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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평화로운 고래 서식지였던 영일만의 옛이야기 복원해야

구룡포의 포경선 선원이었던 이영식, 김정환 씨와 고래 중매인이었던 최원복 씨의 이야기를 씨줄 날줄로 엮어보면 1950∼1960년대 구룡포 포경업의 윤곽이 눈에 들어온다. 그 역사를 좀 더 명료하게 보기 위해 또 한 사람을 만났다. 구룡포 포경선 선주인 강두수 씨의 아들 강신규 (75)씨다. 강신규 씨의 증언을 통해 구룡포 포경에 관한 의미 있는 내용을 접할 수 있었다.첫째, 1919년생인 강두수 씨는 일제강점기 때 구룡포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던 수산회사에서 근무하다가 광복 후에 그 수산회사의 배를 넘겨받아 포경업을 시작했으며 포경선 3척과 꽁치잡이배 2척을 보유했다.둘째, 1970년 3월 12일 포경어업협동조합이 작성한 포경선 현황에 강두수 씨 소유의 제9영어호(永漁號)와 제13영어호가 있지만 이후 자료에는 보이지 않는다. ‘한국포경사’에는 “1972년에는 제9영어호 및 제13영어호가 퇴출하였다”(435쪽)고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는 포경이 금지될 때까지 제9영어호와 제13영어호를 포함해 5척이 포경선이 고래를 찾아 계속 출항했다. 영어호 외에도 저인망선 등을 개조해 포경선으로 활용한 것이다.셋째, 강두수 씨는 자신 소유의 해승호(海勝號)를 폐선할 1970년 무렵에 일본에서 철조선 도입을 검토했다. 크고 성능 좋은 철조선으로 먼 바다에 나가 더 많은 고래를 포획할 것인지, 아니면 기존의 목조선으로 연근해에서 밍크고래 포획에 집중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다가 후자 쪽을 선택했다.넷째, 포경어업협동조합이 작성한 ‘포경선별·종류별 고래 포획 두수 추이’를 보면 제9영어호와 제13영어호는 밍크고래를 1963년 10두·12두, 1964년 11두·13두, 1965년 9두·11두를 각각 포획했다(위의 책 389쪽). 이 통계는 신뢰성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포경선이 이 정도의 고래를 포획했다는 것은 상식과 거리가 멀다. 포경선이 한 달 평균 한 마리 정도의 밍크고래를 포획해서는 포경선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강신규 씨도 당시 포경선이 출항하면 적어도 밍크고래 한 마리는 포획했다고 말했다.‘한국포경사’에서 제시한 자료와 강신규 씨 증언 사이에 왜 이러한 괴리가 있는 것일까? ‘한국포경사’에서도 “어획고 통계는 그 정당성을 기하기 어려운 것이나 우리나라 포경업에서 고래 포획 통계도 예외는 아니다”(454쪽)라고 하며 이 문제를 짚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포경업을 가장 장기간 경영하였고 1971년 5월부터 1975년 7월까지 포경어업협동조합 조합장을 역임한 백용주 씨의 말에 의하면 통계상의 포획고가 실제 포획고보다 훨씬 적었다. 그가 조합장으로 취임하여 고래 포획 통계를 조사해보았더니 그것이 ‘엄청나게’ 적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과소평가된 이유는 앞서 몇 가지가 거론되었지만 그 가장 큰 이유는 장생포에 양륙(揚陸)되어 그곳에서 판매된 것만 보고되었기 때문이라고 백씨는 말하였다. 포획된 고래는 장생포뿐만 아니라 구룡포, 죽변, 포항 등지에서도 양륙되어 판매되었고 부산에도 소량이 양륙되었다고 한다. 박구병, 위의 책, 454쪽고래 포획 통계는 이러한 정황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다섯째, 강신규 씨는 영일만에 밍크고래가 많았던 것은 크릴새우 덕분이라고 했다. 가을보리가 익어서 고개를 숙이는 5월, 대량의 크릴새우가 영일만으로 유입되었고, 먹이사슬에 따라 밍크고래도 따라왔다는 것이다. 이때 호미곶 인근의 대동배·흥환·발산 주민들은 많은 크릴새우를 어획해 상당한 소득을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영일만에 제철 공장이 건립되면서 해안에 각종 구조물이 구축되었고 이 때문에 크릴새우도 밍크고래도 영일만으로 들어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제철 공장이 들어서기 전에 영일만에 밍크고래가 많았다”고 한 김정환 씨의 증언과 맥을 같이한다.1947년 구룡포 연근해에서 귀신고래 포획돼강신규 씨는 한 장의 사진을 건넸다. 1947년 12월 24일 영어호가 39자(11.8m) 귀신고래를 포획한 기념사진이다. 당시에도 귀한 고래였는지 마을 주민 상당수가 고래 주변에 모여 있다. 한국계 귀신고래는 1965년 한반도 연안에서 5마리가 잡힌 뒤 자취를 감췄다. 2008년부터 국립수산과학원이 귀신고래 사진을 찍으면 500만 원, 혼획(混獲)되었거나 좌초한 개체를 신고하면 1천만 원을 포상금으로 주지만 수령자는 아무도 없다. “귀신처럼 멕시코로 간 ‘한국계 귀신고래’”, ‘한겨레신문’2012. 4. 23. 참조울산 고래박물관에 게시된 ‘우리나라 귀신고래 발견·포획 수량’을 보면 1911년부터 1964년까지 총 1천338마리의 귀신고래가 발견·포획되었다. 특이한 것은 이 자료에 따르면 1933년에 한 마리가 발견·포획되고 15년 후인 1958년에 한 마리가 다시 발견·포획될 때까지 단 한 마리의 귀신고래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1947년 영어호가 포획한 귀신고래는 이 자료에도 누락되어 있는 것이다. 구룡포 연근해에서 귀신고래가 포획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이 사진은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포항의 포경업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포항시의원을 지낸 최일만(84) 전 죽도시장 상인연합회장을 만났다. 최일만 전 회장은 죽도시장의 형성·발전과 삶의 궤적을 함께해온 죽도시장의 산증인이다. 특히 한때 포항-시모노세키 간 수출선을 운영할 정도로 수산업을 꽤 크게 하였고, 이 분야에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갖고 있다.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제강점기에 밍크고래의 근거지였던 포항은 6·25전쟁 후에 포경업이 하향세를 보이다가 1950년대 말에는 자료에서 자취를 감춘다. 최일만 전 회장은 실제로 1950년대에 포항에서는 포경업이 인기가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수요 부족을 꼽았다. 당시 포항에서 고래고기가 유통되기는 했지만 수요가 많지 않았고, 고래고기를 보관할 수 있는 냉동 시설이 부족해서 포경업은 별 매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구룡포는 포경업이 지속되고 있었고 장생포는 포경업이 계속 커지고 있었기에 포항에서 포경선을 계속 보유해야 할 이유가 사라진 것으로 볼 수 있다. 1,300만 년 전 고래 화석이 발견된 포항포항은 고래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2005년에는 1,300만 년 전 돌고래 화석이 국내 최초로 포항에서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이 화석을 분석한 연구 결과는 ‘한국에서 발견된 최초의 돌고래 화석’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국제학술지 ‘커런트 사이언스(Current Science)’에 실렸다. 또한 전(前) 전남대학교 한국공룡연구센터 연구원 민재웅은 “우리나라에서 현재까지 고래 화석[수염고래(Mysticeti), 이빨고래(Odontoceti)]은 포항분지 연일층군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다”고 했다. ‘포항분지 두호층에서 발견된 이빨고래 화석 연구’, 전남대 석사학위 논문, 2013고래와 관련된 대부분의 논문이 장생포를 무대로 발표된 반면, 포항과 관련된 고래 논문은 화석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래 사냥 그림인 반구대 암각화는 약 7,000년 전 신석기시대에 제작되었다. 포항에서 발견된 고래 화석은 1,300만 년 전 신생대 시기로 추정된다. 이런 사실 앞에서 포항은 고래 서사를 어떻게 만들고 전개해야 할까? 흘러가버린 옛이야기로 치부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역사적 사실을 복원하고 미래지향적으로 계승할 것인가.밍크고래의 평화로운 집단 서식지였고 귀신고래와 큰 고래들이 지나다녔던 영일만. 포항은 그러한 역사적·문화적·생태적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기 위해서라도 고래 서사를 깊이 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포항의 고래 관련 자료를 폭넓게 조사하고 관련 인물에 대한 구술 채록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일제강점기 때의 자료를 확보하려면 일본에 있는 자료를 찾아보는 노력도 필요할 것이다. 구술해줄 생존자는 이제 몇 명 남아 있지 않다. 시간이 많지 않다.필자 : 김도형(THE OCEAN 편집위원)

2021-08-11

“하루에 고래 세 마리는 위판되었다”

1937년생인 최원복 씨는 1962년부터 1982년까지 구룡포에서 고래 전문 중매인을 했다. 구룡포의 고래 중매인 중 최연장자로 구룡포의 고래 역사에 대해 얘기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분이다. 김도형(김) : 근황은 어떻습니까?최원복(최) : 시간 나는 대로 궁도장에 나간다. 1985년부터 건강도 챙길 겸 궁도를 하고 있다.김 : 어릴 때 구룡포는 어떤 곳이었는지요?최 : 아버지는 김천 사람이고 어머니는 칠곡 사람이다. 1935년에 부모님이 구룡포로 왔다. 구룡포 북방파제 공사가 마무리될 무렵이 아닌가 싶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정어리가 많이 나고 없는 사람이 살기에는 그렇게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열 살 때 구룡포에 콜레라가 닥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바람에 나도 힘든 인생을 살았다.김 : 고래고기 중매업은 언제부터 하셨습니까?최 : 1962년 군 복무를 마치고 구룡포에서 시작했다. 1968년까지는 고래만 하다가 그 이후로는 다른 생선도 취급했고, 고래고기 중매는 1982년까지 했다.김 : 당시 얘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해주신다면.최 : 1970년대 초반 구룡포에 참치 원양업이 성행했다. 참치 밑밥이 꽁치인데 마침 그때 구룡포가 꽁치 주어장이어서 원양어선에 꽁치 대주는 장사를 1982년까지 했다. 그때 돈을 좀 벌었는데 오징어 장사하다가 다 까먹었다. 1986년에 일본 사람과 ‘선동(船凍) 오징어’(배에서 잡아 바로 얼린 오징어)를 거래해서 얼마간 회복했다.김 : 1970년대는 구룡포가 활황일 때지요?최 : 구룡포와 대보(현 호미곶) 합쳐서 인구가 3만 명이 될 정도로 활기가 있었다. 지금은 구룡포 인구가 만 명도 안 될 거야.김 : 요즘 오징어가 많이 비싸지요?최 : 광복 전에 구룡포에 정어리가 그렇게 많았다고 하는데 다 사라졌고, 명태도 사라졌지. 오징어도 어떻게 되려는지 모르겠어. 오징어가 얼마나 비싼지 최근에 6만 5천원에 한 상자 샀지.김 : 고래 거래하실 때는 밍크고래 위판이 많았겠군요.최 : 그렇지. 밍크고래는 17자(5.1m)부터 25자(7.5m)까지가 가장 많이 잡혔다. 하루에 세 마리는 위판되었다. 그만큼 밍크고래가 많이 잡혔다는 얘기지.김 : 고래고기 가격은 어느 정도였는지요?최 : 1980년대 초반까지 소고기 값의 3분의 1이었다.김 : 고래 중매업은 어땠습니까?최 : 치열했다. 새벽에 수화(手話)로 일하고 나면 진이 다 빠졌다. 수화가 그럴듯해 보이는데 실제로는 정말 힘들다. 그 때문에 집안에서 누가 장사한다고 하면 말리게 된다.김 : 수입은 어느 정도였습니까?최 : 치열하게 경쟁해서 고래를 사들여도 벌이는 신통찮았다. 쌀이 귀할 때 고래고기 장사를 한 덕분에 끼니마다 고래고기를 먹기는 했다. 그때는 구룡포 사람들이 고래고기를 많이 먹었다.김 : 고래고기는 어디에서 많이 팔았습니까?최 : 구룡포시장 좌판에서도 팔았지만 포항 죽도어시장에 가서 많이 팔았다. 여기서 해체한 고래고기를 삶아서 궤짝에 넣은 다음 버스를 타고 포항 가서 죽도어시장 수산회사에 넘겼다.김 : 과거에 포항 가는 길이 힘들었을 텐데.최 : 말도 마라, 길이 얼마나 험했는지. 특히 청림 쪽을 지나갈 때는 정말 힘들었다. 구룡포에서 대구까지 트럭 타고 가는 데 4시간 30분 걸렸으니. 1962년에는 구룡포에서 서울까지 가는 데 15시간이나 걸렸다.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된 후 트럭을 타고 달려보니 장판에 구슬 굴러가는 것 같더라. 구룡포에서 포항 가는 도로가 포장된 후에는 한 번 달려본 다음에 일부러 다시 왕복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김 : 혹시 고래고기를 일본에 팔기도 했나요?최 : 1982년쯤 그러니까 고래고기 장사를 거의 접을 무렵이다. 포항에서 일본 시모노세키 가는 선어(鮮魚) 수출선이 있었다. 아우와 둘이서 고래고기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판로를 찾다가 포항 효창수산을 통해 그 선어 수출선으로 일본에 보냈다. 일본에서 온 영수증을 보니까 내가 판 고래고기 내용이 정확하게 적혀 있었다. 당시 구룡포에도 한 수산업자가 시모노세키 가는 선어 수출선을 갖고 있었다.김 : 포항 쪽 고래 유통에 대해 아시는 게 있는지요?최 : 포항 사정은 시의원을 한 최일만 씨가 잘 안다. 논산훈련소 동기이기도 해서 각별한 사이다.김 : 포경 금지 후에 고래 값은 어떻게 되었습니까?최 : 엄청 올랐다. 나가수(참고래) 한 마리가 몇 년 전에 1억 원 넘게 위판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오죽하면 바다의 로또라 하겠는가. 고래 전문 중매인 최원복 씨. 김 : 일제강점기 포경업에 대해 들은 얘기가 있는지요?최 : 일제강점기 때 장생포 포경선이 구룡포에 와서 고래 위판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물러나면서 그들이 갖고 있던 포경선을 우리 사람들이 넘겨받아 포경업을 계속 이어갔을 것이다.김 : 구룡포에서 포경업을 한 강두수 씨는 어떤 분인가요?최 : 일제강점기 때 구룡포에서 수산회사에 근무하다가 광복되면서 포경선을 넘겨받아 포경업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인심이 좋은 분이었고, 지금 그분 아들이 70대 중반인데 구룡포에 살고 있다.김 : 구룡포읍 행정복지센터 앞마당에 있는 제1동건호는 김건호 씨가 기증했다고 들었습니다.최 : 김건호 씨는 강두수 씨의 생질로 강두수 씨한테 수산업을 배웠다. 70대 중반에 작고했는데, 구룡포 길거리에 벚나무를 심기도 했고 좋은 일을 많이 했다.김 : 수산업 하던 분들이 구룡포 지역사회에 영향을 많이 준 것 같습니다.최 : 그렇게 볼 수 있다. 광복 직후 중·고등학교 개교하고 운영이 어려울 때 수산업 하던 사람들이 학교를 살렸다.김 : 구룡포에서 포경선 탔던 분 중에 생존자는 몇 명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최 :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나. 구룡포에 고래 해체하는 사람도 서너 명 있었는데 모두 돌아가셨다.김 : 요즘 고래고기 전문 식당은 어떤가요?최 : 장사가 괜찮을 것이다. 이문도 좋고 고래고기를 찾는 사람들이 꾸준히 있으니까. 최근에 강구에서 고래가 정치망에 걸려 구룡포의 한 고래고기 식당에서 사왔다고 하더군. 구룡포 어판장에서 해체한 고기를 5만 원어치 사서 친구 여남은 명과 어울려 소주 한잔했는데 소주 한 박스를 비웠다. 소주 안주에 고래고기는 그저 그만이다.김 : 고래고기는 12가지 맛이 난다고 하는데 실제로 어떻습니까?최 : 천만의 말씀, 50가지 맛이 난다. 부위별로 독특한 맛이 있다. 고래를 그냥 삶으면 비린내가 나서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고래 삶을 때 소주와 마늘, 생강, 커피 가루를 넣으면 비린내가 싹 사라진다. 육회는 된장에 찍어 먹어도 맛이 좋다. 나가수는 삶으면 살이 퍼지는데 밍크고래는 살이 제 모양을 유지하고 부드럽다. 고래고기는 소화가 잘되고 많이 먹어도 살찌지 않는다.김 : 맛있는 고래고기를 알아보는 방법이 있는지요?최 : 껍질이 두꺼워야 한다. 껍질이 두꺼우면 살코기에 기름기가 있고, 껍질이 얇으면 살코기에 기름기가 별로 없다. 멸치부터 고래까지 모든 생선은 껍질이 두꺼워야 맛이 좋다.대담·정리 : 김도형(THE OCEAN 편집위원)

2021-08-04

“제철공장이 들어서기 전에는 영일만에 밍크고래가 많았지”

1949년 구룡포 구평리에서 태어난 김정환 씨는 전복, 해삼 등을 잡던 머구리배(잠수부가 바다 밑에서 조개 등을 잡는 배)를 타다가 18세에 포경선을 탔고, 21세에 장생포로 건너가 줄곧 고래를 잡았다. 포경선에서 조리사부터 시작해 3등 세라, 2등 세라, 1등 세라를 거쳐 갑판장까지 했다. 김도형(김) : 어떻게 포경선을 타게 되었는지요?김정환(환) : 아는 사람이 소개해주더군. 마침 한 자리가 비어 있었지. 3년 정도 구룡포에서 목선을 타면서 일을 배웠는데, 철선을 타야 돈을 많이 벌 수 있어서 장생포로 갔어. 목선과 철선은 수입에서 차이가 꽤 났거든.김 : 구룡포에서 포경선을 탈 때 어디로 다녔는지요?환 : 북쪽으로는 호미곶 지나서 강구, 축산으로 다녔고, 남쪽으로는 양포, 감포로 다녔지.김 : 과거에 영일만에 밍크고래가 많았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어땠나요?환 : 제철공장이 들어서기 전에는 영일만 쪽에 밍크고래가 많았지. 감포, 호미곶, 칠포, 죽변에도 꽤 있었고.환 : 장생포에서 철선 탈 때는 어디로 다녔는지요?환 : 2월에 군산 어청도로 갔고, 5월이 되면 동해에서 움직였지. 그러다가 다시 전라도 가서 조업했고, 여름이 되면 나가수(참고래) 같은 큰 고래를 잡으러 동해로 왔지. 울릉도, 독도 쪽에 100자(30m)짜리 나가수가 나타났거든. 서해 쪽으로는 처음에 어청도를 다녔는데 거기가 전진기지였던 셈이지. 그다음에 흑산도로 갔고, 백령도에도 갔는데 3년 정도 지나니 못 오게 하더군. 그래서 항구에는 못 들어가고 그 근방에서 고래를 잡았지. 격렬비도 근처에도 갔고 고래 추격하느라 산둥반도 가까이 갔는데 중국에서 간섭을 안 하더군. 중국 배를 ‘짱구리선’이라 불렀는데 근처에 가면 연탄 냄새가 났어.김 : 고래 특성을 얘기해주신다면.환 : 밍크고래는 이것저것 다 잘 먹는데 나가수는 ‘곤지(새우 새끼)’만 먹어. 그래서인지 몰라도 밍크고래보다 나가수가 맛이 좋지. 12월이 되면 돌고래가 북쪽에서 어장 쪽으로 붙어서 내려오는데 전복, 해삼을 먹는다고 하더군. 1월이 지나면 부산 앞바다를 지나 대마도 쪽으로 간다고 들었어. 우연히 작은 돌고래가 잡혀서 먹어봤는데 맛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 껍질이 두껍고 전복처럼 쫀득쫀득하지. 돌고래는 참 귀해. 텔레비전에 나오는 돌고래는 ‘곱시기’라고 하는데 뱃사람이 말하는 돌고래와는 달라. 솔피(범고래)라고 있는데, 이놈은 밍크고래나 곱시기도 잡아먹어. 대단한 놈이지. 멀리서 솔피가 나타나면 나가수나 밍크고래, 곱시기는 도망가버려. 몇 번 잡아봤는데 일고여덟 마리가 떼지어 다녀. 수놈은 한 마리뿐이야. 돛대지. 아주 커. 나머지는 암놈이고. 솔피 한 놈이 밍크고래를 잡으면 그 주변으로 다른 놈들이 빙 둘러서서 살을 이빨로 물어뜯어. 밍크고래가 바다 밑으로 내려가면 안 되니까 한 놈은 밍크고래 밑에서 떠받치고 있고. 솔피 무리가 나타나서 총을 쏘아 한 마리 맞으면 바다에 피가 흥건할 거 아냐. 그런데 다른 솔피들이 도망을 안 가고 그 옆에 붙어 있어. 그러면 포수가 또 총을 쏘게 돼. 솔피는 바다의 왕이지.김 : 고래가 등장하는 영화를 보면 망통에서 쌍안경으로 고래를 관찰하는데 실제로는 어떻습니까?환 : 쌍안경으로는 안 되고 두 눈으로 살피지. 경험이 있어야 하고 시력이 좋아야 해. 고래는 숨 쉬러 물 위로 한 번 올라오면 서너 번 더 올라와. 망통에서 그걸 보게 되면 고래 근처로 빠르게 접근해서 총을 쏘지. 고래도 사람처럼 허파로 숨을 쉬잖아. 처음에는 작살을 맞고도 잘 가다가 시간이 지나면 퍼지고 말지.김 : 포경선에서 선원들 사이에 역할 분담은 어떻게 했습니까?환 : 갑판장은 오래 앉아 있고, 기관장과 선장이 교대 근무를 하지. 세라는 두 시간씩 교대하고. 고래를 추격할 때는 갑판장이 마이크를 잡고 이쪽으로 가라, 저쪽으로 가라 지시해. 포경선에서는 포수가 대장인데 대개 오십이 넘어야 될 수 있어. 김 : 목선과 철선은 어느 정도 차이가 있습니까?환 : 구룡포 목선은 해승호가 15t, 영어호가 10t밖에 안 되고 속도도 느려서 멀리 못 갔지. 목선으로는 큰돈 벌기 힘들어. 철선은 60t에서 80t 정도에 속도도 빠르고 멀리 갔지. 내가 구룡포에서 목선을 탈 때 장생포에는 일본에서 소나를 도입한 철선 동방호가 한 해에 100마리 이상 잡았어. 그때는 철선 타는 게 하늘의 별 따기였어. 직장 다녀서는 그만큼 벌 수 있나. 턱도 없지. 또 목선은 배가 작아 배 위에서 고래를 깰 수 없으니 끌고 들어왔지(김정환 씨는 고래 해체를 ‘깬다’고 표현했다). 철선은 웬만한 고래를 배 위에서 다 깨는데 진짜 큰 고래는 어쩔 수 없이 와이어에 감아서 끌고 들어왔어. 고래를 배 위에서 깨서 운반선에 옮겨 보낼 때도 있었고.김 : 포경선 탈 때 수입은 어느 정도였습니까?환 : 구룡포에서는 월급 없이 수당으로 받았고, 장생포에서는 월급에 수당이 붙었지. 22자(6.6m) 넘으면 두 마리 계산을 했고. 장생포에서 포경선 타고 서해 다닐 때는 고래를 워낙 많이 잡아서 월급보다 수당이 더 많았지. 이따금 부수입도 생겼어. 포경선에서 고래고기를 절여놓았다가 장생포에 오면 뒷거래를 했지. 전라도 사람들은 고래고기를 잘 먹던데 거래는 안 하더군. 전라도 가면 그쪽 배 옆에 우리 배를 붙여서 우리가 잡은 고래고기하고 그쪽에서 잡은 가자미, 조개, 꽃게를 바꾸기도 했지.김 : 고래 가격은 어느 정도 되었습니까?환 : 15자(4.5m) 새끼 밍크는 150만 원에서 200만 원, 20자(6m)는 250만 원에서 300만 원 정도 했어. 요즘은 크기는 물론 선도나 껍질 두께에 따라 가격 차이가 나지.김 : 포경선이 다른 어선에 비해서는 안전하다고 하더군요.환 : 포경선은 노는 날이 많아. 비 오고 안개 끼면 앞이 안 보이니 바다에 나갈 수 없고, 파도가 높으면 배가 속도를 못 내고 위험해서 출어를 못 하지. 밤에도 보이는 게 없으니 움직일 수 없고.김 : 그래도 사고 위험은 있지 않을까요?환 : 나도 죽을 고비가 한두 번 있었어. 갑판장 시절에 포수가 총을 쐈는데 헛방을 했어. 키를 총 쏜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순간 그렇게 못 한 거야. 그러자 배 위에 허술하게 놔둔 큰 밍크고래가 한쪽 방향으로 밀려서 배가 확 쏠려버렸지. 빨리 키 풀어라 고함지르고 난리가 났어. 우와 겁나데. 또 한 번은 항구에 정박해둔 배에서 합선으로 불이 나 곤욕을 치렀지. 아무리 그렇다 해도 다른 배에 비하면 안전한 편이야.김 : 포경선 탈 때 추억이라 할까요, 한 토막 얘기해주신다면.환 : 벌이가 괜찮을 때 흑산도 가서 돈 좀 썼지. 흑산도가 뱃사람들의 수도 아닌가. 그때 한 세월 갔어. 추억이라고 하기엔 그렇고, 1970년 4월 서해 격렬비도 앞바다에서 간첩선 격침시킬 때 바로 옆에 있었지. 조명탄이 대낮처럼 하늘을 밝히고 정말 살벌했어.김 : 포경선 타면서 기분 좋았던 때는 언제입니까?환 : 뱃사람이야 고기를 많이 잡을 때가 가장 좋지. 나가수 같은 큰 고래를 잡으면 만선기를 달고 항구로 들어가지. 뱃고동 세 번 울리면서. 그래도 너무 많이 잡으면 지쳐. 고래는 무게가 있으니까. 전라도 가서 하루에 밍크고래 서너 마리 잡으면 몸도 힘들어. 고래 잡는 것도 힘들지만 그걸 배 위에서 다 깨야 하니 얼마나 지치겠어. 소금에 절여놨다가 운반선에 넘겨주는 일이 또 힘들어. 배에 기름도 넣어야 하고 얼음도 실어야 하고, 밤새 선원들이 그 일을 하다 보면 낮에는 꾸벅꾸벅 졸다가 배 옆으로 고래가 지나가도 모르지.김 : 포경 금지되고는 무슨 일을 하셨는지요?환 : 작은 작업선 타다가 형제들이 힘든 뱃일은 그만하라고 해서 철강 공단에 들어갔어. 배도 팔아치우고 용접 기술을 배워 한동안 잘했지. 10년을 못 채웠는데 IMF가 터져 공단에 일거리가 없는 거라. 공치는 날이 한두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 도무지 알 수가 있나. 얼마 갖고 있지 않은 재산은 자꾸 까먹고. 도저히 안 돼 사표를 내고 다시 배를 탔지. 시간이 좀 지나서 철강 공단의 그 회사에서 다시 일 좀 해달라고 연락이 왔는데 어떻게 다시 가겠어. 계속 배를 탔지.김 : 구룡포에서 포경선 탔던 분들 소식은 듣는지요?환 : 포수나 선장 하던 분들은 거의 돌아가셨고, 갑판장 하던 분들도 얼마 남아 있지 않을 거야.김 : 뱃일이 힘들 텐데 앞으로도 계속하실 겁니까?환 : 나이 들어도 놀 수야 있나. 지겨워서 놀지도 못해. 뱃일을 하는 데까지 해야지.대담·정리 : 김도형(THE OCEAN 편집위원)

2021-07-28

“구룡포에서 포경선 탈 때 한 해에 고래 50마리 잡아”

구룡포에서 포경선 선원 두 명을 만났다. 먼저 소개하는 이영식 씨는 1936년 구룡포 구평리에서 태어나 17세에 구룡포에서 포경선을 처음 탔다. 10년 동안 구룡포에서 고래잡이를 하다가 장생포로 건너가 선장까지 했고, 국제포경위원회(IWC)가 1986년부터 전면적으로 고래잡이를 금지하면서 포경선에서 내렸다. 김도형(김) : 여러 종류의 어선이 있는데 포경선을 탄 이유가 궁금합니다.이영식(이) : 일반 어선을 타다가 포경선을 탄 사람도 있는데 나는 선원 생활을 포경선에서 시작했다. 무엇보다 포경선이 다른 어선보다 안전한 편이었다. 비가 내리거나 바람이 강하게 불면 바다에 나가지 않았고 야간작업도 거의 없었다. 작은 사고는 이따금 있어도 큰 사고는 드물었다.김 : 처음 탄 포경선은 어떤 배였습니까?이 : 구룡포 강두수 씨가 선주인 영어호(永漁號)와 해승호(海勝號)를 탔다.김 : 구룡포에서 포경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혹시 알고 계신지요?이 : 광복 전에 강두수 씨가 구룡포에서 일본인 선주 사무장을 하다가 광복되면서 포경업을 했다고 들었다. 목선(木船)에 망통(고래를 발견하기 위한 전망대)과 총을 달아 포경선으로 썼다.김 : 포경선에는 몇 명이 탔습니까?이 : 목선은 보통 일곱 명이고, 나중에 장생포에 들어온 철선(鐵船)은 여덟 명에서 열세 명 정도 된다. 목선에는 포수, 선장, 기관장, 갑판장, 1등 세라 두 명, 2등 세라 한 명이 탔다. 철선에는 3등 세라도 있고, 고래 해체를 전담하는 해부장도 있었다.김 : 포경선은 포수 역할이 중요하겠지요?이 : 포수가 대장이다. 선장보다 포수가 높다. 선장은 배를 좀 탄 사람 중에 시력이 좋은 사람이 맡았고 실제로 포수가 다했다. 월급도 포수가 가장 많이 받았다. 그런데 포수는 면허가 없다. 선장과 기관장은 면허가 있어야 했다. 선박 검사를 받을 때는 선장, 기관장 면허가 필요했다. 혹시 문제가 생기면 법적인 책임은 선장이 지고, 실질적인 책임은 포수에게 있었다.김 : 포경선의 특징을 얘기해주신다면.이 : 세계 포경의 선구자는 노르웨이다. 일본이 그걸 배웠고 우리가 그걸 또 배웠다. 그래서 포경선에서는 일본어를 많이 쓰고 영어도 좀 섞어 쓴다. 배 방향을 오른쪽으로 바꿀 때는 ‘시나볼’, 왼쪽은 ‘보루’라 했고, 총을 오른쪽으로 향할 때는 ‘미기’, 왼쪽은 ‘히라이’라 했다. 포경선은 무리 지어 다니지 않고 각자 알아서 움직인다. 새벽 4시 반쯤 나가서 해가 지기 전까지 고래를 찾아다녔다. 망통에 두세 사람이 올라가서 고래를 찾았다. 쌍안경으로는 고래를 볼 수 없다. 불과 1, 2초 사이에 고래가 나타났다 사라지는데 쌍안경으로 보이겠나. 정신 바짝 차리고 바다를 살펴야 했다. 고래가 입을 치밀 때나 꼬리를 끄덕 들 때 총을 쏜다. 경험 많은 포수들은 헛방이 거의 없었다. 소나(SONAR, 음파탐지기)가 들어오면서 사람이 망통에 올라가는 일이 없어졌다. 조업을 나가면 가까운 항구에 정박하고, 밤에는 고래를 잡을 수 없으니까 야간작업은 거의 없었다. 해 질 녘에 고래를 딱 한 번 잡아봤다. 장생포에서 선장 할 때였는데, 고래가 배에 딱 붙어 왔다. 운이 좋은 날이었다.김 : 포경선에 달려 있는 총은 어떤 종류인가요?이 : 50밀리(㎜)에서 90밀리까지 있다. 구룡포 목선은 50밀리였다. 60밀리도 있긴 했는데 70밀리가 가장 많았다. 70밀리는 일제 때 쓰던 걸 부산에 가서 수리해 썼다. 80밀리는 울산에 있는 공업사에서 만들었고. 90밀리는 이승만 대통령 때 우리 해역을 넘어온 일본 포경선에서 압수한 것이었다.김 : 고래는 언제 잘 잡혔는지요?이 : 밍크고래는 5월에 가장 많이 잡혔다. 6, 7월에는 나가수(참고래)도 꽤 잡혔다.김 : 고래 해체는 어떻게 했는지요?이 : 목선은 고래를 끌고 와서 항구에서 해체하고, 철선은 배 위에서 바로 해체했다. 목선도 15자(4.5m) 정도의 작은 밍크고래는 배 위에서 해체하기도 했다. 장생포에는 정식 해체장이 있었고, 구룡포에는 해체장이 없어서 위판장에서 해체했다.김 : 당시 잡았던 고래는 어떤 게 있습니까?이 : 밍크고래가 가장 많았고, 나가수, 돌고래도 있었다. 놀이공원에서 보는 돌고래는 진짜 돌고래가 아니라 일본 말로 ‘고시’라고 하는데 뱃사람들은 별로 안 쳐주었다. 진짜 돌고래는 ‘고꾸’라고 불렀다. 길이가 50자(15m)나 됐고 나가구 가격의 두 배에 거래될 정도로 비쌌다.김 : 돌고래 얘기를 좀 더 해주시지요.이 : 돌고래는 음력 10월 말 시베리아 쪽에서 한반도 동해안으로 오는데, 연안에 딱 붙어서 이동했다. 이듬해 봄 남쪽으로 돌아서 다시 북쪽으로 갔다. 고래 중 가장 맛있고 껍질이 두껍고 기름도 많이 나왔다.김 : 밍크고래는 크기가 어느 정도였는지요?이 : 새끼는 10자(3m)보다 조금 더 크고, 대개 14자(4.2m)에서 20자(6m) 정도 됐다. 혜성호를 탈 때 포항 용덕리 앞바다에서 29자(8.7m)를 잡았는데 그게 가장 컸다.김 : 나가수는 어땠나요?이 : 나가수는 태평양에서 자라다가 성장하면 우리 연안에 나타났다. 아무리 적어도 40자(12m)는 되었다. 포수들은 밍크고래보다 참고래 잡기가 힘들다고 했다. 힘이 좋고 빨리 움직이기 때문에 조준하기가 힘들 수밖에 없다. 통상 한두 마리가 다니는데 드물게 20~30마리가 몰려다닐 때도 있었다.김 : 구룡포 시절 고래를 얼마나 잡았는지요?이 : 1960년대 초 영어호 탈 때는 영일만은 물론 강원도 주문진, 경북 죽변, 경남 욕지도를 두루 다니면서 한 해에 밍크고래 50마리 가까이 잡았다.김 : 고래 가격은 어느 정도였나요?이 : 좀 큰 밍크고래는 1천만 원 정도 했다. 가장 맛있는 부위는 일본 말로 ‘오노미’라 하는 꼬리살이다. 일본 사람들이 그걸 좋아했는데 양이 얼마 안 나왔다. 처음에는 국내에서 소비되다가 일본에 수출했다. 수출하는 고래고기는 아무래도 좀 비쌌다. 울산 사람들이 구룡포 고래고기를 사들여서 일본에 수출하기도 했다. 구룡포 어판장에서 솥 걸어놓고 삶아서 팔기도 하고, 고래고기집도 몇 군데 있었다.김 : 구룡포 포경선 선원은 어느 지역 사람이었나요?이 : 구룡포와 흥환, 대보, 삼정 사람들이 많았고, 용덕, 칠포 사람도 있었다.김 : 포경선을 타면 수입은 어느 정도 되었는지요?이 : 구룡포에서는 만 원 수입이 생기면 선원은 2천200원을 받았다. 장생포에서는 기본급에 수당이 따로 붙었다.김 : 장생포 쪽이 후했나 봅니다.이 : 그랬다. 내가 장생포로 옮긴 것도 그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장생포 포경선이 목선에서 철선으로 바뀌고 일본에서 소나가 들어오면서 고래 잡는 숫자가 구룡포와 차이가 많이 났다. 그러니 선원들에게 돌아가는 몫도 구룡포보다 장생포가 많았던 것이다.김 : 포항 쪽 포경선 얘기는 기억나는 게 없는지요?이 : 구룡포보다 포항에 포경선이 먼저 있었다. 장생포가 포경기지로 크고 포항은 사업이 잘 안 되니까 구룡포보다 먼저 포경업을 접은 게 아닌가 싶다. 선배들한테 들은 얘기인데, 포항 출신 김성룡 공군 참모총장이 한때 포항에서 포경 회사 사무장을 했다. 광복 전에 일본에 있다가 광복이 되고 포항에 왔는데, 그때 잠시 그 일을 했다는 얘기다.김 : 구룡포에 포경선은 언제까지 있었는지요?이 : 영어호가 포경 금지될 때까지 남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김 : 구룡포에서 포경선 탔던 분들 근황은 어떻습니까?이 : 살아 있는 사람이 다섯 명 정도 될까 싶다. 나이가 있으니까 아프기도 하고 자주 보지는 못한다. 나머지는 다 고인이 되었을 거다. 김 : 포경선 타고 어디까지 가봤는지요?이 : 구룡포 목선은 강원도 주문진에서 통영 욕지도까지 갔다. 장생포에서 철선 탈 때는 흑산도, 어청도까지 갔다. 어청도에는 해체된 고래를 운반하러 가기도 했다. 그걸 부산 가서 팔았다. 선배들 얘기가 산둥(山東)반도 쪽에는 물 반 고래 반이라 했다. 소나가 들어오면서 서해 고래를 엄청 잡았다. 그때 중국에는 포경선이 없었으니 오죽했겠나.김 : 포경선 탈 때 언제 가장 기분이 좋았는지요?이 : 포경선 탄 사람은 다 그랬겠지만 나 역시도 큰 고래 잡아서 만선기 달고 고동 울리면서 항구에 들어갈 때가 최고였다.김 : 고래 잡으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이 : 1985년 일본 근해에서 밍크고래 여덟 마리를 봤다. 암놈이 젖 떨어지고 새끼 가질 때 되면 수놈이 그걸 알고 몰려든다. 암놈 한 마리에 새끼 한 마리, 그리고 수놈 여섯 마리 도합 여덟 마리를 한꺼번에 다 잡았다.김 : 구룡포읍 행정복지센터 앞마당에 있는 포경선은 어떤 배입니까?이 : 10t쯤 된다. 원래 포경선은 아니고 일반 어선에다 망통 올리고 70밀리 포를 달았다.김 : 혹시 사고 경험은 있는지요?이 : 장생포 시절에 명신호 선장을 했는데, 부산 앞바다에서 충돌 사고가 나서 두 사람이 죽었다. 큰 사고였다. 내가 탄 배는 아닌데, 창원호라고 장생포 배가 양포 앞바다에서 사고 난 적도 있다. 고래가 보여서 총을 쐈는데 헛방이 되었고 롤러로 감다가 제대로 안 감겼다. 그 바람에 창살이 튀어서 선원이 즉사하고 말았다.김 : 포경이 금지된 후에 보상은 얼마나 받았습니까?이 : 장생포에서 포경선 선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보상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단체행동을 해야 했고 돈도 모았다. 예산은 법이 있어야 만들 수 있는데 포경선 보상을 해줄 수 있는 법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보상금이 나왔는데 기본 100만 원에 경력 30만 원을 더해 130만 원을 받았다. 그런데 소문은 5천만 원 받았다고 났다. 포경 금지 후에 일본이 고래를 잡으니 우리도 잡자는 얘기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대담·정리 : 김도형(THE OCEAN 편집위원)

2021-07-26

밍크고래의 집단 서식지였던 영일만

포항 남구 구룡포읍 행정복지센터 앞마당에는 한 척의 어선이 전시되어 있다. 제1동건호라는 명칭의 어선이다. 뱃머리에 총이 달려 있어 한눈에 포경선임을 알 수 있다. 작고한 구룡포 유지 김건호가 기증한 이 배는 구룡포가 포경 기지였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다.흔히 고래 하면 울산 장생포를 떠올린다. 지난 2008년 고래문화특구로 지정된 울산 장생포에는 고래박물관, 고래문화마을, 고래바다 여행선 등 다양한 고래 관광 인프라와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센터가 들어서 있다. 국내 고래 관련 논문을 보더라도 대부분 울산 장생포를 무대로 작성되었다.그렇다면 포항과 구룡포는 어떠한가? 포항과 구룡포에도 과거에 고래가 많았고 포경업이 활발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이야기의 흔적이 제1동건호이고 포항과 구룡포의 고래고기 전문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이야기를 입증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자료는 빈약하고 연구논문은 전무한 실정이다. ‘포항시사’, ‘구룡포수산업협동조합사’ 등에 포경 자료가 일부 있으나 그 실체를 보여주는 데는 한계가 있다.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포항과 구룡포의 포경에 관한 역사적 실체를 확인하고, 이를 통해 이 지역 고래의 분포와 포경의 연구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쓰였다. 다행스럽게도 한국 포경에 관한 독보적 저작인 박구병의 ‘한국 포경사’(수산업협동조합중앙회, 1987)에서 포항과 구룡포의 포경에 관한 특기할 만한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이 글에서는 우선 ‘한국 포경사’를 중심으로 포항과 구룡포의 포경 역사를 정리하고, 현재 구룡포에 거주하고 있는 고령의 포경선 선원 2명, 고래 전문 중매인 1명과의 대담을 싣는다. 19세기부터 고래 무덤이 된 동해포경업은 19세기 내내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조명용 램프 연료로 고래기름을 쓰는 방법이 고안되면서 고래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고래 뼈는 여성용 코르셋으로, 수염은 칫솔 등으로 사용되는 등 버릴 부분이 하나도 없을 만큼 고래 한 마리의 유용성은 대단히 높아 고래 관련 제품, 고래기름 없는 생활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다케다 이사미, ‘바다의 패권 400년사’, AK커뮤니케이션즈, 2021, 72∼73쪽 참조).이러한 이유로 고래의 천국이던 바다는 고래의 무덤이 된다. 동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 선조들은 동해를 ‘경해(鯨海)’라 부를 만큼 동해에 고래(鯨)가 많았지만 조선 시대까지 포경은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이 동해에 진출하면서 양상은 달라진다. 1849년 약 120척의 미국 포경선은 동해를 거침없이 드나들었고, 19세기 말에는 일본과 러시아의 포경선이 동해에서 각축전을 벌인다. 조선 정부도 뒤늦게 포경에 눈을 뜨고 1883년 3월 김옥균을 동남제도개척사겸관포경사(東南諸島開拓使兼管捕鯨事)로 임명하지만, 의미 있는 활동을 하지는 못했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데 이어 1910년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면서 동해의 고래를 독차지한다. 영일만 근처에서 수많은 밍크고래 포획포항이 한국 포경사에서 주요한 무대로 등장하는 시점은 1940년이다. 한일병합 이후 일본은 울산, 제주도, 대흑산도, 대청도, 유진, 장전 등을 근거지로 참고래, 대왕고래, 향고래, 돌고래, 보리고래, 귀신고래, 긴수염고래 등을 대거 포획하다가 1940년부터 밍크고래와 해돈(海豚)으로 눈을 돌린다. 1937년에 시작된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식량 등 각종 물자가 부족해지자 그 대응책으로 수산업 분야에서는 종래 포경업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소형 고래인 밍크고래와 해돈류를 잡기 시작했다. 태평양전쟁 후에는 이러한 시도가 더 강화되었다. 박구병은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밍크고래, 해돈 대상의 포경업은 비록 소규모 경영이고 일본인 주도의 것이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한국에 소재한 회사 ‘조선수산개발주식회사’가 한국에 선적을 둔 포경선을 사용하여 행한 포경업이었다는 점에서 포경사에서 별도의 장을 할애하여 서술할 만한 의의를 지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구병, 위의 책, 312쪽조선수산개발주식회사는 처음에 시험·조사 어로(漁撈)의 명목으로 포경업을 시작하는데, 여기에 동원된 포경선은 18t 규모 제1호환(鯱丸), 5t 규모 제1환일환(丸一丸), 16t 규모 제2환일환이다. 이 세 척의 소형 포경선은 선체가 경쾌하여 방향 전환이 용이하고, 선상에서 총을 쏘아 강철 작살로 고래를 사살할 수 있다.이들 포경선은 모두 포항에 근거지를 두고 영일만을 중심으로 조업하였다. 1941년 4∼5월에 첫 출어를 하는데 영일만의 만구(灣口)와 만내(灣內)에서 가장 많은 밍크고래를 잡았다. 이 점에 대해 박구병은 밍크고래 자원 연구에서 참고할 가치가 큰 자료라 하였다. 조선수산개발주식회사가 작성한 1941년 월별 밍크고래 포획 두수(頭數)를 보면, 1941년 4월부터 12월까지 제1호환이 84두, 제1환일환이 37두, 제2환일환이 61두이며, 그중 제1호환이 영일만 근처에서만 무려 62두를 포획하였다. 이 결과를 보면 영일만 근처에 수많은 밍크고래가 서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밍크고래의 크기는 6∼7m 정도가 가장 많았다. 세 척의 포경선은 이후에도 포항을 근거지로 계속 활동했으며, 1941년 182두, 1942년 240두, 1943년 183두, 1944년 168두의 밍크고래를 포획하였다. 포경기지에 고래처리장은 필수 시설이다. 1941년 7월 1일자로 조선어업보호취체규칙 제8조에 규정된 고래처리장 설치에 관한 허가를 받는데, 그 장소는 포항을 비롯해 속초, 장전, 덕원에 있으며 처리장 면적은 각 50평이었다.광복 후에도 포항은 밍크고래의 근거지조선수산개발주식회사는 일제강점기에 포항에 주재소를 두었고 여기에서 포경 업무를 담당하였다. 광복 이후에 이 회사는 귀속 사업체로 존속되었으며 포항 주재소는 출장소로 격상되었다. 밍크고래 포경업은 미군정청의 방침에 따라 두세 척의 어선을 인수받아 포항을 근거지로 계속되었다. 포항 출장소가 작성한 1946년 7월 1일부터 1947년 3월 18일까지 제11대경환(大慶丸)호가 동해안을 주어장으로 밍크고래를 포획, 판매한 실적을 보면 39두 포획에 34두를 영일어업조합에서 판매하였다. 이 자료를 볼 때 광복 후에도 포항은 밍크고래의 근거지였음을 알 수 있지만 6·25전쟁 후에 상황은 서서히 변한다.1952년 말 부산수산대학 재학생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19척의 포경선 중에 포항에는 원문길 소유의 제3해산호(海産號), 나원신 소유의 제3호호(鯱號)가 있고, 구룡포에는 강두수 소유의 해승호(海勝號), 제9영어환(永漁丸)이 있다. 3년 후 1955년경 부산수산대학 재학생이 다시 조사한 자료에는 국내 19척의 포경선 중 포항에 안달문 소유의 해덕호(海德號), 구룡포에 강두수 소유의 해승호(海勝號), 제9영어호(永漁號), 주길호(住吉號)가 있다. 1959년 한국포경어업수산조합이 작성한 포경업자 현황에는 구룡포 강두수가 있으나 포항의 포경업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자료를 종합해보면 포항은 6·25전쟁 후에 포경업이 하향세를 보이다가 1950년대 말에 공식 자료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구룡포는 강두수 중심으로 포경업이 자리를 잡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울산 장생포에 밀리는 구룡포 포경업1962년 한국포경어업수산조합이 작성한 조합원별 포경선 현황에는 강두수 소유의 제9영어호, 제13영어호가 있으며, 이 해에 제9영어호는 밍크고래 12두, 제13영어호는 14두를 포획한다. 일제강점기에 비해 포획 두수가 크게 줄어든 것이다. 8년 후 1970년 3월 12일 포경어업협동조합이 작성한 포경선 현황에는 총 22척 중 제9영어호와 제13영어호가 있지만 이후 공식 자료에는 보이지 않는다.1970년의 이 현황은 포경 역사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69년 6월 건조된 동방수산 소유의 제1동방호, 제3동방호, 제5동방호가 새롭게 등장하는데 세 척 모두 철조선(鐵造船)에 81.9t, 450마력의 위용을 갖추고 있다. 그에 비해 1935년에 건조된 제9영어호와 1953년에 건조된 제13영어호는 목조선(木造船)에 17t 미만, 50마력 미만에 불과하다. 울산 장생포에는 큰 자본이 유입되면서 최신식의 대형 포경선이 투입된 반면, 구룡포는 노후화된 소형 포경선으로 지탱하면서 두 지역은 경쟁력에서 큰 차이가 난다. 이에 따라 구룡포의 포경선 선원들도 울산 장생포로 이동하게 되고, 구룡포는 포경기지의 명성을 차츰 잃게 된다.제9영어호와 제13영어호가 공식 자료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구룡포 포경업의 명맥이 끊겼다고 단정할 수 없다. ‘구룡포수산업협동조합사’와 구룡포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1970년대에도 구룡포에서 포경은 계속 이루어졌고, 당시 구체적 상황에 대해서는 조사가 필요하다. 포항과 구룡포에서 고래 위판이 활발하였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포경선이 사라진 포항은 물론 구룡포도 고래 위판으로 한동안 각광을 받았고, 이곳에서 위판된 고래고기는 일본으로 수출되기도 했다. 포항과 구룡포의 고래 이야기는 아직도 많은 궁금증을 품은 채 계속 이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구룡포에 거주하고 있는 포경선 선원과 고래 전문 중매인의 육성을 통해 그 궁금증의 일부를 풀어보고자 한다.글/김도형 THE OCEAN 편집위원

2021-07-21

포항 해녀의 문화적 가치에 대한 연구 필요

2006년부터 제주도는 해녀를 ‘사라질 위기에 처한 공동체’로 규정하고 지속 가능한 해녀 보존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해녀가 사라지면 해녀 문화가 사라지므로 해녀 문화 가치 정립을 위한 기록 사업을 추진하고 조례 제정을 통해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지원 사업을 마련하였다.2009년에는 ‘제주특별자치도 해녀 문화 보존 및 전승에 관한 조례’를, 2012년에는 ‘제주특별자치도 해녀 문화콘텐츠사업 진흥 조례’를 제정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밑거름이 되어 제주 해녀는 2015년 제1호 국가중요어업유산으로 지정되었고, 2016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네스코는 제주 해녀 문화가 맨몸으로 물질해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친화적인 물질 방법, 바다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경험, 해녀 공동체 문화가 미래사회로의 지속가능한 발전 모델이라는 인류의 문화적 유산으로 평가하였다. 해녀 문화는 인류 모두의 상징과 가치를 반영하는 해양 문화로 제주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어업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경북 해녀의 문화적 가치 정립되어야해녀는 자연과 공존하는 삶을 보여준다. 공기 공급 장치 없이 숨을 참고 바다 깊이 잠수해 해산물을 채취하고 스스로 남은 산소의 양을 감지하고 수면까지의 잠수 시간을 조절한다. 바다 속 지형과 해산물의 서식처에 대한 지식을 겸비하고 생태 환경에 대한 민속 지식은 해녀의 몸과 머리에 각인되어 있다. 마을 어장을 자율적으로 관리하며 채취기 잠수 시간, 해산물 크기를 규정하고 물질 작업에 필요한 기술과 도구를 통제한다. 물질하는 바다 속을 ‘바다밭’으로 인식하여 해안가와 조간대(潮間帶)에서 공동으로 잡초를 제거하고 소라나 전복 종묘를 마을 어장에 뿌리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해녀는 전국에 분포되어 있다. 경북 해녀는 제주도 다음으로 많고 내륙 시·도 중에서 가장 많다. 경북 해녀 중 70% 이상은 호미곶과 구룡포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어 이곳이 경북 해녀 어업의 발상지임을 추측할 수 있다. 경북 해녀는 미역 어장을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1970년대 해녀 잠수복인 고무옷이 도입됨에 따라 기혼 여성, 30~40대의 여성이 물질을 배워 해녀가 되었다. 제주 해녀가 10대부터 해녀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면 경북 해녀는 기혼 여성이 자식을 키우기 위해 해녀 어업을 선택하고 자발적인 노력으로 해녀가 되었다는 점에서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경북 해녀는 제주 해녀와 동일한 물질 기술을 가지고 있으나 해녀로 성장하기까지 훈련과정이 다르고, 바다 자원에 대한 인식도 다르다. 따라서 포항을 중심으로 경북 해녀의 문화적 가치 정립을 위한 체계적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며 그 가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책임감 강한 어머니상포항에서는 결혼한 30~40대 여성이 물질을 배워 해녀가 되었다. 해방 후 우뭇가사리가 중요 수출 품목이 되면서 1948년부터 구룡포, 양포, 대포, 청하, 축산, 영해, 감포 등지에서 2천여 명의 제주 해녀가 경북어업조합의 지원으로 우뭇가사리 채취 작업을 하였다. 제주 해녀의 집단 이동과 어업으로 경북 어촌 여성들은 수산물의 가치를 알게 되었고 해조류 채취에 참여하였다. 1960년경 어머니를 따라 바다로 나간 영덕군 노물리 김 해녀는 “엄마 파도 온다. 들어온나”라고 하며 우뭇가사리를 채취하는 어머니를 겁에 질려 불렀다고 한다. 그렇게 자란 그녀도 해녀가 되었다.포항 지역 어촌 여성들은 미역, 전복, 성게, 문어 등을 채취하면 돈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해녀를 직업으로 선택하였다. 제주에서는 대개 초등학교 졸업 후에 어머니나 직계가족으로부터 해녀 수업을 받고 해녀 사회로 입문하지만, 포항에서는 결혼한 여성이 스스로 물질을 익혀 해녀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포항 등 경북 해녀는 어머니로서 책임감, 생계를 위해 스스로 물질을 익혔다는 점에서 제주 해녀와 다른 문화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책임감이 강한 ‘어머니 해녀상’을 경북의 해녀 문화 콘텐츠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자랑스러운 직업관경북 해녀는 1970년대 해녀복이 고무 잠수복으로 대체되면서 해녀로서 직업관을 가지게 되었다. 1985년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물질을 시작한 33살의 포항 해녀는 “나는 해녀가 싫다 이런 거 없어요. 그렇게 재미있어. 난 바다가 재미있어. 우리 해녀들 다 글타는데. 왜냐하면 땅에서 하는 일은 시간이 지루하잖아. 바다에서 물건을 잡다 보면 거기에 신경을 몰두하니까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라”고 말한다.제주 해녀는 일본제국주의의 노동력 착취로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로 이동하면서 어장 이용을 반대하는 주민들로부터 무시당하고 핍박받았지만, 포항 해녀는 미역 중심으로 어장을 개발한다는 차원에서 확실한 직업관을 정립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포항 등 경북 해녀는 육지에서 일하는 것보다 바다에서 물질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경북 해녀는 자신의 물질 기술에 긍지를 가지고 있고 자신의 직업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원정 물질경북 해녀는 해녀가 없는 마을을 돌아다니는 원정 물질을 한다. 자기 마을에서 작업을 우선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다른 마을로 원정 물질을 간다. 1950년대 제주 해녀가 경북 어촌으로 물질을 왔듯이 구룡포, 석병, 강사, 구만리 등 영일만 일대의 해녀들은 해녀가 없는 마을로 원정 물질을 간다. 3∼4월 미역철이 되면 원정 물질로 해녀들은 바쁜 나날을 보낸다. 해녀가 없는 마을에서 전복이나 해삼 채취는 스쿠버를 고용하는 경우도 있으나 미역만은 해녀를 고용한다. 해녀 마을에는 ‘구룡포차’, ‘석병차’, ‘강사차’라는 이름으로 물질 어업을 가는 그룹이 형성되고 자신들이 어장을 사서 경영하기도 한다. 원정 물질을 다니면서 직업인으로서 자부심과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경북 해녀의 원정 물질은 제주 해녀 문화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제주는 해녀 없는 마을이 없고 해녀가 자원을 직접 관리하는 공동체적 어업 문화가 지속되었다. 그 때문에 경북 해녀는 바다 자원에 대한 관리의식이 희박하고 책임의식도 부족하다. 어장이 자본가에게 판매되면 자본가는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어장 관리를 소홀히 하고 자원은 남획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어촌계의 어장 판매에 대해 영덕군 축산면 축산리 김 해녀는 “뭐 동네를 위해가지고 해녀들 한두 명 보고 안 팔지는 못하지”라며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해녀는 어장에 들어갈 수 없고 혹시 해녀가 물에서 나오는 것을 보면 어장 주인은 “두룽박 올려보세요. 확인하고 어촌계 고발한다고 뭐 도둑질, 강도질하는 맨치로 인식하고…… 말이 많아서 자제하려고 노력한다”고 하였다(‘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는 해녀 할 거야’, 영덕군·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20. 참조). 앞으로 해녀 없는 마을이 증가할 것이고 공동 어장의 바다 자원을 어떻게 관리하고 공동체를 지속시켜 나갈지 구체적 대안이 필요하다.경북도, 해녀 어업 보존 및 육성 계획 발표경상북도와 포항시는 해녀 어업을 보존·육성하고 해녀 문화를 전승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경상북도는 2012년 제정된 ‘경상북도 잠수어업인 진료비 지원 조례안’에 따라 진료비와 해녀복 등을 지원하고 있다. 또한 2020년 9월 ‘경북도 해녀 어업 보존 및 육성 계획’을 수립해 ‘경북형 해녀 어업문화 전승 및 보전을 통한 지속가능한 어촌마을 공동체 조성’을 목표로 3대 핵심전략 10대 추진과제를 선정했다.3대 핵심전략 중 경북 해녀상 확립 분야에는 △경북 해녀증 발급 △해녀 아카이브 구축 및 해녀 기록화 사업 △해녀 학술조명 및 해녀Day 지정 등의 추진과제를 선정하고, 해녀 어업 활동지원 분야에서는 △해녀휴게실 확충 및 해녀진료비 지급 △해녀마을 박물관 조성 △IoT(사물인터넷) 활용 해녀 어업 안전장비 지원 △마을 어장 연계 수산물 복합유통센터 조성 사업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해녀 연계 어촌 마케팅 분야에서는 △해녀 키친 스쿨 및 해녀 요리 레시피 개발 △해녀↔청년 콘텐츠 개발 △해녀 CI 제작 및 문화상품 개발 등을 추진할 계획이다. 한편 2020년 10월 23일 포스텍 경북씨그랜트센터는 IoT 기반 해녀 어업 안전장비 ‘스마트 태왁’과 ‘해녀용 스마트 시계’ 개발을 발표한 바 있으며, 2021년부터 지역 해녀들에게 보급한다는 방침이다.포항시도 2013년 ‘포항시 나잠어업(해녀) 보호 및 육성 조례안’을 제정하고 진료비 지원을 비롯해 어업인 안전보험 가입비 지원, 치패 방류, 해녀 문화 전승, 갯바위 닦기, 어장 관리 CCTV 설치 등의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해녀의 고령화, 감소는 전국적인 현상이다. 신규 해녀의 양성 없이 지속 가능한 해녀 사업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은 지방의 소멸, 농어촌의 붕괴와도 연계되어 있기에 해법이 간단치 않다. 경북도가 ‘해녀 어업 보존 및 육성 계획’을 발표하고 포항시도 다양한 해녀 지원 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앞으로 경북도와 포항시는 물론 대학, 언론 등 민간 분야에서 지역 해녀의 역사적 정체성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해녀 문화의 가치를 보존·계승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기울인다면 ‘해녀 담론’이 보다 풍성해지고 지속 가능한 해녀 사업을 위한 실질적인 기반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글 : 김수희(독도재단, 경제학 박사)사진 : 김수정(사진작가)

2021-07-07

밭일보다 물질이 낫다는 포항 해녀

포항 등 경북의 어촌 여성은 제주 해녀를 통해 물질 어업과 바다 자원에 대한 가치를 알게 되었다. 어촌의 기혼 여성이 밑천 없이도 애를 키우면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물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포항 남구 호미곶면 강사2리 강 해녀는 “바다에서 돈벌이는 물질하는 거뿐이었어. 그러니까 인자 남자들이 들어가는 게 아니고 여자들이 들어가야 되니까 여자들이 배워가지고 제주도 사람 말고 여기 사람도 많이 하게 됐어”라고 말했다.강 해녀는 포항 해녀가 제주 해녀보다 물질을 더 잘한다고 하였다. 실제로 경북 해녀의 물질 기술은 제주 해녀를 능가할 정도로 발전하였고 해녀 수도 급격히 증가하였다. 1970년대 수산물 가격이 상승하고 천초(天草), 전복, 성게의 일본 수출길이 열린 것도 경북 해녀들이 본격적으로 물질 작업에 뛰어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33살에 고향으로 돌아와 처음 물질을 시작한 구룡포 성정희 해녀는 “애를 키우면서 할 수 있는 일은 해녀뿐”이라고 하였다. 해녀가 된 이유는 고소득이라는 거. 내가 바다를 좋아하다 보니까 수영은 잘하잖아요. 수영만 하면 된다 하대. 애 키우면서 하기는 좋아. 해녀는 서너 시간만 하고 오면 되잖아. 시간적인 단축이 있더라고, 애 키우는 데 좋지. 몇 시간만 애 맡아달라고 하면 되겠더라고. 그런 이점이 있더라니까 ‘경북 해녀의 일·삶·문화’, 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17경북 해녀는 생계 위해 뒤늦게 물질에 뛰어들어영덕군 강구면 삼사리 김 해녀는 23살에 해녀가 되었다. 딸이 세 살 무렵이었다. 마침 앞집에 사는 경이 엄마가 제주도 해녀 출신이어서 그에게 해녀가 되는 과정을 배웠다.제주도에서 나온 해녀들이 기술도 있고 물건도 마이 한다니께. 우리들하고 다르다니께. 제주도 사람들이 가만히 보이 생활력이 억수로 강하잖아. 여기 제주도서 나온 사람들 다 생활력이 강해. 내려가다 보면 물건을 봐도 이 귀가 먹어. 귀가 먹으면서 압력 때문에 수경이 빨려 들어가고 귀가 먹먹할 때는 물건 보면 얼른 한 마리만 따고 그 옆에 꺼는 못 따고 얼른 올라와야 해.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는 해녀 할 거야’, 영덕군·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20영덕군 병곡면 금곡리 권 해녀는 32살부터 물질을 시작하였다.나는 헤엄질도 할 줄 모르고 비닐봉지 머리에 덮어쓰고 이렇게 했다끼네. 물질은 가르쳐 준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보고 내가 해야 되는데 헤엄을 잘 못 치다 보니까 안 늘어. 하다 하다 안 될끼네 물질을 포기하고 미역 할 때만 나가지. 요새도 헤엄은 서툴러. 깊은 데는 못 가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는 해녀 할 거야’, 영덕군·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20경북 어촌에서는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물질을 배운 사람도 있고, 가족 중에 해녀가 있어 해녀가 된 사람도 있지만, 어촌으로 시집온 여성들이 생계를 위해 뒤늦게 물질을 배운 경우가 다수다. 제주에서는 대개 10살부터 숙련 과정을 거쳐 16살에 해녀로 입문하지만, 경북에서는 헤엄을 배운 경험이 없는 여성들이 30살이 넘어 생계를 위해 물에 뛰어든 경우가 많다. 제주와 경북은 해녀가 되는 과정이 확연하게 다른 것이다.울진군 기성면 김 해녀는 1982년 32세 때 본격적으로 물질을 시작했다. (물질을) 따로 배운 게 없고 처녀 때 고향에 있을 때 보면 저 두렁박도 없었고 해녀복도 없어가지고 검은 광목이라고 있었어요. 그걸 두 자씩 받아가지고 물옷을 만들어서 그거 입고 속에 팬티 입고 그랬어요. 티셔츠에 팬티 하나 입고 바다에 들어가기도 하고, 그래서 귀에 물이 들어가고 귓병도 앓고 그러다 보니 해녀들 다 귀가 잘 안 들려요. 그래도 내가 해녀 시작할 땐 잠수복 입고 시작했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는 해녀 할 거야’, 영덕군·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20이런 사례처럼 경북 해녀는 제주처럼 훈련 기간 없이 스스로 물질을 배웠기에 귓병에 걸려 청력에 이상이 있는 해녀가 많다.고무 잠수복 도입으로 물질 작업 크게 개선돼1970년대 고무 잠수복의 보급은 해녀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재래 해녀복은 광목으로 만든 짧은 원피스형 해녀복이다. 이 해녀복을 입으면 수온의 변화에 따라 물질 시간이 정해지기 때문에 조업 시간이 짧고 수입도 적다. 경북 해녀는 밀가루 포대나 검은색 광목으로 재래식 작업복을 만들어 입었고 작업시간은 30분을 넘기지 못했다. 물질 중간마다 상륙해 하도불(불턱)에서 옷을 말리고 다시 물에 들어가기를 서너 차례 반복하였다. 1회당 1시간 정도 물질을 하지 않으면 수입이 나지 않았고 체온을 유지할 수 없었다.경북 어장에 도입된 고무 잠수복은 겉감에 고무 재질을 덧입혀 보온성이 강하였다. 이 잠수복은 목까지 내려오는 통으로 된 모자와 원피스 형태의 상의, 발목을 덮고 가슴만큼 올라오는 바지 형태의 하의로 수온에 관계 없이 3시간에서 5시간까지 조업이 가능하다. 또한 고무 잠수복을 입으면 부력 덕분에 쉽게 물질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다. 실제로 영덕읍 석리 김 해녀는 이웃 해녀가 “고무옷 입고 오리발 신고 이래하면 된다”라고 권유한 덕분에 해녀가 되었다고 한다.고무 잠수복은 맨살을 드러내지 않고 모든 부위를 고무로 감싸는 구조로 되어 있어 해녀의 직업 의식을 강화시켰다. 영덕군 축산면 경정리 김 해녀는 재래식 해녀복을 입었을 때는 “내가 물에 하는 게 뭐 위축되고 자꾸 그래. 남한테 천대받는 것 같고 돈 벌어도 뭐 물에서 한 건데”라는 부끄러운 직업으로 여겼다. 하지만 고무 잠수복을 입고 나서 그러한 생각이 없어졌다. 13살부터 물질을 시작한 영덕읍 창포리 김 해녀도 고무 잠수복을 착용한 후로 물질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졌다고 한다.영덕군 영덕읍 대부리 전 해녀는 “다시 태어나도 해녀 해도 되지. 뭐 힘 안들고”라고 했고, 영덕읍 노물리 김 해녀도 “주변 사람들은 해녀 억수로 부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해녀들이 바다에 나가 돈을 많이 버니까 우리 여자들을 억수로 부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제주와 경북은 해녀가 되는 과정도 다르지만 직업관에서도 분명한 차이가 난다. 제주 해녀는 “물질보다 밭일이 쉽다”고 한다. 다시 태어나면 물질을 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는 제주의 이야기는 해녀가 위험한 직업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타향을 왕래하는 목숨값으로 인식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반면에 포항 등 경북 해녀는 “밭일보다 물질이 쉽다”고 하며 직업에 대한 자부심도 갖고 있다.제주 해녀는 가혹한 제주 역사의 산물인 반면에 경북 해녀는 이 같은 역사 체험이 없고, 기혼 여성이 밑천 없이 손쉽게 경제 활동을 할 수 있으며, 특히 1970년대 고무 잠수복의 보급으로 물질을 용이하게 할 수 있게 된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글 /김수희(독도재단, 경제학 박사)사진 : 김수정(사진작가)

2021-07-05

제주·경북의 해녀 분쟁 이후 경북 해녀 증가

1954년부터 표면화된 제주도 해녀와 경북어업조합 간의 생업 관할권 갈등은 법적 투쟁으로 치닫고 1968년 대구지법의 판결로 막을 내린다. 이 판결로 우리나라 해녀의 역사, 특히 제주와 경북의 해녀 역사가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본다.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의 수산업법 법률 제295호가 1953년 9월 9일 공포되었다. 수산업법을 제정할 당시 제주도는 해녀 어장에 대한 제반 규정을 정비하고자 해녀 어장을 상공부장관의 허가제로 하고 경남 2천500명, 경북 2천 명, 전남 1천 명, 전북 300명, 충남 200명, 강원도 500명, 제주 2만 8천명 등 총 3만 5천 명의 ‘입어권(入漁權)’ 설정을 제안하였다. 입어권이란 공동어장 내에서 수산 동·식물을 채취할 수 있는 권리로 해녀 어장의 관습법상의 어장 이용을 명시적으로 인정한 법률 용어다. 당시 정부는 해조류 증산 정책에 따라 일제강점기 총독부의 해녀 어업 정책을 답습해 해녀 어장을 확대하는 방안으로 입어권을 설정하였다. 그리고 혹시 모를 분쟁에 대비해 수산청장의 재정(裁定)을 구할 수 있다는 조항을 신설하였다. 경북도에서 제주도 해녀의 어장 진입 막아수산업법 제40조 입어관행 조항에서는 해녀가 입어료를 납부하면 어장 이용이 가능했지만, 경북도내 어업조합은 지역의 관습이라며 해녀의 어장 이용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제주도는 1954년 경북도내 어업조합의 어장 공매(公賣)를 규탄하는 진정서를 상공부장관에게 보냈다. 제주도와 경북어업조합 관련자들은 수십 차례 회의를 하였고 제주 지역구 국회의원 3명은 경북 도지사를 만나 입어권 인정을 요구하였다.제주도어업조합은 1954년 4월 30일과 1955년 1월 31일 ‘제주도 출가잠수 일동 대표자 김종대’ 이름으로 수산청장에게 입어 어장에 대한 재정(裁定) 청구를 신청하였다. 1956년 1월 13일 상공부장관 김일환은 수산업법 제69조에 따라 양남어업조합 70명, 감포어업조합 121명, 양포어업조합 279명, 구룡포어업조합 434명, 대보어업조합 166명 총 1천75명에게 매년 5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제주 해녀에게 천초(우뭇가사리), 은행, 앵초, 패류어업을 허가해 줄 것을 명령하였다.수산업법 10조에 따라 마을어장의 매매는 엄연히 금지되어 있지만 경북도내 어업조합은 어장을 공매하고 제주 해녀의 어장 이용을 인정하지 않았다. 경북도 어업조합 실무자들은 관내에 해녀 수가 상당히 불어났기 때문에 제주 해녀가 필요 없고, 패류의 양식과 미역바위 잡초 제거에 막대한 노력과 예산을 투자하면 제주 해녀가 채취해가서 두통거리라고 호소하였다. 경북도내 어업조합은 제주 해녀의 어장 이용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어장 이용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1967년 경북 감포·양포·구룡포·대보 어업조합은 ‘입어관행권 소멸 확인 소송’인 재정 청구를 대구지법에 청구하였다. 이 소송의 골자는 제주 해녀의 입어권을 부정하는 소송으로 입어관행은 소멸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1968년 8월 20일 대구지법 제6민사부는 수산업법 제40조 “관행에 따라 취득하는 입어권이라 함은 반드시 단체로 가지는 경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으로서도 입어관행이 있으면 그 개인이 가지는 권리도 말하는 것이므로 입어관행권 소멸 확인 소송은 성립된다”고 판결하였다. 즉 입어의 관행은 장기간 중단하거나 입어권자가 사망하면 소멸하고 상속이나 양도되는 것이 아니므로 말소 절차를 이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경북도 어업조합은 제정 신청을 통해 입어관행을 폐지하였고 이로써 70년간 유지되어온 제주 해녀의 입어관행이 사라졌다. 제주도의 ‘해녀 안 보내기 운동’ 그리고 ‘고무옷’의 도입입어관행에 따라 공동 어장을 이용했던 해녀들의 권리가 부정됨에 따라 제주도에서는 ‘해녀 안 보내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1969년 제주도 해녀 1만 9천805명 중 도외로 출향한 해녀는 1천160여 명으로 전체 해녀의 6%에 불과하였다. 제주도 해녀의 50%를 상회하던 도외 출향은 경북 재정지구 청구 패소 이후 1972년 917명, 1973년 867명, 1974년 683명, 1975년 509명으로 감소하였다. (‘출가 해녀 3년새 반감’, 제주신문 1976. 1. 6)1968년 경북 어장으로 출향한 제주 해녀는 654명이었으나 1970년 85명, 1973년 199명, 1976년 92명으로 감소하였다. 1975년 7월 영남일보 기사에 따르면 당시 경북도내 해녀는 1천937명인데 이중 제주도 출신은 381명, 지역 출신은 1천556명이다. (‘해녀 대부분 생활난-93%가 연간 30만 원 미만’, 영남일보 1975. 7. 10). 이 제주 해녀들은 지역 남자와 결혼했거나 이주한 해녀를 말한다.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경북 어장에는 지역의 정체성을 가진 해녀들이 성장하였다. 바다 작업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다 일을 천시하였고 여성의 바다일은 부끄러운 직업으로 여겼던 경북 여성들은 해녀가 되고자 물질을 배웠다. 처음에는 바닷가에서 고동도 줍고, 도박홍조류 지누아릿과에 속한 해조(海藻)도 뜯다가 점차 물질 실력이 향상되었는데, ‘고무옷’이 도입되면서 본격적인 해녀가 되었다.포항 장기면 신창1리 김해녀는 6남매의 맏딸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농사를 거들면서 점심을 먹고 난 후 1~2시간씩 목욕하러 바다에 가서 물질을 배웠다. 전복이나 고동, 해조류 등을 따오면 부모님은 신기하고 기특하게 여기셨다. 딸이 바다에 갔다 오면 부식량이 늘어났기에 크게 반대를 하지 않았다. 김해녀는 결혼한 후 해녀가 되었다. 직업이 없는 남편을 대신해서 해녀 직업을 선택하였고 고무옷을 외상으로 구입해 물질을 시작하였다. 김해녀가 해녀가 된 1975년쯤 경북의 모든 해녀가 고무옷을 입었다.해녀의 잠수복인 고무옷은 해녀 어업의 기술적 변혁이다. 작업 시 추위를 막아주어 기존 30분 이내의 작업이 3~5시간으로 증가하였고 무엇보다 해녀에 대한 여성으로서 수치심이 사라졌다. 13살부터 해녀가 된 영덕읍 창포리 김해녀는 고무옷의 고마움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고무옷을 입고 하니깐 괜찮지. 옷을 벗고 일하면 그렇지만은 옷을 다 입고 하면은 얼굴만 보이니깐 객지 사람들이 쳐다봐도 아무 불편 없지. 객지 사람들이 ‘저 사람들 해녀다. 저렇게 우째 하는교?’하면 좀 민망은 하지. 그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가 돈을 벌지만 저런 직업을 가지고 사냐? 이래 생각할 수도 있지?”독도로 간 해녀해녀의 독도 진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50년대 후반 제주 해녀는 독도 어장으로 이동하였다. 독도에는 물이 없고 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거주지도 없었으나 넓은 미역어장이 있었다. 해녀들은 서도 물골 자갈밭에 가마니 몇 장을 깔고 자거나 나무로 2층 단을 만들어 비바람을 피해 살았다.1954년 조봉옥 해녀는 울릉도에 사는 시삼촌이 독도에서 물질을 하면 돈벌이가 될 것이라고 종용하자 세 살짜리 딸과 시아버지, 시누이, 동네 친구 2명과 함께 울릉도에서 전주(錢主)의 오징어 배를 타고 독도로 갔다. 같은 시기에 독도로 간 박옥랑, 김순하, 박애자 해녀는 오징어 장사를 하는 포항 친구의 권유로 울릉도를 경유하여 독도로 갔다. 해녀 개인별로 어장을 찾아 독도로 간 것이다.1959년 19살에 독도에 간 김공자 해녀는 제주 해녀 36명과 남자 10명 등 45명이 함께 독도에서 미역 채취업을 했다. 당시 독도의용수비대가 독도 어업권을 확보하면서 해녀를 집단 모집하였다. 독도의용수비대는 처음 서도에 거주하였으나 동도로 이전하였고 해녀들은 서도 물골에 생활하였다. 미역어장이 넓게 분포되어 있지만 물이 없다면 살 수 없었기에 물이 나오는 물골을 신성시하였고 물골 수신(水神)에게 제사를 올렸다.해녀들은 독도의용수비대를 도와 독도를 지키는 데 헌신했다. 1954년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 대장이 독도에 막사를 지으려고 통나무를 싣고 왔는데 물가까지 옮길 수 없었다. 해녀들은 바다에 떨어뜨린 통나무를 물가까지 밀어주고 막사를 짓는 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식수가 떨어져 곤경에 처했을 때 해녀들은 서도 물골에서 물을 실어 동도에 살던 대원들에게 전달하였다. 그리고 파도로 울릉도 보급선이 독도에 접안할 수 없어 경비대원들이 아사 직전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해녀들은 풍랑 속에 뛰어들어 부식물을 전달했다.“이불을 뜯어 밧줄을 만들고 그 밧줄로 몸을 묶은 후 거센 풍랑 속으로 뛰어들었지요. 우리가 배에서 부식을 받아 헤엄쳐 오면 독도경비대원들은 이불 끈 밧줄을 끌어당기면서 우리를 도왔어요. 힘센 장정들이 얼마나 마음이 급했던지 바닷가에까지 다 나왔는데도 계속 끌어당기는 바람에 바위의 굴 껍질에 긁혀 상처가 많이 나서 고생했어요.” (김순이 해녀)해녀들은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풍랑 속에 뛰어들어 독도의용수비대의 식량을 보급하는 등 독도 역사에 굵은 발자국을 남겼다.글 /김수희(독도재단, 경제학 박사)사진 : 김수정(사진작가)

2021-06-30

해녀는 가혹한 역사의 산물

고대에 물질은 한반도 남부와 제주도 지역에서 성행하였다. 깊은 바다에서 다양한 패류(貝類)를 채취하면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얼굴과 몸에 문신을 했고 이는 풍습이 되었다. 중국 고전 ‘예기’에 “머리를 풀고 문신(文身)은 고대 한반도 주변 나라의 물질 풍속”이라는 기록이 있고, ‘후한서’에는 “삼한(三韓) 사람들이 문신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신라시대에는 허리에 새끼줄을 매고 물질하는 해인(海人)이 있었다. ‘본초습유(本草拾遺)’에는 “신라의 해인은 허리에 새끼줄을 매고 잠수하여 깊은 바다에서 나는 대엽조(大葉藻, 바닷말의 하나)를 채취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신라에서는 미역 같은 해조류를 물질로 채취하였다. 전복 등의 공물 때문에 고초 겪은 제주 사람들5~6세기에 제주에서는 진주 같은 보석을 캐는 물질 어업이 발달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문자왕 13년(504)에 “진주는 탐라에서 생산된다(珂則涉羅所産)”고 하였고 이 진주는 중국 위나라로 유통되었다. 905년(延喜5) 일본 천황이 편찬한 연희식(延喜式) 법전에는 ‘탐라복(耽羅鰒)’이 등장한다. ‘탐라복’은 제주와의 교역품으로 공납된 것인지, 일본 해녀가 제주로 건너가 채취한 것인지, 제주 사람이 일본으로 가서 채취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제주의 전복을 말하는 것은 분명하다. 일본 평성궁(平城宮)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745년(天平 17년) 목간(木簡)에도 ‘탐라복’ 기록이 나온다. 이런 기록을 종합해보면, 제주에는 잠수 기술 능력이 탁월한 해양민이 있었고, 진주와 전복을 교역품으로 번창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1079년(문종 33년) 탐라에 다녀온 고려 사신이 진주 2개를 왕에게 바친 기록도 있다. 빛이 별같이 반짝여서 야명주(夜明珠)라고 한 것은 제주가 선사 이래 잠수 어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음을 증명한다.천년 왕국 탐라국은 10세기에 고려가 들어서면서 독립국의 지위를 잃게 된다. 숙종 10년(1105) 탐라는 고려의 일개 지방으로 전락하고, 고종 때(1213~1259) 탐라의 명칭은 지방을 뜻하는 지금의 ‘제주(濟州)’로 바뀌었다. 이후 제주 역사는 외부에 의한 경제적 착취, 환경파괴가 일어나면서 시련과 고난의 역사로 점철되었다. 고려에 편입된 직후 제주 사람은 중앙에 전복과 말 등 공물 바치는 일로 큰 고초를 겪었다. 남성들은 육지로 도망갔고 더 이상의 이탈을 묵인할 수 없던 조정은 1629년(인조7), 1778년(정조2) 두 차례에 걸쳐 출륙금지령을 내렸다. 전쟁, 군사, 어로 등 각종 군역과 잡역에 남성이 동원되면서 물질은 여성의 몫이 되었다. 특히 여성은 관의 허가 없이 절대 제주를 떠날 수 없는 출륙금지령은 제주 여성의 삶을 더욱 고립시켰다.수탈 견디지 못한 제주 남자들 육지로 도망 가제주에서 잠수 활동을 하는 여자를 잠녀(潛女), 포아(浦娥), 포여(浦女)라고 한다. 10세기 전반 일본 헤이안(平安) 시대 성립된 백과사전적 성격인 ‘왜명류취초(倭名類聚抄)’에는 잠녀(潛女)는 잠수하는 여자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잠녀 기록은 1630년 이건이 남긴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이다. 이 책에서 잠녀는 ‘미역을 따는 여자(採藿之女謂之潛女)’ 또한 ‘생복을 잡아서 관아에 바치는 역(生鰒之捉亦採取應官家所徵之役)’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들은 “미역을 캐낼 때에는 소위 남녀가 발가벗은 알몸으로 낫을 갖고 바다에 떠다니며 미역을 캐어 남녀가 서로 섞여 있으나 부끄러이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전복을 잡을 때도 마찬가지”라고 기록하였다.이후 여러 기록에서 잠녀가 등장한다. 1694년 제주 목사 이익태가 쓴 ‘지영록(知瀛錄)’에는 ‘진상 추인복을 잡는 채복잠녀(進上搥引鰒專責於採鰒潛女)’와 ‘채곽 잠녀 800명(採藿潛女多至八百)’으로 역할을 구분하였다. 해녀는 전복을 진상하는 해녀와 미역을 채취하는 해녀로 구분되어 관리되기 시작한다. 당시 제주의 전복 진상은 포작간(鮑作干)이라는 호적에 등록된 남성들이 매년 조달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전복 진상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16세기에 과중한 부역과 수탈을 견디지 못한 제주 포작간들은 전복 채취를 목적으로 육지로 도망갔고, 사천, 고성, 진주 등지에 집성촌을 형성했다. 이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고기잡이를 주업으로 생활하였다. 수령들은 모든 해산물 진상을 이들에게 맡겼고 이후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조선 정부는 전국에 있는 포작간과 포작선을 징발해 전투를 치렀다. 징발되면 살아서 돌아오기 어려워 포작간들은 내륙으로 도망가거나 숨어버렸다. 임진왜란 이후 포작간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고기잡이를 하지 않았다. 이후 잠수어업은 제주에서만 확인되었고 전복 진상은 수군이나 제주 해녀 등 특정 어민이 맡게 되었다.전복 수요 충족하기 위해 제주 해녀 동원17세기 중엽 조정에서 많은 전복 진상을 요구하였고 제주 포작인들은 수량을 채울 수 없었다. 포작인은 전복 채취를 위해 한겨울에 알몸으로 들어갔으나 “물에 빠져 죽어 열 중에 두셋만 남게 되었다”(남사록(南槎錄)), “형틀과 채찍을 가하였으나 수량을 채우지 못한다”(남천록(南遷錄))는 기록처럼 고문을 가해도 진상할 수량을 채울 수 없었다. 포작인들은 결혼을 하지 못해 혼자 살다가 죽었고 과부라도 “거지 노릇을 하다 죽을지언정 포작하는 사람의 아내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남사록(南槎錄))고 하였다. 17세기 양반가의 음식 문화가 발달하면서 전복 소비가 증가했고 포작인에게 매질을 가해도 진상 수량을 채울 수 없게 되자 조정에서는 제주 해녀를 동원해 전복을 채취하기 시작하였다. 제주도 목사 이익태는 미역을 채취하는 해녀들에게 전복 채취 기술을 습득시키고 ‘잠녀록안(潛女錄案)’에 기록해 관리하였다. 그 상황을 1694년 이익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미역을 따는 잠녀들은 (전복 캐는 일을) 익숙지 못하다고 핑계를 대면서 죽기를 작정하고 저항하며 이를 피할 꾀만 내고 있다. 장차 전복을 캐는 잠녀가 없어지지 않을까 염려하고 또한 역을 고르게 하고자 미역을 따는 잠녀들에게 전복 캐는 것을 익히도록 권면하여 추(搥)·인복(引鰒)을 (전복 잠녀들과 함께) 나누어 배정하였다.-이익태, ‘증감십사(增減十事)’, (지영록(知瀛錄)). 추(搥)·인복(引鰒)이란 전복을 두드려 넓게 펴서 말린 전복으로 해녀는 전복 채취뿐만 아니라 전복을 말려 제조한 후 진상하였다. 전복 진상은 해녀의 몫이 되었고 1702년 제주 목사 이형상은 “섬 안의 풍속이 남자는 전복을 따지 않음으로 다만 잠녀에게 맡긴다”고 하였다. 한겨울 남자들도 물속으로 들어가 채취하기 어려운 전복 기술이 여성에게 전수되어 해녀가 진상역에 동원되었다. 제주 해녀 사회는 위계질서로 조직되어 대상군(大上軍), 상군(上軍), 중군(中軍), 하군(下軍)으로 계급화되었고, 대상군은 전복 진상 등의 책임자로 해녀를 통솔하였다. 지금도 해녀 사회에서는 이런 질서가 존재하고 있다.집안의 자랑이 된 해녀조선시대 미역 어업은 제주도를 중심으로 활발히 이루어졌다. 제주에서는 미역 판매로 상인들이 부자가 되었고 교역상들은 제주도를 왕래하며 미역을 사고팔았다. 정부는 구황식품으로 활용하였고 노약자나 허약자의 보양식, 산후 음식으로 알려지면서 제주의 미역 어업은 발전하였다. 미역을 채취하는 해녀를 귀히 여겼고 해녀는 집안의 자랑이 되었다. 1764년(영조 40년) 53세에 제주 의금부도사로 부임해 ‘탐라록’을 지은 신광수는 “탐라의 여자애들 풍습에 혼인 상대로 잠녀를 귀중히 여겨, 잠녀 둔 부모들은 우리 딸은 먹고 살 걱정이 없다고 자랑한다”고 하였고, ‘잠녀가(潛女歌)’도 남겼다.이월 개인날에 성 동쪽 마을에서는집집마다 여인들이 물가로 나간다.비창 하나 망사리 하나 테왁 하나소중이에 알몸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고깊고 푸른 물에 의심 없이 바로 내려가날리는 낙엽처럼 공중에 몸을 던지니북쪽 사람은 놀라워하는데 이곳 사람은 빙긋이 웃어장난으로 물장구치며 물줄기를 마음대로 타기도 하고.제주 해안가 여성은 열 살이 되면 해녀가 되었고 두려움 없이 바다에 뛰어들어 미역을 채취하였다. 미역은 쌀농사를 지을 수 없는 제주 사람들에게 생계 걱정을 해결해주는 양식과 같았다. 그렇기에 관아에서는 미역을 강제적으로 거둬들였다. 제주에서는 해녀 어업이 활발하였고 개항 직후에는 돈벌이를 위해 일본, 러시아 등지로 진출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여성 잠수 전문가, 해녀의 탄생은 제주 역사의 산물이다.글 /김수희(독도재단, 경제학 박사)사진 : 김수정(사진작가)

2021-06-28

전국에서 세 번째 많은 포항 해녀, 독특한 문화 정체성 유지

우리 몸은 70%가 물로 이루어졌고 물을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갓 태어난 아기는 물에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숨을 멈추고 팔과 다리로 휘젓는 동작을 한다. 물속에서 태어난 신생아가 헤엄치는 모습은 편안하게 보인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몸짓은 헤엄이다. 무의식의 몸짓이다. 인간은 바다 속에서 먹이를 찾아 물질을 하였고 물질은 바다의 문화가 되었다. 바다에서 물질은 의식의 몸짓이며 생산의 몸짓이다.인간이 물속으로 들어가 각종 어패류와 해조류, 어류 등을 식량으로 삼기 시작하면서 물질이 시작되었다. 인류가 식량자원으로 조개류를 채집한 것은 30만 년 전으로 추정되며 전 세계적으로 조개무지가 출현한 것은 20만 년 전으로 소급된다. 선사유적지 조개더미인 패총은 원시인이 조개, 굴, 소라, 전복 등의 조개류를 먹고 버린 해안가의 생활 유적으로 전국 해안가에서 확인된다. 국가별·시대별로 다르게 인식된 나잠(裸潛) 어민물질은 남녀 구분이 없으나 국가별, 시대별로 다르게 인식되었다. 물질을 직업으로 하는 나잠(裸潛) 어민은 한국 해녀, 일본 해녀와 해남, 그리스 해면잡이 잠수부(sponge diver), 남태평양 투아모아 열도의 진주 조개잡이 잠수부, 호주 북부 토레스 해협의 조개잡이 어민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남태평양·호주의 나잠 어민은 남성이 진주나 해면을 캐었고, 한국 해녀와 일본 해녀, 해남은 전복과 해조류를 채취하였다. 하지만 한국 해녀는 전복뿐만 아니라 작살로 문어나 물고기를 잡는 등 일반 어민과 동일한 행동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스·남태평양·호주의 나잠 어민은 스쿠버 장비 등을 이용한 압축공기 잠수부로 전환하였으나, 한국과 일본 어업에서는 스쿠버 장비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한국의 나잠 어업은 마을어장에서 맨몸으로 잠수해 전복, 소라, 미역 등 해산물을 직업적으로 채취하는 어민을 말한다.한국 나잠 어업의 역사적 기원은 제주도 해녀를 제외하면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복, 홍합, 해삼, 각종 패류나 미역, 다시마 등과 같은 해조류를 즐겨 먹었고 왕가나 지배계급에서도 일상 음식으로 먹었지만, 누가 어떤 방식으로 조달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조선시대 전복과 같은 해산물을 제주도 해녀가 조달하였고 산후 음식이자 건강 보약식으로 이용된 미역과 다시마는 동해안과 남해안 남성들이 배 위에서 긴 장대에 낫을 단 낫대나 회전용 트릿대를 이용해 채취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반도의 나잠 어업은 제주도 해녀가 가장 오랫동안 유지해 왔던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물질 노동복 ‘잠비’2021년 3월 해양수산부는 경상북도 ‘떼배 돌미역 채취어업’을 제9호 국가중요어업유산으로 지정했다. 제주도 해녀 어업, 보성 뻘대 어업, 남해 죽방렴 어업과 함께 경상북도 돌미역 채취를 동해안의 대표 어업으로 선정한 것이다. 돌미역 어업은 통나무를 엮어 만든 뗏목배를 이용해 배 위에서 미역을 보고 긴 낫으로 잘라내는 어로 방식으로 지금도 울진과 울릉도에서 지속되고 있다. 해녀가 물에 들어가 낫으로 미역을 베어오면 떼배 어민은 바람의 방향과 특성, 바닷물의 흐름 등을 살펴 배 위에서 미역을 채취한다. 미역의 이용 방식은 해녀 어업과 비교하면 비능률적이고 비경제적이지만 수백 년 지속된 독특한 바다 자원 관리 방식이다.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펴낸 ‘수산편람(水産便覽)’에는 물속 자원의 이용 방법을 기록하였다. 한국에서 해조류를 채취하는 방법은 나잠, 간권(竿捲), 겸(鎌), 예채(刈採), 예취(刈取) 등이 있다. 나잠은 해녀처럼 물질을 해서 채취하는 것, 간권은 장대를 이용해 바다 속에 있는 미역을 틀어서 채취하는 트릿대 방식이다. 그리고 겸·예채·예취는 낫을 이용해 미역을 베는 것을 말하며 오늘날 동해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낫대 방식이다. 대체로 함경도와 강원도, 경북 동해안은 미역을 낫대로 베고 갈퀴로 건지고, 경남·경북·충남은 트릿대로 미역을 돌려 감아 건져 올리는 간권으로 미역을 채취했다. 물속으로 들어가 미역을 채취하는 곳은 제주도 해녀뿐이었다.포항의 해안도로를 걷다 보면 해녀가 검은색 고무 잠수복을 입고 물 위에 뜨도록 만든 ‘두룽박’과 ‘망사리’, 해산물을 채취하는 데 쓰는 ‘꼬끼’를 들고 바다로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과거 광목으로 만든 해녀복을 입었을 때는 평상복을 입고 이동하였다. 해녀들은 광목으로 만든 해녀복을 ‘잠비’라고 불렀다. ‘잠비’는 물에 들어갈 때 갖추어 입는 ‘장비’라는 뜻인데 ‘일을 할 때 장비와 설치를 갖추어 입다’라는 노동복 개념이다. 제주도에서는 물질하는 데 사용하는 소중한 옷이라는 뜻으로 ‘소중이’라고 불렀다. 제주에서는 나잠 어업이 제주의 전통적 가치로 전승되어 ‘소중이’로 인식되었으나, 경북에서는 노동에 필요한 ‘잠비’로 수용된 것이다.경북 해녀 70%가 살고 있는 포항해녀들이 가장 바쁜 계절은 봄이다. 봄철은 해녀의 주수입원인 미역 채취 기간이다. 어획물은 계절마다 달라 봄에는 미역 외에도 문어, 보라성게, 해삼, 전복을 채취하고 여름에는 우뭇가사리, 가을에는 말똥성게, 해삼을 잡는다. 성게는 일본으로 수출되는 효자 상품이며 채취와 제조, 판매까지 전 과정을 해녀가 담당하므로 해녀의 육지 일상은 언제나 바쁘다.4~5월께 포항 해안가와 방파제 부근에는 미역을 한 올 한 올 겹쳐 넓적한 형태로 만든 것을 볼 수 있다. 바닷바람과 햇볕이 잘 드는 방파제가 건조하기에 가장 적당하다. 이 미역은 모두 해녀가 물속에 들어가 낫으로 끊어 온 것으로 자연적으로 돌에 붙어 자랐기에 ‘자연산 돌미역’이라고 한다. 해녀는 고무옷을 입고 물안경을 쓰고 ‘나바리’라는 무거운 납을 벨트에 장착시켜 숨을 참고 물속에 들어가 쉼 없이 올라가고 내려오면서 망사리 가득 미역이 차면 육지로 끌어올린다. 채취부터 건조까지 모든 작업을 해녀가 한다.해녀가 되려면 본인이 거주하는 기초지방자치단체에 나잠 어업으로 신고하면 된다. 전국 해녀수를 보면(2017년), 제주도가 3천985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경상북도는 1천593명이다. 울산광역시 1천474명, 충청남도 1천310명, 전라북도 611명, 부산광역시 938명, 경상남도 598명, 강원도 371명, 전라남도 370명, 인천광역시 306명 순으로 전국에 총 1만1천556명의 해녀가 있다. 경북의 해녀는 포항시가 1천68명으로 가장 많고 영덕군 160명, 경주시 152명, 울진 75명, 울릉군 10명이다. 경상북도는 제주도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해녀가 많고 포항시는 울산광역시에 이어 전국에서 세 번째로 해녀가 많다. 포항은 경북의 해녀 약 70%를 차지하는데 포항시의 어촌계별 해녀(2020년 5월 현재)를 보면 구룡포읍 251명, 호미곶면 249명, 장기면 102명, 동해면 109명, 청하면 60명, 여남·환호·두호·해도 등 포항시내 51명, 송라면 47명, 흥해읍 10명 총 901명이다. 경북의 해녀는 포항 구룡포와 호미곶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포항 해녀는 중요한 해양 문화 콘텐츠포항 해녀의 성장은 해방 후 국가의 수출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해방 후 정부는 해조류 수출을 목표로 우뭇가사리 어장 개발과 한천(寒天) 수출 증산 정책에 앞장섰다. 개인업자의 개입을 금지하고 우뭇가사리 양식 시험을 하는 등 해외에서 각광받는 우뭇가사리의 생산과 수출을 면밀히 관리하였다. 포항으로 수천 명의 제주 해녀가 건너와 우뭇가사리를 채취하였고, 1948년 ‘영남일보’에 ‘경북으로 제주 해녀 천오백명 내도’ ‘수국 전사의 꽃다운 존재인 제주 해녀가 금년에도 활약이 기대된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도되었다. 국가 중요 수출품목으로 지정된 우뭇가사리 채취를 위해 매년 수천 명의 제주 해녀가 국가의 지원으로 영일, 구룡포, 양포 등지에서 활동함에 따라 포항 여성은 바다 자원의 경제적 가치와 해녀라는 직업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포항 해녀는 제주 해녀의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성장한 것이다.포항 바다는 수심이 깊지 않고 우뭇가사리는 연안 가까이 20~30m 수심 바위에 부착되어 전복 채취처럼 숙련된 물질 기술이 필요 없다. 우뭇가사리 어장인 울산, 기장, 거제도 지역은 조류가 빠르게 흐르고 어장이 깊어 제주 해녀와 같이 물질에 익숙한 해녀들이 오랫동안 이용했다. 하지만 포항 어장은 미개척 어장으로 해안가에 사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해녀가 될 수 있는 어업 조건을 갖추고 있다. 특히 1960년대 후반 일본에서 도입된 ‘고무옷’이라는 잠수복은 보온력을 증강시켜 사시사철 물속 활동이 가능하게 했고, 신체를 드러내는 수치감도 없애주었기 때문에 해녀의 양적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포항 해녀는 매년 감소하고 있어 현존하는 해녀가 ‘마지막 세대’일지 모른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환경오염과 자연 생태계 변화로 생산량이 감소하고 있는 것도 해녀 어업을 위태롭게 하는 요인이다.해녀 어업과 문화는 전국에 분포되어 있다. 부산, 울산, 경남 거제도에는 제주 해녀가 모여 살고 있는 집성촌이 있지만, 경북은 각 어촌에 소수의 제주 출신 해녀가 거주하고 있을 뿐 제주 해녀와의 직접적인 문화적 교류는 거의 없다. 제주도 다음으로 해녀가 많은 경북은 해녀 문화도 제주도와 다른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1960년대 후반 포항 해녀는 제주도 해녀를 능가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결혼한 여성도 물질 기술만 터득하면 경제적으로 충분한 수익과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았다. 전통적 어촌 사회에서는 남성의 역할을 강조하고 여성의 역할을 보조적 수단으로 인지했으나 직업적 해녀의 등장으로 여성의 가치가 달라진 것이다. 포항의 해녀 문화는 동해의 풍부한 해안 생태계를 기반으로 빠르게 성장하였고, 경북 어촌의 정체성 확립과 해양 문화 콘텐츠의 기반으로 경북이 보존·전승해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글 /김수희(독도재단, 경제학 박사)사진 : 김수정(사진작가)

2021-06-23

포항, 한국 무속의 특별한 공간

‘오구굿’은 동해안 무속에서 망자천도굿을 부르는 이름으로 오귀굿, 오위굿이라고도 한다. 생로병사의 마지막 단계인 죽음을 위한 제의로, 사람이 죽은 후 일정한 기간 안에 행해야 한다. 사람이 죽은 직후 행하는 굿을 ‘진 오구’라고 하고, 사망한 지 일 년 이상 지난 다음에 하는 굿은 ‘마른 오구’라고 하여 구분한다. 이는 중부 지역인 서울도 마찬가지여서 서울굿에서는 망자천도굿을 ‘진오귀굿’이라 부르고, 죽은 직후에 행하면 ‘진진오귀’, 일 년 이상 시간이 지난 후에 하는 굿을 ‘마른 진오귀’라 한다. 시신의 ‘질고’, ‘마른’ 상태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하는 오구굿오구굿은 죽은 망령을 위로하여 극락세계로 천도하기 위해 행하는 굿이다. 전라도에서는 씻김굿, 중부 지역인 서울굿에서는 진오귀굿이라 부르는 등 지역마다 그 이름이 다르다. 오구굿은 신앙성이 강하기 때문에 가장 많이 하는 굿이기도 하다. 이 굿은 망령을 저승으로 보내는 굿이지만, 동해안 지역에서는 주로 원통하게 죽은 망령, 즉 객사(客死), 수사(水死), 미혼사(未婚死) 등으로 죽은 망령을 위안하는 굿이다. 특히 뱃일하는 사람이 익사하여 보상금을 받은 유족들이 행하는 것이 가장 많았다. 큰 사고로 여러 사람이 사망했을 때는 합동으로 오구굿을 하기도 한다.민간신앙에서는 망자가 숨을 거둔 후 바로 저승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기간과 과정을 거쳐 간다고 생각했고, 그 과정 중 하나가 오구굿이다. 오구굿 제의의 순서를 살펴보면, 먼저 부정굿을 한 뒤 마을의 수호신인 골맥이 서낭을 모신다. 특히 물에서 죽은 영혼을 모시는 ‘넋건지기’를 한 후, 넋을 굿당에 모시기도 한다. 이어서 조상굿을 하고 초망자굿이 이어진다. 초망자굿은 죽은 이의 넋을 위로하는 것이다. 이때 무당은 한지로 망인의 모습을 오린 넋과 그 넋을 담은 상자인 ‘신태집’을 들고 춤을 추면서, 죽은 이의 한을 위로한다. 신태집은 굿판에 온 망자의 혼이 임시로 거처하는 공간으로, 동해안뿐만 아니라 전라남도 씻김굿, 남해안 오귀새남굿에서도 등장한다. 바리데기굿은 발원굿이라고도 하는데, 오구신을 청하여 망인을 저승으로 모셔주기를 부탁하는 굿이다. 무당은 부모를 위해 저승에 가서 약물을 길어온 효녀 바리데기가 오구신으로 좌정하기까지의 신화를 구연한다.포항 오구굿의 사례민속학자 최길성이 1972년 8월 31일부터 9월 1일까지 조사한 ‘청진오구굿’은 당시 주소로 ‘영일군 청하면 청진리’에 있는 50여 호의 해변 마을인 청진에서 했던 오구굿이다. 이 굿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최길성이 펴낸 ‘한국무가집 2(1992)’에 기록되었다. 굿은 이 마을에 사는 최씨가 26세에 사망한 자신의 형제를 위해 의뢰하였다. 망자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형들의 어업을 도우며 살았는데, 저인망 어선을 타고 제주도로 잠수(일명 머구리)를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유명을 달리했다.어업조합에서 유족인 최씨에게 당시 돈으로 보상금 20만 원을 주었는데, 일부는 장례 비용으로 쓰고 남은 돈으로 망자를 위한 오구굿을 한 것이다. 망자는 젊은 나이에 사망한 데다 미혼이었기 때문에 이 오구굿에서는 역시 미혼으로 죽은 여성인 김씨의 영혼을 신부로 맞이하는 굿을 겸하였다. 이 오구굿을 맡은 무당은 이금옥(李金玉) 만신 외 8명이었다.오구굿에서는 특히 바다에 빠진 넋을 건지는 과정을 주목해야 한다. 바닷가에 망자의 가족들과 무당들이 바다를 향해 서면, 무당이 징을 치며 독경을 한다. 독경을 마친 후 넋전을 놋주발에 담고 무명 헝겊으로 싸매어 바다로 던지면, 가족들은 들고 있던 떡을 바다로 던진다. 이때 살아 있는 수탉을 바다에 던지는데, 수탉이 다시 바닷가로 헤엄쳐 나오면 이를 바다에 빠진 망자의 혼이 되돌아온 것으로 생각한다. 처음에 바다로 던졌던 넋전을 다시 거두어 소반에 얹고, 돌아온 닭도 다리를 묶어 소반에 올린다. 그러면 망자의 가족은 소반을 들고 집으로 가니, 망자를 집으로 다시 데려가는 것이다. 집 마당에서는 앞서 말했던 대로 망자 최씨와 망자 김씨 두 영혼의 혼례식이 이루어졌다. 오구굿의 꽃 바리데기 신화동해안 망자천도굿의 명칭이 오구굿인 것은 바리데기 신화에서 따온 것이다. 바리데기가 목숨을 바쳐 저승 여행을 하는 이유는, 아버지 오구대왕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다. 바리데기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전승되는 대표적인 한국 신화로 서울에서는 ‘바리공주’라 하며, 호남이나 동해안에서는 바리데기라 한다. 줄거리는 버려진 딸이 아비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인간이 갈 수 없는 저승 여행을 감행하는 이야기다. 김태곤이 1976년 2월 23일부터 26일까지 조사한 김석출의 바리데기를 중심으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바리데기는 오구대왕과 길대부인의 일곱 번째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버려진 아이다. 버려져 죽을 지경에 처했다가 비리공덕 부부에게 기적적으로 구조되어 무사히 성장한다. 세월이 흐른 후 오구대왕은 병에 걸리는데, 인간 세상에는 약이 없고 서천서역국의 동수자가 지키는 약수와 꽃을 구해야 했다. 여섯 공주에게 차례로 서천서역국에 가서 약수를 구해 오라고 하지만 모두 갖은 핑계를 대면서 가지 않는다. 결국 자신들이 버렸던 바리데기를 다시 찾게 된다. 열다섯으로 성장한 바리데기는 부모와 재회하자마자 부모의 병을 고치기 위해 남장을 하고 여행을 떠난다. 바리데기는 서천서역국으로 가는 험난한 여행길에 석가모니에게 도움을 받기도 하고, 여러 가지 주문과 주령을 들고 지옥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들을 구원하기도 한다.마침내 서천서역국 동대산에 이르러서 동수자라는 남성을 만난다. 동수자는 천상에서 죄를 얻어 삼십 년 동안 약수를 지켰다. 그가 다시 천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인간 여자와 결혼하여 삼 형제를 낳는 것이다. 동수자는 남장한 바리데기가 여성인 것을 알아본다. 그는 바리데기와 같이 목욕하는 척하다가 옷을 숨긴 후, 아이를 낳아달라고 한다. 결국 바리데기는 동수자와 혼인하여 아들 셋을 낳은 후에야 약수와 꽃을 구해 인간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그사이 동수자는 죄를 탕감받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결국 바리데기 혼자 아들 셋을 데리고 쩔쩔매고 있으니 배 한 척이 와서 태워준다.문수지장경 따리시고 오방다꺼니 오르시고 선주가야 오른 인물석가여래 오르시고 일력들아 동력들아 화장하야 오른님을 바양노금살번께 발공도 주정이 보면 물 한솥 연화대 어느 탄울이 오르시고일력들아 동력들아 화장하야 오른님은 화양노금산부채 발공도 주절 벌어 물항수 연화대 아미타불이 오르시고이 노래는 바리데기가 배를 탄 모습을 노래한 ‘용선가’의 일부분이다. 여기서 불교의 여러 신들이 등장하여 함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용선가’의 ‘용선’은 선박 운행의 무사태평을 기원하고, 조상신들이 용선을 타고 좋은 곳으로 천도하라는 의미를 담은 동해안굿의 상징물이다. 바리데기는 한국 무속의 전통적인 신이지만, 이 신화에는 다양한 불교의 신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무속의 세계관에서 바리데기보다 높은 신이다. 바리데기는 지장보살, 석가여래세존님, 저승 시왕 같은 신보다 아래에 있는 신이다. 고유의 신보다 불교의 신을 높게 보았던 것이다.바리데기는 마침내 이승에 도착한다. 하지만 한 농부에게 오구대왕이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른다는 소식을 듣는다. 바리데기는 서둘러 가서 관을 열고 약수와 꽃으로 오구대왕을 되살린다. 그 후 오구대왕님과 길대부인은 천상의 견우직녀성이 되고, 바리데기 일곱 자매는 북두칠성이 되는데 그중 떨어져 있는 별이 바리데기다. 바리데기의 세 아들은 삼태성이 된다. 무엇보다 바리데기는 망자들의 왕생극락을 인도하는 저승의 신이 된다. 그래서 망자천도굿에서 바리데기를 잘 모셔야 망자의 저승 가는 길이 편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바리데기는 무당의 조상신이자 몸주 노릇을 하여 모든 무당의 섬김을 받는 신이기도 하다.바리데기 신화에서도 확인되는 것처럼 오구굿은 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동해안굿에서는 불경을 독경하면서 의례를 진행하며, 죽은 영혼은 불교와 같이 ‘영가’라 부른다. 영산맞이와 같은 굿거리에서는 화랭이들이 바라나 꽹과리를 들고 염불을 하고, 극락춤을 추는 것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본인의 위패를 불명으로 써서 신단에 놓거나, 굿당 신단 위에 극락문을 만들어 연꽃의 조화로 장식하기도 한다. 무속 의례를 행하는 무당들도 무속과 불교의 관련성을 부인하지 않으며, 때로는 무속이 불교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역사적으로 토착 민간신앙이었던 무속은 삼국시대 한반도에 들어온 고등 종교인 불교의 영향을 받아 의례의 특성이나 내세관 등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점이 가능했던 것은 한국 무속 자신은 배척받았으면서도 개방성을 통해 외부적인 요소를 수용하면서 변화 발전하는 방식으로 전승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국 무속의 특징은 동해안굿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동해안굿의 미래동해안굿은 한국의 어느 무속권보다 전승 집단이 굳건하며, 무속을 신뢰하고 지지하는 토박이들의 믿음이 존재한다. 김석출이라는 걸출한 화랭이는 떠났지만, 그 맥을 이을 뛰어난 전승자가 있고 젊은 화랭이들의 배움의 열망이 계속되어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한국 무속은 우리 안에 새겨진 정신적 문신이다. 자기부정을 통해 형성된 문화 정체성은 그 문화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한국 무속의 위상을 재평가하고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무속 문화를 어떻게 되살릴지 고민해야 한다. 한국 무속은 수많은 문화 콘텐츠에서 한국 문화의 정체성과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요소로 활용 가능성이 충분하지만, 무속에 대한 오래된 터부와 편견은 여전히 이를 민속예술 안에 가두고 있다는 게 아쉽다.이번 연재를 통해 포항은 김석출이라는 뛰어난 만신이 태어난 곳이자 호탈굿을 중심으로 한 별신굿, 넋을 건져내었던 오구굿이 열렸던 한국 무속의 특별한 공간이었음을 상기하게 되었다. 현재 포항의 별신굿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포항의 별신굿을 비롯한 무속을 되살리기 위해 앞으로 연구자는 물론, 지방자치단체와 시민단체, 지역 주민 모두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글 / 염원희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2021-06-21

선한 삶의 방식 택하면 감염병도 이겨낼 수 있어

2019년 12월에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이 지속되고 있다. 감염병의 시대, 사회적 거리두기가 계속되면서 사람들은 초반에 느꼈던 긴장감보다는 감염병에 대한 피로감을 느끼는 것이 현실이다. 의학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이지만 새로 출현한 감염병을 감당하지 못하는 현실을 겪으며, 그렇다면 전통사회에서는 감염병을 어떻게 극복하고자 하였는지 궁금해진다. 광인굿, 심청굿, 손님굿다른 무가권도 그렇지만 특히 동해안굿에서는 광인굿, 손님굿, 심청굿 등 질병을 물리치는 여러 제의가 이루어졌다. 광인굿은 광인(狂人), 즉 미친 사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행하는 무속 제의다. 귀신에 의해 정신이상자가 된 사람에게 귀신을 떼어내는 목적으로 행했고, 다른 굿처럼 귀신을 달래기보다는 위협을 가하여 쫓는 축귀(逐鬼)의 제의다. 심청굿은 한국 고전소설의 주인공인 심청을 신으로 모셔 마을 사람들의 안질(眼疾)을 없애주기를 기원하는 독특한 제의이다. 판소리 ‘심청가’가 조선 후기에 생겨난 것이니 심청굿은 비교적 근래에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광인굿, 심청굿이 개인의 질병을 없애고자 하는 목적을 가졌다면, 손님굿은 손님으로 불리는 ‘두창(천연두)’을 가져온다는 신을 모시고 달래서 공동체의 바깥으로 내보내는 의례다.동해안의 손님굿은 두창신인 손님을 모시고 달래어 이 병에 걸린 병자를 낫게 하기 위한 병굿의 성격을 지니므로, 이는 신을 모시는 의례임과 동시에 ‘병자를 위한 의례’라 할 수 있다. 손님굿의 앞부분에 서사 형식의 무가를 구송(口誦)하고, 후반부에 두창신을 내보내는 의례인 ‘말놀이’를 한다. 두창신은 강남천자국(江南天子國)에서 한반도로 들어온다. 실제로 두창이라는 질병의 발생지가 인도였고 대륙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러한 과정이 손님굿 신화에도 반영되었다. 손님신이 한국 무속의 대표적인 외래신(外來神)이다. 손님신이 한반도로 들어오는 여행의 과정을 ‘노정기(路程記)’라 하는데, 중국에서 들어와 한반도 전역을 휩쓸었던 두창의 전염 과정에 대한 문학적 상상력이다.‘손님’은 어떤 신인가강남천자국에서 한반도로 들어와 집집마다 방문하는 손님신을 잘 대접한 노구할매는 복을 받고, 불손하게 대하고 구박한 장자(長者)는 외동아들 막둥이를 두창으로 잃게 될 뿐만 아니라 패가망신한다. 1979년 김유선 만신이 노래한 손님굿은 “의학이 발달하여도 손님신을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시기가 1979년이므로 현대 의학, 특히 서양 의학을 의식한 말인 것으로 짐작된다. 현대에 두창 치료의 의미가 사라졌음에도 치병굿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하며 굿을 시작하고 있다. 1977년에 김석출이 노래한 손님굿의 도입부에서 “하루는 손님네가 회의를 하여 세계 각국을 살펴보니 우리 조선국은 좋은 약도 없고 처방조치도 없고 침술과 한약뿐이니, 마마 천연두는 치료가 안 되니 손님신을 모셔놓고 굿을 하여”라 하여 손님신은 두창을 치료하기 위해 한반도에 왔으며, ‘침술과 한약’으로 일컬어지는 한의학보다 무속이 우위에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이러한 표현을 통해 이 굿이 질병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의례라는 점, 그리고 이 굿의 전승 집단은 손님굿과 같은 병굿을 한의학, 서양의학과 같은 의료행위와 동일 선상에 두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의학의 발달로 현재 무속의 치유적 의미는 미약하지만 적어도 무속 집단은 이 의례의 의미와 목적을 믿고 있으며 그러한 신앙 의식을 바탕으로 전승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손님네가 삐끌어지만참 자손들을 꼼보도 맨들 수 있고병신도 맨들 수 있고눈도 또 새따먹게도 맨들고코빙신도 입비뚤이도 맨들고뱅신을 모도 맨들어 노니그래도 아무리 세월이 좋아서 주사가 좋고 약이 좋다 해도손님네 잘 모시야 됩니다.손님네로 지칭되는 두창신은 ‘꼼보’라는 두창의 결과를 내리는 신일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다양한 질병과 장애를 줄 수 있다. 두창은 사라진 병이지만 현재에도 굿판에서 두창신이 의미 있는 이유는 단지 두창에 한정하여 이 굿을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손님신의 의미는 ‘질병신 일반’으로 확장해도 무방하다.손님신은 강남국, 강남대왕국, 강남천자국으로 지칭되는 곳에서 시준손님, 문신손님, 각시손님, 호방손님의 네 신이 한반도로 들어오는데, 이 중 각시손님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각시손님의 ‘각시’는 막 결혼한 젊은 여성을 가리키는 말로, 결혼한 여성은 출산과 연관되기 때문에 각시손님은 여신 고유의 생산력, 생명력을 상징한다. 흥미로운 점은 다른 문화권의 두창신도 주로 여성신으로 나타난다는 것. 인도의 시탈라마타, 중국의 낭낭, 아프리카의 소포나 등은 하나같이 여성 신격이다.인도의 작은 도시나 마을의 지역신 혹은 마을신들 대부분은 천연손님신이며 여신이다. 중국의 두진낭낭(痘疹娘娘) 역시 여신이며 어머니신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각시손님은 여신, 특히 모신(母神)이기에, 질병신이면서 동시에 치유신이다. ‘치유’는 죽어가는 생명을 되살리는 행위로 생명, 재생, 부활을 의미한다. 각시손님은 막둥이를 두창에 걸려 죽게 하지만, 자신을 잘 모신 서울 이정승댁 육남매는 두창을 가볍게 앓게 하여 이 병에 면역력이 생길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당신은 ‘손님’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여러 손님신들은 의주 압록강에 당도하여 배 한 척을 빌리려 하는데, 뱃사공이 뱃삯으로 각시손님에게 “하룻밤만 수청을 들어주면, 배 한 척을 빌려주겠다”고 희롱한다. 화가난 각시손님은 이틀 만에 뱃사공의 일곱 아들 중 여섯 명을 죽이고, 뱃사공도 물에 빠져 죽게 한다. 마지막으로 일곱째 아들마저 죽이려 하자, 뱃사공의 아흔 살 넘은 어머니가 자손 하나만 남겨달라고 간청한다. 각시손님은 “병신 자식도 좋다면”이라며 일곱째 아들을 열두 가지 질병을 가진 병자로 만들어 살려준다.각시손님이 이같이 혹독한 징벌을 내린 것은 뱃사공이 공동체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를 했다는 데 원인이 있다. 특히 굿 문화의 패트런(patron)은 대다수 여성이다. 굿이 여성문화로서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뱃사공의 각시손님 희롱은 굿에 참여하는 대중의 공분을 사는 행위였음이 분명하다. 무당이 주재하는 굿판이 마련되는데 물질적·물리적·감정적 도움을 주는 여성을 의식한 규범이기에 공감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한반도에 들어온 손님신들은 가난한 노구할매 집에 머물고자 하지만, 노구할매는 대접할 음식조차 없어 이웃의 부잣집인 장자네에 가서 대접받기를 권한다. 손님굿은 가난하지만 손님신에게 정성을 다하는 노구할매와 부유하지만 손님신을 박대하는 장자를 대조한다. 착한 노구할매는 장자의 외아들 막둥이가 15세가 되도록 두창에 걸리지 않은 것을 염려하여 장자의 아들이 두창에 가볍게 걸리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장자는 두창신이 허름한 노구할매의 집에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며, 그 집에 불을 지른다. 장자는 아들이 위독해지자 그제야 손님신을 모시려 하지만, 아들의 병이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면 다시 예전의 태도로 돌아간다. 결국 막둥이는 죽어 손님신을 모시고 다니는 마부가 되어버린다.손님네는 누구든지 들 때는하루 이틀 앓아서사흘나흘 만에는 구실이 돋아나며닷세엿세 만에 꺼먼 딱지 앉아서이레 여드레만에 꺼먼 딱지 떨어지며열흘열이틀 열사흘 만에는야정예를 내여 보내는데아무리 구실이 돋을 때를기다리고 바래도구실이 안 돋어난다이 내용은 두창의 병세가 진행되는 과정이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회복하면 질병에 대한 면역력을 얻어 다시는 걸리지 않게 되므로, 이는 질병에 대한 매우 중요한 정보였을 것이다. 이것이 무가의 일부로 노래되었다는 점은, 당시 두창에 대한 이와 같은 민간의 의료지식이 보편적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이 신화에서 뱃사공과 장자는 신을 모셔야 한다는 규범을 위반하였다. 뱃사공은 여성을 희롱하였으며 장자는 타인과 나누는 데 인색하였다. 공동체가 우선시되었던 농경사회에서 부를 가진 자가 자신의 부를 이웃과 나누지 않는 것은 공동체의 질서에 위배되는 악에 해당하며, 이는 징벌 또는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다. 이에 비해 노구할매는 장자와 다르게, 자신이 가진 적은 것도 이웃과 나눠야 한다고 믿으며 이를 실천하였다. 그러므로 노구할매는 공동체적 삶에 적합한 이상적인 존재다.감염병을 이겨내는 힘동해안 손님굿의 서사 구조는 악인인 장자와 선인인 노구할매를 대조하고, 공동체 에서의 삶의 방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장자와 노구할매는 개별 인간형이 아닌, 한 인간 안에 내재한 악마성과 성스러움의 상징적 표현일 것이다. 신화학자 노스럽 프라이(Northrop Frye)는 신화와 원형적 상징의 대표로 신과 악마의 구조를 든다. 이들 대조적인 구조는 각각 묵시적, 악마적이라 부르고 신은 바람직한 존재, 악마는 바람직하지 못한 존재다. 손님굿은 표면적으로는 신을 잘 대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 같지만, 실은 공동체의 삶에서 자기 안의 성스러움과 악마성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묻고 있는 신화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노구할매처럼 우리 모두가 선함을 택한다면 감염병이라는 재난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글 / 염원희(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2021-06-16

어촌 공동체를 지켜온 축제의 한마당

동해안의 수많은 어촌에서는 어로가 중요한 생업 수단이기 때문에 사나운 바다에 나가야 하는 부담과 두려움을 항상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어촌에서는 안전과 풍어를 동시에 바라게 되고, 이러한 소망을 기원할 수 있는 제의를 자연스레 찾게 되었다. 동해안의 마을마다 전승되는 ‘별신굿’은 늘 위험에 노출된 어촌 공동체를 안정시키고 단합을 도모하는 장이 되어 왔다.동해안의 각 마을에서 무당이 주관하는 큰 규모의 마을굿을 ‘별신굿’이라 한다. 이는 마을별로 오랫동안 공동체의 단합에 기여했던 오랜 역사성을 가진 제의다. 별신굿이라는 말뜻이 궁금할 것이다. ‘별신’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신을 특별하게 모신다’는 의미로 풀이되기도 하지만, 서라벌의 ‘벌’과 같이 ‘평야나 들의 신’이라 해석하기도 하고, 대부분 바닷가에서 쓰는 말인 만큼 ‘뱃신’, 즉 ‘배의 신’을 뜻하는 말이 변하여 ‘별신’이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동해안의 별신굿은 매년 행해지기보다 3년·5년·10년에 한 번씩 한다. 마을마다 개별적으로 이루어지기에 그 시기가 유동적이기는 해도 지속적으로 전승되고 있다. 어촌 주민들이 손꼽아 기다린 별신굿별신굿의 목적은 마을 공동체의 단합을 도모하는 역할이 가장 컸고, 구성원들이 모여 무당의 난장굿을 즐기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축제성’이 강조되는 자리였다. 별신굿이 꾸준히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구성원 모두의 보편적 소망인 풍요를 기원하는 목적을 지녔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바다의 상태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업으로 살아야 했던 지역에서는 어로 활동의 풍요로운 결과야말로 마을의 모든 주민이 바라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기에 별신굿의 존재는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같은 소망을 기원하는 자리였다. 특별한 오락이 없던 시대에 재능 있는 화랭이들의 노래와 춤, 연극을 볼 수 있음은 물론이고, 다 같이 먹고 마시는 자리가 주는 즐거움은 별신굿을 손꼽아 기다리게 만드는 이유였을 것이다.별신굿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전통신앙인 무속을 중심으로 했겠지만, 유식(儒式) 제의가 굿을 하기 전에 이루어지고 마을의 농악대가 참여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 행사였다. 굿이라는 제의의 과정은 마을별로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부정굿, 당맞이굿, 청좌(請座)굿, 세존(世尊)굿, 성주굿, 천왕굿, 심청굿, 군웅(구능)굿, 손님굿, 계면굿, 용왕굿, 거리굿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우선 부정굿으로 굿판 주변을 정화하고 차례로 신들을 불러 모신다. 그렇게 굿판을 깨끗이 한 다음 가장 먼저 마을신을 불러 모셨다. 마을신보다 높은 신도 많겠지만, 마을굿을 하는 것이니 별신굿에서 가장 먼저 모시는 것은 마을신이 되어야 한다. 그다음부터는 하늘에서 인간세계로 내려왔다는 천상신인 세존부터 줄줄이 신을 불러 모신다. 그리고 신을 모실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소망을 기원할 수 있었다. 다른 지역도 그렇겠지만, 동해안굿에서는 때로 무당뿐만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이 적극적으로 굿에 참여하며 즐기기 위해 굿판의 가운데에 나서서 화랭이와 함께 연극을 하기도 하고, 무당 옷을 대신 입고 춤을 추기도 했다.동해안 굿음악은 다양하고 복잡한 장단을 전승동해안굿 하면 지화(紙花)가 떠오른다고 할 정도로 굿판을 장식하는 종이꽃의 화려함은 어느 무가권에서도 따라올 수 없다. 동해안 별신굿의 굿당에는 각종 지화들이 장식되는데 연봉이 2~5개, 12개의 꽃다발이 다섯 묶음 정도 배치된다. 오구굿으로 가면 열 종류도 넘는 꽃들이 형형색색 굿상의 배경으로 장식된다. 별신굿에서는 지화의 사이에 용떡을 3~5개 놓는다. 또한 지화의 좌측과 우측에는 팔각등과 용선이 장식되어 있다. 정면에는 죽은 자의 넋을 받는 종이 인형인 ‘넋전’이 세 종류 정도 자리잡게 된다. 넋전의 아래에는 그날 모실 신을 위한 제물이 차려진다.동해안굿을 전승하는 세습무는 집안 대대로 무업과 음악을 잇는 생득된(ascribed) 예술가다. 이런 예술적 배경으로 인해 동해안굿 음악은 타악기 위주로 편성되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장단을 전승한다. 또한 같은 전승자가 연행하더라도 별신굿마다 굿의 연행 양상은 조금씩 차이가 나기 때문에 지역별로 연구되었다. 전통음악을 연구하는 전남대 이용식 교수는 2013년 5월 24일부터 25일까지 열린 포항시 구룡포 별신굿의 현장을 바탕으로 별신굿 음악을 연구하였다. 그에 의하면 별신굿의 음악은 무악 장단으로 다장(多章) 형식으로 된 것이 많다. 청보 장단은 5장이고, 제마수 장단, 부정 장단, 삼공잽이 장단 등은 3장이다. 이들 장단은 대개 느린 혼소박 장단으로 시작해서 빠르고 단순한 장단으로 진행된다. 장단이 빨라지면서 장구의 변주 가락도 다양해진다. 구룡포 별신굿 무악의 장단은 3+2+3 또는 3+2+3+2의 혼소박 장단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특히 3+2+3의 혼소박이 단위를 이루어 5~6박이 하나의 악구를 이루는 장단은 청보 1장, 제마수 1장, 부정 1장, 드렁갱이 3장, 자삼 장단 등에서 나타난다. 이런 혼소박 장단은 복잡한 박자 구조로 되어 있고, 장구와 꽹과리가 매우 복잡한 변주 가락을 연주하는 점이 동해안 별신굿의 음악적 특징이다. 주민들의 건강과 안전을 기원하는 ‘호탈굿’동해안굿은 신화가 발달했을 뿐만 아니라 화랭이에 의해 연극적 재현이 이루어지는 굿놀이가 발달했다는 점이 중요한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을 보여주는 동해안 별신굿의 한 굿거리로 호탈굿이 있다. 종이로 만든 탈을 쓴 호랑이가 굿판에 등장하면 포수역을 맡은 무당이 이 호랑이를 잡는 굿놀이다. 과거 호환(虎患)은 무서운 재앙 중 하나였다. 호랑이에 물려 죽은 사람의 영혼을 마을굿에 모셨던 것이 ‘범굿’이라 불리던 호탈굿이다. 영일군 구룡포읍 강사리에서도 호탈굿이 이루어졌다. 민속학자 최길성은 1971년 음력 10월 5일 하루 동안 포항 구룡포읍 별신굿에 등장하는 호탈굿을 조사하였다. 이날 이루어진 굿에서 호탈굿은 별신굿의 맨 마지막 굿거리인 거리굿의 바로 앞에서 연행되었다. 별신굿의 거의 막바지에 연행하기 때문에 이 굿거리를 할 때에는 모닥불을 피우거나 등불을 달게 되고,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굿판에 생기는 어둠과 빛의 조화가 호탈굿의 배경이 된다. 이날 호탈굿에서 포수는 무당 김석출(책에는 김경남(金景南)이라 써 있다)이, 호랑이는 무당 제갈태오(諸葛泰伍)가 맡았던 것으로 기록되었다.호탈굿의 과정은 크게 ‘호랑이 등장-포수 등장-호랑이 사냥-호랑이의 가죽 매매’로 구성된다. 먼저 준비된 굿판에서 잽이들이 무악을 연주하면 호탈을 쓴 호랑이 역을 맡은 화랭이가 등장해 굿판 가운데 있는 소나무의 주위를 돌면서 춤과 재주를 보인다. 포수가 총을 대신해 작대기를 어깨에 메고 등장하면, 이를 보고 호랑이가 숨는다. 과거에는 호탈굿을 포함한 별신굿이 끝나면 호랑이가 먹고 가라고 소를 잡아 소머리를 산에 묻었다고 한다. 동해안 굿놀이를 연구한 이균옥 교수는 호탈굿의 각 장면과 연행 후 소머리를 묻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호랑이의 등장 장면은 ‘위협의 발생’이며, 포수의 등장 장면은 ‘위협의 해소 가능성’이다. 그리고 포수가 호랑이를 사냥하는 행위는 ‘위협의 해소’이며, 사람이나 가축 대신 소머리를 산에 묻는 행위는 이후에 호환이 없기를 바라는 마을 사람들의 간절한 ‘기원’이다. 아래의 인용문은 최길성이 1971년에 조사한 구룡포읍 강사리 별신굿에서 호탈굿의 한 대목이다.포수 : 온 김에 이 범을 잡아야 동네가 안과태평하겠는데, 이 범을 꼭 잡아야 되겠소.잽이 : 그렇지.포수 : (총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다가 범을 찾는다. 범은 이리저리 피한다. 포수가 범을 발견하고 총을 겨누면서) 네 이놈 범아, 땅땅땅(잽이가 장구를 딱딱딱 친다. 한 사람이 포수가 겨누는 총 밑에서 숯불을 던져 총알이 나가는 시늉을 한다. 호랑이는 총알을 맞고 이리저리 두세 번 뒹굴다가 죽는다. 포수가 호랑이 가죽을 벗긴다고 하여 호탈과 종이로 만든 가죽을 벗겨 들고 판다). 이 산중의 호랑이를 잡아 가죽을 벗겼으니 이 동네서 사야 안 되겠소.잽이 : 그렇지.(어촌계장이 나와서 돈 1천원을 내고 가죽을 받아가지고 모닥불에 던져 태워버린다.)포수와 호랑이로 분한 화랭이들의 동작과 대사를 통해 별신굿 굿놀이의 일단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포수는 숨어 있는 호랑이를 찾아내어 총을 쏘아 잡은 후에는 가죽을 벗기는 시늉을 한다. 그리곤 반드시 그 가죽을 어촌계장이나 이장, 제관에게 돈을 받고 팔았다. 한지로 만든 호피를 산 이들은 이를 불에 태운다. 인용문에 나온 포수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호탈굿을 하는 목적은 그 마을의 안과태평이다. 호환이 빈번하던 시대에 마을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목적으로 별신굿에서 호탈굿을 행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호환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지만, 주민들의 건강과 안전을 기원하는 의미가 남아 비교적 근래까지도 포항 구룡포에서는 호탈굿을 행하였다. 호탈굿은 별신굿의 개성적인 굿놀이이자 무속의 역사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별신굿에서는 호탈굿 외에도 다양한 연극적 굿놀이가 이루어지고, 굿판에 참여한 청중은 큰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글 / 염원희(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2021-06-14

해외에서도 높이 인정받은 예술적 가치

‘만신’은 무당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김석출 만신의 가계도를 보면, 할아버지인 김천득(金千得)이 무업을 시작하였고, 그의 세 아들이 뒤를 이었다. 뒤이어 김석출은 3대로 무업을 계승하였다. 김석출은 그의 부인 김유선(金有善)과 함께 중요 무형문화재 제82-가호(동해안 별신굿)다. 그런데 김석출은 재주가 많아 동해안굿뿐만 아니라, ‘호적(태평소)의 1인자’이자 ‘지화(紙花) 제조의 1인자’로 명성이 높다. 현재 김씨 집안의 무업은 김석출 만신의 9남 1녀 중 변난호(邊蘭湖)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세 딸인 김영희, 김동연, 김동언과 김용택(김호출의 자), 김정희(김재출의 자)가 부산 일대에서 이어가고 있다. 또한 동해안 별신굿을 잇기 위해 양자와 양녀로 들인 이수자, 전수생도 있어 김석출 만신의 사망 후에도 동해안 무속은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무계를 형성하게 된 계기김석출의 할아버지 김천득은 일찍부터 한지 장사를 하였다. 이를 통해 부를 축적했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는 소문난 알부자였다고 한다. 김석출의 구술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이미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조랑말에 엽전 한 전대씩을 메고 다니며 마음껏 돈을 쓰던 한량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포항시 흥해장에 나가 풍어제(별신굿)를 구경하다가, 굿을 하는 열 살 아래의 무녀에게 반하면서 인생이 바뀌게 된다. 이 무녀가 바로 김석출의 할머니 이옥분(李玉粉)으로, 김씨 집안의 내력을 바꿔 놓은 장본인이다. 당시 김천득 집안에서는 양반 가문에 ‘무당’을 데려왔다고 매를 때려 다스리려 했다지만, 집안의 대가 끊길까 봐 자식에게 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김씨 일가는 양반 가문임에도 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집안의 허락을 받은 김천득은 아내인 이옥분에게 무업을 배워 무당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이후 김천득은 선창꾼으로 화랭이의 삶을 살았다. 꽹과리·장구·징·제금 등의 악기에 능했다고 전해지며, 염불이나 거리굿을 잘했고 선창꾼으로서 재주가 뛰어났다고도 한다. 활발하게 활동하던 김천득은 마흔 살에 돌연 무업을 그만두었고, 바로 무과를 준비해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관직만으로는 생활이 되지 않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고, 공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무당 출신이라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재산을 빼앗기는 일까지 겪으면서 결국 병이 들었다.김석출을 인터뷰했던 국문학자 유영대 교수가 2006년에 쓴 글을 보면, 이런 할아버지에 대한 김석출과 가족들의 심경을 확인할 수 있다. 김석출은 할아버지가 “장구체 놓고 신을 가뒀다가 심(心)에 병이 들었다”고 표현했다고 전한다. 신명(神明)이 가득한 사람이 그 신(神)을 풀어내지 못하자 결국 그 신이 몸에 병으로 나타난 것임을 무속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김천득의 삶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가족들은 그 후 누구도 무속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신명에 순응하는 삶을 받아들인 것이다.김천득과 이옥분 사이에 김범수, 김성수, 김영수 삼형제가 태어났는데, 김석출은 둘째 김성수의 아들이다. 김천득의 세 아들은 모두 예능적 재주가 뛰어났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김석출의 큰아버지인 김범수의 재주가 가장 뛰어나 화랭이로서 뿐만 아니라 농악과 창극 분야에서도 활동했다고 하니 예술가의 피가 면면히 흐르는 가계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범수는 포항 바깥으로 나가 활동하면서 얻은 음악적 기량을 동해안 무속음악에 접목해 발전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김석출의 아버지인 김성수 역시 고향에만 머무르지 않고, 북쪽에서 남쪽에 이르는 드넓은 동해안굿 권역에서 활동하였다.큰아버지와 아버지의 폭넓은 활동은 김석출에게도 영향을 주게 된다. 김석출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외지에서 굿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으므로 자연히 식견이 넓어지고 무업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었다. 큰아버지의 음악적 재능은 조카인 김석출에게도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또한 김석출의 아버지 대에 이렇게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활동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인데, 김석출 가계의 무업이 이미 이 시기에 동해안 남과 북에 걸쳐 활동 범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김석출 주변의 예술인김석출은 김성수와 이선옥의 3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3남 모두 뛰어난 무속 재능을 갖고 활동하였고, 그 자녀들 역시 현재 동해안 무속을 이끄는 위치에 있다. 민속학자 윤동환이 김석출을 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김석출은 열세 살 위 형인 김호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큰형을 따라 일곱 살부터 굿판에 출입하면서 자연스럽게 무업을 익혔고, 형님에게 본격적으로 무업을 배운 후 열두 살 무렵부터는 어른들과 비견될 만큼의 예능을 갖추었다. 열다섯 살에서 열여덟 살(1936~1939년) 무렵부터 부산에서 활동했는데, 굿을 하러 가면 인물이 좋아 여자들이 많이 따랐다는 얘기도 있다. 김석출의 재주를 알 수 있는 에피소드로, 광인굿을 연행하는 재주를 들 수 있다. 동해안의 화랭이는 광인굿에서 작두를 타는데, 김석출이 처음으로 작두에 오른 것은 열여섯 살 때로 재주가 비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석출이 열예닐곱 살 무렵에는 강원도 삼척에 거주하던 작은아버지가 맡은 굿에 불려가기도 했다.김석출이 무악 인생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은 24세에 부산에서 전라도의 태평소왕이라 불리던 방태진 선생과의 만남을 통해서다. 방태진은 유랑 공연단체의 단원으로 의상 감독 겸 반주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김석출은 방태진의 호적 소리에 사로잡혀 자신에게 호적을 가르쳐주기를 청하였다. 방태진이 한 가락씩 일러주면 김석출이 그 소리를 따라서 내는 방식으로 배웠는데, 같은 가락을 세 번 이상 일러주지 않았기 때문에 가락을 얻어듣기 위해 언제나 귀를 바짝 기울여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어렵사리 배운 호적 가락이 당시에는 겁 많고 수줍은 청년의 소리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농익은 김석출표 시나위 가락으로 탄생하게 되었음을 유영대와의 인터뷰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석출이 ‘호적의 1인자’라는 신화는 이러한 인연으로 시작된 것이다.김석출 만신은 포항에서 태어나 자라 굿을 익혔지만, 성장 후에는 경상남도로 이주해 이 지역의 굿을 익혔다. 또한 그 활동 반경이 동해안의 북쪽과 남쪽을 아울렀기에 동해안 지역의 다양한 굿을 습득할 수 있었다. 김석출의 이러한 경험이 중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그 과정에서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동해안 남부와 북부 지역의 굿을 상호 전파하고 교섭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김석출이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한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화랭이로서 기량을 다지면서, 동시에 특별한 무엇인가를 위해 찾아 나서는 김석출 자신의 예술가적 욕구가 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열정이 김석출의 예술 세계를 형성하고 만개하게 했으며, 동해안굿이 새로운 전기를 만나게 된 계기를 만들어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해외 활동과 음반 활동김석출 만신은 국내에만 머무르지 않고 해외에서도 활동하였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동해안굿뿐만 아니라 전통연희나 예술에도 조예가 깊은 정통 명인이기도 했기에 활동이 국내에 한정되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1982년 일본 도쿄국립극장 초청 공연을 비롯해 1994년 교토·오사카 공연, 1995년과 1996년에 요코하마 페스티벌 참가, 1996년 유라시안 에코스 호암아트홀 공연, 1997년 영국 런던 로열홀 공연을 통해 동해안 무속음악과 김석출의 존재를 세계에 알렸다. 이러한 공연을 계기로 한국의 무속음악을 접한 해외 음악인들이 무속음악을 배우겠다고 한국으로 와 동해안 굿판에서 활동한 사실은 무속음악의 예술성과 예술인으로서 김석출의 실력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다.해외 활동과 함께 굿 음악 음반을 통해 김석출의 음악이 대중과 만나는 기회도 이루어졌다. 그가 참여한 음반으로는 ‘높새바람’(삼성나이세스, 1993), ‘동해안 별신굿’(서울음반, 1993), ‘무악(巫樂) 동해무속사물’(삼성뮤직, 1994), ‘동해오구굿’(삼성뮤직, 1995), 94 일요 명인명창전 동해무속음악(실황)’(서울음반, 1996), ‘김석출 결정판’(삼성뮤직, 1997), ‘동해안 별신굿과 오귀굿’(국립국악원, 1999) 등이 있다. 남겨진 음반을 통해 김석출이 떠난 후에도 그의 예술 세계가 영원할 수 있게 되었다.글 / 염원희(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2021-06-09

동해안굿의 근간 만든 포항 출신 김석출

무속이란 민간층에서 무당을 중심으로 전승되는 종교 현상으로 한국 민간신앙의 한 형태다. 민간신앙에는 한 가정의 주부가 중심이 되어 집안에 모시는 ‘가신신앙’, 마을 단위로 전승되었던 ‘마을신앙’, 민속 종교로 일정한 체계를 갖춘 ‘무속신앙’이 있다. 무속신앙을 말할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이 강신무(降神巫)와 세습무(世襲巫)일 것이다. 학계에서는 한강을 기준으로 통상 이남은 세습무권으로, 이북은 강신무권이라고 보았다. 강신무는 신병을 겪고 무당이 된 경우이고, 세습무는 무업을 배우거나 대물림하는 경우를 말한다. 실제로 두 지역의 굿이 연행(演行)되는 과정과 무속의 전통, 무당의 성격에 차이가 있다. 한국 무속은 특정 지역별로 무가권이 구분돼민속학자 김태곤은 한국 무속은 강신무 중심이며, 이는 북방계통에서 유래한 것이고, 세습무는 강신무에서 분화하여 변천된 것으로 보았다. 반면 민속학자 최길성은 강신무와 세습무를 별개의 문화로 보고, 한반도는 남방계와 북방계가 섞여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편의상 이원론으로 구분하지만, 최근에는 강신무와 세습무를 별개로 보지 않고 상호보완적으로 존재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사실 강신무에도 세습적인 요소가 존재하며, 세습무에도 신 관념이 뚜렷하고 신단을 모시는 사례를 볼 수 있다. 게다가 요즘은 세습무권이라 하는 한강 남쪽 지역에서도 강신무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어서 이런 구분이 사실상 큰 의미를 갖지는 못한다.하지만, 강신무권과 세습무권이라는 구분이 아니더라도, 무속신앙은 ‘굿’이라는 제의를 연행하는 방법이나 굿에서 노래하는 신화인 서사무가(敍事巫歌)가 무엇을 전승하는지에 따라 다양한 관점에서 ‘무가권(巫歌圈)’을 구분할 수 있다. 한국 무속은 특정 지역별로 무가권이 구분된다. 한강 이남 지역을 살펴보면, 강신무를 중심으로 한 서울굿, 충청도굿, 전라도굿, 남해안굿, 제주도굿과 함께 동해안의 해안선을 따라 연행되는 ‘동해안굿’이 있다. 북한 지역은 조사하기 어려워 ‘북한 지역 무속’으로 포괄적으로 다루기도 했지만, 한국전쟁 때 월남한 무속인들을 대상으로 황해도굿과 함경도굿이 조사되었기 때문에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등 지역별로 무가권 연구가 이루어진다. 동해안굿은 예술성과 놀이성이 뛰어나이렇게 지역별로 무가권을 구분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국 무속을 관통하는 공통 원리가 존재한다. 굿은 ‘청신(請神)-오신(娛神)-송신(送神)’의 순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부정굿으로 굿을 시작하며 마지막에 굿을 끝내면서 잡귀잡신을 위한 굿거리를 마련한다는 것이 대표적인 공통점이다. 이러한 공통점을 공유하면서 이 글에서 자세히 살펴보려는 동해안 무가권은 그 나름의 특징이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화랭이(세습무 집안의 남성 악사)의 재주를 보여주는 ‘놀이성’이 매우 뛰어나 몇 날 며칠 굿을 놀면서 구성원들이 함께 즐겼던 굿의 원형적 모습이 살아 있는 곳이 바로 동해안이다. 게다가 지금도 여전히 많은 토박이들이 굿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수많은 무속 연구자들의 연구 터전이기도 하다.동해안 무가권의 범위는 강원도 고성을 최북단으로 하여 남쪽으로는 부산 다대포에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 이 지역에서 행해지는 모든 굿을 아울러 동해안굿이라 부른다. 동해안 무속은 말 그대로 어촌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어촌은 자연환경의 지배력이 크고, 협업을 통한 공동 노동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어로 작업의 위험성으로 인한 위기의식의 해소와 공동체적 유대가 반드시 필요한 지역이기 때문에 개인 또는 공동의 소망을 주술 종교적인 방법으로 해소하려는 열망이 강하다. 어쩌면 그러한 열망의 결과물로 형성된 신앙이 동해안굿이라 할 수 있다.굿은 지역사회의 종교 문화적 토대 위에 형성되어 지역적 특성이 여실히 반영되어 있기에 동해안굿은 해안가의 특징과 전통을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게다가 동해안의 각 지역민들은 굿을 통해 신앙 종교적으로 희구하는 한편, 예술적·놀이적 욕구도 충족해 왔기에 동해안굿은 종교성과 놀이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한국의 굿에서 동해안굿은 예술성과 놀이성이 뛰어나다고 평가된다. 이러한 평가에는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동해안굿의 음악은 리듬이 세련되며, 반복되면서 차츰 빨라지는 다이내믹한 장단이 큰 매력이다. 동해안 별신굿의 장단은 매우 다채롭다. 굿거리나 동살풀이, 삼공잽이 외에도 푸너리, 드렁갱이, 배기장, 삼오장 등 독특한 이름을 가진 장단으로 구성된다. 선율악기 없이 타악기로만 연주되는 동해안굿의 사물 장단은 섬세하며 기교가 뛰어나다. 동해안굿의 세습은 김석출에서 출발오랫동안 동해안굿 현장을 연구한 민속학자 윤동환은 동해안굿을 전승하는 두 개의 세습무 집단을 모두 조사하였다. 김해 김씨 집안인 김석출(2005년 사망)과 은진 송씨 집안인 송동숙(2006년 사망) 무계는 동해안굿을 전승하는 두 개의 축이었고, 그들이 활동하는 곳은 동해안의 북단과 남단까지다.김석출(金石出)은 1922년 경북 영일군(현재 포항시 북구) 흥해읍 환호동에서 태어났으며, 무속인 김성수의 둘째 아들로 김경남(金京南)이라고도 한다. 김석출의 본적은 조부의 출생지를 이어받아 경북 영일군 흥해면 옥성동 26번지다. 영일군은 1995년 1월 행정구역 개편 때 포항시로 통합되면서 폐지되었으므로 지금의 포항시가 김석출의 고향인 셈이다. 동해안굿의 세습을 설명하려면 김석출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데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김석출은 ‘중요 무형문화재 제82-가호 동해안 별신굿 보유자(악사)’이자 명예 보유자로 지정되어 있다. 그의 예술적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동해안굿을 이해하게 된다고 할 정도로 그의 삶은 동해안 무속의 지도와 마찬가지다. 김석출은 굿판에서 일곱 살 때부터 잔심부름을 하고, 여덟 살부터는 징채를 잡았다고 하니 아주 어릴 때 무업에 입문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동해안 굿판에서는 나이나 경력보다 ‘무업을 잘하는가’ 하는 점이 우선시된다. 그래서 재주가 많았던 김석출은 어린 시절부터 굿판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김석출은 열아홉 살에 결혼하고 나서도 한동안 포항에 살면서 무업을 계속했고, 형제들과 걸립을 다니며 각 분야의 민속 예인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예술 세계에 깊이를 더할 수 있었다. 이후 동해안 무속의 전승 주체였음은 물론, 해외 공연과 다수의 음반 활동을 통해 동해안굿의 예술성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현재는 딸들과 사위, 조카 등 김석출 만신의 가계에서 동해안 세습무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동해안굿의 근간은 김석출에 의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연재될 글에서는 포항에서 나고 자라 동해안굿의 핵심 전승자가 된 김석출을 중심으로 동해안에서 행해진 별신굿과 오구굿이 어떤 굿인지 살펴보고, 특히 감염병을 극복하고자 했던 무속 제의인 손님굿을 자세히 이야기하려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포항을 중심으로 한 동해안굿의 미래와 앞으로의 가능성을 가늠하려 한다.글 / 염원희(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2021-06-07

미각의 즐거움이 넘치는 포항

포항의 상징은 포스코다. 포항을 대표하는 또 다른 상징은 어떤 것이 있을까? 구룡포 과메기, 호미곶 일출, 죽도시장 등이 그 뒤를 따른다. 그런데 포항시의 공식 상징인 시화나 시목은 무엇인지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포항의 시화는 장미, 시목은 해송, 시조는 갈매기다. 전국 어디에나 있는 것이니 딱히 포항만을 상징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 국민 생선이라 할 만한 꽁치는 흔하지만, 포항이 먼저 떠오른다. 과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꽁치도 포항의 상징으로 한자리를 차지할 만하지 않을까? 시어(市魚)를 정한다면 포항의 시어는 꽁치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포항과 울릉도에서 즐겨 먹는 꽁치 완자 요리전국에 널리 알려진 포항 꽁치 요리의 대명사는 과메기지만 과메기 외에도 포항 사람들의 꽁치 사랑은 유별나다. 포항에서는 꽁치 하나로 참 다양한 요리를 만들어낸다. 구워 먹고 끓여 먹는 것은 기본이고 날것은 회로 먹고, 전도 부쳐 먹고 죽도 끓여 먹는다. 소금에 절여 젓갈로도 담가 먹는다. 다양한 꽁치 요리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과메기와 함께 포항을 대표하는 꽁치 요리는 꽁치 다대기다. 뼈째 다져서 만든 꽁치 완자를 넣고 끓이는 음식이 바로 꽁치 다대기인데 꽁치국, 꽁치 당구국, 꽁치 다대기 추어탕, 꽁치 시락국 등의 다양한 이름과 형태로 진화해 왔다. 꽁치 완자 요리는 울릉도의 관문인 포항과 울릉도에서 함께 즐기는 향토 음식이다. 울릉도에서는 꽁치 완자에 섬엉겅퀴를 넣고 끓이는 꽁치 완자 엉겅퀴 된장국이 대표 요리다. 구룡포의 이름난 꽁치 시락국숫집 벽면에는 시락국수 먹는 법이 쓰여 있다.“꽁치 완자를 으깬다. 청양고추를 넣는다. 산초 가루를 넣는다.” 국수 먹는 법이 어디 정해져 있겠는가마는 낯선 음식 앞에서 주저하는 이들에게 일종의 가이드처럼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으깨지 않고 완자를 통으로 먹을 수도 있고, 매운 것 싫은 사람은 청양고추를 안 넣어도 되고, 산초 향이 싫은 사람은 산초 없이 먹어도 된다. 꽁치 완자를 넣은 시락국에 국수를 말면 시락국수가 되고 밥을 말면 시락국밥이 된다. 전국 각지에 가장 흔한 국밥 중 하나가 시락국이다. 통영에 가면 장어 뼈를 우린 국에 시래기를 넣고 끓인 시락국이 있고, 내륙의 시골 장터에는 돼지고기 육수에 시래기를 넣은 시락국이 있다. 그냥 된장만 푼 시래기 된장국도 우리가 즐겨 먹는 음식이 아니던가. 음식은 지역의 특성을 반영한다. 포항의 꽁치 완자 요리가 소중한 문화인 것은 꽁치의 살뿐만 아니라 칼슘이 풍부한 뼈까지 버리지 않고 다져서 완자로 만들어 먹었던 옛 포항 사람들의 지혜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포항에서도 꽁치 완자 시락국을 끓이는 방법은 집집마다 다르다. 그때그때 값싸고 흔한 생선을 넣고 육수를 내는 집도 있고, 멸치 육수만 쓰는 집도 있고, 달리 육수를 내지 않고 꽁치 완자와 야채만 넣고 끓여내는 집도 있다. 역시 요리에는 고정된 레시피가 없다. 다만 꽁치 완자를 넣는다는 점만 동일하다. 하지만 이 꽁치 완자를 만드는 법도 제각각이다. 꽁치 살과 뼈를 다져서 사용하는 것은 같은데 완자를 만들면서 여기에 밀가루를 섞는 집도 있고 밀가루를 전혀 쓰지 않고 꽁치만을 사용하는 집도 있다. 꽁치 완자 시락국은 꽁치를 도마에 놓고 칼로 다져서 만드니 꽁치 다대기, 꽁치 당구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하지만 요즈음 식당에서는 그런 재래식 방법으로 만드는 것이 힘드니 대부분 꽁치를 방앗간에서 갈아다 완자를 만들어 쓴다. 집에서 소량으로 만들 때만 전통 방식대로 직접 손으로 다진다. 밀가루를 섞은 꽁치 완자는 모양이 좋고 잘 부서지지 않아 씹는 맛이 있지만 국물이 텁텁하다는 단점도 있다.밀가루를 쓰지 않고 온전히 꽁치 원재료만으로 완자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 접착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밀가루 안 쓰는 완자 만들기를 고수하는 집에서는 완자를 미리 만들어두지 않고 수제비처럼 물이 끓을 때 꽁치 다대기를 숟가락으로 떼어서 넣는다. 꽁치 다대기는 끓는 물에 빠지는 순간 굳어지기 때문에 밀가루가 없어도 완자 모양을 유지할 수 있다. 담백한 국물 맛을 원한다면 이 방식의 꽁치 완자 요리를 만들면 된다. 꽁치 다대기는 전을 부쳐 먹기도 한다. 포항 음식은 꽁치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풍성한가. 모리국수, 생선탕에 국수를 넣어 먹는 데서 유래포항에는 꽁치 시락국수에 필적할 만한 특별한 전통 국수 요리가 또 하나 있다. 모리국수다. 모리국수는 생선탕에 국수를 넣어 먹던 데서 유래했다. 옛날에는 생선을 끓여서 뼈를 발라내고 살을 넣고 추어탕처럼 끓인 국물에 국수를 말아 먹었다. 일종의 어탕 국수였다. 지금은 멸치 육수를 쓰는 집이 많다. 오늘은 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의 대천식당에서 모리국수를 먹는다. 본래 구룡포 모리국수는 미역초라는 물고기를 주원료로 만들었다. 미역초의 학명은 무점등가시치다. 남해안에서는 고랑치라 부른다. 동해안에서는 헤엄칠 때 모양이 미역과 닮았다 해서 미역초, 길다고 해서 장치라고도 한다. 미역초는 4∼7월 사이가 맛있다. 그래서 모리국수도 이때가 제철이다. 미역초는 살이 단단해서 회로 먹으면 씹히는 살맛이 일품인데 척추 뼈가 굵고 억세 국물이 잘 우러난다. 모리국수에 미역초를 쓰는 것은 육수가 좋아서다. 미역초를 넣은 미역국도 구룡포 사람들이 즐겨 먹는 향토 음식이다. 국물이 텁텁한 맛이 없고 다른 어떤 생선보다 깔끔하다. 모리국수는 미역초가 흔하던 시절에는 미역초가 1순위였지만 지금은 귀한 물고기가 돼서 다른 물고기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생선이든 싱싱한 생선으로 끓여야 비린 맛이 없고, 시원하고 고소하다. 모리국수는 푹 끓여 뼈를 걸러내고 진국에 국수를 말아내는 민물고기 어탕 국수와는 차이가 있다. 즉석에서 매운탕 끓이듯 생선을 통째로 넣고 바로 끓인다. 먹을 때마다 즉석에서 바로바로 끓이니 손이 많이 간다.모리국수는 옛날 구룡포에서 집집마다 즐겨 끓여 먹던 음식이다. 본래 재료는 정해진 것이 없었다. 한 집에 보통 식구가 십여 명이나 되니 먹을 것이 귀했다. 미역초뿐 아니라 다양한 물고기와 고둥, 새우, 문어, 홍게 같은 해산물을 넣고 육수를 끓이다 국수를 넣으면 양이 많아져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쌀이 귀하던 시절 최고의 영양식이었다. 온갖 해산물에 미역 같은 해초뿐만 아니라 취나물, 고사리 같은 산나물을 넣고 끓이기도 했다. 때로는 신김치를 넣고 끓이기도 했다. 가족들이 다들 모여서 배불리 먹는다 해서 모리국수란 이름이 붙여졌다.모리국수에는 무가 들어가야 시원하다. 먼저 미역초를 깔고 무, 콩나물 등 야채를 넣고 끓이다 육수가 어느 정도 우러나면 국수를 넣어서 익힌 뒤 먹는다. 문어, 홍게, 고둥 같은 해물도 고명으로 들어가니 시원한 맛이 배가 된다. 국수는 생면을 쓰는데 생면을 흐르는 물에 한 번 씻은 뒤 끓는 육수에 넣는다. 그래야 국물이 텁텁하지 않고 개운한 맛을 낸다. 간은 새우젓으로 한다. 민물 어탕 국수의 눅진함과는 또 다른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이 매력이다. 포항 와인의 부활을 꿈꾸며“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소년 시절에 참으로 좋아하던 시, 이육사의 ‘청포도’. 포항 청림동에는 청포도 문학 거리가 있고 다양한 포도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다. 또 호미곶 새천년광장에는 청포도 시비도 있다. 그런데 어째서 안동 태생인 이육사의 시비가 포항에 있는 걸까? 이육사는 1936년 7월 당대의 유명한 한학자였던 사촌형과 이종형이 살고 있는 포항에 휴양차 와 있었다. 동해면 송도원에 머물면서 동양 최대의 포도 농장인 미쓰와(三輪) 포도원을 둘러봤고 영일만을 바라보며 시상을 떠올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청포도’를 완성한 뒤 국내에서 발표했다. 육사의 시 ‘청포도’가 탄생한 곳이 포항인 것이다. 지금은 짐작하기도 힘들지만 한 시절 포항은 와인의 주산지였다.일제강점기, 포항시 동해면과 오천면 일대에는 미쓰와(三輪) 포도원이 있었다. 이 농장에서 생산된 포도를 원료로 만들었던 삼륜 포도주는 명포도주로 알려져 애주가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미쓰와 젠베에가 1918년 2월 국유지 약 16만 5천㎡를 헐값에 불하받아 미쓰와 포도원을 열었다. 1934년에는 포도원의 면적이 약 198만 3천400㎡에 이르렀고 연인원 3만 2천여 명의 조선인들이 동원돼 포도 농사를 지었다. 미쓰와 포도원은 100여 종의 서양 포도를 시험 재배해 20여 종을 심었다. 1935년 기준 연간 생포도주 1천석, 브랜디 100석, 감미 포도주 500석 이상을 생산했다. 와인 종류도 다양했고 증류주인 브랜디까지 만들어냈다. 레드, 화이트, 감미 화이트, 감미 레드 와인과 브랜디, 포켓 브랜디 등이 생산됐다.해방 후에도 이 농장에서는 ‘삼륜포도주공사’라는 이름으로 포도주가 생산됐다. 이 농장의 포도주는 1960년대까지 ‘포항 포도주’로 시중에 판매됐지만 1966년 방부제 과다 사용이 문제가 돼 폐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병대교육훈련단과 포항비행장이 자리한 곳이 바로 미쓰와 포도농장 자리다. 1970년대에는 두산 포도원이 청하와 흥해 지역에 들어서면서 영일만 청포도가 부활했다. 총 98㏊의 땅에서 연간 700∼800t의 포도를 생산했다. 이 지역은 강수량이 적고 연간 최저 온도가 높아 포도 재배에 적지였다. 이 농장에서는 양조용 청포도 리스링과 사이벨, 먹포도 엠비에이 등 3종이 재배됐으며, 이 포도를 원료로 20년간 마주앙 와인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포도주 개방으로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1996년부터 생산이 중단됐다. 이래저래 포항은 와인과 인연이 깊은 땅이다. 다시 이 지역에 포도원을 되살리고 와인을 만든다면 포항의 새로운 산업으로 되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와이너리 투어와 해양 관광, 해양 레포츠의 만남. 아주 매력적인 포항의 미래 관광자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글·사진 / 강제윤 시인·(사)섬연구소 소장

2021-06-02

들큰새콤한 동해안 사람들의 소울 푸드

삭은 혀끝이 거머쥘 감칠맛 어디 있겠냐고/어머니, 할머니, 할머니의 그 할머니/구황하려 매운 손끝으로 버무려 온 물가재미식해/한 젓가락 듬뿍 퍼 올리고 싶다/흔하디흔한 물가재미 큼직큼직 채 썰어/무며 조밥, 마늘, 고춧가루에 비벼 간 맞춘 뒤/오지에 담아 아랫목에 두면 며칠 새/들큰새콤 퀴퀴하게 삭아 있던 밥식해,/왜 오묘함은 가슴과 사귀는 좁쌀 별인지/밤새워 푸득거리는 눈발 한 채여도 안 서럽던!- 김명인, 「물가재미식해」 전문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하게 하고, 앉아서도 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공간이 있다. 나에게는 통영의 동피랑이 그런 곳이다. 10년 넘게 살고 있지만 동피랑은 날마다 설레고 날마다 여행을 떠나게 만든다. 그런데 이번 포항 여행에서 그런 공간을 또 하나 발견했다. 포항 여행자들은 바다를 보기 위해 구룡포나 호미곶을 찾지만 솔직히 나는 포항 시내 죽도시장 부근 동빈내항 풍경이 더 매력적이었다.죽도시장이 가까이 있기도 하지만 동빈내항이 내려다보이는 숙소에서는 주야간 풍경 모두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인공과 자연의 조화로움이 더없이 편안하고 좋았다. 어선이 들고 나는 밤의 항구는 여행자의 노스탤지어를 한껏 자극했고 조명이 들어온 포스코의 풍경은 어느 먼 나라에 와 있는 듯한 흥취를 자아냈다. 그야말로 여권 없는 해외여행이었다.등잔 밑이 어둡다니 아마도 포항 사람들은 동빈내항의 그토록 아름다운 밤 풍경을 접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 풍경이 바라다 보이는 숙소에서 묵을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꼭 멀리 가야 여행이 아니다. 문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여행은 시작된다. 집 떠나면 다 여행이다. 포항 여행자들만이 아니다. 포항 사는 사람들도 동빈내항이 바라다 보이는 숙소로 가끔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동네 여행자. 내가 사는 동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함경도부터 경주까지 동해안 사람들이 즐겨 먹어포항에서 여러 날 머물다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동빈내항과 죽도시장의 풍경이 사무치게 그립다. 아무래도 포항과 사랑에 빠진 듯하다. 언제 또 동빈내항 부근에 방 하나 잡아 놓고 한 열흘쯤 아무 일도 안 하면서 죽도시장으로 출근해 맛난 시장 음식을 안주로 주야장천 술만 마시다 와도 좋을 것 같다. 개복치며 두치며 꽃새우회며 청어회며 말똥성게며 꽁치 다대기며 횟대기 밥식해며 무엇보다 밥식해의 그 쿰쿰하고 아련한 맛이 입맛을 다시게 만든다.죽도시장은 맛의 천국이다. 포스코가 포항의 척추라면 죽도시장은 포항의 심장이 아닐까. 죽도시장은 어시장, 농산물시장, 죽도시장 등 세 개의 시장이 동심원을 그리며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1만8천760㎡ 면적에 25개 구역, 2천500여 개 점포가 들어서 있는 동해안 최대의 전통 시장이다. 시장 어딜 가나 유혹하는 맛들이 널려 있으니 죽도시장은 미각의 제국이다.동해안 사람들의 소울 푸드인 밥식해. 울진 태생의 김명인 시인에게도 식해는 영혼을 따뜻하게 배불리는 음식이었다. 밥과 생선을 넣고 발효시켜 먹는 요리인 식해는 가장 토속적인 동해안 음식이다. 식해는 함경도 북청부터 강원도 속초, 경북 울진, 포항, 경주 감포까지 동해안 사람들이 두루 즐긴다. 밥을 넣고 발효시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 밥식해라고도 부른다. 함경도나 강원도에서는 조밥을, 경상도에서는 쌀밥을 주로 넣어 발효시킨다. 포항에서는 쌀밥을 넣어 만든다. 포항의 밥식해는 대체로 흰살 생선인 가자미, 횟대, 오징어 등을 넣어 만들지만 전갱이나 꽁치 같은 등 푸른 생선으로 만들기도 한다. 백고동으로 만든 식해도 있다. 밥식해는 젓갈처럼 장기간 발효시켜 먹는 음식이 아니다. 그래서 젓갈 해(醢)자를 쓰지만 실제로는 그리 짜지 않다. 간성현감을 지냈던 택당 이식이 쓴 ‘간성지(杆城志)’에는 연어, 황어, 은구어(은어), 전복, 홍합식해도 등장한다. 요즘은 바다에만 서식하는 어류를 주로 쓰지만 과거에는 강과 바다를 오가는 어류가 풍부해 식해의 재료가 됐던 것이다. 이 식해들은 왕실로 진상되기도 했다. ‘간성지’에 따르면 동해안에서 젓갈은 주로 생선알로 담았고 생선살은 주로 식해를 담아 먹었다. 식해 담는 법은 동해안 어느 지역이나 엇비슷하다. 먼저 막 잡은 생선의 내장을 제거하고 물기를 쪽 뺀 뒤 잘게 썰어 소금으로 간을 하고 엿기름을 넣어 하루쯤 1차 발효시킨다. 여기에 쌀을 쪄서 고두밥을 만든 뒤 식힌다. 무는 채 썰어서 소금에 절인다. 절인 무채의 물기를 짜낸 다음 고춧가루, 마늘 등의 양념을 만들어 가자미에 넣고 버무린다. 양념된 가자미와 고두밥을 섞어서 비빈다. 그런 다음 따뜻한 방에서 2∼3일 발효시키면 먹을 수 있다. 포항의 원조 밥식해는 횟대기 밥식해17세기 초 이 땅에 고추가 처음 들어오기 전까지는 고춧가루를 넣지 않은 밥식해를 만들었다. 제사 음식에 고춧가루를 쓰지 않는 이유는 귀신이 붉은색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우리 조상들은 귀신이 붉은색을 싫어하다는 속설을 믿었으니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실상 과거에는 어떤 음식에도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고춧가루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제사를 모셨고, 제사 음식에는 당연히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니 제사 음식에 고춧가루를 쓰지 않는 것은 귀신 때문이라기보다 그 오랜 전통을 따른 것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포항 지역 제사상에도 여전히 흰 밥식해가 올라간다. 식해는 여름에 담글 때는 무를 넣지 않는다. 그래야 물이 생기지 않는다. 빨리 삭히려면 엿기름을 넣지만 천천히 삭혀 먹으려면 엿기름을 넣지 않는다.포항의 원조 밥식해는 횟대기 밥식해다. 횟대기의 학명은 대구횟대다. 포항에서는 홋대기라고도 부른다. 횟대기는 성대(달갱이)처럼 날개 같은 옆지느러미가 달려 있다. 횟대기는 대구횟대, 가시횟대, 빨간횟대(홍치) 등이 있는데 최고로 치는 것은 대구횟대다. 횟대기는 생선살이 유난히 찰지고 쫄깃한 식감이 좋지만 요즘은 값이 비싸 쉽게 접하기 어렵다. 그래서 죽도시장에서도 근래는 가자미식해가 더 많이 만들어진다. 과거에는 애경사에도 빠지지 않는 음식이었다. 지금도 추석이나 설 명절에는 집집마다 밥식해를 만든다.‘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향토 음식 편’(1984)에는 가자미식해를 동해안 향토 음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가자미식해는 얼큰하게 매우면서도 달착지근하고 산뜻한 맛이 일품인데, 12월부터 3월 초에 나는 가자미로 담아야 맛이 좋고, 꼬리 쪽에 가느다란 노란 줄이 있는 참가자미로 담그면 더욱 좋다”고 했다. 조선 후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가자미, 청어, 잉어, 밴댕이, 크고 작은 새우, 오징어, 문어, 꼴뚜기, 각종 조개와 굴, 홍합, 가자미, 북어, 멸치 등 모든 생선들로 젓갈을 담글 수 있다고 소개되는데 ‘생선식해[諸魚食醢’ 항목의 가자미식해 만드는 법은 이렇다.“흰 멥쌀밥에 엿기름과 누룩가루를 넣어 잘 섞고 물도 몇 종지 넣어 발효시킨다. 그런 다음 가자미를 꺼내 물기를 제거하고 햇볕과 바람에 잘 말렸다가 잘게 썰어서 다시 소금에 버무려 두었다가 익은 다음에 먹는다.”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조리법이다. 또 청어나 잉어를 이용해 식해 만드는 법도 등장한다.“청어 혹은 잉어를 세 손가락 너비로 잘라 깨끗이 씻는다. 생선 5근에 볶은 소금 4냥, 끓인 기름 4냥, 생강과 귤껍질 채 0.5냥, 고춧가루 1분, 술 1잔, 식초 반잔, 파 채 2줌, 밥을 조금 섞어 함께 골고루 잘 섞은 후 도자기병에 단단히 눌러 넣는다. 다음은 대나무 잎으로 입구를 촘촘하게 덮고 대나무 꼬챙이를 꽂아 고정시킨다. 5~7일이면 숙성된다.”1680년경에 저술된 조리서 ‘요록(要錄)’은 식해에 산초를 넣으면 맛이 좋다고 전한다.“물고기에 소금을 좀 짜게 쳐서 2~3일 밤 재운 후, 깨끗하게 씻은 다음 눌러서 짠 물을 뺀다. 현미 쌀로 죽을 쑤고 절인 생선에 섞어서 항아리에 담아 놓고 삭힌 후에 죽을 씻어낸다. 다시 백미로 밥을 지어서 섞어 담가 놓으면 색이 변하지 않고, 산초를 넣으면 맛이 좋다.” 여기서는 향신료인 산초를 넣어 식해를 더욱 고급화했음을 알 수 있다. 서유구의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도 식해 만드는 법이 등장한다.“큰 생선 1근을 토막으로 잘라서 물에 닿지 않게 깨끗한 천으로 닦아 물기를 말린다. 여름철에는 소금 1냥 반을 쓰고 겨울철에는 소금 1냥을 써서 절인다. 한동안 지나서 절인 생선에서 소금물이 흘러나오면 다시 물기를 닦아낸 다음 생강 채, 귤피 채, 시라, 홍국, 찐밥과 파기름을 한데 넣고 골고루 섞어서 자기 항아리에 꼭꼭 눌러 담고 대나무 잎으로 덮고 대꼬챙이를 꽂아둔다. 항아리를 뒤집어 봤을 때 소금물이 모두 없어졌으면 생선이 숙성된 것이다. 또한 본래 생선을 절였던 소금물에 담그면 고기가 쫄깃하고 부드럽다.”요즘 식해는 동해안의 음식 문화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식해 문화가 전국적으로 퍼져 있었고 해산물뿐만 아니라 돼지, 꿩 등 육류나 식물을 이용한 식해도 많았다. 의관 전순의가 1459년 지은 ‘산가요록(山家要錄)’은 지금까지 전해지는 이 땅의 가장 오래된 요리책이다. 이 책에는 생선, 양, 돼지껍질, 도라지, 죽순, 꿩, 원미(쌀을 굵게 갈아 쑨 죽) 등 식해 조리법이 일곱 가지나 소개되어 있다. 포항이 식해 문화를 더욱 널리 계승하려면 생선 식해에 한정하지 말고 육류와 식물을 이용한 식해도 개발해 보는 것이 어떨까. 채식주의자들이 많아진 시대이니 포항의 농산물로 만든 식해 또한 널리 사랑받게 되지 않을까 싶다. 글·사진 / 강제윤 시인·(사)섬연구소 소장

2021-05-31

바람과 햇볕으로 조리한 마법의 요리

기록에 남은 과메기의 시작은 조선의 바다를 물 반, 고기 반으로 만들 정도로 풍성했던 청어다. 청어는 조선의 선비들에게 단백질을 공급하는 중요한 생선이었기에 비유어(肥儒魚)라고도 했다. 선비를 살찌우는 물고기. 포항에는 과거에 청어가 얼마나 많이 잡혔는지 지명으로 남아 있을 정도다. 호미곶의 까꾸리께라는 곳이 그곳이다. 청어 떼가 해안으로 밀려오면 까꾸리(갈퀴)로 긁어모았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 까꾸리께다. 그야말로 물 반 고기 반이던 전설 같은 시대의 이야기다. 유럽에서도 청어는 대구와 함께 가장 중요한 생선이었다. 식량인 동시에 축재 수단이기도 했다. 유럽의 청어는 소금에 절여서 유통됐다. 지금도 네덜란드를 비롯한 북유럽에서는 ‘하링’이라는 전통 방식의 청어 초절임이 팔리고 있다. 교회가 육식을 금지하는 기간에 청어는 주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자산어보’에 등장하는 청어 과메기과메기는 대개 11월부터 2월까지 말린다. 구룡포 삼정리 해변에는 아직도 재래식으로 해풍에 건조하는 과메기가 생산된다. 대부분 공장식 시스템을 통해서 실내 온풍 건조로 만들어지고 있으니 해변 덕장의 건조 과메기는 귀하다. 삼정리 어업의 역사는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청동기시대에도 그물로 물고기를 잡았던 증거물들이 출토됐다. 2002년 구룡포에서 호미곶까지 해안도로를 내면서 삼정리, 석병리의 고분군에 대한 발굴 조사를 했는데, 어업 관련 유물이 151점이나 발굴됐다. 삼정리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나온 토제 어망추도 그중 하나다. 어망추는 그물 끝에 달아서 그물이 가라앉게 만드는 기구다.청동기시대부터 삼정리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물을 이용해 물고기를 잡았고 지금도 삼정리 어민들은 같은 바다에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으며 살아간다. 참으로 장구한 어업의 역사가 이어져온 해변이다. 청동기시대에도 사람들은 물고기를 말려 먹었을 것이니 청어나 꽁치를 과메기로 만들어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 대량으로 물고기를 어획한 토제 어망추가 바로 그 증거다.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에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고래잡이를 했던 그림이 남아 있고, 구룡포 삼정리에도 청동기시대 암각화가 남아 있다. 고래 사냥을 해서 고래고기를 먹었던 청동기인들이니 과메기인들 못 만들어 먹었을 까닭이 없다. 그렇다면 과메기의 역사는 물경 3000년에 이른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삼국지’의 ‘위지 동이전’에는 “옥저 사람이 고구려에 조부(租賦)로서 맥포(貊布)와 함께 어염(魚鹽) 및 해중 식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나오고, 2020년 10월 국립중앙박물관은 재발굴 결과 경주 서봉총에서 쏟아져 나온 유물 중에 백제의 조문객이 가져온 민어의 흔적이 나온 것을 보면 2000년 전에도 건어물 문화가 널리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대와 선사시대부터 생선을 말려 먹는 문화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과메기만 없었을 것인가.일반적으로 과메기는 청어나 꽁치를 수분 함유량이 40퍼센트 정도 되도록 말린 것이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청어 과메기를 소개한다. 관목청(貫目鯖) 항목에 나오는 이야기다.“모양은 청어와 같고, 두 눈이 뚫려 막히지 않았다. 맛은 청어보다 좋다. 이것으로 얼간포를 만들면 맛이 매우 좋다. 때문에 청어 얼간포를 관목청어라 부른다. 영남 바다에서 잡히는 놈이 가장 드물고 귀하다.” 과메기는 청어의 눈을 꿰어서 만든 관목어, 관목청으로 불리다 과메기가 된 것이다. 청어에 소금을 약간 뿌려서 살짝 저리는 ‘얼간’을 해서 건조한 생선이 과메기였다. 서유구의 ‘전어지(佃漁志)’ 청어(青魚, 비웃) 항목에도 과메기가 등장한다.“우리나라 청어포 역시 자적색이 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다만 그 고기를 엮는 법은 등을 가르지 않고 새끼로 엮어서 햇볕에 말린다. 이렇게 하면 먼 곳에 부치거나 오래 두어도 상하지 않는다. 민간에서 ‘관목(貫目)’이라고 하는 것은 두 눈이 새끼줄로 꿸 수 있을 만큼 투명한 것을 말한다. 잡는 즉시 선상에서 말린 것이 품질이 우수하다고 한다.”‘영남읍지’(1871)에는 영일, 청하, 영덕 지방의 토산품으로 관목(과메기)이 거론되고 있다. 이규경이 1800년대 초 편찬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단순한 과메기가 아니라 훈제 청어 이야기가 등장한다.“청어를 연기에 그을려 부패를 방지하는데 이를 연관목이라 부른다.”본래 생산지에서 훈제 과메기를 만들기도 했지만 한양으로 운반한 후에 훈제한 뒤 판매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훈제하면 부패하지 않고 오래 보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훈제 과메기는 “비싼 값을 받는다”고 했다.포항에서도 직접 훈제 과메기를 만들어 먹는 풍습이 있었다. 냉훈법으로 말려 먹은 과메기가 그것이다. 겨우내 청어를 얼렸다 녹였다 반복하면서 건조시켰는데 연기가 빠져나가는 구멍인 부엌의 살창이 건조장 역할을 했다. 당시에는 땔감으로 솔가지를 많이 사용했는데 솔가지가 타면서 연기가 빠져나갈 때 솔향이 과메기에 스며들었다. 살창으로 들어오는 찬바람과 부엌에서 나가는 온기에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과메기가 만들어졌고, 여기에 연기로 훈연하며 솔향까지 첨가된 것이다. 솔향 훈제 과메기는 단순한 건조 과메기와는 또 다른 고급 과메기였다. 되살려낸다면 아주 고급 요리가 되지 않을까.과메기는 살창뿐만 아니라 집집마다 뒤꼍 담벼락에도 널어 말렸다. 어촌에서 흔히 생선을 건조해 먹는 방식이다. 이후 좀 더 체계화된 것이 청어를 새끼줄에 엮어 말리는 방식이다. 조기 또한 자갈밭에 널어서 말리는 방식이 점차 새끼줄에 엮어 덕장에서 말리는 방식으로 변천해 온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꽁치나 청어를 새끼줄에 엮어 통으로 말리는 통과메기가 전통적인 방식이다. 내장을 제거하지 않고 한 접씩 새끼줄로 엮어 보름쯤 말린다. 건조 과정에서 내장의 성분이 살에 스며드니 과메기의 향이 진하다. 엮어서 말린다 해서 엮거리라고도 한다. 뼈와 내장 등을 제거하고 말린 배지기 과메기근대에 새롭게 만들어진 것은 배지기 과메기다. 먹기 좋게 뼈와 내장, 머리 등을 제거하고 말려서 만든 것이다. 생선의 등을 칼로 따서 말리는데 칼로 베어졌다 해서 베지기 혹은 배지기다. 지느러미와 머리를 자르고 배를 갈라 내장도 제거한 뒤 등뼈를 중심으로 양분해서 말린다. 먹을 때는 껍질만 제거하면 된다. 배지기는 손질한 생선을 바닷물로 씻은 뒤 민물로 한 번 더 씻어 말린다. 과거에는 바닷물에만 씻었는데 짜다는 이들이 있어 민물로도 씻어준다. 민물에는 2∼3분 담갔다가 건져내 말린다.배지기 과메기는 속살이 바깥을 향하게 한 뒤 건조대에 걸어서 말린다. 바람이나 햇볕이 좋으면 이틀 정도면 먹을 수 있다. 하루면 물기가 빠지고 이틀이면 딱 먹기 좋게 꾸득꾸득 마른다. 이때 덕장에서 바로 걷어 상품으로 출하한다. 냉동실에 보관하고 먹어도 되고, 포처럼 먹고 싶으면 더 꼬들꼬들 말려서 먹어도 좋다. 전통적인 통과메기가 훈제 과메기로 바뀐 것은 1923년께 일본인들이 홋카이도의 청어 가공법을 들여오면서 확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인들이 청어 살과 별개로 청어 알을 선호한다는 점도 배를 따서 말리는 방식이 확산된 계기로 작용했다.과메기는 손가락으로 눌러서 탄력이 있는 정도면 잘 숙성 건조된 것이다. 과메기를 먹는 방법은 다양하다. 김과 미역, 배추 등에 싸서 고추장을 찍어 먹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음식 먹는 것이 본디 정해진 방법이 있겠는가. 옛날 구룡포에서는 김장김치에 둘둘 말아 싸 먹기도 했다. 아니면 그냥 맨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그야말로 자기 취향대로 먹으면 된다. 싱싱하여 비리지 않게 잘 마른 과메기는 아무것도 찍지 않고 그 자체로 먹는 것이 가장 맛있다. 본연의 맛을 뛰어넘을 수 있는 부재료란 없다. 원재료가 충실할 때 부재료는 의미가 없다. 과메기는 미나리를 넣고 무쳐 먹어도 좋고 불에 구워 먹어도 별미다. 건강에 두루 좋은 과메기한국 사람들은 생선회도 유독 씹히는 맛을 선호한다. 꽁치나 청어도 살이 무른 생선이다. 하지만 말랑말랑할 정도로 말리는 과메기는 그 맛이 쫀득쫀득하다. 특히 꽁치 과메기의 식감이 좋다. 꽁치 과메기는 쫀득쫀득한 식감으로 많은 사람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등 푸른 생선은 지방이 많다. 그래서 쉽게 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얼간을 해서 말리면 오랫동안 보존이 가능하다. 지방은 공기와 만나면 바로 부패한다. 그런데 지방이 많은 꽁치가 부패하지 않고 말라서 과메기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꽁치의 몸을 둘러싼 껍질 덕분이다. 껍질이 부패를 방지하고 숙성 발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요즘 과메기의 주원료인 꽁치는 한류성 어류다. 1960년대부터 흔하던 청어가 자취를 감추자 청어와 비슷한 맛을 내는 꽁치가 과메기의 재료로 등장해 전성기를 구가했다. 동해안의 꽁치도 1930년대 이전에는 손으로 잡는 손꽁치 잡이만 있었다. 1938년 후반부터 꽁치 유자망 어업이 시작됐고 1980년대까지 동해안의 대표적 어종이었다. 청어를 대체해 과메기를 만들 수 있을 만큼 풍족했던 꽁치도 2000년대 들어 어획량이 급감했다. 그래서 현재는 포항의 과메기도 대부분 원양에서 잡아온 냉동 꽁치로 만들어진다.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과메기는 포항을 비롯한 인근 동해안 지역 음식이었으나 1990년대 중반 이후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포항의 대표적인 특산물로 자리 잡게 됐다. 과메기의 주재료인 꽁치는 전체 지방의 82%가 불포화지방이고 꽁치 100g당 열량은 262㎘다. 열량이 낮으니 다이어트 식품으로 제격이다. 또 불포화지방이니 혈관 건강에 좋다. 오래 두어도 기름이 굳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게다가 꽁치는 레몬보다 비타민C가 세 배나 많다고 한다. 꽁치는 과메기로 만들었을 때 생꽁치보다 DHA와 오메가3의 양이 증가한다. 과메기를 안주로 먹으면 술에 쉽게 취하지 않는다는 말도 빈말이 아니다. 과메기에 숙취 해소 물질인 아스파라긴산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술안주인 동시에 해장 음식이기도 하니 과메기는 대체 얼마나 미덕이 큰 음식인가.글·사진 / 강제윤 시인·(사)섬연구소 소장

2021-05-26

“제상에 굵은 고기 쓰는 건 자손 크게 되게 해달란 뜻이지”

오늘 영일만은 망망하고 흐리다. 바다는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공포의 대상이다. 그런데 어째서 바다를 보면 안도감이 들까? 바다가 무서워 배 타는 것도 겁내면서 정작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좋아한다. 바다를 통해 위안을 얻는다. 어째서 그럴까? 우리는 모두 바다에서 왔기 때문이다. 우리들 모두가 어미에게서 왔듯이. 우리 육상 생명들의 기원은 바다다. 그래서 우리의 기원을 알려주는 비밀이 어떤 언어권의 문자에는 뚜렷이 남아 있다. 한자어 바다(海)에는 어미(母)가 들어 있고, 프랑스어 ‘어머니(m00E8re)’에는 ‘바다(mer)’가 깃들어 있다. 우연일 리가 없다. 필연이다. 바다는 어머니고 어머니는 곧 바다다. 바다처럼 모든 것을 다 받아주는 어머니. 어머니처럼 모든 것을 다 받아주는 바다.포항에서는 대물 어류들이 자주 밥상에 올라와우리는 어느 때부터인가 바다에 대한 막연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지만 실상 바다는 우리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주는 어머니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먹이를 주는 자애로운 어머니. 우리가 오만하지만 않으면 바다는 우리를 징벌하지 않는다. 오늘도 죽도시장에는 온갖 해산물들이 넘쳐난다. 이토록 풍요로운 먹거리들은 어디서 왔을까? 바다에서 왔다. 어머니 바다의 선물이다. 고래부터 멸치까지 바다에서 나는 수산물 중 죽도시장에 없는 것은 대한민국 어느 시장에도 없다. 경북 지방의 제수음식 중 가장 특별한 생선 요리인 돔배기도 영천과 함께 죽도시장이 본향이다. 돔배기는 경상도 전체의 보편적 음식은 아니다. 대구, 포항, 영천, 경주 등의 경북도 동남부 지방과 안동 등 북부 지방 일부, 부산, 울산 지역에서 주로 먹는다.실상 도시 사람들에게 상어 요리는 결코 흔한 음식이 아니다. 상어라면 먼저 식인 상어를 떠올리는 사람들에게 상어 요리는 상상이 쉽지 않은 음식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경북 지방의 상어 요리인 돔배기가 유명하지만 실상 전라도 해안이나 섬 지방에서도 상어를 즐겨 먹는다. 남해안 섬에 살았던 나는 상어 요리를 자주 먹고 자랐다. 죽상어(까치상어)는 회나 무침으로 많이 먹었고 말려서 포로도 먹었다. ‘부전’이라 부르던 상어 알은 쪄서 간식으로 즐겼다. 전대미(개상어)라는 아주 작은 상어는 회무침으로도 먹었지만 내장을 탕으로 끓이면 별미 중의 별미였다. 어른 몸보다 큰 대형 상어도 잔치 음식으로 즐겨 사용했다.동해라는 큰 바다에 인접한 포항 지역에는 유난히 대물 어류들이 자주 밥상에 오른다. 고래부터 상어, 개복치도 모두 대물이다. 게다가 서남해와는 달리 문어 또한 대왕문어를 참문어로 쳐줄 정도로 대물이 대접받는다. 상어를 먹는 문화가 보편화된 것도 동해라는 큰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포항 지역 어민들은 동해 먼바다로 나가 가오리를 미끼로 상어를 잡았다. 8월 전후에 상어가 가장 많이 잡혔다.돔배기, 토막 내서 염장한 상어의 살코기포항 지방에서 돔배기는 명절이나 제사 모실 때 빠지지 않는 제수 음식이다. “제상에 굵은 고기 쓰는 건 자손들 크게 되게 해달라는 뜻이지. 소고기 올리듯이. 돔배기도 올리는 거요.” 죽도시장에서 만난 돔배기 상인 김차봉 할머니 말씀이다. 할머니는 한자리에 앉아 40년 동안 돔배기를 손질해 팔아왔다.돔배기는 토막 내서 염장한 상어의 살코기다. 주로 꼬치에 꿰어 굽거나 쪄서 조리해 먹는다. 기름기가 거의 없어서 맛이 담백하고 비린내도 없다. 하지만 더 맛있게 먹는 법이 있다. 소 갈빗살에 양념하듯이 양념을 만들어 돔배기에 바른 뒤 굽거나 찐다. 명절이나 제사 때 돔배기 산적을 만들어 쓰고 남은 것은 소금 간을 더 강하게 해서 절였다가 두고두고 반찬으로 먹기도 한다. 염장된 상어는 물에 담가 소금기를 뺀 뒤 쪄서 반찬으로 먹는다. 해안가 마을에서는 잔치집에서도 상어 고기를 썼다. 비싼 소는 잡을 수 없으니 큰 고기인 상어를 썼던 것이다.돔배기용 상어는 워낙 큰 물고기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통 마리로 살 일이 없었다. 그래서 판매점에서도 작게 토막 내서 팔았다. 돔박돔박 네모나게 토막을 내서 파는 물고기라 해서 돔배기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상어의 살은 돔배기뿐만 아니라 탕의 재료로도 쓰인다. 상어 중에서도 귀상어와 청상아리, 참상어, 악상어(준달이)만이 돔배기로 만들어진다. 청상아리는 고기가 부드럽고, 참상어는 감칠맛이 난다. 귀상어의 살은 검붉고 어두운 색이지만 청상아리는 살색이 밝고 붉은빛이다. 귀상어가 그중 가장 귀하게 대접받아 값도 비싸다. 청상아리는 모노상어, 귀상어는 양제기(양지)라고도 부른다. 청상아리는 돌고래만큼이나 커서 살이 많으니 돔배기의 재료로 적당하다.돔배기는 숙성 정도에 따라 맛이 다르다. 계절에 따라 절이는 소금의 양도 다르고 숙성 기간도 다르다. 담백하고 밋밋한 돔배기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소금 간과 시간이 만들어내는 숙성의 맛이다. 옛날에는 상어를 토막 내고 간을 한 후 2~3개월 정도 숙성된 것을 돔배기라 했다. 굴비와 비슷한 정도의 기간을 숙성시킨 것이다. 하지만 요즈음은 상어를 냉동으로 쓰는 까닭에 미리 염장하지 않고 손님이 구매를 하면 그때 염장해 준다. 그래서 숙성 기간이 짧다. 겨울에는 3~4일, 여름에는 1~2일 정도 실온에서 숙성시킨 다음 물에 깨끗이 씻어서 하루쯤 말린다. 그렇게 꼬들꼬들해진 돔배기를 요리해 상에 올린다.본래의 돔배기 맛과는 조금 다르게 변화한 셈이다. 음식 문화는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니 가공 방법이 조금 달라졌다 해서 변질됐다고 할 수는 없다. 명절이나 제사, 잔치 뒤끝에 남은 돔배기는 껍질과 함께 잘게 썰어서 야채, 소고기 등을 첨가해 탕을 끓여 먹기도 한다. 돔배기에는 콜라겐과 펩타이드 성분이 많아 성인병에 좋다고 한다. 단백질이 많고 지방이 적은 건강식품이기도 하다. 한의학에서는 상어를 ‘교어(鮫魚)’라 하는데 오장을 보하는 효능이 있으며, 특히 간과 폐, 피부 질환이나 눈병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북한 지역에서도 상어 지느러미 완자찜이나 철갑상어찜 같은 상어를 이용한 다양한 요리가 발달했다. 제주도 사람들도 무채를 썰어 넣고 별상어(개상어, 두툽상어)회, 무침을 즐긴다. 상어의 껍질을 벗겨 머리와 뼈를 발라낸 다음 소금을 약간 뿌려 꾸덕꾸덕하게 말렸다가 굽는 상어 산적(상어 적갈)도 제주 향토 음식이다. 경북 경산에서는 상어 초무침 요리도 즐긴다.지질학 기록에 따르면 상어는 데본기(3억 6000만~4억 800만 년)에 탄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적으로 상어는 200~250여 종이 서식하고 있다. 청새리상어(Prionace)나 백상어, 레몬상어 같은 이름은 상어의 색에서 유래된 것이다. 상어는 더러 동족도 잡아먹는다. 상처를 입어 피가 나는 상어가 있을 때는 상어 떼가 공격하여 잡아먹는 무자비한 어류다. 사람 또한 바다에서는 그저 상어의 먹잇감에 불과하다.두치, 식용 상어의 부산물로 만들어돔배기가 주로 의례용 상어 요리라면 또 다른 상어 요리인 두치는 주당들이 사랑하는 안줏감이다. 두치는 돔배기를 만들고 난 부산물로 만드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짜다. 두치는 상어 지느러미와 껍질, 연골, 머리 등에 고명을 넣고 돼지고기 편육처럼 눌러서 만든다. 전남 목포 등지에서는 홍어 부산물을 편육처럼 눌러서 만들기도 하는데 두치와 형태가 비슷하다. 서해안에서 박대 껍질로 만드는 벌버리묵도 같은 계통의 음식이라 할 수 있다. 포항에서는 두치, 영천에서는 두투머리라 한다. 두치는 식감이 최고다. 쫄깃한 식감에 약간의 삭힌 맛이 더해서 아주 특별한 맛이 된다. 더러 끓여서 묵으로 만들기도 한다.중국에서는 상어 지느러미만 주로 먹는다. 중국에서는 그 귀하다는 샥스핀과 비슷한 요리가 죽도시장에서는 아주 저렴한 가격에 팔려 나간다. 일본에서는 일부 내륙 지방에서만 상어를 먹고 대부분은 어묵 재료로 쓰인다. 샥스핀(shark‘s fin)은 대형 상어의 꼬리와 등지느러미를 건조시킨 것인데, 중국어로는 위츠(魚翅)라 한다. 샥스핀으로 끓인 위츠탕(상어 지느러미탕)은 제비집 요리와 함께 최고의 중국 요리 중 하나로 꼽힌다. 명나라 때 탄생한 샥스핀 요리는 황실 요리가 발달했던 청나라 시대 이후 중국의 대표적인 고급 요리가 됐다. 황실이나 귀족들만 먹었던 샥스핀이 현대에 와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상어 포획량이 급격히 증가했다. 하지만 상어의 몸은 상품성이 없는 까닭에 상어 포획 과정에서 지느러미만 잘라내고 몸체는 버려서 죽게 만드는 잔인성이 문제가 돼 점차 금기 음식이 되고 있다.상어의 살은 돔배기로 먹고 남은 부산물인 지느러미로 만들어 먹는 두치는 다르다. 식용 상어의 부산물로 만드는 것이니 탓할 일이 아니다. 멸종 위기 종이나 불법 포획이 아닌 식용 상어의 부산물로 만드는 까닭에 도덕적 비난을 받을 이유가 없는 향토 음식 문화다. 중국의 샥스핀을 대체할 만한 뛰어난 요리, 숨겨진 보물이 포항에 있다.글·사진 / 강제윤 시인·(사)섬연구소 소장

2021-05-24

잡을 수 없어 더욱 애달픈 사랑의 맛

포항 죽도시장 고래고깃집에 앉아 낮술을 마신다. 2021년 5월 13일, 이 고래고기 노포에서는 고래고기를 부위별로 담아 모듬 수육으로 포장 판매하고 있다. 한 접시에 3만 원, 5만 원, 7만 원 등 세 종류다. 3만 원짜리 한 접시면 두 사람이 술 몇 병 마시기에 부족함이 없다. 다른 지역에 비해 가격이 월등히 싸 부담스럽지 않다. 고래고기 접시에는 뱃살, 갈빗살, 꼬리살, 옆구리 살, 간, 허파까지 고루고루 담겨 있다. 소고기처럼 부위마다 맛이 다 다르다. 그래도 역시 가장 맛있는 부위는 뱃살이다. 고래고기 한 접시에 거나해지고 말았다. 여행자에게 이런 호사가 또 있을까. 러일전쟁 이후 구룡포 등지에서 고래고기 먹는 문화 확산이 땅에서는 선사시대부터 고래잡이가 있었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는 고래잡이배와 포경 도구들이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7000년 전 신석기인들 중에 고래잡이를 전문으로 하는 해양 수렵 집단이 존재했다는 뜻이다. 암각화에는 북방긴수염고래, 혹등고래, 귀신고래와 범고래, 참돌고래 등이 등장한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작살을 쏴서 이런 대형 고래를 사냥했다는 증거다. ‘삼국사기’에도 고래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동해인(東海人) 고주리(高朱利)가 고래 눈을 왕에게 바쳤는데 밤에도 빛이 났다.”고구려 민중왕 4년, 서기 47년2020년 10월 국립중앙박물관의 재발굴 결과 경주 서봉총에서 신라 왕족의 제사 음식이 다량 확인됐다. 어류에는 청어, 방어 같은 흔한 생선은 물론이고 성게알, 복어와 돌고래의 유체까지 나왔다. 신라시대에도 고래고기를 먹었다는 증거다. 고려, 조선시대의 기록에도 고래에 대한 기록이 간간이 남아 있지만 선사시대처럼 포경업을 전문으로 하는 어로 집단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죽은 고래가 밀려오면 수습해서 사용하는 정도였다. 그래서 손암 정약전도 ‘자산어보’에서 죽어서 떠내려온 고래를 “삶아서 기름을 내고, 눈은 술잔을 만들고, 수염으로는 자를 만들고, 그 척추를 자르면 절구를 만들 수 있다”고 기록했다.근대 유럽, 미국 등은 기름을 얻기 위해, 또 일본은 식용 고래잡이를 했던 것과 달리 조선시대 말까지도 우리 조상들은 상업적 포경을 하지 않았다. 서양에서 고래잡이 산업이 급성장한 것은 급격한 산업화로 기름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1850년대 북극 큰고래 한 마리에서 뽑아낸 고래기름은 275배럴이었다. 참고래 한 마리에서도 평균 130배럴의 기름을 얻을 수 있었다. 한반도 부근에서 포경이 합법화된 것은 1899년 고종이 러시아 포경업자에게 동해안의 포경을 허가해 준 때부터였다.“러시아인 헨리 게제린그에게 경상도 울산포, 강원도 장진포, 함경도 진포도를 고래잡이 근거지로 허락해 주었다.” ‘고종 실록’ 1889년 3월 29일자물론 이전에도 동해에서 외국 포경선들의 고래잡이가 있었다. 1849년 한 해 동안 최소 130척의 미국 포경선이 동해에서 고래잡이를 했다. 조선 정부는 1900년 2월 ‘일본원양어업회사’에도 포경 허가를 내주었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일본은 한반도 근해의 포경업을 독점했다. 이 무렵부터 장생포, 구룡포, 서귀포, 흑산도, 어청도, 대청도 등 포경업 전진기지를 중심으로 고래고기를 먹는 문화도 확산됐다. 1903년부터 1944년까지 한반도 근해에서 일본 포경선이 잡은 대형 고래만 8천259마리다. 공식 기록된 것이 그러하니 실상은 그보다 더 많은 대형 고래가 포획됐을 것이다. 일제 포경선에 의해 한반도 해역의 대형 고래는 씨가 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두 가지 맛이 난다는 고래고기1921년 4월 27일자 ‘매일신보’는 “조선의 경업(고래잡이)은 11월부터 익년 4월 말일까지 반년간에 했어도 항상 200두의 산획(産獲)을 유지한바, 산지는 주로 대흑산도, 대청도, 울산 전진이다”라고 전한다. 포획된 고래는 “모두 곧 배 안에서 처리되어 고기, 기름, 냉동 간장(冷凍肝臟), 증골(蒸骨) 등 광범위로 남김없이 이용”된다고 보도하고 있다. 포경선이 잡은 고래들은 위 기사처럼 배 안에서 처리되기도 했지만, 각지의 포경 근거지로 옮겨져 공장에서 가공 처리돼 대부분 일본으로 보내졌고 일부는 지역에서 유통됐다.해방 후에도 한국의 바다에서는 한동안 고래잡이가 이어졌다. 하지만 무분별한 고래 남획으로 세계적으로 고래의 개체수가 줄어들자 1946년 국제포경위원회가 만들어져 규제에 나섰다. 국제포경위원회는 본래 전면적인 포경 금지가 아니라 적절하게 고래 수를 관리해 고래잡이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됐지만 고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자 1986년부터 상업적 포경을 전면적으로 금지시켰다. 포항 지역의 고래잡이는 구룡포 강두수의 해승호가 1951년 12월 20일 제 1호 허가를 얻으며 시작됐다. 이때부터 구룡포항은 정부 시책에 따라 고래잡이 항으로 육성되었고 1977∼1978년에 최고의 어획고를 올렸다. 하지만 1980년을 고비로 고래 어획이 급감했다. 한국에서는 혼획된 고래들만 식탁에 오를 수 있다.2019년 기준 한국 연안에서 혼획된 고래는 1천960마리였다. 상괭이 1천430마리, 돌고래 374마리, 낫돌고래 71마리, 밍크고래 63마리였다. 혼획은 그물에 우연히 걸려들거나 죽은 사체가 떠밀려 와 잡힌 경우를 말한다. 고의로 잡은 흔적이 없으면 혼획한 자가 고래를 유통 판매할 수 있도록 해경에서 허가해 준다. 포경 금지에도 고래고기 문화가 지속될 수 있는 이유다. 다만 상괭이 등 보호 대상 10종의 사체는 유통이 금지된다. 보호종이 아닌 밍크고래 등은 경매를 통해 유통된다. 하지만 혼획이 지나치게 많아 혼획된 고래라도 유통은 일정한 수로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고래고기는 열두 가지 맛이 있다고 한다. 같은 포유류인 소고기와 맛이 비슷하다. 부위에 따라 날것으로도 먹거나 익혀서 먹는다. 회, 수육, 육회, 초밥, 튀김, 찌개, 두루치기, 전골 등 조리법도 다양하다. 고래기름은 연료뿐만 아니라 화장품, 비누의 원료로 사용됐다. 고래수염은 유럽 여성의 속옷인 코르셋을 만들기도 했다. 향유고래 배설물인 용연향은 최고의 향수 재료다. 고래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살코기뿐만 아니라 껍질, 갈비, 혓바닥, 창자, 콩팥, 염통, 눈, 허파 등 고래의 내장과 부산물도 삶아서 수육으로 먹는다. 일본 문화의 영향 탓에 아직도 고래고기 부위는 일본식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고래 꼬리 1.5∼2m 사이의 붉은 살코기를 두툼하게 썰어 회로 먹는 것은 막찍기라 한다. 고래 꼬리를 소금에 절였다가 뜨거운 물에 데쳐서 썰어 먹는 것은 오배기다. 최고급 부위인 뱃살은 삼겹살처럼 보이는데 회로 먹기도 하고 삶아 먹기도 한다. 이것은 우네다. 꼬리살 바로 윗부분은 마블링이 좋아 최상급으로 여겨진다. 오노미다.한국, 일본뿐만 아니라 고래고기는 북극의 에스키모와 노르웨이에서도 즐겨 먹었다. 고래는 소고기 요리와 거의 흡사한 조리법으로 요리해 먹었다. 고래가 흔하던 시절에는 무를 썰어 넣고 고래 국을 끓였다. 그대로 소고기 뭇국 맛이었다. 고래 불고기, 전골, 두루치기 등도 소고기 대용의 요리였다. 소고기보다 고래고기가 흔하던 시절 이야기다. 지금은 고가의 최고급 요리가 됐다. 가격은 비싸도 고래고기는 중독되면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잡을 수 없어 더 애달프게 만드는 맛, 고래는 애달픈 사랑의 맛이다. 포항에서 큰일 치를 때 내놓는 개복치개복치는 몸길이 2∼4m, 몸무게가 최대 2t까지 나가는 거대한 물고기다. 개복치는 가장 많은 알을 낳는 물고기이기도 하다. 한 번 산란에 무려 3억 개가량의 알을 낳는다. 성체가 된 개복치는 범고래, 백상아리 등을 제외하면 천적이 없다. 하지만 3억 개 알 중 성체가 되는 개체는 한두 마리에 불과하다. 개복치가 얼마나 귀한 물고기인지 알 수 있는 척도다. 개복치의 학명은 ‘Mola mola’, 라틴어로 맷돌을 뜻한다. 한국에서는 안진복, 골복짱, 깨복짱이라고도 하는데 복어목의 한 종이다. 개복치도 상어처럼 지느러미가 더 별미다. 중국에서는 등쪽의 흰 창자를 용창이라 해서 귀하게 여긴다.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 수십 마리씩 잡혀 죽도시장으로 들어왔던 대형 개복치가 요즘은 하루 한두 마리 보기도 어렵다. 수온 변화 등이 원인으로 짐작된다. 개복치는 흔한 생선이 아니라서 일반인들이 쉽게 접하기도 어렵고 맛을 본 사람도 드물다. 하지만 포항에서는 옛날부터 개복치 요리를 즐겨 먹는 풍습이 있었다. 그것이 여전히 이어져 죽도시장에는 개복치를 취급하는 상점이 여럿이다. 대부분은 삶아서 직접 먹을 수 있게 유통된다. 개복치 살은 그대로 콜라겐 덩어리다. 개복치 살은 잘라도 붉은 피가 흐르지 않고 우유 빛깔이다. 네모나게 잘라놓으면 영락없이 묵이나 두부처럼 보인다. 개복치는 몸집이 워낙 커서 고래를 해체하듯 긴 칼을 들고 자른다. 먼저 지느러미부터 잘라내고 뱃살, 옆구리 살, 몸통, 머리 순서로 차례차례 잘라 나간다. 살은 부드러워 슬슬 쉽게 잘라진다. 잘라낸 개복치 살은 껍질을 벗기고 이물질을 제거해서 깨끗이 손질한다.적당한 크기로 잘라낸 개복치 살은 펄펄 끓는 가마솥에 넣어서 삶는다. 삶은 개복치 살은 다른 조리 없이 작게 잘라서 양념장이나 초장에 찍어 먹으면 된다. 맛은 야들야들 탱글탱글 곤약보다 쫄깃하다. 살 자체로는 무향 무맛이니 양념 맛이다. 무맛이란 맛이 없다는 게 아니라 순수한 맛이란 뜻이다. 껍질은 삶아서 우뭇가사리처럼 만들어 먹거나 수육으로 먹는다. 뱃살은 회 무침으로, 머리뼈와 머릿살은 찜으로 요리해 먹기도 한다. 근육은 갈아서 어묵 재료로 쓰기도 한다. 포항 사람들은 상어 살인 돔배기처럼 개복치도 큰일 치를 때 사용했다. 내륙 사람들이 애경사 등 대사를 치를 때 큰 몸집의 소나 돼지를 잡았던 것처럼 바닷가에서는 상어나 개복치 같은 대형 생선을 사용했다. 진짜 부잣집에서는 고래를 썼다. 포항에서는 큰일에 큰 물건을 쓰던 전통이 개복치를 먹는 풍습으로 남은 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개복치를 먹을 수 있을까. 무조건 안 먹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사라져가는 대물들의 맛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바다 생태계 살리기에 더 적극적이어야 하지 않을까.글·사진 / 강제윤 시인·(사)섬연구소 소장

2021-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