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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차가운 바람에도 얼지 않는 압록강아

◆북간도에서 서간도로, 이 험한 길을 우리는 왜폭설이 쏟아졌다. 열차는 좌석이 동났고 고속도로는 통제됐다. ‘일단 가보자’ 서간도에 가겠다는 우리의 결의는 한결같았다. 국도로 이동하는 것 외에는 딱히 방법이 없었다. 이동 거리가 멀고 눈도 내리고 있어 만만치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현실은 더한 어려움이 따랐다.단둥(단동)까지 약 1천500km의 거리를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 이도백하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해 밤 8시 반쯤 단둥에 도착했다. 11시간 반 만에 도착한 단둥은 늦은 밤이었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이쪽은 중국 단둥, 저쪽은 북한 신의주단둥엔 중국과 북한의 국경을 이루는 압록강이 흐른다. 압록강은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하여 한반도와 중국의 국경을 이루며 혜산, 중강진, 만포, 신의주와 단둥을 적시고 가만가만 서해로 흘러간다.단둥은 중국에서 가장 큰 국경도시다. 붉은 ‘단(丹)’ 동쪽 ‘동(東)’, 붉은 기운이 솟구치는 동쪽. 그러나 이 두 글자의 이름에는 중국과 북한의 긴밀한 관계가 숨어 있다. ‘홍색동방지성(红色东方之城)’, 북한을 두고 ‘혈맹으로 붉게 물든 동쪽의 도시’라는 뜻이라 하니 두 나라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한지 가늠이 된다.늦은 식사를 마치고 압록강 강변을 걸었다. 건물마다 형형색색의 불빛으로 윤곽을 두르고, 건물과 건물 틈마다 등(燈)을 달아 빛을 뿜게 했다. “저 다리가 압록강 단교입니다.” 양진오 교수가 강 위의 다리를 가리켰다. 화려한 불빛으로 치장한 다리는 무척 아름다웠다. “강 건너가 평안북도 신의주입니다.” 일행은 일제히 강 너머를 바라보았다.다리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연결된 듯했지만 불빛은 어느 지점에서 멈췄고, 저쪽은 어둠에 갇힌 듯 그 무엇도 가늠할 수 없었다. 강 너머를 바라보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말문이 막혀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곳이 신의주라는 게 믿기지 않기 때문이었다.단둥의 옛 이름은 ‘안동(安東)’이다. 1965년까지 그리 불렀다. 이름이 변경된 까닭은 중국 총리 주은래가 단둥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다음 날 일출을 보고 아침 해가 북경보다 빨리 뜬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단둥엔 조선족을 비롯해 한국인과 북한 동포가 한데 섞여 살고 있다. 어쩌면 단둥은 분단을 모르는 또 다른 조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신의주 쪽에서 내일 아침 해가 뜰 겁니다. 일출을 보면 왜 ‘단둥’인지 알게 될 겁니다.” 양진오 교수가 압록강 너머 캄캄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신의주, 신의주… 도대체 신의주는 어디에 있다는 거지?’ 나는 보이지 않는 도깨비 같은 도시를 쉬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신의주에서 떠오르는 해밤새 잠을 뒤척였다. 새벽부터 창가를 서성이다 6시 무렵 밖으로 나갔다. 간밤의 화려한 불빛은 물러나고 두꺼운 어둠이 장악한 사위는 두려움을 가져온다. 이국의 거리는 익숙하지 않아 더 그렇다. 강물에도 파도가 사는지, 강가로 밀려오고 밀려가는 물소리만 들린다.칼바람 속에도 집요하게 강 너머만 바라본다. 서서히 어둠이 걷히고 조금씩 형체가 드러난다. 가장 먼저 굴뚝이 눈에 들어오고 그 옆으로 공장인 듯 지붕과 지붕이 이어진다. 어둠이 물러날수록 건물의 색깔이 드러나고, 드물게 서 있는 나무의 흔들림까지 보인다.차가워질 대로 차가워진 볼에 감각이 무뎌질 무렵, 굴뚝 옆으로 붉은 기운이 깔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붉은 해가 모습을 드러낸다. 분명 해는 신의주에서 솟는다. 단둥에서 일출을 보고 북경보다 일찍 뜬다고 했다는 주은래는 틀렸다. 붉디붉은 기운은 신의주를 먼저 깨우고, 압록강을 밝힌 후 그다음에 단둥을 비춘다. ‘저기 어디 뒷동네 용천엔 겨레의 할아버지 함석헌 선생의 고향 이랬지. 단둥 세관에 근무하던 시인 백석은 압록강을 숱하게 바라보며 어떤 상념에 젖었을까.’신의주는 가난한 도시로 느껴지지 않는다. 여태껏 우리가 듣고 믿었던 북한은 어디일까. 북한은 가난하고 먹을 것도 없어 굶주린 인민들이 넘쳐날 것이라는 나의 추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우리는 어쩌면 세뇌되고 믿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저 연민의 마음으로 처연하게만 여겨온 마음의 의심이 풀리는 순간이다. ◆압록강 단교압록강 하류엔 일제가 1911년 대륙 침략을 위해 건설한 다리가 있다. 이 다리는 중국과 한반도를 잇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중국이 북한을 도와 전쟁에 개입할 것을 우려한 미국은, 중공군이 한반도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다리를 끊었다. 다리는 현재 중국 쪽 절반만 남았고 북한 쪽은 교각만 덩그러니 남았다. 구실 잃은 다리는 ‘단교(断桥)’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압록강 물살을 견딘다. 다리 위 마오쩌둥 사진 옆에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卫国, 미국에 대항하여 조선을 돕고 나라를 지켰다.)’고 기록해 놓았다.단교 옆엔 ‘중조우의교(中朝友谊桥)’가 있다. 중국과 북한을 잇기 위해 1943년 새로 건설했다. 944m 길이로 철길과 차선이 나란히 놓였다. 이따금 이 다리를 통해 커다란 차량이 국경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에겐 너무 생소한 모습이지만 여기서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다.단교에 올라 압록강을 횡단해 본다. 칼바람이 온몸을 에워싼다. 압록강의 추위는 두만강보다 몇 곱절 더 시린 것만 같다. 다리 위를 걷다 어느 지점에 다다르면 ‘단절’을 경험하게 된다.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탓일까. 더는 갈 수 없는 막막함과 서운함에 쉬이 발길을 돌리지 못한다. 가지 않아서가 아니라 가지 못하기에 더 간절해진다.유람선을 타고 압록강 물살을 거슬러 올라간다. 압록강은 북한과 중국의 공유지역이다. 일행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북한은 지척에 있었다. 신의주 쪽으로 보이는 건물은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정갈하게 자리 잡았다. 북한 장성급 별장이라고 현지 가이드가 일러준다. 별장이라… 가까이 갈수록 건물들에서 오는 이질감은 무엇일까. 겨우 붙어있는 판자며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은 문짝, 잔바람에도 쓰러질 것만 같은 폐가 수준의 느낌은 나 혼자만의 오해인가. ◆이성계가 회군한 위화도, 중국과 맞닿은 황금평버스를 타고 강변을 달리다 개통을 앞둔 압록강 대교 부근에서 하차했다. 강물이 웅숭깊게 흘러가는 하구 어디쯤이었다. 양진오 교수가 강 너머를 가리키며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위화도는 압록강 모래가 퇴적되어 만들어진 섬입니다. 고려 말 1388년(우왕 14) 음력 5월. 요동 정벌을 위해 우군 도통사 이성계는 압록강 하류 위화도까지 이르렀지요.” 우왕(고려 제32대)의 명을 받들어 개경에 머물던 총사령관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 최영 장군은 명나라 정벌을 위해 요동까지 정벌을 추진했지만, 이성계는 현실적인 한계가 따른다며 위화도에서 군사를 물렸다. 위화도에서 회군한 지 4년여 만인 1392년 7월, 이성계는 신진사대부의 도움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왕위에 올랐고, 다음 해 2월 국호를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꿨다.그리고 황금평(黃金坪)에 대해 이야기했다. 원래 ‘황초평’으로 불렸으나 김일성이 황금평으로 이름을 바꿨다. 황금평은 오랜 퇴적으로 인해 중국 영토에 맞닿아 버렸다. 그렇다면 이는 누구의 땅인가. 북한에서는 한때 장성택의 주도로 황금평과 위화도, 나선지구를 신흥 경제 지구로 개발하려 했지만, 장성택이 숙청당한 이후 사업이 흐지부지되었다는 양진오 교수의 말은 흥미로웠다. ◆의친왕 상해임시정부로의 탈출 실패한 단둥역단둥역에 도착했다. 역 광장엔 중국 인민의 추앙 대상인 마오쩌둥의 거대한 동상이 베이징을 향해 서 있다. 단둥역에서는 베이징, 상하이를 비롯해 선양, 다롄, 하얼빈까지 고속열차가 연결되어 있다.단둥역은 의친왕의 기진한 얼굴이 떠오르는 곳이기도 하다. 의친왕은 황실 가족 가운데 가장 항일의식이 강했다. 3·1 만세운동이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나고 전협과 최익환은 고종의 아들 이강(의친왕)을 상해로 망명시켜 임시정부 지도자로 추대하고자 했다. 1919년 11월 11일 중국 안동(당시는 안동현이었음)역. 경성에서 출발한 기차가 역내로 들어왔을 때, 역사는 일본 경찰들에게 포위된 상태였다. 이강의 얼굴을 알고 있던 요네야마 경부가 그에게 다가가 “전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었고 이강의 상해임시정부 행은 실패하게 되었다.◆서간도의 독립투사들_‘이 머리는 차라리 자를 수 있지만, 이 무릎을 꿇어 종이 될 수는 없도다.’석주(石州) 이상룡 ‘강을 건너다(渡江)’ 중에서1910년 12월, 이회영(1867~1932)과 여섯 형제는 일제와 무력 항쟁을 벌이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단둥으로 망명했다. 1911년 1월 경상북도 안동의 대부호이자 퇴계 학통 적통을 이어받은 유학자 이상룡(1858~1932) 선생도 노비문서를 모두 불태우고, 위패를 땅에 묻은 후 식솔 50여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선생의 나이 52세였다.조선에서는 고관대작들이 나라를 팔아먹고 일제가 하사한 작위와 돈 잔치로 흥겨워하고 있을 때,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들은 모든 재산을 청산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회영 형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1911년 4월 서간도 최초의 한인자치기관이자 독립운동 단체의 모태가 된 ‘경학사(耕學社)’를 창설했고, 이상룡 선생이 초대 사장에 추대되었다. 이들은 재산을 내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했다.1925년 이상룡 선생은 임시정부 초대국무령으로 추대되었고, 이듬해 김구 선생에게 물려주고 사임했다. 선생의 나이 69세였다. 이후 선생이 기운을 잃자 동생들이 환국을 간청하였으나 죽기 전에는 떠나지 않겠다며 거절하고 “국토가 회복되기 전에는 잠시 나를 여기에 묻어 두어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1932년 6월, 향년 75세였다.5개월 뒤인 11월, 이시영 선생마저 생을 마감했다. 만주에서 항일에 대한 계획을 세운 뒤 다롄으로 이동하려다가 밀정에게 발각되어 고문 끝에 옥사했다. 향년 65세였다.◆서간도에서 다시 북간도로단둥에서 오후 2시 30분에 출발한 고속열차는 시속 300km로 달렸다.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의 유배지였던 심양을 지나 옛 만주국 수도 장춘을 지나, 북쪽으로 갈수록 날은 저물고 눈 덮인 풍경은 하얗게 빛났다. 약 6시간 만에 연길역에 도착했다.역사란 기억하는 자의 몫이며, 걷고 쓰는 자의 몫이다. 만주·간도를 답사하며 길 위에서 만나는 새로운 것을 대할 때면 가슴이 뜨거워지곤 했다. 이것이 답사의 목적이고 이유다.우리는 이제 대한민국으로 돌어간다. 한동안 열병처럼 앓을지도 모르겠다. 만주를 미처 다 알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쉽다. 그리하여 다시 와야 할 여지를 남긴다.글·사진/박시윤작가끝

2024-04-07

북간도에 나린 시(詩) 시(詩) 시(詩)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중략)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윤동주, ‘별헤는 밤’ 중에서-◆청년문사 송몽규, 시인 윤동주, 두 청년을 애도하며밤새 창을 두드리며 울다간 바람 소리에 잠을 설쳤다. 꼭 만나야 할 인연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아직 연변 조선족자치주를 떠나지 못했다. 희붐한 아침, 일행을 태운 버스는 둔덕을 조심스레 오르고 있었다. 죽은 사람의 혼을, 주검을 운구하는 영여(靈輿)와 상여(喪輿)처럼, 느린 버스 안에서 모두는 침묵했다.길림성 용정시가 내려다보이는 허청리촌(合成利村) 둥산(東山), 나직한 둔덕엔 겨우내 바싹 마른 옥수수 잎사귀만 바람에 바스락대고 있었다. “여기입니다.” 길잡이 양진오 교수가 버스를 세워 본능처럼 무덤이 즐비한 기슭으로 걸어간다. 잠시 후 “이쪽입니다.” 손짓하는 양진오 교수의 목소리가 높고 밝다. 수많은 무덤 중 나무 울타리가 둘러쳐진 작은 무덤이었다. 여러 개의 비석이 먼저 눈에 띈다. ‘詩人尹東柱之墓[시인 윤동주지묘]’, 낮은 봉분엔 떼가 잘 자라지 않아 한기마저 느껴진다. 울타리와 비석이 없었다면 우리는 분명 지나쳤을 것이다. ◆시인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 청년문사 송몽규지묘(靑年文士宋夢奎之墓) 앞에서일본 유학 당시 윤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나라를 걱정했다.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던 몽규였다. 그런 것도 모르고 둘은 진심으로 조선의 앞날을 걱정하고 무엇이 나라를 위하는 것인지 의논했다. 경찰에 체포된 몽규와 동주는 정식 기소되었다. ‘치안유지법 위반’이 이유였지만, 죄명은 독립운동이었다. 몽규와 동주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규슈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다. 故 윤동주 영정. 매달 집으로 배달되던 동주의 소식이 끊기고, 애태우던 가족에게 동주가 사망했다는 한 통의 전보가 전해진다.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동주의 시신을 인수하러 일본으로 갔다. 동주는 한 줌의 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3월 6일, 집 앞 뜰에서 장례를 치르고 용정 동산공원에 묻혔다. 눈보라가 몹시 몰아치는 추운 날이었다. 다음 날인 3월 7일 새벽, 같은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몽규마저 세상을 떠났다.몽규의 시신은 명동 장재촌 뒷산에 안장되었다. 아버지 송창의는 아들의 무덤에 ‘靑年文士宋夢奎之墓[청년문사송몽규지묘]’라는 비석을 세웠다. 유수 같은 세월이 흘렀다. 많은 무덤이 그렇듯 사람의 발길도 뜸해지고 기억마저 희미해져 갔다. 동주의 무덤도, 몽규의 무덤도 그랬다. ◆윤동주를 사랑한 일본인, 오오무라 마스오한국이 중국과 수교를 맺기 전인 1985년, 동주의 무덤을 찾아 달라는 유족의 부탁을 받고 일본 와세다대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가 북간도로 향했다. 그는 북간도의 묘지를 떠돌다 윤동주의 묘비와 무덤을 확인했다. 그는 윤동주의 무덤이 용정에 있다는 것을 한국에 처음 소개했다. 마스오 교수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광명중학 학적부, 릿쿄대학과 도시샤대학의 학적부 등 동주의 행적을 찾아 정리하는 등 윤동주 연구에 몰입했다. 그는 한국인보다 동주를 사랑한 일본인 학자였다. ◆죽어서도 나란히 북간도 하늘을 우러러동주의 묘역에서 10m 떨어진 곳에 몽규의 묘가 있다. 동주는 용정 동산공원에, 몽규는 명동 장재촌 뒷산에 묻혀있었다. 1990년 연변의 유지들이 몽규의 무덤을 동주의 묘소 바로 옆으로 이장하면서 둘의 무덤도 나란해졌다.마른 풀 서걱대는 소리가 동주의, 몽규의 마지막 절규 같아 마음이 숙연해진다. 비석이 여러 개 세워진 동주의 묘에 비하면 몽규의 묘는 부친이 세웠다는 묘비 하나가 전부다. 떼가 잘 자라지 못해 춥게 느껴진다. 무덤 앞엔 누구의 정성인지 그의 시 ‘밤’을 기록한 작은 액자가 놓여있다. 우리는 무덤 앞에서 눈을 감는다. 그리고 묵념 후 경건하게 그의 시를 낭독한다.고요히 침전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송몽규, 밤(夜), 1938년 9월, 조선일보낭독하는 이의 목소리가 흔들린다. 한 다발의 국화를 놓고 술을 올리니 눈시울이 젖는다. 바다보다 깊은 밤을 홀로 헤아렸을 몽규를 떠올리며 감히, 어떤 추모도 할 수가 없다. 일제의 폭압과 나라 잃은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고, 어려서부터 독립운동의 뜻을 품었던 몽규였다. 10대 때, 낙양군관학교에 입학해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공근에게 군사훈련을 배운 그였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석방된 후에도 몽규의 반일은 꺾이지 않았다. 연희전문학교 졸업식, 교장으로 부임한 친일파 윤치호가 부상으로 준 일본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책자를 바닥에 내동댕이 치는 등 반일 의식이 뿌리 깊게 박힌 조선의 청년 몽규였다. 故 송몽규 영정 ◆현해탄을 건너간 몽규와 동주몽규와 동주는 일본 유학을 떠나는 과정에서 창씨개명을 해야 했다. 몽규는 宋村夢奎[송촌몽규] ‘소오우라 무게이’로, 동주는 平沼東柱[평소동주] ‘히라누마 도오쥬우’가 되어야 했다.몽규는 일본제국 경찰의 요시찰 명부에 기록되어 있었다. 악명 높은 고등계 형사들이 몽규의 하숙집을 밀착 감시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결국 고희욱, 윤동주, 송몽규는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고희욱은 며칠 뒤 풀려났지만, 몽규와 동주는 규슈 북서쪽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고 1년 후인 1945년 2월 16일에 동주가, 3월 7일에 몽규가 사망했다.◆몽규와 동주, 영원히 살아 있는 명동촌-명동학교 옛 터 기념관1899년 윤동주의 증조부 윤재옥은 두만강을 건넜다. 간도는 주인 없는 땅으로 인식되던 시절이었다. 1889년 윤동주의 외삼촌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규암(圭巖) 김약연(金躍淵 : 1868-1942) 선생 외 문치정·남위언·김하규, 김학연 등도 일제의 폭정을 피해 집안을 이끌고 ‘비둘기 바위’라는 뜻을 지닌 북간도 ‘부걸라재(鵓鴿磖子)’로 이주했다. 그리고 ‘동방, 곧 한반도를 밝히는 곳’이라는 뜻의 ‘명동촌(明東村)’으로 이름을 붙였다.이들은 나라를 되찾는 길은 오로지 교육뿐이라고 여겼다. 1901년 김약연 선생은 장재촌에 ‘규암재(圭岩齋)’를 세웠고, 남위언은 상중영촌에 ‘오룡재(五龍齋)’를, 김하규는 대룡동에 ‘소암재(素岩齋)’를 지어 학문을 가르쳤다. 1908년 여러 서재를 합하여 명동서숙을 설립하고 명동서숙은 명동학교로, 명동학교는 명동중학으로 발전했다.-송몽규, 윤동주 생가윤동주 생가는 1900년 경, 조부인 윤하현 선생이 지었다. 기와를 얹은 영락없는 조선 전통 가옥이다. 몽규의 어머니가 몸을 풀기 위해 친정인 동주의 집으로 왔다. 몽규는 1917년 9월 28일, 동주는 1917년 12월 30일에 명동촌 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둘은 고종 사촌지간으로 어려서부터 함께 한 형제이자 친구였다.윤동주 생가는 우리가 명동촌에 오는 동안에도 관람이 불투명했다. 중국에서 ‘중국애국시인’으로 둔갑시킨 후 개방까지 불허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명동촌에 도착하기 직전, 현지 가이드로부터 윤동주 생가를 개방해 주겠다는 기쁜 소식을 접했다.명동학교기념관 앞마당을 지나니 걸음이 빨라진다. 몽규가 살던 ‘송몽규옛집’은 문이 굳게 잠겨 발을 들이지는 못했다. 조금 더 골목을 따라가니 길 끝에 웅장하게 치장된 돌비석이 나타난다. ‘중국조선족 애족시인 윤동주생가’. 낮은 산 아래 넓은 마당에 발을 들이니 고요가 밀려온다. 곳곳에 놓인 크고 작은 시비들이 발소리마저 숨죽이게 한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잔잔하고 새들은 정다웠으나 소란하지 않았다. 한옥 마루에 앉으니 겨울임에도 봄처럼 따스한 햇살이 들어 눈이 부시다. 동주는 오늘 같은 날에도 분명 시를 썼을 것이다.제한된 시간이 못내 아쉬워 돌아보고 만져보고, 또 기대어 본다. 바람과 햇살과 구름이 한데 어우러져 참으로 귀한 날이다. 학사모를 쓴 윤동주와 서시를 새긴 시비 앞에서 우리는 우두커니 서서 영원한 청년 윤동주를 마주한다. 귀한 사람, 아까운 사람. 이렇게라도 만나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우리는 감사하자고 했다. ◆용정(竜井), 생명의 물 길어 올리던 용두레 우물해란강은 하얗게 얼었고, 언 사이로 얼지 않은 물이 흐른다. 비옥한 땅이 펼쳐진 가운데 용정시가 가지런히 자리 잡았다. 전체 인구의 70%가 조선족인 용정시 한복판에 ‘거룡우호공원(巨龍友好公園)’이 있다. 경남 거제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공원이다. 이곳에는 특별한 우물이 있다.용두레 우물이다. 19세기 말 조선에서 건너온 선조들이 우물을 발견하고 용두레를 달아 물을 길어 썼다. 사람들이 우물 근처에 모여 살면서 용두레촌으로 불리다가 ‘용정촌’이 되었다. 용두레 우물은 비록 작은 우물에 불과하지만, 조선족들에겐 생명의 근원이자 뿌리가 된 거대한 우물이었다.용정시를 벗어나 평강벌 길 위 어디쯤에서 일송정을 보았다. 먼발치에서 가곡 ‘선구자’를 읊조리는데 울컥 슬픔이 치민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일제는 일송정을 지키던 한 그루 소나무마저도 껍질을 벗기고 도려내어 잔혹하게 말려 죽였다. 그리고 정자마저 파괴했다.해가 저물 무렵의 무지근한 우울 때문인가. 아니면 심연 깊은 바닥에서 우러나오는 고마움 때문인가. 평강벌을 굽이굽이 흐르는 해란강을 따라 달리며,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오직 조국의 독립만 염원하며 이 땅을 개척했을 선조들께 뭉클한 고마움이 인다.우리는 해란강처럼 소리 없이 유유히 용정을 벗어난다. 다시 올 날을 기약하며.글·사진/박시윤작가

2024-03-31

간도에 뿌리내린 애국의 이름, 무명(無名)

1909년 조선에서는 무단통치, 강압 통지가 계속되었다. 일제는 한반도 대토벌을 시작했다. 버틸 곳이 없던 의병 세력들은 비교적 안전한 만주나 연해주로 활동처를 옮겼다. 간도는 오래전부터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이 범법의 죄를 알고도 살기 위해 들어갈 수밖에 없는 땅이었다. 국경을 넘어 황무지를 일구는 민중의 삶은 처참했다. 굶주림과 싸워야 했고 추위와도 싸워야 했다. 도처에 깔린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근근이 목숨을 붙였다. 한편 조선에서는 참고 버티던 백성들이 1919년 3·1 무장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농민들마저 곡괭이와 호미를 들고 뛰쳐나와 일본에 저항했다. 이 무렵 두만강변 북한과 중국 국경지대엔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삼툰자를 찾아서산들은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이어진다. 그 사이로 두만강 물줄기가 낮게 흐른다. 남쪽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이고, 북쪽은 중국 땅 도문이다. 해가 서쪽으로 넘어갈 무렵 일광산 자락 아래, 어느 땅에 당도했다. 이정표도 팻말도 하나 없는 타국의 들판은 적막으로 가득했다. 삼툰자는 어디인가? 조용히 지세를 살피던 길잡이 양진오 교수가 한쪽을 가리켰다. 일행은 모두 길잡이가 가리키는 곳, 어떤 처연함이 서린 곳을 바라보았다. 겨울 저물녘의 시골이 모두 그렇겠지만 삼툰자는 서글픔마저 묻어났다. 세월에 묻혀 잊히는 듯, 희미한 안내조차 없는 들판은 적막하기만 했다.두만강을 등지고 서니 일광산 아래 몇 안 되는 집들이 폐허의 풍경처럼 다가온다. 두만강을 건너온 시린 바람이 어둑어둑한 들판을 휘감을 무렵 ‘처절한 전투’ 그리고 ‘죽음’이라는 단어가 먼저 뇌리를 스친다.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이 처절하게 항거했던 땅. 삼툰자는 독립투사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우리에게 그런 의미의 땅이기도 하다.지금은 간평촌으로 불리는 삼툰자는, 조선 강양에서 김·박·최 씨 세 성(聲)이 두만강을 도강하여 각각 한마을씩, 세 개의 씨족 부락을 이루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툰자가 들어선 땅은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였기에 세 집안이 터를 잡기에는 그만이었다. 모두 피를 나눈 가족 마을이니 밀정이 붙을 리 만무했다.두만강 넘어 간도 땅에 독립군이 있다는 것을 안 일본군은, 독립군이 조선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겠다는 이유로 접경지역인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 두만강변에 대규모 진을 쳤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 독립군과 일본 남양수비대가 대치한 셈이었다.일광산에 오르면 두만강 건너 온성군의 산천이 한눈에 들어왔다. 독립군은 온성군 일대에 진을 친 남양수비대의 동태를 한눈에 파악하고 있었다. 1920년 6월, 청년 독립군 신민단 대원들은 두만강을 건너가 일본 국경초소, 일제 통치기관을 차례대로 습격하며 남양수비대와 수시로 교전했다. 두만강 물이 얕아 도강이 쉬웠고 산과 골짜기로 이루어진 강양 일대는 지형에 능통한 독립군들이 움직이기에 자유로웠다. 독립군의 습격이 점점 거세지자,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일본군은 두만강을 건너 국경을 넘어 중국 땅으로 진입했다.일본군은 민간을 수색하다가 조선인이면 임산부,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무고한 백성의 목숨을 거리낌 없이 앗아갔다. 이때 신민단 대원들은 삼툰자 상촌에 은둔하고 있었다. 삼툰자 하촌을 공격하던 일본군은 신민단 대원들을 쫓아 상촌까지 바짝 추격했다.◆저수지가 된 봉오동전투 격전지삼툰자에서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인 신민단 대원들은 고려령을 넘어 봉오골로 이동했다. 삼툰자에서 손실을 입은 일본군은 대규모 병력을 갖추어 ‘월강추격대’를 편성했다. 그들은 두만강을 건너 곧장 고려령을 넘어 독립군의 숨통을 죄며 봉오골로 향했다. 자비란 한 방울도 없는 월강추격대의 무서운 추격이 시작되었다. 독립연합군의 홍범도 장군은 월강추격대가 봉오골로 올 것을 예측하고 주민을 먼저 피신시킨 뒤 최진동, 안무 등 독립군 연합부대(대한군북로독군부)와 함께 각 고지에 병력을 매복시켰다. 지형에 능했던 신민단 대원들은 삼툰자에서 약20km 떨어진 봉오골 상촌까지 월강추격대를 유인해 갔다.“나라 뺏긴 설움이 우리를 북받치고 소총 잡게 만들었다 이 말이야”-영화 봉오동전투 “해철(유해진)의 대사 중-봉오동은 입구에서 안쪽까지 수많은 골짜기로 이루어졌고,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지형이라 한다. 독립군의 매복에 대해 철저한 준비를 한 일본군은 척후병을 봉오골로 먼저 들여보냈다. 하지만 독립군은 척후병을 공격하지 않았다. 의병이 없다는 듯 속여 월강추격대의 본대가 상촌 중심부로 들어오도록 유인했다. 봉오골은 사면이 야산으로 둘러싸인 협곡으로 이루어진 천연 요새였다. 본대가 봉오골 중심부로 들어오자 4면의 고지에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연합부대는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다.봉오동전투는 거의 4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하늘도 독립군을 도운 것인지, 오후 4시 무렵 갑자기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거센 폭우에 피아식별이 어려워지자 월강추격대는 자국의 후원부대와 서로 적으로 오인하여 총격전까지 벌이다 많은 사상자를 냈다. 월강추격대는 조선 온성으로 급히 퇴각했다. 뺏기지 않으려고 지키려고 목숨을 건 독립군과 뺏으려고 독기를 품은 일본군 사이에서 선(善)은 악(惡)을 이겼다.봉오동전투 승전 소식은 한반도 조선까지 순식간에 퍼졌다. 모두가 싸워 망국의 설움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봉오동 승전 소식은 조선 국민에게 큰 등불이 되었다. 독립군의 첫 승리 소식을 듣고 죽기를 각오한 많은 동포가 만주 간도, 연해주로 이주해 독립군에 입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독립군 수는 셀 수가 없어, 왠지 알아? 어제 농사짓던 인물이 내일 독립군이 될 수 있다 이 말이야.”-영화 봉오동전투 “해철(유해진)의 대사 중-봉오동으로 가는 내내 두만강은 우리와 함께 했다. 두만강 건너 북한의 강양 마을도 함께 따라왔다. 국경은 차갑고 이국은 낯설지만 강 건너 강양, 우리 땅은 반갑다.봉오동에 도착하니 굳게 닫힌 철문이 일행을 막아선다. 상기된 표정들, 무심한 듯 세심한 눈빛들은 이미 철문 넘어 골짜기를 응시한다. 모두 말이 없다. 100년 전, 선조들의 치열했던 격전지를 찾아 타국으로 온 이방인들의 발길이 묶이는 순간이다. 눈앞에 두고 선조들의 숨결을 더 따라 밟을 수 없는 아쉬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좁은 협곡이 많았던 봉오동은 저수지가 되었다.어디선가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봉오동 저수지 쪽에서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다. 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무명의 이름들이 흐르고 있는 듯하다. 봉오동 승리의 골짜기는 이들의 투혼과 이름을 품고 저수지에 고요히 잠겨 있다.글·사진/박시윤 작가

2024-03-24

두만강은 꽁꽁 얼었어도 물은 속으로 제 갈 길 간다

사이 ‘간(間)’, 섬 ‘도(道)’ 사이에 놓인 섬 ‘간도’, 간도는 중국 길림성(吉林省) 동남부 지역으로 중국에서는 연길도(延吉道)라 한다. 1869년 무렵 함경도에 큰 흉년이 들면서 많은 사람이 간도로 이주했고, 1910년을 전 후해 일제의 핍박이 심해지자 독립투사들은 항일 운동의 새로운 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간도로 이주하기에 이르렀다. 민족운동의 산실이자 독립투사들의 숨결이 서린 간도로의 여정을 미약하게나마 따라가 본다. ◆김해공항에서 연길공항으로상공에서 보는 하늘은 맑았다. 두 시간 반 남짓 상공을 날던 비행기에서 안내방송이 나왔다. 곧 연길 공항에 도착한다는 것과 함께 ‘접경지역’이니 창문 셔터를 모두 내리라는 것이었다. 승무원들은 개폐 금지 스티커까지 나눠주며 창문 셔터에 붙이라고 했다. 안내대로 모든 게 완벽해졌을 때, 기내 조명등마저 꺼졌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가?’ 비행기는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채 상공을 떠도는 행성과도 같았다.‘나라’와 ‘나라’를 건너가는 일, 어쩌면 우리는 변경(邊境) 지대의 묻히고 잊히는 이야기를 좇아 월강(越江)을 자처하는 겁 없는 이방인인지도 모른다. ◆중국조선족자치주 그리고 연길연길 공항을 빠져나오니 차가운 바람이 훅 끼친다. 볼을 찢을 것만 같은 칼바람이 정신을 번뜩 깨운다. 연길(延吉, 옌지)은 낯선 듯 낯설지 않다. 조선족자치주의 중심도시인 연길시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동쪽으로 흘러가는 강은 눈이 덮인 채 꽁꽁 얼었다. 어머니의 강, 버드나무 개울이라는 뜻의 만주어 ‘부르하통하(河)’는 도문시를 적시고 두만강으로 흘러들어 동해로 간다.국자교를 건너니 연길 시가지다. 대한민국 도시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다. 나직한 건물들 사이로 제법 높다란 빌딩이 보이고 형형색색의 간판이 하나같이 화려함을 자랑한다. 야무지고 당찬 느낌의 연길이 첫눈에 각인되는 순간이다. 간판은 한글과 한자를 혼용해서 쓰며 고속열차(가오티에·高铁) 내 방송조차 한국어로 안내가 되는 곳이다. 그렇다, 연길은 총인구 68만 가운데 20만여 명이 조선족이다. 우리 동포가 모여 사는 ‘조선족의 서울’인 셈이다.1932년 만주국 간도성의 성도(省都)가 되었다가 1952년 중국 조선족자치구가 되었다. 지금은 중국 땅이지만 과거에는 조선인들이 월강해 피와 땀으로 황무지를 일군 땅이고, 지금도 그들의 후손이 남아 대(代)를 이어 또 다른 문화를 이루어 가는 곳이다. ◆도문에서 마주한 두만강, 그리고 강 건너 북한 온성군 남양노동자구연길에서 차로 1시간 남짓 이동하니 도문이다. 총 인구 12만 명 중 50%가 넘는 조선족 집단 거주 지역이다. 도문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국경을 맞댄 접경지역이다. 도문대교와 도문철교가 북한과 중국 사이에 놓여 두 나라 간 교류를 잇는 도시이기도 하다.두만강 광장에는 몇몇 인민들이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현란하게 춤을 춘다. 광장 너머 헐벗은 산과 ‘中朝邊境(중조변경)’이라는 붉은색의 글자가 시선을 압도한다. ‘중국과 조선, 나라의 경계가 되는 변두리 땅’. 북한과 중국, 러시아와 북한은 서로 두만강을 접경하여 국경을 그었다. 한국전쟁 당시 두만강은 한 번도 대한민국이 점령하지 못했던 강이기도 하다.두만강은 허옇게 질린 듯 꽁꽁 얼어붙었다. 학창 시절 역사책에서나 배웠던 두만강(豆滿江), 님을 싣고 떠나던 배는 어디로 가고 두만강 나루에는 눈만 소복이 쌓였다. 백두산 동쪽에서 발원한 두만강(총길이 약 521km)은 낙동강(약 510km)보다 길다. 강폭은 400~500m 정도로, 언 강을 도강하기에는 그리 어려워 보이지는 않는다. 한때는 두만강이 얼면 강을 건너는 탈북민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북한 주민들은 ‘도망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그러나 폭이 좁다는 것은 언 강을 도강하는 것은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얼지 않으면 물살이 세 위험하다. 그러니 강이 얼든 녹든 국경을 넘어 도강을 결심한다는 건 목숨을 담보해야 할 위험천만한 일이다.남양과 도문 사이에 놓인 도문대교가 보인다. 1933년 일제가 중국 동북 지방의 자원을 반출하기 위해 남양과 중국 도문 사이를 연결하는 철교와 인도교를 건설했다. 인도교는 코로나 이전에는 대교를 개방해 한가운데 ‘변계선’까지 갈 수 있도록 했다고 하나, 지금은 그마저도 차단된 상태다. 대교 입구를 자물쇠로 걸어 잠근 것도 모자라 쇠사슬로 칭칭 감아 단절된 나라로의 통행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나는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우리 땅, 북한을 보고자 두만강 변 철책까지 내려갔다. 날카로운 미늘이 촘촘히 박힌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시야를 뻗으니, 한겨울 칼바람이 몰고 온 날카로운 통증이 동공을 찌른다. 코끝이 찡하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떤 처연함이 턱밑까지 고인다.강 넘어 배경처럼 놓인 헐벗은 산이 도문을 향해 덩그러니 앉았다. 그리고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노동자구가 그 아래 가지런히 놓였다. 한참을 바라보아도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실향민들이 그토록 밟고 싶어 하는 땅,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우리의 영토다. 가만히 응시하던 내가 카메라 셔터를 누르려는 순간 낯선 손길이 어깨를 건드린다. 남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손짓한다. 영문을 모르는 내게 일행들이 빨리 올라오라고 말한다. ‘아, 여기는 중국이지.’ 남자는 월북을 우려해 접경지까지 내려간 이방인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오직 남조선 사람이다. 당황스럽지만 여기서 내 진심 따위는 필요치 않다.차를 타고 두만강을 따라 달린다. 강 건너 북한의 풍경이 굽이굽이 참으로 적막하다. 산기슭에 자리 잡은 나직한 집마다 자꾸 눈길이 간다. 사람은 사는지, 당장 땟거리가 없어 굶지는 않는지 모든 게 걱정이다. 헐벗은 산이며 그 아래서 겨울 저녁임에도 연기를 피워 올리지 못하는 굴뚝이 애잔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 혼자만의 연민인가. 무얼 싣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지만 드물게 지나는 기차조차도 그저 반갑기만 한 두만강의 풍경이다. ◆일광산에 오르니 남양노동자구가 한눈에두만강 나루 인근에 있는 일광산에 오른다. 산을 넘어가는 바람이 제법 맵다. 전망대에 오르니 남양노동자구가 입체적으로 한눈에 들어온다. 5층 빌라가 즐비한 남양은 아주 정갈한 모습이지만 여전히 인기척이 없으므로 보여주기식 마을인가 의심마저 든다. 그때 길잡이 양진오 교수가 한 장의 사진을 보여주신다. 건물과 건물 사이 공터에 일고여덟 명의 아이들이 놀고 있다. 어디든 아이들은 해맑다. 전쟁터 건 병원이 건 아이들의 본성은 즐겁다. 멀리서나마 아이들이 무탈하게 자라기를 기도한다.우리 가요 중 ‘눈물 젖은 두만강’이라는 노래가 있다. 두만강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고 다시는 만나지 못한 사람들. 그들의 눈물은 이쪽과 저쪽을 구분 짓지 아니하였음에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강은 단순히 흐르는 물줄기만은 아닐 게다. 이산의 아픔을 품고 곧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많은 이들의 아픔을 토닥거렸을 게다. 두만강은 아득한 곡선을 돌아 여기에 이르렀고, 다시 곡선을 그리며 까마득한 아래로 흘러갈 것이다.계속글·사진/박시윤작가

2024-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