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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크고래의 집단 서식지였던 영일만

등록일 2021-07-21 20:28 게재일 2021-07-22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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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잡이① -포항과 구룡포의 역사
구룡포읍 행정복지센터 앞마당에 전시되어 있는 제1동건호.

포항 남구 구룡포읍 행정복지센터 앞마당에는 한 척의 어선이 전시되어 있다. 제1동건호라는 명칭의 어선이다. 뱃머리에 총이 달려 있어 한눈에 포경선임을 알 수 있다. 작고한 구룡포 유지 김건호가 기증한 이 배는 구룡포가 포경 기지였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흔히 고래 하면 울산 장생포를 떠올린다. 지난 2008년 고래문화특구로 지정된 울산 장생포에는 고래박물관, 고래문화마을, 고래바다 여행선 등 다양한 고래 관광 인프라와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센터가 들어서 있다. 국내 고래 관련 논문을 보더라도 대부분 울산 장생포를 무대로 작성되었다.

그렇다면 포항과 구룡포는 어떠한가? 포항과 구룡포에도 과거에 고래가 많았고 포경업이 활발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이야기의 흔적이 제1동건호이고 포항과 구룡포의 고래고기 전문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이야기를 입증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자료는 빈약하고 연구논문은 전무한 실정이다. ‘포항시사’, ‘구룡포수산업협동조합사’ 등에 포경 자료가 일부 있으나 그 실체를 보여주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포항과 구룡포의 포경에 관한 역사적 실체를 확인하고, 이를 통해 이 지역 고래의 분포와 포경의 연구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쓰였다. 다행스럽게도 한국 포경에 관한 독보적 저작인 박구병의 ‘한국 포경사’(수산업협동조합중앙회, 1987)에서 포항과 구룡포의 포경에 관한 특기할 만한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이 글에서는 우선 ‘한국 포경사’를 중심으로 포항과 구룡포의 포경 역사를 정리하고, 현재 구룡포에 거주하고 있는 고령의 포경선 선원 2명, 고래 전문 중매인 1명과의 대담을 싣는다.

 

1941년 4~5월에 첫 출어… 한국 포경사 주요 무대로 등장

선상서 쏘는 강철 작살로 영일만 만구·만내 밍크고래 포획

1950년 이후 포항서 자취 감췄으나 구룡포 중심으로 자리

1970년대 철조선 등장으로 구룡포 포경기지 명성 빛바래

 

19세기부터 고래 무덤이 된 동해

포경업은 19세기 내내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조명용 램프 연료로 고래기름을 쓰는 방법이 고안되면서 고래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고래 뼈는 여성용 코르셋으로, 수염은 칫솔 등으로 사용되는 등 버릴 부분이 하나도 없을 만큼 고래 한 마리의 유용성은 대단히 높아 고래 관련 제품, 고래기름 없는 생활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다케다 이사미, ‘바다의 패권 400년사’, AK커뮤니케이션즈, 2021, 72∼73쪽 참조).

이러한 이유로 고래의 천국이던 바다는 고래의 무덤이 된다. 동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 선조들은 동해를 ‘경해(鯨海)’라 부를 만큼 동해에 고래(鯨)가 많았지만 조선 시대까지 포경은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이 동해에 진출하면서 양상은 달라진다. 1849년 약 120척의 미국 포경선은 동해를 거침없이 드나들었고, 19세기 말에는 일본과 러시아의 포경선이 동해에서 각축전을 벌인다. 조선 정부도 뒤늦게 포경에 눈을 뜨고 1883년 3월 김옥균을 동남제도개척사겸관포경사(東南諸島開拓使兼管捕鯨事)로 임명하지만, 의미 있는 활동을 하지는 못했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데 이어 1910년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면서 동해의 고래를 독차지한다.

밍크고래 포경선 제3호환(丸)의 설계도(조선수산개발주식회사 서류), 박구병의 ‘한국 포경사’ 313쪽.
밍크고래 포경선 제3호환(丸)의 설계도(조선수산개발주식회사 서류), 박구병의 ‘한국 포경사’ 313쪽.

영일만 근처에서 수많은 밍크고래 포획

포항이 한국 포경사에서 주요한 무대로 등장하는 시점은 1940년이다. 한일병합 이후 일본은 울산, 제주도, 대흑산도, 대청도, 유진, 장전 등을 근거지로 참고래, 대왕고래, 향고래, 돌고래, 보리고래, 귀신고래, 긴수염고래 등을 대거 포획하다가 1940년부터 밍크고래와 해돈(海豚)으로 눈을 돌린다. 1937년에 시작된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식량 등 각종 물자가 부족해지자 그 대응책으로 수산업 분야에서는 종래 포경업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소형 고래인 밍크고래와 해돈류를 잡기 시작했다. 태평양전쟁 후에는 이러한 시도가 더 강화되었다. 박구병은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밍크고래, 해돈 대상의 포경업은 비록 소규모 경영이고 일본인 주도의 것이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한국에 소재한 회사 ‘조선수산개발주식회사’가 한국에 선적을 둔 포경선을 사용하여 행한 포경업이었다는 점에서 포경사에서 별도의 장을 할애하여 서술할 만한 의의를 지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구병, 위의 책, 312쪽>

조선수산개발주식회사는 처음에 시험·조사 어로(漁撈)의 명목으로 포경업을 시작하는데, 여기에 동원된 포경선은 18t 규모 제1호환(鯱丸), 5t 규모 제1환일환(丸一丸), 16t 규모 제2환일환이다. 이 세 척의 소형 포경선은 선체가 경쾌하여 방향 전환이 용이하고, 선상에서 총을 쏘아 강철 작살로 고래를 사살할 수 있다.

이들 포경선은 모두 포항에 근거지를 두고 영일만을 중심으로 조업하였다. 1941년 4∼5월에 첫 출어를 하는데 영일만의 만구(灣口)와 만내(灣內)에서 가장 많은 밍크고래를 잡았다. 이 점에 대해 박구병은 밍크고래 자원 연구에서 참고할 가치가 큰 자료라 하였다. 조선수산개발주식회사가 작성한 1941년 월별 밍크고래 포획 두수(頭數)를 보면, 1941년 4월부터 12월까지 제1호환이 84두, 제1환일환이 37두, 제2환일환이 61두이며, 그중 제1호환이 영일만 근처에서만 무려 62두를 포획하였다. 이 결과를 보면 영일만 근처에 수많은 밍크고래가 서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밍크고래의 크기는 6∼7m 정도가 가장 많았다. 세 척의 포경선은 이후에도 포항을 근거지로 계속 활동했으며, 1941년 182두, 1942년 240두, 1943년 183두, 1944년 168두의 밍크고래를 포획하였다. 포경기지에 고래처리장은 필수 시설이다. 1941년 7월 1일자로 조선어업보호취체규칙 제8조에 규정된 고래처리장 설치에 관한 허가를 받는데, 그 장소는 포항을 비롯해 속초, 장전, 덕원에 있으며 처리장 면적은 각 50평이었다.

광복 후에도 포항은 밍크고래의 근거지

조선수산개발주식회사는 일제강점기에 포항에 주재소를 두었고 여기에서 포경 업무를 담당하였다. 광복 이후에 이 회사는 귀속 사업체로 존속되었으며 포항 주재소는 출장소로 격상되었다. 밍크고래 포경업은 미군정청의 방침에 따라 두세 척의 어선을 인수받아 포항을 근거지로 계속되었다. 포항 출장소가 작성한 1946년 7월 1일부터 1947년 3월 18일까지 제11대경환(大慶丸)호가 동해안을 주어장으로 밍크고래를 포획, 판매한 실적을 보면 39두 포획에 34두를 영일어업조합에서 판매하였다. 이 자료를 볼 때 광복 후에도 포항은 밍크고래의 근거지였음을 알 수 있지만 6·25전쟁 후에 상황은 서서히 변한다.

1952년 말 부산수산대학 재학생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19척의 포경선 중에 포항에는 원문길 소유의 제3해산호(海産號), 나원신 소유의 제3호호(鯱號)가 있고, 구룡포에는 강두수 소유의 해승호(海勝號), 제9영어환(永漁丸)이 있다. 3년 후 1955년경 부산수산대학 재학생이 다시 조사한 자료에는 국내 19척의 포경선 중 포항에 안달문 소유의 해덕호(海德號), 구룡포에 강두수 소유의 해승호(海勝號), 제9영어호(永漁號), 주길호(住吉號)가 있다. 1959년 한국포경어업수산조합이 작성한 포경업자 현황에는 구룡포 강두수가 있으나 포항의 포경업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자료를 종합해보면 포항은 6·25전쟁 후에 포경업이 하향세를 보이다가 1950년대 말에 공식 자료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구룡포는 강두수 중심으로 포경업이 자리를 잡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수산개발주식회사 포경선의 총과 작살의 장전(裝塡) 장치도(조선수산개발주식회사 서류), 박구병의 ‘한국 포경사’ 313쪽.
조선수산개발주식회사 포경선의 총과 작살의 장전(裝塡) 장치도(조선수산개발주식회사 서류), 박구병의 ‘한국 포경사’ 313쪽.

울산 장생포에 밀리는 구룡포 포경업

1962년 한국포경어업수산조합이 작성한 조합원별 포경선 현황에는 강두수 소유의 제9영어호, 제13영어호가 있으며, 이 해에 제9영어호는 밍크고래 12두, 제13영어호는 14두를 포획한다. 일제강점기에 비해 포획 두수가 크게 줄어든 것이다. 8년 후 1970년 3월 12일 포경어업협동조합이 작성한 포경선 현황에는 총 22척 중 제9영어호와 제13영어호가 있지만 이후 공식 자료에는 보이지 않는다.

1970년의 이 현황은 포경 역사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69년 6월 건조된 동방수산 소유의 제1동방호, 제3동방호, 제5동방호가 새롭게 등장하는데 세 척 모두 철조선(鐵造船)에 81.9t, 450마력의 위용을 갖추고 있다. 그에 비해 1935년에 건조된 제9영어호와 1953년에 건조된 제13영어호는 목조선(木造船)에 17t 미만, 50마력 미만에 불과하다. 울산 장생포에는 큰 자본이 유입되면서 최신식의 대형 포경선이 투입된 반면, 구룡포는 노후화된 소형 포경선으로 지탱하면서 두 지역은 경쟁력에서 큰 차이가 난다. 이에 따라 구룡포의 포경선 선원들도 울산 장생포로 이동하게 되고, 구룡포는 포경기지의 명성을 차츰 잃게 된다.

제9영어호와 제13영어호가 공식 자료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구룡포 포경업의 명맥이 끊겼다고 단정할 수 없다. ‘구룡포수산업협동조합사’와 구룡포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1970년대에도 구룡포에서 포경은 계속 이루어졌고, 당시 구체적 상황에 대해서는 조사가 필요하다. 포항과 구룡포에서 고래 위판이 활발하였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포경선이 사라진 포항은 물론 구룡포도 고래 위판으로 한동안 각광을 받았고, 이곳에서 위판된 고래고기는 일본으로 수출되기도 했다. 포항과 구룡포의 고래 이야기는 아직도 많은 궁금증을 품은 채 계속 이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구룡포에 거주하고 있는 포경선 선원과 고래 전문 중매인의 육성을 통해 그 궁금증의 일부를 풀어보고자 한다.

글/김도형 THE OCEAN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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