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의 해양문화<br/>해녀 ① - 포항 해녀와 나잠 어업
우리 몸은 70%가 물로 이루어졌고 물을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갓 태어난 아기는 물에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숨을 멈추고 팔과 다리로 휘젓는 동작을 한다. 물속에서 태어난 신생아가 헤엄치는 모습은 편안하게 보인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몸짓은 헤엄이다. 무의식의 몸짓이다. 인간은 바다 속에서 먹이를 찾아 물질을 하였고 물질은 바다의 문화가 되었다. 바다에서 물질은 의식의 몸짓이며 생산의 몸짓이다.
인간이 물속으로 들어가 각종 어패류와 해조류, 어류 등을 식량으로 삼기 시작하면서 물질이 시작되었다. 인류가 식량자원으로 조개류를 채집한 것은 30만 년 전으로 추정되며 전 세계적으로 조개무지가 출현한 것은 20만 년 전으로 소급된다. 선사유적지 조개더미인 패총은 원시인이 조개, 굴, 소라, 전복 등의 조개류를 먹고 버린 해안가의 생활 유적으로 전국 해안가에서 확인된다.
한국 해녀는 전복뿐만 아니라 작살로 문어나 물고기를 잡는 등 일반 어민과 동일한 행동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경북의 해녀는 포항시가 1천68명으로 가장 많다. 경상북도는 제주도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해녀가 많고 포항시는 울산광역시에 이어 전국에서 세 번째로 해녀가 많다.
부산, 울산, 경남 거제도에는 제주 해녀가 모여 살고 있는 집성촌이 있지만, 경북은 각 어촌에 소수의 제주 출신 해녀가 거주하고 있을 뿐 제주 해녀와의 직접적인 문화적 교류는 거의 없다.
제주도 다음으로 해녀가 많은 경북은 해녀 문화도 제주도와 다른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국가별·시대별로 다르게 인식된 나잠(裸潛) 어민
물질은 남녀 구분이 없으나 국가별, 시대별로 다르게 인식되었다. 물질을 직업으로 하는 나잠(裸潛) 어민은 한국 해녀, 일본 해녀와 해남, 그리스 해면잡이 잠수부(sponge diver), 남태평양 투아모아 열도의 진주 조개잡이 잠수부, 호주 북부 토레스 해협의 조개잡이 어민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남태평양·호주의 나잠 어민은 남성이 진주나 해면을 캐었고, 한국 해녀와 일본 해녀, 해남은 전복과 해조류를 채취하였다. 하지만 한국 해녀는 전복뿐만 아니라 작살로 문어나 물고기를 잡는 등 일반 어민과 동일한 행동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스·남태평양·호주의 나잠 어민은 스쿠버 장비 등을 이용한 압축공기 잠수부로 전환하였으나, 한국과 일본 어업에서는 스쿠버 장비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한국의 나잠 어업은 마을어장에서 맨몸으로 잠수해 전복, 소라, 미역 등 해산물을 직업적으로 채취하는 어민을 말한다.
한국 나잠 어업의 역사적 기원은 제주도 해녀를 제외하면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복, 홍합, 해삼, 각종 패류나 미역, 다시마 등과 같은 해조류를 즐겨 먹었고 왕가나 지배계급에서도 일상 음식으로 먹었지만, 누가 어떤 방식으로 조달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조선시대 전복과 같은 해산물을 제주도 해녀가 조달하였고 산후 음식이자 건강 보약식으로 이용된 미역과 다시마는 동해안과 남해안 남성들이 배 위에서 긴 장대에 낫을 단 낫대나 회전용 트릿대를 이용해 채취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반도의 나잠 어업은 제주도 해녀가 가장 오랫동안 유지해 왔던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물질 노동복 ‘잠비’
2021년 3월 해양수산부는 경상북도 ‘떼배 돌미역 채취어업’을 제9호 국가중요어업유산으로 지정했다. 제주도 해녀 어업, 보성 뻘대 어업, 남해 죽방렴 어업과 함께 경상북도 돌미역 채취를 동해안의 대표 어업으로 선정한 것이다. 돌미역 어업은 통나무를 엮어 만든 뗏목배를 이용해 배 위에서 미역을 보고 긴 낫으로 잘라내는 어로 방식으로 지금도 울진과 울릉도에서 지속되고 있다. 해녀가 물에 들어가 낫으로 미역을 베어오면 떼배 어민은 바람의 방향과 특성, 바닷물의 흐름 등을 살펴 배 위에서 미역을 채취한다. 미역의 이용 방식은 해녀 어업과 비교하면 비능률적이고 비경제적이지만 수백 년 지속된 독특한 바다 자원 관리 방식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펴낸 ‘수산편람(水産便覽)’에는 물속 자원의 이용 방법을 기록하였다. 한국에서 해조류를 채취하는 방법은 나잠, 간권(竿捲), 겸(鎌), 예채(刈採), 예취(刈取) 등이 있다. 나잠은 해녀처럼 물질을 해서 채취하는 것, 간권은 장대를 이용해 바다 속에 있는 미역을 틀어서 채취하는 트릿대 방식이다. 그리고 겸·예채·예취는 낫을 이용해 미역을 베는 것을 말하며 오늘날 동해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낫대 방식이다. 대체로 함경도와 강원도, 경북 동해안은 미역을 낫대로 베고 갈퀴로 건지고, 경남·경북·충남은 트릿대로 미역을 돌려 감아 건져 올리는 간권으로 미역을 채취했다. 물속으로 들어가 미역을 채취하는 곳은 제주도 해녀뿐이었다.
포항의 해안도로를 걷다 보면 해녀가 검은색 고무 잠수복을 입고 물 위에 뜨도록 만든 ‘두룽박’과 ‘망사리’, 해산물을 채취하는 데 쓰는 ‘꼬끼’를 들고 바다로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과거 광목으로 만든 해녀복을 입었을 때는 평상복을 입고 이동하였다. 해녀들은 광목으로 만든 해녀복을 ‘잠비’라고 불렀다. ‘잠비’는 물에 들어갈 때 갖추어 입는 ‘장비’라는 뜻인데 ‘일을 할 때 장비와 설치를 갖추어 입다’라는 노동복 개념이다. 제주도에서는 물질하는 데 사용하는 소중한 옷이라는 뜻으로 ‘소중이’라고 불렀다. 제주에서는 나잠 어업이 제주의 전통적 가치로 전승되어 ‘소중이’로 인식되었으나, 경북에서는 노동에 필요한 ‘잠비’로 수용된 것이다.
경북 해녀 70%가 살고 있는 포항
해녀들이 가장 바쁜 계절은 봄이다. 봄철은 해녀의 주수입원인 미역 채취 기간이다. 어획물은 계절마다 달라 봄에는 미역 외에도 문어, 보라성게, 해삼, 전복을 채취하고 여름에는 우뭇가사리, 가을에는 말똥성게, 해삼을 잡는다. 성게는 일본으로 수출되는 효자 상품이며 채취와 제조, 판매까지 전 과정을 해녀가 담당하므로 해녀의 육지 일상은 언제나 바쁘다.
4~5월께 포항 해안가와 방파제 부근에는 미역을 한 올 한 올 겹쳐 넓적한 형태로 만든 것을 볼 수 있다. 바닷바람과 햇볕이 잘 드는 방파제가 건조하기에 가장 적당하다. 이 미역은 모두 해녀가 물속에 들어가 낫으로 끊어 온 것으로 자연적으로 돌에 붙어 자랐기에 ‘자연산 돌미역’이라고 한다. 해녀는 고무옷을 입고 물안경을 쓰고 ‘나바리’라는 무거운 납을 벨트에 장착시켜 숨을 참고 물속에 들어가 쉼 없이 올라가고 내려오면서 망사리 가득 미역이 차면 육지로 끌어올린다. 채취부터 건조까지 모든 작업을 해녀가 한다.
해녀가 되려면 본인이 거주하는 기초지방자치단체에 나잠 어업으로 신고하면 된다. 전국 해녀수를 보면(2017년), 제주도가 3천985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경상북도는 1천593명이다. 울산광역시 1천474명, 충청남도 1천310명, 전라북도 611명, 부산광역시 938명, 경상남도 598명, 강원도 371명, 전라남도 370명, 인천광역시 306명 순으로 전국에 총 1만1천556명의 해녀가 있다. 경북의 해녀는 포항시가 1천68명으로 가장 많고 영덕군 160명, 경주시 152명, 울진 75명, 울릉군 10명이다. 경상북도는 제주도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해녀가 많고 포항시는 울산광역시에 이어 전국에서 세 번째로 해녀가 많다. 포항은 경북의 해녀 약 70%를 차지하는데 포항시의 어촌계별 해녀(2020년 5월 현재)를 보면 구룡포읍 251명, 호미곶면 249명, 장기면 102명, 동해면 109명, 청하면 60명, 여남·환호·두호·해도 등 포항시내 51명, 송라면 47명, 흥해읍 10명 총 901명이다. 경북의 해녀는 포항 구룡포와 호미곶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포항 해녀는 중요한 해양 문화 콘텐츠
포항 해녀의 성장은 해방 후 국가의 수출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해방 후 정부는 해조류 수출을 목표로 우뭇가사리 어장 개발과 한천(寒天) 수출 증산 정책에 앞장섰다. 개인업자의 개입을 금지하고 우뭇가사리 양식 시험을 하는 등 해외에서 각광받는 우뭇가사리의 생산과 수출을 면밀히 관리하였다. 포항으로 수천 명의 제주 해녀가 건너와 우뭇가사리를 채취하였고, 1948년 ‘영남일보’에 ‘경북으로 제주 해녀 천오백명 내도’ ‘수국 전사의 꽃다운 존재인 제주 해녀가 금년에도 활약이 기대된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도되었다. 국가 중요 수출품목으로 지정된 우뭇가사리 채취를 위해 매년 수천 명의 제주 해녀가 국가의 지원으로 영일, 구룡포, 양포 등지에서 활동함에 따라 포항 여성은 바다 자원의 경제적 가치와 해녀라는 직업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포항 해녀는 제주 해녀의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성장한 것이다.
포항 바다는 수심이 깊지 않고 우뭇가사리는 연안 가까이 20~30m 수심 바위에 부착되어 전복 채취처럼 숙련된 물질 기술이 필요 없다. 우뭇가사리 어장인 울산, 기장, 거제도 지역은 조류가 빠르게 흐르고 어장이 깊어 제주 해녀와 같이 물질에 익숙한 해녀들이 오랫동안 이용했다. 하지만 포항 어장은 미개척 어장으로 해안가에 사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해녀가 될 수 있는 어업 조건을 갖추고 있다. 특히 1960년대 후반 일본에서 도입된 ‘고무옷’이라는 잠수복은 보온력을 증강시켜 사시사철 물속 활동이 가능하게 했고, 신체를 드러내는 수치감도 없애주었기 때문에 해녀의 양적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포항 해녀는 매년 감소하고 있어 현존하는 해녀가 ‘마지막 세대’일지 모른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환경오염과 자연 생태계 변화로 생산량이 감소하고 있는 것도 해녀 어업을 위태롭게 하는 요인이다.
해녀 어업과 문화는 전국에 분포되어 있다. 부산, 울산, 경남 거제도에는 제주 해녀가 모여 살고 있는 집성촌이 있지만, 경북은 각 어촌에 소수의 제주 출신 해녀가 거주하고 있을 뿐 제주 해녀와의 직접적인 문화적 교류는 거의 없다. 제주도 다음으로 해녀가 많은 경북은 해녀 문화도 제주도와 다른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1960년대 후반 포항 해녀는 제주도 해녀를 능가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결혼한 여성도 물질 기술만 터득하면 경제적으로 충분한 수익과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았다. 전통적 어촌 사회에서는 남성의 역할을 강조하고 여성의 역할을 보조적 수단으로 인지했으나 직업적 해녀의 등장으로 여성의 가치가 달라진 것이다. 포항의 해녀 문화는 동해의 풍부한 해안 생태계를 기반으로 빠르게 성장하였고, 경북 어촌의 정체성 확립과 해양 문화 콘텐츠의 기반으로 경북이 보존·전승해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
글 /김수희(독도재단, 경제학 박사)
사진 : 김수정(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