몽규지묘(靑年文士宋夢奎之墓) 앞에서일본 유학 당시 윤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나라를 걱정했다.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던 몽규였다. 그런 것도 모르고 둘은 진심으로 조선의 앞날을 걱정하고 무엇이 나라를 위하는 것인지 의논했다. 경찰에 체포된 몽규와 동주는 정식 기소되었다. ‘치안유지법 위반’이 이유였지만, 죄명은 독립운동이었다. 몽규와 동주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규슈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다.
故 윤동주 영정.
매달 집으로 배달되던 동주의 소식이 끊기고, 애태우던 가족에게 동주가 사망했다는 한 통의 전보가 전해진다.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동주의 시신을 인수하러 일본으로 갔다. 동주는 한 줌의 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3월 6일, 집 앞 뜰에서 장례를 치르고 용정 동산공원에 묻혔다. 눈보라가 몹시 몰아치는 추운 날이었다. 다음 날인 3월 7일 새벽, 같은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몽규마저 세상을 떠났다.몽규의 시신은 명동 장재촌 뒷산에 안장되었다. 아버지 송창의는 아들의 무덤에 ‘靑年文士宋夢奎之墓[청년문사송몽규지묘]’라는 비석을 세웠다. 유수 같은 세월이 흘렀다. 많은 무덤이 그렇듯 사람의 발길도 뜸해지고 기억마저 희미해져 갔다. 동주의 무덤도, 몽규의 무덤도 그랬다.
◆윤동주를 사랑한 일본인, 오오무라 마스오한국이 중국과 수교를 맺기 전인 1985년, 동주의 무덤을 찾아 달라는 유족의 부탁을 받고 일본 와세다대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가 북간도로 향했다. 그는 북간도의 묘지를 떠돌다 윤동주의 묘비와 무덤을 확인했다. 그는 윤동주의 무덤이 용정에 있다는 것을 한국에 처음 소개했다. 마스오 교수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광명중학 학적부, 릿쿄대학과 도시샤대학의 학적부 등 동주의 행적을 찾아 정리하는 등 윤동주 연구에 몰입했다. 그는 한국인보다 동주를 사랑한 일본인 학자였다. ◆죽어서도 나란히 북간도 하늘을 우러러동주의 묘역에서 10m 떨어진 곳에 몽규의 묘가 있다. 동주는 용정 동산공원에, 몽규는 명동 장재촌 뒷산에 묻혀있었다. 1990년 연변의 유지들이 몽규의 무덤을 동주의 묘소 바로 옆으로 이장하면서 둘의 무덤도 나란해졌다.마른 풀 서걱대는 소리가 동주의, 몽규의 마지막 절규 같아 마음이 숙연해진다. 비석이 여러 개 세워진 동주의 묘에 비하면 몽규의 묘는 부친이 세웠다는 묘비 하나가 전부다. 떼가 잘 자라지 못해 춥게 느껴진다. 무덤 앞엔 누구의 정성인지 그의 시 ‘밤’을 기록한 작은 액자가 놓여있다. 우리는 무덤 앞에서 눈을 감는다. 그리고 묵념 후 경건하게 그의 시를 낭독한다.고요히 침전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송몽규, 밤(夜), 1938년 9월, 조선일보낭독하는 이의 목소리가 흔들린다. 한 다발의 국화를 놓고 술을 올리니 눈시울이 젖는다. 바다보다 깊은 밤을 홀로 헤아렸을 몽규를 떠올리며 감히, 어떤 추모도 할 수가 없다. 일제의 폭압과 나라 잃은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고, 어려서부터 독립운동의 뜻을 품었던 몽규였다. 10대 때, 낙양군관학교에 입학해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공근에게 군사훈련을 배운 그였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석방된 후에도 몽규의 반일은 꺾이지 않았다. 연희전문학교 졸업식, 교장으로 부임한 친일파 윤치호가 부상으로 준 일본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책자를 바닥에 내동댕이 치는 등 반일 의식이 뿌리 깊게 박힌 조선의 청년 몽규였다.
故 송몽규 영정
◆현해탄을 건너간 몽규와 동주몽규와 동주는 일본 유학을 떠나는 과정에서 창씨개명을 해야 했다. 몽규는 宋村夢奎[송촌몽규] ‘소오우라 무게이’로, 동주는 平沼東柱[평소동주] ‘히라누마 도오쥬우’가 되어야 했다.몽규는 일본제국 경찰의 요시찰 명부에 기록되어 있었다. 악명 높은 고등계 형사들이 몽규의 하숙집을 밀착 감시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결국 고희욱, 윤동주, 송몽규는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고희욱은 며칠 뒤 풀려났지만, 몽규와 동주는 규슈 북서쪽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고 1년 후인 1945년 2월 16일에 동주가, 3월 7일에 몽규가 사망했다.◆몽규와 동주, 영원히 살아 있는 명동촌-명동학교 옛 터 기념관1899년 윤동주의 증조부 윤재옥은 두만강을 건넜다. 간도는 주인 없는 땅으로 인식되던 시절이었다. 1889년 윤동주의 외삼촌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규암(圭巖) 김약연(金躍淵 : 1868-1942) 선생 외 문치정·남위언·김하규, 김학연 등도 일제의 폭정을 피해 집안을 이끌고 ‘비둘기 바위’라는 뜻을 지닌 북간도 ‘부걸라재(鵓鴿磖子)’로 이주했다. 그리고 ‘동방, 곧 한반도를 밝히는 곳’이라는 뜻의 ‘명동촌(明東村)’으로 이름을 붙였다.이들은 나라를 되찾는 길은 오로지 교육뿐이라고 여겼다. 1901년 김약연 선생은 장재촌에 ‘규암재(圭岩齋)’를 세웠고, 남위언은 상중영촌에 ‘오룡재(五龍齋)’를, 김하규는 대룡동에 ‘소암재(素岩齋)’를 지어 학문을 가르쳤다. 1908년 여러 서재를 합하여 명동서숙을 설립하고 명동서숙은 명동학교로, 명동학교는 명동중학으로 발전했다.-송몽규, 윤동주 생가윤동주 생가는 1900년 경, 조부인 윤하현 선생이 지었다. 기와를 얹은 영락없는 조선 전통 가옥이다. 몽규의 어머니가 몸을 풀기 위해 친정인 동주의 집으로 왔다. 몽규는 1917년 9월 28일, 동주는 1917년 12월 30일에 명동촌 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둘은 고종 사촌지간으로 어려서부터 함께 한 형제이자 친구였다.윤동주 생가는 우리가 명동촌에 오는 동안에도 관람이 불투명했다. 중국에서 ‘중국애국시인’으로 둔갑시킨 후 개방까지 불허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명동촌에 도착하기 직전, 현지 가이드로부터 윤동주 생가를 개방해 주겠다는 기쁜 소식을 접했다.명동학교기념관 앞마당을 지나니 걸음이 빨라진다. 몽규가 살던 ‘송몽규옛집’은 문이 굳게 잠겨 발을 들이지는 못했다. 조금 더 골목을 따라가니 길 끝에 웅장하게 치장된 돌비석이 나타난다. ‘중국조선족 애족시인 윤동주생가’. 낮은 산 아래 넓은 마당에 발을 들이니 고요가 밀려온다. 곳곳에 놓인 크고 작은 시비들이 발소리마저 숨죽이게 한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잔잔하고 새들은 정다웠으나 소란하지 않았다. 한옥 마루에 앉으니 겨울임에도 봄처럼 따스한 햇살이 들어 눈이 부시다. 동주는 오늘 같은 날에도 분명 시를 썼을 것이다.제한된 시간이 못내 아쉬워 돌아보고 만져보고, 또 기대어 본다. 바람과 햇살과 구름이 한데 어우러져 참으로 귀한 날이다. 학사모를 쓴 윤동주와 서시를 새긴 시비 앞에서 우리는 우두커니 서서 영원한 청년 윤동주를 마주한다. 귀한 사람, 아까운 사람. 이렇게라도 만나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우리는 감사하자고 했다. ◆용정(竜井), 생명의 물 길어 올리던 용두레 우물해란강은 하얗게 얼었고, 언 사이로 얼지 않은 물이 흐른다. 비옥한 땅이 펼쳐진 가운데 용정시가 가지런히 자리 잡았다. 전체 인구의 70%가 조선족인 용정시 한복판에 ‘거룡우호공원(巨龍友好公園)’이 있다. 경남 거제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공원이다. 이곳에는 특별한 우물이 있다.용두레 우물이다. 19세기 말 조선에서 건너온 선조들이 우물을 발견하고 용두레를 달아 물을 길어 썼다. 사람들이 우물 근처에 모여 살면서 용두레촌으로 불리다가 ‘용정촌’이 되었다. 용두레 우물은 비록 작은 우물에 불과하지만, 조선족들에겐 생명의 근원이자 뿌리가 된 거대한 우물이었다.용정시를 벗어나 평강벌 길 위 어디쯤에서 일송정을 보았다. 먼발치에서 가곡 ‘선구자’를 읊조리는데 울컥 슬픔이 치민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일제는 일송정을 지키던 한 그루 소나무마저도 껍질을 벗기고 도려내어 잔혹하게 말려 죽였다. 그리고 정자마저 파괴했다.해가 저물 무렵의 무지근한 우울 때문인가. 아니면 심연 깊은 바닥에서 우러나오는 고마움 때문인가. 평강벌을 굽이굽이 흐르는 해란강을 따라 달리며,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오직 조국의 독립만 염원하며 이 땅을 개척했을 선조들께 뭉클한 고마움이 인다.우리는 해란강처럼 소리 없이 유유히 용정을 벗어난다. 다시 올 날을 기약하며.글·사진/박시윤작가
2024-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