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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은 꽁꽁 얼었어도 물은 속으로 제 갈 길 간다

등록일 2024-03-17 19:27 게재일 2024-03-18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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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윤의 역사답사기행 에세이<br/>국경에 부는 바람아, 우리는 간도로 간다   (1) 조선족 자치 북간도
두만강나루 건너 헐벗은 민둥산이 애잔하게 앉아 있다.

사이 ‘간(間)’, 섬 ‘도(道)’ 사이에 놓인 섬 ‘간도’, 간도는 중국 길림성(吉林省) 동남부 지역으로 중국에서는 연길도(延吉道)라 한다. 1869년 무렵 함경도에 큰 흉년이 들면서 많은 사람이 간도로 이주했고, 1910년을 전 후해 일제의 핍박이 심해지자 독립투사들은 항일 운동의 새로운 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간도로 이주하기에 이르렀다. 민족운동의 산실이자 독립투사들의 숨결이 서린 간도로의 여정을 미약하게나마 따라가 본다.

 

비행기 창문셔터들을 모두 내린 채

조명등 마저 끄고 착륙한 연길시는

간판도·열차 방송도 한국어로 안내

두만강 사이에 두고 북한과 접경한

도문에서 철조망 넘어 보이는 북녘

밟을 수 없는 땅의 애절한 처연함이

두만강 나루 인근 일광산에 오르니

인기척 없는 남양노동자구 한눈에

정갈한 5층 빌라는 보여주기 ‘의심’

◆김해공항에서 연길공항으로

상공에서 보는 하늘은 맑았다. 두 시간 반 남짓 상공을 날던 비행기에서 안내방송이 나왔다. 곧 연길 공항에 도착한다는 것과 함께 ‘접경지역’이니 창문 셔터를 모두 내리라는 것이었다. 승무원들은 개폐 금지 스티커까지 나눠주며 창문 셔터에 붙이라고 했다. 안내대로 모든 게 완벽해졌을 때, 기내 조명등마저 꺼졌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가?’ 비행기는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채 상공을 떠도는 행성과도 같았다.

‘나라’와 ‘나라’를 건너가는 일, 어쩌면 우리는 변경(邊境) 지대의 묻히고 잊히는 이야기를 좇아 월강(越江)을 자처하는 겁 없는 이방인인지도 모른다.

 

중국과 북한의 접경지역임을 알리는 철책. 북한 쪽에는 없고 중국 도문 쪽에만 철책이 설치되어 있다.
중국과 북한의 접경지역임을 알리는 철책. 북한 쪽에는 없고 중국 도문 쪽에만 철책이 설치되어 있다.

◆중국조선족자치주 그리고 연길

연길 공항을 빠져나오니 차가운 바람이 훅 끼친다. 볼을 찢을 것만 같은 칼바람이 정신을 번뜩 깨운다. 연길(延吉, 옌지)은 낯선 듯 낯설지 않다. 조선족자치주의 중심도시인 연길시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동쪽으로 흘러가는 강은 눈이 덮인 채 꽁꽁 얼었다. 어머니의 강, 버드나무 개울이라는 뜻의 만주어 ‘부르하통하(河)’는 도문시를 적시고 두만강으로 흘러들어 동해로 간다.

국자교를 건너니 연길 시가지다. 대한민국 도시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다. 나직한 건물들 사이로 제법 높다란 빌딩이 보이고 형형색색의 간판이 하나같이 화려함을 자랑한다. 야무지고 당찬 느낌의 연길이 첫눈에 각인되는 순간이다. 간판은 한글과 한자를 혼용해서 쓰며 고속열차(가오티에·高铁) 내 방송조차 한국어로 안내가 되는 곳이다. 그렇다, 연길은 총인구 68만 가운데 20만여 명이 조선족이다. 우리 동포가 모여 사는 ‘조선족의 서울’인 셈이다.

1932년 만주국 간도성의 성도(省都)가 되었다가 1952년 중국 조선족자치구가 되었다. 지금은 중국 땅이지만 과거에는 조선인들이 월강해 피와 땀으로 황무지를 일군 땅이고, 지금도 그들의 후손이 남아 대(代)를 이어 또 다른 문화를 이루어 가는 곳이다.

일광산에서 바라본 도문대교(위)와 도문철교(아래)가 중국 도문(좌)과 북한 남양시(우)를 잇고 있다. 함경북도 온정군 남양노동자구 건물 모습.
일광산에서 바라본 도문대교(위)와 도문철교(아래)가 중국 도문(좌)과 북한 남양시(우)를 잇고 있다.

◆도문에서 마주한 두만강, 그리고 강 건너 북한 온성군 남양노동자구

연길에서 차로 1시간 남짓 이동하니 도문이다. 총 인구 12만 명 중 50%가 넘는 조선족 집단 거주 지역이다. 도문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국경을 맞댄 접경지역이다. 도문대교와 도문철교가 북한과 중국 사이에 놓여 두 나라 간 교류를 잇는 도시이기도 하다.

두만강 광장에는 몇몇 인민들이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현란하게 춤을 춘다. 광장 너머 헐벗은 산과 ‘中朝邊境(중조변경)’이라는 붉은색의 글자가 시선을 압도한다. ‘중국과 조선, 나라의 경계가 되는 변두리 땅’. 북한과 중국, 러시아와 북한은 서로 두만강을 접경하여 국경을 그었다. 한국전쟁 당시 두만강은 한 번도 대한민국이 점령하지 못했던 강이기도 하다.

두만강은 허옇게 질린 듯 꽁꽁 얼어붙었다. 학창 시절 역사책에서나 배웠던 두만강(豆滿江), 님을 싣고 떠나던 배는 어디로 가고 두만강 나루에는 눈만 소복이 쌓였다. 백두산 동쪽에서 발원한 두만강(총길이 약 521km)은 낙동강(약 510km)보다 길다. 강폭은 400~500m 정도로, 언 강을 도강하기에는 그리 어려워 보이지는 않는다. 한때는 두만강이 얼면 강을 건너는 탈북민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북한 주민들은 ‘도망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폭이 좁다는 것은 언 강을 도강하는 것은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얼지 않으면 물살이 세 위험하다. 그러니 강이 얼든 녹든 국경을 넘어 도강을 결심한다는 건 목숨을 담보해야 할 위험천만한 일이다.

남양과 도문 사이에 놓인 도문대교가 보인다. 1933년 일제가 중국 동북 지방의 자원을 반출하기 위해 남양과 중국 도문 사이를 연결하는 철교와 인도교를 건설했다. 인도교는 코로나 이전에는 대교를 개방해 한가운데 ‘변계선’까지 갈 수 있도록 했다고 하나, 지금은 그마저도 차단된 상태다. 대교 입구를 자물쇠로 걸어 잠근 것도 모자라 쇠사슬로 칭칭 감아 단절된 나라로의 통행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나는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우리 땅, 북한을 보고자 두만강 변 철책까지 내려갔다. 날카로운 미늘이 촘촘히 박힌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시야를 뻗으니, 한겨울 칼바람이 몰고 온 날카로운 통증이 동공을 찌른다. 코끝이 찡하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떤 처연함이 턱밑까지 고인다.

강 넘어 배경처럼 놓인 헐벗은 산이 도문을 향해 덩그러니 앉았다. 그리고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노동자구가 그 아래 가지런히 놓였다. 한참을 바라보아도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실향민들이 그토록 밟고 싶어 하는 땅,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우리의 영토다. 가만히 응시하던 내가 카메라 셔터를 누르려는 순간 낯선 손길이 어깨를 건드린다. 남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손짓한다. 영문을 모르는 내게 일행들이 빨리 올라오라고 말한다. ‘아, 여기는 중국이지.’ 남자는 월북을 우려해 접경지까지 내려간 이방인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오직 남조선 사람이다. 당황스럽지만 여기서 내 진심 따위는 필요치 않다.

차를 타고 두만강을 따라 달린다. 강 건너 북한의 풍경이 굽이굽이 참으로 적막하다. 산기슭에 자리 잡은 나직한 집마다 자꾸 눈길이 간다. 사람은 사는지, 당장 땟거리가 없어 굶지는 않는지 모든 게 걱정이다. 헐벗은 산이며 그 아래서 겨울 저녁임에도 연기를 피워 올리지 못하는 굴뚝이 애잔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 혼자만의 연민인가. 무얼 싣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지만 드물게 지나는 기차조차도 그저 반갑기만 한 두만강의 풍경이다.

함경북도 온정군 남양노동자구 건물 모습.

◆일광산에 오르니 남양노동자구가 한눈에

두만강 나루 인근에 있는 일광산에 오른다. 산을 넘어가는 바람이 제법 맵다. 전망대에 오르니 남양노동자구가 입체적으로 한눈에 들어온다. 5층 빌라가 즐비한 남양은 아주 정갈한 모습이지만 여전히 인기척이 없으므로 보여주기식 마을인가 의심마저 든다. 그때 길잡이 양진오 교수가 한 장의 사진을 보여주신다. 건물과 건물 사이 공터에 일고여덟 명의 아이들이 놀고 있다. 어디든 아이들은 해맑다. 전쟁터 건 병원이 건 아이들의 본성은 즐겁다. 멀리서나마 아이들이 무탈하게 자라기를 기도한다.

우리 가요 중 ‘눈물 젖은 두만강’이라는 노래가 있다. 두만강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고 다시는 만나지 못한 사람들. 그들의 눈물은 이쪽과 저쪽을 구분 짓지 아니하였음에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강은 단순히 흐르는 물줄기만은 아닐 게다. 이산의 아픔을 품고 곧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많은 이들의 아픔을 토닥거렸을 게다. 두만강은 아득한 곡선을 돌아 여기에 이르렀고, 다시 곡선을 그리며 까마득한 아래로 흘러갈 것이다.

<계속>

글·사진/박시윤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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