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윤의 역사답사기행 에세이 국경에 부는 바람아, 우리는 간도로 간다 <br/>(4) 독립투사들의 땅 서간도
◆북간도에서 서간도로, 이 험한 길을 우리는 왜
폭설이 쏟아졌다. 열차는 좌석이 동났고 고속도로는 통제됐다. ‘일단 가보자’ 서간도에 가겠다는 우리의 결의는 한결같았다. 국도로 이동하는 것 외에는 딱히 방법이 없었다. 이동 거리가 멀고 눈도 내리고 있어 만만치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현실은 더한 어려움이 따랐다.
단둥(단동)까지 약 1천500km의 거리를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 이도백하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해 밤 8시 반쯤 단둥에 도착했다. 11시간 반 만에 도착한 단둥은 늦은 밤이었다.
압록강은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하여
한반도-中 국경을 이루며 서해로 흘러
압록강의 모래가 퇴적돼 만들어진 섬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야기 깃들어
조선 대표 유학자들 만주서 독립운동
독립운동 단체의 모태인 ‘경학사’ 창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독립군 양성도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이쪽은 중국 단둥, 저쪽은 북한 신의주
단둥엔 중국과 북한의 국경을 이루는 압록강이 흐른다. 압록강은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하여 한반도와 중국의 국경을 이루며 혜산, 중강진, 만포, 신의주와 단둥을 적시고 가만가만 서해로 흘러간다.
단둥은 중국에서 가장 큰 국경도시다. 붉은 ‘단(丹)’ 동쪽 ‘동(東)’, 붉은 기운이 솟구치는 동쪽. 그러나 이 두 글자의 이름에는 중국과 북한의 긴밀한 관계가 숨어 있다. ‘홍색동방지성(红色东方之城)’, 북한을 두고 ‘혈맹으로 붉게 물든 동쪽의 도시’라는 뜻이라 하니 두 나라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한지 가늠이 된다.
늦은 식사를 마치고 압록강 강변을 걸었다. 건물마다 형형색색의 불빛으로 윤곽을 두르고, 건물과 건물 틈마다 등(燈)을 달아 빛을 뿜게 했다. “저 다리가 압록강 단교입니다.” 양진오 교수가 강 위의 다리를 가리켰다. 화려한 불빛으로 치장한 다리는 무척 아름다웠다. “강 건너가 평안북도 신의주입니다.” 일행은 일제히 강 너머를 바라보았다.
다리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연결된 듯했지만 불빛은 어느 지점에서 멈췄고, 저쪽은 어둠에 갇힌 듯 그 무엇도 가늠할 수 없었다. 강 너머를 바라보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말문이 막혀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곳이 신의주라는 게 믿기지 않기 때문이었다.
단둥의 옛 이름은 ‘안동(安東)’이다. 1965년까지 그리 불렀다. 이름이 변경된 까닭은 중국 총리 주은래가 단둥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다음 날 일출을 보고 아침 해가 북경보다 빨리 뜬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단둥엔 조선족을 비롯해 한국인과 북한 동포가 한데 섞여 살고 있다. 어쩌면 단둥은 분단을 모르는 또 다른 조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신의주 쪽에서 내일 아침 해가 뜰 겁니다. 일출을 보면 왜 ‘단둥’인지 알게 될 겁니다.” 양진오 교수가 압록강 너머 캄캄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신의주, 신의주… 도대체 신의주는 어디에 있다는 거지?’ 나는 보이지 않는 도깨비 같은 도시를 쉬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신의주에서 떠오르는 해
밤새 잠을 뒤척였다. 새벽부터 창가를 서성이다 6시 무렵 밖으로 나갔다. 간밤의 화려한 불빛은 물러나고 두꺼운 어둠이 장악한 사위는 두려움을 가져온다. 이국의 거리는 익숙하지 않아 더 그렇다. 강물에도 파도가 사는지, 강가로 밀려오고 밀려가는 물소리만 들린다.
칼바람 속에도 집요하게 강 너머만 바라본다. 서서히 어둠이 걷히고 조금씩 형체가 드러난다. 가장 먼저 굴뚝이 눈에 들어오고 그 옆으로 공장인 듯 지붕과 지붕이 이어진다. 어둠이 물러날수록 건물의 색깔이 드러나고, 드물게 서 있는 나무의 흔들림까지 보인다.
차가워질 대로 차가워진 볼에 감각이 무뎌질 무렵, 굴뚝 옆으로 붉은 기운이 깔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붉은 해가 모습을 드러낸다. 분명 해는 신의주에서 솟는다. 단둥에서 일출을 보고 북경보다 일찍 뜬다고 했다는 주은래는 틀렸다. 붉디붉은 기운은 신의주를 먼저 깨우고, 압록강을 밝힌 후 그다음에 단둥을 비춘다. ‘저기 어디 뒷동네 용천엔 겨레의 할아버지 함석헌 선생의 고향 이랬지. 단둥 세관에 근무하던 시인 백석은 압록강을 숱하게 바라보며 어떤 상념에 젖었을까.’
신의주는 가난한 도시로 느껴지지 않는다. 여태껏 우리가 듣고 믿었던 북한은 어디일까. 북한은 가난하고 먹을 것도 없어 굶주린 인민들이 넘쳐날 것이라는 나의 추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우리는 어쩌면 세뇌되고 믿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저 연민의 마음으로 처연하게만 여겨온 마음의 의심이 풀리는 순간이다.
◆압록강 단교
압록강 하류엔 일제가 1911년 대륙 침략을 위해 건설한 다리가 있다. 이 다리는 중국과 한반도를 잇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중국이 북한을 도와 전쟁에 개입할 것을 우려한 미국은, 중공군이 한반도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다리를 끊었다. 다리는 현재 중국 쪽 절반만 남았고 북한 쪽은 교각만 덩그러니 남았다. 구실 잃은 다리는 ‘단교(断桥)’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압록강 물살을 견딘다. 다리 위 마오쩌둥 사진 옆에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卫国, 미국에 대항하여 조선을 돕고 나라를 지켰다.)’고 기록해 놓았다.
단교 옆엔 ‘중조우의교(中朝友谊桥)’가 있다. 중국과 북한을 잇기 위해 1943년 새로 건설했다. 944m 길이로 철길과 차선이 나란히 놓였다. 이따금 이 다리를 통해 커다란 차량이 국경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에겐 너무 생소한 모습이지만 여기서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단교에 올라 압록강을 횡단해 본다. 칼바람이 온몸을 에워싼다. 압록강의 추위는 두만강보다 몇 곱절 더 시린 것만 같다. 다리 위를 걷다 어느 지점에 다다르면 ‘단절’을 경험하게 된다.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탓일까. 더는 갈 수 없는 막막함과 서운함에 쉬이 발길을 돌리지 못한다. 가지 않아서가 아니라 가지 못하기에 더 간절해진다.
유람선을 타고 압록강 물살을 거슬러 올라간다. 압록강은 북한과 중국의 공유지역이다. 일행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북한은 지척에 있었다. 신의주 쪽으로 보이는 건물은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정갈하게 자리 잡았다. 북한 장성급 별장이라고 현지 가이드가 일러준다. 별장이라… 가까이 갈수록 건물들에서 오는 이질감은 무엇일까. 겨우 붙어있는 판자며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은 문짝, 잔바람에도 쓰러질 것만 같은 폐가 수준의 느낌은 나 혼자만의 오해인가.
◆이성계가 회군한 위화도, 중국과 맞닿은 황금평
버스를 타고 강변을 달리다 개통을 앞둔 압록강 대교 부근에서 하차했다. 강물이 웅숭깊게 흘러가는 하구 어디쯤이었다. 양진오 교수가 강 너머를 가리키며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위화도는 압록강 모래가 퇴적되어 만들어진 섬입니다. 고려 말 1388년(우왕 14) 음력 5월. 요동 정벌을 위해 우군 도통사 이성계는 압록강 하류 위화도까지 이르렀지요.” 우왕(고려 제32대)의 명을 받들어 개경에 머물던 총사령관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 최영 장군은 명나라 정벌을 위해 요동까지 정벌을 추진했지만, 이성계는 현실적인 한계가 따른다며 위화도에서 군사를 물렸다. 위화도에서 회군한 지 4년여 만인 1392년 7월, 이성계는 신진사대부의 도움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왕위에 올랐고, 다음 해 2월 국호를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꿨다.
그리고 황금평(黃金坪)에 대해 이야기했다. 원래 ‘황초평’으로 불렸으나 김일성이 황금평으로 이름을 바꿨다. 황금평은 오랜 퇴적으로 인해 중국 영토에 맞닿아 버렸다. 그렇다면 이는 누구의 땅인가. 북한에서는 한때 장성택의 주도로 황금평과 위화도, 나선지구를 신흥 경제 지구로 개발하려 했지만, 장성택이 숙청당한 이후 사업이 흐지부지되었다는 양진오 교수의 말은 흥미로웠다.
◆의친왕 상해임시정부로의 탈출 실패한 단둥역
단둥역에 도착했다. 역 광장엔 중국 인민의 추앙 대상인 마오쩌둥의 거대한 동상이 베이징을 향해 서 있다. 단둥역에서는 베이징, 상하이를 비롯해 선양, 다롄, 하얼빈까지 고속열차가 연결되어 있다.
단둥역은 의친왕의 기진한 얼굴이 떠오르는 곳이기도 하다. 의친왕은 황실 가족 가운데 가장 항일의식이 강했다. 3·1 만세운동이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나고 전협과 최익환은 고종의 아들 이강(의친왕)을 상해로 망명시켜 임시정부 지도자로 추대하고자 했다. 1919년 11월 11일 중국 안동(당시는 안동현이었음)역. 경성에서 출발한 기차가 역내로 들어왔을 때, 역사는 일본 경찰들에게 포위된 상태였다. 이강의 얼굴을 알고 있던 요네야마 경부가 그에게 다가가 “전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었고 이강의 상해임시정부 행은 실패하게 되었다.
◆서간도의 독립투사들
_‘이 머리는 차라리 자를 수 있지만, 이 무릎을 꿇어 종이 될 수는 없도다.’
석주(石州) 이상룡 ‘강을 건너다(渡江)’ 중에서
1910년 12월, 이회영(1867~1932)과 여섯 형제는 일제와 무력 항쟁을 벌이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단둥으로 망명했다. 1911년 1월 경상북도 안동의 대부호이자 퇴계 학통 적통을 이어받은 유학자 이상룡(1858~1932) 선생도 노비문서를 모두 불태우고, 위패를 땅에 묻은 후 식솔 50여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선생의 나이 52세였다.
조선에서는 고관대작들이 나라를 팔아먹고 일제가 하사한 작위와 돈 잔치로 흥겨워하고 있을 때,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들은 모든 재산을 청산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회영 형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1911년 4월 서간도 최초의 한인자치기관이자 독립운동 단체의 모태가 된 ‘경학사(耕學社)’를 창설했고, 이상룡 선생이 초대 사장에 추대되었다. 이들은 재산을 내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했다.
1925년 이상룡 선생은 임시정부 초대국무령으로 추대되었고, 이듬해 김구 선생에게 물려주고 사임했다. 선생의 나이 69세였다. 이후 선생이 기운을 잃자 동생들이 환국을 간청하였으나 죽기 전에는 떠나지 않겠다며 거절하고 “국토가 회복되기 전에는 잠시 나를 여기에 묻어 두어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1932년 6월, 향년 75세였다.
5개월 뒤인 11월, 이시영 선생마저 생을 마감했다. 만주에서 항일에 대한 계획을 세운 뒤 다롄으로 이동하려다가 밀정에게 발각되어 고문 끝에 옥사했다. 향년 65세였다.
◆서간도에서 다시 북간도로
단둥에서 오후 2시 30분에 출발한 고속열차는 시속 300km로 달렸다.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의 유배지였던 심양을 지나 옛 만주국 수도 장춘을 지나, 북쪽으로 갈수록 날은 저물고 눈 덮인 풍경은 하얗게 빛났다. 약 6시간 만에 연길역에 도착했다.
역사란 기억하는 자의 몫이며, 걷고 쓰는 자의 몫이다. 만주·간도를 답사하며 길 위에서 만나는 새로운 것을 대할 때면 가슴이 뜨거워지곤 했다. 이것이 답사의 목적이고 이유다.
우리는 이제 대한민국으로 돌어간다. 한동안 열병처럼 앓을지도 모르겠다. 만주를 미처 다 알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쉽다. 그리하여 다시 와야 할 여지를 남긴다.
글·사진/박시윤작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