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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포에서 포경선 탈 때 한 해에 고래 50마리 잡아”

등록일 2021-07-26 20:05 게재일 2021-07-27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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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잡이② - 포경선 선원 이영식 인터뷰
포경선 선원 이영식 씨.

구룡포에서 포경선 선원 두 명을 만났다. 먼저 소개하는 이영식 씨는 1936년 구룡포 구평리에서 태어나 17세에 구룡포에서 포경선을 처음 탔다. 10년 동안 구룡포에서 고래잡이를 하다가 장생포로 건너가 선장까지 했고, 국제포경위원회(IWC)가 1986년부터 전면적으로 고래잡이를 금지하면서 포경선에서 내렸다.

 

1936년 구룡포 구평리서 태어난 이영식 씨, 17세에 배 올라 수십년 동안 고래잡이 일 해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가 고래잡이를 전면적으로 금지하면서 포경선에서 내려와

“포경선에서는 포수가 대장… 실질적인 책임은 모두 포수에게 있어 월급도 가장 많아

고래가 입 치밀때나 꼬리 끄덕 들 때 총 쏘는데 경험 많은 포수들은 헛방이라고는 없어

큰 고기 잡아 배에 만선기 달고 고동 울리면서 항구에 들어갈 때 기분이 제일 좋았지”

김도형(김) : 여러 종류의 어선이 있는데 포경선을 탄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영식(이) : 일반 어선을 타다가 포경선을 탄 사람도 있는데 나는 선원 생활을 포경선에서 시작했다. 무엇보다 포경선이 다른 어선보다 안전한 편이었다. 비가 내리거나 바람이 강하게 불면 바다에 나가지 않았고 야간작업도 거의 없었다. 작은 사고는 이따금 있어도 큰 사고는 드물었다.

김 : 처음 탄 포경선은 어떤 배였습니까?

이 : 구룡포 강두수 씨가 선주인 영어호(永漁號)와 해승호(海勝號)를 탔다.

김 : 구룡포에서 포경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혹시 알고 계신지요?

이 : 광복 전에 강두수 씨가 구룡포에서 일본인 선주 사무장을 하다가 광복되면서 포경업을 했다고 들었다. 목선(木船)에 망통(고래를 발견하기 위한 전망대)과 총을 달아 포경선으로 썼다.

김 : 포경선에는 몇 명이 탔습니까?

이 : 목선은 보통 일곱 명이고, 나중에 장생포에 들어온 철선(鐵船)은 여덟 명에서 열세 명 정도 된다. 목선에는 포수, 선장, 기관장, 갑판장, 1등 세라 두 명, 2등 세라 한 명이 탔다. 철선에는 3등 세라도 있고, 고래 해체를 전담하는 해부장도 있었다.

김 : 포경선은 포수 역할이 중요하겠지요?

이 : 포수가 대장이다. 선장보다 포수가 높다. 선장은 배를 좀 탄 사람 중에 시력이 좋은 사람이 맡았고 실제로 포수가 다했다. 월급도 포수가 가장 많이 받았다. 그런데 포수는 면허가 없다. 선장과 기관장은 면허가 있어야 했다. 선박 검사를 받을 때는 선장, 기관장 면허가 필요했다. 혹시 문제가 생기면 법적인 책임은 선장이 지고, 실질적인 책임은 포수에게 있었다.

김 : 포경선의 특징을 얘기해주신다면.

이 : 세계 포경의 선구자는 노르웨이다. 일본이 그걸 배웠고 우리가 그걸 또 배웠다. 그래서 포경선에서는 일본어를 많이 쓰고 영어도 좀 섞어 쓴다. 배 방향을 오른쪽으로 바꿀 때는 ‘시나볼’, 왼쪽은 ‘보루’라 했고, 총을 오른쪽으로 향할 때는 ‘미기’, 왼쪽은 ‘히라이’라 했다. 포경선은 무리 지어 다니지 않고 각자 알아서 움직인다. 새벽 4시 반쯤 나가서 해가 지기 전까지 고래를 찾아다녔다. 망통에 두세 사람이 올라가서 고래를 찾았다. 쌍안경으로는 고래를 볼 수 없다. 불과 1, 2초 사이에 고래가 나타났다 사라지는데 쌍안경으로 보이겠나. 정신 바짝 차리고 바다를 살펴야 했다. 고래가 입을 치밀 때나 꼬리를 끄덕 들 때 총을 쏜다. 경험 많은 포수들은 헛방이 거의 없었다. 소나(SONAR, 음파탐지기)가 들어오면서 사람이 망통에 올라가는 일이 없어졌다. 조업을 나가면 가까운 항구에 정박하고, 밤에는 고래를 잡을 수 없으니까 야간작업은 거의 없었다. 해 질 녘에 고래를 딱 한 번 잡아봤다. 장생포에서 선장 할 때였는데, 고래가 배에 딱 붙어 왔다. 운이 좋은 날이었다.

김 : 포경선에 달려 있는 총은 어떤 종류인가요?

이 : 50밀리(㎜)에서 90밀리까지 있다. 구룡포 목선은 50밀리였다. 60밀리도 있긴 했는데 70밀리가 가장 많았다. 70밀리는 일제 때 쓰던 걸 부산에 가서 수리해 썼다. 80밀리는 울산에 있는 공업사에서 만들었고. 90밀리는 이승만 대통령 때 우리 해역을 넘어온 일본 포경선에서 압수한 것이었다.

김 : 고래는 언제 잘 잡혔는지요?

이 : 밍크고래는 5월에 가장 많이 잡혔다. 6, 7월에는 나가수(참고래)도 꽤 잡혔다.

김 : 고래 해체는 어떻게 했는지요?

이 : 목선은 고래를 끌고 와서 항구에서 해체하고, 철선은 배 위에서 바로 해체했다. 목선도 15자(4.5m) 정도의 작은 밍크고래는 배 위에서 해체하기도 했다. 장생포에는 정식 해체장이 있었고, 구룡포에는 해체장이 없어서 위판장에서 해체했다.

김 : 당시 잡았던 고래는 어떤 게 있습니까?

이 : 밍크고래가 가장 많았고, 나가수, 돌고래도 있었다. 놀이공원에서 보는 돌고래는 진짜 돌고래가 아니라 일본 말로 ‘고시’라고 하는데 뱃사람들은 별로 안 쳐주었다. 진짜 돌고래는 ‘고꾸’라고 불렀다. 길이가 50자(15m)나 됐고 나가구 가격의 두 배에 거래될 정도로 비쌌다.

김 : 돌고래 얘기를 좀 더 해주시지요.

이 : 돌고래는 음력 10월 말 시베리아 쪽에서 한반도 동해안으로 오는데, 연안에 딱 붙어서 이동했다. 이듬해 봄 남쪽으로 돌아서 다시 북쪽으로 갔다. 고래 중 가장 맛있고 껍질이 두껍고 기름도 많이 나왔다.

김 : 밍크고래는 크기가 어느 정도였는지요?

이 : 새끼는 10자(3m)보다 조금 더 크고, 대개 14자(4.2m)에서 20자(6m) 정도 됐다. 혜성호를 탈 때 포항 용덕리 앞바다에서 29자(8.7m)를 잡았는데 그게 가장 컸다.

김 : 나가수는 어땠나요?

이 : 나가수는 태평양에서 자라다가 성장하면 우리 연안에 나타났다. 아무리 적어도 40자(12m)는 되었다. 포수들은 밍크고래보다 참고래 잡기가 힘들다고 했다. 힘이 좋고 빨리 움직이기 때문에 조준하기가 힘들 수밖에 없다. 통상 한두 마리가 다니는데 드물게 20~30마리가 몰려다닐 때도 있었다.

김 : 구룡포 시절 고래를 얼마나 잡았는지요?

이 : 1960년대 초 영어호 탈 때는 영일만은 물론 강원도 주문진, 경북 죽변, 경남 욕지도를 두루 다니면서 한 해에 밍크고래 50마리 가까이 잡았다.

김 : 고래 가격은 어느 정도였나요?

이 : 좀 큰 밍크고래는 1천만 원 정도 했다. 가장 맛있는 부위는 일본 말로 ‘오노미’라 하는 꼬리살이다. 일본 사람들이 그걸 좋아했는데 양이 얼마 안 나왔다. 처음에는 국내에서 소비되다가 일본에 수출했다. 수출하는 고래고기는 아무래도 좀 비쌌다. 울산 사람들이 구룡포 고래고기를 사들여서 일본에 수출하기도 했다. 구룡포 어판장에서 솥 걸어놓고 삶아서 팔기도 하고, 고래고기집도 몇 군데 있었다.

김 : 구룡포 포경선 선원은 어느 지역 사람이었나요?

이 : 구룡포와 흥환, 대보, 삼정 사람들이 많았고, 용덕, 칠포 사람도 있었다.

김 : 포경선을 타면 수입은 어느 정도 되었는지요?

이 : 구룡포에서는 만 원 수입이 생기면 선원은 2천200원을 받았다. 장생포에서는 기본급에 수당이 따로 붙었다.

김 : 장생포 쪽이 후했나 봅니다.

이 : 그랬다. 내가 장생포로 옮긴 것도 그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장생포 포경선이 목선에서 철선으로 바뀌고 일본에서 소나가 들어오면서 고래 잡는 숫자가 구룡포와 차이가 많이 났다. 그러니 선원들에게 돌아가는 몫도 구룡포보다 장생포가 많았던 것이다.

김 : 포항 쪽 포경선 얘기는 기억나는 게 없는지요?

이 : 구룡포보다 포항에 포경선이 먼저 있었다. 장생포가 포경기지로 크고 포항은 사업이 잘 안 되니까 구룡포보다 먼저 포경업을 접은 게 아닌가 싶다. 선배들한테 들은 얘기인데, 포항 출신 김성룡 공군 참모총장이 한때 포항에서 포경 회사 사무장을 했다. 광복 전에 일본에 있다가 광복이 되고 포항에 왔는데, 그때 잠시 그 일을 했다는 얘기다.

김 : 구룡포에 포경선은 언제까지 있었는지요?

이 : 영어호가 포경 금지될 때까지 남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김 : 구룡포에서 포경선 탔던 분들 근황은 어떻습니까?

이 : 살아 있는 사람이 다섯 명 정도 될까 싶다. 나이가 있으니까 아프기도 하고 자주 보지는 못한다. 나머지는 다 고인이 되었을 거다.

1974년 장생포항에 들어온 대왕고래. 길이 23m, 무게 59t.  /사진=서진길 사진작가
1974년 장생포항에 들어온 대왕고래. 길이 23m, 무게 59t. /사진=서진길 사진작가

김 : 포경선 타고 어디까지 가봤는지요?

이 : 구룡포 목선은 강원도 주문진에서 통영 욕지도까지 갔다. 장생포에서 철선 탈 때는 흑산도, 어청도까지 갔다. 어청도에는 해체된 고래를 운반하러 가기도 했다. 그걸 부산 가서 팔았다. 선배들 얘기가 산둥(山東)반도 쪽에는 물 반 고래 반이라 했다. 소나가 들어오면서 서해 고래를 엄청 잡았다. 그때 중국에는 포경선이 없었으니 오죽했겠나.

김 : 포경선 탈 때 언제 가장 기분이 좋았는지요?

이 : 포경선 탄 사람은 다 그랬겠지만 나 역시도 큰 고래 잡아서 만선기 달고 고동 울리면서 항구에 들어갈 때가 최고였다.

김 : 고래 잡으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이 : 1985년 일본 근해에서 밍크고래 여덟 마리를 봤다. 암놈이 젖 떨어지고 새끼 가질 때 되면 수놈이 그걸 알고 몰려든다. 암놈 한 마리에 새끼 한 마리, 그리고 수놈 여섯 마리 도합 여덟 마리를 한꺼번에 다 잡았다.

김 : 구룡포읍 행정복지센터 앞마당에 있는 포경선은 어떤 배입니까?

이 : 10t쯤 된다. 원래 포경선은 아니고 일반 어선에다 망통 올리고 70밀리 포를 달았다.

김 : 혹시 사고 경험은 있는지요?

이 : 장생포 시절에 명신호 선장을 했는데, 부산 앞바다에서 충돌 사고가 나서 두 사람이 죽었다. 큰 사고였다. 내가 탄 배는 아닌데, 창원호라고 장생포 배가 양포 앞바다에서 사고 난 적도 있다. 고래가 보여서 총을 쐈는데 헛방이 되었고 롤러로 감다가 제대로 안 감겼다. 그 바람에 창살이 튀어서 선원이 즉사하고 말았다.

김 : 포경이 금지된 후에 보상은 얼마나 받았습니까?

이 : 장생포에서 포경선 선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보상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단체행동을 해야 했고 돈도 모았다. 예산은 법이 있어야 만들 수 있는데 포경선 보상을 해줄 수 있는 법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보상금이 나왔는데 기본 100만 원에 경력 30만 원을 더해 130만 원을 받았다. 그런데 소문은 5천만 원 받았다고 났다. 포경 금지 후에 일본이 고래를 잡으니 우리도 잡자는 얘기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대담·정리 : 김도형(THE OCEAN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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