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잡이⑤ -포항의 고래 서사
구룡포의 포경선 선원이었던 이영식, 김정환 씨와 고래 중매인이었던 최원복 씨의 이야기를 씨줄 날줄로 엮어보면 1950∼1960년대 구룡포 포경업의 윤곽이 눈에 들어온다. 그 역사를 좀 더 명료하게 보기 위해 또 한 사람을 만났다. 구룡포 포경선 선주인 강두수 씨의 아들 강신규 (75)씨다. 강신규 씨의 증언을 통해 구룡포 포경에 관한 의미 있는 내용을 접할 수 있었다.
첫째, 1919년생인 강두수 씨는 일제강점기 때 구룡포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던 수산회사에서 근무하다가 광복 후에 그 수산회사의 배를 넘겨받아 포경업을 시작했으며 포경선 3척과 꽁치잡이배 2척을 보유했다.
둘째, 1970년 3월 12일 포경어업협동조합이 작성한 포경선 현황에 강두수 씨 소유의 제9영어호(永漁號)와 제13영어호가 있지만 이후 자료에는 보이지 않는다. ‘한국포경사’에는 “1972년에는 제9영어호 및 제13영어호가 퇴출하였다”(435쪽)고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는 포경이 금지될 때까지 제9영어호와 제13영어호를 포함해 5척이 포경선이 고래를 찾아 계속 출항했다. 영어호 외에도 저인망선 등을 개조해 포경선으로 활용한 것이다.
셋째, 강두수 씨는 자신 소유의 해승호(海勝號)를 폐선할 1970년 무렵에 일본에서 철조선 도입을 검토했다. 크고 성능 좋은 철조선으로 먼 바다에 나가 더 많은 고래를 포획할 것인지, 아니면 기존의 목조선으로 연근해에서 밍크고래 포획에 집중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다가 후자 쪽을 선택했다.
넷째, 포경어업협동조합이 작성한 ‘포경선별·종류별 고래 포획 두수 추이’를 보면 제9영어호와 제13영어호는 밍크고래를 1963년 10두·12두, 1964년 11두·13두, 1965년 9두·11두를 각각 포획했다(위의 책 389쪽). 이 통계는 신뢰성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포경선이 이 정도의 고래를 포획했다는 것은 상식과 거리가 멀다. 포경선이 한 달 평균 한 마리 정도의 밍크고래를 포획해서는 포경선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강신규 씨도 당시 포경선이 출항하면 적어도 밍크고래 한 마리는 포획했다고 말했다.
‘한국포경사’에서 제시한 자료와 강신규 씨 증언 사이에 왜 이러한 괴리가 있는 것일까? ‘한국포경사’에서도 “어획고 통계는 그 정당성을 기하기 어려운 것이나 우리나라 포경업에서 고래 포획 통계도 예외는 아니다”(454쪽)라고 하며 이 문제를 짚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강두수씨일제강점기때 구룡포 포경업 시작
1972년 포경선 퇴출 기록있지만
포경 금지될 때까지 영어호 등 5척 계속 출항
1970년 무렵 철조선 도입 검토됐으나
목조선으로 연근해 밍크고래 집중 포획 선택
1947년 구룡포서 귀신고래 포획 사진으로 남아
한국 포경사에도 누락된 귀중한 자료
포항은 6·25 전쟁 후 하향 1950년대 말 자취 감춰
2005년 1천300만 년 전 돌고래 화석 국내 첫 발견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약 7천년 전 제작돼
밍크고래·귀신고래가 드나들던 영일만 포항
고래 서사 깊이 품어 관련 자료의 폭넓은 조사로
역사적 사실 복원과 미래지향적 계승 필요
포경업을 가장 장기간 경영하였고 1971년 5월부터 1975년 7월까지 포경어업협동조합 조합장을 역임한 백용주 씨의 말에 의하면 통계상의 포획고가 실제 포획고보다 훨씬 적었다. 그가 조합장으로 취임하여 고래 포획 통계를 조사해보았더니 그것이 ‘엄청나게’ 적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과소평가된 이유는 앞서 몇 가지가 거론되었지만 그 가장 큰 이유는 장생포에 양륙(揚陸)되어 그곳에서 판매된 것만 보고되었기 때문이라고 백씨는 말하였다. 포획된 고래는 장생포뿐만 아니라 구룡포, 죽변, 포항 등지에서도 양륙되어 판매되었고 부산에도 소량이 양륙되었다고 한다. <박구병, 위의 책, 454쪽>
고래 포획 통계는 이러한 정황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다섯째, 강신규 씨는 영일만에 밍크고래가 많았던 것은 크릴새우 덕분이라고 했다. 가을보리가 익어서 고개를 숙이는 5월, 대량의 크릴새우가 영일만으로 유입되었고, 먹이사슬에 따라 밍크고래도 따라왔다는 것이다. 이때 호미곶 인근의 대동배·흥환·발산 주민들은 많은 크릴새우를 어획해 상당한 소득을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영일만에 제철 공장이 건립되면서 해안에 각종 구조물이 구축되었고 이 때문에 크릴새우도 밍크고래도 영일만으로 들어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제철 공장이 들어서기 전에 영일만에 밍크고래가 많았다”고 한 김정환 씨의 증언과 맥을 같이한다.
1947년 구룡포 연근해에서 귀신고래 포획돼
강신규 씨는 한 장의 사진을 건넸다. 1947년 12월 24일 영어호가 39자(11.8m) 귀신고래를 포획한 기념사진이다. 당시에도 귀한 고래였는지 마을 주민 상당수가 고래 주변에 모여 있다. 한국계 귀신고래는 1965년 한반도 연안에서 5마리가 잡힌 뒤 자취를 감췄다. 2008년부터 국립수산과학원이 귀신고래 사진을 찍으면 500만 원, 혼획(混獲)되었거나 좌초한 개체를 신고하면 1천만 원을 포상금으로 주지만 수령자는 아무도 없다. <“귀신처럼 멕시코로 간 ‘한국계 귀신고래’”, ‘한겨레신문’2012. 4. 23. 참조>
울산 고래박물관에 게시된 ‘우리나라 귀신고래 발견·포획 수량’을 보면 1911년부터 1964년까지 총 1천338마리의 귀신고래가 발견·포획되었다. 특이한 것은 이 자료에 따르면 1933년에 한 마리가 발견·포획되고 15년 후인 1958년에 한 마리가 다시 발견·포획될 때까지 단 한 마리의 귀신고래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1947년 영어호가 포획한 귀신고래는 이 자료에도 누락되어 있는 것이다. 구룡포 연근해에서 귀신고래가 포획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이 사진은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포항의 포경업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포항시의원을 지낸 최일만(84) 전 죽도시장 상인연합회장을 만났다. 최일만 전 회장은 죽도시장의 형성·발전과 삶의 궤적을 함께해온 죽도시장의 산증인이다. 특히 한때 포항-시모노세키 간 수출선을 운영할 정도로 수산업을 꽤 크게 하였고, 이 분야에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갖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제강점기에 밍크고래의 근거지였던 포항은 6·25전쟁 후에 포경업이 하향세를 보이다가 1950년대 말에는 자료에서 자취를 감춘다. 최일만 전 회장은 실제로 1950년대에 포항에서는 포경업이 인기가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수요 부족을 꼽았다. 당시 포항에서 고래고기가 유통되기는 했지만 수요가 많지 않았고, 고래고기를 보관할 수 있는 냉동 시설이 부족해서 포경업은 별 매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구룡포는 포경업이 지속되고 있었고 장생포는 포경업이 계속 커지고 있었기에 포항에서 포경선을 계속 보유해야 할 이유가 사라진 것으로 볼 수 있다.
1,300만 년 전 고래 화석이 발견된 포항
포항은 고래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2005년에는 1,300만 년 전 돌고래 화석이 국내 최초로 포항에서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이 화석을 분석한 연구 결과는 ‘한국에서 발견된 최초의 돌고래 화석’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국제학술지 ‘커런트 사이언스(Current Science)’에 실렸다. 또한 전(前) 전남대학교 한국공룡연구센터 연구원 민재웅은 “우리나라에서 현재까지 고래 화석[수염고래(Mysticeti), 이빨고래(Odontoceti)]은 포항분지 연일층군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다”고 했다. <‘포항분지 두호층에서 발견된 이빨고래 화석 연구’, 전남대 석사학위 논문, 2013>
고래와 관련된 대부분의 논문이 장생포를 무대로 발표된 반면, 포항과 관련된 고래 논문은 화석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래 사냥 그림인 반구대 암각화는 약 7,000년 전 신석기시대에 제작되었다. 포항에서 발견된 고래 화석은 1,300만 년 전 신생대 시기로 추정된다. 이런 사실 앞에서 포항은 고래 서사를 어떻게 만들고 전개해야 할까? 흘러가버린 옛이야기로 치부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역사적 사실을 복원하고 미래지향적으로 계승할 것인가.
밍크고래의 평화로운 집단 서식지였고 귀신고래와 큰 고래들이 지나다녔던 영일만. 포항은 그러한 역사적·문화적·생태적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기 위해서라도 고래 서사를 깊이 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포항의 고래 관련 자료를 폭넓게 조사하고 관련 인물에 대한 구술 채록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일제강점기 때의 자료를 확보하려면 일본에 있는 자료를 찾아보는 노력도 필요할 것이다. 구술해줄 생존자는 이제 몇 명 남아 있지 않다. 시간이 많지 않다.
필자 : 김도형(THE OCEAN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